미르다드의 書
미르다드의 서(書)
미하일 나이미
하나의 단어는 하나의 사물을 뜻하고,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세상을 의미하며,
그 하나의 세상은 하나의 우주를 상징하노라.
그 우주는 우주의 창조자이자 창조물인 그대의 '나'가 형상화된 바로 그것이다.
그 누가 자신보다 나은 것을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창조자는 자기 자신 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창조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모든 것이 흘러나오고 모든 것이 되돌아가는 수원지(水源地)와도 같다.
수원지의 물과 흐르는 물은 같은 것이다.
존재의 삼위일체, 즉 '최초의 의식', '말씀', '이해의 성령'을 보라. 이것은 하나이자 셋이며, 셋이자 하나로, 서로가 대등하고 균등하며 영원하다.
이 삼위일체는 자기균형, 자기인식, 자기실현의 존재이다.
새로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언제나 평화롭고 동일하다.
너무나 경이로운 나머지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만, 인간은 그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 이름도 신성하지만, 그것을 신성하게 부르는 인간 또한 신성하다.
인간이 신의 후손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겠는가?
인간이 신과 다를 수 있는 존재인가?
상수리나무는 상수리 열매 안에 감싸져 있는 것이 아니던가?
신은 인간 안에 싸여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인간 역시 '의식, 언어, 이해'의 신성한 삼위일체이다.
인간 역시 자신을 창조한 신처럼 창조자이다.
인간의 '나'는 인간이 창조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신처럼 균형을 갖지 못하는가?
포대기에 쌓인 신神
인간은 포대기에 쌓인 '신'이다.
시간과 공간, 육체와 모든 감각, 그것들에 인지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바로 그 포대기이다.
어머니는 아기가 포대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기는 그것을 모른다.
조심하라.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거라.
그대가 쓰는 '나'는 인간이라는 미숙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싸고 있는 포대기를 의미하고, 그대가 거대한 용광로가 아니라 작은 채에 불과할 뿐이고, 그대가 거르는 것이라고는 보잘것없는 티끌들을 모아 놓은 근심과 고통만이 있는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신의 말씀, 인간의 언어
인간은 신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을 동료 인간들과 분리할 수 없으며, 모든 창조물을 신의 '말씀'으로 부터 분리할 수 없다.
신의 '말씀'은 대양이며, 그대들은 하늘 위의 구름이다.
구름이 대양을 품고 있지 않다면 과연 그것이 구름인가?
구름이 자신의 모양과 정체성을 영원히 고수하기 위해서 한 공간에 계속 머무르려고 애쓰며 삶을 허비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결국 구름은 어리석은 노력으로 인해서 좌절과 허망함 말고 그 어떤 것을 얻게 될 것인가?
구름은 자신을 잃지 않으면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신을 품은 구름이다.
자신을 비우지 못하면 인간은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이 얼마나 큰 비움의 환희인가?
신의 '말씀' 안에서 영원히 길을 잃지 않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나, 즉 그대 자신인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얼마나 위대한 소멸의 기쁨인가?
그대들이 기도할 때에는 '이해'를 위해서 기도하라.
'신성한 이해'가 그대의 마음을 찾게 되면, 그대가 '나'를 말할 때마다 신의 위대한 응답을 기꺼이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죽음'은 그대의 손에 놓인 무기가 되어 그 '죽음'이라는 무기로 '죽음'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생명'은 그대의 심장에 열쇠를 부여해서 영원히 뛰는 심장을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황금의 열쇠이니라.
주인과 하인
세상 만물은 자기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대의 일도 하는 것이다.
그대는 자기일을 하는 와중에 세상 만물의 일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의 주인이다.
주인은 하인의 하인이다.
하인이 고개를 숙이게 하지 말라.
주인이 고개를 쳐들게 하지 말라.
주인의 지독한 자존심을 깨부숴라.
하인의 부끄러움을 뽑아버려라.
온갖 속임수와 비난을 내뱉는 혀를 갖고 사는 것보다 혀 없이 사는 편이 훨씬 낫다. 그리고 '신성한 이해'에 의해서 혀가 정화되기 전까지 모든 언어는 언제나 상처와 속임수를 남길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자신의 가슴을 탐구할 것을 명하노라.
그 안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없애버려라.
그대들의 포대기를 벗어 던지면, 그로부터 그대의 '나'는, 영원한 평화를 누리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나오는 신의 '말씀'과 하나가 될 것이다.
신은 여럿이 아니다.
신은 오직 하나이다.
그러나 인간의 그림자는 수없이 많다.
수많은 인간이 땅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한, 인간의 신은 자신의 그림자 보다 낳을 것이 없다.
빛 속에 있는 자만이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하나의 신을 아는 자만이 그림자가 없다.
신은 빛이며, 오직 빛만이 빛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준비하라.
그대의 눈과 귀와 혀를 온전히 유지하면,
신성한 열망이 한번 채워지기만 한다면 영원히 가득차게 된다는 것을 그대의 가슴이 알게 될 것이다.
그대들이 금은보화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그것들로 인해서 바닥으로 끌어내려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에 묶이기 때문이다. 사물에 휘어 잡히기 싫다면 그것들을 놓아버려라.
바다가 인간보다 더 무한한가?
순진하게도 인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고서 그 크기를 알아냈다고 생각하지 말지어다.
나무는 자신의 뿌리 길이보다 더 멀리 가지를 뻗어 나갈 수 없다. 영원함에 뿌리를 둔다면 인간은 무한한 곳까지 뻗어나갈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한계를 드리우지 말라. 그대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곳에서 신을 만날 때까지 멀리 가라.
뻗어 가거라.
멀리 가거라!
모든 욕망과 두려움, 미소와 눈물을 두 눈에 모두 담지 않으려거든 어떤 시선도 던지지 말라. 어떤 문을 두드린 꿈은 이미 다른 모든 문을 두드렸다.
그러니 그대가 무엇을 바라보는지에 주의하라.
그대가 어떤 꿈을 문 안으로 받아들이는지, 어떤 꿈을 지나가게 내버려 두는지 깊이 살펴라.
삶을 살아갈 때에는
신이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그대를 필요로 한다고 여기고 살라.
신은 진실로 그러하다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나니, '신'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신인神人, God-Man 이나 인신人神, Man-God가 있을 뿐이다.
오직 하나의 유일한 존재가 있을 뿐이다.
아무리 많고 분리되어 있다 하더라도유일한 존재는 영원하다.
신의 유일성이 신의 영원한 법칙이다.
아무리 드넓고 깊은 대양이라도 한 방울의 물이 아니던가?
지금까지도 광대한 우주를 돌고 있는 지구도 하나의 행성이 아니던가?
이 우주에는 수많은 행성이 존재하지만 하나의 우주가 아니던가?
신의 유일성이 유일한 존재의 법칙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사랑'이다.
그것을 알고 지키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외의 다른 법칙을 따르는 것은 비존재, 즉 '죽음'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경멸에 빠진 그대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자기경멸에 빠진 인간을 상대로 재판을 내리려 한다.
그 재판관들과 재판의 내용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두 명의 사형수가 상대방 사형수에게 교수형을 선고하는 것이 이보다는 덜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장님 둘이서 서로의 눈을 뽑아버리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덜 처량해 보일 것이다.
바람이 하늘아래 모든 일을 방조하고 선동한다고 해서 바람을 증인으로 법정에 소환할 것인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여한다고 해서 별들의 말을 증언대에 세울 것인가?
모든 죽은 자들이 산 자들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유로 아담 이후의 모든 죽은 이들에게 소환장을 보낼 것인가?
'사랑'이 '신의 법칙'이다
사랑의 대상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그것은 '생명의 나무'에서 자라난 잎사귀를 선택하여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주는 그것인가?
나무 위의 작은 잎사귀 하나가 그대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면, 그 나무 전체는 얼마나 더 큰 사랑의 가치가 있겠는가?
전체 중에서 일부분에 대해서만 주는 사랑은 결국 비탄에 빠질 운명이다.
그대들은 '생명의 나무'이니라.
자신을 단편적으로 세분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열매로 열매를 대항하지 말며, 잎사귀로 잎사귀를 적대하지 말고, 나뭇가지로 나뭇가지를 거부하지 말라. 나무줄기로 뿌리를 부정하지 말며, 나무를 땅으로부터 분리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전체에 대해 한 부분만 사랑하거나 그 나머지를 완전히 배제하며 사랑할 때의 행동이다.
'사랑'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수액이다.
'증오'는 '죽음'으로 이끄는 고름이다. 그러나 피와 마찬가지로 '사랑'도 혈관을 타고 거침없이 순환되어야 한다. 피의 흐름을 억누르면 위험하고 지독한 재앙을 낳을 것이다.
자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사랑도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자아'가 아니라면 그 어떤 자아도 진실하지 못하다.
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은 자체가 '사랑'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것과 그대를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기 전에 그대가 증오하는 것과 그대를 증오하는 것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미덕이 아니다.
사랑은 반듯이 필요한 것이다.
빵과 물보다, 빛과 공기보다 더 중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랑하지 말지어다.
다만 그대가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사랑'을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고 내
쉬어라.
도도하게 흐르던 강물이 바다에 다다르면 바다로 자신을 채우듯이 그대는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비우고, 그래야 그대가 '사랑'으로 채워지는 법이다.
바다로부터 받은 '물'이라는 선물을 부여잡고 있는 연못은 결국 그 물이 고여서 썩고 만다.
그대가 진정으로 보고자 하면, 그대의 눈동자에 사랑이 긷들게 하라.
그대가 진정으로 듣고자 한다면, 그대의 고막에 사랑이 감돌게 하면 되느니라.
사랑은 능동적인 힘이다.
사랑이 그대의 모든 행동과 발걸음을 이끌지 않으면, 그대는 길을 찾을 수 없다.
사랑이 그대의 모든 염원과 생각을 채우지 않는다면, 그대의 염원은 꿈속에 가시풀이 되고, 생각은 매일의 장송곡이 될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침묵'을 거닐며, 자신의 낡고 꽉 끼는 껍질을 벗고 어떤 구속이나 제약이 없이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그대들이 자신의 근심과 두려움, 열정과 염원, 질투와 욕망을 하나씩 몰아내어서 그칠 줄 모르는 절규와 비명을 더는 듣지 않고, 좌우로 찔러대는 고통을 더는 받지 않도록 하고 싶다.
나는 그 침묵을 통해서 그대들이 어둠과 숨 막히는 껍질을 벗고 빛으로 걸어 나와 '자아'라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기를 바란다.
조급하게 알을 낳으며 울어대는 암탉의 수다스러움이 아니라 진득하게 앉아서 알을 기다리는 암탉의 침묵이니라.
하나의 알을 품기 시작하여 고요한 확신 속에서 21일을 기다리고, 마침내 '신비의 손'이 포근한 암닭의 가슴과 날개 아래에서 생명의 기적을 낳게 할 것이다.
다른 시끄러운 암닭은 알을 낳자마자 다른 닭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야단을 떤다.
그 암탉처럼 미덕을 요란스럽게 떠벌리지 않도록 유념하라. 수치심에 재갈을 물리듯이 명에에 대해서도 재갈을 물리도록 하라.
침묵의 불명예보다 요란스러운 명예가 더 나쁘고, 명예를 떠 벌리는 것은 죄악에 침묵하는 것보다 더 고약하다.
말을 많이 하지 않도록 하라. 천 마디 말 가운데 하나의 말, 진실로 오직 하나의 말만이 내뱉어야 할 가치를 가진다.
기도
그대들은 바로 그대 자신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기도하기 때문에 그 기도가 헛될 수밖에 없다.
그대들 안에는 무언가를 쫒아내는 힘이 존재하듯이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힘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대들 안에는 쫒아내고 싶은 것들이 존재하듯이 끌어당기고 싶은 것들도 존재한다.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여러 조각으로 분열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일부분을 그대에게 심어준 것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분리되지 않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 자신의 '신성' 전부를 그대에게 준 것이다.
그 보다 더 위대한 유산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기도하는 데 있어서 그대들은 입술도 필요 없고 혀도 필요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고요하게 깨어있는 마음, 최고의 열망, 최고의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않는 '최고의 의지'가 필요하다.
기도하기 위해서 사원에 갈 필요도 없다.
마음 안에서 사원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사원에 들어가서도 자신의 마음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 창조, 사랑, 이해
모욕하고 모욕을 당하는 것, 모욕으로 모욕한 자에게 복수하는 것, 추악함으로 추악함을 씻으려는 것은 눈멀고 탐욕스러운 무지가 낳은 비겁하고 옹졸한 자존심일 뿐이다.
자만심에 지배되고 자아도취 된 세상은 그대의 머리 위로 수많은 모욕을 쌓아 올릴 것이다. 세상은 누더기가 된 법률, 부패한 강령, 케케묵은 명예로 얼룩진 피에 굶주린 사냥개들을 그대에게 풀어놓을 것이다. 세상은 그대를 질서의 파괴자이자 혼란과 파국의 장본인으로 선언할 것이다. 세상은 그대의 앞길에 온갖 덫을 놓고 그대의 침실을 쐐기풀로 장식할 것이다. 세상은 그대의 귀에 저주를 심고 그대의 얼굴에 경멸을 내뱉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겁을 먹지 않도록 하라. 대양처럼 넓고 깊게 마음을 먹고, 그대에게 저주를 줄 뿐인 그에게 은총을 내려라.
그리고 이 땅처럼 인자하고 고요하게 유지하며, 인간들 마음속의 오물을 순수한 건강과 아름다움으로 바꾸어라.
그리고 하늘의 공기처럼 자유롭고 유연해져라. 그대에게 상처를 내려던 무기는 결국 녹슬고 무뎌질 것이다. 그대를 해치려던 팔뚝은 녹초가 되어 멈추게 될 것이다.
종달새가 그대에게 노래를 빌려주고, 봄이 샘솟는 물을 빌려주는가?
양이 자신의 털을 그대에게 빌려주고, 소가 우유를 줄 때 이자를 붙이던가?
구름이 그대에게 비를 판매하고, 태양이 온기와 빛을 판매하는가?
이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생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나무토막 하나는 오늘은 나무 위에서 초록색 가지이고 내일은 벽 위에 나무못이 될 수 있어도 불에 타서 완전히 소멸하기 전까지 여전히 나무이고 계속해서 그 형체와 그림자를 바꾼다.
인간도 죽어서 내면에 있는 신이 완전히 그를 소모하기 전까지, 즉 인간이 유일자인 신과 하나임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까지 여전히 인간으로 살아간다.
원 안에서의 움직임은 끝이 서로 닿지 않으며, 끝까지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시간의 악순환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키지 않을 것인가?
인간은 신의 신성한 자유를 물려받은 자이므로 그렇게 할 것이다.
시간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지만, 그 축은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신은 인간이라는 수레바퀴의 축이다.
모든 만물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신의 주변을 회전하지만, 신은 항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정지해 있다.
시간의 축 안에서 만물은 평화롭다.
그 가장자리에는 만물이 요동친다.
과연 그대는 어느 곳에 처하겠는가?
그대들에게 이르나니,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벗어나 시간의 축 안으로 들어감 으로써 요동치는 멀미로부터 자신을 벗어나도록 하라.
그대가 시간과 함께 회전하지 말고, 시간이 그대 주변을 회전하도록 하라.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다. 어떤 이가 죽어서 변형이 이루어지면, 그는 다시 태어나 더는 변화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기 위해서 살아간다.
살기 위해서 죽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시냇물이 바다에서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바다라고 깨우치는 것이 시냇물에게 손해가 되겠는가?
인간이 신 안에서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버리고 이제는 그림자가 없는 존재의 정수를 찾는 일이다.
기쁨으로 너무 들뜨지 말고, 슬픔으로 너무 위축되지 말라. 오직 두가지 모두에 대해 고요함을 유지하라.
이 땅과 그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라.
이 땅과의 계산에서 유일하게 남는 것은 ‘사랑’이며, 이 땅이 사랑으로 그대의 빚을 탕감해 줄 것이다.
사랑은 집착으로부터 유일한 해방이다. 그대가 모든 것을 사랑하면, 그대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리라.
욕망으로 가득 찬 마주침은 다시 돌아왔을 때 원래의 눈빛이 사랑의 마주침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또 다른 욕망의 눈을 찾아 떠날 것이다.
남자와 여자
시간에서의 하나의 단계는 이원성이다. 그것이 통합에서 나온 것이듯 다시 통합으로 들어간다. 그대가 이 단계를 신속히 지나갈수록 그대는 더 빨리 자유를 껴안을 수 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자신이 원래 하나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둘로 쪼개져서 이원성의 쓴맛을 맛보아야 하고 통합의 단맛을 갈망하게 되어 있지만, 자신의 의지로 일원성을 갈망하고 추구하며 그것을 찾고 소유하여 그 놀라운 자유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비록 육체 안에 있을 때에도 남자와 여자는 육체의 교류가 아니라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지, 완전한 통합과 신성한 이해에 다다르는 그들의 여정에 방해되는 모든 장애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통합을 이룩해야 한다.
남자는 여자 안에서 일원성을 발견하고, 여자는 남자 안에서 이원성으로부터의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은 하나로 결합하여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극복한 자, 즉 완벽한 인간이 될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극복한 자는 통합된 인간이며 그 자신의 주인이다.
자신의 눈으로 들판의 초록을 들이마시고, 자신의 생각으로 모든 풀잎과 입맞춤하며, 자신의 영혼으로 모든 뿌리와 조약돌, 땅의 흙과 친교를 나눈다.
집 안에 앉아있는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집의 주인이며, 다른 한명은 손님이다. 그 주인은 건물가격과 유지비용, 온갖 천과 직물과 장식과 가구의 가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그에 반해 손님은 그 돌을 찾아내어 다듬어서 집을 지은 사람의 손과, 나무를 베어 창문과 문, 의자와 식탁을 만든 사람의 손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만든 ‘창조의 손’을 찬양함으로써 자신의 영혼도 고양된다.
그 손님은 그 집의 영원한 거주자인 반면, 그 이름뿐인 주인은 그 집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집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가축에 불과하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과연 눈은 볼 수 있는가?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귀는 과연 들을 수 있는가?
손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은 과연 느낄 수 있는가?
코로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를 과연 코는 맡을 수 있는가?
혀로 맛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과연 혀로 맛볼 수 있는가?
신성한 상상으로 태어난 믿음이 그들의 안내자가 될 때만 그러한 감각들을 느낄 수 있고, 정상으로 가는 사다리가 될 수 있다.
신의 형상이자 닮은 꼴인 인간이 죄인이라면,
신 자신이 분명 죄악의 원천일 것이라고 그대들은 의심없이 선언한다.
태양이 그 빛을 초에게 주는 것이 죄악이 아니라면,
신에게는 그 어떤 죄악도 없다.
초가 태양 빛에서 자신을 불사르고 태양과 하나가 되는 것이 죄악이 아니라면,
인간에게도 죄악은 없다.
그러나 빛을 발하지 않는 초에게는 죄악이 있다.
그럴때 성냥을 심지에 대더라도,
그 성냥과 불을 붙이려는 손을 저주한다.
태양 빛에서 불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초에게는 죄악이 있다.
그러므로 그 초는 태양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멀리한다.
인간은 우주의 법에 불복함으로써 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법에 무지한 자신을 감추려는 죄를 저지른다.
씨앗이 본래의 본성에 적합한 흙에 숨어 있다가 그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는 한, 유리병 속의 씨앗은 씨앗으로 남을 것이며, 그 껍질 속에 감춰진 경이로움은 생명과 빛으로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나됨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원성을 낳듯이, 이원성의 마찰과 대립을 통해서 그 하나됨을 이해하게 된다. 그 안에서는 신의 형상과 닮은 꼴인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고의 의식인 신은 자신을 말씀으로 표현하고, 그 말씀과 의식은 신성한 이해 안에서 통합된다.
이브를 속여 선악과를 맛보게 한 뱀은 심오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목소리로 자신이 나서서 경험하게 만든 이원성이 아니던가?
신은 이브의 행위를 막지 않았고, 아담도 공범이 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신은 자신과 인간이 다르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펼치고 이해에 의해 자신을 통합하기 위해서 이원성의 기나긴 길을 스스로 걸어가도록 한 것은 바로 신의 의지이자 계획이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신이 성내고 격노했는가? 신은 용서했다.
신은 인간이 그 열매를 먹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것을 먹기를 바랐다.
신의 의지에 따라 적극적으로 둘로 나뉜 인간은 죽음으로서 수동적인 하나됨으로 통합에 이른다. 따라서 죽음은 처벌이 아니라 이원성의 본성에서 볼 때 삶의 한 단계일 뿐이다.
이원성의 본성은 만물을 둘로 나누고 모든 것에 그림자를 낳는 일이다. 이원성은 끊임없는 마찰이며, 그 마찰은 서로 반대되는 양쪽이 자기파멸에 열중하도록 환상을 심어준다.
나는 하나의 환상이다. 신으로부터 분리된 이 인격체는 새롭게 뜬 눈의 환상이다. 그것은 실체나 현실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담이 죽음을 통해서 신의 자아인 자신의 실제 자아를 알게 되면서 그 환상이 태어난 것이다.
밖을 바라보는 눈이 어두워지고 내부를 바라보는 눈이 밝아질 때 그 환상은 사라질 것이다.
선과 악의 쌍둥이 문을 통해서 에덴을 뛰쳐나왔던 인간은 이해의 단일한 문을 통해서 에덴으로 들어갈 것이다. 생명의 나무에 등을 지고 나왔던 인간은 그 나무를 바라보며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인간이 자신과 신 사이, 즉 자신의 일시적인 자아와 자신의 영원한 자아 사이에 쳐놓은 장벽 이외에 또 다른 죄악은 없다.
고통으로 넘쳐나는 쾌락을 향한 인간의 탐욕, 빈곤을 부르는 부에 대한 욕심, 복종을 부르는 지배욕, 품위를 떨어뜨리는 명예욕은 무화과 잎으로 만든 그 수많은 가리개가 아니고 무엇인가?
신이시여, 저희를 보소서.
저희의 영혼과 존재와 유일한 자아를 보아주소서.
저희는 당신께서 시간의 새벽에 저희에게 내려준 멀고 거칠며 고통스러운 선과 악의 길을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걸어왔습니다.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이 없고 이원성의 모든 환상이 없고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당신의 존재 이외에 모든 각자의 자아가 없는 당신의 신성한 현존에게로 저희를 인도하였습니다.
저희는 통합되었습니다.
신이시여, 보소서.
저희는 극복하였나이다.
그러면 신이 그대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포옹하고, 그대들을 곧바로 자신의 생명의 나무로 이끌 것이다.
밤에 홀로 있으며 밤처럼 너무나 안정되고
고요하고 무한한 상태인 자들은 그 기쁨이 배가 된다.
밤은 오직 그들에게만 극복한 자의 노래를 불러준다.
밤과 친구가 되어라.
그대 자신의 생명의 피로 심장을 완전히 씻어 내고 밤의 심장에 바쳐라.
그대의 꾸밈없는 갈망을 밤의 가슴속에 맡기고
‘신성한 이해’를 통해 자유로워지는 자신의 야망을 제외한
모든 야망을 밤의 발끝에 제물로 바쳐라.
밤의 신뢰를 얻은 자는
다가올 낮을 쉽게 호령할 수 있나니.
나에게 눈물이 있다면,
반짝이는 모든 별과 먼지들에게,
소용돌이치는 모든 개울과 노래하는 벌레에게,
향기로운 영혼을 공기 중에 퍼뜨리는 모든 제비꽃에게,
세차게 불어대는 모든 바람에게,
모든 산과 계곡에게,
모든 나무와 풀잎들에게
나는 오늘 밤 눈물을 바칠 것이다.
모든 인간 앞에 풍요롭고 아낌없이 펼쳐진 같은 식탁에서 어떤 이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황금을 마음껏 즐기고, 어떤 이는 황금 자체를 탐내서 언제나 굶주린다.
사슴을 발견한 사냥꾼은 그것을 죽여서 잡아먹으려고 애를 쓴다. 똑같은 사슴을 본 시인은 날개를 단 듯 사냥꾼이 꿈도 꿔보지 못한 시간과 공간으로 옮겨간다.
낮은 차원의 사람들은 지성을 본능이라고 부른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성이라고 부른다. 높은 차원의 사람들은 그것을 '예언자적 감각'이라고 명명한다. 지성은 그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의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이름 없는 힘을 '성령'이라고 부르고, 미르다드는 그것을 '신성한 이해의 정신'이라고 부른다.
모든 생명체를 경배하는 자세로 대하라.
아무리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그 안에는 가장 위대한 것을 여는 열쇠가 숨어있다.
모든 생명체는 소중하고 위대하다. 너무나 신비롭고 탁월하고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인 모든 생명은 아무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소유하는 것과 소유 당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대는 오직 그대가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
그대가 증오하는 것이 그대를 소유하게 된다.
그러니 소유 당하는 일을 경계하라.
고요해지면 그대들은 명료해질 것이요.
명료해지면 그대들은 세상을 훤히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인간은 신에게로 향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대가로 신 외의 목적지는 가치가 없다.
가는 길이 멀고 질풍과 폭풍이 몰아친들 어찌하겠는가?
순수한 마음과 예리한 눈을 가진 믿음으로 질풍의 허를 찌르고 폭풍을 타고 넘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대들 자신이라는 가없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며 그 안에서 신이라는 이름의 존재와 무언의 조화를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영원함이 그대들에게 부여한 임무이니라.
삶, 즉 인간의 삶이 하나의 원이고 신을 발견하는 일이 그 중심이라면 그대들이 하는 모든 일은 그 중심과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피땀에 흠뻑 젖더라도 그 외의 모든 일은 빈둥거림일 뿐이다.
방주는 준비 되었다.
바람은 순조롭게 불어오고,
바다는 고요하게 일렁인다.
노아에게 나는 그렇게 가르쳤도다.
그대들에게 나는 그렇게 가르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