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과 그 메카니즘
심리학의 문제

엘리스 배일리


루시스 출판사
113 유니버시티 플레이스 11 층, 뉴욕시, 뉴욕 주 10003
루시스 인쇄사
3화이트홀 커트 슈트 54 런던 사우스웨스트 1번가 2 EF

감사와 사랑으로 엘리스 E. 듀퐁 오티즈에게 바친다

서언
제1장 소개
제 2장 분비선(腺)과 인간 행동
제 3장 에텔체 또는 생기체의 이론
제 4장 혼의 본성과 그 위치
제 5장 혼, 에테르 그리고 에너지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
제 6장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
제 7장 결론
부록
참고도서
색인



“몸과 혼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 작용은 다른 인과 관계보다 신기한 점이 훨씬 더 많다.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자가 사실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루돌프 헤르만 롯체


“중심적인 자아의 소망에서 하강하는 의도meaning가 몸을 감싼다. 이것은 세포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여러 가지 의도로 구성된 성채가 된다. 그 기관들은 사실적인 것일뿐만 아니라, 모험적이고 심오한 상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가치와 미추, 우아함과 기교, 암시적인 철학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오만스럽고 수치스러운 태도, 예술에 대한 무한한 관심, 자유자재한 춤의 의미, 그 모두가 명료하게 된다. 자세, 몸짓, 그리고 무수한 색채와 강도에 따른 표현상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내면의 움직임이 거침 없이 즉시 나타난다. 시와 도덕, 종교와 논리가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처럼 성원들의 내면에 다시 자리를 잡고, 분열에 의해 파멸할 것이라고 위협받는 세계는 구체적인 통합을 회복한다.
                자아, 그 몸과 자유, WM. E. Hoching, p.97.



서언

동양의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사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대부분 이를 무분별하게 경외하거나 막무가내로 불신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런 상태는 유감스러운 것이다. 숭배자는 불신자만큼이나 위험하다.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우리들의 사고와 신기할 정도로 다른, 거대한 동양적 사고의 본체를 공평하게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본질적인 탐색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면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 무분별한 태도는 우리의 철학적 심리학적 서적들, 이 책과 또 다른 책에서 동양적 사고를 거의 완전히 생략해버리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비난한다. 동양은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자신들만의 고유어를 갖고 있다. 이를 잘 번역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동양의 저작이 혼란스러운 시적 표현이나 자아 신비화의 기이한 허튼소리로 채워져 있다고 보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배일리 여사는 비판적인 정신이 동양적 사고로 나가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 비판적인 정신이란 서양적 사고와 똑같이 동양적 사고도 지혜의 궁극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녀는 서구인들이 훨씬 더 경이적인 신비한 원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경외심을 일으키는 외양과 동작으로 다가와서, 조잡스러운 부정확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서구인들에게 그것은 불합리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요컨대 이렇게 말한다. “이 동양적 사고는 실존의 문제들을 깊이 연구하는 경우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이 서양의 사고보다 반드시 더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또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은 모두 자신의 사고를 특화시켜 왔다. 그러므로 둘 다 진지함과 독특한 통찰력의 미덕을 지닌다. 그렇지만, 특화는 궁극적 통합으로 이어질 때에만 가치를 갖는다. 동양과 서양이 각자의 삶의 가장 심오한 영역, 즉 그들의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사고의 영역에서 결합할 때가 성숙되지 않았는가?”

만약 다른 이유가 없다면, 이 책은 동양을 서양으로 그리고 서양을 동양으로 번역하는 것만이 아니라 두 가지 계열의 사고를 단일한 관점에서 조화롭게 결합시키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녀가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는지 아닌지는 독자들이 평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주목할만 하며, 두 가지 형태의 사고 모두에 보다 지성적인 접근을 할 때 결실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적인 분비선(腺)의 연구와 동양적인 “에너지 센터”의 연구 사이에서 저자가 행하는 독특한 비교야말로 이 책에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다. 서양 철학자 스피노자는 오래 전에 절대자의 삶 속에서 그리고 이른바 개체라는 절대자의 표현된 삶에서 몸과 마음이라고 부른 것의 엄격한 병행론(parallelism)을 지적했다. 만약 그런 병행이 존재한다면, 모든 외적 현현에 대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내적 힘이나 심령력의 발견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매우 일반적으로만 내적 힘과 외적 힘을 가정해 왔다. 이 책에서는 이른바 개성을 조정하는 분비선의 연구에 집중함으로써 보다 적절한 개체의 수련에 대해 풍부한 암시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연구의 진전 가능성을 열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관계를 제시할 것이다. 서양에서는 생리학적 행동과 관련해서 갑상선thyroids 또는 부신adrenals을 함께 말한다. 이처럼 생리학적 행동의 심령적 대응물이 있을까? 그것은 답하기 힘든 질문이고 이를 처음 접한 생리학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19세기 유물론의 어두운 상황으로부터 나온 완고한 독단론자가 아니라면, 뇌라는 생리학적 기관의 심령적 대응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갑상선, 부신, 그리고 나머지들의 심령적 대응물은 왜 아니겠는가?

만약 이러한 질문을 논리적 일관성을 위해 탐구한다면, 개체의 심령적 삶이 머리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매우 유약한 지성적 관점을 훨씬 넘어서 우리의 사고는 틀림없이 확장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저자가 도달한 잠정적인 결론을 정리하지는 않겠다. 특별한 결론들은 수정되거나 심지어 거부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생리학적 심리학적 연구로 이어지게 될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 놓았으며 결국 이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도전적일 뿐만 아니라 독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양인들에게는 충격을 줄 것이지만, 서양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지나치게 낯선 동양적 사고 과정에 대해 진정으로 감탄하는 마음과 이에 대한 경이감이 뒤섞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혼과 그 메카니즘: 1장 도입
제 1장 도입

이 책을 쓰게 된 데에는 세 가지 바램이 있었다. 첫째로는 유물론적 또는 현상계의 심리학과 내성적 또는 내면계의 심리학을 결합시키려는 바램이고, 둘째로는 과거의 과학적 심리학을 인류의 사고와 인류의 심리학이라는 더 넓은 영역에서 보기 때문에 물질주의적인 서양과 내성적인 동양을 조화시키려는 바램이고 마지막으로 이들이 대립하는 것이 한 가지 진리의 여러 국면들이며, 이들이 함께 하나의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싶은 바램이다.

이 바램들은 현재 세계적으로 심리학적 교육 수준에서 나오고 있다. 오늘날 지배적인 심리학의 형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철학의 저택들The Mansions of Philosophy”에서 윌 듀런트가 잘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사람을 연구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환경과 더불어 외부에서 시작하여, 적응 메카니즘으로 사람을 설명한다. 그것은 사상을 사물로, ‘마음’을 ‘물질’로 환원하고 스펜서의 변장한 유물론과 왓슨의 행동주의로 귀결한다... 또 다른 방식은 내면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환경을 연구하고 사용하고 정복하려는 필요, 충동 그리고 욕망 체계로 사람을 본다. 그것은 사물을 사상으로, 물질을 마음으로 환원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목적이 모든 형태를 결정한다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질료가 형태를 얻어 완성하는 현실)’와 더불어 시작하고 베르그송의 생기론Vitalism과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로 귀결한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 257


W. B. 필스베리는 이 이중적인 체계는 불필요하게 중복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행동주의적 이론을 취하면, 우리는 두 가지 심리학, 즉 내적 심리학과 외적 심리학을,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 고찰한 심리학과 내부로부터 고찰한 심리학을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기껏해야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필스베리, W. B. 박사, 철학사, p. 298.


이 중복된 상황을 인식하면서, 그리고 두 가지 노선의 해석이 불필요하다는 필스베리 박사에 동의하면서 나는 두 가지가 제 삼의 단일한 것으로 융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기계론적 학파의 정당성과 마찬가지로 내성주의적 학파의 입장도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가정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두 학파 모두 사실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각 학파는 진정으로 상대 학파를 보완해 준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그런다면 서양의 정확한 지식과 동양의 내성적인 지혜에 기초하는 제 삼의 합성 학파가 세워질 수도 있다.

이들 두 심리학파를 고려해 보면, 현대 심리학이 대부분 물질주의적이면서 매우 대중적인 학파라는 것이 분명하다. 유럽과 미국의 많고 다양한 학파에서 나온 심리학에 대한 최근의 책들을 연구하면, 대다수가 행동주의 학파의 기계론 철학을 승인 또는 거부하는 데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는 경우라면 또 다른 형태의 물질주의적 심리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볼프강 쾰러는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때는 어떤 태도를, 이후에는 또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 세속인의 믿음이다. 또한 대부분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한 가지를 하고 이어지는 다른 상황 아래에서는 분명히 다른 일을 하는 성향이 있는 이유를 그는 직접 알고 이해한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동적인 맥락, 즉 정신적인 삶을 구성하는 발전 과정에서 진실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 믿음에 반해서 그리고 그와 완전히 이질적으로 현재 매우 학식있는 심리학자의 관점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어떤 때는 이 일을 하지만 다른 때는 다른 것을 하는 성향이 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경우에는 어떤 신경 경로들이 활기를 띄는 것이고, 두 번째 경우에는 다른 경로들이 열리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투과성이 좋은 경로들을 지니고 있다!” 볼프강 쾰러, 게슈탈트 심리학, p. 349.


그러나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고, 윌 듀런트가 말했던 것처럼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욕망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이며, 조절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거기에는 신비주의와 형이상학이 뒤섞여 있으며, 정신분석, 행동주의, 성적인 신화와 사춘기 질병이 혼합되어 있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 376.

심리학은 신경이건 원자 또는 생기이건 에너지, 힘, 에테르 파동, 그리고 전류와 전하, 리비도라고 하는 심리학자들의 자유 부동력(freely floating force)이라는 단어들로 위엄을 갖춘 불가시적인 경계 지대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과학들은 규정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이와 같은 비인간의 거주처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인다. 장막이 들어 올려지면 인간의 꿈과 열망으로 이루어진 약속의 땅이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다. 불확실성과 기대감은 현대 과학의 확실성과 냉엄한 사실들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인류가 우주적인 무대에 드리워져 있는 커튼 앞에 서서 지성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다음 막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류가 오랜 과거를 지녀서 많은 경험을 얻고 지식을 축적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완전히 기대하지 않았던 계시와 발전에 참여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기에는 현재의 삶의 장치와 이해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동안 이 우주적인 무대에서, 그리고 다양한 노선들을 통한 진리에로의 접근 과정에서 사람들은 과학에 의해 알려진 사실들을 정비해 왔고, 향후 가능한 발전을 찾아내고 있으며, 옳은지 그른지 실험과 시험을 할만한 가정에 서서 많은 분야에서 활동을 진전시키고 있다. 인간 지식의 모든 분야의 학도들을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갖어야 하는지를 지적하면서 버트란트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정확히 반대가 되는, 발견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버트란트 러셀, 회의적인 에세이, p.157.

오늘날의 이러한 과학적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회의론적인 것과, 불가지론적인 것이겠지만 단호하고 공정하게 탐구하면서 의문을 갖지만, 가정된 사실들이 증거에 유효하다고 증명되는 때 기꺼이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 가짐으로, 편견없는 다수의 공식화된 진실에서만 하나의 진리가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소심한 소인배만이 신념이 없고atheistical, 독단적이고, 파괴적인 비판을 일삼으며, 빛이 되돌아 오고, 새날이 밝아올 때 꼼짝하지 않는다.

이 탐구, 물음, 과학적인 태도와 연구는 특별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식분야지만, 아직도 진정한 과학적 연구 분야로 들어 가고 있는 중인 가장 신생의 심리학에 적절하다. 더 많은 것이 알려질 때까지 의견을 보류하여 특별한 학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이 분야를 고찰할 때에만, 탐구자는 시야가 제한되어 고립된 관점으로만 보고 자신이 놓여 있는 광경을 보지 못해서 완전한 단위를 이루지 못한 단편들과 사소함만을 다루는 위험을 회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시기의 가장 바람직한 징후들 중 하나는 동양적 관점에 대한 이해와 이를 연구하려는 경향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동쪽과 서쪽은 대단히 다르고 진리에 이르는 접근법이 다르기 때문에 학도들은 최근에서야 비로소 그들의 기본적인 통일성의 가능성을 숙고하게 되었으며, 사람과 그 환경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삶의 동양적 해석과 서양적 해석의 융합으로부터 출현하게 될 것이다. 낡은 해석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고대의 진실이 수립될 것이다. 낡은 오해는 오류로 인식될 것이지만, 현실은 보다 분명한 빛과 아름다움을 발할 것이다. 서양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구조의 이해에 기초해서 이들이 지닌 것과는 다른 과학, 사상 그리고 추론이 결합되고, 구조를 움직이고 이끌어가는, 동양에서는 친숙한 에너지 또는 영혼의 이해에 기초하는 새로운 심리학이 나타날 것이다. 구조와 동력은 적대적이지 않고, 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다.

서양 심리학은 우선 구조에, 즉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우주,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한 사람의 객관적 반응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사람을 활동하는 육체로 다루고, 자연의 역학mechanics과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역학이며, 시험과 실험을 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룬다. 그것은 몸을 연구하여 감정과 정신력을 설명하고, 이른바 혼에 대해서도 몸으로 설명한다. eb런트는 이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은 말로 지적하고 있다. “자아 또는 혼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유전적인 성격과 획득된 유기체의 경험의 총합일뿐이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75.

이것은 다양한 유형과 기질을 메카니즘으로 설명한다. 루이스 버먼은 자신의 흥미있는 책에서 이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가장 값진 지식은 그가 내분비선으로 이루어진 생물이라는 것이다. 즉, 특이한 유기체로서 인간은 구성 부분들을 조절하는 많은 세포 공장의 산물, 부산물이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 공장의 부서들이 차의 부품들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 화학 공장들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몸을 구성하는 다른 세포들에 작용하는 특별한 물질들을 만들어서 이른바 생명이라는 무수한 과정들을 조절하고 결정한다. 생명, 몸 그리고 혼은 조용한 화학 공정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분비물의 활동에서 출현하는데, 이것은 주석염의 용액에서 시작되는 화학 반응에서 전류에 의해 주석 결정수가 나오는 것과 동일하다.

사람은 내분비선에 의해 조절된다. 5만년 동안 사람은 자신을 정의하고 알려는 노력을 해 온 뒤에 1920년대에 진입해서야, 위의 사실을 자신에 대한 진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심오한 결론이지만, 많은 사실에 의해 지지받는 분명한 결론일 뿐이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26.


서양 심리학은 물리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을 강조하며, 선택하는 분야가 과학적이다. 그것은 환상적인 신비가의 태만하고 몽상적인 추측을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사람과 그 행동 그리고 자질에 대한 진실을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사실들에서 몸을 분리시켜 버렸다. 이 지식은 더 섬세한 인종에게 작용할 수 있는 메카니즘을 만드는 데에 매우 가치있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보다 극단적인 학파들의 경우에 서양 심리학은 육체의 세포와 기관들의 작용에 감정, 사고 그리고 활동을 모두 연관시키기 때문에 매우 결정론적이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는 주로 유기체, 신경 장치, 그리고 내분비계에 의해 지배된다. 다음의 인용은 이러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행동주의자의 관점에서 본 심리학’에서 왓슨은 ‘감정은 전체적으로는 몸의 메카니즘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내장과 분비계의 큰 변화를 포함하는 유전 유형 반응pattern-reaction’(p.195)이라는 점과 ‘생각은 언어 메카니즘의 움직임’(페이지 316)이라는 점, 그리고 ‘고도로 통합된 육체적 활동일뿐’(p. 325)이라는 점을 가르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우리가 내재적인 육체 과정을 연구하는 경우에 생각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왓슨은 대뇌 피질의 해당 부위에서 일어나는 활동과 사고를 동일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 활동을 할 때 음성 도구, 횡경막, 손, 손가락, 눈의 움직임 등, 말하고, 쓰고, 동작하는 것과 명시적으로 묵시적으로 관련되는 모든 육체 과정과 동일시한 것이다.(p. 324). 머톤 프린스, 1925년의 심리학, p.208


“심리학은 세계와 그 속에 있는 사람을 함께 연구한다. 즉 그것은 경험을 신경계에 종속된 것으로 연구하지만, 반면에 물리학은 경험을 신경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연구한다. 심리학은 그러므로 일반 과학들과 함께 마음의 일반적인 특성들을 드러내는 학문 분야로서 분류되어야 한다. 이에 의하면 마음은 ‘신경계에 의존한다고 생각되는 인간 경험의 총합’으로 정의된다...심리학은 (인간)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보는 전체적인 환경을 연구하는 반면, 물리학은 (인간)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을 넘어 존재한다고 보이는 전체 환경을 연구한다. 월터 S. 헌터, 1925년의 심리학, p.95.


“세 번째로 기계론자들의 믿음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하는 두 가지 가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참이라고 해도 다른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이 두 가지 가정은 (1) 세계의 모든 과정들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 종류로만 이루어져 있고 (2) 이 모든 과정들은 자연을 무기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에 물리학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즉 기계적이거나 엄밀하게 결정되고 그래서 엄밀하게 예측가능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윌리엄 맥도걸, 1925년의 심리학, p.303.


루빈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개체의 육체적 모습, 심령적 성격, 또는 혼의 과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분비선의 내분비물의 성질과 총량에 의해 대개 증명된다.” 허먼 H 루빈 의학박사, 인간의 신비한 분비선들, p.54.


어떤 학파들은 의식 일반을 부정하는 데에까지 가서 이를 물질에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양적 연구자는 그들이 정확하게 보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리어리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의식이 신경을 특징짓는 것은 파동이 물질의 형태를 특징짓는 것과 같다.” 다니엘 H. 리어리 철학박사, 현대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 p.116.

그래서 의식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정의된다. “말, 그리고 동작 메카니즘과 밀접하게 관련되거나 이를 포함하는 육체 활동의 복합적인 통합과 연속, 그래서 자주 사회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왈터 S. 헌터, 1925년의 심리학, p.91.


왓슨은 독자들에게 “의식에 대한 언급들, 즉 감각, 지각, 주의, 의지, 심상과 같은 용어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이 용어들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연구를 수행할 때, 그리고 학도들에게 학문 체계로서 심리학을 소개할 때면 언제나 그러한 개념들이 없어도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왔다. 솔직이 그 의미를 모르며, 다른 누구도 일관되게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1925년의 심리학, p.201, 각주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심리학이 심령과 완전히 결별해서 ‘의식’이라는 단어를 대체물, 즉 ‘마음’과 ‘기억’과 함께 살아 있는 것과 함께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때 인간의 행동은 과학적인 기초 위에 세워질 것이고, 문학이나 철학 또는 종교적인 사색의 한 분야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은 개성, 즉 일정한 학식있는 행동을 보여 주는 ‘의식’에, ‘기억’은 개인의 가로무늬근 또는 민무늬근 조직의 일부에서 나오는 신호에 길을 내줄 것이다.” 조지 A. 도시, 우리는 왜 인간처럼 행동하는가, p. 333.

이렇게 완고한 서양 심리학의 물질주의적 경향은 심리학psychology이라는 말의 어원이 ‘논logos’과 심령psyche 또는 혼soul과 관련되어 있다 것을 기억할 때 더 놀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는 그러한 입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들은 내성주의자, 정신주의자mentalist라고 더 잘 알여져 있는 내성적인 심리학파이다. 이들은 의식의 사실성을 인정하고 의식적 실재를 추정한다. 리어리 박사는 이 부류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내성주의자들은 의식, 인식, 인식의 인식, 자아, ‘나(I)’의 심상, 그리고 경직된 훈련과 완고한 기법을 지닌 행동주의자가 경멸, 무시 그리고 부정하는 모든 종류의 개념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성주의자는 관심을 내면으로 돌린다. 자아 성찰로부터 자료들을 얻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을 묻는다. 이론적으로 행동주의자는 인간을 생명의 낮은 형태로 다루기 때문에 동물과 동일하게 다루며, 동물이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행동을 명백하고 객관적으로만 관찰한다. 이는 연구실에서 물체나 화합물의 반응을 관찰할 때 물리학자나 화학자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우기 주관적 학파는 초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경향이 있고, 행동주의 학파는 보다 경험적이고 실용적이다...

“정신주의자들은 심령적 행동이 물리적 행동의 반영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몸과 뇌 이상으로 다른 수준에는 다른 것이 있으며, 이는 원한다면, 마음, 영혼,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은 물질의 기능이 아니다. 다른 한편 유물론자들은 이와는 다르지만, 그와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즉 모든 것은 물리적이며, 생각, 느낌, 감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모든 행동은 모두 물리적, 물질적인 세포의 기능이며, 그러한 구조 없이는 활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행동이 무엇이건 그것은 작용한다. 한편으로 인간은 육체의 구조를 사용하는 정보력이나 영혼을 갖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불가결하게 복잡하기도 하고, 미묘하기도 하며, 고상하다고 할지라도 도덕이나 종교에 의해 작동할 수 있는 기능을 하는 유일한 구조를 기초로 갖고 있다.” 대니엘 B. 리어리 박사, 현대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 pp. 6-7.


내성주의자들과 물질주의자들은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으며, 이들 학파의 주장은 심리학이 분리되면서, 다양하고 많은 집단들에 의해 훨씬 더 약화되었다. 하바드 대학의 호킹 박사는 말한다.

“심리학은 정말 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동적 심리학, 목적 심리학, 형태 심리학 그리고 반응 심리학, 프로이드 심리학, 구조 심리학, 행동주의 심리학,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학파들이 있다. 그들은 자아를 다르게 묘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합은 특징적으로 심리학적 색조를 갖는다. 우리는 행동주의를 순수한 실례로 간주하는데, 그것이 이 성격 중에서 극단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Wm. E. 호킹, 자아 그 몸과 자유, pp.17,18.

프린스 박사는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구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세 가지 진영으로 나뉘어진다. 자아 심리학자들, 비자이 심리학자들 그리고 중도적 입장들. 첫 번째 집단은 모든 의식적 과정의 내용이 자아, 즉 자아, 자아의식의 인식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든 의식은 자아에 의해 어떤 것을 의식 또는 인식하는 것이다.

“비자아 심리학자들인 두 번째 집단은 성찰에 의해서는 어떤 자아나 자아 의식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와 ‘너’는 언어의 필요에 의해 요구되는 강제된 표현일뿐이다.” 머토 프린스, 1925년의 심리학, p. 223.


서양 심리학은 대체로 분명히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기계와 기계 장치의 시대에 번성하는 기계론이다.

서양 기계론적 심리학자의 입장은 그러므로 확고부동하게 완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알려진 진실에 기초해서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증명할 수 있고, 자신의 경우들을 인용할 수 있고, 그 자신이 인간 전체라고 주장하는 인간의 메카니즘에 대한 지식이 객관적이고 명백한 결과를 지닌 실험과 시험에 기초해 있다.

이 물질주의적 심리학에 반대해서 즉시 제기된 비판은 서양 심리학이 주로 비정상적이고 결함이 많고 병적인 케이스만을 배타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었다. 비범하고 천재적이고 이른바 매우 영적인 개인은 무시되고, 일반인에게 아름답고, 본질적이며, 진실한 많은 것이 설명에서 배제된다. 만약 심리분석가가 그리스도를 분석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여호와 콤플렉스”로 고생하고 있다고 도식화되고 분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했던 형태의 구조와 “그의 신경계를 특징짓는 의식”의 성격은 여러 시대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구조가 다시 재현될 수 있었는가? 비슷한 메카니즘을 재생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 심리학은 단지 발전의 초입에 머물러 있을뿐이고, 그래서 왈트 휘트먼은 더 큰 영역을 보고 있다.

“긍정적인 과학 만세! 정확한 증거 만세!”...

여러분이 보여 주는 사실은 이용할만 하지만, 내가 머물 곳은 아니지,
나는 그것으로 내가 거주하는 곳으로 들어갈 뿐이라네” 왈트 휘트먼, 풀잎들, p. 10.


서양에서 독립적으로 출현하긴 했지만 내성주�자들과 정신주의자들의 모호한 반영일뿐인 동양학파는 서양 학파들과 정반대이다. 동양의 심리학은 형태 뒤에 놓여 있는 것을 다룬다. 그것은 영적이고 초월적이다. 그것은 혼과 영혼을 가정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추론과 결론들이 이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형태와 구조를 완전히 인정하지만, 형태와 에너지를 이용하여 전진시키는 자를 강조한다. 그것은 생명과 에너지의 심리학이다.

태고의 시간으로부터 이것은 동양의 사고였으며, 인도의 유서깊은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몸 속에 들어 있는 지고의 영혼은 보는 자, 사고하는 자, 유지하는 자, 맛보는 자, 주님, 상위 자아라고 불리네.

“모든 감각 안의 힘에 의해 비추어지나 모든 감각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초월적이고, 모두를 지지하고, 여러 가지 힘들로 분리되지 않고 모든 힘을 즐기는 자일세.

“그것은 미묘함 때문에 모든 존재의 외부와 내면에 존재하며, 움직임 없이, 움직이고, 지각되지 않네, 그것은 떨어져 있지만 아주 가까이 있네. XIII: 22. 14, 15.

“이 일시적인 몸들은 몸의 영원하고,불멸하며, 무량한 주님에 속해 있도다. II: 17.

"사람들은 감각력들이 대상보다 더 높다고 말하고 감각력보다 감정이 더 높다고 하며, 감정보다 이해가 더 높다고 하지만, 이해보다 높은 것은 그라네. III: 42.”

이렇게 동양의 심리학은 원인, 창조자, 자아를 다룬다. 그리고 그 자아가 정신적, 감정적, 그리고 물리적 활동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작용하는 인간의 성스러운 자아(divine self: 신아)인지 더 작은 자아들이 모두 살아 움직이며 자아 존재를 지니는 거대한 자아(great Self)인지를 다룬다. 동양의 심리학은 그것의 위대한 논증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자아(the Self)를 알고 있고, 그 앎을 통해 주관적인 진아, 상위혼(Over Soul: 에머슨이 말한 만물을 생성시키는 영혼)과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배출해 왔다. 이 주장들은 그들의 방법을 연구하려는 자와 특별한 훈련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입증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력을 주는 진아, 즉 배후에 존재하고 초월해 있는 영혼 쪽에서 그들의 위치는 형태의 영역에 있는 서양 심리학자의 그것만큼 분명하다.

이 두 체계의 결점은 명백하고 각각의 경우에 개탄스러운 결과를 만든다. 서양은 메카니즘을 강조하고, 혼을 부정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지성적 힘을 부정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 때문에 사람의 코구멍 속으로 먼지가 들어갈 뿐 신의 영혼을 드리쉴 수는 없다. 동양은 물리적인 것을 인정하나 그것을 경멸하며, 그로 인해 동양의 비참한 물리적인 조건에 책임이 있게 된다. 이렇게 결함이 심하다면, 이 둘이 결합하면 힘이 나는 것은 진실이 아니겠는가?

자아(the Self)는 존재하고 (이것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한다) 의식적인 신성한 혼이 있다면, 그것이 물리계를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성스러운 결합을 인식할 수 없겠는가? 만약 그것이 지배적인 에너지로 모든 것을 현현시킨다면 (이것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결과들이 성취될 수 있는 정도로 현명하고 의미있게 그 에너지는 진아가 사용하는 구조에 적응될 수 없을까? 혼의 완벽한 표현이 메카니즘의 매질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형태에 대한 서양의 과학적인 지식과 혼의 본성에 대한 동양의 축적되고 상속된 지혜가 지성적으로 결합될 수는 없을까? 물질이 위로는 마음과 혼과 영혼에 이르고, 향상을 촉진시키는 영혼이 육체를 완벽하게 해서 그것을 증명하면 더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물질주의적 심리학과 내성적 심리학을 결합시키고, 서양과 동양을 조화시켜서 그 결합이 강력하고 진실되게 하려는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혼과 그 메카니즘: 2장 분비선과 인간 행동
2 장 분비선과 인간 행동


분비선에 대한 연구는 유년기에 머물러 있다. 이 주제에 대한 문헌들을 개괄적으로 살펴 보면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어떤 분비선의 분비물의 효과와 내밀한 본질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 많으며, 미스테리가 장막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정한 분비선에서 분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일반적인 논의에서도 갑상선과 갑상선 추출물의 조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대부분의 분비선의 분비물은 알려져 있지 않거나 일부만이 추출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학이나 강단의 심리학에 과학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지성적인 사람은 환자를 대상으로 하고 두툼한 사전으로 무장하여 분비선과 그 분비물, 그리고 그 효과 등을 주제로 연구하고, 유용한 자료를 부지런히 수집하고 그 분야를 조사한 뒤에는 이를 보고하는 것을 망설일 필요는 없다. 사실 그러한 연구가 중요한 탐구 분야에 대한 잘 된 요약을 제공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한 기술적인 문헌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감명과 아울러 특별히 과학적인 자료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참신한 정신이 모든 분야에 더 좋은 관점을 제시해 주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훈련받은 전문가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연구되고 보고된 바대로 심리학의 일반 주제에 대해 동양에서 지니고 있는 전래되는 믿음과 오래된 확신에서 표현되었다면, 특별히 그럴 것이다.

분비계를 연구할 때, 그것이 몸의 성장, 머리카락, 심장, 혈액, 그리고 생식기들과 맺는 관계와 같이 일반적인 생리학적 용어로 그 효과를 설명하려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지난 세기에 출판된 의학 서적에서도 수집될 수 있다. 오히려 내 의도는 선진적이고 현대적인 탐구자들,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이 분비선의 연구로부터 추리할 수 있고, 그것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하는 것, 그리고 신기한 내적인 분비물이 사람의 행동, 감정 그리고 정신성, 간단히 말해 사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비선을 연구할 때, 나는 이용할 수 있는 책들로부터 광범위하게 인용할 것이다. 이것은 권위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제시된 견해를 보다 참신하고 생생하게 반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고 문헌의 일부는 이 책의 끝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책들과 훈련된 연구자들은 일반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용어를 종종 사용한다. 예를 들면 갑상선의 분비는 “삼 요드 삼 수소 엑시진돌 프로피오닉 산! (triiodotrihydroexygindolepropionic acid)”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가능한한 나는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표현을 피할 것이다.

분비선을 살펴 보기 전에 “심리학”으로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 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적어도 서양에서는 이미 설명한 것처럼, 심리학이 심령 또는 혼의 논리(logos) 또는 법칙(law)이라는 본래적인 의미를 포기해버렸다. 리어리 박사가 제시한 최근의 정의는 이렇다.


“포괄적 의미로 행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 인간 행동의 과학이란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 즉 인간이 지니는 모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동은 전체적이고 통합된 개성의 행동을 뜻한다.

“심리학은 유기체를 전체로 다룬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물리적이고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즉 개성으로, 복합적인 외부 환경 속에서 다른 개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통합성과 적응성을 지닌 개인으로 다룬다.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행동은... 생리적 사실과 결과, 결국 생물학의 영역으로, 그리고 생화학, 일반 화학으로 귀결되고 필연적으로 운동하는 물질의 과학인 물리학으로 귀결하게 된다.” 대니얼 B. 리어리, 현대심리학, 정상과 이상, pp. 10, 14, 18.


그러므로 심리학은 인간을 환경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다루는 인간 행동의 과학이며, 사람과 그 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의 과학이다. 그것은 인간 행동의 과학이지만, 선악의 행위로 구성되는 윤리적 의미에서 그러하지는 않다. 그것은 인간 행동, 즉 개성의 과학이다. 그러나 이 행동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호킹은 이렇게 말한다. “자아는 참으로 행동의 체계이다. 그러나 지속적인 희망에서 나오는 목적 지향적 행동의 체계이다. 자아의 핵은 희망이다.” Wm. E, 호킹, 몸과 자유, p.46.


삶은 더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이 희망은 진정 지속적인 희망이지만,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호킹은 목적 지향적인 행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행동과 개성이라는 영역에는 세 가지 주요 요소들이 있다. 첫째로는 환경이 있다. 이것은 현재의 사실, 또는 사실들의 모음, 또는 드라마가 연기되는 단순한 수동적인 무대 이상이다. “문화적이든, 사회적이든, 물리적이든 그 모두가 다양한 사실로 나타나거나 기록되는 유기체는 아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적 장치, 특히 이제 우리가 더 자세하게 논의하게 될 반응 장치가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특정한 환경과 특정한 반응 장치, 일련의 행동을 제공하며 불가피하다고 주장되는 환경과 반응 장치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관계의 행위 또는 결과가 존재한다. 이 세 가지의 상호 작용에 의해 인간 행동이 일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히 두 번째 주 요소, 즉 반응 장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여기서 메카니즘의 특정한 측면들, 즉 신경계와 내분비선ductless glands은 다른 것들보다는 더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이 두 체계는 인간의 몸에서 밀접한 상호 관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인간이 환경, 외부 세계에 접촉하는 것은 신경계로, 인간 체구조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놀라운 부분이다. 이 계를 통해서 인간은 구체적인 것을 인식하게 되고 신경망과 척수와 뇌를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는 정보를 인식하게 된다. 여러 가지 메시지들은 수 백만 개의 신경 전달 통로를 따라 뇌의 중앙 발전소로 전달되어 신기한 방식으로 정보로 전환된다. 정보에 대한 역 반응이 일어나게 되고 인간은 전기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들어오고 나가는 신경 에너지의 나타남과 함께 내분비계(그리고 근육계)에서 이와 유사한 활동이 일어나며 활동의 연결이 긴밀해서 내분비선이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못하면, 전달되는 정보에 대한 적절한 반응과 한 형태의 에너지에서 다른 형태로의 에너지 변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체 반응 장치와 그 경우의 메카니즘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유기체는 수용체를 통해서 받아들이는 주변의 에너지를 근육과 분비선의 작용에 따라 송출되는 에너지로 전환하는 변형 장치이다. 이와 동시에 이 장치도 이 과정에 의해 변형되며, 자극, 즉 유기체가 완전히 작용하거나 행동할 때 이 두 가지의 자극과 에너지가 결합되어 출력 신호를 내부에서 일으킨다.” 대니엘 B. 리어리, 현대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 p. 33.


신경계와 근조직은 대개 물리적인 반응 장치, 또는 환경에 대한 물리적인 반응이 이루어지는 수단이라고 설명될 수도 있지만, 신경계와 내분비선을 지성적이고 감정적인 반응 장치, 실제적인 반응을 형성하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장치와 환경 사이에서 벌어지는 후자의 상호 작용은 행위와 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감정과 사고 활동은 내분비계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사람의 본성도 그런 식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리어리 박사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결국 현재의 이론이 보다 정확하고 더 근거가 확실한 지식으로 대체되면, 우리는 내분비선 안에서 또는 그와 관련되는 위치를 발견할 것이다.” 상동., p. 189.


루빈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상태와 되고자 한 상태는 정상적인 내분비선을 지니고 태어났는지 아닌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믿음에 우리는 급속히 접근하고 있다.” H. H. 루빈, 우리의 신기한 분비선들, p. 10.


그리고 리어리 박사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본능보다는 “수용체와 민무늬근와 내분비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대니엘 B. 리어리, 현대심리학: 정상과 이상. p.61.


콥 박사도 자신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체 구조를 결정하는 분비선의 작용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개체individual의 정신적 외관, 즉 ‘행동 복합behavior complexes’은 물질적인 행복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질적인 행복은 틀림없이 다양한 분비선의 분비에서 일어나는 활동과 상호작용에 따르는 것이다...

“비록 이 주제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다 해도 내분비선의 특별한 배치에 의해 몸에서 특정한 형태가 만들어지고 동일한 곳에서 그 결과를 마음이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I. G. 콥, 운명의 분비선, pp. 3,6.


최근 강의에서 J. S. 헉슬리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공을 이루는 데에 순수한 지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질은 주로 갑상선, 뇌하수체, 등등 다양한 내분비선들의 균형이다. 미래의 응용 심리학은 성격을 수정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상동., pp. 11, 12.


이 성격의 문제에 대해 호킹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갑상선이나 내장에 있는 분비선들, 또는 부신과 같은 내분비선들이 성질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 선들 중에서 어떤 것을 자극하거나 그 산물을 주입하거나 그와 함께 복용하면 한때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변화들이 일어날 것이다. 티록신을 조절함으로써 크레틴병(갑상선 호르몬의 결핍에 의한 것으로 소인증과 정신박약 증상을 보인다.: 역주)이 정상처럼 될 것이다. 복용을 멈추면 원래의 조건으로 되돌아 간다. 이 복용을 늘려도, 불행히 그 누구도 정상에서 천재로 향상되지는 못한다. 다만 또 다른 비정상 형태가 만들어질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화학적인 발견도 인간의 정상성을 증가시키는 밝은 희망들을 입증하지는 못하고 있다. 평범한 개인을 천재로 생각하게 하는 약들도 있지만, 복용 결과가 동일한 영향을 준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실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발견에 관해 미래 인류에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혼이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진짜 의미가 있고, ‘요오드 결핍은 현명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 것’이다.” W. E. 호킹, 몸과 자유, pp. 58.59.


그러므로 내분비선과 육체 구조뿐만 아니라 행동에도 미치는 효과를 고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면 분비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특별히 내분비선이라고 언급되는 것은 무엇인가? 콥 박사는 말한다.


분비선들은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배설계drainage system와 관련되는 분비선과 림프선과 육체 작용에 이용되는 산물을 분비하는 것과 관련되는 분비선이다. 림프선이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두 번째 집단은 서로 조율되어 작용하면서 몸의 과정을 조절하고 제어하는 유체들을 분비하는 것이 임무이고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 분비선들은 내용물을 분비하는 관을 갖는다. 두 번째는 관이 없고 그 분비가 혈액의 흐름으로 직접 흡수된다. 이들은 무관 분비선(ductless glands) 또는 ‘내분비 기관’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 산물을 내분비물이라고 부른다. ‘내분비학’이라는 용어는 내분비선의 연구와 관련된다.” W. E. 호킹, 자아, 몸 그리고 자유, pp. 58, 59.


루빈 박사는 말한다.

“내분비”라는 단어는 “분리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그리스어 “크리네인(krinein)"이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이 무관 분비선들 또는 분비 기관들은 ‘내분비선’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이들의 분비물은 직접 혈액으로 영양 림프의 흐름으로, 즉 몸으로 들어간다. 그 때문에 자아에게 필요한 물질을 분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비들은 심리학에서 알려진 몇 가지 경이적인 반응을 자극하는 ‘호르몬’ 또는 유기체의 화학 전달 물질이 포함된다. 사실 호르몬이 심리학에 대한 관계는 라듐이 화학에 대한 관계와 같다.” H. H. 루빈 의학박사, 신기한 분비선들, pp. 8, 9.


이 내분비계는 고도의 협동과 상호의존 속에서 작용하는 기능적인 단위를 형성한다. 버먼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기질은 완전히 협동적이다. 내분비의 분비선들이 이 협동을 지휘하는 자이다... 육체 배후에 그리고 마음 배후에는 이러한 지휘자들의 위원회가 있다” 루이스 버먼 의학 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p. 96, 97.

사실 모든 분비선들은 통일적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서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활동을 연계시키고 있으며 통일된 효과에 의해 사람은 현재 상태가 된다.

사실 그들은 인체의 메카니즘 속에서 다른 계와 분명히 구분되는 기능과 유기체들과 밀접히 연결되는 체계를 형성한다. 혈액계와 신경계는 고유한 활동을 하지만, 내분비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혈액은 신기하게도 다른 분비선들이 분비하는 특별한 호르몬을 전달하는 작용을 하며, 신경계는 내분비선의 정상 또는 비정상 기능을 일으키기 쉬운 심령적인 발전과 특별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보인다.

내분비계에 대한 이러한 논의로부터 우리는 자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럼 무관의 분비선이란 어떤 것들이 있을까?

특별히 중요한 7 개의 분비선들은 머리에서 시작해서 아래쪽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름                       위치                         분비물
1
송과선                    머리                         알려지지 않음
2
뇌하수체 전엽/후엽   머리                        알려지지 않음
3
갑상선                    목                            티록신
4
흉선                       흉곽 상부                  알려지지 않음
5
췌장                       태양총                      인슐린
6
부신 피질/수질        신장 뒤 부분               알려지지 않음/아드레날린
7
생식선                    하복부                       정소와 난소


이처럼 머리와 몸에는 중요한 분비선들의 망상조직이 분포하고 있다. 이것들은 생리학적으로 몸의 구조, 성장 그리고 화학적인 변화를 다스리고,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감정적 반응과 사고 과정을 담당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선행과 악행, 행동의 성질, 그리고 성격을 만드는 자일 것이다.

이제 위에서 언급한 일곱 가지 분비선을 고려하여, 우리는 정신적 심리적 효과에 제한하여 설명할 것이다.

1. 송과선-위치, 머리-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송과선은 고깔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가 완두콩 만하고 코뿌리 뒤에 위치한 뇌하수체 배후 상단에 있는 뇌 중앙의 작은 공간 안에 들어 있다. 송과선은 뇌의 제 삼 뇌실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눈의 망막 색소와 유사한 색소가 있고 이른바 “뇌사립brain sand particles”의 모음이 들어 있다. 틸니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송과체는 어떤 기능을 하는지 확인해 보려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생명에 불가결한 것인가 아니면 대사 활동의 특별한 단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아마 이 기관이 사람과 대부분의 포유류에서 어떤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 기능이 내분비물에 의해 특별히 결정될 수는 있지만, 생명에 불가결하지는 않는 것이 확실한 분비물일 것이다. 송과선 분비물의 정확한 영향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레더릭 틸니 의학박사, 송과선, pp. 573, 542.


이 분비선은 빛에 대한 민감성을 조절하고 성적 특징에 영향을 미치며, 뇌 성장과 관계 있으며, 이하에서 논의되는 역사적 경우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그 활동적인 기능은 사람을 지적인 면에서 조숙하게 만든다고 주장되어 왔다. 이 분비선은 또한 제 삼의 눈, 그리고 시클로프의 눈the eye of the Cyclops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사실 또는 추측을 넘어서 연구자들은 솔직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여러 가지 실험들도 정보를 별로 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아이들과 장애인들에게 송과선 추출물을 복용시키는 실험에서 실험자가 15 세 이상일 때에는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고, 다른 경우에는 상반되는 결과가 나와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몇 십년 전까지 송과선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버먼 박사는 통증과 두통에 만성적으로 시달리는 한 어린 아이가 독일로 보내졌던 경우에 주목했다. 그는 5살 정도의 나이에 매우 조숙해 있었고, 이미 사춘기에 이르러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이상할 정도로 명랑했으며,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인 주제를 논하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집단 의식적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에만 행복해 했다. 병원에 도착한 뒤로 그의 상태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한 달 이내에 죽었다. 부검에서 송과선 종양으로 나타났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89.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이 역사적인 사례는 동양 철학자들의 주장을 고려할 때, 특별한 관심을 갖게 한다.

대부분의 고대 철학자들은 저서에서 송과선이 혼의 자리라고 주장했으며, 데까르트는 “사람 안에서 혼과 몸은 단일한 점에서만, 즉 머리에 있는 송과선에서만 서로 접촉하고 있다”는 말을 빈번하게 했다.

송과선이 혼의 자리라는 고대의 믿음에서, 그리고 아동기의 특징적인 분비선이며 이후 위축되는 분명한 사실에서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있지는 않을까? 아이들은 신에 대한 믿음과 인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왕국이 너희 안에 있다”고 말했고, “너희가 어린 아이들처럼 되지 않고는 하늘의 왕국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워즈워드의 “아동기의 회상으로부터 불멸성을 암시하는 송시”도 주의를 환기시켜 준다.

“우리의 태어남은 꿈일 뿐이고 망각일 뿐이다.
혼은 우리와 함께 떠오르는 삶의 별,
다른 곳에 그 자리를 두고 있고
저 멀리서 왔네
완전한 망각 속에 있지도
벌거벗고 있지도 않지만,
영광의 구름을 걸어가고 있네
그곳은 우리의 고향인 신으로부터 우리가 오는 곳
하늘은 유년기에 우리 주변에 놓여 있다네!
교도소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하네
소년으로 커가면서,
하지만 그는 빛을 바라보고 그것이 흐르는 곳에서
즐거움 속에서 그것을 안다네.
낮에는 동쪽에서 멀리 떨어져 젊은이는
여행해야 하지만, 그는 자연의 성직자,
빛나는 모습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네
마침내 그는 죽음을 감지하고
일상의 빛으로 흐려진다네.”

동양의 철학은 송과선과 혼과의 이러한 관련성이 가능한 것이라고 확인한다.

2. 뇌하수체-위치 머리-전엽의 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후엽의 분비물 피투이트린pituitrin
지난 세기(19세기)의 80년대까지 수 세기 동안 뇌하수체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아서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외분비 기관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그것은 한곳에 위치한 두 가지 분비선이라 해도 옳을 것이다. 이것은 콩만한 크기로 코 뿌리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뇌의 기부에 놓여 있다.

이 분비선은 “자연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불려 왔고, “두개골 속의 두개골”처럼 빈 공간 속에 들어 있다. 대부분의 분비선이 그런 것처럼, 여러 가지 형태로 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또한 수면과 성 주기와 같은 주기적인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지속적인 노력, 즉 에너지 소비의 분비선이며 생명에 본질적이다. 뇌세포를 자극하며, “개성과 직접적이고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또한 뇌하수체가 불충분하게 발전하면 분명히 도덕적, 지성적인 열세, 그리고 자아 통제력의 부족이 나타나거나 적어도 이러한 현상을 동반하지만, 뇌하수체가 잘 발전되면, 정신적 활동과 인내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정적 정신적 성격과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뇌하수체는 진정 한 기관 안에 있는 두 가지 분비선이다. 뇌하수체 후엽의 분비물은 피투이트린이다.


“뇌하수체 후엽은 모성적-성적 본능과 그 승화, 사회적이고 창조적인 본능을 다스린다... 온화한 감정들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지성화된 자아 보호적인 감상주의와 반대로) 모든 기본적인 정서 때문에 다정다감, 동정 그리고 최면 암시에 잘 걸리는 성향이 이 기능들과 연결되어 있다.”

뇌하수체 전엽의 분비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뇌하수체 전엽은 지성의 분비선이라고 설명되어 왔다... 지성에 의해 마음의 능력을, 개념과 추상적 사고에 의해 환경을 통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178.


버먼 박사는 또한 “정신적 활동은 지성적으로는 뇌하수체 전엽의 기능 증가를, 감정적으로는 뇌하수체 후엽의 기능 증가를 동반한다.” 상동, p. 236.

이러한 연구로부터 모든 동물들이 공유하는 모성적인 본능, 동료들에 대한 사랑, 또는 신의 사랑 등 어떤 것을 의미하든 개성의 자질인 감정은 대개 지성화시키는 능력이기도 한 뇌하수체의 조건에 크게 의존한다고 생각된다.

다른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하면, 동양의 지혜를 배우는 학도는 이 모든 추측이 상대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한다.


3. 갑상선-위치, 목- 분비물, 티록신
갑상선에 대해서는 송과선 또는 뇌하수체보다 더 많이 밝혀져 있으며, 동양의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 분비선은 기관 위쪽에 있는 후두 근처의 목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매우 큰 분비선이다. 그것은 한때 성선(sex gland)이었으며, “제 삼의 난소”라고 불리기도 했고 언제나 난소낭(ovarian cases)과 관련되어 있다. 척추 하부에서 성기의 관들ducts과 연결되어 있지만, 진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관련성이 상실되고, 성기와 뇌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서 머리 쪽으로 점차 이동한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46.

또한 여러 가지 조직을 분화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며, 중독을 방지하고 독에 대한 저항력을 증가시키는 해독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갑상선은 에너지 대사의 조절 기관이다. 그것은 에너지 변형의 효과적인 윤활 장치라고 불려 왔고 몸 에너지의 거대한 촉매이다.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내분비계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생명에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정상 이하의 사람들, 장애인과 백치들을 다룬 실험을 통해서 연구자들은 버먼 박사의 말처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갑상선이 없다면 육체적인 능력과 기능의 전개도, 예상 연령에 보이는 사춘기의 징후와 그 이후의 성적인 경향을 보이는 종족의 생식과 아울러 복합적인 사고, 배움, 교육, 습관 형성, 상황에 대한 반응 에너지도 있을 수 없다.” 상동 p.55.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감각 정도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인 감수성과 지각의 정확도는 갑상선의 또 다른 기질이다. 이에 더하여 갑상선이 더 원기왕성하면 더 민감하다. 사물을 더 많이 느끼면 고통도 더 쉽게 느낀다. 왜냐하면 자극이 신경 장치를 자극하는 단계에 훨씬 더 빨리 도달하기 때문이다.” 상동 p. 180


뇌하수체와 같이 갑상선도 기억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 뇌하수체는 기억의 보존과 관계된다고 보이며... 갑상선 기억은 특히 지각과 교훈에 적용되며, 뇌하수체는 이해 (독서, 학습, 사고)와 개념에 적용된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182.


4. 흉선-위치, 상위 흉부-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흉선에 대해서는 실제로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매우 신비한 것 중 하나이다. 송과선과 같이 이것은 아동기의 분비선으로 간주되지만, 아직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

흉선은 흉부에 위치해 있으며, 심장의 상부를 덮고 있으며, 영양과 성장과 관련된다고 짐작된다. 아이들의 무책임한 성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성인기에 기능항진이 일어나면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인간이 되는 경우도 있다.

5. 췌장-위치, 태양총 부근-분비물, 인슐린
췌장과 관련된 정보는 대부분 심리학적이며, 그래서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복부에 있고 (본능적인 동물적 본성의 뇌인) 태양총에 가까이 있으며, “육체적 정신적 목적들을 위한 에너지의 작동”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소화 과정과 관련 있으며, 당 대사에 필요하다고 알려진 인슐린을 분비한다. 세포에 충분한 당이 공급되지 않으면 생존에 필수적인 근육 작용이나 신경 작용이 가능하지 않다.” 상동. p.93.


6. 부신-위치, 신장 뒤-부신 피질의 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부신 수질의 분비물 아드레날린.
부신의 분비선들은 각각 쌍을 이루고 있으며, 하복부에 위치해 있으며, 신장 뒤에 걸쳐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일반적인 성장과 뇌 세포의 성장에 관련되어 있다. 부신 피질의 분비물은 성숙을 이루는 내분비물들의 원천이다.

그러나 부신의 분비선들은 기본적으로 대항의 분비선들이다. 이들은 위험이나 분노를 나타낼 때 직접적이고 활동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그 분비물은 긴급한 때에 자극된다. 고통, 분노 그리고 두려움은 이 분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모든 증거는 수질이 두려움의 증상들을 만드는 물질을 분비시키고, 피질은 화의 반응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76.


또한 이렇다.

“용기는 두려움과 화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모두가 항상 논란 거리가 되고 있다. 용기는 일반적으로 두려움의 반대가 되는 감정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부신 수질의 억제를 의미하는 용기를 가져 올 것이다. 사실상 용기의 메카니즘은 더 복합적이다. 동물의 용기와 의도적인 용기는 구분되어야 한다. 동물의 용기는 글자 그대로 짐승의 용기이다. 언급되었듯이 엄청난 양의 부신 피질을 갖는 동물들은 들판과 숲의 왕들로 호전적이고, 공격적이며, 돌진한다. 그들의 감정은 일종의 피의 욕구를 지닌 것이며,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 황소에게 붉은 천을 흔드는 것처럼 움직이는 공격 대상은 부신 피질의 분비물의 흐름을 자극해서 말하자면 새로운 혈액 조건에 의해 화의 본능이 일어난 것이다. 의도적인 용기의 경우에는 본능 이상의 것이 있다. 결단의 행위, 의지의 표현이 있다. 부신 피질이 없다면 그러한 용기는 불가능하며, 용기에 대한 영예는 주로 뇌하수체 전엽에 돌려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그 분비물과 적절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부신 피질은 진정한 용기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용기 있는 행동들은 뇌하수체 전엽 형의 개인들에게서 대부분 발견되고 있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 p. 177.


7. 생식선- 위치, 하복부-분비, 정소와 난소의 분비물
생식선 또는 간질성 분비선interstitial glands은 외분비의 성선들이지만, 내분비물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많은 분비물은 생식을 위한 수단이다. 생식선이 개성에 미치는 영향을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다. 성적 충동과 그 육체적 정신적인 다양한 부수 효과는 잘 알려져 있고, 연구되어 있는데, 이는 주로 남용과 금지에 대한 것이며, 인류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육체적,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인간의 반응을 모두 성과 관련짓거나 성에만 관련지우는데 우리는 모든 극단적인 주장 배후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성이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동양적 지혜는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고, 에너지 센터들과 분비선들과의 관계를 살펴 볼 때 그에 대한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앞서 설명한 모든 것과 이 주제에 대한 많은 책들과 논문들 중에서 다음의 것이 아마 간단한 요약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제는 모두 실험 단계에 있고, 많은 실험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분비선과 그 기능의 유사성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대부분은 신체 대사와 성장에 연결되어야 하며, 그 모두가 성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그들은 개성의 형태와 기질을 결정한다.

과학이 실험적이기 때문에 사람은 정신분석이 이루어져야 이해될 것처럼 보인다. 감정과 정신적 개념이라는, 파악하기 힘들고, 감지할 수 없는 과정은 물질에 의해 설명된다. 분비선과 신경계, 그리고 접촉 장치와 반응 장치의 발전과 기능의 정도로 현재의 모든 상태가 귀착된다. 성자를 죄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죄인을 성자로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단지 특정한 내분비물의 증감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갖고 나오는 장치보다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그 메카니즘이야말로 사람의 총합이다. 그는 그것을 증진시킬 수 있거나 남용할 수 있지만, 그 장치가 결정 요소이다. 자유 의지는 종식되고 불멸성은 부정된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이 행복한 것처럼 행동하고 또한 다음 세대가 심령적으로 더 잘 태어날 수 있도록 더 좋은 몸을 형성하는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런 결론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모든 연구 대상의 메카니즘과 함께 완벽한 몸이 구성될 수 있고, 따라서 결국 완벽한 심령적 본성이 작용할 수 있는 도구들이 될 수 있는 법칙과 방법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최소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내분비선에 대한 이 모든 결론들이 사실상 올바른 것일까? 개략적으로 분류하고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개요에 공백을 채우는 것만이 남아 있는 것일까?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의문 속에 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우선 개인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개인에 있어서는 분비선과 분비 기능이 기본적인 원인일 것인가 아니면 효과 또는 도구적 성질만을 갖을 뿐인가? 사실 그 너머에 있는 더 큰 원인이 되는 것은 없는가? 모든 물리적이고 심령적 메카니즘을 통해 작용하는 어떤 혼이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지 않을까? 성 바오로가 사람은 자연적인 몸과 영적인 몸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자연의 영광이 하나이고 영의 영광이 다른 하나라고 암시했던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그리고 더 일반적인 두 번째 질문에서 단순한 메카니즘이 실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고 우리의 유일한 길잡이 별은 그 메카니즘을 완성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 “내일 죽으니까 먹고 마시도록 하자” 우리 내면에는 영혼, 혼, 등등으로 불리는 미세한 자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나 에머슨이 말하는 상위혼(Oversoul) 또는 어떤 다른 이름의 초월적인 전체의 일부를 형성하는 자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결코 그것과 하나되지(at-one: 속죄되지) 못하지만, 그 대신에 그 하나됨(at-one-ment: 속죄)에 대한 열망이 우리를 전진시키는 것인가? 썩지 않는 것이 썩는 것을 입는 것일까 또는 필멸은 불멸을 입지 못할까? 죽음은 극복되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동양의 지혜를 살펴 보기로 하자.

혼과 그 메카니즘: 3장 에텔체의 이론
제 3장 에텔체의 이론

동양의 심리학자들은 서양 심리학자들이 가정이라고 간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영적인 본성을 강조하여 물리적인 본성 자체는 영적인 활동의 결과라고 믿는다. 그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내적인 주관적 에너지가 외적으로 현현한 것일 뿐이라고 믿는다. 그는 우주적이고 인간적인 메카니즘 전체를 결과로 간주하며 과학은 그 결과만을 다루고 있다고 믿는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에너지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모든 형상에 스며들어 운동하게 하는 자로, 이른바 에테르와 유사한 어떤 실체를 통해 작용한다. 물질은 가장 거친 형태의 에너지 또는 영혼이며, 영혼은 가장 승화된 상태의 물질이다.

2. 모든 형상에는 이 에테르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형상은 에테르 형체 또는 에텔체를 갖고 있다.

3. 작은 원자가 음의 측면과 아울러 양의 원자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모든 에텔체에는 음의 물질 한가운데에 양의 에너지 센터들이 존재한다. 인간은 또한 음적인 육체에 대비되는 양적인 에텔체를 갖고 있다. 그것은 육체를 활동적으로 활성화시키고 존재 상태를 유지하도록 통일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4. 사람의 에텔체는 심령적 활동을 일으키면서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가 흐르는 7 가지 주요 에너지 핵들을 갖고 있다. 이 핵들은 뇌척추계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심령적 활동의 기초 또는 혼은 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지배적인 원리는 머리에 있으며, 이 센터로부터 모든 메카니즘이 지시를 받으며, 다른 6 가지 에너지 센터들은 이를 통해 에너지를 받게 된다.

5. 특정한 센터들만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는 상태에 있으며, 나머지는 정지되어 있는 상태이다. 완성된 사람 안에서는 모든 센터들이 완전히 작용하여 완벽한 심령적 전개와 완벽한 메카니즘을 만들어낸다.

영적 에너지에 대해 동양에서 강조하는 것과 구조 또는 메카니즘에 대해 서양에서 강조하는 것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상위 국면과 하위 국면에서 모두 사람의 심령적 본성을 완전히 설명한다.

동양적 생기론적 착상과 서양적 또는 기계론적 착상을 결합시키기 위해 그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면 에텔체의 존재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동양적 체계는 난해하고 복잡하며 요약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단한 소개가 이루어져야만 하고 그래서 다음의 개요를 제시한다. 그것은 불완전하지만, 그 분야의 지적인 개관이 된다면, 아무리 간단할지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개요를 제시할 때 우리는 “동양의 심리학자가 믿는다” 또는 “동양주의자가 말한다” 또는 유사한 표현을 계속 반복하는 대신에 긍정적인 진술을 할 것이다. 서양적인 사고에는 그것이 실험을 통해서 입증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반증된 것으로 기각되는 하나의 가설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소개와 함께 우리는 동양의 이론을 요약할 것이다.

모든 것의 원천인 보편적인 본체가 있지만, 매우 순화되어 있고, 미세해서 인간 지성이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다. 그것과 비교하면, 매우 미묘한 향기, 춤추는 태양빛의 발광, 진홍빛 일몰의 영광조차도 거칠고 현세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빛의 거미줄”이다.

물질성을 암시하는 “본체substance”라는 핵심어는 오류어misnomer이다. 그러나 이 단어를 라틴 어원으로 환원해 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즉 “sub”는 아래이고 “sto”는 서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체는 아래 쪽에 서 있는 것 또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sub-stans(본체)”라는 철자 또는 오철자가 보다 더 직설적이고 시사적이다.

이 보편적인 본체가 미세하고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에서 물질보다 훨씬 더 밀도가 높다. 만약 우리가 모든 사실과 가능성에 반하는 가설인 보편적인 본체 밖에서 동인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외적인 동인이 보편적인 본체를 압축시키거나 다른 식으로 외부에서 영향을 미친다면, 본체는 이미 알려진 물질보다 더 밀도가 높을 것이다.

생명, 중단 없는 생명은 본체에 내재하며 그의 영속적인 대응물이다. 생명과 본체는 동일한 하나이고,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하나이지만, 한 실재의 상이한 측면들이다. 생명은 양전기와 같고 본체는 음전기와 같다. 생명은 동적이고 본체는 정적이다. 생명은 활동성이나 영혼이고 본체는 형상 또는 물질이다. 생명은 낳아주신 아버지이고, 본체는 품어주신 어머니이다.

생명과 본체의 이러한 두 측면에 더하여, 세 번째 것도 있다. 생명은 이론적 또는 잠재적인 활동성이고 작업장을 필요로 한다. 본체는 이것을 제공하고 생명과 본체가 결합하면 활동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킨다.

그래서 단일한 실재, 즉 보편적인 본체가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공존하는 이원성, 즉 생명과 본체가 있으며, 그와 동시에 공존하는 삼개조, 즉 생명, 본체, 그리고 이른바 의식 또는 혼의 상호작용이 있다.

현현된 세계 전체는 에너지(그리고 공통 인자인 본체와 의식)로부터 나온다. 극히 작은 모래알로부터 별이 빛나는 하늘의 웅대한 회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프리카의 원시인으로부터 부처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모든 것은 에너지의 산물들이다. 물질은 가장 조밀하거나 가장 낮은 형태의 에너지이다. 영혼은 이와 같이 가장 높거나 가장 미세한 형태의 에너지이다. 그래서 물질은 하강하고 하락한 영혼이고 거꾸로 영혼은 상승하고 영광이 더해진 물질이다.

밀도를 취할 때 에너지는 7 가지 단계 또는 계들을 거쳐서 하강한다. 대개의 경우 그 중에서 세 가지를 구현하는데, 사람은 육체, 감정적 메카니즘 그리고 심체mind-body를 갖게 되어 결국 세 가지 국면에서 기능하게 되거나 세 가지 계에서, 즉 물리계, 감정계 그리고 멘탈(mental: 정신)계에서 깨어 있게 된다. 그는 네 번째 이상의 요소, 즉, 혼, 자아Self를 인식하게 되는 경계에 서게 되고 그 이후에는 그것의 실현을 위해 깨어 나게 될 것이다. 세 가지 상위 계들에 대해서는 이 기본적인 논의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7 가지 계들과 아울러 각 계에는 7 가지 하위계가 있다. 우리는 가장 낮은 물리계의 7 가지 하위 계만을 논할 것이다.

물리계의 세 가지 하위 계들은 모든 학도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고체, 액체 그리고 기체로 예를 들면, 얼음, 물 그리고 증기이다. 그에 더하여 네 가지 더 미세한 계들 또는 매우 다른 4 가지의 에테르가 있다. 이들 네 가지는 잘 알려진 세 가지 하위 계와 각각 공존하고 있으며, 거기로 침투한다.

사람의 육체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도 또한 에테르적 대응물, 즉 에텔체를 갖고 있다. 거친 육체가 음인 반면, 이것은 양이다. 에텔체는 응집 인자이며, 생명과 존재 안에서 육체를 유지한다.
사람이건 어떤 물건이건 에테르적 대응물은 보편적인 본체, 보편적인 생명, 그리고 보편적인 에너지의 성질을 띤다. 그것은 이 모든 것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족적이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보편적인 에너지의 저장소이며, 에테르적 대응물 속에서 살며 움직이고 존재한다. 에너지는 그래서 에테르적 대응물을 통해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의 경우도 참이다. 보편적인 에너지는 그의 에텔체를 통해 작용한다. 그리고 사람이 7 가지 계들에 존재하는 것처럼 에텔체에는 에너지와 7 가지 접촉하는 지점이 있지만, 세 가지 계들만이 활동적이고 네 가지는 휴면 상태인 것처럼 세 가지 에너지 센터들만이 완전히 발전되어 있고 네 가지는 아직 발전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룬다.

서양 과학과 동양 이론을 조화시킬 때, 이 둘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자연히 제기된다.

다름 아닌 아이작 뉴톤 경과 같은 과학자는 의심 없이 에테르라는 보편적인 매질을 받아들인다. 프린키피아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모든 탁한 체들 속에 가득 차 있고 숨어 있는 대단히 미세한 어떤 활기에 관련된 것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활기의 힘과 활동에 의해 체의 입자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견인하고 연속적이라면 뭉친다. 그리고 이웃하는 전기체들은 이웃하는 미립자들을 견인하는 것만큼 잘 반발하며 먼 거리 사이에서도 작용한다. 그리고 빛이 방출되고, 반사되고, 굴절되며 굴곡이 생기면서, 체들을 타격한다. 그러면 온통 동요가 일어나고 동물적 몸의 구성 부분들이 의지의 명령, 이 활기의 파동에 의해 외부적인 감각 기관으로부터 뇌에까지, 그리고 뇌로부터 근육으로 신경의 견고한 통로를 따라 상호 유도되면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들은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전기적이고 융통성있는 생기의 작용 법칙을 정확하게 결정하고 입증하는 데에 요구되는 충분한 실험을 우리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에드윈 어서 버트 박사, 현대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들, p. 275.


위의 인용으로부터 뉴톤은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형상을 밑받침하는 에텔체의 진상을 인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뉴톤이 현 세기 이전에 살았기 때문에 최근 판 브리태니카 백과사전(1926)으로 눈을 돌려 보자. 다음 설명은 “에테르”라는 제목 아래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공간이 단지 기하학적 추상물인지 또는 연구될 수 있는 명확한 물리적인 속성을 갖는 지는 이러저러한 형태로 논의되어 왔다. 물질에 의해 점유되는 부분과 마찬가지로 본체는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어떤 의심도 없다. 그러나 감지할 수 있는 물질이 부재한 공간에서 매개하는 부분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물리적인 속성도 갖고 있으며, 그에 대한 충분한 연구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셈이다.

“이 물리적인 속성들은 감각에 직접 미치지 않고, 그래서 좀 모호하다. 그러나 이것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현재 의문이 없다. 공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물리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공간이 기하학적 추상물 이상의 그 무엇이고 실제적인 현실처럼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거기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당하다. 이름이 중요하지는 않지만, 오래 전에 에테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은 아이작 뉴톤에 의해 채택되었고, 현재도 적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테르라는 용어는 모든 공간에 차 있고, 어디에서나 어떤 분열이나 공백이 없는 진정한 일체이고, 편재하는 물리적인 실재를 뜻하며, 물질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구성한다는 인식이 증가해 가는 추세이다. 물질 자체는 이로부터 변화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래서 에테르는 물질 조각과 조각들 사이에서 이른바 중력을 전달하기 위해 필수적이고 아무리 작고,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물질 조각들 사이에서 방사되는 파동을 전달하는 일반적인 목적을 위해서 훨씬 더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에테르의 속성은 물질로 표현될 수는 없다. 하지만 더 좋은 단서가 없기 때문에 비유를 통해 말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물질이라면,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물체처럼 이름이 붙여져야 하고, 탄성과 밀도로 표시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을 통해 실제로 표현되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높다고 보이는 것처럼 원자 물질이 에테르 속에 있는 어떤 구조라면 에테르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알려진 물질적 본체보다 훨씬 더 밀도가 높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물질은 본체를 이루는 매질 속에서 존속하고 있는 상대적으로 섬세한 구조이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제 13판: 에테르 항목


이 견해는 다른 과학자들이 부연하고 있다.

17 세기의 저작에서 버트 박사가 인용한 캠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 헨리 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가 철학자에게 영적인 본체가 자연에 존재하는지 묻는 것이 필요할까? 이 본체가 몸의 모든 기질, 또는 적어도 동작, 모습, 장기의 위치와 같이 몸의 대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한편...이 본체가 몸을 제거하고 중단시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움직임에 관련되는 것은 무엇이건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작은 부분을 결합시키고, 나누고, 흩어놓고, 묶고 형성시킬 수 있고, 형태에 질서를 부여하고 배치된 것을 회전시키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움직이고 그 회전 운동을 저지하고, 원리에 따라 빛, 색, 그리고 다른 감각 대상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추가할 수 있다... 영적인 본체는 마지막으로 끈도 없고, 갈고리도 없고, 영사기나 다른 도구도 없지만 다만 자신을 적응시켜, 물질을 결합시키고, 나누며, 추진시키며, 동시에 조절을 유지하는 신기한 응집력과 분산력을 갖는다. 그것이 자신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을 분쇄하여 그 자신을 다시 확장하는 것 같은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무어를 논하면서 버트 박사는 계속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무어는 인간 안에 영적인 본체가 있다는 결론으로부터 모든 자연 안에 이와 유사하고 더 거대한 영적인 본체가 있다는 가정으로 자신의 추론을 확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연의 사실들은 인간보다 더 간단한 기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에드윈 어서 버트, 현대물리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들, pp. 131-132.


또한 17 세기 저작에서도 로버트 보일은 동일한 가정을 제시하면서, 에테르의 두 가지 기능을 연속적인 충격에 의해 운동을 전파시키고 자아와 같은 신비한 현상을 발생시키는 매질이라고 생각했다. 보일은 이렇게 말한다.

“우주에 그러한 본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현상들을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몇 가지 실험에서 매우 미세하고, 확산되지 않는 에테르적 본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소에 대한 설명에 대해 여러 가지 정확한 답이 내려져 있다고 해도, 이에 대해 살펴 보지는 않겠다.” 상동, pp. 182, 183.


현대로 다시 돌아와, 윌리엄 버겟 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주는 동물과 식물의 전 영역을 차지하는 조직화된 활기의 세계, 즉 지성과 물질 세계 사이의 연결 고리인 물리적, 생기적, 그리고 지적인 현상의 집합으로 나타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가사의하지만, 물질의 분자 간 운동은 물리적인 것과는 다른, 매질의 성질에서 기원한다. 이것은 생명 없는 물질 운동을 통제하는 일반 법칙을 대체하고, 간섭할 수 없는 법칙에 기원하지 않는 운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동일한 원리에서 힘이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윌리엄 버렛 경, 보이지 않는 것의 입구에서, p. 274.


동양의 가르침은 생기체를 육체와 지성체 사이의 매개라고 간주한다. 그것은 태양계에서 인간의 마음과 우주심의 매개자로 작용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윌리엄 버렛이 말한 “물리적, 생기적 그리고 지성적”인 세 가지 항목을 언급하는 것은 흥미있다

올리버 롯지 경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소통에 대한 견해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순수과학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이 시대의 전선에 서 있다. 그는 말한다.

“원자를 결합시키는 에테르, 즉 몸의 특징적인 구성에 본질적인 결합 에테르는 어떠한가, 어떤 것이 물질 자체만큼 근본적인가?

“우리는 대개 몸의 에테르 측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 기관을 갖고 있지 못하며, 물질을 직접적으로 파악한다. 어린 시절에는 물질만을 파악한다고 해도, 성장하면서 에테르를 추리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파악하기도 한다. 우리는 특징적인 외형이나 어떤 외형적인 몸도 응집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즉 에테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테르는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비물질화된 부분, 즉 변형이 일어나는 부분이며, 잠재적인 에너지의 그릇, 물질 원자들이 들어 있는 본체이다. 물질로 구성되는 몸이 있을뿐만 아니라, 에테르로 구성되는 몸도 있다. 둘은 공존하고 있다.” 올리버 로저 경, 에테르와 현실, pp. 161.162.


그는 히버트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다시 동일한 주제를 거론하고 있으며, 매우 재미있고 시사적인 결론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고 있다.

“빛은 에테르가 미치는 영향의 일종이다. 빛이 에테르와 맺는 관계는 소리가 물질과 맺는 관계와 같다... 모든 시공의 법칙에 따르고, 주로 지상의 에너지 근원인 에너지 법칙에 완전히 지배되며, 물리적 힘이 현현되는 것을 모두 다스리고, 탄성과 견인 등 모든 물질의 속성의 근간을 이루면서 물리학의 계획표 안에 에테르는 적합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수정된 에테르의 전위들이 우주적 건설재라고 입증될 가능성이 있다... 무차별적인 에테르는 대단히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물질적인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그리고 온 공간을 채우는 일체이다. 이원성은 물리학의 도식인 물질과 에테르를 통해서 나타난다.

“모든 동역학 에너지는 원자든 육체적 형태든 이른바 물질에 속해 있다. 운동이나 이동은 그것의 특징이다. 모든 정적인 에너지는 에테르, 수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에테르에 속한다. 에너지는 항상 이쪽에서 저쪽으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즉 에테르에서 물질로 또는 그 역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모든 일이 일어난다.

“이제, 모든 감지할 수 있는 대상은 물질적인 대응물과 에테르적인 대응물을 모두 갖게 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전자만을 감각적으로 알고 있지만, 후자는 미루어 짐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 다른 측면을 파악하는 어려움, 간접적인 추론의 필요성은 우리에게 물질을 알려 주고 에테르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는 감각 기관의 본성에 본질적이고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만큼 생생하고 실제적이며 공존과 상호 작용은 본질적으로 결합하는 그들의 성질이다. 모든 곳에 그리고 언제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에테르 없는 지역은 없다 하더라도 많은 지역에는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가능성과 실재성은 모든 곳에 퍼져 있으며, 현세적인 경험 전체를 완전하게 구성한다.”

보충설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에테르는 사물의 물리적인 틀에 속하며, 그것이 심령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물질이 그런 것처럼 심령적 목적을 보조할 것이다. 테이트 교수와 밸포어 스튜어트 교수는 1875년 이전까지 공간의 에테르에 대한 심령적 의미를 추측했고, 보이지 않는 우주라는 책에서 비판된 종교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다루었다. 그리고 위대한 수리 물리학자 제임스 크러크 맥스웰은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의 제 9판 “에테르” 항 결론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초감각적이고 보편적인 연결 매질이 실제로 존재하며 확실한 기능을 갖고 있다는 신뢰를 표명하였다.” 올리버 롯지 경, 에테르, 물질 그리고 혼, 히버트 저널, 1919년 1월.


펜실배니어 대학의 내분비학 교수인 사져스 박사는 이 보편적인 매질에 대한 신뢰를 다음과 같은 말로 확언했다.

“에테르와 같은 본래의 지성적이고 협동적이며 창조적인 매질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분명해 보인다...

“과학자들이 해석하는 에테르는 모든 조건들을 만족시키고 만족시킬 수 있는, 과학적으로 알려진 유일한 매체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모든 물질에 스며들어 있으며, 파의 움직임에 의해 우주에 제한 없이 모든 공간에 퍼져 있다. 그것은 실제로 태양과 가장 멀리 떨어진 항성에서 오는 빛의 방사 에너지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선’파, 무선 전파, 베크렐 광선, 엑스 또는 뢴트겐선 등을 전달하는 매체이이다.

“에테르는 우주와 지상에서 창조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에테르는 협동과 지성으로 물질을 만드는 것처럼 우주의 에테르는 태양계를 만들고, 그것이 형성하는 모든 화학적 원소들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속성들을 제공한다...” E. de M 샤스 사져스. 의학박사, ScD. LLD, 과학에 의해 제시된 종교의 힘, pp. 152, 153.


옥스퍼드 대학의 조아드 박사는 물질을 활기있게 하는 이 생기력, 즉 ‘생명력’의 활동을 우리에게 그려 주며 생명과 형상 사이의 관계를 보여 준다. 그는 진정 에테르의 대응물과 그를 통해 작용하는, 동양적 에너지 이론에 근접해 있다.

“생명력. 우선 우주가 순전히 물질적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에너지나 목적이 없고 생명이 없는 혼돈, 죽음, 그리고 공허였다. 어떤 단계에서 이 무기적인 우주로, 그리고 어떤 설명되지 않는 근원으로부터 생명의 원리가 도입되었다. 나는 물질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생명을 통해 의도한다. 처음에는 맹목적이고 뒤뚱거리고 순전히 본능적인 충동이나 기분으로 더 높은  의식을 얻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스스로를 표현하려고 한다. 우리는 완전하고 보편적인 의식의 성취라고 할 수 있는, 생명력의 궁극 목적을 이해할 수 있고, 그 결과는 생명과 에너지가 온 우주에 스며듦게 함으로써 보장될 수 있고 이것은 ‘물질’ 세계로서 시작한 것이 ‘마음’이나 ‘영혼’의 세계로서 완성되게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에너지와 생명의 원리가 물질에 주입되고 스며들면서 물질 속에서 그리고 물질을 통해서 일한다. 우리는 그렇게 주입된 물질에 살아 있는 유기체의 이름을 부여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그 목적이 성취되면, 그것을 지원하기 위해 생명력이 창조한 도구 또는 무기의 빛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주 그 자체처럼 살아 있는 각각의 유기체는 전선이 전류를 담을 수 있는 것과 흡사하게 생명에 의해 활기를 받은 물질의 토대를 형성한다.

“생명력은 전능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정복하려는 물질에 의해 제한되고, 그 방법은 실험적이며, 그에 의해 창조된 유기체로 구성된 사람들 속에서 그것이 도달하는 진화 단계에 따라 변화한다. 다른 형태의 존재들은 다른 단계들에서 그 목적에 가장 잘 봉사한다.” C. E. M. 조아드 박사, 마음과 물질, pp. 178, 179.


철학적 주제에 대해서 가장 폭넓게 읽히고 인기있는 작가인 윌 듀런트는 이렇게 말한다.

“물질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것이 기본적이라는 생각을 점점 덜 하게 되고, 육신이 생명과 마음의 외부적 징표인 것처럼 단지 에너지가 외화된 것일뿐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된다... 형상과 힘을 주는 물질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자발성과 생명을 갖는 비물질적인 것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미세하고 숨겨져 있지만, 항상 드러나는 생명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의 궁극적 정수이다... 생명은 우선하며 내적이다. 물질은 논리상, 그리고 의미 상 시간적으로 그와 동시적이고, 공간적으로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본성 상 그것에 이차적이다. 물질은 생명의 형상이고 그의 가시적 성질이다...

“생명은 형상의 기능이 아니고, 형상이 생명의 산물이다. 물질의 무게와 굳기는 원자 내적 에너지의 결과이고 표현이며 몸 안의 모든 근육이나 세포는 주조된 욕망의 도구이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p. 66, 67, 80, 81.


이 책들과 과학자들은 에너지 또는 생명의 생기체의 매질인 에텔체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이 신비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의 모호한 꿈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서양 연구가들에 의해 자연의 사실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의 견해를 요약하면서 이들을 다음과 같이 공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인 몸 뒤에는 에테르 물질로 구성된 주관적인 형태가 있으며, 이는 에너지, 또는 프라나의 생명 원리의 행위자로 작용한다. 이 생명 원리는 혼의 에너지 측면이며, 에텔체를 통해 혼은 형상에 활기를 부여하고, 특이한 성격과 속성을 부여하고 욕망들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마음의 활동을 통해 그것을 지휘한다. 머리를 통해 혼은 몸을 의식적인 활동으로 동력화하고 심장을 통해 신체의 모든 부분들에 생명이 퍼지게 한다.

이 이론은 서양의 물활론과 밀접한 상관성을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현재로써는 활력론(animism: 정령론)이라는 용어로 충분하지만, 인간 의식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발전들 때문에 “물력론(dynamism)”이라는 용어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 완전히 의식적인 존재가 된 사람과 통합되어 작용하는 개성에게, 의식적인 목적과 지도하는 의지를 처음으로 증명하는 때가 되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 언급된 물리적, 감각적, 정신적인 인간 본성의 세 가지 상태들은 인류사에서 비로소 통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휘하는 자아는 조절할 수 있으며, 마음을 통해 생기체 또는 에텔체에 작용하고, 뇌에서 그 접촉점을 갖으면서 그 도구를 완전히 조절하여 표현하고 이어서 창조적인 활동을 지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키설링이 “심오한 존재”라고 부른 것이 출현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문제는 심오한 존재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우리가 인간의 능력과 대조되는 특성으로 그의 존재성을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생생한 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존재가 결정한다고 말하는 경우, 그 모든 언설들에 개별적인 생명이 침투해 있다는 것, 모든 개개의 표현은 개성을 발산한다는 것, 그리고 이 개성은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러한 통찰은 그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실제로 성취될 수 있다. 그것은 마음과 혼을 지닌 존재로써 인간이 그 안에서 자신의 의식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감각 연관으로 표현된다는 사실 덕택에 가능하다. 그는 자유롭게 자신이 즐겁게 여기는 곳은 어느 것이나 중시할 수 있다. 그래서 중시하는 ‘위치’에 따라서 심령적인 유기체는 그 센터를 실제로 변화시켜서 새로운 존재의 센터를 얻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센터가 존재 안에 놓이는지 표면에 놓이는지는 의식의 센터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론적인 연구가 보여 준다면, 필요한 변화 과정을 유도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그 존재를 향상시키는 데에 성공할 수 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성에만 지속적으로 강조를 두고 실제로 자신의 내적 존재와 일치할 것만을 지속적으로 요구받는다. 분명 이 과제는 어려운 것이다. 그 해법은 매우 느린 과정일뿐만 아니라 특별한 훈련 기법을 필요로 한다.” 허먼 키설링, 백작, 창조적인 이해, pp. 180, 181.


메카니즘, 생명과 목적, 의지의 종합으로써 인간이 혼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서양과 동양의 심리학자들이 연합해서 분비샘과 생기체, 그리고 에너지 센터들과의 관련성을 연구하고 이해한다면 크게 촉진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와 관련해서 호킹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

“건전한 정신 건강법의 도움으로 보다 나은 인류의 구체적인 미래를 바라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돌팔이 의사의 시대가 지나간 뒤에 그리고 어느 정도 그들의 도움으로 요가와 같은 수련의 영적인 의미가 서양 심리학의 건전한 요소들과 온전한 윤리 체계와 결합함으로써 자아 완성의 가능성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들 중 어떤 것도 다른 것이 없이는 가치가 많지 않을 것이다.” Wm. E. 호킹, 몸과 자유, p. 75.


에너지 센터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을 자세히 설명하기 전에 두 가지 점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는 혼의 본성에 대한 고찰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세기 동안 이루어진 혼 의식의 위치에 대한 증언을 고찰해 보는 것이다.

제 4장 혼의 본성과 그 위치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혼은 논의와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고 이를 정의해 보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이것은 여러 시대 동안 최고의 지적 관심 거리이자 모든 종교와 철학의 주요 주제였으며, 여전히 그러하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혼에 대한 수 천년의 증언이 실제로 어떤 기초를 갖고 있어야만 하고 자연히 하나의 사실일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히스테리나 노이로제와 병적인 환상과 경험에 기초한 추측을 배제하면 인류에 의해 부정되지 않고 확인을 보증하는, 건전하고 훌륭한 사상가,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들로부터 나온 증언과 추론 구조의 잔여물이 남는다.

리처드 뮐러 프라인펠스 박사는 “혼에 대한 인간의 신앙사를 쓰기 위해서는 인류사 전체를 쓰는 것과 같은 시간이 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리차드 프라인펠스 뮐러, 혼의 신비, p. 24.

이 문제는 아메스 교수가 잘 요약해 놓았다.

“한 쪽에는 자아 또는 혼이 생각과 함께 있고, 다른 쪽에서는 대상, 즉 사람들과 신의 세계가 있다. 수 세기 동안 현자들은 자아와 대상 사이의 틈을 넓히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머리 속에는 사상이, 외부에는 사물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함께 머리 속의 상상들이 외부에 있는 대상에 대해 참이라는 것을 보증할 수 있는 확실한 연결 통로는 전혀 없었다. 이 해협의 양측에 일군의 철학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자아 쪽에 서 있는 관념론자들은 자신들의 앎에서 분리했던 실재에 이르려고 자신들을 확장시켰지만 헛된 것이었다. 반대 쪽에서는 유물론자들이 자아를 무시하거나 그것이 환영 또는 물리적인 세계로부터 유출되는, 숨이나 안개 같은 수반현상이라고 간주했다. 이른바 이원론자들은 실재가 심령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각자 그 위치를 인정하여, 마음이 어떻게 그 자체로부터 기인하면서, 그렇게 다른 객체로 가는지, 또는 객체가 어떻게 그 자체일 수 있고 파악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에 적절히 답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스크라이브너, 아메스 시카고 대학 철학 교수, 종교, pp. 127-128.


혼에 대한 정의를 몇 가지 살펴 보고자 한다. 이들은 수많은 정의에서 취합한 것이다. 정의와 설명에서 매우 분명한 일치가 있다. 웹스터 사전에는 몹시 흥미로운 어구로, 매우 정확하게 동양 지혜의 관점에서 혼을 정의하고 있다.

“개별 생명, 특별히 심령적인 활동에서 나타나는 생명의 본질, 본체, 또는 동인으로 생각되는 실체. 개별적인 실존의 매체, 몸과 본성상 분리되어 있고, 실존상 분리될 수 있다.”

혼의 본성에 대해 다른 해석을 살펴 보면 세 가지 관점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웹스터 사전에 잘 요약되어 있다.

“첫째, 혼은 실체 또는 주체로 다루어지고 특히 사람의 의지적인 사고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몸을 통한 경험의 주체이다. 그것은 마음이 아니고, 사고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둘째, 혼은 마음 또는 의식적인 경험과 동일시된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 관념론자들의 일반적인 이해이다.

“셋째, 혼은 뇌의 작용 또는 기능들의 총합이다. 그래서 피에르 J. G. 카바니스(1757-1808)는 위가 음식을 소화하듯 뇌는 사고를 분비한다고 가르쳤다.”

웹스터는 현재 사고의 적용 경향을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페히너의 이해처럼 혼은 단일한 전체, 즉 단일한 몸의 과정 전체와 결합되는 영적인 과정으로 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관점 사이에 서 있다.” 웹스터 사전, 1923년 판

무엇보다도 불교도가 강조하는 “숭고한 중도”는 다음 세대를 위해 극단적인 입장에서 벗어나는 길을 취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혼이 신의 광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특이하고 유체같은 화합물을 통해 움직인다. 인도인들은 사람의 혼이 불변의 원리, 세계혼, 우주혼anima mundi, 우주 도처에 퍼져 있는 에테르Akasa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이 에테르는 단지 특별한 형태의 에너지를 지휘하는 자이고 본질적인 영혼과 감각적인 물질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매체로 작용할 뿐이다.

동양과 서양 철학을 연결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했던 피타고라스는 동일한 가르침을 주었다. 중국에서 노자는 영적인 혼은 반물질적인semi-material 생기있는 혼과 결합되며, 그러는 가운데 육체를 활기있게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정신적인 능력을 지닌) 혼은 몸과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로마인들은 혼이 영적인 혼, 지성적인 혼 또는 마음, 그리고 생기체로 구성되는 삼개조라고 간주했다. 테오프라스투스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열정의 참된 원리”로 간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스토아 학파는 프노이마(pneuma: 영, 정신)라는 생기의 원리 또는 생기의 발전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유포시켰다... 프노이마의 도입과 함께 인간 개성의 몸, 혼, 영이라는 3원론이 시작되었고, 이것은 신학자들의 사색 속에서 탁월하게 형성되었다. 혼 또는 심령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개념으로... 즉 한편으로는 생리학자들의 활력vital force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 또는 인간의 비물질적 혼으로 분화되었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권, pp. 53-54.


그렇게 스토아학파는 동양 철학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가르침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벌어진 틈에 다리를 놓았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혼의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혼이 세 부분을 지닌다고 믿었다. 하나는 신으로부터 오는 불멸 또는 합리적인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몸에 속하는 식욕과 감각의 자리인 필멸의 동물적 또는 감각적인 부분이다. 세 번째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으면서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의지 또는 영혼으로 이를 통해 이성은 욕망을 정복한다. 식물은 최하위 부분을 갖고 동물은 두 가지 하위 부분을 갖지만, 합리적인 부분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다.

이 이성적인 혼을 그는 본성상 감각에 의해 파악되지 않고 오직 지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비물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필멸의 몸과의 결합은 장구한  생애 동안에 나타나는 사건 중에서 사소한 것일 뿐이다... 플라톤은 그래서 혼과 몸을 기본적으로 구별했다.” 상동. p. 35.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을 생기vital 원리들의 합으로 간주했고 존재가 몸에 대한 것은 시각이 눈에 대한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혼은 육체 내에 있는 진정한 존재였으며, 플로티누스는 그에게 동의했다. 그는 혼을 물질보다 더 높은 존재에 속하는 육체의 살아 있는 지각력으로 간주했다. 터툴리안은 성 그레고리가 했던 것처럼 혼을 생기 원리와 합리 원리,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대부분의 동양 학파들은 혼을 자아, 즉 개체로 간주했고, 기독교 신비주의는 “내면의 그리스도”인 그의 부름과 그의 현존에 의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상태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잠재력이 각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성 바울의 가르침과 연결된다. 기독교와 동양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비교하면 자아, 혼, 그리스도라는 용어들이 동일한 존재나 의식 상태를 내포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하는 주관적인 실재를 가리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혼에 대해 그리스인의 사고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뒤에 영지주의와 마니교에 의해 윤색되었다. 그들은 혼은 빛으로 몸은 어둠으로 간주했다. 빛은 몸을 비춰서 결국 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4 세기의 성 그레고리는 성 바울이 했던 것처럼 몸, 혼, 영이라는 몸의 삼중성을 강조했다. 그는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사상가들의 관점을 자신의 가르침에서 요약하였다.

“혼은 부분을 갖지 않지만, 그레고리는 영적인 능력, 감각적인 능력, 그리고 이성적인 능력을 구분해서, 몸, 혼 그리고 영에 대응시켰다. 이성적인 본성은 몸의 모든 부분들에 동등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상위 본성은 하위 본성을 매체로 사용한다. 물질에는 생기력이 들어 있으며, 생기력에 감각력이 거주하며, 감각력에 이성력이 결합된다. 감각적인 혼은 그래서 매체이며, 육신보다는 순수하고 이성적 혼보다는 탁하다. 그래서 몸과 결합된 혼은 모든 활동의 진정한 원천이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권, p. 88.


5 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파들이 혼에 대해 사고를 전개했다. 스콜라학파, 아랍의 철학자들, 카발라 연구가들, 중세의 철학자들, 그리고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던 일군의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혼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논했지만, 많은 진보를 이루지는 못했다. 왜냐면 모두가 서서히 현대 과학의 출현, 현대 의학의 수립, 그리고 전기 시대의 출현을 향해 점차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자연의 형태 측면과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관심을 끌면서, 혼과 그 본성에 대한 사색이 신학자들에게 점차 이관되었다.

17 세기에 슈탈은 혼을 주제로 글을 썼고, 당시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가르침을 요약했다. 이것을 애니미즘 이론(Theory of Animism: 활력론: 혼이 생명에 원천이라는 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혼이 생명 원리이며, 모든 유기적 발전의 원인이 된다는 학설이다. 애니미즘이라고 하면 자연의 힘들을 인격화하고 숭배했던 진화가 덜된 종족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슈탈이 요약한 애니미즘은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존재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힘과 에너지, 원자에 대한 현대 과학자들의 가르침을 연구하면서 부정할 수 없는 에너지의 세계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 힘들에 의해 움직이는 우주에 살고 있다. 속도, 활동, 활기, 이동, 소리 전달, 전기 에너지, 그러한 많은 말들은 오늘날 표제어가 되어 있다. 우리는 힘에 대해 말하고 생각한다.

슈탈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가르침을 요약했다.

“몸은 혼을 위해 만들어졌지 혼이 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 산물이 아니다... 모든 생명 운동의 원천은 혼이다. 이것은 몸의 기관을 구성하고 있으며, 외적 영향에 대해서 잠시 그것을 유지한다...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질병이 아니라, 심각한 외상에 의해 작동할 수 없게 되거나 더 이상 그것을 작동시키지 않겠다고 선택했기 때문에, 혼이 몸의 기관을 떠나는 직접적인 행위 때문이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69.


버클리의 혼에 대한 정의는 재미있다. 왜냐면 그는 경험을 통해 그것을 간단하고 활동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혼을 두뇌 활동의 산물로써 간주하는 현대의 유물론적 심리학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생명 혼을 부차적으로 다루고 있다.

뮐러 프라엔펠스 박사는 말한다.

“... 우리는 몸을 원자적 메카니즘으로 간주해서는 안되고 광범위한 생명 에너지의 매체로 간주해야 한다. 그래서 ‘몸’이 단순한 물질임을 그치고 ‘활기찬’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또한 계속 말한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우리는 혼의 이해에 이를 가능성을 본다! 인류가 이 개념을 어떻게 형성하게 되었는가 기억해 보자. (의식 없이 ‘혼’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생명이라는 활동의 복잡한 지속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류는 혼이라는 개념을 창조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원시 문화들에서 ‘혼’은 결코 의식과 동일한 것이 아니고 이러한 동일시가 그 후에 철학적으로 은폐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사실상 원시인들이 ‘혼’이라고 이해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활기있는Animated’ 것과 ‘살아 있는alive’ 것은 개념상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마치 ‘활기없는inanimate’ 것과 ‘죽은dead’ 것이 동일한 것과 똑같다. 그리스어 프시케psyche는 결코 의식만을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생명’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와 같이 많은 경우에 독일어 레벤Leben과 젤레Seele도 영어의 ‘라이프life’와 ‘소울soul’이 서로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현대 철학의 주 경향들이 모두 하나가 된다. 후기 유물론자들도 혼은 본체가 아니지만, 심령적 과정이 본체 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것을 ‘움직임motion’과 동등하다고 간주했다. 다른 한편 양심주의자들conscientialists도 심령적 과정을 물리적 운동과 어느 정도 관련지워야 하는 ‘사건events'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이 두 관념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이른바 ‘혼’이라는 것은 확장된 ‘본체’나 생각하는 ‘본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체’가 아니라 매우 복잡한 사건들, 즉 여러 가지 결과들의 연속성으로, 한편으로는 몸의 구조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 학설은 우주를 본체와 의식으로 나누지 않고, 둘 사이에 한편에서는 물질적으로 나타나고, 또 한편으로는 의식이라는 가설의 연결 고리를 설정하는데, 이 점에서 유물론과도 다르고 관념론과도 다르다. 그것은 혼을 본체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의식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의식과 몸은 둘 다 우리에게 의식을 산출하고 또한 원물질에 형상을 부여하면서 이 둘을 모두 포괄하는 제 3의 사물의 결과일 뿐이다. 의식은 보다 심원한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유물론은 몸을 형성하고 그와 함께 혼을 형성하는 형태를 이루는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 보았다. 이 이론은 비록 이원론을 회피하는 것처럼 일방성을 회피함에도 불구하고, ‘일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이 남용되어 왔고,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관념론과 유물론은 둘 다 단원론으로 설명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론은 역학론이라고 불린다. 왜냐면 그것은 혼의 본성을 지도받는 힘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것을 활력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힘이 몸에 형상을 부여하고 의식을 야기시키고, 생명과 동일한 것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리차드 뮐러 프라엔펠스, 혼의 신비, pp. 40. 41. 42.


우리는 이 세 가지, 즉 영혼, 혼 그리고 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암시를 비경The Secret Doctrine에서 얻게 된다.

“우리는 삶을 이른바 물질 속에 나타나는 실존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또는 부정확하게 분리시키면, 사람 안의 영, 혼, 그리고 물질이라고 부른다. 물질은 실존계에 혼이 현현하기 위한 매체이고, 혼은 영의 현현을 위한 상위 계의 매체이고, 이 셋은 모든 것에 퍼져 있는 생명에 의해 종합되는 삼개조Trinity이다.” H. P. 블라바츠키, 비경, I권, pp. 79,80.


혼과 자아는 동양의 문헌에는 동의어로 나온다. 혼, 그 본성, 목적 그리고 실존 양식에 대한 주요 보고서로는 바가바드 기타가 있는데, 이는 동양의 모든 경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더이쎈은 아트마, 자아 또는 혼에 대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만약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 우주의 일반 원리로서 브라만을, 심령적 원리로서 아트만이라는 도식에 따른다면, 모든 우파니샤드 철학의 기본적인 사고는 간단한 등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브라만 = 아트만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 속에 물질화되어 나타나는 힘인 브라만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 유지, 보존,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로 회복시키며, 이 영원하고 무한한 성스러운 힘은 아트만과 동일하며 외적인 모든 것을 탈각한 이후 우리는 내면에서 진실하고 가장 본질적인 존재, 우리의 개적인 자아, 즉 혼을 발견하게 된다. 브라만과 아트만의 이 동일성, 즉 신과 혼의 동일성은 우파니샤드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기본이 되는 사고이다...

아트만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 단어는 바로 ‘자아’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입장이 가능한데, 아트만의 이해에 따라 (1) 물질적 자아, 몸 (2) 개체 혼, 즉 몸으로부터 자유롭고 앎의 주체로써 대상과 대립하고 구분되는 자 (3) 지고의 혼, 주객은 더 이상 서로 구분되지 않거나 인도의 이해에 따르면 대상 없는 앎의 주체이다.” 파울 듀센 의학박사, 인도의 종교와 철학, pp. 39. 94.


어느 동양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유기적 존재들은 자기 결정의 원리를 갖고 있는데, 그에게는 ‘혼’의 이름이 일반적으로 주어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혼’은 내면에 생명을 갖는 모든 존재에 속해 있으며, 서로 다른 혼들은 본상상 동일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면 혼의 생명을 모호하게 하고 방해하는 물리적인 조직 때문이다. 혼이 결합되는 몸의 본성에 의해 다양한 모호성의 정도가 나타난다.

감각 등의 파악과 더불어 각각의 부띠buddhi는 과거의 업보karma에 의해 결정되는 고립된 유기체이며, 그 자신과 특이하게 관련되는 무지(avidya: 무명)를 지닌다. 자아ego는 우리가 경험적 자아의 내면적 생명으로 알고 있는 것을 구성하는, 연속적인 의식 경험의 심리적 통일체이다.

경험적 자아는 자유로운 영혼과 메카니즘, 즉 뿌루샤와 쁘라끄리띠의 혼합이다... 모든 자아ego는 죽을 때 해체를 겪는 조잡한 육체 내에 감각을 포함한 심령적인 장치로 형성된 미세체subtle body를 지니고 있다.” S. 라다크리슈나, 인도 철학, II 권, pp. 279, 283, 284, 285.


어느 인도 경전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생명, 마음, 혼, 영혼이라는 네 가지 아트마가 있다. 혼, 마음, 생명 원리의 대우주적 현현력의 뿌리에 놓여 있는 궁국적인 힘은 영혼이다.’” 라마 쁘라샤드, 자연의 미세한 힘들, p. 121. (쁘라슈노빠니샤드에서 인용))


그러므로 모든 것은 생명력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물질은 영혼 또는 에너지가 가장 낮게 나타난 것이며 영혼은 물질이 가장 높게 표현된 것이라는 동양에서 공식화된 진리에 우리는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그래서 시공간 속에서 특이한 편애와 경향에 따라 종교인, 심리학자, 과학자, 그리고 철학자의 관심을 끄는, 현현한 생명 의식의 다양성이 나온다. 모두가 활기 있는 한 생명의 변화하는 국면을 연구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과 관련되는 차별화, 용어, 그리고 그 요약은 많은 혼란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통일된 실재를 부분으로 분리하는 데에 참여하고 있고, 그렇게 해서 균형 감각을 잃어버리고 일시적으로 분리시킨 특별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러나 전체는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고, 우리가 의식을 총괄하여 진정한 경험에 참여함에 따라 이 실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이 자라나게 된다.

이 경험에 대한 증언은 바로 시간의 밤으로부터 추적될 수 있다. 세계의 계획에 따른 진화적 발전 과정에서 인간 가족이 출현한 때로부터, 자연을 설명하기 위한 신 관념과 인간을 설명하기 위한 혼 관념은 진보적인 발전을 나란히 이루어 왔다. 혼을 다룬 저작은 그 과제의 중대성 때문에 발전이 지체된 상태로 남아 있다.

혼이 발견될 수 있는 위치와 사람의 형상 안에 들어 있는 위치에 대한 추측은 항상 많이 있었다. 그에 대해 제안된 몇 가지 이론들을 여기서 다뤄 보기로 한다.

플라톤은 생명의 원리가 뇌 속에 있으며, 뇌와 척수는 생명력의 조정자라고 주장했다.

스트라토는 뇌의 앞부분의 양미간에 그것이 위치해 있다고 보았다.

히포크라테스는 뇌 안에 의식 또는 혼이 있다고 했고,

헤로필루스는 calamus scriptorius를 혼의 주요 자리로 삼았다.

에라시스트라토스는 소뇌에 혼을 위치지웠으며,그것은 운동의 조절에 관여한다고 말했다.

현대 의술의 위대한 선구자 갈렌은 제 4 뇌실을 인간 혼의 고향이라고 주장했다.

(기원후 3세기의) 히폴리투스는 “송과선을 향해 나가는 영혼에 의해 뇌막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 근처에 영혼의 흐름을 받아 척추로 전달하는 소뇌의 입구가 위치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불가사의한 과정에 의해 이 소뇌는 송과선을 통하여 영적이고 생명을 부여하는 물질을 끌어들인다.”

성 어거스틴은 혼이 중간 뇌실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중세 사상의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아랍의 철학자들은 뇌실을 혼이나 의식적인 생명의 자리로 생각했다.

홀랜더 박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뇌의 위치에 대해 아랍인들이 취했던 강(腔) 또는 동공을 의미하는 특정 세포에 고대 철학자들이 그 기능을 위치지우려고 했던 이유는 기체 상태인 프노이마가 확장할 공간 상의 여유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4 가지 부위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이마 쪽을 향해 있다고 생각된 제1 또는 전방 뇌실은 일반적 의미의 동공이었다. 왜냐면 그로부터 5 가지 외부 감각의 신경들이 뻗어나가 있고, 이들 신경의 도움에 의해 그 속으로 모든 감각들이 결합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제 2 뇌실은 제 1 뇌실과 함께 작은 입구로 연결되어 있는데, 상상적 능력의 자리로써 고정되었다. 왜냐면 다섯 가지 외부 감각으로부터 인상들이 제 1 뇌실로부터 그곳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뇌를 통과하는 두 번째 단계를 이룬다. 제 3 뇌실은 이해의 자리였다. 그리고 제 4 뇌실은 기억에 할당되었다. 왜냐면 제 2 뇌실에서 흡수된 마음의 개념 작용이 집중과 집적을 위해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상 이른바 전실은 두 동공으로 구성된다. 좌측과 우측의 뇌실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제 3 뇌실과 연결된다. 고대에는 이 중실이 몬로의 소공이라고 불렸다. 제 4 뇌관과 세 번째 뇌관은 신호를 주고 받는다. 고대인들은 이 후실을 실비우스의 맥관이라고 불렀다.

측실들은 뇌량corpus callosum으로 지붕처럼 덮혀 있다. 제 3 뇌실은 시상optic thalamus으로 덮혀 있고 제 4 뇌실은 소뇌와 연수 사이에 위치한다... 만약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자극되면, 그 효과는 어쨌든 의식 내에서 결합되고, 이 사실에 대한 지식은 공동 감각중추sensorium commune 또는 공동 감각(common sense: 일반 상식)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감각 센터의 가설에 영감을 주었다. 이것은 혼의 자리로 간주되기도 했다. 뇌의 부분들은 중복되기 때문에 위치 선택이 매우 제한되며, 중심선에 있는 조직들만이 선택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에 의해 송과선이, 그리고 19세기에는 W. B. 카펜터에 의해 시상이, 그리고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연수pons cerebri가 선택된 것과 같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97.


로저 배이컨은 뇌의 센터를 혼이 발견될 수 있는 장소로 간주했다.

루도비코 비베스는 “혼을 의식적인 생명일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생명의 원리로 간주했다. 심장은 그 생명 활동 또는 생장 활동의 센터이고, 뇌는 지성적인 활동의 센터이다.” 상동. p. 119.

중세의 유명한 해부학자 문디누스는 “동물 영혼”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이 동물 영혼이 협소한 통로을 통해 제 3 뇌실로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뇌의 세포질들이 지성의 자리라고 가르쳤다.

뇌의 회질과 백질의 차이를 처음으로 구분했던 베살리우스는 5 개의 뇌실을 설명하여, “세 개의 혼들을 구분했으며,.. 기능이 특히 정신적이었던 동물 영혼의 합인 주요 혼을 뇌에 배당했다.” 버나드 홀랜더 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29.

세르베투스는 뇌의 제 3 뇌실과 제 4 뇌실을 연결하는 통로인 실비우스의 맥관에 혼을 위치지웠다.

De Rerum Natura에서 텔레시오는 “혼은 가장 미세한 형태의 물질, 매우 미묘한 본체로 신경계 내에 갇혀 있어서 우리의 감각에서 벗어나 있다고 가르쳤다. 그 자리는 주로 뇌이지만, 또한 척수, 신경, 동맥, 정맥, 그리고 체내 장기의 외피로 확장한다... 신경계는 혼-생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람의 혼은 동물의 혼과 그 정도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의 물질적 혼에서 벗어나 그 물질적 혼과 결합되는, 신에 의해 직접 각인된 신성한 비육체적 혼을 추정했다.” 상동, 132.


윌리스는 정신성, 활기, 기억 등 혼의 다양한 기능을 뇌의 다른 부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뵈쌍Vieussens은 centrum ovale에 혼을 두었다. 스웨덴보르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혼에 대한 육체 감각의 왕도는... corpora striata를 통한다... 의지의 결단도 모두 그 길을 하강할 것이다... 그것은 올림푸스의 머큐리이다. 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혼에 알려지고, 거기에는 혼이 몸으로 내린 명령도 담겨 있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86.

코르포라 스트리아타는 전두엽과 후두엽 바로 아래에 있는 한 쌍의 거대 뇌신경절이다.
홀리스는 “감각과 운동은 둘 다 뇌수질에서 동력을 받기 때문에 이것이 혼의 자리이다,”라고 결론을 맺었고

챨스 보넷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감각들은... 우리가 부여받은 것... 뇌 속 어딘가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으로 비밀스러운 교신을 한다. 교신들이 일어나는 부분은 혼의 자리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혼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 의해서이고 몸으로 다른 존재들에 작용한다. 이제 혼은 신경에 의해서만 작용한다.” 상동, p. 190.

반면 폰 좀머링은 혼의 자리를 대뇌의 유동체에 위치지웠다.

심리학자 W. B. 카펜터는 시상을 혼 생명의 자리로 간주했다.’ 이 다양한 저자들의 결론은 위에 인용된 홀랜더 박사의 저작에서 가져 온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물활론자이자 물리학자이고 골상학의 창시자 프랜시스 죠셉 겔의 시대로부터 혼의 위치는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조명을 받게 되었고, 성격, 윤리, 그리고 이른바 인성학(Ethology: 품성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뇌와 심적 기질들과의 관계가 연구 주제로 되었고, 오늘날은 분비선을 포함시켜서 이러한 관념을 연구 과제로 수행해 나가고 있다. 심리학의 현대적이고 유물론적 원리들은 일시에 낡은 생기론적, 물활론적, 그리고 신비적 관념을 대체해버렸다. 그렇지만, 유물론적 접근법은 대단히 큰 가치가 있다. 그것은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그것은 우선 균형을 유지시켰고, 지식 구조를 만들었으며, 자연적 사실에 기초했으며, 예언적 신비가의 오류와 결론, 그리고 종교 신학자들의 미신들을 상쇄시켰다. 둘째, 현대 심리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마음, 그리고 그 힘의 연구를 통해, 그리고 크리스챤 사이언스와 신사고와 같은 조직의 영향을 통해 이뤄진 결론에 의해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가교가 건설되었다. 이제 혼, 마음 그리고 뇌의 삼중성triplicity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이 납득되고 이해될 수 있다. 바람직스럽지 않은 모습들을 제거한 뒤에 (그리고 현재 몇 개가 있다) 서양 과학과 협력하여, 빛은 다시 동방에서 비칠 것이며 새로운 존재 상태로, 권능의 더 완전한 실현으로 인간 혼의 본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르도록 인류에게 길을 제시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브라우닝이 이 통합된 인간에 대해 이해한 것이 진실임을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세 혼이 한 혼을 구성하네, 첫째는 지혜,
한 혼이 신체 부위 각각으로 모두로 이뤄지니,
그 속에 들어서, 일하는, 행위자,
땅을 향유하다가, 그것이 끝나자 사람은
하락하네, 허나 충고 따라 위를 향해
안으로 자라고, 다시 안으로 자라나
다음 혼까지, 뇌 속에 자리하네
첫째를 이용하니 합하여 쓰는구나
느끼고, 사고하고, 의지하는, 지자(知者)
때맞춰 방향을 위로 돌리고
안으로 자라고, 다시 안으로 자라나
마지막 혼에 의해, 모두 첫째를 쓰는구나,
지원 받든 받지 않든 자존하고,
사람의 자아를 구성하는 존재자
전자(前者)에 의지하여 놀게 하고,
첫째가 끝내면 위로 향하여,
신은 유지하고 지지되니, 끝나는 것은 인간
영적 교통의 경외로운 순간 위를 향해,
어느 장소도 필요 없이, 그에게로 돌아가니.
행위자, 지자, 존재자, 세 혼들에 한 인간.”

로버트 브라우닝, 사막에서의 죽음. (로버트 브라우닝, 사막에서의 죽음.)

제 5장 혼, 에테르 그리고 에너지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

“그 미세함 때문에 모든 곳에 퍼져 있는 에테르는 접해 있지 않는 것처럼, 몸 전체에 위치한 혼도 접해 있지 않다.
하나의 태양이 이 모든 세상을 비추는 것처럼, 몸 안에 거주하는 그는 모든 장field을 비춘다.
지혜의 눈으로 장과 장을 보는 사람을 분간하는 자,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존재의 해방을 분간하는 자들은 지고의 존재에게 간다.” 바가바드 기타, XIII, pp. 32, 33, 34.


혼과 그 표현, 즉 물리계에서 에텔체 또는 생기체를 다루는 동양의 문헌은 이 책 뒤에 있는 불충분한 참고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광범위하다. 우파니샤드와 뿌라나스 도처에는 이 가르침을 다루는 수천의 문구들이 흩어져 있다. 가장 중요한 정보원들 중에서 두 가지를 든다면 그것은 쉬브-삼히따와 샤챠끄라 니루빠남이다.

존 우드로프 (아더 아발론) 경은 이 동양의 가르침과 혼의 발전 기법에 대한 지식을 서양에 전하려고 책을 통해 많은 일을 했다. 그는 그것을 하나씩 발표하는 형태로 대중이 가장 위험한 과학을 지나치게 빨리 이해하지 않도록 보호했다. 서양 의학과 과학에 기초하여 어떤 인도 철학자가 쓴 신비한 꾼달리니(배산트 G. 렐)라는 소책자도 진정 가치있는 것이다.

이 과학의 위험은 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어떤 기법을 앎으로써 사람이 생기체를 통해 작용하는 자신의 본성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의 의사들은 사람과 관련된 에너지 요소들을 점점 더 인식하고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들이 그런 것처럼 육체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지니는 전기적 성질은 필연적인 인식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서양 과학자들은 에테르와 그 운동을 인식한다. 동양의 스승들은 아까샤와 뿌라나에 대해 말한다. 양자는 모두 모든 형상에 스며 있는 활력있는 생명을 다루고 있고 그것은 에테르의 일관성, 감각성, 그리고 실존의 결과이다. 께노빠니샤드의 다음 구절은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 줄 것이다.


“위대한 힘은 비현현이요, 비형상이며, 빛을 주는 하나의 수여자, 그로부터 소리를 내는 에테르(아까샤)를 세상에 냈고, 그로부터 감지되는 에테르를 탄생시켰네.
감지되는 에테르로부터 빛나는 에테르, 이로부터 맛보는 에테르, 그로부터 냄새나는 에테르가 생겨났네. 이들은 다섯 에테르이고 오중(五重)으로 확장했네.
이들로부터 우주가 나왔다네. 이들에 의해 우주가 연속되네, 이들 안으로 그것은 사라지네. 이들 중에서 그것은 자신을 다시 나타낸다네.” 께노빠니샤드, “자연의 미세한 힘”에서 라마 쁘라샤드에 의해 인용


고대 인도 문헌들에 나오는 빛나는 에테르와 현대 과학자들의 광파 사이에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라마 쁘라사드는 자연의 미세한 힘이라는 매우 흥미있는 책에서 미세한 물질의 네 가지 상태를 이렇게 나열했다.

                1. 뿌라나 또는 생명 물질
                2. 심령 물질
                3. 정신 물질
                4. 영 물질

그리고 이 네 가지는 아까샤를 표현 매질로 사용하는 에너지의 성질들이다. 동양서를 연구하면 우리는 힘의 주관적 세계에 의해 존재하고, 활기를 얻는 물질 세계의 그림을 얻게 된다. 이는 에테르(아까샤)를 운동장으로 사용하면서 현상계에서 모든 형태, 성질 그리고 차별화를 일으킨다.

'뱀의 힘The Serpent Power'으로부터 뽑은 다음의 인용은 물질과 에테르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을 제시한다.


“최신의 과학적인 연구는 이 원래의 물질이 과학적인 ‘물질’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질량, 무게, 관성을 갖지 않는다. 물질은 현재의 가정에 따라, 감각에 의해 알려진 ‘물질’과는 매우 다른 것에 의해 탈물질화되었고, 제거되었다. 이 궁극적인 물질은 운동 상태에 있는 에테르라고 불린다. 현재의 과학적 가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과학적인 ‘물질’이라는 것은 없다. 만약 그렇게 보이는 것이 있다면, 환상Maya과 같은 샥띠Shakti의 움직임 때문이다. 우주가 만들어낸 궁극적이고 가장 단순한 물질적 요소는 ‘에테르’라는 어떤 본체의 움직임이고 이 속에 있는 것이다. 이 물질의 움직임들은 실재적 관점으로부터 ‘물질’이라는 개념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물질은 그래서 그 형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 궁극적인 원소는 일종의 최종 분석이며, 다양한 종류의 물질의 차이들은 궁극적인 입자의 다양한 운동과 그 연속적인 결합에 의존한다. 그러한 기초적인 통일성을 얻게 되면, 한 형태의 물질이 또 다른 형태로 이전할 수 있게 된다.” 아더 아바론(존 우드로프 경), 뱀의 힘, p. 89.


또 다른 책에서 아더 아발론은 말한다.

“첫째로, 모든 가능한 힘들이 추가되어도 ‘물질’은 빛의 현상과 같은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며, 따라서 ‘에테르’라는 물질이 존재한다는 하나의 과학적 믿음에 이르게 된다. 우주를 채우는 매질은 빛, 열, 전기, 그리고 아마도 천체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인력처럼 먼 거리에서의 운동의 방사를 파동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에테르는 ‘물질’ 이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다르며, 보통의 물리적 의미에서 감각 기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물질’과 비교해서 설명하려고 할 때, 어쩔 수 없는 지식의 불명확성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에테르의 실재를 가정하면, 그 속에 잠겨 있는 ‘물질’ 체들은 그 안에서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사실 인도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아까샤 따뜨바(Akasha Tattvas: 아까샤의 성질)의 파동의 특성은 다른 따뜨바와 그 파생물이 존재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순전히 ‘과학적인 서양의 이론들은 그 질료인 ‘물질’과 ‘에테르’로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해 왔다.” 존 우드로프, (아더 아발론) 샥띠와 샥따, p. 167.

“많은 사람들이 마야(환상)라는 관념을 비웃었고, 여전히 이를 비웃는 사람도 있다. 만약 물질이 충분히 확고하고, 영원하며, 실재하지 않는다면 어떨 것인가? 그러나 과학에 따르면 (물질적 존재로써) 우리는 무엇에 기초해 있는가? 그 답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 가변적인 형상으로 물질화되는 대단히 빈도가 낮은 무형상의 에너지라는 것이다... 나의 친구가 견고한 물질(빠르티바부따)의 ‘껍질’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 미세함이 발전할 때까지 점차 더 거칠어지는 과정이 계속된다.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이것은 충분히 감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고 어떤 방사하는 본체 속에서 우리의 눈 앞에서 분열한다.” 존 우드로프 경 (아더 아발론), 샥띠와 샥따, p. 170.


인도의 혼을 보여 주는 많은 내용을 서양에 전달한 비베카난다는 말한다.

“인도 철학자들에 따르면, 온 우주는 두 가지 물질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아까샤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는 편재하는 것이다. 형상을 갖고 있는 모든 것, 취합의 결과인 모든 것은 이 아까샤로부터 진화된다. 공기로 되는 것, 액체로 되는 것, 고체로 되는 것이 바로 아까샤이다. 태양, 지구, 달, 별, 혜성이 되는 것이 바로 아카샤이다. 몸, 동물의 몸, 행성, 우리가 보는 모든 것, 감각될 수 있는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까샤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파악될 수 없다. 그것은 미세하기 때문에 모든 일반적인 지각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거칠게 되어 형상을 지니게 될 때에만 목격될 수 있다. 창조가 시작되었을 때, 이 아까샤만 존재한다. 주기의 끝에 고체, 액체, 그리고 기체는 모두 다시 한번 아까샤로 녹아 들었으며, 다음 창조는 이와 같이 이 아까샤로부터 나온다.

어떤 힘에 의해 이 아까샤가 우주를 형성하는가? 뿌라나의 힘에 의해서이다. 아까샤가 우주의 무한히 편재한 물질인 것처럼 이 뿌라나는 무한히 편재하는 이 우주의 현현력이다. 한 주기의 처음에 그리고 마지막에 모든 것은 아까샤가 되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힘들은 용해되어 뿌라나로 다시 들어간다. 이 뿌라나로부터 다음 주기에 에너지라고 부르는 모든 것, 즉 힘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진화된다.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뿌라나이다. 중력으로, 즉 자기magnetism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뿌라나이다. 몸의 움직임으로, 신경 전류로, 사고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뿌라나이다. 상념으로부터 최하위 물리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뿌라나의 현현일뿐이다. 정신적인 것이건 물리적인 것이건 용해되어 그 원 상태로 되돌아 간 때 우주의 모든 힘의 총합은 뿌라나라 불린다...” 스와미 비베카난다, 라자 요가, pp. 29. 30.


현대적인 작가, 라마차라까는 말한다.

“여러 가지 이론들이 이름이 지닌 위대한 원리를 오해하지 않도록, 우리는 그 원리를 ‘뿌라나’라고 부를 것이다. 이 말은 ‘절대적인 에너지’를 뜻하는 산스크리트 단어이다. 많은 오컬트 권위자들에 따르면 힌두이즘의 ‘뿌라나’는 에너지 또는 힘의 보편적인 원리이고, 모든 에너지나 힘은 그 원리로부터 파생된 것이거나, 그것의 특별한 형태로 그 원리가 현현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아메바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식물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부터 동물의 최고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 형태에서 발견된다. ‘뿌라나’는 편재해 있다. 그것은 생명을 갖고 있는 모든 것 속에서 발견된다. 오컬트 철학은 생명이 모든 사물 속에, 즉 모든 원자 속에 있으며, 무생물의 경우에도 생명이 덜 현현한 것일 뿐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뿌라나’는 모든 것 속에,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혼 속에 있는 신의 일부이고, 그 주변에 물질과 에너지를 모이게 하는 에고와 이 ‘뿌라나’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뿌라나’는 그 물질적 현현 속에서 에고에 의해 사용되는 에너지의 한 형태일 뿐이다. 에고가 몸을 떠나면, 더 이상 통제를 받지 않는 ‘뿌라나’는 몸을 형성하는 개별적인 원자, 또는 원자 집단의 질서에만 반응하고, 몸이 원래의 원소들로 해체되고, 분해되면, 각 원자는 그와 함께 새로운 결합을 형성시킬 수 있는 충분한 ‘뿌라나’를 취한다. 사용되지 않은 ‘뿌라나’는 자기가 나왔던 거대한 우주적 저장고로 다시 되돌아 간다. 통제받는 에고와 함께, 응집이 생겨 원자들은 에고의 의지에 의해 결합된다.

“‘뿌라나’는 일반적인 원리를 지시하는 이름으로 그 원리는 중력, 전기, 행성의 회전, 그리고 생명의 형태 중 최고로부터 최저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서나, 모든 운동, 힘 또는 에너지의 본질을 이룬다. 그것은 모든 형태를 띠는 힘과 에너지의 혼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생명을 동반하는 운동 형태를 만든다.” 요기 라마차라까, 숨의 인도 요가학, pp. 16. 17.


이 뿌라나는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일반적인 생명 원리이고, 이른바 인체의 에너지나 생명은 어떤 특이한 인간 혼이 지녀온 보편적 원리가 분화된 것이다.

우주 내에 아까샤 (에테르)를 이용한 에너지들은 시대를 초월한 지혜에 따르면 세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뉜다.

1. 포하뜨, 이는 기독교인들이 영으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존재 의지이며, 신의 결정적인 생명 원리이다. 이 신은 우리가 모든 형상의 총합이고 모든 의식 상태의 총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신성한 목적이며,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2. 뿌라나, 이는 의식 원리의 활동, 즉 기독교의 혼과 유사하다. 이 뿌라나는 영혼이나 생명, 그리고 물질이나 본체의 결합 결과이고, 신성한 목적을 수행하는 결합, 활기 그리고 예민함을 산출해낸다.

3. 쿤달리니, 이는 인간 형태와 관련될 때, 물질 자체에 잠재하는 힘이다. 이것은 원자의 통합적 생명이다. 그 원자가 경험의 소주기에 참여하는 어떤 형태와도 분리되어 있다.

샥띠는 힘 또는 에너지이다. 아더 아발론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도대체 샥띠란 무엇이고, 사물 안에는 무의식의 원리가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샥띠는 ‘할 수 있다’ ‘힘을 갖는다’는 ‘샥’이라는 어원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어떤 활동에 적용될 수 있다. 탈 수 있는 힘은 불의 샥띠이다. 이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형태의 힘이 나오는 근원적인 샥띠(아드야 샥띠)로 환원될 수 있다.” 존 우드로프 경 (아더 아발론), 샥띠와 샥따, p. 207.


그러므로 이 세 형태의 에너지는 하나의 보편적인 생명의 국면들이다. 에테르를 매체 또는 활동장으로 이용하며 그로부터 모든 객관적인 형상들을 만들면서 태양계를 통해 스스로 표현된다. 그 과정은 인도 철학에 따르면 사람에게서 반복된다.

육체는 세 번째 형의 에너지의 구성 부분들 또는 원자들로 표현된 것이며, 그 원자 에너지의 총합을 꾼달리니라고 한다.

“말하자면 나머지 감각 모두가 저장된 센터가 물라다라 차끄라이고, 또아리를 튼 활동 에너지가 꾼달리니, 즉 ‘또아리 튼 것’이다.”

그것은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거대 우주적 힘(샥띠)의 개별 육체적 표현이다.” 배산트 G. 렐, 신비한 꾼달리니, p. 40.


육체 그 자체를 인간계의 몸 속에 있는 한 원자로 보면, 척추 기저 센터에 있다고 상정되는 꾼달리니 에너지는 본성 상 양의 원자핵일텐데, 이는 전자로 간주되는 다른 원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생기체, 또는 에텔체는 이른바 뿌라나라는 감각적인 활기를 부여하는 이원성인 생명 혼이 표현되는 매체이다. 이 이중적 에너지는 생기체에, 그에 따라 육체에도 두 가지 양의 센터를 갖고 있다. 하나는 감정과 감각이 집중된다고 주장되는 심장에, 다른 하나는 마음과 영적 의식이 표현되는 머리에 있다.

렐 박사는 “적절한 뿌라나는 후두와 심장 기저 사이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우빠니샤드의 사상가들은 머리보다 가슴(heart: 경우에 따라 심장이라고도 옮긴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거기에 생명의 숨이 거주한다. 다섯 개의 뿌라나와 아울러 눈, 귀, 말, 마음도 가슴에서 나온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므로 가슴은 의식적 생명의 중심이기도 하다. 잠잘 때 혼의 기관들은 가슴에 머물고, 또한 죽을 때 그들은 거기에 모인다. ‘가슴을 통해 우리는 형상을 인식한다,’ 가슴을 통해 우리는 믿음을 인정하고, 아이를 낳고, 진실을 알고, 말 또한 거기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가슴이 무엇에 기초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덧붙이면 화를 내며 대답을 거절한다. 그러나 기관들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은 가슴에 기초해 있고, 그것의 지지를 받는다. 가슴이 브라만이라는 실제적인 정의를 제외해도, 그곳은 혼의 경험적인 고향이고, 그래서 브라만의 고향이다. ‘여기 가슴 안에 한 동공이 있어, 그 속에 우주의 주님, 우주의 지배자, 우주의 장(長)인 그가 거주한다.’ 가슴은 흐리다얌hridayam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가슴 안에’ 사는 ‘자는 그’이기 때문이고 (hridi ayam, Chand. 8.3.3.) 한톨의 쌀이나 보리처럼 작다. 즉 가슴에서 창조된 것의 자아로써 뿌루샤(purusha: 보는 자)는 몸 가운데에서 1 인치 높이로 거주한다.” 폴 듀센 박사, 우빠니샤드의 철학, pp. 286, 287.


“이처럼 후기 우빠니샤드의 수많은 문구들은 ‘가슴의 동공에 들어 있는’ 브라만을 경배한다. 우주의 아트마와 내면의 아트만의 일치는 송가. 6.8-16의 따뜨 뜨밤 아시(tat tvam asi)로 표현되고, 또한 이의 모방일 가능성이 있는 브리흐Brih. 5.4의 ‘진리 안에서 이것은 그것이다’라는 뜻인 에따뜨 바이 따뜨(etad vai tad)로도 표현된다. 동일한 공식이 시구에 덧붙여진 산문 구절 속에 있는 까트 4. 3-6. 1에서 12 번 발견된다. 까트 5.14에 따르면 최고의 지복은 이 사고의 의식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서 까트. 4. 12-13만을 인용한다.

        1인치 높이로, 여기 몸 속에
        뿌루샤는 사는구나,
        과거와 미래의 주님
        그를 알고 있는 자는 더 이상 초조하지 않고,
        진리 속에서 이것은 그것이다.

        연기 없는 불꽃처럼, 1 인치 높이로
        뿌루샤는 크기 안에 있고,
        과거와 미래의 주님
        그것은 오늘의 그이고 또한 미래의 그라네,
        진리 속에 이것은 그것이네 폴 듀센 박사, 우빠니샤드의 철학, p. 170.


여기서 푸루샤가 연기 없는 불꽃에 비유되는 것처럼 S'vet. 6. 19에 나오는 이 문구의 모방 구에는 그것이 연료를 소모하는 불에 비유된다. 반면 S'vet5.9에서는 내면의 아트만과 우주의 아트만 사이의 대조가 극단적으로 이뤄진다.

        머리카락 끝을 백번 쪼개고
        그로부터 100분의 1을 취해서
        혼의 크기를 판정하는 것
        그것은 불멸로 간다.

아트만이 가슴에 있는 연기 없는 불꽃이라는 설명은 요기 우빠니샤드에서는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한 혀의 모습으로 발전되었는데, 이것은 마한. 11.6-12인 초기의 일이었을 것이다. 폴 듀센 박사, 우빠니샤드의 철학, p. 171.


문헌들은 자아인 아트만이 가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로부터 그것은 혈액을 통해 생명 원리로 표현되고 있다. 혼의 본성, 또는 이성적 마음과 자아 의식적 개인은 머리에서 표현되고 그 위치에서 신경계를 다스린다.

“최고 센터들은 대뇌피질에 위치하고, 여기에서 반응과 감각의 지식이 현현된다는 것이 이제 증명되었다. 이 센터들은 수용하고, 즉 지각하고 있고, 지시하고, 즉 감시하고 있고, 뇌의 양쪽 반구에 있는 기초 신경절basal ganglia이라는 두 가지 큰 융기부 안의 보조 센터들을 갖고 있다. 이들은 시상과 corpus striatum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 것은 주요 감각 센터에 보조적이며, 둘째 것은 대뇌피질에 있는 주요 운동 센터에 보조적이다. 일반적으로 보조 운동 센터들은 의지에 의해 어느 정도는 조절된다... 요기는 시상에 있는 부수적인 신경 센터들에 관심이 있다. 시상의 일반적인 기능은 몸의 모든 부위로부터 감각을 받아들여, 척추를 통해 중계하여 주요 센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뇌에 있는 최고 반사 센터이고 모든 느낌이 이곳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우다나뿌라나Udanaprana라고 불린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척수 안에서 마지막으로 코 뿌리 높이에 있는 벌브Bulb라는 척수 부분으로부터 중계된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다나뿌라나를 의식적으로 조절하여 들어가고 나가는 모든 감각을 요기는 제압하고, 조절하여야 한다.” 배산트 G. 렐, 신비한 쿤달리니, p. 70.


슈리니와사 이엔갈Srinivasa Iyengar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만들었는데, 조잡한 허무주의 학파를 제외하고는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1. 인간은 의식, 마음 그리고 몸의 복합체이다.
2. 아트마(자아)는 의식의 본성이며 변할 수 없다.
3. 마음은 비록 내부 기관이기는 하지만, 물질적이며 아트만과 다른 것이다.
4.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개성적이고,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5. 이 에너지는 뿌라나이며, 마음과 물질 사이의 매개자이다.

“인도 철학은 뿌라나를 우주의 기본적인 에너지이고 운동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뿌라나는 뿌루샤로부터 오거나, 그로부터 시작하는, 그리고 물질에 작용하는 힘으로 이해된다.(영혼의 국면-A.A.B.)”

“동물의 에너지는 그것이 근육을 떠나 외부 대상에 작용할 때까지 모두 신경 에너지이다. 이 신경 에너지가 뿌라나라고 불린다. 서양 과학은 백 년 동안 기계적인 운동 형태로 신경 에너지를 설명하여 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동양 철학은 그러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뿌라나로부터 기계적인 운동을 설명하거나, 의식에 수반되는 에너지로부터 기계적인 움직임을 끌어낸다.

뿌라나는 사이키콘Psychikon 심령, 즉 그리스 철학의 동물 영혼에 상응한다. 이것은 영혼과 물질 사이를 매개하고, 그들을 서로 관계맺게 하는 부류이다.” 슈리니와사 P. T. 이엔갈, 인도 철학의 개요, pp. 58.59.


아더 아발론은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혈액, 심장, 그리고 숨과 같은 육체의 다양한 부분을 ‘혼의 자리’ 또는 생명의 자리로 지정해 왔다. 바이딕Vaidik 체계는 가슴을 의식의 주요 센터로 위치지우고 있는데, 그의 견해는 ‘마음에 세기다(take it to heart)’와 ‘암기하다(learn by heart)라는 어구에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삐따의 5 가지 기능 중 하나이자, 가슴에 위치한 사다까는 율동감 있게 심장의 수축을 지속함으로써 인식 기능의 수행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인도 생리학자들이 인식의 자리로 심장을 거론했던 경향이 있었던 것은 심장의 구조를 보는 이런 견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딴뜨라에 따르면, 비록 심장도 뿌라나의 그 국면에서 지바뜨마, 또는 육화된 영혼의 자리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의식의 주요 센터들은 두뇌-척추의 차끄라들과 상부의 뇌(샤하스라라)에 존재한다.” 아더 아발론(존 우드로프 경),뱀의 힘, p. 3.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이 인간의 현상을 설명한다. 진화가 진행되면서, 물질적인 형태의 생명을 위해 양의 센터 또는 핵은 척추의 기저에 위치해 있고, 감각적이고 의식적인 인간 생명을 위한 양의 센터는 가슴 안에 있지만, 마음과 영적인 생명 원리에 대한 양의 센터는 머리에 있다는 것이 발견되고 입증될 수 있다.

인간 내부의 센터들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의 도식과 기법은 모두 증가하는 뿌라나 또는 생명 혼 에너지가 발휘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면 (육체의 자동 제어를 통해서) 영적 인간, 혼의 유산인 혼의 권능과 영적 성격을 입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방법과 수행의 목적은 혼과 의식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며, 두 가지 하위 에너지와 물질, 감각적 정신적 본성을 세 가지 에너지들 중에서 최고인, 영적인 생명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성취되면 영적인 생명 원리는 그 메카니즘을 최고 상태의 완전함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혼은 활기를 얻어 어떤 장애나 한계도 알지 못하게 된다. 물질은 하늘로 상승하게 되어,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하는) 물질의 에너지인 쿤달리니 불이 결국 척추의 기저에서 머리 위로 그 위치가 올라간다고 인도인들은 가르친다. 이것은 동정녀 성모가 하늘로 승천하여 자신을 아들인 그리스도, 즉 혼 옆에 자리하게 한다는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과 뇌 의식 속에 자리잡은,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모든 자연인의 에너지를 통제하는 혼 또는 자아에 의해 의식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가 또는 결합으로 신비적 경험일 뿐만 아니라, 생기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하나됨(at-one-ment: 속죄)이다. 이것은 완전한 인간, 즉 물리적, 감각적, 그리고 정신적, 그리고 보편적인 혼과의 의식적 결합이다. 렐 박사는 말한다.

“‘요가’라는 말은 결합 또는 융합한다는 ‘유가’라는 어원에서 파생된 것이다. 용접할 때 동일한 두 금속 조각이 열처리와 망치질에 의해 하나로 되듯이 인도 철학의 요가에서도 보편적 영혼 ‘빠라마뜨마’의 일부인 육화된 영혼 ‘지바뜨마’는 특정한 육체적 정신적 훈련에 의해 보편적인 영혼과 하나가 된다.

요가는 상위 파동에 반응하는 마음의 능력을 고양시켜 우주에서 우리 주변에서 진행되는 무한한 의식적 운동을 지각, 파악, 그리고 흡수하는 과학이다.” 배산트 G. 렐, 신비한 꾼달리니, pp. 13.14.


르네 궤농은 이 결합의 결과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다.

“우리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해방 또는 결합은 똑같은 것으로 ‘상위에서’ 모든 상태들을 포섭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한 실현(사다나sadhana)이고, 존재의 온전함이기 때문이다. 이들 상태가 실제로 현현되는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이상학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영원하고 변함 없는 가능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의 단순한 효과에 의해 여러 가지 상태의 주인인 요기는 활기를 주는 호흡(뿌라나) 없이 다른 상태에서 벗어나 오직 한 상태와 관계한다. 도구가 많이 있는 것처럼, 그는 등불 하나가 심지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수의 형상에 활기를 줄 수 있다.’ 아니루따는 이렇게 말한다. ‘요기는 우주의 원초적인 원리와 직접 연계되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차적으로) 공간 전체, 시간 전체, 그리고 사물 전체와 연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 현현과, 그리고 더 상세하게 말해 그 모든 변용된 인간 상태와 직접 연계되어 있다.

 

제 6장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들

동양의 가르침에 따르면 생기체 또는 에텔체는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으며, 생명 원리인 뿌라나의 지휘자 역할을 하고, 물질에 활기를 불어넣고, 형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는 전장에서 살펴 보았다. 또한 생기체는 혼이라는 자연의 지각 원리를 구체화하는 혼의 표현 매체이다.

혼의 주요 특성은 의식이다. 생명으로써 혼은 “가슴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성적인 영적 의식은 “양미간에 있는 옥좌에 앉아 있다.” 르네 궤농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러므로, 물리적 관점에서 생명 센터에 거주하는 것은 에테르이고, 심령적 관점에서 그것은 ‘살아 있는 혼’이다. 현재 우리는 개별적인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나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원리적이고 무조건화된 ‘자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정 ‘우주 영혼’ (아뜨마)이고, 실제로 브라마, ‘지고의 지배자’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이 센터를 브라마-뿌라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이렇듯 내면의 인간으로 간주되는 (이와 아울러 이것을 모든 존재 상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브라마는 뿌루샤라고 불리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개별성 안에 안식하거나 머무르기 때문이다... 적절하기도 하고 말 그대로 한 마을(뿌리-샤야)이라는 단어 속에서 뿌라pura가 마을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르네 궤농, 인간과 그 생성, pp. 44.45.


생명력은 육체와 접하는 일곱 센터를 갖고 있다.
이들 일곱 생명력 센터는 생명력을 전달하고 혼이 머무는 지점이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실존을 유지하고 그것에 활동을 일으킨다.

드리머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사람의 센터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의 우빠디upadhi의 핵 속에 각각 반영된다. 생명파라고도 불리는 신성 에너지에 의한 물질의 형성 작용을 연구해 보면, 물질이라는 객관성의 한계 속으로 자아를 투사하여 특정한 성질이 어떻게 물질로 나투어 이른바 따뜨바tattvas로 발전하는 지를 알게 될 것이다. 각각의 따뜨바는 혼을 불어넣은 생명에 대해 탄마뜨라, 또는 신성한 의식의 변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따뜨바에서 우리는 중심적 생명으로서 신 의식을 지니는 반면, 저항의 관념은 외벽을 형성한다.”

“자아는 현현력에 의해 각각의 계 속에서 자신의 대행자뿐만 아니라 우빠디들의 핵을 일시에 그리고 동시에 형성하는 인공적인 센터들을 발전시키면서 다양한 우빠디들에서 반영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해 왔다.” 드리머, 바가바드 기타 연구, pp. 37, 40, 107.


생명 센터의 인도식 이름은 “차크라”이다.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의 위치를 (인도식 이름과 함께) 머리에서부터 기저에 이르기까지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머리 센터                   -샤하스라라 챠끄라
2. 양미간 센터                -아즈나 챠끄라
3. 목 센터                      -비슈따 차끄라
4. 가슴 또는 심장 센터     - 아나하따 챠끄라
5. 태양총 센터                -마니뿌라 챠끄라
6. 천골 또는 성적 센터     -스와디스타나 챠끄라
7. 척추의 기저 센터         -물라다라 챠끄라

횡격막 위에 네 가지 센터들이 있고, 그 아래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독자는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들 에너지 센터 또는 챠끄라에 대한 글은 많이 쓰여졌고, 그보다 더 많은 내용이 이야기될 수 있지만, 개괄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생명 센터들은 몸의 모든 부분에 뿌라나 에너지를 전하고 세 부분의 신경계, 즉 뇌척추 신경, 교감 신경과 말초 신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에너지 센터들로부터 생기 에너지 또는 뿌라나 에너지는 미세한 지시선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 이 선들은 “나디nadis”라고 불리며, 신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동시에 동맥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들은 육체의 신경계에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과 그 생성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미세한 형태의 나디 또는 동맥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과 혈액 순환을 일으키는 육체의 동맥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오히려 생리학적으로 신경계의 가지에 상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표현상 이들은 빛나는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이 어딘가에서 발생해서 열과 빛으로 양극화되면, 미세한 상태는 두 가지의 보충적인 방식들, 즉 열의 성질에 해당하는 혈액에 의해, 그리고 빛의 성질에 해당하는 신경계에 의해 육체 상태와 연결된다. 그러나, 나디와 신경은 단순히 상응하기만 하고,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전자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과, 완전한 개별성 속에서 두 가지 다른 영역을 실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호흡이 생명 유지에 본질적이고 주요한 생명 활동에 진정으로 관련되기 때문에 나디와 호흡 작용 사이에 어떤 관계가 확인된다 해도, 그것들은 공기가 순환하는 통로의 일종이라는 설명을 결론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육체적 요소와 미세한 현현에 속하는 적절한 ‘생기 호흡’(뿌라나)을 혼동하게 만들 것이다.

나디의 총 수는 7만 2천개이지만, 다른 문헌에 따르면 7천 2백만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왜냐면 이 수들은 상징적인 것이지 숫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르네 궤농, 사람과 그 생성, pp. 136. 137.


인도 말 로뚜스(lotus: 연꽃)를 챠끄라나 에너지 센터에 관련해 사용하는 라마 쁘라사드는 이런 맥락에서 흥미있는 언급을 하고 있다.

“현대 해부학자들이 말하는 신경총은 이러한 센터들과 일치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으로부터 이 센터들이 혈관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신경과 혈관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양적인 뿌라나와 음적인 뿌라나의 매개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이다. 신경은 양적인 몸의 체계이고, 혈관은 음적인 몸의 체계이다. 신경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상응하는 혈관이 있다. 그들 양자는 모두 구분 없이 나디라고 불린다. 한 쌍은 심장의 연꽃에서 중심을 잡고 있고, 다른 쌍은 천 장의 꽃잎을 이루면서 머리에 중심을 잡고 있다. 혈관계는 신경계의 정확한 그림이고, 사실 그 그림자일 뿐이다. 가슴과 같이 머리에는 그 상위와 하위 부분, 즉 대뇌와 소뇌가 있고 또한 좌우 반구가 있다.” 라마 쁘라사드, 자연의 미세한 힘들, pp. 45-46.


에너지 센터들은 척추와 머리 안에 위치하고 있다. 아더 아발론은 말한다.

“차끄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양 해부학과 중추 신경계와 교감 신경계의 생리학을 설명해야 한다. 둘째, 딴뜨라의 신경계와 차끄라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면에서 가능하다면, 두 체계의 상호 작용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야 한다. 나머지 것은 일반적으로 탄트라 신비주의에 특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차끄라와 샤하스라라에 대한 딴뜨라 이론은 두개골 속에 들어 있는 뇌나 뇌수를 중추신경계와 척추(메루딴다) 내에 들어 있는 척수와 비교하는... 생리학적 측면에 관심을 두고 있다.

앞으로 다섯 센터들(차끄라)에 대해 설명하겠지만, 척추는 다섯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기저에서부터 차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네 개의 불완전한 척추뼈가 결합하여 미저골coccyx이라는 뼈를 이루고 있는 미저골 영역, 다섯 개의 척추뼈가 결합되어 천골이라는 하나의 뼈를 형성하는 천골 영역, 요추 영역 또는 다섯 개의 척추뼈로 이루어진 요부region of the loins, 12 개의 척추뼈로 이루어진 등dorsal 영역, 또는 등뼈 영역, 그리고 7 개의 척추뼈로 구성되는 경부, 또는 목의 영역. 순차적으로 제시된 것처럼, 척수는 각기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특징들을 보인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물라다라, 스와디스타나, 마니뿌라, 아나하따, 그리고 비슈따 센터, 또는 차끄라가 조절하는 영역에 상응한다. 이 지역들은 척추 기저, 천골 센터, 태양총 센터, 심장 센터, 목 센터이다,
중추계는 31 개의 척추 신경과 12 개의 두개골 신경을 통해 말초신경계와 연결되어 있고, 이 두 가지는 모두 구심성 신경과 원심성 신경 또는 감각 신경과 운동 신경으로 감각을 일으키거나 행동을 자극한다. 뇌신경 중에는 척추 구(연수)로부터 마지막 6 가지 신경이 올라오고 후각 신경과 시신경을 제외한 다른 6 가지 신경은 연수 바로 앞에 있는 뇌 부분들에서 올라온다. 참고로 요가와 딴뜨라 학파의 저자들은 신경에 대해 나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또한 의학 서적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쉬라스Shiras를 이용해서 동맥을 설명하지 않고, 이것이 뇌신경을 의미한다고 지적해 왔다. 그렇지만, 요가 나디들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신경이 아니라 생기력이 통과하는 더 미세한 지시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척추골 사이의 유공(작은 구멍)에서 빠져나온 척추 신경은 척추의 양쪽에 있는 교감 신경계의 신경절과 교신한다. 척추건spinal cord은 인체의 경우 제 1 경추의 상부 경계에서부터 확장되어 연수 속으로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제 4 뇌실로 들어가 두 번째 요추로 내려가는데, 거기서 그것은 필라멘트 말단filum terminale이라는 지점으로 점차 얇아진다.” 아더 아발론, 뱀의 힘, pp. 123-125.


앞의 인용은 탄트라 체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최고의 도덕적 자질을 지니고, 생활과 생각이 순수한 사람에게만 안전한, 인도의 에너지 조절 체계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동서양 모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딴뜨라 수행을 가르치는 이른바 비속화된 수행과 학파들은 지나치게 비난받아도 가혹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에너지 센터들은 우리가 방금 살펴 본 것처럼 척추와 머리 위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척추의 매질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서 상술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일곱 개의 센터 중에서 두 개는 머리 속에 있고 5 개는 척추 속에 있다. 머리 속에 있는 두 센터들은 정신력과 운동력에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다. 천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연꽃이라고 불리는 샤하스라라 센터(머리 센터)는 영적 에너지의 구현이며, 의지, 추상적 마음mind 또는 영적 마음, 그리고 직관이라고 설명된다. 아즈나 센터, 또는 미간 센터는 인간이라고 부르는 통합된 유기체, 즉 개성의 하위 마음과 심령적 본성과 관련된다.

척추 안의 다섯 센터들은 사람이 자신의 동물적 본능, 감정적 반응, 그리고 삶의 의도를 드러내는 유기체의 다양한 활동과 관련된다. 그들은 주로 두 가지 머리 센터로 들어가고 그로부터 나오는 에너지의 지휘를 받는다.
뱀의 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센터들은 의지적인 운동에 관계되는 근육 결합 조직들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과 아울러 척수 안에서 근접한 센터가 위치해 있는 유관 신경 분포, 배설 등의 기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대뇌 센터들은 의지, 느낌, 그리고 감정의 현현과 관계될 때에만 이 기능들을 조절한다고 지적되고 있다. 반면 부교감 신경계와 관련된 센터들은 지속적인 유기체의 실존에 본질적인 다양한 자극 조건과 일치하는 무의식적인 적응 메카니즘을 구성한다고 하며, 연수는 또한 상위 센터들과 말초 신경 사이의 통신 경로이자 신경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들을 조절하는 독립적인 센터이다. 머리에서 척추까지 내려오는 운동 자극을 전달하는 신경 섬유들이 척추구(연수)를 통과해 경로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교차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하는데, 이것은 묵따 뜨리베니의 설명을 보면 딴뜨라에서 언급되어 왔던 사실이다. 후자는 수많은 구심성 신경관과 원심성 신경관에 의해 소뇌와 대뇌의 신경절과 연결되어 있다. 소뇌 위에 대뇌가 있는데, 이는 대개 의식적인 의지와 관념 작용과 수의voluntary 운동이 일어나는 것과 관련되는 활동을 한다. 그러나 내관적인introspctive 심리학의 주관적 물질인 의식이라는 개념은 심리학적 작용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의식’이 하나의 유기적 포착conception이 아니고 의식이 내관적인 면을 나타내는 에너지의 생리학적 이해와 전혀 관련되지 않기 때문에 의식에는 어떤 기관도 없다. 내면의 의식은 아뜨마이다. 마음과 몸은 둘 다 의식의 불완전하거나 베일을 쓴(veiled: 가려진) 표현들로 몸의 경우 너무나 가려져 있어서 무의식의 모습을 갖고 있다. 살아 있는 뇌는 뿌라나에 의해 주입된 감지할 수 있는 거친 물질(마하부따)로 구성되어 있다. 그 물질은 마음(안따까라나)의 형상 속에서 의식이 표현하기에 적합한 매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집성(集成)되어 있다. 의식은 몸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단순히 몸의 작용도 아니다. 정신적 의식이 뇌의 장애에 영향을 받거나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은 그런 의식의 표현에 대해 후자의 필요성을 증명하고, 의식이 뇌 속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거나 그것이 같은 것의 속성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척추의 양쪽에는 교감 신경관 (이다와 핑갈라)라는 신경 섬유와 연결된 일련의 신경절이 있는데, 두개골의 기저로부터 미저골까지 쭉 확장되어 있다. 이것은 척수와 소통하고 있다. 비록 경부 영역에서 대부분 사라진다 해도, 대단히 규칙적으로 각 척추 신경에 상응하는 신경절의 각 마디가 흉관 영역과 요추 영역에 있다는 것과 신경 구조의 매우 큰 다발들은 심장, 위, 그리고 폐, 즉 각각 아나하타, 마니뿌라, 그리고 비슈따에 의해 조절되는 영역들, 즉 이하에서 설명되는 다섯 차끄라 중 위쪽의 세 차크라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양쪽의 교감신경의 연쇄로부터 신경 섬유들은 복부와 흉곽의 장기로 이어진다. 이로부터 또한 신경들이 방출되어 척추 신경으로 되돌아 가고, 다른 신경들은 몇몇 뇌신경들 속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사지, 몸통, 다른 부분들로 분산되어 척추 신경 또는 뇌신경으로 이어진다. 교감 신경들은 주로 다양한 조직의 소동맥의 근막과 내장의 근 조직을 조절하는 자극을 전달한다. 혈관의 색조가 연수에 있는 혈관 운동 센터의 활동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교감신경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교감 신경은 중추신경계로부터 확산되는 자극을 유도한다. 이들은 교감 신경 자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척추 신경의 앞쪽 뿌리에 의해 척추로부터 자극이 나와 짧은 가지들을 거쳐서 교감 신경의 연쇄로 들어간다. 교감신경계는 순환, 소화, 그리고 호흡을 조절하고 그에 영향을 미친다.

중추 신경계의 해부학적 배열은 매우 복잡하고 한편 섬유, 세포 그리고 원(原) 섬유의 엉킴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직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중추 신경계의 생리학을 설명할 때, 신경계의 한 부분과 또 다른 부분 사이에서 자극이 통과할 수 있는 경로를 추적하는 것과 해부학적 연관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갖고 그 부분들이 서로 그리고 몸의 나머지와 형성하는 생리학적 관련성을 추측하는 것 이외에는 현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특별한 메카니즘, 즉 감각, 분지, 또는 운동, 그리고 이른바 비뇨생식기 센터와 같은 그 센터들과 특별히 관련되는 중추신경계 내의 신경 센터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주어진 생리학적 행위는 척추의 특정 부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기에 차끄라라고 불리는 마야 샥띠(Maya Shakti)의 표현들과 같은 센터들의 미세한 국면이다. 이들은 차례로 물라다라, 스와디스타나, 마니뿌라, 아나하따, 그리고 비슈따 차끄라들과 궁극적으로 관련있는 생식, 배뇨, 소화, 심장 활동, 그리고 호흡의 거친 기관들과 간접적인 조절 기관들을 통해 관계되고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 관tracts이 배타적이지 않고, 다양한 지각, 의지, 그리고 관념화 과정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아더 아발론, 뱀의 힘, pp. 126-129.


이 센터들은 개인의 진화 상태에 따라 활동성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어떤 센터들이 “깨어 있고” 다른 사람은 똑같은 센터들이 상대적으로 잠자고 있을 수 있다. 어떤 유형은 태양총 센터가, 다른 유형은 심장이, 또한 다른 유형은 목이 활동적이거나 잠든 상태일 것이다. 머리 센터가 활동적인 경우는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미개한 사람들과 진화가 많이 되지 않은 경우에는 횡경막 아래의 세 가지 센터들, 즉 척추의 기저 센터, 천골 센터, 태양총 센터들이 살아 있고, 지배적이지만, 횡경막 위의 센터들은 “잠자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목 센터에서 느낌을 받지만, 머리와 가슴 센터들은 여전히 잠자고 있다. 진화가 많이 이루어진 사람들, 종족의 지도자, 직관적인 철학자와 과학자, 그리고 위대한 성자들은 머리와 가슴 센터가 파동, 즉 감정적 정신적 의식의 유형과 성질에 의해 머리와 가슴에서 중요한 느낌을 받고 있다.

사람의 발전에 따라서 이 에너지 센터들은 살아나고 현저하게 되고, 그 생생함에 따라 다양한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횡경막 아래의 센터들은 사람과 동물 양쪽에서 모두 발견되는 물질적 형태의 육체적 삶과 동물 혼적인 삶을 지배한다. 횡경막 위의 센터들은 지성적이고 영적인 삶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상태가 동물의 삶과는 달리 더 높은 진화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활동들을 하게 한다.

요약한 내용은 7 가지 에너지 센터 또는 차크라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이다.

서양의 분비선 이론과 동양의 일곱 가지 센터 이론을 비교하면, 우선 그 위치에서 현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들은 분비선이 위치하는 동일한 곳에서 발견되고, 에너지 센터들 각각은 상응하는 분비선에 대한 힘의 근원이고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확실한 사실이다) 다음의 비교표는 이 위치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센터들                        분비선

머리 센터                    송과선
양미간                        뇌하수체
목 센터                       갑상선
심장 센터                    흉선
태양총 센터                 췌장
천골 센터                    생식선
척추 기저 센터             부신

        

첫 번째 사실보다 훨씬 더 현저한 두 번째 것은 깨어 있는 에너지 센터들이 분비선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 작용은 이미 알려져 있고, 대부분의 분비물 또는 호르몬이 여기서 발견된다. 인류 중에서 선진적인 사람들의 잠자거나 깨어 있는 센터들은 그 기능이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분비선에 따르는데, 그 분비물은 대개 추출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뇌하수체나 흉선 둘 중 하나 안에 있는 송과선의 분비물은 부신 수질의 분비물과 같이 미확인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버먼 박사는 언급하고 있다. 이것들은 잠자거나 깨어있는 심장 센터, 목 센터, 머리 센터, 그리고 척추 기저 센터에도 해당한다.

이것은 흥미있는 일치일까? 또는 각각의 경우에 발견되지 않은 호르몬이 있는 분비선들이 일반인들의 경우 자고 있는, 아직 각성이 일어나지 않은 센터에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인가?

여러 가지 분비선은 이 센터들의 에너지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확인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의 경우 각성되서 작용하는 센터들이 분비선들과 연결되어, 그 특이한 분비와 이미 알고 있는 혈류와 관계된 작용이 격리된 반면, 아직 잠자며 개발되지 않은 센터들은 그 분비가 부분적으로만 알려졌거나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분비선들과 결합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쨌든 고려할 가치가 있다.

사람은 분비선이 만들어낸 것이며 인간은 특이한 분비계 자체라고 서양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정당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에너지 센터들에 대한 동양적 이론의 정당함에 있을 수도 있다. 분비선과 기능 항진super-activity 또는 기능 저하의 조건, 그리고 정오(正誤)의 기능은 이러한 센터들의 상태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이러한 분비선들은 훨씬 더 크고 더 복잡한 체계의 외부적 상징, 가시적인 것, 물질적 국면일 뿐이다. 그것들을 통해 작용하는 혼 생명의 성질, 그리고 모든 것을 조절하고 지배하는 혼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센터들의 상태는 그를 통해 진동하는 혼 에너지의 형태와 성질에 의존한다. 미개발된 사람의 경우에 그것은 활동하고 나타나는 생명 에너지, 뿌라나일뿐이다. 이것은 동물에게 생명을 주고 하위 센터들(척추 기저 센터와 천골 센터)에 활동성을 준다. 사람이 발전하면 의식, 즉 혼 국면이 점차 그 현존을 느끼게 만들고, 태양총 센터를 활동하게 만든다. 이 센터는 사람과 동물에서 하위의 심령 감각적 삶의 자리이고, 본능적인 뇌라고도 불린다. 바가반 다스는 이렇게 가르친다.

“산스끄리뜨 문헌에서 배꼽이 심장보다 유기체에 더 중심적이고,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다루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심장의 중요성은 아무리 지적해도 부족함이 없고, 그것은 진실이지만, 생리학적으로 ‘배꼽’은 진화의 초기 단계에 보다 더 중요한 기관이었으며, 현 단계에서도 욕망 작용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가슴보다도 더 적절하게 욕망과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바가반 다스, 성스러운 말씀의 과학, I권, p. 82, 각주


그는 다음 문단에서 베산트 여사도 인용하고 있다.

“‘배꼽’은 태양총을 나타내는데, 아마 교감 신경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경총일 것이다. 그것은 식도와 생식기와 함께 소화관을 조절하고, 간장, 비장, 위로 신경 가지가 이어진다. 그것은 또한 폐와 심장으로도 이어져 있다. 그것은 교감 신경계의 뇌로 간주될 수 있으며, 생각에 위험한 이완에 반응하며, 이에 대한 무분별한 집중은 불치의 신경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이 흥분하여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고, 감정적인 충격에 따르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바가반 다스, 성스러운 말씀의 과학, I 권. p. 83


오늘날 사람은 대부분 이 세 가지 센터들을 통해 작용한다. 몸의 에너지들은 생식선을 통해 성적 생활에 만족을 주고 이를 자극하는 작용을 하며, 전투의 분비선이자 투쟁의 분비선인 부신을 통해 싸우고 진화하려는 충동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태양총을 통해 마음의 본능적 삶을 다스린다. 그래서 개인이 발동되면 의식적 감각적 인간으로 된다. 진화가 진전되면, 자아 또는 혼이 사람 속에서, 그의 육체적 실존에서, 점점 더 활동적이고 지배적이 되고, 조금씩 조금씩 에테르 구조의 모든 부분들이 생기있게 깨어나게 된다. 점차 상위 센터들은 활동성이 증가하게 되며, 몸을 통해 쏟아지는 힘의 강조점이 횡경막 위의 센터들로 이동한다. 목 센터가 깨어나면 창조적인 작업의 기관으로 된다. 심장 센터는 활기있게 되고, 사람은 자신의 혼적 관계, 자기 집단의 책임과 생명 혼의 포괄성을 의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머리 센터들이 깨어나 또 다른 범위의 지각들이 그의 의식으로 들어온다. 그는 혼으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고, 개성으로서 통합되고, 그 뒤에도 영혼의 세계, 신적인 세계, 그리고 영혼들의 보이지 않는 세계, 그리고 혼 생활을 실재로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를 인식하게 된다.

인간 진화의 목적들 중에는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 들어 있다. 척추 기저 센터와 심장 센터는 완전히 기능하는 활동 상태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물질 그 자체에 내재하고 척추 기저 센터에 내장된 에너지와, 가슴에 자리잡은 혼의 에너지와 머리에 집중된 영혼의 에너지의 혼합을 통해 인간은 완성의 최고점에 이르게 된다. 에너지의 이러한 융합을 통해 그는 몸이 진정 혼을 위한 매체이고, 그 혼은 진정 의지의 표현이자 영혼의 목적이 되도록 신의 적극적 표현, 즉 영혼, 혼, 몸이 된다.

지상에 살았을 때 그리스도는 무엇이라 말씀했는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XIV: 9) 그는 또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할 것이고;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아버지에게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인 아버지를 드러내며 몸에 육화된 혼이었고, 몸의 메카니즘을 통해 혼의 권능을 증명하였는데, 이것은 센터들의 각성에 따르는 것이라고 인도인들은 주장한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아니마... 모든 몸에 스며들어 죽은 자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권능.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게 방으로 들어 올 수 있었고,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었다. (누가 24: 36, 마가 16: 14, 요한 20: 19, 요한 11.).

2. 마히마... 자신을 포함하거나 확대시키거나 또는 우주를 포괄하는 권능. (마테 12:25, 요한 2: 24, 요한 6:64.)

3. 라기마... 공중 부양을 하거나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자신을 빛으로 만드는 권능. 그리스도는 물 위를 걸었다. (마테 12: 25, 요한 2: 24, 요한 6: 64.)

4. 가리마... 자신을 무겁게 만드는 권능. 기독교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이 권능을 수행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5. 쁘랍띠... 사건들을 예언했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십자가 처형을 예언했다. 마테 26: 2, 누가 24: 7) 질병을 고치는 권능 (그리스도는 수 백명을 고쳤다, 마테 12: 15, 14: 15), 그리고 투시력과 투청력. (그리스도는 투시력, 요한 1: 48, 그리고 투청력, 요한 12: 29.)를 보였다.

6. 쁘라까메가... 몸을 보존하는 권능. 그리스도는 사후에 제자들 앞에 그들이 알고 있던 동일한 몸으로 분명히 다시 나타났다. (요한 20:20-27)

7. 비시뜨반... 자기 조절의 권능, 동물과 사람들을 조절하는 권능. 마귀 들린 사람들의 조절과 경사진 곳으로 달려 내려가 바다에 빠진 돼지들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마테 8, 마가 5, 마가 9)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증명했다.

8. 이샤뜨반... 일반 주권의 권능. 이것은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장되었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능들의 소유와 우리가 더 큰 것도 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예언 성취는 서양인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하는가? 라디오의 경우 음파가 방송되고 조절되고 증폭되지만, 무엇보다도 본래의 미세한 형태로 흘러들어 오는 음파를 수신기는 보강한다. 사람은 기계적인 보강 장치를 만들어 문제 없이 미묘한 음파를 수신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바로 투청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생각의 전달은 (대단히 회의적인 사람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종류의 방송과 다른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다른 “기적들”과 함께 물질 세계는 더 미세한 에너지와 힘에 의해 조절되고 더 미세한 장에서 적기에 작동하는 법을 배우면 간단히 물리적인 것과 물질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혼과 영혼의 발달을 통해, 모든 센터들의 깨어남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완성과 영광에 다가간다는 것이 인도의 오래 된 믿음이다.


제 7장 결론

이 책에서 우리는 심리학의 두 체계,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을 살펴 보았다. 이를 종합하면 우리는 사람이 살아 있는 영혼으로서 어떤 메카니즘을 통해 작용하고 있다는 완전한 그림을 얻을 것이다. 센터들이 위치한 에텔체는 미세하고 보이지 않으며, 오감의 범위를 벗어나 있고, 내분비선들과 신경계 안에서 밀도 있는 물리 영역, 즉 밀도 높은 물리적 현현의 나머지를 조절하고 있다.

혼은 항상 거대한 실재이며, 한 생명의 표현이며, 에텔체와 밀도 높은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 속에서 특화된 센터들을 진화시키고 밀도 높은 물리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에텔체에 영향을 미치고 그를 통해 작용하는 것은 바로 혼의 힘이다.

서양인에게 가장 강력한 호소력을 미치는 문제는 어떻게 수술 시에 보다 큰 효율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혼인 사람은 그의 도구의 조건에 의해 수술 효율이 제한된다. 만약 혼의 중심이 분비선, 신경계 그리고 에텔체를 조정할 수 없고 적절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면, 혼으로서 사람은 그것들을 고치거나 치유해야 한다. 인간의 분비선이 적절하게 작용하지 않아도 이를 연구, 개선 그리고 완성시키는 데에 별 진척이 없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 혼이기 때문이다.

의약의 사용을 통해 그리고 다른 수단에 의해 분비선과 신경 센터들에 직접 가하는 작용은 본질적으로 그 작동을 수정하는 것이고, 문제되는 특정인에 의해 원래 창조된 특정의 분비선과 신경 센터들의 최고 상태를 제한하는 것이다. 호흡, 만트라,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양적 수행에 의해 영향을 맏을 수 있는 에텔체 내의 센터들도 동일하며, 더더욱 진실이다. 그러한 수행들은 대단히 위험하고, 정신 이상에 이를 수도 있다. 결국 바라건데, 우리는 여러 가지 센터들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정보를 갖고 수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연구 결과로 세 가지 이론이 분명해졌는데, 사람을 생명, 자기 의식, 그리고 지성적 목적을 표현하는 유기체로 설명하는 삼중의 가설이 형성되게 되었다.

첫 번째는 분비선과 신경계에 사람은 영향을 받는다. 그의 기질, 자연적인 성질, 삶의 경험과 환경의 지성적인 처리는 그의 내분비계에 의해 결정된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강조한다.
두 번째는 에너지 센터들에 의해 사람은 영향을 받는다. 인간 내부의, 즉 에텔체의 특정한 에너지 초점의 정지 또는 활동은 그의 기질, 표현 방법, 몸의 형태와 수명을 결정한다. 물리계에서 그의 활동은 센터들을 통해 흐르는 에너지의 성질에 완전히 의존한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강조한다.

세 번째는 센터들과 아울러 분비선과 신경증은 혼이 발휘하는 조절 또는 조절 부족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우리가 물질적인 면을 모두 보이지 않고 증명될 수 없는 영역으로 내몰아갔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옳을까? 지나간 시대의 결론이 처음에는 모든 면에서 모호한 가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던가? 과거에 증명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 것이 현 시대에는 증명되었고 입증되지 않았는가? 현재 모호한 요소들을 보다 분명하게 지각하기 위해 직접 이용할 수 있는 많은 증거를 통해 적기에 충분한 방법을 채택하고 기술을 적용할 수는 없을까?

우리가 구조에 관한 사실들을 보았던 것처럼 서양은 진보하고 있다. 사람의 메카니즘은 내분비계와 신경계, 반응 장치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이 주제에 접근할 수 있고, 사람의 분비선을 다룸으로써 인체의 완성을 꾀하여 결국 사람을 혼이 충만한 빛으로 이끌 수 있을까? 또는 센터들은 혼에 대한 표현 매체이고, 신경계와 분비선들을 통해 몸의 구성과 조절을 맡고 있다는 동양적 주장을 받아들여, 승인하기 힘든 방법을 연구, 적용하여 센터들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순전히 물리적인 접근법도 아니고 미숙하게 센터들을 깨어나게 할 위험도 피할 수 있는 제 삼의 길은 있는가? 혼이 그 도구를 완전히 사용하여 센터들의 올바른 활동이 일어나는 데에 요구되는 혼과 몸 사이의 완벽한 상호작용을 이룰 수 있는 해법과 방법을 얻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사람은 하나의 혼이며, 따라서 표현 도구, 즉 삼중의 하위 본성인 심령적 정신적 상태의 총합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을 통하면 각각의 체계 중에서 가장 좋은 측면들을 전체 인류가 이용할 수 있도록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지식의 결합을 이뤄내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은 혼이고 몸을 갖고 있고, 하나의 에너지체를 통해 이 둘을 연결시키는 통일적인 매체가 있다는 작업 가설을 가정해 본다.

혼이 실존하고 기관에 활기를 준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려는 사람들은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열망과 감정, 그리고 물리적 수단을 사용해 왔던 신비가들이 있고, 보다 정신적으로 순수하게 영적인 지식에 이름기 위해 지성과 마음을 사용해 왔던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장구한 계열의 신을 아는 자들은 혼을 자아, 사랑하는 자, 하나, 또는 신, 또는 그리스도 등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存 있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들이 뭐라고 이름했는 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신비가는 단식과 과도한 수련을 통해 몸을 채찍질하고 학대했다. 그래서 그는 육적인 욕구를 줄였다. 여기에 사랑하는 자에 대한 강렬한 헌신과 일별에 대한 열망을 더했다. 격렬한 수행의 세월 끝에 찾았던 것을 발견하고 그 사랑하는 자와 통일되었다.

두 번째 집단은 이성을 사용했고, 마음 조절법mindcontrol을 수행하고, 엄격한 감정적 육체적 조절을 더했다. 집중적인 탐구를 통해서 그들도 실재를 발견했고 영원한 계획의 광범위한 의식으로 들어가 보편적인 혼과의 결합에 이르렀다.

두 집단은 모두 혼 경험의 진실을 증명하지만, 자신의 특별한 성향과 방법에 제한되었고, 그 증거는 일방적이었다. 하나는 너무 환상적이고, 신비적이며 감정적이다. 다른 것 또한 너무 학구적이고 지적이며 형구축적form-building이다. 이제, 인간 지식의 폭넓은 유포와 문헌, 대화와 왕래를 통해, 이들 간의 긴밀한 교제를 통해 최초로 융합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서양과 동양의 철학자들과 성자들의 결론으로부터 현 시대에 영적인 성취 방식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체계와 하나의 방법을 종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작 단계를 어떻게 밟는 것이 실용적인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a) 서양의 지식을 이용한 육체에 대한 분별력있는 대우, 특히 내분비계의 예방 의학과 일반 건강과 관련해서 그러하다.

(b) 현대 심리학과 붊별력있는 심리 분석의 기본적인 사실의 지적인 이해와 적용, 그래서 혼이 표현하는 정신적, 감정적 그리고 육체적 메카니즘의 지식을 얻는다.

(c) 육체는 욕망과 감정적 본성에 반응하고 그에 의해 조절되는 자동 기계이고, 그래서 (음식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신에 대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 의식의 감정적인 상태는 이성적인 마음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

(d) 이 모두로부터 마음의 법칙에 대한 연구가 성장해서 마음과 뇌 사이의 관계가 이해되고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가지 요점이 파악되어 사람의 개성에서 그 효과가 느껴지면 우리는 통합적이고 협동적인 유기체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구조는 혼이 지도할 준비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위의 단계들은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전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혼과 혼이 드러내는 세계의 완전히 지성적인 앎은 이 요약된 자질을 갖춘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신에 대한 직감, 진실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사, 그리고 신비한 광경과의 접촉은 가슴 센터가 깨어나 작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한 신의 연인들은 모든 시대에 존재한다. 그들은 느끼고, 직감하고, 사랑하며 찬미하지만, 혼, 마음 그리고 머리 사이의 연결은 부족하다. 이런 신비적 자질에 지성적인 것이 더해지면, 머리 센터는 깨어나고, 송과선은 더 이상 위축 상태에 있지 않고, 혼의 자리와 지휘하는 영적 의지의 자리로 알려지게 된다. 이 두 센터들이 모두 깨어나면 인류는 성화된 가슴과 두뇌를 갖고 일하는 영적인 개성들에 대한 큰 이해를 얻게 되고, 세계적 사상에 그들은 봉인을 남길 것이다. 지금까지는 신비가들의 방식이 다수를 위한 것이었고, 지성의 방식은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인류는 이제 그 전제를 다수의 신비한 경험에 두면서 감정과 찬미로부터 지식으로, 그리고 신의 사랑으로부터 신의 지식으로 전진할 수 있다.

이것은 동양의 지혜가 서양의 지식에 추가되고 혼의 과학의 기법이 서양의 지성적 유형에 부여되는 경우일 것이다. 이 기법을 상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8 단계로 나누어서 간단히 정리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타인과의 관계의 조절. 동양의 오계(五戒)에서 규정되어 있는 무해함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오계란 무해함, 모든 존재에 대한 진실, 절도 행위 금지, 음란 행위 금지, 탐욕의 금지. 엘리스 A. 베일리, 혼의 빛, p. 184.
이다.

2. 다섯 가지 규칙으로 요약되는 삶의 청정함: 내적 외적 정화, 만족, 열렬한 열망, 영적인 학습과 이슈와라(신성아)에 대한 헌신. 상동, p. 187.


3. 균형

4. 생명 에너지의 올바른 조절과 에텔체에 대한 혼의 직접적인 활동. 이 에너지 조절과 그로 인한 센터들과 육체의 조절은 청정함과 균형이 이루어진 뒤에만 가능하다. 그는 훈련을 통해 동물적 기질의 조절을 배우고 더 이상 노여움과 이기심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시점에 이를 때까지 에너지를 다스리는 법칙에 대한 앎이 허락되지 않든다.

5. 추상 작용. 자기 의식을 머리에 집중해서 거기서 혼으로 작용하거나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물로 나가 있는 의식을 회수해서 내면으로 돌리는 능력을 이르는 말이다.

6. 주의 또는 집중. 이것은 한 점을 향하는 살아 있는 마음으로, 감정 대신에 활동으로 방향을 돌리게 한다. 그래서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집중된 마음에 의해 조절된다.

7. 명상은 주의력이나 집중력이 확장된 것이며, 혼과 그 관심 사항에 마음을 집중하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유기체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게 만들어 “생각하는 대로, 존재한다.”는 명제의 진실을 실증한다.

8. 정관contemplation은 자기 왕국 속에서 형상들을 바라보는 혼의 행위이며, 본성 상 다섯 번째 또는 영적 왕국에서 발견되는 에너지들을 접한다. 이 행위 뒤에는 (조절된 마음에 의해서) 머리 속으로 혼의 지식과 에너지가 흘러 들어온다. 이러한 혼의 활동은 이른바 광명을 이뤄낸다. 그것은 전신을 에너지화시키고 적절한 리듬과 진보 속에서 에너지 센터들이 깨어나게 한다.

생기체와 에너지 센터들을 통해 작용하는 이 의식적으로 지휘된 영적인 에너지는 우리가 완벽한 건강과 혼의 표현을 위해 육체와 내분비계가 결국 완벽한 기관을 갖추어야 함을 제시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명확한 혼의 지식에 이를 수 있으며, 명백한 목적을 지니고 그 메카니즘을 사용할 수 있는 “더 심오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배운다.

위의 방법을 따름으로써 동서양의 위대한 신비가들, 성자들, 그리고 달인들Adepts의 삶을 연구하면 많은 환각과 정신병적 조건의 기미를 뺀 뒤에 현상적인 효과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것이다. 여러 가지 형태의 투시, 예지 그리고 텔레파시 의사소통, 투청력과 신비화된 특별한 능력을 우리는 종종 본다. 그러나 이 모든 힘들은 자신의 영적인 현현들과 하위의 현현들도 생기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A. E. 포웰은 이렇게 말한다.

“두 가지 종류, 즉 낮은 투시와 높은 투시가 있다. 낮은 것은 중앙 아프리카의 원시인들과 같이 미개발된 사람들에서 일어나기도 하는데, 특화된 기관을 통해 소통되는 정확하고 명확한 감각 지각보다는 에텔체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호하고 포괄적인 느낌의 일종이다. 그것은 실제로 인간의 조절 범위를 넘어선다. 신경계와 지나치게 밀접하게 관계맺고 있는 에텔 복체 중 하나에 대한 작용은 다른 하나에 신속하게 반응한다. 낮은 투시에서는 상응하는 신경의 교란이 교감 신경계 내에서 거의 대부분 일어난다.

보다 발전된 인종에서는 모호한 민감성은 정신 능력이 개발되면서 대개 사라진다. 그 이후 영적인 인간이 전개되기 시작하면 그는 다시 투시력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능력은 의지의 조절 아래에서 정밀하고 정확하며 감각 기관을 통해 수련된다. 신경 작용은 뇌척추계에서 거의 전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하위 형태의 심령력은 대부분 동물과 대단히 비지성적인 인간에게 자주 나타난다. 병적으로 흥분하고 통제되지 못한 심령력은 뇌 발달과 교감 신경계의 지배가 미약하고 에텔 물질의 지나친 비대화를 포함한 신경계에서 핵을 지닌 신경절 세포가 큰 핵을 지니고 있어서 조잡한 아스트랄 파동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A. E. 포웰, 에테르 복체, pp. 102. 103.


고양이와 개와 저급한 인간들은 정상적이고 보다 지적인 사람에게 나타날 수 없는 것을 빈번히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능력은 무의식적이고, 사람은 환각의 희생자가 된다. 이처럼 성자와 투시자도 보고 듣지만, 그들의 능력은 의지에 따라 이용되고, 완전히 조절된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모든 심령적 연구가들에게 열려져 있고, 생기체와 센터들의 전제를 받아들이면 실제적인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다.

다양한 센터들이 깨어나면 물리적인 것보다 더 미세한 물질의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을 혼의 과학을 가르치는 동양의 스승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이 관심을 갖는 것은 횡경막 위의 센터들이 대부분인데, 이는 자신의 동료들의 영적 지각, 정확한 이해 그리고 해석과 같은 능력을 수여하여 그리스도가 사람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와 행위하는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영감의 에너지, 즉 그 모든 것의 최상의 힘은 목 센터를 통한 창조적인 작업과 심장 센터를 통한 인도주의적 사업에 대해 영감을 준다.

이 부류에 의해 주장되는 두 번째 효과는 횡경막 아래의 힘을 위의 센터들로 옮기는 것이다. 진화와 명상의 효과에 의해 특정한 양식의 소화 기관과 생식계와 신경 메카니즘들이 작업을 진척시킬 수 있도록, 자동적으로 몸을 에너지화시키는 정상 기능을 수행하는 세 가지 하위 센터들(척추 기저, 천골 센터와 태양총)을 벗어나 세 가지 주요 차크라들(머리, 심장, 그리고 목)에 사람은 의식적으로 작용을 가할 수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대다수 사람이 “횡경막 아래”의 삶을 살고 생명력은 순전히 동물적이고 감각적인 삶에 집중되어 있으며, 성적인 생활과 감정적인 삶은 잠들어 있고, 천골과 태양총으로 그리고 거기를 통해 흐르는 모든 힘은 어떤 생리학적이고 하위 심령적 과정들을 자극한다. 그러나 사람이 진화하면서, 힘의 방향이 변한다. 우리는 그 힘이 이중적인, 즉 한편으로는 생명력이고 한편으로는 혼의 힘으로 하나는 혈액을 통해 표현되고 다른 하나는 신경계를 통해 표현된다는 것을 보았다. 생명력의 측면은 모든 몸의 기관과 구조를 생기있게 하고 능력을 부여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해 나가지만,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정적인 혼의 힘은 위로 향하기 시작한다. 척추 기저 센터의 생명력은 차례로 각 센터를 통과하여 각 지점에서 혼의 에너지를 모아 증가시키면서 척추 통로를 통해 머리로 전달된다.

이러한 의식 전달의 심리학적 효과는 흥미있다. 혼이 머리 안에서 (과학적인 동양의 서적들에 적혀 있는 것처럼) “옥좌에 앉아” 자기의 힘을 통해 척추 기저에 있는 힘을 끌어 올린다. 그러면 영적인 에너지와 물질 자체 내에 있는 힘이 혼의 인력 에너지를 통해 완전히 섞이게 된다. 이것은 쿤달리니 에너지가 오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혼의 지배적인 자기력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고 특정한 센터에 대한 명상이나 물질 에너지에 대한 의식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천골 센터의 혼 에너지는 최고의 창조 센터인 목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래서 집단을 위해 발전되는 창조 작업이 강조될 것이고, 이와 관련된 사람의 활동적인 성 생활을 강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양총 센터의 에너지는 이와 함께 심장으로 이동하여 전달되어야 하고, 의식은 더 이상 자기 중심적이지도 순전히 이기적이지도 않지만, 사람은 사람과 삶에 대한 태도에서 집단의식적이고 포용적이 된다. 그는 더 이상 적대적이고 배타적이지 않다. 그는 알고 이해한다. 그는 동정, 사랑 그리고 봉사한다. 센터와 센터 사이, 그리고 센터와 분비선 사이의 이러한 관계가 일단 파악되면 폭넓은 연구 분야가 존재하게 된다. 심령적인 효과와 아울러 생리학적인 효과는 자세한 연구를 보증할 것이다.

시대를 초월한 지혜에 대하여 공부하는 학도들이 또 다른 주장을 하는 것도 흥미있다. 사람이 목 센터가 작용하는 매우 높은 진화 상태에 이르면, 세계의 일에서 자기 위치를 갖기 시작한다. 그는 세계 활동 중의 어떤 분야에서 특정한 결과를 얻는다. 그의 개성은 체계화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고, 스스로 성숙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뇌하수체는 감정과 정신적 특성의 자리라고 말한다. 한 엽lobe에 추론적인 마음이 자리하는 한편, 다른 엽은 상상적인 감정적 능력과 시각화 능력을 담당하고 있다. 창조적인 능력을 지녀서 개발된 개성을 갖은 사람의 경우에는 뇌하수체의 두 가지 엽들은 그러한 요구를 감당할 수 있고, 혼이 움직이고 표현되는 물질적 국면의 상태, 메카니즘이 그것들로부터 유래할 수 있다. 이 분비선은 미간 센터와 관련된다. 이 센터는 혼의 에너지에 반응하는 머리 센터에 음성적이다. 개괄한 기법과 일치해서 혼이 통제력을 얻어, 머리 센터를 활성화하고 위축된 송과선을 어릴 때처럼 작용하는 상태로 바꾸면, 긍정적인 국면이 그 부분을 작동시키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센터와 그 대응 센터인 뇌하수체 사이에서, 그리고 긍정적인 센터와 그 대응 센터인 송과선 사이에서는 어떤 관계가 세워진다. 시간이 경과하면, 자기장이 세워지고, 혼과 몸이 만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관계하면 혼은 사람의 의식 속에서 탄생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신의 고향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이고, 진정한 인간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육체의 성 기관들과 그 생식 활동들은 외부적으로 구체화된 상징이다. 매우 광범위하게 만연되어 있는 성 주술의 남용은 혼과 몸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는 머리 속에 있는 두 가지 에너지 센터들 사이의 진정한 영적인 결합 또는 혼합에 왜곡을 낳는다. 진정한 과정은 머리 속에 집중된 인간 자신의 본성 안에서 진전되며, 그 관계는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신에 혼과 몸 사이에서 일어난다.

두 가지 머리 센터와 그에 상응하는 분비선들 사이의 이러한 관계에 대해 주장하는 또 다른 효과는 둘 사이의 상호작용은 빛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그들의 빛이 나타나게 하라”는 명령을 한 것을 포함해서 세계의 경전들에는 이와 관련된 확실한 증거가 많이 있다. 신비가들의 삶에서도 산적한 증거들이 있다. 이들은 저작에서 자신들이 목격해 왔던 빛을 저작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나는 일군의 학도들에게 자신들의 일의 결과로 어떤 흥미있는 현상을 알게 되었는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신경과민증 환자들과 몽상가적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보내지 않았지만, 비즈니스, 예술과 문학 분야에 종사하는 남녀에게 보내졌는데, 그들은 신뢰를 보내왔다. 75 퍼센트가 머리에서 빛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환각 상태였을까? 그들은 상상의 희생자들이었을까? 그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항상 보는 것일까?

여기에도 흥미있는 연구 분야가 있으며, 그 결과들은 지금 과학에 의해 인식되고 있는 것처럼 빛이 물질이며, 물질이 빛이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을 것이다. 만약 혼이 작용하고 있고, 사람이 그 혼과 의식적인 결합을 이뤘다면, 관련된 특별한 자극을 통해 신체의 가장 중요한 센테, 즉 머리 센터에서 육체와 관련된 주요 점에서 에텔체의 빛을 인식할 것이다. 바조니 교수는 말한다.

“우리는 지구 상에 있는 모든 형태의 물질이 92 개의 다른 종류의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모여서 분자를 이루고, 셀 수 없이 많은 것으로 결합되어 주변에서 보는 모든 체들을 형성하고, 그 물질들로 우리 몸들을 형성한다. 이제 이들 92 가지 종류의 원자 중에 어떤 하나가 과학자들이 잘 알고 있는 방식으로 자극되면, 빛, 일반적으로 색채를 지닌 빛을 방출하게 할 수 있는데, 이 빛의 본성은 92 가지 원자마다 각각 특이하고 특징적이다.” C. B. 바쪼니, 우주의 핵, p. 31.


에텔체의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우리의 문제에 어떤 빛을 던져 주는 것인가? 동서양의 고대 그림들에서 성자들과 신의 머리 주변에 있는 후광은 예술가들이 영적인 의미만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에서 깨달은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예술가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이것들은 연구되어 증명되거나 논박되어야만 한다.

혼의 제어 기법에 기초한 서양의 성취와 동양 철학에 의해 단일한 인간에 대한 설명을 찾는 두 가지 위대한 사상 학파들을 통일하는 가능성은 하나의 실험과 같다. 서양 학도가 전제로 간주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마음을 연다면, 이 책에서 제시한 논증들을 진실로 증명하거나 틀렸다고 거부하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매터링크는 다음과 같은 결과에 대해 허버트 스펜서를 인용한다.

“능력을 최대로 신장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무익한 상상이라고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헛되이 파악해 보려는 위대함을 다른 과정보다 완전히 깨달을 수 있다... 계속해서 알아내려고 하지만 앎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하면서 포기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통해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와 최고의 의무와 똑같다는 의식을 생생하게 유지할 수도 있다.” 모리스 매터링크, 빛을 넘어서, p. 95.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전망을 어느 정도 분명하게 하고, “확신을 깊게” 하면, 우리가 “살아 있고 움직이며 존재성을 갖추고 있는” 알 수 없는 본질적인 현실을 은폐하는 형태와 측면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인간 가족이든 혼의 왕국에서 시각화되고 접촉되는 형태이든, 그것이 현상 세계라는 것을 인정하면, 결국 점진적으로 (존재의 크기가 커지는) 형상들은 그 본질적인 삶에 대한 확장된 진실을 우리에게 드러내 줄 수 있다. 메카니즘이 개발되고 개선됨에 따라 우리의 신성의 개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에드워드 카펜터는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위대한 저작인 황금 가지에서 프레이저 박사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자연의 법칙들은 우리가 세계와 우주의 고상한 이름들로 위엄을 갖춰 놓은, 계속 변화하는 주마등과 같은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가정일 뿐이다. 과거의 분석에서 마법, 종교 그리고 과학은 오직 (생각의) 이론일 뿐이며, 과학이 그 선구자들을 밀어내면, 그 이후 몇 가지 더 완벽한 가정에 의해, 즉 현상을 보여 주는 스크린 위에 그림자가 나타나는, 아마 현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방법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나는 프레이저 박사가 ‘현상을 보는 방법’이 과학적인 방법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은 올바르다고 본다. 그러나 이 변화는 과학 자체의 성장에 의하거나 그 ‘전제들’의 확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슴의 성장과 확장에 의해, 그리고 그 심리학과 인식력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드워드 카펜터, 이교도와 기독교 교의; 그 기원과 의미, p. 278.


매터링크는 이것을 매우 간결하게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의 시야로부터 일광을 가리는 안개는 저지대에서만 퍼져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몸에서부터 나오는 개념들을 맑게 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존재의 협소한 한계들은 우리의 시야로부터 무한성을 가로막는다.’”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면) 초자연적인 것을 논박하고, 신비가와 투시가가 증언하는 주관적인 상태가 단지 자연 에너지와 힘을 증명하는 것일뿐이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실제적으로 암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최소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힘들을 수 세기 전에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현대 문명의 영광인 그러한 힘들을 현재 인정하고 사용할 수 없다. 이 혼의 힘들 중에서 하나가 자연적인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새로운 세계의 입구가 인류 앞에 열릴 것이다. 리어리 박사는 이것을 이렇게 평가한다.

“어떤 육체적인 구조의 활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개성의 기질, 특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미신이라고 간단히 결론지워버릴 수 있는 논점도 아니다. 그것은 널리 유포되어 있고, 감정으로 꽉 차 있고, 심리학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을 정도로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이거나 아니거나 그러한 특성이 있다면 다시 한번 언급할 가치가 있으며, 정의 또는 가정 상 구조에 기초해 있지 않고, 가장 사소하고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조금이라도 허용하면 과학의 전 분야에 불가피하게 그리고 완전히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정론이 진정한 결정론인 것은 반드시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니엘, H. 리어리 박사, 현대 심리학: 정상과 이상, pp. 191. 192.


우선 활력있는 혼과 관련된 동양 철학도의 주장이 증명되거나 논박될 수 있는 실험실이 있어야만 한다. 죽음의 현상은 혼의 철수라는 각도에서 연구될 수 있다. 물론 인체의 빛 방사는 관심을 끌어 왔다. 척추와 에너지 센터들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빠리 솔본느 대학의 바라둑 박사가 45 년 전에 몇 가지 흥미있는 작업을 했지만, 아직 새로운 연구 분야이다. 그의 책 L’Ame Vitale은 추측이긴 하지만, 암시적이고, 그의 주장은 증명될 필요가 있다.

생기체와 이것이 신경계와 분비선에 미치는 효과라는 주제 전체는 광범위한 연구 분야를 열어 놓는다. 인간의 에텔체와 신경 기관의 관계 뿐만 아니라 행성적 에텔체 또는 유기체로서 그 위치를 갖고 있는 에테르와의 관계는 아직 다루어지지 않은 분야이다.

둘째로 빈번히 증명되는 머리의 빛에 대한 사실과 본질에 대해서 증거를 모으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텔레파시의 본성에 대한 최근의 두드러진 실험들은 올바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텔레파시 기법은 아직 유치한 단계에 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의사소통 사이에 구분이 생기면 많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앞의 것은 정신적 텔레파시이지만, 혼과 혼, 그리고 혼과 뇌 사이에서 벌어지는 교신은 훨씬 더 드문 것이다. 이 후자의 형태는 영감이라고 불려 왔고, 세계의 경전들과 이른바 “영감을 받은” 저술들로 나타났으며, 위대한 발명가와 과학자들, 시인들과 예술가들의 정신적 과정들을 인도해 왔다.

텔레파시와 영감은 빛 그 자체나 라디오처럼 개별적인 인간 에텔체와 이것이 우주적 에텔체와 맺는 관계에 의존적이다. 그들은 영혼과 혼의 더 미세한 세계를 증언한다.
새로운 개혁이라는 책의 맺음말에서 푸핀은 이렇게 말한다.

“이 초물질적인 물질의 의미를 우리가 해독하려고 시도할 때 혼의 창조력은 유일한 안내자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혼을 다른 사람의 혼과 비교하고 하위의 동물의 혼과 비교하는 가장 믿을 만한 기준을 제공한다. 양적인 측정의 과학적인 방법들을 어느 정도 닮은 이러한 비교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계속되어 왔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연구 절차는 관찰, 실험 그리고 계산에 의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에 상응한다. 그것이 정밀성이 부족한 것은 주의깊은 비교 고찰에 의해 여러 세기 동안 정성적qualitative 측정을 하면서 생겨난 엄청난 시행착오들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혼이 동물 혼에 비해 훨씬 더 우월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이가 몸 구조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는 일반적인 판단에 이르게 된다. 또한 비교에 의해서 다른 모든 차별화된 요소들 위에 우뚝 솟은 한 가지 요소가 드러났다. 그것은 영적인 요소였다. 인간 혼의 창조력은 인간 의식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 세계이다.” 미카엘, 푸핀, 새로운 개혁, pp. 264, 265.


가능성이 있는 다른 연구 분야로는 인간의 오라aura에 대해 킬르너 박사가 작업을 진전시킨 것이 있다. 그는 이것을 인간의 분위기라는 책에서 구체화했다. 비범한 힘에 대해 많은 계열들의 연구를 독자들을 위해 잘 요약해 놓은 것으로는 피더랄 인디펜던트라는 호주의 정기간행물에 나오는 최신의 글이 있다. 이로부터 두 문단을 인용한다.

“아인슈타인의 최신 상대성 이론을 연구해 온 과학자가 최근에 그리스도가 물 위를 걸었던 사건을 새롭게 조명했다. 연구 결과로 H. H. 쉘던은 회의주의자들이 오랜 동안 조롱해 왔던 성경의 이야기가 과학적 법칙으로 설명 가능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기적은 회의주의적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상대성 역학의 법칙과 전기 법칙은 하나의 공식으로 환원될 수 있고, 전자기 힘이 중력에 영향을 미쳐, 이를 완전히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라고 셀던 교수는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최근 수학 이론에 따르면, 오직 하나의 본체가 있으며, 전기 및 중력 성분을 포함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법칙이 있고, 양자는 모두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이제 이러한 발견이 이루어진 결과로써 비행기를 엔진이나 물질적인 지지 없이 고도를 유지시키고 창에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공중에서 걸어나오는 일들이 쉽게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연구 분야라고 셀던 박사는 믿고 있다. ‘만약 이 이론이 전기와 중력이 사실상 같다는 것을 증거로 세운다면 우리는 실제로 중력 에너지로부터 우리 자신을 격리시킬 수 있다’고 그는 선언했다. 이러한 믿을 수 없어 보이는 가능성의 실제적인 증거로 쉘던 박사는 자기에 민감한 퍼멀로이(니켈과 철의 합금) 막대기가 자석 밑에 놓이면 어떻게 공중에 혼자 매달리게 되는지를 들었다.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이론적 조명으로 발이 물 표면에 닿자마자 밑으로 가라앉게 하는 중력 법칙에서 그리스도가 자유로웠던 것은 몸 속에 막대한 양의 전자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이것은 그의 개성과 생명력으로부터 솟아나는 어떤 에너지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모든 그림에는 머리 주변에 후광이 그려져 있다. 한때 이 후광은 그의 사도들이 과도하게 상상한 결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심령 현상을 연구한 많은 학도들과 함께 과학은 모든 인간에게 어떤 강력한 전기 기계에서 방출되는 발광과 흡사한 후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실제적인 실험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러한 주장은 과학이 영적인 일들과 물질적인 것을 구분짓는 경계선을 급속히 관통하고 있다는 진전된 증거이다. 일단 상위 법칙의 지식은 하위 법칙들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진정한 영적인 유산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종교가 과학적인 근거에 서게 될 그 날의 여명을 고대하고 있으며, 푸핀 박사가 덧붙여 말한 것처럼 여러 시대 동안 목격한 진실들이 증명되고 입증될 것이다.

“그렇다, 신의 영적인 현실들은 볼 수 없지만, 형성되어 있는 물리적인 사물들 속에서 드러나는 물리적 실재에 의해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게 된다. 사도의 말에 대한 이런 해석에 따르면 물리적인 현실과 영적인 현실은 서로를 보완한다. 그들은 동일한 현실의 두 가지 극단terminals으로, 한 극단은 인간의 혼 속에 거주하며 다른 것은 외적 세계의 사물 안에 있다. 과학과 종교가 왜 서로를 보충해야 하는지 기본적인 이유 한 가지가 여기에 있다. 그것들은 신성이 거주하는 세계로 인간 혼이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두 개의 기둥이다.” 미카엘 푸핀, 새로운 개혁, p. 272.


그때 새로운 능력, 새로운 이상, 신과 물질에 대한, 생명과 영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지닌 새로운 인종이 출현할 것이다. 그 인종을 통해 그리고 미래의 인류를 통해 메카니즘과 구조와 아울러 그 메카니즘을 사용하여 그 자신의 본성, 즉 사랑, 지혜 그리고 지성을 나타내는 혼, 즉 본체도 알게 될 것이다.

과학은 이 궁극적인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진화 과정의 경향은 형상과 생명 사이의 보다 완벽한 적응을 향해 가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 왔다. 모든 창조를 통해 모든 곳에서 한 가지 목적이 작용하고 있으며. 완벽을 향한 의지가 현현하고 있다. 그 목적과 의지는 사랑과 지혜에 의해 조절되고 그 두 가지 형태의 에너지, 즉 영혼의 목적과 혼의 견인력은 물질 측면의 완성에 지성적으로 적용되어 있다. 영혼, 혼 그리고 몸의 성스러운 삼개조(triplicity: 삼위일체)는 세계 속에서 풍부한 심상, 색채, 형태로 현현하고, 세계의 경전 속에서 인류를 위해 표현된 완성을 향해 모두 전진해 갈 것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브라우닝의 환상과 묘사는 우리의 연구 결과를 요약해 줄 것이고, 이 글을 끝맺는 데에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신은 새롭게 하시니
고대의 환희를. 그래서 모든 것 속에 살고,
생명의 순간적인 시작으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는 이 계획의 완성
존재의 그것, 그의 특성들은 여기로 그리고 저기로
가시적인 세계 도처에 흩어졌으나,
결합되기를 청하였네, 희미한 단편들이 원했으니
어떤 경이적인 전체 속에서 결합되기를
불완전한 성질이 창조를 모두 경과하여
하나의 피조물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이 모든 흩어진 광선들이 만나야 하는 어떤 점
사람의 능력 속에 수렴되는...
모든 종족이 똑같이 완성될 때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모두가 인류를 향해
그리고 그 목적을 만들어 저 멀리 두었네
그러나 완성된 인간 내면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신을 향한 성향. 예언은 말했으니
사람의 근접함을, 그래서 사람은 자아 속에서 일어나
8월의 대망, 상징, 유형들
희미한 광채 중에 계속 전진해 가는
저 영원한 원 속에서 생명은 추구하네.
사람들이 자기 본성의 경계를 통과하기 시작하여
확실히 바뀐 새로운 희망과 돌봄 발견하고
적절한 기쁨과 슬픔, 너무나 크게 자라네
옳고 그름의 편협한 신조, 사라지고
측량하기 힘든 선에 대한 갈증 앞에, 평화
그들 내면에서 점점 더 상승하네.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지구에 있구나,
평온히. 반쯤 이룬 피조물들의 라운드 가운데에” 로버트 브라우닝, 파라켈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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