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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스스로 사랑을 아는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자신의 사랑을 믿는 한도 내에서만

타인의 사랑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회상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 심경은 완전히 말로 옮겨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긴 기쁨과 슬픔이 극치인 순간에는

누구나 홀로 연주하는 말없는 생각이라는 곡조가 있게 마련이다.

그때 내 느낌은 슬픔도 기쁨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었다.

나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려 하지만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산화되고 마는 유성처럼 날고 있었다.

 

실상 나와 그녀의 영혼을 꿰뚫고 간 그 봄은 얼마나 우수에 찬 계절이었던가!

흔히 5월에는 이제 곧 장미가 시들 거란 생각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그 계절에는 매일 저녁 꽃잎이 하나씩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옛 스승은 자신의 교리를 결코 엄밀하게 논증하려고 애쓰지 않았거든요.

그는 씨 뿌리는 농부처럼, 단 몇 알의 씨앗이라도 비옥한 땅에 떨어지면

천 갑절 결실을 맺으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그냥 자신의 교리를 뿌린 거랍니다.

그 신학의 스승이 그런 식으로 자기 교리를 굳이 입증하려 애쓰지 않는 이유는

그가 지닌 인식이 그만큼 충만했기 때문일 겁니다.

논증이라는 형식을 묵살할 만큼.

 

신이 모습을 바꾸어 인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지,

인간이 신으로 화할 수는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인간 영혼을 단련시키는 일종의 불은 되겠지만,

인간의 영혼을 가마솥의 끓는 물처럼 증발시키지는 못합니다.

자아의 허무를 인식한 자는 그 자아가 곧 진정한 신성의 반영이라는 것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신성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그것이 비록 불꽃의 잔광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적인 실체를 자신 안에 내포합니다.

차라리 나는 광채 없는 불꽃이나 빛이 없는 태양, 또는 피조물이 없는 창조주가 무슨 의미를 갖느냐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하느님의 빛에서 나와 그 빛 안에서 합일이 이루어지는 곳에선

정신적 교만이나 경솔한 방종, 분방한 기질을 볼 수 없으며,

그곳엔 오로지 끝없는 겸허함, 무한히 자신을 움츠린 우려의 마음,

단정함과 성실, 평등과 진실, 평화로움과 만족스러움,

요컨대 덕성에 속한 일체의 것이 자리하게 되느니라,

그렇지 않은 경우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합일은 이미 아니로다.

<독일 신학 이십팔장 >

 

 

<파묻힌 생명> Matthew Arnold(1822~1888)

 

우리사이에는 익살스러운 재담이 가벼이 날고 있다.

그러나 보라, 나의 눈이 눈물로 젖어 있음을!

이름 없는 슬픔이 나를 덮쳐온다.

 

그렇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재담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웃음을 건넬 수 있음을!

그러나 이 가슴 속에는 남모르는 무엇이 감추어져 있으니,

그것은 너의 가벼운 이야기도 몰아낼 수 없는 것,

너의 손을 이리 다오, 그리고 잠시만 침묵해 다오.

다만 너의 그 맑은 눈을 내게로 향해 다오.

너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을 읽을 수 있도록, 사랑하는 이여!

, 사랑조차 이토록 약한 것일까?

마음을 열어 그것을 말하게 할 힘이 없는가?

사랑하는 이들조차 진정 느끼는 것을

서로 표현해낼 힘을 갖지 못한 것일까?

나는 알고 있었지,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감추는 것을,

혹시나 자신의 생각이 드러나면,

남들에게 무심히 거부당할까, 아니면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또한 알고 있었지, 사람들은

거짓 탈을 쓰고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남들에게나 자신에게나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 그러나

모든 인간들의 가슴속에서는 똑같은 심장이 고동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이여! -

그 같은 저주가 우리의 가슴과 우리의 목소리까지 마비시킨단 말인가? -

그렇게 우리도 벙어리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 단 한순간이라도 우리의 심장을 열어젖힐 수 있다면,

우리의 입술을 묶고 있는 사슬을 풀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을 묶고 있는 것은 깊은 운명의 손길인 것을.

 

운명은,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아이가 될는지를 예지하고 -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일들에 몰두하며

온갖 싸움질에 빠져들며,

사뭇 본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이 변할 수 있음을 예지하고 -

인간의 경박스런 놀음 가운데서도

순수한 자아를 지키도록, 방종 가운데서도

존재의 법칙에 따르도록,

숨어 있는 인생의 강으로 하여금

우리 가슴 깊디깊은 곳을 관류해

보이지 않는 흐름을 추진하도록 명했다.

 

하여 우리의 눈은 그 묻힌 흐름을

보지 못하며, 비록 그 섭리의 흐름을 타고 있으되,

우리의 모습은 불확실함 속을

표류하는 장님 같은 것.

그러나 붐비는 세상의 길목에서도

소란스런 투쟁 속에서도

우리의 묻힌 생을 알고 싶은

무한한 욕구가 솟구치니,

그것은 우리 삶의 참된 본연의 길을 알고자

온 힘과 불꽃을 사르고 싶은 갈증이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이토록 세차게 고동치는

심장의 신비를 캐려는 우리의 삶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가슴을 파헤쳐보았는가.

그러나 슬프게도! 석연하게 그 광맥을 파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몇 천 갈래 길에 서 보았고,

길목마다에서 정신과 힘을 보았다.

그러나 단 한순간도, 우리 본연의 길에 서보지도,

본연의 자아를 만난 적도 없다.

우리의 가슴을 통해 흐르는 그 숱한 이름 모를 감정 중에

단 한 가닥도 표현해낼 능력이 없었다.

하여, 그 감정들은 표현을 찾지 못한 채 영원히 흐르고 있다.

긴 세월 헛되이 우리는 숨겨진 자아를 좇아

말하고 행동하고자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웅변이며

그럴싸하지만 , 그건 진실은 아닌 것이다!

 

하여 우리는 이 같은 내면의 투쟁에

더는 시달리고자 하지 않는다.

속절없는 순간을 향해 요청한다, 몇 천 가지 무위한 행위를,

그것을 망각하고 마비시킬 힘을.

, 그러면 그 순간 즉각 응해 와서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때로는, 몽롱하게 그림자처럼,

끝없이 아득한 어느 왕국에서 오듯

영혼의 깊은 현실에서

미풍과 부유하는 메아리가 찾아와

우리의 날들에 우울을 더해준다.

 

다만 아주 드물게 -

사랑하는 이의 손길이 우리의 손에 놓일 때,

무한한 시간이 광채를 띠고 몰려와

녹초가 되어

우리의 눈이 상대의 말을 읽어낼 수 있을 때,

세상사에 귀 막은 우리 귀에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애무하듯 울려올 때 -

그때에는 우리 가슴속 어디멘가 빗장이 열리고,

오랫동안 잊었던 감정의 맥박이 고동을 치게 된다.

눈은 내면을 향하고, 가슴은 평온해지며,

이제 우리가 뜻하는 것을 말하게 되고

우리의 소망을 알게 된다.

굽이치는 생의 속삭임을 듣게 되며, 생의 강물이 흘러가는

초원을, 태풍과 미풍을 느낀다.

날아 도망치는 그림자 같은 휴식을 잡으려고

영원한 추격을 벌이는 인간의 치열한 경주에,

마침내 휴식이 찾아온다.

 

이제 서늘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미문(未聞)의 고요가 그의 가슴을 덮는다.

그때 그는 생각하리라.

자신의 생명을 잉태한 언덕과

그 생명이 흘러갈 태양을 이제 알고 있노라고.

 

*’Deutsch’라는 말의 어원을 보면 특정한 민족이나 종족을 지칭한 이름에서

파생된 말이 아니고 그 자체가 민족, 종족에 속한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 말은 지배층 이었던 라틴 민족에 대립되는 모든 것

즉 민족의식이나 사람, , 언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어왔다.

좋은 의미로는 성실, 신의, 철저성을, 나쁜 의미로는 우둔함, 고루함을 지칭한다.

 

*파묻힌 생명 Matthew Arnold(1822~1888) : 영국의 시인이며 비평가.

고대 정형을 따른 시 형식에 새로운 삶의 내용과 이상을 추구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1857년에서 1867년까지 옥스퍼드대학 교수로 있었다.

따라서 이 책 <독일인의 사랑>이 씌어질 무렵에는 저자의 동료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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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몽의 스승은 말하기를 옛날 의 체득자는 무엇을 옳다고 함이 없었고

무엇을 그르다고 함도 없는 경지에 도달했을 뿐이다.

그 학풍은 고요하니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關尹은 말하기를 자기에게 집착하지 않으면 형체 있는 만물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움직임은 물과 같아서 모든 사물에 스며들고,

그 고요함은 거울과 같아서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고 그 반응이 메아리와 같다.

그러면서도 흐릿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고요하여 맑은 샘물과 같다.

이 같은 경지에 동화하면 화합할 수 있고 자기 것으로 차지하려고 하면 잃어버린다.라고 하였다.

그들은남보다 앞선 적이 없었고 항상 남의 뒤를 따라갔다.

 

老聃은 말하기를 남성적인 함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여성적인 유약을 지키면 모여드는 천하의 계곡이 되며,

淸白의 맑고 깨끗함을 알고서 더러움을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앞으로 나아가면 자기는 홀로 뒤로 처진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천하의 모든 오욕을 내 몸에 뒤집어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충족을 추구할 때 자기는 홀로 공허함을 추구해서 實利저장하는 일이 없었다.

그 까닭에 도리어여유가 있는지라 높이 솟은 산처럼 넉넉하다.

자기 몸을 움직일 때 천천히 움직여 쓸데없이 精氣를 낭비하지 않고

아무 것도 작위하지 않으면서 기교를 부리는 행동을 비웃는다.

사람들이 모두 행복을 구하는데 자기는 홀로 몸을 구부려 온전함을 얻는다.

그리하여 老聃은 말하기를 어떻게든 허물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여

깊은 것을 근본으로 삼고 간략함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서

견고하면 부수어지고 날카로우면 무뎌진다.”라고 하여

언제나 만물을 너그럽게 마주하고 남에게 모질게 대하지 않으니 궁극에 도달하였다고 할 만하다.

關尹, 老聃은 옛날의 넓고 큰 眞人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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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약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인은 재물 때문에 자기 몸을 희생하고, 군자는 명성 때문에 자기 몸을 희생한다.

그들이 본연의 감정을 변화시키고 本性을 바꾸는 목적은 다르나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버리고 해서는 아니 될 일에 자기 몸을 희생함에 이르러서는 같다.’

그래서 말하기를 재물 때문에 자기 몸을 희생하는 소인이 되지 말고 근본으로 돌아가 너의 자연인 을 따르며, 명성 때문에 자기 몸을 희생하는 군자가 되지 말고 근본으로 돌아가 자연인 의 도리를 따르도록 하라.

때론 구부리고 때론 곧게 나아가면서 너의 自然의 극치를 주시하면서 사방의 만물을 바라보면서 때의 추이와 함께 변화하라.

是非相對의 견지에 얽매이지 말고때로는 옳다 하고 때로는 그르다 하면서 너의 회전축을 잡으며 홀로 너의 뜻을 이루어 나가면서 와 함께 逍遙 徘徊하며 즐겨라.

너의 행동을 한 가지 방향으로만 오로지 한정하지 말며 너의 독단적인 正義를 내세워 그것을 완성하려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네가 추구해야 할 참다운 를 장차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너의 를 좇지 말 것이며 너의 세속적 성공에 몸을 희생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장차 너의 자연인 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無約의 말처럼은의 왕자 比干하다가심장이 갈라졌으며 伍子胥吳王 夫差를 간하다가눈알이 도려내졌으니, 이것은 이 초래한 재앙입니다.

직궁은 아버지의 범죄를 증명했고 尾生은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이것은 이 초래한 재앙입니다.

또 춘추시대의 隱者 포초는 나무를 붙들고선 채로 말라 죽었으며 은대의 隱者 申徒狄은 간하였는데 들어주지 않자 스스로 황하의 물속에 빠졌으니, 이것은 廉潔이 초래한 입니다.

공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보지 못하였고, 匡子는 아비와 대립하여 아버지를 종신토록 만나지 않았으니 정의로 인한 과실입니다.

이것이 옛날부터 전해오는 것이며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이들 士人들은 자기의 말을 엄정하게 하고 자기의 행실을 말한 대로 꼭 실천하였는데, 그 까닭에 도리어 그 재앙을 당하고 그 환난에 걸렸던 것입니다.”

 

과불급 없이 평탄하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고 너무 많아서 남아도는 것이 해가 되는 것은 모든 사물이 그렇지 않음이 없는데, 그 가운데서도 재물의 경우가 제일 심하다.

이제 부유한 자들은 귀는 종소리, 북소리, 피리소리에 어지럽혀지고 입은 맛있는 쇠고기, 돼지고기와 탁주와 甘酒를 실컷 먹어서 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게 되니 어지러운 생활이라 할 만하다.

왕성한 혈기에 분별없이 빠져 있어서 마치 노예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괴로움이라 할 만하다.

재물을 탐내서 걱정으로 우울해지고 권력을 탐해서 체력을 다 소모하여, 여가가 있을 때에는 쾌락에 탐닉하고 몸이 윤택하게 되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움직이게 되니 병이라 할 만하다.

를 바라고 이익에 달려가기 때문에 가득 참이 마치 담장에 흙을 쌓듯 하지만 그로 인한 해를 피할 줄 모르며, 또한 왕성하게 쌓으면서 그만두지 않으니 가히 이라 할 만하다.

재물이 쌓여서 그것을 쓸 데가 없는 데도 재물 쌓는 일을 가슴속에 품고 멈추지 아니하여 마음은 온통 초췌해졌는데도 재물이 더욱 보태지기를 추구하여 멈추지 않으니 근심하고 번뇌한다 이를 만하다.

집안에 있을 때에는 위협하거나 빼앗으려는 도적을 걱정하고 밖에 외출해서는 강도와 도적의 해를 두려워하여 집 둘레에는 망루와 견고한 건축물로 두르고 밖으로는 감히 혼자 다니지 않으니 두려움에 가득 찬 생활이라 할 만하다.

이 여섯 가지는 천하에서 가장 심한 해로움인데도 세상의 富者들은 모두 이 사실을 잊은 채 살펴볼 줄 모른다.

그러다가 재앙이 현실로 나타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지고 있는 능력을 다 쏟고 긁어모은 재산을 다 털어서 다만 하루라도 아무 일 없는 평온한 삶으로 돌아가기를 구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명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하고 이익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마음을 흐트러뜨예리고 몸을 멸망시켜 가면서까지 名利를 다투니 이는 또한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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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知太公調에게 물었다.

향촌의 말[丘里之言]이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太公調가 말했다.

향촌이란 열 개의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과 백 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풍속을 형성하고 있는 집합체이다.

다른 것을 합하여 같은 것이 되고 같은 것을 분산시켜 다른 것이 되니 지금 말[]百體를 각각 따로 지적하여 命名하면 말이 될 수 없겠지만 눈앞에 매어져 있는 말의 百體를 총체적으로 모아서 말하면 그것을 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덕이나 산은 낮은 토지가 쌓여서 높게 된 것이고, 長江黃河는 작은 물이 모여서 크게 된 것이고, 大人은 만물의 를 하나로 병합하여 공평하게 베푼 것이다.

그리하여 大人밖에서 들어오는 말을 들을 때 스스로의 마음속에주관을 확립하지만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는 않으며, 안에서 밖으로 말을 발출할 때 올바름을 지키지만 거부당하지는 않는다.

춘하추동의 四時寒暑를 달리하나 자연[]은 그중 어느 한 계절에만 혜택을 주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일 년이 이루어지며, 나라의 다섯 관직은 각각 직무를 달리하나 군주는 그 가운데 어느 한 관직만을 사사로이 중시하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나라가 잘 다스려지며, 文事[]武事[]는 각각 그 기능이 다르나 大人은 그 어느 하나에만 마음을 주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大人文武를 겸비하며, 만물은 각각 속성을 달리하나 는 그중 어느 하나만 사사로이 사랑하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이름이 없으며, 이름이 없으므로 無爲하니 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때에는 끝과 시작이 있고 세상에는 변화의 推移가 있다.

그리하여 流行反覆해서 나타나는지라 마음에 거슬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마음에 맞는 경우도 있으며, 각자가 자기 생각을 쫓아 행동하면 나아가는 방향이 다른지라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차이가 있게 된다.

비유하자면 커다란 연못에 있는 여러 가지의 素材가 모두 그곳에 머물러 있는 존재인 것과 같고, 큰 산을 볼 때 나무와 돌이 똑같이 산을 이루는 기반인 것과 같으니 이 같은 것을 일러 향촌의 말[丘里之言]이라 한다.”

少知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丘里之言]라고 말해도 좋겠습니까?”

太公調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지금 사물의 를 헤아려 보면 그 수가 一萬에 그치지 않거늘, 그런데도 그것을 만물이라고 대략 한정해서 말하는 것은 수 가운데 많은 숫자인 을 가지고 불러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라고 하는 것은 형체가 있는 것 가운데 제일 큰 것이고, 음양이라는 것은 중에서 제일 큰 것이고, 라는 것은 이것들을 다 포괄하는 보편자[]이다.

가 크다고 하는 데 말미암아 이것을 또는 라고통칭해서 말하면 우선 괜찮지만 그렇게 되면 이미 이름 붙여진 가 이미 있게 된 것이니, 이렇게 이름 붙여진 를 가지고 장차 참다운 에 견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만일 이름 붙여진 를 가지고 변론을 해나간다면, 그것은 비유하자면 를 개나 말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것과 같을 것이니 참다운 에는 미치지 못함이 한참 멀다.”

少知가 말했다.

동서남북 사방의 지상세계와 상하사방[六合]의 무한한 우주 속에서 만물이 생성되어 나오는 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태공조가 말했다.

음양의 二氣가 서로 비추고, 서로 해치거나 서로 도와주며, 춘하추동의 四時가 서로 교대하여 서로 다음 계절을 낳고 서로 앞의 계절을 消去하는 순환을 계속하는데, 愛憎好惡의 감정과 그에 따른 退의 운동이 이에 번갈아 일어나며, 음양의 조화를 구하는암컷과 수컷, 남녀의 결합이 여기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우리의 생활환경은안락과 위난이 번갈아 바뀌고 우리의 운명은재난과 행복이 서로 인과가 되어 생기고 우리의 시대상황은완만함과 급박함이 서로 겨루어 다가와서 여기에 모임(국가사회의 興隆)과 흩어짐(쇠망)이 성립된다.

이것이 우리가 기술할 수 있는 (명칭)(형체)의 전부(현상세계의 모든 현상)이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묘함과 미세함의 전부이다.

만물의 순환변화의 순서가 서로 조정하여 어지러워지지 아니함과 번갈아 일어나는 운동이 서로 消長을 이루는 모든 현상이 궁극에까지 가면 곧 다시 돌아오고 마치면 곧 다시 시작하니 이것이 에 갖추어진 성질이다.

그러나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로 다 아는 것은 기껏만물의 성질을 究明한 것일 따름이다.

참다운 를 통찰하는 사람은 만물이 死滅해가는 이 세상 밖의 것을 追隨하지 않고 만물이 생성해 나오는 起源을 탐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論議가 멈추어야 할 영역이다.”

少知가 말했다.

季眞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한 莫爲接子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或使’, 이 두 사람의 주장 중 어느 쪽이 사실에 맞고 어느 쪽이 도리에 벗어난 것일까요?”

태공조가 말했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것과 같은 일은 사람들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비록 큰 지혜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轉化해 온 것인지 언어로 말할 수는 없으며 또 그것이 장차 무엇으로 轉化하게 될지 뜻으로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을 분석해나가면 작기로는 견줄 것이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고 크기로는 둘러쌀 수 있는 것이 없는 極大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주재자가 있다는 주장과 그렇게 하도록 시킨 주재자가 따로 없다는 주장은 현상에 얽매인사물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므로 결국 잘못된 것으로 간주된다.

接子의 주장처럼 시키는 것이 있다.’고 하면 이 되고 季眞의 주장처럼 주재자가 없다.’고 하면 곧 에 빠지고 만다.

명칭이 있고 실질이 있으면 이것은 사물이 존재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고, 명칭도 없고 실질도 없으면 사물이 공허함에 떨어지고 마니 言語로 표현하고 뜻으로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나 말로 표현하면 할수록 더욱더 진실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태어나는 것을싫다고 기피할 수 없으며, 이미 죽고 난 뒤에 죽는 것을 싫다고거부할 수 없으니, 生死의 문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도리는 인간의 지혜로는쉽게 볼 수 없다.

그러니 누군가 시켰다는 주장과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의심한 끝에 도달한 假說에 불과하다.

내가 만물 생성의근원을 관찰해보건대 그것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한이 없고, 만물 전개의끝을 추구해보건대 그 미래의 시간은 멈춤이 없다.

생성 변화의 理法이처럼 무궁무한하니, 말이 없게 되어야만 만물과 더불어 생멸 변화의 이법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시켰다는 주장과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言語를 근본으로 생겨난 표현이니 사물과 더불어 마쳤다 시작했다 하는 것이다.

참다운 있다고 할 수도 없으며 또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라는 명칭도 실은빌려서 通用하는 것일 뿐이다.

누군가 시켰다는 주장이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물의 일부분에 존재하는 것일 뿐이니 이것을 가지고서야도대체 어떻게 大道를 닦을 수 있겠는가.

만일 말로 충분하다면 하루 종일 말을 해서 를 다 究明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말로 부족하다면 하루 종일 말을 해도 겨우 이나 다 구명하는 데 그칠 것이다.

그러니 는 만물의 근원이요 궁극적인 것인지라 언어나 침묵이 그것을 싣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언어에 의한 표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한 침묵도 아닌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궁극의 경지에까지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Zoe Saldana The Songcord Lyrics

 

Lie si oe Neteyamur I experience Neteyam

Nawma Sa’nokur mìfa oeyä to the great mother my inside (maybe a reference of Neteyam, born from her inside, going to the great mother?)

Atanti ngal molunge You brought the light

Mìpa tìreyti, mìpa tìkanti (you brought) new life, new goal

Lawnol a mì te’lan great joy that is in the heart

Lawnol a mì te’lan great joy that is in the heart

Ngaru irayo seiyi ayoe We thank you

Tonìri tìreyä for the nights of life

Ngaru irayo seiyi ayoe we thank you

Srrìri tìreyä for the days of life

Ma Eywa, ma Eywa O Eywa, o Eywa

Zola’u nìprrte’ ma Kiri welcome, Kiri

Ngati oel munge soaiane I bring you to the family

Lie si oe atanur I experience the light

*Pähem parul, tì’ongokx a oeta A miracle arrives, a birth that comes from me

Lawnol a mì te’lan great joy that is in the heart

Lawnol a mì te’lan great joy that is in the heart

Ngaru irayo seiyi ayoe We thank you

Tonìri tìreyä for the nights of life

Ngaru irayo seiyi ayoe we thank you

Srrìri tìreyä for the days of life

Ma Eywa, ma Eywa O Eywa, o Ey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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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하나의 자유다.

선택함이 없이 살고 삶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허용한다면

그때 그대는 자유인이 된다.

삶이 그대를 통해 일어난다.

 

天地爲棺

 

열한째날 아침 장자의 죽음

 

장자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성대한 장례식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으로 관을 삼을 것이다.

해와 달은 나를 호위하는 한 쌍의 옥이 될 것이며

행성과 별무리들이 내 둘레에서 보석들처럼 빛날 것이다.

그리고 만물이 내 장례식 날 조문객으로 참석할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모든 것은 두루 돌보아 진다.“

 

제자들이 말했다.

우리는 까마귀와 솔개들이

스승님의 시간을 쪼아 먹을까 두렵습니다.“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 땅위에 있으면 나는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땅속에서는

개미와 벌레들에게 먹힐 것이다.

어는 경우든 나는 먹힐 것이다.

그러니 왜 그대들은 새에게 먹히는 경우만 생각하는가?“

 

 

 

_ 오쇼 강설

 

강은 어느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 염려하지 않고 흐름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강은 어김없이 바다에 이른다.

 

지혜로운 자는 언제나 존재에 관심을 두지만,

무지한 자는 언제나 행위에,

앞으로 행해야 할 것에 관심을 둔다.

존재 그 자체는 그들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장자는 존재에 관심이 있지만, 제자들은 행위에 관심이 있다.

 

왜 인간의 얼굴은 그렇게 슬프고 추한가?

그것은 그들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미래에 살며, 따라서 유령과도 같은 존재다.

 

삶은 결코 죽음만큼 절실할 수 없다.

삶은 결코 죽음만큼 아름다울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비등점이라 부른다.

죽음의 순간에 삶 전체가 비등점에 이른다.

모든 것이 이 세상으로부터 다른 세상으로,

육체로부터 육체 없음으로 증발해 간다.

그때는 침묵해야 한다.

죽음은 단 한 순간에 일어날 것이며, 그것을 놓쳐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물건은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는 가슴을 잃어버렸다.

그대는 궁전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왕이 될 수 있는 인간은 더 이상 없다.

궁전은 무덤이 될 것이다.

세상의 도시는 아름답고 나날이 거창해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마치 묘지와 같다. 살아 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존재는 하나의 자유다.

그대가 선택함 없이 살고,

삶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허용한다면 그때 그대는 자유인이 된다.

그때 그대는 절대적으로 휴식할 수 있다.

이 절대적 휴식이 인간 최고의 경지이고, 처음과 끝이다.

자유인이 되라.

삶에 있어서도 죽음에 있어서도 장자와 같은 자유인이 되라.

 

장자(莊子) <361> 列御寇篇(열어구편)

 

잡편의 제10. 편명인 열어구(列御寇)는 본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인명을 취했다. 내용은 독립된 일곱 개의 설화를 모은 것으로, 마지막에 장주(莊周)의 설화가 있고 그의 임종 때의 말도 수록 되어 있다. 내용을 구성하는 설화는 열어구(列御寇)와 백혼무인(伯昏瞀人)과의 문답, 정인(鄭人) ()의 이야기, 장주(莊周)와 조상(曹商)과의 문답, ()의 애공(哀公)과 안합(顔闔)과의 대화, 장주에 관한 2개의 일화, 장주의 임종 때의 문답, 그리고 또 주평만(朱泙漫)의 도룡(屠龍)이야기, 정고보(正考父)의 삼명(三命) 이야기 등을 더해서 모두 아홉 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편의 구성은 <외편>이나 <잡편>에 실려 있는 내용들과 외견상으로는 거의 같아 보이나 내용적으로는 상호 관련성이나 일관성도 없고, 오히려 단편적인 자료를 모았다는 인상을 깊게 한다. 이 편의 끝에 실린 장자 임종 때의 이야기는 문장이나 구상이<잡편>중 다른편보다 뛰어난 데가 많다는 것을 들어, 편집상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소동파(蘇東坡)를 위시하여 여러 후인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하늘과 땅을 관으로 삼는다>

 

莊子將死(장자장사) 弟子欲厚葬之(제자욕후장지)

장자가 죽으려 할 때, 제자들이 그를 성대히 제사 지내려 했다.

 

莊子曰(장자왈)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吾以天地爲棺槨(오이천지위관곽)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과 관 뚜껑으로 삼고,

 

以日月爲連璧(이일월위연벽)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 장식으로 삼고,

 

星辰爲珠璣(성진위주기) 萬物爲齎送(만물위제송)

별자리들을 진주와 옥 장식으로 삼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삼으려 하니,

 

吾葬具豈不備邪(오장구기불비야)

나의 장례 용품은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니냐?

 

何以加此(하이가차)

여기에 더 무엇을 보태려 하느냐?”

 

弟子曰(제자왈)

제자들이 말했다.

 

吾恐烏鳶之食夫子也(오공오연지식부자야)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뜯어 먹을까 두렵습니다

 

莊子曰(장자왈)

장자가 말했다.

 

在上爲烏鳶食(재상위오연식)

위쪽에 놓아두면 까마귀와 솔개가 먹을 것이고,

 

在下爲螻蟻食(재하위루의식)

아래쪽에 묻으면 개미들이 먹을 것이다.

 

奪彼與此(탈피여차)

어느 것들이 먹는다고 그것을 빼앗아 다른 것들에게 주는 것이다.

 

何其偏也(하기편야)

어찌하여 그리 편벽되게 생각을 하는 것이냐?”

 

진리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진리는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다시 또다시 자기 자신의 발로 서야만 한다.

 

聖人之言

 

열째날 아침 수레를 만드는 사람

 

나라의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환공이

어느 날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침 수레를 만드는 목수인 윤편이라는 자가

뜰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윤편이 문득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일어나더니

환공에게 다가와 물었다.

좀 여쭙겠습니다만, 왕께서 지금 읽고 계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들의 말씀이다.”

윤편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성인들은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자 윤편이 말했다.

그렇다면 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화가 나서 말했다.

수레를 만드는 목수인 주제에 무엇을 안다고 떠드는 것이냐?

네가 지금 한 말에 대해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지 못하면

목숨이 없어질 줄 알라.“

 

그 수레를 만드는 자가 말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 일에서 얻은 경험으로 미루어

말한 것일 뿐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렁해서 쉽게 빠져 버립니다.

또 덜 깎으면 조여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게 적절히 손을 놀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퀴가 꼭 맞아 제가 원하는 대로 일이 끝납니다.

 

그러나 그 기술은 손으로 익혀 마음으로 짐작할 뿐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요령을

심지어 제 자식 놈에게조차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으며

자식 놈 역시 저에게서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이 일흔이 넘어서도 제 손으로

수레바퀴를 깎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진정으로 깨친 사실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못한 채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께서 지금 읽으시는 그 글이

그들이 남기고 간 찌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ᄁᆞ?“

 

-<수레를 만드는 자의 지혜>

 

 

 

 

 

<오쇼 강설>

 

 

시간은 허상을 만드는 재주꾼이다.

붓다가 다시 세상에 오면 사람들은 그를 거부할 것이다.

예수가 오늘날에는 숭배받지만 살았을 적에는 십자가에 처형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살아 있으면 사람들은 그를 처형한다.

죽으면 비로소 숭배하기 시작한다.

그를 구세주라고 생각하든, 큰 깨달음에 이른 인물이라고 생각하든,

신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든 그것은 이제 그대의 자유다.

이제 그대는 마음대로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투영할 수 있다.

그가 살았을 때는 그것이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가능하다.

 

기억하라. 종교는 과학보다 예술에 가깝다.

그리고 예술보다 더욱 오묘한 것이 종교다.

예술은 객관성을 상징하지만, 종교는 주관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객관적인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성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붓다가 니르바나(열반)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외부세계의 것이 아니다.

예수가 하늘나라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객관적인 세계의 어느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객관세계를 상징한다.

반면에 종교는 주관세계를 상징한다.

그것으로부터 세상과 연결된 무엇도 발견할 수 없다.

그대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 의미, 그 중요성을 발견할 수 없다.

그때 이라는 단어를 반복하겠지만 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예술 이상의 것, 기술 이상의 것이다.

 

한 사람의 붓다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나의 돌과 같다.

그는 망치와 끌로 그대에게서 비본질적인 부분들을 깎아나간다.

마침내 본질이 찬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 장엄함이 드러나고, 저쪽 세계가 이쪽 세계 속으로 꿰뚫고 들어온다.

그는 어떤 새로운 것을 이 세계 속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그대를 변화시키고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소유로부터 존재를 분리시켜야 한다.

소유로부터 소유자를 분리시켜야 한다.

육체로부터 영혼을, 주변으로부터 중심을.

그것은 하나의 기술이다.

어떤 화가도 그대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말할 수 없다.

그대는 스승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피카소를 바라보라.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한사람의 창조주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이 탄생하면 그 그림은 저쪽 세계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 아무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붓다가 말할 때, 그는 말하는 자가 아니다.

한 사람의 붓다가 걸어갈 때, 그는 걷는 자가 아니다.

한 사람의 붓다가 그대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그는 그 손이 아니다.

도가 그를 통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을 신이든, 그대가 원하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이제 그 손은 붓다의 손이 아니다. 그것은 도구에 불과하다.

신이 그를 통해 그대를 만지고 있으며, 붓다는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와 신 사이에 서 있지 않다.

 

인간에게서 신을 만드는 것,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술이다.

언제나 동물이고자 노력하는 인간으로부터 신을 창조해 내는 것,

그 사념을 떨쳐내고 그 에고를 버리게 해 궁극의 것이 내면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

그것은 실로 위대한 기술이다.

그것은 이슬방울 속에 바다를 실현하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차원 높은, 절대의 기술이다.

어떤 경전도 그것을 전할 수 없다.

오작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일 수만 있을 뿐이다.

그런 스승은 1천년에 한 번, 2천년에 한 번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나면 죽은 교파와 종파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숭배하기 시작한다.

 

뉴델리에 가면 어느 과자 가게의 간판에 이런 문장이 써 있다.

뉴델리에 가면 그 가게를 찾아보라. 그 문장은 이렇다.

정말 맛있는 과자! 수백 마리의 파리가 그것을 증명한다!’

 

 

인간의 마음은 오래된 것일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리는 술이 아니다. 새롭고 신선한 것일수록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살아있는 것이 더욱 심오하다.

죽은 것은 평면적이다.

그것들은 과거의 찌꺼기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축적된 과거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언제나 늙은 사람만을 죽게 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린아이로 대체시킨다.

이것은 신이 늙은 사람보다 어린아이를 더 믿는 다는 뜻이다.

늙은 사람이 이제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신은 새로운 것을 믿는데 인간은 낡은 것을 믿는다.

신은 그대의 자리에 한 아이를 탄생시킨다.

신은 많은 지식보다 순진무구함을 사랑하는 듯하다.

나이 먹고 빛바랜 나뭇잎보다 연약한 새순을 사랑하는 듯하다.

 

삶은 강물처럼 흐른다.

고여 있지 않으며, 똑같은 상황을 두 번 다시 연출하지 않는다.

늘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반복될 수 없다.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대가 새로운 것을 느끼지 못하고, 너무도 죽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어느 한 순간도 같지 않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새로운데, 오직 인간의 마음만이 고정되어 있다.

유일하게 낡은 것을 고집하는 것,

세상의 유일한 박물관,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화석을 수집하고 무덤에 집착한다.

 

도는 늘 다른 동굴에 몸을 숨기고서 말한다.

나는 어제의 동굴에 숨지 않는다. 그 동굴은 이미 끝났다.

숭배자들은 그 동굴에 대고 절할 것이지만 나는 이미 그곳을 떠났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가?

 

옛 성인 장자가 남긴 찌꺼기를 읽고 있는가?

 

 

 

Lotus Bloom (feat. Sara Bloom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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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안의 본성에 충실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안의 본성에 충실하도록 도우라.

이것이 종교적인 인간이고 진정한 구도자의 의미다.

 

獨行

 

아홉째날 아침 장자, 도를 말하다

 

마음에는 행복과 불행에 영향받지 않는

부동의 탑이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도에 의해

그 탑은 보호받는다.

자연의 도는 인위적이지 않고 의식함이 없는 것이어서,

꾸미고 계산하고 의도적일 때는

이미 자연의 도가 아니다.

 

스스로를 의식해 자기를 드러내고자 할 때

그 행위는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며

자기 본래의 것을 잃는다.

자기를 의식적으로 드러냄은 모두 거짓된 것이다.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면

바깥 세상의 일들이 마음을 어지럽혀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때 더 이상 자연의 도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다.

자연을 도를 잃으면

행동 하나하나가 재난을 부른다.

 

남의 눈에 띄는 밝은 곳에서 행하면

사람들이 벌을 내릴 것이며,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행하면

귀신이 벌할 것이다.

 

저마다 자연의 도를 이해하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그런 이는 사람에 대해서나 귀신에 대해서나

늘 평화로울 것이며,

마음의 탐에 초연히 홀로 머물며

늘 옳게, 그러나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할 것이다.

 

<마음의 탑>

 

 

 

 

<오쇼 강설>

 

지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기 전에 인간은 자연스럽게 에덴동산에서 살았다. 그 에덴 동산은 먼 옛날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곳이다.

나무들은 그대로 에덴 동산에서 살고 있다.

동물들도 여전히 에덴 동산에 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여전히 그 속에서 운행하고 있다.

지금 이곳이 에덴 동산이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그곳을 벗어나 살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법 없이도 존재한다.

자연은 그 자체의 고유한 법칙을 갖고 있으며 그 법칙은 인간에 의해 통과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동의절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법칙들이 이미 그곳에 있으며, 삶은 그 법칙들을 따른다.

그대가 간섭하지 않으면 그대는 금방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자연을 가로 막지 말고 허용하라.

그것과 함께 흘러가라.

그것을 신뢰하라.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나왔으며, 그것이 그대의 어머니, 그대의 근원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대는 그 품 안으로 돌아갈 것이다.

 

삶의 길에서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때 지적인 이해를 통해선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

그대 안의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인간,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자 원한다면 그 길밖에 없다.

명상이 그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사념이 끊어진 그 자리로 들어가라.

처음엔 힘든 노력이 될 테지만 점차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그 일이 일어날 것이다. 관념이 사라지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갈수록 더 많은 자유와 환희를 느낄 것이다.

 

의도적인 것, 인위적으로 만든 의지, 꾸밈과 계산을 버려라.

본성을 신뢰하고, 어린아이처럼 되라

본성이 그대를 안내한다.

졸리지 않는다면 잠잘 필요가 없다. 잠을 자야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의도함이 없이 움직이라.

그러면 그대는 근원에 이를 것이다.

이 근원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부동의 탑이고, 도이다.

 

자연스러운 것이 옳은 것이다.

쉬운 것이 옳은 것이다.

그대 자신이 되는 것, 그대는 오직 그것 밖에 될 수 없다.

다른 모든 것은 인위적인 것일 뿐이다.

 

 

 

신심명

03.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

간택(揀擇)함이 없는 마음이나 증애(憎愛)함이 없는 마음바탕에

털끝만큼이라도 가리고 택하는 차별심이나 미워하고 좋아하는 차별심이 남아 있으면

이 차별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택하고 버리는 마음이나,

미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은 모두 자기 욕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며,

욕심은 구하는 마음이 심해지면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만스러운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구하는 것이 있으면 반대로 구하지 않는 것도 있게 되니

자연히 좋고 나쁜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구하던 것이 구해지면, 더 좋은 것을 구하려 하게 되고,

또 점점 더 좋은 것을 구하려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니 언젠가는 불만이 생기게 된다.

또 이렇게 구하고 모아서 쌓아놓은 자기 것을 잃게 되었을 때도

역시 불만스럽게 되고, 그 불만이 커지면 원한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원한(怨恨)은 복수(復讐)로 이어질 수 있으니,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악순환의 발단은

간택하는 분별심과 증애(憎愛)의 분별심에서 일어나는 법이니

오직 간택(揀擇)하는 마음을 싫어하면 지도(至道)에 무난히 이를 수 있고,

증애(憎愛) 하는 마음이 없으면 지도하는 길이 통연(洞然)하고 명백(明白)해진다고 한 것이다.

 

간택하는 마음과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간택하는 마음이나 증애하는 마음은

이기심(利己心)의 근본인 오온심(五蘊心)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오온심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물질,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인데,

물질은 몸이고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은 통틀어서 마음이라고 하는데

우리들의 감각작용은 몸을 통해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 말이나 행동,

즉 간택 및 증애하는 느낌, 생각, 언행의 근본이 되는데 식()에서 일어난다.

 

이 의식은 전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나 금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 지배하는 나의 생각이다.

미워하거나 좋아하거나, 택하거나 버리는 생각의 요인은

나의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그렇게 판단되고 행하는 것이지

그 사물이나 사람 자체에 미운 털이 박혀있어서 미운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미운 털이 박혀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그 물건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 된다.

절에 오면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중에는 자기 비위에 맞는 사람도 있지만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 자체가 좋아서 내 비위에 맞고,

그 사람 자체의 성격이 나빠서 내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자신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자신의 오온심에서 비롯된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온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자기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만 있으면

그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나에게 접근해 온다 하더라도

그를 간택하거나 증애하는 마음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형형색색의 사람과 물건이 서로 어우러질 때

()함이나 성장함이 일어나는 법이고 창조가 가능해 질 수 있지만,

서로 대립하거나 배척할 때는 서로 쇠퇴해지고 멸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고 남을 상대하지 않으면 연기하는 대열에서 소외되고

자기 성격의 개선(改善)이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더욱 외골수로 빠지게 된다.

 

이것도 역시 자기가 간택하고 증애하는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

남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씀한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기도 하겠지만 많은 경우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고(思考)의 허물에 의해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씀은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관점(觀點)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간택하는 마음을 싫어하고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오온심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을 소멸하기 위해 참회하고, 복을 짓고, 도를 닦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참회는 복()을 짓는 뿌리이고,

복을 짓는 행위는 수행을 위한 뿌리이다.

즉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복 짓는 일부터 해야 하고,

복 짓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거나 해()가 되는 일을 한

성품, , 행동 등에 대한 참회가 있어야 한다.

참회를 통해서 복() 짓는 일에 역행하였던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음으로서 복 짓는 일에 가속이 붙게 된다.

 

복을 짓고 수행하는 일에 근본이 되는 것이 내 마음을 믿는 신심(信心)이다.

인과응보를 믿고 제행이 무상함을 믿으며,

제법이 무아하다는 가르침을 내려주신 불법승 삼보를 믿는 마음이다.

 

복 짓는 마음이란 나를 위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다.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으면 그 과보로 금생에 복된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건강 복, 부모 복, 형제 복, 친구 복, 스승 복, 관록 복, 명예 복, 재복, 사업 복, 부인 복, 남편 복, 자식 복,

불교를 만나는 복, 노래를 잘 부르는 복, 그림을 잘 그리는 복, 총명한 복 등등 수 없이 많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복을 짓는 업이 되기도 하고,

무기(無記)이기도 하고, 또 악업을 짓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어느 쪽으로 복 짓는 일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금생이나 내생에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항상 남과 잘 사귀고 남에게 필요한 일, 좋은 일을 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좋은 연을 많이 짓다보면

선한 도반을 많이 만나고 훌륭한 스승이나 선배 또는 귀인을 만나 하는 일마다

잘 풀려가 더욱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다.

 

남이 하는 언행이 나의 비위를 상하게 했을 때,

저 사람의 언행이 기분 나쁘다고 생각되는

즉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저 사람이 저런 언행을 하지 않았을까? 고 생각하는 마음이

간택(揀擇)이 없고 증애(憎愛)가 없는 마음이다.

 

상대방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화가 났을 때,

자기가 낸 화를 정당화하려 하거나 변명하려하는 것은

간택심과 증애심을 오히려 깊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화가 난 것을 인지하는 즉시

마음 속 깊이 참회하고 복 짓는 일을 찾아 하면

화도 다스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택심과 증애심도 점차 해소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복을 잘 지어 부처님 법에 수순할 수 있을 때

()과 혜()를 함께 닦아 탐욕심을 비워

선정(禪定)을 이루고 무명을 밝히는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Fountain of Sec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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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은 영원할 수 없다.

원인이 사라지면 그것도 사라진다.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 그것만이 영원할 수 있다.

그것을 찾으라.

 

秋水時至

 

여덟째날 아침 강의 신과 바다의 신

 

가을 홍수가 밀어닥쳤다.

수천갈래의 노도와 같은 물길이 황하로 밀려들었다.

강둑까지 물이 불고 강폭이 넓어져서

이쪽에서 바라보면 저쪽 강둑에 서 있는 것이

소인지 말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황하의 신은 무척 자랑스러워하며

세상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기 손안에 들어온 것이라 여겼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물결을 따라 흘러내려가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파도가 동쪽 수평선까지

무한히 이어진 것을 보고 놀라서 그만 말을 잊었다.

 

그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는

바다의 신을 향해 한탄했다.

속담에 겨우 백 개의 도리를 듣고는

천하에 자기만한 자가 없는 줄 안다는 말이 있는데

역시 그 말이 맞도다.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이다.

이제야 넓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구나.“

 

바다의 신이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여름 한철에만 사는 벌레에게 얼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철학을 논하는 자에게 삶의 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강의 신과 바다의 신>

 

 

<오쇼 강설>

 

삶은 하나의 초대이다.

그대는 손님이 되어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삶은 그대를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삶과 싸우지 말라.

삶을 해결하려고 고뇌하지 말라.

삶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삶은 하나의 신비다.

신비란 그대가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

그대가 그 속으로 사라져야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 자신이 신비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사랑이 녹아서 미움이 되고, 미움이 녹아서 사랑이 된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삶이 죽음 속으로 녹아들고, 죽음이 다시 삶 속으로 녹아든다.

이렇듯 존재계는 모순이지만 대립되는 두 세계 사이에는 깊은 조화가 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로 보인다.

마음은 논리적이지만 삶은 모순적이다.

그래서 그 둘은 결코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논리 속에서만 분명하게 선이 그어지고 규정지을 수 있을 뿐이다.

삶이란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삶은 모순 속에서 진행된다.

 

과학에는 머리가 필요하고, 예술에는 가슴이 필요하다.

그러니 삶에는 존재 전체가 필요하다.

머리만 활동하면 메마른 이론만 늘어날 뿐이다.

가슴만 활동하면 꿈과 허구만 늘어날 뿐이다.

존재 전체, 그것이 필요하다.

존재 전체로 움직일 때 그대는 우주와 만날 수 있다.

 

늙어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와 함께 살라.

그는 도의 사람이다.

행복한 젊은이는 많다.

그러나 그것은 문재가 아니다.

그러나 늙어서도 여전히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겨울이 오고 가을의 홍수가 물러갔으나 그가 여전히 행복하다면

그는 도를 깨친 사람이다.

영원한 삶의 근본을 깨우친 사람이다.

 

어느 날인가 그대는 바다에 이를 것이다.

바다란 무엇인가?

죽음이 곧 바다이다. 죽음은 무한히 넓은 바다와도 같다.

삶은 그 근원이 있지만 죽음은 근원도 없다.

삶은 강둑이 있어서 때로는 물이 불어나 거대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물이 메말라 강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은 강둑조차도 없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바다인 것이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야만 하듯이

인간 의식의 강물도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러야 한다.

 

현재가 좋은 시절이라고 믿는 노인은 드물다.

그들은 언제나 황금빛 옛시절 속에서 산다.

그때는 이러저러하게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상황이나 정치적 상황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때는 젊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좋았다.

가을 홍수로 강물이 불어났던 것이다.

이제 그대의 강은 바닥이 드러났지만 다른 강이 홍수를 맞이한 것일 뿐이다.

 

마음은 과거에 살든지 현재에 살든지 아니면 미래에 산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 인간의 관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시간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따라서 관념을 버리면 영원을 얻는다.

그것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그 세 가지 관념을 초월했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가 사라진다.

그때 그대는 행복 속에서 슬픔을 느끼고, 슬픔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때 그대는 젊음 속에서 늙음을 느끼고, 늙음 속에서 젊음을 느낀다.

그때 그대는 죽음 앞에서 어린아이이고,

탄생 앞에서 한사람의 노인이다.

 

도의 사람들은 말한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노자는 한 마디로 말했다.

진리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 표현된 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문제는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사용하는 언어에 있다.

그대가 사용하는 우물의 언어 그것이 문제이다.

 

도의 사람의 머리 속에는 사념이 없다는 것을 그대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대의 머리 속에는 단 한순간도 사념이 멈춘 적이 없다.

그대의 머리 속은 군중과도 같다.

그러니 아무 사념 없이 무심의 상태에 앉아 있는 도의 사람을 이해하겠는가?

 

 

 

For A Dancer - Katey Sagal

 

Keep a fire burning in your eye

Pay attention to the open sky

You never know what will be coming down

I don't remember losing track of you

You were always dancing in and out of view

I must've always thought you'd be around

Always keeping things real by playing the clown

Now you're nowhere to be found

I don't know what happens when people die

Can't seem to grasp it as hard as I try

It's like a song playing right in my ear

That I can't sing

I can't help listening

I can't help feeling stupid standing 'round

Crying as they ease you down

Cause I know that you'd rather we were dancing

Dancing our sorrow away

(Right on dancing)

No matter what fate chooses to play

(There's nothing you can do about it anyway)

Just do the steps that you've been shown

By everyone you've ever known

Until the dance becomes your very own

No matter how close to yours another's steps have grown

In the end there is one dance you'll do alone

Keep a fire for the human race

And let your prayers go drifting into space

You never know will be coming down

Perhaps a better world is drawing near

And just as easily, it could all disappear

Along with whatever meaning you might have found

Don't let the uncertainty turn you around

(The world keeps turning around and around)

Go on and make a joyful sound

Into a dancer you have grown

From a seed somebody else has thrown

Go on ahead and throw some seeds of your own

And somewhere between the time you arrive and the time you go

May lie a reason you were alive but you'll never know

 

 

 

..

.

.

.

.

 

 

신은 그대가 그에게로 간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대에게로 온다.

그대가 춤추면서 신에게로 다가가면 신도 춤추면서 그대에게로 다가올 것이다.

 

人相造道

 

일곱째날 아침 물고기와 도

 

 

물고기는 물에서 나고

사람은 도에서 난다.

물에서 난 물고기는

연못의 깊은 그늘로 찾아 들어가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채워진다.

 

도에서 난 사람은

행위 없음의 깊은 그늘로 침잠해

다툼과 근심을 잊는다면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고

그 삶은 평화롭다.

 

<물고기와 도>

 

 

<오쇼 강설>

 

욕망은 삶 그 자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의해 그림이 그려진다.

욕망은 마음의 그림일 뿐, 진정한 필요가 아니다.

욕망은 멀리 있는 지평선과 같은 것이다.

대지가 하늘과 만나는 지점이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가고 또 걸어가도 그 거리는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남아 있을 것이다.

땅과 하늘은 결코 맞닿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힌두교에선 그것을 마야라고 부른다. 환영인 것이다.

 

필요는 아름다운 것이고, 욕망은 추한 것이다.

필요는 신체적인 것이고 욕망은 심리적인 것이다.

그대의 목적지는 그대 내면에 있다.

그대가 가야 할 다른 어느 곳에 있지 않다.

그러나 욕망은 그대를 먼 나라, 먼 시간대, 공간 속 먼 지점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더 많은 욕망을 가질수록 그대는 더 급하게 달려간다.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존재 방식이다.

다른 존재 방식이 있을 수 없다.

들판의 백합처럼 피어나라.

나뭇가지의 새들처럼 노래하라.

야생동물처럼 야생적이 되라.

 

삶은 탄생과 죽음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삶은 피어남과 시듦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삶은 일출과 일몰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삶은 그 두 언덕 사이에서 움직인다.

그것들은 두 개의 강둑과 같은 것이며, 그 강둑 사이로 삶의 강물이 흐른다.

삶이 그대를 보살펴 줄 것이다.

삶을 받아들이고, 물처럼 흘러가라.

그리고 그대의 에고와 그대 자신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구도의 길이다.

 

그대가 신이다.

축소판인지 몰라도 그대는 곧 신이다.

깨어있음 외에는 어떤 수련도 필요하지 않다.

가까이 있는, 바로 곁에 있는 그것을 자각하는 것,

이미 그대의 피부에 닿고 있는 그것을 자각하는 일,

그대의 심장에서 맥박치고 있는 그것을 자각하는 일,

그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그것을 자각하는 일,

바로 곁에 가까이 있는 그것을 자각하는 일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미래 속에 존재한다면 그대는 그만큼 멀어진 것이다.

그때 그대는 멀리 여행을 떠난 것이며, 신은 이곳에 존재한다.

그대는 이미 신을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행위의 세계에서 명상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한 장의 낙엽처럼 약간의 떨림, 산들바람에 흔들림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대지에 안착할 때까지 더 깊이 떨어져 내릴 것이다.

그대는 뿌리에 닿는다.

모든 것이 가라앉는다.

그때 거기 더 이상 근심도, 사념도, 세상도, 그대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것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인 것이다.

 

신은 하나의 반응이다.

신은 그대 존재의 메아리다.

그대가 산에 올라가 무언가를 소리치면 산은 그것에 메아리로 화답할 것이다.

생명계 전체가 그대 안에서 메아리 치고 있다.

그대가 하는 무엇이든 그대에게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카르마의 법칙이다.

신은 그대가 신에게로 다가가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대에게로 온다.

그대가 신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을 통해 신이 그대를 바라본다.

 

 

Nicholas Gunn feat. Diana Miro - hold me tight

 

lyrics

 

This place

Our life

It feels

So right

And I wonder why

Is it in the way you love and hold me tight

And hold me tight

And hold me tight

This place

Our time

I feel

You’re mine

This place

Our time

I feel

You’re mine

And hold me tight

And hold me tight

And I wonder why

Is it in the way you love and hold me tight

And there is more to life

In this place that shelters us on cold dark 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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