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기적


저자 - 디팩 초프라


1. 관찰자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재라고 받아들이는 세계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물건은 크고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단단하며 어떤 것은 부드럽다. 그러나 이 중의 어떤 성질도 우리 자신의 인식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예컨대 접는 의자와 같은 어떤 물체를 가정해 보자. 우리에게는 그 의자는 그리 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미에게는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단단해 보이지만, 중성미자(neutrino)는 그 속을 거침없이 지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아원자(亞原子) 입자에게는 의자의 원자들이 서로 수 마일씩이나 떨어져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가만히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당신이 외계의 어느 지점에서 그것을 본다면 의자는 지구상의 모든 것들과 함께 돌면서 시속 수천 마일의 속도로 우리의 눈앞을 지나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인식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우리가 의자에 대해서 묘사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성질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가 있다. 예컨대 의자가 붉은색이라면 초록색 안경을 쓰고 봄으로써 검은색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만일 의자의 무게가 2.5킬로그램이라면 그것을 달 위에 가져가 1킬로그램도 채 안 나가게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밀도가 큰 행성의 중력장 속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수십만 킬로그램의 무게로 만들 수도 있다.


물질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속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저 밖에’ 어떤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다. 우주란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의 반영일 뿐이다. 인간의 신경계는 우주 속에 진동하고 있는 총 에너지의 10억 분의 1도 안되는 지극히 미소한 부분만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박쥐나 뱀과 같은 다른 동물들의 신경계는 우리의 세계와 공존하고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반영한다. 박쥐는 초음파의 세계를 감지하며, 뱀은 적외선의 세계를 감지한다. 두 세계 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진정으로 ‘저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다만 인식자인 우리가 해석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정형화되지 않은 원시 데이터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사용하여, 물리학자들의 말하는 ‘지극히 불명확하고 멀건 양자의 수프’를 굳혀서 3차원의 고형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영국의 뛰어난 신경학자인 존 에클스(John Eccles) 경은 다음과 같이 놀랍지만 반박할 수 없는 단언으로써 감각이라는 환상을 통찰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자연의 우주에는 어떤 색깔도,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색깔이나 소리와 비슷한 것, 즉 직물, 문양, 아름다움, 향기 등등의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현실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어떤 객관적 사실도 본질적으로는 무효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혼란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속에는 ‘단지 당신의 인식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당신의 우주 - 당신의 몸을 포함한 -를 당신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믿기지 않는 해탈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몸속에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미국과 영국에서는 65세에 맞게 되는 정년퇴직이 제멋대로 한 사람을 사회에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65세가 되기 전날까지만 해도 한 직장인은 노동과 가치로써 사회에 기여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는 사회의 피부양자가 된다. 의학적으로 이러한 인식적 전이의 결과는 비참하다. 퇴직이후 몇 년 동안에 심장마비와 암의 발병률이 치솟고, 퇴직하기 전에 건강했던 사람들이 조기에 죽음을 맞는다. 소위 ‘조기 은퇴성 사망’이라는 이 증후군은 자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인식에 기인한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인식일 뿐이지만 그것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는 질병을 일으키고 사망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비교한 바에 의하면, 노년층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지극히 원기왕성하다. 그들은 미국의 노인네들로서는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굽히기, 들기, 오르기 등을 거뜬히 해낸다.


인간의 표피세포와 같은 오래된 세포를 고배율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그 광경은 마치 전쟁터처럼 황폐화되어 있다. 섬유질이 이러 저리 얽혀 있고 지방질 노폐물과 처리되지 않은 순환노폐물이 보기 흉한 덩어리로 엉켜 있다. 리포푸신(lipofusin)이라 불리는 암황색 색소가 세포내부의 10 내지 30퍼센트까지 축적되어 더럽혀져 있다.


이 황폐한 광경은 아세포 기능의 이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물질적인 렌즈가 아니라 정신적인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 오래된 세포들이 마치 그 사람의 경험이 기록된 지도와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준 일들과 함께 우리를 괴롭힌 일들이 거기에 각인되어 있다. 의식 층에서는 오랜 전에 잊혀진 일들이 마치 감춰진 컴퓨터 마이크로 칩처럼 여전히 외부로 신호를 보내어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긴장하게 하며 지치고 근심스럽고 후회스럽고 의심스럽고 실망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반응들은 심신의 경계막을 넘나들면서 우리의 일부가 된다. 오래된 세포 속의 독성 노폐물 덩어리들이 누구에게나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전적인 차이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 70세에 이를 즈음이 되면 당신의 세포는 독특한 형태를 띠게 될 텐데, 그 형태는 당신이 자신의 신체조직과 내장기관에 대사 작용으로 변화시키고 처리시킨 독특한 경험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혼돈스럽고 거칠게 진동하는 ‘양자의 수프’를 다루어서 의미 있고 질서 있는 현실의 단편들도 만들 수 있게 되면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오직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을 때에만 존재한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 의식의 거의 대부분이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몸을 만들어 내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소위 자율신경계는 당신의 의식을 빠져나간 기능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멍한 상태로 길을 걸어가더라도 뇌 속의 자율신경 중추는 여전히 위험한 순간을 살펴서 긴장반응을 발동시킬 태세를 갖추고 외부세계에 대처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수많은 일이 행해지고 있다. 숨쉬고, 소화시키고, 새로운 세포를 키우고, 손상된 오래된 세포를 고치며, 독성을 순화시키고, 호르몬의 균형을 유지하며, 지방을 혈당으로 바꿈으로써 저장된 에너지를 변환시키고, 눈동자의 조리개를 조절하고, 혈압을 높이고 낮추며,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걷는 동안에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근육으로 혈액을 보내 주고, 주변의 소리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등의 일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율적인 과정이 노화현상에 아주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이러한 기능들을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져 가는 것이다. 한평생 무의식적인 생활을 이어가면 수많은 노후작용이 일어나고, 한평생 의식적으로 활동하면 노화를 예방할 수 있다. 신체의 기능을 자동운전 상태로 내버려두는 대신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 그 자체가 당신이 어떻게 나이를 먹느냐에 변수가 될 것이다. 심장박동과 호흡으로부터 소화와 호르몬 조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른바 자율기능들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가 있다.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과 명상의 시대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여러 가지 일 중에서도, 예컨대 심신건강 연구실에서는 심장질환자가 의지로서 혈압을 내리거나, 위궤양 환자가 위산의 분비를 줄이는 훈련을 받고 있다. 이러한 능력을 노화현상에 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구태의연한 인식을 새롭게 바꾸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기법은 얼마든지 있다.

 

2. 우리의 신체는 에너지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의 패턴을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의 몸은 분자와 원자로 쪼개어지는 고형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은 모든 원자의 99.9999퍼센트가 텅 빈 공간이며, 실제로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덩어리인 아원자 입자가 이 공간 속을 빛의 속도로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 진동은 무작위적이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한 덩어리의 진동은 수소 원자의 정보를 지니고, 또 다른 덩어리의 진동은 산소 원자의 정보를 지닌다. 사실 모든 원소들이 하나의 고유한 정보이다.


정보는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우주와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추상적인 것이다. 인체의 물리적 구조를 궁극적인 근원으로 추적해 가면 분자가 원자로, 원자가 아원자 입자로, 아원자 입자는 텅 빈 공허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유령 같은 에너지로 꽁무니를 감추어 버려서 마침내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게 된다. 신비스럽게도 이 공허에는 어떤 정보가 표현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 소리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양자의 장은 표현되지 않은 형태로 온 우주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 십 억의 은하계가 이 문장 끝의 마침표보다 수백만 배나 작은 공간 속에 압축되어 있었던 대폭발(Big Bang)의 순간 이래로 늘 그래 왔었다. 그러나 무한히 작은 그 점 이전에도 우주의 구조는 나타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을 포함한 우주의 근본 질료는 비질료(non-stuff)이다. 그러나 그것은 범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비질료이다. 모든 원자 내부의 공허는 보이지 않는 지능으로 맥동하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이 지능이 본래 DNA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각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DNA가 정보화된 자신의 지능을 쌍둥이 격인 RNA에 전해 주고, RNA는 나아가서 세포 속으로 들어가 수천 개의 효소들에게 그 지능의 조각들을 전달해 주고, 그러면 효소는 그 특정한 지능의 조각을 단백질을 만드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생명이 전개된다. 이러한 과정의 모든 순간에 에너지와 정보가 교환되어야 하며, 이것이 없이는 생명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이 생겨나지 않는다.


인체는 주로 글루코스나 혈당의 형태로 세포에 전달되는 당분을 연소함으로써 에너지를 뽑아낸다. 글루코스의 화학구조는 우리가 먹는 설탕인 자당(sucrose)과 매우 가깝다. 하지만 설탕을 태운다고 해서 복잡하고도 정교한 구조를 가진 살아있는 세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꺼먼 숯 덩어리와 물과 이산화탄소의 흔적만이 남을 뿐이다.


물질대사는 단순한 연소과정 이상의 어떤 것이다. 각설탕 속에 비활성 상태로 들어 있는 당분이 그 에너지로써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인체 세포가 그것에 새로운 정보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당분은 그 에너지를 예컨대 신장, 심장, 혹은 뇌의 세포에 줄 수 있다. 이 세포들은 모두가 자신만의 독특한 형태의 지능을 지니고 있다. 심장세포의 율동적인 수축운동은 뇌세포의 전기적 방전작용이나 신장세포의 나트륨 교환 작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지능의 풍부성과 다채로움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온 신체가 공유하고 있는 단일한 지능이 있다. 이 지능의 흐름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며, 사망의 순간에 이 흐름이 끊기면 우리의 DNA 속에 저장된 그 모든 지식도 쓸모없게 된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이 흐름은 다양한 방법으로 손상된다. 면역계통과 신경계통, 내분비계통의 특유한 지능이 모두 쇠퇴하기 시작한다. 생리학자들은 이 세 가지 계통이 인체의 가장 중요한 제어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면역세포와 내분비선은 뉴런과 마찬가지로 뇌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용체(receptor)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확장된 뇌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노화란 단순히 우리의 잿빛 물질덩어리 속에 한정된 하나의 질병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면역계통이나 내분비계통의 지능이 상실되면 온몸의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말기 단계까지 진행되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날 때까지도 그 손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감은 노화를 일으키는 수 십 억의 양자의 교환 작용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깊이 침투해 들어가지 못한다. 그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른 동시에 너무나 느리다. 각각의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데에는 10,000분의 1초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너무 빠르다는 것이며,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 누적된 효과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너무 느리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들에는 한 개의 원자보다 수백만 배 작은 규모의 정보와 에너지가 개입된다.


인체가 단순한 물질이라면 노화에 의한 쇠약을 불가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엔트로피(entropy), 즉 질서 있는 체계로부터 점점 무질서하게 되어 가는 경향성의 희생물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폐차장에서 녹슬어 가는 고물차와 같은 것이다. 엔트로피는 잘 돌아가던 기계를 찌그러진 고물로 망가뜨려 놓는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반대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녹슨 고철 무더기가 저절로 재조립되어 새 차로 만들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능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세월의 약탈에 영향 받지 않는 것이다. 현대과학은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을 지금 막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신체의 젊음을 유지해 온 스승들의 영적인 전통 속에 이미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인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그보다 좀 희귀하긴 하지만 서양의 기독교권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본질이 지능의 한 흐름임을 깨달은 현자들을 배출해 왔다. 이 흐름을 유지하고 해가 갈수록 풍부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계의 심층적 차원에서 엔트로피를 극복해 냈다. 인도에서는 이 지능의 흐름을 프라나(흔히 ‘생명력(氣)’이로 번역된다)라고 한다. 이것은 의지로써 증가시키거나 이곳저곳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육신을 젊고 순조롭게 유지하도록 조종할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프라나를 접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다. 요기(yogi)는 다름아닌 의식의 집중을 이용하여 프라나를 움직인다. 심층적 차원에서 프라나와 의지의 집중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의식이며 의식이 곧 생명이다.

 


3. 몸과 마음은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이다.


지능은 그것을 가리고 있는 물질이라는 가면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다. 그 자신을 사념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분자로써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두려움과 같은 기본적인 감정은 하나의 추상적인 느낌으로 묘사될 수도 있고, 혹은 눈에 보이는 아드레날린 호르몬의 분자로 묘사될 수도 있다. 느낌이 없이는 호르몬도 없으며, 호르몬이 없이는 느낌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신호가 없으면 통증도 없고, 통증의 수용체에 꼭 들어맞아서 통증의 신호를 차단시키는 엔도르핀(endorpin)이 없으면 통증으로부터 해방될 수도 없다. 심신상관 의학(Mindbody medicine)이라고 불리는 혁명은 이 단순한 발견 위에 근거한 것이다. 생각이 가는 곳에 화학물질이 동반된다. 이러한 통찰이, 예컨대 남편을 최근에 사별한 여성들에게 유방암이 일어나는 확률이 왜 두 배나 더 높은지, 또 오랫동안 우울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병을 얻는 확률이 왜 네 배나 더 높은지 등을 이해하는 데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정신적인 압박상태가 질병을 일으키는 생체화학물질로 변환된 것이다.


나의 임상 경험에서도, 쥐어짜는 듯이 숨 막히는 통증을 유발하는 심장계통의 대표적인 질환인 협심증 환자가 두 사람 있었는데, 한 사람은 통증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전혀 느끼지도 않고 달리기와 수영, 심지어는 등산까지 즐기는데 비하여 다른 사람은 팔걸이의자에서 일어나려고만 해도 거의 까무러칠 정도의 통증에 시달리는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두 사람의 신체적인 차이를 조사해 볼 것이지만, 그것은 발견할 수도 있고 전혀 발견 못할 수도 있다. 심장병 전문의들은 세 개의 관상동맥 중에서 최소한 하나가 50퍼센트 이상 막혔을 때 협심증의 통증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혈관이 막히는 것은 대부분이 죽은 세포, 응고된 혈액, 지방질이 낀 혈소판 등이 혈관내벽에 끼어서 이루어진 동맥경화의 형태이다. 그러나 50퍼센트라는 수치는 단지 어림짐작일 뿐이다. 어떤 협심증 환자들은 오직 관상동맥의 한 군데에만 혈행을 방해하는 작은 병변(病變)을 가지고도 통증으로 장애인이 되는 반면, 다른 환자들은 관상동맥을 85퍼센트까지 말고 있는 덩어리들을 여러 군데에 지니고도 마라톤 코스를 뛴다고 알려져 있다. (덧붙일 것은, 협심증은 반드시 어떤 물질이 낄 경우에만 발병되는 것은 아니다. 관상동맥에는 근육세포층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 경련을 일으켜서 혈관이 닫혀 있을 때에도 박동하여 통증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데 따라 반응이 매우 다르다.)


심신상관 의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나의 두 환자는 통증에 대한 각자의 서로 다른 해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환자들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신만의 특유한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통증(혹은 기타의 증상)은 심신체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과거의 모든 영향들과 상호 작용한 다음에야 의식 속으로 떠오른다. 모든 사람이, 아니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일에 항상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없다. 통증의 신호는 다양한 용도로 변환될 수 있는 원시 데이터일 뿐이다. 장거리 달리기 같이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 경기는 선수로 하여금 고통을 성취의 신호(‘고통 없이는 성취도 없다’라는 속담을 보라)로 해석하게끔 만들지만, 똑같은 고통이 다른 상황에서 주어지면 전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육상 선수들은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코치를 존경하지만, 신병훈련소에서 그와 같은 훈련을 받으면 교관을 증오한다.


의학은 이제 막 심신의 상관관계를 치료에 이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통증 치료가 그 좋은 보기이다. 플라시보(placebo), 즉 가짜 약을 투여하면 30퍼센트의 환자는 정말 진통제를 투여한 것과 같은 진통효과를 경험한다. 그러나 심신의 상관효과는 이보다 훨씬 더 전일적(全一的)이다. 똑같은 가짜 약으로써 진통을 겪게도 하고, 위궤양 환자의 과다한 위산분비를 멈추게도 하며, 혈압을 낮추기도 하고, 항암제 역할도 한다. (설탕으로 만든 약을 환자에게 주면서 강력한 항암제라고 믿게 하여 머리가 빠지고 구토증이 나는 등 화학요법이 일으키는 모든 부작용이 나타나게 할 수도 있으며, 생리식염수 주사로 말기의 악성 종양을 실제로 완화시킨 예도 있다.)


약효가 없는 동일한 약물로써 이처럼 전혀 다른 반응을 이끌어 낼 수가 있으므로, 마음에 적당한 암시만 주면 인체는 ‘그 어떠한’ 생화학 반응이든지 만들어 낼 능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가짜 약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플라시보 효과를 나타내는 힘은 다름 아닌 암시의 힘이다. 이 암시가 인체가 자신을 치유하려는 의지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 약으로 환자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고, 바로 그 ‘치유의 의지’로 접근하는 것이 어떨까? 만약 우리가 늙지 않으려면 의지를 효과적으로 발동시킬 수만 있다면 인체는 그것을 자동으로 실행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매우 흥미로운 증거를 가지고 있다. 노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병중의 하나는 파킨슨병이라는 신경장애로서, 근육운동을 조절할 수 없어서 걷기와 같은 신체동작이 극도로 느려지다가 결국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이 경직되게 만드는 병이다. 파킨슨병은 도파민(dopamin)이라는 뇌의 매우 중요한 화학물질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고갈되는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어떤 종류의 약물에 의해 도파민을 생산하는 뇌세포가 파괴되어서 일어나는 파킨슨병 증상도 있다. 이 두 번째 형태의 증상의 심화되어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어떤 환자를 가정해보자. 그는 안간힘으로 겨우 한두 걸음을 옮기고는 다시 동상처럼 뻣뻣이 얼어붙는다.


그러나 바닥에다 금을 그어 놓고 “이 금을 밟아 보세요.”하고 말하면 그 사람은 마치 기적과도 같이 그 금위에 설 수가 있다. 도파민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기능이며, 저장된 것은 완전히 소모되었다는 사실(거의 뇌가 다리의 근육에게 한 걸음 더 움직이도록 신호를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는 것처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걸음을 걷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뇌가 깨어난 것이다. 그 사람은 몇 초만 지나면 다시 얼어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그에게 마음속으로 금을 긋고 그것을 밟아 보라고 하면 그의 뇌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부연하자면, 노인들의 쇠약이나 활동력 감퇴는 대부분의 경우 단지 휴지상태일 뿐이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활동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의지만 재확인시켜 주면, 많은 노인들이 운동능력과 체력과 민첩성과 정신반응을 극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


의지는 의식집중의 적극적인 동업자이다. 의지는 우리가 자동적인 과정을 의식적인 과정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이다. 거의 대부분의 환자가 간단한 심신상관관계 훈련을 이용해서 빠른 맥박과 천식성 기침, 뭔지 모를 불안감을 몇 번 만에 좀더 정상적인 반응으로 바꾸어 놓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적절한 기법을 이용하여 다시 통제권 안으로 가져올 수가 있다. 이것이 노화에 대해 시사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예컨대 ‘나는 정력과 활동력을 나날이 증진시키고 싶다’는 식의 의지를 사고과정에 주입함으로써, 활동에 표현되는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는 대뇌중추에 통제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활동력이 감퇴하는 것은 대부분이 그렇게 감퇴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대’한 결과이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패배적인 의지를 강한 신념의 형태로 심어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심신의 상관관계가 이러한 의지를 자동으로 실행하게 된다.


과거에 우리가 지녔던 의지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구시대의 프로그램을 만든다. 사실은, 의지의 힘은 언제든지 다시 각성시킬 수가 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의식적으로 마음을 프로그래밍 함으로써, 나이가 들기 전에 일찌감치 그와 같은 손실을 방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인체의 생화학 작용은 의식의 산물이다.


낡은 패러다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대한 한계 중의 하나는, 인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 사람의 의식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질병의 치료는 그 사람의 신념, 추측, 기대,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또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인체를 마음이 없는 기계로 보는 입장이 아직도 서양의학의 주류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와는 반대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암이나 심장질환으로 사망하는 비율은 아무래도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진 사람들이 더 높고, 목적의식이 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더 낮다.


최근 몇 해 동안 이루어진 의학연구 결과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의 하나는 스탠퍼드 대학의 정신의학자인 데이비드 스피겔(David Spiegel)이 행한 실험이다. 그는 환자의 마음상태가 암의 극복과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많은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신념과 태도에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이 이로운 점보다는 해로운 점이 더 많으리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암을 일으킨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식의 생각은 죄의식과 자기비판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피겔은 유방암이 상당히 진전된 86명의 여성(그들의 병은 관행요법으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들을 대상으로, 그들 중의 반수에게 매주 자기최면 법 강의와 결합된 정신요법을 행했다. 어느 모로 보나 이것은 최소한의 개입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 그것도 여러 명의 환자가 함께 하는 요법으로써 죽음이 불가피하게 된 말기 증상의 병과 어떻게 싸울 수가 있었겠는가? 결과는 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험 대상자들을 10년 동안 추적해 본 스피겔은 요법을 받은 그룹이 요법을 받지 않은 그룹보다 평균 두 배나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최근까지 단지 세 명만이 살아 있었는데, 그들 모두 요법을 받은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 연구결과는 연구자가 그 효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라서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한테서도 이와 비슷한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예일 대학의 젠센(M. R. Jensen)이 보고한 1987년의 신중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감정을 억누르고 절망감에 빠지고 분노나 두려움, 기타 부정적인 감정을 발산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여성들에게는 유방암이 빠르게 퍼져 나간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류머티스 관절염이나 천식, 난치성 통증, 그리고 기타의 장애 증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발견이 보고 되었다.


낡은 패러다임에 빠져 있는 의사들은 이러한 연구결과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통찰력이 번득이는 저서 <의학과 의미(Medicine and Meaning)>에서 래리 도시(Larry Dossey)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의학 회보나 의과대학 강단에서 끊임없이 설교되고 있는 지배적 교훈은 ‘전래의 병리학’만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며, 느낌, 감정, 태도 등은 한갓 들러리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감정이란 외딴 정신의 공간 속을 스치듯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의식의 표현이며 생명의 근본적인 질료라는 사실이다. 모든 종교 전통 속에서 생명의 숨결은 곧 영혼이다. 영혼을 고양시킨다거나 저하시킨다는 것은 인체가 반드시 반영해야 할 근본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의식은 노화현상에 매우 큰 차이를 가져온다. 고등한 생명 형태를 지닌 모든 종이 노화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인식을 다시 노화 자체로 재 번역한다. 늙어가는 것에 절망을 느끼기 때문에 한층 더 발리 늙어가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을 아량으로 받아들이면 육체적? 정신적인 많은 불행을 막아낼 수 있다.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늙는다.’는 속담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생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계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정보의 자극이다. 우리가 나무, 별, 산, 바다라고 부르는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도 자연계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한 가지 중요한 면에서 이와는 다르다. 자연계는 자신의 생각의 형태가 일단 정해지면 거기에 고정되어 버린다. 행성이나 나무와 같은 사물은 생겨나고 발달하고 쇠퇴하고 분해되는 자동적 단계의 성장 사이클을 따른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의 주기 속에 갇히지 않는다. 인식능력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응에 참여한다. 우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을 때 문제가 일어난다. 마이클 탤보트(Michael Talbot)는 자신의 저서 <홀로그램 우주(The Holographic Universe)>라는 책에서 이것을 희랍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 왕에 빗대어 재치 있게 이야기한다. 자기가 손을 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해 버리므로, 마이더스 왕은 사물의 실질적인 재질을 알 수가 없다. 물도, 밀알도, 살도, 깃털도, 모두가 그가 손을 대는 순간 단단한 금속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은 양자의 장을 일상의 물질적 현실로 바꾸어 버리므로 우리는 양자적 현실 그 자체의 재질을 알 수가 없다. 오감을 통해서도 알 수 없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 또한 양자의 장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생각은 공허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떤 시공간적(時空間的) 사건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육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특정한 시공간적 사건이다. 우리는 순전히 추상적인 잠재력을 고형의 물체로 바꾸어 놓은 마이더스의 손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육체의 물질성만을 경함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의식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육체를 바꾸어 놓는 자신의 행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5. 인식이란 학습된 현상이다.


만일 모든 인간이 어떤 경험에 대해서 똑같은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면, 의식의 힘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분명히 일어날 리가 없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똑같은 인식을 공유하는 일은 없다. 당신 애인의 얼굴이 나의 가장 미운 적일 수도 있고,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나에게는 구역질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각 개인의 반응들은 반드시 학습된 것이다. 여기서 개인의 차이가 비롯된다. 학습 행위는 마음을 매우 활발히 사용하는 것으로, 신체에 매우 활발한 변화를 일으킨다. 사랑, 증오, 기쁨, 혐오 등의 인식은 신체에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방향의 자극을 준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몸은 우리가 태어난 이래로 배운 모든 해석방식의 육체적 산물인 것이다.


장기이식 수술을 받은 일부 환자들은 신장이나 간, 심장 등을 기증 받은 후에 괴이한 경험을 했다는 보고를 해 온다. 장기를 기증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은 기증자의 기억 속에 끌려들어 가기 시작한다. 사람의 체내에 다른 사람의 신체 조직이 이식되면 그 사람의 대인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번은 심장이식 수술을 한 어떤 여성이 잠을 자다 깨어났는데, 갑자기 맥주와 통닭을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전에는 그런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미라는 젊은 남자가 나타나는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하고부터 그녀는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죽은 심장 기증자의 신상을 조사해 보았다. 그녀가 그의 가족을 만나본 결과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티미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맥주를 매우 즐겼으며 맥도널드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초자연적인 설명을 찾기보다 우리의 신체는 경험이 육체적 표현으로 변형된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우리가 ‘육화’시키는 어떤 것이므로 우리 몸의 세포 속에는 우리의 기억이 주입되어 있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세포를 받는다는 것은 동시에 그 사람의 기억도 받는 것이 된다.

 

당신의 몸 세포는 끊임없이 경험을 처리하고 그것을 당신의 개인적 관점에 의거하여 대사 작용으로 변환시킨다. 당신은 단순히 원시 데이터를 눈과 귀를 통해 통과시키고 거기에 판단의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그것을 내화하면서 실제로 자신이 그 해석 자체로 ‘변하는’ 것이다. 일자리를 잃어서 실의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몸 구석구석으로 그 슬픔을 투사한다. 즉, 대뇌에서 나오는 신경전달물질이 고갈되고 호르몬의 양이 떨어지며, 수면 주기가 혼란해지고, 피부세포의 표피층에 있는 뉴로펩티드 수용체가 교란되고, 혈액 속의 혈소판이 끈적끈적해져서 덩어리가 되기가 더 쉬워지며, 눈물조차 기뻐할 때의 눈물과는 다른 화학성분을 보이는 것이다.


그 사람이 새로운 직장을 얻게 되면 이 모든 생화학적 양상이 극적으로 바뀌며, 만일 그 직장이 매우 만족스럽다면 그의 몸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수용체, 그리고 DNA 자체에 이르기까지 다른 모든 필수 생화학물질들은 갑작스럽게 상황이 호전되었음을 반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DNA를 유전정보가 저장된 잠겨진 창고로 생각하지만, 작용상 쌍둥이인 RNA는 매일 매일의 상황에 반응하고 있다. 의과대학생들은 시험기간이 되면 암에 대항하는 면역반응에 필수적인 화학물질인 인터루킨(interlukin) 2의 수치가 줄어드는 현상을 보인다. 인터루킨2의 생산은 전령 RNA(messenger RNA)에 의해 제어되는데, 이것은 시험결과에 대한 학생들의 걱정이 유전자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점은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상태의 신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는 것을 역설해 주고 있다. 의과대학생들의 시험에 대한 걱정은 실업자의 걱정처럼 언젠가는 지나간다. 그러나 노화현상만은 날마다 대면해야만 한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 향후 40, 50년, 혹은 60년 동안에 일어날 일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신경학적으로 말하자면, 뇌의 신호는 한갓 물결치는 에너지의 결합이다. 당신이 혼수상태에 있다면 이 신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이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그 신호는 무한히 창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극 중에서 ‘우리는 꿈과 똑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고 말하는 프로스페로의 대사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인체란 대뇌신호가 3차원적으로 투사되어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상태로 변형된 것, 즉 현실화된 꿈과도 같다.


노화란 일련의 오도된 변형, 즉 균형 잡히고 안정적인 자기쇄신의 과정이 옆길로 샌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 육체상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먼저 우리의 의식 - 우리 마음속의 의식이든 세포 속의 의식이든 상관없다 - 이 옆길로 샌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어떻게 이처럼 옆길로 새게 되었는지를 깨달음으로써 체내의 생화학기능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의식을 벗어나면 생화학 작용은 없다. 우리 몸 안의 모든 세포들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신은 무차별로 냉혹하게 몸을 허물어뜨리는 세월의 제물이라고 생각하던 환상은 깨끗이 떨어져 나간다.



6. 지능의 자극이 신체를 시시각각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낸다.


몸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은 변화하는 생명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서 필요하다. 예컨대 어린아이의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는 친숙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다. 그리하여 세상에 대해서 좀더 많은 것을 배우기까지는 그의 몸은 능숙하고 조절되지 못한 행동을 보인다. 3개월 된 아이는 그림 속의 계단과 실제의 계단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 아이의 대뇌는 어떤 것이 눈의 착각인지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6개월이 되면 아이의 현실이 변화된다. 그 정도 된 아이들은 눈의 착각을 알아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이용해서 그들의 몸은 3차원 공간을 좀더 잘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거울이 벽 속의 구멍처럼 보이지 않으며, 진짜 계단은 올라가기 위한 것이지만 그림 속의 계단은 그렇지 않으며, 둥근 것과 판판한 것은 다르다는 등.) 이러한 인식의 변천은 단지 정식적인 것만이 아니다. 눈과 손을 사용하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 성공적으로 사용되며, 형상을 인식하고 운동기관을 조절하는 뇌의 다양한 중추의 육체적인 수준에도 변화가 온다.


새로운 인식이 계속 뇌로 들어오는 한 우리의 몸은 새로운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젊음의 비결은 없다. 여든 살 먹은 나의 환자 한 분이 간명하게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성장하기 때문에 늙지 않는다. 성장하기를 멈추면 늙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이런 것들이 몸과 마음을 성장시키며 이 일이 계속 일어나는 한 시시각각 새로워지려고 하는 본연의 경향이 외부로 표현된다.


양자의 세계에서,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노화는 그렇지 않다. 우리 육신의 시간적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청년 같은 50대가 지니고 있는 분자와 할아버지 같은 50대의 체내 분자는 나이가 같다. 어느 쪽이나 몸의 나이를 말하자면 50억 살(온갖 종류의 원자의 나이)이라고도 할 수 있고, 한 살(인체 조직 속의 원자가 교환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혹은 3초(세포가 음식과 공기와 물을 처리하는 효소를 교체하는 데 걸리는 시간)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우리를 소용돌이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정보의 나이 만큼밖에 나이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점은 매우 운 좋은 일이다. 우리는 양자장에 담겨 있는 정보의 내용을 통제할 수 있다. 각 세포를 이루고 있는 음식과 물과 공기 속의 원자에 담겨 있는 정보는 일정량의 고정된 것이지만 그 정보를 변형시킬 수 있는 힘은 자유의지로 조절할 수 있다. 한 가지, 이 세계에서 당신이 자유롭고 확실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세계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다. 예를 들자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어린아이들이 성장을 멈춘 의학적 사례가 놀랄 정도로 많이 있다. ‘사회심리적 소인증(小人症)’이라고 불리는 이 증후군은 심하게 학대받은 아이들 가운데서 발생하는데, 그들은 사랑의 결핍을 성장호르몬의 결핍으로 바꿔 놓는다. 이 증상은 성장호르몬은 모든 아이들의 DNA 속에 새겨진 기정(旣定) 시간표에 따라 분비되는 것이라는 가설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런 경우에 해석의 힘은 신체 정보의 장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유전자에 새겨진 내용을 무효화시킨다.


해석은 자신과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난다. 당신은 이것을 마음속의 대화로 경험한다. 생각, 판단, 그리고 느낌이 끊임없이 마음속을 소용돌이친다. “난 이것이 좋아. 저것은 싫어. 이것은 겁나지만 저것은 잘 모르겠어.” 등등. 마음속의 대화는 제멋대로 일어나는 정신적 잡음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지닌 가정과 신념에 의해서 의식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당신이 현실에 대해 세워 놓은 어떤 가정이 진실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신념의 핵심이 형성된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견지하고 있는 한, 당신의 신념은 신체 정보의 장을 특정한 변수의 범위 안에 가둬 놓는다. 즉, 당신은 어떤 것을 자신이 기대하는 수준에 맞는가 안 맞는가에 따라서 좋은 것으로, 혹은 싫은 것으로, 괴로운 것으로, 혹은 즐거운 것으로 인식한다.


어떤 사람이 인식을 변화시키면 그의 현실에도 또한 변화가 일어난다. 사회심리적 소인증을 앓는 아이들의 경우, 성장호르몬을 투여하는 것보다 사랑이 있는 환경 속에 살게 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나타낸다. (자신은 부모가 원치 않으며 가치 없는 존재라는 신념이 너무 강하면 성장호르몬을 투여해도 몸이 자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양부모를 만나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라고 믿는 이들의 근본 신념이 바뀌며 그들은 자연의 성장호르몬을 마치 둑이 터지듯이 분비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정상적인 키와 몸무게와 발육상태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들이 자신을 달리 보게 됨으로써 생리적 차원에서 그들의 개별적 현실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노화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은 늙게 되어 있다는 뿌리 깊은 신념이 어떻게 노화 그 자체로 변형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강력한 일화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신념이 늙어가는 자화상을 만들고, 그것들이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 마음속으로 바랐던 것이 실제 결과로 나타나는 것 - 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이 떠받치고 있는 신념을 뒤엎어야만 한다. 당신의 몸이 시간과 함께 쇠퇴해 간다는 신념 대신에 당신의 몸은 시시각각 새로워진다는 신념을 키워 가라. 당신의 몸이 마음 없는 기계라는 신념 대신에, 당신의 몸은 생명의 심원한 지능으로 차 있으며 그 지능의 유일한 목적은 당신을 북돋우는 것뿐이라는 믿음을 키우라. 이 새로운 신념들은 그저 지니기에 기분 좋은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 삶의 희열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7. 분리된 개체처럼 보이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가 우주를 지배하는 지능의 패턴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와 주위의 환경은 하나이다.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몸이 어느 지점에서 끝나 있다고 인식한다. 우리의 몸은 방의 벽이나 집 밖의 나무와는 텅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그러나 양자의 관점에서 보면 ‘고형 물질’과 ‘빈 공간’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1입방 센티미터마다 양자 공간은 거의 무한대의 에너지로 채워져 있다. 또한 아무리 미세한 진동이라도 그것은 전체 은하계 속을 진동하고 있는 광대한 장의 일부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환경은 곧 우리 몸의 연장이다. 호흡을 할 때마다 우리는 중국에 사는 누군가가 어제 내쉰 수억 개의 공기 원자를 들이마신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산소와 물과 햇빛은 우리 체내에 있는 것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원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사물과 합일되어 있는 상태를 체험할 수 있다. 보통의 깨어 있는 의식 상태에서는 당신은 장미를 만져 보고 딱딱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인 당신의 손가락이 또 다른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인 장미를 만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손가락과 그것이 만지는 대상은 둘 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무한한 장의 한갓 미세한 끄트머리일 뿐이다. 이러한 진리가 고대 인도의 성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이렇게 외치게 하였다.


소우주가 그러한 것처럼 대우주 또한 그러하도다.

원자가 그러한 것처럼 우주 또한 그러하도다.

인간의 몸이 그러한 것처럼 우주의 몸 또한 그러하도다.

인간의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우주의 마음 또한 그러하도다.


이것은 한낱 신비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분리의 상태에서 의식을 해방시켜 만물과의 일체성(unity)을 확인한 이들의 실제적인 체험이다. 일체성 속에서는 ‘외부에’ 있는 의식, 사람들, 사물들, 그리고 사건들은 모두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사실, 우리는 이 영향력들의 중심에 있는, 관계들의 거울일 뿐이다. 유명한 자연주의자인 존 뮤어(John Muir)는 “무엇인가를 따로 집어내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우주 속의 모든 것들과 얽혀 있음을 발견한다.”고 외쳤다. 이것은 결코 희귀한 경험이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물들의 주춧돌이다.


일체성의 경험을 할 수 있는가는 노화와 관련해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와 우리의 연장된 몸 사이에 조화로운 상호작용이 있으면 우리는 기쁘고 건강하고 젊은 느낌을 느끼기 때문이다. “공포는 분리에서 나온다”고 인도의 성현들은 말한다. 이 말 속에서 그들은 우리가 왜 노화하는가를 깊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봄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외부의’ 사물들 사이에 혼돈과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 최종 상태의 분리인 죽음은 공포스러운 미지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생명의 일부인 변화의 가능성 그 자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낸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상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일어나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폭력을 수반한다. 다른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이 우리와는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게 만들고자 한다. 조화 속에는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성 속에 있는 사람은 지배가 불가능한 것을 지배하려고 무모하게 애쓰는 대신 받아들이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내면과 그의 연장된 몸속에는 평화와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현인 크리슈나 무르티(Jidu Krishnamurti)는 경이롭게 각성된 의식과 지혜와 줄어들 줄 모르는 활력으로 90여 성상을 살았다. 나는 그가 여든 다섯의 나이로 강단을 향해 계단을 뛰어 올라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를 여러 해 동안 알고 지낸 한 여인이 하는 말에 나는 매우 감명 받았다. “나는 그에 대해서 이 한 가지만을 알았습니다. 그에게는 폭력성이 전혀 없습니다.”


양자적 우주관은 그 방정식과 가정에 관한 한 영적인 관점이 아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발견에 대해 신비로운 경외감으로 일치되어 있었다. 닐스 보어는 물질의 파동적인 속성을 우주심에 비교했다. 그리고 어빈 슈뢰딩거는 우주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마음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생을 마쳤다. (이것은 중력과 다른 모든 힘들이 신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라고 했던 뉴턴의 말을 재확인시킨다.) 진리인 것은, 인간 자신의 영혼을 탐사하는 것이 언제나 인간을 더 큰 의미의 영혼의 가장자리로 데려다 놓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러한 만남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한때 마음과 몸과 영혼을 갈라놓았던 경계를 실제로 넘나들 수 있게 해준다.


분리로부터 일체로, 분쟁으로부터 평화로의 변화가 모든 영적 전통의 목표이다.


“우리는 똑같은 객관적 세계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이 대답했다. “그렇다. 그러나 그대는 세계 속에 있는 자신을 보고 나는 내 속에 있는 세계를 본다. 이 하찮은 인식의 전환이 속박과 해방의 그 모든 차이를 만든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을 분리되고 외떨어진 존재로 봄으로써 만들어낸 무질서 속에 구속되어 있다. 그 완벽한 예가 감정이 격하고 욕구불만적인 행동은 보이며 끊임없이 마감시한에 쫓기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A형의 성격(Type A Personality) - 성급하고 경쟁심이 많으며 항상 긴장하고 있는 인간의 행동유형. 미국의 심장의학자 메이어 프리드먼(Meyer Friedman)과 로이 로젠먼(Roy H. Rosenman)이 만든 말이다. - 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어떤 종류의 포용성이나 흐름 속에도 자신을 풀어놓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의 상처를 분노로 키워 간다. 이같이 억눌린 혼란은 적개심과 성급함, 타인에 대한 책망, 까닭 없는 공포로 주변 환경에 투사된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남을 지배하려고 하며 사소한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과민하게 반응하여 자신과 남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가한다. 특히 사업계에서 A형의 사람은 끊임없이 혼돈을 일으키는 와중에서 자신은 성공적으로 경쟁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실제에 있어서는 일의 성과는 매우 낮으며 욕구불만이 쌓여 감에 따라 자신의 연장된 몸으로부터 들어오는 피드백은 육체적 몸 속에 더 많은 폐허상태를 만들어 낸다. 혈압과 콜레스테롤치가 상승하고 심장은 불필요한 스트레스성 발작을 잘 일으켜 치명적인 심장마비나 뇌졸중의 위험이 심각하게 높아진다.


A형의 성격은 자신의 연장된 몸과 조화롭게 교류하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해로움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환경 속에서 인식하는 스트레스는 모든 사람들을 덮쳐 오는 대부분의 노화현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우리를 노화하게 만드는 것은 스트레스라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인식하는 것이다. ‘저 밖에’ 있는 세계를 위협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스트레스 반응이 가져오는 손상에서 해방되어 환경과 공존할 수 있다. 여러 모로 보아, 늙지 않는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세계가 바로 당신 자신임을 확인시켜 주는 지식을 더욱 풍부하게 가지는 것이다.

 


8.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만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실재는 영원하다. 이른바 시간이라는 것은 사실은 계량화된 영원이다.


우리의 몸과 온 물질세계가 끊임없는 변화의 전개이기는 하나, 그것은 과정이라기보다는 실재이다. 우주는 생겨났으며 진화하고 있다. 우주가 생겨남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대폭발의 순간 이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논리적인 마음으로는 ‘시간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또는 ‘공간보다 큰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떠올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아인슈타인조차도 양자이론을 처음 구상하던 젊은 시절에는 뉴턴의 사상에 빠져 우주가 변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낡은 관념을 고수하여, 시간과 공간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한 상수라고 생각했다.


이 정상(定常)상태(steady-state)의 실재관은 우리의 오감이 아직도 우리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이 빨라지거나 늦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공간이 확장되거나 수축되는 것을 감지할 수가 없으나, 이 또한 리드미컬한 우주의 일부분이다. 더 나아가,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던 무차원의 영역을 상상한다는 것은 인식의 급격한 전이를 요구한다. 우주는 모종의 영원한 근원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인식의 전이를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의 몸이 변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흐름, 혹은 연속(순차적 연쇄)이 있어야 한다. 이 연속 속에는 전과 후가 있다. 이번의 호흡 전에는 먼젓번의 호흡이 있었고 이번의 심장박동 후에는 다음번의 심장박동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시간과 도구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의 평생 동안의 심장박동에 대한 심전도(心電圖)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출력된 그것을 손에 듦으로써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자리에 담긴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아래로 훑어볼 수도 있고 위로 거슬러 훑어볼 수도 있다. 마지막의 박동과 맨 처음의 박동이 나란히 오도록 접어 볼 수도 있다.


자연계 속의 가장 기본적인 시공간적 사건들에 관해서 양자물리학이 밝혀 놓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식의 조작이다. 이 사건들이 에너지 상태를 교환할 때 두 개의 입자는 쉽게 시간을 거슬러갈 수도 있고 앞질러갈 수도 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 미래의 에너지 사건에 의해 변경될 수도 있다. 화살처럼 돌이킬 수 없이 앞으로만 날아가는 시간의 개념은 양자 공간의 복잡한 기하학 속에서 영원히 깨져 버렸다. 양자공간 속에서는 다차원의 줄과 고리가 시간을 모든 방향으로 끌고 다니며, 심지어는 그것을 정지시키기도 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절대는 무시간성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온 우주가 그보다 큰 실재에서 터져 나오는 일개사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날과 달과 시, 분, 초라고 인식하는 그것은 더 큰 실재에서 떼어 낸 조각들이다. 무시간성을 마음 내키는 대로 떼어 내는 것은 인식자인 우리에게 달린 일이다. 우리의 인식이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을 만들어 낸다. 끊임없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귀한 생필품으로서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시간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개인적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하루를 늘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는가? 당신은 빠르고 불규칙적인 심장박동과 소화 리듬의 교란, 불면증, 고혈압으로 신체상에 나타나는 숨 막히고 공포스러운 ‘시간병’ 증세에 시달리는가? 이러한 개인 간의 차이는 우리가 변화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변화의 인식은 시간의 경험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과거나 미래에 의식을 두고 있으면, 우리는 시간의 장 속에서 노화를 만들어 내는 셈이다. 나이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젊어 보이는 한 인도의 스승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 속에서 일생을 보낸다. 그러나 나의 삶은 현재 속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다.” 인생이 현재 속에 집중되어 있으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과거나 미래가 그 위에 침범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 과거나 미래는 어디 있는가? 아무 데도 없다. 오직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는 정신적인 투사(投射)이다. 당신이 이 투사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면, 과거를 건져 내려고도, 미래를 어떻게 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전혀 새로운 체험의 공간이 열린다. 그것은 늙지 않는 몸과 시간을 초월한 마음의 체험이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현실과 일체가 될 수 있는 능력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시간이 불가피하게 가져오는 노쇠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당신은 간단한 심신 훈련으로써 시간을 초월한 상태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다. 하루 중에서 압박감 없이 이완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정하라. 편안한 의자에 앉아 시계를 풀어라. 시계를 들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가까운 장소에 시계를 놓아두라. 이제 눈을 감고 호흡을 의식하라. 의식으로 하여금 들고 나는 숨의 흐름을 편안히 따르도록 놓아두라. 호흡의 흐름과 함께 온몸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고 상상하라. 1, 2분 후에는 따뜻하고 이완되는 느낌이 근육 전체에 퍼지는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내면적으로 안정되고 고요해지면 천천히 눈을 살짝 떠서 시계의 초침을 엿보라. 초침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이 얼마나 이완되느냐에 따라 초침은 다른 행태를 보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초침이 완전히 멎어 있을 것이고 이런 효과는 1초 내지 3초까지 지속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초침이 0.5초 정도 머뭇거리다가 정상적인 째깍거림으로 건너뛸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초침이 움직이기는 하지만 평상시보다 느려져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실험은 직접 해 보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단 시계가 멈추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면 시간이 인식의 산물임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은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시간뿐이다.


당신은 자신의 의지대로 의식을 시간을 초월한 영역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명상은 이러한 경험을 익히기 위한 고전적인 기법이다. 명상중에는 활동하는 마음이 그 근원으로 철수된다. 이 변화하는 우주가 변화를 초월한 근원을 가져야만 하듯이, 쉬지 않고 활동하는 당신의 마음 또한 생각과 느낌과 감정과 욕망과 기억을 넘어선 의식 상태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심오한 개인적 체험이다. 시간이 없는, 혹은 초월적인 의식의 경지에서 당신은 충만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변화와 상실과 쇠퇴 대신 안정감과 충만감이 있다. 당신은 무한(無限)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경험이 현실이 되면 변화와 결부된 공포는 사라지고 시, 분, 초와 날과 달로 쪼개어진 영원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매순간의 완전성이 본질적인 것이 된다.


이제 명상은 서양 문화의 주류 속으로 진입했다. 연구자들은 침묵과 충만과 영원이라는 주관적 경험을 측정해 내기 위해 과학적 기법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명상자의 생리기능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발휘되는 상태로 전이하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다. 수많은 개인적 연구결과에 의하면, 호흡이 길어지고 산소 소비량이 줄어들며 대사율이 떨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노화와 관계되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스트레스 - 노화현상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 와 관련된 호르몬의 불균형이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노화와 연관되는 다양한 생리상태의 변화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노화과정을 늦추거나 심지어는 역전시키기까지 한다. 초월명상(TM, Transcendental Meditation) - 인도의 스승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가 미국에 전파한, 만트라를 통해 의식을 일종의 초월상태로 이끄는 명상기법 - 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연구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오랫동안 명상을 한 사람은 생리적인 연령이 실제 나이보다 5년 내지 12년 정도 젊은 것이 확인되었다.


20년이 넘도록 계속된 이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노화의 생리적 과정 그 자체를 조작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의식을 통해서만도 바라는 결과가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명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틀 그 자체를 바꾸어 놓는 것이다. 양자 차원에서는, 시간이 그다지 큰 지배력을 지니지 못하는 현실 속으로 마음을 옮겨다 놓는 것만으로도 심장박동이나 호르몬치와 같은 시공간 속의 물리적 사건에 영향을 준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시간이 다양한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의식은 그 모든 차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9. 우리는 모든 변화를 초월한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이 현실을 경험하면 변화는 우리의 지배 아래에 들어온다.


지금 당신이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생리학은 시간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의식에 종속된 것이라는 사실은 당신이 전혀 다른 형태의 기능 - 불사의 생리학 - 을 보유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곧 불변성의 경험을 의미할 것이다. 불변성은 변화의 결과로서는 생길 수가 없다. 그것은 시간에 속박된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초월한 의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러한 전환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 예컨대 당신이 극도로 시간에 쫓기면서 일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 압박감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 언제나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압박감을 창조성과 에너지의 원천으로 이용하여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 떠밀려서 적극적인 동기를 상실하고 중압감을 느껴 스트레스를 보상할 만한 만족을 얻어내지 못한다.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시간의 압박에 휘말리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그로부터 스트레스와 구속감을 느끼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자신을 덮쳐 온다. 그는 내부의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그의 몸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몸 세포는 끊임없이, 온갖 미묘한 방법으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자신을 맞추어 나간다. 생리학자라면, 우리가 수백만의 얽히고 설킨 심신상관적 사건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의 연쇄 속에 끌려 다닌다고 혹은 갇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시간에 얽매인 과정들을 재정돈할 수 있는 어떤 상태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다. 간단한 비유가 이 점을 밝혀 줄 수 있다. 당신의 신체를 뇌와 모든 세포 사이를 왕복하는 신호들의 출력물로 생각하라. 보내지는 신호의 종류를 정하는 신경계는 신체의 소프트웨어 역할을 한다. 온갖 종류의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과 기타 전령 분자(messenger molecule)들을 이 소프트웨어가 처리하는 입력물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눈에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프로그래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어디엔가 있는 것일 틀림없다. 심신상관 체계 속에서는 매초마다 수천 개의 결정이 내려지고 생명의 요구에 부응하게 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택이 내려진다.


만일 내가 인도에서 길을 걷다가 코브라를 보고 겁에 질려서 뒤로 물러섰다면, 이 사건을 제어하는 눈에 보이는 장치는 내가 보인 근육의 반응일 것이다. 그것은 나의 신경계가 보낸 화학적 신호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빨라진 심장박동수와 가빠진 호흡은 뇌하수체에서 보내진 특별한 화학물질(부신피질 자극 호르몬)에 반응하여 부신피질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촉발시킨 것이다. 나의 겁에 질린 반응과 관련된 분자 차원의 작용을 생화학자가 낱낱이 추적할 수 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반응하기로 결정을 내린 눈에 보이지 않는 결정자를 발견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짧은 순간적 반응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도 없이 몸이 혼자 놀라 물러서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땅꾼이라면 흥미롭다는 듯 허리를 구부릴 것이고 힌두교 신자라면 시바 신의 형상을 발견하고 경외감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사실은 ‘그 어떤’ 가능한 반응 - 공포, 흥분, 신경질적 반응, 마비, 무감각, 호기심, 기쁨 등등 - 도 다 일어날 수가 있다. 보이지 않는 프로그래머는 눈에 보이는 신체기관을 프로그램할(어떤 유형의 행동을 하라고 지시할) 수 있는 무한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내가 뱀과 마주치는 순간, 나의 모든 기초 생리기능들 - 호흡, 소화, 대사, 배설, 인식, 사고작용 - 은 코브라가 나에게 지고 있는 ‘의미’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올더스 힉슬리(Aldous Huxley)의 다음 말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경험이란 당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다.”


당신은 이 의미란 것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빠르고 손쉬운 대답은 대뇌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체 기관은 다른 모든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순간마다 뇌 속의 수 십 억의 원자들은 철새처럼 들락거린다. 대뇌는 일평생 단 한번도 동일한 패턴을 보이는 법이 없는 전기파로 회오리친다. 뇌의 기본적인 화학작용은 점심식사에 색다른 음식이 들어왔거나 갑작스럽게 기분이 흔들리면 변이될 수 있다. 그러나 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변화라는 큰 바다 속에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 나의 기억은, 그 기억 위에 서서 말없이 나의 삶을 지켜보며 나의 경험을 참고하여 언제든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즐기는 프로그래머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프로그래머는 단지 선택하는 의식일 뿐이다. 그것은 변화에 압도되지 않고 다만 음미한다. 그러므로 시간에 얽매이는, 일상적 인과의 세계에서 생기는 한계에 제약받지 않는다.


뱀을 무서워하는 ‘나’는 과거 언젠가 그 두려움을 학습했다. 나의 모든 반응은 시간에 얽매인 자아와 그것이 지닌 성향의 요체이다. 1,000분의 1초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프로그램 되어 있던 공포가 일련의 신체적 신호의 연쇄를 일으켜서 그와 같은 반응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의식을 가지고 말없이 지켜보는 결정자(decision maker)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미묘한 경로로,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이 우리가 갓난아이 적 이래로, 설사 변한 것이 있다고 해도 크게 변한 것이 없음을 다들 느끼고 있다. 아침에 깨어나면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어 온 온갖 규정들이 자동적으로 자리를 잡기 전의 순수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행복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으며, 잘난 체하지도 않고 겸손해 하지도 않으며,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다.


아침에 깨어날 때 이 ‘나’는 경험이라는 갑옷을 재빨리 걸쳐 입는다. 수초 내로 나는 자신을 상기한다. 예컨대 나는 마흔여섯 살의 의사이며 아내가 있고 두 자녀가 있고 보스턴 근교에 집이 있고 병원까지는 10분 거리에 있다는 등으로, 이러한 자아의 정체성은 변화의 결과이다. 변화를 초월한 ‘나’는 어디서나 일깨워질 수 있다. 할머니의 요리냄새를 맡고 있는 인도 델리 시의 다섯 살배기 아이, 플로리다에서 야자수 나뭇잎을 흔드는 사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든 살 노인네 등으로.


고대 인도의 성현들이 간단히 ‘진아(眞我)’라고 부른 이 변함없는 ‘나’는 경험에 있어서 나의 진정한 기준점이 되어 준다. 다른 모든 기준점은 변화와 쇠퇴와 상실을 피할 수 없다. 다른 모든 ‘나’의 느낌은 상대적 세계가 부과하는 모든 시간에 얽매인 조건, 예컨대 고통 아니면 기쁨, 빈곤 아니면 부요, 행복 아니면 슬픔, 젊음 아니면 늙음과 동일화되어 있다. 일체의식 속에서는 이 세계는 영혼(Spirit) - 곧 의식 - 의 흐름으로 설명된다. 우리의 지상의 목적은 영혼으로서의 진아와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 정도에 따라서 늙지 않는 몸과 시간을 초월한 마음의 경험이 실현될 것이다.

 

10. 우리는 노화와 질병과 사망의 제물이 아니다. 이들은 풍경의 일부일 뿐 어떤 형태의 변화에도 물들지 않는 지켜보는 자는 아니다.


근원적으로 생명은 창조이다. 당신이 자신의 내면의 지능과 접하게 되면 당신은 생명의 창조적인 핵심에 이른 것이다. 낡은 패러다임에서는 생명의 지배력이 DNA에 주어져 있었다. DNA는 극도로 복잡한 구조의 분자로서, 유전학자들에게조차 그 비밀은 1퍼센트도 밝혀져 있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생명의 지배력이 의식에 속해 있다. 앞에서 열거된 모든 예들 - 성장호르몬의 분비를 차단할 수 있는 아이, 초조감을 느낄 때 인터루킨 생산에 변동이 오는 의대생들, 의지로써 심장박동수를 조절할 수 있는 요기들 - 은 대부분의 기초 신체기능들이 우리의 정신상태에 반응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의 몸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수십억 가지의 변화는 단지 스쳐 지나가는 생명의 광경일 뿐이다. 이 막 뒤에는 지켜보는 자가 있다. 그는 곧 흐르는 의식의 근원이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의식과 함께 시작되고 끝난다. 내가 스스로 정하는 모든 목표와 기대치는 의식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고대의 성현들이 진아라고 한 그것은 현대 심리학 용어로 의식의 연속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일체의식이라고 알려진 의식상태는 의식이 완전한 상태이다. 즉, 가면과 환상과 벌어진 틈바구니와 파편이 없는 자신의 연속체 전체를 간파하는 상태이다.


우리는 의식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하므로 모두가 이런 저런 종류의 틈바구니 속으로 떨어진다. 많은 물질적 존재의 영역들이 우리의 지배를 벗어나 질병과 노화와 사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의식이 파편화되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1970년대 초반에 메닝거 병원에서 행한 유명한 일련의 실험에서 인도의 저명한 영성가인 스와미 라마는 의지로써 자신의 심장박동수를 70회에서 정상치를 크게 상회하는 300회까지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시범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심장박동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리드미컬하게 혈액을 펌프질하지 못하고 일종의 경련상태에 이르렀다. 보통사람이라면 심장의 경련은 심장마비와 기타 심각한, 때로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다. 이런 사고는 해마다 수천 명의 건강한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러나 스와미 라마는 이러한 심장이상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일은 의식의 직접적인 명령하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장박동수가 정상이다가 갑작스러운 이상으로 불과 수분 만에 죽는 사람들(모든 종류의 부정맥, 심장 세동(細動), 심빈박(心頻搏)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이 실제로는 의식의 손상을 겪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우리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비추어 이러한 손상의 원인을 심장근육의 탓으로 돌린다. 즉, 규칙적인 심장박동을 주관하는 전기화학 신호가 교란되었다는 것이다. 심장을 구성하고 있는 수십 억 개의 세포들이 전체의 유연하고 통일된 운동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제각각으로 혼란스럽게 수축하여 심장을 마치 꿈틀대는 뱀이 든 주머니 모양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모든 심장전문의들이 두려워하는 이 끔찍스러운 광경은 2차적인 현상일 뿐이다. 심장세포 가운데서의 의식 손상이 1차적인 원인이다. 이 의식의 손상은 국부적인 손상이 아니라 전반적인 손상이다. 환자 자신이 자신의 모든 몸 세포를 다스리고 제어하는 지능의 심층차원과의 통신로를 잃어버린 것이다. 실상, 모든 세포는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다양한 층의 패턴으로 조직된 지능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스와미 라마와 같은 도인은 우리의 의식이 그처럼 조각조각 파편화되고 축소되어야 할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되면 그는 자신이 이 지능의 흐름의 근원이며 경로이며 목표임을 깨달을 것이다. 세계의 종교 전통이 영(Spirit)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전체(wholeness), 즉 의식의 모든 조각난 파편들을 굽어보고 있는 의식의 연속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질병과 노화와 사망의 제물이 되었다. 의식을 잃는 것은 지능을 잃는 것이고 지능을 잃는 것은 지능의 최종산물인 인체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교훈은 이것이다. 즉, 몸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먼저 의식을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매우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당신의 자아관(自我觀)의 결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해전에서 독일 군인들은 가끔씩 전함이 침몰되어 구명보트에서 며칠, 혹은 일주일씩 구조를 기다려야만 했다. 여기서 어김없이 맨 먼저 죽는 것은 젊은 군인들이었다. 전에도 침몰 당했다가 살아난 적이 있는 베테랑 선원들은 위험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젊은 선원들은 자신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어갔던 것임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이 현상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사례에서 단서를 잡아, 동물실험 연구자들은 실험용 생쥐들을 물탱크 속에 빠뜨리는 등의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빨리 노화시키거나 병들게 하여 죽도록 만들 수 있었다. 한번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는 동물들은 그것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이고는 금방 포기하여 죽어 버린다. 물탱크에 단계적으로 익숙해진 동물들은 그것을 견뎌 내어, 세포가 스트레스에 의해 파괴되는 증세를 보이지 않고 오랫동안 헤엄을 치면서 버틴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노화는 대부분 절망 때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운 상상이 노인들의 높은 발병률과 노인성 치매와 합세하여, 냉혹하며 자기충족적인 기대를 가져다  주었다. 노년은 몸과 마음이 점점 더 허약해지는, 피할 수 없는 쇠약과 상실의 시기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전체는 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깨어나고 있다. 60, 70대의 노인들이 40, 50대의 원기 왕성한 건강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정 - 인간은 늙어‘야만’ 한다는 것 - 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늙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가 낡은 패러다임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서, 의식의 전환이 새로운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낡은 우주관 속에 하나의 사실로서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주관이란 우주의 무한한 에너지를 어떤 논리적인 틀 속에 정돈하는 하나의 방식론일 뿐이다. 노화는 모든 것이 변해 가고 사라지고 죽는 자연계의 틀 속에서는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지능의 끝없는 흐름이 온통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 속에서는 그 합리성을 상실해 버린다. 어느 쪽의 관점을 받아들일 것인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당신은 장미꽃이 피었다가 시드는 것으로 보기로 할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을 끝없는 생명의 물결로 보기로 할 수도 있다. 다음해에는 그 장미의 씨앗에서 싹터 나온 새 장미를 보게 될 것이므로.


물질은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유폐된 순간이다. 우리 자신과 우주를 유물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우주의 유폐된 측면이 과도한 중요성을 지니게 만든다. 이 책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나는 여러분들의 우주관이 바뀔 때 존재란 것이 얼마나 유연하고 힘들지 않는 것일 수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몸은 고형적인 물리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흡사 강과도 같다. 헤르만 헤세가 영적인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에서 아름답게 묘사해 놓았던 그 신성한 강 말이다. 이 책 속에는 깨달음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 싯다르타가 마침내 자신의 평화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여러 해를 방랑하던 끝에 그는 넓은 니란자 강가에서 발을 멈추는데 그때 내면의 소리가 이렇게 들려온다. ‘이 강을 사랑하라. 그 곁에 머물러 그로부터 배움을 얻으라.’ 나에게는 이 속삭임이 생명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는 나의 몸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강과도 같이, 나의 몸은 순간의 바뀜과 함께 변화하며, 만일 내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 어떤 공백도, 새삼스러운 고통을 일으킬 과거의 어떤 아픈 기억도, 두려움을 가져올 미래의 상처에 대한 예상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를 떠받쳐 주는 생명의 강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너무나 겸손하여 우리의 인식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몸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면, 힘 있는 어떤 지능이 그 속에 우리와 함께 깃들여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학문적인 지능이 아니라 하나의 세포 속에 짜여 들어 있는 수백만 년의 지혜에 버금가는 그런 것이다. 학문적인 지식은 그처럼 웅대하지는 못하다. 싯다르타는 그 강에 귀를 기울이고 배우기를 원했다. 이 점이 지극히 중요하다. 당신이 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려면 몸의 흐름과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낡은 관점이 간과해 왔던 지식에 대해서 기꺼이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헤세는 이렇게 글을 이었다. “그에게는, 이 강과 그 비밀을 이해하는 자는 누구나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많은 비밀들을, 아니 모든 비밀을 이해하게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당신에게 일어난 것은 모두 당신의 몸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가능성 또한 그 속에 있다는 것이다. 노화는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대부분 당신의 몸이 배워 온 것이다. 신체는 프로그래머인 당신이 입력시킨 것을 수행하도록 배워 왔다. 이 프로그램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당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신념과 가정에 지배받는 무의식적인 것이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물질세계를 가져다 준 사념체계를 모두 허물어뜨리는 일이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체적 자아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친숙한 경험 속에 가장 개인적인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에 대해서 편안해지면, 질서가 엔트로피와의 싸움에서 자꾸만 밀릴 때 모든 것 위에 덮쳐오는 공포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믿도록 배워 온 세계는 그런(질서가 엔트로피 앞에서 밀리는) 세계이다. 그러나 또 다른 방식이 있고 다른 세계가 있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강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행자인 바수데바에게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네도 강의 비밀을 깨달았는가?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야.”



바수데바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퍼졌다. “그렇다네, 싯다르타. 자네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강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지. 그 근원에도, 하류에도, 폭포에도, 나루터에도, 흐르는 줄기에도, 바다에도. 그리고 강에게는 과거의 그림자도, 미래의 그림자도 없이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것 말일세.”


“바로 그거야.”하고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았고 그것 또한 하나의 강이었네. 어린 싯다르타와 젊은 싯다르타, 그리고 늙은 싯다르타는 실재가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에 의해 분리된 것일 뿐이었지.”


그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으나 바수데바는 그저 환한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수세기에 걸쳐 물질주의가 조장해 온 망상은 우리가 강을 정복하여 그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로부터 얻는 유일한 것은 죽음일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의 삶이 더욱 더 큰 경험의 장으로 확장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 속에 집약되는 에너지, 정보, 그리고 지능에는 한계가 없다. 이러한 무한의 창조성은 그 육적인 형태로서 당신의 세포 속에 육화되어 있다. 또한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서, 말해지지 않았으나 가능한 모든 의미, 가능한 모든 진리, 가능한 모든 창조로 충만해 있는 공(空), 즉 마음의 침묵 속에 표현되어 있다. 모든 원자의 핵심 속에 존재하는 공은 우주의 자궁이다. 두 개의 뉴런이 상호 작용할 때 명멸하는 사념 사이에 새로운 세계 탄생의 기회가 존재한다. 이 책은 시간의 호흡이 시들지 않고 오직 새로워질 뿐인 바로 그 침묵의 탐사에 관한 것이다. 아무도 늙지 않는 땅을 찾으라. 그곳은 다름 아닌 당신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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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에 대한 금언



   다음에 열거된 말들은 스승들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다. 어떤 것들은 글로 써서 주셨고, 또 어떤 것들은 다른 방법으로 전해 주신 것들이다. 그것들은 일반 사람들이 접할 수 없는 고대 사본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각각의 금언은 나의 이성과 판단을 위해서 제시되었다. 그것들을 깊이 숙고해 본 결과 맞는다고 생각되었기에 나의 동료들을 위해서 출판하며 그들도 내 생각에 동감하리라 생각한다.

                                                           - W. Q. J. -



1) 카르마를 만들거나 그 결과를 느낄 존재가 없다면 카르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2) 카르마는 원인들 뒤에 따르는 결과들의 조정으로 그러한 과정을 겪는 존재는 조정 과정 동안에 기쁨이나 고통을 경험한다.


3) 카르마는 균형을 회복하려는 우주에 있는 한 치의 오차도 틀리지 않는 성향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작용한다.


4) 균형을 회복하려는 작용이 겉으로 보기에 멈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떤 다른 지역이나 장소에서 일어난 혼란을 조정하기에 필요한 과정으로 성인이나 완전한 투시가만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카르마의 작용이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지 멈추는 경우는 결코 없다.


5) 카르마는 모든 만물에 다 작용한다. 미세한 원자에서부터 브라흐마에 이르기까지 인간 신 엘리멘탈 등이 있는 삼계(三界)에서 진행됨으로 현현한 우주에서 그 어떤 곳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6) 카르마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우주에서 시간의 궁극적인 나눔이 무엇인지 아는 자(者)는 카르마를 알게 된다.


7) 카르마의 본질적인 성질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알 수도 없다.


8) 그러나 원인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계산해 보면 그 작용을 알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원인 다음에 일어나는게 아니라 원인 속에 그 결과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계산이 가능하다.

9) 지구의 카르마는 이전 현현기에 (혹은 지구가 나온 진화의 흐름) 있던 모든 단계에 있던 모든 존재들의 생각과 행위의 결합이다.1)


10) 그런 존재들 속에는 신성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악한 사람들 모두가 포함되기 때문에 지구의 지속 기간은 그 위에서 살고 있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더 크다.


11) 지구와 그 인종들의 카르마는 인간의 정신으로 헤아리기에는 너무나 먼 과거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 카르마의 시발점을 탐구하는 것은 아무 쓸모도 없으며 도움될게 하나도 없다.


12) 이미 일어난 카르마의 원인들은 그것이 다할 때까지 계속 영향을 끼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동료나 의식을 가진 다른 존재들을 돕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13) 그 결과들은 자신이나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에 의해서 완화될 수 있다. 그러면 그에 따른 결과들은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 연관된 모든 원인들의 상호작용과 그 조합이 된다.


14) 카르마는 작용하기 위한 적합한 도구가 없으면 세계나 인종 국가 혹은 인간들에게 작용할 수 없다.2)


15) 적합한 도구가 있을 때까지 그것과 관련된 카르마는 소진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16) 자신에게 제공된 도구 속에서 카르마를 경험하는 동안 아직 소진되지 않은 다른 카르마는 다른 방법이나 다른 존재들을 통해서 소진되지 않고 미래에 작용하기 위해 보존된다. 카르마의 작용이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 시간이 흘러도 카르마의 성질이 변하거나 그 힘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17) 카르마가 작용하기 위한 도구의 적합성은 어떤 생에서 자아가 사용하기 위해서 얻은 신체 정신 지성 그리고 심령적인 성질들과 카르마와의 정확한 연결 관계에 달려 있다. 


18) 어떤 생이든 자아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는 카르마가 그 도구를 통해서 자용하기에 적합하다.


19) 어떤 생 동안에 새로운 등급의 카르마가 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카르마가 작용하는 도구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 강렬한 생각과 맹세의 힘을 통해서

  ⓑ 오래된 카르마의 완전한 소진으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을 통해서


20) 신체와 정신과 혼은 나름 대로의 독립적인 활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 중에 어느 하나가 독립적으로 카르마의 원인들을 소진시킬 수도 있다. 다른 통로들을 통해서 작용하는 원인들보다 발생 시기가 더 오래되었거나 가까운 카르마의 원인들은 소진시킬 수도 있다.


21) 카르마는 자비로우며 정당하다. 자비와 정의는 하나라는 전체의 마주보고 있는 양극이다. 정의 없는 자비는 카르마의 작용에서 불가능하다. 소위 우리가 자비 혹은 정의라고 부르는 것은 결함이 있으며 잘못되거나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22) 카르마는 세 종류가 있다.

  ⓐ 적합한 도구를 통해서 현재 생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

  ⓑ 미래에 소진 되기 위해서 현재 만들어져 저장되고 있는 것.

  ⓒ 과거 생에서 물려 받았지만 자아가 사용하는 도구가 적합치 않아서 혹은  현재 작용하는 카르마의 힘 때문에 억제되어 아직 작용하지 않는 것.


23) 카르마가 작용하는 세 가지 활동 영역

  ⓐ 신체와 환경   ⓑ 정신과 지성   ⓒ심령과 아스트랄계


24) 작용이 미루어지고 있는 카르마와 현재 작용하는 카르마는 카르마가 작용하는 세 가지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혹은 동시에 작용할 수도 있으며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카르마가 동시에 작용할 수도 있다.


23) 어떤 종류의 신체로 태어나서 어떤 종류의 카르마의 결과를 얻는 것은 카르마적인 성향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26) 카르마적인 성향을 억제하거나 제거하거나 혹은 반작용을 주지 않을 때 그 성향은 자아의 환생이나 자아들의 가족에게 최소한 3번의 생 동안 영향을 줄 것이다.


27) 다른 원인들을 일으킴으로써 반작용을 주거나 그 성향을 억제하려는 혹은 결함을 제거하려는 자아의 노력은 카르마적인 성향의 영향력을 바꿀 것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데 Tm여진 노력의 강약에 따라서 그 영향력을 짧게 할 것이다.


28) 성인이나 진정한 투시가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카르마를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개개인은 자기 몫의 카르마를 받으며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틀릴 수도 있다. 가난하게 태어나거나 힘겨운 시험을 받는 것은 나쁜 카르마에 대한 벌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아의 단련을 위해서 시험들과 어려움들을 경험하는 가난한 환경 속으로 자아들은 지속적으로 환생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강해지며 용기와 동정심을 얻게 된다.


29) 인종 카르마는 배분의 법칙에 따라서 인종 속에 있는 개개인들에게 영향을 준다. 국가 카르마는 한층 집중되어진 채로 같은 법칙에 의해서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에 작용한다. 가족 카르마는 가족이 순결하고 뚜렷하게 유지된 국가에만 작용한다. 왜냐하면 칼리 유가 시기에 그렇듯이 가족의 혼합이 있는 국가에서의 가족 카르마는 일반적으로 국가로 배분되어진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시기에도 어떤 가족들은 오랜 기간 동안 잘 뭉쳐진 채로 있어서 그 구성원들은 가족 카르마의 영향을 느낀다. 여기서 “가족”이란 여러 작은 가족들을 포함한다.


30) 카르마는 멘탈계와 아스트랄계를 통한 연결로 자연의 재해들을 일으킨다. 재해의 원인은 내부의 불이나 공기의 혼란과 같이 즉각적인 물리적 원인으로 추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요는 인간의 생각이라는 역동적인 힘을 통해서 만들어진 혼란 때문에 발생된다.


31) 재해가 일어나는 지역과 카르마적인 연결 고리가 없는 자아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카르마의 작용 밖에 있게 된다.

  ⓐ 그들의 내적인 본성에 영향을 주는 반발 작용

  ⓑ 이 세계의 진보를 감시하고 있는 존재들에 의한 부름과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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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입문 (An Outline of Theosophy)

저자: C.W. 리드비터
번역: 김은경




1. 서론


신지학이란?


인류는 위대하고 근원적인 진실, 즉 신의 존재와 본질 그리고 신과 인간과의 관계 및 인간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오랫동안 토의하고 논쟁하고 질문해왔다. 이러한 관점에 대한 견해는 극단적으로 달라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비난을 퍼붓고 상대방의 신념을 비웃었다.

이것은 확실한 증거 없이 대중 속에 뿌리깊게 심어진 에매한 추측을 통해 형성된 주장으로, 잘못 세워진 전제에서 차용된 불합리한 추론 덩어리 속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때때로 납득할 수 없으며 대단히 제한적이지만, 이러한 주장은 위와 같은 주장과 다양한 종교의 근간이 된다.

이처럼 일반적인 견해로 굳어진 현상은 부자연스럽지는 않을지라도 결코 진실은 아니다. 세상에는 받아들일 수 있는 명백한 사실들이 많이 있다. 신지학은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에서와 같이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연구의 과제일 뿐이다. 신지학을 종교로 볼 수는 없지만, 고대의 철학이 종교와 관련을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와 관련을 맺고 있다.

신지학은 종교에 반하지 않는다. 종교를 해명할 뿐이다. 신성의 관점에서 무가치하고 신성을 훼손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불합리한 모든 것을 부정하며, 합리적인 것이라면 개개의 사항이나 혹은 전부를 받아들여 설명하고 강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도록 한다.

신지학은 이와 같은 가장 중요한 사항들에 대한 진실(이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진실의 위대한 체를 말한다)을 보여준다.

신지학은 모든 다양한 종교에 대해서 고려하고 각각의 종교에서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신앙의 조항들이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선량한 사람이라면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자질을 계발하고 그리고 어떤 악을 피해야하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처럼 실제적인 가르침에 있어서는 힌두교와 불교, 조로아스터교와 회교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가 똑같이 가르친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신지학을 우주에 관한 지성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지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지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다. 그것은 명백한 과학으로 연구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향상시키고자 의문을 품고 수고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실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져 온 바로는 신지학은 자연에 관한 위대한 사실로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우주 한 모퉁이에 대한 개략적인 도식이다.



신지학이 알려지게 된 경로

이러한 도식이 알려지게 된 경위를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러한 지식을 발견한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발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 세계적으로 특정한 어떤 곳에서 일시적으로 잊혀진 적은 있었을지라도 언제나 인류에게 알려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신의 계획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고도로 진화한 사람들이 늘 있었다. 그들은 특정한 어느 한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된 나라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제자가 있었다. 세상에는 광범위한 원리가 언제나 알려져 있었고 제자들은 그 광범위한 원리를 이끌어낸 특별한 근본 법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도로 진화한 사람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신지학의 가르침은 그러한 인물들의 영감을 소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서양세계에 공표한 것이다.

때때로 무지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진실은 이미 오래 전에 공표 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지식의 소유자들이 부당하게 침묵을 지킴으로 세상으로부터 이 지식을 은폐시키려 했다고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붓는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 지식은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발견될 수 있다. 서구에서는 이제 와서야 겨우 이러한 지식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서 유럽 전역은 극단적인 미신 속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혼미함과 편협한 맹신에 대해서 반발이 일어나자 그 반동으로 무신론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또 다른 맹신과 편협함일 뿐이다. 이제 겨우 우리들 중의 몇몇 겸손하고 도리를 아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시인하고 최근에서야 참다운 지식을 얻기 위한 탐구를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이성적인 탐구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신지학 협회는 이들이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위대한 진리를 읽고 배우고 내적으로 숙고할 수 있도록 대중적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협회의 임무는 그런 가르침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도록 제시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적어도 자신들의 말에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불쾌한 영원의 유죄선고를 내리는 부족하고 교만한 선교사와 같은 환상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자신의 길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이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에 대한 앎은 우리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보다 수월하게 견딜 수 있게 하고 죽음에 편안하게 직면하게 한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것은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바램일 뿐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개요는 수 천년 동안에 걸쳐 널리 알려져 왔으며 지금도 알려져 있다. 자부심에 찬 서구의 사람들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며, 우리들 앞에 그런 지식의 단편이 제시되면 비웃는다.

다른 모든 과학과 마찬가지로 혼에 대한 과학도 자신의 전 생애를 그 지식을 탐구하고자 바친 사람만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완전히 알고 있는 사람을 아데프트라고 부른다. 그들은 완벽한 관찰력을 얻기 위한 내적인 힘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오컬트적인 연구와 현대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연구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과학적인 연구에서는 모든 에너지를 그 수단과 방법을 향상시키는데 투여하지만, 오컬트적인 연구에서는 관찰자를 발전시키는데 중점을 둔다.



관찰 방법

이러한 것을 계발시킬 수 있는 자세한 사항을 설명하려고 하면 이러한 입문 소책자로는 감당할 수 없다. 신의 전체적인 도식에 대해서는 다른 신지학 저서에 이미 충분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만 전적으로 진동의 문제라고만 언급하겠다.

외부 세계에서 사람에게 전달되는 정보는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오감의 진동을 통한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오감 외에 어떤 감각에 민감하다면, 그는 보통 사람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즉, 흔히 말하는 천리안이 되는 것이다.

천리안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의 시각보다 조금 더 확장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묘한 진동에 보다 더 민감해지면 그렇게 계발된 여러 가지 기능을 통해 그의 의식은 보다 고차원적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되면, 비록 실제로는 이미 알고 있는 세계의 새로운 부분일 뿐이지만, 그의 눈앞에 보다 정묘한 물질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자기 주변에 있는 거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에 대해서 평생동안 배우게 된다. 비록 이러한 우주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끊임없이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기능을 계발하면, 그와 같은 세계를 과학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되고 그런 관찰을 반복할 수 있으며 타인의 관찰과 비교하고 정리해서 법칙과 추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런 모든 일은 한 번이 아니라 수 없이 여러 번 반복되어 왔다. 필자가 앞서 말한 아데프트는 이러한 것을 가능한 최대한으로 행하여 왔었으며, 우리 신지학도들도 이러한 방법을 따라 많은 노력을 해왔다. 우리들이 탐구한 결과는 아데프트에 의해 주어진 지식을 증명할 뿐 아니라 그것을 상당히 보완해주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게되면, 가장 깊은 흥미를 자아내는 전적으로 새로운 거대한 지식의 체가 우리에게 열린다. 그렇게 되면 인생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서서히 해결되고 신비롭게 느껴졌던 많은 것들이 명확해진다.

지금까지는 아래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분리되어 연결되지 않은 파편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 때는 진실의 작은 부분만을 보았기 때문에 신비롭게 느껴졌지만 위에서 바라보게 되면 거대한 전체의 일부분으로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논쟁을 일삼아왔던 많은 의문들, 예를 들면 '인간은 사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하는가'와 같은 문제가 일시에 해결된다. 이러한 지식은 또한 지금까지 교회에서 설명할 수 없었던 천국, 지옥, 연옥 등에 대한 참다운 설명을 해주고 이치에 맞고 질서정연한 신의 계획을 제시함으로서 우리의 무지를 제거하고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내게 해준다.

이제부터 이러한 신의 계획을 설명해 보겠다.



2.일반원리



신지학에 관한 이 논술을 가급적이면 분명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필자의 희망이므로 모든 점에서 개략적인 원리만을 제시하겠다.

특정한 세부사항에 관하여 자세히 알고자 하는 학도는 큰 줄기를 담고 있는 책이나 특정 주제에 관하여 쓴 논문을 참조해주었으면 한다. 본인은 이 작은 논문의 뒷부분에 이런 매력적인 체계에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학도들이 참조할 수 있는 서적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우선 여기서는 신지학 학습의 결과로 인해 인도되는 광범위한 일반적 원리에 있어서 가장 현저한 특징부터 시작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믿을 수 없거나 자신이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개념과는 전혀 상반된 것을 경험하게 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제시하는 것은 이론(형이상학적인 가설이나 자기 자신만이 경험한 종교적 견해)이 아니라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들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러 번 실증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사에 스스로 시간과 노력을 경주하겠다는 어떤 개인에게는 직접 실증 될 수 있는 사실임을 주장하고 싶다.

필자는 독자들에게 알약처럼 한 입에 먹어 삼켜야 하는 어떤 신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학습해야할 체계, 그리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을 제시하고자 할 따름이다.

필자는 독자에게 맹목적 신앙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신지학의 가르침을 하나의 가설(필자에게는 살아있는 사실이지만)로서 받아들이기를 바랄 뿐이다.

이 가르침이 이전에 보고 알고 있었던 것보다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고 사고하는 자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에 답을 해 준다면, 그에 대한 연구를 더 추구하게 될 것이며 필자 자신이 얻은 것보다 더한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필자는 바라며 확신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다른 체계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전혀 문제없다. 그 사람은 아직은 합의 할 수 없는, 한 무리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조에 대하여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머지 않아 합의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때가 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그도 알게 될 것이다.



세 가지의 위대한 진리

신지학 초기 문헌 중에 세 가지 진리에 대해서 적어놓은 것이 있다. 그 세 가지 진리는 절대적이며 결코 상실될 수 없는 것이지만 언제나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생명 그 자체만큼이나 위대하고 가장 순수한 사람의 마음처럼 꾸밈이 없다.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일반 원리 중에 가장 위대하다. 달리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말은 없다.

다음에 나는 이러한 원리에서 당연히 끌어내어야 할 몇 가지 결론을 이야기하고, 세 번째로는 이러한 분명한 지식에서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유익한 결과 중 보다 눈에 띄는 몇 가지 문제들을 논하고자 한다.

나는 대략의 개요에 대해서 일일이 짚어가면서 이 작은 개론서에 나와있는 기본적인 내용을 최대한 설명하겠다.

1. 신은 존재하며 선하다. 그는 생명을 주는 위대한 자이며, 우리들 안에도 그리고 바깥에도 거주하고 계신다. 결코 죽지 않으며 영원히 이롭게 하는 존재로서 들을 수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인식하고자 열망한다면 느낄 수 있다.

2. 인간은 불멸의 존재이며, 그 미래는 무한히 영광스럽고 빛난다.

3.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절대적 정의로 이루어진 지고한 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이 판단하는 진실과 더불어 있으며, 자기 스스로 영광이나 어둠을 가져오며, 보상과 벌을 부과하는 것도 자기 스스로 행한다.



필연적 결과

이러한 위대한 진리에는 부차적인 설명이 따른다. 그것을 처음부터 열거해 보겠다.

1. 외양에 상관없이 모든 사물은 명백하고 지적으로 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아무리 부적절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정확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해를 하고 난 후 바라보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를 방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우려는 것임을 알게 된다.

2. 신의 전체 계획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임을 알고 난 다음에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명확해진다. 바로 그 계획을 이해하는 것이다.

3.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무는 이러한 계획에 지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위대한 두 번째 진리로부터 다음과 같은 것들이 따른다.

1. 영혼이야말로 인간의 참다운 면이고 육체는 단지 부속물일 뿐이다.

2. 그러므로 인간은 영혼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하위 측면이 아닌 상위 측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해야 한다.

3.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생은 진정하며 더 넓은 인생에서 본다면 단지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4.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하나의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5. 인간은 광대한 진화의 여정을 걸어왔다. 그에 대한 연구는 매혹적이며 흥미 있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6. 앞으로 걸어갈 진화의 길 또한 장엄하다. 그에 대한 연구는 더욱더 매혹적이며 더 많은 것을 시사할 것이다.

7. 불변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모든 영혼이 마지막 성취를 이룬다는 것이다. 비록 진화의 도상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결국에는 이루고야 만다.

위대한 세 번째 진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모든 생각, 말, 행동은 명백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보이지 않게 부과된 보상이나 처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의심의 여지없이 원인과 결과에 따른 관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이다.

2. 이처럼 신성한 법칙을 치밀하게 연구하는 것은 의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그 법칙에 적용시키면서, 다른 위대한 자연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이 법칙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3.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조절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만 지적으로 자신의 삶을 인도해서 이 법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

이 지식에 완전히 동화되면 삶의 양식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그로 인해 생기는 모든 결과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자로서는 이러한 변화로 인해 생겨나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읽는 독자들이 나름대로 생각해서 결과로서 의심의 여지없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야가 수 없이 많이 첨가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애매한 지식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신이 믿는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모호한 믿음은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에 전혀 쓸모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진리를 여러 자연의 법칙처럼 믿는다면(불이 타는 것과 물에 빠진다는 것을 믿듯이) 우리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왜냐하면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는 믿음은 너무나 실제적이므로 이 법칙에 맞춰 살게 되기 때문이다.

불이 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주위를 기울이며, 물에 빠지면 익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깊은 물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자연의 법칙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은 매우 확고하고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식과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증명되기 때문이다.

신지학도가 가지는 신념도 그와 마찬가지로 실제적이고 확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래에 기술한 결과를 찾을 수 있었다.

1. 우리는 삶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며, 왜 살아야 하는 지도 알게 된다. 삶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그 삶이 가치 있게 되는 것이다.

2. 우리 자신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알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스스로 향상시킬 수 있는 지도 알게 된다.

3. 최선을 다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되고, 우리가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게 된다.

4. 매사를 보다 넓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소하고 전적으로 개인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지 않는다.

따라서

5. 삶의 고난은 우리들에게 더 이상 대단한 것이 못 된다.

6. 우리에게 처해진 환경이나 운명에 대해서 더 이상 부당하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

7. 죽음의 공포에서 전적으로 해방된다.

8.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직면하여 비통함을 덜어준다.

9. 사후의 삶에 대하여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관점을 갖게된다. 우리의 진화에서 죽음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게 된다.

10. 우리 자신, 혹은 친구들에 대한 종교적인 공포(가열, 영혼의 구제에 대한 공포)와 걱정에서 해방된다.

11. 미래의 운명과 같은 불확실함에서 오는 고통에서 해방되어 완전한 평정과 완전한 편안함에서 살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을 보다 자세하게 다루되 될 수 있는 한 간결하게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3.신 성



신의 존재를 가장 우선시하며 가장 위대한 원리로 여긴다면, 수 없이 많이 남용되었지만 아직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이 단어를 정의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개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무지로 인하여 좁은 범위로 한정되어버린 원래의 훌륭한 개념(비록 실제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지만), 즉 종교의 창시자들에 의해 주어진 개념을 복원시켜야 한다.

또한 무한한 존재로서의 신과 이와 같은 지고의 존재가 드러나서 우주를 진화시키고 지도하는 현현한 신을 구분해야 한다. 이처럼 제한된 현현에만 "인격적인 신"을 적용시킬 수 있다.

신은 인격의 제한을 넘어서 있으며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모든 것을 통해서" 존재한다. 진정한 의미로 모든 것이며 무한하고 절대적이며 전체이다. 그리하여 "그가 존재한다"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모든 실질적인 목적을 위해서 놀랍고 영광스러운 그(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서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의 구현, 즉 위대한 지도력 혹은 우리 태양계의 신(이를 로고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상으로 더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이는 진정하며 우리가 신이라고 예측해서 들어온 모든 것(선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때때로 신성 모독적인 측면에서 말하듯 신의 특성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악덕을 부여할 수는 없다. 신은 모든 사랑, 지혜, 권능, 인내, 연민, 전지, 전능, 편재라 말해지며, 우리 체계의 로고스에게는 이보다 더 많은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한다"라는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 이는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신은 당연히 로고스이다.

우리는 그가 있어 주었으면 하고 막연히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존재를 믿음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태양이 빛나는 것을 알듯이 그저 알뿐이다.

훈련을 받아 투시력이 발달된 사람이라면 이처럼 거대한 존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단지 인간의 발전 도상에서는 그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 공부했듯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곳에 있는 그의 행동과 그의 목적을 통해 우리는 그가 존재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찾는다. 사실 그것은 이 세계보다 상위의 측면일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종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접하게 된다. 일반적인 독자는 이 주제에 관해 설명한 많은 진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진리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중요하며 빛나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태양 로고스의 사역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삼중구조를 지니고 있다. 종교에서 우리들에게 이미 오래 전에 가르쳐주었듯이 셋이면서 하나이다. 현 단계의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지능으로 파악할 수 있는 명백한 신비에 대한 많은 설명은 앞으로 언급하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우리 안에도 존재하며 밖에도 존재한다. 혹은 다른 말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신성의 에센스 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말은 또 하나의 위대한 진리이다. 비록 모든 것에 눈멀고 오로지 외부의 낮은 세계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견이 분분하지만, 삶의 보다 높은 측면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도라면 이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혼과 그 다양한 매체의 구성에 대해서는 제 2의 진리라는 제목 하에서 논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인간의 본성은 신성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과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신성한 차원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신의 도식(圖式)

여기서 제시하는 것 중에서, 첫 번째 위대한 진리에서 도출되는 첫 번째 추론만큼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둘러보면, 많은 폭풍과 억압, 슬픔과 고통을 접하게 된다. 마치 선을 누르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명백한 혼란이 실제로는 예정된 진화 과정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세계의 투쟁으로부터 나오는 먼지의 구름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리고 풍부한 지식과 내적 평화의 유리한 고지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그것은 진리이다.

그러면 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기계의 참된 작용을 명백히 알게 되며, 진보의 흐름에 역행해서 범람하는 악은 단지 작은 소용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소용돌이는 표면상 아주 작은 것으로 점점 뒤로 물러날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강은 수로를 따라 수면을 유지하면서 소용돌이들을 간직한 채 꾸준히 정해진 길을 흘러간다.

마치 이와 같은 위대한 진화의 흐름은 규칙대로 바르게 움직이며 작용하고 있다. 그것이 마치 무서운 폭풍우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표면에서 파도치는 물결 때문이다.

힌튼(Hintons)의 저서인 「과학적 로맨스(Scientific Romance)」 제 1권 18∼24페이지를 보면 또 다른 유추에 대해서 매우 훌륭하게 서술되어 있다.

우리들의 세 번째 위대한 진리가 말해주듯이, 진실로 절대적인 정의가 우리들 모두에게 나누어져 있어, 어떤 경우에 처해 있다하더라도 그 상황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일 뿐, 타인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보다 훨씬 많은 것도 알 수 있다. 즉, 진화의 법칙 아래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을 개발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이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닐지 모르나,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며, 그 환경은 각자의 행적(이것으로 인해 때때로 가혹한 제약이 가해진다)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각자의 발전에 가장 적합한 것이다.

그 환경으로 인해 모든 종류의 어려움이 가해질 수도 있다. 그것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배우고 내적으로 용기, 결의, 인내, 불굴의 의지 및 기타 결여된 자질을 계발시키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의 힘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신들의 뜻에 역행한다고 하지만 사실,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 모든 것은 그들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교하게 짜여진 것이다.

신의 계획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몫일 뿐, 그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비록 사적인 흥미로 인한 것일지라도, 특정한 조건 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적응해야 한다.

인생의 목적이 이타적으로 되어 갈수록 다른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서, 이해는 늘 필수적인 문제이다.

그러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남을 돕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낼 수 있게 된다면, 지성적으로 이에 협조해야 하는 일은 의문의 여지없이 인간 진화를 위한 계획의 일부분이다.

이와 같은 신의 계획은 매우 훌륭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일단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아무리 사소한 부분에 참여하게 될지라도 전력을 다해 그 일에 동참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일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주제에 관하여 보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독자는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여사의 「비교적 기독교 신앙(Esotieric Christianity)」과 「고대의 지혜(Antient Wisdom)」, 그리고 필자의 소책자인 「기독교 신조(The Christian Creed)」를 참조하라.

이러한 개념에 대해 빛을 던져주는 것은 그리스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미드(G. R. S. Mead)의 「오르페우스(Orpheus)」와 그노시스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잊혀진 신념의 단편들(Fragments of a Faith Forgotten)」이 있다.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물을 명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됨에 따라,
잘못이 저질러지고 있는 그 밑바닥에는
올바른 뿌리가 있다는 것을.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은 좀처럼 모르지만,
모든 슬픔에는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다.
태양이 아침의 문을 열어주는 것을 알듯이
모든 것은 최선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알게 되었다.
밤이 어둠의 장막을 드리우듯이,
악으로 빚어진 모든 행동은
언젠가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심적인 불안감이 엄습해 오고
성장은 고통을 수반할 지라도
영혼은 구원된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것은 최선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알게 되었다.
위대하고 영원한 계획 속에 실수란 없음을.
인간이 마지막 선에 다다르는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은 함께 일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영혼이 숭고하고 영원한 탐구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나는 지상을 돌아보며
"모든 것은 최선이었다"라고
말할 것임을.

(이 시는 미국의 어떤 신문에 익명으로 게재된 것이다.)



4.인간의 구성


이 나라(영국)에 만연해 있는 놀라운 물질주의를 일상생활에서 쓰는 몇 가지 표현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것은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람이 혼을 가지고 있다', 혹은 '혼을 구제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사람들이 물질 육체를 참다운 인간으로 보고 혼은 단순한 부속물이나 육체의 소유물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막연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재 서 있는 수준에서 한 발짝도 깊이 들어가지 않으며 그와 같은 존재물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혼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서는 더욱 더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처럼 가련하고 무지한 상황에 그대로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외부의 세계에서조차도 인간이 육체를 떠나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에 육체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 수 있으며, 죽은 후에는 육체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자신을 육체라고 생각하는 이 불합리한 환상을 완전히 불식하기 전까지는 결코 참다운 진상을 음미할 수 없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육체란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조잡한 질료와 연관을 맺고 있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더욱 깊이 탐구하면 더 섬세한 질료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현대 과학에서 모든 질료에 침투해있다고 인정하고 있는 에테르뿐만이 아니라 에테르에 침투해 있는 훨씬 더 섬세한 질료들이다.

독자들은 당연히, 인간이 어떻게 해서 그처럼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극도로 세분화되어 있는 질료의 존재를 알아낼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낮은 질료를 인식하는 방법과 마찬가지의 방법이다. 즉, 진동을 통해서이다. 인간은 자신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섬세한 질료를 통해 그와 같이 섬세한 것으로부터 오는 진동을 감지할 수 있다.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질료 중 보다 조잡한 것은 조잡한 세계를 인지하고 그것과 교신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섬세한 질료는 조잡한 질료로는 인지할 수 없는 미세한 세계와의 통신 수단을 위한 매체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성 바울(St. Paul)은 "자연의 몸과 영적인 몸"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더 나아가 이는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판단 없이 동의어로 쓰고 있는 혼(soul)과 영(spirit)을 구분해서 말한 것이다.

머지 않아 인간이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혼 안에는 영이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혼은 농도가 다른 여러 가지 다양한 매체를 가지고 있으며 육체란 그 중에서 가장 낮은 농도의 매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다양한 매체들은 대응하는 각각의 질료의 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일련의 연속된 세계들이 서로 상호 침투해서 존재하며 사람은 그 각각의 세계에 속하는 체를 가지고서 그 세계를 관찰하고 그 안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점차로 그러한 다양한 체를 이용하는 법을 배우고 그러면서 그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위대하고 복잡한 세계를 보다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상, 여러 개의 내적인 세계는 그와 같은 위대하고 복잡한 세계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들은 이전에는 신비한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던 여러 가지 사실을 차츰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육체는 옷과 같은 것으로 벗거나 바꾸어 입더라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은 결코 형이상학적인 추측이나 신앙에서 말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는 신지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실험을 통해서 알려진 과학적인 사실일 뿐이다.

이러한 의문으로 인한 가설에서 나오는 정확한 설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여러 학도들에 의해 되풀이되어 온 관찰을 직접 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신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실증에서 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인 세계 혹은 성격이 다른 여러 차원을 우리는 계(界, plane)라고 부른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물질계"라고 하는데, 이 물질계 안에는 기체와 여러 등급의 에테르도 포함된다.

이러한 물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단계 다음의 계를 "아스트럴계"라고 부른다. 이것은 중세의 연금술사들(이들은 이 단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에 의해 사용된 용어인데 여기에서는 이 명칭을 그대로 차용했다.

아스트럴계 안에는 더욱 미세한 질료의 계가 있는데 이 계는 "멘탈계"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계를 구성하는 질료가 인간들이 흔히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상위의 많은 계가 있으나 그러한 명칭을 일일이 언급함으로서 독자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현현해 있는 하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세계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늘 명심하라. 사실상, 그 모든 세계는 정확하게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현재 우리의 의식은 물질 두뇌를 통해 작용하고 있으며 물질 두뇌에 의해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물질 세계만을 인식하지만 그것도 일부에 국한될 뿐이다.

우리들은 보다 상위의 매체에 의식을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물질계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상위의 매체에 해당하는 질료로 이루어진 세계를 보게 된다.

본질에 있어서는 모든 질료가 똑같다는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얼음과 수증기가 본질에 있어서 똑같듯이 아스트럴 질료와 물질질료도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단지 다른 상황에 놓여있을 뿐이다. 충분히 세분되고 적당한 속도로 진동시켜준다면 물질 질료는 아스트럴 질료가 되고 아스트럴 질료는 멘탈 질료가 된다.



참다운 인간

그렇다면 참다운 인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로고스로부터 나오는 발산이며 신성한 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광이다. 그의 내부에 있는 영(spirit)이야말로 진정한 신성의 에센스이다.

그리고 그 영은 자신의 혼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옷은 영을 에워싸고 개별화시켰다. 그리하여 우리의 제한된 시각으로는 영이 한동안 신성의 생명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영혼이 형성된 기원과 영을 감싸게 된 유래에 대한 이야기는 아름답고 흥미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입문서에서 다루기에는 벅찬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상세히 다룬 여러 신지학 서적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신성한 삶은 처음에 세 가지 양상으로 시작되었고, 영혼의 형성이야말로 로고스가 질료로 하강하는 위대한 희생의 극치이다. 우리는 이를 화신이라 부른다.

이리하여 어린 영혼이 태어나는데 "신의 이미지로 만들어졌다"라는 말 그대로 세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신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측면으로 현현한다.

또한 신이 질료로 하강하는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여 진화의 과정을 밟는다. 신성의 불꽃 안에는 모든 잠재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가능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세월동안 진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인간의 잠재된 가능성이 진화하기 위한 정해진 과정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충격에 대응해서 진동하는 것을 배우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인간이 자신을 발견하는 수준(상위 멘탈계)에서는 그러한 미세한 진동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보다 거칠고 강한 진동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잠재되어 있는 감각을 각성시키면 조금씩 민감해져 마침내는 모든 수준의 진동에 반응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 진화의 물리적 양상이다. 그러나 모든 진동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을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완전한 공감과 애정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진화한 인간, 즉 아데프트, 영적 스승 그리고 그리스도의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에 다다르기까지, 완전한 인간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내적 자질들을 개발시켜야 하는 것이야말로 이 물질 안에서 보내는 긴 시간동안 이루어야 할 진정한 일이다.

본 장에서는 지극히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 단지 피상적으로 다룬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더욱 깊이 연구하고자 하는 학도는 다음과 같은 신지학 서적들을 참조하길 바란다.

인간의 구성에 대해서는 베산트 여사의 저서 「인간과 육체(Man and his Bodies)」, 「자아와 덮개(The Self and its Sheaths)」, 「인간의 칠중 원리(The Seven Principles of Man)」, 그리고 본인의 저서인 「인간,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Man Visible and Invisible)」(이 책에는 투시가가 본 인간의 여러 가지 매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이 있다. 내적 자질들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투시(Clairvoyance)」를 권한다.

혼의 형성과 진화에 대해서는 베산트 여사의 「혼의 탄생과 진화(Birth and Evolution of the Soul)」, 시네트 씨의 「혼의 성장(Growth of the Soul)」 그리고 본인의 저서 「크리스트교의 신조(Christian Creed)」와 「인간,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Man Visible and Invisible)」을 참조하라.

인간의 영적인 진화에 관한 저서로는 베산트 여사의 「외부의 뜰에서(In the Outer Court)」와 「제자도(The Path of Discipleship)」 그리고 나의 저서 「보이지 않는 조력자들(Invisible Helpers)」이 있다.



5.윤 회


시초에 혼은 보다 미세한 운동에는 영향을 받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거운 진동을 전할 수 있는 보다 조잡한 질료로 만들어진 옷을 둘러야만 한다. 그래야만 멘탈체, 아스트럴체, 육체를 계속해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탄생 혹은 윤회이며 물질적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삶이 계속되는 동안, 온갖 종류의 경험이 육체를 통해 거쳐간다.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교훈을 얻고 자신의 내부에 있던 자질들을 개발시켜나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응축되어, 걸치고 있던 옷들을 차례로 벗는다. 맨 처음에 벗어야 할 것이 물질 육체이다. 이와 같이 물질 육체로부터 물러나는 것을 우리들은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무지함으로 인한 추측에서와 같이, 죽음이 활동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다.

죽음이란 단지 한 가지의 노력으로부터 철수하되 그 결과물을 가지고 철수하는 것이다. 일정 기간의 휴식이 지나고 나면 같은 종류의 또 다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보통 일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미 말해지는 바와 같이, 진정하며 보다 폭 넓은 세계에서 보면 단지 하루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어떤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보낸 하루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껏해야 70이나 80년 정도 지속되는 짧은 인생으로는 이 놀랍고 훌륭한 세계에서 배워야만 할 모든 것을 충분히 배울 수가 없다.

신은 주어진 시간 안에 그 모든 것을 배우기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번 다시 돌아와서 인생이라고 하는 학창시절을 다양하게 거쳐야만 한다.

모든 교과를 다 배우기 전까지는 매번 올 때마다 다른 학급과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기초교육이 끝나고 상급반으로 진학을 하면, 보다 영예로운 과정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세속적인 과정의 학교교육 자격증을 획득한 후에 주어지는 참되고 신성한 삶의 과정이다.

이것이 윤회, 혹은 재생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고대 문명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대다수의 인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흄(Hume)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죽지 않는 것은 태어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영혼이 불멸이라면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했어야 한다. . . . 그러므로 윤회는 철학에서 경청할 수 있는 유일한 체계이다."1)

막스 뮐러는 인도와 그리스의 영혼의 재생에 대한 이론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학설 밑에는 무언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을 최대한 신학적인 용어를 배제해서 설명한다면 가장 가혹한 철학적 시험을 견디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2)

그가 사망한 후 출간된 그의 마지막 저술에서 이 위대한 동양학의 석학은 이 교리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면서 이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헉슬리(Huxley)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진화에 대한 교리와 마찬가지로 윤회도 이 현실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유추에 의해 제시되는 훌륭한 논쟁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3)

그러한 연유로 현대의 저술가들은 고대의 저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이 가설을 가장 진지하게 고려할만한 과제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을 무지한 자들에 의해 파생된 이론, 즉 인간의 영혼에 이르기까지 진화한 혼이 다시 동물로 환생할 수 있다는 이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퇴화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일단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되면, 인간의 혼은 신지학 저술에서 원인체(causal body)라고 말하는 체 안에 거주하기 때문에 어떠한 실수를 저질렀다해도, 혹은 주어진 기회를 잘못 이용했다해도 더 낮은 자연계로 후퇴하지는 않는다.

만약 학교 생활에 태만했다면, 한 과목을 완전히 습득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전체적 진보를 지연시키게 될 것이다. 몇 해전에 이 교의의 본질이 어떤 잡지에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발표된 바 있다.

"한 소년이 학교에 갔다. 그는 아주 어렸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뿐이었다. 선생님은 가장 낮은 학급에 아이를 넣고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살생하지 마라'. '남의 것을 훔치지 마라'. 그는 살생하지는 않았지만, 훔쳤다(그는 포악했다). 하루가 다 지나자(수염은 하얗게 변하고 밤이 찾아왔다) 선생님(그는 신이다)은 말했다.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배웠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에 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아직 다 배우지 못했으니 내일 다시 오너라'.

다음 날, 소년은 다시 왔다. 그러자 선생님(그는 신이다)은 소년을 좀 더 상급반에 넣고 과제를 주었다.

'생명이 있는 것을 해치지 말아라'. '훔치지 말아라'. '남을 속이지 말아라'. 그래서 생명이 있는 것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남의 것을 훔치고 다른 이들을 속였다.

하루가 다 지나자, 그의 수염은 하얗게 변하고 밤이 찾아왔다. 그의 선생님(그는 신이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비심을 배워야 한다. 다 배우지 못했으니 내일 다시 오너라.'

또 다시 아침이 찾아오고 어린 소년은 다시 왔다. 선생님(그는 신이다)은 전보다 더 높은 반에 넣고 다음과 같은 과제를 주었다.

'훔치지 말라'. '속이지 말라'. '탐내지 말라'. 그는 훔치지 않았지만 속이고 탐냈다.

그리고 하루가 다 지나자 그의 수염은 하얗게 되고 밤이 찾아왔다. 선생님(그는 신이다)은 말했다.

'훔치지 않는 것은 배웠지만 다른 것은 배우지 못했구나. 얘야, 내일 다시 오너라.'

이것이 내가 세상이라는 책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들의 얼굴과 별들로 가득한 하늘을 펼쳐서 읽은 것이다."4)

나는 이 자리에서, 윤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논쟁거리들을 제시해서 그들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겠다. 그에 관해서는 필자보다 훨씬 뛰어난 문장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집필한 신지학 저술에 이미 충분히 나와 있다.

나는 단지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인생은 윤회라는 가설이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윤회라는 이 위대한 진리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만족할만한 가설이 나올 때까지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다른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식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증명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선량하고 진실한 사람들은 신이 전능하며 사랑 그 자체라는 사실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조화시킬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주변에 만연해 있는 침통한 슬픔과 고뇌를 바라보며 그것은 신이 전능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러한 슬픔과 고뇌를 미리 예방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아니면 신은 우리가 생각하듯 사랑 그 자체가 아니거나 아예 인간사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라고 느낀다.

신지학은 신이 전능하며 사랑 그 자체라는 믿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윤회라는 기본 교의를 통해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조화시킬 수 있다.

신의 완벽한 힘과 사랑을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이 유일한 가설은 깊게 들여다 볼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삶이 처음이 아니라 이전에 거친 여러 생의 체험을 통해 원시인의 상태에서부터 현재의 위치에 이르렀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이러한 과거의 여러 생에서 우리들은 선행과 악행을 모두 행하였으며 그러한 행위 하나 하나는 예외 없이 냉정한 정의의 법칙에 따라 적절한 결과를 가져온다. 선행에는 언제나 행복과 더 좋은 기회가 따르고 악행에는 항상 비통함과 제약이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제약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거나 혹은 아직 영혼이 어리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견디어 내야할 슬픔이나 고통이 있다면, 그 슬픔과 고통의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운명은 그들이 이전에 한 선악의 행위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결과인 것이다. 만물은 신성한 법칙 아래 최후의 영광스러운 완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윤회라는 이 위대한 진실만큼이나 강한 반론에 부딪힌 다른 신지학의 가르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보다 더 우리를 격려하는 가르침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진보할 시간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만큼이나 완벽해질 수 있는 시간과 기회이다.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이 삶에서 수 없이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으며, 그러한 모든 고통과 슬픔을 또 다시 겪어나가야 한다는 제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유쾌한 것이든, 불쾌한 것이든 간에 움츠러들지 말아야 한다. 앞에서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윤회는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 이론은 우리를 상당히 격려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만약 그처럼 많은 전생을 보냈다면 어째서 단 하나의 생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대답은 간단하다.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아직도 차원이 낮은 한 두 가지의 외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외피를 가지고 전생의 삶을 기억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외피는 전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혼은 전생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속한 모든 계를 완전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생의 모든 기억은 혼에 저장되어 있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내적인 자질로서 표현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식을 낮은 차원의 매체가 아니라 영혼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하면 그가 걸어온 진실하고 광범위한 삶의 모든 역사가 마치 책처럼 그의 앞에 펼쳐지게 된다.

이 주제에 관한 전체적인 설명은 베산트 여사의 소책자인 「윤회(Reincarnation)」와 앤더슨 박사의 「윤회(Reincarnation)」 그리고 「고대의 지혜(The Ancient Wisdom)」의 윤회에 관한 장에 충분히 나와 있다. 특히 「고대의 지혜」에 나와있는 윤회에 관한 부분은 각별히 주의해서 읽어야한다는 것을 당부한다.



6.광범위한 전망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물질적 삶이라는 것은 학교 생활 중의 하루일 뿐이고, 우리들의 육체는 그러한 과정을 배우도록 적절하게 맞춰 입은 일시적인 옷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즉시 이 "교훈을 배우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이고 그 목적에서 이탈하고 있는 사람은 우매하게 보일 것이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부나 명예와 같이 지극히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그것이 단지 아이들의 놀이처럼 보인다. 그러한 것은 인간 본성 중 낮은 측면을 일시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하여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하는 무의미한 것이다.

신지학도는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보다 높은 측면에 시선을 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임을 알고 있기도 하지만 세속적인 것이 전혀 가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위 측면의 것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늘 높은 견지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하위 측면의 욕망과 감정은 주변에 짙은 안개를 드리워서 사물을 명확하게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비록 고차원적인 과정이 언제나 올바르다는 확신을 갖고 그 길을 따르려고 하지만 때때로 낮은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하는 강한 유혹과 마주쳐서 내면에서는 심한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성 바울이 "해야할 일은 하지 않고 안 해야할 일은 하게 된다"라고 말했듯이 "정신의 법칙에 반항하는 육체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우리 모두 느끼게 되는 이러한 내적인 갈등에 관해서 성실한 종교인들이 때때로 심각한 오해를 한다.

그들은 보통 이러한 주제에 관해 한두 가지의 이론을 받아들인다. 즉, 낮은 차원의 유혹이 외부에 있는 악마의 짓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악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함으로 해서 가슴속에 나약함과 사악함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이를 한탄한다. 이것 때문에 선한 많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불필요한 심적 고통을 겪는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선 마음 속에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저급 욕망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우리의 혼을 파멸시키고자하는 악마의 짓도 아니다. 악마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 실체가 있으며, 인간의 기본적인 생각에 의해 이끌려지고 그 생각의 작용에 따라 강화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실체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결코 영구적이지 않다. 그것은 악의를 가진 다른 사람들의 사념에 의해 형체를 갖게 된 인위적인 형상일 뿐이며, 그러한 실체를 만든 사람의 사념의 강도에 따라 생명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일정 기간의 존속 기간을 가진다.

하지만 우리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바람직하지 못한 유혹은 대개 다른 원인에서 온다. 사람이 화신해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질료로 만들어진 외피를 입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이것은 죽은 질료가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있는 충동이다(오컬트 과학에서는 죽은 질료란 없다고 가르친다).

우리들 자신보다도 훨씬 앞선 진화의 단계(너무나 앞선 나머지 우리들처럼 높은 단계의 질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 단계의 질료로 움직이고 있다)에 있는 생명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진보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퇴보로 여겨지는 보다 조잡한 물질과 거친 진동을 따라 내려오는 과정이다. 때때로 진정한 인간의 관심이 우리의 매체인 살아있는 질료와 충돌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때때로 이상하게 느끼는 내적인 심적 갈등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갈등을 시인들은 인간의 혼을 둘러싸고 있는 착한 천사와 나쁜 천사의 싸움으로 표현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아스트럴계(The Astral Plane)」에 설명되어 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언제나 선을 위하여 싸워나가고 있는 높은 차원의 힘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낮은 차원의 힘은 저차원의 매체로서 조절되지 않은 파편이며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 할만한 측면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통제되어야 하며 완전하게 극복해서 조화롭게 만들어야 하지만 이를 악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 또한 조화를 향해 움직이는 신성한 힘의 흐름이다. 단지 이 경우는 우리와 같이 위로 향하여 물질에서 멀어져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향해 아래의 질료로 내려가는 것이다.



7.죽 음


신지학의 진리를 이해함으로서 얻게 되는 중요한 결과 중에서 가장 실질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한 단순한 무지와 미신으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불필요하게 겪어온 비애와 공포 및 불행은 그 양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들 사이에 번져있는 죽음에 대한 그릇되고 우매한 신앙은 지난 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악을 끼쳤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신앙을 불식하는 것은 인류에게 크나큰 이로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과거의 생애 동안 철학적인 문제를 추구해오고 현재 신지학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체 없이 그와 같은 이로움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해 사람들은 죽음으로 인한 공포와 비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통해 진화의 계획에서 죽음이 차지하는 진정한 위치를 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삶의 종말, 공포스럽고 어두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입구로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죽음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의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념은 서양전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러한 개념 때문에 소름끼치는 공포가 수없이 많이 나타나서 거의 풍속으로 자리를 잡을 정도가 되었고, 분별을 가질만한 사람들조차 비판 없이 답습해왔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며 불길함을 나타내는 모든 장치들(장례식 참례자, 깃털, 검은 벨벳과 비단 양복, 검은 테를 친 부고 용지 등)은 단지 이러한 것을 차용하는 사람들의 무지 이외에 아무 것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죽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며 그러한 허구를 유치하고 어리석은 놀이로 간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명복을 비는 사람들의 비통함은 친구와의 이별을 슬퍼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단지 이기심에서 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일시적인 이별의 쓰라림은 피할 수 없겠지만, 자신의 고통이 타계한 친구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이별의 고통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죽음은 이전에 모든 사람에게 여러 번 찾아왔었기 때문에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무시무시한 공포의 왕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우리들을 영광스럽고 고차원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황금의 열쇠를 품고있는 천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올바르고 합리적인 것이다.

그는 죽음 이 후에도 삶이 계속되고 있으며, 육체의 상실은 한 가지 의복을 벗어 던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복을 걸치고 있던 사람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죽음이란 단순히 반 이상 물질계에 치우친 생활에서 전적으로 아스트럴적인 세계, 즉 훨씬 상위의 세계로 발전하는 것임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비록 일시적으로는 헤어짐에 대해 커다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만, 죽는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커다란 이로움이라는 것을 이해하며, 그러한 이별조차 외견상의 것이지 진정한 이별이 아님을 안다.

그는 잠을 자면서 일시적으로 육체의 옷을 벗어 던지면 소위 죽었다고 하는 자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며 그들 곁으로 가서 예전처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이 세계가 하나이며 신성한 법칙은 물질적인 눈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모두에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는다.

어떤 세계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또한 베일 너머에서 발견될 어떤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도 않는다.

신지학 탐구자들의 저작을 통하여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전체를 명료하고 충분히 도식화하여 이 물질계의 생활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자신의 진화에 적절한 시기가 도래하면 주저함 없이 언제라도 그곳으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고차원적인 생활에 대한 다양한 단계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그러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서적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인간이 죽어 가는 상황이란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서 만들어놓은 정확한 조건이라고 말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지상에서 생활하는 동안 살아있는 실체로서 각자가 길러온 생각과 욕망은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에너지를 주입한 사람의 주위를 떠돌며 작용을 가한다.

그와 같은 생각과 욕망이 몹시 완고하고 사악한 성격의 것이었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상념들은 그야말로 소름끼치도록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아스트럴 세계의 거주자 중에서 그러한 경우는 극소수에 해당한다.

최악의 경우 보통의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세계는 죽고 나면 쓸모 없이 되어 완전히 힘을 상실해버리고 모든 이성(理性)적인 관심은 전적으로 사라진다. 이것은 이 지상에서의 방종한 생활과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남에 대한 험담으로 보낸 생에 대한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러한 권태로운 생활에는 특정한 조건에서의 고통이 추가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생활할 때, 격렬한 육체적 욕망에 지배당했다면(예를 들어 식욕이나 성욕, 또는 폭음을 일삼는 경우), 사후 연옥의 고통을 많이 축적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물질 육체를 잃더라도 그러한 욕망과 열정까지 잃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욕망과 열정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생하다. 아니, 오히려 행위로 이행되어야 하는 조잡한 물질의 무거운 분자가 없어지면 욕망과 열정은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 사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이러한 욕망과 열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힘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충족되지 않으며 충족될 수 없는 고통으로 남게 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러한 욕망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스스로 소진해 버리기 때문에 영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겪게 되면 지옥에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무서운 운명이다. 그러나 여기에 명심해두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그러한 운명은 자신이 자초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강도와 지속되는 기간도 자신이 정한 것이라는 점이다. 지상에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러한 욕망이 어떤 강도에 이르도록 두었고 이제는 자신이 키워놓은 욕망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욕망을 제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만약 육체를 가지고 있었을 때, 그러한 욕망을 억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더라면 극복하기는 그만큼 쉬웠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대항해서 싸워야할 괴물(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만들어놓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 힘은 자신이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것이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일 이와 같은 고통을 피하거나 혹은 이러한 하급 욕망을 서서히 제거하지 않고 아스트럴 세계에 들어간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욕망에 지배당한 채 또 다른 육체로 들어가 생을 시작하게 되어 주정뱅이나 호색가 또는 수전노로 태어날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러한 욕망은 조절해야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사람에게 가르칠 수가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조절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해져 그 사람의 몸과 영혼 모든 것을 완전히 장악한 후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삶은 이미 내던져진 상태고 다른 기회는 잃어버린 후가 된다. 그렇게 되면 출구도 없는 악순환으로 들어서게 되고 진화는 상당히 지연된다.

신의 계획에는 모자람이 없다. 아스트럴 삶을 살면서 열정을 다 소진시키고 나면 다시 물질적 존재 상태로 돌아간다. 물론, 열정에 의해 탐닉될 수 있는 여지는 늘 도사리고 있다. 이 새로운 삶을 위해 자기 스스로 이전의 아스트럴 삶에서 그와 같은 열정을 이미 표현했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답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아, 즉 진정한 인간은 가혹한 교훈을 얻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낮은 측면이 현현되어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또 다시 추락하고 마는 예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내부에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올바르고 현명한 부모를 얻어 선한 측면을 개발하고 악한 측면을 억제해서 씨앗이 발화하지 않도록 퇴화시킨다면, 다음의 생에서는 악의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인간은 악을 제어하고 정복하며 그 자리에 선을 대신한다.

반면, 지성을 겸비하고 남에게 이로움을 주며 이러한 비물질적인 존재 상태를 이해하여 자신을 그와 같은 상태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곤란을 감수한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유용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넓고 광활한 기회로 향하는 문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가 입고 있는 조잡한 체를 벗어 던진 삶이야말로 생동감에 넘치고 활발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러한 삶의 즐거움은 세속적인 지상의 즐거움에 비한다면 햇빛의 밝기에 대응하는 달빛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명확한 지식과 고요한 확신을 통해 얻은 끝없는 삶의 힘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밝게 비춘다. 비록 주위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평화와 기쁨의 중심이 되며 불과 몇 년의 아스트럴 존재로서도 물질계의 생활을 통해서 이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을 구현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 앞에 또 다른 세계가 놓여 있다는 것과 이처럼 아름다운 상위의 삶이 보다 광활한 세계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욕망과 낮은 차원의 상념들로 인해 아스트럴 삶이 좌우되는 것처럼, 고상한 상념과 고귀한 열망은 천상의 세계를 제공한다.

천국은 꿈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광의 실체이다. 또한 별들 너머 먼 곳에 있는 진주의 문과 황금 길로 치장된 어떤 도시가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장차 거주하게 되는 곳으로, 이 지상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때 누구나 거쳐갔던 특정한 의식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란, 말로 표현될 수는 없지만 영원토록 존재하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수 백년 동안 지속되어온 축복의 상태라는 관점(비록 여기에 천국을 설명하는 가장 지고하고 영적인 모든 개념의 기초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안에서 다양한 종교를 배출하기는 했지만)으로 밖에 고려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한 자연의 영역으로 지금 영위하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광대하고 훌륭한 삶의 세계이며 동시에 육체로 화신하는 중간 중간에 영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베일에 드리워져 가장 지고한 천상의 모든 영광을 완전하게 깨달을 수 없는 것은 단지 우리의 개발이 완전하지 않은 까닭이며 우리 자신의 제한으로 인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로부터 오는 영향은 우리에게 흘러들어 온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오컬티스트에게 있어서는 가장 평범한 사실이다.

아직도 이러한 기본적인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불교 고승의 가르침을 제시할 뿐이다.

"불평하지 말라. 울지도 말고 기도하지도 말라. 단지 눈을 뜨고 보라. 시야를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를 떼어내기만 하면 빛은 온통 그대 주변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놀라우며 그 어떠한 사람이 꿈꾸고 기도하던 것 이상이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의 영혼(The Soul of a People, p.163.)」

저차원적인 생각과 욕망의 매체인 아스트럴체가 서서히 마모되어 뒤에 남겨지게 되면, 사람들은 멘탈체라고 부르는 더 미세한 매체로 이루어진 보다 고차원적인 매체를 발견하게 된다. 이 매체를 통해 우리들은 이와 대응되는 질료(멘탈계의 질료)로 이루어진 외부 세계를 인지하고 그 곳의 진동을 받아들일 수 있다.

연옥의 시간은 지나고 나면 낮은 측면의 본성은 사라지고 지상 생활동안 힘쓰고 노력해서 얻은 고상한 상념과 열망만이 남는다. 그리고 이것은 무리가 되어 주변을 감싸며 외부의 껍질을 형성한다.

이 껍질이 매체가 되어 사람들은 보다 섬세한 질료로 이루어진 특정한 종류의 진동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주변에 있는 고상한 생각들은 천국의 부를 축적한 것이다.

이 멘탈계는 신성한 마음의 반영이며 물질 육체의 생이나 아스트럴 생에서 품은 생각과 영감의 힘에 비례하여 천국의 기쁨을 무한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창고이다.

모든 종교가 천국의 지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 모든 사람이 천국의 지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이는 천국에 대한 개념의 주요한 사항이다).

모든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빛나는 신의 상념에서 스스로의 천국을 골라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상에서 보낸 생을 근간으로 하여 천상의 생활의 길이와 양상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특성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성격과 양의 기쁨을 받을 수밖에 없다.

천국이란 그곳에서 가졌던 바로 그 의식으로 인해 최고의 영적 지복을 누릴 수 있는 세계이다. 또한 이 세계는 열망에 대응하는 세계로서 오로지 열망의 역량에 의해서만 제약받는다.

아스트럴 생에 대해서 보다 상세한 내용을 알고자한다면 「아스트럴계(The Astral Plane)」를, 천상의 생에 대해서는 「데바챤계(The Devachanic Plane)」를 참조하라.

「죽음과 그 이후(Death and After)」와 「죽음의 다른 측면(The Other Side of Death)」에는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다



8.인간의 과거와 미래


인간은 여러 번의 다양하고 연속된 생을 통해 현재의 위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지난 날 진화해온 과정으로 인해 과연 어느 정도의 지식을 얻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한 지난날은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그러한 지식은 얻을 수 있다. 말로 전하여져 올뿐만 아니라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획득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 초자연적인 신비력까지 동원해서 언급할 지면은 없다.

다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워지지 않은 기록을 남긴다는 것을 밝혀둔다(자연에는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장치가 있어서 세상이 생겨난 이래 발생한 모든 사건이나 장면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알아낼 수가 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생소한 사람들이나 증거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케넌(Buchanan) 박사의 「싸이코메트리(Psychometry)」나 덴톤(Denton) 교수의 「사물의 영혼(Soul of Things)」을 참조하기 바란다.

오컬티스트에게는 그러한 가능성이 매우 친숙할 것이며 과거의 기록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전혀 생소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자연의 기억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신의 기억이다. 그러나 이 기억은 의심의 여지없이 하위계로 반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위계에 관련된 경우라면 인간의 훈련된 지능에 의하여 상기될 수 있다.

가령, 거울 앞을 지나가는 모든 것들은 거울의 표면에 자신의 상을 드리운다. 우리들의 희미한 눈에는 거울 표면에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원래 그대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소리가 축음기의 민감한 실린더에 인상을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울 표면에도 인상이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축음기에서 원래의 음색을 다시 재생하듯이 거울 표면에서도 원래의 인상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고도의 정신능력은 그에 대한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도 거울 뿐 아니라 모든 물리적 물체가 시야에서 일어난 모든 인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들의 세계와 인류의 초기 역사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틀림없이 있었으며, 이러한 방법으로 모든 장면들을 마치 우리들이 보고 싶어하는 부분을 재현하듯이 자세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다(「투시」참조).

이러한 방법으로 지난 과거를 탐구하면 장구하며 느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점진적인 진화의 과정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보면 인간의 개발은 두 가지의 위대한 법칙아래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진화의 법칙으로 인간은 꾸준히 앞으로 그리고 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신성한 정의의 법칙 혹은 인과의 법칙으로 사람이 행한 모든 행위의 결과는 피할 수 없이 그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법칙이다.

이 두 번째 법칙은 첫 번째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며 지성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깨닫게 한다.

이 길고 긴 진화의 과정은 지구상에서뿐만 아니라 관련된 다른 천체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와 같은 초보적인 입문서에서 다루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내용이다.

이에 관해서는 블라바츠키여사의 기념비적인 저서인 「비경(The Secret Doctrine)」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비경」을 읽기 전에, 베산트여사의 「고대의 지혜(Ancient Wisdom)」와 시네트의 「영혼의 성장(Growth of the Soul)」 중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룬 장을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와 같은 저서에서는 인간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유용한 지식도 함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인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영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그러한 영광으로 인도하는 초기의 첫 단계를 다소나마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람은 지금도 신성하며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가능성들을 계속해서 펼치고 있다는 개념은 일부 선량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듯하다. 그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개념이 신성 모독적인 경향을 품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 이와 같이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도 경전에서 자신의 주위에 있는 유태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말하노니 너희가 신이다."

그리고 인간의 신격화에 관한 교의는 기독교 초기의 신부들에 의해 상당히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순수했던 교의는 망각되고 오도되어 오직 오컬티스트의 학도들에게만 그 온전한 의미가 전수되고 있는 듯하다.

만약 모든 것이 애초부터 신성의 불꽃이었다면 장구한 세월에 걸쳐 그처럼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진화하여 결국 그대로의 신성을 이룩하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직 신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신성에서 나왔을 때, 그대는 아직 인간이 아니었다(인간은 고사하고 심지어 불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직은 개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축되었을 때는 수많은 불꽃으로 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을 뿐, 그것은 신의 에센스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름이었다.

신성에서 나왔다가 되돌아갈 때의 상태의 차이는 발광하는 거대한 성운 덩어리와 거기에 형성되어 나온 태양계의 차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성운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막연하고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성운에서 긴 세월동안 서서히 진화되어 형성된 항성인 태양은 천천히 회전하면서 많은 세계와 거기에 살고있는 존재에게 생명과 열과 빛을 아낌없이 쏟아주고 있다.

또 다른 비유도 해볼 수 있다. 인간의 육체는 무수히 많은 미립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의 일부는 계속해서 육체에서 방출되고 있다.

가령, 이와 같은 미립자들 각각이 일종의 진화를 거친 후 인간이 된다고 가상했을 경우, 그 미립자가 진화를 시작했을 때,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인간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진화의 종말에 이르러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신성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처음에는 단순히 에센스의 분출일 뿐이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로고스 안으로 진화할 수 있는 수천, 수만의 위대한 아데프트가 된다.

인간의 미래는 무한한 영광과 장엄함 속에 있다고 하는 이와 같은 설명은 충분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명심해야할 중요한 사항은 이 장엄한 미래가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선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신성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진화의 행진을 돕고자 움직이는 사람)은 위로 향하는 이 길에서 빠른 진보를 보인다.

반면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힘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위대한 전체의 흐름을 거역하고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은 매우 느리고 간헐적인 진보만을 나타낼 뿐이다.

하지만 신의 의지는 어떠한 인간의 의지보다도 무한히 강하며 위대한 계획은 완벽하게 작용하고 있다. 처음에 이러한 교훈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를 익힐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를 습득해야 한다.

신의 인내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조만간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신의 법칙과 의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오직 완벽한 평화만이 있을 뿐이다.



9.원인과 결과


우리는 지금까지 이전 장에서 모든 사람이 정당한 대가로 필연적으로 받게 되는 작용과 반작용의 필수 불가결한 법칙에 대해서 꾸준히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이 법칙을 알지 못하고는 신의 계획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계획을 올바로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은 충분히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보상과 처벌이 주어진다는 종교적인 관념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관념은 상과 벌을 내리도록 관장하는 심판관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심판관은 상황에 흔들리며 어떤 사건에는 다른 사건보다 더 관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원이나 간청을 해서 법칙의 영향을 수정하거나 빠져나올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연상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은 커다란 오해를 자아낸다. 우리가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면 그 전에 그와 같은 연상에 관련된 모든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빨갛게 달구어진 철봉에 손을 올려놓는다면 보통의 경우 심한 화상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 그를 처벌하기 위하여 손을 철봉에 올려놓으라고 했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화상을 입은 것은 바로 자연 법칙의 작용에 의해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열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화상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의도는 물리적인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로 철봉을 잡았든, 혹은 누군가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잡았든 간에 그가 입는 상처는 똑같다.

물론, 다른 더 높은 측면에서는 매우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한쪽은 숭고한 행위였기 때문에 양심의 기쁨을 얻을 것이고 다른 한쪽은 가책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간에 육체적 상처는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참다운 개념을 얻기 위해서는 이 법칙이 언제나 예외 없이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무거운 물체가 밧줄에 묶여 천장에 매달려 있고 일정한 힘으로 그것을 위로 민다면, 역학 법칙에 따라 미는 힘과 정확하게 같은 양의 힘이 손바닥에 가해질 것이다. 이러한 반작용은 균형을 깨뜨리고자 하는 의도에 전혀 영향 받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은 진화의 위대한 흐름에 균형을 깨뜨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강인한 힘은 균형을 되찾고자 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의 의도로 인해 그 당시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생각은 거두어 들여야 한다. 비록 물질계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을지라도, 의도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우리들은 의도 그 자체가 힘이라는 사실을 곧잘 망각한다. 그 힘은 바로 멘탈계에서 작용하고 있다. 멘탈계의 질료는 매우 섬세하기 때문에 낮은 물질계의 질료보다 훨씬 빠르게 진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에너지라 할 지라도 엄청나게 커다란 결과를 몰고 온다. 물리적인 행위는 물질계에 결과가 나타나지만, 어떤 의도가 가미된 멘탈 에너지는 물질계와는 전혀 관계없이 동시에 멘탈계의 질료에 작용을 가한다.

이 두 가지 중, 멘탈계에 끼치는 영향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처럼 언제나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조절이 가능한 것이다.

의도가 어떤 방식으로 뒤섞여 있어도, 그리고 물질계에 선과 악이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균형은 언제나 완벽하게 다시 조절되고 모든 면에서 완전한 정의를 이룬다.

자신의 미래의 특성이나 미래의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지 다른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지극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지금의 생에서 취한 행위가 다음 생의 환경을 만들어내며, 이번 생에서의 생각이 다음 생의 성격의 진화에 주요한 요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작용 방법은 매우 흥미로운 연구대상이지만 여기서 다루기에는 너무 벅차다.

베산트 여사의 소책자 「카르마(Karma)」에는 이러한 내용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고 「고대의 지혜」에서도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장이 있다. 또한 시네트의 「에소테릭 부디즘(Esoteric Buddhism)」도 여러분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실이 우리의 논리적 교훈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 만약 사념이 자신이 속한 멘탈계에 물질 생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만들어낸다면 그 힘을 제어해야할 필요성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사고 방식에 따라 미래의 자신의 성격적 특성뿐만 아니라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꾸준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힘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데에는 중대한 책임이 따른다. 만약 어떤 일반적인 보통 사람이 가슴속에서 분노나 미움을 느꼈다면, 자연스러운 충동에 의해서 그는 그러한 감정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문명화된 사회의 일반적인 규칙은 그러한 언동을 금지시키고 가능한 한 밖으로 표현하는 것을 억제시킨다. 만약 그가 감정을 억제하는데 성공했다면, 스스로 만족해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오컬트의 길을 걷는 학도라면 그보다 훨씬 더 자기조절을 해야하며 편협한 감정을 갖는다거나 그것을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완벽하게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감정이 작용을 가하기 시작하면, 아스트럴계에 어마어마한 힘을 미쳐서 마치 물질계에서 일격을 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화를 내고 있는 대상에게 작용해서 물질계에서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지속적인 결과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물질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맞는 말이다. 투시를 통해 보면, 생각은 명확한 형체와 색깔을 취하고 있으며 그와 연관된 사념의 진동율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

이러한 형태와 색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상념형태(Thought Forms)」에는 상념을 직접 그리고 색까지 칠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을 고찰하면 여러 방면에 걸친 다양한 가능성을 우리 앞에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생각으로 해를 끼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고 마찬가지로 선을 행하는 것도 쉽다.

이러한 흐름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괴로움에 처한 친구를 돕고 위로할 수 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롭고 유용한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도움을 받았지만 그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을 만한 부가 없어서 속상해하고 있다. 하지만, 물질적인 부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최고의 보답으로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남을 도울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그들에게 반드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런 경우,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는 것이 힘이며 법칙을 이해하는 사람은 법칙을 이용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생각에 의하여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자의로 그러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현재 생에서 서서히 자신의 성격을 주조할 뿐 아니라 다음 생의 성격을 결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생각은 멘탈 질료에 진동을 일으키는데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 그에 대응하는 원인체의 질료(말하자면 한 옥타브 더 높게)에 진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10.신지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점


신지학적인 개념에 확실한 신뢰를 갖는다면, 그것이 사람의 인생관을 얼마나 크게 바꾸는지 세심한 독자들은 이미 명백히 알았을 것이다. 그 많은 변화의 방향과 그 이유에 대한 근거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신지학을 통해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풀 수 없는 인생의 문제(그것은 해답 없는 수수께끼였다)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단지 물질계에 속하는 즐거움과 이익을 위한 삶이라면 가치가 없게 느껴지지만, 상위 차원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과 무한한 가능성을 준비하기 위한 학교라고 볼 때 삶은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얻은 지식의 빛을 통해서 보면 우리 스스로가 진화해 가는 방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진화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법도 이해하게 된다.

생각과 행동을 우리 자신에게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방법과 우선 우리와 가장 가까우며 지극히 사랑하는 몇몇의 사람들에게, 그러다가 나중에는 점차적으로 우리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모든 인류에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감정과 사고로 인해 높은 차원에 올라섰다는 생각과 느낌을 갖는데, 우리가 지난날 품었던 부질없고 이기적인 생각이 얼마나 좁고 비굴한 것인지 알게 된다.

모든 것은 아주 미세한 부분의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관점에서 전체로서의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 닥치는 그 많은 고통과 비애는 너무나 가까이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때로는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눈앞의 빈 잔이 태양을 가리는 것처럼, 시야전체를 흐리게 한다. 그래서 "존재의 가슴에 천상의 안식처가 있다"는 것을 쉽게 망각한다.

신지학의 가르침은 이러한 모든 것을 바르게 조망하도록 하고 구름 위로 올라가(아래에서 제한된 시점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려다보도록 해준다.

우리가 때때로 아래로 가라앉는 것은 낮은 인성으로 인한 환상과 편견 덩어리 때문에 진실을 올바로 바라볼 수 없는 능력의 한계를 알기 위해서이다.

또한 초월적이며 사심 없이 위로 오르는 것은 정의를 위하여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원칙이며, 또한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기쁨이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이제 우리 앞에 열리는 것은 기쁨의 생이다. 사람은 진화해감에 따라 연민과 동정심이 강해지고 그에 따라 세상의 죄악과 슬픔 및 고통에 대하여 더욱 민감해진다.

그와 동시에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선을 위한 조화로운 장치임을 알게 된다.

그것을 알고 나면 모든 것이 올바르게 나아간다는 확신과 깊은 만족을 얻을 뿐만 아니라, 로고스의 웅장한 계획을 숙고함으로서 빛나는 기쁨을 얻으며 예약된 결말을 향해 실패 없이 전진할 수 있다는 계획을 확고하게 알게 된다.

신은 우리에게 행복을 뜻함을 알게 되고 행복이야말로 언제나 변함 없는 우리들의 임무임을 알게 된다.

그러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위에 행복의 진동을 보내야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의 슬픔에 빛을 밝힐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상 생활을 영위하면서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문제에 부딪히며 당혹해한다. 그러한 당혹감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고통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왜 이런 모든 일이 나에게만 생기는가? 어느 면으로 보나 나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는 주변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병에 시달리지도 않고 친구를 잃어버리지도 않았으며 재산을 잃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나만 이래야 하는가?"

신지학은 이러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신지학도를 도울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도 부당한 고통이 초래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은 우리가 갚아야 하는 자연의 빚이다. 그렇기 때문에 빚은 빨리 갚을수록 좋다.

여러 가지 고통이 다가오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가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을 끈기 있고 용감하게 견디며 고통에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대처한다면, 우리는 용기와 지구력, 결단력 등과 같은 필요한 자질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래 전에 지은 죄악의 결과인 악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선을 심게 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지학도는 죽음에 대한 모든 공포를 불식한다. 왜냐하면 죽음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먼저 죽음의 길로 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애통해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전히 곁에 있음을 알고 있으며,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이기적인 슬픔은 죽은 이들에게 슬픔과 우울함을 안겨준다는 것 또한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우리 곁 아주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서로간의 공감은 죽기 이전보다 더 밀접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각없는 비통함이 그들에게 얼마나 잘 반영되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지학에서 죽은 사람을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들을 될 수 있는 한 자주 생각하길 바란다. 단지, 이기적인 발로에 있는 비통함이나 그들을 다시 지상으로 데려올 생각을 표현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죽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인해서 자기가 가진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도록 하지말고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도록 하라.

강한 사랑의 상념을 받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 상념으로 인해 진화에 있어서 유익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상념이 올바르고 이성적인 것이었다면 위로 향하는 진화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을 것임을 확신한다.

화신하는 사이에 주어지는 생을 주의 깊게 연구하면 전 생애에 비하여 이 육신을 입고 영위하는 생의 비중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알 수 있다.

고도로 진화한 어떤 인종의 교양을 갖춘 평균적인 사람의 경우, 일생(참다운 생애의 하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은 천 오백 년 정도라고 한다.

그 중 70-80년이 물질계의 생활이고 15-30년은 아스트럴계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천상의 세계에서 보낸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천상의 세계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물론, 인종에 따라서 이러한 비율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가령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영혼이 열등한 인종이나 혹은 낮은 계층에 화신했다면, 그러한 비율은 전혀 달려져서 아스트럴계의 생활이 매우 길어지고 상대적으로 천상의 세계에서는 훨씬 짧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완전한 야만상태에 있는 사람일 경우, 천상의 세계에서는 거의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은 천상에서 생활할 수 있는 자질이 개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식을 알게 되면 우리의 미래를 분명하게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애매함이나 불안감을 없애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

신지학도라면 "구원"에 관한 문제로 공포심을 갖지 않는다. 자신의 무지이외에는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로고스의 의지가 그의 모든 아이들에게 충실히 이행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신성모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원한 희망"이란 것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법칙에 관한 지식에서 우러난 확고한 신념이다.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로지 위대한 진화의 과정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는 가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것만을 염두에 둘 뿐이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을지 모르나 현재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무언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기회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접촉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얼마 전에 태어난 어린 아이일 수도 있으며 같은 일을 하는 친구이거나 집안 일을 돌보는 하인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기회를 주고 있다. 종교심에 치우친 무지하고 무뚝뚝한 친구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견이나 생각을 불쑥 내민다면 혐오감을 주거나 방해가 되겠지만, 언제라도 다른 이들을 도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다른 이들을 돕고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조언이나 지식을 구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

물론 거기에는 물질적인 도움도 포함된다. 말이나 행동으로 도울 수 없는 경우도 가끔씩 생긴다. 그러나 친근하고 도움이 되는 상념을 보내는 일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비록 물질계에 곧바로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을 지라도 생각의 힘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 결과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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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NTAL BODY
by
Arthur E. Powell



차 례

1 개요
2 멘탈적 엘리멘탈 에센스
3 구성 및 구조
4 제기능들
5 전형적인 예들
6 카마-마나스(욕망-마음)
7 상념파동
8 상념체
9 상념전이의 메카니즘
10 무의식적인 상념전이
11 의식적인 상념전이와 멘탈적 치유
12 상념센터들
13 육체적의식 또는 “깨어있는” 상태의 의식
14 기능들
15 집중
16 명상
17 관조
18 수면생활
19 마야비루파
20 데바챤: 일반적 원리
21 데바챤: 길이와 강도
22 데바챤: 세부적인 것
23 첫번째 천계 (일곱번째 하부계)
24 두번째 천계 (여섯번째 하부계)
25 세번째 천계 (다섯번째 하부계)
26 네번째 천계 (네번째 하부계)
27 멘탈계
28 아카식레코드
29 멘탈계의 주민들
30 멘탈체의 죽음
31 개성과 자아
32 재탄생
33 제자도
34 결론




발행인 서문


저자가 이 시리즈의 책들을 편찬하는 목적은 여러 가지 책들이 가지고 있는 제각기의 주제를 종합해서 특정한 주제하에 모두 요약 정리한 것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에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고자 함이다. 각 권은 주로 애니 베산트Annie Besant 여사와 리드비터C.W.Leadbeater씨의 저술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책의 앞부분에 있는 목록은 저자가 상당히 많은 책들을 참조했음을 보여 준다. 가능한 한 본질적이고 생명적인 측면에 앞서 형태적인 측면을 먼저 설명하는 방법을 택했다. 다시 말해서, 제반 현상의 객관적 메카니즘에 대해서 적은 다음에 그 메카니즘을 통하여 표현되는 의식의 제활동을 적어나가겠다는 것이다. 어떠한 진술이라도 증명하거나 더욱이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없었다. 책 모서리에 있는 참고도서 목록은 출처를 참조할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가 비교The Secret Doctrine 및 관련된 여러가지 저서에 필요한 연구는 너무나 방대한 업무라서 착수할 수 없다고 했으므로 블라바츠키H.P.Blavatsky 여사의 저서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블라바츠키 여사에게 진 빚은 여사의 기념비적인 책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통해 나타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여사께서 먼저 길을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후배 연구자들은 어떤 흔적조차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현재의 간행본은 오늘날처럼 여러가지가 변화된 여건에서 있을 수 있는 (내용의)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약간 압축된 형태로 편집되었다. 독자는 또한 이 시리즈의 책에서 다음 사항들에 주의하기 바란다.

1.“자아Ego”는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라져 버리는 개성으로서가 아니라 재화신하는 개성reincarnating Individuality으로서 사용된다.

2.“원자atom”, “원자의atomic”, “소립자의sub-atomic”와 “분자molecule”는 전문화된(세부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 화학의 원자나 분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에테르ether”와 “에테릭etheric”도 역시 그러하다


머리말


이 책은 인간의 몸들(에텔체, 아스트럴체, 멘탈체, 원인체…)을 다루는 시리즈 중 세번째다. 이전의 두 권은 에텔체The Etheric Double와 아스트럴체The Astral Body였다. 세 권 모두, 저술방식은 마찬가지로 동일한 방법을 따랐다. 즉 주로 베산트여사와 주교 리드비터가 저술한 약 40권의 책중에서 멘탈체Mental Body와 관련된 자료들을 위하여 조사되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이 편집자의 노고로 가능한 일관성있고 연속적인 형태로 분류되고 정돈되어 학도들에게 제공되었다.

이 시리즈의 전반에 걸쳐, 자체의 내적 증거와 합리성자체가 진술을 정당화시키는 것 이외에는 진술을 증명하거나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행해지지 않았다. 이와같이 노련한 연구자들과 선생들의 정직함이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연구와 가르침의 결과는 어떠한 종류의 회피나 숨김 없이 가능한 그들 자신의 말로써 나열되고, 주제 사항의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인 제시의 요건에 적절하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한에서만 수정되고 요약되었다.

입증의 문제는 전적으로 별개의 쟁점이며 게다가 엄청나게 방대한 문제이다. 진술된 말을 논증하거나 증명하려고 시도했더라면 이 책들의 주요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주요 목적은 진지한 학도들에게 합리적인 범위내에서 인간의 몸들과 그 몸들이 속하는 계界들에 관하여 본문옆에 붙여진 책이름의 원전으로부터 발췌한 가르침을 정리하고 요약하여 종합한 것을 내놓은 것이다. 증거들을 바라는 사람들은 각자 달리 증거를 찾아야만 한다.

2년반 동안 두 저자의 작품들을 집중 연구한 후에 자구적으로 별로 중요시되지 않은 두 세 가지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불일치나 모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세부적인데 있어서 연구자들의 충실함과 신지학 체계의 일관성에 놀랄만한 하나의 귀감을 살만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두 책(에텔체, 아스트럴체)에서처럼 난외의 참조 색인은 학도가 원한다면 이 책에 진술된 내용을 원래의 출전에서 독자적으로 대조 확인해 보도록 주어진 것이다. 난외의 참조 색인과 더불어 3권의 시리즈의 책 뒤에 있는 색인들은 이리하여 사실상 베산트 여사와 주교 리드비터의 저술 중에서 에텔계와 아스트럴계 그리고 낮은 멘탈계를 이루는 모든 것에 대해서 꽤 완전한 색인을 구성한다.

이 시리즈에 이어서 적당한 시기안에 네번째 책인 원인체The Causal Body가 추가되기를 바란다.


제 1 장

개 요


인간의 멘탈체Mental Body, 그것의 기능과 또한 인간의 삶과 진화에서 하는 역할을 세부적으로 기술하기 전에 우리의 연구가 다루는 배경에 대해서 간략하게 개관을 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첫째로, 멘탈체를 자아의 속성중 구체적인 지성이 현현하는 매개체로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지성속에서 기억력 및 상상력을 포함한 마음의 전 능력들이 발전되고, 인간의 진화중 후반부 여러 단계에서 인간이 그의 육체 및 아스트럴체와는 아주 별개로 살고 작용할 수 있는, 구별되고 두드러진 의식의 매개체로서 기능을 한다.

처음에 학도는 오컬트 심리학에 있어서 인간의 멘탈구조는 두 개의 명확한 부문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깨달아야만 한다. 하나는 구체적인 책, 집, 삼각형 등과 같은 구체적인 상념으로 알려진 것, 즉 독특하고 고유한 것을 다루는 멘탈체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책 및 집과 모든 삼각형에 공통적인 삼각형 성질의 원칙(원리)과 같은 추상적인 상념들, 즉 원리원칙을 다루는 원인체Causal Body로 나누어진다. 이리하여 멘탈체는 루파rûpa 즉 형태적인 상념을 다루고, 원인체는 아루파arûpa 즉 비형태적인 상념들을 다룬다. 개략적인 유추가 수학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개개의 수를 다루는 산수는 마음의 낮은 측면, 즉 다시 말해 형태적 측면에 속하고 일반적인 수를 나타내는 상징들을 다루는 대수는, 마음의 높은 측면, 다시말해 비형태적인 측면에 속한다. 물론 형태, 비형태라는 용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리하여 구름이나 불꽃은 형태를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집이나 통나무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비형태적이다.

다음에 우리는 멘탈적 엘리멘탈에센스Mental Elemental Essence로 알려진 이상하고 반半지성적이며 강하게 활동적인 생명요소life substance를 다루고, 그것이 인간의 사고를 도와줄 때 하는 역할을 다루어야만 할 것이다. 멘탈체의 구조와 구성의 상세한 점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것이고, 다양한 발달의 단계에 있는 인간의 여러 멘탈체들에 대한 전형적인 예에 관한 기술이 뒤따를 것이다.

우리 연구의 현저한 특징은 카마-마나스Kama-Mamas 즉 욕망Desire과 상념Thought간의 긍정적 연합 또는 부정적 연합에 대한 조사인데, 카마-마나스에 의하여 아마도 인류 전체와 아울러 모든 개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연합은 아주 밀접하게 되어 있어 상념에 대한 어떤 비밀학파들은 아스트럴 및 멘탈체를 의식의 한 매체로 보기까지도 하는데 그것들은 사실 실용적 목적(측면)에서 본다면 대부분의 인류에게 있어서 그러하다.

상념 자체의 세계에 있어서 상념의 이중작용이 기술되어야만 한다. 즉, 상념파동의 방사 및 형성과 많은 경우에 있어서의 상념체의 공간투사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두 부류의 현상들이 그들의 창조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결과가 우리가 편의를 위하여 무의식적 그리고 의식적이라고 여기는 상념전이를 다루게 될 때 조사되어질 것이다. 간략한 개관이 주어질 후자의 부분은 멘탈적 치유를 포함한다.

신체 또는 사실상 물리적 환경 전체가 멘탈체와 그 작용working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반면에 멘탈체가 신체와 다른 물질적 대상들에 미치는 영향도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유사한 방법으로 아스트럴체에 관하여 다루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즉, 어떻게 아스트럴체가 멘탈체에 영향을 미치고, 다음에는 멘탈체가 아스트럴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다룰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멘탈체 자체에 착수하여 멘탈체가 육체의 두뇌를 통하여 작용할 때 뿐만 아니라 또한 자체적으로 하나의 독립된 의식 수용체로써 작용할 때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기능들이 어떻게 개발되고 훈련될 수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자연히 우리들을 멘탈체에 대해서 보다 정교한 훈련으로 이끄는데, 훈련은 효율적인 멘탈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집중과 명상 그리고 마침내 신비의식으로 이끄는 관조를 포함한다.

신체가 수면하는 동안 멘탈체를 우리가 사용하는 부분은 간단히 다루어 질 것이고 그 다음에 마야비루파Mâyavi Rûpa라고 알려진 인위적이고 일시적인 멘탈체에 대한 간략한 기술이 추가될 것이다.

육체적 및 아스트럴적 죽음 이후의 삶, 다시 말하면 멘탈계 자체에서의 삶이 다음으로 우리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이것은 약간 길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멘탈적 삶의 과정과 그 세부적인 사항 중 많은 부분의 기초를 이루는 일반 원칙들을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지학자들이 데바찬Devachan이라 부르고 기독교인들이 “천국Heaven”이라 부르는, 네 개의 낮은 멘탈하부계(여기서는 나중에 천계天界로 번역하였다.) 각각에서의 삶에 대한 전형적인 예들을 간략히 심도있게 다룰 것이다.

그 정도 나아간 후에 우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로 간주되는 멘탈계의 실재성과 여러 가능성을 이해한 입장이 될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멘탈계에서의 삶의 성격과 여러 가능성들에 관한 일반적인 성격들을 조사하면서 멘탈계를 하나의 세계로 연구할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하나의 흥미롭고 중요한 특징을 이루는 상념센터들을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상념센터들로부터 우리는 모든 것이 기억되고 기록되는 놀랍고도 오류가 전혀없는 자연의 기억인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로 나아가서 필요한 요건을 갖춘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읽게 될 것이다.

한 장章은 멘탈계의 주민들에 관하여 다루어질 것이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자신의 멘탈체의 소멸로 인해서 하위 멘탈계에서 벗어날때, 우리는 상위 멘탈계 즉 원인계에서 보다 폭넓고 보다 충만한 삶을 잠깐 살펴보기 위하여 멘탈계에서 벗어난 원인계를 공부할 것이다.

신체의 죽음을 통하여 가게 되는 인간의 순례행로(에텔체를 보라)인 아스트럴계를 통하여 그의 과정 (아스트럴체를 보라)을 뒤따른 후, 그리고 이 책에서 그를 따라 그의 참된 집, 즉 원인계나 상위 멘탈계의 입구에 도달한 후에 우리는 개성Personality의 수용체들인 세 하위 수용체vehicle(에텔체, 아스트럴체, 멘탈체)에 있는 인간과 영혼이나 개체성Individuality인 원인체에 거주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련성(에텔체, 아스트럴체, 멘탈체를 사용하는 우리의 의식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혼이 사용하는 원인체 사이의 전반적 관련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우리 연구의 이러한 측면은 개성과 자아에 관한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인간이 그의 집으로부터 하향하는 도중에 하위계들에 재생됨에 따라서 생기는 그 변천을 다시 한 번 더 연구과제로 채택할 것이다.

마지막 한 장은 인류의 상위형제단으로서 지혜의 매스터들이 그들의 어린 양들에게 확실한 지혜, 지칠 줄 모르는 인내, 불변하며 무한한 사랑으로써 이끌때 그들에게 첼라나 제자로서 받아들여지는데 합당한 단계에 도달한 사람의 삶을 다루게 될 것이다.


제 2 장

멘탈적 엘리멘탈 에센스


우리가 멘탈체의 구성 및 구조나 작용 방법에 관하여 성과 있게 연구하기 전에 전반적인 개괄에서 기술했었지만 멘탈적 엘리멘탈 에센스라고 알려진 것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도는 자연의 여러 계들의 각각에서 물질의 원자상태를 형성한 후에 삼위일체의 세번째 측면(기독교 용어에서 성령 또는 생명을 주는 존재- Life Giver)이 원초질료의 바다 속으로 자신을 쏟아부은 결과 그의 생명활력에 의하여 원자적질료에 새로운 능력과 가능성을 각성시켜서 각계에 여러 하위부분들을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물질 속으로 두번째의 큰 신성한 생명이 내려왔다. 다시 기독교적인 용어로 아들이 성령과 마리아에게서 화신했다.

신성한 생명의 쏟아부어짐은 그것이 하강하는 여러 단계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전체적으로 그것은 종종 모나드 에센스Monadic Essence로 불리는데 다양한 계 속에서 원자적인 질료 속에 있을 때만, 특별히 더욱 그렇게 불리어지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원자를 모나드에 제공하기 위하여 사용되는데 적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원자적, 즉 분자질료에 영혼을 불어넣을 때 그것은 엘리멘탈 에센스라 불리고 그 명칭은 중세의 신비주의자occultist로부터 차용된 용어이다. 그것은 신비주의자들에 의하여 자연계의 정령의 몸을 구성하는 질료로 언급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이러한 몸들을 엘리멘탈이라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것의 하향과정 중 신성한 생명이 멘탈계의 3개의 상위계들의 질료에 활기를 줄 때 그것은 제 1 엘리멘탈계로 알려진다.

그것의 진화에 있어서 하나의 완전한 사슬기간Chain Period을 보낸 후에 그것은 4개의 하위 수준의 멘탈계에 내려가고, 거기서 다른 사슬기간을 위하여 제 2 엘리멘탈계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여기서 그것은 또한 멘탈적 엘리멘탈 에센스라 알려진다.

다음의 사슬기간은 아스트럴계에서 보내어 지는데 그곳에서는 제 3 엘리멘탈계 또는 아스트럴 엘리멘탈 에센스라 불린다.

이 셋 각각은 자연계인데 우리가 더욱 친숙한 동물 및 식물계 만큼이나 그것은 여러가지 형태를 가진 생명의 현현에 있어서 다양하다. 게다가, 각 계에는 각각 일곱개의 하부 형태를 가진 일반적인 일곱개의 완벽하고 분명한 에센스의 유형 또는 광선들이 존재한다.

멘탈 및 아스트럴 에센스는 우리가 멘탈체를 계속 연구함에 따라 더욱 분명히 보겠지만, 인간과 그의 여러 체 그리고 그의 진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아스트럴계와 멘탈계에 각각 있는 각기의 엘리멘탈 에센스는 그 계의 단순한 물질과는 아주 분명히 구별된다.

아주 중요한 다른 사항은 멘탈 및 아스트럴 질료를 활성화시키는 생명은 진화에서 하향 혹은 외향적인 현의 상태에 있다;(영계→멘탈계→아스트럴계→물질계로 신성이 하강하는 상태. 역은 물질계→아스트럴계→멘탈계→영계로 신성이 상승) 진화의 하향적 현을 위한 진행은 보다 조밀한 형태의 물질들로 내려가서 그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진화는 이와 정반대다. 그는 이미 물질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고 지금은 물질에서 그의 근원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내부의 인간과 그의 다양한 수용체들의 질료에 거주하는 생명 사이에는 끊임없는 이해의 충돌이 항상 존재한다. 가장 중요한 이 사실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우리의 주제가 전개됨에 따라 나중의 여러 장에서 보다 명확히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제 3 장

구성 및 구조


멘탈체는 멘탈계의 하부 4개의 영역들에 있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아스트럴 질료의 하부 4개의 영역들과 물질계의 고체, 액체, 기체 그리고 에텔체에 대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멘탈물질의 세 상위 등급은 원인체 또는 상위 멘탈체를 구성하는데 사용된다. 이것은 우리가 여기서는 관여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멘탈 질료 외에 멘탈체는 또한 멘탈 엘리멘탈 에센스, 즉 제 2 엘리멘탈계의 질료를 포함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신체는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세포는 신성의 두번째 측면에서 오는 두번째 신성의 쏟아부어짐에 의해 활성화되는 조그마한 개별적인 생명체이다. 똑같은 것이 아스트럴체 및 멘탈체에도 적용된다. 세포들에 퍼져있는 세포생명속에는 지성의 관점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앞장에서 본 것 처럼 하강하여 물질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강한 본능이 있다.

멘탈체의 모양은 원인체의 달걀모양 형태를 따라서 달걀모양이다. 원인체의 특징 중 달걀형 부분만이 여러 하위계에서 현현 가능하다. 그러나 멘탈체의 질료는 달걀모양 전체에 걸쳐 고루 배분되어져 있지는 않다. 달걀형의 모양체 한가운데에 아스트럴 질료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육체가 있다. 차례로 아스트럴 질료는 멘탈 질료를 강하게 끌어 당긴다. 따라서 아스트럴체와 멘탈체의 질료의 거의 대부분 이상이 육체적인 틀 내에 모여 있다. 투시능력을 가진 사람이 보기에는 멘탈체는 신체의 모습을 하고 자욱한 안개로 구성된 것 같으면서 달걀형태의 훨씬 더 미세한 안개로 둘러싸인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멘탈계에서 우리가 아는 사람을 만난다면, 바로 물질계에서 만큼이나 즉각적으로 인식이 가능하다.

육체의 표면을 넘어 방출하고 있는 멘탈체의 부분이 멘탈 “오오라“를 형성한다. 아스트럴체와 멘탈체 둘다의 크기는 원인체의 크기와 똑같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보다 낮은 계들에 있는 원인체 부분의 크기와 똑같다. 이리하여 아틀란티스시대 이후로 사실상 여전히 같은 크기였던 육체와는 달리 멘탈체는 인간 자신이 발전함에 따라 크기가 자란다.

멘탈체의 입자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태에 있다. 더구나 그것들은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멘탈체는 이미 멘탈체 내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가지 결합들을 유지할 수 있는 질료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저장소로부터 자기에게 자동적으로 끌어들인다.

멘탈 입자 자체의 극도로 빠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멘탈체는 동시에 일종의 느슨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그 느슨한 조직을 다소 불규칙하게 여러 부분들로 나누는 어떤 줄무늬들이 그 내부에 존재하고 이 부분들 각각은 신체 두뇌의 어떤 부분에 상응한다. 그리하여 각기 형태의 상념은 당연히 그에 맞게 배정된 부분을 통해서 작용한다. 그러나 멘탈체는 아직까지 일반인에게는 아주 불완전하게 개발되어 있어서 아주 많은 부분들이 아직 작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그 부분들에 속하는 상념에 대한 어떠한 시도도, 우연히 완전히 열린 어떤 부적절한 통로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행해져야만 한다. 그러한 주제들에 관한 상념은 (그러한 주제를 이해하는 멘탈체가 발달되어 있지 않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서투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그것이, 우리가 이후의 장(章)에서 보다 충분히 살펴보겠지만, 얼마의 사람들은 수학에 대한 이해력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간단한 수학적 절차도 행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또 얼마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하며 즐기지만 어떤 사람은 한 선율을 다른 선율과 구별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은 상념들은 멘탈체를 구성하는 질료중 보다 미세한 질료의 진동들을 만들어내고 그 미세한 질료의 특별한 인력(중력)에 의하여 달걀모양체의 윗부분에 뜨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이기심과 탐욕과 같은 나쁜 상념들은 보다 조야한 질료의 진동들이다. 그 조야한 질료는 달걀모양체의 아래부분쪽으로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이기적인 상념에 빈번하게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은 대개 멘탈체의 아랫부분을 팽창시키고 보다 높은 큰 끝부분이 하향하는 달걀모양체의 모습을 대체로 드러낸다. 그러한 저차원의 상념들에 탐닉하지 않고 고차원의 상념들에 열중한 사람들은 멘탈체의 아랫부분이 보다 작은 끝부분의 모양으로 이루어진 달걀모양체의 형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들은 모두 단지 일시적이다. 왜냐하면 달걀모양체의 균형이 점차로 스스로를 회복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멘탈체의 색깔들과 줄무늬들을 연구함으로써 투시자는 그의 성격과 그 사람이 현 생애에서 달성한 진전을 지각할 수 있다.[비슷하게 원인체의 특징들로부터 투시자는 그 사람이 동물계(물질계)를 떠났을 때(각성했을 때) 원인체가 원래 형성된(물질계에 처음 내려올 때 형성된) 이래로 어느정도의 진전을 이루었는지를 볼 수 있다.

멘탈체는 사람이 도달한 지적발달의 단계에 따라 그 구성요소에 있어서 다소간 정묘함에 차이가 있다. 멘탈체는 그 입자들의 섬세함과 급속한 움직임에 의해서 멘탈체에 활발한 무지개 빛을 주면서 아주 아름답게 만든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지성이 보다 고차원으로 진화되고 순결하고 숭고한 화제에 주로 사용됨에 따라 비상하게 방사하는 하나의 황홀한 아름다움이 된다. 우리가 나중에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모든 상념은 햇빛이 폭포를 비출때 폭포의 확산으로 생기는 색채의 작용―색채와 생생한 섬세함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가 많이 있지만―과 같은 것으로 설명되는 색채작용을 수반한 채로 멘탈체에서 진동들을 일으킨다.

모든 멘탈체는 대개 멘탈단위mental unit라 불리우는 네번째 하위멘탈계에 속하는 단 하나의 분자 또는 단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전화신들을 통해서 지금까지 여전히 인간과 더불어 남아있다. 우리가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계속해서 앞으로 보겠지만 멘탈체의 질료는 연속된 삶과 죽음 속에서 계속해서 흩어지고 다시 모이지만 멘탈단위는 전 기간동안 안정된 중심으로서 남아있다.

멘탈단위는 멘탈체의 중심센터로 여겨질 수 있고 멘탈체 전체의 모습은 멘탈단위의 여러 부분들의 상대적인 활동성에 상당히 의존한다.

물론 멘탈단위는 물질의 일곱개의 큰 “유형” 또는 “광선들” 중 하나에 속할런지도 모른다. 인간의 모든 영원한 원자들과 멘탈단위는 같은 유형이나 광선에 속한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이리하여 멘탈단위는 원인체, 아스트럴체 그리고 에텔체와 마찬가지로 멘탈체에 있어서 영원한 원자들에 해당되는 것이다.

영원한 원자들과 멘탈단위의 용도는 그 자체내에 경험에 관련된 체들이 경험하는 모든 경험들의 제결과諸結果를 진동력들vibrating powers로 보존하는 것이다.

마음의 다양한 제활동들은 당연히 어떤 부류나 부분에 귀속되고 이러한 부분들은 멘탈단위의 다른 여러부분들을 통하여 표현된다. 멘탈단위들은 결코 똑같지는 않다. 그것들은 유형에 따라 그리고 또한 그것들의 주인의 발달 정도에 따라 크게 다르다. 만일 멘탈단위가 안정된 채로 있으면 거기서부터 방사되는 힘은 환등기에 있는 빛나는 빛이, 슬라이드를 통과해서 환등기와 화면사이의 공중에서 형성되는 커다란 방사형의 깔대기 모양의 빛을 만드는 것과 똑같이, 멘탈체 내부에서 많은 깔때기 모양을 만들 것이다.

이 경우 멘탈체의 표면은 (내부의 멘탈 단위에서 투영된) 그 결과가 외부로부터 멘탈체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 눈에 보이게되는 것은 바로 그 표면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화면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하여 만약 멘탈단위가 안정되어 있다면 멘탈체의 표면에 형형색색의 많은 그림들이 보여진다. 그것들은 아마도 어두운 공간들 사이에 다양한 유형의 상념이 존재하는 사람에게 공통적인 다양한 유형의 상념들을 나타낸다. 그러나 모든 다른 화학적 결합들과 같이 멘탈단위는 그 축을 중심으로 급속히 회전하고 있고 이 결과로해서 멘탈체에서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아주 분명히 뚜렷한 윤곽을 가지고 항상 똑같은 폭은 아니지만 쉽게 구별할 수 있고, 대개는 거의 똑같은 상대적 위치에 있는 띠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으로 보이게 된다.

학도는 지금쯤 색채들과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완전한 목록은 ≪아스트럴체Astral Body p11-12≫에 주어져 있는데 여기서 반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열망적인 상념이 존재하는 경우엔 그 상념이 멘탈체의 달걀모양체의 정상에 아름다운 작은 자주빛 원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열망자가 (진리의) 길의 입구에 다가감에 따라 이 원은 크기와 광휘에서 증대한다. 비전가에 있어서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색깔의 찬란한 빛을 발하는 하나의 모자같다.

그 아래 종종 헌신적인 상념의 청색띠가 오는데 종교가 정말로 깊고 순수한 소수의 사람들의 경우외에는 대개 다소간 좁은 띠이다.

그 다음에 폭이 훨씬 더 넓은 애정적인 상념의 띠가 올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애정이 나타내는 애정의 유형에 따라 약간의 진홍색이나 장미색을 띨 수도 있다.

애정의 띠 옆에 그리고 빈번히 애정의 띠와 밀접히 연관되어 자부심과 포부의 상념을 표현하는 적황색 띠가 발견된다.

다음에 자부심과 밀접히 관련하여 각각 철학적 및 과학적 유형의 상념을 나타내는 두 개의 띠로 주로 나누어지는, 지성의 노란색 띠가 온다. 이 노란색의 위치는 사람들이 다양한 만큼이나 아주 다양하다. 때때로 그것은 헌신과 애정을 넘어 달걀모양체의 상위부분 전체를 채운다. 그리고 그 경우엔 자부심이 일반적으로 너무 지나친 사람들이다.

막 기술된 색채 집단아래 달걀모양체의 중간 부분을 차지하면서 구체적인 모습에 해당하는 넓은 띠가 있다. 이것은 모든 일반적인 상념체들이 생기는 멘탈체부분이다. 여기서의 주요한 색은 사람의 기질에 따라 종종 갈색이나 노란색을 띤 녹색이다.

이보다 더 폭넓고 다양한 부분은 멘탈체에서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구체적인 형상들로 가득찬 멘탈체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극소수만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들은 분명하고 윤곽이 뚜렷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그것들은 극도로 모호하고 흐릿하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멘탈체는 가장 질서정연한 형태로 분류되고 이름이 붙여지며 정돈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전혀 정돈되지 못하고 완전한 혼란속에 남겨져 있다.

달걀모양체의 아랫부분에 온갖 종류의 바람직하지 않은 상념들을 표현하는 띠들이 온다. 일종의 진흙같은 이기심의 침전물이 종종 멘탈체의 3분의 1이나 절반까지도 채운다. 이위에 증오나 교활함이나 두려움을 표현하는 하나의 띠가 종종 있다. 당연히 사람이 발전함에 따라 이 아랫부분은 사라진다. 그리하여 윗부분이 멘탈체 전체를 채울때까지 점차적으로 팽창한다. 이것은 주로 리드비터가 지은 ≪보이는 인간 보이지 않는 인간Man Visible and Invisible≫의 설명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다.

일반적 규칙은 상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진동은 더 크고 상념이 영적이고 이기적이 아니면 아닐수록 진동은 그 만큼 더 높거나 빠르다는 것이다. 상념의 힘은 광휘를 일으키고 영성은 색채의 섬세함을 일으킨다.

이후의 장에서 우리는 몇몇 전형적인 멘탈체들을 기술하고 다양한 다른 멘탈 속성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표시하는 지를 나타낼 것이다.


제 4 장

제기능


멘탈체는 자아가 구체적인 지성으로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현현할 수 있도록하는 하나의 수용체이다.

마음이란 자아, 즉 진정으로 아는 자로서의 자아의 인식적 측면의 반영이다. 즉 마음은 멘탈체에서 작용하고 있는 자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과 사람을 구별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추구하는 자아라는 것은 마음이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진화의 현단계에서 다섯번째 인류의 사람들이 특별히 멘탈체의 발달에 종사하고 있기때문에 더욱 당연한 것이다.

과거에는 주로 신체가 의식의 수용체로서 활성화되었었다. 아스트럴체도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생명이 활성화되었다. 멘탈체의 활성화는 인류가 지금 더욱 특별히 해야하는 일이다.

<카마kama 즉 감정을 표현하는 아스트럴체의 기능과 더불어 아스트럴체의 개발은 제 4 근원인류Root Race인 아틀란티스인들의 특별한 일이었다. 그것은 제 5 근원 인류의 네번째 아인류sub-race 켈트족의 특별한 일이다.>

위에 진술된 것처럼 제 5 인류가 특별히 발전시키도록 의도되었던 특징적인 것―이것은 제 5 근원인류와 제 5 아인류 둘다에 적용된다―은 마나스manas 즉 마음이다. 마나스는 분별지를 키우고 물건들 사이의 차이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그런 유형의 지성이다.

현재 절반쯤 개발된 상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저항하고 격렬히 반대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견해와 다른 차이점들을 찾는다. 그러나 그 능력이 완전히 개발될 때 여러가지 차이점들은 단지 (여러가지) 차이점을 이해하고 최선의 방법이 어느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조용히 주목받게 될 것이다.

자,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보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는 제 5 아인류Fifth Sub-Race의 현 발전단계에서 다른 사람에 있어서의 약점이, 그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돕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우리가 일어서기 위하여 이용하는 활동무대이며 노예화할 어떤 것이며, 발 아래 짓밟아야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단계에서는 불쾌할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멘탈적 발달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참된 비평 정신은 참된 진전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 5 근원인류의 여섯번째 아인류 뿐만 아니라 제 6 근원인류는 강하게 두드러진 특징들인 영성, 종합력, 연민과 봉사에의 열정을 개발하는 데 주로 종사할 것이다.

그러나 현시대의 인류에서 마음과 감정의 발달단계는 좀더 설명을 필요로 한다. 현재 즉 제 4주기는 주로 욕망이나 감정의 개발을 주로 의도하고 있으며, 제 5주기는 지성을 펼치기 위하여 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불꽃의 주님들’에 의해 제공된 자극때문에 소위 정상 계획의 진행에 앞서 전주기를 이미 상당히 완성했다. 동시에 인간이 오늘날 아주 자랑하는 지성은 일반인이 다음의 주기 즉 5주기의 최고점에 소유하게 될 것에 비하면 극히 미소하다.

“불꽃의 주님들”은 제 3 근원인종 기간중 금성으로부터 이 지구에 와서 곧 우리의 진화를 책임졌다. 그들의 지도자는 인도의 책에선 사나트쿠마라Sanat Kumâra라 불린다. 그는 세 명의 부관외에도 보조원으로서 약 25인의 다른 아데프트Adepts들과 함께 왔다. 또한 약 100명의 보통 금성 인간들이 금성으로부터 넘어와서 (지구의 발전을 위해서) 지구의 평범한 인간 속으로 동화되었다.

비교Secret Doctrine에서 지성이 없는 인간들 속에 불꽃을 사출해서 그들 내부에 지성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언급된 사람은 이러한 위대한 존재들이다. 그들의 활동은 사실 자기적 자극magnetic stimulus의 성격을 띄고 있는데 그들의 영향은 인류를 자신들에게 끌어들여 그들로 하여금 잠재해 있는 불꽃을 개발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개성화 될 수 있게 한다.

이 필요한 여담에서 본론으로 돌아와서, 분석과 연구를 목적으로 우리는 인간을 인간이 사용하는 수용체와 분리하지만, 그러나 자아는 스스로를 현현시키는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하나이다. 의식은 하나의 단위이며, 우리가 의식에서 나누는 구분들은 (1)연구 목적들을 위하여 구분되거나 아니면 (2)우리의 인식능력이 하위의 여러 계에서 작용하는 매체인 기관들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에 생기는 환영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자아the self는 세 가지 측면, 즉 앎knowing, 의지작용willing 그리고 활성화energising를 가지고 있다. 이것들로부터 상념들, 욕망들과 행위들이 여러가지로 생긴다. 그러나 전체 자아가 알고, 의지작용을 하면서 행동한다. 그 기능들이 전적으로 분리된 것은 아니다. 그가 알 때 또한 행동하며 의지를 행사한다. 그가 행동할 때 또한 알고 의지를 행사한다. 그가 의지를 행사할 때 또한 행동하고 안다. 한 기능이 보통 주가되나 때때로는 다른 기능들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주가된다. 그러나 앎―세 기능 중 가장 분리된 것임―이 가장 강하게 집중되어 있을 때까지도 그 앎을 조심스럽게 분석하면 존재하는 것 만큼 식별할 수 있는 잠재적인 활성화와 잠재적인 의지작용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조금 더 설명하는 것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자아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그때 제공된 어떠한 대상의 유사함을 지각할 수 있는 지식적 측면이 현현된다. 자아가 상태의 변화에 열중하면서 집중되어 있을 때 그때 의지적 측면이 나타난다. 어떠한 대상이 존재하여 의지가 그 대상과 접촉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내어 놓을 때 그때 행동적 측면이 나온다. 이리하여 이 세 기능은 자아의 별개의 부분들이 아니고 세 개가 하나로 합쳐진, 즉 복합된 것이 아니라, 세 가지 방식으로 현현하는 하나로서 분리가 불가능한 전체이다.

동양의 요가의 관점에서 보면 “마음”은 개성화된 의식 즉 여러 활동을 포함한 의식의 전체를 말한다. 요가는 의식의 과정을 이렇게 기술한다.

(1)대상의 인식, 즉 지성의 측면으로 멘탈계의 지배적인 특징이다.

(2)대상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 즉 욕망적 측면으로 아스트럴계의 지배적인 특징이다.

(3)대상을 성취하려는 노력 즉, 활동적인 측면으로 물질계의 지배적인 특징이다. 붇디계buddhic Plane에서는 순수 이성으로서의 인식이 탁월하다.

이러한 측면들 각각은 항상 존재하지만 어떤 때는 하나의 측면이 우세하고 다른 때는 다른 측면이 우세하다.

이제 다시 마음에 대하여 더 상세히 조사할 때 추상적 사고작용은 상위 멘탈체 즉 원인체를 통하여 스스로를 표현하는 자아의 작용이다 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구체적인 사고 작용은 (이전에 말해진 바와 같이) 종종 하위 멘탈체로 불리는 멘탈체에서 작용하는 자아에 의해서 수행된다. 구체적 사고의 메카니즘에 우리는 지금 상세히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기억과 상상이 시작되는 곳은 멘탈체에서 이다. 기억의 기원은 물질의 비활성 상태인 타마스Tamas에 있는데 에너지에 의해서 작용되면, 한 번 시작된 진동들을 반복하는 성향이 있다.

멘탈체는 이렇게 자아, 즉 실제 사고자의 수용체이며 자아 자신은 원인체에 거주한다. 그러나 멘탈체는 결국엔 하위 멘탈계에서 의식의 수용체가 되도록 되어 있지만, 또한 일반적인 각성 의식에서는 보통 마음이라 불리는 모든 현현을 통해서 아스트럴체 및 멘탈체에 작용하며, 그리고 또한 그들을 통하여 작용한다.

세부적으로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구체적인 사고행위가 멘탈체의 질료를 진동하게 한다. 이 진동은 저 옥타브에 다시 말해 사고자의 아스트럴체의 조야한 질료에 전달된다. 거기서부터 이번엔 뇌의 에테릭 입자들etheric particles이 영향을 받고 그것들을 통하여 마침내 육체의 보다 조밀한 회색질료가 활동하게 된다. 이리하여 하나의 상념이 물질계의 두뇌에서 활발한 의식으로 전환될 수 있기 전에 이러한 연속적인 단계가 모두 취해져야만 한다.

교감신경계는 주로 아스트럴체와 관련되어 있고, 반면에 뇌척수신경계는 멘탈체를 통하여 작용하는 자아의 영향 하에 있다.

이 상기의 과정은 좀더 설명되어질 수 있다. 물질 두뇌에 있는 모든 입자는 아스트럴에 대응하는 것이 있으며 아스트럴은 멘탈에 대응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사할 목적으로 전 물질적 두뇌가 한 입자 두께로 펼쳐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상응하는 아스트럴 및 멘탈 질료와의 상관관계는 아스트럴이 물질질료 약간 위에, 멘탈이 아스트럴 질료 약간 위에 있는 상태로 비슷하게 층층으로써 또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더욱 가정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모두가 서로서로 상응하는 다양한 밀도를 지닌 세 층의 질료를 가지지만, 그것들은 물질 입자들과 아스트럴 입자들 사이에 그리고 아스트럴 입자들과 멘탈 입자들 사이 여기저기에 통신선들이 존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혀 결합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러한 상념을 멘탈계에서 아스트럴계로, 또 그 아래로 보내기를 원한다면, 많은 통로들이 아직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념이 하향로를 발견할 때까지 멘탈 질료의 뇌를 측면으로 통과하면서 길을 이탈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결국엔 상념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통로를 통과하고 그 다음에 물질계 수준에 도달할 때 상념을 표현할 수 있는 물질적인 입자를 만나기 전에 다시 물질 두뇌에서도 측면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한 방법이 어색하고 서투르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리하여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왜 수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음악, 예술 등에 대한 취미가 전혀 없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유는 특별한 재능이나 주제를 담당하는 뇌의 부분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된 사람인 아데프트에게는 모든 입자는 자신의 선이나 통로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뇌의 모든 부분에서 똑같이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상념은 자신의 적절한 통로를 가지고 있는데 그 통로를 통하여 상념은 물질적 두뇌에 상응하는 적절한 구성 물질 질료에 곧 바로 내려간다.

만일 우리가 개략적으로 자아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들로부터 내부에 있는 자아에게 작용하는 의식의 과정을 분석한다면, 우리는 먼저 외부로부터 오는 신체에 대한 접촉을 관찰하는데 이 접촉은 아스트럴체에 의해 감각으로 바뀌고, 그 감각은 멘탈체에 의해 하나의 지각 대상으로 변모된다. 또한 그 지각 대상들은 한층 다듬어져서 하나의 개념이 된다. 이리하여 미래에 만들어질 가능성있는 모든 상념을 위한 (기본적인) 구성 질료인 관념형태를 보존한다.

비자아와 이루어지는 모든 접촉은 멘탈 구성 질료의 부분을 외부 대상에 대한 그림이나 이미지로써 재배열함으로써 멘탈체를 부분적으로 변경시킨다.

형태적 측면에서 사고작용은 이러한 이미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 구축이다. 생명적 측면에서 사고작용은 아는자 자신 속에 상응하는 변경으로 (내재적으로) 구성되어 진다.

아는자의 특별한 일은 멘탈체에서 형성된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일 외에 이미지들을 사고로 변화시키는 일도 한다.

사고자가 시간 요소를 더하면서 계속해서 똑같은 이미지를 재형성 할 때 기억과 기대가 나타난다.

이렇게 작용하는 의식 자체는 물질계에 의해 제공되는 재료들로부터 조립된 것이 아니라 바로 보편적 마음(우주심)으로부터 직접 의식 속으로 반영되는 관념들(이상들)로서 위로부터 아래로 반영된 것으로 더욱 개화된illuminated 것이다.(제 27장을 보라)

인간이 추리를 할 때 자기자신의 어떤 정보를,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정보에다 첨가하고 있는 중이다. 마음이 자신에게 제공된 자료들에 작용함에 따라 다양한 감각의 흐름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혼합하며, 즉 다양한 감각의 흐름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결합시키면서 마음은 지각된 것들을 함께 연결시킨다. 이러한 관계를 구축하는 일, 즉 통합하는 일은 사실상 아는자의 특별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지닌 특수성이다.

멘탈체의 그러한 활동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스트럴체에 작용하고 이것은 다시 에텔체 및 육체에 작용한다. 그 다음에 감각체sense body의 신경 물질은 자신에게 보내어진 자극들 하에서 진동한다. 이러한 활동은 자체가 전기적인 방출로 나타나며 자기적 흐름이 복잡한 내적 관계를 일으키는 입자들 사이에서 작용한다.

이것들은 소위 하나의 신경로를 남기는데 또 다른 자기흐름이 가로지르는 것보다 더 쉽게 따라 흐를 수 있는 길이 된다. 그러므로 특별한 진동에 관련된 일단의 입자들이 똑같은 관념을 되풀이하는 의식에 의해 활성화된다면, 그 진동은 이미 형성된 길을 따라 쉽게 흐르고, 이리하여 다른 일단의 입자들을 재 각성시키고 활성화시켜서 의식에 하나의 연합된 관념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관념의 연합 메카니즘인데 이와같은 제형상들의 멘탈적 중요성은 모든 심리학 학도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여기서 강조할 필요가 없다.

마음의 특별한 일이 의식되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라는 것이 위에 나타나 있다. 이 문구는 마음의 모든 다양한 여러 과정들을 망라한다. 그러므로 힌두인은 마음이 오감을 통하여 들어오는 감각들을 받아들여 그들로부터 하나의 관념을 창출하면서, 감각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지각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에 마음을 여섯번째 감각이라고 부른다. 마음은 또한 감각들의 “Rajah”라고 언급되어 왔다.

그러므로 또한 수트라sûtra의 의미는 “Vrttis” 즉 마음의 여러 양식들은 5가 원소pentads이다 라는 것이다. 5가 원소라는 말은 화학자들이 원자가 어떤 요소를 결합하고 형성하는 능력에 관하여 언급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마음은 감각기관으로부터 다섯 개의 다양한 감각광선, 다섯 개의 아는 방식, 즉 즈나넨드리야스jñânendriyas를 모아 그것들을 하나의 광선으로 결합하는 프리즘과 같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다섯 개의 감각기관 뿐만 아니라 다섯 개의 행동기관Karmendriyas을 고려한다면 그때는 마음은 11번째 감각이다. 그러므로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îtâ는 “열 개의 감각들과 하나의 감각”을 말한다.

마음을 여섯번째 “감각”이 아니라 멘탈체 그 자체의 감각들로 언급할 때 우리는 신체의 감각들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멘탈체는 멘탈체 전체에 걸쳐 자기에게 어떻게든지 인상을 주는 모든 것들을 의식하면서,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멘탈체 모든 표면을 통해서 멘탈계의 대상들과 접촉한다. 이리하여 멘탈체에서는 시각, 청각, 감각, 미각 및 후각과 같은 감각들을 특별히 지각하기 위한 기관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감각들”이라는 말은 잘못된 명칭이다: “멘탈 감각”이라 부르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이에 의해서 상념들을 말로 나타낼 필요조차 없이 상념 전이Thought transference에 의해 직접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스트럴계에서 존재하는 멘탈 언어의 장벽은 더 이상 멘탈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훈련된 학도가 멘탈계에 들어가서 다른 학도와 의사소통을 한다면 “말”을 할 때 그의 마음은 즉시 색깔과 소리와 형태로 말한다. 그리하여 단지 상념의 한 부분만이 물질계에서의 경우처럼, 우리가 말이라 부르는 상징에 의해서 보여지는 대신에 전 상념이 색깔을 띤 그리고 음악적인 리듬이 있는 그림으로 전달된다.

신들의 언어인 색채언어로 위대한 비전가들에 의해 쓰여진 어떤 책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언어는 많은 첼라들(즉 매스터들의 제자들)에게 알려져 있으며 형태와 색채에 관한한 멘탈계의 언어로부터 취하여진다. 멘탈계에서는, 전술한 바와같이 하나의 상념은 형태, 색채 및 소리를 동시에 일으킨다.

이는 마음이 색채와 소리와 형태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멘탈 질료에 있어서 하나의 복잡한 진동인 하나의 상념을 마음이 생각하기 때문이며, 상념은 자신이 일으키는 여러 진동에 의하여 이 모든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멘탈체에서 사람은 그와 분리된 감각기관들로부터 자유롭고, 물질계라면 자신을 동료들과 분리시키고 다른 것으로 표현할(present) 모든 진동을 매순간 잘 받아들인다.

오늘날 일반인의 멘탈체는 아스트럴체와 육체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덜 개발되어 있다. 진화의 현단계에서 정상인은 자신을 두뇌의식, 즉 뇌척수신경계에서 작용하는 의식과 동일시한다. 여기서 그는 자기자신을 물질계에서 즉 의식의 각성 상태에서만 분명하고 일관성있게 “나”로서 느낀다.

그러나 뇌척수계에 관련된 부분을 제외한다면, 일반인의 의식은 아스트럴계 즉 감각의 영역에서부터 작용한다.

그러나 제 5 인종의 더욱 고도로 진화된 사람들에게서는 의식의 중심은 하위 멘탈계로부터 작용하는 멘탈체에 있으므로 (아스트럴적인) 감각들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관념들에 의하여 감동을 받는다.

이리하여 일반인은 아스트럴계와 멘탈계에서 자아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의식만이 작용한다· 그는 자신 내에 아스트럴 및 멘탈적 변화들을 인식하나, 자기자신에 의하여 내부로부터 시작된 변화들과 그의 아스트럴 및 멘탈수용체에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야기된 변화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에게 그것들은 모두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똑같은 변화들이다.

그러므로 물질계가 그에게 유일한 “실제적인” 세계이고 아스트럴 및 멘탈계에 속하는 의식의 제현상들은 “비현실적”, “주관적인”, “허구적인” 것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또 다른 세계들로부터 자기의 아스트럴 및 멘탈체에 주어진 영향들의 결과로써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상상”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여긴다. 사실 그는 아스트럴계와 멘탈계에 관해서는 어린애이다.

그러므로 개발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 멘탈체는 그의 지구에서의 삶 동안에는 의식의 독자적인 수용체로서 멘탈계와 분리되어 있어서 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한 사람이 자기의 멘탈 능력들을 훈련할 때, 자기가 그러한 것들의 활동을 의식할 수 있기 전에, 이러한 능력들은 아스트럴 및 물질 질료가 입혀져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멘탈체의 주요 기능들을 아래와 같이 일람표로 만들 수 있다.

(1) 구체적인 사고작용의 목적을 위하여 자아의 수용체로서의 용도

(2) 아스트럴체와 에텔 뇌 그리고 뇌・척수계를 매개로 작용하는 신체를 통하여 그러한 구체적인 관념들을 표현하는 것.

(3) 기억력과 상상력을 개발하는 것.

(4)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멘탈계에서 의식의 독자적인 수용체로서의 용도. 위의 기능들에다가 그 이상의 기능이 추가되어야 한다. (이 기능에 대한 설명은 부득이 이후의 장章에서 진행해야만 한다) 즉,

(5) 매번 지상의 삶에서 모아진 경험의 결과들을 융합하고 그 결과들의 정수를 원인체에 살고 있는 진정한 사람(진아)에게 보내는 것.

우리는 여기서 동물계 또한 어느 정도 멘탈 질료를 사용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좋다. 고등가축들은 물론 그들의 사유가 작용할 수 있는 테두리는 작고 제한되어 있어 능력 자체가 인간의 경우보다는 훨씬 덜 강하지만 적어도 의심없이 사유능력을 발휘한다.

일반 동물의 경우 멘탈계의 최하위 부분의 질료만이 사용되지만 높이 개발된 가축에게서는, 네 개의 하위계층 최고의 계의 질료가 어느 정도 활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 5 장

전형적인 예들


진화되지 않은 인간의 멘탈체는《인간,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Man Visible and Invisible》그림6에 설명되어 있다. 색깔들이 동일한 한, 멘탈체는 평정상태에 있는 아스트럴체와 상당히 일치한다. 그러나 멘탈체는 또한 이것 휠씬 이상이다. 왜냐하면 정신적이며 지성적인 사람이 지금까지 개발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 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발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엔 대단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상당히 중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살펴 볼 것이다.

그러한 멘탈체를 자세히 조사할 때 우리는 정상 부근에서 선명하지 않은 노란색을 본다. 색깔의 우중충함은 지성이 특별히 이기적인 목적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주긴 하지만 약간의 지성을 나타낸다.

회색을 띤 청색에 의해 표시되는 헌신은 주로 두려움이 스며들어간 자기의 이익을 고려하는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는 물신숭배임에 틀림없다. 우중충한 진홍색은 지금까지 주로 이기적임에 틀림없었던 사람의 애정의 시작을 암시한다.

우중충한 오렌지색의 띠는 자부심을 나타내지만 아주 저차원적인 것에 속한다. 많은 주홍색은 분노적인 강한 경향성을 표현하는데, 그 분노는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명백히 확 타오르는 분노이다.

신체의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넓고 칙칙한 녹색 띠는 사기, 배반과 탐욕을 보여주는데 후자의 특성은 갈색의 색조에 의해 나타난다. 오오라의 밑 부분에 전반적인 이기심과 어떤 바람직하지 않은 특성을 암시하는 일종의 침전물 같은 우중충한 색깔이 있다.

개발되지 않은 사람의 멘탈체는 아직 조직되어 있지 않고 주로 멘탈계의 최하위계로부터 온 소량의 멘탈 질료만 포함하고 있다. 멘탈체는 아스트럴체로부터 온 감정의 폭풍들에 의해 진동이 발생하는 것처럼 하위의 여러 체들로부터 온 진동에 거의 전적으로 반응한다. 이러한 아스트럴 진동들에 의해 자극될 때를 제외하고는 멘탈체는 거의 항상 고요한 상태에 있으며 아스트럴체나 에텔체의 자극 하에서도 반응이 매우 느리다. 어떠한 명확한 활동도 멘탈체 내부로부터는 생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외부세계로부터의 충격이 (멘탈체에) 분명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하다.

그러므로 충격이 격렬할수록 인간의 진보를 위해서는 더 좋다. 아스트럴체에서 감정의 폭풍들을 일으키면서 분방한 즐거움, 분노, 고통, 공포와 그 밖에 다른 정욕은 멘탈 의식을 자극한다. 그러면, 멘탈의식은 외부로부터 자기에게 가해진 인상들에게 자기자신의 인상 중 어떤 것을 더한다.

보통사람은 7번째 즉 최하위의 하위 멘탈계의 질료만을 사용한다. 그것은 아스트럴계에 매우 가깝기 때문에 그의 모든 상념들이 아스트럴 즉 감성 세계로부터 온 반영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제까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6번째 하위계를 다룰 수 있었다. 확실히 위대한 과학자는 6번째 계의 질료를 상당히 사용할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하위계의 질료와 6번째 계의 질료를 가끔 뒤섞어버리므로 다른 사람들의 여러 발견들과 발명품들을 시기한다. 제 5번째 하위계의 질료는 아스트럴계의 영향력으로부터 더욱더 자유롭다. 원인체 옆에 있는 제 4하위계는 아스트럴 진동들에 말려들 가능성으로부터 아주 멀리 있다.

인용된 작품의 p.93의 맞은편에 있는 그림9에 평범한 사람의 멘탈체가 설명되어 있다. 그 안에는 앞 그림에 비해서 더 많은 지성(노랑색), 사랑(장미빛)과 헌신(청색)이 균형이 잡힌 채로 보인다. 또한 그러한 특성들 각자가 앞에 비해서 두드러지게 향상되어 있으며 색깔들은 훨씬 더 뚜렷하다.

자부심의 정도는 이전만큼이나 높지만 지금은 더 높은 수준에 있으며 사람은 그의 야수적인 힘이나 잔인함 대신에 자기의 좋은 특성들을 자랑한다.

상당한 양의 주홍색이 존속하는데 이것은 분노에 원인이 있음을 나타낸다. 녹색은 기만이나 교활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융통성과 적응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분명히 이전보다 더 좋은 것이다.

원시인에게는 녹색은 녹색이 나타내는 특성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분노의 주홍색이 필요로 하는것보다 더 조야(거친)한 상태의 질료를 필요로 하기에 오오라 구성부위에서 보다 아래에, 즉 주홍색 아래에 있다.

일반인의 오오라에서는 녹색은 주홍색 위에 있다. 그리고 녹색이 필요로 하는 형태의 질료는, 분노의 주홍색을 위하여 요구되는 형태의 질료보다 훨씬 덜 조야하다. 이리하여 멘탈체에 질료의 일반적 특성에 있어서의 발전이 있어왔던 것이다.

여전히 오오라에서 이기심을 나타내는 많은 부분의 갈색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그 색은 야만인의 경우에서보다 약간 더 따뜻하고 덜 사납다.

이리하여 일반인의 멘탈체는 크기가 아주 증대되고 어느 정도의 조직성을 보여주고, 멘탈계의 여섯번째, 다섯번째, 네번째 하위계로부터 온 약간의 질료를 담고 있다.

신체와 아스트럴체에서처럼 멘탈체도 그러하다. 운동은 멘탈체를 증대시키고, 사용하지 않으면 멘탈체는 위축되고 마침내 파괴된다. 멘탈체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진동은 동조적으로 진동하지 않는 질료를 멘탈체로부터 던져내 버리고, 실제로 무한한 (우주의) 창고로부터 끌려온 적합한 구성 질료들로 동조하지 않는 질료를 대체함으로써 멘탈체의 구성 요소에 변화를 일으킨다.

같은 책의 p.121의 맞은편에 있는 그림22는 개발된 사람의 멘탈체를 설명한다. 여기는 자만심(오렌지색), 분노(주홍색) 그리고 이기심(갈색)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남아 있는 색깔들이 확장되어 전 달걀모양체를 가득 채우고 또한 색조에서 아주 향상되어 매우 다른 인상을 준다. 자아의 모든 상념이 사라질 때 색채들은 더욱 정묘해지고 섬세해지게 된다. 게다가, 새롭고 더 큰 특성들 즉 영적인 열망을 달성했음을 나타내는 황금빛의 별들이 포함된 순수한 보라색이 오오라의 정상에 나타난다.

개발된 사람의 원인체를 통하여 위로부터 방사되는 능력은 좀더 적은 힘을 가지지만 멘탈체를 통하여 작용한다.

우리가 색채의 옥타브들에서 처럼 멘탈계의 상위와 하위 수준들에 속하는 색조들 간의 차이를 고려할 때, 아스트럴체가 멘탈체의 하위계의 거의 복제인 것처럼, 멘탈체는 지금 거의 원인체의 복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개발된 사람의 멘탈체가 원인체의 반영이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고급자아의 충동들만을 따르기를 배우고 특별히 그것들로 자기의 이성을 지도하도록 배워왔기 때문이다. 사실 원인체에서 어떠한 특성을 표현하는 색은 멘탈체에서 뿐만 아니라 아스트럴체에서도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러나 색은 이미 진술한 바와 같이 하위계들로 내려옴에 따라 덜 섬세해지고 덜 빛나게되며 덜 정묘해진다.

영적으로 개발된 사람에게 있어서 멘탈 질료는 네 개의 낮은 멘탈 하부 질료가 더 미세하고 다양한 것만을 포함하도록 보다 조야하게 결합된 멘탈 질료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다시 이것들 중 네번째와 다섯번째의 하위계의 구성 질료들은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하위계의 질료들을 훨씬 능가한다. 이리하여 (발전된 사람의) 멘탈체는 (발전하지 못한 사람의 멘탈체보다) 지성의 모든 고차원적인 작용과 고급 예술의 섬세한 접촉과 더욱 고상한 감정의 순수한 전율에 더 잘 반응한다. 이러한 멘탈체는 원인체에 있는 진정한 자아 즉 생각하는 자로부터 오는 모든 자극을 재현할 준비를 신속히 하고 있다. 사고자는 하위 멘탈 질료에 표현할 수 있다.

영적인 사람의 아스트럴 및 멘탈체는 너댓 개의 훌륭한 감정들, 무엇보다도 사랑, 헌신, 연민과 지성적인 열망을 계속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당연하다.

아르하트(제4의 위대한 비전을 이룬 사람)의 멘탈체와 아스트럴체가 자신의 특징적인 색채는 거의 가지지 않고, 자신의 하위 옥타브들을 표현할 수 있는한 원인체의 재현이다. 그들은 전혀 말로 표현하거나 그림으로 묘사할 수 없는 아름다운, 아른아른하게 빛나는 무지개색―일종의 유백색을 띤 진주층같은 효과―을 가진다.

사무적인 사람은 그의 멘탈체에 일반적으로 많은 양의 노란색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다양한 색채 띠들은 대개 균형이 잡혀있고 정연하다. 그는 직관적인 사람보다 훨씬 덜 감정적이고 상상적이어서 종종 어떤 점에서는 능력과 열의가 훨씬 적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실수를 훨씬 적게하는 경향이 있고 그의 행동은 일반적으로 조심스럽게 잘 행해질 것이다.

마음의 과학적이고 정연한 습관은 아스트럴체에 존재하는 색채의 배열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들은 규칙적인 띠들로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그들사이의 구별선들은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직관적인 사람의 멘탈체에는 훨씬 많은 청색이 있지만 색깔들은 일반적으로 흐릿하고 멘탈체 전체가 고르게 잘 조절되어 있지 못하다. 그는 보통 형태의 멘탈체를 가진 사람보다 많은 고통을 겪지만 때때로 그 고통을 통하여 그는 급속한 진보를 이룰 수 있다.

물론, 완벽한 사람에겐 열정과 갈망과 꾸준함과 규칙성이 그것들을 대신하는데 이것은 단지 어느 것이 먼저 획득되느냐의 문제이다.

위에서 열거된, 멘탈체에서 색채들로 표현되는 특성들 외에 폭넓게 말해 색채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형태에 의해 표현되는 용기, 위엄, 쾌활함, 진실함 등등과 같은 많은 다른 특성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멘탈체의 구조상의 차이 또는 멘탈체 표면에서의 변화에 의해 나타난다.

위에서 기술된 다양한 색채고리나 띠 내에 다소 명확하고 두드러지게 평행으로 된 줄들이 보일 수 있는데 사람의 많은 특성은 이러한 줄들을 조사함으로써 판단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강한 의지를 가지는 것은 전 멘탈체에 아주 명확한 선들이 존재하게 한다. 모든 줄들과 방사들은 꾸준하고 확고하며 명확히 구별할 수 있다. 반면에, 의지가 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의 경우에는 이러한 선이 현저히 확고하지도 강렬하지도 않다. 다양한 특성들을 구별하는 선들은 분명하지 않게 되고 그 줄들과 방사들은 작고 약하며 흔들린다.

용기는 확연하며 아주 강하게 표시되는 선들에 의하여, 특히 자부심과 연결된 오렌지색띠에서, 그리고 보다 높은 특성들을 나타내는 색채들이 안정되고 지속적인 빛을 뿜어냄으로써 알게 된다.

두려움이 사람을 압도할 때는 납빛 회색 안개로 희미해지고 압도된다. 그리고 평행의 줄들은 맥동하는 젤리형태의 떨리는 덩어리 속에서 상실되는데 그때 사람은 자기의 수용체를 지도하며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위엄 또한 용기를 표현하는 멘탈체와 똑같이 주로 스스로를 표현하지만 용기의 특성들과는 전혀 달리 안정된 꾸준함과 확신으로 표현한다.

진실함과 정확성은 구체적인 형태를 담당하는 멘탈체의 줄 부분에서 규칙성과 거기에 나타나는 상들의 명확함과 정확함에 의해서 아주 분명히 표현된다.
충성衷情은 애정과 헌신의 강화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애정과 헌신을 쏟아부음에 의해서 달걀모양체의 특정부위가 발달하게 되고 그 부위에 의해서 우리는 알게된다. 충성과 애정과 헌신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감정들의 대상에 대해서 아주 강하고 영속적인 이미지를 형성시킨다. 그것은 사고자의 오오라에 남아 계속 떠돌다가, 그의 상념이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대상으로 향할 때, 그가 쏟아붇는 애정은 정상적으로 새로운 영상을 만드는 한편, 이미 존재하고 있는 영상은 강화시킨다.

기쁨은 멘탈체와 아스트럴체가 전체적으로 밝아지거나 광채가 남으로써 나타난다. 기쁨은 또한 체들이 특별히 물결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인 쾌할함은 위의 것이 약간 변형된 형태로 역시 보기 좋은 지속적인 고요함 속에서 나타난다.

한편 놀라움은 그 놀라움이 즐거운 것이라면 애정의 띠에서 갑자기 피어오르듯이 빛을 수반하는 멘탈체의 날카로운 수축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놀라움이 불쾌한 것일 때는 달걀모양체의 하위 부분에 대부분 아주 많은 양의 갈색과 회색을 포함하여 펼쳐지는 색채변화에 의하여 일어나게 된다. 이 수축은 대개 아스트럴체와 신체 양쪽에 전달되고 때때로 태양신경총(의기 소침함과 병을 유발시킨다)과 심장센터(이 경우엔 심장을 갑자기 고동치게 해서 심지어 죽음도 유발시킨다)에 영향을 미치는 특히 불쾌한 감정을 종종 일으킨다. 그리하여 갑작스러운 놀라움은 경우에 따라서는 약한 심장을 가진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경외감은 멘탈체의 헌신적인 부분에서 심오한 변화를 동반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경이驚異와 똑같다. 멘탈체의 헌신적인 부분은 주로 이 영향 하에서 팽창하고 그 부분의 줄들은 더욱 강렬하고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신비적인 상념과 심령적인 능력들의 존재는 물질계에는 거의 똑같은 것이 없는 색채들에 의해 나타난다.

사람이 그의 상념을 이전에 언급된 하나 이상의 통로 안으로 강하게 흐르도록 하면서 멘탈체의 어떠한 부분을 사용할 때 그로 인해 색깔은 밝게 되고 그동안 멘탈체는 급격히 진동한다. 뿐만 아니라, 그 상념에 상응하는 멘탈체 부분은 대개 일시적으로 팽창하고 크기가 증대하여 당분간 달걀모양체의 균형을 깨뜨린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러한 팽창은 영속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러한 형의 상념이 꾸준히 증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떤 과학적인 연구를 시작하고 그로인해 갑자기 이전보다 더 많이 그 방향으로 그의 상념을 돌린다면 최초의 결과는 앞서 설명되어진 것과 같은 그러한 돌출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지금까지 해온 것과 같은 수준으로 과학적인 주제들에 그의 상념의 양을 유지한다면 그 돌출부는 점차적으로 달걀모양체의 전체 윤곽 속으로 다시 가라앉지만 색채의 띠는 전보다 더 넓어지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의 과학적 주제에 대한 관심의 강도가 꾸준히 증가한다면 그 돌출부는 그 띠의 폭이 넓어지더라도 여전히 두드러진 상태에 있을 것이다.

균형이 맞지 않는 발전을 초래하는 전문화에 의하여 멘탈체에 해가 가해질 수도 있다. 멘탈체의 어떤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개발되고, 마찬가지로 중요한 다른 부분에서는 균형있게 개발되지 않게 된다. 모든 면에서 조화롭고 균형잡히도록 개발하는 것이 추구해야할 목표이며, 이를 위하여 조용한 자기 분석과 목적을 위한 수단의 명확한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주제의 측면은 이후의 장에서 고려할 것이다.

멘탈체 내에서의 질료의 끊임없는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똑같은 현상이 아스트럴체에서도 또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스트럴체가 갑작스런 감정으로 인해 어지럽게 된다면 모든 질료들이 맹렬한 허리케인 폭풍에 의한 것처럼 여기저기로 휩쓸려 버리고 당분간 색채들은 상당히 많이 뒤섞이게 된다. 그러나 곧 다양한 형태의 질료의 특정한 중력에 의하여 전 배치는, 스스로 분류되어 다시 한 번 일상적인 띠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때까지 그 질료 입자들은 비교적 드물긴 해도 그들 자신의 띠를 떠나고 다른 띠에 침입하지만 항상 이들 띠들의 주변을 돌아 움직이기 때문에 결코 안정되어 있지 않다. 자신의 띠 내에서의 이런 움직임은 전적으로 건전하다(조화롭다). 사실상 이런 순환이 전혀 없는 사람은 그가 껍질을 깰 때까지는 성장할 수 없는 멘탈적인 갑각류의 동물이다. 어떠한 특별한 띠 내에서의 질료의 활동성은 상념이 표현하는 주제에 전념하는 상념의 양에 비례하여 증대한다.

멘탈체에 있어서 혼란은 아스트럴체에서의 혼란과 비슷하고, 그 결과는 똑같이 비참하다. 이리하여, 만일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채 마음으로 계속해서 그것을 숙고한다면, 그의 멘탈체에 일종의 폭풍이 일어난다. 아마도 불화에 의해 생기는 안달함처럼 멘탈체에서는 따끔따금하게 아픈 상태가 될 것이다.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영구히 화내기 쉬운 상태의 멘탈체를 가진다. 그렇게 쉽사리 화내는 것은 약간의 자극에도 어떠한 순간에라도 쓰라린 것으로 표출되기 싶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균형과 상식으로써 그의 병든 상태를 고치게 될 때까지는 어떠한 종류의 비교occult의 발전도 바랄 수 없다.

만일 그 사람이 주어진 어떤 주제에 대한 그의 상념이 정체되도록 허용한다면 그 정체는 그 주제에 적합한 (주제의) 재료에서 재현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떤 주제에 대한 상념이 굳어지도록 허용함으로써 하나의 편견을 만드는 울혈이 형성된다. 멘탈 질료가 응고되어 일종의 혹이 될 때까지 계속 그 주위를 맴도는 하나의 조그만 소용돌이가 형성된다. 이 혹이 닳아 없어지거나 강제로 뽑혀버리지 않는다면 그때까지 그 사람은 멘탈체의 그 특별한 부분을 사용할 수 없고 그 주제에 관하여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도 없다. 그 불결하고 두꺼워진 물질이 외부 또는 내부로의 모든 움직임을 막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로 하여금 정확히 보지 못하게 하고, 현안 중인 문제에 관해서 어떤 신뢰할 만한 새로운 인상들을 받지도 못하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관한 어떤 명확한 상념을 보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멘탈체의 이런 병든 지점들은 또한 불행하게도 감염의 중심지들이다. 따라서, 점점 더 명확하게 보지 못하게 된다. 멘탈체의 어떤 한 부분의 정체는 또한 이렇게 다른 부분들의 정체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사람이 어떤 주제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면 그는 곧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편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멘탈 질료의 건전한 흐름이 제지당하고 허위적인 습관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편견이 모든 편견 중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심각한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편견은 그 주제에 관한 합리적인 사고에 대한 어떠한 접근도 못하게 한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은 당연히 종교적인 제 문제에 종사해야 할 멘탈체의 전부분이 비활성화되고 굳어져 있으며 응어리들로 가득 차 있어서 실제로 종교의 본질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도, 그들에게 급격한 변화가 발생할 때까지는, 전혀 접근이 불가능하다.

전체적으로, 거듭 말하지만, 현재 보다 진화된 인종들 중 최고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신체는 충분히 발달되어 있고 상당한 통제상태 하에 있다. 아스트럴체 역시 충분히 발달되어 있지만 결코 완전한 통제 하에 있지는 않다. 멘탈체는 진화 과정에 있으며 그 성장은 아직까지는 완전함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이 세 체들이 전적으로 영혼에 복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야할 먼 길이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는 저급의 자아는 고급자아 속으로 흡수되어 버릴 것이고 자아 혹은 영혼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다양한 체들 사이에 더 이상의 마찰은 없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의 다양한 수용체들은 그들이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질 정도로 아주 현격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제 6 장

카마-마나스(욕망-마음)


The Astral Body(pp23-25)에서 우리는 카마 즉 욕망을 검토했었고 또한 카마-마나스Kama-manas 즉 욕망과 마음의 뒤엉킴을 다루었다. 이 책에서는 The Astral Body(pp26-29)에서 카마에 관하여 언급된 부분중 많은 부분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주제의 마나스 측면에 주로 내용을 국한시키면서 우리는 다시 카마 마나스를 다루어야 한다.

The Astral Body에서 말해진 것을 간략히 요약하면 카마는 아스트럴체에 현현해있는 생명이다. 그것의 특유의 속성은 감정의 속성이다. 그것은 동물적 욕구, 욕정들과 욕망들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를 세상에 묶는데 힘을 행사하는 것은 바로 우리속에 있는 그 원숭이와 호랑이이다. 카마 즉 욕망은 또한 아트마 즉 의지가 저차원적으로 반영된 측면이다.

카마는 때때로 너무 제한된 의미 즉 단지 상스러운 관능적인 욕망을 의미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욕망을 의미한다. 욕망이란 사람의 외향적 측면 즉 세가지 세계에 속해있는 대상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엄격한 의미에서의 사랑은 생명의 사랑 즉 신성의 사랑이며 고급자아, 내향적자아이다.

리그베다Rig veda에서 카마는 창조를 일으키고 추진하는 그러한 감정을 의인화한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활발한 감각력이 있는 존재, 생생한 감각, 열정적인 삶의 격정적인 격동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주와 마찬가지로 개인에 대해서도 카마는 재화신의 주요한 원인이고 대욕망과 소욕망들로 분화되는 것처럼 이것들이 사고자를 지상으로 사슬로 연결하여 하향하게 하고 그를 계속하여 다시 재출생하게 한다.

동양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화신하게 하는 이러한 갈구 또는 욕구를 팔리탄하Pali Tanhâ에서는 트리쉬나Trishnâ로 알려져 있고 트리쉬나의 실현 또는 완성은 우파다나Upâdâna라 알려져 있다.

마나스는 생각하다 라는 동사어원을 가진 “만man”에서 왔다. 그것은 서구에서 마음이라고 모호하게 언급되는 것으로 우리 속에 있는 사고자이다. 마나스는 불멸의 개체성, 실제의 “나”이다.

그러나 사고자인 마나스 자신은 상위 멘탈계의 원인계에 살고 있는 영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하위세계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자신으로 부터 하위마나스를 투사한다. 그 마나스는 반영, 그림자, 광선 등 다양하게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두뇌의 배치와 여러가지 신체적 특성들을 통하여 두뇌가 변형할 수 있는 그러한 멘탈적인 힘들을 두뇌를 통하여 나타나게 하면서 두뇌에 그리고 그 속에서 작용하는 것은 바로 이 광선이다. 이 광선이 뇌신경세포들 속에 있는 분자들을 진동시키고 그리하여 물질계에 의식을 일으킨다. 이 하위마나스는 다음에 나오는 것들로 이루어진 4가지 영역 속에 흡수되어 있다.

카마 또는 욕망
프라나 또는 생명력
에텔체
신체

그것은 한손으로 카마를 움켜쥐고 반면에 다른 한 손으로 그 아버지인 상위 마나스와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지상의 생애중, 카마와 하위마나스는 함께 결합되어 있으며 종종 카마-마나스라고 불려진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카마는 동물적이고 정욕적인 요소들을 제공하고 하위마나스는 이들을 합리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지적인 능력들을 부가한다. 그 둘을 함께한 것 카마-마나스는 생애동안 아주 밀접히 혼합되어 있어서 그들은 거의 개별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욕망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마-마나스는 하나의 새로운 본질이 아니라 마나스의 하위부분과 카마를 혼합한 것이다. 카마-마나스 즉 욕망을 가진 마나스는 외부의 대상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마나스로서 잘 묘사되어 있다.

인간속에 있는 하위마나스의 제 작용은 멘탈능력, 지성적인 힘, 예민함, 정밀함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낸다. 그들은 비교, 사유, 판단, 상상과 아울러 다른 멘탈 능력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종종 천재적 재능이라 불리는 것에까지 이르지만 블라바츠키 여사는 교양과 아울러 순전히 지성적인 예리함의 결과로 이루어진 “인위적 천재적 재능”이라 부른다.

우리가 보통 마음이나 지성으로 부르는 것은 블라바츠키 여사의 말에 의하면 “마나스 자체가 희미해지고 아주 자주 왜곡되어진 것들이 반영된 것이다.” 그것의 참된 성질은 종종 열정과 허영과 오만함과 같은 것 속에 있는 카마적 요소들의 존재에 의하여 증명된다. 참된 천재적 재능은 하위의식속으로 침투하는 상위 마나스의 섬광들로 구성되어 있다. 빈도파니샤트Bindopanishat에서 말해지는 바와 같이 “마나스는 참으로 이중적인 것 즉 순수와 불순을 가진 것으로 선언된다. 불순한 것은 욕망에 의해 결정되고 순수한 것은 욕망에서 벗어난다.”

논증하려는 대신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천재적 재능은 이리하여 상위의 마나스 즉 에고에 속한다. 참된 직관直觀은 그 능력들 중 하나이다. 관찰에 의하여 얻어진 사실들을 정렬하여 비중을 정하고 비교 평가하는 절차인 사유思惟는 하나의 사실을 다른 사실과 비교하고 그것들로부터 논의하고 그들로부터 결론들을 도출한다. 이것은 두뇌기관을 통한 하위마나스의 작용이다. 그 도구는 추론이다. 귀납법에 의하여 가설을 설정하면서 기지The known로부터 미지The unknown로 올라간다. 연역법에 의하여 그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 가설을 입증하면서 다시 기지로 내려온다.

또한 일반적인 사유와 “천재적 재능”으로 알려진 의식의 특수한 번쩍임들 사이에 존재하는 메카니즘에 있어서 차이가 존재한다. 사유는 단계적으로 아스트럴 및 멘탈계의 연속적인 하위계들을 통하여 점차로 두뇌로 내려온다. 그러나 천재적 재능은 단지 원자적Atomic 하위계들을 통해서만 즉 원자적 멘탈로부터 원자적 아스트럴 및 원자적 물질하위계 속으로 쏟아부어지는 의식에 의해서 생긴다.

신체두뇌의 능력인 이성理性은 전적으로 감각들의 증거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인간내부에 있는 신성한 영혼divine spirit에 직접 관여하는 성질은 될 수 없다. 신성한 영혼은 토의와 논쟁을 암시하는 모든 사유들이 자기에게 쓸모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혼 또는 에고는 양심을 통하여 또한 말하는데 양심은 옳고 그른것 사이의 즉각적인 지각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예언prophecy과 영감에 의한 예언vaticination 그리고 소위 신성한 영감은 단순히 인간 자신의 불멸의 영혼spirit에 의해서 위로부터 주어진 광명화(깨달음)의 결과들이다.(이러한 주제의 측면은 제31장에서 검토될 것이다)

카마-마나스는 인간의 개인적 자아인데《베일 벗은 이시스Isis Unveiled》에서는 “아스트럴 영혼The Astral Soul”이라 불린다. 개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나”라고 인식하게 하는 것은 바로, 다른 것과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접촉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하위마나스이다. 하위마나스는 우리를 지성적으로 되게하고 스스로를 모든 다른 자아들과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하위마나스는 느껴지고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 현혹되어 그것이 감지할 수 있는 것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인 통일성을 깨닫지 못한다. 하위마나스는 카마적 감정들과 정욕들과 욕망들의 쇄도에 동요되고 모든 물질적인 것들에 매료되어 자신이 뛰어든 폭풍들의 목소리에 의해 눈이 멀고 귀가 멀어서 자기 출생지의 순수하고 고요한 영광을 잊고서 황홀함을 주지만 평화를 주지 않는 혼란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진다. 감각들과 동물적 성질의 최후에 약간의 기쁨을 주는 것은 하위마나스이다. 왜냐하면 기억이나 기대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열정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미묘한 상상의 힘없이는 그리고 꿈과 공상의 섬세한 색깔들이 없이는 어떠한 절정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카마는 하위마나스를 재빨리 지상에 묶는다. 사랑, 인정, 능력 그리고 명성을 얻을 목적으로 어떠한 행위가 시작되는 한 그 야심이 아무리 웅장하고 자비가 아무리 광범위하고, 성취가 아무리 고상할지라도 마나스는 카마로 더럽혀져 있으며 그 원천만큼 순수하지는 않다. 카마와 마나스는 각각이 서로서로를 자극하고 일깨우면서 서로서로에 작용하고 반작용한다. 마음은 항상 욕망에 의해 재촉을 받고 항상 쾌락의 대사로서 하는 수 없이 섬김을 받게 된다. 쾌락을 주는 것은 마음에 의해 언제까지나 추구되고 마음은 쾌락을 주는 영상을 생기게하고 고통을 주는 영상들을 배제하려고 항상 애쓴다. 멘탈 능력들은 동물적 정욕들에 그들이 순전히 동물적 특성들로서 작용할 때 그들속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힘과 특징을 증대시킨다. 왜냐하면 멘탈체에서 받은 인상들은 아스트럴체에서 받은 인상보다 더 영속적이며 멘탈체는 기억과 상상의 매개를 통하여 그들을 항상 재현한다. 이리하여 멘탈체는 동물들 속에서는 신체적 자극들에 의하여 각성될때까지 잠자고 있는 욕망들을 아스트럴체에게 일깨우면서 아스트럴체를 자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사람속에 하등 동물들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감각을 통한 기쁨, 관능적 욕망, 잔인함, 하등 동물들과 거리가 먼 계산성 등을 발견한다.

이리하여 감각들을 느끼는 데 예속되어 마음의 능력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떠한 동물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야만적인 짐승으로 만든다.

욕망 엘리멘탈 즉 아스트럴체적인 본능적 삶이 이 마나스와 카마의 뒤엉킴에서 하는 역할은 The Astral Body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했었다. 여러분들은 그 내용을 참조해야만 한다. 인간의 아스트럴 및 멘탈체는 아주 밀접히 뒤섞여서 그들이 하나의 체로서 작용하는 것으로 종종 말해진다. 사실, 베단타Vedântin 철학의 분류체계에서 그 둘은 하나의 코샤Kosha 즉 껍질로 분류된다.

붓디체Buddhic Body 아난다마야코샤

원인체Causal Body 비그나나마야코샤

멘탈체Mental Body 마노마야코샤
아스트럴체Astral Body

에텔체Etheric Double 안나마야코샤
육체Dense Body

학도는 감각의 중추들이 카마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다코파니샤트Mundakopanishat에서 “모든 피조물의 사고思考의 기관은 감각들에 의하여 고루 퍼져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고의 기관으로서 또한 “감각들에 의해 고루 퍼져있는” 것으로서의 마노마야코샤의 이중작용을 강조한다.

우리는 여기서 카마-마나스와 원자들Atoms의 스파릴래Spirillæ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을 주목해보자. 지구사슬의 첫번째 기간중에 물질계 원자의 첫 일단의 스파릴래가 모나드Monad의 생명에 의하여 활성화되었다. 이 일단은 조밀한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프라나의 흐름에 의하여 사용된다.

두번째 기간 중에는 두번째 일단의 스파릴래가 에텔체와 연결된 프라나가 그들을 통하여 흘러듦으로써 활성화된다.

세번째 기간중에 세번째 일단의 스파릴래가 아스트럴체와 연결된 프라나가 그들을 통하여 흘러들어 이리하여 감각작용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활성화된다.

네번째 기간중에 네번째 일단의 스파릴래가 카마 마나스적인 프라나가 그들을 통해 흘러들어 그들로 하여금 사고매체로서 작용할 뇌에 사용되는데 적합하게 함으로써 활발하게 된다.

구도의 길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 보다 높은 의식의 사용을 위한 더 깊은 여러 일단들의 스파릴래의 활성화가 필요한데 이것은 어떤 요가수련들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

진화의 일반적인 과정에서 새로운 일단의 스파릴래는 각 기간중에서 개발될 것이고 일곱번째 기간에서는 일곱 스파릴래 전부가 활성화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간에 살게될 사람들은 내적인 것들에 반응하고 고차원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오늘날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쉽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각각의 화신중 마나스는 다음의 세가지 일 중 하나를 할지도 모른다.

(1) 마나스는 자기의 근원을 향하여 솟아오르기 위해서 끈질기게 분투하고 노력해서 하늘에 있는 아버지 즉 상위의 마나스와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2) 마나스는 부분적으로 높이 오르고 부분적으로 하향할지도 모르는데 이것은 일반인에게 주로 있는 경우이다.

(3) 마나스가 카마 요소들로 막혀서 그것들과 하나가되어 억지로 부모로부터 떼어져 나와서 소멸될지도 모른다. 하위마나스가 당분간일지라도 카마로 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킬 수 있을때마다 그것은 최고의 멘탈능력들의 안내자가 되고 물질계인간에서 자유의지의 대행자가 될 수 있다. 이 자유의 상태란 카마가 억제되고 정복되는 것을 말한다.

자유의지는 마나스 자체 속에 존재한다. 마나스로부터 자유를 느끼는 것,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지혜와 저급의 속성이 아무리 반항하고 투쟁할지라고 고급속성이 저급속성을 지배할 수 있다는 지혜가 온다. 의식이 자기자신을 카마 대신에 마나스와 동일시하자마자 하급속성은 고급의식에 걸터 앉을 수 있는 짐승이 되어 버린다. 즉 더 이상 “나”가 아니다. 이리하여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과 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의 차이는 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외부로부터 외부의 매력과 반감 즉 욕망에 의하여 움직여지는데 “의지가 왕권을 잃은것”을 뜻하는 반면에 의지가 강한 사람은 자기의 축적된 경험들의 누적된 힘에 의해 인도되며 외부환경에 적절한 힘을 집중함으로써 외부 환경들을 계속적으로 정복하면서 내부로부터 주어지는 순수한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 더우기 하위마나스가 카마로 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할때 그것은 상위 마나스로 부터 받은 자극을 하위 의식에 더욱 더 잘 전달할 수 있게 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자아로 부터 온 빛이 하위마나스를 통하여 뇌속으로 흘러들면서, 천재적 재능이 번뜩여 나온다. 우리는 이것을 확신해도 좋다. 즉 우리가 개성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한, 욕망과 욕구의 폭풍이 우리 주위로 몰아치는 한 그리고 우리가 감정의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한, 그만큼 오랫동안 상위 마나스 즉 자아의 목소리는 우리의 귀에 이를 수 없다. 자아의 지시는 불과 회오리 바람속에서 오지않고 천둥소리나 폭풍속에서도 오지 않고 단지 침묵의 고요함이 느껴지고 자리잡을때만 내려오는 것으로 바로 그 분위기가 동요없이 계속 고요함이 깊어질 때만 그리고 사람이 자기의 귀를 (교묘하게 속이는) 세상적인 침묵까지도 막는 망토로 자신을 감쌀때만 (바로 그때 일때만) 침묵보다 더 고요한 목소리, 그의 참된 고급자아 즉 에고의 목소리가 들린다. 파문이 인 호수가 달과 별을 비추지만 지나가는 미풍에 파문이 일때 단지 흐트러진 반영만을 나타내듯이 사람도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의 욕망을 고요하게 하고 고요함을 그의 여러 활동의 우위에 둘때 자신내에 고급자아의 영상을 재현할 수 있다. 제자는 자신의 (직계) 스승의 마음을 비추기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자신의 상념이 솟아나오고 자신의 욕망이 일어나면 그는 아무 의미도 없는 흐트러진 반영인 춤추는 빛들만을 가진다.

한 스승의 말에 의하면 “파문이 없는 마음의 고요하고 잔잔한 표면에서만 비가시적인 것들로부터 모아진 비전들이 바로 가시적인 세계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가 지상적인 삶속을 헤쳐나갈때 매일 일어나는 모든 역경의 영향들로 부터 마음계를 보호할 수 있게하는 것은 바로 방심하지 않는 주의(깨어있음)를 통해서이다.”

우주심의 일부로서 자아는 자기자신이 속하는 (영적인) 세계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전지全知하지만 하위세계에서는 그 자아가 개인적 자아를 매개로 하여 작용해야 하므로 단지 잠재적으로 그러하다. 원인체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지혜의 수용체이다. 원인체가 인간의 감각들을 벗어난 것을 우연히 보게되어 그 본 것들을 어떤 뇌세포에 보내어 사람을 보는자, 점장이 그리고 예언자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원천으로 부터이다.

이 승리는 모든 의식을 이 목적을 향하여 기울인 연속된 많은 화신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으며 생명이 생명을 계승하듯이 신체도 마나스의 자극진동에 더욱더 미묘하게 일치하여 하위마나스는 점진적으로 자기 수용체로서 보다 조잡한 아스트럴 물질을 점점 덜 필요로하게 된다. 하위마나스를 물질과 아주 밀접히 접촉하게 하여 그 신성한 본질을 완전히 가리고 완전히 그 직관을 망쳐놓는 “맹목적인 현혹적인 요소”들을 점차로 제거하는 것이 마나스 “광선” 다시 말해 하위마나스의 사명의 일부분이다. 마침내, 카마의 정복이 이루어지고 몸이 마나스에 반응하게 될 때, 하위마나스는 그 근원인 상위 마나스와 하나가 된다. 기독교적 용어로 표현하면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항상 하나가 되어 왔듯이 모든 계에서 이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발적인 경우일지는 모르지만 화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아데프트Adept의 단계로서 매우 향상된 단계이다. 그러므로 문다코파니샤트에 있는 그 위대한 말씀을 옮기면, “사고 기관은 감각들에 의해 널리 퍼져있으며 그 기관이 정화될 때 아트마가 스스로를 현현시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위마나스는 부분적으로 상승하고 부분적으로 하강한다. 일반인의 삶에 대한 정상적 경험은 마나스가 계속적으로 카마와 씨름하는 전장이다. 때로는 (영적) 열망이 승리하여 감각의 사슬들이 끊어지고 하위마나스가 위쪽으로 치솟는다. 다른때엔 카마가 승리하여 하위마나스를 지상에 묶는다.

이리하여 제 4 장에서 간략히 본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의식의 센터가 카마-마나스에 묻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더욱 개발된 사람들은 이성이 욕망을 통제하기 시작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의식의 센터가 상위 아스트럴에서 하위 멘탈로 스스로를 점차로 (상승)이전하고 있다. 사람이 진화함에 따라 의식의 센터는 사람이 흥미와 욕망에 의해서 하기 보다는 본질에 의하여 지배되면서 훨씬 더 높이 상승한다.

왜냐하면 결국엔 인간의 지성은 자신의 삶 및 물질적 환경이 당연히 명료하게 이해되기를 요구한다. 그의 마음은 (모든 만물속에서) 질서, 합리성,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그의 마음이 혼란속에 살면서 고통이 없을 수는 없다. 그 자체가 평화롭게 존재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하위마나스가 카마와 뒤죽박죽으로 얽혀 있어서 상위 마나스와 하위마나스를 묶는 가느다란 연결이 즉 하위마나스를 스승과 묶는 은실이 뚝뚝 끊어져서 둘로 분리된다.

그렇게되면 지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중에도 상위 속성이 전적으로 하위 속성으로 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둘로 나누어지고 야수성이 스스로 탈출하여 살아있는 동안에 야수성의 안내자가 되었어야했을 마나의 반영들을 대동하되 구속되지 않은채로 앞으로 나아간다. 형태로는 인간적이지만 내부속성은 짐승인 그러한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지만 부패한 사람들로서 연민이 느껴지더라도 전율해야할 사람의 무리들속에서 우리가 우연히 만날 수도 있다. 신체적 죽음후 그러한 아스트럴체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닌 실체가 되어서 일반적으로 엘리멘터리Elementary로 알려진다. 엘레멘터리에 대한 설명은 The Astral Body의 pp142, 143에 주어져 있다.

자아의 관점에서 보면 그 개성으로 부터 유용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 “광선”은 아무것도 거져오지 못했고 하위의 삶은 전적으로 완전한 실패가 되었다.

침묵의 목소리에 다음의 권고문이 있다. “마야의 바다에 몰입되어 있는 너의 하늘태생을 우주의 부모(영혼)로 부터 단절되지 않도록 하고 불꽃 같은 능력이 그대 마음의 가장 깊숙한 영역과 세계의 어머니의 거주지 속에 은둔하도록 하라.” “하늘태생”은 치타 즉 하위의 마음이다. 그것의 위의 영혼으로 부터 태어나는데 그때 마나스는 화신할 때 이중적이다. 아트마-붇디-마나스의 계들은 하늘로 상징되어 있고 반면에 개성personality의 계들은 지상으로써 언급된다. 인간에게 얼마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인간속에 있는 “하늘태생”의 존재이다. 그리고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런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의 삶은 외부적 성격을 지닌 하위계들의 생활보다 더 무질서하고 덜 통제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조차도 그들의 멘탈 질료의 얼마가 자기의 아스트럴 질료와 밀접히 얽혀있어서 멘탈 질료가 사후에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카마와 마나스 사이의 투쟁의 결과는 멘탈 질료와 심지어 원인체(상위멘탈) 질료의 얼마가, 에고가 아스트럴체로부터 완전히 탈피한 후에도 아스트럴체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다른 한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의 저급의 욕망들을 완전히 정복하여 그의 마음을 욕망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하는데 성공했다면 실제로 어떠한 투쟁도 존재하지 않고 에고는 자기가 특정한 화신에 쏟아부었던 노력뿐만 아니라 획득했었던 모든 이익 즉 경험들과 능력들 등등을 회수할 수 있다.

제 7 장

상념파동


사람이 자기의 멘탈체를 사용할 때 즉 그가 생각을 할 때 진동이 멘탈체에 형성되고 이 진동은 두 개의 독특한 결과를 낳는다. 첫번째 결과는 진동이나 상념파를 방사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현재의 장에서 다루고 두번째 결과―상념체의 형성―를 나중의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모든 다른 진동들처럼 멘탈체에서의 진동은, 종의 진동이 둘러싼 공기에 전달되듯이 멘탈체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진동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질료에 전달된다. 그러므로 대기가 그러한 자극에 쉽게 반응하는 멘탈 물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계에서 형성된 일종의 파문 즉 일종의 진동껍질이 생긴다. 그 물결은 연못속으로 돌을 떨어뜨리면 충격의 중심으로 부터 물의 표면위의 모든 방향으로 방사하는 물결처럼 주위를 에워싸는 공간을 통하여 퍼져나간다.

멘탈충동Impulse의 경우에 방사는 단지 한 차원계가 아니라 태양이나 등잔으로 부터 방사되는 것처럼 많은 차원으로 퍼져나간다.

방사된 광선들은 꼭 물질계의 태양처럼 조금도 서로서로 지장을 주지 않고 모든 방향에서 서로 교차한다.

더구나 진동이 퍼져나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팽창하는 상태의 구체는 많은 색을 띠는 오팔색 같지만 그 색깔들은 구체가 멀리 퍼져 나감에 따라 점점 희미하게 된다.

이미 말한 것처럼, 멘탈진동은 기회가 주어지는 곳은 어디에서나 스스로를 재현하는 경향이 또한 있다. 따라서 상념파가 또 다른 멘탈체에 부딪힐 때마다 상념파는 먼저의 경우에 일으켰던 상념파의 진동들과 유사한 진동들을 그 멘탈체안에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멘탈체가 (어떤 사람의) 상념파에 부딪히면 그 상념파를 최초로 일으킨 사람의 마음에 이전에 발생했던 것과 유사한 상념이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게 된다.

상념파는 상념의 근원에서 거리가 멀어져감에 따라 점점 힘이 약해진다. 그리고 거리에 따른 변하는 거리의 제곱이 아니라 거리의 세제곱 즉, 입방체적인 변화의 비율에 따라서 변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수평적인 거리가 아니라 입체적인 확장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멘탈 진동들은 물질계의 물질에서의 진동들보다 아주 훨씬더 점진적으로 그 힘을 덜 상실하고 근원으로 부터 엄청난 거리에 있을 때에만 소진되거나 적어도 너무나 미약해서 지각할 수 없는 것 같다. 상념파가 관통하는 거리와 다른 사람들의 멘탈체에 부딪히는 힘과 지속성은 원래 상념의 힘과 명확함에 달려있다. 이리하여 강한 상념은 약하고 우유부단한 상념보다 더 멀리까지 이른다. 그러나 명료함과 명확함이 강렬함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상념파가 퍼져나가는 거리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들은 상념파의 성질(종류)과 상념파가 만나는 저항이다. 이리하여 낮은 차원의 아스트럴 질료의 형태로된 상념파들은 도시의 시끄러운 소리속에서 부드러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되는 것처럼 같은 수준의 많은 다른 진동들에 의해 대개 곧바로 빗나가게 되거나 압도당한다.

이런 이유로 멘탈의 최저 수준에서 시작되어 상응하는 아스트럴의 낮은 수준에 즉각적으로 떨어지는 일반인의 평범한 자기 중심적 상념은 비교적 비효율적이다. 멘탈계와 아스트럴계에서의 자기 중심적 상념의 힘은 아무리 상념이 격렬할지라도 사방에 급증하는 광대한 바다와 같은 유사한 상념이 존재하므로 그 상념파들은 그 혼란속에서 불가피하게 곧 상실되고 그 힘에 압도당한다.

다른 한편, 보다 높은 수준에서 생기는 상념은 훨씬 더 분명한 고유활동 영역을 가진다. 왜냐하면 현 시점에서 그러한 파를 일으키는 상념들은 수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발달한 존재들의 상념은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단연코 우수하다.

물론, 상념들이 아주 고양되었지만 결코 그다지 정확하지도 명확하지도 않은 다른 종교인들의 상념도 존재한다. 과학적인 상념 조차도 영적인 존재들의 상념만큼 똑같이 탁월하지는 않다. 그리하여 실제로 멘탈계에는 영적인 존재들의 상념을 위한 확트인 영역이 존재한다.

영적인 존재들의 상념은 광대한 침묵속의 소리와 같다. 그 상념은, 자신이 일으키는 진동의 파문들이 어떤 수준의 멘탈 질료가 완전히 휴지상태에 있는 보통사람의 멘탈체에 충돌하게 되면 이제까지 단지 드물게 사용되어왔던 어떤 수준의 멘탈 질료를 작동시킨다. 그러므로 사고기관 속에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부분을 각성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러한 상념은 그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영적인 상념을 반드시 전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멘탈체의 보다 상위 부분을 각성시킬때 그 상념파는 그 사람의 상념을 전체적으로 고양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상념이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든지 간에 그러하다.

물론, 무한히 다양한 상념들이 존재한다. 만약 상념이 완벽히 단순하다면 멘탈체내에 단지 하나의 진동율이 존재할 것이며 따라서 단지 한 형태의 멘탈 질료만이 강하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멘탈체는 멘탈계의 4부분의 하위멘탈계의 질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하위계 각각에는 다양한 밀도로 구성되는 많은 세분된 부분들이 있다.

사람이 이미 어떤 다른 상념선line of thought에 몰두해 있다면 강한 상념파는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를 지나가 버릴지도 모른다. 이것은 꼭 이미 일이나 즐거움에 빠져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말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할지도 모르는 바와 같다.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전 관심을 요하는 어떤 업무를 수행할때를 제외하고는 명확하게 또는 강하게 사고하지 않기때문에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에게 부딪히는 상념들의 충돌(충격)에 의해 상당히 영향을 받을 것 같다. 그러므로 대단한 책임이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사고들이 강하고 분명하다면 불가피하게 많은 수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것이기 때문이다.

불순하거나 악한 상념들을 품는 사람은 그러한 사고행위에 의해 그의 동료들 가운데에 도덕적 전염병을 퍼뜨린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내부에 잠재적인 악의 씨앗들(카르마들), 외부로 부터의 어떤 힘이 작용하여 그 씨앗들을 활동하도록 자극하지 않는다면 결코 결실을 맺지 못할지도 모르는 씨앗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할 때, 불순하거나 거룩하지 못한 상념에 의해서 외부로 보내어진 상념파동은 씨앗을 각성시켜 활성화시키고 그것으로 하여금 성장하도록 야기하는 바로 그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념은 어떤 영혼으로 하여금 하향적 생애를 살도록 할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유사한 방식으로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며 그리하여 악은 헤아릴 수 없는 방향으로 확산되고 수많은 가지로 퍼져나간다. 많은 해가 이런식으로 끼쳐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지만, 악을 행한자는 (악한 상념을 품고 표현한 자는) 카르마적으로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물론, 자비심을 띤 상념은 유사하게 선쪽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항상 사랑, 고요함, 평화 등의 상념 등을 그의 모든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비추고 또한 진실한 태양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애를 써야한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기들의 의지에 따라 이렇게 상념의 능력를 통하여 얼마나 엄청난 선을 위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깨닫고 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사실,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사람의 육체적 참석은 고통을 겪는 사람에겐 싫은 것이 되기까지도 할지도 모른다. 그의 육체적 두뇌는 편견이나 종교적 고집에 의하여 여러 가지 제의에 대하여 닫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아스트럴 및 멘탈체는 신체보다 훨씬 더 쉽게 느끼기 쉽고 도움을 주고자하는 상념과 애정과 달래주는 감정의 파동에 의하여 아스트럴 및 멘탈체에 접근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뜻도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멘탈계나 아스트럴계에서는 집중적으로 꾸준하게 사랑하는 상념을 통해서 어떤 원조가 주어질 수 있다.

상념파는 명확한 그리고 완전한 생각을 전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과 똑같은 성질의 상념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예를들어 상념이 헌신의 상념이라면 그 진동들은 헌신을 자극한다. 그러나 숭배의 대상은 상념파가 부딪히는 멘탈체들의 소유자인 각 사람의 경우에 따라 다를지도 모른다. 상념파 또는 진동은 상념의 주제가 아니라 상념의 성질을 이렇게 전달한다. 어떤 힌두인이 크리슈나에 대한 헌신에 열중하여 앉아 있다면 그로부터 주위에 쏟아 부어지는 상념파들은 그 영향하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헌신을 자극한다. 그러나 모하메트교인의 경우엔 그 헌신을 알라Allah에 대한 것으로 반면에 조르아스트교인에겐 아후라마즈다Ahuramazda, 또 기독교인에게는 예수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상념파가 어떠한 형태로든 헌신에 대한 바로 그 생각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물질주의자의 멘탈체에 접촉하면 그 상념은 그 사람에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파동을 일으킬 수는 없지만 그의 멘탈체의 윗부분을 어떤 종류의 활동상태로 자극하는 경향과 아울러 고양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학도가 조심스럽게 주의해야할 아주 중요한 사항은 습관적으로 순수하며 좋고 강한 상념들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뜻하는 바를 위하여 멘탈체의 윗부분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윗부분은 보통사람에 의해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아 전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한 사람은 그러므로 세상에서 선을 위한 힘이되며 어떠한 종류의 반응이라도 할 수 있는 자기 이웃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하게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가 내보내는 진동들은 그들의 멘탈체의 새로운 윗부분을 각성시키고 결과적으로 그들 면전에 전혀 새로운 상념의 장field of thought들을 열어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문제를 조금 더 심도있게 다루자. 날마다 명확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사고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자신의 사고 능력들을 향상시키고 도움이 되는 상념파들을 그 주위의 세계에 내보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멘탈 질료 자체를 개발하고 향상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뇌속으로 들어오는 의식의 양은 질료의 원자가 반응할 수 있는 정도 즉, 생명을 부여받고 활성화된 원자들의 스파릴래의 수의정도에 의해 명백하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진화의 현단계에서의 일반적인 신체의 원자에 이러한 7개의 스파릴래중 4개가 활성화된 상태이다. 보다 높은 형태의 상념이 가능한 사람은 원자들속에 있는 더 많은 스파릴래를 개발하는데 돕고 있으며 이러한 원자들이 계속적으로 그의 신체들 속안으로 또 밖으로 진행함에 따라서 그것들은 자신들을 이용할 수 있는 어떠한 사람에 의해서도 흡수 및 활용을 위하여 이용가능한 상태가 된다. 이리하여 높은 사고는 상념의 바로 그 질료 자체들을 향상시킴으로써 세계의 의식(상승)에 도움을 준다.

이리하여 많은 다양한 종류들의 멘탈 질료가 있으며, 각 종류는 자신이 가장 익숙하고 가장 쉽게 반응하는 그 자신의 특별하고 적절한 진동율을 가지고 있다. 물론 복잡한 상념은 많은 종류의 멘탈 질료에 동시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멘탈체에 대한 상념의 영향 (그리고 멘탈체에 대한 감정의 영향)은 우리가 제3장에서 본 바와 같이, 악하거나 이기적인 상념들은 항상 보다 조야한 질료로서 비교적 느린 진동들인 반면에 좋거나 비이기적인 상념들은 단지, 보다 미세한 질료에만 작용하는 더욱 급속한 파동들이다 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통일된 상념의 힘은 그들 각각의 상념들의 총합보다 항상 훨씬 더 크다. 그것은 그 결과에 의해서 훨씬 더 면밀히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높은 수준의 상념들을 일으킬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항상 모임을 가지는 도시나 공동체는 어떤 곳이라 할지라도 도움을 주게 된다.


제 8 장

상념체


우리는 지금 사람이 생각하면서 멘탈체를 사용할 때 생성되는 두번째 영향 즉 상념체들의 형성을 살펴보게 된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상념은 멘탈체의 질료에 일단의 진동들을 일으킨다. 이러한 자극하에, 멘탈체는 레코드판 위에 놓인 미세한 입자들이 레코드판이 음율에 따라 진동하게 될 때 하나의 형태를 방출하는 방식으로 진동들의 속성에 의해 형성된 멘탈체 자신의 진동하는 부분을 방출한다.

이렇게 방출된 멘탈 질료는 둘러싼 공기로 부터 멘탈계(즉 제 2엘리멘탈계)의 적절한 형태의 엘리멘탈 에센스를 모으고 그 에센스를 그 자신의 진동률과 조화시키면서 진동시킨다.

이렇게 순수하고 단순한 하나의 상념체가 생긴다. 그러한 멘탈 상념체는 아스트럴 혹은 감정체(The Astral Body에서 기술된)를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빛이나며 보다 찬란한 색깔을 띠고있고 더 강하고 더 지속적이며 더 많은 생명활력을 담고있다.

상념의 영향의 사실적인 기술은 다음과 같다. “멘탈계의 질료를 사용해서 상념체들을 형성하는 이러한 멘탈 진동들은 그들의 신속함과 미묘함에 의해서 가장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항상 변화하는 색깔들을 일으킨다.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영묘하게 되고 밝게된 진주층에 있는 무지개 색깔들과 같은 다양한 색조들의 파동이 모든 상념체들 주위로 그리고 관통하여 휩쓸고 지나가서 각각은 지상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색들을 포함하면서 파동치며, 생생하게 빛나고 섬세한 색깔들의 조화를 나타낸다. 많은 생명과 움직임으로 약동하는 이 미묘한 질료의 조합에서 나타나는 매우 아름다운 미와 광휘를 그대들에게 이해시킬 수가 없다. 그것을 목격해온 모든 사람은 힌두교인이든지 또는 불교도든 기독교도인이든지 간에 그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에 대해 황홀한 용어로 말을 하고 항상 그것을 자기가 전혀 묘사할 수 없음을 실토한다. 말이란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는데 있어서 아무리 교묘하게 구성되더라도 단지 그것을 천하게 하고 타락시키는 것만 같다.

하나의 상념체는 상념을 일으킨 하나의 생각에 의해서 생명력을 부여받아 강한 활동성을 띠고있는 일시적으로 생동하는 실체이다. 만약, 상념체가 보다 미묘한 종류의 질료로 이루어진다면 아주 강력한 힘이 될 것이고 강하고 지속적인 의지의 지시를 받을 땐 매우 강력한 힘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용도에 대한 세부적인 것을 우리는 나중에 다루게 될 것이다.

엘리멘탈 에센스는 멘탈계의 질료를 활성화시키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이상하며 반지성적인 생명체이다. 그것은 인간의 상념의 영향에 아주 쉽게 반응해서 인간의 멘탈체로부터 외부로 보내어진 모든 자극(진동)은 즉각적으로 이 에센스로 구성된 수용체를 일시적으로 입는다. 사실, 그것은 아스트럴 엘리멘탈 에센스보다 상념의 작용에 훨씬 더 순간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멘탈 엘리멘탈 에센스는 아스트럴 엘리멘탈 에센스와는 크게 다르다. 즉, 그것은 다른 사슬뒤에 있는 하나의 완전한 사슬이며 그러므로 그 안의 힘은 다른 힘과 같이 똑같이 집중된 방식으로 작용할 수 없다. 그것은 다루기에 아주 힘이든다. 왜냐하면 그것이 항상 하나의 상념에서 또 다른 상념으로 돌진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갈피를 못잡는 상념들에 대하여 주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상념은 이야기된 바와 같이 잠시동안은 일종의 살아 있는 생물같다. 상념의 힘은 영혼이며 엘리멘탈 에센스는 상념의 몸이다. 이러한 상념체들은 엘리멘탈이나 때때로 인위적인 엘레멘탈이라 불린다.

모든 상념체들을 생성하는데 토대가 되는 제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1) 상념의 질이 색깔을 결정한다.
(2) 상념의 본질이 형태를 결정한다.
(3) 상념의 명확함이 윤곽의 명료함을 결정한다.

상념체들은 색채와 모습에 있어서 무한히 다양할지도 모른다. 다양한 색채들과 그 의미는 아스트럴체The Astral Body와 또한 이 책의 이전의 장에서 기술된것 처럼 아스트럴체 및 멘탈체에 존재하는 것과는 일치하기 때문에 학도는 지금 그것들에 익숙할 것이다.

예를 들면, 애정은 환하게 빛나는 장미색(연흥색)을 일으키고 치유를 갈망하는 것은 아름다운 은빛을 띤 힌색을 일으킨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강화시키고자 하는 멘탈적 노력은 아름답게 번쩍이는 황금색의 노란색을 일으킨다.

어떠한 수용체에 있어서도 노란색은 항상 지성을 나타내지만, 그 색조는 아주 다양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색채들의 혼합에 의해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성은 하위의 채널로 향해지면, 특히 대상이 이기적이면 보다 짙고 탁한 색조를 띤다. 일반기업가의 아스트럴체나 멘탈체에서의 지성은 노란 황토색으로 나타나는 반면 철학이나 수학의 연구에 전념한 순수한 지성은 빈번히 황금색으로 나타난다. 어떤 힘을 지닌 강력한 지성이 인류의 이익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사심없이 사용될 때 이것은 점차로 아름답고 밝게 빛나는 담황색의 노란색이 더해진다. 대부분의 노란색을 띤 상념체들은 뚜렷이 윤곽이 있으며 모호한 구름같은 노란색은 비교적 드물다. 그것은 교묘한 발명의 재주의 결과에 대한 감상과 같은 즐거움이나 영리한 장인의 기교에 대한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성질의 구름은 어떠한 개인적 감정의 완전한 부재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러한 감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노란색과 아울러 그 감정에 적합한 색깔을 뛸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상념체들은 그 상념체를 일으키는 생각에 적합한 회전하는 색채의 구름들일 뿐이다. 학도는 현재의 인류의 단계에 있어서 대부분 사람들의 잘못 훈련된 마음들의 산물인 구름같이 흐릿하고 불규칙적인 모습의 상념들이 엄청나게 우세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 이리저리로 떠도는 수천의 상념들 중에서 분명하고 명확한 상념체들을 본다는 것은 아주 드문 현상에 속한다. 상념이 명확한 곳에 형태도 명확하게 형성되며 그 윤곽은 뚜렷하고 종종 아름다운 모습을 띤다. 그러한 모습들은 무한히 다양하지만 종종 어떤점에서는 그들이 표현하는 상념의 종류중 전형적인 것들이다. 추상적인 생각들은 대개 온갖 종류의 완벽하고 가장 아름다운 기하학적인 형태들로서 자신들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에 의해서 물질계에서 우리에게 가장 단순한 추상적인 사실들 조차도 멘탈계에서는 명확한 사실들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상념과 감정의 강도는 하나의 별도의 실재로서 상념체의 지속뿐만 아니라 상념체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 지속기간은 상념의 형태가 생성된 후에 상념을 일으킨 사람이나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상념이 반복되거나 상념체에 제공되어지는 영양분에 또한 달려있다.

상념이 지성적이고 비인간적이라면 즉 사고자가 대수학이나 기하학 문제를 풀려고 시도하고 있다면 그때 그의 상념체들은 멘탈계에 국한 될 것이다. 그의 상념이 영적인 성질의 것이면 즉 깊고 사심없는 사랑과 감정에 대한 열망을 띠고 있다면 그 상념은 멘탈계에서 위쪽으로 상승하고 위쪽에 있는 붓디 수준들의 광채와 영광을 (물질계에) 많이 가져올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그 상념의 영향은 매우 강력하고 그러한 모든 상념은 선을 위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된다. 한편, 상념자체 속에 자아적이거나 인간적인 욕망에 해당하는 어떤 것을 가지면 즉시 진동은 하향하고 상념은 멘탈 질료로서 감싸질 뿐만 아니라 거기서 더하여 아스트럴 질료를 그 주위에 끌어 당긴다. 그러한 상념체는―보다 정확하게는 상념 감정형태라 불릴 수 있다―물론, 다른 사람들의 멘탈체 및 아스트럴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상념체는 단연코 가장 일반적인데 이는 욕망과 정욕이나 감정에 물들지 않은 평범한 남녀의 상념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부류의 상념체들을 카마-마나스의 활동 즉 욕망에 지배된 마음에 의해서 생기는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

사람이 어떠한 구체적인 대상 즉 책과 집 그리고 풍경을 생각할 때 그는 멘탈체의 질료에 그 대상물에 대한 조그마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러한 영상은 멘탈체의 상부에 떠오르며, 대개 그 사람의 면전에 그리고 거의 눈 높이에 뜬다. 그것은 그 사람이 그 대상을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고 대개 잠시 동안 존재하며 그 시간의 길이는 상념의 강도와 뚜렷함에 달려 있다. 이 형태는 아주 객관적이어서 멘탈적인 투시력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그는 위와 똑같은 방식으로 조그마한 초상을 만드는 것이다. 똑같은 결과가 ‘상상’에 해당하는 모든 노력에 의해서 자신이 그릴 그림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 화가는 그의 멘탈체의 질료로 부터 그것을 그려서 자신 앞의 공간속으로 그 형태를 투사하고 마음의 눈 앞에 유지한뒤 복사한다. 똑같은 방법으로 소설가는 멘탈질료로 그의 등장인물의 영상을 구축하고 그의 의지를 행사함으로써 이러한 꼭두각시들을 하나의 위치나 장소로부터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서 이야기의 줄거리가 글자 그대로 자신 앞에 전개되도록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멘탈영상들은 너무나 완전히 실재적이어서 그들은 투시자에 의해서 보일뿐만 아니라 그들의 창조자 외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이동되고 재정돈 될 수 있기까지 하다. 예를 들면, 장난하기 좋아하는 자연의 요정들이나 종종 동료작가의 작품을 지켜보는 ‘죽은’ 소설가가 영상들 혹은 인형들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그 줄거리들이 그들을 만든사람에게 마치 자기자신들의 의지를 개발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리하여 이야기의 줄거리는 자기자신들의 의지를 개발한 것처럼 보인다. 이리하여 이야기의 줄거리는 저자에 의해 원래 의도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침을 따라 진행되기도 한다.

조각가는 자신이 창조하고자 의도하는 조상彫像에 대한 강한 상념체를 만들고 그의 대리석 덩어리 속에 심고 상념체에 침투된 대리석의 바로 그 부분만이 남아 있을 때 까지 상념체 외부에 놓여있는 대리석을 계속해서 잘라내 버린다.

유사하게 강사는 자기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의 부분들을 간절히 생각할 때, 그 노력으로 인하여 일련의 상념체들, 대개 강한 상념체를 만든다. 그가 그의 청중을 이해하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로 그 자신의 상념이 충분히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서두르고 명확하지 않은 상념체는 미소한 인상만을 주며 더군다나 그것도 어렵게 전달한다. 반면에 명확한 상념체는 청중의 멘탈체들로 하여금 상념체를 재현하도록 한다.

최면술은 상념체의 객관성(실재성)에 대한 실례들을 제공한다. 어떤 생각의 상념체는 백지에 투사될 수 있으며 거기에서 최면에 걸린 사람에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가령 그것이 아주 실재적이어서 최면에 걸린 사람은 그것이 마치 실제적인 물체인 것처럼 보고 느끼게 된다.

역사와 드리마 그리고 소설 속의 등장 인물들에 관련된 많은 상념체는 다소간에 영속적이다. 예를 들면, 대중의 공상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으로부터, 존 번얀John Bunyan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신데렐라, 알라딘의 램프 등과 같은 동화들로 부터 등장인물들과 여러 장면들을 강하게 묘사해왔다. 그러한 상념체들은 그 책을 읽은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의 산물들과 합쳐졌기 때문에 집단적이다. 어린애들은 생생하고 능력있는 상상들을 가지는데 그리하여 그들에 의해 읽히는 책들은 상념체들의 세계에서 대개 잘 표현된다. 그래서 셜록 호움즈, 선장케플, 의사 니콜라와 같은 많은 사람들의 모습들이 훌륭하고 실물같이 존재한다. 그러나 ㅇ대체로 오늘날의 소설들로 부터 불러내어지는 상념체들은 우리 선조들이 로빈슨 크루소나 셰익스피어 희곡의 등장인물에 의하여 만들어졌던 상념체들 만큼 아주 명확하지는 않다. 물론, 이것은 사람들이 이전의 경우보다 더 피상적으로 그리고 보다 덜 관심을 가지고 독서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념체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정도로 하자.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상념체들을 일으킨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에 미치는 영향들을 고찰해보자.

각 사람은 삶을 통하여 살아가면서 세가지 부류의 상념체들 창조한다.

1) 생각하는자 주위에도 집중되어 있지도 않고 또한 어떤 사람을 특별히 목적으로 심지도 않음으로써 생각하는 자가 지나온 길을 표시하듯이 일종의 흔적으로서 남아있는 상념체들.

2) 생각하는자 주위에 집중되어 있음으로써 그 주위를 맴돌고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따라다니는 상념체들.

3) 명확한 대상을 목적으로 하며 생각하는자로 부터 주어진 목적과 목표를 향해서 외부로 정확하게 날아가는 상념체들.

첫 번째의 상념체는 분명하게 개인적이지도 않고 특별히 다른 어떤 사람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기 때문에 공중에 떨어져서 단순히 떠 있으며 항상 상념체를 일으킨 사람에 의해서 원래 보내어진 진동들과 비슷한 진동들을 방사한다. 상념체가 어떠한 다른 멘탈체와 접촉하지 않으면 방사된 상념체는 점차로 에너지원을 다 써버린다. 그 경우엔 상념체는 무너져 산산 조각으로 된다.

그러나 만약 상념체가 가까이 있는 어떤 다른 멘탈체에게 동조적인 진동을 각성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어떤 인력이 형성되고 그 상념체는 대개 그 멘탈체에 의해 흡수된다.

진화의 현 단계에서 인간의 상념의 대부분은 활발하게 이기적이 아닌 경우에 조차도 대개 자기중심적이다. 그러한 자기 중심적 사고들은 사고자 위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멘탈체 주위에 그러한 상념들의 껍질로 두르고 있다. 그 상념들은 끊임없이 그들 주위에 맴돌고 항상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작용한다. 그들의 성향은 자신들을 재현하는 것 즉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이전에 품었던 상념(과 감정)들을 반복시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부로부터 그에 대한 이러한 압력, 특별히 그가 노동을 한 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이러한 끊임없는 어떤 상념들에 대한 암시를 느끼는데 그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명확한 상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상념들이 악하다면 그는 빈번히 그들을 그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선동하고 유혹하는 악마들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름 아닌 전적으로 자기자신의 창조물이다. 즉 자기가 자기자신의 유혹자이다.

이러한 종류의 반복된 상념들은 소위 프라랍다Prârabda 혹은 ‘익은..’카르마를 만들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똑같은 종류의 상념들을 말하자면 복수하듯이 지속적으로 되풀이 하는 것은 사람을 마침내 포화된 용해액의 상태에 비유될 수도 있는 지점까지 데리고 온다. 똑같은 종류의 더 많은 물질을 포화액에 더하는 것이 전체용액에 응고를 야기시키는 것처럼 사소한 부가적인 충동Impulse이 주어지면 (포화된 상념체에) 작은 어떤 범죄를 저지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유사하게,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하는 반복된 상념들은, 적합한 기회에 자극이 그 사람에게 주어지면, 영웅주의적인 행위로 구체화되어 나온다. 그러한 상황하에서는 사람은 반복된 상념이 행위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자신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나 자기자신이 자기 희생의 어떤 영웅적인 일을 실행한 것에 놀랄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고찰은 자유의지와 필요 또는 운명의 오래된 문제를 설명하는데까지 나아간다. 더군다나, 사람의 상념체들은 비슷한 성질을 가진 다른 사람들의 상념체들을 그 사람쪽으로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이렇게 외부로부터 엄청난 에너지의 증원군을 자기자신에게 끌어 들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자신 속으로 끌어들인 이러한 힘들이 좋은 종류인지 또는 나쁜 종류에 속하는 것인지는 자기자신에게 달려있다.

대개 각각의 명확한 상념은 하나의 새로운 상념체를 창조한다. 그러나 같은 성질의 상념체가 이미 사고자 주위에 맴돌고 있다면 어떤 상황하에서 같은 주제에 관한 새로운 상념은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대신에 이전의 상념과 합쳐져서 그 상념을 강화시켜서 오랫동안 똑같은 주제를 곰곰히 생각함으로써 사람은 때때로 엄청난 능력을 가진 상념체를 창조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 상념이 악한 상념이라면 그러한 형태는 아마도 수년 동안 지속되며 잠시 동안 실제 살아 있는 실체의 모든 모습과 능력들을 지니는 진짜 나쁜 영향력이 될지도 모른다.

자기 중심적인 상념의 껍질은 명백히 반드시 (진리에 대한) 멘탈시력Vision을 흐리게 하고 편견의 형성을 촉진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껍질을 통하여 그 사람은 당연히 세상의 만물을 껍질을 이루는 주된 색깔들로 물들여진 형태로 내다본다. 외부로부터 그에게 이르는 모든 것이 자신이 가진 껍질의 특성에 의하여 이렇게 다소 왜곡된다. 이리하여, 사람이 상념과 감정을 완전히 통제할 때까지 그는 만물을 실제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관찰들은 지독히도 잘못 만들어진 유리처럼, 모든 것을 왜곡하고 물들이는 이 매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리야상가Aryasangha(지금은 듀알컬 대사)가 침묵의 목소리(The Voice of the Silence)에서 마음은 ‘실재의 파괴자인가(The Great Slayer of the Real)’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 어떠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만들 수 있는 이미지만을 (골라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우리자신이 만든 이러한 상념체들에 의해서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물들여져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떤 사람의 상념이 단순히 곰곰히 생각만하고 어떠한 감정도(애정이나 싫어함과 같은) 욕망도(그 사람을 원하는 것 같은) 연관시키지 않는다면, 그 상념은 대개는 자기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지각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상념과 연관된 감정 즉 애정이 있다면, 사고자의 멘탈체의 질료로부터 형성된 상념체는 그 형태주위에 또한 아스트럴체의 질료를 끌어당기고 이렇게 아스트럴이 결합된 멘탈 형태는 자기가 생성된 몸에서 뛰어나와 감정의 대상으로 똑바로 가서 그에게 달라붙는다.

그것은 레이던(Leyden)항아리에 비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리멘탈 에센스의 형태는 항아리에 해당되고 상념에너지는 전하(Charge of electricity)에 해당한다.

그 사람이 그 순간에 수동적인 상태에 있거나 아니면 자기 내부에 그 상념체의 진동들과 조화를 이루는 성질의 활발한 진동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 상념체는 즉시 그 사람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나면, 사라져 버린다. 그러한 결과는 자신과 비슷한 진동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기자신과 비슷한 진동을 불러일으킨다. 아니면 이미 발견된다면 이미 존재하는 그 진동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이 다른 것들에 아주 강하게 몰두되어 있어서 상념체의 진동이 출입구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상념체는 (에너지와 진동을) 방출할 기회를 기다리면서 그 주위에 맴돈다.

한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보내어진 상념체는 이렇게 보내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람에게 얼마의 힘과 (진동)질료 두 가지 모두를 실제로 전이시키는 것이다.

상념파의 영향과 상념체의 영향사이의 차이는 우리가 제7장에서 본바와 같이 상념파는 명확하고 완전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과 똑같은 성질의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상념파는 이렇게 그 활동에 있어서 훨씬 덜 명확하지만 그 범위는 훨씬 더 광범위하다. 다른 한편, 상념체는 상념의 정확한 성질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그 성질을 정확하게 이전시키고 명확하고 완전한 생각을 사실 전달한다. 그러나 한 번에 한 사람에게만 전달 가능하다. 따라서 상념파는 탁월하게 적응성이 있다. 예를 들면 헌신의 파동은 헌신의 대상이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경우에 전혀 다를 수도 있지만 받는 사람에게서 헌신을 일깨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념체는 그 헌신에 의해서 원래 느꼈던 존재의 정확한 영상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형상화 시킨다.

상념이 충분히 강하다면 거리는 상념체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보통사람의 상념은 대개 약하고 널리 퍼져 있는 관계로 해서 제한된 영역 밖에서는 효과가 없다.

강하게 다른 사람 쪽으로 향해진 상념체는 말하자면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면서) 사랑이나 보호하고자 하는 갈망의 상념체는 생각되어지는 사람에게 가서 방어하고 보호하는 힘으로서 그의 오오라 속에 남아 있게 된다. 그 상념체는 의식을 지닌 그리고 신중한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자극에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봉사하고 방어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보호진동의) 오오라에 부딪히는 (같은 종류와 진동의) 친근한 힘들을 강화시키고 친근하지 않은 힘들을 약화시킬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주위에는 진정으로 수호천사들이 이렇게 창조되고 유지된다. 멀리 떨어져있는 아이를 위한 많은 어머니의 ‘기도’는 위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작용하면서 이렇게 아이 주위를 둘러싸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식은 당연히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손안에 놓여있는 엄청난 힘을 의식하게 한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상념파들을 다룰 때 언급되어진 것 즉 우리가 물질계에서는 어떤 사람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한다. 그러나 그 사람의 멘탈체와 아스트럴체는 영향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은 빈번히 육체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감수성이 강하다. 그러므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상념, 애정적인 상념 등을 사람의 멘탈체나 아스트럴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이용 가능한 것이다. 상념의 법칙들이 그러한 이상 여러 가지 결과들이 자연히 생긴다. 어떤 명백한 결과가 물질계에 따르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일어나고 작용하는 것이다.

학도는 상념체는 다른 사람의 오오라에서 그 상념체의 진동에 동조하여 반응할 수 있는 질료들이 있는 경우에만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상념체의 진동들이 그의 오오라가 진동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경우들에서는 상념체는 그것으로부터 반동하는데 그것도 상념체가 부딪히는 힘에 비례하는 힘으로 반동한다. 그러므로, 순수한 마음과 가슴이 해로운 공격들에 대한 최고의 보호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순수한 마음과 가슴은 섬세하고 미묘한 물질들로 이루어진 멘탈체와 아스트럴체를 형성하고 이러한 체들은 조야하고 밀집된 질료들이 필요로하는 진동들에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로운 의도를 가지고 투사된 악한 상념이 그렇게 순수한 체에 부딪히면 그것은 되튀어서 거의 무저항의 자기선을 따라 다시 날아 가는데 그 투사자 쪽으로 되돌아 가서 부딪힌다. 그는 자기(투사자)가 일으킨 상념체의 질료와 유사한 질료를 그의 멘탈체와 아스트럴체에 가지고 있기때문에 반응하는 진동들 속으로 내던져져서 그가 다른 사람에게 일으킬려고 의도했었던 파괴적인 영향들을 겪는다. 이리하여 “저주(그리고 축복)은 자기에게로 되돌아 온다.” 이로부터 또한 착하고 아주 발전된 사람을 미워하거나 의심하면 아주 심각한 결과들이 발생한다. 그에게 보내어진 상념체들은 그를 해칠 수 없고 상념체는 자신을 보낸 주인에게 되돌아가서 그 투사자들을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육체적으로 파괴한다.

사람이 자기자신을 어떤 먼곳에 있는 것 처럼 생각하거나 먼곳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 그는 자기자신의 영상(상상) 속에서 만든 상념체가 그 곳에 나타난다. 흔히 그러한 상념체는 다른 사람에게 보였고 때때로 아스트럴체나 그 상념체를 보낸 사람의 유령으로 오해되어 왔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보는 사람이 그때 상념체를 볼 수 있는 충분한 투시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상념체가 스스로를 유형화시킬 수 있는, 다시 말해 상념체 주위에 일시적으로 물질계의 질료를 어느 정도 끌어들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한 형태를 일으키는 상념은 필연적으로 강한 상념이 되어야하므로 멘탈체의 상당한 부분을 이용하게 되고 그 형태가 사고자를 떠날때 작고 압축되어 있지만, 그 상념체는 목적지에 나타나기 전에 대개 실물 크기로 팽창한다. 더구나 본질적으로 반드시 멘탈질료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이와 같은 상념체는 아주 많은 경우에 또한 그 주위에 상당한 양의 아스트럴 질료를 끌어 당긴다. 아스트럴 형태를 띌때 멘탈적인 엘리멘탈은 그 이글이글하는 색깔이 자신이 취하는 하위질료의 껍질층 안에 여전히 쉽게 보일 수 있지만 자기의 광채의 많은 부분을 상실한다. 원래의 상념이 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에 영혼을 부여하듯이 멘탈 엘리멘탈로서의 상념체에 대비(대조)해서 본다면 바로 그 상념(아스트럴 질료를 끌어당긴 상념)이 아스트럴 엘리멘탈의 영혼으로서 작용한다.

사고자의 의식의 어떤 부분도 막 기술된 것과 같은 상념체에 포함되지(작용하지) 않는다. 일단 그로부터 내보내어지면 일반적으로 상념체는 완전히 별개의 실체다. 그러나 사실 상념체는, 상념체의 창조자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어떠한 인상을 받는 가능성에 관한한 실제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멘탈에서 어느 정도의 통제를 필요로 하는, 일반 투시능력보다 훨씬 더 향상된 형태의 투시능력이 있다. 이것은 새로 창조된 상념체에 의해서 인상들을 받는 것이 가능하게 할 만큼 그 상념체와의 연관과 그것에 대한 지배를 보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상념체에 주어진 그러한 인상들은 동조진동에 의해 사고자에게 전송될 것이다. 이러한 투시능력이 완벽한 경우에 그것은 거의 마치 보는 자(투시자)가 그의 의식의 일부를 상념체로 투사해서 관측이 가능한 일종의 전초지점으로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 자신이 상념체를 대신하여서 서있는 것처럼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주 잘 볼 수 있다. 그가 보고 있는 인물들은 그에게 실물크기이며 가까이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원한다면 그의 (의식의) 관점을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여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상념체들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연습한다. 상념들이란 실제적인 것들이며 매우 힘이 있는 것들이다. 우리 모두가 밤낮 끊임없이 상념체들을 만들고 있다. 우리의 상념들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특별히 우리자신의 일이 아니다. 사실 악한 상념들은 악한 말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미치고 이미 자신들속에 악의 씨앗들을 잉태하고 있는 어떠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한 매스터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자신의 공간속에 그의 상념흐름을 자기의 공상들, 욕망들, 충동들과 정욕들의 결과로 붐비는 자기자신의 세계로 채우고 있다”

그는 또 아데프트가 할 수 있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아데프트는 그의 상상이 비가시적인 세계에 있는 무활성의 우주질료로 부터 형성한 상념들을 가시적인 세계속으로 투사하여 그 안에서 구체화 할 수 있다. 아데프트는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자신의 주위에 저장해온 질료와 오랜 세월동안 모든 형태를 경험한 질료을 단지 이용하고 조작할 뿐이다. 그는 단지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실재의 존재로 소생시킬 뿐이다.”

영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사람과 개발된 사람의 차이는 개발된 사람은 의식적으로 상념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상념체를 의식적으로 창조하여 통제할 수 있을때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그의 능력들이 아주 크게 증대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는 당장에 멘탈체로 방문하기에 불편한 장소에 활동하기 위해 상념체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상념체들을 지켜보고 인도할 수 있고 그를 자신의 뜻(의지)를 수행하는 대리인으로 할 수 있다.

아마도 상념체의 최고의 예는 기독교에서 천사로 알려진 예다. 이것은 천사들의 계의 일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자세하게 보면) 그리스도의 외형을 띠고 있고 그리스도 자신의 의식의 확장인, 그리스도의 상념체다. 성변화聖變化로 알려진 “원소”에서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와 같은 존재의 천사에 의해서이다.

유사한 현상이, 다소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H.O.A.T.F의 초상(화)이 사용되는 프리메이슨 지부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상념체는 완전히 그리스도 자신의 일부분이 되어서 꼭 그가 육신의 형태로 지부에 서 있는 것처럼 그가 지부와 함께거주 한다는 생각으로 축복된 은혜를 받게 된다. 물질계에서 독사가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죽이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의지력를 행사함으로써 인위적인 엘리멘탈 즉 상념체를 즉각적으로 흩어지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엘리멘탈이 어떻게 작용하든지 간에 아주 이례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신비주의자의 마음을 끌진않는다. 이에 대한 이유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엘리멘탈 에센스에 관한 설명이 약간 필요하다.

상념체를 구성하는 질료인 엘리멘탈 에센스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자체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즉 그것은 자체의 내부적인 충동에 의해 모든 가능한 진동폭(진동율)으로 진동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상념의 진동이 에센스를 어떤 진폭으로 잠시동안 계속 진동하도록 할 때 그것은 상당한 도움을 받아서 다음번에 유사한 진동이 그것을 강타할 때 이전보다 더 쉽게 진동할 것이다.

엘리멘탈 에센스에 영혼(생명)을 불어넣는 상념이 나쁘냐 좋으냐는 (에센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로하는 것은 단지 어떤 종류의 상념에 의해 사용되기만 하면 된다. 선과 악의 차이는 영향을 받는 에센스의 성질에 의해 나타난다. 악한 상념이나 욕구는 그를 표현하기 위하여 보다 조야한 질료를 필요로하고 보다 고차원의 상념이나 욕구는 더 정묘한 질료를 필요로한다. 이리하여 점진적으로 엘리멘탈 에센스는, 인간과 자연령, 데바와 심지어 동물들의 상념이 자신에게 작용함으로써 그들이 실제로 생각하는 정도까지 진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엘리멘탈 에센스가 이러한 방식으로 진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신비가는 어떠하든지 그것의 진화를 방해하지 않도록 오히려 가능한한 방어막을 사용함으로써 자기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인공 엘리멘탈에 대하여 방어하기를 더 좋아하고 인공 엘리멘탈을 공격하여 파괴시키는 것을 꺼려한다.

물론, 학도는 보다 조야한 형태들의 에센스가 진화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저속한 상념들을 생각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보다 조야하고 저 차원의 상념들을 항상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신비가는 고차원적이고 순수한 상념들을 생각하고, 이리하여 아직은 애쓰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더 정묘한 엘리멘탈 질료의 진화를 도울려고 언제까지나 노력해야 한다.

상념체들이란 주제를 마치기 전에 우리는 모든 소리는 우리가 음악적인 소리라 부르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소리는 아스트럴 및 멘탈질료에 각인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아스트럴체 제7장에 이것에 대한 사항이 약간 기술되어 있다.

기독교의 성찬식을 거행하는 동안에 상위계들에서 형성되는 상념체 또는 상념체계는 음악에 의해 만들어진 (상념)체들과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일반적인 상념체들과는 약간 다르다. 그 상념체는 그 의식이 처음에 진행되는 동안에는 목사의 모인 회중에 의해 에텔, 아스트럴 및 멘탈수준에서 제공되어지다가 나중에 훨씬 높은 차원의 질료가 주로 천사무리로 부터 도입되어 형성되는 고급계의 구조(들)로 이루어진다.

상념체계thought-editice는 물을 증류하는 공장의 액화장치에 비유될 수 있다. 증기는 냉각실에서 냉각되고 물로 응결된다. 비슷하게, 성찬식의 체계는 숭배자들에 의해 제공되는 상념적인 자료들을 수집하고 응축하는 용기를 제공한다. 그 속으로 가장 높은 계들로 부터 신성한 힘이 특별히 쏟아부어져 내려와서 천사와 같이 돕는 존재Angel-helpers로 하여금 물질계에서 어떤 명확한 목적들을 위하여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모든 위대한 종교들의 의식들은 어떤 종류의 공통된 행위를 통하여 그러한 결과들을 낳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프리메이슨의 의식들은 비록 다른 방법에 의하기는 하지만 비슷한 목적을 달성한다.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형성된 상념체는 등을 대고 누워있는 사람의 오오라라고 또한 여겨질지도 모르는 진짜 “천상의 덮개”이다.

이러한 상징은 다른 곳에서, 예를 들면 많은 색깔을 지닌 요셉의 외투와 비전가가 입는 영광의 의복과 또한 그리이스 철학자들의 Augoeides 즉 인간의 영혼이 보이지 않는 정묘한 세계에서 입는 영광스러운 몸에서 처럼 나타난다.


제 9 장

상념전이의 메카니즘



상념전이의 현상과 그것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기 전에, 상념이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는 메카니즘을 먼저 기술하는 것이 이해하는데 편리할 것이다.

텔레파시Telepathy라는 말은, 말 그대로 “멀리에서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특별히 느낌 혹은 감정의 전이에만 국한되어 사용되었느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상념전이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비물리적인 수단에 의하여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영상image이나 상념이나 느낌의 전이를 모두 포함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다.

텔레파시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즉,

1)두 에텔 두뇌와
2)두 개의 아스트럴체
3)두 개의 멘탈체 사이의 직접적인 교신Communication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물질Physical 또는 에텔 방법이라 부를 수도 있는 첫번째 방법에서, 상념은 먼저 멘탈체에 진동을 일으키고 다음에는 아스트럴체에, 그 다음에 에텔 두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질계 두뇌의 조밀한 분자들 속에서 진동을 일으킨다. 두뇌의 진동에 의해 물질 에테르는 영향을 받고 그 파장은 바깥으로 나가 다른 사람의 두뇌에 도달한다. 다른 사람의 두뇌에 도착한 파장은 두뇌의 에테르와 조밀한 입자들에 진동을 일으킨다. 받아들이는 쪽의 두뇌에서 형성된 이러한 진동들은 그 다음에는 두뇌에 붙어 있는 아스트럴 및 멘탈체에 전달되고 그리하여 의식에 도달하게 된다.

만약 사람이 물질 두뇌에서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강하게 생각하면 그는 에텔질료에 그 형태를 만든다. 영상을 만드는 노력을 할 때 그는 또한 모든 방향으로 에텔 파동들을 내보낸다. 내보내지는 것은 영상 자체가 아니라 영상을 재현할 일단의 진동들a set of vibrations이다. 그 과정은 전화와 약간 비슷하다. 전화에서는 목소리 자체가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에 의해서 많은 전기적 진동들이 생기게 되는데, 진동들이 수화기에 들어갈 때 목소리를 표현하는 음들로 다시 한 번 바뀐다.

송과선은, 눈이 시각 기관인 것처럼 상념전이의 기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송과선은 개발이 되지않은 상태이지만 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약하게나마)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송과선이 앞으로 완벽하게 수행할 고유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송과선의 진화를 촉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집중적으로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면서 단 하나의 관념idea에 대해 아주 골똘히 생각하면, 그는 송과선에서 약간의 떨림이나 스멀스멀하는 느낌―그것은 개미가 기는 듯한 느낌에 비유되어 왔다―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 떨림(진동)은 송과선에 스며들어 있는 에테르에서 발생하며 송과선의 조밀한 분자들 속에서 (개미가) 기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약간의 자기적 흐름을 일으킨다. 만약 상념이 그러한 자기적인 흐름을 일으킬 정도로 충분히 강하면, 그 때 사고자the thinker는 그의 상념이 전달되어 질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하고 힘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송과선의 에테르에서 생기는 진동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에테르에 그러한 단지 진폭이 훨씬 더 작고 속도가 더 빠른 빛의 파장들 처럼 파장들을 일으킨다. 이러한 진동들은 에테르를 움직이게 하면서 모든 방향으로 지나가고 이러한 에텔 파동들은 다른 사람의 두뇌에 있는 송과선의 에테르에 진동을 일으키고 그곳에서부터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규칙적으로 연속해서 멘탈 및 아스트럴체로 이전되어 의식에 도달한다. 두번째 송과선이 진동을 재현할 수 없다면,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한채 지나가버리는데 이것은 빛의 파장들이 맹인의 눈에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상념전이의 두번째, 즉 아스트럴체에 의한 방법에서는 에텔 두뇌는 전혀 그 과정에 관여하지 않으며 교신Communication은 한 아스트럴체에서 다른 아스트럴체로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세번째, 즉 멘탈체에 의한 방법에서는, 사고자는 멘탈계에서 상념을 창조한 후에 아래쪽의 물질 두뇌로 보내지 않고 그것을 즉시 다른 사고자의 멘탈체로 향하게 한다. 이것을 의도적으로 행하는 능력은 상념전이의 물리적인 방법보다 훨씬 더 높은 멘탈적인 진화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보내는 사람이, 아는 상태에서 이런 활동을 행하기 위해서는 멘탈계에서 자기자신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보다 진화될 때 아마도 이것이 보편적인 교신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이미 매스터들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사용해 왔으며,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가장 복잡한 생각들을 쉽게 전달할 수 있다.


제 10 장

무의식적인 상념전이


제 7장과 8장에서 우리는 상념파동들 및 상념체의 생성과,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느 정도 다루었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의 후자적인 측면―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욱 상세히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먼저, 완전히 일어나든 아니면 부분적으로 일어나든 무의식적인 형태의 상념전이를 다룰 것이다.

이미 이야기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상념의 자취를 뒤에 남긴다. 예를 들면, 우리가 거리를 따라서 쭉 걸어갈 때 항상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상념의 바다 속에서 걷고 있다; 대기大氣 전체가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은 타인의 상념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이 마음을 잠깐 동안 텅 비워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러한 상념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마음에 아주 작은 인상을 줄 뿐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때때로 그 사람의 관심을 끄는 상념이 마음속에 들어와 그의 마음이 그 상념을 붙잡아서 잠시 동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그 상념에 힘을 불어넣음으로써 강화한 다음에 다시 그 상념을 내보내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상념에 대한 책임은 없다. 왜냐하면 그 상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 상념을 취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난 후에 강화시킨 채로 내보내면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많은 근원들로부터 오는 그런 혼합된 상념들은 어떠한 명확한 일관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상념들 중 어떠한 것이라도 일련의 연관된 생각들을 일으켜 마음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상념들의 흐름을 조사한다면, 아무런 근거도 없고, 쓸모도 없는 공상들이 짧은 기간 중에 얼마나 많이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와서 떠나는 지를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이 상념들 중 4분의 1도 자신들이 만들어낸 상념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 상념들은 전혀 쓸모가 없고, 그들의 일반적인 성향은 좋기보다는 오히려 나쁘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주로 명확한 의도 없이 내보내어지는 그들의 상념에 의해 계속해서 서로서로 영향을 미친다. 사실, 여론與論은 주로 이렇게 해서 형성된다. 대부분의 여론은 상념전이想念轉移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그 문제를 생각해 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설득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힘이 강한 사고자思考者의 강력한 상념은 멘탈계 속으로 들어가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포착된다. 그들은 포착한 그 진동을 재현하고, 상념을 강화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상념들은 점점 더 강해지고 결국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상념체들을 전체적으로 고찰한다면, 그들이 민족적 및 인종적인 감정을 일으켜 마음에 편견을 갖게 하고,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는데 끼치는 엄청난 영향을 깨닫기가 쉽다. 우리는 어떤 생각들 가령 민족적인 편견들, 여러가지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의 사고방식들, 그리고 상념과 감정의 민족적인 여러 형태들을 구체화하는 상념체들로 붐비는 대기―상념의 바다―에 둘러싸인 채로 성장한다. 이런 모든 상념들은 우리의 출생부터 심지어 출생 이전부터 우리에게 작용한다. 모든 것을 상념의 바다인 이 대기를 통해 보고, 모든 상념은 이 대기에 의해 다소간 굴절이 되고, 우리 자신의 멘탈체와 아스트럴체는 이 대기와 일치해서 진동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국가적인 분위기에 의해 지배된다. “여론與論”은 일단 형성되면, 쉴새 없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두뇌를 강타하고 그 두뇌 속에 공명하는 진동들을 일으키면서 그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자나 깨나 이러한 영향들은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으며 바로 우리의 무의식이 그것들을 더욱 효과 있게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격상 솔선해서 하기보다는 수용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이르는 상념들을 거의 자동적으로 재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리하여 전국적인 분위기는 계속적으로 강화된다.

이러한 사태의 필연적인 결과로 다른 국가들로부터 인상들을 받는 나라들은 자기 나라의 진동율로써 그 인상들을 수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똑같은 사실들을 볼 때, 다른 국가의 국민들은 그 사실들에다 자신들이 자지고 있는 현재의 선입관들을 더해 놓고는 서로서로가 그 사실들을 왜곡하고 부정한 방법들을 실행하고 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만일 이러한 사실과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인식된다면, 많은 국제 분쟁들이 현재의 경우보다 더 쉽고 순조롭게 해결되고 많은 전쟁들까지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각 국가는 “각국의 개성의 차이에 의한 판단의 차이”를 인식하고 의견차이에 대해 상대방을 비난하는 대신에, 두 견해 사이에 절충을 구하고 나아가 어느 당사자도 전적으로 자기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론을 형성하는 거대한 구름떼 같은 상념체들의 영향을 뿌리치고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힘으로 (진리와 사실에 대해서) 진정한 구별을 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 진실을 전혀 볼 수 없으며, 또한 그 존재에 관하여 알 수도 없기 때문에 이 거대한 상념체를 받아들이는데 만족하게 된다. 그러나 신비주의자에게 무엇보다도 필요로 하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명확하고 편견 없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다른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명확한 시야를 확실히 견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거대한 덩어리로 떠도는 상념의 구름이 미치는 영향력을 간파한다는 것은, 그 영향력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상념의 영향력은 언제까지나 존재하고 있으며, 비록 우리가 보다 큰 사항에 대해서는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할지라도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는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그것에 굴복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압氣壓의 영향하에 태어나는 것과 똑같이 상념의 구름의 영향 하에서 태어났고, 기압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이 그 영향력을 의식하지 못한다. 신비주의자는 자기자신을 이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이러한 거대한 집단적인 상념체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채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만 한다.

집단 상념체들의 영향은 사람의 정묘한 체들에 미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훨씬 범위를 넘어서서 작용하고 있다. 파괴적인 유형의 상념체들은 파괴적인 힘(에너지)으로 작용하여 종종 물질계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들은 수많은 “사고”를 일으키는 근원, 즉 자연의 이변들, 폭풍, 회오리바람, 지진, 홍수 등의 근원이다.

그것들은 전쟁과 혁명 그리고 모든 종류의 사회적 혼란과 격동을 야기시킬 지도 모른다. 질병 및 범죄의 유행, 사건들의 주기적인 발생들은 마찬가지로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분노의 상념체들은 살인을 저지르는데 일조한다. 이리하여 모든 방향으로 끝없는 형태들로써, 사람들의 악한 상념들은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반작용하면서 파괴를 자행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개인의 상념이 유발하는 결과들에 주의를 기울일 때, 학도는 “아스트럴체”에서 헌신적인 감정이 물밀듯이 들어옴으로써 아스트럴체에 생기는 결과들에 대해 설명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한 헌신적인 감정은 대개 헌신의 상념들에 의해 또한 수반된다. 이러한 상념들은 주로 멘탈체에서 형성되지만 그 주위에 아주 많은 아스트럴 질료를 끌어당겨서 멘탈계와 아스트럴계 양쪽 모두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발달한 사람은, 헌신적인 상념파동이 퍼져나가는 중심지인데 필연적으로 상념과 감정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애정, 분노, 의기소침 그리고 다른 모든 감정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 하나의 전형적인 예는 강사로부터 흘러나오는 상념흐름들과, 청중으로부터 일어나서 그에 결합하는 올바른 이해와 인식의 상념흐름들이 바로 그 예이다.

종종 강사의 상념들이 작용하여 청중의 멘탈체들에 공명진동하는 반응이 일어나서 그 순간 그들은 강사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강사의 자극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는 잊어버리고 처음에 들었던 그 당시에는 명료한 것처럼 보였던 것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한편, 비평적인 상념은 강사의 상념 흐름을 깨뜨리고 혼란시키면서 상반되는 진동율을 일으킨다. 이런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본 사람은 누구든지 그 실습 수업object-lesson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해진다.

어떤 책을 읽을 때 사람의 상념은 살아있지만 수면 중이거나 죽었지만 아스트럴체에 있을지도 모르는, 저자의 주의를 끌 수도 있다. 이리하여 저자는 학생에게 끌려와서 학생으로 하여금, 저자가 (학생의) 육체를 입고 그와 함께 있는 것처럼 작가의 분위기에 아주 강하게 휩싸이게 할 수도 있다.

역시 유사하게, 학생의 상념은 같은 주제를 연구해온 다른 사람들의 상념을 자기에게로 끌어 들일 수도 있다.

사자死者의 상념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뛰어난 예는, 어떤 사람이 가령 살인죄로 처형을 당한 곳에서 그가 다른 살인을 선동함으로서 보복을 하는 곳에 일어난다. 사실 이것은 공동사회에서 때때로 그와 똑같은 유형의 살인들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된다.

어린아이에게 미치는 상념의 영향은 특히 두드러진다. 어린아이의 신체가 유연하고 형성력形成力이 있는 것과 같이 그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도 똑같다. 어린아이의 멘탈체는 스폰지가 물을 빨아올리듯이 다른 사람들의 상념들을 흡수해버린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지금은 그 상념들을 재현을 못 할 수도 있지만, 그의 마음에 뿌려진 상념의 씨앗들은 적절한 시기에 재현하게 된다(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이가 고상하고 사심 없는 분위기에 둘러싸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투시가透視家에게 어린아이의 아름답고 순백한 영혼과 오라들이 몇 년 지나서 주위에 있는 어른들의 이기적이고, 순수하지 못하며, 거룩하지 않은 상념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때가 묻고, 어두워지는 것을 본다는 것은 끔찍하다. 단지 투시가만이, 어른의 인격이 더 좋기만 한다면 어린아이의 인격이 얼마나 엄청나게 그리고 얼마나 빨리 향상될 것인지를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상념과 의지를 지배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리 좋은 목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상념을 사람의 좋은 특성에 고정시키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좋은 특성들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그의 결점들이나 나쁜 성향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성향들을 강화하거나, 악한 특성들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단지 씨앗으로 잠복해 있던 곳에 악한 특성들을 생기게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를 간단히 들면, 잡담이나 추문에 탐닉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질투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을 가정하자. 이런 사람들이 비난하는 즉시 그 불행한 희생자에게 질투를 연상시키는 온갖 종류의 상념흐름들을 쏟아 붓기 시작한다. 만일 그가 이미 질투하는 성향이 있다면 그러한 상념의 홍수에 의해 크게 강화될 것은 명백하다. 반면에 자신은 전적으로 질투로부터 벗어나 있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그의 결점을 상상해서 생각하고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너무나 잔인하게도 아주 고소하게 좋아하는 그 상상된 결점에서 넘어서서 그 사람 속에 바로 악을 창조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잡담과 추문에 의해 가해지는 상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신비학도는 “스승의 발밑에서At the Feet of the Master”에서 이러한 나쁜 짓을 하는 것에 대한 준엄한 꾸지람이 언급되어있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현시대에 행해지는 많은 비평들이 결점을 신랄하게 공격하는데 치중하는 반면, 진실한 신비주의자가 취할 비평의 자세는 ‘기쁘게 진주를 열심히 캐듯이’ 행하는 그러한 비평이 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좋든지 나쁘든지간에 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혹은, 오히려 그 불가피성―으로 인하여, 상념의 힘을 행사하려고 뜻을 품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힘은 무서운 무기가 된다.

아스트럴-멘탈 영상들 즉 감정이나 느낌이 관련되어 있는 상념체들은, 많은 사람들을 상호간에 카르마적으로 연결시키는 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이리하여 극단적인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가슴에 사무치는 증오와 보복의 상념을 내보냄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살인을 저지르게 하는 충동을 일으키는데 일조를 했다고 가정하자. 그 상념을 일으킨 사람은 비록 물질계에서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결코 본 적이 없지만 자신의 카르마Karma에 의해 그 범죄자와 필연적으로 연결이 된다. 비록 모른다고 해서 혹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카르마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육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상념과 감정으로 인해 생기는 그 결과도 그대로 받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만드는 멘탈 영상들은 그의 미래 환경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식으로 이후의 생애에서, 선하거나 악한 목적으로 사람들을 함께 끌어당기는 인연이 맺어지게 된다. 그 인연으로 인해 우리는 여러 유대관계와 친구와 적들로 둘러싸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행로에서 조력자들 즉 이 생애에서 우리가 사랑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방해자들 즉 이 생애에서 증오를 받을 만한 아무 짓도 행하지 않았지만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념들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작용하여, 우리의 멘탈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차후에 우리가 여러 인간관계로 사귀게 되는 친구들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물론, 우리 주위에 오오라의 질료로써 벽을 만들어서 우리 자신을 외부에서 오는 상념체들의 침입으로부터 상당한 정도로 보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멘탈 질료는 상념의 자극에 아주 쉽사리 반응하고 우리가 원하는 어떠한 모양으로도 쉽게 만들어질 수가 있다. 우리가 “아스트럴체”에서 본 바와 같이, (멘탈 질료로 방어막을 형성하는) 원리가 아스트럴 질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보호막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고백하는 것이고, 모든 것 중 최고의 보호는 강력하게 뿜어져 나오는 사랑의 물결로써 바람직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일소하는 해같이 밝게 빛나는 선의善意와 순수함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보호막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1) 난잡한 군중들 속으로 들어갈 때
2) 명상시에
3) 잠들기 전에
4) 보호막의 도움 없이는 저급한 상념들이 들어올 것 같은 특별한 상황등에 사용될 수 있으며, 2)는 제16장에서; 3)은 제18장에서; 4)는 제13장에서 각각 다루어 질 것이다.

보호막은 다른 사람들을 도우는 데 있어 분명히 여러가지 용도가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조력자”는 외부로부터의 명확하고 의도적인 공격들에 대해서나, 지루하고 갈피를 못 잡게 하는 상념들의 소용돌이에 대해서 아직까지 자기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사람을 돕는데 가끔씩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감정의 세계에 살고 있는 동물들이 감정적인 자극들을 멀리 떨어져 있는 동료들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윌리엄 J. 롱William J. Long은 흥미로운 그의 저서 “How Animals Talk”(어떻게 동물들이 이야기하는가)에서 이러한 텔레파시적인 의사소통 방법이 전 동물계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라고 자신이 믿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수많은 실례가 동물들의 생활에 호의를 가진 그리고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이 관찰자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돈Don이라 불리는 세트종種 사냥개는 주인이 언제 집으로 돌아오는 지를―특별히 예기치 않은 때에도―항상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개는 또한 언제 토요일이나 휴일이 돌아오는지 그리고 주인이 언제 그를 숲속으로 데리고 나갈 지를 알고 있었다. 와취Watch라는 개는,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말이 오륜경마차를 운전하면서, 주인과 함께 3~4마일 떨어진 곳에서 집으로 출발하는―항상 달리하는―몇 초의 시간 내에 그의 주인을 만나러 나가는 것이 거듭 관찰되었다.

두려움이나 초조함이 말을 탄 사람에게서 말에게로 쉽게 전달된다는 것은 말을 타는 사람들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 만일 늑대새끼 한 마리가 새끼들로부터 도망치면, 어미늑대는 그 새끼를 뒤쫓는 대신에 조용히 그대로 남아서 머리를 들어 새끼가 달아나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쳐다보면, 새끼는 주춤하다가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그 새끼들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 관찰되었다. 암 여우는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매순간 자기의 가족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같다; 어미가 새끼들을 계속 응시하면, 새끼들은 즉시 노는 것을 멈추고 즉시로 굴 속으로 뛰어 들어와서 어미가 사냥가서 돌아올 때까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상처를 입은 늑대는, 며칠 동안 홀로 누워 있은 후에―물론 전혀 자취가 남아있지 않지만―8~10마일 떨어져 있는, 늑대떼들이 그 당시에 죽였던, 동물의 시체를 향해 곧장 달려간다고 알려져 있다.

캡틴 룰Captain Rule이라는 사람은 그가 향유고래를 (작살로) 맞히자 마자, 10마일 이내에 있는 모든 다른 향유香油고래가 마치 전부 작살에 맞은 것처럼 꼬리를 돌린다(뒤집는다)는 것을 관찰했다. 어떤 야생동물들은 다른 많은 새들이 열심히 먹이를 먹고 있는 순간에는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찌르기과 새들의 “날개 훈련”은 단지 텔레파시적인 의사소통을 가설로 할때에만 설명할 수 있는 것 같다. 물새 떼의 집단적인 움직임도 그 가설로서 설명될 수 있다.

많은 사냥꾼들이 총을 휴대하지 않고 나가거나 잡겠다는 의도를 전혀 갖지 않고 나가면 빈번히 많은 야생동물들을 보고 아주 가까이에 접근하지만, 죽이겠다는 욕망이 있으면 동물들이 차분히 있지 못하고 의심스러워하며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관찰해왔다. 흥분이 사람에게서 동물에게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한 사냥꾼이 자신의 육체 및 마음의 흥분을 억눌렀을 때는, 자기가 이 교훈을 배우기 전보다 훨씬 더 쉽게 사냥감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가 획득한 호랑이가죽이 많은 것이 그의 말을 뒷받침한다.

저자는 좀더 나아가, 어떠한 정보가 정상적인 5감으로는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종종 하나의 명확한 감각으로서 작용해서―아프리카인들이 “chumfo”라 부르는―다가오는 위험에 대하여 경고를 주는 능력을 가진 많은 인디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만났다고 말한다.

특별히 이 주제와, 동물의 일반 생활상에 흥미를 가진 독자들은 “How Animals Talk”와 William J. Long이 저술한 다른 책들을 읽도록 강력히 권하고 싶다.


제 11 장

의식적인 상념전이와 멘탈치유



어떤 두 사람이 그러한 노력에 충분한 시간과 인내를 들이기를 좋아하고, 상념을 명확하고 꾸준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상념전이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상념전이의 기술에 다소 능숙해지는 것은 거의 누구라도 가능하다. 물론 ‘심령 연구협회 보고서’와 같은, 그 주제에 관한 아주 방대한 양의 문헌이 있다.

두 실험자는 상호 편안한 시간을 맞추어 매일 10분 내지 15분을 그 일에 바쳐야 한다. 그 다음에 각자는 아무런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 한 사람은 상념 투사자 혹은 상념전송자가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수신자가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한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수동적으로 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이러한 역할을 교대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구나, 한 쪽이 훨씬 전송을 더 잘하고, 다른 쪽은 받는 것을 더 잘 할 수도 있다.

전송자는 추상적인 사고에서부터 구체적인 물체, 가령 단순한 기하학도형 중 아무 것이나 하나의 상념을 선택해서 집중하고 의지적으로 그것을 수신하는 친구에게 그 인상을 심어 주도록 해야 한다. 마음이 파탄 잘리Patanjali에 의해 “한 점one-pointed”으로 자세히 묘사된 상태에 있으면서 전적으로 집중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경험이 없는 사람은 주의력이 분산되거나 갈팡질팡하여 나쁜 습관이 형성되거나, 긴장을 하게 되므로 너무 오랫동안 집중하는 것은 좋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수 초秒의 집중이 수 분分의 집중보다 더 안전하다.

수신자는 어떠한 사소한 신체적 불편으로 집중하는 상념에서 그의 주의력이 분산되지 않도록 가능한한 신체를 편안하게 하여, 마음을 텅 비우고―미숙한 자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일단 그 비결(요령)이 터득되면 아주 쉽다― 그 안으로 들어오는 상념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이것들이 나타나자 마자 적어야 하며 그의 유일한 관심은 여전히 수동적인 상태로 남아 있으면서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고 아무것도 조장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전송자 또한 그가 보낸 상념들을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그 두 기록을 비교해야 된다.

실험하는 사람들의 의지활용과 상념통제의 능력이 특별히 부족하지만 않다면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의 능력이 몇 주 지나,―아무리 늦어도 몇 달 지나면 개발될 것이다. 저자著者는 첫 시도에서 그것이 발생하는 것을 체험했다.

“올바른White” 신비학도는 일단 상념전이의 가능성을 확신하면,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학구적인 실험이나, 그들 자신의 판단에서는 유용할 지 모르지만 그의 친구들에게 단순히 친근한 상념들을 내보내는 것에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자신의 상념의 능력들을 사용할 수 있다.

이리하여 하나의 명백한 예를 들어, 학도가 음주와 같은 해로운 습관에 빠져 있는 사람을 돕고 싶어한다고 가정하자. 그는 먼저 수면 시간과 같은 어떤 시간대에 환자의 마음이 작용하고 있지 않은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 사람이 잠이 든다면 그만큼 더 좋다.

그러한 시간대에는 홀로 앉아서 환자가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마음 속에 상상해야 한다. 아주 명확한 심상화가 되면, 필수적이진 않지만, 만약 그 영상이 생생하게, 명확하게 그리고 자세히 심상화가 되면, 그 과정은 더 효과적이다.

만약 환자가 잠들어 있는 상태라면, 그는 그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의 아스트럴체가) 끌려 올 것이고, 형성되어온 자신의 영상에 활력을 불어 넣을 것이다.

그 다음에 학도는 마음을 완전히 집중하여 그 영상에 고정시켜 그가 환자의 마음에 인상을 주기를 원하는 상념들을 말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직접 환자 앞에 안건들을 내놓거나 말로써 간청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만큼 명확한 멘탈 이미지들을 이 상념들에 제공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환자의 의지를 통제하려고 시도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해야 할 일인 단지 그의 마음의 지성과 감정에게 호소하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형성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행하기 위한 노력을 하도록 돕는 것일 뿐이다.

그에게 어떤 특별한 행동 노선을 강요하는 시도가 행해져서 그 시도가 성공한다 할지라도, 얻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첫 째로, 강요로 인해 효과를 약화시켜 그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그가 지금까지 저지르지 않았던 악행보다 더 많은 해를 그에게 미칠 지도 모르다. 두 번째로, (다른 종류의) 유해한 방종에 멘탈적으로 빠지는 경향은 특별한 형태의 방종에 탐닉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한 쪽에서 제지당하면 그것은 다른 쪽을 찾을 것이고, 새로운 악이 과거의 악을 대신할 것이다. 이리하여, 의지를 지배당함으로써 강요를 받아 절도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악을 치료받지 못하는 것은, 그가 감옥에서 옥살이를 할지라도 치료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실제적인 고찰은 별도로 하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심지어 올바로 행동하도록 할 때조차도 그에게 자기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참된 성장은 외부의 강제력에 의해서 도움을 받지는 않는다. 실제적인 이익을 얻기 전에, 우리의 지성intelligence은 (신성을) 확신해야 하며 감정은 각성되고 정화되어야 한다.

만약 학도가 그의 상념을 통하여 어떠한 다른 도움을 주기를 원한다면, 그는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 우리가 제 8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일반적인 보호력으로서 친구에게 보내어진 친구가 잘되기를 바라는 강한 희망(소원)은, 상념의 강도에 비례하는 시간 동안 상념형태로 그 주위에 남아 있을 것이고, 악한 상념들에 대하여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하며 심지어는 물리적인 위험들을 막으면서 악에 대하여 그를 보호할 것이다. 비슷하게 보내어진 평화와 위안의 상념은 그 대상 주위에 고요한 분위기를 퍼지게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요하게 한다.

이리하여 상념전이가, 시술자로부터 환자에게 선하고 강한 상념들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멘탈치유mind-cure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의 예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멘탈학, 멘탈치료mind-healing 등등이다.

단순히 자신이 건강하다고 믿게 함으로써 사람을 치유하는 시도가 행해지는 그러한 방법들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최면적인 영향이 빈번히 작용한다. 인간의 멘탈체, 아스트럴체와 에텔체는 아주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만약 어떤 사람이 멘탈적으로 자기 자신이 건강하다고 믿는다면, 그의 마음은 신체로 하여금 그의 멘탈 상태와 조화를 이루게 하여, 치료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블라바츠키H.P.Blavatsky여사는, 시술자가 환자의 습관을 깨뜨리고 환자의 의지가 술에 취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하여 스스로를 굳건히 할 수 있도록 그의 의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시술할 줄 안다면, 그를 음주로부터 구해내기 위하여 최면을 사용하는 것은 적법하고 심지어 현명하다고 여긴다. 환자의 의지력이 알콜중독에 의하여 마비되었기 때문에, 최면술사는 그 사람의 의지가 회복되어, 의지력을 다시 행사할 수 있도록 일시적인 방편으로 최면의 힘을 사용한다.

신경계통은 영적인 능력들을 물질계에서 표현하기 위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신경질환들은 의지력에 가장 쉽게 굴복한다. 교감계통은 욕망의 형태와 의지적인 측면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의지력이 그 계통에 먼저 작용할 때 가장 빨리 그 효과들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뇌척추 계통은 인식과 순수의지의 측면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다른 치료방법은 치료자로 하여금 먼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정확히 발견하고, 자신이 그 기관을 마음 속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 그 기관이 마땅히 되어야 할 건강한 상태를 상상한다. 다음으로는 그가 이렇게 창조한 멘탈 상념체 속으로 그는 아스트럴 질료astral matter를 만들고, 자기력에 의하여 그 체에 이용가능한 물질들을 사용하며 외부로부터 어떠한 부족한 것들을 보충하면서 에텔 질료로서 그 아스트럴 질료를 더 조밀하게 하여 결국에는 기체, 액체, 고체들로 형성된 보다 조밀한 물질을 만들게 된다.

이 방법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해부학과 생리학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가 향상(진전)된 단계의 경우에는, 물질계적인 의식에서는 지식이 부족할 수도 있는 시술자의 의지는 상위의 계로부터 인도를 받을 수도 있다.

이 방법에 의해서 하는 치료들에는, 위에 언급된 교감(신경)계통에 작용하는 것보다 쉽고 따라서 보다 일반적인 방법에 의해 의한 치료들에 따르게 되는 그러한 위험이 없다.

그러나 의지력에 의한 치료에는 어떤 위험이 있는데, 즉 병을 보다 높은 체 안으로 몰아넣는 위험이 존재한다. 병은 종종 이전에 고급계들에 존재했던 악을 최종적으로 표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그것을 제지하여 다시 더 정묘한 체 속으로 되돌리는 것보다는 병이 스스로 표출되도록 하는 것이 더 낫다.

만일 병이 악한 욕망이나 악한 상념의 결과라면, 그때는 물리적인 치료수단이 멘탈적인 수단보다 더 좋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수단은 그 질병(의 원인)을 다시 상위의 계로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인데, 그러한 일은 만일 멘탈적인 수단이 사용되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메스메리즘mesmerism은 이것이 물리적이면 적합한 치료과정이 된다.

참된 치료법은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를 완벽하고 조화롭게 만든다. 그러나 이 방법은 훨씬 더 어렵고 의지를 사용하는 방법만큼 그 효과가 신속하지 않다. 감정과 마음의 순수함은 육체의 건강을 의미하고, 마음이 완벽히 순수하고 균형이 잡힌 사람은 자기가 없애야 할 카르마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생긴 부조화들 중 얼마를 자신이 짊어질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신체상의 질병에 걸리지는 않는다.

물론 치료하기 위하여 상념의 힘을 사용하는 다른 방법들이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우주에 있는 하나의 거대한 창조력인데, 우주에서는 신적인 창조력이고 인간에게서는 인간적인 창조력이다. 그리고 마음은 창조할 수 있는 것 바와 같이 회복시킬 수도 있는데, 상처가 난 곳으로 마음을 돌려 그 힘으로 상처를 치료하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김에 우리는 또한 “매력glamour”의 힘은 간단하게 명확하고 강한 멘탈 영상을 만든 다음에 그것을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투사하는 능력일 뿐이라는 것에 유의해야한다.

종종 기도祈禱에 의하여 타인에게 주어지는 도움은 주로 지금 막 설명한 것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일반적인 소원들과 비교할 때, 기도가 빈번하게 효과가 있는 것은 경건한 신자가 그의 기도 속으로 몰입하는 더 큰 집중과 강도에 기인한다. 기도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비슷한 집중과 강도는 유사한 결과들을 낳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의 상념의 힘에 의하여 생기는 기도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학도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어떤 진화된 인간이나 초인이나 심지어 비인간적인 지성적인 존재의 관심을 불러들이기 위한 간구에 기인하는 기도에 의한 다른 결과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기도를 하는 사람이 소유한 어떠한 능력보다도 더 뛰어난 능력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기도응답”에 관해서는 여기서 곧 바로 다루지는 않는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상념으로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죽은 사람들”에게 훨씬 더 쉽게 행할 수 있다. ‘아스트럴체’에 설명된 바와 같이, 사후의 사람의 성향은 주의(관심)를 내부로 돌리며, 외부세계에서 살기보다는 오히려 감정과 마음(의 내부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욕망 엘리멘탈Desire-Elemental에 의한 아스트럴체의 내부로의 재배열(재구성)은 더욱 더 멘탈 에너지들을 가두어 놓고 에너지가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억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외부지향外部指向적인 에너지들을 이렇게 억제한 사람은 멘탈계로부터 오는 영향들에 더욱 더 민감하게 되어, 지상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도움을 받고, 기운이 북돋워지고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사후 세계에서 사랑의 상념loving thought은 이 세상에서 표현되는 사랑의 말이나 부드러운 애무만큼이나 감각에 쉽게 느껴지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사랑과 평화의 상념들, 그리고 신속하게 위쪽으로 통과하려는 열망을 추구해야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이러한 측면에서 보며 자기들을 도와줄 방법을 아는 친구들이 없기 때문에, 친구들이 있을 때보다 더 오랫동안 중간상태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위대한 종교들을 창설한 신비주의자들은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죽어서 나아갔던 사람들을 위하여 당연히 치러져야 하는 예식(의식)에 관하여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힌두교도에게는 쉬라다Shraddha가 있으며, 기독교인에게는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와 기도문구가 있다.

이와 비슷하게, 상념전이가 반대로, 즉 육체를 떠난 자들로부터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로 발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리하여, 예를 들면, 특정 주제에 관한 강사의 강한 상념은 그 주제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육체를 떠난 존재들의 관심을 끌지도 모른다. 사실, 청중은 신체를 가진 사람들보다 아스트럴체를 입은 사람들을 종종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

때때로 이러한 방문객들 중 하나가 강사보다 그 주제에 관하여 더 많이 알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 그는 암시나 예증들로 강사에게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만약 강사가 투시능력이 있다면 그는 그 조력자를 볼 지도 모르고 새로운 생각들이 자기 앞에 더 미묘한 질료로 구체화될 것이다. 만약 강사가 투시능력자가 아니라면, 그 조력자는 아마도 강사의 두뇌에 생각들을 새길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강사는 그것들이 자기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종류의 도움은 종종 “보이지 않는 조력자”에 의해 제공된다.

어떤 목적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용되는 통일된 어떤 집단의 결합된 상념의 능력은 신비학도들과 마음의 과학을 보다 깊이 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리하여 기독교계의 어떤 교파에서는 어떤 특정구역을 복음화하기 위하여 선교단을 파견하기 전에 명확하고 지속적인 상념thinking을 보내는 것이 관례이다. 이런 식으로 전해질 가르침이 확산되기에 매우 호의적인 상념분위기thought-atmosphere가 그 구역에서 창조되어, 민감한 두뇌들은 그들에게 전해질 가르침에 대하여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된다.

로마 카톨릭교의 명상단체―수도원―들은 힌두와 불교의 은둔자들처럼 상념으로써 많은 이익을 주고 유익한 일을 한다. 사실상, 선하고 순수한 지성의 존재가 전세계에 고상하고 고매한 사상들을 퍼뜨림으로써 세계에 도움을 주는 일에 착수하는 바로 그 곳에서, 인류에 대한 봉사가 진행된다. 그러한 상념을 만드는 그 외로운 사고자思考者는 세계를 영적으로 고양시키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된다.

한 사람의 상념분위기(상념영역)가 다른 사람에게 강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우리가 반半의식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에 관한 또 다른 실례는, 학도나 제자를 영적인 스승 즉 구루에 연결시키는 일에 관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것이 잘 이해가 되고 있다. 거기서는 제자 훈련의 가장 중요하고 효율적인 것이 항상 스승의 면전에서 생활하며 스승의 오오라에 완전히 둘러싸이는 것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스승의 다양한 체들은 모두가―비록 제자가 때때로 잠깐 동안 연결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제자의 여러 가지 체들보다 더 높고 더 규칙적인 진동율로 끊임없이 강한 파장(폭)으로 진동하고 있다. 그러나 스승의 훨씬 더 강력한 상념파동들에 의한 계속적인 압력이 제자의 상념파동들을 같은 수준으로 서서히 끌어올린다. 이것은 음악적인 훈련과정을 이해하면 유추해서 대체적으로 납득이 간다. 아직 음악적인 귀가 거의 열리지 않은 사람이 혼자서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이미 완벽하게 훈련되어 있는 다른 사람의 더 강한 목소리와 함께 노래한다면 그의 일은 더 쉬워지게 된다.

중요한 사항은, 주음主音에 해당하는 스승의 상념파동은 언제나 고진동으로 작용하고 있어서 스승과 제자 어느 쪽에서도 의식할 필요없이 밤․낮 제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자의 여러 가지 정묘한 체들은 훨씬 더 쉽게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게 된다.

(기계적일 정도로) 무의식적이고 아무런 생각없이 행동하는 일반 사람은 누구도 영적인 스승의 조심스럽게 통제된 영향력의 100분의 1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일반 사람의 많은 수효가 개개인의 부족한 힘를 어느 정도 메꾸어 줄 수 있어, 우리의 동료들이 가지고 있는 의견과 감정에 의해―느끼지 못하지만 끊임없이―가해지는 압력때문에 우리는 부지중에 자주 그들의 편견 중 많은 것을 흡수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인종 및 민족적인 상념 영향을 다룰 때 이전의 장에서 본 바와 같다.

매스터에 의해 “받아들여진(accepted)” 제자는 매스터의 상념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어 제자는 그가 받아들인 상념이, 주어진 어떤 주제에 관한 것인 지를 언제라도 알기 위해 자신을 훈련할 수가 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종종 잘못을 모면한다. 매스터는 어떠한 때라도 하나의 암시나 아니면 메시지로(message:전언) 제자에게 상념을 보낼 수 있다. 예를 들면, 만약 제자가 편지를 쓰거나 강의를 하고 있다면, 매스터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어떤 때라도 제자의 마음속으로 편지에 포함되거나 강의에 사용될 문구를 보낸다. 초기 단계에서는 제자는 종종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 생각들이(ideas)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곧 매스터의 상념을 인식하는 것을 배운다. 사실상 멘탈계와 아스트럴계에서는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가장 친근하게 (스승의 암시와) 유사한 암시를 기꺼이 보내줄 많은 존재들이 있기 때문에, 제자는 스승의 상념을 인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다. 그리고 제자가 그러한 암시들이 누구에게서 오는 지를 분간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분명히 필요하다.


제 12 장

상념 센터들


같은 언어를 말하는 사람이 함께 끌리는 것처럼 멘탈계 있는 똑같은 유형의 상념들은 진동이 비슷하기 때문에 상호 인력이 작용해서 생긴 명확히 집중된localised 어떤 상념 센터들이 존재한다. 특정한 주제에 관한 상념들은 어떠한 상념이라도 많은 상념(공간상의 실제 장소들)들을 일관성이 있든 없든 지간에 옳든 그르든지 간에 흡수하는 이들 센터들 중 하나에 끌려간다. 그리하여 그 센터는 특정 주제에 관한 모든 상념의 흐름들이 모이는 일종의 촛점이 되고, 다시 이 흐름들은 모든 종류의 다른 주제들을 가진 수백만 개의 흐름들에 의해서 연결된다.

예를 들면, 철학적 사고는 주요한 철학적개념들에 상응하는 하부상념센터들sub-divisions이 있는 곳에 그 자신만의 명확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센터들 사이에 온갖 종류의 호기심을 돋우는 상호관계들이 존재하며, 다양한 철학체계들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 방식을 나타낸다. 그러한 개념들의 집합체들은 그 주제에 관하여 생각되어온 모든 것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철학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소용돌이와 같은 일단의 상념센터들과 접촉하게 된다. 만일 그가 멘탈체에 있다면 잠이 들었든지 “죽었”든지 간에 멘탈계의 적절한 지역으로 공간적으로 끌려간다. 만일 그가 육체에 애착을 가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이러한 소용돌이 중 하나나 다른 상념센터와 공명진동의 상태로 나아가서 소용돌이 모양의 상념센터들로부터 그가 동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그가 실제로 소용돌이 속으로 표류하여 들어 갔을 때의 경우보다는 약간 덜 자유로울 것이다.

엄밀하게는 연극이나 소설을 위한 상념센터는 존재하지 않지만, 소위 낭만적인 상념의 지역이 있다. 즉 한쪽에서는 남․여 관계와 관련된 것으로 모호하지만 화려하게 빛나는 수 많은 조합으로서 구성되어있는 상태이고 다른 면에서는 중세 기사제도를 특징으로 한 감정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는 인정 많은 동화들을 포함하는 엄청나게 크기는 하지만 다소 분명치 않은 일단으 상념형태들이 있다.

상념 센터들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사람들이 양처럼 무리를 지어 생각하게 되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나태한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이 한 주제를 고찰하고 혼자 힘으로 결정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애를 쓰는 것보다 이미 결정된 상념을 다른 어떤 사람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아스트럴계에서는 비슷한 현상이 약간 다른 식으로 작용한다. 감정 형태들은 모두가 하나의 세계 센터world-center로 날아 가지는 않고, 사실은 자신의 근처에 있는 같은 성질의 다른 상념들과 하나로 합쳐져서 거대하고 매우 강력한 감정 “덩어리blocks들”이 되어 거의 모든 곳에 이리 저리로 떠돌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아주 쉽게 그들과 접촉하게 되어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영향의 실례들은 공포, 정신병적인 분노, 우울증등의 여러 경우와 관련되어 발생한다. 그러한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motion의 흐름들은 배꼽근처의 챠크람을 통하여 사람에 도달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심장챠크람을 통하여 작용하는 고상한 감정들에 의하여 유익하게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념의 저장소들reservoirs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어렵다. 각 상념은 멘탈계의 질료속으로 혼자의 힘으로 뚫고 나가면서 길자국을 남기는 것 같다. 그 길은 일단 개척되면 계속해서 열려있거나 아니면 쉽게 다시 열리고, 그 길자국을 형성하는 질료의 입자들은 어떠한 새로운 노력에 의해서 다시 활성화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노력이 적어도 상념의 첫번째 흐름line을 일반적인 성향을 띠게 한다면 악간 다른 흐름이 이미 존재하는 흐름과 아무리 유사한 성향을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념이 혼자 힘으로 새로운 흐름을 개척해 내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그 흐름을 따라 갈 정도로 조금 더 적응하는 것이 더 쉽다.

물론 이러한 상념센터들의 크기content는 어떠한 일반 사고자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충분히 그 이상의 크기이다. 충분히 강하고 인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센터들과 관련된 또 다른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첫째: 이러한 상념 센터들을 통하여 상념의 힘을 일으킨 사람들의 마음들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의지가) 강하고 정열적이며 공명하는 마음을가지고 가르침을 잘 받는 사람은 실제로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思想家들의 발앞에 앉아서 그들로부터 인생의 문제들에 관하여 배울 수도 있다.

사람은 이리하여 상념센터에서 다른 상념형태들을 감지(탐흔)하고, 진동에 의해서 그것들이 연결되어 있는 사고자들에게 까지 상념을 뒤따라가서 그들로 부터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둘째: 본래 진리The Truth와 같은 것이 있다. 다시 말해서 만일 그 개념이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태양로고스Solar Logos의 마음에 있는 진리에 대한 개념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한 상념은 신성The Deity과 의식적으로 연합union을 이룬 사람에 의해서 접촉될 수 있지만, 그 수준 이하의 사람은 누구도 접촉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반영들은 상위의 계로부터 하위의 계로 투사되어 하강함에 따라 점점 더 희미해지는 것이 보인다. 이러한 반영 중 적어도 얼마는, 상념이 그 반영을 만나기 위해 치솟아 오를 수 있는 사람의 범위내에 있다.

이러한 상념센터들로부터 또 하나의 상당히 흥미로운 사항이 뒤따른다. 많은 사고가들이 동시적으로 같은 멘탈 지역으로 끌리고, 거기서 정확히 똑같은 개념들을 모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이 발생할 때, 물질계에서 그러한 상념들을 표현하는 것이 동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그때는 그들은 무지한 자들에 의해서 표절했다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멘탈계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더 빈번히 발생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두뇌들이 조잡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두뇌는 고급계에서 배운 것을 (물질계에서) 되살리는 것이비교적 드물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분야 뿐만 아니라 발명품의 분야에서도 발생한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동일한 발명품들이 종종 동시적으로 도착한다는 것은 특허청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다른 개념들은 작자에 의해 아카식akashic 레코드로부터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은 다음에 다른 장에서 다루어 질 것이다.


제 13 장

육체적 의식 또는 “깨어있는” 상태의 의식



이 장에서 우리는 멘탈체를 존재하는 그대로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각성waking”의식 동안 즉 보통의 물질적인 삶(물질계의 삶)에서 사용되는 것으로써 의 멘탈체를 고찰하겠다. 물질계의 삶에서 멘탈체의 성질과 작용을 결정하는 세가지 요소들을 차례로 다루는 것이 편할 것이다.

즉 (1) 물질적 삶The Physical life
(2) 감정적 삶The Emotional life
(3) 멘탈적 삶The Mental life

(1) 물질적 삶The Physical Life

아스트럴체 제 8장에서, 물질적 삶에서 아스트럴체에 영향을 주는 제요소들이 열거되어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거기에 쓰여진 것의 대부분이, 필요한 부분에 수정을 안 가하면, 멘탈체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요소들을 다시 장황하게 다루지 않고, 필요한 곳에 최소한의 설명을 곁들여 다만 간략하게 그것들을 요약할 것이다.

신체의 모든 부분이 각각 아스트럴 및 멘탈체의 상응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조야하고 순수하지 못한 신체는 멘탈체를 또한 조야하고 불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멘탈질료의 일곱 등급이 (물론 아스트럴 질료의 일곱 등급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질료의 일곱 등급에 각각 해당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멘탈체는 물질적인 고체들, 액체들, 기체들 그리고 에테르들에 의해 즉 물질적인 질료의 하위 4등급에 의하여 더욱 특별히 영향을 더욱더 받는 것 같다.

물론, 조야한 여러 가지 멘탈질료로 구성된 멘탈체가 다양하고 고상한 상념들에 반응하는 것보다 더 조야한 형태들의 상념에 더 쉽게 반응할 것이라는 것은 학생들에게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조야한 음식과 음료는 조야한 멘탈체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육고기 음식flesh food과 술과 담배는 육체, 아스트럴체 그리고 멘탈체에 해롭다. 똑같은 사실은 거의 모든 약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아편과 같은 약이, 큰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섭취되는 경우엔 가능한 삼가해서 복용해야한다. 독소를 제거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마약이 신체에 작용한 후에 멘탈체와 아스트럴체로부터 아편의 나쁜 작용을 제거할 수 있다.

게다가, 육고기와 술을 먹은 신체는 고차원 의식이 흘러 들어오는 과정 중에 특별히 건강을 잃기 쉽다. 사실, 신경질환은 고차원 의식이 (체내에 섭취된) 육고기에 의한 생성물flesh products로 막히고 술에 중독된 몸을 통하여 자기를 표현하려고 애를 쓰는 중에 형성 되었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기인한다.

모든 종류의 더러움은 종종 물질계보다 고급계들에서 더욱 장애가 될 수 있다. 이리하여, 예를 들면, 신체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발한perspiration으로서 항상 배출되고 있는 노폐물에 상응하는 멘탈 및 아스트럴의 질료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특성을 가진다.

떠들썩하거나 날카롭거나 갑작스러운 소음들은 자기의 아스트럴 및 멘탈체들이 정상적인 상태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라도 가능한 멀리 피해야한다. 이것이 번잡한 도시 생활이 끊임없는 소음의 영향으로 조형력있는 아스트럴체와 멘탈체에 치명적인 어린애들 뿐만 아니라 신비학도가 도시 생활을 피하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소음이 멘탈체에 미치는 영향이 누적된 결과로 피로감이 생기고 명철하게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의 멘탈체는 자신의 주변 환경에 있는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받는다. 이리하여, 예를 들면, 자신의 방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어떤 개념들에 대한 표현을 그의 눈앞에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술가 자기 자신 즉 자기의 내적인 상념과 감정의 아주 많은 부분을 자신의 작품안에 부여하기 때문에 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멘탈 및 아스트럴 질료로 명확히 표현된, 그림의 보이지 않는 이면들(숨겨진 측면들)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향기가 꽃속에 내재하고 꽃으로부터 발산되는 것과 똑같이 멘탈 및 아스트럴 질료들은 그림으로부터 발산된다.

책들은 상념형태들이 특별히 강하게 집중된 센터들이며 한 인간의 삶에서 알지 못하는 가운데 미치는 영향은 종종 엄청나다. 그러므로 서가에 불쾌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책들을 보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부적들Talismans or amulets은 어느 정도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들은 에텔체와 아스트럴체에서 이미 설명되었다. 간략하게 말하면, 그것들은 두가지로 작용한다.

(1)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자체의 파장들을 방사한다.

(2) 부적의 존재와 그 목적을 앎으로써 휴대하는 사람의 마음에 믿음과 용기가 생겨, 자기 자신의 의지력으로 그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힘을 발휘한다.

만일 부적이 만든 사람과 ‘연결되고’ 소지한 사람이 마음으로mentally 만든 사람을 부르면, 자아the ego는 반응하여 자기 자신의 보다 강력한 상념 파장에 의해 부적의 진동들을 강화시킬 것이다. 자기magneticism를 강하게 띤 부적은 이리하여 막대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감정들과 마음뿐만 아니라 육체적 성질physical nature도 극복되어야 하며, 육체적 성질이 다루기에 가장 어렵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얼마의 사람들은 부적 같은 것들을 조롱한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신비학의 길이 너무 힘이 들어서, 자기들에게 제공되는 보조적인 것은 무엇이든 기쁘게 사용한다.

이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부적은 아마도 샴�라Shamballa에서 보관되고 있는 비전들Initiation과 여러 용도에 사용되는 능력의 막대기Rod of Power일 것이다.

사람은 주위 대상들의 색채들에 의해 또한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감정이나 상념이 보다 정묘한 질료로서 어떤 색채를 표현하듯이, 역으로 심지어물체에 있는 특정 색채는 지속적이고 진동적인 압력을 우리에게 가하여 그 색깔에 적합한 감정이나 상념을 불러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특별한 경우에 적합한 마음과 감정의 상태를 더 일으키려는 노력에서, 제단의 앞휘장과 예복등에서 기독교 교회가 어떤 선정된 색채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있다.

사람은 자기 방의 벽들과 가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상념들과 감정들에 의하여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 가까이에 있는 물체들을 자기화하여, 그 물체들이 자신에게나 영향권 내에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똑같은 형태의 상념들과 감정들을 암시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놀라운 실례들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감방과 다른 비슷한 장소들의 경우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또한 분위기가 글자 그대로 높은 진동율로 진동하고 있는 “거룩한 장소들”의 중요성이 존재한다. 명상과 깊은 사색을 하기 위하여 따로 선정된 방은 곧 주변 세계의 분위기보다 더 순수하고 더 고상한 분위기를 띠게 되므로, 현명한 학도는 자기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이 사실을 당연히 이용한다.

이러한 종류의 상념의 힘thought-force이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것에 관한 하나의 실례로, 우리는 “재수 없다”라는 평판을 가진 어떤 배들이나 엔진들engines의 경우를 인용할 수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떤 배들에게 사고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들이 분명히 발생했다.

그러한 결과는 어느 정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발생했을 것이다. 강한 증오의 감정들이 배를 건조한 사람이나 처음 취임한 선장에 의해서 마음에 품어졌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러한 감정들 자체만으로는 심각한 불행을 일으킬 정도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선상생활에서는 사고가 단지 조심스럽고 신속하게 행동함으로써 사고를 피할 수 있는 경우들이 많다. 그런 경우에 단 한순간이라도 지체하거나 느슨하게 행동하면 재난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기술된 것들과 같은 그러한 집단적인 상념형태들은 순간적인 부주의나 순간적으로 주저하게 하는데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악의가 가장 쉬게 작용하는 채널이 될 것이다.

또한 그 반대도 사실이며 “행운을 가져다 주는lucky” 분위기가, 물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낙천적이고 쾌활한 상념들에 의해 물체주위에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유물遺物에 대해서도 유사하다. 개인적 자기磁氣를 높이 띠는 어떠한 물품도, 실제적으로 그 힘이 줄어들지 않고 수세기 동안 그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지도 모른다. 유물이 진짜가 아닐지라도, 수세기 동안의 헌신적인 감정에 의해서 그 속으로 쏟아 부어진 힘은 그것을 강하게 자기를 띠게 하고 선善을 위한 하나의 힘이 되게 한다.

이리하여 표현에 있어서 다소 예스럽고 운치 있지만 다음, 충고속에 신비적인 지혜occult wisdom가 존재한다; “네가 굽는 빵속에 사랑을 이겨 넣어라; 피곤한 얼굴을 한 여성을 위하여, 네가 묶는 소포속에 힘과 용기를 포장하라; 의심의 눈을 가진 남성에서 네가 지불하는 동전으로 신뢰와 정직함을나누어 주라.” 선의 법칙Good Law을 연구하는데 학도는, 비록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자기에게오는 축복의 근원을 전혀 알지 못할지 모르지만,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중하게 축복들을 나누어주는 기회는 많다.

제 11장에서 상념전이를 다룰 때 언급했던 것처럼, 영적으로 더욱 높이 발달한 사람과의 교제는 멘탈체의 발전과 훈련에 상당히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불로부터 발산하는 열이 불 가까이 있는 물품들을 따뜻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 보다 파워가 더 강한 사고가의 상념방사들은 우리의 멘탈체로 하여금 그와 공명동조하게 하고, 당분간 우리는 우리의 멘탈능력mental power이 증대되었음을 느낀다.

이러한 결과의 예는 종종 강의에서 일어난다. 청중속에 있는 사람이 연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 말하여지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 그 개념이 희미하게 되어 그것을 재현하려고 노력하는데 마음에 전혀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설명은 보다 강한 사고가의 뛰어난 진동들은 그때에 청취자의 멘탈체가 상념형태들을 만들었지만, 나중에 그 멘탈체가 그 자신의 힘으로 그러한 모습들을 다시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진실한 스승은 어떤 표현된 말에 의해서 보다 자기 가까이에 제자들을 있게 함으로서 훨씬 더 제자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바다, 산, 숲, 폭포들 등과 연관되는 보이지 않는 실체들은 사람들의 멘탈체, 아스트럴체와 에텔체에 지금까지 (어떠한 진동에) 익숙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각성시키는 진동들을 발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여행은 세가지 체 전부(아스트럴,멘탈,에텔체)에게 유익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육체의 건강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모든 것이 상위의 체들에 좋은 반응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또한 사실인데, 감정적이고 멘탈적인 삶은 신체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멘탈체와 아스트럴체가 명백히 본질적으로는 육체보다 상념의 능력에 더 잘 반응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심지어 육체의 질료(의 배열)은 감정과 상념의 능력에 의하여 형성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예를 들면, 미덕이든지 악이든 지간에 습관적인 상념은 신체상의 특징들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는 못하고 있다. 또 하나의 예는 성자들의 몸에 나타나는 “성흔聖痕”의 예인데, 그것에 대한 많은 실례들이 기록되어있다. 현대의 정신분석에 관련된 문헌과 다른 출처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다른 예들을 들 수 있다.

오늘날의 매우 진화된 제 5인류인에게 있어서 사실상, 신체가 멘탈적인 상태 들에 의하여 주로 지배된다. 그러므로 신경의 긴장을 일으키는 염려, 멘탈적 고통과 근심은 신체조직의 여러 작용들을 쉽게 혼란시키고 허약하게 하거나 질병을 일으킨다. 올바른 사고와 감정은 신체에 다시 작용하여 프라나 혹은 생명력을 동화시키는 능력을 증대시킨다.

멘탈적인 힘과 차분함은 이리하여 직접적으로 신체의 건강을 증진시킨다. 왜냐하면 진화된 제 5인류는 말그대로 그의 신경계통으로 그의 육체적인 삶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2) 감정적인 삶(The Emotional Life)

멘탈체와 아스트럴체는 아주 밀접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깊은 영향들을 미친다. 카마kama와 마나스manas 사이의 긴밀한 연합과 서로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은 이미 카마-마나스에 관한 장인 제 6장에서 다루었다. 여기에서는아스트럴체가 멘탈체에 부수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몇 가지 더 다루고, 또한 멘탈체가 아스트럴체에 미치는 영향도 다룰 것이다.

아스트럴체를 휩쓰는 감정의 홍수 자체는, 멘탈체로부터 오는 어떠한 (정신적) 활동도 육체의 두뇌 속으로 거의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당분간은 가능하지만, 멘탈체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이것은 멘탈체 자체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멘탈체와 두뇌 사이를 연결하는 아스트럴체가 하나의 진동율만으로 진동하고 있어서 그 진동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다른 어떠한 진동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한 감정이 멘탈적인 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전형적인 예는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이며, 이 상태에서는 지성을 나타내는 노란색은 그의 오오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특히 불쾌한 색조로서 표현되는, 아스트럴체에서의 저속한 관능성(지나친 성적 욕망에 빠지는 것)은 멘탈체에서는 전혀 표현될 수 없다. 이것은 다양한 계界들의 질료가 점점 정묘해짐에 따라 저차원의 특성들을 표현하는 능력을 점차로 상실한다는 원리의 실제적인 예가 된다.

이리하여 관능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멘탈 영상을 형성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상념과 영상은 아스트럴 질료로 표현되지 멘탈 질료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특유의 색조를 띤 인상을 아스트럴체에 남기겠지만 멘탈체에서는 그에 수반되는 악들 즉 이기심, 자만심과 사기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색채들을 더욱 뚜렷하게 할 것이다.

바람직한 감정과 상념이 그렇지 않은 것들과 서로 뒤섞인 덩어리들이 때때로 함께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리하여 예를 들면 깊은 헌신과 어떤 형태의 관능성은 거의 뒤죽박죽으로 빈번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불쾌하게 뒤섞인 결과로 괴로움을 받는 사람은, 헌신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힘에 의해서 지나친 성적 욕망과 같은 저속한 부류에 해당하는 (관련된) 자신의 멘탈체를 단단한 보호막으로 둘러쌈에 의해서 그와 같은 욕망이 끼치는 나쁜 작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고차원에서 내려오는 영향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작용하게 하면서 저차원의 영향들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것이다.

이것은 멘탈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현상 중의 한 예일 뿐이다.

물론 멘탈체가 아스트럴체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그리고 학도는 이러한 사실에 세밀한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각각의 체體는 결국 바로 상위의 체體에 의해서 통제된다는 것을 그는 기억할 것이다. 이리하여 육체는 자체를 지배할 수 없고, 아스트럴체의 열정과 욕망들이 육체를 지시하고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아스트럴체는 멘탈체에 의해 훈련되고 그 통제를 받아야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욕망을 변화시켜서, 욕망보다 고상한 측면인 의지로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사고(작용)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상념으로서의 자아(Self)를 통해서만 욕망으로서의 자아(Self)를 매스터시킬 수 있다.

욕망들 가운데서 선택한다는 의미로서의 자유는 욕망보다 상위의 어떤 것이 작용하며, ―보다 낮은 차원의 것에 관한 한―상위의 어떤 것이란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마나스라는 것을 나타낸다. 신비학도는 육체의 두뇌 센터들이 아스트럴계로부터 (온 힘과 에너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아스트럴체의 챠크람 혹은 힘의 센터들은 멘탈계에 의해 형성되고 통제된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멘탈체로부터 육체의 두뇌에 보내어지는 모든 자극(충동)은 아스트럴체를 통과해야하며, 아스트럴계의 질료가 물질계의 질료보다 상념진동들에 훨씬 더 잘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아스트럴체에 미치는 영향은 그에 비례해서 더 크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아스트럴체 p. 78에서 다루었다.

그러므로 멘탈질료의 진동들이 또한 아스트럴 질료의 진동들을 자극하기 때문에, 사람의 상념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들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이리하여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람은 때때로 자기가 보기에 악행들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계속해서 생각함에 의해서 쉽게 화를 낸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사실인데, 이것은 종종 잊혀진다. 조용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생각함으로써 분노나 다른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거나 제거할 수 있다.

과학적이고 논리 정연한 습관이 배인 마음이 아스트럴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예가 ‘인간 그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Man Visible and Invisible’에서 삽화 20에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과학적인 유형의 사람이 가지는 아스트럴체를 묘사하고 있다. 아스트럴체의 색깔들은 명확히 구별되는 띠들로 형성되는 경향이 있고 그 경계선들은 분명하고 뚜렷하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지성적으로 발달하여 헌신적인 감정이 그 띠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려 관능성이 상당하게 감소된다.

집중능력을 성취하는 것과 멘탈체의 발달은, 일반적으로, 꿈속의 삶조차 영향을 미쳐 꿈을 생생하게 하고, 지속되게 하고 합리적이며 교훈적으로 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아스트럴체는 멘탈체의 색채들을 단순히 반영시켜야하고 영적으로 발달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실제로 반영하는데, 자신을 이성이 지시하는 것만을 느끼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역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정이 멘탈체에 결코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멘탈체는 정욕 또는 감정이 아니라 사고의 원천home이기 때문이다.


(3) 멘탈적인 삶(The Mental Life)

비록 인간의 마음을 형성시키는 것과 진화발전시키는 것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어느 정도 작용해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자신의 의식이 활동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튼튼하고 충분히 활기가 있어 활동적이며 자기에게 제공되어지는 보다 고매한 사상들을 이해할 수 있는 멘탈체를 가지고자 한다면, 그는 꾸준히 올바르게 사고하는데 전념해야한다.

각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바로 자신이 자신의 멘탈체에 거의 항상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다. 연사들이나 작가들 같은 다른 사람들이 가끔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자신의 멘탈체에 항상 영향을 미친다. 자기의 멘탈체 구성에 있어서 미치는 자신의 영향은 다른 어떤 사람의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그리고 그 자신이 마음의 정상적인 진동율을 결정하게된다. 그 진동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상념들은 그의 마음에 접촉할 때 반발하여 한쪽으로 튕겨난다. 그가 진실을 생각하면, 거짓말은 그의 마음에 자리를 잡지 못한다. 그가 사랑을 생각하면, 증오가 그를 방해할 수 없다. 그가 지혜를 생각하면, 무지가 그를 마비(무력화)시킬 수 없다.

말하자면 땅을 묵혀두듯이 마음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때는 어떠한 사고의 씨앗이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아무렇게나 진동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는 지나가는 아무 상념의 진동에나 반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의 것이며 그는 자신―자아―이 선택하는 그러한 상념들만 들어오도록 허락해야만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고(생각)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비록 좀 더 생각하는 사람들 조차도 실제로 자기들이 전심 전력하여 일하는 순간들을 제외하고는, 명확하게 그리고 확고하게 생각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결과적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그 위에) 뿌려지는 상념의 씨앗은 무엇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만일 자신의 상념들을 자세히 지켜본다면, 그 상념들이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쏟아 내놓은 상념들의 부분들로 주로 이루어진 우연한 상념들의 흐름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일반 사람은 어떠한 특정한 순간에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또는 왜 그가 그것을 생각하는 지를 정확히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의 마음을 어떤 명확한 대상에 향하게 하는 대신에, 그는 마음을 제멋대로 되도록 하거나 돌보지 않는 밭을 묵히듯이 놔두어서, 안으로 들어오는 아무 상념의 씨앗이라도 발아하여 성장할 수도 있다.

일반 사람의 상념 수준 약간 위로 자기자신을 고양시키기를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는 신비학도는, 항상 그에게 엄습하고 있고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상념 중 상당한 부분이 자기의 상념보다 낮은 수준에 속하는 것이므로, 자신을 그 상념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온갖 종류의 주제들에 관한 너무나 광대한 상념의 바다가 존재하므로, 그 상념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고군 분투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지부支部의 지붕을 이는 것To Tyle The Lodge”에 모든 프리메이슨이 “끈임없이 관심을 가지는 사항”이 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만일 사람이 지속적이고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자아自我― 즉 실제적인 사고자 the real thinker―의 충동(목소리)들에만 귀를 기울이도록 훈련된 그의 두뇌는 사용되지 않을 때라도 여전히 고요할 것이고 주위의 상념의 바다로부터 오는 무분별한 상념 흐름들을 받아들여 반응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이 물질계보다 통찰력이 더 예리하고 판단이 더욱 참된 상위의 계들로부터 오는 영향들에 더 이상 둔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발견할 것이다.

상위의 의식이 자신을 주장(표현)할 수 있는 때는, 바로 사람이 그의 마음을 차분한 상태로 유지하여 고요하게 하고 상념이 없는 그 상태로 유지할 때 한해서 뿐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비로서 명상과 요가를 할 준비가 갖추어지게 된다. 이것에 대해서는 차후에 살펴볼 것이다.

멘탈체를 훈련하는데 있어, 그것은 실제적인 지침이 된다. 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은, 사색을 함으로써 삶이 더 고상해지며 더 행복할 수 있고 지혜로서 고통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의 상념이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서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상념을 주시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무기를 올바르게 사용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상념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두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상념을 통제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다. 상념의 힘으로 엄청난 양의 선善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상념의 힘을 개발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다.

독서는 멘탈체를 발달시키지 못한다; 단지 사고 작용만이 멘탈체를 발달시킨다. 독서는 단지 사고(생각)하기 위한 자료들을 제공하는 정도의 가치만 있다. 그리고 사람의 멘탈(체)의 성장은 그가 독서중에 하는 생각의 양에 비례한다. 규칙적이고 지속적이나 과도하지 않는 훈련에 의해서 사고思考 능력은, 근육의 힘이 운동에 의하여 증대하듯이 증가할 것이다. 그러한 사고작용 없이는 멘탈체가 느슨하게 형성되고 조직화되지 않은 채로 있게 된다; 집중을 얻지 못하고는 상념(사고)의 힘은 결코 발휘될 수 없다.

이리하여 성장은 연습함으로써 일어난다는 인생의 법칙은 육체에 대해서 적용이 되는 것처럼 멘탈체에 대하여도 적용이 된다. 멘탈체가 훈련이 되어 사고 작용중에 진동하게 될 때, 새로운 질료가 멘탈계의 영역으로부터 끌려와 멘탈체를 형성하게 되고, 이리하여 멘탈체의 구조가 점점 더 복잡하게 될 뿐만 아니라 크기도 증대한다. 사고의 정도가 멘탈체의 성장을 결정하고, 사고(하는 내용의) 질質이 멘탈체의 성장에 사용되는 질료의 종류를 결정한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도록 독서 방법을 좀 더 자세히 고찰해보자. 조심스럽게 쓰여진 책 속에서는, 각각의 문장이나 단락은 어떤 명확한 개념을 분명하게 진술한 내용이 있는데, 그 개념은 저자의 상념 형태에 의하여 표현된다. 그 상념 형태는 대개 중심 개념으로부터 추론한 것들이거나 필요한 추론의 결과들을 표현하는 다양하고도 보조적인 상념형태들로 둘러싸여 있다.

독자의 마음속에는, 아마도 즉시되든지 아니면 점진적으로 되든지 간에, 저자의 상념 형태의 정확한 복사판이 형성되어야한다. (중심 개념에서 파생한) 추론들을 나타내는 상념 형태들이 또한 나타나느냐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은 독자의 마음의 성향에 달려 있다. 즉 그가 한 순간에 어떤 진술에 뒤따라 (연결되어) 오는 모든 것을 재빨리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멘탈적으로 발달되지 않은 사람은 그 상념 형태를 결코 정확하게 반영시킬 수 없고, 기하학적인 모양 대신에 일정한 모양이 없고 명확하지도 않은 일종의 (구름 같은) 덩어리를 형성한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볼 수 있는 명확한 모양을 만들 수는 있으나, 그 끝과 각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거나 한 부분이 나머지에 비하여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외 다른 사람들은 개념에 대한 일종의 앙상한 뼈대만을 만들어서, 자신이 그 개념의 윤곽을 포착했지만 생동감이 전혀 없고 상세하지도 못한 것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개념의 한쪽 측면은 이해했지만 다른 측면은 이해하지 못하여, 상념 형태를 절반만 형성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한가지 사항만 포착하고 나머지는 무시할 수도 있다.

탁월한 신비학도는 정확하게 그리고 즉시로 중심 개념의 영상을 재현할 것이고, 그가 마음속에서 그 중심 개념을 숙고할 때 보조 개념들이 그 주위에 하나씩 나타나게된다.

영상들이 불완전한 주된 이유들 중 하나가 관심의 부족 때문이다. 투시가는 독자의 마음이 동시에 6개의 주제들에 빠져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의 두뇌에는 가정 문제들, 사업상의 염려들, 즐거웠던 일들에 대한 추억 및 기대, 공부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지루함 등등이 들끓고 있는데, 이것들이 그의 멘탈체의 10분의 9를 차지하고 나머지 10분의 1로 자신이 읽고 있는 책에서 동화(이해)하고자 하는 상념형태를 포착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한다.

그러한 단편적이고 산만한 독서는 보잘 것 없고 상호 관련이 없는 상념 형태들로 멘탈체를 가득 채우게 된다. 이것은 산뜻한 대 건축물을 짓듯이 멘탈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조약돌만 산더미처럼 쌓아 올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음과 멘탈체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위하여, 주의를 모으는 훈련과 집중력은 필수적이며, 자기가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관련이 없는 모든 상념들을 그의 마음에서 제거하는 것을 배워야하는 것은 분명하다.

잘 훈련된 학도는 저자의 상념 형태를 통하여 그의 마음과 접촉하여 어려운 사항들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나 이해력을 그로부터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영적으로) 상당히 발달되어 있지 않으면, 자기에게 오는 새로운 상념들이 저자의 상념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상념들로 생각하게된다.

물질계에서 행해지는 모든 멘탈적인 일WORK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두뇌를 통하여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 멘탈체가 두뇌를 통하여 쉽게 작용할 수 있도록 육체의 두뇌는 훈련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어야한다.

두뇌의 특정 부위들은 그 사람의 어떤 특성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어떤 경향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정돈되어지고 멘탈체에 있는 부분들과 당연히 상호 관련성을 가져야 한다.

물론, 신비학도는 생각하는 기술을 신중하게 훈련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사고(력)는 훈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 보다 훨씬 더 강력해서, 보다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이것은 그가 그렇게 하고자 구체적으로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도, 완전히 무의식 중에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신비학도는 상념(사고)의 엄청난 힘을 배웠기 때문에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데 있어서 책임은 그에 비례하여 더 크며,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그 힘을 활용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나 하는 것이 좋겠다. 쉽게 자극을 받아 논쟁하는 사람들은, 설전舌戰을 하러 열심히 돌아다닐 때 자기들이 멘탈적인 요새의 성문들을 열어놓고 요새를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때는 우연히도 그들의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상념(의 힘)들이 멘탈체 안으로 들어와서 멘탈체를 장악해 버릴 수도 있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항들에 힘이 종종 낭비되어지는 동안, 멘탈체의 전체적인 상태는 흘러들어 오는 영향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신비학도는 자기 자신이 논쟁을 할 때는 상당히 주의를 해야한다. 논쟁이 상대편의 의견을 좀체 바꾸게 할 수 없다는 것은 공통된 경험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논쟁은 기존의 견해들을 더욱 확고부동하게 할 뿐이다.

인생의 매 순간에는 의식이 멘탈체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자든지 깨든지 간에,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의 멘탈체를 형성하고 있다. 의식의 모든 진동은, 비록 그 진동이 단지 지나가는 상념에 의해 일어날지라도, 멘탈체 속으로 멘탈 질료의 입자를 얼마 끌어들이고 다른 얼마의 입자는 멘탈체에서 떨쳐낸다. 멘탈체가 순수하고 고상한 상념들에 의하여 진동하게 되면, 진동들의 속도는 조잡한 질료의 입자들이 떨어져 나가게되고 보다 정묘한 입자들이 대신하게된다. 이런 식으로 멘탈체는 꾸준하게 더욱 정묘해지고 더욱 순수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더욱 정묘한 질료들로 구성된 멘탈체는, 조잡하고 악한 상념들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조잡한 질료들로 구성된 멘탈체는 스쳐 지나가는 악한 상념들에 영향을 받을 것이고 좋은 상념들에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어 전혀 이득을 보지 못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사실이 멘탈체의 “형태적 측면form-side”에는 더욱 세부적으로 적용된다. “생명적 측면life-side”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때, 신비 학도는 바로 의식의 본질essence이 항상 자신을 참된 자아Not-Self와 동일시하고자 하며, 또한 항상 참된 자아를 거절함으로써 스스로를 (EGO로서) 표현(재주장)한다는 것을 또한 명심해야한다. 사실, 의식(의 활동)은 이러한 주장―“나는 이것이다”―과 부인―“나는 이것이 아니다”―을 번갈아 하는 활동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므로 의식은 우리가 진동이라 부르는 “견인과 반발력attracting and repelling”이며, 또 질료 속에 견인과 반발을 일으킨다. 이리하여 의식에 의하여 발생된 진동들의 특성이, 멘탈체 속으로 끌려오는 질료의 정묘함이나 조잡함을 결정하게 된다.

우리가 제 1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상한 상념을 가진 다른 사람에 의해 우리에게 작용하는 상념진동들은, 우리의 멘탈체 내에 이에 공명반응하는 질료들의 진동을 같이 일으키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진동은 너무나 조잡해서 활발하게 고진동하지 않는 질료를 교란시켜 멘탈체로부터 몰아내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타인으로부터 받는 혜택은 주로 우리자신의 과거의 사고작용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유익한 영향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우리의 멘탈체 내에 타인의 상념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유형의 질료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른 체들과 마찬가지로, 멘탈체도 습관의 법칙들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멘탈체를 어떤 유형의 진동에 익숙하게 만들면, 우리의 멘탈체는 쉽게 그리고 즉시로 그 진동을 재현하게된다. 이리하여 예를 들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하게되면,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을 좋게 생각하는 것 보다 습관적으로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더 쉽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들을 보지 못하게 하고 나쁜 점들을 엄청나게 과장하게 하는 편견들이 그와 같이 생기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악한 생각들을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 반면에, 물론, 좋은 생각들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바람직하지 않은 특성들 보다는 바람직한 특성들을 찾도록 자신을 훈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싫어하기 보다는 좋아하는 습관이 형성될 수 있다. 그렇게 연습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의심과 멸시가 배어든 고정된 습관을 따르는 대신에 존경과 감사가 깃든 습관을 따라서 더욱 쉽게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사고작용의 힘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면, 삶은 더 안락하고 더 즐겁게 되고, 우리의 멘탈체 속으로 적절한 종류의 멘탈질료를 채워 넣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마땅히 활용해야 하는 그들의 멘탈능력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즉 그들의 마음은 상념의 창조자creators라기 보다는 저장소receptacles이어서, 내부로부터 그들 자신의 상념들을 창조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의 상념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의식의 태도를 바꾸게 되고 마음의 작용을 지켜 보게 된다. 자신의 사고작용 중 많은 부분이 결코 그 자신의 것이 아니며, 상념들이 어디서부터 그에게 오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의 마음이란 단지 상념들이 통과하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처음에는 상당히 번민을 느낄지도 모른다.

예비적인 단계인 이러한 멘탈적인 자의식self-consciousness(상태)에 이른 후에 다음 단계에서는, 상념들이 그의 마음으로 들어왔을 때와 마음에서 나갈 때에 있어서 그 상태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즉 상념들이 그와 함께 머무는 동안 자신이 직접 그 상념들에게 덧붙인 것이 무엇인지를―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신속하게 그의 마음은 정말로 활발하게 작용하게 되고 (자신에게만 속하는) 자기의 창조 능력들을 개발할 수 있게 된다.

다음에, 그는 자기의 마음 내에 무엇을 머물도록 허용할 것 인지를 극도로 신중하게 선택해야한다. 만일 그의 마음에서 좋은 상념을 발견하면, 그는 그 상념을 곰곰이 생각하고, 강화시켜서, 하나의 자애로운 힘agent으로써 다시 내 보낼 것이다. 그의 마음에서 나쁜 상념을 발견할 때, 그는 그 상념을 재빨리 몰아낼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들과 특성들에 대해 상념이 조심성 없게 작용하게 되면, 마음을 그러한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반응하는 성향을 띠게 만들어 그런 생각들을 구체화시키는 행동들을 야기하게되어 실제적인 위험이 된다. 상념으로 악한 행위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리저리 머리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가 행동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도 전에, 자신이 악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멘탈적인 사고작용은 밖으로 쇄도하여(표출되어) 행위를 유발시킨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는 사고작용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런 생각없이 행동한다고 말할 때 조차도, 그것은 그가 이전에 자신의 내부에서 자라도록 허용한 상념들과 욕망들과 감정들을 본능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상념들을 품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이 연습을 얼마동안 꾸준히 실행한 후에, 그는 마음속으로 흘러오는 악한 상념들이 점점 더 적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상념들은 다름 아닌 마음이 직접 스스로 작용함에 의해서 (마음으로부터) 몰아내어진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은 주위에 있는 모든 유사한 상념들에 대하여 하나의 자석처럼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멘탈체속으로 다량의 좋은 질료를 끌어들이고, 그의 멘탈체는 해를 거듭하면서 그 내용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이리하여 상념-영상들thought-images의 창조가 외부로부터 온 자극에 의해서 만들어지도록 마음을 방임하는 위험, 즉 외부세계로부터 온 자극이 멘탈체에 영상을 만들어서 창조적인 멘탈질료―필연적으로 자신을 (멘탈체로부터) 표출시켜 (무엇인가의 창조를 위해서) 현현시키려고 노력하는―를 에너지로 가득차 있는 상념체들속으로 방출시키게 내버려두는 것은 상당히 큰 위험이므로 피해야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모든 내적인 투쟁과 영적인 어려움 들은 멘탈체가 이렇게 통제되지 않고 아무렇게나 활동하기 때문이다. 멘탈체가 이렇게 통제되지 않은 채로 작용하도록 허용하게 되는 것은 바로 무지 때문이다. 우리는 무지를 지식으로 대체하고, 멘탈체를 통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멘탈체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자극에 의해서 영상들을 형성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 된다.

엄청나게 많은 고통이 통제되지 않은 무분별한 상상想像(력)에 의해 야기될 수 있다. 저급한 정욕들―특히 성적인 욕구―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절제되지 않은 상상 때문에 생기게된다. 비록 강렬한 욕구가 느껴질지라도, 행위를 유발하는 것은 바로 창조력을 지닌 사고작용이다. 욕망의 대상을 단순히 보거나 생각할 때에는 위험이 전혀 없으나, 사람이 자기의 욕망들에 굴복하는 것을 상상하고, 그가 만든 영상을 욕망이 강하게 만들도록 허용하는 바로 그때에 그의 위험은 시작된다. 만일 우리가 창조력을 지닌 상상들에 빠지지 않으면, 그리고 빠지는 그 순간까지는, 욕망의 대상 자체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일단 상상에 빠지게되면, 투쟁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이 투쟁에서 우리가 스스로 의지意志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도움을 받아 열광적으로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상상들이 초래하는 결과들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두려움에 자극 받아 행하는 열광적인 저항은 의지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의지는 무엇보다도 오히려 상상을 통제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야하며 이리하여 우리의 어려움을 일으키는 원인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

우리가 나중의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이번 생애동안에 모으는 질료들은 사후의 삶에서 멘탈 힘들과 능력들―이것들은 미래의 삶에서 더욱 많이 표현될 것이다―로 점차로 발전하게된다. 다음 생에 화신할 때의 멘탈체는 우리가 현재의 멘탈체로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려있다. 카르마의 법칙은 우리가 씨를 뿌리는 대로 결과를 거둔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한 생애를 다른 생애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고 또한 기적같이 무無로부터 어떤 것을 창조할 수는 없다.

이는 챤도기오파니사트Chândogyopanishat에 쓰여져있는 것과 같다: “인간은 사고(작용)의 산물이다; 즉 그는 나중의 생애에는, 이번 생애生涯에서 심사 숙고深思熟考하는 것 바로 그것으로 된다.”

사고 습관들과 싸우고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것, 즉 멘탈체로부터 일단의 멘탈 입자들을 몰아내고 보다 고차원적인 다른 입자들로 대체하는 것을 포함시키는 과정은, 신체적인 습관들을 타파하는 것이 대개적으로 처음에는 어려운 것처럼, 물론 처음에는 당연히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며, 옛날의 사고 형태가 변화함에 따라 올바로 사고하는 것이 점차로 쉬워지고 결국엔 자연스려워진다.

사람이 집중적인 멘탈 활동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전혀 없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치유학파들―크리스챤 사이언스, 멘탈 사이언스와 다른 단체들―은 치유 성과들을 달성하는데 있어 이러한 강력한 힘agency을 활용하며, 그들의 유용성은 시술자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힘들에 관한 지식에 주로 달려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공 사례들이 그 힘이 존재함을 증명한다. 실패한 것들을 살펴보면, 힘을 조작하는 것이 능숙하지 않거나 치료하기에 충분한 힘을 불러낼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상념이란 창조성creativeness, 즉 인간의 삼위일체 중 세번째 측면의 현현이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의지는 성부聖父 하나님 아버지의 현현이며, 사랑은 성자聖子의 현현이며 상념 혹은 창조적인 활동성은 성령의 현현이다. 왜냐하면 활발하게 활동하여 의지의 명령들을 창조하고 수행하는 것은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상념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의지가 왕이라면 상념은 수상首相에 해당한다.

신비학도는 이 창조적인 능력을 인간의 진화를 촉진시키는데 활용한다. 동양의 요가는 마음이 진화하는데 작용하는 일반적인 법칙들을 특정한 의식의 진화를 이렇게 촉진시키는데 응용한 것이다. 상념이 어떠한 생각에 주의 깊게 집중되면, 그 생각은 사고자thinker의 성격을 띠게 하며, 이리하여 사람은 자신 속에 지속적이고 주의 깊은 사고―즉 명상―을 함으로써 바라는 특성을 창조할 수 있다.

이 법칙을 알게 될 때, 벽돌을 쌓는 사람이 벽을 짓는 것 만큼 확실하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멘탈체를 형성할 수 있다. 성격을 형성시키는 과정은 근육의 힘을 발달시키는 과정 만큼이나 과학적이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그 활동을 중단시키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나중의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일을 할 때, 기도祈禱가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데,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예는 브라흐만Brahman 교도의 삶에서 발견된다. 그의 삶은 전부가 실제로는 하나의 연속적인 기도다. 그것은 훨씬 더 정성이 들고 세세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카톨릭의 수도원에서 사용되는 얼마의 형태와 약간 비슷하다. 수도원에서는 종교에 갓 귀의한 초심자가 식사를 할 때마다 그의 영혼에 생명의 양식이 공급되도록, 그가 씻을 때 마다 그의 영혼이 순수하고 깨끗하게 유지되도록, 그가 교회에 들어 갈 때마다 그의 삶 전체가 하나의 예배가 되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브라흐만 교도의 삶은, 그의 헌신이 더 규모가 크고 훨씬 더 세세한 점까지 실행된다는 것을 제외하면 카톨릭 신자의 삶과 비슷하다. 진실 되게 그리고 정직하게 이러한 지시 사항들을 모두 준수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에 의해서 깊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신이 행한 상념의) 영향을 받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제 4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멘탈체는, 인간 자신이 성장하고 발전함에 따라 물론 활동성에서 뿐만 아니라 크기에서도 증대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신체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오랫동안 실제로 똑같은 크기로 존재한다. 아스트럴체는 어느 정도까지 자란다. 그러나 (원인체뿐만 아니라) 멘탈체는 진화의 후반기에서는 엄청나게 팽창하는데, 안정되어 있을 때는 작열灼熱하는 광휘光輝로 이글이글거리는 휘황찬란한 빛들을 내며, 아주 활동적일 때는 눈부신 섬광 같이 번쩍이는 빛들을 내보낸다.

영적으로 거의 발달하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멘탈체를 구별하기 조차 어렵다; 다시 말해 그의 멘탈체는 너무나 발달하지 않아, 알아보는데 좀 주의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명확하게 사고할 수 없다. 특별히 서구에서 종교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그러하다. 모든 것은 애매모호하고 혼란스럽다. 애매모호함과 혼란스러움은 신비학도의 발전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개념들은 명쾌하고 우리의 상념 영상들은 명확해야한다. 다른 특징들은 제외하고라도 이것들은 신비학도의 삶에서 필수 사항이다.

신비 학도는 각 사람이 불가피하게 자신의 마음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외부 세계를 본다는 것을 또한 깨달아야한다. 그 결과는 색유리를 통하여 풍경을 보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빨간색 유리나 푸른색 유리를 통해서만 본 사람은, 이 색유리가 풍경의 원래 색깔들에 미친 여러 가지 영향들을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마음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모든 것을 봄으로써 미치게 되는, 본질을 왜곡시키는 영향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로서, 마음은 “환영의 창조자”라 불린다. 신비 학도는 혹들과 편견들을 제거하여 그의 멘탈체를 정화시키고 발달시켜야할 의무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리함으로써, 멘탈체 내에 있는 결점들 때문에 생기는 왜곡된 현상들을 최소화하면서, 그의 멘탈체는 진리를 반영하게 된다.

인간이 동물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우리가 멘탈체와 그 작용 및 반작용들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 지으면서 간략하게 다루겠다.

만약 사람이 동물에게 애정의 상념을 보내거나 그에게 뭔가를 가르치고자 분명하게 노력한다면, 인간의 아스트럴체나 멘탈체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동물의 체에 미치게 되는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작용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교적 드물고 거의 대부분의 작용이, 어느 한쪽에서도 직접적인 의지 작용도 없이, 관련된 두 실체들이 단순히 가까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불가피하게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 사람의 성격과 유형은 동물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만일 그들 사이의 상호 작용이 주로 감정적이라면, 동물은 주로 그의 아스트럴체를 통하여 발전할 것이고, 집단 영혼group soul과의 연결 고리를 결국에 단절시키는 것은 ―바로 집단 영혼위에 떠돌고 있는―모나드의 붓다적인 측면에 갑작스럽게 쇄도하는 감정으로 인해 일어나고, 이리하여 에고ego를 형성시킨다.

상호작용이 주로 멘탈적이라면, 갓 형성된 동물의 멘탈체는 자극을 받을 것이고 동물은 아마 마음을 통하여 개성화個性化될 것이다.

사람이 영적으로 강하거나 의지가 강하다면, 아마도 그의 의지가 자극을 촉진시킴으로써 동물은 개성화될 것이다.

애정과 지성과 의지를 통한 개성화individualisation는 세가지 정상적인 방법이다. 보다 덜 바람직한 방법, 즉 자만심, 두려움이나 권력욕을 통하여 개성화 되는 것이 또한 가능하다.

예를 들면 약 200만의 자아自我들로 구성된 한 무리가, 전적으로 자만심을 통하여 달 체인의 일곱 번째 주기에 개성화되었다. 그들은 어떤 총명함 외에는 다른 특성들을 거의 소유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의 원인체原因體는 오렌지색 외에는 거의 아무 색도 나타내지 못했다.

이 집단의 오만傲慢과 제멋대로 군 행동으로 전 역사를 통하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골칫거리가 생겼다. 그들 중 얼마는 아틀란티스에서 “어두운 얼굴의 주들Lords of the Dark Face”이 되었고, 나머지는 세계를 파멸시키는 정복자들이거나 “재계의 황제들”이라 불리는 파렴치한 백만장자들이 되었다.

잔인한 것을 봄으로써 일어난 두려움을 통하여 개성화된 사람들 중 얼마는 중세시대의 종교 재판소의 재판관들과 오늘날 어린애들을 몹시 학대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개성화의 메카니즘에 대한 보다 세부사항들은 베산트 박사가 저술한 “의식의 연구A Study in Consciousness” 제 5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원인체에서 다룰 것이다.


제 14 장

기능들


멘탈체는 아스트럴체처럼 시간이 경과하면 각성되어 활동이 활발해져서, 멘탈계의 질료의 진동들에 반응할 것이고 이리하여, 전적으로 새롭고 훨씬 더 광범위한 지식과 능력의 세계를 자아 앞에 열어놓는다.

그러나 멘탈체에서 의식이 완전히 발달한 것은, 단순히 멘탈체를 어느 정도 사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생각할 때마다 그의 멘탈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의식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하나의 독립된 체로서 멘탈체를 활용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일반인의 멘탈체는 그의 아스트럴체 보다 훨씬 덜 진화 되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멘탈체의 상위부분들은, 하위부분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을 때도 아직까지 깊이 잠들어 있다(전혀 각성되어있지 않다). 사실, 일반인의 멘탈체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하나의 체體가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인은 멘탈체로서 이리저리 여행할 수 없고 또한 정상적인 방법으로 인상印象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멘탈체의 (수용) 감각들을 사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자들 중에서는, 비록 멘탈체가 아주 고도로 발달된 경우도 있겠지만, 이것은 주로 각성된 의식waking consciousness에서 사용되고, 아직 까지는 상위계에서 직접적으로 인상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매우 불완전하다.

사실, “위대한 비전가들의 형제단The Great Brotherhood of Initiates”에 속하는 스승들에 의해 명확히 훈련을 받아온 사람을 제외하고는, 의식적으로 멘탈체로 활동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드물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수년 동안 명상을 하고 특별히 노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 1 비전 때까지, 사람은 아스트럴체로 밤에 일을 한다. 그러나 아스트럴체가 완벽히 통제되고 그가 아스트랄체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자마자, 멘탈체로 일하는 것이 시작된다. 멘탈체가 완전히 조직을 갖추게될 때는 아스트럴체 보다 훨씬 더 유연한 체가 되고, 아스트럴계에서 불가능한 것이 멘탈체로 많이 달성할 수 있다

멘탈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능력은, 제 2비전이 하위 멘탈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제 2비전을 바라는 비전가가 성취해야한다.

아스트럴계의 시력이 물질계의 시력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멘탈계의 시력은 아스트럴계나 물질계의 시력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멘탈적인 시력의 경우에는, 우리는 더 이상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같은 별도의 감각들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멘탈체에 도달하는 진동들에 충분히 반응을 하여, 어떤 대상이 멘탈체의 인식 범위내에 올 때 멘탈체가 즉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게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한다. 말하자면 멘탈체는 그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한번의 순간적인 작용에 의하여,―적어도 멘탈계와 하위계들에 관한 한―그것에 관하여 알아야할 모든 것 즉 그것의 원인과 결과들 및 가능성들을 알아버리는 (멘탈체 전체에 걸친) 하나의 일체화된 감각을 가정해야한다. 고차원적인 감각이 이렇게 작용하게 되면, 어떠한 의심, 주저함이나 지체도 결코 있을 수 없다. 만일 그가 어떤 장소를 생각하면, 그는 이미 거기에 가 있게 된다. 어떤 친구를 생각하면, 그 친구가 그 앞에 와 있다. 더 이상 오해들이 생길 수 없고 또한 더 이상 외모에 속거나 현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친구의 모든 상념과 감정은 멘탈계에서 한 권의 책처럼 그 앞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고차원적인 감각이 개발된 친구와 함께 있다면, 그들의 교제는 모든 세속적인 개념을 벗어난 완벽한 상태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거리와 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감정들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고, (또한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표현되는 어색한 말들에 의하여 적어도 절반이라도 나타난다; 질문과 대답은 필요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상념영상(thought-pictures)들은 형성되자마자 읽혀지고, 생각들의 상호교환은 섬광이 마음속에 스쳐지나 가는 것처럼 빨리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기능은 현재 우리가 마음대로 구사하는 기능들과는 단지 정도에 있어서만 차이가 나지, 종류가 다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질계에서처럼, 멘탈계에서도 인상들은 보이는(지각되는) 대상으로부터 보는 사람에게로 이동하는 진동들에 의하여 여전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붓디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멘탈 투시에 관하여 언급할만 하거나 언급해야할 것은 별로 많지 않다. 왜냐하면 최고의 신비학파 중 몇몇 단체에서 적절히 훈련받은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예를 찾아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멘탈 투시는 우리가 최고로 영광스럽고 장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평범한 일상생활처럼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멘탈 투시로 가능한 모든 것―적어도 그가 동화시킬 수 있는 것 모두―은 훈련된 제자의 능력은 미칠 수 있으나, 훈련을 받지 못한 투시가가 그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아마도 일반 투시가들 중에서는 천명 중 한 명도 결코 그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피술자가 시술자의 통제에서 벗어났을 때, 메스메리즘적인 트랜스 상태에 있을 때, 그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일어나는 일은 아주 드물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술자와 시술자 양쪽에서 고매한 영적인 열망, 상념 및 의도의 순수함에 관해서는 거의 초인적인 자격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우들에서 조차도, 피술자는 일반적으로 강렬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자기의 개인적인 종교적 확신들이 깊이 배어든―지극한 축복에 대해서 희미한 추억 이상을 가져오는 일은 좀처럼 없다.

모든 지식, 즉 멘탈계를 초월하지(벗어나지) 않는 모든 지식은 멘탈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이용가능 할 뿐만 아니라, 과거 세상의 일은 현재 만큼이나 개방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세계)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기억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제 28장을 보라.)

이리하여, 예를 들면, 멘탈체를 자유로이 작용시킬 수 있는 사람에게는, 책을 읽는 과정과는 아주 별도의 방법으로서 책의 의미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방법들이 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책을 연구해온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그 내용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그가 단지 그 연구가가 포착한 개념에만 접근하게 된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두 번째는 책의 오오라를 조사하는 것이다. 각각의 책은 그 책을 읽고 연구해온 모든 사람들의 상념들에 의해서 형성된 상념 오오라로 둘러싸여 있다. 이리하여 책의 오오라를 조사함―psychometrisation―으로써, 일반적으로 그 내용을 거의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비록 다양한 독자들이 품고 있지만 책 자체에서는 표현되어 있지 않은, 사변적인 견해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제 8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오늘 날에는 옛날 사람들 만큼 사려 깊고 철저하게 연구하는 독자들이 거의 없는 것 같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현시대에 발행되는 책과 관련된 상념체(상념형태)들은 과거에 출간된 저자의 필사본들을 둘러싸는 상념체들만큼은 좀처럼 정확하고 명확하지가 않다.

세 번째 방법은 제 10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책이나 필사본을 완전히 넘어가서 저자의 마음에 접촉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고도의 능력들을 필요로 하는 네 번째 방법은, 책의 주제를 심령적으로 탐흔하고 그 주제에 관한 모든 상념 흐름이 한 점에 모이는 그 주제의 상념센터를 멘탈적으로 방문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제 12장 상념센터들에서 다루었다.

멘탈계에서 관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람이 잠시 동안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상념을 중단시켜, 상념의 창조물들에 의해서 인상을 쉽게 받는 주위의 질료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자신에 관련된 여건들을 전적으로 이렇게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마음을 정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마음을 텅 비게 하는 것blankness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하타요가 수행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그것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후자의 경우엔, 마음(의 작용)은 점차로 둔화되어 절대적인 수용성의 상태로 되고, 그 상태는 거의 영매의 상태mediumship에 접근하게된다. 전자의 경우에, 마음은 가능한 예리하게 깨어있고 적극적이며, 단지 마음이 관찰하고자하는 대상속으로 개인적인 견해가 개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음의 상념(작용)을 잠시 중단시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체들속에서처럼 챠크람들, 즉 힘의 센터들은 멘탈체에서도 존재한다. 그들은 힘이 하나의 체體로부터 다른 체體로 흐르는 연결점들이다. 에텔체의 챠크람들은 “에텔체”에 설명되어 있으며, 아스트럴체의 차크람들은 “아스트럴체”에 설명되어 있다. 현재 멘탈체의 챠크람들에 관하여 이용가능한 정보는 너무나 빈약하다.

그에 대한 한 가지 정보는 다음과 같다: 어떤 유형의 사람에게는 머리 정상에 있는 챠크람은 구부러져 있거나 경사져 있어 그 (센터의 힘의) 소용돌이는 소위 송과선으로 알려져 있는 퇴화된 기관과 일치한다. 그리고 송과선은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활성화되어서,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거치게 되는 중간의 아스트럴체를 (명백히) 전혀 거치지 않고 하위 멘탈계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길이 된다. 블라바츠키 여사가 송과선의 각성에 대하여 상당히 강조를 할 때, 그녀가 글을 쓴 대상은 바로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또 다른 사실은, 힌두인들이 아니마라 부르는 확대 기능인데, 눈썹사이에 있는 챠크람이 이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챠크람의 중앙에서부터 연장된, 일종의 렌즈에 해당하는 단 하나의 원자原子가 있어 관찰할 미세한 대상들의 크기에 맞는―소위 소형 현미경과 같은―기관器官이 돌출되어 있다.

사용되는 그 원자는 물질적이거나 아스트럴적이거나 멘탈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어느 것에 속하든 지간에 특별한 준비 과정을 필요로 한다. 원자의 모든 스파릴래는 현재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혹성 연쇄의 제 7활동기에 꼭 맞도록 열려져야만 하고 완벽하게 작용해야만 한다.

그에 사용되는 힘power―배율倍率―은 원인체原因體에 속하므로, 하위계의 원자가 접안接眼렌즈처럼 사용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상물들을 반사하는 체계가 먼저 이해되어야한다.

원자는 어떠한 하위계에서도 자체조정이 가능하므로, 조사되고 있는 대상에 필요한 어떠한 배율로도 맞출 수 있다.

렌즈의 배율이 더욱 확대되면 조작자는 렌즈로 그의 의식을 집중하여 그의 의식을 먼 지점까지 투사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 힘은, 다르게 조작함으로써, 너무나 커서 보통의 시야로서 즉시 볼 수 없는 것을 전체적으로 보기를 원할 때, 여러 가지 배율로 축소시키기 위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이것은 힌두인들에게 마히마로 알려져있다.

멘탈계 자체의 한계를 벗어나는데 있어서 공간적인 한계가 멘탈 투시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제 27장에서 살펴보겠지만, 그것은 다른 혹성들의 멘탈계로까지 확장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탈 투시에 의하여 아주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

지구대기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상념의) 교란상태를 벗어남으로써, 시력을 굉장히 명확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엄청나게 배율을 높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다. 그 고배율로 다른 혹성들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천문학적인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프라나 혹은 생명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계에서처럼, 멘탈계에서도 또한 존재한다. 쿤달리니 또는 뱀의 형상을 한 불과, 포하트 즉 전기와, “에텔체”에서 원초적인 힘Primary Force로서 언급된 생명력life-force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멘탈계에 있는 프라나와 쿤달리니에 관하여는, 현재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쿤달리니가 여러 가지의 모든 체들을 활성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위에서 언급된 원초적인 힘은 제 2로고스로부터 하강한 두 번째 분출의 다양한 표현들 중 하나이다. 부디계에서 그것은 인간에 내재하는 그리스도―원리로서 현현해 있다. 멘탈체와 아스트럴체에서 그것은 다양한 층의 질료를 활성화시키는데, 아스트럴체의 상위부분에서는 고상한 감정으로서 나타나고 아스트럴체의 하위부분에서는 아스트럴체의 질료에 힘을 제공하는 단순히 (물밀듯이) 쇄도하는 생명력으로서 나타난다. 최하위의 (육체에서) 현현할 때 그것은 (옷 입듯이) 에텔질료를 입고서, 아스트럴체로부터 에텔체의 표면에 있는―인간의 몸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쿤달리니와 만나게 되는―챠크람속으로 달려간다.

신비학도는 보라색 프라나의 흐름이 고차원의 영적인 상념과 감정을 자극하고 일반적인 상념은 노란 색이 일부 뒤섞인 푸른색의 흐름이 작용함으로써 자극된다는 것과, 또한 몇몇 종류의 심각한 정신 박약의 경우에는 노랗고 푸른 보라색을 띤 생명력이 뇌로 흐르는 것이 거의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주교 리더비터가 지은 ‘챠크라(The Chakras)’는 챠크라들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다양한 센터들 혹은 챠크라들과 계들 사이의 관련성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신비학도는 아래의 표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챠크람에 관한 표

(표 생략)

위의 표에서 보면, 원초적인 힘과 프라나와 쿤달리니는 인간의 멘탈체와 감정적인 삶에 직접 관련이 없고 단지 그의 신체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챠크라들에 들어오는―신비적이고 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다른 힘들이 또한 존재한다. 미저골과 비장 챠크람은 이러한 힘들을 전혀 나타내지 않지만, 배꼽 차크람과 그 이상의 챠크람들은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힘들이 들어오는 입구들이다.

여러 챠크람들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프라나 흐름들이 띠는 색채들과 ‘비교(Secret Doctrine)’ 제 3권 p.452의 도해속에서 블라바츠키 여사에 의하여 인간의 본질들principles에 배정된 색채들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아래의 표에 나타나 있다.

(표 생략)


쿤달리니는 제 3로고스에서 나오는 첫 번째 분출에 속한다. 그것은 지구의 중심부에 있는 하나의 거대한 구球에 작용하는데, 단지 그 바깥층들에만 접근할 수 있다; 이 바깥층들은 인간의 몸에 있는 쿤달리니의 여러 층들과 공명진동하는 관계에 있다. 이리하여 인체 내에 있는 쿤달리니는 지구 내부의 깊숙한 곳에 있는 이른바 “성령의 산실”로부터 오게 된다. 그것은 지하 세계의 불에 속하는데, 프라나 혹은 생명력의 불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프라나는 공기 및 빛과 활짝 트인 (광활한) 공간들에 속하는 것이며,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불은 벌겋게 단 쇠의 불처럼 훨씬 더 물질적이다. 이 엄청난 힘에는 다소 무시무시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물질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하강하여, 완만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나아가는 느낌을 주는 것은 떨칠 수가 없다.

쿤달리니는 첫 번째 분출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중에 표출되는 힘이며, 그것은 이미 말한 원초적인 힘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작용하여, 진화하고 있는 피조물이 제 1 로고스의 분출을 받아 인간적인 자아가 될 수 있는 정도까지 그 두 가지 힘이 피조물을 끌어올리게(데려오게) 된다.

시기상조로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불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의 본성에 있는 모든 특성을 강화시키고, 좋은 특성들보다 저급하고 악한 특성들을 더 쉽게 강화시킨다. 예를 들어, 멘탈체에서는 야심이 아주 쉽게 각성되고, 곧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진다. 지성적인 힘을 아주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일반인에게서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그러한 비정상적이고 악마나 가질 수 있는 자만심을 유발시킬 것이다. (쿤달리니에 대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누구도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사람이 쿤달리니가 우연히 각성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면, 즉시 이러한 문제들을 충분히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한다. ‘하타요가 프라디피카’ Ⅲ권 p.10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쿤달리니는 요기들에게 자유를,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속박을 준다.”

쿤달리니의 정복은 매번 화신할 때마다 반복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화신할 때마다 입게 되는 체들이 매번 새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쿤달리니가 완전히 정복된 후에는, 반복해서 정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쿤달리니의 작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상위의 자아의 목소리를 듣는 것 보다 오히려 그 자아를 볼 것이다. 또, 이 상위의 자아와의 연결에는 많은 단계가 있다; 개성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자아ego의 영향을 의미하지만, 자아의 관점에서 보면 모나드의 힘을 의미하고, 모나드의 관점에서 보면 로고스의 의식적인 표현(수단)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멘탈체의 여러 기능들을 사용하기 위하여, 의식을 멘탈체에서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의식은, 비록 자신이 막연하게 다른 체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차원과 공간과 대상을) 의식할 수도 있지만, 한번에 단지 하나의 체에만 집중될 수 있다. 이리하여, 만일 아스트럴 및 멘탈 시력을 소유한 사람이 그의 의식을 육체의 두뇌에서 (외부 대상을) 집중하면, 그는 친구들의 신체들을 완벽하게 볼 수 있는 동시에 그들의 아스트럴체 및 멘탈체도 희미하게나마 볼 것이다. 지극히 짧은 순간에, 그는 의식의 초점을 바꾸어, 아스트럴체를 충분히 그리고 완벽하게 볼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그는 멘탈체 및 아스트럴체를 계속 보겠지만, 아주 자세히는 보지 못한다. 똑같은 사실이 멘탈 시력과 상위계들의 시력에도 적용된다.

멘탈계에서 본 것을 육체의 두뇌에 가져올 때, 상위계로부터 하위계로의 이중전이(二重轉移)라는 어려운 작용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멘탈계에서 본 것에 대한 기억은 중간의 아스트럴계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멘탈체의 기능들이 육체에 각성되어 있어 사용할 수 있을 때조차도, 물질계의 언어로 자신이 (멘탈체로) 보는 것을 전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멘탈체의 의식을 육체의 두뇌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여러 체들 사이의 연결(고리)들이 형성되어야만 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연결들이란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져 있으며, 활발하게 활성화되어있지 않아서, 사용함으로써 발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위 발육 부진의 신체 기관들과 같은 상태에 있다. 그러한 연결 고리는 육체 및 에텔체를 아스트럴체와 연결하고, 아스트럴체를 멘탈체와 연결하고 멘탈체를 원인체와 연결한다. 의지의 작용이 그 연결 고리들을 활성화시키고, 그들이 작용하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은 의식을 한쪽 체體로부터 다른 체體로 전달하기 위하여 그들을 사용한다. 의지의 사용은 연결 고리들을 활성화시키면서 쿤달리니, 즉 뱀의 형상을 한 불을 자유롭게 한다.

육체와 아스트럴체의 연결 고리는 뇌하수체이며, 육체와 멘탈체의 연결 고리는 송과선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뇌하수체를 먼저 개발하고 어떤 사람들은 송과선을 먼저 개발하는데, 각자가 자신의 구루, 즉 영적인 스승이 지시하는 방법을 따라야만 한다.

사람이 자신의 여러 체들 사이의 연결부를 개발한 후에 각성된 의식상태로 육체를 떠나는 것을 배웠을 때, 그는 물론 지금까지는 그냥 살아왔었던 육체적 삶과 수면중의 삶 사이의 (무의식이 차지하는) 공백을 메우게 된다. 이 공백을 메우는 것은 멘탈체로부터 오는 진동들에 반응할 수 있도록 두뇌를 훈련함으로써 더욱 촉진된다. 그때에는 뇌가 더욱더 그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듣는 도구가 되어, 의지로부터 오는 자극들을 받아 활동들을 수행하고 의지가 약간만 작용해도 반응하게 된다.

육체에서 상위 의식의 진동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주로 준비해야 할 준비 사항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정갈한 음식과 순수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하위의 여러 체들을 정화시키고, 정과 욕심을 완전히 정복하고, 외부적인 삶의 소란과 우여곡절에 영향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균형을 이룬 성격과 마음을 함양하고, 고상한 주제들에 관한 고요한 명상 습관을 기르고, 특히 뇌로 하여금 한가지 일로부터 다른 것으로 정신없이 왔다갔다하게 하여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게 하는 쉽게 흥분하는 성급한 마음을 지양하고, 상위계의 모든 것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참으로 사랑하는 친구와의 관계에서처럼 그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만족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각성된 의식상태에서 멘탈체의 기능들을 사용할 수 있을 때에, 그는 물론 멘탈계로부터 오는 모든 형태의 인상들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모든 활동들은, 그가 바로 그들의 신체 움직임 들을 볼 때처럼, 그에 의해서 감지된다. 멘탈체의 능력들을 사용하는 것을 배울 때, 사람은 하위의 체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위체들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 단계에서 사람은 또한 의식적으로 상념형태를 창조하고 통제함으로써 그의 유용한 능력들을 매우 크게 증대시킬 수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멘탈체로 여행하는 것이 불편할지도 모르는 장소들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상념형태를 사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념형태들이 작용할 때 그 상념들을 지켜보며 인도하고 그의 의지를 이행하는 대리인들로 되게 하면서, 멀리서부터 그 상념들을 그는 통제하게 된다.

사람이 신비 지혜의 가르침을 따라 나아가기 시작할 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전 멘탈체는 정화되어 완전히 조화롭게 작용하는 상태에 있어야한다. 특히, 그는 강하고 명확한 상념 형태들을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가 상념 형태들을 생생하게 심상화할 수 있다면 그에게 큰 도움과 위안이 된다.

그 두 가지 행위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상념의 형성은 멘탈체를 통하여 활동하는 의지의 직접적인 작용이다. 반면에, 심상화는 자신이 만든 상념형태를 투시적으로 보는 능력일 뿐이다. 만일 사람이 어떠한 대상을 강하게 생각하면, 그가 그것을 심상화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 대상의 영상은 생각하는 것 바로 그 만큼 그의 멘탈체내에 있게 된다.

또한 신비학도는 고도의 도덕적 순수성과 멘탈적인 균형을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이 없으면 투시는 투시가에게 저주가 되고 축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멘탈체의 의식을 개발하면, 매번 화신하여 사는 전 생애동안에 그의 삶과 기억은 연속적으로 유지된다.

이리하여 사람이 멘탈체의 능력들과 한계들을 경험하면서 멘탈체로 의식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때, 그는 자기가 사용하고 있는 체와 자기 자신을 구별하는 것을 또한 필연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 다음 단계는 그가 개성적인 “나” 즉 멘탈체의 “나”의 환영적인 성격을 지각하고, 자기 자신을 실제적인 사람 즉 원인체에 살고 있는 개체성(individuality) 혹은 자아(ego)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의식을 상위 멘탈계에 있는 자아(ego)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이 단계에서는, 그는 그의 모든 과거 생애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가 멘탈계와 아스트럴계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려 기억을 연속적으로 유지하는 즐거움을 맛보고자 한다면, 그의 멘탈체를 하나의 체로써 사용하는데 자신을 오랫동안 철저하게 훈련해야만 한다. (자아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 육체적인 의식에 오기 오래 전에, 자아가 자신의 계에서 충분히 의식적이었으며 활발히 작용하였던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우리는 유추해보면 알게 된다. )

멘탈체 자체는 피로를 느낄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는 피로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 피로하다는 것은 단지 마음이 스스로를 표현하게 되는 수단인 육체의 두뇌가 느끼는 피로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육체적인 피로는 멘탈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리하여 완전히 지친 사람은 (육체를 통일적으로) 조정하는 능력을 상당히 상실하게 된다. 모든 육체의 세포가 불평을(부조화를 유발) 하고 있으며, 모든 체들―에텔체, 아스트럴체, 멘탈체―에게 이러한 영향을 주어, 자그마한 별도의 소용돌이들이 아주 많이 형성되어 각자가 자신의 진동율로 진동하여, 모든 체들이 가지고 있는 응집력과 제각기 체가 맡은 바 일을 수행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현재의 지식수준에서는, 일반적인 기억이 작용하는 정확한 방식은―그 주제가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에―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멘탈체의 진동은 기억이 작용하는 방식의 일부이며, 원인체는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수 천년 전에는 상위의 체들의 기능들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의식이 존재했던 것 같다. 의식의 집행자가 어두운 방에서 “옴Om”이라고 발성하여 자신과, 그의 마음에 가득한 감정들을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게 했다. “브우르Bhur"를 발성할 때, 어두운 방은 (불이 환하게 켜진 것처럼) 빛으로 가득차는 것을 그들은 느끼게 된다. 다른 단어를 발성하면, 아스트럴시력이 그들에게 일시적으로 열리고, 또 다른 단어를 발성하면 그들의 멘탈 시력이 비슷하게 열렸다. 그러한 효과들은 비록 일시적이지만, 장래에는 똑같은 결과를 얻는 것이 물론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더 쉽게 될 것이다.

신비학도가 충동과 직관을 구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둘 다가 내부로부터 두뇌에 오기 때문에, 처음에는 둘이 정확히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여건이 허락되면, 잠시 동안 기다리는 것이 지혜롭다. 왜냐하면 충동은 시간이 지나면 대개 점점 약해지지만 직관은 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충동은 대개 흥분이 따르고, 충동에는 개성個性적인 것이 있다: 반면에 참된 직관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지만, 조용한 가운데서 느껴지는 강렬한 힘을 띠고 있다. 충동은 아스트럴체가 (고양되어 오는 것을) 육체가 느끼는 것이며, 직관은 자아로부터 개성에 새겨진 단편적인 지식이므로 상위 멘탈계나 심지어 때때로는 부디계로부터 온다.

충동과 직관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본성이 충분히 균형을 이룰 때까지, 조용히 심사 숙고하는 것이 필요하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다려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충동은 사라져버리는 반면에, 직관은 점차로 더 명확해지고 점점 더 강해진다. 고요함과 차분함은 하위의 마음으로 하여금 더욱더 분명히 직관을 듣고 그 능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리하여 직관은 고요하게 기다리면 아무것도 잃지 않고 오히려 이득을 얻게 된다.

더군다나, 직관은 이기심이 없는 것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 만약 상위의 계로부터 오는 어떤 자극에 이기심이 약간이라도 나타나 있다면, 그것은 아스트럴적인 충동이지 참된 부디적인 직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보면서 알게 되는) 물질계의 직접적인 시력과 약간 유사한 직관은, 결국에는 물질계의 촉감에 비유될 수 있는 이성을 대신할 것이다. 시력이 촉감의 상태에서 발달하는 것과 똑같이, 연속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본질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직관은 발달한다.

그러나 지성이 없는 사람들의 직관은 충동이며, 욕망에서 기인하며, 사유보다 더 못한 것이다.


제 15 장

집 중



우리가 상념의 메카니즘(작용)과 힘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마음의 통제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이 타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미치는 영향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사실상, 상념을 통제하는 것은 영혼의 능력들을 개발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선결 요건이다.

‘침묵의 목소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은 실재(實在)를 가리는 것이다. 제자로 하여금 그것을 제거하게 하라.” 물론 이것은 마음이 파괴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마음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이 지배되고 정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훈련하여 사용해야 할 것은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도구이기 때문이다.

신비학도는, 명백히, 자기 자신이 품게 되는 상념들과 감정들에 관하여 아주 조심을 해야 한다. 일반 사람은 아마도, 감정이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감정을 좀처럼 점검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감정이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때 그 감정에 굴복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신비학도는 아주 다른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감정들이 그에게서 마음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두는 대신에, 그는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의 멘탈체를 개발하고 통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한 첫 단계 중 하나가 마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리하여 신비학도는 감정들과 마음을 모두 정복해야만 한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그리함으로써 잘 훈련된 무사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리 저리 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처럼, 그는 자기의 마음을 활용하여 이리저리 생각하거나 마음을 고요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집중력을 획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멘탈적인 일(WORK)에 대비해서 필요한 예비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이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갑자기 왔다갔다 하도록 하지 않고 또한 보잘 것 없는 상념들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면서, 꾸준하게 연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산란한 상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서도, 그들이 마음을 통제하는데 전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상념의 흐름들을 저지할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집중된 상념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초기의 오컬트적인 발달 과정이 일반인들에게 아주 어려운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집중(력)이 완전히 부족한 것, 다시 말해 마음과 의지의 연약함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좋은 상념들 보다 악한 상념들이 더 많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마음과 의지가 연약함으로 인해서, 조금만 조심하고 조금만 노력을 하면 완전히 피할 수 있었던 온갖 종류의 유혹을 그는 쉽게 받게 되는 것이다.

형태적 측면에서 말하면 집중하는 것은 하나의 지속적인 영상으로 멘탈체를 유지하는 것이고, 생명적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내부에 그 영상을 재현할 수 있도록 이 형태에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들어오는 다른 모든 인상들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하나의 영상에 의해서 형성된 단 하나의 이미지속에 마음을 계속 머물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의지의 힘인 것이다.

더욱 간단히 말하면, 집중이란 마음을 하나의 생각에 맞추고 그 생각에 마음을 계속 유지하는데 있다.

훨씬 더 간단히 말하면, 집중이란 주목하는(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면, 그때 그의 마음은 이미 집중되어 있다.

목센터 혹은 목 챠크람은 고차원적인 청각과 관련 있지만, 또한 주목하는 능력과 밀접히 관련이 있는데, 모든 오컬트 체계에서 그것은 항상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고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제자들은 수년 동안 “아쿠스티코이(Akoustikoi)”라 불리는 단체에 속해 있으면서, 확고한 철학 원리들로 철저하게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위험한 물위로 배를 띄우는 것’(신비 지혜가 아니라 세상에 속한 지식들의 영향을 받는 환경을 말한다)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스라(Mithra) 신비의 최하위 계층이 “까마귀들(Ravens)”이라는 계층인데, 까마귀나 앵무새처럼 그들은 자신의 들은 것만을 반복하는 것이 허락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리메이슨은 이와 유사한 것으로, 그 체제내에 E.A 계층을 인정한다.

말하는 김에, E.A.의 S... 를 사용하는 사람을 돕기 위하여 정묘한(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하는 특별한 부류의 비인간적인 지적 존재들을 부르는 E.A의 s.... 는 정확하고도 적절한 곳에 만들어질 필요성이 있다; 만약 부주의하게 자신이 행하는 것에 신중히 생각도 하지 않고 만들게 되면, 자기가 만든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채로 그러한 영향들에 자신을 노출시킬지도 모른다. 그러한 모든 형태들의 “마술(magic)"을 사용할 때, 그는 부주위하게 그의 곁을 지나가게 되는 불쾌한 세력들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신비 학도는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당연히 생기는 결과로―예를 들면 이마살을 찌푸리는 것처럼―신체의 근육이 긴장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긴장은 신체를 피곤하게 할뿐만 아니라, 영적인 힘들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신비 학도는 명상중에 또한 일상 생활중에서도 주기적으로 그의 신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의도적으로 “긴장을 풀어야한다”. 한 순간이라도 완전히 이완을 하면, 전신이 엄청난 휴식을 취하게 된다는 것은 경험으로 입증될 것이다.

(집중력이) 강하고 기질이 강한 사람들은 특별히 이완에 주의를 기울여야하고, 이 목적과 관련된 수련들을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Annie Payson Call이 지은 ‘휴식을 통한 힘(Power Through Repose)’은 확실히 추천할 만한 최고의 책 중 하나이다.

집중은 신체적으로 노력하는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하나의 상념으로 빠져드는 순간 마음은 그 상념에 대하여 집중되어 있는 상태다. 집중이란 마음을 어떤 상념에 억지로 지속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완벽히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그 상념에 계속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신비 학도는, 상념의 자리는 육체의 두뇌에 있지 않고 멘탈체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그러므로 집중은 육체의 두뇌보다는 멘탈체에 관계가 있다.

이리하여 집중이란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고, 반대로 활발하면서도 잘 통제된 능동적인 상태라는 것이 명백하다. 멘탈계에서의 집중은, 물질계에서 도약하기 위하여 근육을 움츠리는 것이나 근육을 계속 팽팽하게 유지하기 위해 힘을 주는 것과 흡사하다.

실제로 상념을 집중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한번에 5분이나 10분을 초과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뇌를 혹사시키기 쉽다. 매우 점진적으로 늘여나가서 시간은 15분, 20분이나 30분으로 연장될 수 있다.

신비 학도는 뇌에서 멍하고 묵직한(괴로운) 느낌이 들 때까지 결코 집중이나 명상을 계속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멍함과 고통이란 여러 체들의 질료를 변화시키는 노력이 몸이 견디어내는 것보다 더 급속히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위험 신호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보다 상념을 억제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같다. 이는 아마도 감정이 억제되지 않고 날뛰도록 허용하는 것은 꼴사납다고 가르침을 받아온 반면에, 대개 떠오르는 상념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통제하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의 멘탈체에 배인 과거의 습관들과 충돌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아스트럴체의 집단 의식이 소위 욕망 엘리멘탈(Desire-Elemental)을 형성하듯이, 그의 멘탈체에는 멘탈 엘리멘탈(Mental Elemental)이 있다. 이리하여 이 멘탈 엘리멘탈은 모든 것을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왔다갔다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멘탈 엘리멘탈과의 투쟁은 욕망 엘리멘탈과의 투쟁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멘탈 엘리멘탈은 욕망 엘리멘탈보다 진화상에 있어서 훨씬 이전에 해당하는 단계이므로 물질적으로 제한을 가하는 것에는 덜 익숙하다. 결과적으로 그―멘탈 엘리멘탈―은 욕망 엘리멘탈보다 더욱 활발하다. 다시 말해, 더욱 끊임없이 활동적이지만, 욕망 엘리멘탈보다 그 강도는 덜하고 그 결정적인 역할도 덜하다.

이러므로, 그 멘탈 엘리멘탈을 다루기는 더 쉽지만 우리가 그것을 다루기에는 덜 익숙하다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하여 욕망보다 상념을 통제하는 데 힘이 실제로 훨씬 더 적게 들지만, 그것은 힘을 지속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

멘탈계에서 마음은 자신의 고유한 활동영역이 있어 자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마음이 멘탈 엘리멘탈을 완벽하게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은 단지 연습만 하면 되는 반면에, 우리가 욕망 엘리멘탈을 지배할려고 노력할 때는 우리는 마음을 낯선 세계속으로 끌고 내려와서 외부로부터 온 성격이 서로 상반하는 외부인(alien)인 즉 마음이 욕망 엘리멘탈을 지배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에 말한 몇 가지 사실들은 너무나 중요하므로 요점만 간략히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을 통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감정을 통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지만, 우리는 감정 통제에 어느 정도의 연습을 해왔으나, 대개 마음의 통제는 거의 전혀 연습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멘탈적 수련(훈련)은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것 같다. 감정 통제와 마음의 통제 둘 다는 신체를 완전하게 정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성취도가 아직까지도 주목할 정도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전의 수많은 생 동안에 어느 정도는 육체의 완전한 정복을 훈련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신비학도에게는 분명히 고무적일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면, ‘침묵의 소리(the Voice of the Silence)’에서 이 지구가 신비가에게 알려져 있는 진짜 유일한 지옥이라는 말이 진실이다는 것을, 그는 당연히 절실히 느낄 것이다.

위에 언급한 말들이 거짓되거나 과장되지 않도록, 신비학도로 하여금 상념의 힘(thought-power)으로 가령 격심한 치통을 추방하는 일―이것 조차도 어떠한 여건하에서는 행해질 수 있다―이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보도록 하라; 상념의 힘에 의하여 우울함, 분노, 질투 또는 어떠한 다른 불쾌한 감정을 추방하는 것이 분명히 훨씬 쉽고, 불쾌하거나 이득이 없는 주제에서 유쾌하거나 유용한 다른 주제로 상념을 돌리거나, 심지어 마음으로 하여금 전혀 작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집중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더욱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두개의 주요 그룹으로 자연스럽게 나누어 진다. 첫째는 카마 즉 욕망과 관계가 있고, 둘째는 바로 멘탈 질료의 속성 자체와 관련이 있다.

마음을 통제하는데 있어 그 어려움은 5,000년 전에 아르주나와 스리 크리슈나 사이의 불후의 대화에서 그―아르주나―에 의해 잘 표현 되었다.

“오! 마두(Madhu)를 제거해버리신 이여! 평온한 상태에 있을 때에 비로소 그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신 이 요가에 대해서, 차분하지 못함 때문에 저는 그 요가의 기반이 확실히 잡힌 것을 보지 못하고 있나이다. 오! 크리슈나여!, 이는 나의 마음이 가만히 있을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충동적이고 강하여 굴복시키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 바람만큼이나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크리슈나의 대답도 올바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성공으로 이르는 유일한 방법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오! 힘있게 무장한 자여, 마음은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도다; 그러나 꾸준한 연습과 무심함(無心)으로 마음은 제어될 수 있도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장애에 두 가지 해결책을 역순으로 고찰해보자.

1. 무심(indifference). ― 이 말은 분명히 카마 혹은 욕망이 마음을 끌어들여 좌우하고 지배하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제 6장에서 우리는 카마와 마나스의 관계를 자세히 연구했으며, 욕망이 계속적으로 마음을 자극하여 항상 마음을 쾌락의 노예로서 봉사하도록 하는 것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렇게, 마음은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할 뿐만 아니라 기쁨을 주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하여금 그 맡은 바 직무로부터 벗어나서 노예 상태로 끌려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감정들을 제어하고 정복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신비 학도가 사소한 감정들로 인해 야기되는 혼란은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과, 신성의 번쩍이는 섬광閃光인 인간이―아직 광물로도 진화하지 못한 ―욕망 엘리멘탈의 지배를 받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는 것은 결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행동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

이 무심(無心)을 성취하여 하나의 집중 수단으로써 활용할 수 있는 주된 방법이 두 가지 있는 것 같다. 이것들을 우리는 (a) 철학적 방법과 (b) 헌신적인 방법으로 부를 수 있다.

(a) 철학哲學적인 방법The Philosophical Method

이것은 카마 즉 욕망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속박시켜버리는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바꾸고 그 태도를 강화시키는데 있다. 이리하여 사람은 외부적으로 오는 것이든 내부로부터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든지 간에 모든 대상들에 무관심하게 된다. 본 저자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 방법은 서구적인 기질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것 같으며, 그 방법이 해결하는 것 보다 더 복잡한 문제를 종종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양적인 기질을―특성을 대체적으로 적절하게 표현한다면―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별로 큰 어려움을 야기시키지 않는 것 같다. 그 방법을 명확하고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논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물론 이 책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는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설명하는데는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방법적인 체계에 대한 철학적인 원리는 바가바드 기타의 강연 5와 6에 설명되어 있는데, 각각 행위를 포기하는 요가와 자아를 정복하는 요가라 불린다.

이 체계하에서는, 사람은 “미워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 .... 그는 이원성으로부터 자유롭다; ...... 그는 5감이 감각 대상들 사이에 움직이는 것을 지각한다..... 그는 애착을 버리며 모든 행위의 근원을 영원속에 둔다; 그는 마음으로 모든 행위들을 포기한다; .... 그는 학식과 겸손함을 겸비한 브라마나, 암소, 코끼리와 심지어 한 마리 개와 들고양이까지도 동등하게 본다; ... 그는 즐거운 것을 얻을 때 기뻐하지도 않고 불쾌한 것을 얻을 때 슬퍼하지도 않는다; ... 그는 외부의 접촉들에 애착이 없고 자아안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 그는 욕망과 정욕의 힘을 견디어낼 수 있다 ..... 만물과 조화를 이루고... 즐거워하며... 모든 존재들의 행복에 열중하고... 욕망과 정욕으로부터 벗어나있다.”

“그는 행위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신성이 부여하는) 의무적인 행위를 행한다... (자신에 의해) 형성된 (에고의) 의지는 포기한 채로 명예와 불명예에서 뿐만 아니라 추위와 더위에서 즐거움과 고통속에서도 한결같이 잘 통제되고 평화롭게 있다; ...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들, 적들, 낯선 사람들,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외국인들과 친척들 또한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도 편애하지 않고 똑같이 대한다; ... 그는 희망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롭다; ... 그는 모든 바람직한 것들을 갈망하는 그 갈망으로부터 자유롭다; ... 그는 바람없이 고요한 곳에 있는 등불과 같다; ... 그는 엄청난 슬픔에 흔들리지 않는다; ... 그는 상상에 의해 생겨나는 모든 욕망들을 단번에 내버린다; ... 마음을 자아(the Self)속에 거주하게 한 후에 ... 조금씩 조금씩 그는 고요함(tranquility)을 얻는다; .... 그는 자아가 모든 존재들 속에 있으며, 모든 존재들이 자아 속에 있는 것을 본다; ... 그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은 우리가 철학적 방법이라 불렀던 것의 극히 일부분만을 이루고 있다. 사실, 그 방법은 특별히 각 개인에 맞게 그리고 기질의 특수성들에 적합하도록 수정될 수 있고 또한 수정되어야한다.

그러나 철학적인 방법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렵고 까다로운 길이다; 그러므로, “또 다른 다르마(dharma)는 (자신에게) 위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보다 덜 과격한 두 번째 방법을 따르게 하라.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설명하겠다.

(b) 헌신적인 방법

이 방법에서는 카마 즉, 욕망 또는 애착을 제거하기 보다는 신비학도는 바로 카마의 힘 자체를 사용해서 마음을 안정된 상태에 두게 한다. 이것은 헌신가가 사용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카마(욕망)을 최고의 상태로 순화시켜, 상대적으로 자신에게 약한 모든 애착을 보잘것 없는 것으로 보고 그의 주의력이 산만하거나 다른 것들로 흘러가지 못하게 한다.

성격상 헌신적인 사람은 마음을 사랑하는 대상이나 이미지에 고정시킴으로써 자기 목적을 성취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그 이미지를 관조(contemplatin)함에 의해서 경험하게 되는 바로 그 즐거움이, 마음을 그 이미지에 계속 고정시키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마음이 어쩔 수 없이 그 이미지로부터 다른 이미지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고 할지라도, 마음은 계속해서 원래의 그 이미지로 되돌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헌신적인 사람은 상당한 정도의 집중에 이른다.

헌신가는 자신에게 매력적인(마음이 끌리는) 요소를 사용하는 반면에, 보다 철학적인 성향을 띠는 사람은 어떤 심오한 개념이나 심지어는 문제까지도 그에게는 매력적인 이미지로 여긴다. 이리하여, 그에게는 지적인 흥미 즉 지식에 대한 깊은 욕구가 마음을 다른 것보다는 그것에 집중하게 하는 마력적인 힘을 제공하고 마음을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고정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유익한 ‘집중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마음으로 집중을 연습하는 것은 마음을 의지의 영향하에 두게 하거나 특정한 때의 기분․감정인 무드로 마음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고 작용은 특정한 목적에 극한(집중)될 것이다.

그다지 헌신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위의 방법은 상당히 수정될 수 있다; 사실상 이 수정된 방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모든 방법 중 아마도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행하는 것이 때문이다. 그 방법에서는, 선정된 주제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몰두하여 모든 다른 상념들은 마음에서부터 사실상 배제된다. 마음은 다소 몰입된 집중상태를 일으킬 수 있도록 매우 열중해야만 한다.

신비학도는 자유자재로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을 배워야하며, 외부 대상들을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과 습관을 배양하면 이것을 성공적으로 가장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선택하여, 다각도로 꼼꼼하고 세밀하게 조사하고 연구해야한다. 자연계에 있는 어떠한 대상도 실제로는 결코 지루하거나 흥미롭지 않은 것은 없다; 만일 어떠한 것이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면, 오히려 자연계에 현현한 것에 대한 경이로움과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부주의와 인식의 부족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상대적으로 초보적인 연습을 어느 정도 마스터하는 것이 심상화―어떤 대상이 육체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히 그 대상을 마음으로 재현시키는 능력―를 성공시키는데 필요하다. 그리고 정확한 심상화는 어떤 형태들의 오컬트적인 WORK, 예를 들면 의식(儀式)과 같은 데에 필요한 능력이다.

만일, 어떤 구체적인 대상 대신에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 즉 미덕이 선정되면, 그것은 신비학도의 열성과 헌신을 일깨우게 되고, 이 경우에 있어 집중이란, 주로 감정의 집중이며 마음의 집중은 현저히 줄어든다. 상념보다는 감정에서 우리가 한 점으로 집중되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상념이 보다 미묘하고 활동적이기 때문이다.

명상을 행할 때뿐만 아니라 집중을 행함에 있어서도, 초심자는 채워지지 않은 보잘것없는 많은 욕망들과 생각지도 않은 문제들이 항상 초심자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입을 쩍 벌리고서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억제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것들을 공정하게 다루어, 그들에게 특정한 시간을 내주어서, 해결할 때까지 다각도로 충분히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은 계획이다. (마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내버려두는 것과 같은 우유부단한 성격을 극복할 수 없는 마음은, 명상은 고사하고 집중에 성공할 수가 없다.

신비학도는 자기의 문제들을 조정하기로 결정을 하고, 자기 자신의 결정들을 준수하여, 그 다음에는 똑같은 문제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을 반복하지 말아야한다. 이것을 행하는 능력은 실천에 의해서 그리고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습관에 의하여 성장하게 된다.

(2) 끊임없는 연습

이 말은 멘탈 질료와 멘탈 엘리멘탈 에센스에 다소 내재하고 있는, ‘끊임없는 활동성’이라는 속성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 같다. 그 엘리멘탈 에센스는 어떤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쏜살같이 날아가듯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상념들’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질료와 마찬가지로 멘탈 질료는 습관의 법칙들을 따르므로, 끊임없이 연습함으로써 멘탈 질료를 훈련하여, 마침내 ‘끊임없는 활동성’을 제어하는 것이 몸에 배여, 참된 인간 즉 사고자(The Thinker)에 잘 따르는 ‘자발적이고 말 잘 듣는’ 종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겉도는 마음―일관성 없는 마음 상태―을 극복하는 가장 빠르고도 좋은 방법은 물론 의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더라도, 의지는 어느 정도 사용되어야만 한다. 전적으로 의지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리고 의지력이 발달할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철학이나 헌신이나 그 밖에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어떠한 다른 수단들을 사용하여 그들의 의지력을 보조하고 보완하기를 더 좋아한다.

물론 자신의 주위에 보호막을 만들어서 외부의 상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영속적으로 사용가능한 안(案)으로써 추천할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보호막이란 결국에는 단지 (일시적인 용도에 불과한) 목발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보호막이 사용될지라도, 보호막은 ‘정처 없는’ 상념들이 그의 내부로부터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여기저기에 남겨진 ‘아무렇게나 떠돌아 다니는’ 상념들이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것을 막을 수는 있다.

단지 하위 멘탈 질료만이 그러한 보호막을 만드는데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념들이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으며, 또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가 자신의 상념을 그의 스승에게 쏟아낼 때 이 보호막에 의해서 상념이 방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에서 이와 유사한 과정이 ‘지부의 지붕을 이는 것(Tyling the Lodge)’인데, 물론 이것은 공부가 되는 단계에 적합한 계에서 행해진다.

집중력은 평범한 일상생황에서 얻어질 수가 있으며 당연히 일상생활 중에서 얻어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든 지간에, 우리는 우리의 주의력을 그 자체에 완전히 집중하고, 전심전력으로 행하고 또 가능한 잘 해야한다. 예를 들면 한 통의 편지도 잘 그리고 정확하게 써야만 하며, 세세한 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부주의하여 편지를 연기시키거나 그 효과들을 해치지 않도록 해야한다.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완전히 주의를 집중하고 저자가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 노력하면서 읽어야한다. 어떻게든 마음을 명확하게 훈련하지 않고는 단 하루라도 보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집중력이)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연습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그 힘이 약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엔 그 힘이 위축되어 버리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근심이 작용하는 메카니즘과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을 학생들이 이해해야한다. Work는 지나치지 않다면, 상념 도구를 해치지 않고 반대로 강화시킨다. 그러나 근심이 작용하는 멘탈적인 과정은 분명히 상념 도구를 해치고 잠시 후에는 극도의 신경 피로와 초조함을 야기시키는데, 이로 인하여 지속적인 멘탈적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된다.

근심이란 똑같은 일련의 상념을 약간만 변화를 주면서 계속해서 되풀이 하고, 어떠한 결과도 얻지 못하며, 심지어는 종종 어떤 결과를 목표로도 하지 않는 과정이다. 그것은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멘탈체와 두뇌에 의하여 시작되어 의식에 강요되는 상념 형태들이 계속해서 재현되는 것이다.

사고자(思考者)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불만의 상태에 있다; 예상되는 골치 아픈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는 걱정하며 들뜬 상태에 있게 된다. 사고자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이러한 충동하에서는, 이미 형성되었고 또한 거절당했던 영상들을 멘탈체와 두뇌가 계속해서 위로 방출하(던져 올리)게 된다. 염려하는 상태에서는, 사고자는 그의 여러 체들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에 불과하다.

근심은 대개 자동현상에 기인하기 때문에, (멘탈) 질료의 바로 그 (자동현상의) 특성은 또한 근심을 극복하는데 활용될 수도 있다. 아마도 “근심을 일으키는 채널”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반대되는 성격의 또 다른 채널을 형성하는 것이다. 명상중에 “자아는 평화이다; 그 자아는 나다. 자아는 힘이다; 그 자아가 나다.”와 같은 그러한 상념에 곰곰이 몰두함으로써, 이것을 할 수 있다. 그가 이렇게 곰곰이 명상할 때, 자신이 곰곰이 명상하고 있는 그 평화가 그를 감쌀 것이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상상했던 그 힘이 그를 가득 채울 것이다. 명상을 위한 개념들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형성하는 것이, 물론 특정 개인에게 적합할 수 있다.

신비학도는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할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그만두는 법도 배워야 한다. 사고 작용이 끝날 때는, 파도에 밀려 계속해서 바위에 부딪히는 보트와 같이, 상념이 ‘아무렇게나 계속해서 떠돌게 내버려두어’ 마음과 부딪히지 않도록, (사고 작용의 결과 남은) 그 상념은 완전히 (마음에서 or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 기계가 물건을 생산하고 있지 않을 때는 기계를 헛돌게 하여 불필요하게 기계를 마모시키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값으로 따질 수없는 마음이란 기계를 계속 헛돌게 하여 유용한 결과도 얻지 못하고 마멸시켜서는 안된다. 피곤한 수족들이 완전히 휴식을 취하면 힘이 소생하듯이, 마음도 완전한 휴식속에서 위안(힘)을 얻을 것이다.

신비학도는 그의 사고 작용을 끝마칠 때, 그 상념을 내버려야 하며, 그리고 내버리는 바로 그 순간에 또 다른 상념들이 마음에 떠오를 때, 그의 관심을 그것들로부터 다른 데로 돌려야 한다.

또 다른 방법은―저자가 사용을 하여 성공한 한 방법이다―관심(주의)을 다른 데로 돌리기 보다는 일어나는 상념들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 이 방법이 바로 적극적인 행위이다.
이다. 그들이 오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들에게 전적으로 무심해라. 어떤 새로운 생명이 그 상념들 속으로 부여되지 않게 되면, 잠시 후에 그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어,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상념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어 완전히 고요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 고요함은 아스트럴체와 멘탈체 둘 다에게 극히 편안함을 주게 된다.

(이 방법은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또한 사용될 수 있다. 저자는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 그것이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상념의 흐름[사고 작용]을 중단시키는 것은 상위의 여러 계들에서 우리가 활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예비 단계이다. 두뇌가 고요해지는 것을 배울 때, 바로 그때에서야 의식을 물질적인 옷으로부터 철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신비학도는, 요가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행자가 “사고 원리가 (우리 의식의 지배하에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파탄잘리가 말한 금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은 멘탈체 또는 “사고 원리”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을 얻어서, 바로 인간의 본질인 사고자가 신중히 동의함으로써만 그것이 변화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파탄잘리가 요가를 정의하는데 사용된 용어는 치타-브리티-니로다(chitta-vritti-nirodha)인데, 이것은 마음의 질료(chitta)의 소용돌이들(vritti)을 억제(nirodha)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듯이, 마음을 다룰 수 있어야한다; 그 단계에 이를 때, 그가 완전히 멘탈체로부터 철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리하여 요가는 멘탈체의 모든 진동들과 변화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스터의 멘탈체에는,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변화를 제외하면, (멘탈체)의 색채 변화가 전혀 없다. 그의 멘탈체의 색채는 “잔잔한 호수 물결위에 비치는 달빛”과 같다. 달빛이 비치는 흰 부분(whiteness)안에는, 모든 색채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지만, 외부 세계에 속한 것은 어떤 것도 지속적으로 비치고 있는 그 광채위에 색조의 변화가 조금이라도 일어나게 할 수가 없다. 그의 멘탈체는 자신이 하위 세계와 의사소통할 필요가 있을 때만 사용하는 외부의 껍질에 불과하다.

집중의 결과로, 아는 자(the Knower)가 집중된 마음을 가지고 하나의 영상을 꾸준히 숙고할 때, 그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말로 설명을 들을 때 보다도 그 영상에 대해서 더욱더 완전한 지식을 얻게 된다.

대상을 말로 설명함으로써 대략적으로 형성된 윤곽은, 그 윤곽속의 전체적인 상황이 (집중된 마음의) 멘탈체에 의해서 형성됨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그림은 점점 더 세부적으로 충실해진다. 그리고 의식은, 설명된 그 내용들과 더욱더 밀접하게 접촉을 하게 된다.

집중과 상념의 힘에 관한 이론과 실습을 더욱 세부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신비학도는 애니 베산트가 지은 ‘상념의 힘, 그 통제와 함양(Thought-Power, Its Control and Culture)’을 참조하라. 그리고 집중에 관한 실제적인 소책자로서는 어네스트 우드가 지은 멋진 책 ‘집중(Concenrtration)’을 참조하라.


제 16 장

명 상



집중은 물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집중은 주인이 뜻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마음을 하나의 도구로 만든다. (본질인 생명을 가리고 있는) 휘장―형상―을 뚫고 들어가 생명에 이르러 그 (상위의) 생명을 끌어당겨 마음이 속하는 (하위의) 생명과 연합시킬 목적으로, 집중된 마음이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향할 때―그때 명상이 이루어진 상태다. 이리하여 집중은 기관(器官)을 형성하는 것이며 명상은 그 기관의 작용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집중이란 마음을―종잡을 수 없이, 외부의 대상들이나 감각작용이나 또는 마음 자체의 작용에 의해 생긴 산만한 것들에 전혀 끌려가지 않고―단 하나의 점에 확고하게 고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은 (고정된 것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의 지속성과 부동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은 서서히 외부세계와 신체로부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되어, 감각들이 매우 조용한 상태로 있지만 마음은 강하게 살아있고 마음의 모든 에너지들이 내부로 철수되어, 마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인 단 하나의 (점에 해당하는) 생각에만 그 에너지가 집중되게 된다. 마음이 비교적 쉽게 자신을 이러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을 때 한 단계 더 나아갈 수가 있으며, 강한 가운데서 조용하게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물질 두뇌에서 작용하는 동안에 도달할 수 있는―최고의 사고작용(thought)까지도 마음은 벗어날 수 있고, 그렇게 노력하는 중에 보다 상위의 의식에 올라가 그 의식과 하나가 되어,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이 산만하지 않고 주의(관심)를 기울여서 잠시동안 하나의 주제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명상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명상을 헌신의 대상이나, 이해하기 위해 (지혜 혹은 지성의) 빛이 비침(illumination)을 필요로 하는 문제나, 형상이기 보다는 사실상 (본질적인) 생명을 깨닫고 흡수할 수 있는 대상에다 집중된 마음을 주의 깊게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다양한 방향과 관계 속에서 하나의 주제를 고찰하거나 숙고하는 기술이다.

명상에 대하여 정의를 다르게 내리면, 명상이란 각성된 의식, 즉 정상적인 상태로 작용하는 마음속으로 초의식(super-consciousness)에 대한 자각(깨달음)을 가져오고자 하는 노력, 다시 말하면 신성한 본질 혹은 영적인 본질―참된 인간―의 영향력이 하위 인성(人性)에 미칠 수 있는 하나의 채널을 열망함으로써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과 감정들로부터 벗어나 이상(ideal)으로 이르는 것이며, (암흑에) 속박된 하위 의식의 문을 열어 이상의 영향을 받게 하는 것이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명상이란 내적인 인간이 무한에 대해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갈망이다”라고 말했다. 성(聖) Alphonus de'Liguori는 명상을 “영혼이 신의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축복된 용광로”라고 말했다.

(명상의 주제로) 선정된 이상은 미덕과 같이 추상적일 수도 있고, 사람속에 내재하는 신성일 수도 있고, 인간적인 모습을 한 매스터나 신성한 스승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가 본질적으로는 영혼을 신성한 근원으로 고양하는 것 즉, 개개의 자아가 우주적인 자아와 하나가 되고자하는 갈망이다.

음식이 물질적 생명에 대한 관계는, 명상이 영적인 생명에 대한 관계와 똑같다. 명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연코 가장 유능한 사람이다. 로즈베리Rosebery 경은 크롬웰에 대해 말할 때, 그를 “실용주의적인 신비가”로 묘사하고, 실용주의적인 신비가는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다라고 선언했다. 집중된 지성 즉 소란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는 능력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에너지가 엄청나게 집중되는 것과, 보다 꾸준함과, 자기 절제와, 차분함을 의미한다. 명상하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힘을 (분산하여) 허비하지 않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여러 가지 사건들을 지배한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사건들이란 (내부적으로 존재하는) 힘이 단순히 외부적으로 표현되는 것에 불과한데, 사건의 근원인 힘이 그의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신성한 생명을 공유하므로, 따라서 신성한 힘도 행사할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음이 하나의 이미지에 맞게 형성되어 있고 ‘아는 자’가 꾸준히 그것을 응시(관조)한다면, 이를 통하여 어떠한 말로 설명하는 것 보다 대상에 대해 훨씬 더 완벽한 지식을 얻게 된다. 집중을 행할 때, 그림(영상)이 멘탈체 안에서 형성되는데, 가령 말로서 설명된 것으로부터 대략적으로 얻은 윤곽에 대해 집중을 하게 되면 더욱 더 세부적으로 완벽하게 살을 붙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의식은 ‘말로써 설명된’ 바로 그 대상들과 더욱 긴밀하게 접촉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들이 명상을 권장하고, 명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모든 철학의 학파들이 인정해왔다. 몸이 튼튼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정해진 운동을 행하는 것처럼, 신비학도는 자신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를 발달시키기 위하여 특정한 수련들을 행해야 한다.

물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이, 명상의 종류도 다양하다; 하나의 명상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좋은 결과들을 주기란 전혀 불가능하다. 각 사람은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의 명상을 독자적으로 찾아야한다.

명상은 많은 목적이 있는데, 주된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사람이 고상하고 거룩한 것들을 생각하여, 자기의 상념이 반복되는 보잘 것 없는 일상생활의 일로부터, 즉 시시한 일들과 골치 아픈 일로부터 확실히 벗어나도록 한다.

(2)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고상하고 거룩한 것들을 생각하는데 익숙하게 하여, (잠시 후에는) 그것들이 일상생활의 배경을 형성하게 된다. 당장 필요로 하는 일상적인 일들로부터 해방될 때 마음이 즐겁게 그 배경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3) 일종의 아스트럴 및 멘탈적인 체육(gymnastics)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위의 체들을 건강하게 보전하고 신성한 생명의 흐름이 그들을 통하여 계속 흐르도록 한다. 이를 위하여, 규칙적으로 명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4) 인격을 도야하여, 그 안에 다양한 특성들과 미덕들을 함양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

(5) 보다 고상하고 보다 정묘한 것들을 포함하기 위하여 의식을 상위계들로 고양시킨다; 이를 통하여 사람은 신의 면전에까지 오를 수 있다.

(6) 자연의 신비를 풀고 또한 상위의 계들로부터 축복들을 불러 내린다.

(7) 처음에는 비록 서툴지라도, 더욱 깊이 발전하여 더욱 폭넓은 지식을 얻어, 투시 능력을 달성하고 마침내 이 물질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보다 차원 높은 삶에 이르는 길이다.

명상은 상위의 의식을 개발하는 가장 쉽고도 안전한 방법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가령 로고스나 매스터에 관하여 명상함으로써 시간이 경과하면 누구라도 자기 자신(의 의식)을 먼저는 아스트럴계로 그 다음에 멘탈계로 고양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물론, 그 시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걸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학도가 살아온 과거(생)와 그가 현재 행하는 노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고차원적인 것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데 열중하고 있는 사람은, 잠시동안 자기 자신(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멘탈계에서 강력한 상념형태를 만든다. 이 상념 형태는 즉각적으로 바로 상위의 계에서 맴돌고 있는 힘에 의하여 하나의 채널로 사용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러한 성격의 상념 속에서 함께 합쳐질 때, 그들이 만드는 채널은 각 채널의 단순한 합보다 그 수용 능력이 엄청나게 더 크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면 그로 인해 형성되는 채널이 작용하는 공동체에는 더없이 귀중한 축복의 근원이 된다.

그들이 지성적인 연구에 몰두할 때, 바로 그들이 정상적으로는 상위 멘탈계에 고유하게 머물고 있는 힘을 하위 멘탈계로 쏟아 붇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만약 그들의 상념이 보다 고상한 측면에서 윤리와 영혼의 발달을 다룬다면, 그들은―부디계의 힘이 멘탈계로 하강하게 되는―보다 고매한 상념의 채널이 될 수가 있다.

이리하여 그들은 (상위의 계의) 힘이 고유한 계界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그 힘의 작용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많은 사람에게, 그 힘의 영향이 미치게 할 수 있다.

사실상 이것이, 예를 들면, 신지학회 지부의 실제적이고 가장 큰 기능 즉 신성한 생명을 분배하기 위한 하나의 채널을 제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지학회의 모든 지부는 지혜의 매스터들과 그들의 제자들에게 관심의 초점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신지학회의 회원들이 연구와 토의 등을 할 때 그들의 상념들이 매스터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회원들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고상한 힘이 그때 (매스터에게서) 쏟아져 들어 올 수 있다.

신지학회의 회원들은, 어떤 사람이 신지학회에 가입할 때 그는 가느다란 ‘생명의 실’로 매스터들과 연결된다고 매스터가 말씀한 것을 애니 베산트 여사가 언급한 것이 기억날 것이다. 이 실은 매스터와 (진동적으로) 일치하는 자기선(磁氣線)이며 신지학도는 열심히 노력하고 헌신과 사심 없는 봉사를 함으로써 그 실을 강화하고 확대시켜 살아있는 광선으로 만들 수도 있다.

훨씬 더 높은 근원으로부터 축복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하다. 신성한 생명과 빛은 신이 창조한 모든 세계(체계)에 충만해있는데, 각 계界에서의 힘은 정상적으로는 그 고유한 계에 엄격히 제한되어있다. 그러나 특별한 채널이 마련되면, 그 힘은 하위계에 하강하여 비추게 된다.

어떠한 상념이나 감정이라도, 이기적인 측면이 전혀 없을 때마다 그러한 채널은 항상 제공된다. 이기적인 감정은 폐쇄된 곡선으로 움직여서, 그 감정이 속하는 계에 그 반응이 (부메랑처럼 부정적으로) 되돌아온다. 전혀 사심이 없는 감정은 되돌아오지 않는 에너지의 분출이 되지만, 그 상승 운동 중에 바로 옆의 상위계로부터 신성한 능력이 하강하기 위한 통로를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기도 응답’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상인 것이다.

투시능력자에게 이 채널은 일종의 거대한 원통형이나 깔때기 모양의 소용돌이처럼 보인다. 이것은 물질계에서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멋진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부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힘이 채널을 통하여 흘러 내려올 때, 그 힘은 어느 정도로 소용돌이와 하나가 되어, 그 소용돌이에 의해 영향을 받아 (그와 함께) 힘이 어떠한 통로를 통하여 왔는지를 보여주는 특징들을 띠면서, 그 소용돌이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명상을 함으로써 사람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는 점진적으로 혼란 상태에서 벗어나 질서 정연한 상태로 되어, 서서히 팽창하여 더욱더 높은 진동들에 반응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매번 노력할 때마다, 자신과 상위의 계와 직관적인 지식 사이를 분리시키는 베일의 막을 얇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의 상념 형태들은 날마다 더욱 명확하게 되어, 상위의 계로부터 그 속으로 쏟아 부어지는 생명은 더욱더 충만하게 된다.

이리하여 명상은 보다 높은 유형의 질료들로 여러 체들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그것은 종종 고상한 감정들이 경험되도록 하는데 이 감정들은 부디계로부터 내려와서 아스트럴체에 반영된다. 게다가, ‘지속성’을 얻고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멘탈체와 원인체의 발달이 또한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주는 고상한 감정들은 조금씩 왜곡되기가 아주 쉬워서,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그에게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단지 감정만으로는 완벽한 균형이나 지속성을 결코 얻을 수 없다. 동기를 유발하는 감정의 힘뿐만 아니라 마음과 의지의 통제력도 필요로 한다.

파탄잘리가 상세히 설명한 ‘다섯 가지 마음 상태’를 알면 명상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신비학도는 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단계)가 멘탈계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각각의 계에도 그에 알맞은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크쉬프타Kshipta: 나비와 같은 마음으로,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항상 쏜살같이 날아간다. 이것은 물질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2) 무드하Mûdha: 혼란스러운 상태로, 사람이 감정의 지배를 받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단계. 이것은 아스트럴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3) 비크쉬프타Vikshipta: 어떤 개념에 심취해있거나 몰두한 상태로, 어떤 개념에 빠져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하위 멘탈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의식의 인식적인 측면과 관계있는 비베카를 배워야한다.

(4) 에카그라타Ekâgrata: 한 점의 상태로 어떤 개념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개념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상위 멘탈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의식의 활동성적인 측면과 관계있는 바이라기야(Vairâgya)를 배워야한다.

(5) 니루다Niruddha: 자기 절제(self-control)의 단계로 모든 개념들을 초월하여 각성된 의지에 따라 그가 원하는 대로 선택한다. 이것은 부디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이 단계의 사람은 의식의 의지적인 측면과 관계있는 샤트삼파티(Shatsampatti)를 배워야만 한다.

완전한 통제력을 획득하여 마음의 모든 감정들을 억제할 수 있는 바로 그때, 그는 우리가 다음 장에서 더욱 충분히 다룰 관조(觀照)에 상응하는 삼마디(Samâdhi)에 들 준비가 되어 있다. 한편 마음의 단계에 대한 뼈대를 완전히 갖추기 위하여, 여기서 삼마디에 대하여 미리 약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어원적으로 삼마디는 “완전히 함께 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영어로는 “마음을 함께 두는 것” 즉 마음을 완전히 함께 모으고 모든 산만한 것들을 억제하는 것으로 번역된다. “요가란 진정된 마음이다”라고 브야사(Vyâsa)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삼마디의 원래 의미이다. 비록 마음이 완벽히 진정되어 고요한 상태(composure)에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결과인 ‘무아경’을 나타내기 위하여 더욱 빈번하게 사용되기는 하지만.

두 종류의 삼마디가 있다:

(1) 삼프라즈나타 삼마디: 의식이 있는 삼마디 즉 대상에 대하여 외부적으로 의식이 향한 삼마디.

(2) 아삼프라즈나타 삼마디: 의식이 없는 삼마디 즉 의식이 내적으로 향하여 자신속으로 철수하여 근접한 상위의 체 속으로 들어간 삼마디.

쉽게 참조할 수 있도록, 이 사실들은 아래의 표에 설명되어 있다.

[도표 생략]

학도는 또한 요가에서 언급되는 4가지 마음 상태에 대하여 간략하게 열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자그라트Jâgrat: 각성된 의식
(2) 스바프나Svapna: 꿈의 의식 ― 아스트럴체에 작용하여 그 경험을 두 뇌에 줄 수 있는 의식
(3) 수슈프티Sushupti: 깊은 잠의 의식 ― 멘탈체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그
경험을 육체의 두뇌에 인상을 줄
수 없는 의식
(4) 투리야Turîya: 무아경의 의식― 두뇌로부터 아주 많이 분리되어 있어
서 외부 수단에 의하여 쉽사리 회상할
수 없는 의식

그러나 이들 네 가지 의식 상태가 각각 모든 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물질계 의식의 네 상태에 대한 예들을 보여주는데, 간결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표로서 정리되어 있다

[도표 생략]


또한, 그 용어들은 상대적이다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그라트 즉 각성된 의식이란, 명백히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뇌와 신경계에 작용하고 있으며 이 의식은 전체의식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의식을, 한쪽 끝만이 두뇌 속으로 삽입된 커다란 달걀 같은 빛(덩어리)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바로 그 끝이 각성된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자의식이 아스트럴계에서 개발되고 두뇌가 그 진동에 반응할 정도로 충분히 개발될 때, 아스트럴 의식은 각성된 의식의 일부분이 된다. 그때 멘탈 의식은 스바프나 즉 꿈의 의식이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멘탈 자의식이 개발되고 (두뇌가) 그 (진동)에 반응할 때, 각성된 의식은 멘탈 의식을 포함한다. 그렇게 계속되다가, 마침내 다섯 개의 계界에 있는 모든 의식이 각성된 의식 속에 포함된다.

이렇게 각성된 의식이 확장되는 것은 뇌 속에 있는 (어떤) 기관들과 세포들 사이의 연결들이 발달될 뿐만 아니라 뇌의 원자原子들도 발달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아스트럴 자의식을 포함하기 위하여, 뇌하수체가 개발되어야 하고 원자 속에 있는 네 번째 일단의 스파릴래(Spirillae)가 완벽하게 되어야 한다.

멘탈 자의식을 포함하기 위하여, 송과선이 활성화되어야만 하고 다섯 번째 일단의 스파릴래가 완전히 작용해야 한다.

이러한 신체적인 발달이 없으면, 그때 아스트럴 의식과 멘탈 의식은 여전히 초의식 상태로 남아 있으며 뇌를 통하여 표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때 그의 자그라트 즉 각성 의식은 아스트럴 의식이다. 이리하여 자그라트에 대한 광의의 정의는 제일 바깥의 체를 통하여 작용하고 있는 ‘전체 의식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또한 위에서 분석한 것을 토대로 삼마디를 다시 고찰할 수 있다. 삼마디란 육체는 느낄 수 없지만 마음은 충분히 의식할 수 있는 상태여서, 마음이 육체를 초월한 경험에 대한 기억을 가진 채 육체의 두뇌로 되돌아가는 의식 상태다.

만일 사람이 무아경에 빠져들어 아스트럴계에서 활동적이게 될 때, 그때 그의 삼마디는 아스트럴계에 있다. 만일 그가 멘탈계에서 작용한다면, 그때에 그의 삼마디는 멘탈계에 있다.

삼마디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이 마음이 (다른 차원․계에 대해서) 충분히 자의식 적인 동안에 육체를 무감각한 상태로 놔두기 위하여 그 육체로부터 철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삼마디는 상대적인 용어다. 이리하여 매스터는 아트마계에서 삼마디를 시작하여 상위의 우주 계들로 올라간다.

또한 삼마디라는 말은 사람이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계를 막 벗어난 상태를 나타내기 위하여 때때로 사용된다. 이리하여, 의식이 단지 물질계에서만 명확한 야만인들에게는, 아스트럴계가 삼마디일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하위 체들에 되돌아 올 때 어떠한 명확한 지식을 추가적으로 가지고 오지를 못하고 또한 어떤 유용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도 가지고 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의 삼마디를 최고의 신비학파에서는 장려하지 않는다.

잠드는 것과 삼마디로 들어가는 것은 대개 똑같은 과정이다; 그러나 하나는 일상적인 상태에서 기인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훈련된 의지 작용에 기인하며 매우 귀중한 능력이다.

최면, 마약, 흰 바탕에 있는 까만 점을 보는 것이나, 코끝을 응시하는 것이나 다른 비슷한 수련들과 같은 무아경을 일으키기 위한 물리적인 수단들은 하타요가의 방법에 속하며 라자요가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투시가에겐 ‘최면에 걸린 피시술자’와 ‘자의적으로 황홀경에 든 요기’ 사이에 차이는 뚜렷하다. 최면에 걸린 피시술자에겐, 모든 “원리(본질)들”이 존재하는데 상위 마나스는 마비되어 있고 부디는 그 마비로 인하여 상위 마나스로부터 단절되고 아스트럴체는 전적으로 하위 마나스와 카마에 복종한다.

다른 한편, 요기에 있어서 하위의 4가지 “원리(본질)”는 거의 지각할 수 없는 ‘황금색을 띤 프라나’의 진동들과 머리로부터 위쪽으로 쭉 뻗쳐 한 점에서 절정을 이루는 ‘황금색 줄무늬가 있는’ 보라색 불꽃 하나 외에는 완전히 사라진다.

최면에 걸린 사람은 그가 경험한 것들을 뇌 속에서 전혀 회상할 수 없으나 요기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기억한다.

몇 가지 실례를 들면, 아마도 명상시에 사용되는 방법들 중 얼마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비 학도는 습관이 될 때까지 육체가 영(혼)spirit의 도구라는 생각을 가짐으로써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육체를 생각해야만 한다. 즉 어떻게 하면 그것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 가능한 지를 생각해야만 하고, 생각으로 육체와 자기 자신을 분리시켜서, 실제로 육체를 부인해―관련성을 끊어―야한다.

다음에는, 자신이 감정과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그는 아스트럴체의 감정과 욕망들을 가지고 아스트럴체를 부인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멘탈체에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자신이 상념(생각)들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마음을 부인하고 자신으로 하여금 영원한 평화가 존재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영역속으로 치솟아 오르도록 해야만 한다. 거기서 잠시 동안 머물면서 자신으로 하여금 “저것이 바로 실제 자아이다”라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 아주 열심히 분투하도록 해야 한다.

다시 ‘의식(적)으로’ 내려와서, 그는 영(혼)의 평화를 자기의 다양한 체들 속으로 가져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수련은, 목적에 맞게 하나의 미덕을 선정함으로써 명상을 인격 형성을 도모하는 쪽으로 돌리는 것인데, 해를 끼치지 않음(harmlessness)를 예로 들어보자. 주의가 집중된 후에, 많은 측면에서 그 주제에 관하여 생각한다; 즉, 행위, 말, 사고와 욕망에서의 해를 끼치지 않음; 해를 끼치지 않음이 이상적인 사람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표현될 것인지; 어떻게 그것이 그의 일상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 만일 그가 그 미덕을 충분히 얻었다면, 자기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등등에 관하여 생각한다.

이렇게 해를 끼치지 않음에 관하여 명상을 한 후, 자신의 모든 행동과 상념속으로 저절로 표현될 마음 상태를 일상 생활 안으로 가지고 올 것이다. 물론 다른 특성들도 유사하게 다룰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몇 개월 동안 진지하게 노력하면, 플로티누스가 (우리가 꼭) 기억해 둬야 할 말로서 묘사한 것처럼, 그의 삶에 있어서의 놀라운 변화들을 일으킬 것이다. “너 자신의 내부로 물러나서 보라. 그리고 네가 너 자신이 아직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창조자(조각가)가 하는 것처럼 하라. 그는 여기를 잘라 내고 저기를 매끄럽게 하고 이 선은 더 우아하게 저쪽 선을 완전하게 하여, 마침내 그는 조각에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나게 한다. 너도 또한 그렇게 하라. 지나친 모든 것을 잘라 내고 구부러진 모든 것을 곧게 하고 그늘진 모든 곳에 빛을 가져오고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빛나도록 애쓰고, 신과 같은 미덕의 광채가 네 위에 빛날 때까지 네가 최종의 선함이 흠없는 성소에 확실히 자리잡게 되는 것을 볼 때까지 너의 조상(彫像)을 끌(정으)로서 다듬는 것을 중단하지 마라.”

이리하여 미덕에 관하여 명상을 하게 되면, 사람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그 미덕을 소유하게 된다. 힌두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된다; 그러므로 영원에 관하여 생각하라.” 또다시 말한다: “인간은 상념의 창조물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명상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탁월한 예가 40년 동안 매일 진리에 관하여 명상한 어떤 사람이다. 그 결과로 그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 자신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진동에 의해서 어떤 사람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을 항상 알 수 있을 정도로 진리 자체에 자신을 일치시키게 되었다. 그 사람이 만일 재판관이었다면, 그의 능력은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 일을 행할 때, 사람은 자기의 상상력을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요가에서 사용하는 주된 수단이다. 사람이 상념으로 자신이 어떤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그는 이미 그 특성을 절반은 소유하고 있다. 만일 그 자신이 어떤 실패에서 벗어나 있다고 상상하면, 그는 그 실패를 절반은 벗어나 있다. 훈련된 상상은 매우 강력한 무기이므로, 사람은 그것을 활용함으로써 그의 곤란한 일과 결점을 절반은 제거할 수도 있다.

결점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그것은 ‘영적인 영향력을 차단하는 하나의 벽으로 작용하게 되는’ 병적임과 침울함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능한 한, 성격의 결점들을 무시하고 반대의 미덕들을 형성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 영적인 삶에서의 성공은 하급 속성과의 격렬한 투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고급 속성에 대한 지식과 올바른 분별을 모든 것에 적용하여 우리가 성장함으로써 얻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단 고차원적인 삶의 축복과 즐거움을 충분히 경험하게 되면, 이에 반비례하여 저차원적인 삶은 퇴색되어 그 매력을 잃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데 대한 가장 좋은 참회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의와 함께 희망에 찬 용기로써 앞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 위대한 스승이 말씀하셨다.

다음에는, 명상의 목적이 어떤 대상에 대한 지적인 이해이고, 또한 그와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라고 가정하자. 신비 학도는 ‘아는 자’의 첫번째 일이 ―정확히―관찰하는 것이다 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념은 관찰의 정확성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관찰이 정확하지 않다면, 그 첫 잘못으로부터 수많은 잘못들이 뒤이어 발생하는데, 이것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대상이 이렇게 조심스럽게 관찰된 후에, 상념의 흐름은 자연스럽고 초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모든 측면에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에 작용한다. 그리고, 여전히 모호한 의식의 수준을 아주 분명하고 명확히 하기 위한 노력이 행해진다.

예를 들어 주제를 조화로 정하자. 많은 감각들에 관련하여 조화를 고찰하자; 음악, 색채와 많은 다른 종류의 현상들로 조화를 고찰하자. 조화의 주요한 특징들을 발견하고, 그것이 다른 유사한 개념들과 대조적인 개념들과 어떻게 다른 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자. 일련의 사건에서 그것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그것의 유용성이 무엇인지, 그것이 없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자. 이 모든 것들과 많은 다른 질문들에 대답을 한 후에, 모든 구체적인 영상이나 상념들을 내버리고 조화의 추상적인 개념을 사고화하기 위한 노력을 행해야 한다.
학도는 멘탈계의 시력은 물질계의 시력만큼이나 아주 실제적이고 만족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리하여 사람이 물질계의 시력으로 나무나 탁자를 보는 것만큼 명확하고 분명하게, 조화라는 개념이나 2의 제곱근을 보기 위하여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가능하다.

세 번째 예로서 헌신적인 명상을 들자. 이상적인 사람인 매스터를 생각하자. 신성이나 아니면 신성의 어떠한 현현이라도 지정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좋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 감탄(찬미), 감사, 존경, 숭배가 항상 일어나도록 상념(생각)을 다른 측면들로부터 그 주제에 작용하게 하라. 그 주제에 현현된 모든 특성들을 숙고하고, 모든 측면과 관계를 지어서 각 특성을 다루어라.

일반적인 관점에서 추상적인 이상과 하나의 인성(personality)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명상 목적에 적합하다. 지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은 대개 추상적인 이상이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감정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은 그의 상념을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추상적인 이상이 가지는 불리한 점은 그것이 열망을 통제하는데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며, 구체화하는 것이 불리한 점은 그것이 이상(理想) 이하로 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매스터에 관하여 명상함으로써 얻는 결과에 특별히 유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함으로써 매스터와 명확히 연결되는데, 그것은 투시가의 시야에는 일종의 광선으로서 나타난다. 매스터는 항상 잠재의식적으로 그러한 광선이 (자신에게) 연결되면서 부딪히는 것을 느끼며, 우리가 명상이 끝난 후 오랫동안 계속해서 작용하는 자기(磁氣)의 지속적인 흐름을 그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 광선을 따라 우리에게 내보낸다.

그림이 명상할 목적으로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면, 그림의 표현이 변화하는 것을 종종 관찰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의지가 직접적으로 물질계의 질료에 작용하게끔 훈련되어, 그 결과로 실제적인 물질계의 입자들이 강하게 지속되는 상념의 힘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심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명상의 다른 한 형태, 즉 만트라적인 명상이 주어질 수 있다.

만트람이란 어떤 명확한 결과들을 가져오기 위하여 신비가에 의하여 배열된 명확하게 연속되는 소리들이다. 그러한 소리들은 운율적으로 계속해서 반복될 때, 여러 체들의 진동들을 일치시켜 그 (소리)들과 조화(일치)시킨다. 만트람은 이리하여 특정 진동들을 억제하거나 바라는 진동들을 일으키는 기계적인 방법이다. 그것의 효력은 이른바 동조 진동(sympathetic vibration)에 달려있다.

만트람이 반복되면 될수록, 그 결과는 그 만큼 더 강력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식서(Church formulæ)의 반복과 묵주 기도(rosary)는 가치가 있는데, 그것의 가치는 계속하여 셈을 함으로써 의식으로 하여금 정신이 산만하지 않고 듣고 생각하는 것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한다는데 있다.

주로 인도에서 실행되어지는 이러한 명상법에서, 헌신자는 그의 마음을 말하자면 쉬리 크리쉬나, 즉 화신한 신, 세상에서 사랑과 지식의 신(Spirit)에게 향하게 한다. 하나의 문장이 만트람으로 채택되어 계속 반복해서 읊는 동안, 그것의 깊고 다양한 의미에 주의를 집중하여 숙고한다. 이렇게 해서 헌신자는 바로 위대한 주님(The Great Lord)과 (직접) 접촉하게 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어떤 명상 형태들을 가장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더 많은 설명과 세부사항을 얻기 위하여, 학도는 훌륭한 책자인 어니스트 우드의 “집중(Concentation)”, J.I.Wedge. Wood의 “초심자를 위한 명상(Meditation for Beginners)”, 베산트 박사의 “바깥뜰(In the Outer Court)”에 있는 상념통제와 인격형성에 관한 뛰어난 여러 장들을 참조하도록 권하고 싶다.

탁월한 “자아 명상(Ego Meditation)”은 J.J. van der Leeuw, LL.D.가 “망명중인 신들(Gods in exile)”라는 훌륭한 소책자의 후기편에서 설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매일 명상하면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일에 그들의 마음을 집중할 때,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그것은 아스트럴계와 멘탈계에서 뿐만 아니라 물질계의 에테르에서도 (힘의) 긴장을 일으키고,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예기치 않은 발전을 가져온다. 이리하여―흔히 있는 경우이지만―우리의 환경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하는 대신에, 물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이 방황하지 않도록 하는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한 명상 집단에서 방황하는 마음은 그 흐름이 깨어져 버려서, 노도같이 움직이는 거대한 상념의 덩어리로서 존재하는 대신 그 명상 집단 안에―강에서 물을 비껴가게 하는 바위들처럼―소용돌이들을 형성할 것이다.

집단적인 감정과 상념이 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것에 대한 단적인 예는 빅토리아 여왕의 60년 기념제이다. 주교 리드비터는 그 행사를 그가 지금까지 본 오컬트적인 힘 중에서 가장 놀랍게 현현한 것 중 하나로 묘사했다. 군중은 아주 의기양양하여 그들의 감정에 의하여 그들 자신들로부터 들어 올려져서 영혼이 엄청나게 고양되는 것을 경험했다. 비슷한 효과가 비록 소규모이지만 집단(그룹) 명상에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명상을 하는데 물리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수 사항들을 고찰할 것이다. 명상시에,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몸은 편안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그리고 몸에 대해서는 잊어야한다. 만약에 몸이 불편하다면, 몸은 잊혀 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항상 몸은 편안해지기 위해서 그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떤 상념들과 감정들이 몸의 특징적인 움직임과 몸짓을 통하여 스스로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그 과정을 역逆으로 돌림으로써 몸의 자세는 여러 가지 (초월적인) 마음과 감정의 상태들을 초래하여, 그 원리들을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학도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대다수의 서구 사람들은 등이 심하게 경사지지 않은 안락의자에 앉는 것이 가장 편안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양손은 마주잡고서 다리위에 놓거나, 양쪽 무릎에 가볍게 놓을 수도 있다. 발은 함께 편하게 놓거나 오른쪽 발을 왼쪽 발 위에 놓고 꼬을 수 있다. 몸의 사지를 이렇게 고정시키는 것은 손가락 끝이나 발 (그리고 그외의 신체 부위) 등으로부터 나가는 자기(磁氣)의 유출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세는 쉬워야 하며 긴장을 풀어야한다. 머리는 가슴으로 내려가서는 안되고 가볍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양 눈과 입은 닫고 (자기 흐름이 많이 흐르는) 척추는 똑바로 세워야 한다.

동양 사람은 대개 바닥이나 낮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 이 자세는 방출된 자기(磁氣)가 보호막 안에서 신체를 빙빙돌아 상승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약간 더 효율적이다 라고 말해진다.

명상 자세를 결정하는데 고려되어야 할 다른 요소는 육체 의식(physical consciousness)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닥에 앉아 있는 인도인은 (의식을 잃을 경우) 몸에 상처를 입지 않고 단순히 뒤로 넘어진다. 의자에 앉아서 명상하는 사람들은, 육체가 의식을 잃는 경우에 의자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안락의자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스럽게 잠으로 떨어지는 경향 때문에 눕는 자세를 채택해서는 안된다.

미리 냉욕(冷浴)이나 활발한 산책을 하는 것은, 두뇌의 활동에 분명히 해가 되는 혈액이 완만하게 순환하는 경향을 극복하는데 유용하다.

깊은 명상과 호흡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상시에 몸이 조화를 이루게 됨에 따라 호흡은 점점 깊어지고 규칙적이며 리드미컬하게 되어 마침내 점차로 아주 느려지고 조용해져서 거의 지각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하타요가는 그 과정을 반대로 하는데 호흡을 아주 섬세하고 또한 정교하게 통제함으로써 신체의 여러 기능들을 조화시키고 마침내 마음의 여러 작용들을 조화시킨다.

그러나 학도는 호흡 수련을 무분별하게 실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명상중에 자신이 행하는 노력들에 의해서 호흡의 자연스러운 효과가 신체에 일어나게 하면서, 하타요가의 방침(가르침)을 따라 상념을 통제하는 것을 배우도록 충고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얼마의 호흡 수련은 매우 위험하지만, 심장과 폐에 부당하게 긴장을 유발하지 않고 상념을 몸의 다양한 센터들 즉 차크람들에 집중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간단하면서도 다소 깊은 호흡을 행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좋은 향香은, 오컬트적인 견지에서 보면 “기운(atmoshpere)”를 정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또한 도움이 된다. 신비 학도는 또한 자기 주위에 있는 아름다운 색채들, 꽃들과 그림들 그리고 마음과 감정들을 고양시키는 다른 수단들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는 또한 어떤 종류의 식사를 금하는 것을 준수하고 건강에 해가 되지 않고 행해질 수 있다면 육식과 술을 삼가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약 알코올이 섭취되면 명상은, 특별히 뇌하수체에 영향을 미치면서 뇌 속에 염증(의 증상)들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잠을 잔 후와, (깬 후에) 부대끼는 세상살이에 뛰어들기 직전에는 욕망들과 감정들이 대개 더욱 고요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이 명상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이다. 그러나 어떤 시간을 선택되더라도, 방해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는 때에 명상을 해야 한다. 더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명상하는 시간대는 항상 같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규칙성이 명상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헌신적인 명상가들에 의해 선택된 시간은, 해뜰 때, 한낮과 해질녘이었는데, 이것들은 자기(磁氣)적으로 보아 가장 적합한 때이다. 하루 중 매시간 종이 울릴 때마다 잠시 동안, 마음을 자기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다는 것을 자각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다. 이것을 실행하면, 소위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부르는 “자아 회상(self-recalledness)”으로 발전하게 되어 학도가 마음을 자동적으로 영적인 상념들로 되돌아가도록 훈련하는데 도움을 준다.

식사를 한 직후에 명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유는 명백한데, 명상이 소화기관에서 피를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명상은 또한 한 밤중에 좋지 않는데, 여러 체들이 피곤하고 에텔체가 쉽게 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는 달의 부정적인 영향이 작용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들이 발생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때때로 명상은 아스트럴적이거나 멘탈적인 나쁜 영향들 때문에 보통 때보다 성공하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어떤 시기에 미치는 혹성의 영향이 다른 때보다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이리하여 한 점성가는 목성이 달과 어떠한 관계를 가질 때 에텔 대기를 팽창시키고 그래서 명상을 더욱더 성공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토성과의 어떤 위치는 에텔 대기를 수축시켜서 명상을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위에 간략히 개요만 설명한 명상체계는 영적이고 멘탈적이며 윤리적인 발달과, 마음 및 감정의 통제를 그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오는” 심령 능력들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명상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충분히 민감한 구조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직관적인 심령능력의 한 형태로 계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직관적인 심령 능력은 사람들과 장소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점차로 민감하게, 또 잠을 자는 동안 아스트럴계에서 경험한 것들을 단편적으로 기억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자아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지도에 대한 더 민감한 감수성에서, 또한 매스터들과 영적으로 개발된 사람들의 영향을 인식하는 능력에서,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도 특출한 방식으로 특출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명상은 결국에는 각성(Illumination)에 이를 수도 있다. 이것은 다음 세 가지 전혀 다른 것들 중에 속한다:

(1) 어떤 주제에 대하여 강하고 조심스럽게 깊게 숙고함으로써 사람은 자신이 직접 그 주제에 대한 어떤 결론에 이룰 수 있다; (2) 그는 자기의 상위의 자아(higher self)로부터 각성(Illumination)을 얻어서, 그의 상위 자아가 그 고유계에서 그 문제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 (3) 상당히 개발되면, 그는 매스터들이나 데바들과도 접촉할 수도 있다. 그가 내린 결론들이 자신의 상념 형태들에 의하여 더럽혀질 수 있는 것은 단지 첫 번째에 한해서 이다. 왜냐하면 상위의 자아는 이것들을 초월하여 있으며, 또한 매스터나 데바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상할 때에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루 종일 행하고 있는 것에 달려있다. 예를 들면,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명상시에 그것들을 피할 수가 없다.

물론, 물리적인 명상은 자아(ego)가 아니라 하위의 여러 체들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다. 명상하는 동안에 에고는 인성을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여긴다. 즉 에고는 대개 약간 경멸적인 태도를 취한다.

만약 어떻게든 자아가 발달이 되면, 자아는 자신의 계(level)에서 명상하겠지만, 물론 그 명상은 인성의 명상과 동시에 일어날 필요는 없다.

명상은 완전한 의식(상태)에서 신체를 떠나는 기술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다. 의식이 흔들림 없는 지속성과 확고부동함에 이르게 될 때, 관심은 외부세계와 몸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철수되고, 감각들이 고요한 상태로 있는 반면에, 마음은 아주 활발하게 작용하지만 내적으로 모든 힘들은 철수되어져서―상념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인―상념이 단 한 점의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표출될 준비가 되어진다. 마음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조용하고도 의지적인 노력으로 비교적 쉽게 이렇게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육체의 두뇌 속에서 (의식이) 작용하는 동안 자신이 도달 가능한 최고의 상념을 넘어 자신을 투사할 수 있고, 그러한 노력을 할 때보다 상위의 의식으로 상승하여, 그 의식과 연합하여, 자신이 몸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 행해질 때, 잠을 잤거나 꿈을 꿨다는 듯한 느낌이 전혀 없으며, 또한 결코 의식을 잃지도 않는다; 자기가 자신의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마치 묵직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벗은 것처럼, 그 사람은 자신이 몸밖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육체로부터 자유를 얻는 다른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면, 무아경에 이를 정도로 헌신을 강도 있게 하든지, 아니면 위대한 스승에 의하여 제자에게 전해지는 특별한 방법들로도 육체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몸으로 되돌아가, 자유로이 다시 그 육체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상황하에서, 그가 겪은 경험들에 대한 기억을 두뇌에 각인 시키고, 육체에 있을 동안에 그 기억을 유지할 수도 있다.

진정한 명상은 반수면 상태와 육체적인 쾌락상태에서 일어나는 행복감이 아니라 불굴의[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강령술에서 일어나는 수동적인 영매상태(mediumship)와 관계가 없고, 사실상 그와 전혀 다르다.

학도는 자기가 영적인 영향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동시에 적극적(positive)이어야한다는 지시에 당황해 할 필요가 없다. 적극적인 노력은 하나의 예비단계로 필요하다. 이것은 상위계의 영향이 아래로 작용할 수 있도록 의식을 상위계들에 이르도록 고양시킨다; 그때, 바로 그때라야만, 이렇게 얻어진 평화를 인식하게 되고, 상향적이고 분투적인 노력을 완화시키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을 영적인 영향력에 개방하는 것”이라는 어구는 높은 영계에서 강하면서도 고요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것은 외관상으로는 수동적이고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가 날개와 날개 끝부분으로 엄청난 노력을 계속하여 유지함으로써 불어오는 강풍에 (균형을 유지하여) 공중에서 떠있는 것과 똑같다.


제 17 장

관조(觀照)


관조(Contemplation)는―우리가 이미 두개를 다룬―세 단계 중 세 번째이다. 세 단계란:

(1) 집중Concentration. ― 주의를 하나의 대상에 고정하는 것

(2) 명상Meditation. ― 단지 그 대상에만 관련해서 의식을 활동하게 하는 것: 즉 가능한 모든 관점에서 그 대상을 보고, 그 의미를 통찰하고 새롭고 깊은 상념에 도달하거나 그 대상에 대한 직관적인 영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3) 관조Contemplation. ― 의식의 저차원적인 활동들이 성공적으로 억압되는 동안, 의식을 그 대상에 활발하게 집중하는 것: 받아들인 영감(light)에 잠시 동안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 그것이 사고(思考)나 명상의 (계통의) 절정에서 집중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힌두 용어에서 그 단계들은 다음과 같이 더 자세히 설명되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

(1) 프라티야하라Pratyâhâra: 감각들의 완전한 통제를 포함하는 예비적인 단계.

(2) 드하라나Dhârâna: 집중(Concentration)

(3) 드햐나Dhyâna: 명상(Meditation)

(4) 사마디Samâdhi: 관조(Contemplation)

드하라나, 드햐나와 사마디는 묶어서 산냐마Sannyama로 알려져 있다.
명상할 때, 우리는 대상과 함께 여러 가지를 관련지어 보거나 또는 비교해서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우리는 대상에 관하여 더 이상 추리하고 논할 수 없을 때까지 이 추리 및 논의 과정을 계속한다: 그 다음에는 주의를 그 대상에 활발하게 기울인 채로, 모든 비교하는 것과 논하는 것을 중지하고 우리에게는 그 대상을 둘러싸는 것 같은 무한(indefiniteness)을 통찰하려고 애를 쓰면서, 그 과정을 억제한다. 이것이 관조이다.

초학도는 명상이 일생을 요하는 하나의 학문(기술)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며 그러므로 그는 초기의 노력에서 순수한 관조의 단계에 도달하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관조란 사고자와 대상이 하나가 되도록, 의식을 한 대상에 유지하여 그것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또한 묘사될 수도 있다.

잘 훈련된 마음이 잠시 동안 한 점의 상태(onepointedness)나 집중을 유지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주의를 어떤 것에도 기울이지 않고서 고정된 주의를 유지하면서 그 대상을 버릴 수 있을 때 바로 그때 관조의 단계에 이른다.

이 상태에서, 멘탈체는 어떠한 영상image도 보여주지 않는다. 멘탈체 자신의 구성 물질(materials)은 어떠한 인상도 받지 않으면서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며 고요한 물같이 완벽하게 조용한 상태로 유지된다. 이 상태는, 화학자가 말하는 “임계(臨界)” 상태 즉 물질의 두 상태 사이의 (변형)점과 같이 아주 짧은 기간 이상은 지속될 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면, 멘탈체가 고요하게 될 때, 의식은 멘탈체로부터 벗어나 “라야 센터(laya centre)” 즉 멘탈체와 원인체 사이에 있는 중간 접촉점들에 들어가고 나온다.

이러한 의식의 이전(移轉)은 일시적인 기절 혹은 의식 상실을 수반한다. 이는 의식의 대상이 사라짐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피할 수 없는 결과로, 그 뒤에 의식이 상위의 체에서 작용하게 된다. 하위 계들에 속하는 의식의 대상들을 내어 버리게 되면 이렇게 상위 계에서 의식의 대상이 뒤이어 나타나게 된다.

그때 자아는 자기 자신의 고상한 상념들에 따라서 멘탈체를 형성하고 자신의 진동들로 멘탈체를 충만하게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계보다 훨씬 더 높은 계들에 대해서 얻은 광경들(visions)을 모방해서 멘탈체를 만들 수 있고, 이리하여 하위의 의식에다가, 모방하지 않았다면, 멘탈체가 반응할 수 없을 개념(관념)idea을 전달할 수 있다.

이것들이, 현란한 빛으로 마음속에 번쩍거리며 들어와서 하나의 세계를 비추는 천재의 영감(靈感)들이다. 세계에 영감들을 전달하는 바로 그 사람 자신도 일반적인 멘탈 상태로는 어떻게 그것들이 그에게 도달했는지를 거의 알 수 없지만 약간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다.

“...내 속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능력이
나의 입술에 살아 있고 나의 손으로 손짓한다.”

모든 교리와 모든 시대에 있어서 성인들의 절정(황홀경)과 환상들도 또한 이러한 성질의 것이다; 이들 경우에서는 오랫동안 몰입하는 기도나 관조가 (이러한 현상들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두뇌의 상태를 낳았다. 감각들이 전달되는 길들은 강한 내적인 집중에 의해 폐쇄되었고 라자 요가 수행자가 심혈을 기울여 도달하려고 애쓰는 것과 똑같은 상태에 가끔씩 무의식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명상에서 관조로의 이전은 “씨앗을 가진” 명상으로부터 “씨앗을 가지지 않은” 명상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그것은 사슬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논쟁에서 마지막 연결 고리에 해당하는 추론의 최고 지점이나 전 (추론) 과정의 중심 상념이나 형상figure위에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씨앗을 가진 명상이다.

그 다음에 학도는 여전히 마음을 얻어진 위치(상태) 즉 도달한 최고의 지점에서 활기차고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모든 것들로 하여금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그것이 씨앗이 없는 명상이다. 침묵과 텅빔 속에서 기다리며 평형의 상태로 계속 있을 때, 그 사람은 “구름(cloud)”속에 있다. 그때, 갑자기 하나의 변화가, 분명하고 불가사의하며 믿을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해탈(illumination)로 이끄는 관조이다.

이리하여, 예를 들면, 한 매스터의 영상을 형성한 후, 이상적인 사람인7 그 매스터에 관한 관조를 실행할 때, 자신을 그 영상의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채우면서 학도는 황홀하게 그 영상을 응시한다. 그리고 나서 매스터를 향하여 자신을 높이려고 애를 쓰면서 그는 자기의 의식을 이상적인 사람에게 고양시키고 그 속에서 흡수되어 그와 하나가 되려고 노력한다.

위에서 언급된 일시적인 기절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마-메가(Dharma-Megha),즉 의(義)의 구름이라 불린다. 서구의 신비주의자들은 그것을 “산 위의 구름(Cloud on the Mount)”, “성소의 구름(Cloud on the Sanctuary)”, “자비의 보좌의 구름(Cloud on the Mercy-Seat)”라 부른다. 그 사람은 홀로 있지는 않지만 (무엇인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느낀다. 곧 구름은 엷어지고 그 다음에 상위 계의 의식이 점점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 전에, 그 사람에게는 바로 자신의 생명이 고갈되고 있는 것 같고, 그가 큰 어둠으로 가득한 텅 빈 곳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고요히 하고 내가 하나님임을 알라(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라는 자아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고, 자아의 영광이 보일 것이다. 구름은 사라지고 자아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명상에서 관조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기 전에, 바라고 희망하는 것은 적어도 수련기간 동안에 전적으로 포기되어야만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카마Kama(욕망)는 완벽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원하는 것들이 마음을 차지하는 동안에, 마음은 결코 혼자가 될 수 없다; 모든 바램은 분노, 불성실, 불순함, 분개함, 탐욕, 부주의함, 불만, 나태, 무지 등등이 생기는 씨앗(근원)이다. 하나의 바램이나 희망이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동안, (진리의) 법칙을 이렇게 위반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다.

바라는 것들, 충족되지 않은 것들이 존재하는 한, 그것들은 사람의 주의력을 분산시킬 것이다; 상념의 흐름(물결)은 언제나 충족되지 않은 욕망들과 우유부단한 사고에 의하여 열려 있는 조그만 협곡들과 수로들 속으로 이탈해서 흐르기를 원하고 있다. 모든 충족되지 않은 욕망, 모든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굶주린 입이 음식을 찾듯이 주의를 끌려고 한다: 일련의 상념이 어려움을 만날 때 이들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한쪽으로 방향을 튼다. 방해를 받은(중단된) 상념의 사슬들을 찾아내면, 충족되지 않은 욕망들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의식적인 활발함이, 어떤 것의 고유 속성(nature)과 계에 속하는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반적인 활발함에 대해서 직각들을 이루며 나아가기 시작할 때 관조 과정은 시작된다: 그러한 움직임은 그것이 존재하는 계들을 (칼로 자르듯이) 가로지르며 보다 정묘한 내부의 속성 속으로 뚫고 들어간다. 비교하는 활동들에 의하여 주의가 부분 부분들로 더 이상 나누어져서 분산되지 않을 때, 회전하는 팽이가 매우 급속하게 움직이는 상태에서 정지된 상태로 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처럼, 마음은 전체적으로 움직이고 아주 고요한 것 같을 것이다.

관조할 때 사람은 대상에 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자아와 대상을 서로 관련된 두개의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관념(생각)을 감정으로 물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초연의 지점에 도달하여 관조는 바로 대상의 내부로부터 시작할 수 있고, 동시에 멘탈적인 열정과 에너지가 모든 상념의 노선을 따라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을 행해야 한다. 의식은, 하늘에 날개를 펴고 있는 새처럼, 앞을 내다보고 결코 뒤돌아 설 생각을 하지 않고서 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

관조할 때 상념은 내부로 들어가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이르게 된다: 비록 무엇인지는 명확히 포착할 수 없지만 뭔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뒤돌아가거나 한쪽으로 돌이키지 않고, 상념은 그 위치에 지속적으로 머물고있다. 이 관조에서는, 물론, 잠이나 멘탈적인 무활동의 성질을 띠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어떤 강한 탐구열 즉 시력이 정상적으로 뚜렷하고 정확하게 유지되는 의식적인 활동이 작용하는 일반적인 하위 영역들에 내려가지 않고, (무한한 속성의) 명확하지 않은 것(indefiniteness) 속에서 명확한 어떤 것을 보기 위한 지속된 노력이 있다.

헌신가는 유사한 방식으로 관조를 실행할 수 있지만, 그의 경우에 활발한 것은 상념(사고)이라기보다는 감정이다.

자기 자신의 내부 속성(본질)nature에 관하여 관조할 때, 학도는 외부의 여러 체들 및 마음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일체성을 거부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속성들을 제거하지 않고 한계들(limitations)을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이) 벗겨 낸다. 마음은 몸보다 더 신속하고 더 자유롭다. 그리고 영은 마음을 능가하는데 그것은 훨씬 더 자유롭고 더 신속하다. 사랑은 어떠한 외부적인 표현에서 보다 마음의 고요함 속에서 더욱 가능하지만, 마음을 능가하는 영에서는 사랑은 신성하게도 확실하다. 이성과 판단은 감각들의 앞뒤가 맞지 않는 (비뚤어진) 증거를 언제까지나 바로 잡는다: 영의 시야는 감각 기관들이나 마음 없이 진리를 식별한다.

이러한 수련들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성공의 비결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충만한 의식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유지하는 동안에 저차원의 활동들을 차단하라. 첫째로, 하위의 마음은 활기를 띠고 깨어 있어야만 한다; 그 다음에 그 마음의 활동은 (그 마음의 활동에 의해서) 얻어진 힘(충동)impetus이 내부에서 고차원의 기능들을 단련시키고 개발하는데 사용되는 동안에는 차단되어야 한다.

고대의 요가학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사고하는 마음의 과정들이 적극적인 의지에 의하여 억압될 때, 상념이 욕망들을 초월하여 그들 가운데서 선정하고, 욕망들이 특별한 행위들과 노력들을 자극하는 것처럼,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일반적인 사고 작용(thinking)을 초월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새로운 의식 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탁월한 의식 상태는 하위의 마음(lower mind)으로서는 묘사될 수 없지만, 그 상태를 달성하는 것은, 모든 교양 있는 사람들이 신체가 활동하고 있을 때조차도 자신들이 신체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과 똑같이, 멘탈 활동이 진행 중 일지라도 사람은 자기가 마음과 상념을 넘어선 어떤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대상들을 식별하고 비교하며 원인(결과)적인 관계를 찾아내는 심혈을 기울이는 과정들을 가진 마음을 벗어난 또 하나의 존재 상태, 아니 이보다는 오히려 생명에 대한 또 하나의 살아 있는 개념이 존재한다. 그 높은 상태는 의식의 활동들이 모든 세속적인 열정과 활기 속에서 그들이 정상적으로 거주하는 더듬는 동굴 생활(groping cave life)을 벗어나게 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그 높은 의식은 조만 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올게 될 때 모든 생활(생명)이 갑작스럽게 변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명상을 함으로써 학도가 영적인 경험을 풍성하게 함에 따라, 그는 의식의 새로운 국면들이 이렇게 점진적으로 그의 내부에서 열리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불타는 열망으로 그의 이상에 집중할(fixed) 때, 그는 곧 자신에게 빛을 비추는 이상의 영향을 의식하게 될 것이고, 그가 헌신의 대상에 도달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할 때, 잠시 동안 바로 하늘 자체의 문들floodgates이 열리고 자신이 그 이상과 하나가 되고 그것을 실현(체득體得)함으로써 나타나는 영광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보다 (유한 계의 틀에 맞추어진) 정형 적인 마음의 형태(형체)들을 초월한 후에, 높이 도달하려는 강한 노력이 행해진다. 그 다음에 인성(personality)의 제한들이 떨어져 나가고 분리의 모든 그림자가 대상과 추구하는 자의 완벽한 연합 속에 사라질 때, 바로 그러한 영의 황홀경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침묵의 목소리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너는 네 자신이 길 그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 위를 여행할 수 없다...보라! 너는 빛이 되였고 너는 소리가 되었고 너는 너 자신의 스승과 신(神)이 되었다. 바로 너 자신이 네가 탐구하는 대상이니라; 끊임이 없는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가 변화 없고 죄가 없이 일곱 목소리가 하나로 된 채로 영원들을 통하여 다시 울린다.”

그러한 경험들을 더 묘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지루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유한계의 틀로) 정형화된 말의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말이란, 순례자가 그의 발걸음을 어디로 향하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도록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것을 향한 길을 가리키는 길잡이로서만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제 18 장


수면 생활


많은 사람들은 잠자려 할 때 정처 없이 떠도는 상념의 흐름들로 인해서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한 경우들에는, 멘탈 보호막이 외부로부터 오는 그러한 상념들로부터 그들을 구해 줄 것이다. 그러한 보호막은 단지 일시적으로 필요할 뿐이다. 왜냐하면 필요한 것은 단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잠들기에 충분한 기간 동안 만큼의 평화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육체를 떠날 때 이 멘탈 보호막을 가지고 갈 것이다. 바로 그때에 멘탈 보호막은 자신의 WORK를 성취할 것이다. 왜냐하면 멘탈 보호막의 유일한 목적은 그로 하여금 그의 육체를 떠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육체에 있는 동안에, 뇌 세포들에 대한 멘탈적인 작용은 그가 쉽게 육체를 떠나지 못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그가 육체로부터 떨어져 있게 되면, 바로 그 동일한 염려나 종잡을 수 없는 상념은 그를 다시 육체로 오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보호막이 깨어질 때, 아무 근거도 없는 상념들이나 정신적인 근심의 흐름은 아마도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물질 육체의 두뇌로부터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이것은 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수면 중에 평범한 사람이나 황홀경에 있는 영적으로 개발된 사람이 멘탈계에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은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삶과 목적의 순수함이 절대적인 선결 조건이고, 심지어 멘탈계에 도달했을 때조차도 실제적인(진정한) 의식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인상을 받아들이는 (수용) 능력만이 있다.

잠자는 동안에 멘탈계에 들어가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를 설명하겠다. 순수한 마음과 아울러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상당한 심령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잠자는 동안 (멘탈계에) 다가가자, 하나의 상념 영상이 그의 마음에 제공되었다. 경건한 영역에 대한 기쁨이 너무 강하고, 영광스러운 장면을 관조contemplation함으로써 일어난 상념들이 매우 고상하고 아주 영적이어서, 잠자는 사람의 의식은 멘탈체 속으로 들어갔다. 즉, 그녀는 멘탈계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녀는 빛과 색채의 바다에서 떠 있었지만, 그녀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상념(생각)에 열중하고 있었고 그 이상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그 상태에 계속 있었지만,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이 경우에, 잠자는 사람이 멘탈계에서 의식이 있는 상태로 있었지만, 멘탈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이와 같은 결과는 이미 어느 정도의 심령적인 발달을 이룬 사람의 경우에 한해서만 가능한 것 같다; (메스메리즘적인) 최면을 당한mesmerized 사람이 황홀한 상태에서 멘탈계에 접촉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상태가 훨씬 더 필요한 것은 명확하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에 대한 이유는 평범한 사람한테는 멘탈체가 별도의 의식의 체로서 사용될 정도로 충분히 개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대 비전 형제단大秘傳兄弟團에 속하는 스승들에 의하여 멘탈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훈련을 받아온 사람들에 의해서만 하나의 체로써 사용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제 14장에서 언급한 것 즉 제 1비전 때까지, 사람은 밤에 자기의 아스트랄체로 활동한다는 내용을 되풀이해야겠다; 그러나 아스트럴체가 완벽하게 통제되고 그가 충분히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마자, 멘탈체로서의 활동이 시작된다. 이제 이 멘탈체가 완벽하게 조직화될 때, 멘탈체는 아스트랄체보다 훨씬 더 유연한flexible 체가 되며, 아스트랄계에서 불가능한 많은 것이 멘탈체로 성취될 수 있다.

비록 사후에 사람이 천계天界 즉 멘탈계에 살 수도―우리가 이후의 몇 장에서 볼 것이지만―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상념들로 이루어진 보호막 속에 갇혀 있다; 이것은 멘탈계에 작용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멘탈계에서 자유로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관찰하는 능력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멘탈체로 자유로이 작용할 수 있는 사람은 멘탈계의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을 소유하게 되며 아스트랄계에 활동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에게 엄청나게 놀라운 지식의 전경前景을 열어주고 실제적으로 실수를 거의 불가능하게 하는 훨씬 더 포괄적인 멘탈 감각을 소유한다.

멘탈체로 작용하고 있을 때, 사람은 자기의 아스트랄체를 육체와 함께 뒤에 남겨둔다; 만일, 그가 어떠한 이유로 아스트랄체에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한다면, 그는 자신의 아스트랄체를 부르지 않고 단 한번의 의지 작용에 의하여 일시적인 필요를 위하여 하나의 아스트랄체를 현현顯現시킨다. 그러한 아스트럴체의 현현은 마야비루파라 불리고, 처음에 그것을 형성하는데는 대개 자격 있는 매스터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주제는 다음 장에서 우리가 다룰 것이다)

수면 생활sleep-life이 유용하게 즉,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 물론 그 방법은,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밤은 상담을 가지고 온다(The night brings counsel)”라는 속담 속에 표현되어 있다. 해결해야할 문제를 잠자러 갈 때 조용하게 마음속에 간직해야만 한다; 그것은 토론이 되거나 논의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잠이 방해받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단지 마음에 기억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면, 잠자는 동안에 사고자the Thinker가 물질 육체와 두뇌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그는 그 문제를 택하여 다룰 것이다. 대개 사고자思考者는 (물질) 두뇌에 그 해결책을 인상 지워서, 그가 잠을 깰 때 그것이 의식 속에 있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즉시로 그 해결책을 메모하기 위하여, 잠자리에 종이와 연필을 놔두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얻어진 상념이 물질계로부터 쇄도하는 자극에 의하여 아주 쉽사리 지워지고 쉽사리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 19 장

마야비루파


마야비루파MAYAVIRUPA란 말 그대로 “환영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멘탈체로 작용할 수 있는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질 수 있는 일시적인 아스트럴체이다. 그것은 육체를 닮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것에 주어지는 형태는 그것이 투사投射되는 목적에 맞게 적합하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질계에 자유로이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점에서 물질계의 존재와 같이, 눈에 보일 수 있고 대화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따뜻하고 단단한 느낌이 들어 육체와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마야비루파를 사용하는 이점은, 아스트럴체가 아스트럴계에서 매혹적인 것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아스트럴계의 매력도 마야비루파를 압도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떠한 아스트럴계의 환상도 마야비루파를 속일 수 없다.
마야비루파를 형성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즉각적으로 멘탈계로부터 아스트럴계로 지나가고 다시 아스트럴계에서 멘탈계로 나아갈 수 있고, 항상 멘탈계의 더 큰 능력과 더 예리한 지각知覺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아스트럴계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를 원할 때만 아스트럴적인 현현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가 아스트럴계에서 일을 마칠 때 그는 다시 멘탈계로 철수하고, 마야비루파는 사라지며 그 구성 질료들은 아스트럴 질료의 일반적인 순환―신비 학도의 의지에 의하여 끌려왔던 그 원천―으로 되돌아간다.

마야비루파에 있을 때, 사람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 관한 한 상념 전이라는 멘탈계의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상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전달력은 다른 사람의 아스트럴체의 발달 정도에 의하여 제한된다는 것은 물론이다.

매스터가 먼저 그의 제자에게 마야비루파를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 후에, 처음에는 쉽지 않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있다.

제 2비전 후에, 멘탈체의 발달과 더불어 영적인 진전(성장)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제자가 마야비루파를 사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바로 이때쯤이다.


제 20 장

데바찬: 원리들

아스트럴계에서 보내어지는 사후의 삶의 첫 부분은 이미《아스트럴체The Astral Body》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스트럴체를 아스트럴계에 남겨두고, 사람이 자신의 의식을 멘탈체 속으로 끌어올려 즉 자신이 멘탈계로 “상승”하여, 이른바 천계(天界, heaven world)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우리의 연구를 시작한다. 이것은 신지학자들에 의하여, 문자 그대로 빛나는 나라Shining Land를 의미하는 데바찬Devachan이라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불린다; 그것은 또한 산스크리트어로는 데바스단Devasthân 즉 신들의 나라Land of the Gods라고 불린다. 그것은 힌두인의 스바르가Svarga이며 불교도의 수카바티Sukhâvati이고 조로아스터교도와 기독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의 천국天國Heaven이다. 그것은 또한 “보통 사람들의 니르바나”라 불려왔다. 데바찬의 기본 원리는 데바찬이 상념想念의 세계라는 것이다.

데바찬에 있는 사람은 데바차니devachanî로 묘사된다.

고대의 책들에서, 데바찬은 인간의 진화를 감독하는 위대한 영적이고 지성적인 존재들(spiritual Intelligences, 理智靈)의 작용에 의하여 모든 슬픔과 악이 배제되는 멘탈계 중 특별히 보호받는 한 지역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인간이 그의 물질계에서의 삶의 결실들을 평화적으로 동화시키는 지극히 복된 안식처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데바찬은 멘탈계의 예비된reserved 지역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곧 살펴보겠지만,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의 보호막shell 안에 자신을 가두어버려서, 멘탈계의 삶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곳이다; 아스트럴계에서처럼, 그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교제할 수가 없다.

소위 데바찬의 인위적인 보호를 거기에 있는 각 개인을 둘러싸는 만(灣, gulf)으로 여기는 또 하나의 (표현)법은, 물론 카마적 질료 즉 아스트럴 질료 전부가 파도에 쓸려나가 버리듯이 사라지고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하위 세계들에 있는 어떤 것에도 반응할 수 있는 수단(vehicle, 體) 즉 의사소통의 매체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는 이러한 하위 세계들은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스트럴체로부터 멘탈체를 최종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전혀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다; 사실상, 보통 사람이 그 (분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은 어쨌든 불가능하다; (그러한 순간에) 그는 단순히 그 자신이 즐거운 휴식 속으로 평온하게 빠져드는 것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 뒤에 나타나는 것과 유사한, 멍한 무의식 기간이 존재한다; 그 기간은 폭넓은 범위 안에서 다양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은 거기서 서서히 깨어난다.

이 무의식의 기간은, 출생 전의 육체적인 삶(胎兒)에 해당하며 데바찬에서의 삶을 위하여 데바찬의 자아ego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잉태기간인 것 같다. 그 기간의 일부분은, 미래를 위하여 앞으로 가져가야 할 모든 것(아스트럴 질료)을 아스트럴계의 영원한 원자로써 흡수함에 의해서 생기는 것 같고, 또다른 일부분은 다가오는 (멘탈체의) 개개의 독립된 삶을 위하여 멘탈체의 질료에 생기를 불어넣는 데 사용되는 것 같다.

두 번째 죽음 후에 사람이 다시 깨어날 때, 그의 첫 번째 감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극한 축복감과 활력감, 즉 지복至福의 기쁨을 느껴서 그는 현재 단지 살아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한 지극한 축복은 그 체계의 모든 상위계에 있어서 삶의 본질이다. 심지어 아스트럴계의 삶조차도 우리가 물질계에서의 삶에서 알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천계의 삶heaven-life은 그 축복에 있어서 아스트럴계의 삶에 비할 바가 못된다(천계의 삶이 훨씬 더 축복으로 가득차 있다). 각각의 상위의 계에 있어서, 똑같은 경험이 되풀이되는데, 각각은 하위의 계에서 겪는 경험을 훨씬 능가한다. 이것은 축복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지혜와 시야의 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천계의 삶은 아스트럴계의 삶보다 훨씬 더 충만하고 폭이 넓어서, 그들 사이의 어떠한 비교도 불가능하다.

잠자는 사람이 데바찬에서 눈을 뜨게 됨에 따라, 아주 정묘한 색조色調가 열리는 그의 눈에 들어오고, 바로 그 공기가 음악과 색채인 것 같고, 전 존재가 빛과 조화로 충만하다. 그 다음에 황금색의 아지랑이를 통하여, 하위세계의 곤란한 일들과 정욕에 손상되지 않은 채 가장 고상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감정들을 표현하는 아름다움으로 영묘화靈妙化된, 자신이 지상에서 사랑한 사람들의 얼굴들이 나타난다. 아마 어떠한 사람도, 깨어나서 천계로 들어가는 (순간의) 지극한 축복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 천계에서의 삶의 주된 특징이다. 그것은 악惡과 슬픔이 그 세계에서는 본질상 불가능하거나 모든 피조물이 거기서 행복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거기에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적인 축복을 향유하고 있는 세계, 다시 말해서 그의 열망에 대해서 반응하는 (상위의) 권능은 자신이 열망하는 능력(의 정도)에 의해서만 제한 받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주적 기쁨이 압도적으로 존재한다는 느낌은 데바찬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서 결코 떠나지 않는다; 지상에 있는 어떤 것도 그와 같지 않으며, 아무것도 그것을 모방할 수 없다; 천계의 이 엄청난 영적인 활력spiritual vitality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천계를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이 행해졌지만, 천계가 본질적으로 물질계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실패하게 된다. 이리하여 불교와 힌두교 투시가들은 보석으로 된 열매들jewelled fruits을 가진 황금과 은으로 이루어진 나무들에 관하여 말한다; 거대하고 웅장한 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유대의 서기관書記官은 금과 은으로 이루어진 거리들에 관해 말했다; 더욱 현대적인 신지학 저술가들은 일몰日沒의 색깔들과 바다 및 하늘의 영광스러운 풍경들로부터 자신들의 비유들similes을 끌어낸다. 각자가 똑같이, 자기 마음에 익숙한 그러한 직유법적인 비유들을 사용함으로써, 너무나 웅대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생생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한다.

멘탈계에 있어서 사람이 겪는 상황position은 아스트럴계에서(의 상황과는) 크게 다르다. 아스트럴계에서는, 수면 중에 습관적으로 사용했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철저히 익숙한 (아스트럴)체를 그는 사용했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멘탈체를 그가 결코 사용한 적이 없었으므로, 멘탈체는 결코 충분히 발달되어 있지는 않다. 이리하여, 멘탈체는 그로 하여금 그 주변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대신에 그 세계로부터 그를 상당히 차단시키게 된다.

아스트럴계에서 그가 (본성을) 정화시키는 삶을 사는 동안에, 그의 본성의 하위 부분은 불타 없어진다; 지금은 보다 고상하고 보다 세련된 상념들 즉 그가 지상에 사는 동안에 (마음에) 품었던 고상하고 이기심없는 열망들만이 그에게 남아있다.

아스트럴계에서는, 비록 분명히 제한적일지라도, 그는 비교적 즐거운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그 속죄贖罪의 삶에서 상당히 고통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바찬에서는, 전적으로 이기심이 전혀 없는 그러한 상념들과 감정들만의 결과들을 거두어들인다; 그러므로 데바찬의 삶은 지극한 축복이 될 수밖에 없다.

한 매스터가 말한 바와 같이, 데바찬은 “눈물이 없고 한숨이 없는 나라(land)이며 결혼하는 것도 결혼에 종속되어지는 것도 없는 나라이며 정의로운 자들이 그들의 충만한 완전성을 온전히 깨닫는 곳이다.”

데바차니devachanî 주위로 밀집한 상념들은, 일종의 껍질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는 이 정묘精妙한 질료로 어떤 유형들의 진동에 반응할 수 있다. 이러한 상념들은, 그가 천계의 무한無限한 부를 끌어들이는 (매체로서 이종의) 능력들이다. 그 상념들은 그가 천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내다 볼 수 있고 또한 외부의 힘들로부터 반응이 그에게 올 수 있는 (통로인) 창문들로서 역할을 한다.

가장 원시적인 상태를 벗어난 모든 사람은, 그의 전 일생 중 단 한번일지라도, 순수하고 사심없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그에게 하나의 창문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념의 껍질을 하나의 한계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상념의 껍질의 역할은 사람을 멘탈계의 진동들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식 능력의 한계 내에 있는 그러한 (멘탈계의 진동에 대한) 영향들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멘탈계는 (우리가 제 27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신성한 마음Divine Mind의 하나의 반영 즉 무한히 큰 하나의 창고이다. 거기서부터 천계의 삶을 향유하는사람이, 물질계 및 아스트럴계의 삶 동안에 발생한 자신들의 상념들과 열망들의 힘에 정비례해서 그 결과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보다 상위의 천계에서는, 이러한 한계들이―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당장은 한계라고 부를 수 있다면―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상위의 계에 대하여는 우리가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각 사람은 천계의 삶에 접근하여, 사전事前의 노력으로 자신이 (받을) 준비를 한 만큼만 천계에 관하여 인식할 수 있다. 동양의 비유가 말하는 바와 같이,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그릇을 가지고 온다; 어떤 그릇은 크고 어떤 그릇은 작다. 그러나, 크든지 작든지 간에, 모든 그릇은 (채울 수 있는 만큼) 가득 채워진다; 지극한 축복의 대양大洋은 모든 그릇을 채우고도 남는다.

일반인은 이 멘탈계에서 결코 크게 활동할 수가 없다; 그의 상태는 주로 수용적이고, 그 자신의 상념막 외부에 있는 어떠한 것에 대한 그의 시각vision은 가장 제한된 성격을 띤다. 그의 상념들과 그의 열망들이 단지 어떤 경향들lines을 따라서만 있기 때문에, 그는 갑작스럽게 새로운 경향들을 형성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는 주위의 많은 살아 있는 힘들 혹은 멘탈계의 힘있는 천사로서 알려진 주민들angelic inhabitants로부터 거의 이득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이러한 존재들 중 다수가 사람의 어떤 열망들에 쉽게 반응을 할지라도.

이리하여 지상에서의 삶 동안에 주로 물질적인 것들에만 주의注意해온 사람은, 자신이 (홀연히) 소속된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창문을 별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흥미가 예술이나 음악이나 철학에 있었던 사람은, 측량할 수 없는 기쁨과 무한한 가르침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득을 볼 수 있는 정도는, 단지 그 자신의 지각능력에만 달려있다.

오로지 (일생동안 품고 있던) 고상한 상념들이 애정愛情과 헌신獻身에 연관된 상념들을 가진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타인을 깊이 사랑하거나 어떤 인격적인 신(神, a personal deity)에 대하여 헌신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은, 친구나 신에 대한 강한 멘탈적인 이미지를 만들게되고, 그와 더불어 그 멘탈 이미지를 필연적으로 멘탈계 안으로 가지고 오게 된다. 왜냐하면 그 멘탈적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소속되는 것은 바로 그 이미지에 맞는 멘탈적인 질료의 계에 속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의 중요하고 흥미로운 결과가 뒤따른다. 그 이미지를 형성하고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랑은 매우 강력한 힘이다. 사실상 상위 멘탈계에 존재하는 친구의 자아에 도달하여 작용할 정도로 충분히 강한 힘이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은 진정한 사람은, 물론, 그를 아주 부분적으로 표현하는 육체가 아니라 자아ego이기 때문이다. 그 진동을 느끼는 친구의 자아는, 즉시 그리고 열심히 그 진동에 반응하며 자신을 위하여 만들어진 상념형태 속으로 자신을 쏟아 넣는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친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실제적으로vividly 그와 함께 있게 된다.

그 친구가 (육체적인 죽음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는) 소위 살아 있든지 아니면 죽었든 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육체 속에 때때로 갇히는 친구의 일부분(단편)이 아니라, 자신만의 진정한 계에 있는 그 사람 자체(의 영혼)에 대하여 호소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항상 반응한다; 그리하여 백 명의 친구를 가진 사람은 그들 각각의 애정에 대하여 동시적으로 그리고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데, 이는 하위 계에서 아무리 많은 표현을 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는) 자아의 무한함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한히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늘들”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이리하여 천계의 삶을 사는 각 사람은, 그가 교제하기를 바라는 모든 친구들에 대한 활성화된vivified 상념형태들을 자신의 주위에 가지고 있게 된다. 더군다나, 그 상념형태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항상 최고의 상태에 있는데, 이는 자기자신이 진정한 계(상위 멘탈계)에 있는 친구들의 자아가 현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인 상념형태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멘탈체25편

제한된 물질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친구를 우리가 물질계에서 알고 있는 제한된 현현으로만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한편, 천계에서 우리는 이제까지 지상에 있었을 때 보다 우리의 친구들의 실재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간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있는 이 물질계는 자아 자신의 집에 더 가까운 (그 집에서) 두개의 단계나 또는 계보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후 멘탈계에서의 삶과 아스트럴계에서의 삶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아스트럴계에서 우리는 (친구들의 신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그들의 아스트럴체로 친구들을 만난다; 즉,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인성들personalities을 만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 멘탈계에서는 우리는 그들이 지상에서 사용하는 멘탈체들로서 친구들을 만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들의 자아는 자신들을 위하여 전혀 새로운 별도의 멘탈체들을 형성하여, 인성들의 의식이 아니라 자아들의 의식이 이 멘탈체들을 통하여 작용한다. 이리하여 우리의 친구가 행하는 멘탈계의 활동들은 그들의 물질계의 삶들의 인성들이 행하는 활동들과는 모든 점에서 전적으로 별개가 된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인성人性에는 닥칠 수도 있는 어떠한 슬픔이나 곤란(장애)은, 그의 자아가 또 하나의 멘탈체로 사용하고 있는 그의 상념형태thought-form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만일 그러한 일이 일어날 때 그가 인성의 슬픔이나 곤란에 대하여 실제로 알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곤란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원인체에 있는 에고의 관점으로 보아, 그것을 배워야 할 하나의 교훈이나 해결되어야 할 어떤 카르마로 간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에서 볼 때, 어떠한 현혹(미혹)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현혹된 견해란 다름 아닌 하위 인성의 견해이다; 왜냐하면 인성이 곤란한 것(장애)들이나 슬픔들로 보는 것은 원인체에 있는 진인眞人에게는 상향적인 진화의 도상에서 (나아갈) 단계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데바찬에 있는 사람은 물질계에 있는 친구들의 인성적인 삶들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소위 메커니즘적인 이유를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이러한 결론에 대한, 마찬가지로 설득력 있는, 다른 이유들이 또한 존재한다. 왜냐하면 데바찬에 있는 사람이 (물질계로) 되돌아보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슬픔이나 고통 중에 있거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가 행복하게 되는 것은 명백히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바찬에서는 공간이나 시간으로 인한 분리는 이리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단어나 상념에 대한 어떠한 오해도 발생할 수 없다. 반대로, 지상에서의 삶의 경우보다 영혼과 영혼끼리 훨씬 더 긴밀한 교제가 존재한다. 멘탈계에서는 영혼과 영혼 사이에 어떠한 장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의 삶의 실재에 정확히 비례하여, 데바찬에서 영혼의 교제가 존재한다. 우리 친구의 영혼은, 그의 영혼과 우리의 영혼이 동조된 진동으로 떨릴 수 있는 바로 그 정도로, 우리가 창조한 그에 대한 형상으로서 살아 있다.

우리는 지상에 있을 때 유대관계가 단지 육체와 아스트럴체적이었던 사람들과는 접촉할 수 없다. 즉 그들과 우리가 내적인 삶에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들과 접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데바찬에서는 어떠한 적도 들어올 수 없다. 왜냐하면 단지 마음과 가슴이 동조(진동)하는 조화만이 천계에서는 사람들을 함께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훨씬 진화한 사람들과는, 우리가 그들에게 반응할 수 있는 한도에서만 접촉한다. 우리보다 덜 진화된 사람들과는, 그들의 능력의 한계에 따라 우리가 교제할 수 있다.

신비학도는 욕망 엘리멘탈이 사후에 가장 조밀한 질료를 바깥에 두면서 동심원적인 질료의 층들로 아스트럴체를 재배열하여, 그의 아스트럴체의 제일 바깥 층의 질료가 소속되는 아스트럴계의 하부계에 그 사람을 국한시킨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멘탈계에서는 이에 상응相應하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멘탈 엘리멘탈은 욕망 엘리멘탈에 의해서 채택된 방식으로는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아스트럴계의 삶과 멘탈계의 삶 사이에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멘탈계에서 사람은 다양한 계level들을 차례로 경험하지 않고, 자기의 발달정도에 가장 잘 상응하는 계에 직접적으로 끌려간다. 그 계에서 그는 멘탈체로 살아가는 그의 삶을 전부 보낸다. 그 삶의 종류는 무한한데, 이는 각 사람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기 때문이다.

데바찬 즉 천계에서, (지상에서의 삶이) 막 끝난 사고자(思考者, the Thinker)의도덕적 및 멘탈적 경험들에서 귀중한 모든 것이 드러나고, 명상되어지고, 점차로 명확한 도덕적 및 멘탈적 능력으로 즉 그가 다음에 화신Incarnation할 때 그와 더불어 가지고 갈 능력들로 변형된다. 그는 과거의 실제적인 기억을 멘탈체 속에 담아두지 못한다. 왜냐하면 멘탈체는, 우리가 나중에 당연히 살펴보겠지만, 해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은, 과거를 통해 살아 왔고 (지금도) 살아가는 바로 사고자思考者의 내부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에 경험한 여러 사실들은 능력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만일 사람이 (무엇인가를) 깊이 연구해 왔다면 그 연구의 결과로 (그가) 연구(한 내용이) 그에게 첫 번째로 제시될 때 그 주제를 습득하고 통달하는 특별한 능력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러한 연구 방향에 대하여 특별한 소질을 가지고 태어나서 아주 용이하게 그것을 소화할 것이다.

지상에서 생각되어지는 모든 것이 이렇게 데바찬에서는 활용된다; 모든 열망은 능력으로 완성된다; 좌절로 끝난 모든 노력들은 재능과 능력들이 된다; 투쟁들과 패배들은 승리의 도구들로 차차 변형될 재료들로 다시 나타난다; 지혜롭고 잘 통제된 의지들로 완성될 슬픔과 잘못들은 귀금속들처럼 찬란한 빛을 발한다. 성취하는 데 필요한 능력과 기술이 과거에는 부족했던 선행을 베풀고자 하는 계획들은, 데바찬에서 상념으로 성취되는데 말하자면 단계적으로 실행된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힘과 기술은, 지상에서 나중의 삶에 사용되어질 마음의 재능들로서 발달하게 된다.

데바찬에서는, 한 매스터가 말한바와 같이, 자아는 “모든 지상의 인성으로부터 도덕적 자질(특성)들과 의식의 넥타(정수, 감로)만을” 모은다.

데바찬 기간 중에 자아는 경험의 축적 즉 막 마친 지상에서의 삶의 수확을 검토하여, 그 경험들을 나누고 분류하여 동화시킬 수 있는 것을 동화시키고 무력해지고 쓸모 없는 것을 거부한다. 자아가 지상의 삶의 소용돌이에 항상 바쁘지만 않는 것은, 노동자가 항상 재료를 모으기만 하지 않고 때때로 그들로부터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과 똑같다. 혹은, 사람이 항상 음식을 먹기만 하지 않고 신체조직을 형성하기 위하여 음식을 소화하여 동화시키는 것과 같다. 이리하여 데바찬은, 우리가 나중에 보겠지만,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의 계획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데바찬의 속성(본질)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로 인하여, 때때로 사람들은 하위의 천계에 있는 일반 사람의 삶은 단지 하나의 꿈과 환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 가운데서 행복하다고 상상하거나 기쁨이 충만하고 성공적으로 그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고 상상할 때, 그는 사실 지독한 착각의 희생자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실재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견해로부터 기인한다. 신비학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육체 속에서 살 때에조차도 그들의 멘탈 삶에 대하여 거의 깨닫지 못하여, 그들이 육체 밖에서 멘탈적인 삶에 대한 모습이 제시될 때 그들은 모든 현실감을 잃어버리고 그들이 마치 꿈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느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물질계의 삶은, 비록 적합하지는 않지만 실재한다는 점에 관해서는, 멘탈계에서의 삶과 비교가 된다.

일반적인 지상에서의 삶 중에, 자기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일반 사람의 개념은 아주 많은 점에서 불완전하고 부정확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면, 그는 자기가 보는 모든 것의 이면에 놓여 있어, 사실상 단연코 모든 것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에텔적, 아스트럴적 및 멘탈적인 힘들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그의 전 시야는, 그의 감각들과 지성과 교육과 경험으로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한 적은 부분의 대상에 제한되어 있다. 이리하여 그는 거의 대개 자기 자신이 직접 창조한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는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러한 관점에서, 일반적인 물질계의 삶은 적어도 데바찬에서의 삶만큼 환영적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하면 물질계의 삶이 실제로는 훨씬 더 환영적이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왜냐하면, 데바찬에 있는 사람이 그의 상념들을 실제적인 것들로 생각할 때, 그는 완전히 옳다; 그 상념들은 멘탈계에서는 실제적인 것들인데, 이는 멘탈계에서는 상념만이 실제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란 멘탈계에서는 우리가 본성으로 이 위대한 사실을 깨닫지만, 반면에 물질계에서는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멘탈계와 물질계) 둘 중에서 환영이 물질계에서 더 크다고 당연히 말할 수가 있다. 사실, 멘탈적 삶은 감각들로 이루어진 물질계의 삶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생생하며 실재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한 매스터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사후의 삶을 유일한 실재로 부르고, 인성자체를 포함한, 지상에서의 삶을 단지 환영적이라고 부른다.” “데바찬의 존재를 전통적인(관습적인) 용어가 뜻하는 의미와는 다른 어떠한 다른 뜻으로 ‘하나의 꿈’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진리의 유일한 수호자인 비전적인 가르침Esoteric Doctrine에 대한 지식을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삶에 대해서 현실감(실재감)을 느끼고 우리가 데바찬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을 때 비현실감을 느끼는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지상에서는 삶의 환영들에 완전히 좌우되어 내부로부터 지상의 삶을 보는 반면에, 우리가 (데바챤을 듣는) 그 순간운 그 데바챤의 삶이 지닌 특별한 정도의 마야나 환영을 겪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외부(물질계)로부터 데바찬을 응시(관조)하기 때문이다.

데바찬 자체에서는, 그 과정은 역전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주민들은 그들 자신의 삶이 실제적인 삶으로 느끼고 지상에서의 삶은 가장 명백한 환영들과 오해들로 가득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체로, 데바찬에 있는 사람들이 지상의 삶을 영위하는 물질계의 비평가들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 그러나 물론 지상의 환영들은 줄어들지라도, 하위의 천계들에서의 접촉은 더욱 실제적이고 더욱 직접적이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전적으로 (환영들을) 피할 수는 없다.

보다 일반적 용어로 말하면, 사실은 우리가 존재의 계들을 통하여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우리는 실재에 더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들이 상대적으로 실제적이고 지속적이지만, 물질적인 것들은 환영적이고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신비학도는 이러한 생각을 따르는 것이 도움이 되고, 데바찬에서의 삶을 물질계와 아스트럴계에서 더 일찍이 보내어진 삶의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결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품고 있는 최고의 이상들과 열망들은 물질계에선 결코 실현되지 않으며, 또한 물질계에서 실현될 가능성들이 적고 물질계의 질료가 비교적 조잡하기 때문에 물질계에서는 실현될 수도 없다.

그러나 카르마의 법칙 (또 다른 표현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 알려져 있다)에 의하면, 어떠한 힘도 결코 상실되거나 그 (힘에 의해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가 없어 질 수가 없다; 그 힘은 당연하고 충분한 결과를 필연적으로 초래한다. 그리고 기회가 올 때까지, 그것은 그 (기간) 만큼 축적된 에너지로서 남아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차원적인 영적인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지상의 삶에서는 당연한 결과를 가져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육체보다) 고차원적인 그의 본질들은 사람이 육체의 압박(속박)incubus으로부터 벗어날 때까지는 아주 섬세하고 정묘한 진동들에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계의 삶에서 처음으로, 이 모든 장애는 제거되고, 축적된 에너지가 카르마의 법칙이 요구하는 필연적인 반응으로 쏟아져 나온다. “지상에서는 단절된 부분적인 호들, 천계에서는 하나의 완벽한 원”이라고 브라우닝은 말한다. 그러므로, 완벽한 정의가 행해지고, 비록 물질계에서는 많은 것이 목표를 벗어나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 같을 지라도 아무것도 결코 상실되지는 않는다.

이리하여, 데바찬은 하나의 꿈이나 목적없이 게으름피우는 도원경桃源境lotus-land이 결코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곳은 지성과 감성이 조잡한 질료나 사소한 염려들에 의하여 방해를 받지 않고 발달하고, 지상에서의 삶의 투쟁들을 위하여 무기들이 연단(주조)되는 곳으로서 사실상 미래의 진보가 확보되는 나라, 오히려 하나의 존재 상태이다.

신비학도는 또한, 사후의 삶을 계획해 온 자연의 체계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최대한도로 행복하도록 하는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체계라는 것을 지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천계의 즐거움이 (어떤 정통주의 이론들에 따르는 것처럼) 단지 하나의 특별한 유형에만 속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천계에 지루함을 느끼고, 어떤 사람들은 그 (천계의) 특별한 성향에 대한 취향의 부족하거나 필요한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곳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선장 스톰필드의 천국 방문》에서, 마크 트웨인은 천계에 대한 진부한 개념으로 (사람이 생각하기에) 그곳에 영원히 거주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을 하여, 우연히도 심오한 종교 및 철학 문제들에까지도 유머스러운 분석을 적용한 전형적인 예를 제공한다.

우리의 본 주제로 돌아가서, 친척들과 친구들에 대한 어떤 다른 결론arrangement이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울 수가 있을까? 만일 죽은 사람들이 지상에 있는 친구들의 우여곡절의 운명을 (눈으로) 뒤따르도록 허용 받는다면, 행복은 그들에게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자기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서 그들이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친구들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고통스러운 공백 기간이 있을 것이다. 그 기간은 종종 수년으로 연장되지만, 많은 경우에는 친구들이 아주 변한 상태로 도착하여 더이상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이 모든 어려움들을 피하여 왔다. 각 사람은 지상에서의 삶 중에 그 자신이 직접 만든 원인들에 의하여, 천계에서의 삶의 길이와 특성 둘 다를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특성들idiosyncrasies에 가장 적합한 기쁨의―자신이 당연히 받을―양과 질을 정확하게 가질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함께 있으며, 항상 그들은 최고로 고상한 상태와 최고로 좋은 상태로 그와 더불어 있다; 어떠한 불협화음이나 변화라도 그들 사이에 전혀 들어 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그들로부터 정확히 그대로 받기 때문이다. 사실상, 자연의 방법은 인간의 재치나 상상으로 지금까지 대체할 수 있게 (고안한) 어떤 것보다도 극히 탁월하다.

아마도 물질계에서는, 멘탈체를 입고 있으며 물질적인 체physical vehicle에 속박되지 않은 사고자思考者에 의해 행사되는 능력들의 창조적인 속성을 깨닫는 것은 어렵다. 지상에서, 예술가는 탁월하게 아름다운 광경들을 창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지상의 재료들로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할 때 그는 그것들이 그의 멘탈적 개념들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데바찬에서는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마음이 정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정상적으로 작용하는 매체이며 모든 멘탈적인 자극에 반응하는 매체인, 마음을 형성하는 질료Mind-stuff 그 자체의 대단히 정묘한 질료로부터 (원하는) 형태로 즉시 재현된다. 이리하여 데바찬에서는 사람의 주위에 있는 환경의 아름다움은, 그의 마음의 풍성함과 에너지에 따라 무한히 증대된다.

신비학도는 멘탈계가, 물질계에 화신하는 사이의 중간 기간들에서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생한 삶이 영위되는 광대하고 찬란한 세계라는 것을 깨닫고자 애써야만 한다. 우리로 하여금 최고의 천계의 모든 영광이 지금 여기 (바로)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과 그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영향력들이 우리가 단지 그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작용한다는 것을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단지 우리의 영적인 발달의 부족 즉 육체에 의해 강요되는 제한들 때문이다. 불교의 스승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네가 너의 눈으로부터 안대眼帶를 벗어 던지고 보기만 하면, 네 주위 모든 곳에 빛이 있다. 그것은 아주 놀랍고, 아주 아름다우며, 어떠한 사람이 꿈을 꿔왔거나 기도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며, 그것은 영원 무궁토록 존재한다.”(한 민족의 영혼 p.163)

달리 말하면, 데바찬은 의식의 한 상태이며, 그의 영혼을 감각들로부터 철수시키는 것을 배운 사람에 의해서는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데바찬이 각 지상에서의 삶에 대한 관계는 니르바나가 윤회가 완성된 주기에 대한 관계와 같다고 생각해도 좋다.


제 21 장

데바찬: 그 기간과 강도

(* 표 2개는 삽입을 못하였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연옥과 천국을 만든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여러 의식 상태 중 어느 것도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한한 원인은 무한한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물질계, 아스트럴계 그리고 멘탈계에서 각각 보내는 기간은 진화 정도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난다. 원시인은 사후에 단지 몇 년만을 아스트럴계에 보내면서, 거의 물질계에만 산다. 그가 발전함에 따라 아스트럴계의 삶은 기간이 더 길어지고, 지성이 펼쳐짐에 따라 그는 또한 멘탈계에서 약간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문명화된 인류의 평범한 사람은 물질계와 아스트럴계보다 멘탈계에 더 오랫동안 머무른다. 사실, 사람이 진화를 많이 하면 할수록 아스트럴계의 삶은 더 줄어들고 멘탈계의 삶은 더 길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화의 가장 초기의 단계를 제외하고는, 사람은 멘탈계에서 훨씬 더 많은 생애를 보내게 된다. 곧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정신적인 발달이 아주 미미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물질계와 멘탈계의 삶의 비율은 1 : 20 이상은 드물고, 꽤 발달한 사람의 경우에는 비율은 때때로
1 : 30 정도 된다. 신비학도는 진정한 인간 즉 자아의 참된 집은 멘탈계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각각의 화신은―무한한 진리의 길로 가는 중―그의 경력에서 중요하더라도 일시적인 사건일 뿐이다.

뒤에 나오는 표들은, 관련된 사람의 부류에 따라 아스트럴계, 멘탈계와 원인계에서 보내는 평균 기간과 더불어 물질계에 화신하는 사이의 기간에 대한 평균 시간을 나타낸다.

신비학도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사회적인 계층(지위)에 의한 분류에 너무 자구字句에 얽매이거나 액면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분류는 이해하기 쉽도록 간략하게 구분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의 사람이 “주정꾼과 쓸모 없는 사람”의 항목에 포함될 수도 있으며 또한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는 않을지라도 미숙한 노동자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등급 대신에 도덕적 및 멘탈적인 발달에 의한 분류 방법이 고안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도 우리가 채택한 사회적 지위에 의한 분류 방법만큼이나 많은 어려움이 있다.

표1

표2

위의 숫자는 단지 평균치이며 각각의 평균치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개체화Individualisation의 방식에 따라 어떤 차이가 생기지만, 이러한 차이는 하위의 부류들에서는 비율이 훨씬 더 작다. 지성을 통하여 개체화된 사람은 위에서 언급된 두 기간 사이의 폭이 더 긴 경향이 있고, 반면에 다른 방법으로 개체화된 사람은 보다 짧은 간격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이 점을 보다 충분히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젊어서 죽는 사람은 노년에 죽는 사람보다 각각의 화신 사이의 기간이 짧은 경향이 있지만 아스트럴계의 삶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아스트럴계의 삶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강한 감정들은 대부분은 물질계의 초기의 삶에서 생기는 반면에, 천계의 삶에 귀착되는 보다 영적인 에너지는 지상에서의 삶이 끝나거나 끝날 즈음까지 계속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데바찬에서 보내는 총시간은 지상에서의 삶에서 가지고 온 재료 혹은 내용에 달려 있다. 즉 멘탈 및 도덕적인 재능으로 차츰 완성될 수 있는 모든 것, 지상에서의 삶 동안에 형성된 모든 순수한 상념과 감정, 모든 지성적 및 도덕적 노력과 열망, 유용한 일에 대한 모든 기억 그리고 인간에 대한 봉사를 위한 계획이다. 아무리 미약하거나 혹은 짧은 기간일지라도, 이러한 일은 하나도 상실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기적인 동물적 정욕은 여기에 들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표현할 수 있는 어떠한 질료도 천계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생에서의 악은, 비록 선을 크게 능가할지 모르지만, 극히 미약한 선의 결과가 표현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서 데바찬의 삶이 매우 짧겠지만, 가장 타락한 사람도 그가 의義에 대한 아주 미약한 열망, 즉 자비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데바찬의 삶을 반드시 가지는데, 그 기간 중에 선善의 씨앗은 어린 싹을 내고 선의 섬광閃光은 자그마한 불꽃으로 타오를 수도 있다.

과거에,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하늘나라를 항상 생각하고 천국의 축복을 누릴 목적으로 그의 삶을 통제했을 때에, 데바찬에서 보내는 시간은 아주 길었고 때때로 수천 년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 시대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훨씬 더 세상에 집중되고 하늘나라에 대하여 생각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라 그들의 데바찬의 삶은 단축되었다.

이와 같이, 멘탈계의 천계와 원인계의 천계에서 보내는 시간은 멘탈체와 원인체에서 여러 번 발생한 상념의 양에 비례한다. 야심과 흥미, 사랑과 희망과 두려움과 함께 인성적인 자아에 속하는 모든 것은 하위 멘탈계 즉 형태 또는 형상의 세계에서 그 결실을 이룬다. 상위의 고차원적인 마음. 즉 추상적이고 비인성적인 사고 작용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은 원인계의 하부계들, 즉 무형의 세계에서 성취되어진다. 위의 표가 보여주는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히 원인계의 천계에 들어가는 즉시 다시 나오게 된다. 어떤 사람은 그곳에서 아주 긴 시기의 데바찬의 삶을 보낸다. 또한, 몇몇 사람은 그곳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낸다.

이리하여, 사람이 자기의 아스트럴계의 삶이나 속죄의 삶을 스스로 조성하는 것처럼,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바로 자신이 만든 원인들에 의하여 자신이 살게 될 천계의 기간과 특성 둘 다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연히 받을 양과 특성들에 가장 적합한 기쁨의 질을 그대로 가지게 될 것이다.

아주 중요하고 흥미로운 또 다른 요소는 데바찬에서의 삶의 강도强度이다. 이 강도는 다양한 부류의 자아에 따라 다르며, 물론 천계에서의 삶의 기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259쪽의 표에서, 동일한 무리에 속하는 자아 내에, 발달은 동일하지만 화신化身하는 기간에 있어 상당히 다른 두 가지 유형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약 1,200년이 걸리고 다른 하나는 약 700년이 걸린다. 그런데 발생하는 영적인 힘의 양은 두 경우에 거의 똑같지만, 보다 짧은 기간이 걸리는 사람은 축복의 양을 두 배로 천계의 삶 속으로 집약시킨다. 말하자면, 맹렬하게 일을 하고, 경험을 집중시켜서, 다른 부류에 속하는 사람보다 주어진 기간에서 거의 두 배의 일을 해낸다.

앞 페이지에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차이는 개체화(개성화)가 이루어지는 방법에 기인한다. 개체화의 세부 사항―이것은 우리의 주제를 벗어난다―을 다루지 않고 말하면, 애정이나 헌신을 순간적으로 표출함으로써 개체화되어 훨씬 더 집중되거나 강렬한 형태로 자기의 축복을 가지는 사람보다, 지성의 발달에 의해서 서서히 개체화되는 사람은 더 긴 데바찬의 삶을 살게 하는 다른 종류의 영적인 힘을 일으킨다. 발생하는 힘의 양에 어떠한 차이가 있다면, 보다 짧은 기간이 걸리는 사람의 경우에 약간 더 많은 힘이 있는 것 같다.

화신하는데 걸리는 기간은 큰 차이가 있는데, 결과적으로 자아가 자신의 천계의 삶을 완성하는 속도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 여러 조사에 의해서 드러났다.

이에 대한 중요한 이유 중 한 가지는, 사람들이 서로의 카르마적인 상호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떤 위대한 목적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사람들이 집단으로 함께 화신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들이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진 실제적인 일이 미래에 그들에게 닥쳐올 때 그들 사이에 애정의 유대가 아주 강하게 결속되어 서로 오해하거나 불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즉 유사한 예비적인 경험을 경험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함께 화신하는 “봉사자”로 알려진 어떤 자아의 집단이 존재한다. 집단이 헌신적으로 봉사한다는 위대한 사실이 다른 모든 고려 사항에 우선하며, 집단은 그 봉사를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로 뭉쳐진 것이다.

이 안에는, 어떠한 부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자신에게 돌아오는 카르마를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카르마가 해결되는 속도는, 각자의 특별한 여건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조정된다. 이리하여 사람이 카르마로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보다 고차원적인 (신의) 사역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도록, 과거의 어떤 카르마가 아주 급속히 청산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상당히 축적된 카르마가 집중되어서 한꺼번에 어떤 큰 재난으로 닥칠 수도 있다. 카르마가 재빨리 제거되면, 그의 길은 깨끗하게 닦여지게 된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인류의 경우에, 카르마가 이와 같이 집중적으로 표출되지 않으며 천계에서의 삶은 일반적인 속도로 이루어지게 된다.

삶의 강도에서의 차이를 포함하여, 카르마를 해결하는 시간에서의 차이는 멘탈체에서 보면 멘탈체의 광휘로 나타난다.




THE MENTAL BODY.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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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길잡이
LIGHT on THE P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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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지혜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과
그 지혜의 감화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혼자 사용할 수 있도록 쓰여진 소론
마벨 콜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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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 1부
☞ 2부
☞ 카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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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1885년에 발행된 초판의 표제에는 "동양의 지혜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과 그 지혜의 감화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혼자 사용할 수 있도록 쓰여진 소론"이라고 묘사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여기 있는 규칙들은 모든 제자들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책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후자의 설명이 분명히 더 정확한 것이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책은 M.C.를 통해서 힐라리온(Hilarion) 대사(大師)에 의해서 쓰여졌다.  -- M.C.는 "마벨 콜린스
(Mabel Collins)"로 한때 블라바츠키(Blavatsky)여사와 '루시퍼(Lucifer)'를 편집하는 데 함께 일했던 분
으로 신지학회에서는 잘 알려진 분이다.

  힐라리온 대사는 그 분의 스승이신 "위대한 분" --신지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베니
션"이라고 불려지는 분--으로부터 이 규칙들을 받았다.  그러나 심지어 이 위대한 분도 이 책의 일
부만 저술하였다.  이 규칙들은 세 단계를 거쳐왔다.  순서대로 정리해 보겠다.

  이 책은 아주 작은 책이다.  그러나 최초의 형태는 더욱 더 작았다.  연대를 알 수 없는 오래된
야자수잎 위에 쓰여져 있는 사본이다.  너무나 오래된 것이어서 심지어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도
그것의 연대나 작가의 이름을 잊어버렸으며 그리고 이 책의 기원은 유사(有史) 이전 태고시대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으로 여겼다.

  그것은 열장의 야자수잎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잎에는 단지 세줄 만이 쓰여져 있다.  왜
냐하면 야자수잎 사본에서는 각각의 줄들이 현재 우리가 쓰는 식의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되어 있
기 때문이다.  각각의 줄은 그 자체로 완전한 문장이다.  즉 짧은 금언(金言)이다.  30개의 행(行)
이 분명하게 구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검은 글씨로 인쇄되어졌다.

  이 금언들은 산스크리트(Samskrit) 고어(古語)로 쓰여져 있다.  베니션 대사(大師)께서 알렉산드
리아 학파의 제자들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 산스크리트로 쓰여져 있는 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하
였다.  그리고 힐라리온 대사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제자들 중의 한 분으로 이암불리쿠스
(Iamblichus)라는 이름으로 화신하신 분이다.

  그 분도 이 금언들을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본과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한 곳에는
몇몇 설명들도 첨가하였다.  예를 들면 첫번의 세 개의 금언을 보면 "4"라고 표시된 네번째 항(項)
에서 분명히 주석으로 의도된 것 같은 설명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읽어보면 이와 같다:

  『야망을 없애라.  야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일하는 것처럼 열심히 일해라』

  『생명에 대한 욕망을 없애라.  그러나 생명에 집착하는 사람들처럼 생명을 존경해라.』

  『안락함에 대한 욕망을 없애라.  그러나 행복 때문에 혹은 행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처럼 행
복해라.』

  베니션 대사가 하신 모든 설명과 부연들은 보통 글씨체로 인쇄되었고 1885년에 처음으로 출판되
었을 때와 동일한 금언들이다.  힐라리온 대사가 그것을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바로
그 형태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출판 직후 그 분이 금언에다 많은 설명들을 부연하였다.  그리고 그후 다시 출판되었을
때 그 설명들은 맨 뒷 부분에 인쇄되어져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설명들을 올바른 자리에 배치하였
으며 각각의 설명은 '주'라는 말로 시작된다.

  '카르마'에 대한 간략한 소론(小論)은 베니션 대사께서 지으신 것이며 초판에도 인쇄되어 있었다.

  신지학 문헌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개의 소론 중에서 "도의 길잡이(Light on The
Path)"가 첫번째이다.  --길(Path)을 걸어간 분들로부터 그 길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지
침들이다.  작고한 수바-로우(T. Subba Row)씨가 그 금언들은 여러 겹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
한 것을 기억한다.--  즉 각각 서로 다른 단계에서도 반복해서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이다.

  첫째 길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다음은 수습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서 그리고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위대한 첫 단계 비전(Initiation)을 지나서 "진정한 길'에 들어선 사
람은 더 높은 수준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초인자격'을 성취했을 때 한번 더
더욱 더 높은 의미에서 이 똑같은 금언들이 더 높은 성취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위한
지침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이 금언들의 신비적인 의미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가르침
(도의 길잡이)은 그 어떤 지침들보다 우리를 보다 더 멀리 나아가게 해준다.

  다음은 "침묵의 소리"로 블라바츠키 여사가 직접 썼지만 위대한 대스승인 아리아상가
(Aryasanga)--(우리들에게는 드왈 쿨(Dwal Kul) 대사로 알려져 있다.)--가 행한 세개의 강연으로 구
성되어 있으며 후에 그 분의 제자인 알시온(Alcyone)--(크리슈나무르티의 어릴 적 이름)--이 기억을
더듬어서 쓴 책이다.

  이 책에서는 우리를 아라한의 수준까지 데리고 가는 지침들이 있다.  힐라리온 대사의 관점과는
아주 다른 관점에서 여러 방식으로 쓰여졌다.  유사점들과 차이점들을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많은
흥미로운 것들이 있을 것이다.

  도의 길잡이로서 세번째 책은 알시온이 우리들을 위해서 아리아상가가 행하신 설교들을 전한 것
이다.  "스승의 발밑에 엎드려"에서는 쿠트후미(Kuthumi) 대사가 그에게 주신 가르침들을 그대로 반
복한 것이다.  그 가르침들은 그가 위대한 비전의 첫 단계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의도된 가
르침들이다.

  그러므로 이 세번째 책은 다른 것들보다 그 범위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지만 그러나 놀랄만한 정
도의 명확성과 단순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가르침들은 그 당시 어린
그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의 길잡이"의 토대인 고대 산스크리트 사본은 또한 이집트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베니션
대사의 많은 설명들 속에는 인도식 가르침보다 이집트식 가르침이 더 많다.  인도식이든 이집트 식
이든 신지학 문헌에서 더 가치 있는 보석을 찾기가 어렵다.

  주의 깊게 그리고 자세히 공부하면 그 어떤 책도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
다.  "스승의 발밑에 엎드려'의 서문을 인용해 보면;

  "그 가르침들이 진실하며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공하길 원하는 사람
들은 그대로 정확하게 행해야만 한다.  음식을 보고 맛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굶주린
자를 만족시켜 줄 수 없다.  그는 그의 손을 뻗어서 먹어야만 한다.  그래서 스승의 가르침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분의 한마디 한마디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리고 모든 암시를 받아
들이면서 그 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단 하나의 암시라도 한마디의 말씀이
라도 주의 깊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은 두번 말
씀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길에 들어선 사람들의 진화를 빠르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이 책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보
통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적인 것을 제시한다.  단지 그 가르침에 따라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가기만
하면 그것의 의미를 진실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만약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그녀)에게는 여전히 봉인된 책으로 남아있을 것이고 그래서 그 가르
침들을 실천 불가능하거나 혹은 쓸모 없는 책으로 치부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고자
하는 진실한 노력을 보이면 이러한 가르침들은 분명히 환한 빛을 드리울 것이다.  바로 그런 식으
로만 이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진주의 가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C.W.리드비터
LIGHT on THE PATH  도의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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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여기에 있는 규칙들은 모든 제자들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제자들은 이 규칙들을 마음에 담아서 잘 유의해야 한다.

  눈이 볼 수 있게 되기전까지 눈은 눈물을 흘릴 수 없어야 한다.  귀가 들을 수 있게 되기전까지
는 귀는 귀의 민감함을 잃어버려야 한다.

  목소리가 대사(大師)들 앞에서 말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그 목소리는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힘
을 잃어버려야 한다.

  혼이 대사들 앞에 설 수 있게 되기전까지 혼의 다리는 '마음의 피' 속에서 씻겨져야 한다.


1. 야망을 없애라

  주 ---야망이 첫번째 저주다.  말하자면 자기 동료들보다 위로 올라가려는 인간을 강력하게 유혹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상을 바라는 마음의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지성과 권능을 가진 사람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더 높은 가능성으로부터 끊임 없이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한 스승이다.  그것의 결과들은 입 속에서 먼지와 재로 변한다.  죽음과 소외
감처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은 실망과 좌절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간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비록 이 첫번째 규칙이 단순하고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성급히 지나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의 이러한 악들은 미묘한 변형을 거쳐서 제자의 가슴 속에 변화된 모
습으로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는 야망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대사께서 나의 마음 속을 보
았을 때 내 마음이 완전히 깨끗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자기 자신
(저급아)으로부터 관심을 없앴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경험과 욕망의 한계를 더 확장시켰으며 그
리고 자신의 관심을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삶의 영역으로 확대한 오컬티스트들보다는 창작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열심히 창작하는 순수한 예술가가 오히려 올바른 길에 더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는 다음의 두 개의 규칙에도 똑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오랫동안 그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그대 자신의 마음에 의해서 그대가 쉽게 현혹되지 않도록
해라.  지금과 같은 시작 단계에서의 실수는 고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와 함께 계
속 지니고 다니면 그것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대는 그것을 없애는데 더 많
은 쓰라린 고통을 겪어야만 할 것이다.


2. 삶의 욕망을 없애라.


3. 안락함에 대한 욕망을 없애라.


4. 야망이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것처럼 열심히 일해라.  생명에 열망하는 사람들처럼 생명을 존중
해라.  행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처럼 행복해라.  마음 속에서 악의 근원을 찾아 그것을 없애버려
라.  그것은 욕망을 가진 자의 마음 속에서 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제자의 마음 속에서도 풍성하게
살고 있다.  단지 강한 자만이 그것을 없앨 수 있다.  약한 자는 그것이 성장해서 열매를 맺고 죽
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세월 내내 살아가며 성장해 가는 식물이다.  그것은 인간이 수없이 많은 환
생을 통해 경험을 쌓았을 때 그때 꽃을 피운다.  권능의 길에 들어설 자는 그의 가슴 속에서 이것
을 잡아 떼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의 가슴은 피를 흘릴 것이고 그의 모든 삶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고통을 참아내야만 한다.  이 시련은 생명의 길로 이끄는 위
험한 사다리의 첫 단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며 또는 마지막 단을 밟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자여!  그것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리고 그대 혼의 모든 에너지를 그 일에 꽉 잡아매라.  현재 속에서도 미래 속에서도 살지 말
고 영원 속에서만 살아라.  이 거대한 잡초는 "영원" 속에서는 꽃을 결코 피울 수가 없는 것이다.  
존재의 얼룩은 '영원한 생각'이라는 바로 그 공기 속에서 씻겨져야 한다.


5. 모든 분리감(分離感)을 없애라.

  주---자신은 나쁜 사람들이나 어리석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비
록 그대가 그들을 그대 자신과 동일시하는 정도가 그대의 친구나 혹은 스승을 그대 자신과 동일시
하는 정도와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악
한 사물이나 사람과 그대가 분리되어 있다는 그런 생각이 그대 마음 속에서 자라나도록 놔둔다면
그대는 그렇게 함으로써 카르마를 만들게 된다.  그 카르마는 그대가 그것이나 그들과는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대의 혼이 인식할 때까지 그 사물이나 사람과 그대를 단단히 묶어둘 것이
다.

  이 세상의 죄나 수치들은 그대의 죄요 그대의 수치들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왜냐하면 그대는
이 세상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의 카르마는 거대한 세계의 카르마와 서로 뒤얽혀 있
기 때문이다.  그대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때에는 그대는 이미 악취가 나는 지저분한 곳들이나
깨끗한 모든 곳을 다 지나갔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만지기를 꺼리는 그 지저분한 옷이
과거에 그대의 옷이었을지도 모르며 내일의 그대의 옷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리고 그
것이 그대의 어깨 위에 내던져졌을 때 그대가 혐오감을 가지고 돌아선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더욱
더 달라붙을 것이다.

  독선적인 사람은 진흙 바닥을 자신의 침대로 한다.  절제하라.  왜냐하면 절제하는 것이 옳기 때
문이다.  그대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6. 감각적인 욕망을 없애라.


7. 성장하고 싶은 욕망을 없애라.


8. 그러나 홀로 의연히 서라.  왜냐하면 형체를 가진 것, 분리감을 의식하고 있는 것, "영원"을 벗
어나 있는 것, 그 어떤 것도 그대를 도와줄 수가 없다.  감각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관찰해라.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자기 지식'의 학문을 시작할 수 있으며 그 지식에 이르는 사다
리의 첫 계단에 그대의 발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꽃이 무의식적으로 자라나듯이, 그러나 자기 자신의 혼을 대기 속에서 개화시키길 간절히
열망하듯이 그렇게 자라나라.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대의 혼을 영원 속에서 개화시키기 위해서 서
둘러 앞으로 밀고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대의 힘과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것은 "영원", 바로
그것이어야 하지 성장하고 싶은 욕망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 그대는 순수함이
가득 찬 그런 속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 그대는 성장에 대한 사적인 욕망 때문에
더욱 더 굳어지게 된다.


9. 그대 안에 있는 것, 그것만을 열망해라.


10. 그대를 넘어서 있는 것, 그것만을 열망해라.


11. 소유할 수 없는 것, 그것만을 갈망해라.


12. 바로 그대 안에는 이 세계의 빛이 있다.  그 빛만이 길(Path) 위를 비출 수 있다.  만약 그대가  
그대 안에 그 빛을 인식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아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그대를 초월해 있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것에 도달했을 때 그대는 이미 그대 자신을 잃어버린 후
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히 움츠러들기 때문이다.  
그대는 빛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그 빛줄기(Flame)를 만지지는 못할 것이다.


13. 권능을 열렬히 원해라.


14. 평화를 절실히 열망해라.


15. 무엇보다도 소유하기를 간절히 원해라.


16. 그러나 그러한 소유는 순수한 혼들의 것이며 그리고 모든 순수한 혼들에 의해서 똑같이 소유
될 수 있으며 그래서 하나로 뭉쳤을 때만이 독특한 전체성을 이룬다.  순수한 혼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을 갈망해라.  그리하여 그대는 '그대의 유일한 진아(true)'--하나로 뭉쳐진 생명의 영--를
위해 많은 부(富)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원하게 될 평화는 그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는 그런 성스러운 평화이며 마치 성스러운
꽃이 조용한 늪에서 자라나듯이 그대의 혼은 그 평화 속에서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제자가 원하
게 될 권능(힘)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대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그런 힘이
다.


17. 길을 찾으려고 애써라.

주---이 세마디 말은 그 자체만으로서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  제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지도 모른다.  "제가 이 말들 속에 있는 생각들을 공부해야 합니까?  제가 길을 찾고 있지 않았습
니까?"  그러나 너무 성급히 지나치지 마라.  잠시 동안 멈춰서서 숙고해 보아라.  그것이 그대가
원하는 길인가?  말하자면 그대 자신이 오르려는 매우 높은 정상에 대해서 그대가 이루게 될 위대
한 미래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자여! 경계해야 한다.  길은 길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그 길을 걷게 될
그대의 발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 규칙과 제2부의 17번 규칙은 서로 상통한다.  오랜 기간 동안의 싸움과 많은 승리를 얻고 난
후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하여 최고의 비밀을 요구할 때 그때 그대는 더욱 더 멀고도 심오한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게 된다.  이 위대한 가르침의 마지막 비밀을 들었을 때 그 속에서 새로운 길
의 신비가 열리게 된다.  그 길은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나오는 길이며 순전히 인간의 인식이나
상상을 넘어서는 그런 길이다.

  오랫동안 멈춰서서 깊이 잘 숙고해 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이들 각 지점에서 길은 길 자체를
위해서 선택되어졌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길과 진리가 우선 있게 되며 그리고
나서 삶이 따라오게 된다.


18. 그대 안으로 조용히 침잠하면서 길을 찾아라.


19. 그대 밖으로 대담하게 나아가면서 길을 찾아라.


20. 어떤 한 길로만 그것을 찾지 마라.  각각의 기질에 따라 가장 바람직한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길이 있다.  그러나 길은 헌신만으로는 찾아질 수 없으며 종교적인 사색만으로도 찾을 수 없으며
열심히 정진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희생의 노력만으로도 삶에 대한 세심한 관찰만으로도 찾아질 수
가 없다.

  그 어떤 하나만으로는 한 단 이상 앞으로 올라갈 수 없다.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단
들이 필요하다.  인간의 악들은 하나씩 하나씩 극복되면서 사다리를 구성하는 단들이 된다.  인간
의 미덕들은 진실로 필요한, 결코 없이 지내서는 안 될 그런 단들이다.

  그러나 비록 그것들이 즐거운 분위기와 행복한 미래를 만든다 해서 따로 따로 홀로 서게 되면
그것들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길을 걷고 싶어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성질(본성)을 현명하게 사
용해야 한다.  개개인은 자기 자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전체적인 개체성을 확고하게 이해할 때, 그래서 깨어난 영적인 의지에 의해서 이
개체성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어렵게 만든 것으로 인식할 때, 그
리고 자신의 성장과 함께 지성이 서서히 발전하여감에 따라 개체성은 그 개체성 너머에 있는 삶에
닿기 위한 수단임을 인식할 때만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놀랍고 복잡하면서 분리된 또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때 바로 그때
비로소 그는 길 위에 있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의 신비스럽고 영광스러운 심연
속으로 뛰어 들어감으로써 그것을 찾아라.  모든 경험을 테스트하면서 그 길을 찾아라.  개인성의
성장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대의 감각들을 이용하여 그것을 찾아라.

  그리고 그대와 마찬가지로 발전하려고 힘들게 애쓰고 있으며 그대가 속해 있는 민족을 구성하는
다른 신성한 단편들--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모호함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대의 감각들을 사용
함으로써 그것을 찾아라.  존재의 법칙들을 배우면서 대자연의 법칙들을 배우면서 초자연적인 법칙
들을 배우면서 그것을 찾아라.

  그리고 그대의 혼이 그대 안에서 타고 있는 희미한 별에게 깊고 깊은 존경을 표하면서 그 길을
찾아라.  그대가 꾸준히 주의 깊게 보고 존경을 표함에 따라 그 빛은 점점 더 강하게 자라날 것이
다.  그때 그대는 그 길의 시작을 찾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 길의 끝을 찾
았을 때 그 빛은 갑자기 무한한 빛으로 될 것이다.

  주---모든 것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찾아라.  이렇게 말했다 할지라도 "그 길을 알기 위해서 감각
의 유혹들에게 굴복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라.  오컬티스트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했을지 모르지만 오컬티스트가 된 후부터는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대가 길을 선택해서 들어와서 이러한 유혹들에게 굴복할 때마다 그대는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대는 두려움 없이 유혹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대는 그러한 유혹들을 깊이 심사
숙고할 수 있으며 관찰할 수 있고 그리고 그러한 유혹들이 그대에게 더이상 영향을 줄 수 없는 때
를 확신에 찬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굴복하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라.  끊임 없는 순례여행의 형제로서 그에게 그대의 손을
뻗어 주어라.  단지 그의 발은 진흙으로 힘겨워졌을 따름이다.  오 제자여!  선한 자와 죄지은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고 그 선한 자와 지식을 성취한 자와의 사이에는 더욱 더 큰 차이가 있으며
선한 자와 신성(神性)의 입구에 서있는 자 사이에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이 일반 대중들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너무 일찍부터 생각하지 않도록 경계하
라.  그대가 그 길의 시작을 찾았을 때 그대 혼의 별이 빛을 비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빛에
의해서 그대는 그 빛이 얼마나 거대한 암흑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숭고
한 첫번째 싸움에서 승리하기 전까지는 그대의 정신(mind), 마음(heart), 두뇌 모두가 흐릿하고 어두
울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겁에 질려 공포에 떨지 마라.  그대의 눈을 그 작은 빛에 고정해라.  
그러면 그것은 커질 것이다.

  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혼은 깊은 침울함 속에 있기 때문에 그대 내면의 암흑을 보고 그들의
무기력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여라.  그들을 비난하지 마라.  그들로부터 뒷걸음치지 말고
이 세상의 무거운 카르마를 약간이나마 짊어지려고 노력해라.  암흑의 힘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도록 막고 있는 몇 안 되는 강한 의지의 사람들에게 그대의 도움을 주어라.

  그리고 나서 기쁨의 동반자 상태 속으로 들어가라.  그 상태는 진실로 무시무시하게 힘든 노력
과 말할 수 없이 깊은 슬픔을 가져오면서 동시에 너무나 장엄하며 하염 없이 커가는 기쁨을 져올
것이다.


21. 폭풍우가 지나간 후 정적 속에서 피어나는 꽃을 찾아라.  그 꽃은 폭풍우가 다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개화할 것이다.  폭풍우가 계속 되는 동안, 싸움이 지속되는 동안, 그것은 자라날 것이며 뻗
어올라 갈 것이며 가지들과 잎들을 만들 것이며 꽃봉오리를 맺기 시작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개
성이 분해되어 녹아 사라질 때까지--중대한 실험과 경험을 하기 위한 단순한 실험재료로, 그 재료
를 만들어낸 신성한 파편에 의해서 소유되어 질 때까지--인간의 모든 본성이 고급아에게 굴복하여
복종할 때까지 그 꽃은 개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열대지방에서 폭우가 지나간 후에 오는 그런 고요함이 찾아들 것이다.  바로 그때
대자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작용하기 때문에 대자연의 몸짓을 볼 수도 있다.  그러한 평온함은 매
우 지친 영혼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그 깊고 깊은 침묵 속에서 마침내 길을 찾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건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 없이 말하는 목소리"이다. --그것은 형체도 실
체도 없이 찾아오는 사자(使者)이다.  혹은 마침내 개화된 영혼의 꽃이다.  그것은 그 어떤 비유로
도 묘사되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심지어 맹렬한 폭풍우의 와중에서도 느껴질 수 있고 찾
아질 수 있으며 소망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침묵은 짧은 순간 지속될 수도 있으며 천년 동안
이나 지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몇번이고 되풀이
해서 싸워 승리를 해야 한다.  대자연은 잠시 동안만 숨을 죽이고 정지할 수 있다.

  주---꽃이 개화하는 순간은 지각이 깨어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바로 그 순간 자신감, 지식
그리고 확신감이 찾아온다.  영혼이 잠시 멈춘 그 순간은 경이의 순간이며 그 다음은 만족의 순간
으로 그것이 바로 침묵이다.

  오 제자여!  그 침묵을 경험하였고 그 평화를 느꼈으며 그 힘을 간직하고 있는 분들, 그들은 그
대가 그것을 완전하게 지나가기를 또한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라.  그러므로 제자가 그 '배움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을 때 그대는 그대의 스승을 반드시 찾게 될 것이다.

  구하는 자들은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끊임 없이 요구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만을 가지고 구하기 때문이다.  그 정신의 목소리는 정신이
활동하는 정신계에서만 들린다.  그러므로 이 스물하나의 규칙을 다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구하는
자는 갖게 될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오컬트적인 의미로 읽는다는 것은 영의 눈을 가지고 읽는다는 것이다.  구한다는 것은 내면에
있는 갈망--영적인 갈망--을 느끼는 것이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 갈망을 조금이나마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것이다.  제자가 배울 준비가 되었을 때 그는 받아들여지고 승인되어
지며 인정되어진다.  그렇게 되는 것은 틀림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등불을 켰으며 그 등
불은 숨겨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대한 첫번째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야 배울 수 있다.  정신은 진리를 인정할지 모르지
만 영(spirit)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일단 그 폭풍우를 통과해서 평온함을 성취하기만 하면
그때는 언제든지 배울 수가 있다.  심지어 제자가 주저하고 머뭇거리거나 외면하더라도 배울 수가
있게 된다.  침묵의 소리는 항상 그의 내면에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길을 완전히 벗어났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 소리가 다시 울려퍼져 그를 산산조각이
나도록 비틀어서 신성한 가능성들로부터 그의 욕정을 분리시킬 것이다.  그때 버려진 저급아로부터
고통스럽고 절규에 찬 외침과 함께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그대에게 평화가 함께 하길.......  "나의 평화를 그대에게 주노라."라는 말
은 스승만이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해줄 수 있다.  동양의 지혜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 중에도 이 말을 들려줄 수 있는 자가 있으며 또 그들에게 매일 매일 더욱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다.

  세가지 진리를 소중히 여겨라.  그들은 똑같이 모두 다 중요하다.  지금까지 쓰여진 것들은 배움
의 전당의 벽 위에 쓰여져 있는 규칙들 중에 첫번째 부분이다.

  구하는 자는 갖게 될 것이다.

  읽기를 원하는 자는 읽을 것이다.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배울 것이다.



평화가 그대와 함께 하기를
(PEACE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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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이며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그러나 언어가 빈약해서
침묵하고 있는 세개의 위대한 진리가 있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아며 그 영혼의 미래는 무한한 성장과
영광이 있는 그런 미래이다."


"생명을 주는 그 본질은 우리들 내면에 거주하며
우리가 없더라도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자비심을 베푸는 것이고
들을 수도 볼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지만
지각하기를 원하는 사람에 의해서는 지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각자는 자기 자신의 절대적인 입법자이며
영광이나 우울함을 주는 자이고 자기 자신의 생명보상 및 처벌을
정하는 자도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 진리들은 생명 그 자체만큼이나 위대하며 또한 지극히 단순한
정신을 가진 인간만큼이나 단순하다.  진리에 굶주린 자들에게 주어라."
LIGHT on THE PATH  도의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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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평화의 상태인 침묵 속에서 널리 울려퍼지는 어떤 소리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 소리는 말
할 것이다. ;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았다.  그대는 수확을 걷어들였다.  이제는 씨를 뿌려야 한다."  
그리고 이 소리가 침묵 그 자체라는 것을 알고 그대는 그 소리에 따를 것이다.

  지금은 제자인 그대, 홀로 설 수 있으며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있는 그대, 욕망을 정복
하고 자기 지식을 성취한 그대, 자신의 혼의 꽃이 활짝 피어난 것을 보고 그리고 그것을 알아 보
았으며 침묵의 소리를 들은 그대---그대는 이제 배움의 전당으로 가서 거기에 그대를 위하여 쓰여
져 있는 것을 읽어 보아라.

  주---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혼의 문들
을 열었다는 것이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지각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욕망을 정복했다는 것은 자아를 어
떻게 쓰며 어떻게 통제하는지를 배웠다는 것이다.

  자각(自覺)을 성취했다는 것은 자기 내면의 요새로 물러나 개성적인 인간을 편견 없이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대의 혼의 꽃이 활짝 피어난 것을 보았다는 것은 결국에
는 그대를 인간 이상으로 변형시킬 그 모습을 순간이기는 하지만 그대 속에서 힐끗 보았다는 것이
다.

  알아보았다는 것은 마치 소름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유령 앞에 있는 것처럼 공포에 질려 뒤로 물
러나지 않고 그리고 시선을 떨구지 않은 채 이글거리는 빛을 응시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을 완수했
다는 것이다.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나는 일이 사람들에게 종종 일어난다.  그래서 승리를 거의
획득하였을 바로 그 순간에 이런 일로 인해 그 승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내면으로부터 단 하나 뿐인 진실한 길잡이가 온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배움의 전당으로 가라는 것은 배움이 가능한 그런 상태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
이다.  그러면 거기에는 그대를 위한 많은 가르침들이 쓰여져 있을 것이고 그 말들은 그대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불의 글자들(fiery letters)'로 쓰여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가 준비되었을 때
스승도 준비가 되어 있다.


1. 앞으로 닥쳐올 싸움에서는 옆으로 비켜 서 있어라.  그리고 비록 그대가 싸움을 한다고 하더라
도 그대는 전사(warrior)가 되지 마라.


2. 전사를 찾아서 그로 하여금 그대 안에서 싸우게 하라.
3. 싸움에서는 전사의 명령을 받아서 그 명령에 따르라.


4. 그에게 복종하라.  마치 그가 장군인 것처럼 그에게 복종하지 말고 그가 그대 자신인 것처럼 그
리고 그가 하는 말들은 그대의 비밀스러운 욕망들을 말하는 것처럼 그에게 복종하라.  왜냐하면 그
는 바로 그대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대보다 무한히 더 현명하고 무한히 더 강하다.  그를 찾아라.  그렇지 않으면 싸
움의 흥분과 혼란 속에서 그대는 그를 지나쳐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대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면
그는 그대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외침이 그의 주의 깊은 귀에 들리면 그때부터 그는 그대 속에서 싸울 것이고 내면의 흐
릿한 공허를 꽉 채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대는 옆으로 비켜서서 그로 하여금 그
대 대신 싸우도록 하기 때문에 그대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피로를 모른 채 그 싸움을 해 나갈 것이
다.  그러면 그대가 날리는 일격이라도 결코 빗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그대가 그를 찾지 않는다면 그를 지나쳐 가버린다면 그대는 그대를 보호해줄 호위병이
없게 된다.  그대의 뇌는 현기증을 일으켜 동요할 것이고 그대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전쟁
터의 먼지 속에서 그대의 판단과 감각들은 그대를 저버릴 것이며 그대는 그대의 친구와 그대의 적
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그대 자신이다.  그러나 그대는 유한하며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다.  그는 영원하며 결코
틀릴 수가 없다.  그는 영원한 진리이다.  일단 그가 그대에게 들어가 그대의 전사(warrior)가 되었
을 때 그는 결코 그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장엄한 평화의 날에 그대와 하나가 될 것이다.


5. 생명(삶)의 노래를 들어라.

  주---그것을 찾아서 먼저 그대의 마음 속에서 그것을 들어 보아라.  처음에는 "그것은 거기에 있
지 않습니다.  내가 찾았을 때 단지 불협화음만 찾았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더욱 더 깊이 찾아
보아라.  또 다시 그대가 실망했다면 잠시 멈춰서 쉰 후에 다시 더 깊이 찾아보아라.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샘인 자연의 멜로디가 있다.  그것은 완전히 숨
겨져 있어서 보이지 않으며 조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거기에 있다.  그대 천성의 바로
그 바탕에서 그대는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을 찾게 될 것이다.

  악을 선택하는 자는 그의 혼이 발산하는 빛에 눈을 감아버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
다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마음의 멜로디 소리에 귀를 닫아버린다.  그는 욕망들 속에서 사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밑바닥에는 저지할 수 없는 강력한 흐름
이 있다.

  실제로는 장엄한 대해(大海)가 거기에 있다.  그 대해를 찾아라.  모든 사람이, 심지어 가장 초라
한 피조물들까지도 장엄한 대해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그가 그러한 사실
에 아무리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그 자신만을 위해서 소름끼치도록 무서우며 허깨비 같은 외형을
만든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그 장엄한 대해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대에게 말한 것이다.: 그런 모든 존재들은 -- 비록 그대가 그런 존재
들 사이에서 분투하고 있지만 -- 신의 일부분들이다.  그리고 그대는 환영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환영이 그대를 너무 현혹시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그 달콤한 목소리를 어디에
서 먼저 감지해야 할지 추측하는데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분명히 그대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아라.  거기에서 그것을 찾아라.  일단
그 목소리를 한번 듣기만 하면 그대는 그것을 그대 주위에서 더욱 더 쉽게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6. 그대의 기억 속에 그대가 들은 그 멜로디를 잘 간직해 두어라.


7. 그것으로부터 조화의 가르침(lesson of harmony)을 배워라.


8. 이제 그대는 소란의 혼돈 속에서도 그대 자신이면서 동시에 그대의 왕인 전사에게 순종하면서
반석 같이 확고부동하게 똑바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전사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싸움
에 태연하며 싸움의 결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가지만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전사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또 결코 패배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대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침착하고 냉정하게 깨어있는 채로 그대가 고통스럽게 획득한 그리고
그 고통을 제거해 가면서 얻은 청력(聽力)을 사용해라.  그대가 인간인 동안에는 단지 장엄한 노래
의 단편들만이 그대의 귀에 들려올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주의 깊게 듣게 되면 충실히 기억해 두어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에게 들려온
그 어떤 것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할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의 의미를 배
우려고 노력해라.  때가 되면 그대는 더 이상 스승이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인
들이 목소리를 가지고 있듯이 그것도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 속에 개개인들이 존재하고 있
다.

  생명 그 자체는 말(speech)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의 말은 귀먹은
그대가 생각하고 있듯이 울부짖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노래다.  그것으로부터 그대는 조화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배워라.  그것으로부터 조화의 법칙들에 따르는 것을 배워라.


9.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생명들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겨라.

  주----절대적으로 초월적인 견해를 가져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시야는 색깔로 채색되어진다.  
그러므로 먼저 초월성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지성은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 누구
도 그대의 적이 아니며 또한 그대의 친구도 아니다.  모두가 한결 같이 그대의 스승들이다.  비록
많은 세월이 걸리더라도 그대의 적은 그대가 풀어야 하는 하나의 신비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해되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친구는 그대 자신의 일부분이고 그대
자신의 연장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만이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바로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개성이라는 족쇄가 풀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의 심오한 신비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대가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옆으로 선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그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니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으
며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대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들을 사용할 줄 알게 될 것이고 그
힘들을 가치 있는 봉사에 쓸 수 있을 것이다.


10. 지성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보는 것을 배워라.


11. 그대 자신의 마음을 진심으로 가장 소중히 여겨라.


12. 왜냐하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 생명을 밝혀줄 수 있고 또 그대 눈에 그 생명을 더욱 더
선명하게 할 수 있는 한줄기의 빛이 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공부해라.  그러면 그대가 살고 있으며 또 그대가 한 부분이 되기를 원하는 세
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대를 둘러싸고 있으며 끊임 없이 변하고 움직이는 생명을 소중히
여겨라.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 마음
들의 구성과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배워감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그대는 더욱 더 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생명'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3. 지식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말문(speech)이 열리게 된다.  지식을 성취해라.  그러면 그대의 말
문이 트이게 될 것이다.

  주---그대가 그대 스스로 어떤 확신을 얻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21개의 규칙들(제1부)을 터득하고 그대가 가지고 있는 힘들을 개발하고 그대의 감각들을 구
속에서 해방시킨 후에 배움의 전당에 들어갔을 때 그때 그대는 말문이 솟아오르는 샘이 그대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3개의 규칙을 끝으로 이미 쓰여진 것에 내가 더 보탤 수
있는 말들이 없다.

  나의 평화를 그대에게 주노라.

  여기에 있는 규칙들은 내가 나의 평화를 줄 사람들만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내가 쓴 것을
외적인 감각 뿐만 아니라 내적인 감각을 가지고 읽을 수 있는(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위해서 쓰여
진 것이다.


14. 내면의(영적인) 감각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했으며 외적인 감각들의 욕망들을 정복해서
지식을 성취한 제자여!  진실로 길에 들어갈 준비를 하여라.  그대는 길(도)을 찾았다.  그 길을 따
라 걸을 준비를 해라.


15. 땅(earth), 공기(air) 그리고 물(water)에게 그대를 위해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들을 물어
보아라.

  그대의 내적인 감각을 개발하면 그대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6. 대지의 거룩한 자들(Holy ones)에게 그대를 위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물어 보아라.  
외적인 감각들의 욕망을 정복하면 그대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

17.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유일자'에게 그대를 위해서 수많은 세월 동안 간직해 왔던 그 마
지막 비밀을 물어 보아라.

  이기적인 혼의 욕망들의 정복이라는 위대하며 어려운 승리를 얻는데 수많은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세월의 경험이 쌓일 때까지는 그 보상을 얻기를 기대하지 마라.  이 17번째 규칙을
배울 때가 오면 그 사람은 인간 이상의 인간이 될 수 있는 바로 그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18. 이제 그대의 것이 된 그 지식은 그대만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혼은 모든 순수한 혼들과
하나가 되었으며 또한 그대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者)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것은 하늘의 주인이신 지고자(至高者)가 그대에게 맡긴 책임이다.  그것을 저버리거나 그대의 지식
을 오용하거나 혹은 그것을 소홀히 하게 되면 그러면 심지어 지금이라도 그대가 성취한 그 높은
경지에서 떨어질 수 없다.

  위대한 자들도 그들 자신의 책임의 무게를 지탱할 수가 없어서 그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서 떨어지기도 한다.  그것도 바로 거의 성취하게 된 바로 그 입구에서.  그러므로 바로 이 순
간까지 항상 전율과 경외감을 가지고 이 순간을 기대하라.  그리고 싸움에 대비하라.

  신성의 입구에 서 있는 자에게는 어떤 길잡이도 있을 수 없으며 어떤 틀 속에 끼워 맞출 수 있
는 법도 없다고 쓰여져 있다.  그렇지만 제자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마지막 고뇌를 다음과 같
이 말할 수 있다:
19. 실체도 존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굳게 지켜라.


20. 소리 없는 그 소리만을 주의 깊게 들어라.


21. 내면의 감각이나 외면의 감각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것만을 관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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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 on THE PATH  도의 길잡이

카 르 마   KARMA


  개개인의 존재를 끝도 시작도 없으며 끊어질래야 끊어질 수 없는 무한에서 무한으로 뻗어있는
밧줄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 밧줄은 무한히 많은 섬세한 실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실들은 매우
빈틈 없이 결합되어 그 밧줄의 두께를 형성한다.

  이 실들은 무색이며 곧음, 강도 및 평평함에 있어서 완벽하다.  모든 곳을 관통해서 지나가면서
이 밧줄은 이상한 뜻밖의 일들을 겪는다.  하나의 실오라기가 걸려서 달라붙게 되거나 혹은 그 밧
줄에서 격렬하게 뽑혀져 버리는 일이 매우 잦다.

  그러면 상당한 시간 동안 그것의 질서가 어지럽게 되고 또한 전체의 질서를 혼란하게 만든다.  
때때로 먼지나 색으로 얼룩이 지고 그래서 그 얼룩은 맞닿은 부분보다 더 많이 퍼져나갈 뿐만 아
니라 또 다른 실들까지 변색시킨다.

  그리고 그 실들은 살아있는 실들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마치 전선처럼 아니 그보다는 진동하는
신경처럼 그러니 그 얼룩 즉 뒤틀린 영향력이 얼마나 멀리까지 전달되겠는가?  그러나 그 긴 줄
(가닥) 즉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으로써 개인을 형성하는 살아있는 실오라기들은 결국에는 어둠 속
에서 나와 밝은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그 실들은 더 이상 무색이 아니라 황금색으로 빛날 것이다.  다시 한번 그것들은 가지런
히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 실들 사이에 다시 조화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내면의
조화로부터 더욱 더 장엄한 큰 조화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 설명은 단지 작은 부분 --진실의 단면--만을 제시해 준다.  이 설명은 진실의 단편보다도 더
욱 더 작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곰곰히 잘 생각해 보아라.  이 설명의 도움으로 어쩌면
그대는 더 큰 것을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먼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미래는 현재의 개별적인 행위들에 의해서 제멋대로 형성되
는 것이 아니라 마치 현재와 과거가 끊어지지 않는 연속선상에 있는 것처럼 미래 전체도 현재와
끊어지지 않는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밧줄의 설명이 옳은 설명이다.  오컬티즘에 대해서 약간의 관심만 두어도 큰
카르마의 결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과 악이라고 친밀하게 부르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하지 않고서는 오컬티즘에 대해 어떤 관심도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컬티즘에서 한 걸음만 내디디면 지식의 나무에 가게 된다.  오컬티즘을 공부하는 사람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어야만 한다.  그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는 더 이상 무지에서 나온 우
유부단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다.  그는 선의 길을 가든가 아니면 악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그리
고 명확하게 알고서 두가지 길 중에 한쪽 길로 한 걸음만 내딛게 되어도 엄청나게 큰 카르마의 결
과를 낳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향해 가는 그 목표에 대해서 불확실해 하며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
면서 걸어간다.  그들의 삶(인생)에 대한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그 결과로 그들의 카르마는 혼란
스럽게 작용한다.

  그러나 일단 지식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는 혼란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그리고 그에 따라서 카르
마의 결과들이 거대하게 증가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른 계(Plane : 界)에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컬티스트는 조금이라도 반신반의할 수가 없으며 일
단 그 입구를 넘어서게 되면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어른이 다시 어린이로 될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이다.  이제는 성장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으므로 다시
는 후퇴할 수 없다.

  카르마의 족쇄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는 그 자신의 개인성을 어둠 속에서 일으켜 세워 밝
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는 그의 실오라기들이 때가 묻은 것들과는 더 이상 접촉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 때들이 너무 달라붙어 끌어당기지 않도록 그의 존재를 고양시켜야 한다.  그는 단지 카
르마가 작용하는 그 지역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것 때문에 그는 그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존재를 버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바닥은 거칠
고 더럽거나 혹은 얼룩지게 하는 꽃가루를 가진 꽃들로 가득 차있거나 혹은 달라붙어서 애착물로
되어버릴 달콤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르지만 머리 위에는 항상 자유롭고 장애가 없는 하늘이
있다.

  카르마를 없애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늘을 보고 자신의 집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에테르(Ether)를 보고 자신의 집을 찾아라.  좋은 카르마를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은 혼란과 대
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수확하기 위해서 좋은 씨를 뿌리려고 노력할 때 수천가지
잡초들을 심지어는 거대한 잡초를 심게 될 수도 있다.

  그대 자신의 수호가를 위해서 씨를 뿌리지 마라.  그 열매가 이 세계를 양육할 수 있는 그런 씨
만을 뿌려라.  그대는 이 세계의 한 부분이다.  이 세계에 양분을 줌으로써 그대는 그대 자신을 기
르는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생각 속에서조차도 제자가 직면하게 될 거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즉 오랫 동안 제자 자신이 선을 위해서 일을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의 혼
속에서는 단지 악만을 인식해왔다.  말하자면 그 자신이 이 세상에 많은 보탬이 되려고 의도해 왔
다고 생각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그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카르마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
서 그가 큰 보탬을 위해서 일했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일했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그 자신이 보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부인하
는 바로 그 속에서 보상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제자가 자기 자신을 억제함
으로써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혼은 구속에서 해방되어져야 하며 욕망들은
자유로와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보상도 처벌도 없으며 선도 악도 없는 그런 상태에 고정되어질
때까지는 아무리 노력해봤자 모두가 허사다.

  큰 진전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자기 자신의 혼과 정면으
로 마주보게 될 것이고 그가 지식의 나무에 도달했을 때 자신은 달콤한 것이 아닌 쓰디 쓴 과실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결국 베일은 걷히게 될 것이고 그는 자신의 자유를 포
기하게 될 것이며 욕망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컬티즘의 삶으로 향하는 자 그대는 경계해야 한다.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그
것에 그대의 시야와 청각을 고정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욕망을 치유할 수 있는 보상에 대한 바램과
갈망의 비참함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지금부터 배워라.

  지금부터라도 실천에 옮겨라.  그러면 수천 마리의 뱀들이 그대의 길을 막지 않을 것이다.

  영원(永遠) 속에서 살아라.

  카르마의 실제 법칙들의 작용에 대해서는 제자가 더 이상 카르마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지점
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배울 수가 있다.  '비전을 받은 자(initiate)'는 대자연의 비밀을 요구할 권리
가 있으며 인간사를 지배하는 규칙들을 알 권리가 있다.

  그는 대자연의 제한과 인간사를 지배하는 규칙들로부터 그 자신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이러한 권
리를 획득했다.  그는 이제 인정받는 신성한 요소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일시적인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덧없는 상태들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러므로 카르마의 법칙을 이해하기를 원하는 그대는 먼저 그대 자신을 이러한 법칙들로부터 자
유롭게 하라.  그리고 이것은 이런 법칙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바로 그것에 그대의 주의를
고정시킴으로써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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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의 힘과 효력


사념의 힘


신지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신지학을 단순한 사변적 철학체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신지학은 전혀 사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신지학은 절대적인 사실을 관찰하고 자연의 현상 및 그 힘에 의해 행해지는 실험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신지학을 학습하게 됨으로써 인생의 실제적인 규범을 얻게 된다. 그것은 삶의 모든 순간마다 신지(神知)가 학도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지학이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신지학도는 세계 속의 세세한 부분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세계 전체를 알게 되며, 또한 진화법칙을 이해함으로 인해 삶을 현명하게 살게 되고, 한계가 있는 육체적 감각의 범위 내에 있는 극미한 부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반적인 본성에 관해서는 다른 저서에서 기술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그의 세계에 있어 가장 뚜렷한 특성의 하나인 보다 섬세한 물질(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성한다)의 인간의 사고와 감정에 대한 급속한 반응에 주의를 집중해 보자.

  

이 주제에 관해서 학습한 적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사고와 감정의 힘이 절대적인 실재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러한 힘이 보다 섬세한 물질에 영향을 주는 것은 증기나 전기의 힘이 물리적 물질에 영향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량의 증기와 전기의 힘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확실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상위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적인 효과를 생겨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질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무한한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힘을 상당량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은 물질적 부나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상위 여러 계의 부는 이러한 힘을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으며, 또한 누구든지 이룰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힘은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지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를 탐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확실히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모든 것을 의식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그러한 힘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무지로 인해 힘을 잘못 사용하고 있으며 선보다는 악을 행하는 쪽이다. 힘을 지닌다는 것은 책임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장 필요한 것은 알지 못하는 동안에 악을 행하지 않고 그처럼 위대한 힘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이 주제에 관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사념의 특성


그러면 사념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작용하는가? 신지학에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인간은 우리의 태양계에 상호심투해 있는 각각의 세계에 대응하는 다양한 매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욕망, 정열, 감정의 매체를 아스트럴체라고 부르며, 생각을 표현하는 매체는 멘탈체라고 부른다. 멘탈체는 아스트럴체보다 좀더 섬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보다 높은 매체이다.


투시가의 눈으로 보면 맨 처음으로 보이는 것이 이 상념의 매체인 멘탈체이다. 그것은 멘탈체 안에 있는 물질의 진동에 의해 나타난다.


이 진동으로 인해 여러 효과가 생겨나는데 그와 같은 모든 것은 이 물질계에서 일어나는 과학적인 효과와 상당히 닮았다.


첫째, 멘탈체 자체에서 생기는 영향이다. 이것은 습관을 만들어내는 성질임을 알 수 있다. 멘탈체에는 서로 종류가 다른 물질이 많이 있고, 그러한 것들은 각각 고유의 진동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개개의 물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진동에 대해서는 쉽게 반응하기 때문에, 강력한 사념이나 감정에 의해 바깥쪽이 비워지면, 가능한 빨리 자신의 고유한 진동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사념이 충분히 강하다면 멘탈체의 모든 물질을 잠시동안 자신과 같은 진동을 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다음 번부터는 반복이 좀 쉽게 이루어진다. 그와 같이 해서 습관이 되어 멘탈체에 형성되면 사람들은 특정한 사념을 반복하게 된다.


둘째, 밀도에 따라 멘탈체의 위와 아래에 있는 인간의 다른 매체에 미치는 영향이다. 물질계에서는 어느 한 종류의 물질을 뒤흔들어 섞으면 그것은 쉽게 다른 종의 물질로 전해진다.


가령, 지진이 일어나면 바다에 커다란 파도의 물결을 일으키며, 또 폭풍에 의한 공기의 흐름은 그 아래 있는 대양에 파도를 일으켜, 얼마 후 커다란 파도의 물결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아스트럴체의 동요(바꾸어 말하면 우리들이 보통 감정이라 부르고 있는 것)는 멘탈체에 진동을 주어 그 감정에 대응하는 사념을 일으킨다.

역으로 멘탈체의 움직임 중 아스트럴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스트럴체에 영향을 미친다. 즉, 이것은 어떠한 종류의 사념이 쉽게 감정을 자극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멘탈체의 진동이 그것보다 농밀한 아스트럴체의 물질로 전해져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다 더 섬세한 원인체의 물질에도 필연적으로 전해져 간다.


이와 같이, 사람의 습관적인 사념은 그 자신의 에고의 특질을 만들어 간다.

지금까지 사념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같은 사념은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사념은 감정에 작용할 뿐 아니라 사념을 품는 사람에게 영속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자신의 바깥에 주는 영향을 생각해보자. 마치 대기가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사념은 우리들 모두를 둘러싸고 있는 멘탈 물질의 바다에 영향을 준다.


셋째로 모든 사념은 방사성의 파동을 발생시키고 있다. 그 파동은 처음 생겨난 사념의 성질에 따라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다. 이 진동은 멘탈계에 머무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의 위와 아래의 계(界)에도 영향을 미친다.


만약 사념이 순수하게 지적이고 비개인적인 경우에(가령, 어느 철학체계에 대하여 생각한다거나, 혹은 대수나 기하학의 문제를 풀려고 할 때) 발생하는 파동은 멘탈 물질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만약 영적인 성질의 것이라면, 즉 그의 사고(思考)에 사랑이나 영적 열망, 혹은 깊은 헌신의 감정이 섞여 있다면, 그 파동은 상위의 멘탈계 영역까지 올라가서 직관적으로 장엄함과 영광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의 파동은 대단히 강력한 것이 된다.


이에 반해, 만약 사념이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의 일이나 개인적인 욕망에 치우쳐진 것이라면, 그의 진동은 아래로 내려와서 그의 힘의 대부분을 아스트럴계에서 소모해 버린다.

이러한 파동은 모두 광(光)이나 음(音)의 파동이 이 물질계에 작용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각각 대응하는 수준에서 작용한다.


파동은 모든 방향으로 확산되지만, 그의 힘은 처음 발생했던 거리로부터 멀어져감에 따라 감쇠해간다. 그러나 파동은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멘탈 물질의 바다에 작용할 뿐 아니라, 그의 바다 안에 움직이고 있는 다른 멘탈체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실험으로, 피아노의 음이나 바이올린의 현에서 울리는 음이 똑같은 피치로 조정되어 있는 같은 종의 악기에서 그에 대응하는 음을 생겨나게 하는 실험이 있다.

하나의 악기에서 발생한 진동이 공중에서 전해져 다른 악기에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멘탈체에서 만들어진 사념의 진동은 주위의 멘탈 물질에 의해 전달되어 다른 멘탈체에서 재생된다.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사념은 전염되기가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에서 이것에 관하여 고찰해 볼 것이다.


넷째로 모든 사념은 진동뿐만 아니라 형태(像)도 만든다. 그 상은 확실하고 독립되어 있는 물질로서 여기에는 힘과 생명력이 부여된다.


대부분의 경우 일시적으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작용하지만, 그것은 진동과 똑같이 멘탈계에만 머물기도 하고 아스트럴계의 수준까지 내려와 감정의 세계에 주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사념상의 연구는 매우 흥미 있는 것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해설과 채색도는 「사념형태(Thought forms)」(리드비터, 베산트 공저)를 참조하라.


지금 당장에는 그러한 것들을 나타내는 것보다는 사념의 영향이라든가, 또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사념의 작용에 대해 주목해 보자.


사념파의 작용


그러면 사념의 힘이 나타나는 두 가지 현상에 대해 고찰해 보자. 진동은 사념의 특성에 따라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힘은 주로 멘탈 물질의 네 개의 단계 중에서 하나로 향하게 된다. 네 개의 단계란, 멘탈계의 아래쪽을 이루는 네 개의 층을 말한다.


보통 사람의 사념은 대략 그 자신이나 그의 욕망, 감정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최하위 단계의 멘탈 물질만이 진동한다. 실제 대다수의 모든 사람이 아직 멘탈체가 완전히 발달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멘탈체의 상태는 아스트럴 매체의 상태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통의 교양을 지닌 사람이면 아스트럴체는 육체와 똑같이 충분히 발달해 있고, 그것을 완전히 의식의 매체로서 사용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아직 아스트럴체를 육체와 같이 사용하는 습관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 힘에 자신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아스트럴체의 힘은 모두 그대로 있다. 단지, 문제는 사용하는데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사람이 아스트럴계에서의 행동을 인식한다면, 잠자고 있을 때나 혹은 죽은 후이거나 그는 충분히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갈 수 있다.


하지만 천상의 세계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나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그것은 멘탈체가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인류가 놓여있는 진화과정이 바로 멘탈체의 발달이다.

멘탈체는 비의(秘儀)를 얻어낸 대동포단에 속하는 스승들의 지도아래 특별한 훈련을 받은 자만이 매체로 사용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 그저 부분적으로만 발달해 있으며, 결코 의식을 독립된 매체로 사용할 수는 없다.


거의 대다수 사람들의 멘탈체의 상위 부분은 멘탈체의 하위 부분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조차 아직까지는 휴지상태에 있다. 이것은 멘탈계의 대기 전체에서 가장 아래의 층에 속하는 진동이 파장을 내고 있어도 높은 층에서는 비교적 활동이 적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사실은 훗날 사념의 힘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실제적인 가능성을 고찰할 때 필요하기 때문에 확실히 마음에 새겨두어야 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사념의 파장이 뚫고 나가는 거리와도 중요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사념의 파장이 관통하는 거리 그리고 다른 멘탈체에 영향을 주는 강도와 지속력은 처음 일어났을 때의 사념의 강도와 명확성에 달려있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의 소리의 파장을 공중에 방사시켜 그것이 여러 방향으로 퍼져서 청취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의 소리가 닿는 거리는 발음의 강도와 명확성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강력한 사념은 약하거나 불확실한 사념보다는 훨씬 먼 곳까지 도달한다. 하지만 강도보다는 명확성이 보다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사업이나 오락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의 귀에 대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는 것처럼, 아무리 강력한 사념파일지라도 이미 다른 생각에 몰두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든 주의력을 필요로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명확하고 강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방사된 사념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들은 늘 그런 영향력의 범위 안에 있게 된다.


이런 파동은 매우 뚜렷한 순응성을 갖고 작용한다. 모든 점에서 곧바로 반응을 하는 멘탈체를 찾아내었을 때는 똑같은 파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도 대체로 원래의 파동과 비슷한 정도의 영향을 줄 수가 있다.


가령, 어떤 카톨릭 교도가 성모 마리아 상 앞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하자. 그의 강한 기도의 파동이 파도를 일으켜서 여러 방향으로 펼쳐지게 된다. 만약 그 파동이 다른 카톨릭 교도의 멘탈체나 아스트럴체에 닿으면 기도하고 있는 사람의 원래 파동과 똑같은 사념과 감정이 불러 일으켜질 것이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 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개신교도나 다른 종파의 신도에 파장이 닿으면 역시 기도를 하고 싶은 기분은 생겨나겠지만, 그의 감정은 자신의 종파에 익숙한 방향을 취해 그리스도에게로 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파동이 회교도에게 닿으면 알라에게 향하는 기도의 기분을 일으킬 것이고, 힌두교도의 경우에는 크리슈나에게로 향하며, 조로아스터교도의 경우는 아후라마즈다에게로 향할 것이다.


그 파동은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기도의 기분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심지어 기도의 기분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는 유물주의자의 멘탈체에 닿았을 경우에도 역시 고상한 효과를 일으킨다. 그 사람은 전혀 익숙하지 않은 진동을 바로 만들어 낼 수는 없겠지만, 그 파동이 지닌 경향은 그의 멘탈체의 상위부분을 진동시켜 어떤 행동을 부추기게 할 것이다. 공감하는 정도로는 효과가 계속 유지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악의나 불순한 사념의 작용도 같은 법칙에 따른다. 미움이나 시기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그것과 닮은 격정을 일으키도록 파동을 방사한다.


그러한 파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미운 감정의 대상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따라서 감정의 대상을 미워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파동의 방사로 인해 전혀 다른 사람에게 같은 종류의 악감정을 일으킨다.


사념형태의 작용


사념형태의 작용은 파동의 작용보다는 한정되어 있지만 훨씬 정확하다. 사념형태는 파동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실제에 있어 사념형태는 같은 형태의 파동에너지와 조화되는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작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념 형태의 힘과 가능성에 관해 분류해 본다면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확고하게 다른 사람에게로 향해져 있는 사념을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이나 감사의(때로는 부러움이나 질투) 사념을 내보내는 것처럼, 이런 사념은 다른 어떠한 사념과도 똑같이 방사하는 파동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의 영향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같은 파동을 재생산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나 사념에 의해 만들어낸 사념 형태는 확실한 의도로 치우쳐 있다. 그것은 사념자의 멘탈체와 아스트럴체에서 떨어지자마자 사념이 향하게 되어 있는 상대방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서 그 사람에게 밀착한다.


이것을 충전된 라전병에 비유하는 것도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니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멘탈계와 아스트럴계의 물질은 병으로 상징되고, 거기에 들어간 사념의 파동에너지는 충전되어 있는 전기에 해당된다.


만약 사념이 어떤 사람에게 향해있을 때 그가 사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이거나 혹은 그의 마음 속에 접근한 사념과 조화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활발한 진동이 발생하면 사념은 바로 그 사람 위에서 방전한다.

당연히 그 결과로서, 이전에 이러한 파동을 가진 것이 없었다면 그 사념에 닮은 파동을 일으킬 것이고, 이미 같은 사념이 거기에 있었다면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그 때 그 사람의 마음에 진동이 전달될 수 없을 정도로 무엇인가 다른 일에 몰두해 있다면, 사념 형태는 그의 둘레에 떠있으면서 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게 될 것이다.

둘째, 사념이 다른 사람에게 향하지 않고 주로 사념을 품고 있는 사람 자신에 관련된 것이라면(실제 대부분의 사람의 사고는 그러한 것이지만) 파동은 늘 모든 방향으로 확산한다.


그러나 사념 형태만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의 둘레에 떠 있으면서 언제든지 그 사람에게 반응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의 마음이 다른 생각에 완전히 빠져 있는 한, 떠 있는 상은 그저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가 일련의 사고를 다 끝마치면 다시 말해 그의 마음이 잠시 쉬게 되면, 그의 사념 형태는 반응하는 기회를 찾아내어 바로 같은 사념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즉, 그의 마음에 이전에 몰두한 적이 있는 일의 사념을 반복하게 해준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와 같은 사념 형태의 외피에 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때로 자신에게 압력이 덮치는 것 같은 느낌을 갖지만 그것은 둘레에 어느 일정한 사념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악한 사념이 떠오르는 경우 악마에 의해 유혹 당하고 있다고 믿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유혹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셋째, 사념자의 둘레에 떠 있지도 않으면서 특별히 누군가에게 향해 있는 것도 아닌 한 무리의 사념이 있다. 이 경우에 만들어지는 사념 형태는 사념자의 둘레에도 머물지 않고 특별히 다른 사람을 향해 끌려가지도 않으면서 그저 특별한 용도나 목적 없이 그것이 만들어진 곳에 떠돌고 있다.


사람은 각각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사념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한 것들은 그로부터 떨어져서 어느 정해진 대상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 형태, 그의 둘레에 모여서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형태, 그가 지나는 길을 따라서 일종의 선을 그어서 그의 발자취를 표시하는 형태가 있다.

대기 전체는 세 번째 형태의 어렴풋하고 애매한 사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걸어 나갈수록 이러한 팽배한 양의 사념 안에서 혹은 사념에 닿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마음이 다른 생각에 의해 확실하게 점유되어 있지 않다면, 이러한 다른 사람의 사념들은 멍하게 있는 사람의 마음속을 뚫고 지나간다. 그러한 것의 대부분은 특별히 마음을 끌지는 못한다.

그러나 때로는 주의를 끄는 사념이 들어오면 마음은 그것에 끌려 잠시동안 즐거워 한 후에 그것이 들어왔을 때보다는 좀 강화된 상태로 방출한다.


물론, 이처럼 여러 가지 발생의 기원이 다른 상념끼리 섞여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일관된 것이 없다. 당연히 이러한 것의 어느 하나에서 사고를 시작해서 일련의 관념의 연상이 시작되기도 하고 그 자신에서부터 사고를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훌쩍 생각이 들어와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왜 생겨난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동안 어떻게 해서 이러한 특정한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일까?������라고 자문한다면, 그리고 그때까지 자신의 사고의 줄거리를  돌이켜본다면, 그는 그사이에 수많은 쓸모 없는 무용의 사념이 마음속을 지나간 것을 알고는 대단히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것의 4분의 1은 자신의 사념이 아니며, 그저 지나가면서 취한 사념의 결합에 불과하다. 대체로 그러한 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며, 일반적인 경향으로 보면 선이라기보다는 나쁜 편으로 기울어져 있다.


사념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이제 사념의 작용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실제 문제에서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좋을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이런 지식을 통해 어떻게 우리들 스스로 진화해가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사념의 작용을 과학적으로 고찰해보면 우리들이 진화에 관하여 보통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모든 사념과 감정은 하나의 성향을 강하게 하기도 하고 약하게 하기도하여 영속적인 효과를 생기게 한다. 더욱이 모든 사념파와 사념 형태는 그 사념이 향하는 상대에게 필연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임으로 마음에 품은 사념과 감정은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통 사람은 감정을 점검해보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느끼면 그는 자신의 감정에 몸을 맡기고 그것을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념의 힘이 작용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사람은 그와 같은 감정의 발산을 하나 하나 세심히 짚어보고 그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기 이전에 자신의 진화에 해로운가 해롭지 않은가를 검토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에게 이익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감정은 나오는 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조절해야 한다. 현재 우리들이 도달해 있는 진화 단계는 멘탈체의 발달에 있으므로 이 문제를 보다 신중히 취급해 자신의 진화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음이 가는 대로 두는 대신에 마음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라는 것을 이해해서 마음을 조정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음을 불안정한 상태로 두어서는 안 된다. 멍하고 흐린 상태에서는 어떤 사념 형태일지라도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와트박사가 이전에 말했듯이, 악마는 한가한 사람을 찾아내어 악을 행하게 한다. 이 말은 위의 내용에 적용시켰을 경우 확실한 진실이다. 왜냐하면 멍한 상태의 마음은 좋은 인상보다는 나쁜 인상을 훨씬 쉽게 취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통제를 얻어내는 첫 걸음은 늘 마음에 유익한 생각을 지니도록 하는 일이다. 마음의 움직임의 배후에 확실하고 바람직하며 쓸모 있는 일련의 사념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해야 할 명백한 의무가 없을 때 언제든지 되돌아 올 수 있는 사념을 간직해 두는 것이다.


마음을 훈련하는 또 하나의 필요한 점은 해야 할 일을 철저히 해낸다는 신념을 마음에 새겨두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집중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완전히 하나의 일에 잠깐동안이라도 고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알 수 있다.


마음은 이것저것 헤매고 다니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다시 말해, 각기 다른 여러 생각들이 한꺼번에 섞여 들어온다. 하나의 주제를 단 5분 동안만이라도 마음에 고정시키려고 하면, 마음은 여러 차례 옆길로 빠져나가 몇 번이고 다시 그 주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집중 그것자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행히 그것을 해볼 기회가 자주 주어진다. 결국은 집중할 수 있게 된다면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그것에 주의를 집중하고 될 수 있는 한 높은 성취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편지를 쓰고 있다면, 세세한 사항에 대한 부주의로 편지의 목적이 흐려지지 않도록 매우 정확히 써야 한다. 책을 읽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소설이라 해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집어내어 거기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어야 한다.


무엇을 배우는데 있어 마음에 대한 확실한 훈련을 하지 않고는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겠다는 노력은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왜냐하면, 힘이 불어나는 것은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기만 한다면 마음은 늘 약한 상태로 남게 된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점은 자신의 에너지를 절약하는 요령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제각기 일정량의 에너지밖에 지니지 못하므로 그것을 얼마나 유효하게 잘 사용하는가는 자신의 책임이다.


보통 사람은 그의 힘을 가장 쓸모 없는 곳에 낭비해 버린다. 그러나 오컬티즘의 학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통 사람은 단지 불안정한 진동의 중심에 불과하다. 그들은 언제나 고뇌와 걱정을 가지고 있거나 매우 소심해 있으며 혹은 무엇인가 얻어내려고 애태우고 있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 그들은 늘 불필요하게 흥분해 있으며, 그것도 거의가 쓸모 없는 일에 대한 것들이다.


자신은 전혀 의식해 본적이 없겠지만 그들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는 늘 주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이러한 진동과 동요를 불행하게도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욕망이나 감정에 의해 불필요하게 흥분해 버린다. 감이 빠르고 쉽게 느낌을 받는 사람이 도시에 살거나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이 막대한 활력을 낭비해 버리는 또 하나의 원인은 불필요한 논쟁에 의해서다. 어떠한 의견이든, 설령 그것이 종교나 정치에 관한 것이든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의견을 제압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믿음을 갖고 살건 그것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며, 자기가 이 세상을 단 하나의 사상과 습관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진리는 여러 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 사람 혹은 하나의 신조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전체가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사고하는데 있어 의견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자신의 의견과 대립하는 견해를 가진 사람 또한 그러한 신조를 따르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람들이 논쟁을 일삼고 있는 대부분의 주제는 그토록 골치를 썩여가며 토론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가장 확고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일수록 아는 것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오컬티즘의 학도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물어오면 대단히 즐겁게 답을 해주지만 무익한 말싸움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않는다.

  

힘을 낭비하게 되는 또 하나의 원인은 마음의 걱정이다. 많은 사람은 늘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칠지 모르는 재난에 대해서 걱정한다. 즉 죽음이나 사후의 일에 대한 두려움 혹은 경제적인 파멸이나 사회적 지위의 실추 등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민한다.


막대한 양의 힘이 이와 같은 무익하고 불쾌한 면에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절대적인 정의로운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지고의 길로 올라가는 것이야말로 신의 의지이고 그와 같은 진보의 길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을 모두 버리게 될 것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자신에게 닥친 모든 것들은 진화를 돕기 위해 있는 것이며, 자신의 진화를 늦추게 하는 유일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임을 이해해야 한다.

자신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고민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며 가장 가깝게 있는 의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해 나가는 것이 자신에게 선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마음의 걱정이 남을 돕거나 심지어 최소한의 역할조차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많은 재난과 힘을 낭비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악의가 섞인 감정으로 힘을 낭비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말이나 마음에 걸리는 어떤 것으로 인해 화를 내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거짓이나 불쾌한 말을 했다 해도 십중팔구 그의 말 뒤에는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설령 그의 말에 악의가 있다고 해도 감정을 자극하도록 그대로 둔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다.


일부러 끄집어내어 오래도록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상처받거나 스스로의 감정에 의해 자극 받지 않는 한 불쾌한 말만으로 상처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말을 조용히 넘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다른 사람이 말한 것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면, 자신의 멘탈체의 동요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을 뿐,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없다.


다른 이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히려 행동하지도 않았으며 할 수도 없다. 만약 학도가 불쾌하게 되거나 마음이 상했거나 그에 의해 큰 고통을 겪게 된다면, 그 책임은 스스로가 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의 말로 인해 자신의 멘탈체나 아스트럴체에 동요가 온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자신의 매체를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아직까지는 이러한 모든 것을 혼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면서 다른 이들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평판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길을 걷고 자신의 일에 충실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사념의 영향


마음과 감정을 통제하여 쓸데없는데 힘을 쓰지 않는 것은 자신의 진화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만이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가령, 어떤 이가 화를 내게 되면 그것은 당연히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또 화를 내게 되면 그러한 충동에 저항하는 일이 더욱 힘들고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둘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그로부터 발산되는 진동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만약 그가 성난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들도 역시 그런 노력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는다 해도 이러한 자신의 행위는 그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그가 노(怒)한 감정의 파동을 내보내는 것을 그대로 두게 되면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마음, 즉 그들의 아스트럴체에 똑같은 진동을 일으킨다.


  


만약 그들에게 아직 그러한 파동이 없었다면 끌어 일으킬 것이고 이미 존재해 있었다면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동료의 자기개발을 더 어렵게 만들 뿐 아니라 무거운 짐을 그들의 어깨에 얹어주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만약 그가 노한 파동을 통제해 억제한다면, 그는 평온하고 부드러운 영향을 방출할 것이고, 그것은 똑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 모두에게 틀림없는 도움을 주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념은 필연적으로 주위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사념이 불순하거나 사악한 것이었을 때의 책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때의 우리는 주위사람들에게 도덕적 부패를 사방으로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 구석에는 악의 씨앗이 있다. 그러나 그 씨앗은 바깥에서 어떠한 힘이 가해져 활동하게 하지 않는다면 꽃이 피어 열매를 맺지 않는다.


  


만약 우리들이 불순하고 사악한 사념에 빠져 만들어 내는 힘의 파동은 그 씨앗을 발화시켜 길러주는 원인이 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그의 혼의 진화는 정체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주어진 충격은 뒤에 사악한 사념이나 말이나 행위로 꽃 피어 더 멀리 퍼져 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해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불순하거나 사악한 사념이라도 그 책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다.


  


다행히도 이러한 현상은 사악한 사념과 똑같이 훌륭한 사념에도 모두 해당된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랑과 온정과 평화의 사념을 끊임없이 방사함으로서 태양과 같은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참으로 눈부신 힘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이와 같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늘 신중해야 한다.


  


생각을 할 때는 가령, 어떤 사람의 일에 대해 생각할 경우 그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 힘이 작용해 차츰 그 이미지와 일치되도록 그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사념을 친구들의 장점에 맞추어 고정해야 한다. 그것은 그의 어떠한 자질을 생각하든 간에 그의 파동을 강하게 하여 그러한 자질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하나의 실례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남에 대한 험담이나 추문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도 없이 행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무서운 악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만큼은 비난을 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 중에 버릇없이 행동한 사람이 있을 때, 사람들은 절대로 그의 장점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사념을 그의 단점에 고정시켜 버리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단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의까지도 거기에 끌어넣는다. 이와 같은 경우, 그들은 그의 그러한 진동을 강화시켜서 결과적으로 그의 나쁜 재질을 키우게 되고 만다.


  


역으로, 이 악덕이 그들 자신의 터무니없는 사상 안에서만 있는 것이고 욕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대부분이 이것이 실상이다), 그들은 이 단점을 자신의 힘이 미치는 영역까지 그 사람의 내부에 만들어 내게 된다.


만약 이 희생자 안에 악덕의 씨가 숨어 있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불미스러운 노력은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확실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우리들은 마음속에서 그들의 높은 이상을 두고, 그들이 얼마 후 거기에 이르도록 강하게 원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의 성격에 어떤 결점이나 악덕이 있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절대 그러한 것에 마음을 두어 그것을 강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는 그들의 높은 이상에 대하여 강력한 사념을 만들어 그 파동을 우리들의 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보내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경우가 있다.


  


������정말이지 이러이러한 부인은 성격이 급하기 짝이 없어. 잘 알고 있지? 그녀는 어제도 이러이러했어. 들어서 알겠지만 그녀는 언제나 너무 심해������


  


이런 것이 또 한 사람에 의하여 그녀의 가장 친한 30-40명의 친구들에게 반복된다. 몇 시간만에 몇 백명의 사람들 모두가 성급하기 짝이 없는 것에 대하여 집중적인 사념파를 이 불행한 희생자에게 쏟아 붓게 된다.


  


그녀는 얼마 후 기대한 대로 그들이 비웃는 꼴로 되고 만다. 그로 인해 또 하나의 성급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보게 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못된다.


  


이러한 경우, 도움이 되어주길 원하는 사람이면, 화를 내며 남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각별히 주의해서 피해야 하며, 자신의 모든 힘을 모아서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그 부인이 지금보다 침착하고 평정한 상태에서 행동하면 좋겠어. 자신이 조절하려고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우리들은 그녀가 자신의 성스러운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강하고 조용히 그리고 부드러운 영향력을 가능한 되풀이해서 내보내자.������


  


처음에는 노한 사념이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평안한 사념이다. 어느 것이나 똑같이 그의 목표를 찾아내 사념으로 향해진 당사자의 멘탈체와 아스트럴체 안에서 그것이 증식해 가는 것을 돕게 된다.


  


친구들의 일에 대해 모든 방법으로 될 수 있는 한 애정을 쏟아 생각하자. 그들의 장점을 생각하고 주의를 그러한 것들에 집중하는 것으로서 친구들을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자.


  


우리들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결점을 비난할 때 보여주는 것과 같은 정도의 열의를 가지고, 우리들의 비판을 그들의 진수에 이르게 하는 적절한 것들로 해야 할 것이다.


사념에 의한 자기 개발














사람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생각이나 격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 몇 번이나 노력했지만 언제나 실패했지. 그래서 그러한 노력은 아예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되었어.������


  


이러한 생각은 아주 비과학적인 것이다. 만약 나쁜 재질이나 습관이 우리 안에 일정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전의 여러 생애에서 그런 힘이 누적되도록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힘을 쉽게 억제할 수 있었던 시기에 저항하지 않고 그것이 그대로 불어나게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통제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일정한 한가지 방향으로만 사고하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사고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누적해 두었던 에너지의 양은 어차피 유한하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들이 몇 번의 생애에서 그 에너지를 비축했다 하더라도 그것에 써야 할 시간은 역시 유한한 것이며, 그 결과도 당연히 유한한 것이다.


  


만약 지금 우리들이 과거의 잘못을 알아내어 그 습관을 통제하여 충동을 중화시켜 보겠다고 노력한다면, 그 습관의 뿌리에 작용했던 똑같은 힘을 역방향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많은 시간 동안 계속된 습관을 완전히 중화할만한 충분한 힘이 금방 나오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노력은 그 누적한 힘을 감소시킬 것이다.


  


우리들은 영원히 살아가는 혼으로서 무한히 힘이 나오도록 할 수가 있다. 우리들은 끌어낼 수가 있는 무한한 힘을 저장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인내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결국에는 틀림없이 성공한다. 어느 정도의 실패를 여러 번 반복했다 하더라도, 그 때마다 누적된 힘은 다소라도 감소할 것이며, 결국 그것은 우리보다는 먼저 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끝내 성공하는 것은 단지 기술상의 문제일 뿐이다.


  


당신은 기차의 차장이 정지한 큰 화차나 객차를 착실히 밀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바라는 곳에 운반해 갔을 때, 그는 어떻게 해서 그것을 정지시키는가?


  


아무리 전력을 다 쏟아 넣는다 해도 한번에 세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는 객차 앞에서 나가는 힘을 되밀어가며 서서히 후퇴하면서 힘을 넣어 되돌린다.


  


그러나 객차의 진행에 대항하고 있는 힘은 결코 멈추지 않으면서 차츰 그 객차의 힘을(이것은 습관이 만들어진 뿌리의 힘에 해당한다) 약화시켜 끝내는 그것을 정지시키고 만다. 이전의 카르마를 제압하는 것의 좋은 실례가 아니겠는가!


사념에 의한 원조


이러한 사념의 흐름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 슬퍼하거나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볼 때 언제든지 도움의 손길을 뻗칠 수가 있다.


  


이 물질계에서는 종종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그의 육체의 뇌는 편견이나 종교적 고집에서 우리들이 권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는 육체보다는 훨씬 감수성이 뛰어나기에 도움이 되는 사념이나 사랑의 파동과 감정에 의해 그것에 가깝게 접근할 수가 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은 섬세한 물질에 있어서나 농밀한 물질에 있어서나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므로 우리들이 내보내는 에너지는 틀림없이 그 목표에 이르고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을 위로하고 도와주기 위해 내보내는 사념 형태나 사념이 그 사람에게 도착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형태(想)나 이데아가 도착했을 때, 그것이 그의 마음에 확실히 나타나느냐 아니냐는 우선 그 사념의 명확성에 달려있고, 다음은 그때의 정신상태에 달려있다.


  


그가 자신의 시련이나 고통에 완전히 마음을 뺏기고 있어 우리들의 사념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우리의 사념 형태는 단지 그 주변에서 머물며 기회를 엿보다 그의 주의가 소홀한 틈이 생기거나 그가 지쳐버려 자신의 사고의 흐름을 중지했을 때 가차없이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자비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 물질계에서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현실적인 원조를 해주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멘탈계나 아스트럴계에서는 사랑의 사념을 착실하게 집중하면 반드시 도움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인 구제라고 말하는 형상은 사념이라고 하는 것이 심지어 이 물질계에 있어서도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아스트럴 물질이나 멘탈 물질에는 아주 쉽게 작용하기 때문에, 단지 실행해 보기만 하면, 그것이 실제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와 같은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나 버스나 기차를 탔을 때, 의기 소침해 있거나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가 그를 분발시켜 도와주기 위한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슬픔이나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태양은 여전히 세상을 비추고 있으며, 이승에서는 아직도 감사해야 할 많은 것과 선과 미가 풍부히 있다는 의미의 강한 감정을 보내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때에 따라서는 이런 실험의 결과를 바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즉, 우리들이 보낸 사념의 효과를 얻어 그가 벗어난 모습을 실제로 목격하는 때가 있다.


  


늘 그와 같은 현실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만약 우리들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똑같은 결과가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확신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학습이 미숙한 사람은 그가 사념을 보낸 사람에게 진정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믿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주 많은 경험을 해 이와 같은 행위를 실제로 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언젠가는 성공한 증거가 모여서 그 때는 의심을 하는 일이 없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각자는 이와 같이 해서,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살아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간에) 모두를 도와주는 일을 생활의 일부로 해야 한다. 육체를 가졌든 안 가졌든 멘탈체나 아스트럴체에 향해지는 힘의 작용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이런 착실하고 규칙적인 실행은 커다란 선이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그것에 의해 자신의 능력을 발달시켜 진보를 더욱 확실히 해나감과 동시에 이것에 의해 세상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출판된 정신요법에 관한 어떤 책에는 노력과 협동심에 대해서 신지학도가 매일 매일 기울여야 하는 태도를 예리하게 기술한 문장이 있었다.


  


������빵을 반죽할 때 거기에 사랑을 집어넣어라. 당신이 어떤 물건을 포장할 때, 그것이 슬픔에 찬 여인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힘과 용기를 함께 넣어서 포장해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나이에게 지불하는 돈에도 신뢰와 솔직함을 보태어 건네 주라.������


  


독특한 표현이지만 훌륭한 사고가 담겨있다. 매 순간이 우리에게는 기회이고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는 신지학적인 사고를 그대로 표현했다.


  


이리하여 선한 법칙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학도는 그의 둘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나누어주며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않는 것에 상관없이 어디서든지 겸손하게 선을 행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념을 통해서 모든 사람은 도움의 사념을 내보낼 수가 있고 또한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사념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남을 배려하고 남을 도와주고자 하는 사념을 내보낼 수 있으며 이러한 사념은 우주의 법칙이 존속하는 한 반드시 그 목적을 완수한다.


  


물론 항상 그 결과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치는 평화와 사랑의 거리에 뿌린 작은 종자에서 어떤 열매가 열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The Impersonal Life



조셉 S. 베너 / 번역 김은경


   서문

 

  두 통의 편지

 

1. 나

2. 고요하라 그리고 알라

3. 나, 생명, 신

4. 의식, 지성, 의지

5. 열쇠

6. 생각과 창조

7. 말

8. 나의 이상

9. 에덴 동산

10. 선과 악

11. 쓰임

12. 영혼의 동반자

13. 권위

14. 매체와 중재자

15. 매스터

16. 그리스도와 사랑

17. 귀향

18. 합일

 













서문


첫 번째 판에 부쳐...


이 메시지 안에 살아 있는 깊은 진실을 이해하려면,


읽을 때마다 그 진실에 다가가고자 간절히 염원해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그리고 고요하게...


지성을 가라앉히고, 당신의 영혼을 초대하여 이 가르침을 행하십시오.


한 번에 한 문장씩만 읽으십시오.


그리고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 진리에 반응하고


당신에게 명확한 의미를 전해올 때까지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무엇보다도,


이 메시지 전체에 걸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는


내부에 있는 위대한 스피리트이며


당신 자신의 영혼이며


그리고 개성을 초월한 자아라는 것을


깨닫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 자아는 당신이 실수할 때, 어리석을 때, 나약할 때,


그 실수와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말없이 지적해준 바로 그 자아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눈으로 자아의 이상을 통찰하고


그 이상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꾸짖고 도와주었습니다.



조용한 상태에 있을 때 이 메시지가 다가왔습니다.


위대한 스피리트의 인도를 간곡히 염원하고 있었으며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봉사하고자 했습니다.


아버지, 그 분은 항상 존재하시며,


가슴과 생명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을


언제라도 축복하시고자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제가 받았던 도움과 인도가 당신에게 전달됩니다.


지혜롭고 아름다운 가르침은 너무나 훌륭하고 또한


완전히 개성을 초월해 있기에 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똑같이 적용될 것입니다.



이 메시지가 주는 가장 커다란 축복은, 만약 당신이 준비되어 있다면,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나"는 외부에서 가슴속으로 당신을 인도하며


계속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책을 잠시 접어두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친숙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찾아내도록 하며


당신의 지혜와 힘의 원천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평화와 건강과 행복과 자유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그렇기 때문에 이 작은 책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평안이며 당신 안의 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표현입니다.


또한 당신이 들어가고자 원하는 당신 주의 기쁨으로


향하게 하는 문, 혹은 채널이 될 수 있도록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



기념판 서문


3년 전, 고귀한 영혼의 인간적인 도구로서 역할을 하셨던 한 분은


영감으로 쓰여진 이 책이 세상으로 나가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나 전적으로 개성을 초월한 삶으로 귀의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페이지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담겨 있으며


그 메시지는 진정한 자아를 깨닫도록 이끌어줍니다.


저자에게 이 열 세 번째 판을 바칩니다.


또한 저자 내부의 그리스도인 초월적인 자아에게도 바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듣고 받아서 아버지의 말씀을 세상에 내보낸


모든 사람들에게도...


아버지의 사랑의 선물을 이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선물은 개성을 초월한 삶에 초대된 학도들과 친구들이 메시지를 통해서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이 삶 동안에 첫 번째 왕국을 찾고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저자가 이 세상을 뜰 무렵,


현재는 아버지가 세우신 그 뜻을 따르고 있는 따님이 아버지의 서류뭉치에서,


낡아서 다 헤진 서류 주머니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두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편지에는 주어진 메시지를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영의 숭고함과 헌신이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념판에 첨부시켰습니다.


이 책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소중한 선물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저자가 남긴 글들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장래에 새로운 형식으로 개정될 판에 대비해서 보완해야 할 부분을 세심하게


지적해 놓은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판에서 우리는 그 뜻을 따라서 몇 부분 교정을 했습니다.


내용은 바뀌지 않았지만,


많은 독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던 부분의 의미가 보다 명확해졌습니다.


새롭게 열 세 번째 판을 발행하면서,


이 임퍼스널 라이프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


사심 없이 헌신적인 봉사를 다한 그 분에게,


학도들도 그리고 발행인도 겸허한 마음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44년 11월 1일


편지 1...


1916년 9월 13일




신이시여 


당신은 모든 것을 제공해주십니다.


당신께서 제게 주시는 것은 결코 다 함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 모든 것에서 저는 충만함, 오로지 그것만을 느낍니다.



이로써 저의 생명과 당신께서 제게 주신 그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칠 것을 서약합니다.


당신께 봉사함으로써...


오로지 당신을 위해 일하고, 모든 것을 당신의 인도에 맡기고자 합니다.


저를 이끌어 주소서...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지혜와 분별뿐입니다.


그 지혜와 분별은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그 뜻과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주며


당신의 끝없는 베푸심과 도움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편지 2...


1917년 5월 17일



아버지께 


아버지께서는 제 심장에 "초월적 삶"이라는 메시지를


이 세상에 내놓고자 하는 커다란 열망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아버지 당신의 열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세상 가운데서 피어날 수 있도록 저를 선택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간곡히 바라옵나이다...


이러한 열망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 안에서 거두어 주옵소서.


"초월적 삶"이 제 삶 속에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어주옵소서.


그리고 수백만의 형제들도 당신께서 제게 보여주셨던 것을 보고


자신들의 삶에서 "초월적 삶"을 표현하도록 해 주소서.



아버지께서 이처럼 새로운 방법을 세상에 제시하는 대리자로서의 특권을


제게 주신 것처럼 하루속히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십시오.


그러한 아버지의 인도는 제가 걸어가는 길의 길잡이가 되어


아버지의 일이 가능한 가장 훌륭한 성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것은 아버지의 일이며 아버지의 생각이며 아버지의 열망입니다.


오, 주여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루 속히 저를 써 주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조셉 S. 베너.




1장 나


당신에게 


오랜 세월동안 여기 저기를 뛰어다니면서


책과 가르침 속에서, 철학과 종교에서


헤맨 당신,


하지만 진리가, 행복이, 자유가, 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당신을 위해


나는 말합니다.


지치고 낙담하여 희망조차 잃어버린 영혼의 소유자인 그대여


여러 차례 "진리"의 한 끝을 흘끗 보고


그것을 따라가서 잡으려고 노력했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사막의 신기루만이 남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스승을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단체나 종교에서 인정받는 스승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전달하는 지혜와 수행하는 임무가 너무나 거룩해서


당신 앞에 "매스터"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 "매스터"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결점과 나약함과 은밀한 죄를 가지고 있는


개성을 지닌 인간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개성을 통해 당신이 신성한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 아름다운 가르침을 전달하긴 했지만...


지치고 굶주린 영혼으로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른 채


당신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한 당신에게 내가 왔습니다.


당신도 "진리"가 존재하는 것을


영혼으로 느끼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후에 그 느낌은 내부에서 살아있는 표현으로 되기 위해


모호하게 소용돌이를 일으켰습니다.


이제 당신은 확신을 얻고 싶어합니다.


알고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의 양식"에 굶주린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왔습니다.


함께 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함께 하고자 한다면, 자신을 일깨우고 앉으십시오.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나의 말을 놓치지 마십시오.


가슴속에 목마름을 간직한 채,


또 다시 실망해서 돌아서는 일은 없도록 하십시오.


나! 


나는 누구인가?―


지식과 권위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나는?


들으십시오! 


나는 "당신"입니다.


당신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며 알고 있는...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언제나 알고 있었고 언제나 있어왔던...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입니다.


당신의 지고한 자아이며


나라고 이야기하고 내가 있음을 이야기해왔던


당신의 부분입니다.


초월적이며 가장 깊은 부분으로


책을 읽을 때면 그 속에 있는 나의 말에 반응하도록 내부에서 활기를 주었으며


진실을 발견하면 인지하도록 하고


실수가 보이면 수정하도록 했습니다.


나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스승으로 당신이 알게 될 오직 하나 뿐인 스승이며


유일한 매스터입니다.


나는 당신의 신성한 자아입니다.


나, 곧 당신의 나는 이 메시지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살아 숨쉬는 나의 말입니다.


삶 속에서 내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이 당신을 가르치는


교훈의 원천 혹은 "매스터"라고 생각하십시오.


나, 오로지 나만이 당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당신을 가르치는 단 하나뿐인 스승이며 유일한 신입니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단지 생명의 빵과 포도주만을 베풀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무엇인가를 읽을 때


내부에서 외부의 인간적인 의식으로 당신에게 호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메시지입니다.


당신의 내가 내부에서 언제나 알고 있다는 확신은 들었지만


아직까지는 당신의 외부의식에 명확하고 구체적인 용어로 옮길 수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밖으로 드러나서 당신을 감동시킨 모든 것은


이미 내부에서 이야기했던 나의 말을 확인시켜준 것뿐입니다.


밖으로 드러나서 표현된 것은 당신의 인간적인 자아의 의식에 도달해서


당신 안에 새겨 넣으려고 적절한 시기에 내가 선택한 길, 혹은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물론, 그 인간적인 마음에서 태어난 지성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당신 존재가 표현된 것일 뿐입니다.


마치 당신이 내 존재의 표현이듯이...


또한 그것들은 당신의 인간적인 성향의 단면일 뿐입니다.


당신이 내 신성한 성향의 단면이듯이...


심사숙고해서 주의 깊게 이 말을 살펴보십시오.


기치를 드높여서 지금부터는 당신 인성의 지배에서 벗어나십시오.


당신의 마음과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멋대로 우쭐거리면서 과대망상에 빠져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의 마음을 하인으로 여기고 지성은 노예로 다루십시오.


그래야만 나의 말이 당신 영혼의 의식 속을 꿰뚫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야 나는 당신 영혼의 의식에 다다랐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당신 의식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제, 그것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다면,


다른 사람이 가져다 버린 곳에서 모아온,


한낱 쓰레기밖에 안 되는


당신 자신만의 개인적인 공상, 신념, 의견을 옆으로 제쳐버릴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내던져 버릴 수 있다면...


그 때


내 말은 끝없는 기쁨과 축복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인성은 내 말을 의심할 것입니다.


당신이 이 메시지를 읽으며 나와 함께 하는 이 길 내내...


왜냐하면 인성은 생명의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 말이 당신의 가슴 깊숙이 자리해서 뿌리를 내리면


인성은 더 이상 삶을 유지할 수도 없거니와 자리를 잡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생각과 느낌과 세월이 다하도록 계속될 수 있는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모든 지배력도 상실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서야 내가 당신에게 왔습니다.


당신이 내 존재를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이


어느 정도는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습니다.


언제나 당신과 함께 했지만


당신은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의도적으로 당신을 그토록 황량하고 광대한


책과 가르침과 종교와 철학 사이로 이끌었습니다.


당신 눈앞에 약속된 땅의 비전을 계속해서 제시하면서...


당신이 영혼의 양식을 기억해내서 그 참 맛을 알고 찾을 수 있도록


사막의 만나를 먹였던 것입니다.


이제, 나는 당신을 당신의 신성한 유산과 분리시키고 있는


요단강으로 데려왔습니다.


드디어, 깨어있는 의식으로 나를 인식할 때가 온 것입니다.


우유와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으로 건너 갈 때가 되었습니다.


준비가 되었습니까?


가고자 합니까?


가고 싶다면 여기 이 나의 말을 따르십시오.


내 말을 모세가 받은 성궤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널 것입니다.


2장 고요하라 그리고 알라


("Be Still - and KNOW)


이제, 나를 알고자한다면, 그리하여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나라고 즉, 당신의 진정한 자아라고 확신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우선, 가만히 있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과 몸, 그리고 그 활동들을 잠재워서 마음과 몸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까지는 이렇게 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나를 알고자 하고 지금부터 내가 당신에게 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실행하면서 나를 따르고 나를 신뢰해서 내가 말한 것을 실증한다면, 당신에게 방법을 가르쳐줄 것입니다.


들으십시오! 


"나", 이 책 전체에 걸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당신의 신성한 자아로 여겨보십시오.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과 지성에 말을 걸고 충고도 하지만, 아직까지도 당신은 분리된 인격으로 여길 것입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경험하고 배운 것과 맞지 않거나 지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이 "나"는 당신입니다. 즉, 당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은 지성과 몸이 이기적으로 탐닉해서 제공한 과제에 너무나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며 매스터인 진정한 당신을 돌아볼 여지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몸과 지성이 느끼는 기쁨과 고통에만 귀기울여왔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당신은 자신이 지성과 몸이라고까지 믿게 되었으며 당신의 신성한 자아인 나를 거의 잊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지성도, 몸도 아닙니다. 이 메시지는 당신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제시하는 가르침과 당신에게 부과하는 주된 의무는 당신이 이 위대한 사실을 의식 속에서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을 노예상태로 만들어왔던 이 몸과 지성에 대한 의식을 던져 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부에 있는 나를 알기 전에 내부에서 나를 느껴야 합니다.


마음과 그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 그리고 몸과 몸에서 느끼는 감각으로부터 완전히 눈 멀고, 귀 멀고자 하려면, 내부에서 나를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의 가르침인 이 말을 성심성의껏 따라야만 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조용히 앉으십시오. 그리고 아주 편안해지면 마음으로 이 말의 의미를 받아들이십시오.


"고요하라!- 그리고 알라-나는-신이다"


아무런 판단없이 이 말을 받아들여 보십시오. 나의 신성한 이 말이 당신의 영혼 깊숙이 흘러 들어가게 하십시오. 당신의 마음 속에서 감지하는 인상이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받아들이십시오.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고 방해도 하지 마십시오. 그저 신중하게 느껴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당신입니다. 그리고 무언가 생생한 의미가 당신의 의식으로 전해져 오기 시작하면,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말하십시오. 나의 말을. 당신의 몸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모든 세포에게 그리고 당신 마음이 작용하는 모든 기능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의식적인 힘을 전부 동원해서 이 나의 말을 하십시오.


"고요하라!- 그리고 알라-나는-신이다"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이 말이 마치 여기에 씌어져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당신 안의 신이 당신에게 명령하고 간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근원적인 것이 아닌 당신의 부분이 그 명령과 요구에 따르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이 말을 탐구하고 그 숨겨진 가능성을 찾아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이 말과 함께 하면서 이 말 속에 잠기십시오. 창조적인 생각을 할 때, 이 말이 그 속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인이 되도록 하십시오.


이 말을 하루에 천 번 행하십시오.


당신이 내 안의 가장 깊은 뜻을 발견할 때까지,


당신의 몸을 이루는 세포들이 "고요하라!"라는 명령에 답하여 기쁨으로 전율하고 지체없이 이 말을 따를 때까지,


당신의 마음 주변을 맴돌던 모호한 상념들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 때, 이제는 텅 빈 당신 존재의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말처럼,


그 때, 당신 의식의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알아감(Know-ing)의 태양처럼,


그 때, 놀라울 정도로 신기한 호흡이 엄청나게 넘쳐 들어와서, 당신을 이루는 여러 부분 중에서 결국에는 변화하고 스러져 갈 모든 부분을 극도로 채우는 것을 느낄 것이고 그로 인한 희열감으로 당신의 감각은 거의 폭발해 버릴 지경이 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의 내부로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계속해서 밀려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이 땅에서 거의 들어올려질 것입니다. 그 때, 내 존재의 그 장엄함, 그 신성함, 그 영광을 당신의 내부에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때 당신은 알 게 될 것입니다. "나는 신이다"라고.


그러한 순간에 내부에서 나를 느끼게 될 때, 나의 힘을 감지하고 나의 지혜에 귀기울일 때, 그리고 모든 것을 감싸안는 내 사랑의 환희를 알 게 될 때, 그 때는 어떠한 질병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으며 외부환경으로 인해 약해지지도 않으며 그 어떠한 적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당신은 내부에서 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나에게 올 수 있으며 모든 면에서 나를 신뢰하고 내 의지가 표현될 수 있도록 나를 허용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오면,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 나의 실재와 나의 힘을 실현시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오로지 고요하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나에게 맡기면 됩니다. 당신의 질병과 다른 이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당신의 마음을 밝게해서 당신이 찾고자 하는 진리를 나의 눈으로 보게하거나 예전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을 완벽하게 하도록합니다.


이러한 지혜, 이러한 현실이 금방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름아닌 바로 당신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욕망과 인간적인 이해에 머물고 있는 당신의 인성은 아닙니다.


바로 당신의 나, 내부의 신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봉오리를 터트려서 꽃으로 피우는 이가 누구입니까?


병아리를 알에서 깨우는 이는 누구입니까?


날과 시간을 정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의식입니다. 나의 지성인 내부의 지성이 나의 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는 꽃으로도 병아리로도 표현되며 내 생각이 결실을 맺도록 합니다.


꽃이 피고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때 의지를 가지고 그러한 것을 행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의지를 접고서 나의 의지와 하나가 되었으며 내가 나의 의지로써, 꽃을 피우고 알에서 깨어나올 수 있는 시간을 정하게 하고 성숙하게 했습니다. 또한 내 의지가 주는 자극을 받아들여서 노력을 했고 그렇게 해서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인간적인 의식의 껍질을 뚫고 나오려고 수 천번은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인성으로.


그와 같은 노력은, 실체로 이루어진 형상의 세계와 손으로 잡혀지지 않는 꿈의 영역사이에 내가 드리워 놓은 문을 부수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고통과 괴로움을 견디면서 물리치지 않는 한, 당신의 개인적인 영역으로 침입해 오는 침입자를 더 이상 막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 속에서 예전에는 없던 힘을 얻고 앎을 가져다 주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단, 당신이 지식과 선을 얻고 나와 하나가 되어 자신에게 이롭게 하려면 모든 욕망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나의 신성한 본질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활짝 피어나게 할 수 있으며 인간적인 인성의 껍질을 던져 버리고 천국에 있는 나의 왕국의 영광스러운 빛 속으로 다가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나는 당신에게 이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나를 따라서 내가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을 성심성의껏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애를 쓴다면, 곧 나를 알 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이 쓰여져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것이라도 당신에게 제시해서 이해하도록 할 것입니다. 책이나 가르침, 혹은 자연이나 친구에게서.


만약에, 이곳에 쓰여진 말 중에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말을 버리기에 앞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찾으십시오.


단 한 문장이라도, 혹은 그 안에 있는 어떠한 생각이라도, 불분명한 채로 남겨두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탐구하고 분투한다면, 결과에 대해서 연연해 하지 말고 내부의 진정한 자아인 나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결과는 나의 관리하에 있으며 내가 알아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당신의 인성일 뿐입니다. 그러한 인성이 추구하는 대로 내버려둔다면 실패와 좌절만이 있을 뿐입니다.


3장 나, 생명, 신


지금까지 읽은 내용이 내부에서 반응을 일으켰다면, 그리고 당신의 영혼이 한 발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따를 준비가 된 것입니다.


아직도 여기에 적혀있는 말이 신성한 권위로 그럴 듯하게 위장한 것 같은 의심이 들고 반발심이 일어나면서 단지 교묘한 암시와 교활한 궤변으로 마음을 현혹시키고자 하는 것이라고 부추기는 당신 지성의 속삭임이 들린다면, 내 말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당신의 의식에는 아직도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말은 또 다른 표현으로, 다른 길을 통해 당신에게 가야만 합니다.


당신의 인성이 지성으로 당신을 부추겨서 권위에 의심을 품게하고 반항하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 당신은 아직까지는 나에게 속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인성이 그토록 반감을 갖게 만드는 것도 사실은 나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나는 여전히 자신의 개체성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당신의 인성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인성으로 몸과 마음을 충분히 단련시켰을 때 비로소 나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기 위한 준비를 하기 전에는 당신의 인성이 그와 같이 의심을 품고 반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일단 나의 권위를 알아차린다면, 인성에 의해서 세워진 권위는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성이 지배한 날들을 헤아리면서 당신은 더욱 더 나를 필요로 하게 되고 더 많은 도움과 인도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하지 마십시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 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읽기로 마음 먹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읽기로 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더 이상 읽지 않기로 했을 지라도 나에게는 계획이 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더라도, 혹은 그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할 지라도, 시간이 무르익으면 그 모든 위선과 미망속에서 내가 당신을 이끌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마침내 그것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 뿐이며 유일한 실재인 나에게 돌아설 것입니다.


그 때, 내부에서 응답을 하고 있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입니다.


"고요하라-그리고 알라-나는-신이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잊은 채, 그 곳에서 말없이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서.


그 사소한 어리석음과 나약함으로 인한 결과를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은 헛된 열망을 품었으며 야망에 사로잡혔으며 후회로 비탄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을 바라보며 적절한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로 왔습니다. 지치고 낙담하여 공허한 눈빛을 하고 아무 것도 없는 빈손으로.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당신을 이끌어 온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모른 채 간청합니다.


자신을 이끌어 달라고.


그렇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당신 안에서.


이 순간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당신을 이끌었으며 당신이 생각할 때나 행동할 때 영감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당신을 비롯하여 각자 나름대로 나를 표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초월적인 손으로 당신들을 가다듬고 빚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 가슴속 깊은 곳에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기뻐할 때나 가슴아파할 때에도,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에도 그리고 당신이 저지르는 모든 부도덕한 행동 중에서도. 또한 당신이 생각으로서 신과 동료에 반하는 부끄러움을 범했거나 죄를 지었을 때에도 함께 했습니다.


앞으로 곧장 걸어갈 때에나, 혹은 옆길로 빠지거나 아니면 뒤로 돌아 설 때에도 그 길을 인도한 것은 나였습니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나마 나를 흘끗보게 해서 당신을 북돋았던 것도 나였습니다.


넋이 나갈 정도로 황홀한 얼굴이나 아름다운 육체 혹은 꿈같은 즐거움이나 주체할 수 없는 야망으로 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서 당신을 매혹시켰던 것도 나였습니다.


죄와 나약함과 탐욕과 궤변의 옷을 걸치고 있던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 양심의 울타리 속으로 밀어 넣었던 것도 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자신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정체불명의 존재로부터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당신을 그대로 내 버려두었습니다.


결국 당신 스스로 무력함을 깨닫고 환멸을 느끼며 일어나서, 새로운 비전에 대한 영감을 감지하고 나의 가면을 찢어 버리도록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 모든 것을 하도록 했습니다.


볼 수만 있다면, 당신이 한 모든 것은 내가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형제 자매가 한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의 형제 자매 안에 있는 것은 나, 바로 나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의 육체를 활성화시켰으며, 사고 할 수 있도록 정신을 움직이게 했고 가슴이 뛰도록 했습니다.


나는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해 있는 자이며, 스피리트이며, 당신 존재를 활성화시킨 근원입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간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지 않은 존재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나, 초월적인 유일자인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티끌만큼의 제한도 허용함이 없이 무한합니다.


우주는 나의 몸이며 그 곳의 모든 지식은 나의 정신에서 뿜어져 나오며 모든 곳에 가득한 사랑은 나의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며 위대한 힘은 행동하는 나의 의지였던 것입니다.


모든 지혜와 사랑과 힘 혹은 당신이 말하는 대로 빛과 열기와 에너지는 세 가지로 표현된 삼위 일체의 의지력으로서 형상을 유지시킨 후 또 다른 표현으로, 또 다른 생명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의지력은 나의 자아가 행동으로, 혹은 존재의 상태로 표현된 것입니다.


표현된 모든 것 중에서 나의 모습이 있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나는 모든 형상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그 각각의 형상속에 거주하는 자입니다.


들어난 모든 형상의 가슴 속에서 나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슴속에, 동물의 가슴속에, 꽃의 가슴속에 돌의 가슴속에. 그 모든 가슴속에서 나는 살고 있으며 움직이며 나의 존재함과 함께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모습을 그 각각의 가슴 속에서 내보냅니다. 그러면, 그것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돌로, 꽃으로, 동물로, 인간으로.


그렇다면 이 위대한 나말고는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각각의 개체성이란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렇게 의심하는 당신의 물음이 느껴집니다.


맞습니다. 나, 유일하며 결코 다함이 없는 실제인 나의 일부분이 아닌 것, 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이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소위 개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분리된 존재로 있고자 하는 당신의 인성일 뿐입니다.


머지 않아 당신은 나의 개체성과 분리되어 있는 개체성이란 없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성 또한 나의 신성한 인성 속으로 사라져갈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나의 초월성을 잠깐이나마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그러한 깨달음의 상태에 다가갈 것입니다. 그 때는 더 이상 개체성을 원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신과 분리되기를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성이 원하는 또 다른 환영일 뿐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장 의식, 지성, 의지


그렇습니다. 읽을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당신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와서 복잡하게 얽히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의심이 들고 누구에겐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어렴풋하게 느껴졌던 공포심은 어느 사이엔가 희망으로 바뀌어서 점점 커져만 갑니다.


나의 의미가 인간적인 지성의 어둠 속을 스며들어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서, 당신은 진실을 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진실은 나의 말 속에 숨겨진 이면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이 나는 당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이것을 읽어나가면서, 의미를 보다 완전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당신의 인간적인 의식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 즉, 본연의 당신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다시 되풀이 합니다. 앞에서 말한 나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아주 극미한 원자에서부터 거대한 태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과 혼을 불어 넣어 주는 존재입니다. 또한 당신과 당신의 형제 자매 안에 있는 지성으로서, 모든 것이 살아가고, 자라나고,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지성입니다.


아마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어떻게 동시에 당신의 나이며 당신 형제의 내가 되는 지. 또한 그 내가 어떻게 돌과 식물과 동물에 깃들어 있는 지성이기도 한 지.


하지만 여기에서 하는 내 말을 잘 따른다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지 않아 내가 당신의 의식에 등불을 밝혀, 마음 속 가장 깊숙한 곳을 비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의 지성을 가리고 있는 세속적인 오해와 관념과 견해를 몰아낼 것입니다.


만약 나의 의미를 계속해서 읽고 이해하고자 진실로 간절히 노력한다면.


그러므로 주의깊게 읽으십시오.


나는 당신입니다. 즉, 당신의 진정한 자아, 진실로 당신에 속하는 그 모든 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환상일 뿐이며 진실한 당신, 영원하며 신성한 자아인 이 나의 그림자입니다.


나는,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 안에 점으로 초점화되어 스스로 "나"라고 부르는 바로 그 의식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의식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사실은 당신의 인간적인 의식에 맞추어 희미해진 나의 의식입니다. 희미해졌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나의 의식입니다.


당신의 마음에서 세속적인 모든 오해와 관념과 견해를 말끔히 몰아내서 완전히 비운다면 나의 의식은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 때 당신은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자기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게 될 것입니다. 즉, 사실 당신은 단지 나의 의식의 초점이며 나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통로 혹은 매체였던 것입니다.


아마 아직까지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지성에게 진실을 확신시켜서 당신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전까지는 믿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하나하나의 모든 세포에 의식이 있고 세포마다 나름대로의 지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만약 세포에게 이러한 의식이 없다면, 세포는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그토록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수 백만의 세포들이 함께 모여 있지만, 하나하나의 세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지성적으로 해내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일은 각각의 세포가 모여 이루어진 합일된 의식에 의해 조절되고 있습니다. 그 의식은 집단적인 지성을 형성해서 그와 같은 일을 지시하고 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집단 의식은 물론 세포가 모여 이루어진 기관의 지성입니다. 다른 기관에 있는 다른 집단의식도 마찬가지로 수 백만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당신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기관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육체를 구성하는 기관이 해야하는 일을 지시하는 지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기관 속에 있는 하나 하나의 세포는 이러한 지성을 전달하는 하나의 초점이라는 것도 알 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지성이 물러나 버린다면 세포들은 서로 흩어지고 당신의 육체는 죽어서 더 이상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활동하지 못합니다.


각각의 세포가 모여서 이루어진 신체 기관의 활동을 지시하고 조정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당신의 인간적 혹은 개인적인 자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당신은 단 하나의 신체기관의 활동도 의식적으로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면 진정한 당신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당신이 아닌 초월적인 내가 있어야만 합니다.


들으십시오. 


당신과 당신 안에 있는 나의 관계는 당신 몸 속의 세포 의식과 당신 안에 있는 '나' 의식의 관계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내 몸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인 것입니다. 역시 나의 세포인 당신의 의식과 나의 관계는 당신의 몸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 의식과 당신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의식이 나의 의식인 것처럼, 당신의 몸 속에 있는 세포의 의식 또한 나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포, 당신, 나 이렇게 우리 모두는 의식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당신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 중에서 단 하나의 세포도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 안에 있는 나라는 의식으로 들어올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임을 알 수 있다면, 그 때 당신은 당신 몸의 세포뿐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고자 한다면 다른 이들의 몸 안에 있는 어떠한 세포라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의식이 당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몸은 해체되고 세포는 흩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세포들은 자신들이 행하던 임무를 중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포들이 죽은 것일까요? 혹은 의식을 잃었을까요?


아닙니다. 세포들은 그저 한동안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른 세포들과 함께 모여서 새로운 형태로 결합됩니다. 그리고 조만간 생명을 담아내는 또 다른 매개체-광물이나 식물 혹은 동물-로 표현됩니다. 이를 통해, 세포는 원래 가지고 있던 의식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나의 의지가 명하는 바에 따라서 새로운 유기체에 합류하는데, 그 곳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대로 새로운 의식을 통해 또다른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포의식이 모든 몸-광물, 식물, 동물, 인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까요? 그리고 각각의 세포가 경험을 하고 나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임무를 다 수행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세포 의식은 어떠한 종류의 몸이라 하더라도 그 몸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모든 세포 의식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식은 초월적이며 자신이 행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그 어디에서라도 삶을 유지합니다. 하나의 형태를 완성한 후, 내가 원한다면 그 어떠한 의식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 안에서 새로운 의식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내 몸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이듯이 당신의 의식은 나의 의식이고 당신의 지성은 나의 지성입니다. 심지어, 당신의 의지 또한 나의 의지입니다. 당신을 위한 것 혹은 당신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나의 것이며 오로지 나만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의 의식과 나의 지성과 나의 의지는 근원에 닿아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그리고 나의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들은 하나입니다. 당신의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들 또한 하나인 것처럼.


나, 그리고 근원적인 나의 의식, 나의 지성, 나의 의지는 당신과 또 다른 나의 무수한 세포 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안에서 초연하게 일하고 있듯이 당신과 다른 이들 안에서도 나를 구성하면서 초연하게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 당신과 당신 형제들 안의 나 그리고 모든 몸 안에 깃든 의식, 지성은 하나입니다.


나는 그 모든 지성을 움직이고 있으며 생명과 혼을 불어넣어주며, 또한 모든 물질 안에 깃들어 있는 의식입니다.


만약 볼 수 있다면 당신, 진정한 당신, 근원적인 당신은 모든 곳에 있고 모든 것과 하나입니다. 또한, 내가 당신 안에 있으면서 모든 것 속에 있고, 당신과 그 모든 것을 통해 나의 실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안에 있고 나와 하나입니다.


당신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현재 의식과 지성 그리고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가 당신의 것이 아니듯, 당신이 자신의 의지라고 부르는 것도 당신 개인에게만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의식은 당신이 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내 의지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하루 빨리 자신 안에 있는 힘, 혹은 능력을 인식해서 깨어나게 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무한한 힘을 보다 풍부하게 허용할 것입니다.


온갖 힘, 그리고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은 내가 나의 의지를 사용하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의지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은 당신의 능력에 맞추어서 제공한 내 의지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데 이 힘을 사용하도록 허용한다면, 몸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당신의 힘을 시험하고 내 권능을 잘못 사용할 때 빚어지는 결과를 보여주고자, 나는 때때로, 소위 말하는 죄를 짓도록 하거나 실수를 유도합니다. 심지어는, 나의 현존이 당신 안에서 나의 권능, 나의 지성, 나의 사랑으로 발화할 때, 당신이 한껏 부풀도록 허용합니다. 이것을 당신 안에 허용하고 당신이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그냥 놔둡니다.


오래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그것은 당신의 입에 재갈을 물린 후 끌고 달아나서 당신을 진창 속에 빠뜨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의식 속에서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당신이 넘어지고 난 후, 언제나 나는 그 곳에서 당신을 끌어 올리려고 했습니다.


비록 그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넘어진 이유를 짚어주면서, 일단은 당신을 똑바로 일으켜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시 길을 가도록 했습니다. 마침내 당신이 완전하게 겸허해져서 그러한 힘을 사용함으로 인해 누적된 결과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당신은 나의 의지, 나의 지성, 나의 사랑의 의식적인 사용은 나의 봉사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일 뿐, 당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이루는 세포, 혹은 당신의 팔을 형성하는 근육이 당신의 의지와 분리된 의지를 행사합니까? 혹은 당신의 지성과 분리된 지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당신의 의지나 당신의 지성과 다른 것은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당신은 자신이 나의 몸 안에 있는 하나의 세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의지는 당신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고, 당신의 의식이나 지성 또한 온전하게 나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이라고 하는 개인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당신은 인간의 뇌를 담고 있는 물질 육체일 뿐입니다. 나는 질료 속에서 이상을 발화시킬 목적으로 그러한 육체를 창조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국면에서 이상이 가장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는 최고의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지금으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아니면 강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내재되어있는 본능적인 성향들은 보이지 않으며 감지할 수 없는 힘, 그러면서도 근원적이며 신성한 그 무엇에 굴복하는 것을 강렬하게 반대할 것입니다.


두려움을 갖지 마십시오. 그와 같이 반대하는 것은 단지 당신의 인성일 뿐입니다. 계속해서 나의 말을 따르고 새긴다면, 머지 않아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나는 당신 내부의 이해력을 활짝 열어서 지금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수 없이 많은 놀라운 진실을 전할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은 기쁨에 넘쳐 즐거이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그 말에 담겨있는 메시지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5장 열쇠


지금은 내가 누구인지 모를 것입니다. 내가 바로 진정한 당신이며 당신 형제 자매에게 있어서도 그러하듯이 모든 사람들이 나의 부분이며 나와 하나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바로 언젠가는 소멸될 당신과 당신 형제자매에게 있어서, 진정하며 결코 스러지지 않을 유일한 부분인 영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나의 또 다른 일면으로서 자연이라고 불리는 것을 통해서 표현된 것입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이, 언젠가는 사라져갈 육체와 마음과 지성과 함께 당신의 인간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한 부분인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과 당신의 형제자매가 신성한 나의 본성을 나타내는 한 국면 혹은 속성이라는 사실을 미쳐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아직 깨닫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말하고자 합니다. 만일 그것이 당신의 의식 속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면(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만), 당신은 그 징조를 알아 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징후를 인지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말하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숙고하고 탐구한 후에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의미가 어느 정도 전해지기 전에는 그냥 넘어가지 마십시오.


내가 여기에 풀어놓은 원리를 한번 이해하고 나면, 나의 메시지는 분명해지고 보다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우선, 나는 열쇠를 주고자 합니다. 그것은 지금은 당신에게 가려진 비밀스러운 나의 존재에 대한 모든 신비를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일단, 사용법을 터득하고 나면, 천상과 지상의 모든 지혜와 힘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열쇠는 천상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들어가서 나와 의식적인 합일을 이루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열쇠는 바로 이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즉, "당신의 가슴속에 있는 생각대로 될 것입니다"


잠시 멈추고 이것이 당신의 마음 속에 확고하게 뿌리 내리도록 명상해보십시오.


생각하는 자는 창조하는 자입니다.


생각하는 자는 자신의 의식에서 창조한 세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일단,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게 된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창조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새로운 인성을 만드는 것이든, 새로운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든, 혹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든.


이 열쇠로 숨겨지고 통제되는 어떤 숨겨진 진리의 뜻을 파악할 수가 없다면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당신은 어떻게 그 모든 의식이 하나인지, 그리고 어찌하여 그것이 나의 의식이며 더군다나 동물, 식물, 광물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이면서 또한 당신의 의식인지 보아왔습니다.


또한 이러한 의식이 어떻게 해서 나의 의지에 의해 조절되는 지도 보아왔습니다. 그러한 의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를 결합시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고 여러 가지 지성 센터들을 사용하고자 다양한 유기체를 형성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신과 내가 의식과 지성으로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물론이고 자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의 의식조차 조절하거나 통제하지 못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것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내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의식이라는 것이 초월적인 각성의 상태로 봉사하고자 대기하고 있으며 혹은 자신과 연관되어 내재되어 있는 어떠한 힘에 의해 통제되고 사용될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오직 인간만이 의식을 갖고 내부에 있는 이러한 힘에 의해 인도되고 사용되는 가장 진화한 유기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내부에, 모든 것의 내부에 있는 이러한 잠재된 힘은 단지 의지 나의 의지일 뿐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알고 있듯이 모든 힘이라는 것은 단지 내 의지가 현현된 것일 뿐입니다.


당신은 내가 애초에 "나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들어왔을 것입니다. 내가 호흡과 생명을 불어넣자 인간은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했던 것처럼, 나는 내 모든 의식과 내 모든 의지-그것은 바로 나의 권능, 나의 지성, 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를 표현할 수 있도록 인체의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나는 내 자신의 완벽함을 본따서 그것을 완벽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인체 기관에 내 숨을 불어넣자 그것은 나와 함께 살아 숨쉬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내가 늘 거하고 있던 천상의 왕국으로부터 불어넣은 것은 나의 의지였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인간 안에서 숨쉬고 살고 그리고 존재를 행사했습니다. 나는 오로지 그러한 목적으로 인간을 내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호흡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적이고 본질적인 자아보다 훨씬 더 위대한 무엇인가가 인간의 몸 안에서 인간의 폐로 호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 안에 강한 어떤 힘이 존재하며 폐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장을 통해 심장 안에 생명을 담고 있는 피를 불러들여서 폐를 거쳐 몸 안의 세포 구석까지 보내주는 힘이기도 합니다. 또한 음식을 소화 흡수하여 피와 조직과 머리카락과 뼈를 만들기 위해 위와 또 다른 기관들을 이용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뇌와 혀와 손과 발을 이용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러한 힘은 인간 안에서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한 나의 의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막론하고 인간은 바로 나이며 인간의 모든 행동 그리고 당신의 행동은 바로 나의 행동이며, 인간이 내뱉는 모든 말과 생각은 인간들의 기관을 통해서 바로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인간이 나의 호흡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지상의 모든 왕국에 대한 지배권 또한 얻게 되었다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상과 바다, 공기 그리고 에테르의 주인이라는 의미이며 이 모든 왕국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가 인간에게 경의를 표하고 인간의 의지에 종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의식 안에 내가 존재하며 나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 유기체 안의 주인이며 통치자인 나는 의식이 거하고 있는 모든 유기체의 주인이며 통치자입니다. 모든 의식이 나의 의식인 것처럼 나의 의식은 생명이 있는 모든 곳에 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생명이 없는 물질은 없기 때문에 나의 의식은 모든 곳-땅, 물, 공기, 불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습니다-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인간이 부르는 것처럼 공간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의식 안에 잠재된 힘을 심어주고자 나의 의지는 모든 곳에 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나의 의지의 초점이므로-또한 모든 곳에 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을 포함한 모든 유기체의 의식은 인간의 지도와 통제하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나,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내가 인간의 일생을 통해 매일 매일 한 순간 한 순간 모든 인간 유기체의 의식을 끊임없이 지도하고 조절하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자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의 생각을 통해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 유기체를 통해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유기체를 통해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나, 바로 진정한 나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내뱉어진 말을 통해서 나는 인간이 행동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고 인간과 인간이 사는 세상을 현재와 같이 있는 그대로 만들었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사는 세상이 인간의 생각대로가 아닐 지라도 다른 점은 없습니다. 나의 목적에 따라 내가 창조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만약 그 모든 생각이 나의 생각이라면, 인간은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는 것이냐고.


그렇습니다. 지금은 하나의 신비이겠지만, 다음에 나올 말을 주의 깊게 따라온다면 당신에게 진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인간-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르쳐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6장 생각과 창조


나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바로 나입니다.


나는 또한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완벽한 모순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인간들은 자신이 추측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에게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나, 인간 내부에 있는 내가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하고 있지만, 나는 인간의 기관, 인성, 육체, 그리고 마음과 영혼을 통해서 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지금부터 짚어 나가겠습니다.


첫째, 내가 당신을 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었다는 것과 당신 안에서 내 존재를 행사한다는 것을 이해해보십시오. 지금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신, 즉 내가 어디인지 외부에 있다고 믿으며 우리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당분간 내가 당신 안에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다음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 생각은 깨어있는 생각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 속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이상과 생각을 불어 넣어주고 이끌어주는 나를 의식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다음에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당신 내부에 있으며 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진 당신은 또한 내 모든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며, 또한 내 신성한 힘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동안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거나 당신이 말하듯이 그릇된 생각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잘못사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의 권능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 그러한 그릇된 생각은 나로부터 당신 자신을 의식적으로 점점 더 멀리 분리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당신에게 밝혀지게 될 나의 목적을 변함 없이 완수해왔습니다.


그러한 증거는 당신이 나에게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바로 당신이 물질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과 당신의 몸이 살로 이루어져 있으며 즐거움과 고통의 감정이 교차하고 내 의지에 반하는 악이라 부르는 사악한 기운을 세상에 퍼뜨리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모든 것이 그렇게 되도록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당신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바, 그리고 믿는 바에 따라 즉, 소멸해갈 인간의 의식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인간이 그러한 모든 것을 생각하는 그대로 나타나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내 목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창조의 법칙을 완수하는데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당신이 어떤 것을 어떤 방식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있어서는 진정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나 악, 혹은 소위 말하는 슬픔이나 고통, 걱정거리와 같이 당신에게 실제로서 느껴지는 그것은 비록 당신이 실제한다고 생각하고 믿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해도,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며 당신의 견해를 어리석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의 몸, 당신의 인성, 당신의 성격, 당신의 환경, 당신의 세계 이 모든 것은 현재의 상태가 되도록 당신 스스로 생각해왔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같은 과정을 통해 그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생각을 통해 당신이 바꾸고자 하는 어떤 방법으로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불가능할 것 같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진정한 생각, 즉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생각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당신이 묻는군요.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나, 당신의 진정한 자아인 내가 의도적으로 당신을 현재의 이러한 불유쾌한 상황으로 주의를 돌리도록 하였으며, 또한 당신이 그러한 상황을 지금 보이는 것처럼 보도록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신념과 믿음을 가지고 당신이 내부의 나에게로 돌아섰을 때, 나 오직 나만이, 지금은 그렇게도 불만족스럽게 느껴지는 상황의 실체를 보도록 하고 또한 그것을 밖으로 들어낼 수 있도록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을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나는 모든 물질적인 외관은 인간의 마음에서 보았을 때는 환영이라는 것과 인간적인 이해가 얼마나 오류를 범하는지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을 유혹하여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도록 겉으로 드러나는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제시했습니다. 결국, 당신은 내부에 있는 나와 나의 지성-그것은 오로지 하나 뿐인 해설자이며 안내자입니다-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내부에 있는 나에게 돌아섰을 때, 나는 당신의 눈을 열어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각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지금과 같이 생각함으로 인해서 만들어 놓은 모든 상황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변화시켜 그러한 상황이 반드시 지금처럼 되어 있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에 불만족스럽고 불쾌하거나 혹은 육체적인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을 겪고 있다면 어째서 당신에게 그러한 영향을 주며 괴롭히고 있도록 만드는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까?


누가 주인입니까? 당신의 육체? 아니면 마음? 혹은 내부의 나인 당신?


왜 내부의 내가 생각하고자 원하는 진정한 것을 생각함으로 해서 당신이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까?


이러한 모든 것은 전적으로, 당신이 다른 것을 생각했고, 당신의 마음 속에 스며든 부조화스러운 상념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부조화스러운 상념에게 힘을 부여하여 그 상념이 당신을 침범해서 방해하도록 만들었고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이처럼 부조화스러운 상념에 힘을 실어주는 생각을 멈추고 나를 향해 내부로 돌아와서 내가 당신의 생각을 이끌도록 한다면, 그 부조화스러운 상념은 당신의 의식에서 흔적없이 사라져서 당신이 상념으로 창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기꺼이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그 때 당신은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인도하는 올바르고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사고를 지니고 당신이 창조하고자 내부에서 내가 바라는 대로 진실하고 영원한 것을 창조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고 외관과 실체를 분별할 수 있을 때, 당신의 깨어있는 생각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과거의 무의식적인 생각이 지금은 싫어하지만 과거에는 원했었던 그러한 것을 창조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당신의 세계와 당신의 삶이 때때로 과거에 원했던 바대로 나타난 것은 무의식적인 생각 즉, 당신의 창조력에 영향을 행사했던 욕망을 통제하지 못했던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가능성을 품고 있는 새로운 이상이 나타날 때, 당신의 마음이 작용하는 과정을 들여다보고 분석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한 이상을 포함하고 있는 욕망과, 어떻게 해서 생각을 통해 이상이 실제로 결실을 맺는 지에 대해서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그 관계에 대해서 주목해 보았습니까?


이러한 관계와 과정을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이상이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이상이 생겨나는 필요성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이상이 외부로부터 오든 내부로부터 오든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상을 불어넣고 어떤 순간 당신의 의식에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언제나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당신이 고요해지고 주의력을 모을 수 있을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잠재울 수 있으며, 의식 속에서 솟아오르는 모든 다른 생각과 사념을 제거시킬 수 있을 때, 이상은 한껏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마음을 밝혀서 그 이상이 품고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국면과 가능성들을 당신이 정신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펼쳐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스스로 어떠한 의지작용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상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할 수 있을 때 일어납니다.


일단 그 가능성을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에 심어놓았고 흥미를 유발시켰습니다. 그러자 인성이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내가 당신의 마음 속에 이상을 창조해서 불어넣은 것처럼 나는 그 이상이 열매를 맺도록 했으며 욕망-이상이 품고 있는 그 모든 가능성들을 외부로 현현시키고자 하는 것-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욕망은 내 의지를 수행하는 일시적인 대리자로서 원동력이 되는 힘을 제공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적인 인성이라는 것이 일시적인 도구로서 그 힘을 제한하고 초점을 맞추는데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이상과 모든 욕망은 바로 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과 가슴에 영감을 불어넣어 당신을 통해 외부로 현현되도록 한 것은 나의 이상과 나의 욕망이었던 것입니다.


당신만의 이상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이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 욕망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욕망은 선한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하게 이해되었다면, 머뭇거림 없이 완벽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부에서 일어난 나의 욕망과 나의 충동을 잘못 해석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나의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나의 선물을 오용하고 그 오용으로 인해 초래된 고통을 겪고 나야 당신은 나의 이상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순수하고 헌신적인 통로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마음 속에 이상이 떠오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이상을 외부로 현현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상과 욕망의 관계는 이쯤에서 끝내고 이제는 실현되는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마음 안에서 이상이 명확한 그림을 그려가고 그 이상이 인성을 소유하는 정도에 따라서 창조적 힘을 동반한 욕망은 작용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생각해 내거나 혹은 상상하게 만드는 일시적인 마음의 작용입니다. 즉,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진공, 혹은 초월적이고 근원적이고 생명으로 가득 찬 사념의 물질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멘탈 형태를 만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침묵으로든 발성을 통해서든, 또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단 말이 행해지면, 그와 같은 물질은 즉시 물질화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의식 그리고 몸과 마음으로 빚어지는 모든 행동에 따라서 조절되고 그 다음에는 이상과 관련된 모든 몸과 마음에 따릅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의식과 마음과 몸은 나의 것일뿐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초월적이며 분리되지 않은 하나입니다. 그리하여 상황과 사물과 사건들이 이끌리고 지시되고 구체화되어 조성되어 조만간 이상은 명백하고 실제적으로 겉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생겨난 모든 사물과 모든 상황과 사건의 처음에는 마음속에 이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상을 눈에 보이게 겉으로 들어내는 것은 욕망과 생각과 표현된 말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깊이 생각해보고 스스로 증명해보십시오.


어떤 이상하나를 받아들여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실현되는 과정을 쭉 따라가 보십시오. 아니면 처음에는 이상으로 시작한 당신의 공적을 거꾸로 추적해보십시오. 혹은 당신이 그린 그림이나 당신이 발명한 기계, 아니면 지금 계속되고 있는 특별한 물건이나 상황도 좋습니다.


이것이 모든 진정한 생각 즉 모든 창조의 계획과 과정이었습니다.


들으십시오. 당신은 지금도 그리고 언제나 이러한 생각의 힘을 통해 모든 지상의 왕국을 지배해왔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당신은 지금 이 순간 그저 생각하고 말로 표현하면 됩니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힘을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신으로서 전지 전능하며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자아인 내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당신의 의지와 주의력이 집중되어 이루어진 물질의 보이지 않는 세포를 기다리고 있는 의식-그 의식은 나의 의식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은 당신이 생각을 통해 제공한 상상이나 계획에 따라 정확하게 행동하고 즉각적으로 복종합니다.


모든 것은 말로써 만들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 없었다면 지금 만들어진 모든 것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것을 깨달아 당신 내부에 있는 의식인 나의 의식이 생명을 가지고 있는 질료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질료를 활성화시키는 의식과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당신의 의지와 하나인 그 의지는 바로 나의 의지라는 것과 당신의 모든 욕망은 나의 욕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내부에 있는 나를 알고 느끼기 시작할 것이며, 당신을 통해 언제까지나 초월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나의 이상의 권능과 영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적으로 필요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에 의해 지시되는 당신의 생각을 어떻게 분별하는지 배우는 것입니다. 또한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의 근원을 어떻게 추적해야 하는지, 그리고 당신의 의식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어떻게 즉시 소멸시켜 버리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당신의 욕망을 조절하고 사용해서 그러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욕망이 당신에게 종사하게 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내부에 모든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당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상은 표현되어야 하는데 반드시 당신을 통해 표현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단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인간적인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모든 개인적인 관념, 믿음, 견해를 접어두고 그저 당신 안으로 흘러 들어오도록 한다면- 그것은 완벽하게 표현될 것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단지 내부에 있는 나에게 돌아서서 당신의 생각과 욕망을 지시하도록 놓아두고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이 하고자 내가 바라는 것을 받아들여서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욕망은 실현되고 당신의 삶에는 장엄한 조화가 찾아들고 당신의 세상은 천상이 되며 당신의 자아는 나의 자아와 하나가 됩니다.


당신이 이러한 것을 깨닫고 그 이면의 의미를 포착하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다음에 나오는 내용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7장 말


이제 우리는 열쇠를 받을 것입니다. 방금 설명한 계획과 과정에 따라서 세상이 창조되는 과정을 보여줄 것입니다. 땅이 생겨나고 그 땅속과 땅위에 생겨난 모든 것-거기에는 당신과 당신의 형제자매도 포함됩니다-은 이상, 즉, 지금은 생각으로 존재하지만 생명으로 표현되는 나의 이상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나, 창조자이며 태초에 생각했던 자는 유일하며 오직 하나 뿐인 사고자였습니다.


우선은 다음의 사실을 새겨두십시오.


이미 말했듯이 인간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내가 인간의 유기체를 통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고 믿을 뿐입니다. 하지만, 내면에 있는 나를 깨닫기 이전에는 단지 내가 유도했거나 혹은 마음 속에 영감으로 불어넣은 생각만을 취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그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사적인 것으로 잘못 해석하여 그로 인해 생겨난 이기적인 욕망을 통해 스스로 온갖 문제를 만들었으며 모든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이처럼 명백한 실수와 오해와 간섭은 사실상 극복해야만 하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장애를 통해서 마침내 몸과 마음을 강하게 단련시키고 깨끗하게 순화시켜서 영원토록 그의 영혼 안에서 일하고 있는 이러한 나의 이상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단지 나의 이상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준비된 유기체일 뿐입니다. 몸과 마음과 지성을 지니고 있는 인성을 제공해서 이러한 이상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했으며 물질 뇌를 통해서 내가 생각하고 말함으로써 이상을 외부로 현현시킬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인간의 뇌에 이상-그것이 어떠한 이상이든-을 심습니다. 그냥 놓아두기만 한다면, 인간이 자신의 마음과 그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 그리고 자신의 가슴과 그 가슴에서 나오는 모든 욕망을 나에게 넘기고 이상이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일임하기만 한다면, 그 이상은 자라나서 성숙해지고 완전하게 외부로 현현할 수 있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당신의 지적 마음에 이상을 심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받아들여서 당신을 통해 그것이 성장하고 표현될 수 있도록 한다면, 이상은 자라나고 무르익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스러운 지혜를 수확할 것입니다.


성경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나의 계시를 보면 "말씀"에 대한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뛰어난 학식을 지닌 성경학자들조차 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천지만물은 그-말씀-로 인해 만들어졌다. 만약 그-말씀-가 없었다면 이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것은 애초에 만들어지지 않았으리라."


당신은 여기에서 어떻게 나의 말이 태초에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와 함께였으며 어떻게 그 말이 나, 즉 나 자신인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만물이 나와 나의 말로 인해 만들어지는 방법과 나와 나의 말이 없었다면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인간의 이해력으로 볼 때, 말이란 이상의 상징입니다. 즉, 말은 이상을 나타내며 구현하고 표현합니다.


만약 볼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상의 상징인 말입니다. 다이아몬드도 그렇고 제비꽃과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상징의 이면에 있는 이상을 식별해 낼 수 있다면, 겉으로는 인간이나 다이아몬드 혹은 제비꽃으로 보이는 그 이면의 영혼 즉,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말은 이상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이상은 잠재되어 있으며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것이지만 생각이나 말로서 혹은 어떤 형태나 또 다른 무엇으로 표현되고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초에 나와 함께 있었던 그 말은 그 당시 단지 이상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지상의 삶이라고 부르고 있는 어떤 새로운 상태 혹은 조건으로 표현되고 있는 내 자아의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상은 나, 바로 나의 자아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펼쳐지지 않은 채 내 안에 잠재되어 있었지만 이상은 나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 존재를 이루고 있는 실질 혹은 에센스였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이상, 유일한 태초의 이상이었습니다.


만물은 나로 인해 만들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과 말로 표현되고 있는 나의 이상에 의한 생명력 넘치는 행위로.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존재이면에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인이며 원리라고 하는 나의 이상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도 없으며 표현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의 이상은 지금 펼쳐지고 있는 중입니다. 혹은 생각이 외부로 표현-어떤 이들은 이를 진화라고도 합니다-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꽃이 자신의 영혼 안에 숨어있는 나의 이상의 간절한 바램-표현되고자 하는-에 자신을 맡겨서 줄기에서 봉오리가 움터 나오고 마침내 꽃을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모든 매개체들을 표현하면서 발전시키고 펼쳐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그들은 서로 화합하여 나의 이상을 완벽하게 구현할 것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나의 이상의 영광 속에서, 그들의 영혼으로.


현재, 그러한 매개체들은 나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형태로 이루어진 다양한 언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가장 복잡한 형태를 모두 포함하며 거의 무한한 말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의 이상을 완전하게 생각해내었을 때, 혹은 나의 매개체들을 완벽하게 표현했을 때, 그 때, 나의 이상은 모든 말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각각의 말은 나의 이상의 완벽한 부분 혹은 국면을 이루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은 선택되고 정리되어 내 의미의 장엄한 취지로 빛나는 단 한마디의 말이 될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언어는 하나의 언어로 녹아서 섞여버릴 것이고 모든 말은 하나의 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매개체들은 육체를 입게 될 것이고 모든 육체는 하나의 육체, 즉 내 이상-나의 자아-을 하나의 말로 완성해서 표현하기 위한 완벽한 매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제는 이처럼 완벽하게 된 말로 표현되고 있는 나의 자아는 매개체-인성과 육체와 마음과 지성-들을 통해 표현되며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은 육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육체로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내부에 있는 내 이상의 재생의 힘을 통해 모든 말은 육체를 가지고 진화한다는 의미입니다. 육체를 변화시키고 성스럽게 하여 투명하고 순수해지면, 초월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세속적인 성향은 인성에서 모두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자아는 온전히 드러나서 완벽하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말과 모든 육체는 하나의 말, 태초부터 있었고 영광스러운 태양-신의 그리스도-과 같이 모든 창조된 육체를 통해 빛날 그 말로 다시 한번 융합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창조와 겉으로 드러난 모든 것들의 목적과 계획이었습니다.


나의 창조의 과정이나 내 자아를 지상에 표현하는 내 이상에 대한 나의 생각의 과정을 대략적으로 짚어 간다면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8장 나의 이상(MY IDEA)


당신은, 이 지상과 여기에 속하는 모든 것이 단지 나의 이상-지금도 생각이라는 과정을 통해 완벽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당신은,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은 나의 이상이라는 것과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든 것-당신 자신과 당신의 형제자매를 포함하여-, 즉 나, 태초에 유일하게 생각하는 자였고 창조자였던 나로 인해 생각을 통해 존재하게 된 모든 것에 대한 원인과 이유였다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 이상이 걸어온 과정을 지구에서 표현된 다양한 단계를 통해서 처음부터 따라가 볼 것입니다. 또한 이상이 현재와 같이 드러나도록 한 내 생각의 과정과 함께.


태초에, 새로운 우주의 날이 동터왔던 새벽에, 말의 의식은 막 깨어났으나 아직은 우주의 밤의 정적 속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때 나, 생각하는 자는 나의 이상을 품었습니다.


이처럼 나의 자아는 새로운 의식으로 표현되고 있었으며 나의 자아가 품고 있던 나의 이상을 '지구 표현(Earth expression)'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나의 전지적인 마음의 거울 속에 그려진 그림을 빠짐없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 이 우주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실제의 지구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구체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의 신성한 본질의 무한한 모든 측면과 속성과 힘이 나의 의지의 살아있는 메신저이며 육신을 입은 나의 말인 빛의 천사들이라는 매체를 통해 완벽하게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영원한 천상의 세계와도 같았습니다.


나는 자연으로 표현되어 드러나 있는 나의 자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드러나 있는 모든 것의 이면에 숨어서 활기를 주며 전개시키는 원리인 나의 생명을 보았습니다. 또한 모든 생명 이면에 숨어서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신성한 창조적 권능인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이상으로부터 태어났으며 잠재되어 있으나 진실한 원인과 이유로서 그러한 사랑을 완벽하게 표현하고자하는 나의 욕망을 보았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마음을 거울삼아 그러한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의 거울은 사물의 영혼과 실제만을 볼 수 있고 반영시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마음 속에 그린 이 모든 것은 실제의 지구였던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이 지구의 시작이었고 지구가 품은 뜻은 우주적 존재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의 의식은 모든 공간과 모든 생명의 내적인 에센스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마음의 진정한 실체입니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알 수 있으며 어디에서나 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계도 경계도 없습니다. 오직 내 마음의 영역 안에서 나는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채웁니다. 그 모든 진동과 그 모든 현현은 단지 내 존재(My Be-ing)의 어떤 한 국면이 표현된 것일 뿐입니다.


존재(Be-ing)란 표현해내는 것(ex-pressing) 혹은 외부로 펼치는 것(out-pressing)입니다. 당신은 표현되지 않은 존재를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인 나는 표현입니다. 끊임없이 그리고 계속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표현하는 것일까요?


내가 모든 것이라면, 오직 나의 자아 외에 무엇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아직까지는 나, 즉 나의 자아를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상으로 불어넣어 준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면 나에 의해 인도되는 이상은, 존재하고 있으며 혹은 표현되고 있는 나의 자아의 한 부분이거나 한 국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단 나의 마음의 영역에서 태어난 이상이라면, 이미 보아왔듯이, 즉시 실체가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의 영원성에서 보았을 때, 시간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있어서 이상은 가장 먼저 욕망을 낳습니다. 그 욕망은 이상을 표현해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욕망은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생각은 행위의 원인이 되고 행위는 결과를 불러옵니다. 그렇게 해서 이상은 외부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에 있어서, 나는 욕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지 결과를 불러일으키도록 말을 하거나 생각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 느끼는 욕망은 나로부터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이상에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당신을 통해 이상이 표현될 수 있도록 오직 당신의 마음 속에만 심은 것입니다. 진정으로, 당신이 무엇을 바라든 간에 나는 당신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서 나의 목적-욕망에 의해 특별한 형태로 제시되어, 당신 안에서 혹은 당신을 통해 나의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성 안에서 욕망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지 나의 이상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혹은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표현하고자 부추기는 내 의지의 행위에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당신이 보기에 내 안에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단지 나의 자아가 가지고 있는 나의 이상이 존재하거나 혹은 표현되기 위한 필요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느끼는 모든 실제적인 욕망, 즉 당신 가슴속의 모든 욕망은 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욕망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런 새로운 조건 하에서 나의 자아를 표현하고자 하는 이상이 잉태되면 나는 단지 생각하기만 하면 됩니다. 즉, 나의 이상과 의지에 나의 주의력을 집중하거나 혹은 초점을 맞춰서 그것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합니다. 혹은 나의 다른 계시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창조의 말을 발성합니다. 그러면 내 의지를 집중함으로 인해 일어난 진동의 파장은 나의 존재(My BE-ing)의 우주적 힘으로 하여금 내 마음의 영원한 저장고 안에 있는 필요한 요소들을 끌어 모으도록 합니다. 그리고 나의 이상을 핵으로 하여 이러한 요소를 소위 말하는 행성의 상념체(thought-form)라고 하는 것에 결합시켜서 형태를 빚습니다. 거기에 나의 생명 실체-나의 의식-를 채우고 내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생각의 작용은 단지 행성의 상념체를 활성화시켰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생각의 영역 속에서 흐릿한 상태로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내부에 있는 이상의 힘을 일깨운 것은 상념체였습니다. 나의 의지가 눈에 보이는 세계인 지구라는 행성-살아있는 표현을 하도록 준비된 매개체이면서 이제는 나를 담을 수 있으며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에 실질적으로 드러나서 빛을 발할 때까지, 그 의지를 이상에 집중시켜 생명 실체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을 형성하고 만들어서 물질체로 응고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생각으로 인해 준비된 물질 육체입니다. 이 물질 육체 안에는 내 존재의 잠재적인 모든 성향이 이미 들어와 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부에 있는 나의 이상이 이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단계는 나의 이상의 여러 가지 국면과 가능성 그리고 힘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 혹은 매체들을 개발하고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광물계, 동물계, 식물계라고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외부로 드러난 증거입니다. 그것은 차례대로 나타났으며, 나를 더욱 명확하게 표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성향과 무한한 국면을 나타낼 수 있도록 서서히 더 높은 차원으로 그리고 복잡한 상태의 의식으로 펼쳐졌습니다.


내가 또 다른 나의 계시록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나의 창조를 굽어보니 보기에 좋았노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단계에서였습니다.


그러나 표현을 위한 결정적이며 궁극적인 매개체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모두가 나의 성향의 어떤 국면들을 완벽하게 표현하고는 있었지만 이 때는, 모든 매개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리고 나를 의식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당시의 매개체가 표현하는 것은 마치 전선이 열과 빛을 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무르익어 나의 신성한 속성들이 의식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매개체가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즉, 나와의 관계뿐이 아니라 나의 이상을 표현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과 힘을 의식할 수 있는 매개체들이 창조된 것입니다.


이 때가 바로 당신과 당신의 형제자매가 인간이라는 표현매개체로 존재하게 된 시점입니다. 다른 모든 매개체들과 비슷하게, 나의 집중화된 상념에 응해서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나의 다양한 속성의 무한한 측면이 실체화된 형태 안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각각은 나의 존재의 어떤 특정한 국면을 지배적으로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는 자신의 창조자이자 표현하고 있는 자를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완벽하게 표현되고 있는 당신을 봅니다. 마치 이 순간 완벽한 당신-진정한 당신, 나의 자아의 속성-을 보고 있는 것처럼.


사실, 당신은 빛의 천사입니다. 나의 상념의 광선 중에 하나로서 내 존재의 속성을 담고 있습니다. 이 지구라는 조건 아래에서 영혼을 부여받아, 단지 나의 이상을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한다는 목적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나의 존재를 지탱하기 위한 필요성이 아니라면 그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습니다).


영원에는, 시간도 공간도 개체성도 없습니다. 단지 물질의 세계에 마음의 자궁으로부터 상념 현상이 탄생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과 개체성이라는 환영이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상념 혹은 창조물은 생각하는 자나 혹은 창조자로부터 분리된 의식을 갖습니다.


그리하여 그 때, 나에게서 분리되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잉태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완전한 분리의식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시작되었습니다.


태초에, 초점화된 나의 상념이 내보내는 진동에 따라 당신이 맨 처음 지구 표현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나의 속성 중 하나인 당신은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특별한 속성을 표현하면서, 스스로 나의 자아의 이상을 옷으로 삼아 휘감았습니다. 당신은 그러한 이상을 활성화시키는 힘이었던 것입니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처럼 특별한 속성을 표현하고 있던 나의 자아의 이상은 그 때, 당신의 특별한 표현을 위한 영혼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 혹은 영혼은 당신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진정으로 나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특별한 속성을 위한 매개체로서 표현되고 있는 나의 자아인 것입니다.


당신의 자아가 나의 이상을 옷으로 삼아 둘렀을 때, 그 때 이 이상은 존재하고자 하는 필요성으로 인해 특별한 속성을 표현하는데 요구되는 상념 질료를 즉시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기 시작했으며 나의 형상과 모양대로 본을 떠서 틀을 짰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성전이 되었으며 살아 숨쉬는 나로 채워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신성한 속성 중에 하나인 당신이 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원은 나의 형상과 모양을 본 떠 만들어졌으며 나의 상념 질료로 구성되어있고 나의 이상으로 옷을 삼아 입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원이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육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파괴되지 않으며 소멸하지도 않는 완전무결한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하게 그려진 나의 상념으로, 살아있는 나의 에센스가 포함되어 있으며 겉으로 표현되어 물질적인 형태를 취할 수 있도록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당신으로 표현되고 있는 나는 나의 신성한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둘째, 당신이 지니고 있는 나의 이상은 나의 속성 중 하나로서 지구 환경에서 혹은 당신의 영혼 속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셋째, 당신에 의해 내가 그린 상념은 당신이 거하고 있는 곳에 당신 영혼의 사원 혹은 당신 영혼의 몸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당신 안에, 신성한 혹은 초월적인 부분 즉 불멸의 삼위일체를 구성합니다. 아직은 명확하지 않은 나의 상념의 상태로 잠재되어 있는 당신은, 나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어지긴 했으나 미처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적인 인성과 연결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인성은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9장 에덴 동산


방금 말한 내용을 어느 정도 명확하게 파악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모든 말의 이면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으며, 그것은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과제입니다.


이 메시지는 과연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일깨워주며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 당신의 신성한 자아를 각성시켜서 또 다시 다른 자아-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들고 충족되지 않는 감각적 즐거움과 정신적 방황 그리고 감정적 쾌락을 미끼로 오랫동안 당신을 유혹해온-에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그 전에 당신은 그 다른 자아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한다는 당신의 생각으로 인해 창조되었으며 당신은 그것을 나와 분리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힘을 부여함으로 인해 생명을 주어 당신을 유혹하고 속이도록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창조된 자아는 이기적인 자존심과 야망과 상상의 힘으로 뭉쳐있으며 생명, 소유 그리고 현명하거나 훌륭한 사고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아는 단순히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일 뿐입니다. 분리된 주체성으로서, 나뭇잎이나 눈, 구름처럼 실체성도 영속성도 없이 그저 언젠가는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처럼 사소한 인격적 자아를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완벽한 시야를 가지고서 온갖 더러운 이기심과 인간적인 허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소박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서 나를 향해 묻기만 한다면, 당신은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언제나 내면에 있었던 당신의 무한하고 초월적인 부분인 바로 나라는 것을. 수 없이 긴 세월동안 의식적으로 당신의 영광스럽고 신성한 자아로부터 분리되어 왔던 이러한 인성적인 모든 환영을 지적해 준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나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식할 때, 그리고 그 메시지가 확실하다는 판단이 서면, 이러한 깨달음은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당신에게 나는 그러한 판단을 내리도록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모든 환영이 사라지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진실로 나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추상적인 글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단련시키는 것이 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은 관념이 외부로부터 제시되었을 때, 나의 의미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어야만 내부에서 내가 불어넣는 나의 이상을 인지해서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용할 수 있도록 나는 당신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세속적인 지식을 얻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나의 천상의 지혜를 받아들여서 내가 당신에게 이끄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을 퍼뜨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 당신 자신의 진정한 자아이며 하늘에 거하고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하면 참된 깨달음이 올 것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주의 깊게 읽어 나가십시오.


나의 이상이 펼쳐져 가는 여정을 함께 밟아 나가던 중에 우리는 당신의 불멸의 영적인 육체 혹은 나의 생각에 의해 창조된 상념 이미지 안에 당신의 내가 드러나는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그대의 내가 물질적 형태-나의 속성을 지구에 표현하기 위해 맞춘 형태-를 취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정신적인 형태가 소멸해갈 일시적인 형태로 바뀌어 나갈 때, 모든 생각과 창조의 방법과 과정이 뒤를 따랐습니다. 성경에서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어 그 코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자 사람은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다."


좀 더 설명할까요? ― 내 이상(당신의 영혼)의 내부에 있는 힘은 생명 실체(먼지)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을 끌어 모아 활성화시킵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진행됨에 따라 당신의 영적인 몸을 구성하고 있는 상념 이미지의 패턴에 따라, 원자는 원자대로 세포는 세포대로 본질적인 실체로 본을 뜨고 틀을 짭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의 옷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담을 수 있는 형태-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할 일시적인 형태-가 만들어져서 외부로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이 단계의 형태는 심령적인 감각에 의해 인지될 수 있는 형태였습니다. 아직은 소위 말하는 물질적 감각으로 인지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습니다. 이제 이 단계에 와서 모든 존재는 주기적인 운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속성인 당신, 호흡이 불어넣어지고 그 다음에 콧구멍을 통해(내부로부터) 생명이 불어넣어진 당신이 그 때 이 지상에 인간, 즉 살아있는 영혼(이제 나의 이상은 적절한 매개체를 통해 이 지상에서 깨어있는 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으로 맨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아 내부에는 모든 나의 속성과 권능과 가능성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이상을 지구에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매개체들이 모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속성 중의 하나로서 당신은 이 모든 매개체들을 다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당신-나의 속성에 속하는-의 힘과 가능성을 전적으로 그리고 완벽하게 표현하는데 필요하다면 그러한 매개체 중에 어떤 것이라도 혹은 전부라도 이용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고 단지 이러한 이유로 당신과 당신의 형제자매들은 인간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인간의 형태를 입고 있는 동안, 당신의 표현은 전적으로 초월적이었기에, 비록 자의식은 있었지만, 당신은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며 내부에 있는 나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줄 것과 당신을 인도해줄 것을 전적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지구 표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당신이 깨닫게 된 첫 번째 상태였던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에덴의 상태로서 당신은 에덴 동산에 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에덴의 상태는 곧 초월적인 의식에 있어서 천상의 국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사멸하는 매개체로서 표현되는 존재로 한정되어 버렸지만, 당신이 깨어있는 의식으로 나와 하나가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해서 그리고 왜, 내가 당신(지금은 사람, 혹은 인간이라고 표현되고 있는)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버려야만 했는지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이 지구를 표현함에 있어서 욕망이 맡았던 역할과 그 욕망과 나의 의지의 연관성에 대해서 당신에게 상기시키는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서 욕망이 당신의 관심을 외적인 것에 쏠리게 하고 내부의 나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문제를 풀고 나의 이성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면, 그 때 아마도 당신(인류)을 그토록 깊은 잠에 빠지도록 몰고 간 첫 번째 필요성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당신은 우주의 날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주기에 거의 근접해있습니다). 그리고 왜 당신으로 하여금 깨어나는 꿈을 꾸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 것입니다. 사실상, 당신은 계속 잠들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지구에서 벌어진 그 모든 일들과 그 모든 상황은 그저 하나의 꿈이었을 뿐입니다. 오직 당신(인류)이 내부의 나를 다시금 의식하게 될 때, 그리고 당신 자신(인류)이 더 이상 겉으로 보이듯이 하나가 아니라 둘-한쪽은 활동적이고 사색적이고 적극적인 부분으로 남성을 나타낸다면 다른 하나는 수동적이고 감성적이고 소극적으로 자궁 혹은 여성을 나타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때, 당신은 완전히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 있는 지구가 필요했던 것은 당신의 의식을 순수한 천상의 기쁨으로부터 끌어당겨서 이러한 새로운 꿈의 상태에 붙들어 두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시적으로 발현한 마음을 계발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자연스러운 성향인 이기적 성향은, 결국에는 소멸해갈 표현인 이 지상에서의 임무에 당신이 완전히 몰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기심의 뱀(나는 당신의 마음에 이처럼 보이도록 했습니다)을 통해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해서 생긴 지혜는 우선 첫 번째로 당신의 수동적이고 감정적이고 수용적인 부분에서 욕망이 싹트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내 의지의 일시적인 대리인으로 지상에서 나의 속성을 보다 완전하게 표현하기 위한 동기와 힘을 부여했습니다.


결국, 욕망이 필요했던 이유는 당신(인류)에게 완벽한 껍질을 씌워 당신의 초월적인 천상의 본질이 깊은 잠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꿈속에서 나의 의지를 당신 마음껏 사용하도록 해서, 소위 말하는 지식의 선악의 나무에서 딴 열매를 맛보도록 했고 충분히 먹어보게 만들었습니다. 그처럼 직접 먹어봄으로 해서 올바르게 분별하는 법을 배우고 그 열매가 무엇인지를 알게 만들어서 지식을 이용할 수 있는 힘을 습득하게 하고, 그렇게 습득된 지식을 현명하고 완벽하게 나의 이상을 표현하는데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어떻게 해서 꿈속에서 그처럼 그릇된 지상의 상태에 몰두하고 집착하게 되었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열매를 먹고 선과 악을 분별함으로써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이면에 숨어 있는 실재에 대한 지식을 소멸함으로 해서 새롭게 열린 매혹적인 세상에 눈을 뜨게 되면서. 당신은, 당신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던 생각과 감정 모두가 어떻게 해서, 그리고 왜 벌거벗겨졌는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자라나 자꾸 숨으려고 했던 이유와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나와 분리되어 있다는 의식을 창조하게 된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마도 이러한 모든 것이 왜 이렇게 놓여있어야만 했는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째서 당신(인류)이 초월적 의식 상태인 에덴 동산을 떠나야만 했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꿈의 세상에 펼쳐진 지상의 환영 속에서 어떻게 당신의 자아를 전적으로 상실해야만 했었는지. 그것은 육체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나의 완벽함을 완전하게 표현하기 위한 개인적 의식, 곧 자의식을 계발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인간적 인성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리움과 희망과 야망과 열망을 비롯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된 욕망의 모든 양상을 심어주어 당신이 영양분을 공급하면서 인성을 강하게 키우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나의 속성을 이 지상에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매개체를 준비시키고 발전시키고자 했던 내 의지의 인간적인 국면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을 발성했고 당신을 에덴 동산 밖으로 쫓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살로 된 외피"를 입혔습니다. 즉,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몸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지구의 심장으로 들어오기 위해 다시 말해 내 이상의 지구인 진정한 지구-당신의 꿈속의 지구가 아니라-로 들어와서 그 안에 있는 나의 이상을 활성화시켜 활동적인 생명을 표현하기 위해, 나의 속성인 당신은 꿈속에서 보았던 상태에 적합한 유기체와 외피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당신에게 살로 만들어진 외피를 입혔듯이,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이 지상을 표현하기 위한 적합한 형태와 함께 나의 이상을 제공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말이라는 수단과 명백한 매개체를 통해 당신의 자아를 표현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했습니다.


초월의 상태에서는 말이 필요 없기 때문에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상만이 존재하며 이상만이 표현됩니다. 이상은 나의 존재의 다양한 국면의 표현이기에 그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꿈꾸는 상태에서는 외부로 표현되는 초기의 단계에, 듣고 보고 느끼고 냄새맡고 맛볼 수 있는 형태와 실체가 있어서 그에 대한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기체가 주어지고 그 유기체를 통해 표현이라는 것과 표현된 것을 이해한다는 것, 두 가지의 목적을 완수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나의 이상이 펼쳐져 감에 따라 나의 신성한 속성 중 하나인 당신은 그러한 속성을 표현할 수 있는 내 이상의 내부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 자아의 상념 이미지 안에 거하다가 마침내 이 지구 형태의 세상에 현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욕망의 가면을 쓴 나의 의지가 재촉하는 바에 따라 나의 의미를 표현하게 되었을 때, 당신은 급격히 "증가하여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특별한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최적의 조건을 찾던 중, 나의 이상의 어떤 국면을 보다 완전하고 활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던 각각의 모든 생명 형태와 접촉하고 그 안에서 잠자고 있는 지성을 일깨우고 활성화시키면서 점차적으로 이 지구 표면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지구에는 다양한 언어가 형성되었습니다. 각각의 언어에는 수많은 단어가 담겨 있었으며, 인간의 마음 속에 내부에서 들끓고 있는 나의 이상의 무한한 국면들을 지상의 용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탄생시켰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처럼 나의 이상을 말로서 표현하고자 애쓰면 쓸수록, 상황은 점점 더 비참한 실패로 치달았습니다.


때가 되면 위대한 각성이 찾아들 것입니다. 모든 말은 단 하나의 이상의 상징일 뿐이며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있던 간에 모든 이상은 단 하나의 이상, 즉 표현되고 있는 내 자아의 이상이 지니고 있는 국면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만약 위대한 영감으로부터 오는 유일한 존재인 나의 의지의 의식이 아니라면, 그러한 이상을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욕망은 헛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인성-행동할 때 표현되는 당신의 사적인 부분, 그리고 내 안에서 전적으로 당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러한 이상을 살아있는 행동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욕망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입니다. 결국, 실패와 실망과 굴욕감만 얻게 될 뿐입니다.


10장 선과 악


당신이 지상의 임무에 착수하기 이전에 거주하던 에덴 동산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소위 말하여 선과 악의 지식이라 불렀습니다.


이 동산에 머물고 있는 동안, 아직까지는 이 열매를 맛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은 전적으로 초월적이었습니다. 내 의지를 지상에 표현하기 위한 대리자인 욕망의 주된 임무는 당신으로 하여금 이 열매를 먹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욕망에 굴복하여 먹어버린 순간, 그 순간 당신은 에덴의 상태에서 밀려나 강제로 추락하게 되었고(마치 알에서 깨어나는 병아리와 봉우리에서 움터 나오는 장미꽃처럼) 당신은 아주 새롭고 낯선 환경에 처하게 되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에는 하위의 왕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함으로 해서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열매를 얻기 위해 땅을 갈아야만 했고,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지상의 임무를 스스로 떠맡게 되자, 당신은 지상의 모든 생활 조건에 완벽하게 적응해야할 필요성이 생겨났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에서 펼쳐지고 있는 나의 이상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몸을 완성시키고 마음을 개발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이러한 꿈의 상태로 들어오게 된 진정한 이유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월적인 상태인 에덴의 상태에서 밀려나 떨어졌을 때, 당신은 이 꿈의 세상의 유혹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전적으로 욕망이 이끌도록 허락하여 당신은 더 이상 사물의 영혼이나 실제를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물질 육체를 입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의 두뇌를 지닌 지상의 옷이었습니다. 그 옷은 당신의 영혼의 의식에 있어서는 베일로 작용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시력은 흐려지고 당신의 마음은 색깔로 덧칠해졌습니다. 결국, 당신의 인간적인 이해로 인해 진실의 빛은 더 이상 당신의 시야와 마음을 뚫고 지나가지 못하고 모든 것은 거짓으로 색칠되고 왜곡되었습니다.


이러한 꿈의 상태에서 당신은 모든 사물이 안개 속에서와 같이 어둡게 보였습니다. 이처럼 안개로 뒤덮인 세상 속에서는 사물의 실제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어렴풋한 윤곽만이 보일 뿐이었지만, 당신은 그것을 사물의 실제라고 알았습니다.


당신이 꿈꾸는 눈으로 본 모든 것들이 그러했습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리고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에 인지되는 모든 것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자신과 당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마저도 그러했습니다.


이리하여 더 이상 사물의 영혼을 볼 수 없고 단지 희미한 그림자만을 보게 되자, 당신은 그러한 그림자가 실제의 물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있어서 세상은 그러한 물질로 채워지고 구성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안개는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진실의 빛의 반영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지니고 있는 지성은 마치 불안전한 렌즈처럼 모든 것을 몽롱하게 하고 비틀어 놓고 그것을 실제라고 여기게 해서 끊임없이 당신의 의식을 꿈의 세계의 무수한 환영으로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제 지성은 욕망의 창조물이고 전적으로 욕망에 의해 조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듯이 영혼의 능력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안개는 당신의 인간적 지성이 끼고 있던 흐린 렌즈였습니다. 욕망에 의해 조절되었기 때문에, 표현되고자 내부에서 외부로 압력을 가하던 나의 이상을 인식하도록 각성시킬 때 내가 내부에서 혹은 외부에서 끌어당겨 당신의 의식에 영감으로 불어넣은 모든 이미지와 이상 그리고 충동을 거짓되게 묘사하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의식적으로 당신을 지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내가 욕망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의도적으로 행한 것입니다.


욕망으로 인해 불어넣어진 이 잘못된 시각으로 인해 당신은 여러 번 발을 헛디뎠고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점차적으로 자신-내부에 존재하는 나, 초월적인 유일자-에 대해서 자신감을 잃어갔습니다. 사실, 당신은 나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어떻게 할 수 없이 속수무책일때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할 지도 몰랐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했던 신성한 재산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고 당신의 모든 의식을 세속적인 조건에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과 의지, 그리고 모든 능력을 개발시켰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강하게 만들고 힘을 부여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에 나의 신성한 이상을 완벽하게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실수와 고통과 아픔을 겪은 당신은 구원되고자 하는 욕망을 품었고 그 욕망은 당신의 마음에 악의 이상을 샘솟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고통이 없을 때면, 욕망은 선의 이상을 불어넣었습니다.


사물의 모든 외관과 조건에 따라 당신은 이 선과 악이라고 하는 특성을 부여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대리자인 욕망-실제로는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 안에 있는 나의 인간적인 자아 즉 당신입니다-을 만족시키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당신이 시작하게 된 삶의 이 모든 상황과 거기서 겪게 된 경험들-기쁠 때는 선으로 그리고 불쾌할 때는 악으로-은 어떤 영혼의 자질 중 특정 부분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욕망에 의해 창조된 사건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부에 있던 내가 어떤 순간에 당신의 의식에 심어준 진실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명백하게 악으로 보이는 것은 당신을 유혹하는 이 나무의 열매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이 나무의 열매는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처음 먹었을 때의 맛은 달콤합니다. 하지만 그 달콤함을 실컷 즐기도록 해서 해악을 끼치거나 저주를 내려 끝내 환멸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한 환멸은 당신이 굴욕감속에서 나, 당신의 진정한 자아로 돌아오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처럼 일깨워진 새로운 의식을 통해 그 열매의 에센스에서 정수를 뽑아내어 영혼의 실질과 조직에 합류시킵니다.


마찬가지로 명백한 선으로 보이는 것은, 열매의 긍정적인 측면입니다. 그대가 그 안에서 꿈틀대는 어떤 성향을 인식하고 거기에 순종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표현되며 당신에게 행복과 자연스러운 영향을 누리도록 허락할 것이며 외부로 드러나는 사랑으로 가득 찬 나의 영감과 인도를 선물할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통해 욕망에 이끌려온 당신은 단지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일 뿐입니다. 진정한 당신은 육신을 통해 나의 이상을 완벽하게 드러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면서 그러한 나의 이상을 표현하는데 쓰이기 위한 완벽한 매체가 되기 위해 준비하면서 훈련과 개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모든 것은 당신이 한 것입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을 부추겨서 소위 말하는 선과 악의 지혜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먹게 하고 그 열매를 주식으로 삼은 것도 당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이른바 악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악과 더불어 사는 동안 그 안에 선의 씨앗이 있어서 악을 뽑아내어 들어올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그대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어떤 관점에서 다른 관점을 외적으로 묘사하는 상대적인 용어일 뿐이며, 혹은 내적인 진리-당신이 알고자 했으며 되고자 했고 표현하고자 했던 실체-를 표현하는 각각의 외적인 국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당신은 인간적인 의식의 껍질을 하나씩 벗어 던지기 시작하면서 마음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 혹은 마술을 흩어버렸습니다. 마음을 정복하고 조절하고 영적으로 승화시키면서 명료해진 지성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결국, 얇아진 껍질을 통해 마침내 나-모든 사물에 내재하고 있는 유일의 위대한 실체-를 흘끗 대면하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시간 동안 당신, 세상의 모든 지혜를 꿰뚫고 있으며 초월적인 당신의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행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지성이 그토록 소리 높여 권위를 갖고 선언하듯이 단지 이 지상의 조건과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지난날 어두운 시절에 뿌렸던 씨앗을 거두어들이고 당신이 현재 천상의 집인 초월적인 상태에서 나의 이상을 수놓고 있는 것처럼 이 지상에 나의 완벽한 이상을 수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이러한 모든 것을 행했던 위대하고 초월적인 나입니다. 그 나는 계속해서 겉 모습을 바꾸어 갔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내부에 있었습니다.


계절은 끊임없이 흘러갔습니다. 봄에는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그 열기로 소리 없이 만물을 성장시킵니다. 가을에는 아낌없이 추수하고 겨울은 차가운 날씨 속에서 평화와 풍요를 가져옵니다. 그렇게 해가 가고 생애가 가고 세기가 가고 시대가 갔습니다. 나의 이상이 내쉬는 숨이 계절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본질의 완벽함을 외부로 표현하고 펼쳐 나가고자 이 지상과 나의 속성인 당신과 또한 모든 다른 나의 속성을 통해 나는 나의 이상으로 영감을 불어넣고 숨을 내쉬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나를 표현하고 있기에, 나의 속성인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나의 자아를 표현하고 내가 존재할 수 있기에, 당신을 통해서 그와 같이 했습니다. 나는 바로 당신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자아를 표현하고 있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안에 있는 나는 도토리 안에 있는 참나무와 같습니다. 당신과 나는 햇빛과 태양의 관계와 같습니다. 당신은 표현되고 있는 나의 어떤 국면입니다. 나의 신성한 속성 중에 하나인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일시적인 인성을 가지고 나의 완벽함을 표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화가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정확한 그림을 마음 속에 그립니다. 하지만 화가의 손은 붓과 색이라는 거친 매개체를 가지고 자신이 본 그림의 진정한 특성과 효과를 그대로 옮기지 못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 자신 안에서 나를 보고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알지만 이 지상의 재료로 이루어진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의 불완전함과 동물적인 육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소멸할 마음 그리고 이기적인 지식으로 인해 나를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통해 나의 자아를 표현하기 위해 나는 당신의 육체, 마음 그리고 지성을 창조했습니다. 육체는 나의 완벽함의 이미지를 본 떠 만들었으며, 나와 나의 작업을 당신에게 알려주기 위해 마음을 만들었고 마음을 통해 영감으로 불어넣는 나의 이상을 해석하도록 지성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러한 몸과 마음과 지성의 인간적인 국면으로 그리고 그것들을 외적으로 사용해서 흩트려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내부에 있는 유일자이며 유일한 실제인 나-그 신성한 본질인 나는 계속해서 당신을 통해 나를 표현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를 잊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흩뜨림 없이 외적으로 사용하는 순간이 머지 않아 올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실체는 당신의 내부에 있는 그 완벽함의 모든 영광 속에서 당신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자아를 드러냈다 하더라도, 내가 드러낸 것이 당신에게 생명의 빵이 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내가 드러낸 것을 당신이 삶 속에 실천하고 나타내지 못한다면 이전보다 많은 축복을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1장 쓰임


이러한 모든 것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지금 이 자리에서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내부로부터 오는 영감-이것은 나의 신성한 이상이 발전되고 펼쳐짐에 따라 보다 포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여기서 그려진 것보다 훨씬 완벽하게 표현됩니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그대로 남겨두겠습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나의 수많은 외부적인 표현의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한다해도, 당신이 아직 그것의 진실을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경험하지 않았다면, 나의 말을 믿을 수도 없을 것이고 그것이 내적으로 적용되고 사용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일깨워 내부에 있는 나를 인식하도록 하며, 당신의 인간적인 의식으로 하여금 더욱 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초월적인 통로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서히 당신에게 나의 이상의 실체를 밝히겠습니다. 당신에게서 나를 가리고 있는 모든 시대의 환영들을 하나씩, 하나씩 파헤치고 당신을 통해 모든 인간적인 신성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나의 천상의 속성들을 이 지구에 표현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비록 어렴풋하게나마 나의 실체를 당신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보여주는 정도만큼만 당신의 내부에서 열릴 것이며, 그것은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이로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부에 있는 나의 이상이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육신의 덮개를 통해 빛을 발하게 되면, 현재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과 지성이 신에게 품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숭배하고 찬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모든 것을 깨닫게 되어 진실로 이해하기 이전에, 당신과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은 아이처럼 단순하고 의심하지 않는 마음으로 내부에 있는 유일자이며 오직 하나 뿐인 근원인 나에게 완전히 텅 비워진 자신의 척도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그러한 것을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오직 그 순간, 나에 대한 의식으로 넘쳐흘러 당신을 가득 채우고자 하는 나를 방해하는 그 어떠한 사적인 의식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당신에게 나의 진정한 의미의 영광을 지적해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메시지는 단지 외부적으로 준비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이 이와 같은 것을 다소 이해할 때가 도래했습니다. 내부에 있는 나의 목소리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내어 당신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내부의 나를 인식했다는 전제 아래에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매체로 해서 내가 말하고 있는 이러한 진실은 당신이 직접 받아들여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나의 이상의 국면들을 당신의 의식에 보다 강하게 심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당신에게 진리로서 호소하고 있는 것은 내부에 있는 나의 이상이 지금 이 순간까지 애쓰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와 닿지 않거나 당신 자신의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 그냥 지나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지금으로서는 당신이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진실은, 내 손으로 활기를 지펴온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울려 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은 나의 이상의 잠재력으로 가득 넘쳐 있으며 그리고 거기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이 진리는 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표현되고자 하는 나의 이상의 어떤 한 국면을 이루면서 살아있는 실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마음은 나의 무한한 마음의 어떤 국면이거나 언젠가는 소멸할 일시적인 자연 안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 것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당신의 마음과 다른 이들의 마음에 대고 이 책을 매개로 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나의 무한한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그리고 나의 이상을 이 지상에 표현하고자 재촉하면서 나의 일시적인 자아에 대고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머지 않아 당신은 나의 생각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부에서 당신의 인간적인 의식에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 책이나 겉으로 드러난 또 다른 나의 계시록과 같이 나의 의미를 인지하기 위한 말이나 글에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 안에 있으며 내가 바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부에 거하며 모든 마음의 의식을 통해 표현되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와 일체인 것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일은 오직 내 마음의 총체적 의식으로 들어와서 내가 당신의 마음 안의 나의 이상에 거하듯이 나와 함께 거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이상을 외부로 표현할 뿐, 모든 것은 지금 나의 것이듯 또한 당신의 것이며 내가 그것들을 존재하도록 했을 때, 그들에게 준 그 의식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의식 즉, 과연 당신이 깨어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지의 문제입니다. 당신이 나와 분리되어 있는 것은 단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단지 내 마음의 초점일 뿐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당신이 당신의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의 의식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당신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숨쉴 수도 없고 당신 안에 있는 나의 의식이 없어지면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이를 모르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바로 나이며, 우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믿어보십시오. 우리는 일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은 내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하십시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단호하게 상상해보십시오. 진실로 이를 의식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천국에서 나와 함께 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실재하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으며 가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단지 당신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믿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당신이 나와 분리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의 이상의 세 가지 본질인 모든 권능과 지혜 그리고 사랑이 당신을 통해 표현될 수 있도록 기다리면서 초월적인 영역에서 나와 함께 거하십시오.


지금 나는 이에 대해 많은 말을 해왔고 같은 주제에 대해서 적어도 한 번 이상 명백하게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다르게 이야기했습니다. 나의 의미를 다양하게 밝히면서 의도적으로 이와 같이 제시하여 결국에 당신이 나의 신성한 초월성-실제로는 당신의 초월성-을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반복해서 말했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여러 가지 진리를 되풀이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쩌면 이것이 지루하고 불필요하다고 여길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주의를 기울여서 읽는다면, 진리를 되풀이 말할 때마다 이미 말해진 것에 무언가를 덧붙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매번 당신의 마음에 보다 강하고 보다 깊은 인상을 남긴다는 것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나의 의도한 바가 이루어지면, 당신은 곧 그러한 진리의 영적인 이해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을 받지 못하고 되풀이하는 것이 말과 시간의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의 지성은 그저 읽기만 할 뿐 나의 진정한 의미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이와 달리, 만약 이해했다면 모든 말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여러 차례 읽고 또 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위해 보관해오던 놀라운 지혜의 진주를 받아 들게 될 것입니다.


이 책과 여기에 적혀 있는 메시지는 이제부터는 영감의 원천이 솟아오르는 샘 혹은 당신을 초월적인 영역으로 향하도록 하여 천상에 있는 당신의 아버지인 나-당신이 알고자 원하면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와 향기로운 교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문이 될 것입니다.


나는 초월적인 상태를 다양한 여러 각도에서 그려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거기에 익숙해져 모든 열등한 상태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해서 깨어있는 의식으로 언제든지 그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의식적으로 그 안에 거할 수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말해지고 있는 나의 말이 닻을 내리고 당신 마음 안에서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당신 안에서 일깨워온 어떤 자질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질로 인해 당신은 사물의 실재를 보다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나 사랑스러움뿐만 아니라 그들의 약점과 잘못 그리고 단점까지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잘못과 단점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당신의 형제를 비난하고 판단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인성 속에 있는 그와 같은 결점을 극복해서 용해시켜버리도록 하기 위해 당신 안에 확고한 결의를 불러일으켰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당신 자신 안에 있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부에 있는 내가 당신의 주의를 그곳으로 이끌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용도에 맞게 사용할 곳이 있으며 오로지 쓰이기 위한 것이듯, 이제부터 내가 당신에게 준 능력과 선물과 힘을 지금까지 어떻게 사용해왔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지금쯤은 내가 당신에게 모든 것을 제공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혹은 당신 자체, 선한 것과 악한 것, 축복과 고통, 성공과 실패, 부와 가난과 같은 이 모든 것을 나는 당신에게 허락했으며 당신에게 끌어당겼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일깨워서 선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존재로서 나를 인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받은 모든 것은 용도에 맞게 쓰이기 위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당신은 제공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제공하는 존재인 나를 알기 전까지는 정말로 나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상 당신의 인성은 내가 당신에게 준 많은 것들을 제거하고 당신이 더 좋다고 여기는 것과 바꾸는데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제공하는 존재로서의 당신 자신의 자아, 즉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 순간 당신은 나를, 제공하는 존재이자 내부의 에센스로서 당신의 세계와 당신의 삶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했으며 심지어 이러한 것에 대한 당신의 현재의 태도까지도 창조했다는 것을 인정할 지도 모릅니다.


모두 다 내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지 당신의 내부에 있는 완벽함-이것은 나의 완벽함으로서 당신의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펼쳐지고 있습니다-인 나의 이상의 외적인 국면을 표현함에 있어서 내가 이용하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것을 깨닫게 되면 될수록, 내가 제시하는 사물과 상황, 그리고 경험의 참된 의미와 사용이 당신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당신은 내면에 있는 나의 이상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할 것이고 당신이 그 이상을 느낄 때, 당신 자신의 진정한 자아인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알기 전에 내가 주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것-그리고 내가 사용하고자 하는 곳에는 용도가 있습니다-과 그에 대해 사적으로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으며 당신이 그와 같이 이용했을 때는 어떠한 이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배워야만합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소리, 색채 혹은 언어의 아름다운 교향곡을 표현해내어 인간의 용어를 빌자면, 음악, 미술 혹은 시로서 나타냅니다. 때로는 이것이 다른 이들에게 너무나 감동을 준 나머지 사람들은 당신을 이 시대 최고의 인물로 여기며 갈채를 보내기도 합니다.


나는 당신의 입을 통해서 말하기도 하며 혹은 수많은 아름다운 진리를 쓰도록 영감을 불어넣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당신을 가장 뛰어난 설교자 혹은 스승이라고 떠받드는 많은 추종자들이 당신의 주변으로 모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당신을 통해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하고 마귀를 쫓으며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절름발이가 걸을 수 있도록 하며 그 외에도 이 세상에서 기적이라 부르는 믿기 어려운 일을 행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나는 당신을 통해서 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은 모든 인간적인 표현 안에서 나의 완벽함을 명확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당신을 통해 그들의 가슴속에 쏟아 부어진 나의 사랑의 능력을 허용하는 것이며 그들 안에 숨겨진 나의 이미지를 그들의 내적인 비전 안에 그려주는 것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조화로운 소리를 당신이 매 순간 내뱉는 말에 사용하고 적용해서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천상의 향기로운 음악을 듣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고 또한 당신이 색깔과 균형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감각을 당신의 삶 속에서 실현해서 오직 너그럽고 고양되고 도움을 주는 상념이 당신 주위를 맴돌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결코 사적으로 당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내가 당신을 통해서 지극히 훌륭한 진리를 말하거나 수행한다 할 지라도 당신 자신이 매일 매일, 매 시간마다 이러한 진리와 더불어 살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통해 끊임없이 나와 나의 권능-나의 봉사에 쓰이도록 하기 위해 사랑하는 당신과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는-을 상기시키지 않는다면 그 어떤 명예도 당신의 몫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 겉으로 보기에는 나에게 그러한 선물을 전혀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또한 당신 스스로 그렇게 나에게 봉사하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며 가치 없다고 느끼고 있는 당신에게 나는 말합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내부에서 나를 인정하고 진심을 다해 나에게 봉사하고자 추구하는 만큼, 바로 그 만큼 나는 당신을 쓸 것입니다. 당신의 인성은 개의치 않습니다. 그 인성이 가지고 있는 잘못이나 성향이나 약점은 상관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처럼 나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당신으로 하여금 수많은 놀라운 일을 하도록 할 것입니다. 당신의 형제들을 일깨우고 각성시켜서 당신이 나를 인정하는 것만큼 그들도 나를 인정하도록 할 것이며 더 나아가 당신이 접촉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당신이 영향을 끼치도록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상위 인식에 대한 영감을 부여해서 고양시키고 사고 방식을 바꾸고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바꿈으로 해서 나에 대한 태도 또한 바꾸도록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당신들 모두를, 주어진 재능에 관계없이 선을 위해 일하는 살아 있는 힘으로 만들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다수가 영위하는 삶의 양식을 바꾸고 그들의 야망과 열망을 고취시키고 형성하도록, 요컨대 세속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한 복판에서-내가 당신을 이 곳에 세워놓았습니다- 발효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은 이러한 것을 전혀 모를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은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으며 아직까지도 빈번히 실수를 저지르고 자신이 생각하는 나에 대한 가장 지고한 이상에 맞춰서 살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더 한층 나에게 봉사하기를 열망하고 나와 보다 깊은 의식의 교류를 갈망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은 그러한 열망과 갈망이 내가 나의 영적인 힘을 쏟아 붓는 통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전적으로 초월적인 이 영적인 힘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당신의 내부에 있는 내가 당신의 가슴과 삶 속에서 그리고 나의, 즉 당신의 다른 자아들의 가슴과 삶 속에서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이 이러한 모든 인식에 다다랐을 때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봉사하는 모든 가운데 틀림없이 그러한 것을 실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을 때, 나는 점차적으로 나의 권능과 나의 지혜와 나의 사랑을 의식적으로 사용해서 나의 신성한 이상-당신을 통해서 그 완벽함을 표현하고자 언제까지나 재촉하고 있는-을 초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곧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과 그 인성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과 힘과 갖추어진 요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들은 당신을 통해서 내가 관리하고 운영해온 것이며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나의 사용 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목적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공적이며 만족할만한 사용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마치 뿌려진 씨앗이 결실을 이루듯이, 이러한 사용으로 인해 나의 이상-이것은 오직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을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한 모든 나의 영적인 능력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능력을 기르도록 합니다.


12장 영혼의 동반자


이제는 내가 지금까지 당신에게 제시했던 것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특히, 당신이 아직도 나를 제공자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현재 당신이 점유하고 있는 삶의 특별한 위치가 당신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나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한 최고의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그러한 상황에서 물러나서 당신이 선택한 상황으로 옮겨가지 않는 것입니까?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 혹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그 명백한 사실 자체가 지금으로서는 현재의 상황이야말로 당신 안에 있는 자질 중에서 나의 완벽함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을 일깨우는데 가장 적합한 상황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당신 자신의 자아인 나는 당신이 어떤 힘의 내부에 숨겨진 나의 목적과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그 안에 머물러 있도록 허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그러한 환경은 당신 마음의 평화를 혼란케 만들고 불만족스럽게 여기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의 의미를 깨닫고 나의 목적을 당신의 목적으로 삼을 때, 오로지 그 때 나는 지금의 상황에서 물러 나와 내가 당신을 위해 준비해 놓은 보다 높은 단계로 들어설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아마도 현재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는 당신과 전혀 걸맞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당신의 "영적인" 각성에 도움을 주는 것은 고사하고 방해를 하고 해를 끼치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당신은 심지어 아무도 모르게 헤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혹은 당신의 열망과 추구에 공감하고 합류할 수 있는, 즉 보다 당신의 이상에 가깝다고 느끼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떠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떠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인성으로부터는 결코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영적인" 동반자를 구하는 이기적인 갈망은 내부에서 말하고 있는 나의 목소리를 다시 의식하여 깨달을 때까지 열 배나 더 오랫동안 마음의 환영 속에서 헤매도록 만들 그러한 사람만을 끌어당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억압하고 왠지 신용할 수 없으며 늘 잔소리를 퍼부어 대는 동반자는 당신이 아직까지 필요로 하는 영적인 훈련을 제공하고 있는 것임에 반해, 당신에게 공감하고 당신을 인정하는 동반자는 단지 인성 적인 자아와 당신 안에 있는 "영적인" 힘을 구하는 이기적인 열망을 강화시켜서 당신의 본성에서 자기 본위적인 부분을 더욱 발달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스럽고 신뢰감을 주며 늘 당신의 뜻에 따르는 동반자는 당신이 나의 초월적인 사랑을 의식하여 그 안에 머물기도 전에 이기심과 자만심을 부채질할 뿐입니다.


당신의 진정한 영혼의 동반자는, 실제에 있어서 당신이 그런 것처럼 나의 신성한 자아를 나타내는 하나의 속성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천사는 당신에게 와서 당신 자신의 인성을 깨끗이 씻어내어 나의 신성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오직 그 때 그처럼 많은 마음의 근심거리를 제공하고 영혼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영혼, 하늘에서 내려온 이와 같은 천사, 즉 나와 그리고 당신 자아의 또 다른 부분으로서 당신에게 와서 당신을 통해 초월적인 사랑이 표현되도록 열망하고 애쓰고 있으며, 따듯하고 다른 사람을 늘 사려 깊게 배려하며 마음을 평정시키고 가슴의 평화를 유지하며 침착하고 확고하게 자기를 통제할 줄 아는 이 영혼만이 오직 문을 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만이 그 자신의 영광스러운 존재의 자유로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으며 당신에게 있어 진정한 자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영혼의 모든 신성한 아름다움 속에서 이 영혼을 보기 전에는, 세속적인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기 전에는, 당신이 추구하는 그러한 이상을 찾을 수도 인식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상은 외부-누군가 다른 인성-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내부, 당신의 신성한 짝 즉 나, 당신의 지고하며 초월적인 자아인 바로 내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완전한 자아는 당신을 통해 표현되고자 애쓰면서 당신에게 내가 준 그 동반자를 통해서 불완전하게 보여지는 것을 느끼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더 이상 사랑과 공감과 이해와 영적인 도움을 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내부에 있는 나에게로 향하는 때가 곧 올 것입니다. 그 때, 이처럼 겉으로 불완전하게 보이는 모든 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당신의 동반자에게서 오로지 사심 없는 사랑과 관대함, 신뢰, 그리고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이 반영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 자신의 가슴으로부터 언제까지나 밝게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으로서는 이것을 모두 믿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여전히 당신 자신의 자아인 내가 현재 이와 같은 삶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또는 내가 현재의 그와 같은 배우자를 골랐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기 전까지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낳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며 신뢰를 지닌 채 나에게 향한다면 나는 내부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깊고 변함 없는 신뢰-나로 하여금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할 수 있게 하는-를 가지고 나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해 나의 가장 신성한 비밀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이렇게 할 수 없는 당신에게 나는 말합니다. 만약 당신 자신의 자아가 당신을 이 곳에 세워둔 게 아니라면 그리고 현재의 동반자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당신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당신의 지금의 동반자와 같이 있는 것입니까?


생각하십시오! 


나, 이 모든 것이며 완벽한 유일자인 나는 결코 실수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인성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그 인성이 현재의 동반자를 골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낳은 상황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당신이 말을 하는군요.


무엇이, 도대체 누가 인성으로 하여금 지금의 동반자를 고르고 삶에 있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도록 했습니까?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바로 그 곳에 그 배우자를 놓아두었습니까? 그리고 누가 바로 이 시대에 그 모든 다른 나라 가운데 당신이 태어난 바로 그 나라 그리고 그 도시에서 당신이 태어나도록 했습니까? 어째서 다른 도시가 아니고 어째서 백년 후가 아닙니까? 당신의 인성이 이 모든 것을 했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당신 자신에게 진심으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나, 바로 신이며 당신 내부에 있는 당신 자신의 자아인 내가 당신이 한 모든 것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올바르게 했습니다.


나는 나의 이상을 표현하면서 그와 같은 것을 했습니다. 나의 이상은 내부에서 영원으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나의 속성인 당신을 통해서 완벽하게 외부로 표현되고자 언제나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이끌려 어딘가에서 당신을 기다리면서 있을 것이라 믿어 왔던 진정한 "영혼의 동반자"는 이제 그만 찾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영혼의 동반자는 누군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영혼 속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서 완성을 호소하고 있는 것은 나를 알고 표현하도록 내부에서 열망하고 있는 나에 대한 당신의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나, 당신 자신의 신성한 짝, 당신의 영적인 부분, 당신의 또 다른 반쪽은 당신이 이 지상에 와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완성하기에 앞서 반드시 합일을 이루어야만 하는 오직 하나뿐인 대상입니다.


아직까지 당신의 초월적인 자아와 의식적으로 결합하지 않은 당신에게 이것은 신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의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자신을 나에게 완벽하게 내맡기고 다가설 수 있을 때, 그리고 나와 합일을 이루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때, 그 때 나는 당신을 위해 오래도록 간직해두고 있었던 아름다운 천상의 환희를 드러낼 것입니다.


13장 권위


책 속에서 신비-그것은 지금으로서는 당신에게 숨겨진, 나의 이상이 이 지상에 표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여전히 책을 읽으려고 갈망하는 당신에게 나는 말합니다.


내가 보내는 충동을 따라서 다른 이들이 해석해놓은 나의 이상의 의미를 그처럼 외부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한 충동은 그들을 통해서 그와 같이 표현되었습니다. 비록 당신이 상상하는 방법은 아니라 할 지라도 나는 당신에게 이로운 길을 찾을 것입니다.


때로는 고대의 가르침, 철학, 종교 또는 다른 인종과 다른 민족의 철학과 종교를 통해서 추구하는 것 또한 좋습니다. 그것은 내가 당신에게 표현하고자 하는 진리입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무익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게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마음으로 풀어놓은 사상이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가르침은 아무리 진실하고 아름답다 할 지라도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곧 올 것입니다. 나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당신의 것인 사상과 가르침을 간직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러한 것을 받을 준비가 되면 나는 아무도 모르게 당신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그러한 때가 오면-필연적으로 그러한 때는 올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은 흥미를 갖고 있는 가르침과 다양한 종교, 철학, 비교(秘敎)를 추구하는데 더 이상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책에 묘사되어 있는 것과 같은, 그리고 책의 저자나 철학자들 그리고 종교의 창시자들은 분명히 소유하고 있으리라 추측되는 힘과 영적인 성장에 조금도 근접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낙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나는, 이러한 모든 책과 가르침과 종교는 사실상 내가 영감을 불어넣은 것이며 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 위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해 왔고 여전히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당신에게 있어서는 겉으로 드러난 그 어떠한 권위를 찾는 것을 이제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 대신 당신은 내부에 있는 내가, 오직 나만이 인도하고 지도하는 나의 생명의 책을 공부하는 것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당신이 성심 성의껏 진심을 다해 이렇게 한다면 내가 당신을 어떤 종교의 대제사장으로 선택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광휘와 장엄함은 당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이해력으로 그렸던 것처럼, 태양이 멀리 떨어진 별들에게 그 빛을 전달하듯이, 다른 모든 이들에게 미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내가 수많은 가르침을 당신에게 가져가서 그 안에 있는 경이로운 많은 것들을 지적하고 그렇게 해서 당신이 보다 결연하게 그 가르침 안에 있는 나를 찾게 하기는 했지만, 고대의 종교는 오래 전 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다른 민족에게 주어진 종교는 그 민족을 구성하는 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그러한 것들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말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과거의 것이고 당신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만약 당신이 볼 수만 있다면 축적된 모든 지식들, 모든 가르침, 모든 종교, 모든 권위 그리고 심지어는 여기에 표현된 나의 권위와 겉으로 드러난 나의 다른 계시록마저도 내 던져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 내부에 현존하고 있는 나의 실재의 의식과 외부의 근원으로부터 오는 모든 권위, 가르침, 종교는 아무리 지고하고 신성하다 할 지라도 당신이 내부로 나에게 돌아서게 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면 그리고 본질과 상관없이 모든 질문에 대한 나의 최종적인 권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당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북돋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데, 나만이 줄 수 있는 도움과 인도를 어째서 과거의 종교, 과거 인류의 지식 또는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것들 속에서 찾는 것입니까?

이미 지나간 것은 모두 잊으십시오. 과거의 것은 죽었습니다. 왜 당신의 영혼에게 죽은 것들을 짊어지라고 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과거의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그 만큼 당신은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이며 영원한 현재인 지금, 영원 안에서 거하고 있는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과거의 행위나 혹은 과거에 겪은 경험, 종교나 가르침에 집착하는 그 만큼 당신은 자신에게서 나를 가려놓고 당신 영혼의 비전을 보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와 같은 것들의 부정적인 영향에서 벗어나서 내부에 있는 나의 초월적인 의식의 빛-어떠한 한계도 인정하지 않으며 모든 것들의 무한한 실체를 뚫고 들어가는-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당신이 나를 찾아오는 길에서 언제까지고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미래 또한 개의치 말아야합니다. 자신의 마지막 완성을 미래에서 찾는 사람은 과거에 매어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행동의 결과에 구속되어 있는 한, 그리고 나를 유일한 인도자로서 인식하고 모든 책임을 나에게 일임하지 않은 한 당신은 결코 자유로와 질 수 없습니다.


나와 하나인 당신은 젊음도, 늙음도 또한 태어남도 죽음도 모른 채, 지금 이 순간 완전하며 언제나 완전했습니다.


완벽 그 자체인 당신은 무엇이 존재했었고 또한 현재 무엇이 존재하는 지에 개의치 않습니다. 당신은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영원한 현재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당신이 신경을 써야 하는 오직 한 가지는 바로 가까이에서 당신이 맞대고 있는 것, 즉 지금 여기-그와 같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고의로 당신을 현재의 상황에 세워두었습니다-에서 완벽하게 표현되고 있는 나의 이상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미 알맹이는 빼냈기 때문에 껍질뿐인 그러한 것을 마음과 영혼에게 짐 지우면서 질질 끌고 가는 대신에 놓아버리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모든 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단단히 얽매어 놓고 있는 믿음인 윤회에 적용됩니다.


완전하며 영원한 당신이 과거나 혹은 미래의 화신들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그 자체의 완전함에다 완전함을 더할 수 있습니까? 혹은 영원한 것이 영원에서 나와서 영원으로 돌아갑니까?


나는 존재하며, 그리고 나와 하나인 당신도 존재합니다. 언제나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당신의 나는 나의 이상을 표현한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육체 안에서 재화신하면서 거주합니다.


인류는 나의 몸입니다. 나는 나의 속성들을 통해서 나의 이상의 영광스러운 빛을 표현하면서 인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나의 존재-나의 존재의 천상의 광희는 인류의 지성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흐릿하고 불완전한 측면들로 인하여 인류의 시야에는 흐리고 왜곡되어 보입니다-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나와 또한 나와 하나인 당신은 인류 안에서 재화신합니다. 마치 참나무가 참나무에 달린 잎으로 그리고 도토리들로 재화신 하듯이. 계절에서 계절이 지나고 한 세대에서 또 다른 세대로 나아가면서 수천 개의 도토리와 수천 그루의 참나무에서 또 다시 수천의 참나무가 태어납니다.


당신은 당신의 과거 생들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확신하십니까?


좋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현재 내가 당신에게 표현하고 있는 나의 의미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나의 과거 표현 중 하나의 실체를 흘끗 볼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고 해서, 당신이 개인적으로 그러한 표현을 위한 나의 통로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나와 함께인 당신과 그리고 모든 통로를 통해서 표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격이나 나이 그리고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표현에 있어서 생명이고 지성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정말로 그러한 표현이었다고 믿음으로 해서 당신이 흡족하다면 그것은 좋습니다. 나는 그러한 믿음이 당신에게 이롭도록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올 위대한 각성을 준비하는 것에 한해서입니다.


그 사이에, 당신은 굳게 속박되어 있습니다. 이기적인 욕망과 이기적인 탐구로 물들어 있는 당신의 인성은 여전히 손과 발이 과거에 묶인 채 자신이 빚어낸 행위의 모든 결과에 지친 후에는 미래를 쳐다보며 구조의 손길을 바라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러한 그릇된 신념으로 당신의 마음과 지성을 채우고 오직 그와 같은 당신의 방법으로 궁극적인 해방과 나와의 합일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하고 언제나 변함 없는 일체성을 깨달을 수 없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당신의 자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오직 인성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성은 이 육체에, 이 지상의 삶에 좀 더 머물려고 애쓰고 모색하며 그 후 내가 더 이상 육체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는 다른 육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을 그러한 망상으로 바쁘게 만들고 세월을 통해 이득과 의견을 주입시킴으로 해서 당신을 속박시킨 것은 바로 이 인성일 뿐입니다. 오직 당신이 당신의 신성한 영원성, 전능함, 지성을 깨닫고 일어설 수 있을 때, 그리하여 인성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믿음과 견해를 던져버릴 수 있을 때, 그 때 당신은 이러한 그릇된 관계에서 당신의 자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자아의 왕좌에 자리를 하고 매스터이며 군주이며 나와 일체로서의 진정한 자신의 지위를 맡을 수 있습니다. 이 때 인성은 하인이자 신하로서의 본래의 주어진 자리로 내몰리며 나의 작은 명령에도 기꺼이 따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쓰임에 가치로운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14장 매체와 중재자


당신, 나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인하여 교회나 종교 단체, 비교그룹 혹은 영적인 의식과 같은 성격의 활동에 참여하여 그 곳에 도움을 주고, 그 곳의 일을 지원함으로 해서 나를 즐겁게 하고, 그러한 것으로 인해 나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얻을 것이라 생각했던 당신이여. 여기에 주어진 나의 말을 경청하고 깊게 숙고하십시오.


가장 먼저, 나는 이미 당신으로 인해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아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으며 나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일을 합니다. 비록 때로는 나의 소망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고 오직 당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찬가지로 나는 모든 마음에 그 모든 삶의 경험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아십시오. 내가 몸을 준비시켜 심장을 활성화시키고 의식을 발달시키도록 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통해 나의 이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나와 나의 이상을 어렴풋이 감지하도록 해서 마음에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부여하여 나의 말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그것으로 책을 펴내어 다른 이들을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그 말의 저자들과 스승들은 나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말은 받아들이고자 대기하고 있는 이들의 가슴과 의식의 불을 지펴서 나온 것입니다.


나와 나의 이상을 어렴풋이 감지하게 한 이러한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교사나 지도자가 되도록 하고 교회와 협회 그리고 사교(邪敎)를 조직하도록 해서 구도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끌어당겼습니다. 그렇게 그들을 통해 내가 말을 하고 그 말로 나는 나를 인식하고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과 의식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내부에 있는 초월적인 영혼인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을 했습니다. 교사이며 지도자들은 단지 나의 이상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로서 봉사했을 뿐 그들 자체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끌어당긴 이들의 의식에 나의 이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단지 필요한 곳에서 필요할 때 나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초월적으로 사용하는 통로이며 지적인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이상을 어떤 이를 통해 표현할 때, 그 가슴이 활성화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그 안에 나를 담을 수 있도록 넓게 열려지지 않았다면, 소멸해갈 마음과 지성을 가지고는 나의 의미를 깨어있는 의식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당신은 교사나 지도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났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를 통해 하는 말들은 겉으로 훌륭하게 드러나서 현재 그의 가슴속에 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명령에 불복종했을 경우, 나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당신의 의심과 걱정으로 그리고 나를 화나게 했을 것이라는 우려를 담고 그와 같은 교사 혹은 지도자를 찾아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마도 신의 대리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줄곧, 어떠한 "스승" 혹은 "안내자"를 통해서 나의 메시지 혹은 충고나 도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필연적으로 환멸을 맛볼 수밖에 없으며 그 환멸이 잉태시킨 슬픔과 굴욕 속에서 당신은 다시 한번 자신으로부터, 내부의 스승으로부터, 나로부터, 당신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부터 내던져지게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나의 일이라고 믿고 쏟아 부은 그 모든 현혹스러움, 돈과 봉사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수양, 열정, 헌신과 그러한 것을 이기적으로 갈취해서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사적인 힘과 특권을 쌓아올리고 강화시키고자 사용한 것, 영적인 가르침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성스럽고 아름답게 위장시킨 교활한 궤변으로 당신들에게 단지 사탕발림만 실컷 하고 영적인 진보에 대한 약속으로 배를 채우게 해서 자신들에게 구속시킨 다음 자신들을 지지하고 존경하고 찬미하도록 한 것, 만약 당신이 의심 없는 믿음과 복종으로 이에 임하지 않는다면 나를 불쾌하게 하여 채찍이 가해질 것이라고 한 위협, 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욕망을 품고 추구한 바였으며, 욕망은 진실로 내 의지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은 부류에는 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스승을 만나서, 비록 그 스승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리고 얼마나 진실하고 선하며 영적으로 현명한지에 관계없이 당신은 의심 없는 사랑과 헌신 그리고 복종을 다 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가치 있는 가르침과 인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추구하고 당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받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좋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모든 것을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은 헛되고 당신이 추구했던 진정한 결과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시오. 영적인 것을 달성하고자 추구하고 열망하는 것은 사적인 것이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결국 실망과 환멸, 굴욕으로 이끌릴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볼 수만 있다면 환멸감과 굴욕감 속에서 진정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내가 당신을 위해서 열어 보이고 이끈 것이며, 그때 당신에게는 인간적인 스승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될 것입니다. 이러한 환멸감과 굴욕감 그리고 고의적으로 당신을 그리로 데려간 것은 당신을 다시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고 온유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당신이 내면에서 울리는 나의 말을 듣고 따를 수 있도록 준비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듣고 따름으로서, 당신은 나의 왕국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외적인 추구는 끝나게 될 것이며 당신을 나에게 데려오는 일만 남았습니다. 지치고, 헐벗고, 굶주린 당신은 기꺼이 나의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내가 건네주는 빵 껍질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것입니다. 이전에는 완고함과 자만심으로 인해 받을 가치조차 없다고 여겼으며 당신의 지체 높은 혼에게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가르침과 교사로 충분하다면, 당신의 내부에 지혜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이러한 말들은 당신의 가슴에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왜 그러한 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러한 말들은 당신이 이미 내부에서 진실이라고 느꼈던 것을 확신시켜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것을 아직은 볼 수 없고 여전히 중재자를 필요로 하는 당신을 위해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준비해 놓았다가 당신을 일으켜 세우고자 했습니다. 당신이 그와 같이 살아서 당신의 인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깨어있는 의식으로 나와 일체를 이루기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견딜 수 있는 당신에게, 우리 사이에는 중재자가 필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알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의식을 가지고 지체함 없이 바로 나에게로 올 수 있습니다. 나, 내부에 있는 신은 언제나 당신을 받아들이며 당신은 나와 함께 영원토록 거할 것입니다. 심지어 나자렛의 사람 나의 아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현재도 나는 그를 통해 표현되고 있으며 미래의 어느 날, 나는 당신을 통해 표현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왜 그와 같이 아름답고 영적인 가르침이 그와 전혀 걸맞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오게 되었는지 의아해 여기는 당신에게 말합니다.


나의 의미를 초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나는 모든 통로를 다 이용합니다.


어떤 이들의 경우 다른 이들보다는 더 낳은 표현의 매체로 준비시켰습니다. 하지만 인성은 전혀 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보다 더 나를 담을 수 있도록 가슴에 활기를 불어넣어, 보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나와 하나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나와 일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로부터 분리된 의식으로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안에서 나는 살고 움직이고 나의 영적인 본질을 표현합니다.


이 지상에서 표현을 시작한 이래 맨 처음부터 나는 나의 이상, 결국에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나의 말을 보고 그것을 이 세계에 전할 나의 사제와 나의 예언자와 나의 메시아를 준비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사제나 예언자 혹은 메시아를 통해서 얘기하건 또는 어린 아이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적을 통해 얘기하건, 생생하게 살아서 당신에게 감동을 주는 모든 말들은 당신의 내가 그러한 인간 매체를 통해 당신 영혼의 의식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제 중 한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나의 말을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지라도 사제로부터 모든 이들의 의식 깊숙이 있던 살아 있는 말을 끌어낸 것은 사제 자신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있는 바로 나입니다. 사제는 자신이 말한 것 중 그 무엇이 당신에게 그토록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며, 심지어 당신에게 이야기한 말에 담겨 있는 나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사제 내부에 있는 나는 사제의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로부터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나에 대한 헌신과 믿음을 보고 거기에서 영적인 힘을 끌어냅니다. 이 영적인 힘은 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놓은 각자의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하는 채널 혹은 연결선입니다. 비록 모든 이들에게 같은 말을 하고는 있지만, 이 말은 각자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어떤 한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다른 이들은 결코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 있는 내가 당신에게 의미하는 바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형제와 자매 안에 있는 나는 모든 이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각각 선택하는 것입니다.


두 명 혹은 세 명이 나의 이름 아래 모였을 때라도 나는 언제나 함께 합니다. 그들을 한데 모으도록 한 생각은, 그리고 각각의 사람 안에서 영감을 준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나를 향한 그들의 열망이 모임으로 해서 각각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서 영혼의 의식이 나를 흘끗 조우할 수 있도록 매체 혹은 채널을 창조했습니다.


나는 모든 사제와 모든 교사, 모든 매체들이 이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대리인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들 대리인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따르도록 그들 스스로 열망하게 북돋웠습니다. 이는 내가 한 것입니다. 내부에서 나의 현존을 의식할 준비가 된 이들의 가슴속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사제와 교사 혹은 매체들은 아마도 내부에 있는 나를 결코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나를 자신들 외부에 있는 어떤 스승 혹은 인도자 또는 구세주로 칭하거나 인격화시키려 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야말로 내가 대리인으로 이끈 이들이었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어떤 말을 통해서 나는 그들 대리인들이 말하도록 하고 열망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이 부여한 영적인 힘과 함께 하도록 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영혼의 의식을 각성시켜 진정으로 나, 모든 것의 바로 그 중심에 있으며 각각의 가슴속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초월적인 영혼을 이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대리자 안에 있는 나와 그들을 따르는 모든 이들 안에 있는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에 있어서 하나이며 이해에 있어서도 하나이며 사랑에 있어서도 그리고 나의 의지를 수행한다는 목적에 있어서도 하나인 것입니다.


나, 전적으로 개성을 뛰어넘어 있으며 시간도 공간도 개별적인 정체성도 모르는 나는 그저, 대리자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인성과 그들이 서로 마주하는 사적인 기회를 내부에서 밖으로 표출되고자 언제나 전력을 다하고 있는 나의 이상이 말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을 뿐입니다.


나를 따르는 자들의 신뢰와 믿음을 취한 대리자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했습니다. 나는 적당한 시절이 오면 나의 의지와 나의 이상을 깨달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그들의 인성에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것입니다. 언제나 엄청난 고통과 굴욕이 뒤따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가고 나면, 그들의 영혼은 환희에 넘쳐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나를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아름다운 진리의 말이 그 말과 부합하지도 않고 또한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온다고 해서 의아해하지는 마십시오. 또한 단순하게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정작 말을 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높은 지평을 향해 성장해 가는 것에 대해서도 의아해할 것 없습니다. 교사와 제자, 모든 이의 내부에 존재하는 나는 개개의 영혼 안에 있는 나의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조건을 선택하고 각각 다른 방법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보완하고 도울 수 있는 장소와 시간에 맞추어져 있는 개개의 영혼은 나의 이상을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조화롭게 펼칠 수 있도록 하모니를 이루고 있습니다.


15장 매스터


아직도 여러 가지 가르침에서 배운 대로 나와의 합일을 위해 내가 각각의 구도자에게 "매스터" 혹은 성스러운 스승을 데려다 줄 것이라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는 당신이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과거에 당신이 여러 종류의 신비서적과 가르침에 파고들도록 내가 허락한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이러한 가르침에서 찬양하고 있는 합일을 이루는데 필요한 힘을 얻고자 하는 당신의 비밀스런 열망을 북돋기까지 했습니다. 그러한 힘을 소유할 수 있는 당신 안의 실낱같은 의식에 생기를 주면서까지.


심지어 나는, 당신이 특정한 의식이나 호흡법, 만트라를 되풀이함으로 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매스터"를 끌어당겨 그가 당신의 스승이 되어 주고 당신이 보다 향상된 단계로 진입할 수 있도록 특정한 비전을 준비시킬 것이라는 신념도 묵인했습니다. 그러한 비전은 존재의 내부 계획에 있는 비밀스런 체계이며 나의 신성한 지혜를 보다 풍부하게 당신에게 열어 보여줄 것입니다.


나는 단지 이러한 것만을 허용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볼 수만 있다면, 당신을 이러한 책들로 이끌고 그러한 열망을 북돋아주고 그에 대한 신념이 당신 마음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한 것 또한 바로 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상상하듯 그러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러한 모든 가르침, 열망, 신념을 통해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에 나의 신성한 이상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지적해 주면서 당신을 이끌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힘을 천상의 계급으로 묘사해 왔습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은 그것을 보다 더 잘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태초부터 그들을 나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한 천사 혹은 신성한 존재, 초월적인 대리자,

나의 의지의 집행인으로서 묘사해 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존재를 만나서 말을 주고받고 싶은 가능성에 매혹된 당신의 인간적인 지성은 일부 어떤 가르침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이들을 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당신의 인간적인 일상사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 상상하면서, 삶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또한 특정 가르침에 제시되어 있는 규칙을 따르며 산다면 그들을 흡족하게 해서 당신이 열반이나 불멸성을 얻도록 도와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와 같은 현혹에 스스로 빠져들도록 고의적으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도하고 주어진 모든 가르침에 성실하게 복종하도록. 심지어 때로는 당신 스스로 만든 이상적인 존재에 대한 비전과 꿈속에서 섬광처럼 그를 조우하도록 하고 그가 바로 이상적인 "매스터"라는 믿음을 허용하면서 당신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나는 심지어 당신 안에서 특정한 능력을 열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당신은 삶에 있어서 영적인 부분을 스쳐 가는 인성의 현존을 느끼게될 것입니다. 그 매스터와 지도자는 당신의 열망으로 인해 끌어 당겨진 것이며, 그들이 지녀야할 일부의 역할을 완수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자, 이제 그러한 존재들은 매스터가 아님을 알아야 될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또한 신성한 존재들은 자신을 매스터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나, 오직 나만이 당신 자신의 진정한 자아이며, 당신이 당신 형제 안에서도 나를 알아 볼 수 있을 때까지, 현재 당신의 유일한 매스터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건, 영적인 존재이건 당신의 의식에 다가와서 자신을 매스터라 주장하거나 혹은 당신이 매스터라 부르는 것을 허용한다면 그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가 연설한 수없이 많은 놀라운 "진리"와 그가 행한 "경이로운" 일에 상관없이 그는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이 이해하고 있는 용어로 신성이 아닙니다.


당신이 다른 존재에게서 매스터라는 이상을 찾고 숭배하는 한, 그가 아무리 지고하고 성스럽게 보일지라도, 그만큼 당신은 그러한 이상에 실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내가 그와 같은 "매스터"를 당신에게 허락해 그를 만나서 친분을 쌓을 수 있기 전까지는.


만일 그러한 "특권"이 당신에게 허락된다 할 지라도, 그것은 어서 빨리 당신이 눈뜨기를 바라고 뒤따라올 환멸감을 재촉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당신이 진정 "매스터"는 단지 인성일 뿐이라는 것을 배우면, 당신 자신보다 그 깨달음이 아무리 높이 진보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인성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내면의 가장 깊은 영혼이 당신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신성한 존재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면에 있는 진실을 가르칠 수 있는 모든 이상을 당신의 식탁에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당신으로 하여금 완벽한 속임수에 빠지도록 하고 모든 인간의 가르침, 그리고 모든 인간과 심지어 신의 완벽함에 대한 신뢰마저 잃게 했다면, 그것은 단지 실제와 그림자를 보다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에게 그려주려고 하는 보다 지고한 이상을 준비케 함이었습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으로부터 들어올릴 수 있는 곳은 오직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상에 한정되어있습니다. 욕망을 통해서 나는 나의 의지를 당신 안에 현현하도록 하고 욕망을 통해서 나는 수많은 경이로운 일을 행했습니다.


만약 의심이 든다면, 다음의 열쇠를 한 번 사용해 보십시오.


매스터를 생각하는 것은 매스터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매스터에 대한 이상은, 생각을 통해서 당신이 매스터에게 요구하게 되는 이미지를 만들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각을 통해서, 이러한 이상에 덧붙여 매스터가 지녔으리라 상상되는 모든 자질을 지어냅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은 욕망을 통해서, 소망을 통해서, 숭배를 통해서 이러한 자질들을 여전히 인격을 지니고 있는 어떤 상상의 인물 안에서 창조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까지는 초월적인 존재를 마음에 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욕망과 생각의 강도에 따라, 이러한 이상은 조만간 반드시 현실로 구체화될 것입니다. 육체를 입은 사람이든지, 아니면 환영과 꿈의 영역에서 구체화시킨 인물이든지간에.


인간의 마음이란, 특정 시기가 오면 당신이 매스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도록 작용합니다.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시련이나 문제를 가지고 그에게 가면 설명과 충고를 얻을 수 있으며 인생사의 문제가 그가 말하는 대로 귀착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을 저버리거나 혹은 당신을 속여 낙담시키고 환멸과 굴욕감에 젖게 해서 결국 나, 당신 자신의 자아에게로 다시 내던진 사람에게 이끌었다면, 그것은 오직 그렇게 해서 당신이 내부의 나에게로 돌아설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해 왔지만 자만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나의 목소리를 듣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직은 이러한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당신이여, 육체를 가졌든 혹은 영적인 형태이든 당신이 열망해오던 매스터를 아직 만나보지 못한 당신이여. 나의 말을 통해 그 말이 지니고 있는 진실에 대해 반응하도록 일깨우려 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당신이여. 그러한 당신을 위해 나는, 결국에는 반드시 당신을 나에게로 이끌게 될 어떤 경험을 비축해두고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당신은 내가 바로 매스터라는 앎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밖으로든, 안으로든, 당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온 매스터에 대한 모든 생각과 모든 열망의 내부 그리고 그 이면에서 영감을 부여한 이상이라는 것을.


"제자가 준비되면, 매스터는 나타난다"라고 가르쳐져 왔습니다. 어떤 의미로 볼 때, 이 말은 진실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해석하고 있는 그러한 의미로는 아닙니다.


매스터를 바라는 당신의 비밀스런 욕망은 그를 당신에게로 데려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나타나는 것은 내가 준비해왔을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나타나는 것은 단지 매스터의 등장일 뿐입니다. 진정한 매스터 혹은 스승이 나타날 때, 당신은 결코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스터는 재미있는 친구나, 사업상의 동료, 이웃집 사람 혹은 자신의 아내나 남편, 자식들 안에 숨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딛고 일어선 당신, 더 이상 매스터 혹은 스승을 찾지 않고 나의 영원한 현존과 약속에 대한 신뢰 안에 자신의 거처를 택한 당신이여. 당신을 위해 나는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쁨과 축복을 당신의 영혼에게 가져다줄 만남과 교류를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자, 이것은 신비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것을 이해할 때까지, 위에서 말한 것이 여기에 있는 어떤 진술과 일치하지 않으며 나의 다른 계시록과 상반된다고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 신비는 당신에게 들어 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진실로 나의 의미를 알고자 원한다면.


그 때가 되기 전까지는, 당신이 추구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지고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나, 당신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이며 전지 전능하며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존재, 드러나 있는 모든 것의 내면에서 그리고 이면에서 영감을 주는 이상인 나에게로 직접 다가올 수 있다면, 어째서 나의 완벽함을 부분적으로 나타내고 있을 뿐인 인간의 모습을 한 스승이나 영적인 스승, 인도자, 매스터 혹은 천사를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신 안에 내가 있으며, 심지어 당신이 찾는 모든 것에도 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혜, 모든 권능, 모든 사랑은 다 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어째서 나에게 오지 않는 것입니까? 왜 나에게 와서 나로 하여금 당신을 준비시켜 당신을 통해 나의 모든 것을 표현 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 것입니까?


당신은 인간적인 인성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은 신성이며 그러므로 완벽합니다.


당신은 첫 번째 진리는 믿지만, 두 번째 진리는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둘 다 진실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비입니다.


당신은 스스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당신입니다.


당신은 전자입니까? 아니면 후자입니까? 아니면 둘 다입니까?


당신은 나와 하나입니다. 나는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 안에. 당신의 몸, 마음, 지성 안에. 당신 몸의 모든 세포 안에. 그리고 당신 마음의 모든 속성 안에 있으며, 당신 지성의 모든 자질 안에 있습니다. 나는 영혼이며, 각각의 활동 원리입니다. 당신은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내 몸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이며, 내 마음을 이루는 하나의 속성이며, 내 지성을 이루는 하나의 자질입니다. 당신은 나의 일부분이지만, 곧 나, 나의 자아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당신 마음에 매스터에 대한 이상을 가져가서 집중하도록 한 것은 오직 당신에게 나에 대한 이러한 이상을 준비시켜 이끌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초월적인 자아, 빛의 천사, 내 존재의 광휘, 그리고 당신 자신의 신성한 주님이며 매스터인 내부에 있는 나에게로.


그렇습니다. 당신의 신성한 자아인 나야말로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 찾도록 한 매스터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나를 찾았을 때, 그리고 내가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바로 그 때 당신은 인간적인 의식으로 기꺼이 나의 제자가 될 것이며 충심을 다해 나를 기다리며 오로지 나에게, 당신 안에 있는 나 그리고 당신의 이웃에 있는 모든 나에게 봉사하는 것만을 염두에 두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나는 모든 사람 안에 거하고 있으며 그들의 유일자이며 유일한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통해 나는 당신을 불러왔으며 당신의 인간적인 의식에 닿고자 그리고 인상을 남기고자 애써왔습니다. 끊임없이 당신에게 가르쳐왔듯이, 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각각의 시기에 필요로 했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나에게는 당신의 의식에 다다르는 수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당신에게 가져가서 사용했습니다.


나는 수많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열정 그리고 욕망을 담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연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경험의 목소리로 심지어 때로는 인간적인 지식으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나의 목소리였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하나의 사실을 표현하고자 그것을 초월적으로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모든 것 안에 있으며 모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수천 가지 방법으로 말해진 이 목소리는 당신 또한 이 모든 것의 부분임을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리고 당신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당신이 나를 인식하기를, 그리하여 당신의 의식이 나의 초월적인 완벽함의 이상을, 천상에서 표현되어 온 것과 마찬가지로 이 지상에 표현하는데 동참하기를 내내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찾아들면, 오직 그 때, 당신은 진정한 매스터를 만나고 알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직 그 때가 되어서야 당신은 어째서 나, 당신 자신의 초월적인 자아만이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의 매스터가 될 수 있는 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때가 되면 어째서 인성적이며 분리된 의식으로는 육신을 입고 만나야 하는 한 사람의 진정한 매스터를 결코 인식할 수도 그리고 알 수도 없는 지 또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의식, 즉 당신 안에 있으며 매스터의 안에 있는 나의 의식으로 들어올 수 있을 때까지, 매스터는 아마도 친절하고 도움을 베풀고 있는 친구나 교사 이상으로는 보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 의식을 획득하면, 그제서야 위대한 영 형제단에 속해 있는 당신의 동료들을 알고 그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자아를 정복하고 오직 자신들의 어린 형제들을 돕기 위해 또한 내부에 있는 신성한 존재들을 발견하기 위해 살아가는 영혼들입니다.


신성하게 보이고 당신이 매스터라고 생각하게 하거나 부르도록 하는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인생에 나타난다면, 그는 아직 전적으로 초월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그 사람은 뛰어난 인물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영혼이 섬기기를 열망하는 신성한 존재는 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비록 그가 완전히 초월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러한 사람을 매스터로 둔 것에 만족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는 나의 초월적인 완벽함을 끊임없이 대조시켜가면서 그의 인성적인 불완전함을 깨닫도록 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와 나의 초월성을 오직 하나 뿐인 모델이자 이상으로서 인정하며 완전한 복종으로 나를 향해 돌아설 때까지. 그리고 오직 내부에서 그리고 자신 영혼의 숨겨진 깊은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을, 오랫동안 밖에서 나의 완벽함을 찾아 헤매도록 당신에게 영감을 부여한 진정한 이유로 인정하면서.


16장 그리스도와 사랑


나의 말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당신의 믿음과 사랑을 없애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앉고 있는 당신에게 말합니다.


이천 년 전, 나의 이상을 표현하던 단계가 나의 신성한 실제를 어느 정도 보여줄 수 있는 시기에 이르렀을 때, 나의 인간적인 속성들에게 이 지상에서의 임무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인성을 통해 그리고 나의 신성한 속성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인간의 형태를 통해 표현되어야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면에 있는 나로 인해 인간들의 마음과 지성은 보고 기억하고 영감을 받을 수 있었고 나의 이상을 그들의 마음과 지성을 통해 그와 비슷하게 표현하고 자신들의 인간적인 인성 속에서 그 이상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나는 갈릴리 사람인 예수의 인성을 통해서 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나의 가르침을 통해서, 또한 나의 신성한 이상을 완전하게 표현하기 위해 필요했던 그가 구현한 나의 삶을 통해서. 인간적인 이해력에 대고 자세히 그려가면서.


나는 그가 인간적인 인성으로 겪고 지나가야 될 것을 만들었으며 일종의 상징적인 자연의 경험으로 여러분에게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 즉 이러한 인성을 창조한 나의 인간적인 속성들이 다시 초월적으로 돼서 나와 더불어 신성한 나의 이상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성을 가진 모든 이들이 반드시 겪고 지나가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인간적인 속성인 여러분들 모두는 내부에 있는 나로 하여금 여러분들의 인간적인 마음을 각성시켜 여러분들의 신성한 자아인 나를 깨닫기 전에 초라한 말구유-소 때들이 먹이를 찾으러 오는 장소(신에 대한 신뢰와 결의로 가득한 가슴. 이 상태는 인간이든 혹은 동물이든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상태입니다)- 안에서 순결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 몸과 이해력을 충분히 성장시키고 발달시켜 내부에 있는 나를 느끼도록 어둠(혹은 지적인 활동)의 땅인 이집트로 보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힘과 나의 사랑을 충분히 자각하게 되면 나는 당신을 통해 지혜와 진리의 말을 전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지식인들, 심지어 율법학자들조차도 당황케 만들 것입니다. 이 후에는, 오랜 동안의 공부와 명상의 시기가 뒤따르게 됩니다. 그 시기는 마음을 성숙하게 하고 영혼을 발달시켜서 내부에서 나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각성시키고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 때가 되면 당신은 나를 향해 완전히 개화되고 당신과 내가 하나라는 충만한 의식을 갖게 됩니다. 여기에 더 이상의 분리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진정한 자아이며 이 후로는 내가 전적으로 당신의 삶을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나의 다른 계시록에서 광야라고 언급되어 있는, 세상으로 당신을 이끌어낼 것입니다. 거기서 당신을 시험하고 강하게 만들어 나의 신성한 속성을 초월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익히도록 힘과 자만과 돈이라는 세 가지 커다란 유혹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 어떤 지성도, 자아도 그리고 외부의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유혹해서 내부에 있는 나를 잊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당신의 가슴속에서 이야기하든, 혹은 당신 형제의 가슴속에서 이야기하든 이제 당신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오직 나의 목소리뿐이라는 것을 당신이 증명하게 될 때까지.


이러한 증명을 통해 기적을 행하고 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전달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당신을 믿지 않고 비웃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과 박해도 함께 할 것입니다. 세속적인 법을 대표하는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의 시련이 따르고, 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통을 겪고, 무덤에서 3일간을 보내고 그리고 결국 나와 완벽한 합일된 상태를 이루어서 부활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내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영혼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향해 당신의 가슴을 열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과 그리고 이전에 나의 계시록에서 준 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따랐던 모든 사람들이 가던 길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새로운 섭리를 위해 내가 당신과 많은 이들을 준비해온 시기에 도래했습니다. 당신은 초월적인 방법으로 아무런 매개체 없이 즉시 나의 의식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인성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던져버릴 수 있을 만큼 성장하고 힘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나를 선포할 수 있으며 내가 이러한 힘을 주었고 외부 세상에 대한 끌림과 영향으로부터 일어설 수 있도록 한 내부의 유일자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야말로 내가 나의 신성한 이상의 그 모든 놀라운 영광을 표현할 영혼으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즉 나 의식은 당신이 신성한 나의 이상으로 표현된 나를 완벽하게 그릴 수 있는 그 날까지 당신의 심장과 모든 인성들의 심장 안에서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서 예수의 삶을 통해 상징화된 경험들을 거쳐가야만 합니다. 예수의 삶을 통해 내가 표현했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본보기는 당신의 삶에서도 힘껏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자비는 사실상 사랑이라기보다는 성스러운 삼위일체, 즉 사랑-지혜-권능으로, 이것이야말로 나의 초월적인 삶을 진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초월적 삶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초월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의 깊게 헤아려보면, 당신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인간적인 감정 혹은 그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혹은 사적인 흥미를 배제한 사랑을 품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부에 있는 나를 당신의 마음에서 느끼기 시작하고 나를 담기 위해서 당신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섬유를 창조적인 직관으로 깨어나게 할, 당신에게 있어서 진실로 생명의 연금액이 될 놀랍고 경이로우며 새로운 느낌을 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할 때, 그러한 감정을 외부로 드러내기 위해 당신을 통해서 그 감정을 세상으로 쏟아 부을 때, 당신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신성한 초월적인 사랑의 향긋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당신은 마음의 해탈을 얻고 다함이 없는 권능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은 당신을 전적으로 사심 없이 만들고 나의 신성한 이상이 초월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완벽한 통로가 되게 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자신이 나를 이루는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들을 이루는 일부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혹은 당신을 이루는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것이며 어디든지, 혹은 어떻게든지 내가 지시하는 대로 쓰이기 위해서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당신의 삶은 더 이상 당신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자아는 다른 자아들 속으로 녹아 사라질 것입니다. 당신은 아낌없이 당신의 삶과 이해와 힘을 제공할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초월적인 삶, 혹은 초월적인 사랑의 국면으로 당신이 그처럼 하도록 나누어 준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을 통해 초월적인 사랑의 많은 측면을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예수의 삶과 인성에 감화를 받고 그를 본받도록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한 추구와 분투 속에서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 의식을 깨닫도록. 그리스도는 단지 나를 향해 열려있는 채널 혹은 문이라는 인식과 깨달음을 통해 나는 마침내 당신이 의식을 갖고 나의 초월적인 삶의 일부로 들어설 수 있는 지점까지 당신을 데려왔습니다.


여기서 나는 명백히 당신에게 말합니다. 나의 초월적인 사랑은 인성적인 삶과 인성적인 사랑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은 인류의 가슴에 있는 것을 나의 진실한 사랑의 영역으로 쏟아 붓기 위해 이용한 매개체일 뿐입니다. 그 영역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포함하며 생명을 주고 창조적이며 고양시킬 수 있는 힘을 계속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은 개개인이나 인성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은 삶이라는 체스 판에 놓여있는 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나는 나의 목적, 즉 나의 신성한 이상으로 인류를 완벽하고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최선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그 말을 이동시킵니다.


인류 안에서 나는 오직 나의 이상을 표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오직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을 통해 그리고 그 안에서 당신 자신의 이상을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안에서 나는 살고, 움직이며 나의 존재를 행사합니다. 인류는 나의 불멸의 자아의 소멸해갈 인성이며 몸입니다. 마치 당신의 인성과 몸이 당신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인 것과 마찬가지로.


육체를 지니고 있는 개개인의 모든 인간적인 인성은 인류라는 나의 몸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세포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 있는 이 내가 현재 당신의 몸을 지어서 그것을 통해 당신이 지니고 있는 나의 이상 혹은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해서 나는 점차로 인류를 지어서 그 인류를 통해 나의 자아가 품고 있는 나의 이상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라는 내 몸에서 각각의 세포들이, 심지어 당신의 인간적인 몸을 이루는 세포조차도, 나의 삶에 동참함으로 해서 초월적으로 그리고 조화로운 조직의 한 부분을 이루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합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세포라도 이에 저항하거나 조직의 총체적인 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다면 그 조직은 조화롭게 작용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몸 전체는 타격을 받고 병에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조직을 이루는 각각의 세포 하나 하나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 세포의 작용은 조직이 완전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몸이 완벽한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세포가 내 전체 몸을 지탱하기 위해 완벽한 기능을 하도록 자신들의 모든 힘과 지성, 사실상 이것은 내가 준 생명의 속성이며 이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의 몸은 당연히 부조화 상태에 빠지게 되고 병, 고통, 죄, 속박, 가난, 이해의 빈곤, 분열 혹은 죽음이라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처럼 각각의 조직이 완벽한 건강상태에서 내 몸의 생명을 표현하고 유지하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내가 부여한 모든 지성과 힘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분열, 혼란, 폭동 결국에는 전쟁, 즉 다양한 조직 사이에서 그리고 저마다의 세포들 사이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 내 몸 전체에 크고 작은 혼란 상태가 초래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류라는 내 몸 안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국가 간의 전쟁일 것입니다. 국가는 내 몸의 조직입니다. 모든 전쟁은 단지 첨예한 질병, 부조화인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인류 안에서 초월적인 사랑으로 표현되고 있는 나의 삶은 심지어 물질 육체에서조차 오직 조화 속에서 표현될 수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사용되고 균형을 잡고 상황에 대비한 다음에 비로소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몸을 이루는 다양한 조직으로부터 모든 질병과 쇠약해지고 부적절한 세포를 서서히 종식시키거나 혹은 질병을 열병, 수종, 부스럼, 패혈증, 혹은 퇴화와 같이 신체에서 악성상태로 진행시키면서 합니다. 이처럼 특정한 조직이 정화되거나 혹은 그 조직의 작용력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수억의 세포들은 그와 같은 세포들을 배출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각각의 세포와 조직의 진정한 생명과 작용은 나의 총체적인 몸이 완벽한 조화 속에서 존재하고 표현될 수 있도록 개체적인 삶을 포기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 하나의 세포와 조직이 이러한 생각 외에 다른 어떠한 생각도 품지 않을 때 그리고 자신들을 순결하고 사심 없는 통로로 만들어 나의 초월적인 생명이 흐르도록 할 때, 나의 몸은 조화롭고 완벽한 전체가 됩니다. 그리고 그 때, 나의 이상은 영원 안에 있는 천상의 영역에서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지상에 그 신성한 힘과 가능성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의 진정한 생명인 사랑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당신을 통해 나의 성스럽고 초월적인 사랑을 쏟아 부을 수 있도록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한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당신이 서서히 획득한 나에 대한 인식 즉 내면의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 또한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일깨울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 또한 자신들의 자아를 전적으로 나를 향해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당신과 그들이 형성하고 있는 인류라는 나의 몸을 이루는 기관이나 특정 부분은 완벽한 건강과 조화를 얻게 되고 내 전체의 몸을 완벽한 건강으로 채우고 유지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가 오면, 나의 신성한 생명력 혹은 내 초월적인 사랑은 모든 인류를 통해 흐르고 현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이상은 천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이 지상에서 표현될 것입니다. 이 지상과 지상에 속해 있는 모든 체들은 이전에 그러했듯이 더 이상 조잡한 육체를 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하게 정화되고 자신을 닦아서 다시 한번 자신들이 내려온 그 곳으로 스스로를 들어올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창조했던 목적, 즉 외부적인 현현과 나의 신성한 이상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유기체를 발달시키고자 했던 목적이 완수되었기 때문입니다. 육체, 즉 그와 같은 것을 표현하기 위한 표면적인 매체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차후로 나는 마음 질료를 가지고 창조하고 표현할 것입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삶이 영위되는 천상의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유일한 매체입니다.


17장 귀향


여기서 말해진 모든 것을 깊게 탐구하고 나에 대한 어렴풋한 윤곽을 얻은 것 같지만 아직 확신은 없을 것입니다. 그대여! 가까이 다가와서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영혼으로 들으십시오.


고요하라! ― 그리고 알라 ―나는 ―신이다.


만일 당신이 "고요하게" 있는 것을 배웠다면, 만일 당신 내면의 신인 이 "나"에 대해서 공부하고 명상해왔다면, 만일 이것을 인격적인 나와 구분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때때로 인성으로부터 한 발자국 나와서 인간적인 자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할 수 있다면, 그러한 인성이 지니고 있는 사소한 그 모든 결점과 약점, 그리고 그 안에 토대를 잡고 있는 이기심과 동물적인 욕구와 열망, 뿐만 아니라 그 유치한 갈망과 한심한 자만심, 허영을 한 번 보십시오.


이러한 것을 할 수 있고 그와 같은 것을 투명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순간 나와 의식적인 자각 상태에서 일체를 이루고 당신 안에 있는 나, 당신으로 하여금 사물의 진실에 대한 눈을 뜰 수 있도록 이끈 것은 바로 나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당신은 인성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나의 의식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부르십시오.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그리고 영적 혹은 초월적인 의식이라고. 왜냐하면 초월적인 눈인 나의 눈을 통하지 않고는 이것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기억을 돌이켜보십시오.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받았던 것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따랐으며 결국 완벽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외 다른 것에는 그 충동에 반대하고 당신이 가진 지성적인 추론으로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결국, 실패와 실망과 괴로움을 맛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추진력으로 당신을 몰아붙이는 의식만이 당신의 진정한 자아, 곧 내면의 나입니다. 나는 그러한 순간에 당신을 인도하고 당신이 해야할 것을 뚜렷하게 말해왔습니다. 그 순간, 당신은 나의 귀인 영적인 귀로 들었으며 초월적으로 복종했을 때는 성공과 만족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인성적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때는 실패와 후회, 불행이 따를 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느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모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친밀함을 느끼거나 부조화스러운 진동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영적 혹은 초월적인 몸으로 느끼는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당신이며 당신이 알아챌 수만 있다면 모든 외부적인 상황과 사건들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보호하고 경고하고 충고를 보내기 위해 경보를 발하며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헌신적인 사랑이 당신의 가슴을 채우는 순간입니다. 거기에는 강렬하게 다른 이들을 돕고자 하는 충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그들이 겪는 고통에서 일으켜 세워주고자 하는 그리고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진리의 길을 일러주고자 하는 충동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당신 안에서 느끼는 바로 나입니다. 그것은 완벽한 사랑으로 신 그리스도이며 유일자입니다. 이 우주에서 생명을 창조해서 북돋우며 활성화시키고 강하게 하고 치유하기도 하며 모든 것을 제공하며 모든 것을 채워 넣는 힘인 나의 진정한 속성을 표현하고자 인성을 옆으로 밀어 제치고 당신의 마음과 몸을 내가 창조한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나입니다. 당신의 영적인 몸이며 내가 거주하는 내부에 자리하고있는 완벽한 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당신을 이끈 사람은, 그렇습니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세밀한 부분까지 언제나 당신에게 얘기하고 충고하고 가르치고 위험신호를 알리고 도와준 바로 나였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돌아서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당신이 매 순간 받아들이는 이 인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연구한 후 나를 기다리고 내 안에서 안식을 청하기만 한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나는 당신이 가는 길 내내 당신을 인도하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짊어진 짐을 가볍게 만들며 삶의 고요한 물결이 일고 있는 푸른 초원으로 당신을 인도할 것입니다.


나의 자녀여, 진심을 다해, 내부에서 발견한 내가 지시하는 데로, 결코 멈추지 않고, 인간들이 말하는 지식과 가르침의 표면을 맴돌며 낭비해온 시간과 에너지의 십분의 일이라도 쏟을 수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당신 내부에 있는 나의 현존을 되풀이 그리면서 하루에 단 한 시간을 오직 나에게만 쏟아 부을 수 있다면,


여기에서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이제 곧, 오래지 않아 당신은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지금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감 잡을 수도 없는 진리와 힘과 도움을 베푸는 다함이 없는 원천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나를 찾아서 당신 생의 가장 최우선으로 여긴다면, 나를 찾는 그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당신은 나의 현존을 자각하고 당신 가슴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사랑이 담긴 내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곧 나와 아름다운 합일을 이루게 될 것이며 나의 의식 안에 거하고 있는 당신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말은 당신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원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기적적으로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내 안에 머무는 것이 처음에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육체와 악이 아직은 계속해서 당신의 의식에 흔적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초월적인 나의 눈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어 사물의 진실을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이 지상의 주님이라고 여겨지는 존재의 진실마저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자신이 천사 같은 사람들과 함께 경이로운 신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육체는 단지 신세계에 거하는 당신 인성의 탈것, 혹은 나의 이상을 이 지상에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필요했던 영혼의 자질을 발달시키고자 당신이 창조한 지상의 조건이나 경험을 위한 도구 즉, 옷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눈에는 어떤 그림자도 어떤 악도 없으며 따라서 악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빛이고 사랑이며 자유고 행복, 평화이며 당신은 모든 존재 안에서, 그리고 나의 속성을 저마다 표현하고 있는 이들 안에서, 또한 나의 한 국면인 모든 생명체 안에서 나를 볼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단지 나의 사랑이 당신의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오도록 하면 됩니다. 그 사랑은 당신이 바라보는 모든 것의 진실한 의미를 당신에게 밝혀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신의 왕국을 발견해서 그 안으로 들어섰다는 깨달음이, 그 왕국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지상이며 당신 주변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그 왕국이며 당신은 계속해서 이 왕국 안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살아왔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그 위대한 깨달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왕국은 아득히 먼 어딘가에 따로 있는 장소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의 존재 내면에, 또한 다른 모든 존재의 내면, 즉 겉으로 드러난 사물의 내면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왕국은 모든 존재의 실체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든 것은 이 실체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것은 나로부터 자기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인간의 잘못된 생각과 믿음으로 인해 창조된 것입니다.


당신이 왕국을 발견하게 되면 사실상 당신 자신이 내 신성한 속성 중의 하나였음을,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이 지나 온 모든 일들은 처음부터 당신을 위해 펼쳐졌던 것이고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을 위한 일에 적합하도록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그 안에 있는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전 영혼은 지금까지 지나왔던 그 모든 방황의 시간 끝에 마침내 나의 집으로 돌아와 나의 진정한 삶 속으로 영입할 수 있다는 기쁨에 넘치는 기대감으로 인해 날아오를 것입니다. 이 진정한 삶이란 나와 당신의 다른 자아들의 의식 안에 있는 유일자이며 나의 신성한 이상을 이 지상에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한 마지막 작업입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즐거움 가득한 기억을 불러일으켰고, 영혼의 활기를 지펴온 당신이여. 내가 지금까지 당신에게 해 온 그 모든 말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다음의 이 말을 결코 놓지 마십시오. '가만히-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기다림, 그 영광을 배우라. 만일 당신이 초월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초월적인 이해력으로 들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만약 이 글이 당신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나의 실체에 대한 첫 번째 비전을 가져다 주었다면, 나와 나의 왕국을 부분적으로 인식함으로 인해 당신을 일시적인 영적 황홀경으로 이끌어줄 높은 진동을 불러일으켰다면, 그리하여 당신이 언제나 이러한 나의 의식 안에 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면,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복종한다면, - 당신 의지의 성실성과 강도를 시험하고자 찾아든 상황에서 쉽사리 무릎꿇고 낙담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직 당신이 예민하게 자신이 지닌 힘의 부족함을 깨닫고 노력과 실패를 통해 나를 믿고 내 안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때, 나는 당신을 통해 영원토록 표현되고 있는 나의 신성한 권능이 지닌 의식 안에서 당신을 활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높은 진동은 오로지 특정한 영혼의 능력과 그에 상응하는 자질 안에서만 일깨워질 수 있지만, 내가 그러한 힘을 나타내기 이전에 이미 그 진동은 일깨워진 후라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러한 영혼의 자질이 일깨워지면, 그러한 자질들은 다른 어떤 자질들로부터 적극적인 저항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당신의 내부에서 지배권을 행사해왔던 것으로 반드시 극복되고 정복되어야만 합니다. 영혼의 자질이 온전히 표현되기 전에 고양되어 자신의 진정한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러한 저항은 반드시 강하게 몰아쳐 와서 영혼의 자질이 완벽하게 표현되도록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신성한 이상이 표현되고자 내부에서 움터나오기 전에 외부로부터 오는 모든 공격을 꿋꿋하게 막아낼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인지하십시오. 당신이 나의 힘을 견디어 낼 수 있다면, 그만큼 강하다면 그 즉시 나는 그것을 표현할 것입니다.


당신이 저질러온 실수는 당신을 성장시켰습니다.


나는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의 나무입니다. 나의 생명은 뻗어갈 것이고 점차적으로 서서히 자라날 것입니다. 당신은 다 자라기 전까지는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나의 생명은 그 모든 시간 동안 당신 안에서 완벽한 건강과 힘과 아름다움을 쌓아오고 있으며 현재 내부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과 같이 외부로도 그렇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부에서 나를 깨닫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나와 교감을 이룰 수는 없는 당신. 지금부터 듣고 배워나가십시오.


당신은 "고요히"있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내부에서 나의 현존에 대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곳에 있는 나를 깨닫고 나에게 질문을 던지십시오. 그런 다음, 침묵 속에서 나에게 답을 구하는 기도를 청하십시오. 하지만 불안함이나 근심 혹은 사적인 흥미는 배제하십시오. 그저 열린 마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다가오는 인상을 맞이하십시오.


어떤 사고가 당신의 머리 속으로 들어왔는데 그것이 이전에 어디선가 들은 것이라 생각된다면, 즉시 그것을 집어던지고 말하십시오. "아닙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또 다른 사고가 다른 인간적인 출처를 통해서 다가올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깨어있다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거부할 것입니다. 만일 그런 다음에도 계속해서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당신은 분명히 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느껴지는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시작일 것입니다. 당신이 여러 목소리에서 나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법을 배우게 되어 사적인 흥미를 전적으로 잠재울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이 지니고 있는 이상이나 신념, 견해에 방해받지 않고 언제든지 나와 침묵의 교감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으며, 혹은 다른 이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당신에게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순간 나는 당신의 마음에 해야할 말을 가져다 놓을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서 나오는 침묵 속에서 혹은 다른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당신의 혀를 통해서.


내 사랑하는 이여, 자신을 나에게 기꺼이 바치고 나와 합일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과적으로 세상을 지탱해 주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버팀목이 남김없이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을 뿐이며 돈도, 친구도 없이 어디에서 인간적인 도움을 청해야 할 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축복 받은 그대여, 당신은 지금 매우, 매우 가까이 와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오직 내 안에 거하기만을 바라고 나의 말이 그 안에서 당신을 이끌도록 한다면, 또한 내 약속에 대한 완전한 신뢰로 무장한다면 오래지 않아 당신에게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마음으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기쁨, 성취,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당신은 그 동안 나의 명령에 복종해왔고 나를 신뢰했으며 무엇보다도 나의 왕국과 나의 정의를 추구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세상이 당신에게 주기를 거부했던 것조차 모두 당신에게 줄 것입니다.


그대, 소중한 사람이여, 그처럼 자신을 나에게 헌신했음에도 세상이 제시한 관점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당신. 아직은 그러한 것을 그저 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고 온전히 나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실패와 실망, 가난을 허용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세속적인 것들의 거짓 가치를, 덧없음을 그리고 행복이 자리할 수 있는 여력의 부재와 나의 실제의 삶과의 무관함을 배울 수 있도록.


사랑하는 나의 아이여. 당신은 아직도 이를 보지 못하고 가슴속에는 근심과 두려움만이 가득하군요. 당신은 내일의 일용할 양식이 어디서 오는지 다음 달에 지불해야하는 집세 혹은 지불기한이 만료된 부채를 어떻게 마련해야할 지 막막해합니다.


산상의 설교를 통해 당신에게 주어진 나의 말을 다시 한번 들으십시오.


"내 그대에게 이르노니, 살아감에 있어 무엇을 먹을지 혹은 무엇을 마실지 걱정하지 말라. 그대 몸을 위해서 무엇을 걸칠지 또한 생각지 말라"


"삶이란 그저 육신보다 더하지 아니하더냐? 또한 육체는 옷보다 중하지 않더냐?"


"창공을 나르는 새들을 보라. 그들은 씨를 뿌리지도, 추수를 하지도, 곡간에 쌓아두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천상에 있는 그대의 아버지가 그들을 먹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새들보다 훨씬 더 하지 않는가?"


"그대들 중 염려함으로서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는 자가 있던가?"


"어찌하여 무엇을 걸칠까 고민하느냐. 들판에 핀 백합을 보라. 그들이 어떻게 자라더냐? 그들은 애쓰지도 않으며 옷을 만들기 위해 실을 잣지도 않는다. 내 그대들에게 말한다. 심지어 솔로몬의 그 모든 영광으로도 백합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당할 수는 없다."


"그러한 까닭으로, 오늘 혹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잎조차 하느님께서 입히시거늘 그대들에게 그보다 덜하겠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걸칠까? 말하지도 생각지도 말지어다"


"(이는 모두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리라.) 천상에 거하시는 그대의 아버지는 당신이 이러한 모든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신다"


"그대들은 먼저 하느님의 왕국(하느님의 의식으로 해석되는)과 하느님의 정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이 그대들에게 더하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말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생각이 따로 있을지니"


"한 날의 괴로움은 한 날로 족하리니"


아직도 이보다 더 확고하고 분명한 명령과 약속이 필요합니까? -자신을 나에게 완전히 바치고 스스로를 나의 제자라고 부르는 그대여.


들으십시오! 


내가 언제나 모든 것을 제공해오지 않았던가요? 당신이 언제나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마다 내가 나타나서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요? 주변이 온통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때 불을 가져다주지 않은 적이 있던가요?


현재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어디에선가 더 잘 할 수 있었던 지점을 한 번 보십시오. 당신이라면 자신이 획득한 영적인 이해를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세속적인 소유물과 바꾸시겠습니까? 당신이 이 생 전체를 통해 나에게 반항하고 나를 거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 나의 자녀여, 돈과 집과 옷과 음식과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것은 단지 부수적인 것일 뿐으로 당신이 그것들을 그토록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단지 부수적인 문제로만 앉혀놓지 않는다면, 사실 그것은 당신의 진정한 삶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을 볼 수 없단 말입니까?


만일 당신이 세상이 준 것들을 잃음으로 해서 그것을 통해 나의 유일함을 그리고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때 내가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다면, 세상의 것과 결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진정하며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당신의 것으로 허락할 것입니다.


나의 자녀여, 이것은, 건강과 용기를 상실한, 당신의 자아가 거머쥐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당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기 위해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며 외부에 있는 세상의 의사들과 치료에서 제시하는 모든 지시를 따랐습니다. 결국, 희미한 한 줄기 희망만을 간직한 채 내부의 나에게로 돌아와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사랑스런 이여, 당신 또한 나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아십시오. 나는 유일자이며 당신을 치료할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의사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 내부에 있는 전지전능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의 건강이며 당신의 힘이고 당신의 생명력입니다. 당신이 내부에서 나를 느낄 수 있을 때, 이런 모든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때,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진실한 건강을 경험할 수 있게됩니다.


자, 나의 자녀여, 가까이 오십시오. 나는 이제부터 건강, 번영, 행복, 합일,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할 말에는 위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라!


고요하라! 그리고 알라, - 나는, - 신이다.


당신 안에 있는 나를 아십시오. 내가 당신임을 아십시오. 내가 당신의 생명임을 아십시오. 이 생명 안에 거하고 있는, 이 순간 당신의 전 존재를 통해 자유롭게 흐르는 모든 지혜, 모든 사랑, 모든 권능임을 아십시오.


나는 모든 실질 안의, 즉, 당신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 안에 있는, 모든 광물과 식물과 동물의 질료 안에 있는, 불과 물과 공기 중에 있는, 그리고 태양과 달과 별 안에 있는 생명, 지성, 권능입니다. 나는 당신 안에 그리고 다른 이들 안에 있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다른 이들의 의식은 당신의 의식과 하나이며 모든 것은 나의 의식입니다. 다른 이들 안에 있는 나의 의식을 통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요구하기만 한다면.


그러므로, 그들에게 나의 이름으로 말하시오.


나와 합일을 이룬 당신 안의 의식으로 말하십시오.


당신 안의 내 권능의 의식으로, 그들 안에 있는 내 지성의 의식으로 말하십시오.


말하십시오. -명령하십시오. 이 의식 안에서 당신이 하고자하는 대로 -그러면 이 우주는 그 명령을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수행할 것입니다.


일어서십시오! 나와 합일하고자 열망하는 이여. 이제 당신의 신성한 유산을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의 영혼, 당신의 마음, 당신의 몸을 여십시오. 그리고 내 생명의 호흡을 들이키십시오.


아십시오. 나는 내 신성한 권능을 당신 안에, 이제는 나와 더불어 완전히 살아있는, 나의 건강과 더불어, 나의 힘과 더불어, 나의 지성과 더불어,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가득한 나의 존재와 더불어 완전히 살아있는 당신 존재의 모든 섬유, 모든 신경, 모든 세포, 모든 원자 안에 가득 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분리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의 진정한 자아, 당신의 진정한 생명이며 나는 지금 당신 안에서 나의 자아와 모든 나의 권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깨어나십시오. 일어서서 당신 자신의 주권을 외치십시오! 당신의 자아와 당신의 권능을 아십시오! 내가 가진 모든 것, 당신을 통해 흐르는 나의 전지전능한 생명은 바로 당신의 것임을 아십시오! 당신은 그 생명을 취해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어떤 것도 할 수 있으며 그 생명은 당신을 위해 건강, 권능, 번영, 합일, 행복, 평화, 즉 당신이 나에게 바라는 그 어떤 것이라 할 지라도 드러낼 것임을 아십시오!


이것을 그리십시오. 생각하십시오. 아십시오! 그런 다음 당신에 내재되어 있는 의심할 수 없는 명확성을 가지고 창조의 말을 발성하십시오! 그것은 결코 허공 속으로 메아리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그것은 당신이 추호의 여지도 없이 완전하게 나에게 복종한 다음에 또한 당신의 자아를, 당신의 실질을,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생명을 나에게 일임하고 내가 책임지도록 할 때, 그리하여 완전히 내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나에게 신뢰를 다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했을 때, 위에서 한 말은 당신의 영혼에 잠재되어 있는 나의 신성한 권능을 실질적인 삶에서 꽃피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거대한 힘을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 힘은 당신이 내 안에 거하는 만큼 확장될 것이며 나의 말이 당신 안에 뿌리를 내리도록 해 줄 것입니다. 당신을 꿈의 세상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할 것이며 영적인 충만함으로 채우고 당신이 가는 모든 길을 비추고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제공하며 언제든지 걱정거리와 고통을 없애줄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더 이상의 의심과 의문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 신인 내가 바로 당신 자신의 자아로 언제나 필요한 것을 공급하며 길을 일러줄 것임을 알게될 것이며 나와 당신은 하나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8장 합 일


진정으로 자신을 나에게 헌신하고자 열망하고 기꺼이 자신의 전 생애를 나에게 바치고자 하며 나의 초월적인 이상이 아무런 걸림 없이 완전히 표현될 수 있도록 모든 사적인 이상과 희망과 목적을 덮어둔 당신이여! 다음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나는 당신이 겪어온 그 모든 경험을 통해서 바로 여기까지 당신을 이끌어왔습니다. 이 순간 당신이 진정으로 나에게 봉사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당신 혼자서는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으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즉 이 나를 알았다면 그리하여 자신의 지성, 힘, 실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나의 것임을 알고 당신의 모든 생각과 당신이 행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과 원인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안다면, - 그 때 당신은 나의 말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말에 진실로 복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것을 일깨울 수 있는 경험들을 지금까지 당신에게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준비되고 자격을 갖추었다면 나와 더불어 깨어있는 의식으로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즐거움에 넘쳐. 하지만 고요히 각각의 새로운 경험들을 기다리며 또한 그 각각의 경험은 나의 의미를 놀라우리만치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리하여 나는 당신이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당신과 보다 더 사랑스럽고 친밀한 합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경험은 심판이나 시험, 혹은 이전의 행동으로 인한 카르마 때문이 아니라 바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더 이상 예전의 욕망들을 따르고자 하지 않는다면, 단지 나의 바램을 알고자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각각의 모든 경험 안에서 나는 나의 실체, 즉 여러분 자신의 진실이며 아름다운 자아의 영광스러운 비전을 들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들어날 것입니다. 행동을 함에 있어서도 일이 무엇인가에는 상관하지 않고 단지 당신 앞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요구하는 일임을 알고 당신의 초월적인 부분으로 나를 즐겁게 하고자 분투할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나는 나의 의지를 보다 빠르게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업에 관계된 일이라 하더라도 당신은 거기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당신을 그와 같은 사업에 결부시킨 것도 나입니다. 그것이 어떤 성격의 사업이라 할지라도. 그 일에서 당신이 성공하든 혹은 실패하든 또는 당신이 꾸준히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인지 혹은 당신의 자손들을 위해서 부를 축적할 것인지 혹은 당신이 모은 그 모든 재산을 다 잃든 혹은 그 어떤 재산도 이룩하지 못하든 그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성공이나 실패 혹은 야망이나 특별한 능력을 지니지 못한 현실을 통해 나는 당신의 가슴에,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인 나를 인식시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이 행한 모든 일들을 북돋우고 지시하면서 그리고 당신이 진정한 성공에 의식적으로 깨어나 동참하고 내가 당신을 위해 비축해놓은 진실한 부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리면서.


그러면 이제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사업과 업무 혹은 삶의 상황이라는 것이 단지 겉으로 들어난 외부적인 계기나 사건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위와 같은 인식을 일깨우기 위해 가장 적합한 경험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선택해서 가져간 것입니다. 동시에 현재 불완전하게 표현되고 있는 영혼의 특정한 자질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그저 당신의 가슴 안에 거주하고 있는 나, 즉 당신이 일터로 갈 때나 가게로 갈 때 혹은 당신이 업무를 보고 있을 때, 당신이 그 어디에 있든 늘 당신과 함께하고 있는 이 나를 알 수 있다면, 그리하여 당신의 일을 비롯하여 모든 면에 있어서 내가 당신을 지도하도록 허락한다면, 진실로 내 당신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당신 안에 있는 새로운 힘을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 힘은 당신을 통해 친절하고 온화한 연민과 진정한 형제애로 흘러나와 당신이 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스러운 원조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삶을 살며 일에 종사하는 가운데 보다 고차원의 원리에 눈뜨도록 북돋우고 그들이 그들 주변 안에서 같은 결과를 일으키고자 열망하도록 이끌 것입니다. 그 힘은 당신을 당신의 사업과 돈과 친구들과 또한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풍요로움으로 이끌 것이며 보다 고차원적인 사상의 영역으로 이끌어 당신이 확고하게 비전을 인식하고 나의 모든 초월적인 힘과 속성을 당신의 삶 속에서 매 순간 드러내도록 할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찾고 나를 숭배하기 위해 교회나 이러 저러한 종류의 종교적인 모임을 찾아 나설 생각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나의 묵시록조차 읽고 싶은 생각이 사라질 것입니다.


대신, 당신은 내부로 고개를 돌리고 거기서 언제나 나를 찾게 될 것이며 나와 교류하고 나를 위해 봉사하는 것에 대한 그리고 나를 숭배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의 목소리를 듣고 거기에 따르는 것과 온화한 내 사랑의 전율과 따뜻함을 느끼는 것 이외에 다른 곳에는 관심을 쏟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랑은 당신이 어딜 가던 또한 당신이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을 에워싸서 갈 길을 준비하고 상황을 가볍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을 어디로 보내든, 나는 당신이 그 곳을 보다 향상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나에게 끌어당겨서 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을 통해. 당신은 이제 자신의 인성을 나의 신성한 초월성에 굴복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당신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오직 나만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가슴 속에서 나의 현존을 일깨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 눈에 새로운 빛을 담고 그들 인생에 대한 새로운 목적을 의식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의 가정에 머물 것입니다.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나는 놀랄만한 것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은 이해하지만 이전에는 극렬하게 반발했던 진실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남편과 아내, 자녀, 형제자매, 부모를 통해서 인내심, 관대함, 끈기, 말의 통제, 사랑이 깃든 온화함, 진실한 헌신 그리고 가슴을 이해할 수 있는 위대한 자질을 가르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 안에 있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나 역시 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은 이것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진실로 이 위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형제나 아내 혹은 부모나 자녀가 사랑스럽고 즐거움 가득한 눈빛을 빛내며 당신에게 이야기할 때, 바로 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실수를 비난하지 않고 내부에 있는 나, 내면의 초월적인 존재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부의 나는 사랑이 깃든 온화함을 담고 부드럽게 이야기해서 언제라도 다른 이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당신들을 다시 한번 모이게 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있는 진정한 나는 하나이며 부름을 받을 때면 언제라도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알 수만 있다면, 당신에게 있어 최고의 학교와 최고의 교사는 당신 자신의 단란한 가정 안에 있습니다. 많은 것이, 아주 많은 것이 이것을 깨닫고 내부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인 내가 가르침을 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자들을 위해서 준비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당신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을 통해 다른 이들도 가르칠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깨어있는 의식으로 나와 함께하고 초월적으로 나와 나의 지혜안에 거한다면,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의 말에 영감을 불어넣고 당신의 행동에 힘을 싣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자신에게 미칠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일임하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그 때 일어나는 변화를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인성에서도 일어나며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성에서도 일어납니다. 당신이 이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그들 인성의 이면에 있는 나, 즉 당신 자신의 초월적인 자아는 그들의 눈을 통해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이 나를 볼 수 있을 때, 그 때 천국은 당신 앞에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의 형제에게서 결점을 찾지 않으며 주변에서 부조화스러운 소리도 듣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서 불친절한 모습을 찾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다른 이들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인 내가 모든 완벽함과 모든 조화와 사랑으로 가득한 온화함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적인 인성이 인식을 획득하여 겸손하게 물러서서 나의 빛이 나의 신성한 이상의 영광 안에서 찬란히 빛나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에게 다가온 모든 상황이 당신으로 하여금 나에게 최고로 봉사할 수 있도록 내가 선택한 것임을 볼 것이며 그 모든 장소와 그 모든 상황 속에는 할 일이 많이, 아주 많이 있음을 볼 것입니다. 인성이 불쾌하고 싫은 것으로 여기면 여기는 것일수록 나의 살아있는 현존은 그것을 더욱 더 필요로 합니다.


깨달음이 찾아올 때면 당신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간에, 사업이든 전문적인 일이든 손으로 하는 노동이든 교회의 일이든 혹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일이든, 그곳에서는 틀림없이 당신이 봉사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거기에서 최고의 방법과 길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당신의 다른 자아들이 처음에 밖으로부터 오는 영향에 감화를 받지 않고 어떻게 내부에 있는 나의 현존에 눈을 뜰 수 있겠습니까? 받은 자는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합니다. 내부에 눈을 뜬 자는 반드시 다른 이들이 내부에 눈을 뜨도록 해주어야만 합니다. 당신이 하는 사업으로 일로 노동으로 사회의 최하층으로 나의 살아있는 현존을 가져가야만 하며 나의 빛과 치유의 힘을 가진 나의 사랑이 슬프고 병든 사람들에게로 흘러넘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야만 합니다. 당신은 전체를 발효시킬 수 있는 효모를 공급해야만 합니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고조된다면, 깨어난 나의 그대여, 당신은 이러한 것을 아직은 무지한 자, 등을 돌린 나의 사람들에게 가져가야만 합니다. 나의 영감과 나의 힘을. 그러면 그들은 일어나서 세상 속에서 받아들인 영향력을 던져버리고 내면에서 울리는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주변의 조건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회피하고 도망간다면 삶의 그 어떤 조건도 향상시키거나 극복할 수 없습니다. 신성에 접해야만 하며 그 신성을 마셔야합니다. 그것은 당신들을 안내하며 상황을 설명해주었던 이 나와 더불어 인간 경험의 심연에까지 이르러 그것을 깊이 이해한 자에 의해서만 공급될 것입니다.


읽고 이해한 자의 영혼에 축복이 있으라. 그대의 사명은 바로 그대 앞에 있으리니.


하지만 당신이 걸친 두꺼운 지성으로 빛이 뚫고 들어갈 때 공포에 떨고 있는 인성과 더불어 주저하고 있는 이여. 당신 또한 머지않아 나의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기다리는 기쁨을 누리도록 신속히 준비할 것입니다.


이해하는 자나 공포를 느끼는 자나 둘 다 모두 영혼으로 느끼십시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당신들을 통해 나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지 나의 의지 외에는 아무런 의지도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은 이루어질 것이며 당신은 분리라는 꿈으로부터 완전히 깨어나서 내가 바로 당신의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자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자신을 나에게 주고 당신 삶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나에게 넘기기 전까지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이나 행동에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부조화스러운 생각이나 느낌을 일으키는 당신의 인간적인 인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길은 연속된 하나의 축복의 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어디에 가든 나의 빛은 꺼지지 않으며 나의 사랑은 평화와 화합과 합일을 만들어 내면서 당신을 향해 빛을 발할 것입니다. 당신이 일단 이해한다면, 당신이 다른 이들의 생에 출현함으로 해서 모든 이들이 보다 낳아지고 행복해진다는 위대한 일, 혹은 비록 위대하지 않다 해도 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전히 생동감 있게 존재하는 그들 안의 내가 당신 안에서 표현되고 있는 진정한 초월적인 통로를 통해서 발견되거나 감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인성이 의식하지는 못할 지라도 나의 초월적인 삶의 영광과 신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인류를 비틀거리게 해왔던 모든 세상의 불안과 전쟁들, 그리고 우리 행성에 만연한 불행의 원인은 대체로 수백년 동안 대중들을 착취해왔고 인류의 노동을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해 온 물질주의적인 목표들을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집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이 자본가들의 집단은 문명화된 삶을 위해 필요한 세상의 자원들과 원료들을 독점하고 착취해왔다. 그들은 서로 얽혀있는 요직의 인사들을 통해서 세상의 부를 소유하고 통제하며 그 부를 그들의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매우 부유한 자들과 매우 가난한 자들 사이의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 내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고 돈이 주는 권력을 사랑한다. 그들은 늘 정부와 정치꾼들의 뒤에 서 있어왔다. 그들은 유권자들을 통제해 왔다. 그들은 이기적인 정치가 가지는 국수주의 목표 설정을 부추겨 왔다. 그들은 세상의 산업에 자본을 공급하고 기름과 석탄, 빛과 에너지와 운송수단을 통제해왔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혹은 은밀히 세상의 은행 계좌들을 통제한다.

오늘날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찾을 수 있는 만연한 불행에 대한 책임은 무엇보다도 서로서로 연결되어있으면서, 개인적인 혹은 회사만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업가들, 은행가들, 국제적 거대기업들과 독점회사들 및 트러스트들의 중역들로 이루어진 집단들 앞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가 -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 - 그들로 하여금 상품과 물류와 빛과 동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할 때 - 즉, 결국에는 더 큰 금전적 이득을 그들에게 안겨주게될 때 - 외에는 대중들을 이롭게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의 능력에 대한 착취, 행성의 주요 자원들에 대한 시장 조작, 그리고 개인적이거나 사업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선동하는 것 등이 그들이 사용하는 주된 방법들이다.

모든 나라들에서, -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어낸 - 그러한 사람들과 조직들을 찾을 수 있다. .... 그들은 매우 가깝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 국제적인 집단을 형성하며, 완벽하게 일치된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일하며,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들이 몰고온 재앙(1,2차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들은 다시 조직되어졌고,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변함이 없다. 그들의 국제적인 관계는 견고하게 남아있다. 그들은 인류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위협이 되고있다. 그들은 정치를 조종한다; 그들은 모든 나라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들을 산다. 그들은 협박과 돈과 공포를 통해서 침묵을 유지한다. 그들은 부를 긁어 모으고 박애적인 사업을 통해서 그럴싸한 명성을 산다. 그들의 집안 사람들은 부드럽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며, 소명으로서의 일(God-ordained work)의 의미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변을 아름답고 화려한 것들과 각종 소유물들로 둘러싸고는, 그들 주변의 수백만의 사람들의 삶에 깃들인 가난과 불행, 추위와 헐벗음, 굶주림과 추함에는 눈을 닫아버린다. 그들은 a salve to their consciences로서(?) 혹은 소득세를 줄이기 위해서 자선단체와 교회에 기부한다. 그들은 수만명의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이 수만명의 사람들은 너무나 적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실질적인 평안과 레져와 문화와 여행은 불가능하다는 것에 유의해야한다.


인류의 문제거리들. 제 3장 - 자본과 노동, 그리고 고용의 문제 p70-71
Problems of Humanity - Chapter III - The Problem of Capital, Labor and Employment

영적인 의미에서의 직관이란 무엇인가?

직관은 자타불이라는 보편적 일체성에 대한 깨달음을 가져오며, 그로부터 진정한 자비가 가능해 진다.


직관의 정의 (Glamor - A World Problem - Certain Preliminary Clarifications에서)


직관이란 사람들을 향해 솟아 나오는 (감성적) 사랑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에 대한 단순한 이해가 아니다. 직관이라 불리는 많은 것들은 단지 유사점들을 알아채고 명료한 분석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오랜 세월을 세상에서 살아왔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온 지성적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다른 사람들의 기질이나 문제점들을 간파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능력을 직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직관은 고차원적인 것이든 저차원적인 것이든 심령능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환영을 보고 침묵의 소리를 듣고, 어떤 가르침에 기쁘게 반응하는 것들로 직관이 작용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직관은 단지 상징을 보는 것만은 아니다. 상징을 보는 능력은 모든 에텔체들이 그 근간을 두고 있는 원형(pattern-forms)들을 생산해 내는 활동을 하는, 우주심(Universal Mind)의 어떤 층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며, 특별한 종류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직관은 영혼의 특권인 통합적인 이해(synthetic understanding)이며, 그것은 오직 영혼이 그 자신의 차원에서 두 방향으로 접근해 갈 때에만 가능해 진다
: 위로는 모나드를 향해서, 그리고 아래로는 통합되어 있고, 아마도(비록 잠깐이라 하더라도) 조화롭게 영혼과 하나됨의 상태에 있는 하위 인격을 향해서. 그것은 제 3비전에서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되는 고도로 내적인 통합의 첫 번째 징표이다.

직관은 보편성의 원리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이며, 그것이 작용하면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 분리감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된다. 그 절정의 지점에서 그것은, 감상이라던가 애정적 반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모든 존재들과의 동일시가 그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그 보편적 사랑(Universal Love)으로서 알려 진다. 그렇게 되었을 때, 진정한 자비를 알게 된다; 또한 그 때에는 그 어떤 비판적 인식이나 생각도 불가능해 진다. 오직 그 때에 만이, 모든 형상들 속에 신성한 씨앗이 잠재되어 있음이 보이게 된다.


직관은 빛, 그 자체이며, 그것이 작용하게 되면, 세상은 빛으로서 보이고 모든 형상들이 가진 빛의 몸들이 점점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와 함께 모든 형상들의 내면에 있는 빛의 중심(영혼)과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며, 따라서, 만물과의 근본적인 관계가 정립되고, 그 어떤 우월감이나 분리감도 뒷 배경으로 물러나 버리게 된다.


따라서 직관은 그것의 등장과 함께 다음의 세가지 품성을 가져온다.

1. 빛의 계시(Illumination) 빛의 계시이란 말은 머리 속의 빛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현상적인 것이며, 진정으로 직관적인 많은 사람들은 그런 빛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내가 언급하고 있는 빛은 구도의 길(the Way)을 비추는 빛이다. 그것은 지성의 빛으로서, 실재로는 마음을 밝히고, 빛 속에 고요히 멈추어 있는 그 정신적 도구(mental apparatus즉, mind) 안에 자신을 반영하는 그런 빛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상의 빛으로서 영원하게 존재하는 실체이지만, 오직 개인의 내면의 빛이 그렇게 인식되었을 때에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온 시대의 빛(Light of the Ages)으로서, 그 날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더욱 더 밝게 빛나는 빛이다. 그러므로, 직관은 각자의 내면에서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각자의 경험 속에서 하나의 사실로서 자신과 우주심과의 완전한 동일성을 인식하고, 각자가 거대한 세계 생명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고, 또한 각자가 영원하고 영속적인 존재 속에 참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2. 이해(Understanding) . 이 말은 모든 형상들의 총체의 밑에 선다 stands under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물러나는 능력, 혹은 형상적 삶과의 오랜 동일시로부터 철수할 수 있는 역량을 포함한다. 문제는 비의적 의미에서 물러나는 것이며, 그러면서 동시에 분리감과 고립감 그리고 우월감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이해를 가진다는 것은 모든 존재들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하위 인격에는 초연함을 유지하는 더 향상된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초연함은 자신의 안위- 육체적인, 정신적인 혹은 영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정적인-에 대한 이기적인 염려 속에서 사랑에 대한 무능력에 기초한 것이기 쉽다. 이해는 통합된 인격으로서 삶과 만나며, 거기에 더해서 전체적 목적들과 계획들에 영혼으로서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성자아와 영혼의 통합과, 폭넓은 경험, 그리고 내면에 거주하는 그리스도 원리의 신속한 활동을 의미한다. 직관적 이해는 언제나 자동적인 것이다. 이해에 추론이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직관의 활동이 아니다.

3. 사랑(Love).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애정어린 감상이 아니며, 사랑하는 기질을 가진다는 것과도 다르다. 이런 두 가지 측면은 부수적인 것이며, 결과적인 것이다. 직관이 발달되면, 애정과 사랑을 표출하는 정신은 필연적으로 그 순수한 형태로서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이런 결과들을 낳는 것은 훨씬 깊고 포괄적인 그 무엇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요구(필요)와 삶에 대한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이해이며, 이것은 신성한 신의 아들이 가진 고귀한 특권이다. 그것은 벽을 쌓아 올리며, 비판하고 분리를 낳는 모든 것들을 거부한다. 그것은 어떤 요구를 이해할 때라도, 아무런 구별도 두지 않으며, 또한 영혼으로서 사랑하는 자의 내면에 사랑의 대상과의 즉각적인 동일시를 낳는다.


이러한 세가지 단어가 직관의 세가지 특성들 혹은 측면들을 요약하는 것이며, 보편성(universality), 혹은 보편적 일체감(the sense of universal oneness)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구도자들이 얻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직관이 현존할 때, 그 극적인 나, 즉 언제나 모든 사건들과 모든 현상들, 모든 집단적 작업을 중심으로서의 자기자신과 연관시키는 능력의 즉각적인 해체가 일어나게 된다.


나는 이 이상으로 직관이란 주제에 대해 더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너무나 광대한 문제이며, 너무나 난해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직관의 세가지 측면들을 그대에게 제시하고 나서, 그대의 삶에 사랑과 빛과 이해로서 결실을 맺게 할 그런 수련과 수행에 자신을 던져 매진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론이 파악되고, 올바른 삶의 재조정이 이루어지며, 필요한 작업들이 완수되었을 때, 지금까지 잠재되어 왔던 송과선 주변의 두뇌세포들은 깨어나고 진동하면서, 그 하위자아는 자기적 영향력을 방사하게 된다. 몸 안의 모든 세포들의 핵은 빛의 초점들이며, 직관의 빛이 감지되면 그 세포의 빛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윤회의 법칙과 인간의 진화



그러한 법칙(윤회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넘어서, 우리는 거의 아는 바가 없으며, 경험으로 부터 이러한 귀환에 관한 실질적인 본질을 아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그러한 어리석고 입증할 수 없는 세부사항들 -  *) 신지학이나 그 밖의 오컬트 단체들이 사실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 을 거부한다. 그 법칙은 존재한다; 그것의 작용에 관한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에 관해서는 오직 몇가지 사항들 만이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으며, 이 몇가지 사항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1. 재탄생의 법칙 혹은 윤회의 법칙(the Law of Rebirth)은 우리 행성에서의 위대한 자연의 법칙들 중 하나이다.

2. 그것은 진화의 법칙 아래에서 설립되었고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다.

3.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영향받고 있다.

4. 그것은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이 없는 가장 조야한 물질적 형상으로 부터, 그를 신의 왕국에 들어가게 해줄 영적인 완성과 지적인 완성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5.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차이점들을 설명하며, - 동양에서 카르마의 법칙이라 부르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과 관련하여 - 삶에 대한 태도들, 그리고 주변 환경들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설명해 준다.

6. 그것은 영혼의 의지의 측면의 표현이며, 어떤 형상적 측면에서의 결정의 결과가 아니다. 즉 윤회하는 주체는 모든 형상들 안의 영혼이며, 그는 다음번의 필요한 교훈들을 배우기에 적절한 물질적, 감정적, 지성적 외피들을 선택하고 지어낸다.

7. (인류에 관한한) 재탄생의 법칙은 영혼의 계에서 활동하게 된다. 환생은 멘탈계의 영혼의 수준으로부터 의도되고 지휘된다.

8. 영혼은 집단적으로, 주기적으로, 법칙에 따라서, 그리고 신과의 올바른 관계와 동료 인간들과의 올바른 관계들을 성취하기 위해 화신한다.

9. 재탄생의 법칙 아래에서 점진적인 개화는 "한 인간은 그가 심장으로 부터 생각하는 대로의 존재이다"라는 정신적인 원칙에 의해 주로 영향을 받는다. 이 몇마디의 단순한 어구는 매우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0. 재탄생의 법칙하에서 인간은 천천히 마음을 발달시키며, 그러고 나면 마음은 감정과 감성적 본성을 조절하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영혼과 영혼의 본성과 영혼의 세계를 인간에게 계시한다.

11. 인간의 발달의 그 단계에 서게 되면, 인간은 귀환의 길을 밟기 시작하며, 점차적으로 (많은 생이 흐른 뒤에) 신의 왕국으로 향해 가게 된다.

12. 발달된 정신과 지혜, 실질적인 봉사와 이해를 통해서 한 인간이 분리된 자아를 위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되었을 때, 그는 하위 삼계에서의 삶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며 재탄생의 법칙에서 해방된다.

13. 그는 이제 집단적인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의 영혼의 집단과 모든 형상들 속의 영혼을 인식한다. 그는 - 그리스도가 요청했듯이 - 그리스도와 같은 완성의 단계를 성취하였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일반론을 넘어서  더 나아가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재림하게 되면, 우리의 앎은 더욱 진실해지고 실재적으로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사람들의 영혼들과 영원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우리와 함께 윤회하는 사람들 -  우리와 함께 같은 교훈들을 배우고 있고 우리와 함께 경험하고 실험하고 있는- 과 우리는 분명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이 증명되고 인정되면 우리 인간의 삶을  깊은 근원들에서 부터 새롭게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과 어려움들이 이 근본적인 법칙과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인정하지 못하는 데에서 연유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의 적절하고 제약적인 힘에 의해서 우리의 행위들을 통제하는 법을 점차 배우게 될 것이다. 재탄생의 법칙은 오늘날 인간들이 그들의 종교적인, 정치적인, 경제적인, 사회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삶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영위하며, 그리하여 모든 형상들 속의 신성한 생명과 올바른 관계를 정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지혜를 구현하고 있다.

The Reappearance of the Christ Chapter V - The Teachings of the Christ p120

*) 역주 : 신지학의 윤회론 자체가 거짓이라는 일반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후기의 평범하고 세속적인 부류의 소위 신지학도들의 무분별한 윤회론에 대한 호기심과 주장들 - 특히 전생의 기억 등 -에 대한 부정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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