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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스스로 사랑을 아는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자신의 사랑을 믿는 한도 내에서만

타인의 사랑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회상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 심경은 완전히 말로 옮겨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긴 기쁨과 슬픔이 극치인 순간에는

누구나 홀로 연주하는 말없는 생각이라는 곡조가 있게 마련이다.

그때 내 느낌은 슬픔도 기쁨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었다.

나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려 하지만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산화되고 마는 유성처럼 날고 있었다.

 

실상 나와 그녀의 영혼을 꿰뚫고 간 그 봄은 얼마나 우수에 찬 계절이었던가!

흔히 5월에는 이제 곧 장미가 시들 거란 생각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그 계절에는 매일 저녁 꽃잎이 하나씩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옛 스승은 자신의 교리를 결코 엄밀하게 논증하려고 애쓰지 않았거든요.

그는 씨 뿌리는 농부처럼, 단 몇 알의 씨앗이라도 비옥한 땅에 떨어지면

천 갑절 결실을 맺으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그냥 자신의 교리를 뿌린 거랍니다.

그 신학의 스승이 그런 식으로 자기 교리를 굳이 입증하려 애쓰지 않는 이유는

그가 지닌 인식이 그만큼 충만했기 때문일 겁니다.

논증이라는 형식을 묵살할 만큼.

 

신이 모습을 바꾸어 인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지,

인간이 신으로 화할 수는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인간 영혼을 단련시키는 일종의 불은 되겠지만,

인간의 영혼을 가마솥의 끓는 물처럼 증발시키지는 못합니다.

자아의 허무를 인식한 자는 그 자아가 곧 진정한 신성의 반영이라는 것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신성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그것이 비록 불꽃의 잔광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적인 실체를 자신 안에 내포합니다.

차라리 나는 광채 없는 불꽃이나 빛이 없는 태양, 또는 피조물이 없는 창조주가 무슨 의미를 갖느냐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하느님의 빛에서 나와 그 빛 안에서 합일이 이루어지는 곳에선

정신적 교만이나 경솔한 방종, 분방한 기질을 볼 수 없으며,

그곳엔 오로지 끝없는 겸허함, 무한히 자신을 움츠린 우려의 마음,

단정함과 성실, 평등과 진실, 평화로움과 만족스러움,

요컨대 덕성에 속한 일체의 것이 자리하게 되느니라,

그렇지 않은 경우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합일은 이미 아니로다.

<독일 신학 이십팔장 >

 

 

<파묻힌 생명> Matthew Arnold(1822~1888)

 

우리사이에는 익살스러운 재담이 가벼이 날고 있다.

그러나 보라, 나의 눈이 눈물로 젖어 있음을!

이름 없는 슬픔이 나를 덮쳐온다.

 

그렇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재담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웃음을 건넬 수 있음을!

그러나 이 가슴 속에는 남모르는 무엇이 감추어져 있으니,

그것은 너의 가벼운 이야기도 몰아낼 수 없는 것,

너의 손을 이리 다오, 그리고 잠시만 침묵해 다오.

다만 너의 그 맑은 눈을 내게로 향해 다오.

너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을 읽을 수 있도록, 사랑하는 이여!

, 사랑조차 이토록 약한 것일까?

마음을 열어 그것을 말하게 할 힘이 없는가?

사랑하는 이들조차 진정 느끼는 것을

서로 표현해낼 힘을 갖지 못한 것일까?

나는 알고 있었지,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감추는 것을,

혹시나 자신의 생각이 드러나면,

남들에게 무심히 거부당할까, 아니면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또한 알고 있었지, 사람들은

거짓 탈을 쓰고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남들에게나 자신에게나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 그러나

모든 인간들의 가슴속에서는 똑같은 심장이 고동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이여! -

그 같은 저주가 우리의 가슴과 우리의 목소리까지 마비시킨단 말인가? -

그렇게 우리도 벙어리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 단 한순간이라도 우리의 심장을 열어젖힐 수 있다면,

우리의 입술을 묶고 있는 사슬을 풀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을 묶고 있는 것은 깊은 운명의 손길인 것을.

 

운명은,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아이가 될는지를 예지하고 -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일들에 몰두하며

온갖 싸움질에 빠져들며,

사뭇 본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이 변할 수 있음을 예지하고 -

인간의 경박스런 놀음 가운데서도

순수한 자아를 지키도록, 방종 가운데서도

존재의 법칙에 따르도록,

숨어 있는 인생의 강으로 하여금

우리 가슴 깊디깊은 곳을 관류해

보이지 않는 흐름을 추진하도록 명했다.

 

하여 우리의 눈은 그 묻힌 흐름을

보지 못하며, 비록 그 섭리의 흐름을 타고 있으되,

우리의 모습은 불확실함 속을

표류하는 장님 같은 것.

그러나 붐비는 세상의 길목에서도

소란스런 투쟁 속에서도

우리의 묻힌 생을 알고 싶은

무한한 욕구가 솟구치니,

그것은 우리 삶의 참된 본연의 길을 알고자

온 힘과 불꽃을 사르고 싶은 갈증이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이토록 세차게 고동치는

심장의 신비를 캐려는 우리의 삶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가슴을 파헤쳐보았는가.

그러나 슬프게도! 석연하게 그 광맥을 파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몇 천 갈래 길에 서 보았고,

길목마다에서 정신과 힘을 보았다.

그러나 단 한순간도, 우리 본연의 길에 서보지도,

본연의 자아를 만난 적도 없다.

우리의 가슴을 통해 흐르는 그 숱한 이름 모를 감정 중에

단 한 가닥도 표현해낼 능력이 없었다.

하여, 그 감정들은 표현을 찾지 못한 채 영원히 흐르고 있다.

긴 세월 헛되이 우리는 숨겨진 자아를 좇아

말하고 행동하고자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웅변이며

그럴싸하지만 , 그건 진실은 아닌 것이다!

 

하여 우리는 이 같은 내면의 투쟁에

더는 시달리고자 하지 않는다.

속절없는 순간을 향해 요청한다, 몇 천 가지 무위한 행위를,

그것을 망각하고 마비시킬 힘을.

, 그러면 그 순간 즉각 응해 와서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때로는, 몽롱하게 그림자처럼,

끝없이 아득한 어느 왕국에서 오듯

영혼의 깊은 현실에서

미풍과 부유하는 메아리가 찾아와

우리의 날들에 우울을 더해준다.

 

다만 아주 드물게 -

사랑하는 이의 손길이 우리의 손에 놓일 때,

무한한 시간이 광채를 띠고 몰려와

녹초가 되어

우리의 눈이 상대의 말을 읽어낼 수 있을 때,

세상사에 귀 막은 우리 귀에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애무하듯 울려올 때 -

그때에는 우리 가슴속 어디멘가 빗장이 열리고,

오랫동안 잊었던 감정의 맥박이 고동을 치게 된다.

눈은 내면을 향하고, 가슴은 평온해지며,

이제 우리가 뜻하는 것을 말하게 되고

우리의 소망을 알게 된다.

굽이치는 생의 속삭임을 듣게 되며, 생의 강물이 흘러가는

초원을, 태풍과 미풍을 느낀다.

날아 도망치는 그림자 같은 휴식을 잡으려고

영원한 추격을 벌이는 인간의 치열한 경주에,

마침내 휴식이 찾아온다.

 

이제 서늘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미문(未聞)의 고요가 그의 가슴을 덮는다.

그때 그는 생각하리라.

자신의 생명을 잉태한 언덕과

그 생명이 흘러갈 태양을 이제 알고 있노라고.

 

*’Deutsch’라는 말의 어원을 보면 특정한 민족이나 종족을 지칭한 이름에서

파생된 말이 아니고 그 자체가 민족, 종족에 속한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 말은 지배층 이었던 라틴 민족에 대립되는 모든 것

즉 민족의식이나 사람, , 언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어왔다.

좋은 의미로는 성실, 신의, 철저성을, 나쁜 의미로는 우둔함, 고루함을 지칭한다.

 

*파묻힌 생명 Matthew Arnold(1822~1888) : 영국의 시인이며 비평가.

고대 정형을 따른 시 형식에 새로운 삶의 내용과 이상을 추구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1857년에서 1867년까지 옥스퍼드대학 교수로 있었다.

따라서 이 책 <독일인의 사랑>이 씌어질 무렵에는 저자의 동료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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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

03.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

간택(揀擇)함이 없는 마음이나 증애(憎愛)함이 없는 마음바탕에

털끝만큼이라도 가리고 택하는 차별심이나 미워하고 좋아하는 차별심이 남아 있으면

이 차별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택하고 버리는 마음이나,

미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은 모두 자기 욕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며,

욕심은 구하는 마음이 심해지면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만스러운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구하는 것이 있으면 반대로 구하지 않는 것도 있게 되니

자연히 좋고 나쁜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구하던 것이 구해지면, 더 좋은 것을 구하려 하게 되고,

또 점점 더 좋은 것을 구하려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니 언젠가는 불만이 생기게 된다.

또 이렇게 구하고 모아서 쌓아놓은 자기 것을 잃게 되었을 때도

역시 불만스럽게 되고, 그 불만이 커지면 원한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원한(怨恨)은 복수(復讐)로 이어질 수 있으니,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악순환의 발단은

간택하는 분별심과 증애(憎愛)의 분별심에서 일어나는 법이니

오직 간택(揀擇)하는 마음을 싫어하면 지도(至道)에 무난히 이를 수 있고,

증애(憎愛) 하는 마음이 없으면 지도하는 길이 통연(洞然)하고 명백(明白)해진다고 한 것이다.

 

간택하는 마음과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간택하는 마음이나 증애하는 마음은

이기심(利己心)의 근본인 오온심(五蘊心)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오온심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물질,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인데,

물질은 몸이고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은 통틀어서 마음이라고 하는데

우리들의 감각작용은 몸을 통해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 말이나 행동,

즉 간택 및 증애하는 느낌, 생각, 언행의 근본이 되는데 식()에서 일어난다.

 

이 의식은 전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나 금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 지배하는 나의 생각이다.

미워하거나 좋아하거나, 택하거나 버리는 생각의 요인은

나의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그렇게 판단되고 행하는 것이지

그 사물이나 사람 자체에 미운 털이 박혀있어서 미운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미운 털이 박혀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그 물건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 된다.

절에 오면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중에는 자기 비위에 맞는 사람도 있지만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 자체가 좋아서 내 비위에 맞고,

그 사람 자체의 성격이 나빠서 내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자신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자신의 오온심에서 비롯된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온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자기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만 있으면

그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나에게 접근해 온다 하더라도

그를 간택하거나 증애하는 마음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형형색색의 사람과 물건이 서로 어우러질 때

()함이나 성장함이 일어나는 법이고 창조가 가능해 질 수 있지만,

서로 대립하거나 배척할 때는 서로 쇠퇴해지고 멸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고 남을 상대하지 않으면 연기하는 대열에서 소외되고

자기 성격의 개선(改善)이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더욱 외골수로 빠지게 된다.

 

이것도 역시 자기가 간택하고 증애하는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

남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씀한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기도 하겠지만 많은 경우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고(思考)의 허물에 의해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씀은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관점(觀點)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간택하는 마음을 싫어하고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오온심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을 소멸하기 위해 참회하고, 복을 짓고, 도를 닦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참회는 복()을 짓는 뿌리이고,

복을 짓는 행위는 수행을 위한 뿌리이다.

즉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복 짓는 일부터 해야 하고,

복 짓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거나 해()가 되는 일을 한

성품, , 행동 등에 대한 참회가 있어야 한다.

참회를 통해서 복() 짓는 일에 역행하였던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음으로서 복 짓는 일에 가속이 붙게 된다.

 

복을 짓고 수행하는 일에 근본이 되는 것이 내 마음을 믿는 신심(信心)이다.

인과응보를 믿고 제행이 무상함을 믿으며,

제법이 무아하다는 가르침을 내려주신 불법승 삼보를 믿는 마음이다.

 

복 짓는 마음이란 나를 위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다.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으면 그 과보로 금생에 복된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건강 복, 부모 복, 형제 복, 친구 복, 스승 복, 관록 복, 명예 복, 재복, 사업 복, 부인 복, 남편 복, 자식 복,

불교를 만나는 복, 노래를 잘 부르는 복, 그림을 잘 그리는 복, 총명한 복 등등 수 없이 많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복을 짓는 업이 되기도 하고,

무기(無記)이기도 하고, 또 악업을 짓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어느 쪽으로 복 짓는 일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금생이나 내생에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항상 남과 잘 사귀고 남에게 필요한 일, 좋은 일을 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좋은 연을 많이 짓다보면

선한 도반을 많이 만나고 훌륭한 스승이나 선배 또는 귀인을 만나 하는 일마다

잘 풀려가 더욱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다.

 

남이 하는 언행이 나의 비위를 상하게 했을 때,

저 사람의 언행이 기분 나쁘다고 생각되는

즉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저 사람이 저런 언행을 하지 않았을까? 고 생각하는 마음이

간택(揀擇)이 없고 증애(憎愛)가 없는 마음이다.

 

상대방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화가 났을 때,

자기가 낸 화를 정당화하려 하거나 변명하려하는 것은

간택심과 증애심을 오히려 깊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화가 난 것을 인지하는 즉시

마음 속 깊이 참회하고 복 짓는 일을 찾아 하면

화도 다스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택심과 증애심도 점차 해소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복을 잘 지어 부처님 법에 수순할 수 있을 때

()과 혜()를 함께 닦아 탐욕심을 비워

선정(禪定)을 이루고 무명을 밝히는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Fountain of Sec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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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판도라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모든 선물을 받은 여자>라는 뜻이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자기 뜻을 거역하고 인간들에게 불을 훔쳐다 주자

그 대가로 인간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했다.

그는 헤파이스토스에게 흙과 물을 섞어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헤파이스토스가 여자를 빚어내자 다른 신들은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저마다 여자에게 선물을 주거나 자기가 지닌 재능을 불어 넣었다.

헤르메스는 여자의 마음속에 거짓과 속임수와 교활한 심성까지 담아 주었다.

그리하여 아름다움과 성적인 매력과 손재주와 언변 등을 고루 갖춘 여자 판도라가 세상에 나왔다.

제우스는 그녀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다.

프로메테우스는 단박에 판도라를 의심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훌륭하지만 마음속에 거짓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피메테우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제우스는 그들 부부에게 결혼 선물로 상자를 하나 주었다.

러면서 <이 상자를 받아서 안전한 곳에 고이 간직하거라.

하지만 미리 일러두건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것을 열어 보면 안 된다> 하고 말했다.

에피메테우스는 사랑에 흠뻑 빠진 나머지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받지 말라는 프로메테우스의 경고를 잊고

상자를 받아 자기 집 한 구석에 숨겨 두었다.

 

판도라는 남편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세상은 경이로웠다.

아픈 사람도 없고 늙은 사람도 없었으며 모두가 선량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판도라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신비한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판도라는 요염한 자태를 한껏 드러내며, 상자의 뚜껑을 열고 잠깐 들여다보기만 하자고 남편을 졸랐다.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열지 말라고 했다면서 아내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판도라는 상자를 열어보자고 매일같이 성화를 부렸지만 에피메테우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판도라는 남편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상자를 감춰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자물쇠를 부수고 묵직한 뚜껑을 들어올렸다.

 

판도라가 미처 상자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전에 상자에서 무시무시한 울부짖음과 고통에 겨운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판도라는 겁에 질린 채 흠칫 물러섰다.

그때 상자에서 증오, 질투, 잔인성, 분노, 굶주림, 가난, 고통, 질병, 노화 등

장차 인간이 겪게 될 온갖 재앙이 쏟아져 나왔다.

판도라는 뚜껑을 도로 닫았다.

그러나 이미 온갖 불행이 인간들 사이로 퍼져나간 뒤였다.

다만 상자 밑바닥에 무언가 자그마한 것이 잔뜩 웅크린 채 남아있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그 뒤로 인간들은 갖가지 불행에 시달리면서도 희망만은 고이고이 간직하게 되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제5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에서 옮김


 

 

 

CRY

 






Soul Photo

- 상상을 담는 창의적 사진 강의 노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하라.


쓰고 싶은 만큼 써라.

다음 잘 썼다고 생각하는 문장들을 따 빼고

그래도 되는지 보라.’ 

 _ 헤밍웨이


미숙한 예술가는 경험에서 나오는 창조성이 부족하고

작품을 명백하게 만든다.

결과는 너무 익힌 음식이 된다.

그럼 어떻게 더 적은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창조할 수 있을까?

훌륭한 예술가는 숨기는 것 이상을 한다.

 

"시가 불을 지핀다는 것은

곧 시를 읽으면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고

그렇게 내 안에 빈틈을 채운다는 뜻이다.

똑 같은 일이 사진에서도 벌어진다"


사진과 함께하는 여행은 믿을 수 없이 힘들다.

하지만 걸어왔던 거친 길들은 늘 숨겨야 한다.

그럼 목적지가 훨씬 더 멋질 것이다.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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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버림의 미학


제거의 과정은, 도박꾼들의 말처럼, 선택을 위한 최고의 기술이다.

_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사진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사진가가 특별히 가져야 할 자질은 무엇인가요?

사진가라면 기하학은 기본이다.


창의성과 사진

우리의 생각과 바라봄과 새 삶의 방식이 위대한 사진의 원동력이다.

창조적으로 되려면 새로운 정보를 두드리고 동시에 오래된 것을 떠나보내야 한다.

 


창의적 사진의 조건


창조성의 제일 큰 적은 상식이다.’

_파카소


창의성은 강렬하고 생생하고 늘 변한다.

순식간에 번지고 측정도 불가능하다.

심지어 제대로 정의 내리기도 어렵다.



# 사진에 숨을 불어넣다.


사진 찍기는 숨을 참는 것이다.

그 순간 모든 기능을 집중해 언제 사라질지 모를 리얼리티를 포착한다.

정확하게 그때가 이미지 하나를 완성함으로써

몸과 마음에 엄청난 희열을 주는 순간이다.‘

_앙리 키르티에 브레송




# 사진의 질을 위해 노력한다.


더 깊이 파고 더 멀리 가고 싶다면

당신은 노력이 필요한 길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이 어려울수록 당신이 생각하고 보는 방식,

그리고 당신 자체가 더 많이 변할 것이다.

그 길을 걸으면서 당신은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은

대부분 대단한 노력을 요한다고 깨닫게 될 것이다.

 


# 저주할 것인가? 통곡할 것인가?


당신은 벽돌쌓기를 인부처럼

할 수도 있고 장인처럼 할 수도 있다.

주어진 임무는 똑 같다. 하지만 과정과 결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

_앤 라모트


인부는 하루 종일 끝나기만 고대하며 일한다.

땀을 흘리며 고생만 할 뿐이다.

결과는 대개 대수롭지 않다.

장인은 심지어 인부보다 더 힘들게 일한다.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땀을 흘리고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장인은 그 과정에 집중한다.

시간 감각도 잊고 일하다보니 이제 짐을 싸서 돌아갈 시간이라는 사실도 믿을 수 없다.

그곳에는 장인 정신의 본질이 숨겨져 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떤 재난으로 그 벽돌이 무너졌다고 해보자.

인부는 운명을 저주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장인은 통곡을 할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사해 (The Dead Sea)


사해는 왜 죽은 것일까?

배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물이 안으로 흘러들어 거기서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난을 해쳐가면서 나는 이 사해의 원칙이

창조성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진리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창조성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은

나를 보내고

또 나를 넘어서는 것이다.

나 혼자 매일을 사는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사해의 이론을 삶에 응용하기 위해 오늘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간단히 누군가에게 점심을 사거나

직접 손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도 괜찮다.

아니면 아픈 친구를 산으로 데리고 가거나....

 

 



보는 법 배우기


진정한 탐험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_마르셀 프루스트

 

매일 눈을 뜨면 시작하는 일이지만 보는 행위는 바로 기적이다.

어둠이 빛으로 변하고 흐릿한 선들이 명확해진다.

색깔의 억제가 색깔의 포화로 바뀌는가 싶더니 모든 것에 생명력이 가득해 진다.

매일 이렇게 기적이 벌어지는 데도 눈을 반쯤만 뜬 채 일생을 보내는 사람도 많다.

보고는 있지만 정말 완전히 보는 것이 아니다. 가끔씩 뭔가가 흥미를 돋우기도 하지만

그 사이 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 시야는 쇠퇴한다.

그리고 그러면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시력만이 아니다.

 


자세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보는 것에 영향을 주는 아주 심오한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보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눈앞에 있는 그 무엇인가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오히려 보기는 우리가 누구냐에 달려 있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최고의 모험이다.

보는 법을 배우면 새로운 관점으로 삶에 접근하고 세상의 놀라움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각이라는 선물을 받았고 바로 지금이 그 특권을 향유하고 확장할 때이다.

나는 진정한 사진은 단지 직업적인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좀 더 풍성한 방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찰하기


알기만 하면 잡초도 꽃이다.’

_밀른


예술은 우리가 하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

보는 방법을 바꾼다.

최고의 시인들은 속세에 산다.

모임이 지루할 때도 혼잡한 교차로를 건널 때도 그들만의 관찰 기술을 연마한다.

보고 또 다시 본다.

뭔가 더 있음을 아는 것이다.

기대로 가득 찬 시인의 관찰은 미세한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관찰 덕분에 시인은 언뜻 보기에 평범한 것들로 절대 평범하지 않은 시를 쓰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려면 시인의 길을 따라야 한다.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방법이 중요함을 계속 상기시키는 것이 바로 이다.

그렇게 나만의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고 눈앞의 장면을 보고 관찰했다면

이제 조용히 들을 때가 온 것이다.

 

 

# 진정한 듣기


진정으로 들으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또 침착하고 고요해야 한다.

나는 눈으로도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듣는다.

반대로 듣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들으면 우리는 알아채기 시작하고

그럼 결국 더 많은 것을 말하게 된다.

때로는 들릴락말락하고 또 때로는 매우 시끄럽기도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알아채려면 먼저 침묵하고 들어야 한다.

세상은 정신없고 반복적인 소음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을 잠시 멈추게 하는 사진을 찍고 싶다면

침묵과 고독을 친구로 삼아라.

그리고 어디를 가든 그 친구와 함께 가라.

 

 

# 알아채기

알아차리기는 일종의 예술이다.

바로 지금 자연스러운 빛을 동반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 사진을 찍기 전에 당신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 빛의 색깔과 질과 관련한 작은 정보들을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빛, 색깔, 내용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지는 못한다.



# 뉘앙스를 찾기


좀 더 눈을 사로잡는 사진을 찍고 싶다면 더 깊이 볼 필요가 있다.

처음 본 것과 처음 찍은 사진은 보통 너무 분명하다.

뛰어난 작가들은 빛과 선과 모양과 형태의 작은 뉘앙스를 찾아내기 위해 철저한 조사과정을 거친다.

보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뉘앙스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생각해 보라.

그 미소의 미묘함이 매년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인다.

보는 방법을 익히는 첫 번째 단계는 눈을 크게 뜨고 뉘앙스를 찾을 수 있는 깊이 있는 시각을 키우는 것이다.

그럼 다 보여주지 않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 사진은 뭔가가 더 있음을 시사하고 보는 사람은 더 많이 생각하고 더 깊이 느낄 것이다.

 


# 버리고 취하기


단순한 구도가 드러내는 미세한 암시는 마치 비밀을 속삭이는 것 같다

- 충분히 말하라. 하지만 너무 말하지는 말라.

관찰자는 사진으로의 멋진 초대를 받는다.

영문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고 질문을 던지며 사진과 세상에 관여하게 될 것이다.

사진을 선택하고 편집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고 심오한 기술이다.


누구나 사진을 많이 찍을 수는 있지만 특별한 사람만이 어떤 사진이 최고인지 결정할 수 있다.

사진이 좋으면 그 사진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아쉬운 점에 집착하고 괴로워해서 좋을 게 없다.

그 보다는 내가 할 수 있고 더 잘 할 수 있는 일에 다시 전념하라.

그것이 사진 찍기의 즐거움이다.

절대 따분할 수 없고 또 절대 목적지에 완전히 도착할 수 없다.

여행 자체가 목적이다.

하지만 보는 법을 알면 그것이 재능이 되어 좋은 사진을 찍고 그 대가도 받을 것이다.



사진은 비밀에 관한 비밀이다.

더 많이 말할수록 더 적게 알게 된다.’

_ 다이앤 아버스


나는 완벽한 사진을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좋은 사진에 머무른다.’

_ 언셀 애덤스

 

영감은 초의식super-consciousness) 또는 잠재의식(sub-consciousness)의 작용일 것이다.

어느 쪽인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영감이 자의식(self-consciousness)의 반대라는 점이다.

_아론 코플랜드

 

우리는 영적 경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된 경험을 하는 영적 존재이다.

_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뎅

 

초점(focus)은 에너지가 모인 중심을 가리키는 단어로

본래는 '난로(hearth)', '벽난로(fireplace)' 등을 뜻했으며

고대 이후에는 '(fire)'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_ 페니피어스

 


나는 예술가란 숨을 참고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몇 분 후 한참 떨어진 곳에서

반짝이는 물방울을 흩뿌리며 솟아오르는

심해의 잠수부와 같다고 생각한다.

예술가의 장점은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지만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_나탈리 골드버그

 

 

의미 있는 인물 사진


#누가 되고 싶은가?


어느 시점이 지나면 사진은 자서전이 된다.

더 나은 사진을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밖으로 나가 우리 자신을 개발해야 한다.

더 흥미로운 사진들을 찍으려면 뭘 해야 하죠?

더 흥미로운 사람이 되세요.

사실이지 않은가?

내가 만든 사진은 나를 반영한다.

# 더 나은 인물 사진을 찍으려면

최선은 그냥 조용히 단순하고 우아하게 시작하는 것이다.

의미있는 질문을 잘하고 놀랍도록 잘 듣는 것

누군가의 인물 사진을 찍을 때면 속력을 늦추고,

바라보고,

듣고,

질문하고,

교감하고,

정말로 중요한 것에 대해 말해보라.

 


#심장으로 사진을 찍다.


대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사진을 창조하려고 노력한다.‘

떨림 없는 손이 텅 빈 심장을 대체할 수 없다.’

_ 로드니 스미스


그럼 당신의 심장 상태는 어떤가?

냉담한가?

자기 만족감에 빠져 있는가?

아니면 닫혀 있는가?

무언가에 집중하는가?

자유로운가?

생기가 넘치는가?



우리는 카메라가 아니라 심장으로 사진을 찍는다.’

_ 아놀드 뉴먼

 

배우고, 잊고, 다시 배우려면

능숙하게 주의를 분산시킬 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아는 대상에만 집중하고 있는 한,

우리는 봐야할 새로운 대상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배우기 위해 기존의 것을 잊을 때는

지식을 하나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명사가 아닌 동사로 보는 새로운 개념이 요구된다.

당신은 정신적 접근법을 새롭게 해야 한다.

_ 캐시 N. 데이비슨









 

 Winter of my Soul

















마하바라타 3(전쟁)

9 바가바드 기타


크리슈나의 가르침 (아르주나에게)

 

영혼의 존재를 아는 이는 영혼은 놀라운 것이라고 여긴다. 베다도 영혼은 놀라움이라고 표현했다. 영혼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은 이들도 영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혼은 불멸의 것이다.

 

행복과 불행, 손실과 이득, 승리와 패배 따윈 생각하지 말고 그저 본분에 충실하라. 그것만이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이다.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업보도 신경 쓰지 말고 너의 본분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것이 해탈의 방법이다. 그대가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다시는 업보의 굴레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신을 섬기고 종교적인 본분을 행하는데 흔들리지 않는다. 쾌락과 부, 권력을 추구하는 자는 현생만 생각한다. 그들은 욕망에 휩싸여 니르바나에 마을을 쏟을 수 없다. 속세에 연연하지 말거라.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원적인 논리에서 벗어나거라. 자아를 세우고 물질적 이득과 안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거라.

 

큰 강에 도착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작은 우물과시냇물이 필요하지 않다.

삶의 위대한 뜻은 결과를 바라지 않고 본분에 충실할 때 얻어진다. 행동의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때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아르주나여, 해탈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느니라.

하나는 포기와 진리에 대한 탐구를 요하지만 다른 하나는 세속적 욕구 없이 일하는 것이다. 포기했다고 하여 완벽함을 얻을 수는 없다. 단순히 일을 멈추는 것으로 숙명적인 인과관계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감각적인 욕구를 생각하면서 그 욕구를 없애는 것은 소용없다. 그것은 단지 시늉일 뿐이다. 지혜로 감각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집착하지 않는 자가 더 낫다. 진정으로 집착이 없는 인간은 일할 필요도 없고, 일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그는 임무에 따라 움직이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로써 그는 위대함을 유지한다. 그는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된다. 훌륭한 이가 행하면 모두가 그를 따라할 것이다.

 

내 안의 피난처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집착과 공포 그리고 분노에서 해방되고, 나를 위해 순수하고 초자연적인 사랑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모든 종류의 희생은 초월적인 지식 안에서 최고에 달하거나 자신이 신의 영원한 종임을 깨닫기 위함이다. 이것이 신비주의의 열매이니라. 조금씩 쌓인 업보는 이로써 재로 변한다. 이 지혜를 가지고 행동하라. 그러면 누구도 행동의 결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저들을 지혜의 무기로 무찔러라. 수행으로 무장한 바라타여, 일어나 싸우거라.

 

언제나 나를 생각하거라.

나보다 우월한 진리는 없다.

진주가 끈에 묶이듯 만물이 나에게 안식한다.

나는 이세계의 모든 창조요, 파괴다.

이것이 지식 중의 지식이다. 가장 비밀스러운 비밀이고 종교의 완전함이다. 애정을 가지고 오직 나만을 숭배하고 섬기거라.

나는 나뭇잎이나 꽃, 과일 하나라도 나에게 권하는 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니 그대도 모든 일을 나에게 주는 보시라 여기고 행하거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완벽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 높은 가르침이다.

항상 나를 생각하라.

나에게 헌신하고, 나에게 숭배하고 경배하라.

나에게 완전히 흡수됨으로써 그대는 인생의 궁극적인 나에게로 오게 될 것이다.

 

정신과 육체의 차이를 알고 위대한 자를 볼 수 있는 자만이 영적인 거처에 안식할 수 있다. 오직 그런 자만이 세상일에 관여하더라도 나락에 빠지지 않는다. 경전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변덕스럽게 행하는 자는 오직 불행을 얻을 것이다.

 

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나의 기쁨을 위해 행동하거라.

지고의 도덕률이다.

다른 수행이나 종교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하면 모든 죄악으로부터 그대를 보해해 주리라.

두려워 하지 말라.










The Things We Leave Beh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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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다드의 서()

 

미하일 나이미

 

 

 

하나의 단어는 하나의 사물을 뜻하고,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세상을 의미하며,

그 하나의 세상은 하나의 우주를 상징하노라.

그 우주는 우주의 창조자이자 창조물인 그대의 ''가 형상화된 바로 그것이다.

그 누가 자신보다 나은 것을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창조자는 자기 자신 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창조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모든 것이 흘러나오고 모든 것이 되돌아가는 수원지(水源地)와도 같다.

수원지의 물과 흐르는 물은 같은 것이다.

 

 

존재의 삼위일체, '최초의 의식', '말씀', '이해의 성령'을 보라. 이것은 하나이자 셋이며, 셋이자 하나로, 서로가 대등하고 균등하며 영원하다.

이 삼위일체는 자기균형, 자기인식, 자기실현의 존재이다.

새로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언제나 평화롭고 동일하다.

너무나 경이로운 나머지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만, 인간은 그것을 ''이라고 부른다.

그 이름도 신성하지만, 그것을 신성하게 부르는 인간 또한 신성하다.

인간이 신의 후손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겠는가?

인간이 신과 다를 수 있는 존재인가?

상수리나무는 상수리 열매 안에 감싸져 있는 것이 아니던가?

신은 인간 안에 싸여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인간 역시 '의식, 언어, 이해'의 신성한 삼위일체이다.

인간 역시 자신을 창조한 신처럼 창조자이다.

인간의 ''는 인간이 창조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신처럼 균형을 갖지 못하는가?

 

 

포대기에 쌓인 신

인간은 포대기에 쌓인 ''이다.

시간과 공간, 육체와 모든 감각, 그것들에 인지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바로 그 포대기이다.

어머니는 아기가 포대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기는 그것을 모른다.

조심하라.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거라.

그대가 쓰는 ''는 인간이라는 미숙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싸고 있는 포대기를 의미하고, 그대가 거대한 용광로가 아니라 작은 채에 불과할 뿐이고, 그대가 거르는 것이라고는 보잘것없는 티끌들을 모아 놓은 근심과 고통만이 있는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신의 말씀, 인간의 언어

인간은 신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을 동료 인간들과 분리할 수 없으며, 모든 창조물을 신의 '말씀'으로 부터 분리할 수 없다.

신의 '말씀'은 대양이며, 그대들은 하늘 위의 구름이다.

구름이 대양을 품고 있지 않다면 과연 그것이 구름인가?

구름이 자신의 모양과 정체성을 영원히 고수하기 위해서 한 공간에 계속 머무르려고 애쓰며 삶을 허비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결국 구름은 어리석은 노력으로 인해서 좌절과 허망함 말고 그 어떤 것을 얻게 될 것인가?

구름은 자신을 잃지 않으면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신을 품은 구름이다.

자신을 비우지 못하면 인간은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이 얼마나 큰 비움의 환희인가?

신의 '말씀' 안에서 영원히 길을 잃지 않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 즉 그대 자신인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얼마나 위대한 소멸의 기쁨인가?

그대들이 기도할 때에는 '이해'를 위해서 기도하라.

'신성한 이해'가 그대의 마음을 찾게 되면, 그대가 ''를 말할 때마다 신의 위대한 응답을 기꺼이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죽음'은 그대의 손에 놓인 무기가 되어 그 '죽음'이라는 무기로 '죽음'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생명'은 그대의 심장에 열쇠를 부여해서 영원히 뛰는 심장을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황금의 열쇠이니라.

 

 

주인과 하인

세상 만물은 자기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대의 일도 하는 것이다.

그대는 자기일을 하는 와중에 세상 만물의 일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의 주인이다.

주인은 하인의 하인이다.

하인이 고개를 숙이게 하지 말라.

주인이 고개를 쳐들게 하지 말라.

주인의 지독한 자존심을 깨부숴라.

하인의 부끄러움을 뽑아버려라.

온갖 속임수와 비난을 내뱉는 혀를 갖고 사는 것보다 혀 없이 사는 편이 훨씬 낫다. 그리고 '신성한 이해'에 의해서 혀가 정화되기 전까지 모든 언어는 언제나 상처와 속임수를 남길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자신의 가슴을 탐구할 것을 명하노라.

그 안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없애버려라.

그대들의 포대기를 벗어 던지면, 그로부터 그대의 '', 영원한 평화를 누리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나오는 신의 '말씀'과 하나가 될 것이다.

 

 

신은 여럿이 아니다.

신은 오직 하나이다.

그러나 인간의 그림자는 수없이 많다.

수많은 인간이 땅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한, 인간의 신은 자신의 그림자 보다 낳을 것이 없다.

빛 속에 있는 자만이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하나의 신을 아는 자만이 그림자가 없다.

신은 빛이며, 오직 빛만이 빛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준비하라.

그대의 눈과 귀와 혀를 온전히 유지하면,

신성한 열망이 한번 채워지기만 한다면 영원히 가득차게 된다는 것을 그대의 가슴이 알게 될 것이다.

 

 

그대들이 금은보화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그것들로 인해서 바닥으로 끌어내려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에 묶이기 때문이다. 사물에 휘어 잡히기 싫다면 그것들을 놓아버려라.

바다가 인간보다 더 무한한가?

순진하게도 인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고서 그 크기를 알아냈다고 생각하지 말지어다.

나무는 자신의 뿌리 길이보다 더 멀리 가지를 뻗어 나갈 수 없다. 영원함에 뿌리를 둔다면 인간은 무한한 곳까지 뻗어나갈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한계를 드리우지 말라. 그대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곳에서 신을 만날 때까지 멀리 가라.

뻗어 가거라.

멀리 가거라!

모든 욕망과 두려움, 미소와 눈물을 두 눈에 모두 담지 않으려거든 어떤 시선도 던지지 말라. 어떤 문을 두드린 꿈은 이미 다른 모든 문을 두드렸다.

그러니 그대가 무엇을 바라보는지에 주의하라.

그대가 어떤 꿈을 문 안으로 받아들이는지, 어떤 꿈을 지나가게 내버려 두는지 깊이 살펴라.

 

 

삶을 살아갈 때에는

신이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그대를 필요로 한다고 여기고 살라.

신은 진실로 그러하다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나니, ''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신인神人, God-Man 이나 인신人神, Man-God가 있을 뿐이다.

오직 하나의 유일한 존재가 있을 뿐이다.

아무리 많고 분리되어 있다 하더라도유일한 존재는 영원하다.

신의 유일성이 신의 영원한 법칙이다.

아무리 드넓고 깊은 대양이라도 한 방울의 물이 아니던가?

지금까지도 광대한 우주를 돌고 있는 지구도 하나의 행성이 아니던가?

이 우주에는 수많은 행성이 존재하지만 하나의 우주가 아니던가?

신의 유일성이 유일한 존재의 법칙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사랑'이다.

그것을 알고 지키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외의 다른 법칙을 따르는 것은 비존재, '죽음'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경멸에 빠진 그대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자기경멸에 빠진 인간을 상대로 재판을 내리려 한다.

그 재판관들과 재판의 내용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두 명의 사형수가 상대방 사형수에게 교수형을 선고하는 것이 이보다는 덜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장님 둘이서 서로의 눈을 뽑아버리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덜 처량해 보일 것이다.

바람이 하늘아래 모든 일을 방조하고 선동한다고 해서 바람을 증인으로 법정에 소환할 것인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여한다고 해서 별들의 말을 증언대에 세울 것인가?

모든 죽은 자들이 산 자들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유로 아담 이후의 모든 죽은 이들에게 소환장을 보낼 것인가?

 

 

'사랑''신의 법칙'이다

사랑의 대상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그것은 '생명의 나무'에서 자라난 잎사귀를 선택하여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주는 그것인가?

나무 위의 작은 잎사귀 하나가 그대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면, 그 나무 전체는 얼마나 더 큰 사랑의 가치가 있겠는가?

전체 중에서 일부분에 대해서만 주는 사랑은 결국 비탄에 빠질 운명이다.

그대들은 '생명의 나무'이니라.

자신을 단편적으로 세분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열매로 열매를 대항하지 말며, 잎사귀로 잎사귀를 적대하지 말고, 나뭇가지로 나뭇가지를 거부하지 말라. 나무줄기로 뿌리를 부정하지 말며, 나무를 땅으로부터 분리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전체에 대해 한 부분만 사랑하거나 그 나머지를 완전히 배제하며 사랑할 때의 행동이다.

'사랑''생명'을 낳고 기르는 수액이다.

'증오''죽음'으로 이끄는 고름이다. 그러나 피와 마찬가지로 '사랑'도 혈관을 타고 거침없이 순환되어야 한다. 피의 흐름을 억누르면 위험하고 지독한 재앙을 낳을 것이다.

자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사랑도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자아'가 아니라면 그 어떤 자아도 진실하지 못하다.

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은 자체가 '사랑'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것과 그대를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기 전에 그대가 증오하는 것과 그대를 증오하는 것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미덕이 아니다.

사랑은 반듯이 필요한 것이다.

빵과 물보다, 빛과 공기보다 더 중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랑하지 말지어다.

다만 그대가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사랑'을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고 내

쉬어라.

도도하게 흐르던 강물이 바다에 다다르면 바다로 자신을 채우듯이 그대는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비우고, 그래야 그대가 '사랑'으로 채워지는 법이다.

바다로부터 받은 ''이라는 선물을 부여잡고 있는 연못은 결국 그 물이 고여서 썩고 만다.

 

 

그대가 진정으로 보고자 하면, 그대의 눈동자에 사랑이 긷들게 하라.

그대가 진정으로 듣고자 한다면, 그대의 고막에 사랑이 감돌게 하면 되느니라.

사랑은 능동적인 힘이다.

사랑이 그대의 모든 행동과 발걸음을 이끌지 않으면, 그대는 길을 찾을 수 없다.

사랑이 그대의 모든 염원과 생각을 채우지 않는다면, 그대의 염원은 꿈속에 가시풀이 되고, 생각은 매일의 장송곡이 될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침묵'을 거닐며, 자신의 낡고 꽉 끼는 껍질을 벗고 어떤 구속이나 제약이 없이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그대들이 자신의 근심과 두려움, 열정과 염원, 질투와 욕망을 하나씩 몰아내어서 그칠 줄 모르는 절규와 비명을 더는 듣지 않고, 좌우로 찔러대는 고통을 더는 받지 않도록 하고 싶다.

나는 그 침묵을 통해서 그대들이 어둠과 숨 막히는 껍질을 벗고 빛으로 걸어 나와 '자아'라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기를 바란다.

조급하게 알을 낳으며 울어대는 암탉의 수다스러움이 아니라 진득하게 앉아서 알을 기다리는 암탉의 침묵이니라.

하나의 알을 품기 시작하여 고요한 확신 속에서 21일을 기다리고, 마침내 '신비의 손'이 포근한 암닭의 가슴과 날개 아래에서 생명의 기적을 낳게 할 것이다.

다른 시끄러운 암닭은 알을 낳자마자 다른 닭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야단을 떤다.

그 암탉처럼 미덕을 요란스럽게 떠벌리지 않도록 유념하라. 수치심에 재갈을 물리듯이 명에에 대해서도 재갈을 물리도록 하라.

침묵의 불명예보다 요란스러운 명예가 더 나쁘고, 명예를 떠 벌리는 것은 죄악에 침묵하는 것보다 더 고약하다.

말을 많이 하지 않도록 하라. 천 마디 말 가운데 하나의 말, 진실로 오직 하나의 말만이 내뱉어야 할 가치를 가진다.

 

 

기도

그대들은 바로 그대 자신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기도하기 때문에 그 기도가 헛될 수밖에 없다.

그대들 안에는 무언가를 쫒아내는 힘이 존재하듯이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힘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대들 안에는 쫒아내고 싶은 것들이 존재하듯이 끌어당기고 싶은 것들도 존재한다.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여러 조각으로 분열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일부분을 그대에게 심어준 것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분리되지 않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 자신의 '신성' 전부를 그대에게 준 것이다.

그 보다 더 위대한 유산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기도하는 데 있어서 그대들은 입술도 필요 없고 혀도 필요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고요하게 깨어있는 마음, 최고의 열망, 최고의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않는 '최고의 의지'가 필요하다.

기도하기 위해서 사원에 갈 필요도 없다.

마음 안에서 사원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사원에 들어가서도 자신의 마음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 창조, 사랑, 이해

 

 

모욕하고 모욕을 당하는 것, 모욕으로 모욕한 자에게 복수하는 것, 추악함으로 추악함을 씻으려는 것은 눈멀고 탐욕스러운 무지가 낳은 비겁하고 옹졸한 자존심일 뿐이다.

 

자만심에 지배되고 자아도취 된 세상은 그대의 머리 위로 수많은 모욕을 쌓아 올릴 것이다. 세상은 누더기가 된 법률, 부패한 강령, 케케묵은 명예로 얼룩진 피에 굶주린 사냥개들을 그대에게 풀어놓을 것이다. 세상은 그대를 질서의 파괴자이자 혼란과 파국의 장본인으로 선언할 것이다. 세상은 그대의 앞길에 온갖 덫을 놓고 그대의 침실을 쐐기풀로 장식할 것이다. 세상은 그대의 귀에 저주를 심고 그대의 얼굴에 경멸을 내뱉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겁을 먹지 않도록 하라. 대양처럼 넓고 깊게 마음을 먹고, 그대에게 저주를 줄 뿐인 그에게 은총을 내려라.

 

그리고 이 땅처럼 인자하고 고요하게 유지하며, 인간들 마음속의 오물을 순수한 건강과 아름다움으로 바꾸어라.

그리고 하늘의 공기처럼 자유롭고 유연해져라. 그대에게 상처를 내려던 무기는 결국 녹슬고 무뎌질 것이다. 그대를 해치려던 팔뚝은 녹초가 되어 멈추게 될 것이다.

 

 

종달새가 그대에게 노래를 빌려주고, 봄이 샘솟는 물을 빌려주는가?

양이 자신의 털을 그대에게 빌려주고, 소가 우유를 줄 때 이자를 붙이던가?

구름이 그대에게 비를 판매하고, 태양이 온기와 빛을 판매하는가?

이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생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나무토막 하나는 오늘은 나무 위에서 초록색 가지이고 내일은 벽 위에 나무못이 될 수 있어도 불에 타서 완전히 소멸하기 전까지 여전히 나무이고 계속해서 그 형체와 그림자를 바꾼다.

인간도 죽어서 내면에 있는 신이 완전히 그를 소모하기 전까지, 즉 인간이 유일자인 신과 하나임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까지 여전히 인간으로 살아간다.

 

 

원 안에서의 움직임은 끝이 서로 닿지 않으며, 끝까지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시간의 악순환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키지 않을 것인가?

 

인간은 신의 신성한 자유를 물려받은 자이므로 그렇게 할 것이다.

시간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지만, 그 축은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신은 인간이라는 수레바퀴의 축이다.

모든 만물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신의 주변을 회전하지만, 신은 항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정지해 있다.

 

시간의 축 안에서 만물은 평화롭다.

그 가장자리에는 만물이 요동친다.

과연 그대는 어느 곳에 처하겠는가?

 

그대들에게 이르나니,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벗어나 시간의 축 안으로 들어감 으로써 요동치는 멀미로부터 자신을 벗어나도록 하라.

그대가 시간과 함께 회전하지 말고, 시간이 그대 주변을 회전하도록 하라.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다. 어떤 이가 죽어서 변형이 이루어지면, 그는 다시 태어나 더는 변화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기 위해서 살아간다.

살기 위해서 죽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시냇물이 바다에서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바다라고 깨우치는 것이 시냇물에게 손해가 되겠는가?

인간이 신 안에서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버리고 이제는 그림자가 없는 존재의 정수를 찾는 일이다.

 

기쁨으로 너무 들뜨지 말고, 슬픔으로 너무 위축되지 말라. 오직 두가지 모두에 대해 고요함을 유지하라.

 

이 땅과 그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라.

이 땅과의 계산에서 유일하게 남는 것은 사랑이며, 이 땅이 사랑으로 그대의 빚을 탕감해 줄 것이다.

 

사랑은 집착으로부터 유일한 해방이다. 그대가 모든 것을 사랑하면, 그대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리라.

 

욕망으로 가득 찬 마주침은 다시 돌아왔을 때 원래의 눈빛이 사랑의 마주침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또 다른 욕망의 눈을 찾아 떠날 것이다.

 

 

남자와 여자

시간에서의 하나의 단계는 이원성이다. 그것이 통합에서 나온 것이듯 다시 통합으로 들어간다. 그대가 이 단계를 신속히 지나갈수록 그대는 더 빨리 자유를 껴안을 수 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자신이 원래 하나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둘로 쪼개져서 이원성의 쓴맛을 맛보아야 하고 통합의 단맛을 갈망하게 되어 있지만, 자신의 의지로 일원성을 갈망하고 추구하며 그것을 찾고 소유하여 그 놀라운 자유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비록 육체 안에 있을 때에도 남자와 여자는 육체의 교류가 아니라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지, 완전한 통합과 신성한 이해에 다다르는 그들의 여정에 방해되는 모든 장애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통합을 이룩해야 한다.

남자는 여자 안에서 일원성을 발견하고, 여자는 남자 안에서 이원성으로부터의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은 하나로 결합하여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극복한 자, 즉 완벽한 인간이 될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극복한 자는 통합된 인간이며 그 자신의 주인이다.

 

 

자신의 눈으로 들판의 초록을 들이마시고, 자신의 생각으로 모든 풀잎과 입맞춤하며, 자신의 영혼으로 모든 뿌리와 조약돌, 땅의 흙과 친교를 나눈다.

 

집 안에 앉아있는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집의 주인이며, 다른 한명은 손님이다. 그 주인은 건물가격과 유지비용, 온갖 천과 직물과 장식과 가구의 가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그에 반해 손님은 그 돌을 찾아내어 다듬어서 집을 지은 사람의 손과, 나무를 베어 창문과 문, 의자와 식탁을 만든 사람의 손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만든 창조의 손을 찬양함으로써 자신의 영혼도 고양된다.

그 손님은 그 집의 영원한 거주자인 반면, 그 이름뿐인 주인은 그 집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집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가축에 불과하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과연 눈은 볼 수 있는가?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귀는 과연 들을 수 있는가?

손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은 과연 느낄 수 있는가?

코로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를 과연 코는 맡을 수 있는가?

혀로 맛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과연 혀로 맛볼 수 있는가?

 

신성한 상상으로 태어난 믿음이 그들의 안내자가 될 때만 그러한 감각들을 느낄 수 있고, 정상으로 가는 사다리가 될 수 있다.

 

 

신의 형상이자 닮은 꼴인 인간이 죄인이라면,

신 자신이 분명 죄악의 원천일 것이라고 그대들은 의심없이 선언한다.

태양이 그 빛을 초에게 주는 것이 죄악이 아니라면,

신에게는 그 어떤 죄악도 없다.

초가 태양 빛에서 자신을 불사르고 태양과 하나가 되는 것이 죄악이 아니라면,

인간에게도 죄악은 없다.

그러나 빛을 발하지 않는 초에게는 죄악이 있다.

그럴때 성냥을 심지에 대더라도,

그 성냥과 불을 붙이려는 손을 저주한다.

태양 빛에서 불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초에게는 죄악이 있다.

그러므로 그 초는 태양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멀리한다.

인간은 우주의 법에 불복함으로써 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법에 무지한 자신을 감추려는 죄를 저지른다.

 

 

 

씨앗이 본래의 본성에 적합한 흙에 숨어 있다가 그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는 한, 유리병 속의 씨앗은 씨앗으로 남을 것이며, 그 껍질 속에 감춰진 경이로움은 생명과 빛으로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나됨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원성을 낳듯이, 이원성의 마찰과 대립을 통해서 그 하나됨을 이해하게 된다. 그 안에서는 신의 형상과 닮은 꼴인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고의 의식인 신은 자신을 말씀으로 표현하고, 그 말씀과 의식은 신성한 이해 안에서 통합된다.

이브를 속여 선악과를 맛보게 한 뱀은 심오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목소리로 자신이 나서서 경험하게 만든 이원성이 아니던가?

신은 이브의 행위를 막지 않았고, 아담도 공범이 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신은 자신과 인간이 다르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펼치고 이해에 의해 자신을 통합하기 위해서 이원성의 기나긴 길을 스스로 걸어가도록 한 것은 바로 신의 의지이자 계획이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신이 성내고 격노했는가? 신은 용서했다.

신은 인간이 그 열매를 먹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것을 먹기를 바랐다.

신의 의지에 따라 적극적으로 둘로 나뉜 인간은 죽음으로서 수동적인 하나됨으로 통합에 이른다. 따라서 죽음은 처벌이 아니라 이원성의 본성에서 볼 때 삶의 한 단계일 뿐이다.

이원성의 본성은 만물을 둘로 나누고 모든 것에 그림자를 낳는 일이다. 이원성은 끊임없는 마찰이며, 그 마찰은 서로 반대되는 양쪽이 자기파멸에 열중하도록 환상을 심어준다.

나는 하나의 환상이다. 신으로부터 분리된 이 인격체는 새롭게 뜬 눈의 환상이다. 그것은 실체나 현실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담이 죽음을 통해서 신의 자아인 자신의 실제 자아를 알게 되면서 그 환상이 태어난 것이다.

밖을 바라보는 눈이 어두워지고 내부를 바라보는 눈이 밝아질 때 그 환상은 사라질 것이다.

선과 악의 쌍둥이 문을 통해서 에덴을 뛰쳐나왔던 인간은 이해의 단일한 문을 통해서 에덴으로 들어갈 것이다. 생명의 나무에 등을 지고 나왔던 인간은 그 나무를 바라보며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인간이 자신과 신 사이, 즉 자신의 일시적인 자아와 자신의 영원한 자아 사이에 쳐놓은 장벽 이외에 또 다른 죄악은 없다.

고통으로 넘쳐나는 쾌락을 향한 인간의 탐욕, 빈곤을 부르는 부에 대한 욕심, 복종을 부르는 지배욕, 품위를 떨어뜨리는 명예욕은 무화과 잎으로 만든 그 수많은 가리개가 아니고 무엇인가?

신이시여, 저희를 보소서.

저희의 영혼과 존재와 유일한 자아를 보아주소서.

저희는 당신께서 시간의 새벽에 저희에게 내려준 멀고 거칠며 고통스러운 선과 악의 길을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걸어왔습니다.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이 없고 이원성의 모든 환상이 없고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당신의 존재 이외에 모든 각자의 자아가 없는 당신의 신성한 현존에게로 저희를 인도하였습니다.

저희는 통합되었습니다.

신이시여, 보소서.

저희는 극복하였나이다.

그러면 신이 그대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포옹하고, 그대들을 곧바로 자신의 생명의 나무로 이끌 것이다.

 

 

밤에 홀로 있으며 밤처럼 너무나 안정되고

고요하고 무한한 상태인 자들은 그 기쁨이 배가 된다.

밤은 오직 그들에게만 극복한 자의 노래를 불러준다.

 

밤과 친구가 되어라.

그대 자신의 생명의 피로 심장을 완전히 씻어 내고 밤의 심장에 바쳐라.

그대의 꾸밈없는 갈망을 밤의 가슴속에 맡기고

신성한 이해를 통해 자유로워지는 자신의 야망을 제외한

모든 야망을 밤의 발끝에 제물로 바쳐라.

 

밤의 신뢰를 얻은 자는

다가올 낮을 쉽게 호령할 수 있나니.

 

나에게 눈물이 있다면,

반짝이는 모든 별과 먼지들에게,

소용돌이치는 모든 개울과 노래하는 벌레에게,

향기로운 영혼을 공기 중에 퍼뜨리는 모든 제비꽃에게,

세차게 불어대는 모든 바람에게,

모든 산과 계곡에게,

모든 나무와 풀잎들에게

나는 오늘 밤 눈물을 바칠 것이다.

 

 

모든 인간 앞에 풍요롭고 아낌없이 펼쳐진 같은 식탁에서 어떤 이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황금을 마음껏 즐기고, 어떤 이는 황금 자체를 탐내서 언제나 굶주린다.

사슴을 발견한 사냥꾼은 그것을 죽여서 잡아먹으려고 애를 쓴다. 똑같은 사슴을 본 시인은 날개를 단 듯 사냥꾼이 꿈도 꿔보지 못한 시간과 공간으로 옮겨간다.

낮은 차원의 사람들은 지성을 본능이라고 부른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성이라고 부른다. 높은 차원의 사람들은 그것을 '예언자적 감각'이라고 명명한다. 지성은 그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의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이름 없는 힘을 '성령'이라고 부르고, 미르다드는 그것을 '신성한 이해의 정신'이라고 부른다.

 

 

모든 생명체를 경배하는 자세로 대하라.

아무리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그 안에는 가장 위대한 것을 여는 열쇠가 숨어있다.

모든 생명체는 소중하고 위대하다. 너무나 신비롭고 탁월하고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인 모든 생명은 아무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소유하는 것과 소유 당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대는 오직 그대가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

그대가 증오하는 것이 그대를 소유하게 된다.

그러니 소유 당하는 일을 경계하라.

 

 

고요해지면 그대들은 명료해질 것이요.

명료해지면 그대들은 세상을 훤히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인간은 신에게로 향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대가로 신 외의 목적지는 가치가 없다.

가는 길이 멀고 질풍과 폭풍이 몰아친들 어찌하겠는가?

순수한 마음과 예리한 눈을 가진 믿음으로 질풍의 허를 찌르고 폭풍을 타고 넘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대들 자신이라는 가없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며 그 안에서 신이라는 이름의 존재와 무언의 조화를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영원함이 그대들에게 부여한 임무이니라.

 

, 즉 인간의 삶이 하나의 원이고 신을 발견하는 일이 그 중심이라면 그대들이 하는 모든 일은 그 중심과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피땀에 흠뻑 젖더라도 그 외의 모든 일은 빈둥거림일 뿐이다.

 

방주는 준비 되었다.

바람은 순조롭게 불어오고,

바다는 고요하게 일렁인다.

노아에게 나는 그렇게 가르쳤도다.

그대들에게 나는 그렇게 가르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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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는 들의 광기

1권 사자가된 낙타의 반역

2권 어린아이가 된 사자의 반역

3권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의 자유

 

오쇼 라즈니쉬 지음 · 손민규 옮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천체여! 만일 그대가 그대의 빛을 받아 줄 대상을 갖지 못했다면 그대의 행복은 과연 무었이 되겠는가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태양이 떠오름으로 새들은 행복하다. 태양이 떠오름으로 꽃들은 행복하다.지구 전체가 깨어 일어나 행복에 넘치고 에너지로 가득 찬다.태양이 떠오름과 함께 새날이 밝아 온다는 희망으로 넘친다.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노래할 때, 태양 또한 틀림없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새와 꽃들이 없고 아무도 기다려 주는 이가 없다면 태양은 슬픔에 잠길 것이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사라진다면 태양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떠오르겠는가 뱀과 독수리  짜라투스트라는 뱀과 독수리를 데리고 다니곤 했다.동양에서 뱀은 지혜를 상징한다. 가장 위대한 지혜는 뱀이 허물을 벗듯이, 뒤 돌아 보거나 집착함이 없이 과거로부터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항상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움직인다. 지혜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삶에 대한 경험이다. 지혜는 과거 기억의 잔재를 긁어모으지 않는다. 지혜는 항상 신선하고 새롭고 현존하는 것을 반사하는 투명한 거울과 같다 독수리는 자유, 용기의 상징이다.독수리는 두려움 없이 태양을 가로질러 끝없는 하늘 저 멀리 날아간다.지혜와 자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지식은 지혜와 정반대로 대립되는 것이다. 지혜는 본질적으로 순진무구함이다.지식은 에고이지만 지혜는 그 에고의 사라짐이다. 지식은 그대를 온갖 정보로 가득 차게 하지만 지혜는 그대를 완전히 텅 비게 한다. 그 비어있음(Emptiness)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충만함이다.지혜가 자유를 가져다준다. 다른 자유는 없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자유는 허위에 불과하다. 유일하게 진정한 자유는 영혼의 자유이다 인간은 거의 무감각해졌다. 인간은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일수록 더 무감각하다. 인간이 이해하는 언어는 단지 돈과 권력, 명성의 언어일 뿐이다. 인간은 사랑과 기쁨, 춤의 언어를 잊어버렸다 홀로 되었을 때, 짜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면서 신이 죽었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 진리와 종교성,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말을 이해해야 한다. 신은 단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말이란 있을 수 없다. 신이라는 관념은 교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신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 허황된 관념은 오랜 세월 동안 세뇌작용을 통해 인간에게 강요되어 왔다 신은 공포와 탐욕, 삶에 대한 절망감에서 비롯된 발명품일 뿐이다. 신은 삶의 예술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창작품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춤추는 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삶은 주의깊음(alertness)과 지성, 인내와 관용을 필요로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삶과 삶이 주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는 삶을 열렬하게 긍정하는 유일한 신비주의자이다. 삶에는 아무 것도 포기할 것이 없다. 삶은 존재계의 선물이다. 삶을 즐기는 법을 배우라. 삶의 과즙을 맛보라. 나무와 별, 그들과 함께 춤추라. 질투 없이 사랑하고, 경쟁심 없이 살라. 모든 사람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어떠한 신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때 저 세상의 낙원이란 개념은 쓸모 없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대의 삶이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며, 나무가 춤추고 기쁨의 빛을 비추는 아름다운 정원처럼 되기를 바란다. 짜라투스트라는 절대적으로 삶에 찬성한다. 이것이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이다. 독약과 같은 사람들, 파괴적인 사람들은 수많은 추종자를 갖는다. 그리고 삶과 사랑의 메세지가 전부인 이 독특한 신비주의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종교가 되었다.   삶 이외의 다른 신은 없으며 사랑 이외의 다른 기도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친다. 인간이란 초극(超克) 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초극하기 위해 무엇을 해왔는가?"이제 까지 모든 만물은 자기 이상의 무엇을 창조해 왔다. 그러나 위대한 만조(滿潮)가 썰물이 되는 것을 바라며, 또한 인간을 초극하는 것보다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가?원숭이는 인간에 대해 무엇인가? 웃음거리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비통한 치욕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초인에 대해 웃음거리이거나 비통한 치욕이다. 그대들은 벌레로터 인간에의 길을 걸어왔으나, 그대들 안에는 아직도 많은 것이 벌레 그대로이다. 먼 옜날에 그대들은 원숭이였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인간은 어떤 원숭이 보다 더한 원숭이다. 그대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자도 식물과 유령사이의 잡종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내가 그대들에게 유령 혹은 식물이 되라고 할 것인가?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고 있다!초인이란 대지(大地)의 뜻이다.그대들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초인은 대지의 뜻이 될거라고......형제여! 그대들에게 부디 원하노니, 언제까지나 대지의 뜻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초지상적인 희망에 관에 말하는 자들을 부디 믿지 말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독을 가져오는 자들이다.전에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 최대의 모독이었으나, 신은 죽었고 더블어 이 모독자들 또한 죽었다. 이제는 대지에 대한 모독이, 또한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의 내장(內臟)을 대지의 뜻보다 훨씬 존중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모독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설령 다윈의 이론이 생물학 적으로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심리학적으로는 그의 이론을 거부할 수 없다. 그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원숭이가 남아있다. 그대의 행동은 아직도 인간이하이다. 그대가 갖고 있는 인간성은 피부 깊숙이 스며든 것이 아니라 단지 살갗을 스친 정도일 뿐이다. 그대는 자신 안에서 고릴라가 뛰쳐나오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사소한 모욕만으로도 누구인가를 죽이거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대는 동물들이 갖고 있는 온갖 폭력성과 충동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   누구든지 대지에 반대하는 자는 그대에게 반대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대지의 아들과 딸이기 때문이다. 나무와 새에게 그러하듯이 이 대지는 그대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이 대지 위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이 그대의 가족이다.이 세상 전체를 거대한 가족, 사랑의 바다로 만드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종교이다. 그 외에, 종교라고 말하여지는 모든 것은 위선에 불과하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본문)

그대들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크나큰 경멸의 시간이다.그대들의 행복, 그리고 이성과 선행도 한결같이 구역질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또한 그대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이다.'나의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그것은 빈곤과 더러움, 그리고 비겁한 안일이다. 그러나 나의 행복 자체를 정당화해야 할 것이다!'나는 위대한 경멸자를 사랑한다. 그들은 동시에 위대한 숭배자이며 피안을 향한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오쇼 강설)

그대의 무지에 대한 경멸, 그대의 증오와 질투에 대한 경멸, 그대 안의 동물적인 본능과 세속적인 삶에 대한 경멸.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대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체험은 '그대 자신'에 대한 경멸인 것이다 그대의 행복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모든 사람은 자신을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는 이성이 결여된 수많은 미신으로 물들어 있다. 그대는 신을 믿는가?이성적인 인간은 신을 믿을 수 없다. 그대가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천국과 지옥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도 자신을 매우 합리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그대의 이성은 맹목적인 신념과 증명되지 않은 가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이성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것은 경멸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대의 선행이란 무엇인가?실제로 그대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그대는 사랑과 기쁨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대에겐 넘치는 축복이 없다. 그러니 그대가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게임이다. 먼저 그들을 거지로 만들라. 그런 연후에 적선을 하고 그대는 선한 사람이 된다? 그대가 가진 것은 돈뿐이며 그 돈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착취한 것이다.그대의 선행은 무엇인가?그대는 자신의 선행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위선이지 미덕이 아니다. 짜라투스트라는 강렬한 어조로 말한다 저 너머의 세계, 의식의 에베레스트를 동경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으로 불려질 가치도 없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본문 

  짜라투스트라는 이 같은 말을 마치고 다시 군중을 응시하며 침묵 속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말했다.'그들은 저기에 서 있다. 그들은 비웃고 있다. 그들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나는 이들의 귀에 어울리는 입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목동이 없는 가축의 떼이다. 누구나 같은 것을 바라며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간다.'옛날에는 세계의 모든 인간이 미치광이였다' - 그들 중에 가장 영리한 자가 이렇게 말하고 눈짖을 한다.사람들은 영리하며 과거에 일어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은 끝이 없다. 사람들은 아직도 서로 싸우지만 곧 화해한다. - 그렇지 않으면 소화 불량에 걸리기 때문이다.사람들은 밤과 낮에 약간의 즐거움을 가지긴 하지만 건강을 소중하게 여긴다.'우리는 행복을 발견해 냈다.'  -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박거린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쇼 해설  

짜라투스트라의 이 말들은 항상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왔다. 수많은 군중들을 상대로 말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뜻밖이고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은 귀를 갖고 있었지만 귀 기울이지(listening) 않는다. 기껏해야 그들은 들을(hearing) 뿐이다. 그들은 귀를 갖고 있으므로 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더 요구된다. 귀와 더블어 고요하고 수용적인 마음, 간섭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다.그때, 듣는 것은 귀 기울임이 될 것이다. 귀 기울임은 그대가 그것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올 때 그대는 그 바람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가? 내적인 경험에 관해서도 똑같은 사실이 적용된다. 단지 고요한 마음으로 귀 기울인다면  무엇이 진리인지 즉각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마음과 무관하다. 이러한 인식은 그대 존재의 중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침묵과 순간 속에 존재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마음이 아니라 가슴을 통한 앎,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앎이다. 이것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짜라투스트라의 말이 곧 나의 말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는 그 말들이 25세기 전의 인물에 의해 말해 졌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교육의 혜택을 받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불행하다. 우리는 온갖 기계와 장난감으로 가득 찬 세상 안에서도 불행하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와 우리 존재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가 밖에서 찾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 존재의 내면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밖에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며 낙타가 사자가 될 것인지, 그리고 마침내 어떻게 사자가 어린아이가 될 것인지........  존경심과 경애심을 품고 있는 강인한 정신에는 여러가지 무거운 것이 존재한다. 강인한 정신은 무거운 것, 가장 무거운 것을 열망한다.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 강인한 정신은 이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많은 짐을 짊어지기를 원한다.이처럼 강인한 정신은 온갖 무거운 것을 스스로 짊어진다.그리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서둘러 사막으로 달려간다.그러나 가장 황량한 사막에 이르러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곳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정신은 자유를 획득하여 자신의 사막에서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왜 정신 속에는 사자가 필요한가? 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공손하게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 사자라 해도 그런 능역은 없다. 사자의 능력은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자유를 만들어 내는 것 뿐이다.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에 대해서조차도 신성한 '(No)'를 말하는 것, 나의 형제들이여, 그것을 위해서는 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나에게 말해 다오. - 사자도 해내지 못한 것을 어린아이가 해낼 수 있을지를, 왜 약탈자인 사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지를......  어린아이는 순진 무구하다. 어린아이는 하나의 망각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어린아이는 하나의 유희이며 스스로 움직이는 수레바퀴이다. 어린아이는 첫번째 운동이며 신성한 긍정이다.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요구된다. 이제 정신은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것이며, 세계로부터 분리된 정신은 이제 자신만의 세계를 쟁취한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는 의식의 진보 과정을 세 개의 상징으로 구분한다.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가 그것이다 낙타는 짐을 나르는 짐승이다. 낙타는 기꺼이 노예처럼 일하며 결코 반역하지 않는다.그는 'No'라고 말할 줄 모른다. 그는 신봉자이고 추종자이며 충실한 노에이다. 낙타는 인간 의식의 가장 낮은 단계이다 사자는 혁명가이다. 혁명의 시작은 ''라고 말하는 데서부터 발한다.낙타의 의식 속에는 "그대는 이것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자기를 이끌어 주는 누군가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그에게는 종교와 사제와 신성한 경전들이 필요하다. 그는 용기와 영혼이 없으며 자유에 대한 열망도 없다. 그는 다만 복종할 뿐이다. 사자는 자유를 열망하며 모든 구속을 파괴하고자 한다. 그는 자기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는 다만 "나는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자조차도 인간 성장의 최고점은 아니다. 최고점은 사자가 변형을 통하여 어린아이가 될 때 가능하다.어린아이는 순진 무구하다. 그것은 순수한 신뢰이다그것은 존재와 삶, 그리고 삶이 포함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신성하게 'Yes'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순수함과 진실함, 수용성, 그리고 존재에 대한 개방성의 정점이다. 이 상징들은 매우 아름답다

 

즐거움과 정열에 대하여   

감각이 느끼고 정신이 인식하는 것, 그것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감각과 정신은 스스로 모든 것의 목적이라고 그대를 설득하려 든다. 감각과 정신은 그토록 오만하다.감각과 정신은 도구와 장난감이다. 그 배후에는 여전히 '자기(self)'가 있다.'자기'는 감각의 눈으로 찾으며 정신의 귀로 듣는다.'자기'는 항상 귀를 기울이고 추구한다.'자기'는 비교하고 극복하고 점령하고 파괴한다.'자기'는 지배한다. 그리고 에고의 지배자이다.나의 형제여,그대의 사상과 감정의 배후에는 하나의 강력한 통치자, 하나의 알 수 없는 현자가 서 있으니, 그는 '자기'라 불리운다. 그는 그대의 육체 안에 산다.누가 안단 말인가

 (오쇼 강설

 주시하라.그러면 그대의 감각이 확실한 것이 아님을 발견할 것이다. 감각의 주장은 공허한 것이다. 그대는 말해진 적도 없는 소리를 들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본다. 육체는 항상 있는 그대로 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대 안에 단 두 가지의 실체만을 인정한다.육체와 존재가 그것이다. 그대의 존재에 도달하고 싶다면 육체와 더블어 시작하라. 육체는 그대 존재의 외적인 측면이다. 그리고 존재는 육체의 내적인 측면이다 자기(self)는 그대의 진정한 주인이다.만일 그대의 자기가 감각과 마음을 도구로 이용한다면 그것은 완벽하게 옳다.그러나 인간에게는 일이 거꾸로 되었다. 우리는 주인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으며, 하인이 주인인 체한다. 마음과 감각은 하나의 도구로써는 훌륭하다. 주인이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주인인 체한다. 하지만 마음은 단지 하나의 하인일 뿐이다존재는 완전히 잊혀졌다. 그것이 인류의 비극이다 그대의 자기, 즉 존재는 육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똑같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마음은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은 그대에게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그대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사랑 속에는  어떤  광기가  존재한다.그러나   광기  속에는  어떤 질서가  존재한다.  삶을  사랑하는  나의 눈에 나비와  비누  거품이  보이며  인간들  가운데  그와  같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  가장   알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이 가볍고  어리석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작은  영혼들이  파닥거리며 나는 것을 보는 것이 짜라투스트라로  하여금 눈물짓게 하고  노래하게  한다  

(오쇼 강설

 사랑은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사랑에는  목적이나  의미가  없다.  사랑은 커다란  기쁨과  희열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의  의미는  아니다.  사랑은  목적을  가지는  비즈니스가  아니다 광기란  무엇인가?그대가   사랑하는지  증명할   없을  ,   그것은  광기이다.   그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할   없다.  사랑은  자신  속에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그 공간은  진주처럼 빛나는  이슬방울이  매달린  장미꽃과  같다.  이른 아침  산들바람과  태양아래에서  춤추는 장미와  같다.  사랑은  그대  삶의  춤이다.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은  광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에게는  사랑만이  유일하게  정상적인  것이다.그대는  사람들을  관찰해  본적이  있는가?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것을  알릴  필요조차  없다.  그의  눈을  보면  새로운  깊이가  느껴지고  그의  얼굴에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떠오른다. 그의  걸음걸이에서  춤과  같은  미묘함을    있다.   그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의  존재에  봄이  찾아와  영혼  속에  있던  꽃이  횔짝  피어 났다 행복에  대하여  가장   아는  사람은 삶의  흐름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긴  사람이다.  그는  작은  무지개를  만들면서  햇빛 속에 빛나는  비누 거품조차 사랑한다.    비누 거품과  나비,  바람속에서  춤추는  장미 . . .    그렇게  심각함이 없이  가벼운 것,  그대가  어리석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작은  영혼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춤을  보면서   짜라투스트라는  눈물 짖고 노래  부른다. 그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다.이 변화하는 삶이 짜라투스트라에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노래 부르게  한다.

 

 

우정에 대하여 

 타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폭로한다.친구에 대한 우리의 염원은 우리 자신을 폭로한다 

 (오쇼강해 친구에 대한 욕구가 있는 한 그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다.오로지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친구가 될 수 있다.그러나 그것은 그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의 우정은 배고픔과 갈증이 아니라 흘러 넘치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사랑을 나누어 주기 원한다 친밀함 (friendliness)은 관계 이상의 것이다. 모든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구속한다. 관계는 그대를 노예로 만들고 다른 사람을 노예화 시킨다.친밀함은 어떤 조건이나 기대, 보답, 심지어는 감사함까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나누어 주는 기쁨일 뿐이다. 친밀함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다면 그대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그대는 속임수를 쓸 수 있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공허함을 채워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공허함을 채워 줄 수는 없다.그대는 자신의 공허함과 직접 마주쳐야 한다.그대는 그 공허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위안이 아니다.그대는 혁명을 필요로 한다.그대 존재의 변형을 필요로 한다.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사랑과 우정, 믿음등 모든 관계는 그대 자신이 공허하고 가치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폭로할 뿐이다 그대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누가 그대를 사랑하겠는가 그대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다면 누가 그대를 믿겠는가?  

 

이웃간의 사랑에 대하여 

 나는 그대에게 이웃이 아니라 벗을 가르친다.그 벗으로 하여금 대지의 축제가 되고 초인에 대한 예측이 되게 하라.나는 그대에게 벗과, 그의 넘쳐흐르는 가슴을 가르친다.나는 그대에게 완성된 세계를 품고 있는 벗을, 선의 그릇을, 항상 베풀기 위하여 완성된 세계를 갖고 있는 창조하는 벗을 가르친다.그대는 벗의 안에 깃든 그대의 원칙으로써 초인을 사랑해야 한다 

 (오쇼 강설 이웃은 우연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친구는 그대 스스로 발견하고 선택한 존재이다. 우정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를 친구로  '선택' 한다.우정이 하나의 축제가 될 정도로 친구를 사랑하라.이 세상은 이웃이 아니라 친구를 필요로 한다. 사랑하지만 간섭하지 않는 친구, 사랑하지만 조건을 내세우지 않는 친구, 사랑하지만 그대를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내버려두는 친구, 세상에는 그런 친구가 필요하다.사랑과 우정으로 가득찬 세상,그런 세상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그 보다 낮은 목표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단 하나의 유일한 종교, 즉 사랑을 알았다면 세상은 파라다이스가 되었을 것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자의 길에 대하여 

 나의 형제여, 그대는 따로 떨어져 홀로 있기를 원하는가?잠시 멈추어 내말을 들어라."추구하는 자는 쉽사리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 따로 떨어져 홀로 있는 것은 죄악이다." - 군중은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말하는가? 내가 듣기 원하는 것은 그대의 지배적인 사상이지, 그대가 멍에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자라투스트라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대의 눈은 분명히 나에게 알려야 한다.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나의 형제여, 나의 눈물과 더블어 홀로 있으라.자신을 초월하여 창조하기를 원하는 사람,그리하여 소멸해 가는 사람,나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느니......  

 (오쇼 강설

 군중은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스타일을 원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군중은 그대가 군중의 일부이기를 원한다.예수라는 젊은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무엇이 그의 죄였는가?그의 죄는 홀로 자신의 길을 갔다는 것이다.그는 자신의 개체성을 확립했고 군중을 추종하지 않았다.그는 자신만의 발자국을 만들었다.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기를 원한다.그래야만 자신의 열등감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홀로 우뚝 선다.그는 자기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다.그는 위험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대의 내면이 공허하며 군중 속에서 그대 자신을 잊으려고 애쓴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군중은 창조자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창조하는 사람은 사회적인 도덕규범이나  표준적인 가치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그는 교회에 갈 의무도 없고 경전을 읽을 의무도 없다. 그는 자신만의 종교를 발견한다.창조성이 곧 그의 종교이다.군중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그를 설득하려 든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유인이기를 포기해야 한다.그렇다면 그대는 무엇인가?그대는 영혼이 없는가?그대는 의식을 갖지 못했는가?그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꼭 다른 사람이 와서 그대에게 빛을 주어야만 하는가?어떤 사람이 빛을 가져온다면, 그는 다시 빛을 거두어갈수도 있다.그 빛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자신을 초월하여 창조한다는 말은 그대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 그럴 때에만 그대 안에 이미 현존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창조할 수 있다. 그대의 거짓된 인격이 모두 사라질 때 그대의 진정한 개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창조는 그대 자신으로 가는 길인 동시에 초인으로 가는 길이다.자신의 내면에서 초인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헛된 삶을 사는 것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내게 말해 다오, 황금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황금은 흔치 않고 무용하며 반짝반짝 빛나면서 그 광채가 부드럽기 때문이다.황금은 항상 자신을 선사한다 황금은 오직 최고의 덕을 나타내는 하나의 비유로서만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된다 선사하는 자의 눈빛은 황금처럼 빛난다 

 (오쇼 강설 

그는 황금에 대해 말함으로써 아름다움과 선함, 그리고 사랑이라는 최고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사랑은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사랑을 수단으로 만드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사랑이 아름다움과 기쁨, 향기를 간직하기 위해선 무용한 채 남아 있어야 한다. 사랑이 어떤 곳에 도달하기 위한 사다리가 되는 순간, 사랑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에는 목적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은 목적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전락한다.무엇이든지 유용한 것은 수단이라는 낮은 차원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목적은 항상 무용한 것이다 짜라투스트라에 있어서 , 무용성이라는 말은 비난의 말이 아니다. 장미꽃의 유용성이 무엇인가?하늘의 구름이 현란한 색채로 물들고 지평선이 한편의 시처럼 될 때, 그토록 아름다운 석양의 유용성은 무엇인가?유사 이래로 예술가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예술은 예술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자신의 덕을 다른 사람에게 선사하는 사람들, 내면의 풍요로움을 전해 주는 사람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갖는 사람들의 눈은 황금처럼 빛난다.그들은 비교할 수 없는 광채를 가진다

선과 악의 모든 이름은 비유이다. 비유는 말하지 않으며 다만 암시할 뿐이다 비유에서 지식을 구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정신적인 가치에 관한 모든 언어는 다만 힌트일 뿐이다.마치 그것이 실체인 양 말에 얽매이지 말라. 말은 힌트이다.그것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일본에는 불상이 없는 절이 있다.그 절에는 불상 대신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다.왜냐하면 붓다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손가락을 숭배하지 말라.손가락에 대해서는 잊어라.경전과 스승, 종교에 대해서는 잊어라.다만 그들이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해 힘쓰라 손가락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죽인다.모하메드교인은 기독교인을 죽이고, 기독교인은 힌두교인들을 죽인다.힌두교인은 모하메드교인을 죽인다.아무도 손가락을 위해 싸운다는 사실을 모른다.그러나 달은 하나이다.손가락이 가리키는 각도는 다를 수 있다.왜냐하면 달을 가리키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시대, 다른 시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어찌 크리슈나, 예수, 붓다, 짜라투스트라가 똑같은 방식으로 달을 가리킬 수 있겠는가 경전과 말, 조각상이 지시하는 바에서 지식을 구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탐구는 내면을 향해야 한다.신의 왕국은 그대 내면에 있다.그대가 내면을 향하지 않는 한,그대가 눈을 감고 마음을 릴렉스(relax) 시키지 않는 한,그대의 마음과 가슴, 육체가 깊은 조화를 이루지 않는 한,그대는 내면에 울려 퍼지는 침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 자신의 목소리이다.그대 자신의 진리만이 그대를 해방시킨다.다른 사람의 진리는 항상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그대들의 가슴이 강물처럼 드넓게 가득히 물결쳐 그 강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축복이 되고 위험이 될 때, 그때야말로 그대들의 덕이 비롯되는 때인 것이다전통과 관습, 군중에 맞서서,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용기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짜라투스트라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그를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가슴이 사랑의 강물로 흘러 넘치는 사람의 현존 자체가 그대에게 위험을 안겨준다. 그의 사랑은 그대를 익사시킬 수 있다. 그의 사랑은 그대의 에고를 파괴할 수 있다 유사 이래로 인류에게 커다란 축복을 안겨준 사람들은 인류를 저주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되어 왔다. 오로지 지성과 용기를 겸비한 극소수의 사람들,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모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들의 축복을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위험성만을 알았다. 이 사람들은 사회 전체에 혼란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와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는 혼란은 별이 탄생할 때의 혼란이다. 그 혼란을 통해 인간은 진화의 최고점에 도달한다. 낡은 것이 파괴되고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그런 혼란은 마땅히 환영받아야 하는 혼란이다

 

그대들이 비난과 칭찬을 초월하고 , 그대들의 의지가 사랑하는 자의 의지로서 만물에 명령하려 할 때, 그때야말로 그대들의 덕이 비롯되는 때이다.그대들이 단 하나의 의지를 의욕하는 자가 되고, 모든 욕구를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본질이며 필연이라고 부를 때, 그때야말로 그대들의 덕이 비롯되는 때이다 진실로 그것은 새로운 선이며 악이다 !진실로 저 심연의 새로운 일렁임이며 새로운 샘물의 목소리이다  이 새로운 덕은 힘이며 지배적인 사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하나의 미묘한 영혼이다그것은 황금의 태양이다. 그리고 그 둘레를 인식의 뱀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짜라투스트라의 중심 주제이다. 사랑은 곧 그의 신이다. 사랑은 모든 덕의 출발이며 기원이다.어둠과 무지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은 새로운 도덕성이며 새로운 선()이다.사랑은 새로운 신이다  진실로 저 심연의 새로운 일렁임이며 새로운 샘물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황금의 태양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2) 

 나의 형재들이여, 그대들의 덕의 힘으로 대지에 충실하라!그대들의 사랑과 지식이 대지의 뜻에 봉사하도록 하라!이렇게 나는 그대들에게 간절히 바란다 정신 또한 덕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백 번을 실험했으며 백 번을 길을 잃고 헤매었다. 그렇다. 인간은 하나의 실험이었다. , 많은 무지와 오류가 우리에게서 육체가 되었다. 수천 년 간의 이성뿐만 아니라, 수천 년 간의 광기도 우리에게서 돌연히 튀어나온다. 상속자가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오쇼 강설 

인간은 실험적인 존재이다.인간은 깨어있는 의식의 경지와, 삶의 심오한 근원에 도달하기 위한 실험적인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은 완성품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개는 개로 태어나 개로 죽는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붓다로 죽을 수 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다른 동물은 진화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진화할 수 있다. 일단 그대가 실험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 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대는 진보해야 한다. 그대의 진보에는 한계가 없다. 진정한 진화는 내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그대의 여행은 내면을 향한다. 그렇게 해서 실험적인 존재로써의 그대는 결국 경험적인 존재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성직자가 아니다. 그는 영혼의 과학자이다.그의 종교는 숭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그의 종교는 더 높은 차원으로의 변형으로 이루어 진다.그에게 있어 종교의 상징은 불이다. 불은 항상 위를 향해 타오른다.그러나 짜라투스트라의 추종자들은 다른 종교와 똑같은 오류를 저질렀다. 그들은 의식의 더 높은 차원을 향해 스스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보다는 불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숭배는 교활한 장치이다. 사람들은 뭔가를 숭배하고, 숭배가 곧 종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숭배는 종교가 아니다.사람들은 길을 잃었고 , 짜라투스트라의 사원은 여전히 상징에 매달린다. 그대 안의 모든 쓰레기를 불사르고 순수한 황금 만을 남기는 불꽃,스스로 그런 불꽃이 되고자 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대지는 그대를 통해 자신의 의미를 추구한다. 그대는 대지의 가장 진화된 부분에 속한다. 그대의 육체는 대지에 속한다. 그대는 대지의 가장 만개한 꽃이며 위대한 변형이다.사랑으로 대지의 뜻을 받들라.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대지와, 대지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잠재성을 흔들어 일깨우라. 그것만으로도 신과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게 될 수 있다. 인간은 그 자신만으로도 충족될 수 있다 인간은 하나의 실험이었다.인간은 하나의 '되어감(a becoming)이다.실험이 실패한 이유는 아무도 우리를 대지의 실험으로써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모든 종교는 대지를 포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출발점부터 잘못된 길을 간다. 그들 또한 대지의 아들이며 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지에 대한 포기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삶의 의식을 부여한 것은 바로 대지였다 수천 년 동안 잘못되어 온것이 유산으로써 우리에게 물려졌다. 과거의 전통과 종교에서 잘못된 것을 가려내고, 다른 실험들이 어디에서 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매우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그대는 맹목적으로 과거의 행로를 따라가서는 안된다 불필요하고 비 본질적인 모든 것을 불태우고 극소량의 본질만 남기는 불꽃이 되어야 한다. 그 극소량의 본질로부터 그대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3)  

그대들은 나를 존경한다. 그러나 언젠가 그대들의 존경이 무너진다면 어찌 될까?무너지는 우상에 맞아 죽지 않도록 조심하라.그대들은 짜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는가?그러나 짜라투스트라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그대들은 나의 신봉자이다. 그러나 신봉자에게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조차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나를 발견할 것이다.나는 지금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나를 떠나 그대들 자신을 찾으라. 그대들이 나를 모두 부인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와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은 신봉자(believers)를 원하지 않는다.세상은 신봉자로 가득 찼다. 짜라투스트라가 원하는 사람은 완전히 변화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믿음(belief)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옳다."나를 믿지 말라. 나를 이해하라!그리고 그 이해를 통해 그대 안에 혁명이 일어나도록 하라."단지 믿기만 하는 것은 너무 싸구려이다. 그것은 사기극이다.그러나 세상 전체가 그런 기만 속에 살아간다 짜라투스트라를 만남으로 해서 그대가 그대 자신을 탐구하기 시작한다면 그와의 만남은 커다란 의미를 가질 것이다.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와의 만남은 아무 의미도 없다.

 

지복(至福)의 섬에 대하여 

 유일한 것, 완전한 것, 충족된 것, 불멸하는 것, 이런 것에 대한 모든 가르침을 나는 악이며 염세적이라고 부른다.최상의 비유는 시간과 생성에 대해 말해야 한다.그 비유는 모든 무상함을 대변하며 찬미하는 것이어야 한다.나의 의지는 항상, 나를 해방시키고 기쁨을 가져다 주는 자로서 나에게 온다  

(오쇼 강설)

  그대의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 될 것이다.그때, 그대는 날이 갈수록 더러워지는 고여 있는 물이 아니다. 그대는 변화하여 흐르는 강이다.그대의 삶은 매 순간 새로워지고 새로운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선사한다 찬양되어야 할 것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변화이다.불변하는 것은 죽어 있다.그러나 살아 있는 것은 항상 움직인다.그것은 항상 변화하고 생성한다.짜라투스트라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생성'을 가르친다. 그는 영원불변 대신해 변화를 가르친다 의지(Willing)는 그대를 해방시킨다.왜냐하면 의지는 그대를 창조자로 만들기 때문이다.의지는 그대를 신으로 만든다.의지는 그대를 초인으로 변형시킨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동정하는 자에 대하여  

일찍이 악마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신에게도 그의 지옥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동정을 경계하라. 동정으로부터 무거운 구름이 인간에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진실로 나는 뇌우(雷雨)의 전조(前兆)를 잘 알고 있다.그러나 이 말 또한 명심하라!모든 사랑은 동정을 넘어서 있다.위대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까지도 창조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에 바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바치는 나의 이웃에게도"  -- 이것이 창조자의 말이다.그러나 모든 창조하는 자들은 냉혹하다  

(오쇼 강설

 그대는 지성과 명상, 사랑을 통해 계속적으로 그대 자신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그대의 연인을 변화시켜야 한다.그대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매순간 새로워져야 한다. 그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차원, 새로운 길을 발견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한다. 그대는 똑같은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 동정은 사랑보다 훨씬 낮은 차원이다.사랑은 창조적인 경험이다.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를 창조한다.그 끊임없는 창조 안에서 그들은 항상 새롭고 신선하다 짜라투스트라는 창조성의로써의 사랑을 말한다. 그의 말은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사랑은 고정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사랑은 창조적인 소용돌이이며 하나의 춤이다.춤이 더욱더 깊어질수록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춤만이 남는다.그대는 삶을 아름다운 춤으로 만들 수 있다.그대는 삶을 사랑의 창조적인 행위로 채울 수 있다.짜라투스트라는 사랑을 최상의 가치로 가르친다.그에게 있어 사랑은 신이다.그에 관한 한, 사랑은 종교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성직자에 대하여

  어느 날 짜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신호를 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여기 성직자들이 있다. 그들이 나의 적이기는 하지만, 조용히 칼을 잠재운 채로 그들을 지나쳐 가라!그들은 질이 좋지 않은 적이다. 그들의 겸손보다 더 복수심에 찬 것은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손대는 자는 쉽게 더럽혀진다.그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자가 그들에게 멍에를 씌운 것이다.그릇된 가치와 잘못된 경전의 멍에를! , 누군가가 그들을 그들의 구세주로부터 구원해 준다면!, 저 성직자들이 세운 오두막집을 보라!그들은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동굴을 교회라고 부른다!, 이 왜곡된 빛, 이 곰팡내 나는 공기여! 여기서는 영혼이 자신의 정점까지 날아오를 수 없다!오히려 그들의 신앙은 이렇게 명령한다. '무릎을 꿇고 계단을 기어오르라. 너희 죄인들이여!'누가 그런 동굴과 속죄의 계단을 만들었던가? 그것은 자신을 숨기고 싶어하고 밝은 하늘 아래에서 부끄러워했던 자들이 아니었던가?허물어진 지붕 사이로 다시 맑은 하늘이 새어 들어와 무너진 벽 위의 풀들과 붉은 양귀비꽃을 내려다볼 때 -- 그때에 비로소 나는 이 신의 처소를 향해마음을 돌리리라.그들은 자기들에게 반대되는 것, 자기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신이라고 불렀다. 진실로 그들의 숭배 속에는 영웅적인 성질이 많았다.그리하여 그들은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말고는, 그들의 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나로 하여금 그들의 구세주를 믿게 하려면 그들은 좀더 훌륭한 노래를 불러야 하리라. 나에게 그의 제자들이 좀더 많이 구원받은 것처럼 보여야 하리라!나는 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싶다. 아름다움만이 속죄를 설교하기 때문이다.그들 구세주의 영혼은 헛점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 구멍들을 자신들의 망상으로 채우고 그 구멍 마개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그들은 열심히 고함을 지르며 그들의 가축 떼를 외나무다리 위로 몰아친다.마치 미래로 통하는 다리가 그 하나 뿐인 양 !그러나 진실로 이 목자들 또한 여전히 양떼에 속해 있는 것이다!그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 위에 피의 문자를 새겼다. 그리고 그들의 어리석음은 진리가 피에 의해 증면 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그러나 피는 진리의 증인로서는 가장 나쁜 증인이다. 피는 가장 순수한 가르침에도 독을 섞어서 망상과 증오로 바꾸어 놓는다.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이 자유로 가는 길을 찾으려 한다면, 구세주보다도 훨씬 위대한 사람들에 의해 구제되어야 한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쇼 강설)

  종교를 대표하는 성직자들, 그들은 종교의 친구가 아니다. 그들은 종교의 가장 큰 적이다. 왜냐하면 종교에는 중개인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대와 존재계 사이에는 직적적인 관계가 있을 뿐이다.존재계는 단 한 가지 언어만 아는데, 그것은 바로 침묵의 언어이다.그대를 위해 삶과 존재계의 의미를 해석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모든 사람은 자기 스스로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존재계는 아름다운 음악과 넘치는 기쁨,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축복의 노래가 있다.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존재계의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침묵하는 것 뿐이다 종교적인 인간은 순수한 엑스터시(ecstasy) 속에 산다.그의 가슴은 노래로 가득하다.그는 언제라도 춤출 준비가 되어 있다.그러나 성직자들은 진리를  탐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진리가 이미 발견되었으므로 그저 신앙을 갖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진리는 다만 명상적인 각성(awareness)과 그대 내면의 침묵을 필요로 한다.유일한 사원은 바로 그대의 내면이다. 그 외의 다른 사원은 모두 가짜이다 깊은 조화 속에 하나가 되지 않는 한, 그대는 이 우주의 음악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음악은 세상이 잘못된 곳이 아니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것이어야 한다.삶은 하늘 밖의 하늘, 정상 위의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진보해야 한다 신은 자신의 창조물인 아담과 이브가 현명해지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은 계속 그를 숭배한다.그리고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성직자들을 따라간다.짜라투스트라는 바로 이런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전적인 자유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 전부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의 구세주가 될 것이다.그대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구세주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낡은 목록판과 새로운 목록판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정지해 있다." -- 이것이 바로 겨울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불모의 시간을 위한 좋은 구실이며, 겨울 잠을 자는 자들과 난롯가에 웅크리고 있는 자들을 위한 커다란 위안이다."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정지해 있다" -- 그러나 얼음을 녹이는 바람은 그 반대를 설교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지금 모든 것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누가 아직 선과 악에 매달릴 수 있겠는가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는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고타마 붓다와 동시대인이다. 이 세 명의 위대한 스승은 삶에 대해 기본적으로 하나의 접근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삶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았다."삶은 유전한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그들은 만물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인간 심리에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 한다. 왜냐하면 변화가 무엇을 초래할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그대는 미리 그것과 마주칠 준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발적이고 즉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이것이 문제이다. 즉흥성(spontaneousness)은 깊이 있는 의식과 주의 깊음(aalertness)을 요구한다 짜라투스트라와 고타마 붓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왜 이같은 사실을 계속 강조하는가? 그것은 이 사실이 우리의 도덕과 종교, 인간관계, 그리고 삶에 대한 접근방식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치를 위해 살아라.삶과 더블어 흘르라.이 지구는 정치가나 종교지도자, 교회와 전통의 소유물이 아니다.이 지구는 삶을 사랑하고, 삶을 노래하는 사람들, 삶을 축복하고 춤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삶을 하나의 축제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 -- 삶은 그런 사람들의 것이다 삶을 남김 없이 전체적으로 사는 것, 이것이 곧 신성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낡은 목록판과 새로운 목록판에 대하여

  ,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가도록 방향을 가리키고, 그대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임명한다.그대들은 미래를 낳는 자, 미래를 경작하는 자, 미래의 씨를 키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진실로 소상인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귀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값이 붙어 있는 것 중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앞으로 그대들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영광으로 여기지 말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대들의 명예로 삼으라 그대들은 자식들의 땅을 사랑해야 한다.이 땅이 그대들의 새로운 귀족이 되게 하라.아득히 깊은 바다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그대들의 땅이 되게 하라! 나는 그대들에게 그것을 찾고 또 찾으라고 항해할 것을 명한다!그대들은 그대들이 아버지의 자식임을 그대들의 자식에게 보상해야 한다.그래서 지나간 모든 것을 구제해야 한다! 나는 이 새로운 목록판을 그대들의 머리 위에 걸어 놓는다 

 (오쇼 강설

 과거로부터 해방 되는 것, 그것은 곧 정신적인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마치 지구상에 새로 태어난 것처럼 그대는 아무 과거도 갖지 않는다. 그대는 오늘 아침 봉오리를 연 장미꽃처럼 신선하다.연꽃에 매달린 이슬방울처럼, 아침의 산들바람처럼 그대는 신선하고 새롭다.과거에서 해방되라.과거는 그대의 영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과거가 마음 속에 남겨 놓은 먼지를 깨끗이 청소했을 때, 그대의 의식은 투명한 거울이 된다. 그 거울은 너무나 투명해서 미래의 모든 것 -- 새로운 귀족과 새로운 가치, 초인을 비추어 볼 수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며 수치이다.'창조 되었다' 는 것은 꼭두각시 이외에 다른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그때에, 그대는 고유의 영혼을 갖지 못한다.반면에, 신성은 그대가 창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신성은 그대를 모두를 초인과 창조자로 만들 것이다.신성은 그대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다 순진무구함과 침묵, 평화와 진리 그리고 그대 내면의 존재와 빛에 대한 경험, 그대의 영원성에 대한 경험이 신성을 이루는 요소이다.신성은 미래의 종교가 될 것이다.신은 숭배의 대상이지만, 신성은 숭배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신성을 창조함에 의해 그대는 의식의 최고점에 도달한다.그대는 가장 아름다운 공간과 엑스터시에 도달한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딘가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대의  기계적인  습성,  로보트  같은  행동, 그리고 그대  자신을  초월하기  위해 용기를 내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  최고의  완성인 초인은  오지  않으리라  우리는 동물들과  ,  나무,  강과  의사를 소통하기  위하여  노력한  적이  없다.  확실히 그들의  언어는  우리와 다르다.침묵  속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무, 동물들 그리고 새들과의  조화를  경험한다.인간은  탐험을 계속해야  한다. 탐험해야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우리는  사소한  일에  정신을  쏟고  있다.  우리는  삶의  실체와 소중한  가치에  관심이  없다.   . . . . .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SATSANG 사트상  :  사트상은 진리에 도달한 자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뭔가 꼭 말을 해야 될 필요도 없으며, 반드시 질문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그저 진리에 이른 자와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경험이다. 그의 진동이 전해오고, 그의 기쁨이 전염된다. 그의 침묵이 그대 안으로 스며든다. 그의 가슴이 돌연 그대의 가슴과 어울려 춤추기 시작한다.

 

웃음과 춤에 대하여  

도대체 사랑하지  않으면  곧바로  저주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내게  고약한  취미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완고한  자는  그렇게  했다. 그는 천민 출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에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으리라.  위대한  사랑은 사랑을  바라지  않는다.  -- 위대한  사랑은 보다  큰 것을  바라는  것이다  

(오쇼  강설

 위대한  사랑은 사랑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사랑은  이미  위대하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랑은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곧 명상이나  기도가  될 것이다.홀로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흘러  넘칠 수 있는 것은 명상 안에서만  가능하다.  명상에는 엄청난  사랑과 자유가  동시에  존재한다.

 

,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진실성'을 믿게 하려면 먼저 그대들이 숭배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수어 버려야만 하리라.진실한 자 -- 신도 없는 사막에 가서 자신의 숭배하고자 하는 가슴을 부숴 버린 자를 나는 그렇게 부른다.그러나 잘 먹어 살찐 유명한 철학자들은 도시에 산다.  -- 그 짐수레를 끄는 가축들은 !그들은 언제나 당나귀가 되어 민중의 짐수레를 끌고 있는 것이다   

(오쇼 강설 

철학은 진리를 발견하는 길이 아니다. 철학을 통해서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다. 철학은 다만 공허한 언어의 체계를 구축할 뿐이다. 철학은 사람들의 머리를 비대하게 만들 뿐, 삶에 어떤 혁명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과거에 신은 만물의 창조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런 관념은 인간을 하나의 사물로 전락시킨다.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이 없을 때뿐이다. 인간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되어 간다. 창조는 진화가 없음을 의미한다. 창조된 모든 것은 그 지점에서 완전히 정지한다. 진화는 우주가 원래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인간의 의식은 진화를 통해 생성된 것이다. 그리고 진화 안에서는 신이 있을 자리가 없다 짜라투스트라는 부패하고 낡은 것을 철저하게 청소하고자 한다. 그는 그대의 눈이 멀리 떨어진 별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한다. 그 별은 그대의 미래이다.그대는 그 별이 될 수 있고,또 그 별이 되어야 한다.왜냐하면 별이 되지 않는 한, 그대의 삶은 춤과 노래, 축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변자가 아니다.그들에겐 정신을 차리도록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 사람이 필요하다.그대가 숭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의 의식보다 높은 것은 없다.오로지 인간의 의식만이 자신을 초월하여 나아갈 수 있다.그대가 떠받들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의 유명한 철학자들을 '민중의 수레를 끄는 당나귀들' 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대가 존경받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사람들의 선입견에 어긋나는 말을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의 품위를 갖춘 사람은 존경을 바라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의 품위와 존엄성을 갖는다. 그는 자신을 존경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초극(自己超克)에 대하여

  (오쇼 강설

 삶은 끊임없는 초극의 과정이다.초극이 없다면 , 사물은 그 자신을 초월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정체된 채로 남을 것이다 짜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종교는 '진화' 이다. 찰스다윈보다 2천 년이나 앞서서 짜라투스트라는 진화론의 모든 기초를 다져 놓았다.삶은 계속해서  그 자신을 초극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초극을 멈추는 순간, 삶은 사라진다. 완전히 정지할 때, 세상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삶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재의 세계에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로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변하지 않는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과 악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극해야 한다.그리고 선악의 창조자가 되려는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 가치들을 부수어야만 한다.이렇게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적인 선이다.우리의 진리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파괴하라.지어야 할 집이 너무 많다  "창조의 길 위에서 그대는 또한 파괴해야 하리라."더 높은 가치를 원한다면 낡은 집은 부숴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창조자는 거의 언제나 파괴자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학자에 대하여 

 (오쇼 강설

 지식의 포기는 내면의 청소를 의미한다.명상은 빌려 온 지식을 포기하고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다.그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그대의 무지는 순진무구함이 된다.지혜로운 자들이 "나는 모른다."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짜라투스트라에 의하면, 최고의 의식 상태는 어린아이와 같다 붓다와 예수는 진리를 알았을지도 모른다. 크리슈나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앎이 그대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대는 그대 스스로 탐구하고 추구해야 한다. 그대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 구도자가 되어야 한다.그대는 지도에도 없는 인적미답의 길을 가야한다 무지가 환히 빛을 발하게 될 때, 하나의 원이 완성된다.무지가 각성과 만나는 순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폭발이 일어난다. ego로서의 그대가 사라지고, 그대는 순수한 존재, 아무것도 주장할 필요가 없는 순수한 '있음(isness)'이 된다.바로 그런 순간에,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고 말했다.   똑같은 상황에서 보디달마는 이렇게 선언했다."나의  ''는 단지 언어적인 편의일 뿐이다. 내 안에 ''라고 말할 수 있는 실체는 없다. 나는 다만 언어적인 편의상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 말이 없다면 그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는 사라지고 순수한 하늘, 순수한 '있음(isness)' 만이 존재한다.지식의 구름이 끼지 않은 청정무구함만이 존재한다."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볼 때, 그대는 생각하는가?대부분의 경우에 그대는 낡은 습관으로 인해 생각을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마음속으로 ", 얼마나 아름다운 석양인가!"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의 말은 장애물이 될 뿐이다. 그것은 석양과 하나가 되는 방법이 아니다. 생각이 멈춰야 한다. 그때 그대는 석양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거의 석양의 일부가 되어 그곳에 있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그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알게 될 것이다. "석양은 아름답다."   되풀이한다고 해서 석양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말들은 빌려 온 것이다. 그대는 그 말들을 들어 왔을 것이고, 자신의 미적 감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말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딴 곳을 헤매고 있다. 아름다움에 의해 그대의 마음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대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훌륭한 춤이 그대에게 명상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그대는 춤을 감상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구제에 대하여  

그리하여 나의 눈은 현재로부터 과거로 달아나 보지만 여전히 같은 것을 뱔견하게 된다.인간의 조각난 단편과 사지(四肢)와 무서운 우연을  -- 그러나 인간은 하나도 없다.지상의 현재와 과거  -- ! 나의 벗들이여 -- 그것이 나의 가장 견디기 힘든 짐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반드시 도래할 것'을 보는 견자(見者)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했으리라.    

(오쇼강설)

  군중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 자신의 본성에 따라 두려움 없이 사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다. 본성을 제외한 다른 안내자는 없다. 다른 안내자는 그대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뿐이다.삶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삶은 아름다운 노래와 꽃으로 가득 차 있다. 삶은 그대를 그대 자신으로 성장하도록 절대적인 자유를 준다.    견자(見者), 의욕하는자, 한 사람의 창조자, 미래 그 자체. 그리고 미래로 가는 다리, -- 그러나 아아, 그러면서도 그 다리위에 불구자 같은  -- 이 모든 것이  짜라투스트라인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내가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밤이 아무리 길더라도 언젠가 새벽은 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인류에게 닥친 이 밤이 영원히 계속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나는 미래를 본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거의 현재와 같다. 나는 새벽이 멀지 않았음을 안다. 나는 그 새벽을 앞당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나는 지금의 인류와 앞으로 도래할 초인 사이의 다리이다. 그러나 또한 나는 불구자이기도 하다. 나는 초인이 될 수 없으며, 다만 다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인류는 나를 통과하여 새로운 시대, 더 아름답고 축복받은 존재계로 들어가리라." 

 

구제에 대하여 2

  '형벌'이란 복수가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복수는 제 스스로 거짓말을 함으로써 선한 양심을 가장하는 것이다. 마침내 의지가 자기 스스로를 구제하여 의욕이 무의욕(無意慾)으로 되지 않는 한  --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이 광기의 어처구니없는 노래를 알고 있다 내가 그대들에게 "의지는 창조하는 자이다."라고 가르쳤을 때,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노래로부터 그대들을 데리고 떠났던 것이다.의지는 과연 스스로 구제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었는가?의지는 복수의 정신을 잊였는가 

 (오쇼 강설 

삶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월한다.의지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이 적용될 수 있다.의지 또한 그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자만이 아이가 될 수 있다.왜냐하면 이 교활한 세상에서 순진무구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 사자의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기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신뢰감을 간직한다는 것은 겁쟁이에게는 불가능하다.아이는 순진 무구함과 신뢰에 가득 차 있다.만일 그대가 순진 무구하고 신뢰에 가득 차 있다면 그대를 속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신뢰는 그대 주변에 어떤 에너지를 창조한다. 신뢰감 자체가 보호막을 형성한다. 순진무구함은 사람들이 그대를 속이지 못하게끔 막아주는 방패가 된다 의지의 마지막 기능은 그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볼 때, 짜라투스트라는 고타마 붓다에게 동의한다.물론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고타마 붓다는 그 상태를 '무욕(無慾 desirelessness)' 이라 부르고, 짜라투스트라는 '무의지(無意志 will - lessness)' 라고 부른다그때 그대는 집에 도착한 것이다.욕망도 의지도 없다.그대 자신의 잠재성을 완전히 실현했다.그대의 존재는 활짝 꽃피었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상은 어둠 속을 더듬는 것과 같다.그러나 '(seeing)' 은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보는 것이다 존재계에는 언어적인 주장을 초월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경험을 넘어선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부 세계만을 본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 그들 고유의 주체성(subjectivity)을 보는 것이 가능함을 알지 못한다.절대적인 침묵 안에서 마음이 계속적인 재잘걸임을 멈출 때 , 돌연 그대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공간이 그대의 내면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을 깨닫게 되고 삶 전체가 달라진다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종교, 이념, 신학, 철학 등 모든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다. 이제 그는 자신의 눈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는 구세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구원받았다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그러나 '보는 자' 는 모든 것을 안 다음, 다시 그것들을 버렸다. 그것들은 모두 쓰레기이기 때문이다.'보는 자' 와 어린아이는 매우 가까이 있다.지성적인 예리함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대가 순진무구한 가슴 갖느냐 하는 것이다

 

처세에 대하여 

 무서운 것은 정상이 아니라 낭떠러지이다!시선은 아래쪽을 향하고 손은 위쪽을 붙잡으려는 낭떠러지, 거기서 가슴은 이중적인 의지로 인해 현기증을 일으킨다.,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내 가슴의 이중적인 의지도 잘 알고 있을 테지?그리고 나의 손이 확고한 것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인간들 사이에서 마치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장님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속이는 자들이 나를 경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것,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처세술이다  

(오쇼 강설

 인간은 심연 위에 가로놓인 밧줄과 같다.인간은 한편으론 동물의 세계에 묶여 있고 다른 한편으론 인간 자체를 초월하기를 염원한다.인간은 하나의 다리이다.인간은 지나가야 하는 사다리와 같다.정상이 있다면 심연이 있는 법이다. 정상을 향해 움직일 때, 그대는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정상은 문제가 아니다.정상은 오르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다. 문제는 바로 입을 벌리고 있는 낭떠러지이다단 한 순간만 방심해도 그대는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진보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분열되어 있다. 그의 생물학적이고 생리적인 측면은 중력처럼그를 아래로 끌어내린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더 높은 곳, 태양이 빛나는 정상에 오르기를 염원한다.삶은 정상을 향한 도전과, 심연을 겁내지 않는 대범한 영혼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도 항상 주의와 경계를 늦추지 말라! 단 한발자국도 잘못 디뎌서는 안 된다.그대가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은 낡은 것이 죽을 때에 한해서이다. 위험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누가 아는가?낡은 것이 죽고 난 다음에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자신의 삶에 변형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그들이 나를 속이도록 내버려 두는 것, 이것이 나의 처세술이다. 그런 태도는 나를 끊임없는 걱정과 경계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그것은 나를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허용한다. 나는 그들이 나를 속일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나는 그들이 나를 속이도록 내버려 둔다. 편안히 쉬기 위해서 !"

 

처세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진 자보다 허영에 찬 자를 더욱 신중히 대하라는  ,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처세술이다.상처받은 허영심은  모든 비극의 어머니가 아닌가?  그러나  자부심이 상처를  받으면 자부심보다  더 나은 무엇이 자라나는  것이다.나는  허영심을 가진  자들이 모두  훌륭한  배우임을 발견했다.  그들은 연기에 능숙하며,  사람들이  즐겁게 보아 주기를  바란다.  그들의  모든  정신은  이런  욕망에  쏠려 있다    

(오쇼 강설)

  진짜  문제는  허영에  가득 찬 사람이다. 그는  빈껍데기뿐이면서도 자신이 겸손하고 소박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애쓴다. 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영원히 똑같은  상태로 남을  것이다.아마 겸손을  내세움으로서 그들은  자신의  비겁함과 비창조성을 감추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는  상처를  받을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자존심을  회복하려 할  것이고, 자신의 기개를 증명하려 들 것이다. "

 

신비주의자의 경험은 절대적인 고독과 침묵 속에서 얻어진다. 그 침묵을 언어의 세계로 끌어내려면, 그 음악을 세속적인 언어로 표현하려면, 대단한 기술이 요구 된다. 거기에서부터 신비주의자의 실패는 시작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신비주의자의 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사상을 듣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신비주의자의 침묵과 의식이 자신의 가슴에 도달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의 말을 멋대로 해석하고 완전히 왜곡시킨다. 이런 실패의 순간에 신비주의자가 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고독, 내면의 중심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과학자들은 매우 충격적인 현상을 발견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은 문이라기보다는 검열관(檢閱官)처럼 작용한다. 감각의 검열 작용에 의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은 자그만치 98퍼센트에 이른다! 우리는 단지 2퍼센트만을 인식하는 것이다. 나머지 98퍼센트는 감각에 의해 차단된다. 우리가 알아듣는 것도 2퍼센트에 불과하다. 98퍼센트는 마음에 의해 차단된다 오락은 그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더 의식적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그대를 더 무의식적으로 만든다.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점점 더 많은 오락을 만들어 왔다. 인간은 더 무의식적으로 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의식적으로 되는 것은 변화의 과정을 겪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요한 시간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여, 너의 과일은 무르익었으나 너는 그 과일에 어울릴 만큼 무르익지 못했구나!그러므로 너는 다시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너는 아직 더 무르익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벗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내가 왜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모든 것을 다 들은 셈이다.그리고 그대들은 내게서, 누가 가장 침묵하는 자이며 그렇게 되기를 열망하는 자인지 들었다 

 (오쇼 강설

 이 독백은 매우 멋진 수단이다. 만일 부인이 그대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면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말라. 큰소리로 말하지 말고 속삭이듯이 그녀의 귀에 가까이 대고 말하라. 그러면 그대의 말을 들을 것이다 이제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고독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대들에게 비유를 말해야겠다. 이제 나는 더 심오한 방식, 인간의 가슴에 도달할 수 있는 더 효과적인 방식을 발견하기 위해 침묵에 잠길 것이다. 내가 나의 앎을 나누어 줄 수 없다면 그 앎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면 나의 체험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붓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그대가 내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하다. 그대가 이해한 바는 내가 말한 의미와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그 의미는 그대가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람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힘들다. 오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짜라투스트라가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어둠 속에서 끌고 나올 수 있는 새로운 그물,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언어를 찾고자 한다. 둘째로, 짜라투스트라는 그들이 자신을 실망 시키고 기대를 저버렸음을 제자들 스스로 알기를 원한다  나의 벗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내가 왜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모든 것을 다 들은 셈이다.그러나 이 말을 하고 났을 때, 극심한 고통이 그를 엄습했고 벗들과의 작별이 임박해지자 그는 소리내어 울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그날 밤 벗들을 남겨 두고 그는 홀로 떠났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방랑자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는 자신과 이야기 한다.나는 방랑자이며 산을 오르는 자이다. 나는 평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한곳에 앉아 있질 못하는 것 같다 

  (오쇼 강설)

  모든 인간은 별에 도달하기를 원한다.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순례 여행은 목적이 문제가 아니다.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 자체가 축복인 것이다. 여행의 목적은 방랑의 길을 떠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 즉시 그는 새로운 여행을 준비할 것이기 때문이다.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목적지는 그대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인간의 정신은 염원 이상의 것이 아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열망 ,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바다를 탐험하고, 아무도 오른 적이 없는 산을 오르고 싶은 열망, 그리고 미지의 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염원, 이것이 인간의 정신이다 "나는 방랑자이며 산을 오르는 자이다." 라고 말할 때,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정신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방랑자에 대하여 2

 내게 재난이란게 닥칠 수 있었던 시기는 지나갔다  

(오쇼 강설

 재난을 초월한다는 것은 그대가 존재계와 깊은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거기에 실패나 절망은 가능하지 않다. 그대의 침묵과 진실함(serenity)은 방해받지 않는다 고타마 붓다는 이런 경험을 '여여(如如 suchness)' 라고 이름 붙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그는 "그것은 그렇게 일어날 것이었다"고 말했다.고타마 붓다에게는 존재하는 것 자체 이외에 다른 욕망은 없다.그는 원래 '타타타(tathata)'라는 아름다운 말을 썻다. 제자들이 죽었을 때도 그는 "애석할게 없다. 그의 때가 온 것이다." 하고 말했다.붓다는 "타타타(tathata) 사물의 본성은 여여하다."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타타가타(tathagat 如來), 즉 여여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얻었다 전체적인 수용성과 더블어 재난이 사라지고 삶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 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삶에는 절망이나 재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정확히 놓여 있다. 그대는 너무나 평온하다. 이 평온과 고요함 속에서만 그대는 그대 자신을 알게 된다  * 요약자 주() : 타타가타 (산스크리트어 tatha-agata)는 어원적으로 '그렇게 여기에 오신 분' 이다.

 방랑자에 대하여  

만일 모든 발판이 사라질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의 머리를 밟고도 올라갈 줄 알아야 한다. 그대가 달리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는가 

 (오쇼 강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뒤에 남겨두고, 그대 자신을 앞질러 나가야 한다.그대의 꿈과 생각, 상상, 편견, 철학 등 그대의 퍼스낼러티를 형성하는 모든 것을 뒤에 남겨두고 나아가야 한다.그대는 하나의 화살과 같다.그리고 그대에게 맡춰야할 표적은 없다. 그대는 전속력으로 날아가지만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이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방랑자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을 무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자신의 눈에 너무 열중하는 자라면 어떻게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있겠는가?그렇다! 나 자신과 나의 별까지도 내려다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의 정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최후의 정상으로 내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이 서 있는 곳 중에서 심연이 아닌 곳이 어디 있으랴!본다는 것 자체가 심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쇼 강설)

  그대에게 위안을 주는 모든 것은 가짜이다. 삶은 매 순간 마다 그대는 심연 위에 서 있다. 그렇지 않은가? 바로 다음 순간에 그대에게 죽음이 닥칠 수도 있다. 그리고 죽음은 가장 깊은 심연(abyss)이다. 구도자의 투명한 눈을 갖게 될수록 그대는 자신의 주변에서 더 많은 심연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봄(seeing)은 심연을 보는 것이다. 그대 존재의 정상을 보고자 한다면 그대는 또한 심연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대가 아무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면, 아무 곳에도 도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탐험 자체가 즐거움이며, 외부와 내면에서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 기쁨이요 축복이라면 -- 그때에 정상과 심연은 차이가 없을 것이다. 정상과 심연은 하나가 된다.

탄생은 그대에게 생명을 준다.이제 그 생명 에너지를 의식의 각성에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그대에게 달려 있다.각성된 의식은 정확히 꽃과 같다.그대 내면의 꽃을 피우지 못하는 한, 그대는 결코 삶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씨앗은 그저 씨앗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씨앗은 수천 송이의 꽃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 되었다 씨앗은 파괴되어야 한다.씨앗은 그 안에 숨어 있는 꽃이 실제로 피어날 수 있도록 대지 속에 사라져야 한다

 

해뜨기 전에 

 신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가리워져 있다. 그처럼 그대도 그대의 별을 숨기고 있다. 그대는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대는 그대의 지혜를 나에게 말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벗이었다.우리는 서로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침묵하고, 서로에게 미소로써 우리의 앎을 보인다

 (오쇼 강설 

하늘은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이 벙어리이고 무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앎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침묵이 유일한 언어이다. 신비주의자는 그것을 안다. 하늘의 침묵은 곧 자신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그대는 아름다운 꽃과 석양, 별이 빛나는 밤, 그 아름다운 침묵 속에서 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나 사원에서는 신을 볼 수 없다. 성직자들은 인류를 속이기 위해 거짓 신을 창조했다. 교회와 사원은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와 같다. 그곳에서는 매우 쉽고 싸게 신()을 구입할 수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벗이었다.' 매우 아름다운 말이다. '아는 자'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그대는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순수한 즐거움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그것이 순수한 삶이다.목적의식은 삶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 대가나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순수한 즐거움으로 행동한다면, 그의 모든 행동은 그 자체가 보상이 될 것이다. 오직 그런 사람만이 삶의 깊이와 높은 경지를 안다.매 순간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며 보상이다. 매 순간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매 순간 그대는 삶의 화환을 엮어간다.그 삶은 어떤 목적이나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그 삶 자체가 의미이며 즐거움이다.그대의 행동 자체가 보상이며 벌인 것이다.

 

해뜨기 전에

 세계는 깊다. -- 낮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다. 낮 앞에서 모든 게 다 말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낮이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헤어지자  , 내 머리 위의 하늘, 수줍음에 불타오르는 하늘이여 ! , 해뜨기 전의 나의 행복이여 ! 낮이 오고 있다. 그러니 이제 우리 헤어지자!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는 매우 심오한 신비를 말한다.세상에는 깊은 어둠 속에서만 알려지는 것들이 있다. 삶은 하나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삶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누리며 살아야 할 신비이다.밤이 오면 모든 것이 신비로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낮이 오면 꽃잎에서 증발되는 이슬방울과 더블어 신비는 사라진다.인간을 초월하는 것은 곧 인간의 마음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짜라투스트라는 '인간과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내게 있어서, 명상은 존재계의 신비로 가는 길이다 모든 의심과 회의를 벗어 던져라.어두운 미지의 세계,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라.가슴 전체의 '예스'와 신성한 '아멘'을 갖고서 그 안에 들어가라.그것이 그대 자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삶과 존재계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그것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작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나는 이런 민중들 사이를 걸어가며 많은 말들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주울 줄도 간직할 줄도 모른다 

 (오쇼 강설 

사람들은 자신의 선입견에 들어맞는 말만을 듣는다. 그때 그는 자신이 항상 옳았음을 증명하며 흐뭇해 한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면 그는 완전히 귀를 닫아 버린다. 그는 진리가 자신의 존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가 자신의 안락한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류에 관해 가장 불행한 사실 중의 하나는, 인류가 사술과 미신, 율법 그리고 노예화에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과 감수성(sensitivity), 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다.종교는 경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성직자들의 수중에 있는 것도 아니다. 종교는 교회와 사원에 있지 않다. 종교는 그대의 지성, 그대의 의식이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그대 스스로의 사원이 되지 않는다면, 하늘처럼 광활하고 순수하게 되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종교적인 경험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작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 축복받은 번개의 시간이여 ! 정오가 되기 전의 비밀이여 !어느 날엔가 나는 그들을 달리는 불로, 불꽃의 혀를 가진 선구자로 만들리라.어느 날엔가 그들은 불꽃의 혀로써 예고하리라."위대한 정오가 오고 있다.. 그때가 가까왔다 !" 라고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는 자기 자신에 지치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위대한 정오'를 선언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위대한 정오. 이것은 사랑과 개체성(individuality), 자유의 가장 큰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위대한 정오라고 부른다.위대한 정오, 그것은 인류가 가진 의식의 최고점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배교자에 대하여  

나와 똑같은 종류의 사람은 역시 나와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그의 첫번째 동료는 시체와 어릿광대이리라 

 (오쇼 강설)

  의식의 최고점에 달할 때, 고타마 붓다, 마하비라, 짜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분리된 세사람이 아니다. 세 개의 침묵, 세 개의 엑스터시는 분리될 수 없다. 세 개의 제로(zero)는 아무리 더해도 하나의 제로이다.축복의 최고 경지에서 그대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러나 고립되어 있지 않다. 그대는 혼자이다. 왜냐하면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의 오르가즘(orgasm), 하나의 바다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수많은 강물이 하나의 바다에서 합쳐지듯이 말이다. 그들은 바다만큼 자유롭게 된다.최고의 정상에서 그대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러나 그 홀로있음(aloneness)은 같이 있음(togetherness)이다. 그것은 엄청난 합일(merger)이다 여러 사람들을 살펴보라. 그러면 그들의 말투와 몸가짐, 태도에서 그들의 의식이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의식은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날 때, 그대의 행동과 몸가짐도 변화를 일으킨다.

 

배교자에 대하여

 "신들은 있지만, 그러나 하나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신앙이 아니겠는가?"귀 있는 자는 들어라 

(오쇼 강설)

  모든 존재계는 신성하다. 신성(godliness)은 모든 곳에 있다. 그러나 인격체로서의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그대는 신성과 더블어 춤추고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신성을 숭배할 수는 없다.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는 있다.그대는 전체적으로 춤출 수 있다. 그 춤 속에서는 춤추는 자가 사라지고 춤만이 남는다. 그것이 종교성(religiousness)이며 감사함(gratefulness)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귀향(歸鄕)에 대하여 

 , 고독이여!그대 나의 고향인 고독이여!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거친 타향에서 거칠게 살아와,눈물 없이는 그대에게 돌아갈 수 없을 정도이구나  

(오쇼 강설

 엄마의 자궁 안에 있을 때와 똑같이 평화와 침묵, 정적의 세계에 도달한 사람. 즉 모든 존재계가 자궁이 되고 엄마가 되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그 경험이 마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임을 발견한다.그는 더 많은 자유와 아름다움, 강열한 엑스터시(ecstasy)가 있는 더 큰집에 도달한 것이다 예전의 집은 진짜 집에 비하면 멀리서 들려 오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진짜 집은 그대의 고독(solitude)과 홀로 있음(aloneness), 그리고 그대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그대의 집은 그대 안에 있다. 바깥 세계에서의 방황을 멈출 때, 먼 곳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대 존재의 근원에서 릴렉스(relax)할 때 -- 그럴 때에만 그 집은 발견될 수 있다 고독(solitude)은 외로움(loneliness)이 아니다. 외로움은 휴식이 아니라 불안이다. 집이 될 수 있는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홀로 있음이다 고독은 명상과 침묵의 꽃망울이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고독은 그대 내적인 잠재성의 개화(開花)이다.

 

귀향(歸鄕)에 대하여 2

  우리는 서로에게 묻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활짝 열린 문을 당당하게 지나다닌다.여기서는 모든 존재가 말이 되기를 원하며, 모든 생성이 내게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한다  

(오쇼 강설 

릴랙스(relax)할 때, 존재계 전체가 전혀 새로운 질(quality)을 갖게 된다. 고독과 홀로 있음은 모든 존재를 그대와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하늘 전체가 그대의 것이 되고, 나무가 곧 그대가 된다. 산이 그대 안에 있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자기만의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우주의 심장이 뛰는 소리이다. 이제 그대는 집에 돌아 왔다. 이것은 '귀향(homecoming)' 이라 불려질 수 있다 "눈을 감고 내면을 들여다보라."그대가 찾고 있는 자는 바로 그대이다. 찾는 자가 찾아지는 자이다. 관찰자와 관찰되는 자는 똑같다. 그대는 하나가 된다. 이 하나됨은 인간의 의식이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황홀경(ecstasy)이다.이것이 가장 높은 경지이며, 가장 깊은 심오함이다. 이것이 종교의 전부이다 그대는 어느 곳으로도 갈 필요가 없다.깊은 침묵과 정적 속에 잠기기만 하면 그 뿐이다. 그러면 그대는 수천 마일을 헤매어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그대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그대는 온갖 유혹에 끌려 이러저러한 것을 쫒아 달리기 시작한다. 서서히 본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다. 그대 안의 어딘가에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앎이 없다면 그것을 찾겠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을 맛보았고, 그대의 깊은 의식 속에는 여전히 그 맛이 남아 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방황과 탐험에 지쳤을 때, 이제 그대는 쉴 곳을 찾아 앉을 것이다. 그 휴식 속에, 삶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그대는 지금까지 내내 찾아 헤매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귀향에 대하여

 나 자신과 나의 부유함을 숨기는 것 - 그것을 나는 저 아래에서 배웠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아직도 가난하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행복한 콧구멍으로 나는 다시금 산의 자유를 호흡한다! 마침내 나의 코는 모든 인간이라는 생물의 악취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을 사랑한다. 인간은 초인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앗은 초인이 성장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을 미워한다. 씨앗은 하나의 감옥이 되었다 적당한 토양을 찾았을 때, 씨앗은 즉시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씨앗은 너무 자신을 방어한다. 그때 씨앗은 감옥이 된다. 씨앗은 적당한 토양을 회피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씨앗은 씨앗으로써의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자신이 지닌 잠재성을 완전히 잊게 된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짜라투스트라가 인류에게 크게 공헌한 점은, 전혀 새롭고 개안된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대는 간혹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짜라투스트라는 위대한 통찰력을 지닌다. 그는 선입견에 따라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본다. 그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지닌 고유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는 매우 객관적이고 실재적이다. 그는 어떠한 관념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으며, 특정한 철학이나 종교를 설립하려 하지 않는다. 투명하고 명확한 시각은 그대에게 진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는 그대 앞에 다이아몬드를 던져 놓는다. 그러나 그대는 장님 같은 태도를 취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선입견이 방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대는 눈을 꼭 감고 있을 수 있다 그대에겐 멀리서 반짝이는 별에 도달하고 싶은 열망이 없다. 그대는 초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없다. 편안한 거짖 속에 빠져 있는 그대를 편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를 기분좋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파괴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악이다. 그것은 그대의 성장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초인이 나타나 부패하고 냄새나는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순진 무구하고 새로운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부패한 상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주 만성이 되어 버렸다.  

 

세가지 악()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 그것은 시들어 버린 자에게만은 달콤한 독약, 그러나 사자의 의지를 가진 자에겐 훌륭한 강심제이며 경건하게 보관된 포도주 중의 포도주.감각적 쾌락, 그것은 보다 높은 행복과 최고의 희망에 대한 커다란 상징적 행복 --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보다도 더 이방인이 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얼마나 낯선 존재인가를 누가 속속들이 이해하였겠는가?   

(오쇼 강설)

  그대 자신에게 비인간적인 기준을 강요하지 말라.비인간적인 기준에 단련된 사람일수록, 당연히 그는 위선자가 된다. 그러나 군중은 그를 성자로 떠받들고 존경할 것이다. 왜냐하면 군중은 그처럼 할 수 없기 때문이다.대부분의 경우에 그는 이중적인 인격을 갖는다. 하나의 얼굴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의 얼굴은 사생활 속에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다그리고 표면에서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모든 가치를 행하는 척한다 감각적인 쾌락을 포기한다면, 그대는 더욱더 무감각(insensitive)하게 될 것이다. 감각적 쾌락은 그대의 감각(sense)을 생동감 있게 지켜준다. 그대의 감수성을 최고 상태로 유지 시키는 것은 감각적 쾌락이다. 그러므로 감각적 쾌락을 포기하는 것은 곧 감수성(sensitivity)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대에게 감수성이 없다면, 그대는 음악의 즐거움, 그림과 조각, 시의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 그것들은 위대한 천재들에 의해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다 시체와 살아 있는 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살아있는 사람은 민감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예민하게 작용한다. 그는 음악의 미묘한 선율을 들을 수 있고, 예술 작품의 심오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시에 담겨진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아무 조건 없이 감각적 쾌락을 허용할 때에만 가능하다 군중은 양떼와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특정한 삶의 스타일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 삶의 스타일은 그들에겐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강한 사람들에게는 감옥이며 죽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짜라투스트라는 감각적 쾌락을 신성하게 여긴다.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면 할수록 그대는 허약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힘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존재계와 단절될 것이다. 그대는 감각을 통해 존재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감각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그대는 이미 무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감각적 쾌락 안에서 그대가 파괴된다면, 그것은 그대가 더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포기해야 할 것은 감감적 쾌락이 아니라, 바로 그대의 허약함이다 감각적 쾌락은 더 큰 행복이 가능하다는 암시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대가 삶의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감각적 쾌락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대는 더 큰 행복을 맛볼 수 있다.감각적 쾌락은 영적인 축복으로 가는 징검다리와 같다. 그런데 그대는 징검다리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 그때, 그대는 더 높은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사다리를 없애 버렸으니 말이다. 사다리는 포시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기어 올라가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이 초월과 포기의 차이점을 명시하라 !가능한 한 다양하고 강렬하게 감각적 쾌락을 즐기라. 그것들을 완전히 소진(消盡)시키라. 그러면 돌연 그대는 깨닫게 될 것이다."감각적 쾌락의 세계는 끝났다. 이제 나는 이 세계를 초월해야 한다." 그때 그대는 감각적 쾌락에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감각적 쾌락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놓인 다리이다.남성과 여성이 서로 이방인 이라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간격이 크면 클수록 매력은 더 강해진다. 그들이 서로 다를수록 그들은 서로에게 더 끌린다. 그들이 서로에게 낯선 존재일수록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탐구는 더 깊어진다.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하나의 여행이다. 그것은 탐험과 같다. 그것은 정반대의 극단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또한 삶의 변증법적인 면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것은 큰 공부이다. 그 공부가 없이는 더 높은 의식과 행복, 더 높은 영성(spirituality)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깊은 감각적 경험을 한 사람만이 남성과 여성의 엄청난 차이점과 독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때엔 남성과 여성 사이에 평등이야 불평등이냐 하는 문제는 없다. 남성과 여성은 다만 서로 독특한 존재일 뿐이다

 

세가지 악에 대하여2

  지배욕, 그것은 가장 냉혹한 가슴을 가진 자에 대한 불타는 천벌, 가장 잔인한 그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잔인한 고문, 산채로 불 태우는 어둠의 불꽃.지배욕, 그것의 시선 앞에서 인간은 기어 다니고, 허리를 굽히고, 노역하고, 뱀과 돼지보다도 더 천하게 된다.  -- 마침내 인간으로부터 커다란 경멸의 외침이 터져 나올 때 까지.지배욕, 그러나 높은 것이 힘을 갈망하여 밑으로 내려올 때, 누가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르겠는가! 진실로, 그런 갈망과 하강에는 병적인 것이나 탐욕은 없다  

 (오쇼 강설)

  지배욕(Lust for power)은 노예제도를 만들고, 온갖 방법으로 인류를 파괴해 왔다. 그것은 파괴적이고 추악한 욕망이다.그러나 창조적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창조적인 의지를 그는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라고 부른다. 권력에의 의지는 지배욕과 전혀 다른 현상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그대 자신이 더 강하고 통합적(intergrated)이며, 더 사자에 가깝고 개체성을 지닌 개인이 되어감을 의미한다."나도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나도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권력에의 의지는 자기 자신이 되려는 의지이다. 그것은 영원 불멸성을 획득하려는 의지이다.힘에 대한 욕구는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권력에의 의지이며,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지배욕이다. 모든 것에는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법이다.

 

세가지 악에 대하여

 이기심(selfishness), 고귀한 육체가 속해 있는 굳센 영혼으로부터, 그리고 아름답고 승리감에 넘치며 싱싱한 육체의 둘레에서 모든 사물은 거울이 되는 것이다. 자기 향락은 자신으로부터 모든 비겁한 것을 추방한다. - '나쁜 것, 그것은 곧 비겁하다는 것이다!'그러나 이제 그들 모두에게 낮이, 변화가, 심판의 칼이, 위대한 정오가 오고 있다. 그때 많은 것이 밝혀지리라!그리고 에고(ego)를 건전하고 신성하다 말하고, 이기심을 영광되다고 말하는 자는, 진실로 예언자인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선언한다. - "보라, 그가 오고 있다. 그가 가까이 왔다. 위대한 정오가 ! "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유일하게 악한 것은 비겁함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선한 것은 용기이다. 모든 덕은 용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모든 죄악은 비겁함에서 비롯된다.짜라투스트라는 이기심은 다만 사물의 본성이라 말한다. 그러나 비겁한 겁쟁이들은 미덕을 쌓기 위하여 비이기심을 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인류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을 '위대한 정오' 라고 부른다. 그때가 되면 이기심이 건전한 것으로 될 것이다.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것이 우리의 종교, 우리의 지고한 정신적 가치로 선언될 것이다. 자연 그 자체가 우리의 종교이다. 그 밖의 다른 종교는 필요없다."보라, 그가 오고 있다. 그가 가까이 왔다. 위대한 정오가!"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키백과)

 

 

 

 

 

 

 

 

 

 

 

 

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Mazdaism) 혹은 배화교(拜火敎)의 창시는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전 640년경으로 다양하다. 이 종교는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수슈트라에 의해 세워진 종교이다. 기원전 600경에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를 통해 오늘날 이란 전역에 퍼졌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이미 그리스 지방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sda)를 중심으로 선과 악의 질서 및 세계를 구분하는게 특징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교리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 영향을 주었다.

 

조로아스터교의 발생과 전파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본명 자라수슈트라 스피타마)의 출생 연대는 대개 기원전 660년으로 보는 편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기원전 1000-1400년경에 살았다고 보기도 한다. 그의 생애는 전설 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로아스터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서른살에 이르러 천사장을 만났다. 이 천사장은 참된 신은 아후라 마즈다이고 너 조로아스터는 그의 예언자라고 알려주었다. 이때부터 조로아스터는 진리를 전하기 시작했고, 때로 미친사람 취급을 받는가 하면 2년간 투옥되기도 했으나 조로아스터교는 급속히 발전하였다. 조로아스터가 77세가 되었을 때 큰 전쟁이 있었는데, 그는 거룩한 불(聖火) 앞에 서 있다가 적군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역사가 유구하다. 7세기 이후로 이슬람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기 전에 수세기 동안 상당수의 이란 국민들의 국가적 종교 혹은 주()의 종교로 참배되었다. 이슬람 이전 이란 왕조의 정치 세력은 고대에 조로아스터교에 커다란 명성을 안겨 주었으며, 또 그 주요 교리의 일부는 기타의 종교계통에서 채택하기도 하였다.

 

선과 악의 대립

조로아스터교는 일반적으로 마즈다교 또는 마즈다이즘(Mazdaism)과 본질적으로 동의어로 사용된다(아후라 마즈다를 예배). 조로아스터교에서, 창시자 아후라 마즈다는 모두가 선하며, 그로부터는 어떤 ()도 기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로아스터교에 있어서 선과 악은 분명한 근원을 가지는데 악(druj)은 마즈다(asha)의 창조를 파괴하고자 하고, ()은 그것을 지속하려고 한다. 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아베스타의 텍스트들인데, 그 중요 부분은 상실되었고, 대부분의 유일한 예배의식만이 존속하고 있다. 상실된 부분은 주로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다만 후기의 작품 속에서의 참고와 간략한 인용문을 통하여서만 알려져 있다.

아후라 마즈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하나의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신 아후라 마즈다 만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는 종국적으로는 모든 예배가 지향되는 창조되지 않은 창조자로 일컬어진다. 이 종교는 선한 생각, 선한 언어와 선한 행위를 통하여 인생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은 행복을 보장하고 혼란을 막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설교한다. 이 능동적인 참가는 조로아스터의 자유 의지의 개념에 중심적인 요소이며, 또 조로아스터교는 모든 형태의 수도원 생활을 거부한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아후라 마즈다는 궁극적으로 사악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혹은 아리만(Ahriman)에 승리할 것이며, 그 시점에서 우주의 혁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시간이 끝나게 될 것이라는 사상을 갖고 있다.

영향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과 마귀론의 주요 개념은 아브라함의 종교들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조로아스터교 자체는 여타 종교 계통으로부터 개념을 물려받았고, 또 다른 관례적인종교와 같이 어느 정도의 제설(諸說) 혼합주의를 수용한다. 조로아스터교의 많은 특성은 선사시대의 인도-이란 시기, 즉 인도인들과 이란 인들이 전혀 다른 사람들로 갈라선 이주(移住) 이전 시대의 문화와 신앙으로 추적될 수 있다.

 

현대의 조로아스터교와 영향

현대 조로아스터교는 이슬람의 영향으로 교세가 쇠퇴하였다.[1] 2004년에 전 세계의 조로아스터교인들의 숫자는 145,000명 내지는 210,000명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인도의 2001년 인구조사는 조로아스터 교도의 자손인 파시교도가 69,601명이었으며, 파키스탄에서는 그들의 숫자가 5,000명으로 집계되었고 대부분 카라치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고장인 이란에서는 25,000명의 신도가 있으며, 약 일만 명의 신도들이 한 때 전통적인 조로아스터교의 근거지였던 중앙 아시아 지방에 살고 있다.

유명한 조로아스터교인

프레디 머큐리 (영국 록 밴드 의 보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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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울의 이슬이 맺혀 있음으로 해서 떨고 있는 장미꽃과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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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다.

그러나 장미꽃은 이슬 방울과 떠오르는 태양,

그리고 산들바람과 더블어 엄청난 즐거움에 넘친다.

그 순간은 너무나 소중하다.

그것은 춤추는 순간이다.

이 춤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기쁨일 뿐이며

다른 목적이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장미와 우리 사이의 공통점이 그것이다.

우리 또한 순간을 즐겨야 한다.

우리는 태양과 바람, 빗속에서 춤추어야 한다.

춤은 그 자체가 보답이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서?"라고 물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모든 가치를 잊고 있다.

 

 

- 오  쇼 -

 

 

 

 

 

 

 

 

 

 

 

 

 

 

 

 

 

 

 

 

 

 

 

 

 

 

 

 

 

 

 

 

 

 

 

 

 

 

 

 

 

 

 

 

 

 

 

 

 

 

 

 

 

 

 

 

 

 

 

 

 

 

 

 

 

 

 

 

 

 

 

 

 

 

 

 

 

 

 

칼릴지브란과 예언자에 대하여

 오쇼 라즈니쉬

 

 

 

 

 

칼릴 지브란...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황홀하고 기쁘다.

그에게 견줄  만한 다른 이름을 떠올린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단순히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가슴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과 맞닿아  있다.

칼릴 지브란, 그는 순수한 음악, 하나의 신비이다.

오직 시인만이 그를 이해한다. 그것도 어쩌다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대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세상이 여러 번 바뀌고,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칼릴 지브란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으로도 과연 그처럼 인간의 영혼 깊은 곳을 꿰뚫어볼 줄  알고, 또한 우리를 둘러싼 미지의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간직한 인물이 나타날지 나는 자신할 수 없다.

 

  칼릴 지브란, 그는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이다.

인간의 언어로 비록 한 조각이나마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인간의 언어와 의식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신비가, 시인, 창조적인 영혼들이 칼릴 지브란을 통하여

손을 맞잡고 노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도  그는 그것이 진리 전체가 아니라, 진리를 흘끗 들여다본 것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대여, 진리를 흘끗 들여다 보는 일이 바로 그대를 궁극의 진리, 절대 진리, 우주적인 진리로

인도하는 순례의 첫걸음이다.

 

역시 아름다운 사람인 클로드 브래그든(Claude Bragdon)은 칼릴 지브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의 힘은 어떤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에서 솟아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우주적이고 무한한 힘이 나올 리가 없다.

하지만 그  힘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한 웅장하고 찬란한 언어는 오로지 칼릴 지브란 자신의 것이다."

나는 브래그든의 이 말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한 송이  아름다운 꽃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별들이 찬란한 하늘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충분히  그것들을 감상할 수 있다. 나는 동의하는 것과 감상하는 것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둔다.

그리고 만일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깨인 사람이다. 만일 그 차이를 구분할 줄 모른다면,

그는 아직 원시적이고 미개 의식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브래그든이 한 말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한다.

동시에 나는 그가 한 말이 단지 추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그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는 말한다. "그의 힘은 어떤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에서 솟아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우주적이고 무한한 힘이 나올 리가  없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이론적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체험의 뿌리가 없다.

그는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칼릴 지브란을 통하여 흘러나온다는  것을 느끼지만, 확신할 수가 .

또한 확신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다. 자신이  체험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칼릴 지브란의 아름다운 언어에 무한한 감명을 받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한 편의 시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 그 자신은 그것을 맞보지 못했다.

그는  칼릴지브란을 사랑하지만, 칼릴 지브란으로 살지는 못한 것이다.

 

나에게는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에 대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그대에게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먼저, 그는 확실히 위대한 시인이다. 어쩌면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시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신비가가 아니다.  시인과 신비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쩌다가 시인은 문득 신비가의 자리에 있게 된다. 그 드문  순간에, 장미꽃이 그에게 쏟아져 내린다.

매우 드문 그 경우에, 시인은 거의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와 같은 깨달은  사람이 된다.

하지만 기억해 두라, 나는 '거의'라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드문 순간들이 왔다가 가버린다. 그는 그 드문 순간들의 주인일 수가 없다.

그  순간들은 산들바람과 향기처럼 왔다가, 그대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 가버린다.

시인의 천재성이란 바로 그러한 순간들을 언어로 포착하는 일이다.

그러한 순간들은 그대의 삶 속에도 역시 찾아온다. 그것들은 거저 나누어 주는 존재의 선물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대 내면에 진리 추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섬광이다. 

언젠가는 그러한 순간이 바로 그대의 삶 자체가, 그대의 피와 뼈와 골수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것으로 숨쉬게 될 것이며, 그대의 심장은 그것으로 고동칠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절대로  잃어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대 자신이 원한다고 해도.

시인은 몇 순간만 신비가이며, 신비가는 영원히 시인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의문을 낳는다.

아무도 그 의문을 풀지 못했다.

 

여기 한 가지 해답이 있다. 이  의문은 수없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시인은 섬광과도  같은 몇 순간만을 체험하는 데에도 그토록  많은 아름다움과 그토록 많은 시를  창조할 수 있다.

그의 손이 가 닿는 순간 단어들은 생명을 얻고 살아난다. 그런데 신비가들은 어째서 그러한 시들을 쓸 수가 없었는가?

그들은 하루 스물네 시간을 밤낮으로 그러한 창조적인 상태 속에서 지내지만, 그들의 언어에는 시인 같은 아름다움이 없다.심지어 고타마 붓다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도  칼릴  지브란이나  미하일  나이미(Mikhail  Naimy),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 같은 시인의 말에는 훨씬 못 미친다. 이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단지 몇 순간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것을  창조하는데,

자나깨나 우주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왜 그렇지 못한가?

왜 그들은 칼릴 지브란과 같은 시를 쓸 수 없었는가?

리고 아무도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만일 어떤 거지가 금광을 발견한다면, 그는 좋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왕이라면  그렇지 않다. 시인은 잠시만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잠시만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가는 잠깐만 우주의식과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주의식 자체가 되어 버렸다.

되돌아올 길이 없다. 

섬광과도 같은 몇 순간들은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들은 단지 이슬방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신비가는 바다가  되었다. 그래서 침묵이 곧  그의 노래이다.

모든 말이 무력해지며, 어떤 식으로든 그의 체험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바다는 너무나 넓으며, 그는 계속해서 그 바다와 하나다.

자연히 그는 자신이 그 바다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창조하기 위해서는, 창조하는 그대가 거기 있어야만 한다.

노래부르기 위해서는, 노래부르는 그대가 거기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신비가는 노래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의 시이다. 그대는 그것을 인쇄할  수도, 그것을 그릴 수도 없다. 

단지 그것을 마실 수 있을 뿐이다.

 

시인을 만나는 것과 신비가를 만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시인과의 만남부터 시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대가 만일 이슬방울조차 맛보지 못했다면, 바다는 아직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면 더 정확히 말해서, 그대가 아직 바다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대에게는 그 이슬방울만으로도 드넓은 바다처럼 느껴질 것이다.

내가 칼릴 지브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며,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시 자체이다. 나는 화가가 아니라, 그림 그 자체이다.

 

  여기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동양의 어떤 왕이 나라 안팎의 모든 화가들에게 실물과 똑같이 보이는 그림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다.

"만일 그대들이 문을 하나  그린다면, 단순한 그림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진짜 문인 줄 착각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그림을 나는 갖고 싶다.

그만큼 사실적이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그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왕국 전체를 원한다면 그것도 기꺼이 주겠다." 

수천 명의 화가들이 궁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열심히 그렸다... 

그러나 어떻게 실제와 똑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 화가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누구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까지 그려야 한다는 시간적인 제약도 없어야 한다.

또한 종이 위에  그 그림을 그리지도 않을 것이다.  궁전 안의 큰 벽에 그리겠다.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는 누구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 완성된 그림은 왕이 맨 먼저 보게 될 것이다.

조건이 받아들여졌다. 거의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이제 왕은 많이 늙었지만,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는가?

왕은 약속을 지켰다. 6년이 지난 뒤, 화가가 왕에게로 와서말했다.

"이제 들어와도 좋습니다."   화가가 왕을 방으로 데리고 갔다. 왕은 믿을 수가 없다.

정말로 사실과 똑같은 그림이  벽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림 속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있고,

나무들 사이로 좁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왕이 물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가?" 화가가 말했다. "당신이 직접 걸어가 보십시오..."

이 이야기를 믿든지 안 믿든지 -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 화가는 왕과 함께 그림 속의 길로 걸어들어갔으며, 영영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을 역사적은 실제 사실로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대는 핵심을  놓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진실된 이야기이다.

참된 화가는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아 없어지며, 참된 시인은 자신의 시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창조는 신비가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신비가는 자신이  창조한 것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그에게는 자신의 그림에 또는 자신의 시에 서명조차 할 시간이 없다.

시인은 그렇게 할 수가 있다. 잠시 창문이 열려 그 너머를 보고 난 뒤 다시 창문이 닫혀버리기 때문이다.

 

칼릴 지브란은 30권 가까이 되는  책들을 썼다.

이제부터 우리가  읽어나갈 이 <<예언자(The Prophet)>>는 그의 첫 번째 책이다.

그 나머지는 전부 휴지 조각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가 이 작품을 썼을 당시 그는 아주  젊은, 불과 스물한 살의 나이였다.

따라서 갈수록 더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만하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하려고  매우 열심히 노력했다.

평생 동안 그는  글을 썼지만, 그 어떤 작품도 <<예언자>>의  아름다움과 진리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어쩌면 창문이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우연한 기회에 신비가가된다. 은 단지 우연에 의한 것일뿐이다...

산들바람이  불어오지만, 그대가 불어오게 한 것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 이 <<예언자>>는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이 되었다.

- 더 나은  것을 쓰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바로  여기서 그는 실패한 것이다.

그에게 매우 간단한 진리 한 가지를 말해 줄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그대가 <<예언자>>를 썼을 때 그것은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절로'써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대는 그러한 작품을 쓰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지, 그대가  '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그  일이 일어나는 그릇이었을 뿐이다.

그대를 통해 흘러나온  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어린애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듯이... 어머니가 그 아이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단지 통로 역할만을  했을뿐이다.

<<예언자>>는 그대의 행위, 그대의  머리,  그대 자신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흘러나온 매우 드문 작품이다.

실제로 그대가 사라질 때만이, 그러한 일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그대가 내버려 둘 때만이,

그대가 도중에  가로막고 있지 않을  때만이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

긴장을 다 풀고 있기 때문에 그대가 방해자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은 그토록 귀하고 드문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그대는  칼릴 지브란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다. 그는 우주가 자신을 통해  흘러나오도록 내맡겼다.

그는 단순히 하나의 그릇, 통로였다. 피리 부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텅 빈 피리였다.

내 체험에 의하면, <<예언자>>와 같은 책은 그대가 말하는 소위  성스러운 책들보다훨씬 성스러운 책이다.

그리고 이러한 책은 순수한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종교를 탄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책은 그대에게 어떤 의식 절차도 주지 않는다. 어떤 계율도 교리도 주지 않는다.

단지 그들에게 일어났던 똑같은 체험을 그대에게도 순간이나마 맛보게 해줄 뿐이다.

그 체험 전부터는 말로 표현되지가 않는다.

그러나 약간은... 어쩌면 장미 전체는 아닐지라도 몇 개의 꽃잎만큼은 가능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장미가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다만 그대의 창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이따금 산들바람이 꽃잎들을 불어다  줄수 있다.

그대의 존재 속으로 부는 산들바람에 실려오는 그 꽃잎들은 실제로 미지의 세계로 의 초대이다.

신이 그대에게 긴 순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순례를 떠나지 않는 한  그대는 여전히 무의미한 삶 속에서 질질 끌려가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가슴 속에는 웃음이 없다.

 

  칼릴 지브란은 '알무스타파(almustafa)'라는  가상의 이름을 지어냄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을 피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의 시작이다. 알무스타파가 바로  그 예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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