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始無始一 析三極 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 無匱化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

運三四 成環五七

一妙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一 二 三

() paratman 절대세계(텅 빈 세계)

하나 () : 만물의 시작 atman

() - () : 무에서 춤을 추어 춤 자체가 공이 된다. - 완성, 절대세계

하나가 삼으로 쪼개 진다 - 삼은 원래 하나다.

분열된 존재는 항상 그 안에 원형이 존재한다.

- 분열된 삼은 본래 텅 빈 무가 경영한다.

 

 

환인 환웅 단군

() () ()

 

 

신이 인격(에고)을 입으면 사람이 된다.

고로 나는 인격신이다.

신의 왕국을 각자 이루어야 한다.

 

텅 빈 자리가 우리 마음 안에 있다

존재만 한다.

존재 자체는 텅 비어있다 한편으론 일()이다.

하늘이 세상에 나를 보낸 이유는 나를 통하여 자신을 완성하려 함이니......

하늘의 계획은 존재에서 완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은 지극히 광명하고 신령하시니 위대한 덕과 위대한 지혜, 위대한 능력으로 무수한 세계를 주재하신다.

 

무극 : 창조 이전의 존재의 하느님

태극 : 창조의 하느님 (만물을 창조하는 덕. 지혜, 능력의 하느님)

황극 : 주재의 하느님 (온 우주를 통치하는 하느님)

이 세 가지의 모습은 하나이면서 셋이요, 셋이면서 하나이다.

 

0은 하늘이요 일은 하느님의 존재요 십은 완성이다.

0은 존재하는 것의 본성이요, 하느님의 본체

1은 창조하는 것이 본성이며, 창조의 하느님

5는 중심을 잡고 다스려 경영하는 것이 본성이다.

 

 

하늘() : () 만물의 시작 +() : () 원신 태극

() : () () : () 원정

사람() : () 하늘과 땅에서 사람이 나온다.

사람은 하늘과 땅으로 만들어졌다. 원신, 원기, 원정

본래 무인 원신(정신의 순수한 모습)으로 원정(땅의 순수한 모습)을 깨워 우리의 태극으로 돌아가려는 호흡이 단학이다.

 

() : 무에서 춤추고 있는 형상

 

있음 자체는 - 무극 0

내가 있음 - 태극 1

내가 오감(에고)을 느낀다(경영한다) - 황극(하나님) 5

 

소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이 대우주에도 있다.

 

(시작)은 십(완성)을 예정하고 있다.

 

현상세계의 모든 물질은 공()을 담는 그릇이다.

텅 빔이라는 도가 있어야 물질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현상계의 배후에서 현상계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

 

천지인에서 양 극단(,)을 취하면 여섯이 된다.

육은 씨앗이고 가운데 생명이 추가 되어 칠이 된다.

현상계는 육칠팔구 봄7소양 여름9태양 가을8소음 겨울6태음

 

천지인은 만물의 세 축이다.

각축에 음양이 형성되고 중심을 잡으면 중 칠의 의미

칠단이 되야 온전해 진다. 칠지보살부터 성인이다.

일이 씨앗이라면 칠(육면체의 중앙이 잡힌)은 개체화 된 신이다.

칠은 일이 묘하게 부풀어진 것

하나가 만물의 씨앗이라면 육은 전후좌우상하를 갖춘 유형의 씨앗이다

모든 것이 펼쳐지면 구(완성형)가 된다.

 

태양(유형의 신) - 생명() 지혜() (순환)

우리 본심은 태양처럼 광명하다

내안에 그런 자리가 있어서 참나만 찾으면 덕 지혜 힘이 나온다.

욕망을 내리고 호흡으로 에너지를 키우고 몸을 잘 관리하고 선을 행하면 사람가운데서 천지가 하나가 된다.

사람 가운데 천지를 품고 잘 살아라. 홍익인간(弘益人間)

 

일종무종一終無終

 

1단계 : 참나를 아는 것, 씨앗

2단계 : 단전 계율 참나의 뜻대로 사는 것

3단계 : 거듭나는 것

4단계 : 동서남북으로 불려나는 것 성장

5단계 : 통합 - 지천명

6단계 : 입체적 균형을 지향 - 하늘의 뜻에 따른다

7단계 : 중심을 잡다. 천명에 어긋남이 없다, 칠지보살 =아집이 없다.

8단계 : 더 정밀하게 닦아간다

9단계 : 정밀한 것 까지 통합 - 극치 -더 정밀한 구를 향해간다

10단계 :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 십은 정지임.

 

 

'삼일신고(三一神誥)‘

 

봉우

대하발 의 서문 : 대조영의 동생

10,000년 전 환웅(환인의 분신)의 홍익인간 - 대종교에서 단군도 동일하게 본다.

환인 환웅 단군 삼위일체 : 환인은 절대세계의 존재, 환웅은 통치이념을 가져온 존재, 단군은 그 이념의 통치자

천부인(天符印) - 하늘을 상징하는 도장

환웅이 3,000명을 데리고 온다

신단수 밑에 와서 도시를 만든다.

() 박달나무 단, 밝다. 단군은 밝은 임금, 몽고신화의 하느님은 텐그리. 텐은 동그란 탱구리 영어의 텐, 몽고의 임금 텐그리 칸.

하늘의 문명이 땅(여자)과 결합하여 지상의 임금이 탄생하는 인간의 신화적구조

 

메시아 (예언 제사 왕)

삼일신고의 목적은 환웅 같은 분을 닮아라.

 

하나님의 세 모습

무극 일자 참나의 텅 빈 모습 진여문 am 존재 성부

태극 (정신) 참나 그 자체 일심(한마음) I am 창조 성령

황극 영혼 생멸의 경영 용 I am ~(오감) 경영, 균형 성자

무극 태극 황극은 한 세트이다.

 

황극은 - 천황 지황 인황()

인황 - 환인 환웅 환검 환(), ()

 

조화(造化) 교화(敎化) 치화(治化)

() () ()

 

셋이면서 하나인 신에 대한 가르침 - 삼일신고 三一神誥

_ 하나가 무에서 나와 평면 경영하면 5 입체적 경영 7

무극 태극 황극

 

무극, 신의 본질, 하늘은 그 자체로 허허공공하다, 텅 빔, , 텅 빈 의식, 바다

존재의 하느님, 텅 빈 자신, 근원으로서의 하늘, 시작하는 하나 안에 있는 텅 빔

지혜, 자비,

돈오점수 - 참나를 찾고 점수를 통해 닦아낸다.

 

성통공안(性通功完))

 

요가 - 지혜, 박티(헌신), 카르마, 라자(지감, 조식, 권계, 금계)

 

세계(世界) - 각각의 시간과 공간을 갖는다.

 

 

고경각의 신사기본

천훈(天訓)

主若曰 咨爾衆 蒼蒼非天 玄玄非天

주약왈 자이중 창창 비천 현현 비천

天 無形質 無端倪 無上下四方 虛虛空空 無不在 無不容

천 무형질 무단예 무상하사방 허허공공 무부재 무불용

신훈(神訓)

神 在無上一位 有大德大慧大力

신 재무상일위 유대덕대혜대력

生天 主無數世界 造兟兟物 纖塵無漏 昭昭靈靈

생천 주무수세계 조신신물 섬진무루 소소영영

不敢名量 聲氣願禱 絶親見 自性求子 降在爾腦

불감명양 성기원도 절친현 자성구자 항재이뇌

천궁훈(天宮訓)

天 神國 有天宮 階萬善 門萬德 一神攸居

천 신국 유천궁 계만선 문만덕 일신유거

群靈諸哲 護侍 大吉祥 大光明處

군령제철 호시 대길상 대광명처

惟性通功完者 朝 永得快樂

유성통공완자 조 영득쾌락

세계훈(世界訓)

爾觀森列星辰 數無盡 大小明暗苦樂 不同

이관삼열성신 수무진 대소명암고락 부동

一造 조군世界 神 勅日世界使者 轄七百世界

일신 조군세계 신 칙일세계사자 할칠백세계

爾地自大 一丸世界

이지자대 일환세계

中火震盪 海幻陸遷 乃成見象

중화진탕 해환육천 내성현상

神 呵氣包低 煦日色熱 行化遊栽物 繁殖

신 가기포저 후일색열 행저화유재물 번식

진리훈 (眞理訓)

人物 同受三眞 曰性命精 人 全之 物 偏之

인물 동수삼진 왈성명정 인 전지 물 편지

眞性 無善惡 上哲 通

진성 무선악 상철 통

眞命 無淸濁 中哲 知

진명 무청탁 중철 지

眞精 無厚薄 下哲 保

진정 무후박 하철 보

返眞 一神

반진 일신

惟衆 迷地 三妄着根 曰 心氣身

유중 미지 삼망착근 왈 심기신

心 依性 有善惡 善福惡禍

심 의성 유선악 선복악화

氣 依命 有淸濁 淸壽濁夭

기 의명 유청탁 청수탁요

身 依精有厚薄 厚貴薄賤

신 의정유후박 후귀박천

眞妄 對作三途 曰 感息觸 轉成 十八境

진망 대작삼도 왈 감식촉 전성 십팔경

感 喜懼哀怒貪厭

감 희구애노탐염

息 芬寒熱震濕

식 분란한열진습

觸 聲色臭味淫抵

촉 성색추미음저

衆 善惡淸濁厚薄 相雜 從境 途任走 墮 生長肖病歿 苦

중 선악청탁후박 상잡 종경 도임주 타 생장소병몰 고

哲 止感 調息 禁觸 一意化行 返妄卽眞 發大神機 性通功完 是

철 지감 조식 금촉 일의화행 반망즉진 발대신기 성통공완 시

 

존재(Being) - 단지 모를 뿐

상락아정(常樂我靜)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 :

다만 알지 못함을 아는가, 그것이 깨달음이다.

다만 모를 뿐이다.










천부경(天符經)


一始無始一 析三極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 無匱化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
運三四 成環五七


一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주해(註解)


一始無始一 析三極無盡本


‘하나’에서 우주만물이 비롯되지만 시작이 없는 ‘하나’이며, 그 ‘하나’에서 천 지 인 삼극(三極)이 갈라져 나오며 다함이 없는 근본(根本)이 ‘하나’이다.


* 하나 : 一(하나)의 본질과 무한한 창조성에 대한 표현
 하나에서 만유(萬有)가 비롯되니 하도 신령스러워 ‘하나’님이라 부른다.


* 하나는 하늘, 천주(天主) (옴(AUM), 브라흐마(Brahma), Atman, 알파와 오메가, 알라(ALLAH), 일신(一神), 한울, 한얼), 불(佛), 도(道), 태극(太極), 무극(無極), 삼신(三神), 참나, 순수의식, 우주의식, 전체의식, 일심(一心), 혼원일기(混元一氣), 지기(至氣), 진리(眞理), 진여(眞如), 불멸(不滅) 등으로 다양하게 명명된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그 이름이 실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명명이 있기 전부터 이미 그것은 사실로 존재해온 것이다. 하나는 궁극적 실재이므로 생멸(生滅)하지 않으며 만유를 생멸케 한다.

비가 대지를 고루 적시고, 태양이 사해(四海)를 두루 비추며, 달빛이 천강을 고루 물들이는 것과 같은 만물에 편재해 있는 ‘하나’는 본래 ‘무명(無名)’이다. 그 이름으로 실상을 죽이는 것은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다. 


* 삼극(三極) :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의 세가지 측면 즉, 천지인(天地人),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 법신(法身) 화신(化身) 응신(應身), 신(神) 정(精) 기(氣), 브라마 비슈누 시바.


하늘의 기틀과 마음의 기틀, 땅의 형상과 몸의 형상, 그리고 사물의 주재함과 기(氣)의 주재함이 모두 혼원일기인 ‘하나’의 이치(理致)와 조화(造化) 작용이므로 하나와 우주만물은 분리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만물에 내재하는 ‘참자아(神性)’의 동질성을 깨달은 사람은 우주의 조화 기운과 하나가 됨으로써 유일자(오직 나, 참나)와 한 호흡 속에 있게 된다.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은 하늘마음이 곧 사람마음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늘이 사람을 떠나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치를 통해 드러낸 것으로, 거울이 모든 형상을 받아들이고 바다가 모든 강줄기를 받아들이듯이, 일심(一心)은 만물만상을 포용한다. 우리들 자신의 깊은 의식이 하늘로 통하는 문이다. 의식의 근원에 이르게 되면 하나의 진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일심(一心)의 나타남이다.
언젠가 ‘존재의 집’에 이르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소를 타고 소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우리의 본신인 신을 찾아 천지사방을 헤매었다는 것을 !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 無匱化三


하늘의 본체가 첫 번째 열리고, 땅의 본체가 두 번째로 열리고, 인물의 본체가 세 번째로 생겨나는 것이라.


‘하나’가 쌓여 크게 열(十)을 이루지만 다시 다함이 없이 천·지·인 삼극(三極)으로 화하게 되는 도다.


해설)
‘하나(一)’의 묘리(妙理)의 작용으로 천지가 열리고 인물이 생겨나는 무위(無爲)의 천지창조(天地創造)과정을 일(一), 이(二), 삼(三)의 순서로 나타낸 것이다.

‘하나(一)’는 만유가 비롯되는 현묘(玄妙)한 문(問)이요, 천변만화(千變萬化)가 작용하는 생멸(生滅)의 문이며, 만물만상이 하나가 되는 진여(眞如)의 문이다. ‘하나(一)’의 묘리(妙理)의 작용으로 우주만물이 생장·분열하고 수렴·통일되지만 그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장·분열하는 천·지·인 삼극(三極)의 천변만화의 작용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과정은 다함이 없이 순환 반복 되는 것이라 하여 ‘일적십거 무궤화삼(一積十鉅 無匱化三)’이라고 한 것이다.


‘하나(一)’가 종자라면, 우주만물(三)은 그 나무이고, 열(十)은 그 열매다. 종자인 ‘하나(一)’와 그 나무인 우주만물(三)은 둘이 아니며, 종자인 ‘하나(一)’와 그 열매인 열(十) 또한 둘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一)’와 셋(三)과 열(十)은 종자와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모두 하나이다.
 이는 마치 움직임이 극(極)에 달하면 고요해지고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이는 태극(太極)과도 같이, ‘하나(一)’가 묘하게 피어나 생장·분열하여 열매(十)를 맺게 되지만 그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十)는 다시 종자인 ‘하나(一)’가 되고 그 ‘하나(一)’에서 천·지·인 삼극(三極)이 갈라져 나오는 과정이 다함이 없이 순환 반복되는 것이다.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하늘에도 음양이 있고, 땅에도 음양이 있으며, 사람에게도 음양이 있어 음양 양극 간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으로 천지 운행이 이루어지고 운주만물이 생장·변화하는 도다.


해설)
 ‘천일 지일 인일’이 ‘하나(一)’의 본체를 나타낸 것이라면  ‘하나(一)’가 만물(三)을 생성하는 과정은 음과 양, 양극간의 상호 작용으로 천지 운행이 이루어짐으로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작용 속에도 ‘하나(一)’의 진성(眞性)은 그대로 존재하므로 그 체가 둘이 아닌 즉 자생자화(自生自化)하는 본체로서의 작용인 것이다. 즉, 하나와 음양오행과 만물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천부경의 천·지·인 삼신은 불교의 법신 화신 보신, 동학의 내유신령 외유기화 각지불이와 마찬가지로 자성의 세 측면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자성의 세 측면은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신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로서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이치에 입각해 있으며, ‘천일 지일 인일’ ·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 ‘인중천지일’은 천지인 삼신일체(三神一切)를 의미한다.


*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각지불이(各知不移) :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기 알아서 옮기지 아니한다는 뜻은 인간의 신성(神性)과 생명의 유기성 및 상호 관통을 깨달아 순천(順天)의 삶을 지향하는 것을 말한다.


* “본체계와 현상계의 상호 관통을 깨닫지 못하면 죽음에서 죽음으로 떠돌게 된다.”
 -까타 우파니샤드
 "What is here is also there, and what is there is also here, Who sees the many and not the onE, wanders on from death to death."
 


大三合六 生七八九


대삼(大三), 즉 하늘의 음양과 땅의 음양과 사람의 음양이 합하여 육(六)이 되고, 칠(七), 팔(八), 구(九)가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육(六)은 천지인 기본수인 일, 이, 삼을 합한 수이기도 하며, 본체로서의 천지인 셋과 작용으로서의 천지인 셋을 합한 수이기도 하다.


해설)
육은 대삼의 묘합(妙合)이자 ‘하나(一)’의 체상(體象)을 나타낸 것으로 ‘하나(一)’의 진성(眞性)은 이들 음양(二) 속에도 그대로 보존된다. 말하자면 ‘하나(一)’는 본체계와 현상계를 관통하는 근원적인 일자(一者)로서 우주만물에 편재해 있는 보편자(普遍者)이다.


‘천이 지이 인이’를 합한 육에 천·지·인 기본수인 일, 이, 삼을 더하면 칠, 팔, 구가 생겨나는 것이니 이는 천지인 혼원일기인 ‘하나(一)’가 생명의 물레를 돌리는 이 우주의 가없는 파노라마를 천지 포태(胞胎)의 이치와 기운을 담은 이수(理數)로 나타낸 것이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다스리는 하늘의 주재신으로서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것으로 알려진 북두칠성(北斗七星)과 인간의 일곱가지 감정인 칠정(七情)과 망자(亡子)가 삼악도(三惡道)에 들지 않고 좀더 낳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비는 기도의식이 49재 즉 칠칠재(七七齋)의 7이라는 숫자,
 우주섭리를 함축하고 있는 팔괘(八卦)와 여덟 절후(節侯)의 팔절기(八節氣)의 8이라는 숫자,
 하늘의 구궁(九宮 : 팔괘의 방위와 가운데 방위를 합한 것)과 인체의 구규(九竅 : 눈, 코, 귀, 입, 요도, 항문의 아홉 구멍)와 중국 하나라 우왕이 요순(堯舜) 이래의 정치대법을 9개 조항으로 집대성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9라는 숫자,
 그리고 칠팔구를 합한 24절기의 24라는 숫자 -- 이 숫자들의 순열 조합은 우주 섭리가 써내려 가는 생명의 대 서사시(敍事詩)요, 천지인 혼원일기가 연주하는 생명의 교향곡이다.


요약자 주)
 ‘일(一) 이(二) 삼(三) 사(四) 오(五)’는 우주 생성의 본체의 원리인 선천(先天)수이자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수(數)이고, ‘육(六) 칠(七) 팔(八) 구(九)’는 선천 원리를 바탕으로 생명이 생성(生成) 성장(成長)하여 가는 현상세계의 후천수(後天數)이자 형이하학(形而下學)적인 형상(形象)의 수(數)이다. 육(六)은 육면체(六面體)로 표현되는 생명체의 모습이 이 형성되는 수(數)이고 칠(七), 팔(八), 구(九)로 성장(成長)되어가는 수(數)의 표현이다.






運三四 成環五七


 천·지·인 셋(三)이 네(四)단계 - ‘하나(一)’, ‘천일 지일 인일’, ‘천이 지이 인이’,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 를 운행하면서 오행(五行)이 생겨나고 음양오행(七)이 만물을 낳는 과정이 끝없이 순환 반복되는 원궤(環)을 이루는 것이다.


해설)
 삼(三)과 사(四)의 수리(數理)를 운용(運用)하여 오(五)와 칠(七)의 순환 고리를 이루는 바가 표징(標徵)하는 인간세계의 윤회란 오욕칠정이 낳은 우리 내부의 부정적인 에너지가 다함이 없이 카르마(karma, 業)의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 실재인 ‘하나(一)’와 우주만물이, 본체와 작용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리하여 이 우주가 ‘한생명’임을 깨닫게 되면, 윤회의 수레바퀴는 멈추게 될 것이다.


 삼(三)과 사(四)의 수리(數理)를 운용(運用)하여 오(五)와 칠(七)의 순환 고리를 이루는 것을 도형으로 나타낸 것이 원방각(圓方角:○ □△)이다. 천지인(天地人)을 함축하고 있는 천원(天圓:○ )·지방(地方:□)·인각(人角:△)의 원리는 삼사(三四) 즉 삼각△과 사각□을 운용하여 오칠의 순환 고리 원(圓:○ )을 이루어 원방각이 삼위일체가 되는 삼일도(三一圖)를 형성하게 된다. 원방각의 삼일도는 5개 접점과 7개면으로 이루어진 까닭에 오칠의 순환 고리 원을 이룬다고 한 것이다.








  생명은 전체적인 것-전체와 분리된 개체는 그 어떠한 의미에서도 진리가 아니다.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개체의 존재성은 우주적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존재성은 관계성이기 때문이다. 오(五)와 칠(七)이 이루는 생명의 순환 고리는 생명 현상 그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이는 포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사(生死)란 우주의 숨결이다. 생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 삼라만상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변화할 뿐이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이나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 모두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생명의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초목을 키우고 초목은 다시 인간에게 산소와 양분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생명의 흐름은 상호 의존(interdependence)·상호 전화(interchange)·상호 관통(interpenetration)하는 궤를 이루며 영원히 이어진다.


 지전(地轉)에서는 음양 양극 간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으로 천지 운행이 이루어지고 음양오행이 만물을 낳는 과정이  끝없이 순환 반복되는 ‘하나’의 이치와 기운의 조화(造化)작용을 보여준다.
 천부경에서 천지 포태의 이치와 기운을 일(一)부터 십(十)까지의 숫자로 풀이한 것은 진리가 언설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까닭이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나룻배가 필요하나 언덕에 오르기 위해서는 배를 버려야 하듯, 진리의 언덕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 숫자들마저도 버려야 한다.



一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하나(一)’의 묘리(妙理)의 작용으로 삼라만상이 오고 가며 그 쓰임(用)은 무수히 변하지만 근본은 변함이 없도다.


 ‘하나(一)’에서 삼라만상이 화생(化生)하는 것을 ‘오다(來)’라고 하고, 궁극에는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다(往)’라고 한 것으로, ‘만왕만래’는 그러한 과정이 수없이 반복됨을 의미한다.
용변은 ‘하나(一)’의 작용적 측면을 나타낸 것이고 부동본은 다함이 없는 창조성을 지닌 ‘하나(一)’의 본체적 측면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본체(本體)와 작용(作用)의 관계는 일(一)과 다(多), 이(理)와 사(事), 정(靜)과 동(動), 진(眞)과 속(俗), 정(淨)과 염(染), 공(空)과 색(色)이라는 불가분의 관계로 분석될 수 있다.


해설)
 우주만물이 다 지기(至氣)인 ‘하나(一)’의 화현(化現)이고, 우주만물의 생성·변화·소멸 자체가 모두 ‘하나(一)’의 조화의 자취이니, ‘하나(一)’의 묘리(妙理)의 작용으로 삼라만상이 오고 간다고 한 것이다.


 ‘하나(一)’는 천지만물의 근원으로서 무한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달(月)이 수천 갈래 시냇물에 비치지만, 허공에 떠 있는 달은 변함도 다함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밤이 다하면 물속에 있는 수천 개 ‘달’은 근원인 하나의 ‘달’에 의해 거두어 진다. 무지(無知)의 바람이 고요해지면 일체의 현상은 ‘하나(一)’의 본질 속에 흡수되기 마련인 것이다.  본체계와 현상계, ‘하나(一)’와 만물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실체와 보이는 그림자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은 일체의 생명 현상이 자기근원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주체-객체 이분법으로 무리하게 설명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스스로 생성되고 스스로 변화하여 스스로 돌아가는 것인데, 누가 누구를 창조한단 말인가! 거울에 비친 형상과 거울을 분리시킬 수 없고, 천강(千江)에 비친 달그림자와 달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우주만물과 혼원일기인 ‘하나(一)’ 즉, 유일신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풀 한포기, 물방울 하나까지도 모두 유일신 ‘하나(一)’의 조화 작용의 나타남인 까닭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실체가 곧 그림자요 그림자가 곧 실체이다. 생사(生死)를 버리고 열반(涅槃)을 구하는 것은 마치 실체를 버리고 그림자를 구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색신(色身)을 버리고 법신(法身)을 구하는 것은 물을 버리고 얼음을 구하는 것과 같다. 생사가 곧 열반이요, 색신이 곧 법신이다. 그것은 티끌 속에서 티끌 없는 곳으로 가는 경지다. 말하자면 본체와 작용의 관계다.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서는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은 진(眞)이 아니며, 법신(法身)만이 청정하여 끝이 없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물속의 달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지만 허공에 뜬 달은 항상 교교(皎皎)히 빛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창세기 28장 10-12, 15 :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자신의 깊은 의식이 바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다. 의식의 근원에 이르게 되면 하나의 진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일심(一心)의 나타남이다.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하나님의 사자 또한 영적 차원에서 물적 차원으로, 물적 차원에서 영적차원으로 자유로운 내왕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본체계에서 현상계로, 현상계에서 다시 본체계로의 이동을 표징(標徵)하는 것이다. 
 


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인간의 근본 마음자리는 우주의 근본인 태양과도 같이 광명한 것이어서, 이렇게 환하게 마음을 밝히면 천·지·인 삼신일체의 천도가 인간 존재 속에 구현 되는 것이다.


 본심은 소우주인 인간의 참본성, 즉 근본 마음자리를 일컫는 것이고 태양은 대우주의 근본인 태양을 일컫는 것이니, 본심본태양은 인간의 근본 마음자리가 우주의 근본인 태양과도 같이 광명하다는 뜻이다. 인중천지일은 사람가운데 천지가 하나가 된다. 이는 내재적 본성인 신성(하나)을 깨달음으로써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체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실현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해설)
 인간의 자기실현이란 “내가 나 된 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동경대전(東經大全) 我爲我而非他 따라서 이 세상에서 새로이 이룰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인간 본래의 자성(自性)을 회복하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 ‘참나’가 바로 불생불멸의 영원한  ‘하나(一)’이며, 이는 하나인 마음(一心)으로 우주적 본성을 일컬음이다. 


 그런 까닭에 『영부주문(靈符呪文)』 에서는 “마음이란 것은 내게 있는 본연의 하늘이니 천지만물이 본래 한 마음이라(心者 在我之本然天也 天地萬物 本來一心)”고 한 것이다.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사람이 하늘을 모시고 있음(侍天)을 저절로 알게 되는 법. 이는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나타남이다.


* 『金剛三昧經論』에서는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네 가지 지혜가 원만해진다고 말한다.
 대원경지(大圓鏡智) : 그 땅은 청정하기가 깨끗한 유리와 같다.
 평등성지(平等性智) : 그 성(性)이 항상 평등하기가 저 대지(大地)와 같다.
 묘관찰지(妙觀察智) : 깨닫고 묘하게 관찰함이 지혜의 햇빛과 같다.
 성소작지(成所作智) : 이익을 이루어 근본을 얻음이 대법우(大法雨)와 같다.


 저 푸른 창공도 저 까마득한 허공도 아닌 하나인 마음 즉 ‘하나(一)’를 공경함으로써 불생불멸의 참자아 즉 자신의 내재적 본성인 신성(神性)을 깨닫게 될 것이요, 일체의 우주만물이 다 내 동포라는 전체의식(우주의식, 순수의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며, 실로 ‘하나에 대한 공경’이야말로 모든 진리의 중추이다.


 인간이 영적(靈的)으로 확장될수록 사랑은 그만큼 전체적이 된다. 우주만물에 대한 차별 없는 공경과 사랑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주 만물에 내재한 -동시에 초월한- ‘하나’인 참자아를 깨달음으로서 이다.


 신(神)은 만유에 내재해 있는 신성(神性)인 동시에 만유를 생성 변화시키는 지기(至氣)로서 일체의 우주만물을 관통한다. 그것은 종교적인 낡은 교의나 철학적 사변이나 언어적 미망(迷妄)을 떠나 있으며, 에고(ego, 個我)가 만들어 낸 일체의 장벽을 해체한다.
‘인중천지일’은 이성과 신성의 통합을 의미한다.
*경천(敬天) : 우주만물에 대한 사랑과 공경의 원천인 바로 그 하나인 마음을 공경함.



一終無終一


‘하나(一)’에서 우주만물이 비롯되고 다시 ‘하나(一)’로 돌아가지만 끝이 없는 영원한 ‘하나(一)’로다.


우주만물의 근원인 그 하나(一)는 ‘하나(一)’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이전부터 이미 사실로서 존재해 온 까닭에 시작이 없으며 따라서 ‘하나(一)’로 돌아가지만 끝이 없는 ‘하나(一)’라는 뜻이다.


해설)
 끝이 없다는 것은 곧 시작이 없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영원한 ‘하나(一)’로 천부경은 끝난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인 ‘하나(一)’는 진여(眞如)와 생멸(生滅),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본체(本體)와 작용(作用)의 이분법이 완전히 폐기된 경계인 까닭에 시작도 끝도 없으며, 가지도 오지도 않는 것이다.


 어느 화상(和尙)이 선지식(善知識)에게 물었다.
“가지도 오지도 않는 것은?”
선지식이 대답했다.
“내가 너하고 같이 다니는 것이다.”


참자아 속에는 그 어떤 차별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전체성만이 물결칠 뿐이다. 모든 존재 속에 내재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이 ‘하나(一)’인 참자아를 깨닫게 되면 그 어떤 환영(maya)이나 슬픔도 없으며 죽음의 아가리로부터 벗어나 불멸에 이르게 된다.


 - 찬도가 우파니샤드 : There is a Spirit witch is pure and which is beyond old age and death; and beyond hunger and thirst and sorrow. This is Atman. the Spirit in man.


 가을이 되면 나무가 수기(水氣)를 뿌리로 돌리듯, 일체의 생명은 본래의 뿌리로 돌아감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歸一心源) 은 개인적 차원의 원시반본이요, 우리 민족의 원형을 함유하고 있는 상고사 복원과 국조이신 환인 환웅 환검 숭배는 민족적 차원의 원시반본이며, 천지부모를 섬기는 것은 지구공동체적 차원의 원시반본이고 우주의 봄 여름인 선천 5만년이 다하고 우주의 가을이 되면 우주의 섭리에 따라 후천개벽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우주적 차원의 원시반본으로 그 이치는 모두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주 가을로의 초입(初入)에서 천부경이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도 후천의 세 세상을 열기 위한 원시반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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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재료 : 정신(), 기운(), 정액()

 

순수의식 -- -- 생각, 감정

순수한 에너지 -- -- 호흡, 음식물의 에너지

순수한 생명의 씨알 -- -- 몸의 정액

(선천) (후천)

 

선천적인 정기신이 실질적인 단의 재료가 된다.

선천적인 정기신은 바로 붙잡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어서 후천적인 정기신을 이용해야 한다.

그러니 몸을 배양하고, 호흡을 수련하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 후천적인 정기신을 잘 닦고 배양하는 중에 자연히 선천적인 정기신이 배양되고 강화된다.

 

단학의 최고 요결은 바로 단전(丹田)에다가 기운()을 가두어라()!” 이것입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단약의 재료 정액, 기운, 정신을 으로 나누어 ·로 상징되는 양적에너지’()호랑이·로 상징되는 음적에너지’()를 하나로 합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단약을 제대로 만들 수 있다.

 

*몰입(沒入) : 원신(元神)의 작용인 깨어있는 일념(一念)’으로 본인이 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

이렇게 한 점 사심 없이 깨어있는 일념으로, 자신이 ’()한 것을 그대로 완수’()하는 것을 정성’()이라고 한다.

 

성통공완(性通功完) : 자신의 불변의 본성을 각성하고, 닦아야 할 공부를 완성하자 !

 

 

- 기운을 모으는 자세와 방법

 

자세

 

폐기(閉氣)’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다리를 포개고 단정히 앉아서

눈꺼풀을 발처럼 드리우고 내려다보되,

눈은 콧등을 대하고,

코는 배꼽을 대하며,

등뼈는 마땅히 수레바퀴 모양으로 둥글게 하여야 한다.

이때, 마음은 온전히 자신의 숨결단전에 가있어야 한다.

 

내면의 3가지 보물인 정액 기운 정신은 안을 지키는 보물이며,

외면의 3가지 보물인 눈 귀 입은 안의 보물이 출입하는 통로이다.

정기신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이 3가지 보물이 출입하는 주요 통로인 눈 귀 입을 보물을 지키듯이 잘 통제해야 한다.

눈은 정신이 출입하는 통로이고,

귀는 정액이 출입하는 통로이며,

입은 기운이 출입하는 통로이다.

그러니 단학수련을 위해 자세를 취할 때,

눈은 내리깔고

입은 다물어야 하며

귀로는 일체의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

*내시반청(內視反聽) -내부를 들여다보고 내면의 소리를 들어라.

 

눈을 내리깔면 정신이 안으로 갈무리 되며

입을 다물고 코로만 호흡을 하면 기운이 안으로 갈무리 되고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정액이 쓸데없이 새어나가지 않아서,

하단전에 정기신이 실하게 모인다.

 

조식(調息)

 

들이쉬는 숨은 면면(綿綿)히 끊어지지 않게 하고 내쉬는 숨은 미미하게 하라.”

둘 다 끊어지면 안 된다.

우주의 운행이 단 한 순간도 멈추는 법이 없듯이,

자연 그대로의 호흡 또한 멈추는 법이 없다.

 

들숨과 날숨의 길이를 같이하되,

고르고

가늘며

미세하고

끊어지지 않고

긴 호흡이 최고의 호흡이다.

이렇게 하는 중에 정신() 기운(), 용 호를 하단전에 몰아줘야 한다.

의수단전 (意守丹田) - 정신으로 단전자리를 잘 지키면서 호흡하라.

용과 호랑이가 만나면 뭔가 화학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하단전의 위치 : 배꼽아래 5~6에서 안으로 70%정도 들어간 자리

 

단전을 염()하면서 호흡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기운이 내려가게 될 것이다.

정신은 불이라서, 단전에 정신을 집중하면 자연히 불이 나서 따뜻해진다.

거기다 호흡으로 풀무질을 계속하면,

단전의 불기운이 더욱 치성해 진다.

정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다.

정신이 기운을 모아서 불을 붙이고,

호흡에 따른 바람으로 자꾸 부채질을 하면 불이 아주 잘 타오르게 된다.

불은 온갖 쓰레기를 태워서 정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온갖 탁한 기운들을 단전에 모아서 모두 태워서 정화시킨다.

그래서 새로운 생명의 씨알이 황금처럼 빛나게 된다.

이것이 금단(金丹)’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 연금술이다.

 

 

용호비결(龍虎秘訣) 주해(註解)

 

수단의 도는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것이지만, 이제 그에 관한 책이 소나 말에 가득 실어도 모자라고, 집 한 채를 다 채울 정도로 많은데다가, 또한 그를 표현한 말이 명확하지 않아서 황홀하니 참뜻을 알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배우는 이가 처음 손댈 방법을 알지 못하여 장생을 얻으려다가 도리어 요절하는 사람이 많았다.

 

<*참동계>라는 한 권의 책은 실로 단학의 시조라고 할 만한 책이지만 생각건대 이 또한 천지의 이치를 참고하여 괘와 효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어서 처음 배우는 사람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헤아리려는 것과 같아 능히 짐작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 이제 난해한 것은 다 빼고 입문에 간절하고도 쉬운 것을 몇 개의 장르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한다. 만약 능히 깨달을 수 있다면 한마디 말로도 족할 것이다. 

*참동계-한나라 회계 사람 위백양(魏伯陽)의 책. 수단(修丹)에 관한 책으로는 최초의 것으로 알려진 책으로 내용이 모두 역()으로 표현되어 있음.

 

대개 처음의 시작은 *폐기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한마디의 비결이요,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도이다. 옛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을 숨겨서, 내놓으려 하지 않았고, 알기 쉬운 말로 하려고도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처음 시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기식(氣息) 가운데에서 단을 수련해야 함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금석에서 단을 구하였기 때문에 장생을 얻으려 하다가 도리어 요절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폐기 - 예부터 폐기를 패식 '패식(止息) '으로 오인하여 숨을 멈추는 식의 호흡공부를 하다가 몸에 부작용이 나타나는 등 잘못되는 사례가 많았다. '''닫는다'는 말이긴 하나 숨[]이 아니라 기운을 닫는다는 것이다. 폐기는 숨을 멈추지 않고 기운이 단전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잘못 해석하므로. 봉우 선생은 머문다는 뜻을 가진 '머무를 ()' 자를 써서 유기(留氣)라고 하였다. 배에 기운을 둔다고 하여 복기(伏氣)라고도 하며, 기운이 차곡차곡 아랫배에 쌓인다 하여 누기(累氣) 적기(積氣), 축기(蓄氣) 등과 같은 용어도 사용하는데 모두 같은 의미이다.

*금석에서 단을... - 연단(煉丹)하는 사람이 여러 가지 금속이나 약물로 단약을 만들어 오래 살고자 그것을 먹었다가 오히려 일찍 죽은 일이 많았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제 폐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다리를 포개어 단정히 앉아서 (이른바 불가의 금강좌이다.) 눈썹을 발처럼 드리워 내려다보되 눈은 콧등을 대하고 코는 배꼽 언저리를 대하며(단학공부의 정신은 온전히 이에 있는 것이다. 이때 등뼈는 마땅히 *수레바퀴 모양으로 둥글게 하라.) *들이쉬는 숨은 면면히 끊어지지 않게 하고 내쉬는 숨은 조금씩 아주 미미하게 하여 항상 신과기로 하여금 배꼽 아래 한 치 세 푼의 자리에 있는 *단전에서로 머물게 하라.(숨을 꾹 참고 기를 내보내지 않을 필요는 없다. 참을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 다만 의식적으로

*다리를 포개어... - 불가의 수련 자세로서, 두 다리를 꼬고 앉는 가부좌(跏趺坐)를 말한다. 그러나 실제 수련시에 반드시 가부좌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 앉아있기에 편한 자세로 앉아서 수련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

*수레바퀴 모양으로... - 실제로 수레바퀴처럼 둥글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척추를 곧추 세우지 말고 척추의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대로 유지하여 앉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들이쉬는 숨은 면면히... - 드나드는 숨을 일부러 또는 억지로 가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가운데 가늘게 호흡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단전 - 기를 모으는 곳으로 바다와 같이 많은 기를 모을 수 있다고 하여 기해(氣海)라고도 한다.

 

기를 아래로 보내되 *대략 소변을 볼 때와 같이 하면 된다. 이른바 내쉬는 숨은 *"손풍"에 힘입는다 하는 것이다. 진실로 마음을 고요히 하고 머리를 자연스럽게 숙여 아래를 보되 *눈은 콧등을 보고 *코는 배꼽언저리를 대하게하면 기는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게 된다. 폐기의 초기에는 가슴이 번거롭게 꽉 차는 듯하거나 혹은 뱃속에서 찌르는듯 아프기도 하고 우레 소리를 내며 무엇인가 내려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제대로 되어 가고 있는 좋은 징조이다.

*상부의 풍사는 바른 기운의 핍박을 받게 되면 *공동처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보내는 길을 얻은 연후에야 기는 스스로 평안해지고 병도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공부의 첫 길이요 또한 *"편향증험"이라고도 한다. 가슴앓이나 배앓이로 늘 고생하는 사람이 더욱 마음을 다하여 수련한다면 그 효과가 매우 신묘할 것이다.)

*대략 소변을 볼 때와 같이 하면 된다... - 오줌을 누어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일부러 힘을 주거나 억지로 기를 내리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손풍"에 힘입는다. -은 역괘(易卦) 중 팔괘의 하나인데 바람과 유순(柔順)함을 나타낸다.

*눈은 콧등을 보고 - 눈으로 코끝을 보라는 것이 아니고 코끝을 볼 정도로 눈을 내리뜨라는 것이다.

*코는 배꼽언저리를 대하게... - 눈을 내리뜨고 머리를 약간 숙이고 호흡을 하면 코가 배꼽 부근을 대하는 것과 같이 된다.

*상부의 풍사는... - 풍병, 을화병 등몸을 해롭게 하는 기운.

*공동처 - 기해(氣海), 즉 단전을 뜻함.

*"편향증험" - 한 조각 새참을 먹는 것처럼 실제로 조식의 효능을 경험하는 것을 가리킨다.

 

항상 생각하고 수련함으로서 공부가 차츰 익숙하게 되어 이른바 *"현빈일규"를 얻게 되면 *백 가지 구멍과도 모두 통하게 된다

(태는 구멍 가운데에서 쉬는 것이니 이 한 구멍을 얻는 것이 곧 선도를 닦는다는 것이다.)

*"현빈일규" - 현빈은 단전의 다른 이름으로 곧 단전에 한 개의 구멍이 난다는 뜻.

*백 가지 구멍과도... - 현빈일규 이후 정진하여 많은 진전이 있게 되면 기를 몸의 원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보낼 수 있다는 의미.

삼가 생각하건대 옛사람이 말하기를 순리로 하면 사람이 되고 역리로 하면 신선이 된다고 하니,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넷을 낳고, 넷이 여덟을 낳고, 그렇게 육십사에까지 이르게 되어 온갖 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은 인도이며(순리로 밀고 가는 공부) 다리를 포개어 단정히 앉아서 눈썹을 드리우며 입은 다물고 만 가지 어지럽고 번거로운 일을 수습하여 아무것도 없는 태극의 경지로 돌아가는 것은 선도이다. (역리로 밀고 가는 공부)

<참동계>에 소위 뜻을 버리고 허무로 돌아가서 항상 무념의 상태가 되고 (무라는 것은 태극의 본체이다. ) 스스로 증험하여 차츰 밀고 나아감에 마음이 하나 되어 종횡으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선도 수련의 첫째 뜻이다. 다만 수선(修仙)하려는 사람은 그 뜻을 일찍 세우는 것이 귀한 것이다. 몸의 원기가 쇠약해진 후에는 비록 백배의 공을 들인다 해도 상선의 반열에 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폐기

 

(복기 또는 누기라고도 한다. <*황정경>"신선도사라하여 달리 신이한 술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과 기를 쌓아가는 것을 참된 길로 하는 것이다." 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이른 말이다.) 

*황정경 - 태상노군(太上老君), 즉 노자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상청황정내경경(上淸黃庭內景經) 36장이 있고, 동진東晋의 위화존(魏華存)이 전하는 <상청황정외경경上淸黃庭外景經> 24장이 있다. 양생(養生)의 요결을 다룬 것들로서, ()은 중앙의 색()이고, ()은 사방(四方)의 가운데이며 뇌중(腦中)과 심중(心中)과 비중(脾中)을 가리키기 때문에 황정(黃庭)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련의 여러 도교 경전들을 총칭한다.

 

폐기라는 것은 *눈을 깃발로 삼아 기의 오르내림과 전후좌우를 뜻하는 바대로 하지 않음이 없다. (기를 오르게 하려면 위를 보고, 기를 내려가게 하려면 아래를 본다.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을 뜬 채 위를 보면 좌측의 기가 돌아서 올라오고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을 뜬 채 위를 보면 우측 기가 돌아서 올라온다. 기를 내리는 데는 몸 앞쪽의 임맥(任脈)을 쓰고 기를 위로 올라가게 하려면 몸의 뒤쪽에 있는 독맥(督脈)을 사용하는 것이다. 신이 가면 기도 가고 신이 머물면 기도 머무는 것이니, 신이 가는 곳이면 기가 가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마치 군중(軍中)에서 군을 지휘할 때 깃발을 사용하여 군을 움직이는 것과 같이 눈으로서 명령하지 않는 것이 없다. 또한 위를 보고자 할 때는 눈을 뜨지 않고 다만 눈동자만을 굴려 위를 보아도 된다)

*눈을 깃발로 삼아 기의 오르내림과 전후좌우를 뜻하는... - 눈으로 기를 움직이는 것은 폐기의 시초에 행하는 것이 아니다. 수련의 정도가 깊어 조식 수련이 1분 이상이 경과한 후라야 해볼 수 있는 것이다초심자가 섣불리 행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대개가 몸의 위쪽은 기가 성하고 아래쪽은 기가 허해서 아플 때는 상기가 되어 아래위가 서로 교류하지 못하므로 늘 기가 아래로 내려가 *중궁에 있도록 힘써서 비장과 위장이 화창하고 혈맥이 잘 순환하게 하여야 한다.

(이것은 다만 세상의 일반 사람들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을 수련하여 지키는 요체도 역시 이와 같이 몸의 중궁을 기키는 데 있는 것이다.)

*중궁 - 천간(天干)으로는 무기(戊己), 오행(五行)의 토(), 장부로는 비장, 위장에 해당된다.

 

능히 혈맥으로 하여금 두루 돌게 하여 임맥과 독맥이 모두 통하게 되면 수명을 연장하고 죽음의 피한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단을 수련하는 길은 반드시 폐기하는 것으로 시작의 첫걸음으로 하여, 다리를 포개고 손을 단정히 하며 얼굴을 펴서 온화한 빛이 돌게 하고, 눈은 발을 드리운 듯 아래를 보아, 반드시 신과 기가 배꼽 아래 단전 가운데 머물게 하면 몸의 위쪽에 있는 풍사가 마치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내리듯 흘러내려서 먼저 가슴에서 배로 내려가게 된다. (처음에는 배에 가득 차고 다음에는 배가 아프게 된다.) 이 길을 얻은 연후에는 몸이 화평해지고 땀이 촉촉이 나면서 온몸의 모든 맥이 두루 돌게 되니, 곧 마음이 텅 빈듯하여 눈앞에 백설이 펄펄 내리는 듯 느껴지고 내가 육신에 깃들어 있는지 육신이 내 속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매우 고요하고 아득하여 황홀한 경지가 되어 자신은 이미 음과 양이 나누어지기 이전, 즉 태극이 갈리기 이전의 경지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참된 경계이며 진정한 정신수련의 길이다. 이 밖의 것은 모두 삿된 말이요, 망령된 행동이다.

 

태식

 

(<태식경>에 이르기를, 태는 복기하는 가운데 맺고, 기는 태가 있는 가운데에서 쉰다. 기가 몸 안에 들면 살게 되고 신이 형체에서 떠나면 죽게 되는 것이니 오래 살고자 하면 신과 기가 서로 같이 머물게 하라, 신이 움직이면 기도 같이 움직이고 신이 머무는 곳에는 기도 머문다. 부지런히 행하는 것이 바로 진정할 길이다.)

 

폐기하는 요령이 점점 익숙해져서 신기가 좀 안정된 후에는 차차 기를 배 밑에 털이 난 데까지 밀어 내려 이 기식이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를 세심하게 추구하면서 그 출입을 따라 한 호흡 한 호흡으로 하여금 항상 그 가운데 있게 하여 (이를 소위 현빈일규라 하는데 수단의 도는 이곳에 있을 뿐이다.) 입과 코 사이에서 나오지 않도록 하면 (항상 한 치의 나머지 기운이 입과 코 사이에 있도록 한다.) 이는 소위 모태 안에 있을 때의 호흡이니 이른바 *귀근복명하는 길이다. (또한 말하기를 근본으로 되돌리고 근원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인데, 사람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는 입이나 코로 호흡하치 아니하고 탯줄이 어머니의 임맥에 연결되어 통하고 임맥은 폐로 통하며 폐는 코로 통하여 어머니가 숨을 내쉬면 또는 태아도 내쉬고 어머니가 숨을 들이쉬면 또한 태아도 숨을 들이 쉬다가, 세상에 태어나 탯줄이 끊어진 후부터는 입과 코를 통해 호흡하게 되어 몸의 영양을 잃고 진기가 녹아 없어지니, 이로부터 질병이 생기고 요절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귀복하는 법을 얻어서 정진을 그치지 않는다면 *벽곡을 하고 *등선한다는 것이 모두 이 법에 있는 것이다. 옛사람의 시에 "집은 낡아도 고치기 쉽고 *약은 말라도 살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네. 다만 귀복법을 알기만 하면 금은보화를 산처럼 쌓으리."라고 하였다.)

*귀근복명 - 호흡의 근본인 태식으로 돌아가 참생명을 회복함.

*벽곡을 -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것을 말함.

*등선 -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름.

*- 여기서는 기력, 기운을 말함.

 

그러므로 태식이 능해진 후에야 이 기가 부드럽고도 온화해지고 안정이 되어 마침내 호흡이 없는 듯한 숨을 쉬게 되는 것이다. 경에 말하기를 기가 안정되면 호흡이 없어진다 하였다. 옛적에 *갈선옹이 매년 한더위에는 깊은 연못에 들어가 열흘 만에 나왔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패기로써 태식을 한 까닭인가 한다.

 *갈선옹 - 중국 삼국시대 오의 도인(道入). 강소(江蘇 )사람. 본명은 갈현(葛玄)으로 뒤에 <포박자(抱朴子)>로 유명한 갈홍(葛洪)의 증조부이다. 혼자 힘으로 학문에 통달했으나, 벼슬을 즐겨하지 않고 탄금(彈琴)에 전심, 노장(老莊)의 글을 암송하며 명리를 떠난 생활을 했다. 아버지의 사후 장생불사를 희구하여, 적성산(赤城山), 나부산(羅浮山) 천태산(天台山) 등 여러 명산을 돌아다니며 수행하였다. AD.244년에 득선(得仙)했다 한다.

 

주천화후

 

(화에는 안과 밖, 느리고 빠름이 있다. 수련의 초기에는 기와 혈이 모두 허하므로 폐기를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화후가 일어나기 쉽지만 배꼽과 배 사이에 기가 한동안 흩어지지 아니하면 반드시 따뜻한 기운이 그 사이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기혈이 점점 실해지고 화기가 더뎌진다. 또한 화에는 문무진퇴의 법이 있으니 잘 살펴 수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천화후라는 것은 열기가 온몸을 도는 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과 기가 서로 배꼽과 배 사이에 머물러 있을 때 의식을 두어 부는 것이 능해지면 (이 때에 문무화후와 근양법도가 있으며 또한 진퇴의 법이, 있으니 아주 조심스럽게 살펴 가며 수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몸과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킨 연후에 법대로 잘 진화하면 방광이 불같이 뜨거워지고 좌우의 두 신장이 끓는 물인 삶는 것같이 뜨거워서, 허리로부터 아래쪽이 평상시와는 달리 시원하게 느껴진다. 만약 화후를 가볍게 하지 못하면 곧 뜨거운 불기운이 온몸에 퍼져 도리어 몸에 화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따뜻한 기운이 미미한 상태에서 차츰 뚜렷해지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열기가 이르는 곳이 점점 환하게 열리면저 올라간다.) 마치 꽃봉오리가 점점 피어나는 것 같아서 소위 빛나는 연못에 연꽃이 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신수화지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비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하고 아주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경지를 돈독히 유지할 때에 쓰는 말이니 바로 이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태를 오래 간직하고 있으면 열기가 점차 왕성해져서 (이것이 소위 꽃봉오리는 점점 피어나고 감로(甘露)는 점점 무르익어 간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에 수기가 위로 거슬러 올라와 달콤한 침이 입 안에 고여 예천(醴泉)이 되는 것이니 소위 옥장금맥이라 하는 것이다.)

 

뱃속이 크게 열려 아무것도 없이 팅 빈 것처럼 되면 삽시간에 열기가 온몸에 두루 퍼지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주천화후라 하는 것이다. 법도대로만 운화를 한다면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배꼽 아래 한 치 세푼의 자리가 곧 하단전인데 상단전 (이환궁) 과 더불어 소리가 울리듯 서로 응하면 이른바 옥로 (단전의 다른 이름) 의 불은 따뜻하고 정상 이환에 붉은 노을이 난다고 하는 것이다. 상하단전이 물을 대듯 어울려 끝이 없는 고리모양으로 둥근 형상을 이를 것이니 다만 이 단전의 불기운을 따뜻하게 길러 잃지 아니하면 (*하루 사이에 자오묘유로 진화를 해야 하며 따뜻한 기로 하여금 한숨이라도 진화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항상 밤낮으로 하루같이 수련하여 열 달이 된 후에야 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루 사이에 자오묘유로 진화를 해야 하며... - 글자 그대로 하면하루 사이에 자시, 묘시, 오시, 유시 이렇게 네 번 진화를 하라는 것이나 실제로 그렇게 네 번에 걸쳐  8시간을 수련하라는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열심히 수련하라는 의미이다.

 

청명한 기가 위로 올라와 이환궁에 응결한 것이 선가에서 말하는 현주요, 불가에서 말하는 사리가 되는 것이니 이것에는 필연적인 이치가 있다. 성도하느냐 못 하느냐에 이르러서는 각자의 정성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며 다만 일찍 달성하는 것이 귀한 것이다.

문득 듣자 하니 이른바 화()로써 약을 고며 단으로써 성도한다는 말은 신으로써 기를 제어하고 기로써 신을 형체에 머물게 하여 모름지기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술은 알기 쉬우나 도는 만나기 조차 어렵고 비록 우연히 만났다 하더라도 전심 전력으로 행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천 명, 만 명이 배워도 끝내는 한두 사람의 성공자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정성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또 시에 말하기를 "정기가 항상 몸속에 가득하면 한가한 곳에서 초연하게 지낸들 거리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 달마 선사도 태식법을 얻었으므로 능히 면벽하여 관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정경>에 말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오곡의 정기로 배를 불리나 나는 홀로 이 음양의 기운으로 배를 불리네!" 하였다.

이 두 시를 가지고 보건대 벽곡은 오로지 태식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진실로 능히 벽곡을 하여 홀로 음양의 기운을 포식할 수 있다면 땅의 문은 닫히고 하늘의 문은 열릴 것이니 어찌 평지에서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지 못하겠는가?

 

*앞의 *세 조목은, 비록 각각 이름을 붙이기는 하였으나 오늘 한 조목을 행하고 내일에 또 한 조목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부는 오로지 폐기하는 중에 있는 것임을 명심 하여야 한다. 다만 공부에는 깊고 얕음이 있고, 등급에는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니 비록 변화하여 하늘을 날으는 술법이라 할지라도 모두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오직 배우는 이의 정성에 달려 있을 뿐이다.

* 앞의(: 원문은 우삼조이나 그것은 세로쓰기의 경우이므로 가로쓰기에서는 ''대신 ''이라고 해석하였다.)

* 세 조목(폐기, 태식, 주천화후.)

 

 

 

자신이 우주의식과 하나인 순수의식임을 아는 것

자신의 그 텅 빈 자리를 보는 것

이것을 견성이라 한다.

이 견성을 굳건히 하고 일상에서 실행하려면 내적 능력이 필요하다.

견성의 맛을 일단 보면 그 자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 가운데 이제 능력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 단전호흡을 한다.

 

 

단전호흡을 위한 기도

 

지극히 광명하신 태양 !

태양은 따뜻하고 눈부시고 아름답다.

무한한 사랑 !

분별을 넘어선 지혜 !

위대한 능력 !

그 안에서 분화된 참나 !

분화된 참나는 순수한 원신입니다.

원신이 단전을 바라봅니다.

원신이 기운을 모아서 불을 붙입니다.

고요한 호흡으로 은은하게 불기운이 일어납니다.

불은 온갖 탁한 기운들을 단전에 모아 모두 태워 정화합니다.

순수한 단을 염원합니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따뜻한 단전을 지킵니다.

나는 단전에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

사랑하는 당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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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명상

 

(이 명상으로 그대는 푸른 하늘과 하나가 되는 지복의 순간과 순수의식인 참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자신에게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합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 쉴 때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 쉴 때 숨을 내쉰다고 알아차립니다.

(그 숨의 길고 짧음 까지 알아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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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의식을 집중하고 푸른 하늘을 연상 합니다.

높고도 깊은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합니다.

이 푸른 하늘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의 기운으로 충만한 우주의식입니다.

 

이제, 그대 의식 안에 푸른 하늘을 온통 채웁니다.

이 충만한 의식은 순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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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수한 의식이 그대입니다.

이 순수한 의식이 자아임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제 그대는 푸른 하늘에 충만한 우주의식과

그대의 순수한 의식이 하나가 되었음을 느껴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임을 느낍니다.

이것은 하나의 물방울이 바다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주의식과 그대 의식은 하나입니다.

 

이제 푸른 하늘이 그대 안으로 녹아 들어옵니다.

침묵의 순간입니다.

지복의 순간입니다......

처음으로 그대는 우주와 하나 되는 경험을 합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입니다.

 

이 하나 된 의식 속에서......

눈을 감은 채, 두 눈동자를 두 눈썹 사이 중앙에 고정 시킵니다.

이 고정된 의식의 눈으로 앉아있는 그대 모습을 바라봅니다.

몸의 어느 부분에 통증이나 가려움이 느껴지거든 그 지점을 바라봅니다.

그 느껴지는 지점에 집중합니다.

그 느낌은 서서히 스스로 사라져갑니다.

사념이 들어오거든 그 사념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봅니다.

이내 사념은 사라지고 순수의식만이 남게 됩니다.

 

이렇게 그대의 모습과 사념을 바라보면

그대의 의식이 몸과 마음으로 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대의 몸과 마음은 그대가 아닙니다.

순수의식이 바로 그대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자아, 무아, 참나 등등 ......

이는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신비입니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공()이라 표현합니다.

본질적으로 의식은 공()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 이제 하나 된 그대의 순수의식으로

그대의 자녀를 연상합니다.

그대로부터 세상에 온 그대 아이의 순수의식을 떠올려 봅니다.

아이의 순수의식은 우주의식과 하나입니다.

그대의 의식 또한 우주의식과 하나입니다.

아이는 그대와 하나입니다.

깊은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이므로......

우리는 서로 하나의 다른 표현, 또 다른 현현(顯現)일 뿐입니다.

 

자 이제 확장시켜 나아갑니다.

그대와 가까운 사람부터 떠올려 봅니다.

가족, 친구, 이웃, 거리를 지나는 모든 사람, 보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까지 모두 하나의 의식임을 느낍니다.

국가, 인종, 종교 등의 분별을 초월하여 전 인류가 하나의 의식인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의식 안에서 흐르는 강물로,

바다에서 하나가 됩니다.

모두 사랑하는 형제자매 입니다.

우리는 서로 하나의 다른 표현일 뿐인 것입니다.

 

지금 앉아 있는 그대 주위의

모든 생명들의 의식이 푸른 하늘에 깃들어 있습니다.

풀잎의 의식 , 나무의 의식, 새들의 의식, 노루와 사슴의 의식, 온갖 야생화의 의식이

푸른 하늘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의식들 모두 그대의 의식과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생명들과 더불어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지금 여기에 축복이 충만합니다.

모든 생명들과 축복의 순간을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순수의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지이며,

우리는 집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면의 순수의식과 우주의식이 하나의 파동으로 물결칩니다.

이 순수의식을 매 순간 떠올리며,

그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명상이며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파동이 되어 우주 속으로 널리 퍼져나가

모든 생명들이 함께 느끼고 기뻐하며 춤추고 있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2015.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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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전호흡을 위한 기도

 

지극히 광명하신 태양 !

태양은 따뜻하고 눈부시고 아름답다.

무한한 사랑 !

분별을 넘어선 지혜 !

위대한 능력 !

그 안에서 분화된 참나 !

분화된 참나는 순수한 원신입니다.

원신이 단전을 바라봅니다.

원신이 기운을 모아서 불을 붙입니다.

고요한 호흡으로 은은하게 불기운이 일어납니다.

불은 온갖 탁한 기운들을 단전에 모아 모두 태워 정화합니다.

순수한 단을 염원합니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따뜻한 단전을 지킵니다.

정성을 다하여~ !

사랑하는 당신을 위하여~

 

 

 

 

 

 

 

 

 

 

 

 

 

 

언어와 상징을 초월하는 마하무드라의 노래

 

탄트라,

더없는

깨달음

 

말로써 공()을 설명하지만

공은 결코 그런 식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은 빛처럼 찬란하다.”고 말하지만

의식은 모든 언어와 상징을 초월한다.

본질적으로 의식은 공()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다.

 

 

The ultimate experience

하나, 최후의 경험

 

마하무드라는 모든 언어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참으로 진지하고 진실한 그대를 위하여

이것을 말할 수밖에 없도다.

 

()은 의지처를 필요로 하지 않나니

마하무드라는 무()에 의지한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유동적이고 자연스런 상태를 지켜라.

그러면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얻으리라.

 

--

 

마하무드라(mahamudra)는 최후의 경험이다.

마하무드라는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는 완벽한 오르가슴이다.

존재의 근원으로 녹아드는 것이다.

 

도덕에는 선과 악이 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상태에는 지혜로운 것과 어리석은 것이 있다.

자연적인 사람은 선한 것이 아니라 지혜롭다.

자연적이지 못한 사람은 악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다.

자연에는 선과 악이 없다.

다만 지혜로운 것과 어리석은 것이 있을 뿐이다.

죄도 없고 덕도 없다.

지혜와 무지가 있을 뿐이다.

이 무지를 죄로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라.

무지가 유일한 죄다.

어떻게 하면 무지를 지혜로 변형시킬 수 있을까?

유동적이고 자연적일 때 변형이 일어난다.

 

진리의 아름다움, 진실의 아름다움을 잊지 말라.

더 진실해져라. 그러면 꽃이 되어 활짝 피어날 것이다.

더 진실해지면 많은 것들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사회는 거짓과 위선에 많은 투자를 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대는 위선적인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방에서 위선과 마찰을 빚을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혼자가 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해탈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해탈은 자랑할 것이 못된다.

해탈은 그대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내면을 텅 비워라.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워라.

이것을 그대 삶에서 제일가는 원칙으로 삼아라.

 

The root problem of all problems

, 모든 문제의 근본은 마음이다.

 

하늘을 응시하면서 무()를 보아라.

주의 깊게 마음을 관찰하라.

그러면 온갖 차별이 무너지고

깨달음에 도달하리라.

 

하늘을 떠도는 구름은

뿌리도 없고 집도 없다.

마음속을 떠도는 차별심도 이와 같으니,

본래의 의식을 보면 모든 차별이 무너지리라.

 

허공에 온갖 형상과 색깔이 나타나지만

허공은 검은 색이나 흰색으로 물들지 않는다.

본래의 의식으로부터 만물이 출현하지만

이 의식은 선악에 물들지 않는다.

 

--

 

마음은 실체가 없다.

오직 사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사념은 본성과 하나가 아니다.

사념은 오고 가지만 당신은 그 자리에 남는다.

그대는 하늘과 같다.

 

하늘은 그냥 그렇게 존재할 뿐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모든 (becoming)’은 공간 속에 나타나는 형상과 이름,

색깔과의 동일시에 불과하다.

당신은 이미 존재(being)’.

아무 것도 될 필요가 없다.

 

붓다는 무엇을 얻었는가?

아무 것도 얻지 않았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얻었다.

그것을 기억해 냈다.

 

 

The nature of darkness and of light

, 빛과 어둠

 

장구한 세월을 이어온 어둠도

불타는 태양을 가리지는 못하리라.

억겁의 윤회도 의식의 찬란한 빛을

가리지는 못하리라.

 

말로써 공()을 설명하지만

공은 결코 그런 식으로 표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은 빛처럼 찬란하다고 말하지만

의식은 모든 언어와 상상을 초월한다.

본질적으로 의식은 공()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다.

 

--

 

어둠은 빛의 부재(不在)에 지나지 않는다.

빛은 오고 가지만 어둠은 항상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어둠은 부재로써 지속 된다.

어둠은 어떤 실체도 없이 그 자리에 머문다.

 

미움은 실존하지 않는다.

미움은 사랑의 부재 상태일 뿐이다.

분노는 실존하지 않는다.

분노는 자비의 부재 상태다.

무지는 실재하지 않는다.

무지는 깨달음의 부재 상태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빛이 되고,

자신을 망각한 사람은 어둠이 된다.

당연히 이 어둠을 틈타 온갖 도둑과 강도가 공격한다.

온갖 재앙이 일어난다.

 

그대는 하나가 아니다.

내면의 불꽃이 계속 깜박거리고 있다.

강한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흔들거리고 있다.

 

행동은 문제가 아니다.

존재가 문제다.

내면의 존재와 빛을 깨달으면,

그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 빛은 항상 거기에 있다.

그 빛은 그대의 존재 자체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공()은 공이다.

그러나 그 안에 전체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보면 공은 공이 아니다.

공은 가장 완벽하고 충만한 현상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계 전체가 그대 안에 들어온다.

물방울 하나가 사라져 바다가 된다.

 

주시자에 관심을 기울여라.

경험이 아니라 주시자에 초점을 맞추어라.

아무리 아름다운 경험일지라도 그 모두가 꿈과 같은 것이다.

모든 경험을 넘어서야 한다.

경험도 없고,

대상도 없고,

빛도 없고,

피어나는 꽃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임제가 바위 옆에 있는 나무 밑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깨달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임제가 말했다.

나는 이곳에 홀로 앉아 있다. 나는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본다. 가끔씩 손님이 찾아오는 것도 본다. 나는 여기에 홀로 앉아서 그냥 지켜본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며,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스스로 죽는 사람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는 영원 자체가 될 것이다.”

 

 

 

Be like a hollow bamboo

, 텅 빈 대나무가 되어라

 

몸으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어라.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지켜라.

마음을 비우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라.

텅 빈 대나무가 된 것처럼

몸을 편하게 하고 휴식하라.

 

마하무드라는 집착 없는 마음과 같다.

이렇게 수행하면 조만간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

 

 

휴식(Relaxation)

 

휴식은 이 순간만으로 충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슬이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에 잔디밭을 걸어 보라.

전체적으로 느껴보라.

잔디의 촉감, 차가운 이슬방울, 신선한 아침 바람, 떠오르는 태양, 이 모든 것을 느껴보라.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가?

무엇이 더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는가?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 밤의 침묵을 느껴 보라.

눈을 감고 그대 자신을 느껴 보아라.

무엇이 더 필요한가?

충분하고도 남는다.

내면에서 깊은 감사함이 솟아난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이다.

휴식은 이 순간만으로 충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 순간만으로도 그대가 바라는 것 이상이다.

이때 에너지가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다.

에너지가 평화로운 연못이 된다.

이 에너지의 연못 안에서 그대는 용해되어 사라진다.

그것이 휴식이다.

휴식은 전체의 차원에 속한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들판에 핀 저 백합꽃을 보아라. 그들은 애써 일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솔로몬의 영광도 저 백합꽃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들은 솔로몬보다 더 아름다운 향기를 뽐내고 있다. 보아라, 저 백합꽃에 대해 명상하라. -마태복음 628~29

 

 

기도

 

지금 여기만으로도 충분하다.

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노래한다.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있다.

이것을 즐겨라!

그대는 살아서 숨쉬고 있으며 의식을 갖고 있다.

이것을 찬미하라!

이때 돌연 휴식이 찾아온다.

긴장과 번뇌가 사라진다.

번뇌를 일으키던 에너지가 감사함으로 바뀐다.

그대의 가슴 전체가 감사함으로 고동친다.

이것이 기도다.

깊은 감사함으로 고동치는 것,

이것이 기도다.

 

누군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에게 물었다.

천국에서 천사들은 무엇을 합니까?”

에크하르트가 대답했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천국은 찬미하고 즐기는 곳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찬미 할 뿐이다. 그곳의 영광과 장엄함, 그곳의 시()와 번성함을 그들은 찬미한다.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찬미한다.”

 

강가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듯이 수동적이 되어라.

이 수동성이 자동으로 마음을 비워 줄 것이다.

의식이 고요한 호수가 된다.

투명한 거울이 된다.

 

 

- 이 명상을 해보라.

 

입을 굳게 다물고 앉아라.

혀를 입천장에 대라.

사념에 동요되지 말고 수동적으로 마음을 주시하라.

아무것도 기다리지 말고 그저 지켜보라.

그리고 자신을 텅 빈 대나무로 느껴라.

이때 갑자기 무한한 에너지가 그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대는 미지의 새로운 어떤 것, 신성한 것으로 가득 찬다.

빈 대나무가 피리가 되고, 신이 피리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되면 그대 안으로 신이 들어오는데 아무 장애물도 없다.

 

이것은 가장 아름다운 명상법 중에 하나다.

텅 빈 대나무가 되어라.

이 밖에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그대는 지금 그대로 완벽하다.

 

욕망을 갖는 한 그대는 놓친다.

욕망이 가라앉게 하라.

무욕(無慾)의 고요한 호수가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뜻밖에도 그것이 여기에 있다.

 

무엇을 수행하란 말인가?

더 릴렉스 하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

더욱 수동적이고 텅 빈 존재가 되어라.

아무런 욕망과 기대도 없이 초연한 주시자가 되어라.

삶을 찬미하라.

그러면 어느 순간에 무르익는 계절이 오고,

그대는 붓다가 되어 활짝 피어난다.

 

 

The innate truth

다섯, 본연의 진리

 

만트라의 암송과 바라밀다의 실천,

경전의 교훈, 계율의 엄수,

학파와 성전(聖典)의 가르침으로는

본연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욕망으로 가득 차서 목적을 추구하는 마음은

빛을 가릴 뿐이다.

 

탄트라의 수행자가 분별심을 일으킨다면

삼마야(samaya)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다.

모든 행위를 멈추고, 욕망을 포기하라.

바다에서 파도가 일듯이,

상념이 일어났다 스러지도록 놔두어라.

무주(無住)와 무분별(無分別)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자가

탄트라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다.

 

욕망을 버리고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경전의 진실된 의미를 안다.

 

* 삼매三昧(Samadhi)는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망념妄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삼매야三昧耶(Samaya)라고도 한다.

 

--

 

해변가에 앉아 지켜보라.

파도가 일어났다가 가라앉는다.

밀물이 있는가 하면 썰물이 있다.

바다의 분위기가 수시로 바뀐다.

가만히 앉아 지켜보라.

마음도 이와 같다.

사념의 파도가 일어났다가 스러진다.

때로는 조류가 밀려와 큰 혼란이 일어나고,

때로는 썰물이 되어서 다소 고요해 지는 것을 느낀다.

의식 전체가 바다와 같다.

 

사념을 받아들여라.

밀물이 오는 것도 좋고, 썰물이 오는 것도 좋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거대한 파도가 일어난다.

엄청난 에너지가 솟구친다.

그것을 주시하라.

그 다음에 파도가 가라앉고 모든 것이 잠잠해진다.

아름다운 보름달이 고요한 바다에 비친다.

사념의 파도가 밀려와 산산이 부서져도

그대는 고요하고 평정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그저 지켜보는 자가 되어라.

이것은 더 풍성한 침묵이다.

 

바다는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그대와 떨어져 존재한다.

일정한 거리가 있다.

이 거리가 진짜 명상이다.

이것이 진짜 침묵이다.

그대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는다.

그대의 순수함은 절대적으로 온전하다.

 

무분별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사람,

아무 차별도 하지 않는 사람이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무주(無住)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자...

 

진리는 모든 경전을 초월한다.

모든 경전이 진리를 암시한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손가락은 수없이 많지만 달은 하나다.

일단 진리를 알면 그대는 모든 것을 안 것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바다는 어디에서 맛을 보건 짠맛이다.”

 

진리의 맛은 한결같다.

 

 

The great teaching

여섯, 위대한 가르침

 

마하무드라 안에서는 모든 죄가 불타 없어진다.

마하무드라를 통해 인간은 세상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된다.

이것이 가장 빛나는 진리의 횃불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어리석나니,

그들은 불행과 슬픔에 빠져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리라.

 

해탈을 구하는 자는 스승(guru)를 믿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이 스승을 받아들일 때

해탈은 지척에 있다.

 

,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모든 것이 슬픔의 씨앗이로다.

작은 가르침은 행위로 인도하나니

그대는 오직 큰 가르침을 따라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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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에 맞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대는 전체의 일부다.

이것은 파도가 바다와 싸우고,

나뭇잎이 나무와 싸우는 것과 같다.

이것은 그대의 손이 그대의 몸통과 싸우는 꼴이다.

그대는 도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탄트라는 자연적인 길이다.

초연함과 자연스러움이 목적이다.

흐름에 맞서 싸울 필요가 없다.

강과 더불어 흘러가라.

강은 바다로 흘러간다.

강의 흐름에 복종하라.

복종이 탄트라의 핵심 단어이다.

탄트라는 사랑의 길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복종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첫 번째로 이해해야 한다.

탄트라는 투쟁의 길이 아니라 초연하고 자연스러운 길이다.

장자는 쉬운 길이 옳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의 일부다.

우리는 하나의 전체다.

한 사람이 정상에 도달한 큰 파도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주변의 작은 파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그는 바다 전체, 그리고 주변의 모든 파도와 하나다.

어떻게 파도 하나가 깨달을 수 있는가?

 

탄트라를 이해할 수 있다면 시시한 가르침에 신경 쓰지 말라.

거대한 배가 있는데 왜 작은 돛배에 연연하는가?

 

모하메드교 신비주의자인 주나이드((Junnaid)가 신에게 물었다.

제 이웃에 사는 사람 하나는 너무 악해서 마을 전체에 큰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와서 신에게 기도해서 이 자를 제거해 달라고 부탁하시오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나이드는 기도 중에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그를 받아들였는데 네가 누구라고 그를 거부하는 게냐?”

주나이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시는 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신이 그를 탄생시켰으며, 여전히 그가 살아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살아 있는데 그치지 않고 원기 왕성하게 활동하도록 신이 돕고 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이기에...?”

 

마하무드라는 무엇인가?

마하무드라는 전체와 분리 되지 않는 존재의 상태다.

전체와 함께 나누는 궁극적인 오르가슴의 상태가 마하무드라로 불린다.

거대한 오르가슴이란 뜻이다.

성적인 오르가슴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오르가슴은 자신의 신체가 더 이상 물질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다. 육체가 전기처럼 진동한다. 아주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진동이 올라오기 때문에 그대는 이것이 물질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는다. 이것은 전기적인 현상이 된다. 오르가슴 안에서 그대는 육체의 가장 깊은 층에 도달한다. 그곳에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에너지의 파동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춤추는 에너지, 진동하는 에너지가 된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이 진동의 순간, 에너지로 충만한 이 순간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 육체라는 경계선이 사라질 때, 육체가 수증기처럼 증발하고 에너지만 남았을 때, 아주 미묘한 리듬만 남았을 때,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깊은 사랑을 통해서만 이런 느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랑은 죽음과 같다.

두 연인이 하나의 리듬 안에서 진동하기 시작할 때, 그들의 심장 박동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서 조화를 이룰 때, 이때 오르가슴이 일어난다. 그들은 하나의 멜로디, 하나의 하모니가 되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음악이다. 이에 비하면 다른 음악은 빛을 잃는다.

두 사람이 하나로 진동하는 것, 이것이 오르가슴이다. 그리고 존재계 전체와의 사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마하무드라다. 이것이 가장 큰 오르가슴이다.

 

에너지가 우주와 더불어 진동하고 있을 뿐이다.

그 사이에는 아무도 없다.

에고가 완벽하게 사라진다.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가 있고 그대가 있다.

파도가 바다와 함께 넘실대고 있다.

이것이 마하무드라의 경지다.

이것이 궁극적인 오르가즘이며,

가장 지복에 찬 의식의 경지다.

이제 그대는 우주 전체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왜 그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가?

그들은 삶이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을 불신 때문에 놓치고 있다.

그들은 어리석다.

믿지 않는 한 마하무드라는 불가능하다.

그대가 복종한다면 삶은 가장 큰 축복이며 은총이다.

그대가 최고의 선물을 놓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배우기를 원한다면 신뢰를 배워라.

신뢰를 통해 그대는 전체가 그대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

 

왜 스승을 믿어야 하는가?

스승은 창문이다.

그를 통해 지나가야 한다.

그를 통해 약간의 맛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대 또한 자신의 창문을 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말에 불과하다.

스승은 전체적인 지복이 인격화 된 현상이다.

그의 내면에 지복이 물결치고 있다.

그를 믿으면 이 물결이 그대에게 전해진다.

스승은 그저 하나의 현존이다.

그를 통해 그대는 처음으로 신을 일별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대 스스로 나아갈 수 있다.

 

구루(guru)'라는 단어는 비구름처럼 무거워진 사람을 말한다.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목마른 사람에게 비를 쏟아 부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향기를 머금고 피어 있는 꽃이다.

그대에게 코가 있다면 이 향기가 그대를 뚫고 들어갈 것이다.

구루라는 단어는 미지의 에너지로 무거워진 사람,

만삭이 된 산모처럼 신을 잉태하고 무거워진 사람을 뜻한다.

그대가 받을 준비만 하면 그는 언제라도 그대의 품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탄트라는 큰 가르침이다.

큰 가르침은 그대의 존재와 관계가 있다.

그대의 존재, 그대의 중심, 오직 이것이 중요하다.

큰 가르침에 의하면 그대는 이미 붓다다.

이것을 자각하라.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지 말라.

강물에 자신을 맡겨라.

강과 하나가 되어라.

강은 이미 바다로 가고 있다.

이것이 큰 가르침이다.

 

 

The passless path

일곱, 길 없는 길

 

이원성을 초월하는 것이 왕다운 견해로다.

산란함을 정복하는 것이 왕의 수행이로다.

수행 없는 길이 모든 붓다의 길이로다.

이 길을 걷는 자가 깨달음에 이르리라.

 

이 세상은 무상하다.

환영이고 꿈이어서 실체가 없도다.

세상을 등지고 혈족(血族)을 버려라.

욕망과 증오의 사슬의 끊고

산에 들어가 명상하라.

 

아무 노력 없이

자연스러운 상태에 한가로이 머물 수 있다면

곧 마하무드라의 경지에 오르리라.

무득(無得)의 경지를 얻으리라.

 

--

 

신은 진화한다.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에서 완전으로 진화한다.

더 큰 완전함으로 진화한다.

아무 미래도 없는 완전함은 죽은 것이다.

불완전 가운데 성장하라.

이것이 삶이다.

완전해 지려고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성장을 멈출 것이다.

이때 그대는 딱딱하게 굳은 돌부처가 될 것이다.

오직 죽은 사람들만이 위험에서 벗어난다.

사람들이 시체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세상은 무상하다.

꿈과 이 세상은 아무 차이도 없다.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그대는 자기만의 꿈속에 갇혀 있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사람들의 숫자만큼 많은 세상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아간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은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에너지의 파장일 뿐이다.

교차하는 파장이 물질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스크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교차하는 빛이 있을 뿐이다.

이 빛들이 환영을 만들어 낸다.

이 세상은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영화와 같다.

모두가 전기적인 현상일 뿐이다.

 

오직 그대만이 실재한다.

주시자만이 실재이고,

나머지는 모두 꿈이며 환영이다.

깨달음이란 이 모든 꿈을 초월했음을 뜻한다.

보여지는 대상이 없다. 오직 보는 자만 남는다.

이때 그대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대는 실체를 얻었다.

 

혈족을 버려라.”

그의 말은 내면의 속박 관계를 버리라는 뜻이다.

내 것’ ‘네 것이라는 관념을 버려라.

틸로빠의 말은 마음속의 꿈과 인연,

내적인 환영의 세계를 버리라는 뜻이다.

 

자신의 마음을 버리면 돌연 그대는 산속에 있게 된다.

시장 안에 있을 때에도 시장이 사라진다.

집에 앉아 있을 때에도 집이 사라진다.

돌연 그대는 산 속에 있게 된다.

문득 그대는 홀로 존재한다.

그대 외에 아무도 없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내적인 현상이다.

그대는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 실체가 있다.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대 존재의 봉우리와 계곡,

존재의 높이와 깊이를 보게 될 것이다.

틸로빠의 말은 이런 뜻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대가 처한 상황 속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에서 자신을 발견하든 그곳에 있어라.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유지하라.

그러면 곧 존재계와 하나가 되는 절정의 오르가슴에 도달할 것이다.

 

느긋하고 자연스러워라.

때가 오기를 기다려라.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되면 그 일은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왜 서두르는가?

서두르면 끊임없이 기대하게 될 것이고,

초조함과 긴장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득(無得)의 경지를 얻으리라.

준비가 되면......

 

 

Cut the root

여덟, 나무의 뿌리를 잘라라.

 

나무의 뿌리를 자르면 잎이 마르듯이

마음의 뿌리를 자르면 세상이 무너지리라.

등불이 억겁의 어둠을 한 순간에 몰아내듯이

마음의 빛은 섬광처럼 무지의 베일을 태워 없애리라.

 

마음에 집착하는 자는

마음을 넘어선 진리를 보지 못하리라.

수행에 매달리는 자는

수행을 초월해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한다.

마음과 수행, 이 둘을 초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마음의 뿌리를 깨끗하게 자르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모든 차별에서 벗어나 편한 상태에 머물러라.

 

--

 

선택은 속박을 낳고 무선택은 자유를 준다.

일시적인 것이 비진리이고, 영원한 것이 진리다.

삶과 존재계는 영원하지만 마음은 일시적인 것이다.

 

탄트라는 말한다.

이 마음의 메카니즘(mechanism)을 이해하고 뿌리를 잘라라.

선택하지 말라.

선택하면 동일시된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대는 특정한 방식으로 그것과 하나가 된다.

 

어떤 것과 동일시될 때 그대는 영혼을 잃는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 영혼을 상실한다는 의미다.

그대는 수많은 사물과 동일시된다.

그대는 사물이 된다.

선택이 동일시를 초래하고,

이 동일시는 그대를 최면과 같은 잠에 빠지게 한다.

 

동일시(identification)가 뿌리다.

탄트라는 인격을 개선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인격의 개선은 가지치기를 해서 나무를 다듬는 것과 같다.

인격은 외형(外形)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외형이 바뀌어도 그대는 똑같다.

탄트라는 더 깊이 들어간다.

뿌리를 잘라라.”

마음의 뿌리, 마음과의 동일시가 끊어지면 삼사라(samsara)가 무너진다.

각성의 바람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집 전체가 무너진다.

돌연 그대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된다.

 

어둠은 하나의 부재 상태에 불과하다.

다만 빛이 부재했을 뿐이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한순간에 모든 무지가 불타 없어진다.

이것이 돈오(頓悟).

 

마음을 넘어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대다.

마음을 초월해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을 초월한 곳에 의식이 있다.

마음을 초월한 곳에 무엇이 있는가?

사치다난다(satchitananda), 진리, 의식, 지복이 있다.

 

그대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진리는 그대와 함께 있었다.

왜냐하면 그대가 바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

진리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명상은 주시다.

명상한다는 것은 주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명상은 이해이며 각성이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보면 마음의 뿌리가 잘려질 것이다.

이 응시가 날카로운 칼이 된다.

여유롭고 자연스러워라.

자신의 내면을 꾸밈없이 응시하라.

이것이 마지막 말이다.

 

 

Beyond and beyond

아홉, 저 넘어 피안의 세계

 

 

 

주지도 받지도 말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키라.

 

마하무드라는 모든 수용과 거절을 넘어선다.

 

아라야(alaya)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그것을 방해하거나 더럽힐 수 없다.

 

태어나지 않은 차원에 머물러라.

 

그러면 모든 현상이

 

드하르마타(dharmata) 안으로 용해 될 것이다.

 

모든 자의지(自意志) 와 긍지가 무()로 돌아갈 것이다.

 

--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그대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나는 그대를 통해 나 자신을 알고,

그대는 나를 통해 그대 자신을 안다.

그런데 둘 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이것은 이상한 게임이다.

 

틸로빠는 주고받음에 연연하지 말라고 말한다.

자연스럽게 줄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이때에는 마음속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나는 무엇인가 주었다.”는 생각이 쌓이지 않는다.

이것이 주는 것(giving)과 나누어 가지는 것(sharing)의 차이점이다.

우리는 공생적(共生的)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의 일부다.

의식의 바다는 거대하다.

아무도 외딴 섬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만나 하나로 합쳐진다.

경계선이 없다.

모든 경계선이 허상이다.

틸로빠는 이것을 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대는 허공을 자를 수 없다.

그대 내면의 존재는 허공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

그것은 무아(無我).

실체가 없다.

분명히 존재하긴 하지만 물질이 아니다.

그것을 자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없어도 세상은 계속 돌아간다.

왜 그대 자신을 여유롭게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지 못하는가?

왜 전체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가?

강아지가 제 꼬리를 물려고 하는 것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겨울 아침을 즐기지 못하고 쓸데없이 자기 꼬리를 잡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여유롭고 자연스러워라.

어느 누가 제 꼬리를 잡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행동에 빠지지 말라.

영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은 가장 어리석은 행동 중의 하나다.

흰 구름처럼 흘러갈 뿐이다.

구름은 목적지가 없다.

그저 움직임 자체를 즐긴다.

흘러가는 것 자체가 아름답다.

 

드하르마타(dharmata)는 만물이 고유의 원소(元素)적인 성질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대가 내면의 거처에 머물면 만물이 고유의 자연적인 원소로 돌아가 용해될 것이다.

그대가 이 질서를 교란하는 주범이다.

내면의 거처에 머물러라.

아라야(alaya)안에 , 내면의 하늘, 그 절대적인 순수성 안에 머물러라.

이 하늘에는 구름이 오고가도 아무 흔적이 남지 않는다.

모든 원소가 자신의 안식처로 돌아간다.

 

배고픔이 스스로 자신을 만족시켜 포만감이 된다면

그대가 어떻게 나를 내세울 수 있겠는가?

삶이 자신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성취하고 죽음에 도달하여 휴식에 든다면

어떻게 그대가 를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라고 말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자연스러운 사람은 내면에 앉아서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한다.

그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오직 이때 마하무드라가 일어난다고 틸로빠는 말한다.

존재계와 하나가 되는 마지막 오르가슴이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존재계와 떨어져 있지 않다.

그대 내면의 하늘과 외부의 하늘이 하나가 된다.

오직 하나의 하늘이 있을 뿐이다.

 

 

The supreme understanding

, 더없는 깨달음

 

최고의 이해는 이것과 저것을 모두 초월한다.

최고의 행동에는 애착 없는 위대한 창조성이 깃들어 있다.

최고의 완성은 아무 희망 없이

내재성을 깨닫는 것이다.

 

첫 단계에서 구도자는 마음이

폭포수처럼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리라.

중간 단계에서 마음은 갠지스 강물처럼

유연하고 고요하게 흐른다.

마지막 단계에서 마음은 거대한 바다가 된다.

이 바다에서 아들의 빛과 어머니의 빛이 하나가 된다.

 

--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말라.

그대 자신으로 남아라.

다른 사람들을 지나쳐 가라.

무관심 하라.

모든 사람 각자 다른 길을 가리키며 그대를 충동질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그대 내면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다.

 

유연성이 젊음이고 경직성은 늙음이다.

유연할수록 젊은 것이며, 경직될수록 늙은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완전히 경직된 상태다.

삶은 절대적인 여유로움, 절대적인 유연성이다.

 

탄트라의 성자는 순간마다 즉흥적으로 감응한다.

그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자신도 모른다.

이것은 아름다운 현상이다.

 

틸로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에게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부분적이지만 깨달음은 전체적이다.

전체를 보면 모든 구분이 사라진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전체를 볼 때 모든 차별이 사라진다.

모든 경계선이 무너진다.

지구 전체가 하나가 된다.

깨달음보다 높은 것은 없다.

이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른 것들과 연결된다.

경계선이 사라지고 만물이 하나로 용해된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무한한 바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있을 뿐이다.

 

붓다는 내면에 고요하게 앉아있다.

모든 것이 내면에 응집되어 있으며,

무한한 에너지가 사방으로 흘러넘친다.

순간마다 창조가 이루어진다.

우주적인 창조가 일어난다.

 

틸로빠는 왜 희망이라는 말을 쓰는 것일까?

희망과 더불어 미래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희망과 더불어 욕망이 들어오고,

더 많이 원하는 탐욕이 생기고 불만이 생긴다.

그리고 당연히 절망이 뒤따른다.

'희망 없음(no hope)' 이것은 기대에 찬 상태도 아니고 절망한 상태도 아니다.

절망과 기대는 둘 다 희망에서 나온다.

 

틸로빠는 사물의 여여(如如, suchness)함을 본다.

그에게는 선택이 없다.

그는 아침과 저녁을 동시에 본다.

그는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본다.

그는 탄생과 죽음을 한꺼번에 본다.

그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희망 없이 산다.

이것은 참으로 경이적인 차원이다.

틸로빠가 말하는 것은 언어를 넘어선다.

축복은 희망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축복은 그저 흘러넘치는 에너지다.

그대가 꽃피기 시작한다.

존재의 여여함을 깨달았을 때 개화(開花)가 일어난다.

아무 이유도 없는 피어남과 축복이 계속된다.

그저 여여함 안에서 휴식한다.

 

성취해야할 모든 것은 내면에 있다.

이것이 내재성이라는 말의 의미다.

그대는 완벽한 존재로 태어났다.

이것이 예수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말한 뜻이다.

 

한 방울의 물을 이해한다면 바다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한 방울의 물은 바다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우주 전체의 축소판이다.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이것을 깨달으면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그대는 웃기 시작한다.

그대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찾는 자 자신이 찾는 물건이었다.

여행자 자신이 목적지였다.

이것이 최고의 성취다.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 아무 희망 없이 자신의 완전무결함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경지다.

 

첫 단계에서 구도자는 마음이

폭포수처럼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리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면 사토리(satori)가 일어날 것이다.

깨달음의 첫 번째 일별(一瞥)이 찾아 올 것이다.

지금 그대의 마음은 꽁꽁 얼어붙은 빙하(氷河)와 같다.

그러나 여유롭고 자연스런 상태에 머문다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다면 이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태양이 내리쪼이기 시작한다.

지금 여기에 존재할 때 막대한 에너지가 비축된다.

그리고 이 에너지가 마음을 녹이기 시작한다.

이 첫 번째 단계를 통과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사회가 그대에게 주입한 모든 것이 무너진다.

지금까지 그대가 배워 온 모든 것이 무너진다.

지금까지 그대를 지탱하고 체계를 유지해온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대의 습관, 그대의 가치관, 그대의 길 전부가 사라진다.

정체성(identity)이 증발되고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녹아내리면서 자기 정체성이 상실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에게 일어난 일이다. 첫 번째 사토리 순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아는 것이라곤,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이 단계를 통과하면, 첫 번째 사토리를 잘 통과하고 중간 단계에 이르면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

이 질서는 내면에서 온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질서, 새로운 질서가 솟아난다.

자연스러운 계율이 찾아온다.

그대만의 계율이 솟아난다.

 

중간 단계에서 마음은 갠지스 강물처럼

유연하고 고요하게 흐른다.

곤두박질치며 포효하던 폭포가 사라졌다.

광란의 상태가 가라앉았다.

이것이 두 번째 사토리다.

그는 갠지스 강처럼 된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흐르는 소리조차 없는 강물이 된다.

그대의 걸음걸이가 우아해 진다.

그대의 존재로부터 전혀 새로운 매력이 발산된다.

우아하고 고상한 매력이 배어 나온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다.

이것이 불상(佛像)에 표현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표현 될 수 없다.

광기가 저절로 가라앉는다.

사회가 강요한 기존의 질서는 완전히 사라진다.

예전의 지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경전을 통해 알았던 모든 지식이 사라진다.

이제 그대만의 지혜가 솟아오른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사자처럼 포효한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물은 큰 소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평원에 이르면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

지형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흘러간다.

아주 평온하다.

 

이 내적인 완성에 도달하라.

모든 희망을 버리고 내면의 근원으로 들어가라.

어떤 목적지도 갖지 말라.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저 즐겨라. 매순간을 즐겨라.

두 번째 상태는 절대적인 침묵과 정적, 고요함, 평정이다.

집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함이며 휴식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마음은 거대한 바다가 된다.

이 바다에서 아들의 빛과 어머니의 빛이 하나가 된다.

고요하게 흐르던 강물이 바다에 도달한다.

바다와 하나가 된다.

끝없이 펼쳐진 대해, 무한한 대양이 된다.

경계선이 사라진다.

이제 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체적인 단위가 사라졌다.

이제 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래 근원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원()이 완성된다.

그대는 집으로 돌아왔다. 본래의 근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제 그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이 가장 역설적인 상태이다.

언어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직접 맛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것이 틸로빠가 마하무드라로 부르는 것이다.

거대한 오르가슴, 궁극적인 법열, 최고의 오르가슴이다.

여행이 막을 내렸다.

여행이 끝났을 뿐만 아니라 여행자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길이 끝났을 뿐만 아니라 목적지 또한 사라졌다.

 

존재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있음(is-ness)'만이 남았다.

육체가 사라졌다.

육체는 존재했었다(existed).

존재했던 마음, 존재했던 길이 사라졌다.

목적지가 사라졌다.

존재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순수한 '있음(is)'마나 남았다.

텅 빈 거울, 텅 빈 하늘, 텅 빈 실존(being)만 남았다.

이 상태를 틸로빠는 마하무드라라고 부른다.

이것이 최고이며 마지막 경지다.

이 보다 더한 경지는 없다.

이 경지는 '초월성(beyondness)'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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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 empty, sunyata) 
 
진실의 세계에서는 공밖에는 작용하지 않는다.
진실이라는 것은, 마음이 없어지는 데서 비로소 드러난다.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사고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이 사고 뒤에는 '공'이 있다.
그 '공'은 사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고(思考)는 물(物)의 세계 밖에서는 작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고도 하나의 물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통하여 진실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했을 때,
사고에 그 나름의 역할을 맡길 수는 있다. 
 
사고는 진실 안에서는 작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실은 사고를 통하여 기능할 수 있다. 
 
비어 있는 마음, 그것은 하나의 순수한 현존(現存)이다.
그리고 그 순수한 현존 안에서는 온갖 것이 가능하다.
왜? 전 존재가 그 순수한 현존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공'에 있을 때 비로소 거기에 하나의 만남, 즉 통합이 자리한다.
'공'에 있을 때 비로소 '진실' 쪽으로 열리고 '진실'이 그 열린 데를 통하여 들어온다.
'공'에 있을 때 비로소 '진실'을 잉태한다. 
 
주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객체는 필요 불가결하다.
그런데 객체가 사라져버린다면 주체도 사라져버리는 셈이다.
처음에는 내용물이 사라지고 이어서 의식이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해서 '사마디(三昧)'라고 부르는 제 3의 상태가 온다.
객체도 없고, 주체도 없다.
내용물도 없고, 의식도 없다. 
 
이 내용물도 없고, 의식이 없는 상태는 무의식과 다르다.
이것은 하나의 초의식(超意識) 상태, 초월의식 상태다.
의식은 지금 자체를 의식하고 있을 뿐이다.
의식은 그 자신을 향하고 있다.
원은 완성되고 있다.
그대는 집으로 돌아와 있다. 
 
이것이 제 3의 상태, 사마디다.
그리고 이 상태야 말로 붓다가 '순야타'라는 말로 부른 것에 다름 아니다.

 

 

 

 

 

 

 

 

 

 

TANTRA VISION

 

탄트라 秘典

 

 

 

 

마음을 변형시키고 초월시키는 112가지 수행법!

 

Osho Rajneesh 강의 l 이연화 옮김

 

 

 

 

5천 년 전 시바는 그의 연인 데비에게

112절로 이루어진 탄트라 방편들을 전수했다.

그것의 이름은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Vigyana Bhairava Tantra)이다.

여기서 비그야나는 의식을 말하고 바이라바는

초월을 의미하며 탄트라는 방편들을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전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의식 초월 방편이 된다.

 

목마른 영혼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태어났는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라는 고민도 없이 무지와

무관심, 무감각에 빠져버린 메마른 의식과 안일한 삶의 태도에서

이젠 깨어나십시오.

 

 

 

 

 

 

 

탄트라의 세계

 

탄트라는 지적인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산 체험이다.

그대가 수용적으로 되고 준비되고

느낄 만큼 예민해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그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비가 묻는다.

 

!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토록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원소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우주의 중심에 앉은 자는 누구입니까?

형상들로 충만하며 동시에 모든 형상들을 초월한 이 생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이름과 모양마저도 뛰어넘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 주소서.

 

 

호흡(呼吸), 우주에 이르는 다리

 

진리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진리는 미래에 성취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그대가 바로 진리이다.

 

 

1

빛의 샘(光源), 그 황홀한 일별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 사이에서 찾을 수 있도다.

숨이 들어오고, 들어온 숨이 나가려고 하기직전,

바로 거기에 지복(至福)이 깃들어 있도다.

 

2

숨을 들이쉴 때 아래(下丹田)에서 위(百會)로 반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리고 내쉴 때 다시 위에서 아래로 반원을 그린다.

이 두개의 회전점을 통해서 불생불멸의 그 자리를 깨달을 지어다.

 

3

들이쉬고 내쉬는 그 찰나의 사이에 호흡은 에너지가 없으면서 또한

에너지로 가득 찬 그대의 중심에 닿는 도다.

 

4

숨을 완전히 내쉰 뒤 호흡이 멎었을 때,

또는 숨을 완전히 들이쉰 뒤 호흡이 멎었을 때,

호흡의 이 우주적인 멈춤 속에서 에고는 사라진다.

 

 

탄트라에서는 그대의 변화를, 그대의 차원적 승화를 요구한다. 그대가 달라지지 않는 한 탄트라는 이해되어질 수 없다. 탄트라는 지적인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 체험이다. 그대가 수용적으로 되고, 준비되고, 느낄 만큼 예민해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그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오직 체험만이 그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대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대는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올 때는 이미 그대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옛날의 그대는 그대가 아니다. 거기에 하나의 틈이 생겼다. 옛사람은 이미 죽었고 새사람이 나왔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의 의미이다. 탄트라는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데비는 매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시바는 데비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처음부터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당황할 것이다. 시바는 데비의 질문에 어떤 해답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데비가 묻는 질문에 시바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다.

 

데비는 '당신의 실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시바는 그것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한 가지 테크닉을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대비가 그 테크닉을 통과한다면 그녀는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 알게 된 것이다.

진정한 해답은 언제나 질문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바는 '내가 누구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한가지 방편, 하나의 테크닉을 가르쳐 줄 뿐이다.

그리고 그 테크닉을 쓸 수 있다면 그대 역시 해답을 알게 될 것이다.

탄트라에서는 행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빛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빛에 대해서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빛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탄트라의 영역이다.

'빛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즉시, 탄트라는 묻는 자에게 그가 지금 눈먼 상태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런 다음 그를 변형시켜 그로 하여금 빛이 무엇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해준다. 탄트라는 결코 빛이 무엇이라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빛으로 인도하고 빛을 보게끔 눈을 띄워 준다. 그래서 탄트라의 해답은 지적인 것이 아니다. 눈먼 사람에게 빛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면 이것은 지적인 것이다. 하지만 눈먼 사람 자신이 직접 눈을 떠서 빛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탄트라를 지적이 아니라 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들이 깊이 들어갈수록 하나가 된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둘이지만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그들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다. 이중성이 초월된 것이다. 오직 이런 뜻에서 예수가 '신은 사랑이다'라고 한 말이 의미가 있다. 다른 의미로는 그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상 사랑은 신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다.

 

시바는 사랑 자체이다.

바이라바의 경지는 그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정점에서 살고 있다. 이제 봉우리는 그의 거처가 되었다. 그러면 이 정점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중성을 넘어서, 무의식을 넘어서, 의식을 넘어서, 육체와 영혼을 넘어서, 이 세상과 모크샤(Moksha;대자유)를 넘어서, 여기와 저기를 넘어선 곳에 이를 수 있을까? 그 방편이 바로 탄트라이다. 탄트라는 순수한 방편 그 자체이다.

 

탄트라는 말한다. 마음이 사라진 상태를 바이라바의 경지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무심(無心)의 상태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갖고 있다면 마음은 그대 앞에서 세상을 창조해 나갈 것이다. 그때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그대 마음의 투사체이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바꾸어라. 그대의 마음을 무심으로 바꾸어라.

그러면 이 112가지 방편들이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공기가 그대의 콧구멍에 닿는 감촉을 느껴보라. 그 숨과 함께 단전으로 내려가라. 완전히 깨어 있는 중에 호흡과 함께 다녀야할 것이다. 결코 호흡을 놓쳐서는 안된다. 앞서가지도 말고 뒤따라가지도 말라. 오직 호흡 그 자체가 되어 호흡과 동시에 존재하라. 호흡과 의식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호흡이 들어올 때 그대도 들어오라. 그렇게 할 때만이 그대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 존재하는 정지 간격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숨과 함께 들어가고 숨과 함께 나와라. 들어가고 나가고, 들어가고 나가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 속에서, 붓다는 특히 이 방편을 사용했다. 그것은 대표적인 불교 명상법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바로 아나빠나사티(Anapanasati)라는 것이다. 불교에는 대표되는 몇 가지 명상법이 있다. 그중에서도 남방불교, 혹은 소승불교라고 불리는 국가들, 즉 스리랑카, 태국, 버어마 등지의 불교 수행승들은 모두 이 방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이 방편을 포함한 자신들의 수행법을 비파사나(Vipasana)명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붓다의 마지막 깨달음에 대한 체험은 바로 이 방편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흡의 핵심이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때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이제 호흡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순간을 지복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 꽃을 관찰하라. 그대에게 주는 이 꽃을 관찰하라.'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이 꽃을 도저히 관찰할 수 없다. 잠시 동안 그 꽃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아름다움과 연결된 또 다른 생각으로 옮겨 다닐 것이다. 이제 꽃은 더 이상 그대의 관찰 대상이 아니다. 그대의 시각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붉다. 이것은 푸르다. 이것은 희다." 그런 다음 그 색깔에 연결된 다른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것은 관찰이 아니다. 관찰 속에는 언어가 개입되지 않는다. 언어는 개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감정을 유발한다. 하지만 진정한 관찰은 언어적인 개념도 없고 감정의 어떤 움직임도 없는 상태 속에 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꽃은 그대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꽃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다. 그대와 하나가 되어 있기에 거기에 홀로 남아 있다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3분 동안만 마음의 어떤 움직임도 없이 완전하게 꽃과 함께 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여기 차원의 변형이 온다. 지복의 순간이 온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관찰자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이 각성되지 못했기에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여기저기로 원숭이처럼 건너뛰고 있다.

 

왜 그토록 이 회전점이 중요한 것인가?

이 회전점은 육체와 마음으로부터 그대를 분리시켜 다른 차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호흡은 그대와 함께 육체 차원으로 들어왔다가 그대와 함께 마음의 차원으로 나간다. 하지만 호흡의 두 회전점에서는 호흡이 그대와 함께하지 않는다. 회전점에 이르는 순간 그대는 호흡과 분리된다. 그 순간에는 호흡이 삶이라면 그대는 죽음이고, 호흡이 육체라면 그대는 비육체이며, 호흡이 마음이라면 그대는 무심이다. 호흡이 멈춰지면 마음의 작용도 따라서 멈춰진다. 왜 그런가?

호흡이 멈춤과 동시에 마음은 호흡에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호흡은 육체와 마음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호흡의 정지는 그대 자신으로부터 몸과 마음의 분리를 뜻한다.

 

 

다섯 개의 신비

 

도약하라! 비상하라!

그대 자신을 변형시켜라.

그대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초월시켜라.

 

5

미간(眉間)에 집중하고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精髓 : prana)로 가득 차게 하라.

그리고 정수리에서 빛이 쏟아지듯

호흡의 정수가 쏟아지고 있음을 느껴라.

 

6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도 들숨과 날숨사이에 항상 유념하라.

이 수련을 계속하면 머지않아 그대는 다시 태어나리라.

 

7

만져지지 않는 호흡의 정수는 미간에 있다가

그대가 잠드는 순간 가슴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꿈의 세계를 넘고 죽음의 세계까지 넘어간다.

8

지극한 경배와 헌신으로 호흡의 두 교차점에 집중하라.

그리고 아는 자를 알아라.

 

9

죽은 듯이 누워 있으라.

화가 날 때 그 분노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속눈섭 하나 움직이지 말고 응시하라.

빨고 싶으면 빨아라.

그러나 빠는자로 남지 말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폴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동양의 신비를 공부하기 위해 이집트에 있는 한 신비주의 명상학교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입학원서를 냈다. 하지만 그는 학교 측으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디를 가나 가장 훌륭한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 입학원서를 냈다. 그러자 학교 측에서는 단식과 호흡의 특별 수련을 거치지 않으면 입학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피타고라스는 학교 측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식을 배우려고 여기에 왔지 수련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

그러자 학교 측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의 존재가 다른 차원으로 변형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지식을 전해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 같은 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 우리는 구체적인 경험에만 흥미가 있다. 삶을 통해서 경험되어지지 않는 지식은 더 이상 지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여! 당신은 40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호흡법을 수련하라. 의식이 각성된 상태에서 호흡의 어떤 지점을 계속 집중하라."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피타고라스는 이 수련을 거치기로 했다. 40일 동안의 단식과 호흡 수련을 거친 뒤에 그는 드디어 입학을 허락받았다. 그때 피타고라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피타고라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피타고라스가 아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그때 당신들이 옳았다. 그때 나는 잘못되어 있었다. 오직 지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40일의 이 정화(淨化)를 통해서 내 존재의 차원은 완전히 변형되었다. 나의 관점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제 나는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 수련을 거치기 전에는 오직 지적인 것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다. 이제 진리는 개념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되었다. 진리는 결코 철학이 아니라 경험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존재의 경험이다."

피타고라스는 과연 어떤 수련을 거친 것일까? 피타고라스가 거친 수련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다섯 번째 방편이다. 이집트의 이 수련법은 인도에서 건너간 것이었다.

 

5.

미간(眉間)에 집중하고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精髓: prana)로 가득 차게 하라.

그리고 정수리에서 빛이 쏟아지듯 호흡의 정수가 쏟아지고 있음을 느껴라.

 

이것이 피타고라스에게 주어진 방편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이 방편을 가지고 그리스로 갔다. 그리하여 그는 서양의 모든 신비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 방편은 가장 심오한 명상 테크닉 중의 하나이다. 이를 이해하라.

'미간에 집중하라......'

생리학자들은 미간에는 인간의 몸 가운데서 가장 신비스러운 부분인 '(galand)'이 있다고 말한다. 송과선(pineal galand)이라고 불리는 이 샘은 티벳에서 쉬바네트라(shivanetra)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시바의 눈, 3의 눈, 탄트라의 눈을 뜻한다. 이 눈은 미간에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은 아직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 기능을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라도 작동될 수는 있지만 저절로는 절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그것을 열기 위해서는 어떤 수련이 필요하다. 이 제3의 눈은 눈먼 것이 아니라 닫혀 있을 뿐이다. 여기 이 방편이 바로 제3의 눈을 여는 테크닉이다.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두 눈을 미간에 집중하라. 사물을 보듯이 그렇게 두 눈썹 사이에 집중하라. 그러나 눈을 떠서는 안된다. 반드시 눈을 감은 채로여야 한다. 이 방편은 가장 간단한 집중법이다.

 

중요한 것은 처음에 정확한 지점을 아는 것이다. 먼저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두 눈의 시선을 모아 두 눈썹 한가운데로 옮겨 가라. 그리고 바로 그 중앙점을 느껴라. 그대의 시선이 중앙점 부근으로 이동하게 되면 두 눈은 고정될 것이다. 두 눈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대는 정확한 지점을 포착한 것이다. "두 눈썹 사이에 집중하라.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그대의 집중력이 정확한 지점에 꽂혔을 때,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 앞에서 사념의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사념의 구름들을 주시하는 주시자이다. 한번만 이렇게 제3의 눈에 고정되면

그대는 더 이상 사념에 휩쓸려 다니는 노예가 아니다. 그대는 사념을 지켜보는 주시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념이 그대를 찾아와도 그대는 그 사념이 된다. 그대와 사념 사이에 어떤 간격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대가 제3의 눈에 한번 집중하게 되면 그때는 사념의 주시자가 될 것이다. 3의 눈을 통해서 그대는 사념들을 구경할 수 있다. 오가는 군중들을 구경하듯이 그대는 사념의 이동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창문을 통해서 길거리의 사람을 볼 때 그대는 자신을 그 사람들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멀리 떨어져 하나의 방관자로 남는다. 이 방편은 '주시자' 를 발견하는 테크닉이다. 이제 그대는 사념들을 구경하라. 그 사념들과 만나라.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에 고정될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그대는 주시자가 된다. 그대의 몸에 통증이 일어날 때 이를 주시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을 그대 자신이라고 여기지 말라. 동일시하지 말고 방관자, 주시자가 되라. 그대가 주시하게 되면 그대의 의식은 제3의 눈에 고정될 것이다.

둘째, 그 역 또한 성립된다. 그대가 제3의 눈에 '의식을 고정시킴으로써 그대는 주시할 수 있다. 그대는 사념들을 지켜볼 수 있다. 그 기로 호흡의 미묘한 진동을 느낄 수 있다. 호흡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먼저 호흡의 정수(The essence of breathing)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호흡을 할 때 공기로써만 호흡하지 않는다. 의학은 말한다. -우리는 공기를 통해서 호흡을 한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공기는 단지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공기를 통해서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라는 매개체에 실려오는 프라나(prana)에 의해서 호흡한다.'

도대체 프라나라는 존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과학은 아직까지 그것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3의 눈에 집중함으로써 그대는 호흡이 아니라 호흡의 정수, 즉 프라나를 느낄 수 있다. 이 프라나를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삼사라(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로 가득 차게 하라.' 호흡의 정수를, 프라나를 느낄 때 정수리까지 가득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으로 모여들 때 이는 가능하다.

그대 머리 전체가 이 호흡의 정수로 가득 채워진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상상하는 순간 호흡의 정수는 실제로 사하스라라 차크라에까지 넘치게 된다.

그 다음 호흡의 정이 빛이 쏟아지듯 정수리로부터 쏟아지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호흡의 정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 빛의 샤워 밑에 있을 때 그대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내적인 재탄생의 의미이다.

 

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꿈이 현실화되듯이 이 현실 전체가 그대로 꿈이 될 것이다. 꿈과 현실은 근본적으로 같다. "이 세상은 환영이다. 꿈이다."라고 상카라가 말했을 때 이 말은 단지 이론적인 주장이나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는 구체적인 경험이다. 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의 내면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을 때 프라나가 아침 햇살처럼 그대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 상상만으로 프라나의 이 충만은 그대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6.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도 들숨과 날숨 사이에 항상 유념하라.

이 수련을 계속하면 머지않아 그대는 다시 태어나리라.

 

그대의 활동은 연극배우의 연기와 같은 것이다. 물론 그대의 배역은 붓다의 역할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도둑의 역할이 될 수도 있다. 붓다의 역할이 주어졌을 때 그대는 붓다처럼 행동하게 된다. 도둑의 역할이 주어졌을 때 그대는 역시 도둑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역할을 하는 도중에도 그대 자신은 어디까지나 그대 자신으로 남는다. 중심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주변에서는 붓다처럼, 아니면 도둑처럼 행동하고 있다. 알아야 한다. 그대는 분명히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대는 마치 붓다나 도둑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을 뿐이지 그대 자신이 결코 붓다나 도둑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행동하되 그대의 의식은 언제나 그대의 중심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이 방편을 잘 수련하면 그대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가 될 것이다. 삶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그대는 연기를 하는 배우다. 그러나 그대의 의식만은 끊임없이 호흡과 호흡 사이의 간격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이 간격을 잊어버린다면 그대는 더 이상 배우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제 그것은 드라마가 아니다. 연기가 아니다. 그대는 드라마를 삶 자체로 잘못 알아 버렸다. 여기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편의 드라마를 진짜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그 삶은 삶이 아니다. 그것은 드라마에 나오는 하나의 배역이다. 이 사회가 그대에게 맡겨준 배역인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면 그 배역은 또 바뀐다. 그런데 그대는 하나의 배역을 그대 자신과 동일시해 버렸다. 그래서 이 방편을 통해 바로 그 동일시를 부숴버려야 한다.

 

이 방편은 그대 자신을 노련한 연극배우로 만든다. 그대가 호흡의 틈에 집중할 때 일상적인 삶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흐른다. 그대의 의식이 중심에 있다면 그대의 집중력은 주변으로 쏠리지 않는다. 주변에는 다만 의식의 일부만이 머물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대 의식의 부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불과하다. 주변의 일을 알고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대 주변에서는 항상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대 자신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이 방편을 수련하게 되면 그대의 삶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대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7.

만져지지 않는 호흡의 정수는 미간에 있다가 그대가 잠드는 순간 가슴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꿈의 세계를 넘고 죽음의 세계까지 넘어간다.

 

3의 눈을 알게 되면 만져지지 않는 호흡의 정수, 프라나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프라나가 가슴의 한가운데에 닿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꿈의 세계, 그리고 죽음까지도 넘어가게 될 것이다.

이 방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수련하라. 첫째, 호흡 속에서 프라나를 느껴라. 호흡의 만져지지 않는 부분을 느껴라. 미간을 집중하면 이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숨결 사이의 틈을 집중해도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미간보다는 좀 어렵다. 단전에 집중하게 되면 역시 가능하지만 좀 더 어렵다. 그러므로 호흡의 만져지지 않는 부분을 알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제3의 눈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대가 프라나를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자신이 죽을 때를 미리 알 수 있다. 죽기 6개월 전부터 이미 죽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성자들이 왜 자신의 죽는 날짜를 예언하는가? 그것은 쉬운 일이다. 호흡 속에 담겨진 것을 느낄 수 있다면, 프라나가 그대 속에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면, 프라나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대는 즉시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호흡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호흡은 더 이상 프라나를 운반해 오지 않는다. 들어오는 공기는 더 이상 프라나를 운반해 오지 않는다. 프라나의 양이 조금씩 줄다가 마침내는 텅 비게 된다. 이는 그대 몸이 우주의 에너지, 이 프라나를 더 이상 흡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프라나가 필요없다. 그리고 숨이 나갈 때는 빈 숨만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 안에 이미 있던 프라나를 싣고 가 버린다. 이 때문에 그대가 일단 호흡의 만져지지 않는 부분을 알게 되면 그대는 죽는 날을 알 수 있다. 프라나의 이동이 바뀌는 6개월 뒤에 그대는 죽을 것이다. 잠들려 할 때 이 방편을 수련해야한다. 이 방편을 수련하기 가장 적합한 시간이 바로 이때다. 잠들려 하는 그 순간에 그대의 의식은 잠 속에 용해되어 버린다. 이제 그대는 아무것도 자각할 수 없다. 이 순간이 오기 직전에,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호흡을 깨달아야 한다. 프라나를 느껴야 한다. 이 프라나가 심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껴야 한다.

느껴라. 프라나가 심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껴라. 프라나는 그대 심장으로부터 몸 속으로 들어온다. 이 프라나가 심장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을 느껴라. 프라나를 느끼면서 잠들도록 하라. 잠의 안개가 그대를 덮도록 하라.

이를 체험하게 되면 꿈속에서도 의식은 각성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꿈꾸면서 동시에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꿈을 꾸면서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꿈꾸는 동안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제3의 눈 때문이다. 꿈꾸고 있는 사람의 두 눈을 본 일이 있는가? 꿈꾸는 사람의 눈동자는 위로,

3의 눈 쪽으로 향하고 있다. 잠자는 어린아이의 눈을 보라. 그 눈동자가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보라. 어린아이의 두 눈동자는 제3의 눈 쪽으로 집중되어 있다.

어린아이의 눈을 보라. 어른들의 눈은 보지 말라.

그들의 잠은 깊지 못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잠자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어린아이들의 눈은 제3의 눈 쪽으로 향하고 있다. 3의 눈 쪽으로 향한 이 집중이 꿈을 현실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꾸고 있는 동안은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결코 느낄 수 없다.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이다. 그때야 비로소 '내가 지금까지 꿈을 꾸었다'라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 거듭 말하지만 꿈꾸고 있는 동안은 결코 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꿈꾸고 있으면서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차원에서이다. 첫째 잠에서 깨어났을 때, 둘째 그대 의식이 초롱하게 각성되어 있을 때, 꿈을 꾸면서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리고 꿈의 세계를 넘고 죽음의 세계까지 넘어간다.' 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꿈속에서 '이것이 꿈' 임을 깨달을 수 있을 때 그대는 두 가지를 할 수 있다. 첫째, 꿈을 조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꿈을 조작할 수 없다. 꿈조차 그대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이 얼마나 무기력한가. 특별한 어떤 꿈을 꾸려 해도 그대는 결코 그런 꿈을 꿀 수 없다. 꿈은 그대의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그대는 꿈의 창조자가 아니라 꿈의 희생자이다. 꿈은 그대 뜻과 관계없이 꾸어진다. 그대는 꿈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그대는 꿈을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다. 그러나 잠드는 그 순간에 프라나가 심장에 충만함을 기억한다면, 그리하여 그대의 호흡 하나하나가 프라나에 의해서 터치된다면 그대는 꿈의 마스터가 될 것이다. 그대가 좋아하는 꿈은 무슨 꿈이든지 꾸게 될 것이다. 잠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그 순간 이렇게 말하라. '나는 이러이러한 꿈을 꾸고자 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그대가 원하는 그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잠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그대 자신에게 말하라. '나는 이러이러한 꿈을 꾸고 싶지 않다.' 그러면 그러한 꿈은 결코 그대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꿈의 마스터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하지만 전혀 쓸모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대가 자신의 꿈에 있어서 마스터가 된다면 그대는 결코 꿈꾸지 않게 될 것이다. 꿈은 정지될 것이다. 더 이상 꿈꿀 필요가 없기 때문에 꿈이 정지될 때 그대

잠의 차원은 변형된다. 여기 잠은 죽음과 같다. 죽음은 깊은 잠이다. 잠이 죽음만큼 깊어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꿈은 잠의 수면에서 만들어진다. 꿈꾸고 있는 동안 그대는 잠의 표면에서 흐를 뿐이다. 그것은 꿈에 매달리기 때문에 잠의 수면에서 떠도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 꿈이 없을 때 그대는 바다 깊숙이 떨어진다. 바다의 밑바닥까지 침몰하게 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인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잠은 죽음의 짧은 기간이요, 죽음은 긴 잠이다."

잠과 죽음은 동질이다, 잠은 하루하루의 죽음이요, 죽음은 삶에서 삶의 긴 현상이다. 삶에서 삶의 긴 잠이다. 그대는 피곤하다. 그대는 잠을 잔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다시 생명력에 넘치게 된다. 그러다가 70, 80이 되면 완전히 피곤해진다. 이제 죽음의 짧은 기간 대신 긴 죽음을 필요로 하고 있다. 긴 죽음 후에, 긴 잠 후에 그대는 완전히 다시 태어난다. 새로운 몸을 받고 다시 태어나게 된다. 꿈이 없는 이 잠을 안다면, 꿈속에서 '나는 지금 꿈꾸고 있다.'고 깨달을 수 있다면 이제 죽음의 공포는 없을 것이다.

완전히 죽은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완전히 죽을 수는 없다. 죽음이란, 완전한 죽음이란 불가능하다. ......왜 그럴까?

그대는 자꾸자꾸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 잠이 너무 깊기에 그대는 잠들기 전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까마득한 전 세상의 기억들이 잠의 이 안개에 덮여 버린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라. 오늘 밤도 그대는 역시 잠들 것이다. 이는 마치 녹음된 테이프를 다시 지우는 장치와 같다. 기억도 이와 같다. 기억도 일종의 녹음 현상이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뇌세포에 녹음된 그 수많은 기억들을 다 지워 버릴 수 있는 그런 기계 장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 마음에 묻은 기억의 티끌을 완전히 씻어 낼 수 있는 그런 기계 장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그대는 더 이상 어제의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어젯밤 잠들던 그대를 전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그대의 잠은 죽음과 같게 될 것이다. 여기 어젯밤 잠들기 직전의 그대와,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난 그대와는 전혀 연결성이 없다. 그것은 기억의 제거 장치에 의해서 어제의 그대 기억이 완전히 지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은 죽음과 삶에서도 일어난다. 그대가 죽을 때, 그리고 다시 태어날 때, 그대는 기억하지 못한다. 누가 죽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대는 또다시 시작한다. 이 삼사라 속에서 자꾸자꾸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방편을 수련하면 꿈의 마스터가 된다. 그대는 꿈을 멈추게 할 수도, 다시 꾸게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꿈꾸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 될 것이다. 결코 꿈의 희생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그대의 잠은 죽음과 동질이다. 여기서 그대는 알 것이다. 죽음은 일종의 수면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꿈이 끝날 때 동시에 죽음도 끝나야 한다. 죽음이 한낱 잠과 같은 것을 느낀다면 그대는 죽음 그 자체와 연결될 수 있다. 이제 그대는 선택할 수 있다. 그대가 태어날 곳과 태어날 몸을 선택할 수 있다. 꿈의 마스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탄생의 마스터가 될 것이다. 이 때문에 '꿈의 세계를 넘고 죽음의 세계까지 넘어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탄생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꿈의 통제자가 아니라, 탄생의 선택자가 아니라 그것들의 희생물에 불과하다.

모른다. 우리는 모르고 있다. 이 탄생과 죽음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우발적이며 카오스 현상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꿈의 마스터가, 죽음의 마스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과 마스터가 된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8.

지극한 경배와 헌신으로 호흡의 두 교차점에 집중하라.

그리고 '아는 자'를 알아라.

 

탄트라는 말한다.

"몸은 사원이다. 몸은 신이 거주하는 곳이다."

몸을 하나의 사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몸은 성스러움, 그 자체이며 영원히 풀 수 없는 신비이다. 호흡을 하고 있는 동안 그대자신이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그대 자신 속에서 신이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먹을 때나 몸을 움직일 때도 마찬가지다. 그대 자신이 먹거나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이 그대를 통해서 먹고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모든 것에 대하여 경배의 감정이 솟는다.

많은 성자들이 그들의 몸을 사랑했다. 그들은 그들의 몸이 마치 연인에게 속해 있는 것처럼 소중히 다루었다. 그대도 그대 자신의 몸을 그들처럼 소중하게 취급할 수 있다. 아니면 단지 하나의 기계로서, 물건으로 취급할 수도 있다. 선택은 그대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대가 몸을 신성한 사원으로 취급할 수 있다면 이 테크닉은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지극한 경배와 헌신으로......'

먹을 때 그대 자신이 먹는다고 생각지 말라. 신이 그대 몸을 빌어서 먹는다고 생각하라. 먹는 행위는 마찬가지겠지만 태도의 이 변화를 계기로 모든 것이 변형된다. 음식을 먹는 그대의 행위는 신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행위로 바뀐다. 목욕을 할 때, 역시 신이 그대 몸을 빌어서 목욕을 한다고 느껴라. 그러면 이 테크닉을 수련하기가 보다 용이해질 것이다.

 

9.

죽은 듯이 누워있으라.

화가 날 때 그 분노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눈썹 하나 움직이지 말고 응시하라.

빨고 싶으면 빨아라. 그러나 '빠는 자'로 남지 말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죽은 듯이 누워 있으라,' 이렇게 하게 되면 그대는 죽어 버릴 것이다. 몸을 거기 그대로 버려둬라. 꼼짝도 하지 말라. 그대는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완전히 죽어 버렸다고 상상하라. 몸도 움직일 수 없고 눈도 움직일 수 없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대는 죽었다. 이때 어떤 느낌이 일어나는지 느껴 보라. 그러나 자신을 속이지는 말라.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약간씩 몸을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조금도 움직이지 말라. 모기가 물더라도 말이다. 죽음처럼 그대로 있어라. 이 방편은 가장 유용한 방편중의 하나이다.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는 이 방편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는 방편이 아니었다. 그에 있어서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일어난 변화였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전생에 나는 이 방편을 수련한 결과 이생에 와서 저절로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 인과 관계가 있다. 15세 되던 어느 날 그는 그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몸 전체가 빳빳하게 굳어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는 질식 상태를 느꼈다. 심장이 멎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은 악몽을 꿀 때 자주 일어난다. 몸이 빳빳하게 굳어 버리고 혀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렇게 심한 가위에 눌릴 때는 깨어나도 한동안 꼼짝할 수가 없다. 이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정신은 말짱하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의 정신은, 의식은 말짱했다. 그러나 그는 느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어떻게 할래야 해볼 도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살려는 모든 노력을 단념해 버렸다. 두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죽음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점점 굳어지다가 마침내 죽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몸은 죽었으나 그는 알고 있었다. 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살아 있지만 몸이 죽었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몸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가뿐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어제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죽어 버렸다. 죽음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의식의 다른 차원을 안 것이다. 그는 집을 나와 버렸다. 그날 밤 그 죽음의 경험이 그를 변형시켰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 시대에 있어서 깨달음을 얻은 몇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방편이다. 라마나에게 있어서는 이런 현상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결코 그렇게 자발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쉬지 말고 수련을 계속하라. 그러면 어느 땐가는, 다음 세상의 어느 땐가는 그대에게도 자발적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설령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그 노력은 헛되지 않는다. 그 노력은 그대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하나의 씨로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시절이 무르익고 비가 오게 되면 그 씨는 마침내 싹이 트고야 말 것이다. 모든 자발적인 현상이 이와 같다. 씨는 뿌려졌다. 그러나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성숙해지고 더 많이 경험할 때, 그리고 더 많이 좌절할 때,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어떤 극적인 상황을 만나서 씨는 싹이 튼다. "죽은 듯이 누워있으라. 화가 날 때는 그 분노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슬픔을 느낄 때면, 두려움을 느낄 때면, 그 슬픔과 두려움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라. 그대는 죽었다. 그러므로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속눈썹 하나 움직이지 말고 응시하라. "

이것은 메허바바(Meher Baba)의 방편이었다. 몇 해 동안 그는 속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송장처럼 몇 시간이고 누워 있곤 했다. 이것은 정말 좋은 방편이다.

그대는 다시 제3의 눈에 고정된다. 이렇게 하여 일단 제3의 눈에 고정되게 되면 두 눈섭을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다. 메허바바는 이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대는 의아해할 것이다. '도대체 이렇게 하찮은 방법으로 어떻게 깨달음을 얻는단 말인가?' 그러나 3년 동안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장만 응시했다. 3년이란 시간은 참으로 긴 시간이다. 3분만 응시해 보라. 3분이 그대에게는 3년보다 더 길게 느껴질 것이다. 응시하는 동안의 3분이란 그렇게 길 수가 없다. 시간은 여기에서 영원히 정지해 버린 것 같다.

메허바바는 계속 천장만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의 사고와 동작은 점점 정지되고 의식만 뚜렷해졌다. 아니 그는 응시, 그 자체가 되었다. 그의 삶은 깊은 침묵이 되었다. 이 응시로 하여 그의 내면은 침묵의 한가운데가 되었다. 이제 그에게 형식적인 말을 시키기란 불가능하게 되었다.

메허바바가 미국에 갔을 때였다. 당시 미국에는 독심술에 정통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상대방 앞에 앉아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있으면 상대의 생각을 정확하게 꼬집어내었다. 그의 적중률은 100퍼센트였다. 어떤 사람이 그를 메허바바에게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는 메허바바에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일생에서 단 한 번의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그는 메허바바의 생각을 알아내기 위해서 몇 번이고 독심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단 한 가닥의 생각도 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종이 위에 이렇게 썼다.

"도대체 무슨 이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이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이 사람의 마음은 텅 비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감은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아직도 내 앞에 앉아 있는지 아니면 다른 데로 가버렸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눈을 뜰 때마다 그는 내 앞에 있었다. 하지만 눈만 감으면 나는 속는 것 같았다. 그는 멀리 달아나 버리고 내 앞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어떤 사실을 발견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계속적인 응시로 인해서 모든 생각을 정지시켜 버린 것 같았다."

 

"화가 날 때는 그 분노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이 한 구절만으로도 독립된 방편으로서 훌륭하다.

화가 뭉게구름처럼 일어난다. 그러나 그 분노를 발산하기 위해서 어떤 행위도 하지 말라. 분노 그대로, 그냥 분노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법이 바로 이 방편이다.

"화가 날 때 그 분노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화가 나면 화를 내라. 그 분노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있어라.

절대로 피하지 말라. 분노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다면 이제 머지않아 그 분노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완전히 새사람이 될 것이다. 불안하거든 그 불안한 상태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라. 불안을 없애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말라. 그러면 불안은 사라질 것이다. 불안의 먹구름이 지나가 버린 다음 그대는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형될 것이다. 결코 불안에 동요되지 말라. 불안, 그 자체를 똑바로 직시하라. 그러면 그대는 불안의 마스터가 된다.

 

빨고 싶으면 빨아라, 그러나 '빠는 자'로 남지 말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무엇이든지 빨아라. 공기를 빨아라. 그러나 빠는 그 행위자는 잊어버리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 어떤 것을 빨 때 그대는 '빠는 자'이지 '빠는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제 행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라. 뛰어들어서 '빠는 그 자체'가 되라.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수련하라. 달릴 때는 '달리는 자'가 되지 말고 '달리는 그 자체'가 되라. '달리는 자'를 느끼지 말고 '달리는 순간'을 느껴라. 그대는 진행 과정이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진행 과정이다. 그대 내부에는 아무도 없다. 그 격정 속에 오직 달리는 그 진행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대의 마음을 쉬게 하는 방편들

 

 

이 방편들은 그대로 하여금 중심을 찾고

거기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10

사랑의 달콤한 애무를 받을 때 사랑 자체가 되면

어여쁜 공주는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간다.

 

11

개미가 기어가는 것을 느낄 때 감각의 문을 닫아라.

그때 그것이 일어나리라.

 

12

침대에 눕든지 자리에 앉든지 그대자신을

무중력 상태에 있게 하라. 그때 마음을 넘어선다.

 

 

인간은 중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서 벗어나서 살아간다. 그 때문에 내면에서 긴장이 싹튼다. 그리고 끊임없이 갈등과 고뇌를 느낀다. 그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는 있지 않다. 그대는 올바른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대는 균형을 잃었다. 그것은 중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태는 모든 정신적 긴장을 초래한다. 그것이 심해지면 그대는 결국 미치게 된다. '미친 사람(madman)'은 자신 밖으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Enlightened man)'은 미친 사람의 역() 이다. 그는 자신의 중심에 이른 사람이다. 그대는 그 중간에 있다. 그대는 자신 밖으로도 완전히 나가지 않았고 그렇다고 중심에 이른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머물러 있다. 어떤 때에는 중심에서 갑자기 멀어진다.

 

인간을 네 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정상적인 인간형이다. 그들은 고정된 동일시를 갖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나 교수 기술자나 심지어는 성자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에 집착한다.

두 번째 타입은 매우 유동적인 자아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업가가 아닌 시인, 화가, 혹은 예술가로 불리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엇이라고 딱히 지정할 수 없다. 어떤 때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만 어떤 때는 미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붓다 같은 환희를 맛보기도 한다.

세 번째는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구적으로 자신을 떠나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네 번째 유형이 바로 그들의 집에 도착한 사람들, 중심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들은 붓다나 그리스도 같은 사람들이다. 이 네 번째 유형은 완전히 이완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완전히 그 마음이 푹 쉬어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의 의식 속에 긴장이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노력이나 욕망도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뭔가 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상태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만족한다. 그것이 곧 무위(無爲)의 마음이다. 자신의 중심에 이른 마음이다. 이것은 미친 사람의 마음과 완전히 반대이다. 미친 사람은 어떤 존재(Being)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뭔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becoming)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그의 마음은 끝없이 찾아 헤맨다. 그는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실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붓다는 바로 이 순간의 존재 속에 산다. 미친 사람은 그와 정반대이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존재 속에서 결코 살지 못한다. 그는 항상 뭔가가 되려 한다. 이 둘은 양극이다. 그리고 잊지 말라. 미친 사람은 그대의 반대편이 아니다. 그는 붓다의 반대편에 있다. 붓다 역시 그대의 반대편이 아니다. 그는 미친 사람의 반대 극부 이다. 그대는 단지 그 사이에 있다. 그대는 그 두 가지가 섞여 있다. 그대는 미친 증세도 갖고 있고. 깨달음의 요소도 갖고 있다.

 

태양은 매일 아침 새롭게 떠오른다. 오래된 태양, 낡은 태양은 없다.

달도 새롭다. 꽃도 새롭고 나무도 새롭다. 모든 것이 새롭다. 그대의 마음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대의 마음은 항상 낡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과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경험을 축적하고 경험을 투사하기까지 한다. 마음은 과거를 필요로 하고 생명은 현재를 필요로 한다. 생명은 항상 존재의 축복이 담겨 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대가 마음의 작용을 허용하는

거기엔 항상 불행이 뒤따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떻게 존재의 중심에서 편히 쉬는 순간을

지속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을 위해 여기에 세 가지 방편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그대의 마음을 푹 쉬게 한다. 그대의 신경을 완전히 이완시켜 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존재의 중심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다시는 더 이상 무엇이 되려는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소개되는 이 방편들이 도와줄 수 있다. 이 방편들은 그대로 하여금 중심을 찾고 거기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10

사랑의 달콤한 애무를 받을 때 사랑 자체가 되면 어여쁜

공주는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간다.

 

시바는 사랑으로 시작한다.

첫 번째 방편은 사랑과 연관되어 있다.

사랑은 그대가 알고 있는 이완의 경험 중에 가장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사랑을 할 수 없다면 그때는 이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대가 이완할 수 있다면 그대의 삶은 사랑의 삶이 될 것이다.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긴장한 사람은 항상 뚜렷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벌어야지 사랑을 해서는 안된다. 사랑은 목적이 없는 것이다. 사랑은 상품이 아니다. 그대는 사랑을 사 모을 수도 은행에 저축할 수도 없다. 사랑을 통해서 그대의 에고를 강화시키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실제로 사랑은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것은 어떤 이유나 목적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왜 사랑을 하는가? 대관절 사랑을 통해 무엇을 하려 하는가? 사랑은 그것 자체로 궁극이며 끝이다. 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계산적이다. 그것은 항상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긴장할 수밖에 없다. 목적은 반드시 미래에 성취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지금 여기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바는 사랑과 함께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달콤한 애무를 받을 때 사랑 자체가 되면 어여쁜 공주는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간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인가?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그대가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는 과거가 멈춘다. 미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대는 현재의 차원 속에 있다. 그대는 지금이라는 순간 속에 있다.

우리는 시간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과거, 현재, 미래로 말이다. 사실 그런 구분은 완전히 엉터리이다. 시간은 오직 과거와 미래뿐이다. 현재는 시간에 속한 부분이 아니다. 현재는 영원의 부분이다. 흘러간 것이 시간이다. 그리고 다가올 것이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 존재하는 상태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영원이다.

과거에서 미래까지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간은 일차원적이다. 그것은 과거 아니면 미래의 수평선상을 달린다. 하지만 그대가 현재로 들어오는 순간 차원이 바뀐다. 그대는 현재라는 시점에서 수직이동이 가능해진다. 차원적 비약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수평선 위를 달릴 수 없다. 붓다나 시바는 바로 이 점에서 살았다. 그들은 시간 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 살고 있다.

 

누가 예수를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생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때 예수는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선승(禪僧)의 대답과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예수의 대답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는 그가 알아듣도록 보충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말만 했다. 시간은 수평선 위를 흐르고 신의 나라는 수직선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이다 그것은 항상 여기에 있다. 그대가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첫째 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통해서 그대는 시간의 궤도를 벗어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원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자신들 속에 사랑을 향한 그토록 깊은 갈망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대가 그것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한 사랑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사랑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심오한 현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사랑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대가 사랑을 한 뒤에 그토록 좌절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랑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시간 속에서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시간 속에서는 사랑이 불가능하다.

 

그대가 시간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항상 벽이 있다. 그대가 시간을 초월해서 보면 언제나 열린 하늘이 있다. 무한한 하늘이 있다. 그리고 사랑은 무한을 여는 문이다. 그대는 사랑을 통해서 존재계의 영원함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그대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은 명상의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방편이다.

"달콤한 애무를 받는 동안 어여쁜 공주는 영원한 생명이 되어 애무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 속에서 방관자처럼 서 있지 마라. 사랑 자체가 되라. 영원 속으로 뛰어들라. 그대의 연인을 애무하는 동안, 혹은 애무를 받는 동안 행위자로 남지 말고 애무 그 자체가 되라. 키스를 할 때 키스를 하거나 받는 행위자가 아니라 키스 자체가 되라.

시바는 사랑 자체가 되라고 말한다. 그대가 포옹할 때 포옹 자체가 되라. 키스를 하면 키스 자체가 되라. 그대 자신을 잊어버리고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만이 존재 한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라. 그때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뛴다. 피가 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돈다. 그때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보며 손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움직인다.

사랑이 되라. 그리고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라. 사랑은 그대의 차원을 급격하게 변화시켜 준다. 그대는 시간을 벗어나서 영원을 대면한다. 사랑은 깊은 명상이다. 종종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성자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안다. 그들은 요가 수행자들이 놓치는 것들을 맛본다. 하지만 그대의 사랑이 본격적인 명상을 통해 변형되지 않는 한 그것은 일시적인 경험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탄트라가 필요하다.

탄트라는 사랑을 명상으로 바꾸어 준다. 탄트라가 왜 그토록 사랑과 성 ()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지 이제 그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그대가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자연스런 문이 되기 때문이다.

 

시바에게는 사랑이 위대한 문이다. 그에게는 섹스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섹스는 하나의 씨앗이며 사랑은 그 꽃이다.

섹스는 사랑의 꽃을 피워야 한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섹스의 잘못이 아니라 그대의 잘못이다. 섹스는 섹스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탄트라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사랑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사랑 또한 사랑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빛으로, 명상적 체험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그것은 궁극으로, 신비의 절정이 되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사랑이 변형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행위하는 자를 잊어버리고 행위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사랑 속에 있는 동안에는 사랑 자체가 되라. 그때 그것은 그대의 사랑도 아니며 나의 사랑도 아니다. 그 누구의 사랑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저 사랑일 뿐이다. 그대가 거기에서 사라질 때 그대는 궁극 속으로 녹아 들게 된다. 그리고 사랑의 꽃을 피우는 에너지가 된다.

그때 그것은 하나의 명상이 된다. 그 속에서 그대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다면 사랑하는 자는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이 남게 된다. 그때 시바는 말한다.

"영원한 생명은 그대의 것이다."

 

11

개미가 기어가는 것을 느낄 때 감각의 문을 닫아라.

그때 그것이 일어나리라.

 

내 어릴 적 친구 중의 하나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의사들은 모두 3개월 동안은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3개월 동안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했다. 내가 병문안을 갔을 때 그는 내게 말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게. 내가 당장 죽을 수 있도록 말이야. 3개월 동안 누워 있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내겐 훨씬 쉽네. 돌처럼 누워 있는 것은 견딜 수가 없어."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번이 아주 좋은 기회일세. 눈을 감고 돌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해 보게. 자네는 움직일 수 없다 어떻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자네는 돌이기 때문이야. 눈을 감고 석상이 된 자신을 느껴 보게."

그러자 그는 내 말대로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그냥 해보게. 자네는 여기에 앉아 있고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네. 아무것도 말일세. 자네는 여기서 어쨌든 3개월을 지내야 하니 그냥 한번 해보게." 평소 같았으면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도 않거니와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말했다.

"좋아 ! 한번 해보기는 하겠네. 하지만 믿지는 않겠네. 내가 석상이라 생각한다고 해서 뭔가가 일어날 리는 없지. 하지만 자네의 성의를 봐서 한번 해보지. " 그는 내 말대로 했다. 나 역시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도 어떤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 있게 되면, 절대적인 절망 속에 있게 되면 뭔가가 일어난다.

그런데 잠시 후 그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가 2,3분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군' 하고 눈을 뜰 줄 알았다. 그런데 30분이 지나도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정말 석상(石像)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의 이마에 서려 있던 모든 긴장이 다 사라지고 그의 얼굴은 변해 있었다. 그가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두고 나와야 했다.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고요했다. 그의 호흡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잠이 들었는지 확인도 해볼 겸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해 보았다. "나는 이제 가야하네. 그러니 눈을 뜨고 무슨 일이 일어났거든 말해 주게."

그러자 그는 눈을 떴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말했다.

"이것은 기적이다. 혹시 자네가 나를 어떻게 한 것이 아닌가?"

내가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그는 내 말을 듣는 즉시 반박했다.

"분명히 자네는 뭔가를 했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내가 눈을 감고 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어떤 느낌이 몸으로 전해져 왔네. 나는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네. 나는 몇 번이나 눈을 뜨려고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했어, 정말 석상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단 말일세. 그리고는 시간도 멈춰 버린 것 같았어. 갑자기 이 세상이 사라져 버리고 나는 홀로 내 속으로 깊이 들어갔어. 그때는 고통도 사라져

버리더구만. "

사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다. 수면제를 맞지 않으면 잠을 이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는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에게 정확히 언제쯤 고통이 사라졌는지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처음에 나는 어디론가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고통이 거기에 있었고 나와 고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벌어졌지. 그리고는 고통이 점점 멀어져 가더니만 마침내 사라졌어. 그때까지 적어도 10분은 걸렸을 거야. 고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어.

석상이 어떻게 고통을 느낄 수 있겠는가?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감각의 문을 닫아라. "

돌처럼 되라. 이 세상을 향해 문을 닫아 버려라. 그대의 육체에 대해서도 문을 닫아라. 그대의 육체는 그대에게 속한 부분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부분이다. 그대가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닫혀 질 때 그대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닫혀 진다. 시바는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지금 당장 그 육체를 갖고 해보라.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다.

굳이 개미가 기어가는 느낌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대가 '개미가 기어갈 때 나는 이 명상을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개미를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어떤 느낌이라도 좋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차가운 침대에 누워서 할 수도 있다. 갑자기 차가운 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대의 침대도 사라지고 침실도 사라진다. 전 세계가 사라진다. 그대는 돌처럼, 죽음처럼 변한다. 그리고 외부로 향해 뚫려 있는 어떤 창문도 없다. 그대는 움직일 수도 없다. 그때 그대는 중심으로 내던져진다. 주변을 맴돌던 원심력을 잃고 갑자기 중심으로 당겨오게 된다. 처음으로 그대는 중심에 서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대는 이전의 그대가 아니다.

 

12

침대에 눕든지 자리에 앉든지 그대 자신을 무중력 상태에

있게 하라. 그때 마음을 넘어선다.

 

그대는 여기에 앉아 있다. 그대의 몸무게가 사라졌다고 느껴보라. 무게란 것은 없다, 그대는 지금까지 항상 무게를 느끼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부터 무게가 사라졌다고 느껴보라. 그러면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면서 무중력 상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 그대의 몸은 사라지고 없다. 사실 무게를 가진 몸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본래 무게가 없다.

 

만약 그대가 이 방편을 수련한다면 그대는 자신이 본래 무게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상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본래 그대는 무게가 없었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들어 내면 항상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그대는 자신에게 걸어 놓은 뿌리 깊은 최면을 풀어야 한다.

그대는 스스로에게 '나는 육체다. 따라서 나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라고 최면을 걸어 놓았다. 그대가 건 최면을 스스로 풀 수 있다면 그대는 자신이 육체가 아니며 무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대가 무게를 느끼지 않을 때 그대는 마음마저 초월한다.

그때 시바는 말한다.

"침대에 눕든지 자리에 앉든지 그대 자신을 무중력 상태에 있게 하라.

그때 마음을 넘어선다."

사실 마음도 무게를 갖고 있다. 그리고 사람마다 그 무게는 모두 다르다.

 

깊은 명상 속에서 그대가 자신의 육체를 잃어버릴 때 그대는 무중력 상태를 느끼게 된다. 그때 종종 육체도 함께 떠오르는 수가 있다. 과학자들은 볼리비아에서 한 여인이 공중 비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명상 중에 있었는데 4피트 정도 떠오른 것이었다. 그 장면은 사진으로 남겨졌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그 장면을 TV를 통해 구경했다. 하지만 과학으로는 어떤 설명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명상을 하지 않을 때는 1피트도 떠오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명상이 방해를 받으면 갑자기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명상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대의 육체를 완전히 잊어버려라. 그러면 그대와 육체 사이에 동일시가 끊어진다. 그때 육체는 매우 작은 것이 되고 그대는 매우 큰 것이 된다. 그때 그대가 얻는 무한한 힘에 비하면 그대의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가 육체를 보고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황제가 노예를 보고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차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노예가 울면 황제도 운다. 노예가 구걸하면 황제도 구걸한다. 노예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면 황제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한번 황제가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나면 다시는 노예와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그때는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한다. 그대는 무한한 힘을 유한한 육체와 동일시한다. 한번 그대가 진짜 자신을 깨닫고 나면 그때는 더 이상 몸무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비상할 수 있다. 육체도 함께 말이다. 세상에는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일들이 수없이 많다.

 

마음은 육체의 부분이다. 마음은 물질이다. 물질은 무게를 갖는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어떤 무게도 갖지 않는다. 이 세 가지 방편들을 며칠 동안만 집중적으로 해보라. 그러면 내가 한 말이 실제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질문 )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사색, 집중, 명상 이 세 가지는 어떻게 다릅니까?"

 

사색은 일관성 있는 생각을 뜻한다. 그것은 방향이 설정된 사념 활동이다. 우리 모두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색이 아니다.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다. 한 가지 생각은 다른 한 가지 생각을 또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어떤 정해진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그래서 프로이드 학파는 그것을 보고 ' 연상작용' 이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연상의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 한 가지 사건만 일어나도 마음은 그 작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컴퓨터와 같다. 한 가지 정보는 다른 정보로 이어지고 그런 작용은 계속된다. 그리하여 그대는 하루 종일 그 짓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대의 이런 생각들을 사념의 구름, 혹은 사념의 물결이라고 부른다. 바람 부는 대로 그대는 사념이 되어 흘러 다닌다.

 

사념이 사색이 되려면 연상작용에 의해 떠다니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일정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대는 특정한 문제를 놓고 고민한다. 그때 그대의 모든 연상작용들을 잘라 버린다. 그리고 논리적인 단계를 거쳐 어떤 결론에 이른다. 그대의 마음은 어떤 곁길로도 빠져 달아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직 정해진 길 위로만 가야 한다.

과학자들은 사색을 통해 어떤 문제에 접근한다. 논리학자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조차 한 송이의 꽃에 대해 사색한다. 그때 온 세상은 마음에서 사라져 버린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송이의 꽃만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가면 많은 생각들이 곁길에 나타나서 그를 유혹하지만 그는 그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매야 한다.

그때 마음은 오직 한 가지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이것이 바로 사색이다.

 

과학은 사색이 그 기반이 되어 있다. 모든 논리적인 생각들이 바로 사색이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사념의 구름은 사색이 아니다. 사색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거기에 집중이 있다. 집중은 한 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은 사색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한 점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으로 하여금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날뛴다. 그리고 사색 속에서는 미친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일정한 방향으로 한 길로만 가는 것이다. 그는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집중 속에서는 마음이 아예 움직이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요가는 집중과 연관되어 있다. 사념이나 사색의 마음은 요가를 통해 한 점에 집중할 수 있다. 그때 명상이 일어난다. 명상은 마음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그것은 무심 (無心)의 상태이다.

 

그래서 여기에 네 가지 단계가 있다. 사념, 사색, 집중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상이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에게 모든 방향이 열려 있다. 그리고 사색 속에서는 한쪽 방향으로만 열려 있다. 집중 속에서는 방향이 없다. 오직 한 점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명상 속에서는 그 한 점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마음은 존재할 수 없다. 사념은 마음의 일상적인 상태이다. 그리고 명상은 가장 고차원적인 상태이다. 가장 낮은 상태의 마음이 바로 연상작용을 계속하는 사념이다. 그리고 명상은 마음의 절정, 마음의 죽음이다.

 

마음은 생각이다. 무심은 '생각 없음' 이다. 그리고 마음은 자신의 자살을 도울 수 있다. 마음은 자살할 수 있다. 그대는 자살할 수 있다.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자살을 부탁할 수 없다. 자살을 하려면 그대만이 도울 수 있다. 마음 역시 무심의 상태가 되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럼 어떻게 마음이 도움이 되는가? 만약 생각의 과정이 점점 치밀해진다면 그때 그대는 하나의 마음에서

더 복잡한 마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대의 방 안에 가구들을 하나씩 없애는 것과 같다. 가구를 하나도 남김없이 치우고 나면 그 방 안은 하나의 공간이 된다. 사실 공간이라는 것이 가구를 치움으로 해서 창조된 것은 아니다. 공간은 본래 거기에 있었다. 단지 잠시 동안 가구에 의해서 점유된 것뿐이다. 그대가 가구를 치울 때 공간이 밖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그저 공간이 복구된 것일 뿐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깊이 들어가 보라. 무심의 공간이 마음의 조각들에 의해서 점유되어 있다. 마음의 조각들을 하나씩 치우면 그대는 무심의 공간을 다시 복구할 수 있다. 마음의 조각이란 생각을 말한다.

그리고 그 공간이 바로 명상이다.

 

사념은 사색으로 옮겨가야 한다. 사색은 점진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집중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집중 역시 점진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명상의 단계로 뛰어들기에 좋은 준비가 된다. 그때 그대는 한 단계씩 음미하면서 걸어갈 수 있다. 그대가 각 단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지나가면 마지막 점에 이르게 된다. 그런 길은 비상이 아니다. 그것은 점진적인 성장이다. 그래서 여기에 네 가지 단계가 있다. 사념, 사색, 집중 그리고 명상이다.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이 방편들은 단전에 뿌리를 박기 위한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있다.

이 방편들을 통해서 그대는 단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다.

 

13

무한한 허공 속에서 오색찬란한 공작의 꼬리 깃털이 그대의

오감(五感)이 되었다고 상상하라. 이제 그 아름다운 색채가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리고 한 점을 정하여 거기에서 만나게 하고

그 점을 집중하라. 그 점이 허공 속에 있든지 벽 위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다.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하라. 그때 또 다른

것을 향한 그대의 바람이 실재가 되어 나타나리라.

 

14

그대의 신경 전체에 온 주의를 집중시켜라. 연꽃 뿌리 속에 들어 있는

실처럼 섬세한 신경이 척추 속에 있다. 그대의 의식이 척추의 중심에

머무를 때 변형이 일어난다.

 

 

그대는 중심을 갖고 있다. 중심은 거기에 있다. 그대는 중심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대와 존재계를 연결해 주는 다리 없이 어떻게 그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신성에, 혹은 불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리고 매순간 그 뿌리를 통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뿌리는 깊이 묻혀 있다. 어떤 나무든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는 자신의 뿌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대 역시 뿌리를 가지고 있고 그 뿌리가

그대의 중심이지만 그대는 그것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대가 그 뿌리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의 중심을 인식하게 되면 그때 그대의 삶은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삶은 깊은 잠 속에 있는 한편의 꿈이 될 것이다.

 

그대는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이 우주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외계(外界)가 아니다. 그대는 이방인이 아니다. 이 우주는 그대의 집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대의 뿌리를 찾지 못하는 한, 이 우주는 그대와 아무 상관없는 외계로 존재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중심을 자각하지 못하고 산다면, 하나의 아웃사이더로서 산다면 거기에 고뇌가 싹트기 시작한다. 반면에 그대가 주인공이며 우주의 일부이며 존재계 자체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꽃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면, 존재계가 그대를 통해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면, 그대는 지복감을 느낄 것이다. 지복감은 우주와 그대가 유기적인 합일체라는 사실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찾아온다. 그러나 그대가 중심을 알지 못한다면 그대는 샤르트르처럼 '내버려졌다'는 감정을 받게 될 것이다.

생명이 억지로 그대를 살게 한다는 느낌말이다. 그러나 이 중심이 거기에 있지만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를 통해 이 중심에 이르는 방편들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첫째로 인간이 태어날 때 그는 특정한 한 점에 뿌리를 박는다. 그 특정한 점을 '차크라(중심)'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전(丹田)에 있다.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자살을 할 때 이 단전에 비수를 박았다. 그들은 중심이 거기에 있다고 믿었다.

 

어린아이가 사랑이나 따뜻한 온정 속에서 자라지 못하면 그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가슴 차크라가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 가족, 사회, 이 모두는 아이의 가슴 차크라를 개발시키도록 돕는다. 그리하여 그 아이에게는 드디어 가슴 차크라가 개발된다. 하지만 이것은 제 2차 산물이다. 그대가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 개발되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그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의 차크라가 개발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 차크라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진짜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란 쉽지 않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 역시 매우 드물다. 모든 아버지, 모든 어머니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매우 어렵게 얻어지는 성숙이다. 그러나 만약 아이가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스스로 사랑할 수 없다. 인간 사회에 그토록 사랑이 메말라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대는 계속 어린아이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에게 사랑의

차크라를 열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사회가 더 문명화될수록 사랑의 차크라보다는 머리의 차크라, 지적인 중심을 더 강조한다.

 

단전은 근본 차크라이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갖고 있다. 그것은 부차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이 없이는 생명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두 번째 차크라가 생긴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으로서 사랑을 통해 개발된다. 사랑을 받고 그것에 대응할 때, 그 차크라는 점점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차크라는 지적인 차크라로서 그것은 머리에 생겨난다. 모든 논리와 모든 교육이 그 차크라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 부차적인 차크라이다. 헌데 우리는 이 세 번째 차크라에서 살고 있다. 두 번째는 거의 사라졌다. 있다고 해도 기능이 멈춰 있다. 가끔씩 기능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매우 불규칙하다. 그러나 세 번째 차크라인 머리는 이제 삶의 기본적인 힘이 되어 버렸다. 이 사회가 그만큼 지적으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대는 계산하고 사고하고 판단해야 만이 살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조만간에 머리로 그 중심이 옮겨질 것이다. 그대는 머릿속 에서 삶을 시작할 것이다. 머리, 가슴, 단전 이 세 가지는 그대가 갖고 있는 세 개의 중심이다.

단전은 원초적인 중심이며 근본이다. 가슴은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개발되어야 하는 바람직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지성의 차크라도 역시 개발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슴, 즉 감성의 차크라의 대가로 개발되어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감성의 차크라는 그대의 지성과 단전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지성의 차크라만 개발된다면 다시는 단전의 차크라, 본래의 중심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존재의 차크라까지 가는 방편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지성을 통해서, 이해를 통해서 존재까지 나아가야 한다. 단전의 중심은 존재 속에 있다. 가슴의 중심은 느낌 속에 있다. 그리고 머리의 중심은 앎 속에 있다. 앓은 존재와 가장 멀리 있는 것이고 느낌은 존재와 가까이 있다. 만약 그대가 느낌의 중심을 놓치게 된다면 지성과 존재의 다리를 연결하기란 무척 힘들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힘들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지적인 사람보다 더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서양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지성의 차크라를 강조한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인간의 뿌리에 대해서 깊은 향수를 갖고 있다. 시몬느 드 베이유 같은 사람들은 '근원을 향한 열망'이라는 책을 썼다. 서양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문화가 발달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슴보다 머리를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가슴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슴의 고동소리가 그 기능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아주 일부분이다. 가슴은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머리가 알 수 있는 능력을 말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존재는 하나되는 능력을 의미한다.

종교는 존재에 관한 것이다. 시는 가슴에 관한 것이고 철학은 머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가슴과 머리는 본래의 중심은 아니다. 진짜 중심은 아랫배에 있는 단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시 이 본래의 중심을 자각할 수 있을까? 아주 드물지만 가끔씩 그대는 단전에 다가가게 된다. 그때 깊은 지복감을 맛보는 순간이 찾아온다.

예를 들면 그대가 섹스 행위 속에서 단전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왜냐하면 섹스 속에서는 그대의 의식이 다시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대는 머리를 떠나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깊은 오르가즘 속에서 때때로 그대는 단전 가까이 다가간다. 섹스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환상을 갖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지복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은 섹스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단전이다. 섹스 행위를 통해서 짧게나마 그 단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 속으로 깊이 떨어질 때 그대는 단전을 거쳐 간다. 그대는 그것을 만질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것마저 불가능하다. 현대인들은 섹스조차 머리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섹스 행위는 두뇌를 자극하는 것에 불과하다. 섹스에는 지성이 필요 없다. 현대인들은 섹스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그대가 섹스를 생각으로 처리하면 할수록 그것은 악순환이 될 것이다. 섹스조차도 생명력 없이 메마른 것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이미 서양에서 그렇게 되고 있다. 그저 반복적인 지겨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는 낡은 습관을 되풀이할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좌절감을 느낀다. 마치 믿었던 것에 속은 것처럼 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의식이 중심을 향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머리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단전을 통해 갈 때만이 그대는 지복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경우야 어떻든 그대가 단전을 통과할 때 단전은 그대에게 축복을 줄 것이다.

 

니이체는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말했다. 왜인가? 위험 속에서 그대의 의식은 단전으로 내던져지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념을 비우고 앉아 있을 수 없다. 마음을 작동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대는 즉각 행동해야 한다. 위험이 그만큼 매력 있게 보이는 것도 위험 속에서는 일상적인 마음이 그 기능을 멈추기 때문이다. 위험은 깊어진다. 그대의 마음은 필요 없게 된다. 그대는 무심 (無心)이 된다. 드디어 그대는 존재하게 된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마음의 활동인 사념은 사라진다. 그것은 명상의 순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위험을 찾아 다닌다.

그것은 명상의 상태를 원하기 때문이다. 지복의 순간은 갑작스럽게 그대 속에서 폭발한다. 그것은 소나기처럼 내면에서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갑작스럽고 우연하게 터지는 일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대가 지복을 느낄 때마다 그대는 단전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

이번에 나온 방편들은 단전에 뿌리를 박기 위한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있다. 그냥 주먹구구식이 아니고 요행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이 방편들을 통해서 그대는 단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다.

, 이제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의 열세 번째 방편에 들어가자.

 

13

무한한 허공 속에서 오색찬란한 공작의 꼬리 깃털이 그대의 오감(五感) 이 되었다고 상상하라. 이제 그 아름다운 색채가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리고 한 점을 정하여 거기에서 만나게 하고 그 점을 집중하라. 그 점이 허공 속에 있든지 벽 위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다.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하라. 그때 또 다른 것을 향한 그대의 바람이 실재가 되어 나타나리라.

 

이 방편의 의도는 그대로 하여금 내면의 중심에 이르게 하는 데 있다. 만약 그대가 외부에다 하나의 중심을 정해 놓고 그것에 온 의식을 집중해서 바라본다면 그때 그대는 이 세상을 벗어나게 된다. 이 세상 전체를 그대는 잊어버리게 된다. 갑자기 그대는 그대 내면의 중심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먼저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은 하나의 방랑자이다. 그것은 절대 한 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항상 쉴 새 없이 떠다니고 있다.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옮겨 다니면서 언제나 한 곳에 정착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저절로 정착하지는 못한다. 마음의 구조 자체가 움직임이다. 그것은 오직 움직이기만 할 뿐이다.

만약 그대가 어느 한 점에 머무른다면 마음은 그대와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마음은 움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대가 멈추면 마음은 곧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움직임 속에서만 살 수 있다. 마음은 하나의 진행 과정이다. 그대가 멈추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면 마음은 갑자기 죽어 버린다. 그것은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의식만이 남게 된다. 의식이라는 것은 그대의 본성이다. 마음은 그대의 활동이다. 걷는 것과 같은 하나의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어떤 실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마음은 하나의 활동이며 차라리 사념의 흐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대가 걷다가 멈추면 거기에는 더 이상 걷는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리는 그대로 있지만 걷는 행위는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집중할 때 의식은 그대로 있지만 마음이 사라진다. 의식은 다리와 같은 것이다. 의식은 그대의 본성이다. 마음은 걷는 행위로써 하나의 활동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의 소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대는 항상 마음의 명령에 순종해 왔기 때문이다. 그대는 주인이 되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대는 마음이 그대 자신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가 마음을 자신으로부터 가려내지 않는 한 그대는 항상 마음의 노예가 되어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마음의 속임수를 알고 그 굴레를 벗어나라. 마음은 사실 노예이면서 주인인 척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수많은 생을 거쳐 오면서 주인은 노예가 되고 대신 노예가 주인 행세를 해 왔다. 그것은 하나의 믿음이었다.

, 이제 그 반대로 해보라. 지금까지와는 거꾸로 믿어 보라.

탄트라는 경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한한 허공 속에서 오색찬란한 공작의 꼬리 깃털이 그대의 오감(五感) 이 되었다고 상상하라. 이제 그 아름다운 색채가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하라."

먼저 그대의 다섯 가지 감각이 다섯 가지 색채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 색채들이 우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 색채들이 내면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라. 그대 역시 그 색채들과 함께 내면으로 들어가라. 그리하여 모든 색채가 하나의 중심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라. 이것은 단순한 상상이다. 그러나 도움이 된다. 이 다섯 가지 색채들이 그대를 관통해 들어가서 한 점에서 만난다고 상상해 보라.

이들 다섯 가지 색채가 한 점에서 만나게 될 때 전 우주가 해체될 것이다.

그대의 상상 속에는 오직 색채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작의 꼬리 깃털처럼 허공에 펼쳐져 있는데, 그대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한 점에서 만나고 있다. 그 한 점은 어디에 잡아도 좋다. 하지만 단전이 가장 좋다. 그대의 단전에서 다섯 가지 색채들이 모인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전 우주가 그 색채로 구성되어 있다. 그때 그 점을 보라. 그 점에 집중하라. 그 점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집중하라. 그 점은 해체될 것이다.

이 명상 속에서는 오직 색채만이 있다. 그대는 세상 전체를 잊어버렸다. 그대는 모든 대상물들을 잊어버렸다. 그대는 오직 다섯 가지 색채만을 선택했다. 어떤 색이건 그대가 원하는 색을 선택하라. 이 명상 방편은 색채 감각이 뛰어난 사람에게 맞는 것이다. 화가의 눈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색채를 상상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만약 그대가 색채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면 이 방편을 한번 시도해 보라.

 

사물은 상상을 통해 사라지고 이제 상상도 집중을 통해 사라졌다. 그대는 오직 주체로서 남아 있다. 물질적 세계도 사라지고 정신적 세계도 사라졌다. 그대는 오직 순순한 의식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외향성과 내향성의 두 가지 성격이 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내면에서 빛깔들이 한 점에 모이는 것을 상상하기가 훨씬 쉽다. 하지만 내면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오직 외부적인 것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의 마음은 항상 외부를 향해 움직인다. 그들은 내면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들에게는 내면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외향적이라면 그때는 외부에다 한 점을 찍어라. 그 결과는 똑같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 집중하라. 그때 그대는 눈을 뜨고 집중해야 할 것이다. 만약 내면에다 한 점을 찍을 경우에는 눈을 감고해야 할 것이다. 내면에 점을 찍든 외부의 어떤 벽에다 점을 찍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대의 집중력이다. 눈을 뜨고 한 점을 바라보는 경우가 훨씬 사념에 방해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그대가 집중하고 있는 점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때까지 집중해야 한다. 눈을 깜박이지 말라. 깜박이는 그 움직임에 마음이 생각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깜박이는 순간 그대의 집중은 잃어버린다.

 

그대는 달마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인류 역사상 명상의 가장 위대한 스승 중에 하나이다. 그가 어떻게 집중을 했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일화가 여기에 있다. 그는 눈을 깜빡 거릴 때마다 집중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깜빡거리지 않기 위해 눈꺼풀을 베어내었다. 그리고는 그 눈꺼풀을 마당에 던져 버렸는데 거기에서 한 식물이 자라나게 되었다. 그 식물의 이름은 중국식 발음으로 '(Tah )'였는데 그것은 당시 달마가 머물렀던 산 이름이었다. 이 식물이 바로 오늘날의 차(tea: )가 된 것이다. 그래서 차를 마시면 그대의 신경이 각성되는 것이다. 그대의 눈이 깜빡거리면 곧 잠이 들게 된다. 그러면 차 한 잔을 마셔라. 그것은 달마의 눈꺼풀을 달인 물이다. 선승(禪僧)들이 차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차는 보통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달마대사의 눈꺼풀이다.

일본에서는 차의 축제를 연다. 그리고 모든 가정마다 집 안에 다실(茶室)이 있다. 그리고 제사나 종교 행사를 할 때에도 차는 빠지는 법이 없다. 그것은 차 마시는 일이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일본은 차를 마시는 예법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다도(茶道)'라고까지 부른다. 그들은 마치 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다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차가 준비되는 동안 고요히 앉아서 물이 끓는 소리를 듣는다. 또한 차의 향기와 빛깔, 다기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감촉까지 놓치지 않고 느낀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달마의 눈꺼풀을 달여 마시는 것이다. 물론 그 일화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아름다운 일화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그대가 한 점에 집중할 때 그 점이 실제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그대의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 그대가 외부의 점에 집중하고 있을 때 마음은 움직일 수 없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마음은 생존할 수 없다. 그것은 죽는다. 마음이 죽으면 그때 그대는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갑자기 모든 연결 다리가 끊어진다. 마음이 곧 다리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대가 벽 위의 한 점에 집중할 때 마음은 그대에게서 벽으로, 벽에서 그대에게로 왔다갔다 한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마음은 그렇게 해서라도 존재하게 된다. 그때는 아직 그 점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집중을 계속하게 되면 마음은 왔다갔다하는 힘이 점점 약해지고 마침내 그 움직임을 멈춘다. 멈추는 순간 마음은 죽는다. 그때 그대는 그 점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대는 그 점을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단지 빛이 들어오는 하나의 창문일 뿐이다. 마음이 사라진 이상 눈은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눈을 뜨고 있어도 말이다.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면 그때 점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대가 그 점을 볼 수 없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있다.

중심에 이르게 될 때 그대는 그대 존재의 뿌리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존재계와 연결되어 있는 곳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 속에 존재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한 점이 있다. 그것이 바로 중심이다. 그대가 한번만 이 중심을 알게 되면 그대는 집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세계는 더 이상 그대와 상관없는 외계가 아니다. 그대는 이방인이 아니다. 그대는 이 세상에 속해 있고 이 우주가 그대의 집이다. 거기에 더 이상 갈등과 불안이 있을 수 없다. 그대와 존재계 사이에 어떤 불화도 없다. 존재계는 그대의 어머니가 된다. 그대 속으로 들어와서 그대 속에서 꽃피운 것이 바로 존재계이다.

 

이 느낌, 이 감동, 이 환희, 더 이상 거기에 고뇌와 번민이 있을 수 없다. 그때의 지복은 어떤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왔다가 사라지는 어떤 바람이 아니다. 그때의 지복이 바로 그대의 본성이다. 그대가 중심에 이르면 지복의 순간이 닥쳐온다. 하지만 그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황홀한 느낌이 약해져 간다. 그저 고요한 평화만이 흐를 뿐이다. 하지만 그대는 진짜로 행복하다. 그것은 별이 빛나고 강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축복 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일어난 어떤 것이 아니다. 이제 그것이 바로 그대 자신이다.

 

두 번째 방편도 같은 원리 이다. 그 과학적 접근 방식 또한 같다.

그리고 작용 구조 역시 같다.

 

14

그대의 신경 전체에 온 주의를 집중시켜라. 연꽃 뿌리 속에 들어 있는 실처럼 섬세한 신경이 척추 속에 있다. 그대의 의식이 척추의 중심에 머무를 때 변형이 일어난다.

 

이 명상 역시 눈을 감고 수련해야 한다. 탄트라 행자(行者)는 눈을 감고 자신의 척추를 영상으로 떠올려야 한다. 해부학 서적이나 모형을 통해 척추뼈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리 알아 두는 것도 좋다. 그리고 나서 눈을 감고 그대의 척추를 영상으로 떠올려 보라. 등뼈는 곧게 펴고 앉아야 한다. 그리고 척추 속에 연꽃 뿌리의 실처럼 섬세한 신경을 보라. 그것에 집중하라. 그러면 곧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왜인가?

척추뼈는 그대의 몸 전체 구조의 기초이다. 모든 것이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척추(spine)라고 부른다. 그 척추 속에는 연근 속의 실 같은 것이 들어 있다. 해부학에서는 그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척추 속에 있는 실 같은 것을 은줄(silver cord)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대가 아무리 세밀하게 해부를 해봐도 눈으로는 그 은줄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깊은 명상 속에서는 그것이 보인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이다. 그대의 척추 신경 속에 에너지의 코드가 들어 있다. 그것을 통해서 그대는 보이지 않는 존재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보이는 세계, 즉 물질 세계와 그대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연결 다리와 같은 것이다. 그 실을 통해서 그대는 그대의 육체와 연결되어 있고, 또한 그대의 영혼과도 연결되어 있다. 먼저는 척추를 영상으로 떠올려야 한다. 거기에 매우 이상한 점이 있다. 그대가 척추를 연상하려고 하면 그대는 상상으로 그 영상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상상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대는 실제로 그대의 척추를 볼 수 있게 된다.

 

고대 탄트라와 요가학파에서는 많은 뼈들을 그들의 연구 재료로 사용했다. 인간의 두개골에 대해서 탄트라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그것은 내면에 대한 집중에 많은 도움을 준다. 먼저 눈을 감고 자신의 두개골을 영상으로 떠올린다. 그리하여 두개골의 외부부터 차근차근 살펴 들어간다. 그리고는 두개골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점점 자신의 두개골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대의 의식은 조명되기 시작한다. 한번 그대가 내면에 초점을 맞추면 그대는 발가락 끝에서 머리 끝까지 어디로든 탐구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것은 거대한 또 하나의 우주이다. 그대의 작은 육체는 거대한 우주인 것이다.

 

"그대의 의식이 척추의 중심에 머무를 때 변형이 일어난다."

한번 그대가 그것을 느끼게 되면, 그 은줄을 보게 되면 그대는 새로운 빛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 빛은 그대의 척추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온몸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그것은 그대의 몸을 벗어나 있기도 하다. 그때 보이는 것이 바로 '오오라(後光)'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오오라를 갖고 있다. 그러나 보통 그대의 오오라는 빛이 없는 그림자뿐이다. 그리고 그 오오라의 색깔은 그대의 모든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대가 분노할 때 그 오오라는 핏빛으로 채색될 것이다. 그대가 슬프거나 침울할 때 오오라는 어두운 회색이 될 것이다. 그것은 죽음과 가깝기 때문이다. 이 척추 속에 있는 은줄을 깨달을 때 그대의 오라라는 깨달은 사람의 그것과 같아진다. 붓다, 마하비라, 크리슈나, 그리스도 등과 같은 사람들의 초상화는 항상 후광이 그려져 있다. 그들의 척추에서부터 빛이 발산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내면의 중심을 깨달을 때 그대의 몸 전체는 빛으로 가득 차고 넘친다. 그것은 몸

밖으로까지 뿜어 나온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 즉 붓다에게는 그가 누구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 그의 오오라가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자 중 누군가가 깨달았을 때 스승은 그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오오라가 모든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중국에 혜능(慧能) 이라는 선사가 있었다. 그는 흥인(弘忍)이라는 스승이 깨달았다는 소문을 듣고 오랜 여행 끝에 스승은 찾아갔다. 스승은 그를 보자 곧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여기에 뭣하러 왔는가? 그대는 나를 찾아올 필요가 없다." 혜능은 스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혜능은 자신이 아직 스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스승은 다른 것을 보고 말한 것이다. 스승은 커지고 있는 혜능의 오오라를 보고 말했던 것이다. 그의 말은 이런 뜻이다. '그대는 나에게 와서 배울 것이 없다. 조만간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와서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혜능은 이렇게 말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

그래서 그의 스승은 그를 받아들였고 그에게 절의 후원(後園)에서 방아를 찧게 했다. 그 절은 대중이 5백 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 스승은 혜능에게 말했다. "후원에서 일하고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 필요하면 내가 부르겠다." 혜능에게는 어떤 명상도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경전도 읽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홍인은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거기에는 수많은 학자와 명상 수행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제각기 연구나 명상 수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혜능은 쌀 씻고 방아 찧는 일에만 몰두했다. 어느덧 8개월이 흘러갔다. 그 동안 혜능은 한 번도 스승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직 후원에서 스승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다. 그 절에는 수많은 학자와 선승들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혜능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혜능은 누가 보아도 평범한 일꾼이었다.

스승이 곧 입적 (入寂)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누군가가 후계자가 되어야 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깨달은 바를 네 줄의 시로 적어서 내라고 했다. 그 시를 보고서 깨달은 제자를 골라내고 그에게 법맥을 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절에는 위대한 학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신수였다. 모두들 그가 홍인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스승에게 시를 바치지 않았다. 결국 신수 혼자 시를 썼는데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몸은 보리수 이고 마음은 밝은 거울이다. 매일 열심히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 그러나 사실 신수조차도 스승에게 가기를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시는 매우 훌륭한 시였다. 모든 경전의 결론을 담고 있는 시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수는 깨달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경전이었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도 깜깜했던 것이다. 그는 스승을 대면하고 자신이 지은 시를 내보일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밤중에 몰래 스승의 방문 앞에다 시를 붙여 놓았다. 그리고 이름을 써놓지 않았다. 스승이 옳다고 말하면 그때 자기가 썼다고 말할 셈이었다. 다음날 아침 스승은 그 시를 보고는 대중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아주 좋은 시이다. 이 시를 쓴 사람은 깨달았다."

그 말이 떨어지자 절은 온통 그 시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삼았다.

모두들 그 시를 외어서 그 뜻을 음미했고 부엌에서 일하는 승려들조차 그 시를 외우고 다녔다. 그래서 혜능은 그 시가 무슨 시인지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혜능은 그만 웃고 말았다. 깨달았다는 자의 시가 깨달음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혜능이 웃자 그 옆에 있던 한 승려가 물었다.

"자네는 왜 웃는가? 혹시 정신이 이상한 것 아닌가? 자네가 뭐 아는 것이 있는가? 방아나 찧는 주제에."

사실 그때까지 혜능이 웃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벙어리처럼 말도 하지 않고 언제나 일만 했던 것이다. 그때 혜능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글을 쓸 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깨달은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시는 틀렸다. 내가 시구를 불러볼 테니 한번 적어보라."

그러자 승려들은 호기심에서 혜능의 말을 받아 적었다. 혜능의 시는 이런 내용이었다.

"보리수란 본래 없는 것이며 마음 역시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 때가 묻을 것이며 무엇을 닦을 것인가?

승려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그 시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 곧바로 스승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스승은 그 시를 보자마자 누가 지은 시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혜능이 지었다는 말을 듣자 곧 그 시는 틀렸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승려들은 역시 생각했던 대로라고 안심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스승은 모두들 잠든 틈을 타서 후원으로 혜능을 찾아갔다. 혜능이 스승을 맞이하자 스승은 곧 입을 열었다. "너의 시는 깨달은 자의 그것이다. 나는 이 바보들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쓸데없는 지식만 잔뜩 쌓은 바보들이다. 만약 그대가 나의 후계자라고 한다면 아마 그들은 자네를 죽일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달아나라. 그대는 나의 후계자이며 깨달은 자다. 그 증거로 내가 스승께 물려받은 의발을 전해주겠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대의 후광을 보고 그대가 곧 깨달을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서 여기를 떠나라."

 

깊은 섹스행위 속에서 그것은 더욱 쉬워질 것이다. 섹스에 대해서는 그냥 잊어버려라. 그저 깊은 포옹만 하라. 그리고 내면으로 들어가 거기에 머물러라. 그리고 그대의 척추를 떠올려 보라. 그것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때 훨씬 많은 에너지가 척추의 중심 가까이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의 육체가 충분히 이완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은줄은 더 잘 보일 수 있다. 사랑은 가장 깊은 이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을 커다란 긴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그것을 고민 덩어리로,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랑의 따스함 속에서 충분히 이완하라. 그리고 눈을 감아라. 그러나 남자들은 대개 눈을 감지 않는다. 섹스 행위 중에는 여자만이 눈을 감는다. 앞에서 내가 남자보다도 여자가 자신의 몸 속에 집중되어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자들은 눈을 뜨고 진짜 사랑을 나눌 수 없다. 눈을 감아야 내면으로부터 육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눈을 감아라. 몸을 느껴라. 이완하라. 척추의 중심에 집중하라. 그때 탄트라는 말한다. '거기에 변형이 일어난다'고 말이다. 그대는 변형될 것이다.'

 

(질문 )

 

"단전의 차크라를 개발하는 것은 가슴과 머리의 차크라를 개발하는 것과 완전히 별개의 것입니까? 아니면 단전의 차크라를 개발하면 동시에 머리와 가슴의 차크라도 열립니까? 그리고 어떤 것이 단전의 차크라를 개발하는 방법이며 머리와 가슴의 차크라를 개발하는 방법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 주십시오."

 

가슴의 차크라를 개발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사랑과 감수성을 키우는 방법들이 이미 개발되어 있다. 그리고 머리의 차크라도 마찬가지다. 더욱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될 수 있다. 그것은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정서나 감정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존재는 개발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채로 거기에 있다. 단지 재발견할 뿐이다. 많은 의미가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첫째, 그대가 아인슈타인과 같은 머리를 갖기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붓다가 될 수는 있다. 그대가 마쟈누(Majanu)가 되기는 불가능할 수 있다. 그는 가슴의 차크라가 궁극적으로 발달된 사람이다. 그는 어떤 사람보다 연애 방면에 뛰어나다. 하지만 그대는 붓다가 될 수는 있다. 붓다의 불성(佛性)은 개발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자의 소질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불성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는 이미 붓다이다. 단지 모를 뿐이다. 그대는 이미 아인슈타인이 아니다. 그대가 아인슈타인처럼 되려면 무진장 노력해야 한다. 그래도 아인슈타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개인은 재현되지 않는다. 붓다는 개인이 아니다. 붓다는 하나의 현상이다. 어떤 개인적 요소도 붓다가 되는 데는 깊은 의미가 있다. 그대의 존재는 충분히 붓다가 될 수 있다. 중심은 이미 거기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가슴을 열리게 하는 것은 개발이라고 부르지만 단전의 중심을 아는 것은 회복이라고 부른다. 그대는 회복해야 한다. 그대는 본래 붓다였다. 그대는 그사실을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자신이 붓다라는 것을 아는 붓다와 자신이 붓다라는 것을 모르는 붓다들이다. 하지만 모두가 붓다이다. 존재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다. 오직 존재계만이 진짜 공산주의이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공산주의는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아무도 평등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불평등이 기본이다. 하지만 존재계에서 보면 모든 것은 평등하다. 내면에서 본다면 그대는 붓다나 그리스도나 크리슈나와 동등하다.

 

평등은 오직 내면의 차원에서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112가지의 방편들은 단전의 중심을 개발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래서 때때로 그 즉시 붓다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어떤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자신을 한번 바라볼 수 있다면, 자신의 내면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면,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거기에 있다. 오직 한 가지 문제는 어떻게 그대가 이미 붓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관점을 갖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명상은 그대가 붓다가 되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대의 불성을 인식하도록 도울 뿐이다.

 

오늘은 이만!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15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을 손으로 막아라. 그러면 두 눈 사이의

공간에 모든 것이 담겨지리라.

 

16

축복받은 자여, 모든 감각이 가슴속으로 녹아들 때 연꽃의 중심에

이르게 되리라.

 

17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우리가 내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대는 글자만 이해할 뿐이다. 그것의 깊은 의미는 그대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 의미는 경험을 통해서만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글자에는 의미가 없다. 내가 '내면'이라고 말할 때 그대는 글자만 이해한다. 그대는 '내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른다. 단지 글자만 알아들을 뿐이다. 의식을 갖고 그대는 내면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은 끊임없이 외부로만 돌아간다. '내면' 이라는 말에 대한 느낌조차 막연하다. 내가 그대를 보고 피상적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중심이 거기에 있지만 그대는 항상 주변만을 맴돈다. 의식이 없을 때만 그 속으로 깊이 떨어진다. 의식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외부로만 도는데 그것은 그대의 삶이 그만큼 강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미적지근하다. 그대는 죽은 자처럼 산다. 아니 둘 다이다. 죽은 자처럼 살든지 살아 있는 자처럼 죽든지 둘 다이다.

그러나 삶이란 주변에 있어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중심에 설 때만이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주변에서는 미적지근한 삶만이 가능하다. 그대는 힘없는 삶을 산다. 누구한테도 떳떳하고 확신 있게 '삶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진짜로 살지 못한 사람은 진짜로 죽을 수도 없다. 진짜로 살아진 삶만이 진짜로 죽을 수 있다. 그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언제든지 진짜는 아름답다. 하지만 거짓된 것, 흉내만 내는 것은 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대의 삶은 추하다. 그것은 진부하고 썩은 것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언제 어디선가 무언가 일어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은 그저 텅 비어 있다. 과거의 모든 순간이 그러했다. 단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며 미래에 뭔가가 일어나리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대뿐이다. 미래에는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럴려면 그대에게 강렬함이 필요하다. 삶을 꿰뚫어 버리는 강렬함 말이다. 그때 그대는 중심에 뿌리박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더 이상 주변을 맴돌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삶의 동기를 찾게 될 것이다.

 

구제프는 '인간은 개성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사실 개성이란 말 자체가 허구성이 깃든 말이다. 그대는 하나의 인간이 아니다. 그대는 다수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대 속에서 말하면 그것은 순간적인 중심이 된다. 다음 순간 또 다른 중심이 거기에 있다. 매순간마다 그 중심은 바뀐다. 그대가 확신감을 느낀다면 그대는 자신이 단지 하나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중심이 없는 수많은 파장들이 모여서 흘러가는 것이 그대이다. 그래서 그대가 죽을 때 그대의 삶은 하나의 낭비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다. 목적 없이, 의미 없이 떠도는 것이 바로 그대의 삶이다.

탄트라, 요가, 그리고 다른 종교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그 중심을 어떻게 회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떻게 개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매순간 통할 수 있는 중심을 찾고 있다. 그때 삶이 강처럼 계속 흘러가더라도, 파도처럼 왔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하더라도 중심은 언제나 영원히 남아 있다. 그때 그대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이 경전에 나오는 112가지 방편들은 모두 중심을 찾기 위한 것이다. 중심은 항상 거기에 있어 왔다. 왜냐하면 중심 없는 원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은 항상 중심을 갖고 존재한다. 중심이 없이는 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단지 중심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우리는 중심을 바라보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15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을 손으로 막아라. 그러면

두 눈 사이의 공간에 모든 것이 담겨지리라.

 

이것은 가장 오래된 방편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아주 많이 사용된 방법이며 가장 간단한 방법 중에 하나이다. 두 눈과 귀, 입과 코를 손으로 막아라. 그러면 지금까지 계속 밖으로 흘러가던 그대의 의식이 갑자기 그 흐름을 멈춘다. 그대가 관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호흡을 멈추면 갑자기 그대의 마음이 멈출 것이다. 호흡은 마음의 조건이다. 그대는 그 말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 방편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대가 호흡을 갑자기 멈추면 아무런 생각도 진행되지 않는다. 당장 실험해 보라. 마찬가지로 일곱 개의 구멍을 모두 막으면 그대의 지식은 더 이상 외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때 그대의 두 눈 사이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공간이 바로 제 3의 눈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 공간에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그대가 그 공간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한번 그대가 두 눈 사이에 있는 이 내면의 공간을 느끼게 되면 그대는 존재계를 알 수 있다. 이 공간 속에 존재계 전체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를 알게 되면 전체를 알게 되리라."

 

3의 눈이 열리게 되면 에너지가 보인다. 일곱 개의 구멍이 모두 닫혀지는 것은 중심에 서게 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왜냐하면 한번 의식의 흐름이 밖으로 흘러나갈 수 없게 되면 의식은 그것의 근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 의식의 근원이 곧 제3의 눈이다. 그대가 제3의 눈에 집중된다면 많은 것이 일어난다. 첫째는 온 세상이 그대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스와미 람(Swarm Ram)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태양이 내 안에서 돌고, 별들이 내 안에서 운행한다. 달이 내 안에서 뜨고 전 우주가 내 안에 있다."

그가 처음 이 말을 했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별이 람 속에 있을 수 있는가? 그는 제3의 눈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면의 공간이다. 처음으로 내면의 공간 속에 빛이 비춰졌을 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음을 볼 때 그대는 우주가 된다. 3의 눈은 그대의 육체에 속한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적

신체가 아니다. 우리의 두 눈 사이에 있는 공간은 육체 속에 자리잡은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내면을 관통하는 무한한 공간이다. 한번 그 공간이 그대 앞에 펼쳐지면 그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대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거기에는 어떤 죽음도 있을 수 없다. 처음으로 그대가 이 공간을 알 때 그대의 삶은 진짜 삶이 된다.

 

내면의 공간을 안 사람에게는 엑스터시 속에서 이렇게 외친다.

"아함 브라흐마스미! 나는 우주다. 나는 존재계다."

신비주의자 만수르(Mansoor)는 단지 이 제3의 눈에 대한 경험 때문에 살해되었다. 그가 처음 이 내면의 공간을 깨달았을 때, 그는 '나는 신이다.'라고 외쳤다. 만수르의 선언은 반종교적인 것이며 반이슬람적인 것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제까지나 사람은 사람이고 신은 신이다. 사람은 피조물이고 신은 조물주인 것이다. 어떻게 피조물이 조물주가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살해당했다. 그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왜 웃는가? 만수르여!"

만수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 그대들은 나를 죽인다고 하지만 사실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웃는 것이다. 그대들은 나를 죽일 수 없다. 그대들은 이 만수르의 육체에 속고 있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이 우주를 만든 창조주이다. 태초부터 이 우주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바로 나다."

인도에서라면 그의 말이 쉽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인도에서 그런 말은 수십 세기 동안에 걸쳐 내려왔던 말들이다. 사람이 내면의 공간을 알게 될 때 한순간에 그것이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만수르가 죽은 뒤 이슬람교 신비주의자들인 수피들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신상에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수르 사건 이후 수피 전통에서는 스승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너희가 제3의 눈을 깨닫게 될 때 침묵하라. 그때 어떤 것도 말하지 말라. 가족들을 만나더라도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들만 말하라." 그래서 이슬람교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이슬람교이고, 나머지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전의 이슬람교, 진정한 이슬람교이다. 그것이 바로 수피즘(Sufism)이다.

 

이 경전은 말한다.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을 손으로 막아라. 그러면 그대의 두 눈 사이의 공간에 모든 것이 담겨지리라."

그 공간은 우주 전체의 공간이다.

 

내가 지금 그대를 갑자기 밖으로 밀어 내쳐 버리면 그 순간 그대의 생각은 딱 멈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매일 연습한다면 그때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기계적인 습관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연습하지 말라. 그대가 할 수 있을 때 곧바로 해 버려라. 그러면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내면의 공간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내면의 공간은 그대가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될 때만이 그대의 의식으로 들어온다. 그대가 '이제 나는 한순간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라고 느낄 때, '이제 죽음의 순간이 왔다.'라고 느낄 때, 바로 그때가 중요한 순간이다. 그때 견디어 보라. 겁먹지 말라. 죽음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 방편을 수련하다가 죽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이것이 안전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대가 이 방편을 수행하는 도중에 죽을 수가 없는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 직전에 사람은 무의식이 된다. 만약 그대가 의식적이라면 그래서 그대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면 그때는 걱정하지 말라. 그대는 아직도 의식적이다. 그래서 그대는 죽을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죽으려고 무의식적으로 되면 그때 호흡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대는 저절로 손의 힘이 빠질 것이고 더 이상 코와 입을 막고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 방법은 안전한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다.

 

16

축복받은 자여, 모든 감각이 가슴속으로 녹아들 때 연꽃의 중심에 이르게 되리라.

 

이 방편은 가슴 중심인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럼 먼저 가슴 중심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면 이 방편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가슴이 중심인 사람은 모든 것이 가슴으로 연결된다. '왜 당신은 사랑을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대가 머리 중심인 사람이라면 그대는 이러저러한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가슴 중심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그저 사랑할 뿐이다."

그때 그대는 가슴 중심인 사람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이유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때 그대는 머리 중심인 사람이다. 가슴 중심인 사람은 자신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그대 자신을 잘 살펴보라. 그대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머리 중심인지 아니면 가슴 중심인지 말이다.

만약 그대가 가슴 중심인 사람이라면 이 방편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속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가슴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기본적인 욕구이며, 아무도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을 갖고 있지 않다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은 모두 사랑이 넘치는 가슴 중심의 사람이라고 믿지만 그 믿음은 헛된 꿈일 뿐이다. 자신을 살펴보라. 마치 타인을 살펴보듯이 요모조모를 따져보면 자신이 어떤 유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방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란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속일 수 있어도 이 방편을 속일 수는 없다. 아무리 이 방편에 매달려 봐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그대는 곧 느낄 것이다.

 

베다가 편찬되고 힌두교가 생길 무렵 거기에는 가슴 중심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머리 중심의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것과 정반대 상황이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기도할 수가 없다. 기도는 가슴 중심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머리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를 따진다. 반대로 가슴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줄 수 있는가를 항상 생각한다. 이 따스함은 뭔가를 계속 주고 있다는 뜻이다. 생명을 주고, 에너지를 주고, 내면의 진동을 준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그대를 껴안으면 그대는 그와 함께 깊이 녹아들 것이다.

손으로 만져 보라. 눈을 감고서 무엇이든지 만져 보라. 그대의 연인을 만져 보라. 그대의 자녀나 어머니를 만져 보라. 그대의 친구를 만져 보라. 나무와 꽃을 만져 보라. 대지를 만져 보라. 눈을 감고 대지와 가슴으로 대화를 나누어 보라. 그대의 손은 대지의 감촉을 느끼기 위해 펼친 그대의 심장임을 느껴라. 모든 감촉이 그대의 가슴에까지 와 닿게 하라.

그대는 음악을 듣고 있다. 그것을 머리로 듣지 말라. 머리에 대해서는 그냥 잊어버려라. 아예 머리가 없다고 느껴라. 머리가 없는 자화상을 그대의 침실에 걸어두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것을 집중하라. 그대는 머리가 없다. 머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음악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껴보라. 그대의 가슴이 음악과 함께 진동하게 하라. 그대의 감각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결합하도록 하라. 모든 감각이 가슴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용해되도록 하라.

"축복받은 자여, 모든 감각이 가슴속으로 녹아들 때 연꽃의 중심에 이르게 되리라." 가슴은 연꽃이다. 모든 감각은 연꽃의 개화(開花) 인 것이다. 그래서 먼저 그대의 감각을 가슴에 연결시켜라. 그 다음에는 모든 감각이 그대의 가슴속으로 들어와서 흡수된다고 생각하라.

이 두 가지 생각이 확고해지면 그때 감각은 그대를 돕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들은 그대를 가슴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대와 가슴은 연꽃이 될 것이다. 이 가슴의 연꽃은 그대로 하여금 존재의 중심에 이르게 할 것이다.

한번 그대가 가슴의 중심을 알고 나면 그때는 단전의 중심으로 내려가는 것이 매우 쉽다. 사실 경전에서는 여기까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전체적으로 가슴에 흡수되면 그때 사념의 활동은 완전히 멈춘다. 그리고 단전으로 향하는 문이 저절로 열린다. 머리에서 바로 단전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혹은 그대가 가슴과 머리 사이에 어중간하게 있다 해도 그것 역시 어렵다. 한번 그대가 단전에 빠져들면 그대는 갑자기 가슴을 초월하게 된다. 그리고 본래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신은 사랑이다.' 란 말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확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은 문이 된다. 그대가 사랑에 깊이 빠져들 때, 그때 사랑의 대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누군가와 사랑에 깊이 빠질 때, 그때 머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때 가슴은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때 사랑은 기도가 되고 그대의 연인은 신이 된다.

실제로 가슴의 눈은 사랑 외에 다른 면을 볼 수 없다. 평범한 사랑 속에서도 이 일은 항상 일어나고 있다. 만약 그대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은 신이 될 것이다. 그것이 영원하거나 심오한 것은 아니겠지만 단지 한 순간이라도 그대의 연인은 신성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물론 오래가지 않아서 머리는 모든 것을 파괴시킬 것이지만 말이다. 머리는 사랑조차도 무차별하게 처리해 버린다. 한번 머리가 지나가면 가슴이 이루어 놓은 모든 아름다움은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그대가 머리의 방해 없이 사랑 속에 빠져 있을 수 있다면 그대의 사랑은 기도가 되며 그대의 연인은 신성에 이르는 문이 될 것이다. 그대의 사랑은 그대로 하여금 가슴의 중심에 이르게 할 것이며 가슴의 중심에 서게 될 때 자동적으로 단전의 중심으로 떨어지게 되리라.

 

17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붓다는 어느 날 밤 슈로운을 찾아가서 말했다.

슈로운이여, 나는 그대가 입문하기 전에 왕자라고 들었다. 그리고 시타를 아주 잘 연주하는 훌륭한 음악가라는 말도 들었다. 그러면 내가 한 가지 물어보겠다. 그대가 시타를 연주할 때 줄이 너무 느슨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자 슈로운이 말했다.

"그러면 소리가 나지 않아서 연주를 할 수 없습니다."

붓다가 또 물었다.

"만약 줄이 너무 팽팽하면 어떻게 되는가?"

슈로운이 말했다.

"그래도 안됩니다. 너무 팽팽하면 줄이 끊어집니다. 줄은 항상 적당하게 조여져야 합니다. 너무 느슨해도 안되고 너무 팽팽해져서도 안됩니다. 오직 시타의 명인만이 줄을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만이 훌륭한 음악이 나올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붓다는 말했다.

"삶도 그와 똑같다. 너무 팽팽하거나 느슨해서도 안되고 오직 적당해야 한다. 나는 그대를 6개월 동안 유심히 지켜보았다. 삶을 포기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삶을 적당하게 유지하는 것은 오직 삶의 명인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슈로운 그대가 삶의 명인이 되고자 한다면 적당하게 중도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은 무심이 되어야 한다. 마음이 그 기능을 멈추지 않는 한 항상 극단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극단은 마음이 볼 때 환상적으로 보인다. 중도에서는 마음이 죽는다. 시계추를 보라. 시계추는 항상 양극단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계속 움직일 수 있다. 만약 시계추가 중간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오른쪽으로 가려면 일단 왼쪽으로 가서 추진력을 얻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계속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 역시 이와 같다.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그러면 여기서 ' 언제까지나'란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대가 도달할 때까지이다. 마음이 죽어서 궁극에 이를 때까지이다. 마음은 극단에 이를 때 생기를 느낀다. 마음이 중도에 머무르면 그때는 생기를 잃는다. 결국 그것은 죽어 사라지고 무심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쉬워 보이고 간단해 보인다. 아마 그대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만 되면 어떤 후회도 할 필요가 없어진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니 해보라. 그대는 마음이 화를 낸 뒤에 계속 후회를 고집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일상적인 사랑은 싸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마음의 움직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 없는 사랑만이 싸움 없이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붓다는 사랑을 갖고 있다. 그의 사랑은 싸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붓다가 그대를 사랑한다면 그대는 별로 짜릿한 기분을 맛보지 못한다. 붓다의 사랑 속에는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싸움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저 무조건 부드럽기만 하기 때문에 그대는 곧 싫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대의 마음은 뭔가 싸울 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붓다는 화를 내지 못한다. 그는 오직 사랑만 할 수 있다. 그대에게 그의 사랑이 전혀 와 닿지 않는다. 그대는 반드시 양 극단을 함께 느껴야 실감이 나기 때문이다.

 

붓다가 12년만에 처음 고향에 들렀을 때 그의 부인은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을 전체가 그를 맞이했지만 그의 부인 야소다라(Yashodhara)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붓다는 웃으면서 그의 제자 아난다(Ananda)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소다라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잘 안다. 아마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다. 12년은 긴 세월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화가 나 있다.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나를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집에 가서 그녀를 만나봐야겠다."

그래서 붓다는 집으로 갔다. 아난다도 함께 갔다. 아난다는 붓다가 어디를 가건 함께 간다는 것이 입문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붓다 역시 언제나 아난다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에 동의했다. 아난다는 붓다를 따라 왕궁으로 들어갔다. 야소다라의 방 앞에 이르자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가겠다. 그녀는 무척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나와 함께 있으면 그녀로 하여금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

붓다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야소다라는 화산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폭발했다. 울부짖기 시작한 것이다. 붓다는 거기에 그냥 앉아 있었다. 한참을 운 뒤에 그녀는 진정하고 붓다를 쳐다보았다. 붓다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그때 붓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뭔가를 얻었소. 뭔가를 깨달았소. 그대가 진정하게 되면 나는 그대에게 내가 깨달은 진리를 주려고 하오. 나는 그대가 실컷 울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렸소. 12년의 세월은 긴 시간이오. 그대는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오. 그대가 화를 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이것은 아직도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오. 그러나 이 사랑을 초월한 사랑이 또 있소. 그 사랑 때문에 나는 당신을 다시 찾아온 것이오. 뭔가를 말해 주려고 말이오."

그러나 야소다라는 그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고요하기 때문에 느끼기가 쉽지 않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 사랑은 반대 극부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랑과 짝을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사라지면 반대 극부는 저절로 사라진다. 그래서 이 방편은 놀라운 것이다. 그것을 통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한번 해보라. 이것은 그대의 전 생애에 해당되는 경구이다. 그대는 그것을 가끔씩 연습할 수 없다. 그대는 계속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걷든지 머물든지 앉든지 눕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중도에 머물러라. 그러면 그대의 내부에서 고요함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고요함이 그대를 가득 채울 때, 그대는 자신이 중심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대가 한번 그것을 알게 되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중심점은 마음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점은 그대가 지금까지 찾아온 모든 것이다.

 

(질문 )

 

"붓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산야신(출가 수행자)이 되도록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산야신은 먹을 것을 구걸하고 사회로부터 벗어나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붓다 자신도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수도원적 삶은 세속적 삶의 반대극부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중도의 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의 길을 중도의 길이라 부릅니까?"

 

붓다의 길은 중도이다. 붓다는 죽음도 아니고 삶도 아니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산야스(구도행)라고 했다. 삶에 집착하지도 않고 삶에 반대하지도 않는 것, 그저 중도에 머무는 것 이것이 바로 붓다가 말하는 진정한 산야신(구도자)의 삶이다. 그래서 그대가 삶과 죽음에 관계하지 않을 때, 그때 그대는 한 사람의 산야신이 된다. 그대가 삶과 죽음이 양 극단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때 붓다의 길은 중도의 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산야신은 삶에 반대하지 않는다. 만약 삶에 반대한다면 그는 산야신이 아니다. 그는 정신병 환자일 뿐이다. 그는 이미 다른 극단으로 가고 있다. 산야신은 균형 잡힌 의식을 갖고 있다. 그는 중도에 서 있다.

 

삶은 극단에 있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며 죽음 역시 극단에 서 있기 때문에 불행이다. 극단으로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삶과 죽음이 모두 불행이다. 삶이 축복일 때는 오직 중도에 있을 때이다. 축복은 균형이다. 한 사람의 산야신은 균형 잡힌 존재이다. 그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좌경도 아니고 우경도 아니다. 그는 중도에 머물러 있다.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고 어떤 것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오직 중심에 머물러 있다. 죽음을 선택하지 말라. 선택은 불행의 씨앗이다. 만약 그대가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불행을 선택한 것이다. 만약 삶을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불행을 선택한 것이다. 삶과 죽음은 두 가지 극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두 개가 아니다. 하나의 흐름에 양 극일 뿐이다. 그래서 그대가 한쪽 극단만을 선택하면 다른 극단에 대해서는 반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행을 만들어 낸다. 죽음은 삶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죽음을 가려내고 삶만 얻을 수 없다. 삶을 택하는 순간 죽음도 택한 것이 된다. 그래서 거기에 불행이 생겨난다. 그대가 행복을 선택하면 저절로 불행이 거기에 들어 있다. 불행은 행복의 다른 부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사랑을 선택하면 그때 미움도 선택한 것이 된다. 미움이 사랑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그대가 선택한 사람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하지 말라. 중도에 머물러라. 중도가 곧 진리이다. 다른 극단은 죽음이며 또한 삶이다. 그리고 중도에 서서 이 양 극단 사이를 흐르는 에너지야말로 진리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선택하지 말라. 선택은 하나를 원하고 다른 것은 반대한다는 뜻이다. 중도에 머무르는 것은 선택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때 그대는 이 전체를 초월할 수 있다.

 

사람은 선택 때문에 불행해진다. 선택하지 말고 그저 가만히 있어 보라. 그것은 지극히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번 해 보라. 그대가 양 극단으로 흐르려고 할 때마다 중간에 멈추어 보라. 그대는 점점 중도라는 것에 대한 육감이 느껴질 것이다. 물론 그것은 너무나 섬세한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미묘하고 섬세한 것이 바로 그 느낌이다. 그러나 한번만 그대가 확실히 그 느낌을 잡게 되면 그때는 아무것도 그대를 방해할 수 없다. 아무것도 그대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그때 그대는 고통 없이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산야스가 의미하는 것이다. 고통 없이 존재하는 것! 이것은 선택하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붓다는 처음으로 계속해서 중도에 머물 수 있는 방편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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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그대의 전 관심을 방편에다 쏟아라.

결과는 잊어버려라.

결과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방해가 된다.

 

18

어떤 대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라.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말라. 여기

그 대상의 중심 속에 축복이 있다.

 

19

손이나 발로 지탱하지 않고 엉덩이로만 앉아 있어 보라. 갑자기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20

흔들리는 수레 속에서 율동적으로 흔들려라. 수레가 멈추어도 그대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진동 속에 계속 머물게 하라.

 

21

감로수로 가득 찬 그대 육체의 한 부분을 침으로 천천히 찔러 보라.

그리고 찌르는 행위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갑자기 그대는 내면의

순수를 얻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신비스러운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두 가지 차원으로 기능한다. 하나는 외부로 나가는 것인데 그때 그대의 의식은 감각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 물질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차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대의 내면이다. 만약 의식이 외부로 나가면 그때 그대가 아는 것은 물질이다. 그러나 의식이 내면으로 들어오면 그때 그대가 아는 것은 무엇이든지 비물질이다. 실제로 거기에 어떤 구분도 없다. 물질과 비물질은 하나다. 그러나 이 실체라는 X가 눈이나 감각을 통해 볼 때에는 물질로 보인다. 그리고 똑같은 이 X가 감각이 아닌 중심을 통해서 보면 비물질로 보인다. 실체는 하나인데 그것을 보는 방식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감각을 통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감각을 통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방편들은 그대로 하여금 감각이 작동하지 않는 점, 감각을 초월한 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방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그대가 이해해야 할 세 가지 것이 있다.

첫째로 그대가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볼 때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은 단지 창문과 같은 것이다. 보는 주체는 눈 뒤에 있다. 꿈을 꿀 때 그대는 눈을 감고 있어도 영상이 보인다. 보는 자는 감각 뒤에 있다. 그 주체는 감각을 통해서만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감각을 닫아 버리면 그때 보는 자는 내면에 남게 된다. 만약 보는 자, 보는 의식이 중심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그 주체는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깨달을 때, 다시 말해서 존재계 전체를 깨달을 때, 그대는 존재계와 둘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먼저 중심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 그대의 의식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떤 곳으로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체 속에 머무르는 것 말이다. 그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내면에 머무를까?' 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결국 바깥으로 나가려는 하나의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생각이 된다. 그리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외부적인 것이다. 그것은 내면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대의 내면에는 오직 의식만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구름과 같다. 그것들은 그대에게 다가오지만 결코 그대의 것이 아니다. 모든 생각은 외부로부터 나온다. 한 가지 생각도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은 없다. 그래서 그대가 언제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것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가 내면에 대해서 생각하더라도, 그대의 영혼이나 자아에 대한 것이라도 그것은 그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에게 속한 것은, 다시 말해 그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의식뿐이다. 그것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단순한 의식을 내면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직접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몇 가지 방편들이 필요하다.

그 방편들은 그대를 그대의 중심에 이르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직접적으로 그 중심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직접 다가가려고 하는 순간 그대는 외부로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본이기 때문에 그대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그대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대의 연주를 듣고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황홀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 기분을 직접 느끼려 한다면 그대는 음악을 제대로 연주할 수 없게 된다. 황홀한 기분을 느끼려는 욕심이 하나의 장애가 되는 것이다. 행복감은 하나의 부산물이다. 그대는 그것을 직접 움켜잡을 수 없다. 너무나 미묘한 현상이기 때문에 그대는 간접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뭔가를 할 때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영원한 것이라도 그대가 직접 움켜쥐려고 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만다. 방편을 이야기하고 수단을 제어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방편들은 그대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반드시 나타난다. 그러므로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방편에 주의하라. 그대의 전 관심을 방편에다 쏟아라. 결과는 잊어버려라. 결과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방해가 될 수 있다.

행위 속에 그대 전부를 몰입하라. 그럴수록 결과는 더욱 빨리 나타난다.

물론 그 결과는 언제나 간접적이다.

 

18

어떤 대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라.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말라.

여기 대상의 가운데 축복이 있다.

 

"어떤 대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라......."

여기에서 '사랑스럽게'가 열쇠이다. 그대는 사물을 사랑스럽게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렇다'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대는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마 대상을 탐욕적으로 바라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것에서 뭔가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탐욕이다.

아름다운 얼굴이 있다. 아름다운 육체가 있다. 그대는 그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하지만 왜 그것을 바라보는가? 거기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그것을 갖고 싶은가?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탐욕이다. 그대는 그 몸과 얼굴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대의 행복을 위해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말이다. 탐욕은 그대의 행복을 위해 어떤 것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대의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탐욕은 뭔가를 얻는 데 있고 사랑은 뭔가를 주는 데 있다.

 

만약 그대가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서 사랑을 느낀다면 그때는 즉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 얼굴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남자를 혹은 이 여자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사랑에서는 그대 자신을 희생한다. 사랑은 주는 것이며 탐욕은 빼앗는 것이다. 탐욕은 공격적이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은 의미가 없다. 탐욕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대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로 그대가 어떤 사물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면 그 대상은 하나의 인격을 띄게 된다. 그대의 사랑이 그것을 사람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대가 나무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면 그 나무는 사람이 된다.

어느 날 나는 비베크(라즈니쉬의 제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새 아쉬람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모든 나무에 이름을 붙여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무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나무에 사람처럼 이름을 붙여준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무도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에 대해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개나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인다. 그러면 그 개는 하나의 사람이 된다. 그때 그것은 다른 개들과는 달라진다. 그것은 인격을 갖게 된다. 그대가 개를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그대가 어떤 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인간이 될 것이다. 그와 정반대의 경우도 성립된다. 그대가 한 인간을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사람은 사물이 된다. 탐욕의 눈이 그토록 공격적으로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무도 물건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대가 아내를, 혹은 다른 여자를, 혹은 어떤 남자를 탐욕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들은 상처를 받는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물건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를 어떻게 이용할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순간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사람은 대체될 수 없다. 물건은 대체될 수 있다. 한 사람은 그 사람으로서 고유하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같은 사람은 없다.

사랑은 어떤 것을 독특하게 만든다. 사랑이 없으면 그대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깊이 사랑하지 않는 한 그대는 자신의 독특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대는 단지 군중 속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 독특함은 사랑을 통해 일어난다.

경전은 말하고 있다. 어떤 대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라고 말이다. 사랑은 사물과 사람의 구분을 없앤다. 그대가 사랑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그것은 사람이 된다. 그리고 모양까지 다르게 보인다.

사랑의 관계가 형성된다면 어떤 사물도 하나의 인간으로 변한다. 그러나 탐욕의 관계가 형성된다면 어떤 사람도 하나의 사물로 변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중의 하나이다.

사람을 사물로 만드는 것 말이다.

 

"어떤 대상을 사랑으로 바라보라......"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가 어떤 사물을 사랑으로 바라볼 때, 그 다음으로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려라.

한 송이의 꽃을 보라.

그리고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려라. 꽃만 존재하게 하고 그대 자신은 사라져 버려라. 꽃을 느껴라. 깊은 사랑이 그대의 의식에서부터 꽃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대의 의식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 차게 하라. 어떻게 하면 그 꽃이 더욱 아름답게 활짝 피도록 도울 수 있을까를 말이다. 온몸과 마음으로 그 꽃잎 한장 한장을 느껴보라.

그대가 어떤 일을 해내고 못해내고는 별로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꽃을 아름답게 피우기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그대의 간절함, 그대의 아픔인 것이다. 이 생각이 그대의 존재 전체 속으로 퍼지게 하라.

그때 그대는 엑스터시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꽃은 하나의 인간으로 변할 것이다.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말라. "

그대는 갈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사랑의 관계 속에 빠져든다면, 어떤 그룹에서 누군가와 사랑이 시작된다면 그때 그대는 군중에 대해서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얼굴만 남게 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대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림자일 뿐이다. 그리고 오직 그 한 사람의 얼굴만 그대 앞에 떠오른다. 그때 그대는 대상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다. 그대의 사랑과 함께 머물러라. 하나의 심장을 느껴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만 생각하라.

"여기 그 대상의 중심 속에 축복이 있다."

그대가 사라지고 없을 때, 그대 자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렸을 때, 그대의 즐거움은 관심 밖일 때, 그리고 오직 상대방만을 생각할 때 상대방은 그대 사랑의 중심이 된다. 그대의 의식은 오직 그에게로만 흘러간다.

깊은 자비심과 깊은 사랑의 감정으로 그대는 상대방의 행복만을 생각한다.

그 상태에서 갑자기 그대는 축복을 느낀다. 하나의 결과로서 축복은 그대에게 쏟아져 내린다.

갑자기 그대는 중심에 서게 된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보인다. 경전은 여기에서 그대 자신이 중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대는 자신을 아예 완전히 잊어버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로 들어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기도할 때마다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 그러면 그 기도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그리고 기도의 결과가 무엇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득이 되도록 기도하고 축복이 내릴 때는 모두에게 골고루 내리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래서 어떤 사람이 붓다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모두 받아들였지만 한 가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를 할 때 항상 다른 사람만을 위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절대로 기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저한테만 하나의 예외를 만들 수 없습니까? 저에게는 이웃집에 한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는 나의 적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 기도를 통해 축복을 받을 때 그만은 제외시킬 수 없습니까? 마음은 이토록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기도는 아무 쓸모도 없다. 그대가 모든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나누어 줄 수 있을 때까지 되지 않는 한 기도를 통해서 어떤 결과도 바라지 말라. 그러니 모든 것을 나누어 줘라. 그때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 되리라."

사랑 속에서 그대는 자신을 잊을 수 있다. 그대는 어떤 역경과 어려움도 사랑 속에 있을 때는 쉽게 견딜 수 있다. 관심의 초점이 그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중심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그대는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된다. 지복감으로 말이다. 왜인가? 그대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대의 마음은 텅 비워진다. 내면에 공간이 마련된다. 그대의 마음이 전적으로 타인의 행복에만 쏠려 있을 때 그대는 무심의 상태가 된다. 그때는 모든 생각이 멈춘다. 그리하여 상대방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 순간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그대가 여전히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아직도 에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랑에 빠질 때 그대는 완전히 무력감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고뇌란 것이다. 그때 그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대는 모든 것을 하기 원하지만 가능하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 우주를 다 주고 싶지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때 만약 그대가 이것저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완전히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사랑은 무력감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아름답다. 완전한 무력감 속에서 진정한 헌신과 자기 체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대가 누군가를 증오할 때 그대는 뭔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대는 절대적인 무력감에 빠진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의미하고 우스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짜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그대 마음은 그 기능을 멈추고 만다. 그 무력감 속에서 체념이 일어난다. 그때 그대의 마음은 텅 비게 되고 진정한 귀의와 헌신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랑을 심오한 명상이라고 부른다. 진정으로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더 이상 다른 명상이 필요 없다. 그러나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지 않으면 112가지 명상이 필요한 것이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며칠 전에 어떤 구도자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들은 나에게 큰 희망이 됩니다. 나는 처음으로 당신에게서 112가지의 방편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의구심이 일어납니다. '만약 이 112가지 명상 방편이 나에게 모두 맞지 않는다면 그때는 113번째 방편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일리가 있다. 그것은 무리한 억측이 아니다. 만약 이 112가지 방편이 그대에게 모두 맞지 않는다면 그때 그대는 더 나아갈 길이 없다. 그러나 그대가 놓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그대가 사랑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방편도 필요 없다. 사랑은 그 자체로 위대한 방편이다. 그러나 사랑은 일반적인 방편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그대 자신을 그대의 의식 밖으로 내던지는 것을 말한다. 그대의 에고가 자리 잡고 있던 곳에 다른 어떤 것이 들어온다. 그 자리가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마치 이제 그대는 없는 것처럼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쟝 폴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옳다. 타인은 그대에게 지옥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그는 틀렸다. 왜냐하면 타인은 지옥을 만들 수도 있고, 천국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탐욕을 통해 산다면 타인은 지옥으로 그대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타인을 하나의 물건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람을 하나의 물건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 그 사람 또한 그대에게 반항할 것이고 그대를 하나의 물건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면 그 상황은 지옥이 되고 만다.

 

모든 남편과 아내들이 서로에게 지옥을 만들어 준다. 그들은 상대방을 서로 소유하려 하기 때문이다. 소유는 물건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사람은 결코 그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대가 어떤 사람에게 소유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결코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대는 사람을 마치 물건처럼 소유하려고 든다. 결국 그런 행위를 통해 사람은 물건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대를 물건으로 만든다면 그대는 반항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대의 적이 된다. 그때 그대 또한 나를 물건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물건으로 만들 때에 그 행위는 비도덕적이다. 그러나 그대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면 그 순간은 축복이다. 지복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대상의 중심 속에 축복이 있다. "

갑자기 그대는 자신을 잊어버린다. 상대방이 거기에 있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완전히 부재 상태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상대방도 역시 부재 상태로 변한다. 그대와 상대방 사이에 축복이 내린다. 연인들이 느끼는 황홀함이 바로 이것이다. 그 축복은 그대가 명상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점점 그들 모두가 사라져 간다. 어떤 에고도 없이 오직 순수한 존재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완전한 합일이다. 그 합일 속에서 축복을 느낀다. 그대가 만약 축복을 상대방이 그대에게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축복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대가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대는 명상 상태에 의식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때는 그 정도가 더욱 깊어진다. 그대가 대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원리를 알지 못한 그대가 누군가와 사랑을 할 때 축복이 일어나게 되면 그대는 오해하기 시작한다. 그 축복이 그 사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대는 그를 놓치려 하지 않는다. 그를 꼭 붙들어 두고 싶어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와 함께 있으면서 그를 통해 축복을 느끼면 그대는 불행을 느낀다. 그대는 이제 축복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제 그대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가버릴지 모른다. 그래서 그대는 질투하게 된다. 결국 그대는 그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조치를 단단히 취한다. 완전히 그를 소유하려 한다. 그대는 오직 그를 통해서만 축복의 순간을 맛볼 수 있다는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소유되는 순간 사랑은 사라져 버린다. 그때 사람은 하나의 물건이 된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축복은 이제 다시 그대를 찾아오지 않는다. 축복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대접받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때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대 역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를 물건으로 만들면 그 역시 그대를 물건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오직 사람끼리 만났을 때에만 거기에 신성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소유 관계 속에서는 축복이 불가능하다. 마음은 사랑보다는 탐욕적으로 기능한다. 마음은 이렇게 생각한다.

'언젠가 축복이 일어났었다. 그러니 이제 그 축복은 매일 내게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그를 소유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축복의 순간을 다시 맛볼 수 없다.

 

축복은 그대가 사라질 때, 사랑하는 사람 속으로 그대가 녹아들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상이 꼭 사람이 아니라도 가능하다. 한 송이 장미꽃이나 하나의 바위와도 그대가 사랑에 빠진다면 축복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한번 그대가 그 원리를 알게 되면 그대는 언제 어디에서든지 지복의 순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대의 의식이 깊은 사랑 속에서 사람이나 나무, 하늘, , 그 어떤 것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자신을 완전히 벗어난다. 그때 그대의 의식에는 에고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에고가 사라지는 순간 거기에 축복이 일어난다.

 

19

손이나 발로 지탱하지 않고 엉덩이로만 앉아 있어 보라.

갑자기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방편은 중국의 도교 수행자들에게 널리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운 방편이다. 조건만 맞으면 가장 쉬운 방편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대도 한번 해보라.

먼저 그대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 그대는 매우 예민한 몸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실 그대는 거의 감각이 죽어버린 몸을 갖고 살아왔다. 그것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대의 몸을 섬세하고 예민한 몸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대의 엉덩이는 몸에서 가장 감각이 무딘 부분이다. 하루 종일 엉덩이로 앉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엉덩이가 손가락처럼 민감하다면 그때는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엉덩이는 매우 무뎌졌다. 발바닥처럼 말이다. 그래서 먼저 그대는 엉덩이를 예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긴장을 풀고 의자에 앉아라. 팔걸이가 있는 의자면 더욱 좋다. 그리고 눈을 감아라. 그리고는 왼손이나 오른손 중에 하나를 느껴보라. 오른손잡이는 왼손이 좋다. 왼손을 느끼는 동안에는 왼손 외에는 몸 전체를 잊어버려라. 오직 왼손에만 감각을 집중시켜라. 그러면 왼손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계속 무거워진다고 생각하라. 생각할수록 더욱 무거워질 것이다. 마치 왼손이 그대 자신인 것처럼 오직 왼손만 느껴라. 그러면 왼손은 갈수록 무거워진다. 그리고 나서 왼손에서 어떤 감각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 어떤 감각이 일어나든지 하나하나를 놓치지 말고 주목하라.

이런 식으로 적어도 3주 정도를 매일 계속하라. 하루 중 어느 때라도 좋다. 매일 10분이나 15분 정도만 해보라. 3주가 지나기 전에 그대는 왼손이 완전히 바뀌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왼손의 촉각은 굉장히 예민해졌다. 그래서 왼손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각마저도 놓치지 않게 되었다. 그대가 왼손에 대해서 성공을 거두면 그때부터 엉덩이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해보라. 먼저 눈을 감고 바닥에 앉는다. 그리고 엉덩이 두 짝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라. 그대는 엉덩이이다. 그대의 모든 의식이 엉덩이에 집중되도록 하라. 그것은 어렵지 않다. 그대가 시도한다면 놀라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몸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하나의 축복이다. 그대가 엉덩이만을 느낄 수 있을 때 그대는 매우 예민해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일어나는 감각들을 모두 관찰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촉감이나 미세한 고통마저도 말이다. 그때 그대의 의식은 엉덩이와 하나가 된다.

침대에 누워서 몸 전체를 잊어버려라. 그리고 오직 엉덩이에만 감각을 집중하라. 침대 시트의 차가운 감촉을 느껴라. 혹은 욕조 속에 누워서 온몸을 잊어라. 오직 엉덩이만을 느껴보라. 혹은 벽에 기대어 서서 엉덩이 부분만 벽에 대고 벽의 차가움을 느껴보라. 사랑하는 사람끼리 엉덩이를 서로 대고 있어 보라. 엉덩이를 통해서 무엇이 전달되는지 느껴보라. 이것은 그저 그대 엉덩이의 감각을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방편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라.

 

"손이나 발에 의지하지 않고......"

맨 땅 위에 앉아라. 손이나 발로 땅을 짚지 말고 붓다의 자세인 연화좌(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보라. 혹은 달인좌(반가부좌)의 자세로 앉아도 좋다. 그리고는 눈을 감아라. 엉덩이가 대지에 맞닿는 촉감을 느껴보라. 그대는 엉덩이의 감각이 매우 예민해져서 엉덩이 두 쪽 중에서 어느 한쪽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무게 중심을 한쪽 엉덩이에만 쏠리게 하고 다른 쪽 엉덩이는 땅에 닿지 않게 해보라. 그리고는 상체를 옆으로 흔들면서 양쪽을 번갈아 땅에 닿게 해보라. 어느 순간 그대는 완전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된다. 균형이 잡혔다는 것은 그대의 엉덩이가 양쪽 모두 같은 양의 느낌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대의 몸무게가 양쪽 엉덩이에 정확하게 배분되었다는 뜻이다. 엉덩이의 감각이 예민해지면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엉덩이의 균형이 완전히 갖추어지면 그 순간 그대는 갑자기 중심에 이르게 된다. 그 균형 때문에 갑자기 그대는 단전의 중심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엉덩이에 대해서 잊어버릴 것이다. 그대 몸 전체를 잊어버릴 것이다. 그대는 내면의 중심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중심(center)'중심에 이르는 것(Centering)'과는 다르다. 중심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머리의 중심, 가슴의 중심, 엉덩이의 중심, 그 어떤 부분이라도 중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심에 이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단전의 중심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대가 붓다의 앉은 모습을 볼 때 그 모습이 양쪽 엉덩이가 균형을 잡은 것이라고는 아마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대는 사원이나 절에 가서 마하비라나 붓다가 앉아 있는 조각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엉덩이의 균형을 잡고 있는 모습인 줄은 모른다. 그대 역시 그렇게 앉을 수 있는 순간 그대는 단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20

흔들리는 수레 속에서 율동적으로 흔들려라. 수레가 멈추어도 그대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진동 속에 계속 머물게 하라.

 

이것 역시 방식만 다를 뿐 같은 이치이다. 그대가 기차를 타고 가거나 혹은 우마차를 타고 갈 때 이 방편을 실행해 볼 수 있다. 이 방편은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던 그 옛날에 발견된 것이지만 아직도 인도의 시골에서는 여전히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닌다. 그런데 수레가 흔들릴 때 그대의 의식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 깨어 있지 않으면 이 방편을 이용할 수 없다. 그래서 그대는 '율동적으로 흔들려라' 라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그대가 보통 수레를 타고 다닐 때 무의식적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려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움직여지는 힘에 대해서 저항한다는 말이다. 만약 수레가 왼쪽으로 기울면 그대는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수레가 오른쪽으로 기울면 왼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몸이 한쪽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계속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수레를 타고 가면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으로 기울면 그대는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이것이 첫 번째 요점이다. 그대가 이 방편을 실행하려 한다면 저항하지 말라. 흔들리는 대로 몸이 쏠리는 대로 그저 쏠리고 흔들려라. 수레와 하나가 되라. 어떤 저항도 하지 말라. 어린아이들이 여행을 해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거기엔 싸움이 없다. 저항이 없다.

"흔들리는 수레 속에서 율동적으로 움직일 때......"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어떤 저항도 하지 마라.

그리고 나서 두 번째로는 한 가지만 하라. 그것은 하나의 율동을 만드는 것이다. 그대의 움직임에서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조화가 되게 하라. 길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길을 탓하지 말고 길을 닦지 않은 정부도 비난하지 말라. 그 모든 것들을 다 잊어버려라. 그리고 나서 눈을 감고 그대의 움직임에 박자를 붙여라.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어라.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경전에 나온 것처럼 보이지 않는 회전을 만들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회전하도록 그대를 방치하라. 회전을 만들어라.

원을 그려라. 처음에는 그 원을 크게 만들어라. 그리고 나서 그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라. 그 다음에는 그 원을 점점 작게 만들어라. 그대 몸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질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대 내부에서는 계속 섬세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커다란 원에서 시작하라. 눈을 감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그대도 멈추게 될 것이다. 눈을 감고 큰 원을 그리면서 회전하면 그대가 주저앉을 때에도 계속 머리 속은 돌아가고 있다. 앉아서도 그냥 있지 말고 계속 그 회전을 돌려라. 회전의 반경이 작아질수록 그대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아무도 그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내부에서는 계속 미세한 회전, 진동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움직여라. 그리고 그 움직임의 속도를 점점 늦춰라. 그러면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구제프는 이 방편을 근거로 많은 춤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에게 전수받은 제자들의 춤은 전부 회전무용들이다. 그들은 회전을 계속하면서 춤을 춘다. 그리고 나중에는 회전이 오직 인식으로만 계속된다. 점점 그 회전의 폭을 적게 만들어서 몸이 동작을 멈춘 뒤에도 마음은 회전을 계속한다. 그대가 20시간 정도 기차를 계속 타면 집에 와서 누워 있어도 기차를 타고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처럼 회전을 계속하면 몸이 회전을 멈추었을 때에도 마음속에서는 회전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대가 몸을 땅에 던져서 완전히 쓰러지더라도 내부에서는 회전이 계속된다. 그것을 느껴라. 회전은 계속된다. 구제프는 이 회전무용을 개발했다. 그는 금세기에 이르러서 많은 기적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명상 무용을 위해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는 그 춤을 뉴욕 시민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무대 위에서 회전무용을 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관중들 역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제프가 갑자기 '스톱!'하고 외치자 일제히 그들은 회전을 멈추었다. 그 스톱은 무용수에게 뿐만 아니라 청중들에게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청중들도 동작을 완전히 멈추어 버린 것이다. 거기에는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회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보기에도 아름다운 광경이다. 백 명의 무용수들이 한꺼번에 계속 춤을 추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어 버렸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대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춤이 멈추는 순간 그대의 생각도 멈춰 버릴 것이다.

이 일은 뉴욕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공연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생각이 멈추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어느 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백 명이나 되는 무용수들이 모두 무대의 맨 앞쪽 끝에 가서 회전을 해 나오고 있었다. 한 걸음만 더 움직이면 모두 떨어질 판이었다. 모든 청중들은 구제프가 스톱을 외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서 담배에 불을 붙인 뒤에 다시 무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용수들은 구제프의 명령이 없자 그대로 춤을 멈추지 않고 일제히 무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높이는 키보다 훨씬 높았고 바닥은 단단한 돌이었기 때문에 관중들은 너무나 놀랐다. 관중들은 너무나 놀라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무용수들이 뼈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상을 당한 무용수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구제프에게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지 물었다.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높은 데서 돌바닥으로 떨어졌는데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구제프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들은 떨어지는 순간에 육체 속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내면의 회전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구제프는 그때 떨어져도 그들이 자신들의 육체를 관찰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이 떨어지는 것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육체를 관찰할 수 있게 되면, 그래서 거기에 어떤 저항도 없다면 어느 정도의 높이로는 잘 다치지 않는다. 높은데서 떨어져 뼈가 부러지는 것은 저항하기 때문이다. 떨어질 때 그대가 중력에 저항하면 그때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대가 중력과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룬다면 다치지 않는다. 경전은 말하고 있다.

"흔들리는 수레 속에서 율동적으로 흔들려라. 수레가 멈추어도 그대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진동 속에 계속 머물게 하라."

그대도 할 수 있다. 수레가 필요 없다. 그저 어린아이들처럼 두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회전해 보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돌아라.

만약 그대가 쓰러진다 해도 걱정할 일은 없다. 쓰러지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다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쓰러져서라도 눈을 감고 있어라. 그대는 계속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심으로 점점 다가가다가 어느 순간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이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터득한다. 그들은 계속 빙글빙글 돌다가 땅바닥에 쓰러져서 회전의 관성이 주는 느낌을 즐긴다. 그것은 육체는 그대로 있는데 의식은 계속 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사리 느낄 수 없는 중심에 이르는 느낌을 어린아이들은 회전을 통해 느낀다. 그들의 육체와 의식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명상은 이미 붙어버린 육체와 의식 사이에 하나의 간격을 만드는 것이다. 그대는 너무나 단단하게 그대의 육체에 고정되어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육체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간격이 생긴다면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자신이 육체가 아니며 육체를 초월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몸을 흔드는 것이나 회전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것들은 그대와 의식 사이에 간격을 만들어 낼 것이다.

 

21

감로수로 가득 찬 그대 육체의 한 부분을 침으로 천천히 찔러 보라. 그리고 찌르는 행위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갑자기 그대는 내면의 순수를 얻게 될 것이다.

 

그대의 육체는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그대-야말로 감로수인 것이다. 그대의 육체를 관통하라. 그대가 육체를 찔러도 그대는 찔리지 않는다. 오직 육체만이 찔릴 뿐이다. 그러나 그대는 마치 그대 자신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만약 그대가 육체만이 찔릴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대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고통 대신에 축복을 느낄 것이다. 굳이 바늘로 찔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은 매일 일어나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하나의 명상으로 만들 수 있다. 어떤 고통이 그대의 몸속에서 일어난다. 그때 그대가 할 일은 딱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육체 전체를 잊어버리고 고통을 느끼는 부분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만약 그대가 다리가 아프다고 느끼면 다리에 집중하라. 그러면 다리 전체가 아픈 것이 아니라 무릎이 아픈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또 그 무릎에 집중하라. 그러면 무릎 전체가 아픈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점이 아픈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점점 범위를 좁혀 들어가라. 갑자기 그 한 점은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대는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그대와 그대의 육체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픈 것이 그대가 아니라 집중하는 것이 그대이다. 아픈 것은 육체라고 하는 하나의 사물이다. 그대가 고통에 집중할 때 그대와 육체 사이의 간격은 점점 넓어진다. 그대와 육체 사이에 이어졌던 동일시의 끈이 끊어졌다. 그대가 내면으로 집중해 들어가는 동안 그대의 육체와는 점점 멀어진다. 그 움직임이 하나의 간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고통에 집중할 때 그대는 자신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이제 그대는 관찰자가 되었다. 그리고 고통은 그대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 그대는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관찰하고 있다. 그대는 오직 의식만을 인식하고 있다.

"육체의 어떤 부분을 침으로 찔러 보라. 그리고 그 찌르는 행위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만약 거기에 고통이 있다면 그때는 먼저 고통스런 부분에 집중하라.

그러면 그 부분은 침이 들어가는 한 점으로 축소될 것이다.

먼저는 감각이 예민한 곳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는 그곳을 침으로 찔러 보라. 동시에 찌르는 행위 속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명상이 되는 부분이다. 침이 그대의 피부 속으로 들어갈 때 주의력을 집중하라. 고통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순간 그 고통을 느껴라. 그리고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가 보라. 고통이 그대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말라. 고통과 그대를 동일시하지 말라. 침과 함께 몸속으로 들어가라. 눈을 감아라. 고통을 관찰하라. 고통이 그대 속에 들어올 때 그대 역시 그대 속으로 들어온다. 침 끝이 그대를 찌를 때 그대의 마음은 쉽게 집중된다. 예리한 침을 사용하라. 강렬한 고통을 이용하라. 그것을 지켜보라. 그것이 바로 '찌르는 행위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의 뜻이다.

"그러면 내면의 순수를 얻게 되리라."

만약 그대가 관찰할 수 있게 되어 고통이 그대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침 끝이 그대를 찌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곧 내면의 순수를 얻게 될 것이다. 내면의 순수는 그대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자신이 육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와 육체는 별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번 그대가 그런 경험을 하면 그대의 삶은 완전히 변한다. 지금까지 그대 삶의 초점은 그대의 육체에 매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대가 육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이상 똑같은 삶을 계속 할 수는 없다. 그런 삶은 중심이 없는 삶이었다. 그대가 육체가 아닐 때 그대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낸다. 그런 삶이 바로 산야신, 구도자의 삶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삶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제 그대는 하나의 영혼으로서, '아트만'으로서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육체로 존재한다면 그때 그대는 물질과 탐욕, 성적 욕망에 매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육체에 집중된 삶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대가 비밀을 안 이상 그런 삶을 계속 꾸려갈 수는 없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은 의식에 집중된 삶이다. 아름다움과 선함과 자비가 넘치는 삶이 될 것이다. 그 중심은 육체가 아니라 의식인 것이다.

 

(질문 )

 

"만약 깨달음과 삼마디(三味)가 전체의식, 혹은 우주의식이라면 그때 그것은 약간 이상하게 보입니다. 우주의식이라면 그것은 전 우주에 퍼져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중심에 이른다.'는 것은 한 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왜 중심에 서 있는 상태를 우주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중심에 이르는 것은 하나의 길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이지 결과가 아니다. 삼마디는 중심에 이르는 것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중심에 이르는 것은 삼마디를 얻는 과정이다. 물론 깨달은 사람에게는 중심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모순처럼 보인다.

야콥 뵈메(Jacob Boehme)는 사람이 신성에 이를 때 그 상태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말했다. 한 가지는 모든 곳이 중심이며 다른 한 가지는 아무데도 중심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둘 다 같은 뜻이다. 단지 '중심에 이른다.'는 말이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길은 목적이 아니며 수단은 결과가 아니다. 수단은 얼마든지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112가지 방편이 중심에 이르는 여러 가지 수단이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 한번 그대가 중심에 이르게 되면 그대는 폭발할 것이다.

 

왜 중심에 이르는 것은 폭발의 방법이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대가 중심에 이르지 않으면 그대의 에너지는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폭발할 수 없다. 그냥 흩어져서 퍼질 수는 있다. 하지만 폭발할 수는 없다. 폭발은 거대한 에너지의 응집이 필요하다. 폭발은 이제 그대가 더 이상 다른 데로 새어나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대는 한 점에 응축되어 있다. 그대는 영적 핵폭탄이다. 그대가 중심에 이르게 될 때만이 그대는 폭발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히 핵폭발인 것이다. 그 폭발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그것에 이르는 방편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결과는 이야기할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제대로 방편을 따르면 결과는 자동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폭발 자체를 말로 표현할 길은 없다.

이 점을 기억하라. 기본적으로 종교는 그것의 궁극적인 경험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종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방편뿐이다. 그것은 어떻게-는 표현할 수 있지만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다-는 오직 그대에게만 남아 있다. 만약 그 대가 '어떻게'를 할 수 있다면 -무엇이다-는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다. 그대만이 알 수 있을 뿐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가 아무 소용없는 무한(無限)의 경험이다. 그것을 나타낼 만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붓다는 그가 깨달은 후 40년 동안 계속 이렇게 말해 왔다.

"진리에 관해서 나에게 묻지 말라. 열반에 대해서 묻지 말라. 그런 것들에 대해서 어떤 것도 묻지 말라.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길을 보여줄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그대들에게 경험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더구나 언어를 통해서는 더욱 불가능하다. "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방법은 그렇지 않다. 방법은 과학적인 것이며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경험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며 시적인 것이다. 만약 그대가 방편을 올바르게 수행한다면 그 결과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과가 중심에 이르는 것이 되지 않을 때에는 뭔가가 잘못되었다. 어디에선가 그대는 중요한 과정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중심에 이르게 하는 과정은 과학적이다. 그리고 폭발이 그대에게 일어날 때 그것은 언제나 개인적이며 시적인 것이다. 시적인 표현을 통해 그대가 경험한 것을 그대 나름대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표현이다.

만약 그대가 깊은 공감대를 갖고 있다면 뭔가를 전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깊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떤 것이 전달될 때마다 그것은 전달자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첫째로 그것은 표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표현되더라도 그대가 비판적이라면 그때는 전달이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어떤 교류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 교류는 너무나 섬세하게 이루어진다. 112가지 방편 전부가 암시로 일관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시바(Shiva)는 항상 이런 식으로 말했다.

"이것을 하라. 그러면 축복이 일어나리라."

그 다음에는 침묵했다. 축복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축복, 체험, 폭발, 이런 것들은 모두 개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표현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거의 99퍼센트는 오해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바는 침묵했다.

그는 방법론만 말했다. 그러나 중심에 이르는 것은 끝이 아니다. 그저 길일뿐이다.

 

왜 중심에 이르게 되면 결국 폭발로 이어지는가?

그것은 거대한 에너지가 한 점에 모아지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몰리는 순간 그 한 점은 에너지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폭발하는 데까지는 과학적이다. 그것은 단순한 과학 법칙이다. 만약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는 아직도 중심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외가 없다. 그대가 한 번 중심에 이르면 즉시 폭발이 일어난다. 거기에는 어떤 시간의 간격도 없다.

에너지가 흘러 나가고 나면 그대는 에너지가 텅 빈 상태가 된다. 그것은 그대가 불능상태에 빠진 것이다. 죽음이 그대에게 오기 전에 이미 죽은 상태이다. 죽은 세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끊임없이 에너지를 외부로 흘러 보내고 있다. 에너지의 양이 얼마나 되든지 그대는 잠시 후에 텅 빈 상태가 될 것이다. 에너지가 흘러 나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대는 매순간 죽어 가고 있다. 오직 인간만이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고 변형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모든 것이 죽는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은 불멸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대는 이 모든 것을 한 가지 법칙으로 집약시킬 수 있다. 에너지가 외부로 흘러 나간다면 죽음은 그것의 자연스런 결과이며 그대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모르게 될 것이다. 그대는 오직 천천히 죽어가는 것만을 알 수 있다. 살아 있음의 강렬함을 결코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대는 에너지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밖으로 흘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흘러 들어와 응집되고 폭발하여 변형이 일어나야 한다.

에너지는 그대가 중심에 서 있을 때 흘러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는 그대의 중심을 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단전에 있다. 단전은 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폭발이 일어난다. 폭발이 일어나면 그대는 더 이상 개체가 아니다. 다시 전체 속으로 들어간다. 새로운 탄생이 일어났다. 그대는 코스모스와 하나가 된 것이다. 이제 그대는 어떤 중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대는 ''라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어떤 에고도 없다. 붓다나 그리스도가 '' 라는 말을 쓰긴 하지만 그것은 그저 형식적인 것이다. 그들은 어떤 에고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전체이다.

붓다가 임종을 맞이하는 날, 그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산야신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그래서 붓다가 물었다.

"그대들은 왜 우는가?"

누군가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붓다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40년 전에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깨달음을 얻는 날 죽었다. 40년 동안 ''라고 하는 중심이 없었다. 그러니 울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 지금 누가 죽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라는 말을 쓰는 것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들에게 말해 주기 위해 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내부로 흐르게 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의 존재 목적이다. 어떻게 에너지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까? 이 방편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중심에 이르는 것은 삼마디가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경험이 아니다. 단지 궁극적인 경험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며 문이다. 중심이 사라지는 그 순간 삼마디의 체험이 일어난다. 그래서 중심에 이르는 것은 단지 통로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유일한 문이며 유일한 통로이다.

 

그대는 지금 중심에 이르지 못했다. 그대는 지금 여러 개의 중심을 갖고 있다. 진짜로 그대가 중심에 이를 때 그대는 오직 하나의 중심만 갖게 된다. 그때 에너지는 방향을 바꿀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의 귀향(Homecoming)이다. 그때 그대는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난다. 그러면 다시 중심이 사라진다. 하지만 이전처럼 여러 개의 중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이제 중심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코스모스, 전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 이제 그대는 곧 존재계가 되었다. 예를 들어 하나의 빙산이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다. 빙산은 자신의 중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다와 분리되어 하나의 개체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바닷물과 빙산이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나누어진 것이다. 만약 온도만 같다면 빙산은 자동적으로 녹아서 바닷물이 된다. 그러면 더 이상 빙산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

 

그대와 붓다 사이에, 예수와 예수를 죽인 자들 사이에,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 아르쥬나는 빙산이고 크리슈나는 바다이다. 그 본성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아르쥬나는 스스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느끼며 고립된 개체라고 생각한다.

이 중심에 이르는 방편들을 통해서 온도가 변하면 빙산은 녹을 것이다. 그때는 오직 바다만이 존재한다. 바다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삼마디이다. 그것은 전체와 하나 됨의 느낌이다. 그것은 사념과 다르다. 그대가 중심에 이르기 전에도 얼마든지 삼마디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그대는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모른다. 단지 그것에 대해 얻어 들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직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것에 대해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문제는 그것이 그대에게 일어나야 한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바다만이 있다. 존재는 하나의 방편이며 삼마디는 그 끝이다. 삼마디 중에 일어나는 것은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바는 매우 과학적이다. 그는 이야기하는 데 관심이 없다. 그는 마치 전보 내용처럼 꼭 필요한 말만 한다. 한 마디도 필요 없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삼마디를 표현하는 말은 그저 '경험, 축복, 그것'등이다.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것'은 설명될 수 없다. 그대가 어떤 일상적인 경험도 다른 사람의 설명을 통해서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대가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과일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그 과일에 대한 맛을 설명하면 어떤 맛이라는 기분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가? 물론 그대는 이해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대가

직접 그 과일을 맛보면 이전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모든 경험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로 전달될 수 없다. 굳이 말로 표현하게 되면 더욱 혼란스럽게 될 뿐이다. 그런데 현대의 언어분석학자들은 종교란 모두 넌센스라고 한다. ‘왜 뭔가를 경험했다면 그 경험을 표현할 수 없는가?’라고 묻는다.

그들의 관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종교적 경험은 제쳐두고라도 일상적인 경험마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단지 뜻 없는 수식어만 나열하는 것뿐이다.

고타마 붓다는 깨달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과는 깨달음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는 방편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었다. 그대는 장님과 빛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에게 아무것도 전달해 줄 수 없다. 그는 날 때부터 장님이었기 때문에 빛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었다. 그대는 하늘이 푸르다고 말하겠지만 장님은 푸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장님이 아니라도 그렇다. 그대가 푸르다고 하는 경험과 그가 푸르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경험이 어떻게 같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푸른 것에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있다. 외부적인 일도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난 일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을 마치 무슨 열병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다. 루소는 젊음이 인간의 삶에서 절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젊음은 사랑이라고 불리는 병에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은 사랑이 모든 의미를 잃어버릴 만큼 충분히 늙은 뒤에라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그대가 지혜롭게 되도록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느낌이다. 사랑을 또 다르게 느끼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진짜로 현명한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킬 것이다. 그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 체험의 깊이가 깊을수록 강렬할수록 그는 언어를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붓다에게 신에 대해서 묻자 붓다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신에 대해서 말이 많은 사람은 신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그저 침묵했다. 그리고 그가 어떤 마을에 들어갈 때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말라. 그대들은 다른 모든 것을 물어도 된다. 하지만 신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

사랑에 대해서도 표현할 수 없는데 어떻게 신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때 어떤 표현을 해도 그것은 해가 된다.

시바가 경험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두 번째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된다 해도 그것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탐욕적이어서 어떤 것이 부분적으로 표현되는 순간 그 부분에 집착해 버린다. 그리고는 마음은 방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그 결과에만 매달린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힘들고 지루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노력이 말이다. 그런데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고 그런 결과가 생기기를 꿈꾸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며칠 전에 이곳에 있었다. 그는 아주 나이가 많은 산야신이었다. 그는 30년 동안 구도자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 그는 거의 70살이 되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나는 정말로 알고 싶은 몇 가지 물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오?"

그러자 갑자기 그는 말을 바꾸어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나는 단지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내가 알만한 것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그는 계속 상상을 해 왔다. 축복, 신성에 대한 경험, 깨달음 같은 것을 말이다. 이제 그는 노년이 되어 죽음은 가까이 다가와 있었고 모든 상상력과 지식을 동원해서 자신의 견해를 정립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경험했다면 그때는 침묵을 지키시오. 나와 잠시 동안만 함께 있어 보시오. 거기에 어떤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안절부절 했다.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고 칩시다. 그러니 나에게 그것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모른다고 치는 것은 있을 수 없소. 당신이 알든지 아니면 모르든지 할 뿐이오. 그 부분에서 분명하시오. 만약 당신이 안다면 그때는 침묵을 지키시오. 그리고 여기에서 잠시만 지내시오. 그런 뒤에 돌아가도 좋소. 그러나 당신이 모른다면 그때는 분명히 모른다고 말하시오. 그것이 그대 자신에게 유익할 것이오."

그때 그는 당황했다. 사실 그는 나에게 몇 가지 방법이나 물어 보러 온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나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함 브라흐마스미 (나는 브라흐만이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사실 나는 30년 동안 밤낮으로 그것을 생각해왔는데 말입니다."

 

무엇이 지식이고 무엇이 경험인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것을 서로 혼동 한다 그대의 지식이 경험이라고 느끼기가 쉽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간교하고 속이기를 잘한다. 그래서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 하다. 시바가 경험에 대해서 말을 해 놓았다면 그때는 모두들 그 설명을 흉내낼 것이다. 하지만 시바가 아무 말도 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는 그를 속일 수 없다. 이 책,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들 중의 하나인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바이블도, 베다도, 기타도 이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책이 오직 방편들만을 말하고 있을 뿐, 결과에 집착하는 그대의 탐욕에 어떤 가능성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은 결과에 집착하기를 원한다. 마음은 방편에는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웬 방편들이 이렇게 많습니까? 성자 까비르(Kabi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하지 삼마디 브하리!’ 이것은 저절로 엑스터시가 일어나게 하라는 뜻입니다. 자연스런 엑스터시가 좋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방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만약 그대가 '사하지 삼마디 (자연스런 삼마디)'를 성취했다면 그것은 좋다. 그때는 어떤 방편도 필요 없다. 그런데 왜 그대는 여기에 왔는가?”

그가 말했다.

"나는 아직 그 삼마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하지 삼마디'가 좋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또 물었다.

"왜 그것이 더 좋다고 느끼는가? 혹시 아무런 방편도 필요 없이 그저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아닌가?"

 

()의 가르침이 서양에서 황당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선의 스승들은 아무 노력 없이 성취하라고 말한다. 물론 그들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대는 이 점을 놓치지 말라.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경지, 즉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대가 더 이상 어떤 노력도 기울일 수 없을 만큼 많은 노력이 있은 뒤에야 그대는 무위의 경지에 이른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했다. 그들은 논리에는 맞지 않지만 어쨌든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고 깨달을 수 있다는 말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것'은 자연스럽게 꽃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옳다. 하지만 그대가 문제이다. 그대는 결코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대는 끊임없이 뭔가를 하려고 한다. 그대의 마음은 항상 천방지축으로 뛰논다. 그러면서 어떻게 자연스런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리는가? 먼저 그대가 자연스럽게 되라. 그대 자신이 먼저 무위의 상태가 되라. 그러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대에게 찾아올 것이다.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는 폴 렙스(Paul Reps)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책을 저술했는데 그것은 '선육선골(Zen Flesh, Zen Bones)'이라는 책이다. 그리고 그 책의 부록 편에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가 들어있다. 그리고 이 112가지 방편들은 '선보다 앞선 것'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자 많은 선의 추종자들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선은 아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믿어 왔고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는 오직 노력이 필요한 방편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선은 노력도 방편도 필요 없다고 믿어온 사람들에게 '선보다 앞선 것' 이 아니라 '선에 반대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겉으로 보면 그들이 옳다. 하지만 깊게 들어가면 그들은 완전히 오해를 하고 있다. 자발적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나긴 수행의 여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제프의 수제자인 오스펜스키(P.D. Ouspensky)는 그 길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단지 그 길에 이르는 몇 발자국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 길()은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벌써 그대가 그 길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 길조차 그대에게는 아주 멀리 있다. 그대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보자면 말이다. 그래서 그대는 먼저 그 길에 당도해야 한다. 오스펜스키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길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스럽게 무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발성, 즉 사하지 요가(sahal Yoga)는 그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대가 아무리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자발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대에게서 어떤 자발성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대에게는 사랑조차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 역시 하나의 거래이다. 사랑조차 하나의 노력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자발적인 폭발을 통해 우주와 하나가 된단 말인가? 먼저 그대는 인위적인 행동, 모든 거짓된 태도, 모든 선입관과 알음알이들을 던져 버려라. 오직 그때만이 자발적인 것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방편들은 그대로 하여금 무위(無爲)의 상태로 이르게 해 줄 것이다. 단지 그대의 존재만으로 충분한 상태 말이다. 그런데 마음은 또 속임수를 쓸 수 있다. 마음은 항상 그대를 속일 것이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크리슈나무르티 역시 어떤 노력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는 명상을 하는 데 어떤 방법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의 말도 옳다. 그러나 시바는 여기에서 112가지의 명상 방편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시바 역시 옳다. 만약 그대가 시바와 크리슈나무르티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려면 그때는 시바를 선택하라. 크리슈나무르티는 그대에게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다. 그대를 돕는 데 있어서는 크리슈나무르티가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그는 해롭다. 아무리 그와 함께 토론을 많이 해도 그대는 삼마디에 들지 못한다. 그대는 맞지도 않는 결론, '어떤 방편도 필요 없다.'라는 생각만 더욱 강하게 고집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방편이 필요하다. 방편이 필요 없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아직 그 순간은 그대에게 오지 않았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미리 뭔가를 안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시바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그 순간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슈나무루티는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쓸데없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그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 그의 논리는 정확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방편도 필요 없다는 것을 사랑에 비유해서 말한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사랑을 미리 연습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거짓이 된다. 사랑은 미리 연습할 수 없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명상을 하는 것은 마음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방편을 행할 때는 마음이 그것을 한다. 그렇다면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 마음을 이용한단 말인가?

그의 논리는 이처럼 정확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논리를 듣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는 저절로 깨달음의 경험이 찾아오지 않는다. 크리슈나무르티는 50년 동안 그렇게 말을 하고 다녔지만 나는 아직 한 사람도 그가 말하는 조건에 이른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이것은 명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명상의 결과가 아니라 방편에 대해서만 배울 수 있다. 결과에 대해서만 안다는 것은 두 발이 허공중에 떠있는 것과 같다. 그대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대는 방편을 통해 답을 알아내어야 한다. 방편도 거치기 전에 미리 답을 아는 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잘못된 선입관과 편견만을 갖게 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단지 관념적으로 이해한 것일 뿐

어떤 축복이나 엑스터시도 없다. 하지만 그대는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무지 방편을 통과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그대는 그 축복의 순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시바의 연인인 데비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시바는 오직 방편만을 가르쳐 주었다. 질문이 거기에 있다. 방편도 거기에 있다. 그대는 방편을 통해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중심에 이르는 것은 방편이다. 답이 아니다. 답은 우주의식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을 경험하면 더 이상 어디에도 중심은 없다.

 

오늘은 이만!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금세기 가장 위대한 탄트라 행자인

게오르그 구제프는

인간의 유일한 죄는 동일시(同一視)이다

라고 말했다.

여기의 방편은 동일시에 대한 것이다.

 

22

과거의 일을 회상하라. 그때 그 상황과 그대의 모습에 집중하고 현재의

모습은 잊어버리면 거기에 초월이 일어나리라.

 

23

그대 앞에 한 물건이 있다. 그것의 충만한 실재를 느껴라.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다. 오직 그것만이 실재 한다고 느껴라. 그리고 나서 그

두 가지 느낌, 부재감과 실재감 둘 다 떠나라. 그리고 실현시켜라.

 

24

어떤 사람을 반대 하거나 찬성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기분을

그에게 투사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중심에 머물게 하라.

 

금세기 가장 위대한 탄트라 행자인 게오르그 구제프(George Gurdjieff)'인간의 유일한 죄는 동일시 (同一視)이다'라고 말했다.

첫째로, 그대가 어린 시절을 하나의 꿈처럼 바라볼 수 있다면 그대는 현재의 상황도 다음날에는 꿈으로 바라볼 것이다. 지금 그대가 늙었다 해도 임종시에 돌이켜보면 그것 역시 꿈이다. 어린 시절 한때가 그대에게 꿈으로 다가오듯이 말이다. 그래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과거와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면 말이다. 그 속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하나의 구경꾼으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미래 역시 구경꾼의 입장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대가 미래에 대해 어떤 상상을 하든지 말이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현재 일어나는 상황 역시 하나의 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여기에 틈바구니가 생겨난다. 그대의 의식이 현재를 구경할 때 분명 의식은 시간의 일부가 아니다.

그대의 의식은 영원이다. 어떤 공간이 거기에 있고 그대는 그것을 마치 꿈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대의 모든 과거는 무엇인가? 거기에 틈이 있다. 공간이 거기에 있다. 과거를 하나의 꿈으로 보라. 이제 그것은 꿈이다. 그대의 과거는 기억일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이 실재인지 꿈인지는 증명하기 어렵다. 증명할 방법이 없다. 기억은 그것이 실재인지 꿈인지 말해줄 수 없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나이가 들면 종종 꿈과 현실을 착각하는 증세가 있다고 말한다. 어린아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항상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 모른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 꿈속에서 갖고 놀았던 장난감이 제 손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그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잠시 시간이 지나면 그대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안다. 만약 꿈속에서 누군가가 그대를 죽이려 한다면 꿈을 깨어나서도 여전히 가슴이 떨린다. 심장이 마구 뛰고 얼굴이 붉어진다. 아직도 공포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꿈이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어떤 꿈은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쁘다. 그럴 때는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워서야 별일 없음을 확인하고 비로소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 있다.

 

그대가 과거를 꿈이라고 생각하고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재 상황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분명 그대의 의식은 하나의 방관자로서, 관찰자로서 따로 존재해 있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 상황과 자신을 동일시해 버린다.

시간 속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이든지 꿈과 같다. 그대가 그것에서 손을 떼지 않는 한, 그것과 동일시를 끊어 버리지 않는 한 그대는 축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동일시는 불행이다. 비동일시는 축복이다.

 

22

과거의 일을 회상하라. 그때 그 상황과 그대의 모습에 집중하고

현재의 모습은 잊어버리면 거기에 초월이 일어나리라.

 

이것은 아주 기초적인 방편이다. 특히 붓다가 많이 사용한 방편이다.

이 방편에는 많은 유형들이 있다. 그대는 자신의 방식대로 그 방편에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대가 잠에 떨어지기 전 그날의 기억을 역순으로 더듬어 나간다. 그러면 하루의 일과를 모두 기억하게 되고 아침에 일어나서 처음 있었던 일까지 더듬어 간다. 그때 그대는 거기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오후에 누군가가 그대에게 욕을 했다. 그대 자신을 보라.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는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그러나 그대는 어디까지나 구경꾼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만약 그대가 화를 내면 그때 그대는 동일시한 것이 된다. 그대는 명상의 요점을 놓쳐 버렸다. 화를 내지 말라. 그는 그대를 보고 욕을 한 것이 아니다. 오후의 그대 모습에 대해서 욕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그대는 강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그대라고 하는 고정된 틀이 없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그대는 하나의 모습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낮에 있었던 일을 밤에 회상할 때 이미 그대는 하나의 방관자로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화내지 말라. 누가 그대를 칭찬해도 즐거워하지 말라. 마치 영화를 보듯이 그냥 보라. 매일 밤 이렇게 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불면증이나 악몽을 꾸는 사람에게는 더욱 좋다. 불면증, 몽유병, 그리고 악몽에 시달리는 이유는 그대의 마음이 늘어질 대로 늘어졌기 때문이다. 아침에 그대는 탄력성 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 때문에 그대의 마음은 탄력성을 잃어버렸다. 잠자리에 들어서 잠을 자기 전에 하루의 일을 되새겨 보라. 그러면 다시금 그대의 마음은 탄력성을 되찾을 것이고, 그대는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어린아이처럼 깊이 잠들 수 있게 된다.

 

그대는 이 회상법으로 생애 전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마하비라는 이 회상법을 사용해서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미국에서는 이 회상법을 '심리요법 (Dianetics)'이라고 부르는데 하나의 정신 운동처럼 퍼져 나가고 있다. 그들은 그대가 만일 병이 나면 그 병은 그대의 과거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그들의 말은 옳다. 그대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 나가다 보면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문제들이 숨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풀어주면 그대의 병은 말끔히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많은 성공적인 사례로 증명된 바가 있다.

그대는 매일 이 방편을 수행할 수 있다. 지나간 하루를 다시 되돌아보는 것은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해줄 것이다. 마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의 차례대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기억하라. 그때는 아무것도 풀어야 할 문제거리가 드러나지 않는다. 저녁부터 아침으로 시간을 거슬러 가라.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모든 것을 깨끗이 해결할 수 있다. 그대는 다시 생기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저녁의 일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아침으로 건너뛰지 말라. 그냥 하나의 흐름처럼 천천히 거슬러 가라. 그대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훈련시킬 수 있다. 100부터 1까지 역순으로 세어 보라. 99, 98, 97,,,,... 계속해 보라. 처음에는 약간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마음은 항상 1부터 100까지 세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그대는 이 방편을 실행해 보라.

경전에서는 '그대'라고 하지 않고 '그대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대는 결코 거기에 없다. 항상 개입되는 것은 그대의 모습이다. 그대는 결코 개입되지 않는다. 이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하라. 그대가 나를 욕할 때 그대는 나의 존재를 욕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모습, 나의 껍질을 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껍질에서 나를 분리시킬 수 있다. 그대의 이름도 그대가 아니고, 그대의 모습도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이름과 모습을 인식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의식은 다르다. 그대가 한번만 그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현재 벌어지는 상황도 지켜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처음부터 현재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거기에는 급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유 공간이 너무 없다. 그대는 즉시 모든 사건에 대처해야 한다. 동시에 그와 멀리 떨어져 지켜봐야 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과거의 일을 회상하라고 말한다. 우선 과거를 회상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그대의 모습을 구경하라. 지켜보라. 그 속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이 홀로 존재하는 의식을 인식하게 되면 그때 초월이 일어나리라. 그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대는 이것을 통해 변형될 수 있다. 그것은 그대의 모든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육체, 마음, 시간 속에서의 그대 존재, 이 모두가 그대의 실체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대의 본질적인 실체는 다르다. 모든 일이 벌어지지만 그대의 실체는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한 의식으로 남아 있다. 선과 악, 성공과 실패, 칭찬과 비난, 질병과 노화, 탄생과 죽음, 그 모든 일들이 왔다가 지나가지만 그대는 결코 변치 않는 순수한 의식이다.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고 영향 받지 않는다. 그대가 어느 정도 이 방편에 숙달되면 일주일 치의 과거를 주말에 회상할 수 있다. 그때는 한적한 장소가 좋다. 하루 휴가를 내어 한적한 교외로 나가라. 나무 아래나 해변에 누워 태양과 모래를 느끼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라. 그리고 일주일 치에서 멈추지 말고 계속 그대의 과거 전부를 회상해 보라. 그대가 기억해 낼 수 있는 마지막 것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말라. 그대는 놀랄 것이다. 평소에 그대는 4,5세 때까지의 기억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그런데 그대는 망각의 장벽을 뚫고 들어간다. 그대는 이 방편을 통해 점점 장벽을 뚫어 갈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가 태어나는 날까지 다가갈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계시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모래와 태양의 현실 속으로 돌아오라. 그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좀더 노력한다면 자궁의 장벽까지 뛰어넘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보낸 9개월 간의 기억도 회상할 수 있다. 그것 역시 마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대의 어머니가 침울할 때 그대 역시 침울함을 느꼈다. 그대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모두 그대에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녀가 화가 나면 그대 역시 화가 났다. 그녀가 행복할 때 그대 역시 행복했다. 그녀가 칭찬을 받으면 그대 역시 우쭐해졌다. 그녀가 아프면 그대는 고통을 느꼈다. 그대 역시 우쭐해졌다. 그녀가 아프면 그대는 고통을 느꼈다. 그대의 기억이 자궁 속에 있었을 때까지 꿰뚫을 수 있다면 이제 그대는 제대로 들어섰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자궁에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서도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오직 이 기억 때문에 마하비라와 붓다는 전생의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환생이란 하나의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깊은 심리적 체험이다. 만약 그대가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오기 전의 순간에 대해서 기억할 수 있다면 그때에는 더 많은 과거의 전생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그 방법에 익숙해지면 그대는 쉽게 다른 전생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경험이다. 나는 지금 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방편을 충실히 수행하면 점차 그대는 수많은 전생을 알게 될 것이고, 지금도 과거와 똑같이 넌센스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양식을 반복하고 있다.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인가? 그대는 이제 자각해야 한다. 모든 것이 꿈이란 것을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똑같은 전철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욕망이란 과거가 미래로 투사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기에 욕망은 멈추게 된다. 욕망이란 그대의 과거 경험을 또 다시 반복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대가 상황 전체를 알지 못하는 한 그대는 욕망을 떠날 수 없다. 어떻게 그것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과거는 거대한 장벽, 바위 장벽으로 거기에 있다. 그대의 머리 위에 있다. 오직 그대를 미래로만 향하게 밀고 있다. 욕망은 과거에 의해 만들어지고 미래 속으로 투사된다. 만약 그대가 과거를 꿈으로 알 수 있다면 모든 욕망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낙엽처럼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와 동시에 미래도 사라져 버린다. 그때 그대는 초월하게 된다.

 

23

그대 앞에 한 물건이 있다. 그것의 충만한 실재를 느껴라.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다. 오직 그것만이 실재한다고 느껴라. 그리고 나서 그 두 가지 느낌, 부재감과 실재감 둘 다 떠나라. 그리고 실현시켜라.

 

그대 앞에 하나의 대상이 있다. 예를 들면 장미꽃 한 송이가 있다. 무엇이든지 좋다. 우선 그것을 느껴라. 그대는 한 송이의 장미꽃을 본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는 흐느끼거나 울부짖을 것이다. 혹은 웃거나 춤출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단지 보고만 있을 뿐이다. 보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대는 결코 완전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은 말한다. 이것은 장미다. 그대는 그냥 지나친다. 그대는 그것을 진정하게 본 적이 없다. 마음은 그것이 장미라고 말해준다. 그대는 장미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 그래서 그대는 장미를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 장미에 대해 과거의 기억만 떠올리면 굳이 현재 존재해 있는 장미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보는 것조차 완전하지 않다. 장미와 함께 남아 있으라. 그것을 보고 그것을 느껴라.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아 보라. 그리고 만져 보고, 뺨에 대어 보라. 가슴에 대어 보라. 장미를 느껴 보라.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려라. 온 세상을 잊어버려라. 그대 앞에 있는 장미만이 존재한다고 느껴라. 아직도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다면 장미를 철저하게 느끼지 못한 것이다. 오직 장미, 장미, 장미밖에 없다.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려라. 오직 장미꽃 한 송이만 남겨 두라. 장미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라.

이것은 우리가 예민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들은 쉽게 그것을 느낄 것이다. 남자들은 시인이나 예술가처럼 심미적인 감각이 없다면 좀 어렵다. 그러나 해보라. 아이들 또한 매우 쉽게 할 수 있다.

나는 이 방편을 내 친구 아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매우 쉽게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그에게 장미 한 송이를 주면서 지금 한 말을 그대로 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내 말대로 했고 깊이 들어가서 즐겼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느끼고 있니?"

그가 말했다.

"나는 이제 장미꽃이 되었어요."

바로 그 느낌이다. 아이들은 매우 쉽게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절대로 훈련시키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가장 뛰어난 명상가들이 될 수 있었다. 다른 사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려라. 오직 그것만을 느껴라. 이것이 사랑에 빠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대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면 그대는 온 세상을 잊어버린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 거기에 있다. 내가 사랑이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대는 이 방편을 사랑의 기술로 사용할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며칠 전에 한 친구가 그의 아내와 함께 왔다. 그의 아내는 어떤 것에 대해 불평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온 것이다. 그 친구가 말했다.

"저는 일 년간 명상을 해왔는데 이제는 제법 깊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저는 명상의 절정에 이르면 갑자기 '라즈니쉬, 라즈니쉬, 라즈니쉬' 하고 외치는 것이 제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아내와 사랑을 한창 나누다가 절정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라즈니쉬, 라즈니쉬, 라즈니쉬' 하고 외치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제 마누라는 산통이 다 깨진다고 불평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나와 사랑을 하는 거예요? 아니면 명상을 하는 거에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갑자기 왜 라즈니쉬를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가 상당히 어렵게 됐습니다. 그렇게 외치지 않으면 절정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누라는 그 말만 들으면 김이 샌다며 마구 바가지를 긁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그의 아내가 불평하는 것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이 프라이버시를 필요로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랑은 절대적인 프라이버시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어떤 대상과도, 장미꽃이나 바위와도 그대가 깊은 사랑에 빠지면 온 세상을 잊어버린다. 그때 조건은 그 대상만이 현존하고 다른 대상들은 모두 사라지도록 느끼는 것이다. 그대가 자연적으로 사랑에 빠지면 그것은 쉽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대가 돌이나 바위를 두고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선사들은 그렇게 한다. 그들은 명상을 위해 정원에 바위를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돌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그들은 돌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돌과 사랑에 빠지면 그때는 사람이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이제 그대는 사랑에 빠진 그 대상마저도 떠나야 한다. 경전에서는 부재감과 실재감 둘 다 떠나라고 말한다. 오직 이 바위, 이 장미꽃, 이 여자, 이 남자만이 존재했다.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이것마저 떠나게 되면 갑자기 그대는 텅 빈 허공 속에 떨어진다. 그리고 시바가 말한 '실현하라'는 말은 이 허공(虛空)을 실현하라는 뜻이다. 이 무()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본질이며 순수한 존재이다.

() 나 공()에 직접 접근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그대는 하나의 대상을 통해서 접근하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속에 하나의 대상을 정하고 그 대상에만 몰입하라.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려라. 그대의 의식이 오직 하나의 대상으로만 가득 차게 될 때 그것마저 떠나라. 그것마저 잊어버려라. 그대는 심연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 어떤 대상도 말이다. 오직 그대라는 주체만이 있다. 깨끗하고 물들지 않은 순수한 존재만이 있다. 그것은 순수 의식이며 그대의 본질, 그대의 실체이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것은 실재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첫째 실재감을 완전히 느끼는 데는 며칠 아니면 몇 주가 걸릴 것이다. 그때 한 가지 대상을 정해놓고 그것에 대해 계속 집중하라.

대상을 바꾸지 말라. 처음 정한 대상을 끝까지 집중하라. 만약 그대가 장미꽃을 정했다면 끝까지 장미꽃만을 집중의 대상으로 삼아라. 그리고 매일 아침 '나는 이제 장미꽃이다'라고 말하라. 이렇게 해서 며칠이 지나면 그대는 점점 장미꽃에 밀착된다. 그러면 억지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장미꽃만 생각해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때 갑자기 오직 장미꽃만 남고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진다. 온 세상이 사라진다. 이것이 첫 단계이다.

만약 그대가 첫 단계를 확실히 거쳤다면 둘째 단계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장미꽃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무()를 위해서 장미꽃을 잊을 수 있다. 첫째 단계는 그대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음은 항상 조급하기 마련이다. 그대가 첫째 단계를 연습할 때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이것은 준비에 불과하다. 빨리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라.' 하지만 첫째 단계를 확실하게 거치지 않으면 둘째 단계는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첫 단계를 완성하라. 그리고 나서 둘째 단계로 넘어가라. 그러면 대상은 더 이상 거기에 없다. 오직 그대의 의식만이 빛처럼, 순수한 불꽃처럼 남아 있다.

 

그대는 등잔을 갖고 있다. 그 등잔의 불빛이 여러가지 사물에 비추어져서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대의 방 안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많지만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그대의 등잔이 빛을 발하면 모든 것이 보인다. 이제 그 사물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나면 오직 빛만 남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방편을 통해서 마지막에 남게 되는 그대의 의식이다.

그대의 의식은 빛이며 불꽃이다. 이 세상은 방안의 사물이다. 그대는 먼저 하나의 대상을 골라 집중하라. 그러면 다른 물건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남은 대상마저 버려라. 그러면 갑자기 의식만이 남게 될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니르바나' 라고 불렀고, 마하비라는 '카이발리아' 라고 불렀다. 우파니샤드는 그것을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의 체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시바는 이 한 가지 방편만을 수행할 수 있어도 지고의 존재를 실현하게 되리라고 말한다.

 

24

어떤 사람을 반대하거나 찬성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기분을 그에게 투사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중심에 머물러 있게 하라.

 

만약 누군가에 대해 증오나 반대 감정이 일어나면, 혹은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면 그때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그 감정을 그 사람에게 투사한다. 만약 그대가 나에게 증오를 느낀다면 그대는 증오의 감정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하지만 경전에서는 말한다. 그대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지 말라고 말이다.

기억하라. 그대는 그런 감정의 원천이다. 예를 들어 내가 그대를 사랑할 때 대개의 사람들은 그대가 내 사랑의 원천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전혀 반대이다. 내 감정의 원천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대는 그저 영사막에 불과할 뿐이다. 내 감정을 투사하는 스크린인 것이다. 그대는 사랑의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면서 '당신이야말로 내 사랑의 원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허구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사랑 에너지를 끌어올려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그때 상대방은 그대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 만약 그대 사랑의 근원이 그대의 연인에게 있다면 그때는 그대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대의 연인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대의 연인을 쳐다보고 반하는 사람은 그대 외에 아무도 없다. 이게 무슨 일인가? 결국 그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그대의 감정을 투사하고 그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밀월'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때 달은 꿀처럼 달게 느껴진다. 그 달빛을 받은 온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놀라운 밤이다. 기적적인 밤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에게만 그러하다. 이웃집 사람에게 물어보라. 달이 그토록 황홀하고 아름다운지 말이다. 달은 변하지 않았다. 그대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달은 그저 그대의 감정이 투사되는 영사막일 뿐이다.

경전에서는 말한다. 그대가 어떤 기분을 느낄 때 그것을 타인에게 투사하지 말라고, 오직 그대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거기에 머무르라고 말이다. 기억하라. 그대 자신이 그 감정의 원천이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근원으로 가라. 그대가 증오를 느낄 때 대상으로 눈길을 던지지 말라. 증오가 생겨나는 그 점으로 들어가라. 그것은 그대 속에 있다. 그대의 증오나 사랑, 분노 등의 감정을 근원에 이르는 내면의 여행으로 삼아라.

 

이것은 매우 과학적인 심리요법이다. 만약 그가 붓다에게 가서 욕을 한다면

그는 붓다에게서 아무런 분노도 촉발시키지 못한다. 만약 예수에게 간다면 예수는 그에게 다른 뺨을 내어 줄 것이다. 만약 달마대사에게 간다면 큰소리로 웃어젖힐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근원이 아니다. 근원은 언제나 그대 속에 있다. 타인은 그 근원에 자극을 줄 뿐이다.

물이 가득 찬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서 퍼 올리면 물이 담겨 나온다. 두레박은 단지 물을 퍼 올리는 역할만 할 뿐이다. 두레박이 물의 근원은 아니다.

 

모든 감정이 그 근원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대가 화를 내려는 순간 그것이 기회이다. 그때 그 근원으로 들어가기가 쉽다. 왜냐하면 그대가 화를 내는 순간 그대는 뜨겁다. 열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 뜨거운 통로를 따라 내면으로 들어가면서 시원한 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갑자기 전혀 다른 차원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대 앞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분노를 사용하라. 증오를 사용하라. 그리하여 내면으로 들어가라. 우리는 항상 타인을 탓하며 감정을 외부로만 투사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근원도 없다. 결국 공허함을 느끼고 좌절한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아름다운 일화 하나가 생각난다.

장자는 강에서 홀로 나룻배를 타고 명상에 잠기곤 했다.

어느 날 그는 여느 때처럼 눈을 감고 배 위에 앉아서 한참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어떤 배가 그의 배를 부딪쳐 왔다. 장자는 화가 불쑥 치밀었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무례한 사람이다. 내가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의 배에 일부러 충돌한단 말인가?’

그는 화를 내면서 눈을 떴다. 그리고 배를 보면서 막 소리를 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배는 비어 있었다. 아무도 타지 않은 빈 배였다. 그저 강물을 타고 그냥 떠내려 온 것이다. 순간 장자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대가 빈 배를 향해 화를 낸다면 그대는 분명히 미친 사람이다. 후에 장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눈을 감았다. 분노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분노와 함께 그냥 떠내려갔다. 그리하여 빈 배 때문에 나는 근원에 이를 수가 있었다. 캄캄한 밤중을 헤매던 나는 내면의 빛에 도달하게 되었다. 빈 배는 나의 깨달음이 되었다. 나의 스승이 되었다. 이제 어떤 사람이 나를 욕한다면 나는 웃을 것이다. 나는 그 배는 빈 배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방편을 이용하라. 그대에게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질문 )

 

"당신께서 강의하신 마지막 방편에서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면 자신의 분노나 증오감을 억누른다고 느껴집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자유롭게 이 방편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방출과 억압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들은 서로 정반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하나도 다르지 않다. 감정을 방출하는 것이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둘 다 다른 사람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이 방편은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방편은 방출이나 억압의 본질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그대의 분노 에너지가 일어나고, 원천을 찾아 다시 그대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 방편은 그대의 기분, 그대의 에너지, 그대의 감정을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잡이로 이용하는 것이다.

 

구제프는 이 방편을 잘 사용했다. 그는 먼저 그대가 화를 내도록 상황을 만든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앉아 있다. 그러면 그대가 들어간다. 그대는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대를 화나게 하는 행동을 할 것이다. 그대가 하는 말에 조소를 보내고 그대에게 모욕감을 준다. 그러면 그대는 화가 나기 시작한다. 구제프는 그대의 상황을 면밀하게 주시하다가 화가 터져 나오려는 순간 그대에게 이렇게 말한다.

"눈을 감아라. 그대의 분노를 인식하라. 내면으로 들어가라."

바로 그때 그대는 이 모든 상황이 미리 계획된 것임을 깨닫는다. 아무도 그대를 모욕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한 편의 연극일 뿐이다. 싸이코 드라마인 것이다. 그러나 분노는 일어난다. 그대는 전모를 알았지만 에너지는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그대는 원천으로 떨어지는 에너지와 함께 내려갈 수 있다.

이것은 명상의 가장 성공적인 방법 중의 하나다. 그리고 명심하라. 그대가 깊은 사랑에 빠지면 분노로 방출될 에너지가 없다. 그대가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분노로 방출될 에너지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그대는 화를 낼 상황을 찾아 헤매게 된다. 만약 그대의 에너지가 섹스를 통해서 방출된다면 그대는 덜 폭력적으로 변한다. 만약 그대의 에너지가 섹스를 통해 방출되지 않으면 그때는 그대가 폭력적으로 변할 것이다. 섹스로 흘러갈 에너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는 병사들에게 섹스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은 매우 폭력적이다. 만약 병사들에게 섹스를 허용한다면 그 군대는 싸울 힘이 없어지고 만다. 정신문명이 발달한 나라는 야만적인 나라와의 전쟁에서 반듯이 질 수밖에 없다. 야만적인 나라에서는 에너지를 전쟁 말고는 발산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모든 사람의 성적 욕구가 충족되어 있다. 그들은 싸움에 쏟을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만약 세계 평화를 원한다면 그때는 섹스의 자유를 부르짖어라. 만약 전쟁을 원한다면 섹스를 엄격하게 금지하라. 성을 억압하라.

 

만약 섹스 에너지가 원천으로 돌아가면 그대는 어린아이같이 될 것이다. 어린아이도 섹스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대보다 더 풍부하다. 그러나 그것은 원천 속에 있다. 그것은 아직 육체로 이동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모든 호르몬 샘이 성숙되어지면 그때 섹스 에너지가 이동할 것이다. 왜 어린아이들이 순수하게 보이는가? 에너지가 아직 원천 속에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에너지가 근원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진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이다. 신의 나라, 천국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과학적으로 풀이하면 그대의 에너지가 원천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에너지가 원천에 있을 때에는 형태가 없다. 예를 들어 전기 자체는 형태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그대의 마음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하나의 메커니즘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수천 가지 형태를 띠게 된다. 분노도 하나의 메커니즘이고 섹스도 그러하다. 사랑도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증오도 물론 그렇다.

에너지가 증오의 통로로 들어오면 그것은 증오가 된다.

같은 에너지가 사랑의 통로로 들어오면 그것은 사랑이 된다.

그것이 원천으로 돌아가면 그저 아무 형태도 띠지 않게 된다.

그것은 사랑도 분노도 섹스도 아닌 순수 에너지 그 자체이다.

그래서 붓다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보이는 것이다.

방출하지 말라. 그대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까지도 낭비하게 만든다. 억압하지도 말라. 결국 한꺼번에 방출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는 이 방편을 통해서 에너지를 원천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 그대는 쓸데없이 에너지를 방출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붓다는 그대가 화를 내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자신을 벌하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했다. 타인이 그대를 욕했다. 그것은 그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대는 화를 냄으로써 자신을 벌한다. 그대는 자신을 변형시키는 데 사용할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다 방출해 버린 셈이다.

이제 화를 내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는 알았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화를 참으려고 한다. 그대는 분노를 억압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화산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것은 조만간 폭발할 것이다. 그대는 하루 종일 분노를 모으고 있다. 한 달 간의 분노를 모으고 있다. 이제 일 년 동안의 분노를 모았다. 그리고 일생 동안의 분노를 모은 것이다. 그대는 여러 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대는 억눌린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대는

이제 그것이 한꺼번에 폭발할까봐 매우 두려워한다. 매순간이 내적 갈등과 긴장 속에 있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억압하는 것보다는 방출하는 것이 훨씬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억압과 방출 둘 다 어리석은 행위이다. 방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고 억압하는 것은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차라리 근원으로 돌아가라고. 그렇게 되면 그대는 화를 낼 때보다 더욱 생기가 넘치게 된다. 아무런 형태도 띠지 않은 채 그대는 강렬한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대의 현존에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지배할 필요가 없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라. 그들은 강력한 에너지의 원천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붓다에게 가면 그는 강력한 에너지의 원천 때문에 갑자기 그의 에너지 상태가 변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가 붓다에게 가까이 가는 순간 그대는 강력한 자력에 이끌리게 된다. 붓다의 현존은 형태를 띠지 않은 원초적인 에너지 때문에 그 곁에 있는 사람의 에너지 중심을 자극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카리스마인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그에게는 다섯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지독한 고행주의자들이었다. 붓다 자신도 매우 위대한 고행주의자였다. 그는 수많은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고통을 주었다. 그의 그런 지독한 고행에 감명을 받아 다섯 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하지만 어느 날 붓다는 그것이 정말로 어리석고 아무 의미 없는 짓임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몸을 학대해서는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깨닫자 고행의 길을 버렸다. 그리고 다섯 명의 제자들은 즉시 그를 떠났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타락했다. 당신은 더 이상 수행자가 아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가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이 다섯 명의 제자들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을 찾았다. 그는 비하르에서 부다가야로 베나레스를 거쳐 사르나쓰로 갔다. 그들은 사르나쓰에 있었다. 때는 저녁이었다. 태양은 지고 다섯 수행자는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붓다가 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타락한 고타마가 온다. 우리는 그를 존경할 필요도 쳐다볼 필요도 없다."

그들은 붓다가 오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하기 위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붓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섯 수행자들은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붓다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모두 갑자기 눈을 뜨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러자 붓다가 말했다.

"왜 이렇게 하는가? 그대들은 나를 존경하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그들이 말했다.

"우리가 일부러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절로 일어난 일입니다. 당신은 뭔가를 성취하셨습니까?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당신에게서 나옵니다. 혹시 우리에게 최면을 걸었습니까?"

붓다가 말했다.

"아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나의 모든 에너지가 원천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내가 움직일 때마다 갑자기 자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오늘은 이만!

 

 

정지(靜止)명상법

 

스톱!” 그 상태에서는 숨조차 쉬지 마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느낄 것이다.

동시에 그대는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25

그대가 어떤 행위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바로 그 순간 정지하라!

 

26

어떤 욕망이 다가올 때 그 욕망을 주시하라.

그리고 갑자기 그 흐름을 멈추어라.

 

27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한없이 걸어라.

그러면 결국 쓰러질 것이다.

그 순간 그대는 체가 되리라.

 

삶에는 두 가지 균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존재(being)와 행위(doing)이다. 존재는 그대의 본질이다. 존재는 언제나 그대와 함께 있다. 그대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 자신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대에 의해서 소유될 수 없다. 그대와 존재 사이에는 어떤 간격도 없다. 그대는 바로 존재다.

그러나 행위는 그대가 성취하는 것이다. 행위는 그대가 저지르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가 저지르고 나서야 그것은 일어난다. 그래서 행위와 존재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대의 육체를 살아 있게 하려면 그대는 많은 행위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 행위 때문에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아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행위는 그대의 존재를 둘러싼 주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 주변을 통해서 살게 된다. 이러한 주변이 없다면 그대는 생을 꾸려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주변일 뿐이다.

그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중심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가 가진 소유(having)는 무엇이든지 그대의 행위(doing)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중심은 행위와 소유라는 주변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방편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대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그 행위는 그대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그대의 존재(being)는 모든 행위(doing)에 우선한다. 그리고 모든 행위는 소유(having)에 우선한다. 하지만 그대의 마음은 항상 이 행위와 소유에만 휘말려 들고 있다. 마음을 넘어선 곳과 마음의 뿌리 아래에는 그대의 존재가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그대 자신의 중심, 그대의 존재에까지 이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궁극을 찾는 구도자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 중심과 주변의 구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결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이 '정지'에 관한 구절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 지식, 명예, 권력 등등 그대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그대 자신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가 가진 소유물이며 그대는 그것들과 다르다.

두 번째로 그대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 행위는 그대의 존재가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그대는 달릴 수도 있고 천천히 걸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대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대는 그대의 존재를 선택할 수 없다. 그대는 이미 거기에 있다.

행위는 하나의 선택이다. 그대는 선택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이 점을 명심하라. 소유와 행위는 항상 그대의 중심을 둘러싼 주변일 뿐임을. 그리고 그대가 바로 중심임을 말이다.

 

이 중심이 바로 진아(眞我)이다. 그대는 그것을 아트만(Atman), 혹은 그대가 좋아하는 무슨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다. 이 중심이 그대의 가장 깊은 본질이다. 어떻게 이곳에까지 도달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거기에까지 도달하지 않는 한, 그래서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는 한 결코 영원한 축복의 상태에 이를 수 없다. 죽음이 없는 열반의 세계를 결코 알 수 없다. 신성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이 중심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는 언제까지나 불행과 고통과 분노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의 주변은 지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중심으로 들어가려면 그대는 다음의 방편을 수련해야 한다.

 

25

그대가 어떤 행위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바로 그 순간 정지하라.

 

이 방편의 요점은 행위하는 중간에 정지하는 것이다. 구제프는 이 정지 명상법을 서양에 널리 알렸다. 물론 그는 이 명상법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이 방편들을 티벳의 라마승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많은 서양인들이 구제프가 소개한 이 정지 명상법을 통해서 자신의 중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구제프는 이 방편을 '정지 운동(stop exercise)'이라고 불렀다. 티벳의 불교도들도 이 방편을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로부터 배웠다. 수피(Sufi)들도 역시 이런 종류의 명상 운동을 갖고 있는데 그들 역시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로부터 배운 것이다. 기본적으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명상법들이 바로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서 나온 것이다.

 

구제프는 이것을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사용했다. 예를 들면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춤을 추도록 한다. 20명 남짓한 그의 제자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춤을 추는데 춤이 무르익어 가는 순간 그는 갑자기 '스톱!'하고 외친다. 그가 스톱이라고 외치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모든 동작을 완전히 멈추고 있어야 한다. '스톱' 이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는 자세를 어떻게 변형해도 안된다. 한 발을 들고 있는 상태에서는 계속 들고 있어야 한다. 눈을 뜨고 있을 때 명령이 떨어지면 계속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만일 눈이 저절로 감긴다면 그때는 별 문제다. 그러나 일부러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되도록 각성된 상태에서 눈 뜬 상태를 지속시키도록 해야 한다. 마치 조각상처럼 말이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난다. 행위 도중에, 춤 도중에 갑자기 그 동작을 정지시키면 틈이 생겨난다. 그때 그대는 두 개로 분리된다. 그대의 몸과 그대 자신으로 분리된다. 그대의 몸과 그대 자신은 동작 속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지가 일어나고 몸은 동작 쪽으로 가려한다. 지금까지 동작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속도가 작용하는 것이다. 몸은 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대는 갑자기 멈추었다. 몸은 이 갑작스런 정지에 어떤 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정지하는 순간 몸은 움직이려는 강한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정지 상태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 이때 하나의 틈이 생겨난다. 그대는 그대의 몸이 멀리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움직이려는 충동을 가지고 그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몸의 충동에 협조하고 있지 않다. 그대는 그것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조금이라도 몸의 충동에 협조한다면 그때 틈은 생겨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불편함을 느끼는 동작 중에 스승의 정지 명령이 떨어졌다. 그 명령을 들었지만 그대는 자신에게 편한 자세로 고친 후에 정지한다. 이런 식일 때는

결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이것은 스승의 잘못이 아니라 그대 자신의 잘못이다. 이 방편의 요점, 정지의 순간을 놓쳐 버렸기 때문이다. 정지 명령을 듣자마자 즉시 정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 뒤로는 어떤 움직임도 있어서는 안된다.

자세가 불편하다.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로 두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내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라.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을 의식한다면 그때는 또 다시 자신을 속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더라도 그대는 움직이지 말라. 그리하면 거기에 틈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서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의 육체와 행위의 영역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게 된다. 정지하고 있는 것은 그대의 몸이고 정지시키는 자는 그대 자신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하나의 행위에서 다른 행위로, A에서 B, B에서 C, 그대는 계속 옮겨 다닌다. 아침에 그대가 눈을 뜨자마자 행위는 시작된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대는 행위의 물결 속에서 떠다닐 것이다, 그대는 수없이 행위를 바꾼다. 그러나 단 한순간이라도 비행위 (非行爲), 즉 무위(無爲)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어렵다. 어떻게 그대가 비행위의 상태가 될 수 있겠는가? 비행위 속에 있고자 하는 그 노력 역시 또 하나의 행위가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행위의 상태에 머물고자 애쓰고 있다. 그들은 부처의 자세로 앉아서 비행위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하지만 어떻게 노력을 통해서 비행위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그대의 노력은 또다시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그대는 비행위를 하나의 행위로 바꾸어 버릴 수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조용한 상태 속으로 억지로 밀어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억지로 밀어 넣는 행위는 결코 비행위의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지만 결코 무위의 차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인위적인 명상은 또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대가 재채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그대는 그 낌새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막 재채기가 일어나려고 한다.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때 재채기는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 충동이 시작되는 시초에 그대가 그 낌새를 알아차린다면, 그래서 '스톱' 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대는 재채기를 멈출 수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재채기를 멈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더 빨리 찾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멈추려는 것은 그대의 마음을 더욱 의식적이게 만들고 결국 감각을 더 민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대의 감각이 좀더 민감해질 때 그대의 전체적인 주의력은 거기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의력 때문에 재채기는 더 빨리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대는 직접적으로 재채기를 멈출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을 멈추게 할 수는 있다.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대는 재채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감각을 느낀다. 그때 단지 멈춰라. 재채기를 막으려고 하지 말라. 단지 자신을 멈춰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완전한 부동(不動) 속에 남아 있으라. 숨도 쉬지 말라. 그 순간 재채기의 충동이 되돌아가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충동이 떨어져 나간 상태 속에서 중심에서 나오던 미묘한 에너지는 다시 중심으로 돌아가 버린다. 재채기 속에서 풀어 버려야 했던 에너지가 말이다.

충동이란 그대가 사용할 수도 없고 흡수할 수도 없는 어떤 에너지에 의해서 괴로워하는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이 에너지는 밖으로 흘러나가려고 한다. 재채기를 하고 난 뒤에 시원함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여분의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나갔을 뿐이다. 이제 남는 에너지는 없어졌다. 그리고 에너지의 유출이 그대에게 미묘한 휴식감을 준다.

이런 이유로 해서 파블로프(Ivan Pavlov)나 스키너(B.F.Skiner)같은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섹스는 재채기와 같다. "

섹스와 재채기가 심리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대에게는 에너지가 과잉되어 있다. 그래서 그대는 이 과잉된 에너지를 방출하려고 한다. 에너지가 방출되는 순간 그대의 신경 조직은 휴식을 느낄 것이다. 충동을 느낄 때, 에너지의 과잉을 느낄 때, 그리하여 그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 나가려고 할 때, 바로 그 순간 정지하라.

예를 들면 지금 물을 마시고 있다. 물이 입술에 닿는다. 그 순간 정지하라. 입술이 물에 닿은 채로, 물 마시고 싶은 욕망이 거기 있는 그대로, 목마름이 있는 그대로 두라. 그리고 행위를 시작하려는 자신만을 완전히 정지시켜라. 숨도 쉬지 말고 손짓 하나 까딱하지 말고 마치 죽음처럼 굳어져라. 목마름은, 그 충동은, 그 방출하려는 에너지는 그대를 중심으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로켓의 연료가 된다. 그 순간 그대는 중심으로 내던져진다. 왜인가? 충동은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충동은 에너지의 방출이기 때문에 그 흐름이 멈추어지는 순간 중심으로 되돌아간다.

또한 에너지는 부단한 흐름이다. 에너지는 밖으로 흘러 나가든지 아니면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결코 에너지는 정체되지 않는다. 이것은 에너지의 법칙이다. 에너지의 이 법칙을 기억한다면 정지의 명상법을 수행하기는 보다 쉬워질 것이다. 에너지가 어느 한 지점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이미 에너지가 아니다. 따라서 에너지로 비롯되는 모든 것들이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싸움을 하지 않고는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에너지가 거칠게 이동할 때만이 그들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행위를 하기 전에 반드시 한바탕 싸움을 하는 부부들이 있다. 그들은 온갖 욕설을 퍼붓다가 급기야는 서로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싸운다. 그 다음에 그들은 격렬한 사랑의 행위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행동이 일상적인 습관이 되어 버렸다. 싸울 때는 언제나 사랑이 가능하다. 그리고 싸우지 않을 때는 사랑도 불가능하다.

인도에서는 아직도 남편이 아내를 때리고 있다. 그래서 남편이 어느 날 때리는 행위를 그만두게 되면 아내는 안다. 더 이상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끝났다는 의미이다. 왜인가? 왜 그토록 사랑과 싸움은 밀접한 관계인가? 그것은 같은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단지 이동하는 방향이 틀릴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과 싸움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는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사랑할 줄도 모른다. 그에게는 아마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사랑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미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부처에게도 사랑이 있다. 그러나 부처의 사랑은 그 차원이 다르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자비라고 부른다. 그것을 절대로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대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미움, 분노, 폭력 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너지는 언제, 어디서든지 순식간에 변형될 수 있다. 같은 에너지가 분노가 될 수 있고 사랑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번에는 그 에너지가 그대의 내부로 이동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려는 충동이 일어날 때 정지하라.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억제가 아니다. 그대는 어떤 것도 억제하지 않았다. 단지 에너지와 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에너지의 변화를 간파했을 뿐이다. 그리고 에너지가 어떻게 내면으로 돌아가는지 알았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충동은 진정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변형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짓된 사회 속에서 혼자 진실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짓으로 변해가는 사회를 떠나지 않으면 불필요한 싸움만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를 불필요한 곳에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으로부터 과감하게 떠나라. 잘못된 이 사회로부터 미련 없이 떠나라. 그러면 그대는 진실해질 것이다. 이것이 구도자들이 이 세상을 등지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보라. 그대가 얼마나 진실하지 않은지를 찬찬히 살펴보라. 자신의 이중성격을 지켜보라. 그대는 ''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느낌은 ''쪽에 있다. 따라서 진짜가 아닌 것을 정지시켜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 정지 테크닉은 그런 식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선 무엇이 자신의 진정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이 방편을 사용해보라.

 

단지 그대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충동을 느낄 때, 그때 바로 정지하라. 잘 안된다면 다음 세 가지를 명심하고 시도해 보라.

첫째, 진짜 충동이 일어날 때만 그것을 시도해야 한다.

둘째, 정지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 단지 정지하기만 하라.

셋째, 기다려라.

그대가 정지했을 때, 숨도 쉬지 않고 손가락도 꼼짝하지 않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 기다려 보라. 뭔가를 일부러 꾸며 내려고 하지 말라. 내가 기다리라고 말할 때는 내면의 중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진아에 대해서도 생각지 말고 아트만 따위는 잊어버려라. 깨달음의 일별이 거기에 있다는 것도 기대하지 마라. 그저 기다리기만 하라. 충동이, 에너지가, 움직임 그 자체가 스스로 변형되도록 하라. 만약 그대가 아트만이나 브라흐만이나 중심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에너지는 사고작용으로 흘러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이 내면적인 에너지를 매우 간단하게 소비해 버릴 수 있다. 단 한 조각의 사념도 에너지에게 충분히 방향을 잡아줄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그때부터 계속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스톱' 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전체적인 스톱이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시간 전체의 흐름이 멈추는 것과 같다. 그리고 어떤 꾸밈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그대는 있으라. 바로 이 단순한 있음 속에서 갑작스럽게 중심이 폭발한다.

 

26

어떤 욕망이 다가올 때, 그 욕망을 주시하라. 그리고 갑자기 그 흐름을 멈추어라.

 

이것은 동일한 방편의 다른 차원이다. 그대는 하나의 욕망을 느낀다. 섹스에 대한 욕망, 사랑에 대한 욕망, 음식에 대한 욕망, 어떤 것에 대한 욕망, 그대는 욕망을 느낀다. 그것을 주시하라.

경전에서 '그것을 주시하라'라고 말할 때에는 그것에 대해 찬성하든지 반대하라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 욕망을 주시하라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말이다. 성적인 욕망이 마음속에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말한다.

"이것은 나쁜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주시가 아니다. 그대는 단지 나쁘다고 생각하도록 교육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욕망을 주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경전을 참고로 하고 과거에 자문을 구하고 있다. 과거의 선생, 과거의 성자들에게 말이다. 그것은 욕망 자체를 주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어떤 다른 것을 주시하고 있다. 그대의 성장 배경, 그대의 교육, 그대의 문화 전통, 그대의 종교를 말이다. 그대는 많은 것을 주시하고 있지만 정작 그대의 욕망은 주시하지 않는다.

단순한 욕망이 일어날 때 그것을 마음속으로 가져오지 말라. 과거 속에다, 교육 속에다, 조건 속에다 받아들이지 말라. 단지 그 욕망을 주시하기만 하라.

그 욕망은 생물학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그대 속에 있다. 그대의 욕망을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맞추어 생각하지 말라. 단지 욕망 그 자체를 주시하라, 있는 그대로 말이다. 그것을 해석하려 들지 말라. 여기서 주시란 해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지 있는 그대로 쳐다본다는 말이다. 욕망이 거기에 있다. 그것을 직접 그리고 즉시 바라보라.

 

'섹스에서 초월의식까지(From Sex to Superconsciousness)'라는 책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왔다. 그들은 내게 와서 제목을 바꾸어 달라고 말했다. 섹스라는 단어가 매우 거슬린다고 했다. 그들은 그런 책을 읽지 않았으며 이미 그 책을 읽은 사람들도 역시 제목을 바꾸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인가? 그것은 그 말이 그대에게 어떤 해석을 주기 때문이다. 마음은 너무나 해석적이기 때문에 내가 '레몬 주스'라고 말하면 그대는 벌써 침을 흘린다. 그대는 그 말을 해석한 것이다. 레몬 주스라는 말은 진짜 레몬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대는 침을 흘린다. 그대는 해석을 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대는 하나의 순수한 욕망을 갖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고 주시하라. 그것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라. 깨어 있으라. 그리고 갑자기 그것을 멈추어라.

이 테크닉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다.

첫째는 사실에 대해 깨어 있는 것, 일어나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대가 성적인 욕망을 느낄 때 그대 속에 무엇이 일어나던가? 그대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대의 육체가 어떻게 떨기 시작하는지, 갑작스런 울음이 어떻게 터져 나오는 것인지, 마치 그대가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다고 느끼게 되는지를 지켜보라. 그것을 느끼고 주시하라. 어떤 판단도 미리 내리지 말라. 그저 사실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지 말라. 만약 그대가 판단을 한다면 그때 주시는 멈추고 만다. 그대는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이제 그대는 욕망을 향해 얼굴 대신에 등을 돌린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그대는 존재의 생물학적인 심층에까지 이를 수 있는 귀한 순간을 놓쳐 버린 것이다. 그대는 사회라고 하는 표층에 집착하고 있다. 사회는 가장 표면적인 층이다.

지금 이 순간에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가 중요하다. 이것이 살아 있는 순간이다.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을 주시하라. 지켜보라. 그리고 두번째 부분으로 넘어가라. 이것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다. 시바는 말한다.

"그때 갑자기 차단하라. "

'갑자기'란 말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 말라.

"이것은 나쁘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떠나겠다. 나는 이 생각과 함께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 욕망은 죄악이다. 그러니 나는 그것을 그만두겠다. 그리고 그것을 억압할 것이다. "

그때 하나의 억압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명상 상태가 아니다. 억압은 자신의 손으로 존재를 속이는 것이다. 억압은 심리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대는 전체의 메커니즘을 흩으려 놓고 있다. 그리고 매일 폭발시켜 버려야 할 에너지들을 억압하고 있다. 에너지는 거기에 있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억누른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라도 표출시켜야 한다. 억압은 왜곡의 창조물이다. 이 경전 즉 탄트라는 억압과는 거리가 멀다. 억제라는 말과도 상관이 없다.

이 경전은 단지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멈춰라."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욕망은 거기에 있다. 그대는 주시한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주시한다면 그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쉽게 일어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주시하지 않고 그대의 마음을 바라본다면 그때 마음은 생각을 일으키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만약 우리가 성적인 욕망을 갑자기 멈출 수 있으면 그것은 아름답다.' 그대는 그것을 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하고 싶은 마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 자신의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서, 전통에서 빌려온 것이다. 처음에 주시하라. 그러나 그 다음에 좋다거나 나쁘다고 규정짓지 말라. 그러면 후반부는 쉬워질 것이다.

그대는 욕망의 흐름을 멈출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멈출 수 있겠는가? 그대가 어떤 것을 전체적으로 주시할 때 그것은 매우 쉬워진다. 마치 휴지를 던져 버리듯이 쉽다. '그것을 멈춰라.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나의 욕망이 거기에 있다. 그대는 그것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빠져 나가고 있다. 그것은 솟아오르고 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 전체를 흔들고 있다. 실제로 그대가 아무런 해석 없이 욕망을 주시할 때 그대는 존재 전체가 하나의 욕망이 될 것이다.

 

성욕이 거기에 있을 때, 그리고 그대가 그것에 반대하거나 찬성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그것에 대해 무심하다면 그때 그대의 존재 전체는 그 속에 녹아들 것이다. 단 하나의 성욕은 불꽃이 된다. 그대 존재 전체는 그 불꽃 속으로 집중될 것이다. 마치 그대가 전체적으로 성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단지 성기뿐만 아니라 몸 전체로 퍼져 나간다. 그대의 육체는 진동하게 될 것이다. 열정은 하나의 불꽃으로 화한다. 바로 그때 멈추어라. 그것과 싸우지 말라.

단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것을 멈춘다. "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대가 '나는 멈춘다.'라고 말하는 순간 하나의 분리가 일어난다. 그대의 육체는 성욕으로 가득 찬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그대와 성욕은 양극으로 나뉘어진다. 그대의 육체는 열정과 성욕으로 마구 뒹군다. 그리고 동시에 그대의 중심은 고요하다. 거기에는 싸움이 없다. 단지 분리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그대는 마치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을 기억하라. 싸움 속에서는 결단코 그대에게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27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한없이 걸어라.

그러면 결국 쓰러질 것이다.

그 순간 그대는 전체가 되리라.

 

똑같다. 테크닉은 똑같다.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걸어라. 쳇바퀴 속에서 달리고 뛰고 춤춘다.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말이다. 한 발자국을 더 이상 못 옮기겠다고 느낄 때까지 해보라. 그러나 이제 완전히 지쳤다고 말하는 그대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마음의 소리에는 어떤 주의도 기울이지 말라. 그저 계속 달려가라. 춤추라. 날뛰어라. 어떤 생각도 만들어 내지 말라. 마음은 이제 그대가 지쳤다고 말해 줄 것이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대는 계속 강행하라. 사실 그대가 지쳤다고 하는 것은 그대가 지친 것이 아니다. 그대의 가장 외부의 표층이 지쳤을 뿐이다. 보통 저녁이 되면 몸은 지치게 마련이다. 하루 종일 그것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은 재충전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대는 깊이 잠이 든다. 우주적 충전기가 그대에게 에너지를 충전시켜 줄 것이다. 내일 또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층이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지금 당장 달리기를 하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아마 '나는 매우 피곤하고 졸리니 지금은 달릴 수가 없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때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 집에 불이 났소!' 라고 말하면 그대는 갑자기 일어날 것이다. 거기에는 피곤도 없다. 그대는 달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가? 그대는 매우 지쳐 있었다. 그런데 비상사태가 일어나서 그대는 두 번째 층의 에너지에 연결되었다. 그대는 다시 생기가 넘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테크닉에서는 두 번째 층의 에너지마저도 고갈되어야 한다. 첫 번째 층의 에너지는 쉽게 고갈될 수 있다. 그래도 계속하라. 그러면 새로운 에너지의 샘에 연결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다시 생기가 넘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명상 캠프에 있을 때 우리가 했던 일들은 마치 기적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세 번, 아침과 저녁 그리고 밤에 한 시간씩 미친 듯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명상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강행군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해보기도 전에 그렇게 강행군을 하다가는 과로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렇게 격심하게 움직이고 나면 다음날 아침 일어나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피로를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일 세 번씩 격렬한 명상을 통해 모든 정력을 다 쏟아 부었지만 아무도 피로해서 쓰러지지 않았다. 왜인가? 그것은 그들이 두 번째 층의 에너지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대 혼자서 그렇게 했다면 아마 지쳐 나자빠졌을 것이다. 에너지의 첫 번째 층이 끝나면 그대는 '나는 몹시 피곤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5백 명 정도의 큰 그룹이 한데 뭉치면 아무도 자기가 피곤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조금만 더 계속하자'라고 자기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품는 똑같은 생각이다. '아무도 피곤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나도 조금만 더 하자. 다른 사람이 아직 생생한데 왜 내가 먼저 지쳐 나자빠져야 하는가?'

단체라는 느낌은 그대에게 자극과 힘을 준다. 그리고 두 번째 층의 에너지는 매우 큰 것이다. 그것은 비상사태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비상사태의 에너지가 다 고갈되면 그때 그대는 우주 에너지, 무한한 에너지의 근원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많은 노력과 분발이 필요한 것이다. 그대가 '이제 이것은 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라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그대를 넘어간다. 물론 그것은 그대 자신이 아니라 그대의 첫 번째 층을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층마저 끝나게 되면 그대는 진짜 피곤하게 느낄 것이다.

'만약 지금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나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들이 명상 속에 깊이 들어갈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이제 겁이 납니다. 나는 곧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진짜 중요한 순간이다. 그대에게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조그마한 용기만 있어도 그대는 세 번째 층으로 들어갈 것이다.

가장 깊을 뿐만 아니라 무한한 영역으로 말이다. 이 방편들은 그대로 하여금 에너지의 우주적 바다에까지 이르게 할 것이다. 그대가 대지 위에 전체적으로 무너져 내릴 때 그대는 처음으로 합일을 이를 것이다. 이제 그 어떤 것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분별로 생겨난 마음은 사라지고 없다. 나누어지지 않은 존재 덩어리가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질문 )

 

앞에서 이야기된 방편들에 따르면 분노, 성욕, 폭력 등이 일어날 때 그것을 주시하고 있다가 갑자기 멈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편을 수행할 때 종종 뭔가 부자유스럽고 불편함을 느낍니다. 왜 사람은 분노나 성욕 등등의 것을 멈추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까?

 

모든 사람이 죄의식을 갖고 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화를 내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화를 내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대에게 화가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섹스가 나쁘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또 그렇게 가르친다. 하지만 섹스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대의 부모들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당장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쌍스러운 것은 입밖에도 내지 말라. "

그러나 그토록 나쁜 것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대의 부모 역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의 존재가 바로 그것의 적나라한 실현이다. 그대의 부모가 섹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지 그들은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섹스가 왜 나쁜 것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인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가? 아무도 그대에게 그것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단지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딱지만 잔뜩 붙이고 있다. 그리고 그 딱지들이 불행을 낳고 지옥을 만든다. 그러므로 이 한 가지는 기억하라. 구도자에게는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다. 현실을 이해하는 것,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 사회가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를 따르지 않는 것 말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그대 자신을 보지 말라. 그대는 눈을 갖고 있다. 그대는 장님이 아니다. 그대의 눈을 사용하라. 이것이 바로 주시의 의미이다. 그대가 주시한다면 그때 이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안된다.

 

그대는 그대 삶의 주체가 되라.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는 노예가 되지 말라. 그대는 눈을 가지고 있고,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섹스 에너지와 분노 등등의 것을 가지고 있다. 그대의 의식을 사용하라. 그대의 눈을 사용하라. 그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갖고서 깨어 있어라. 마치 그대가 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라. 그대를 가르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내면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전체적으로 깨어 있으라. 아무것도 미리 결정을 내리지 말라. 서두르지 말고 결론짓지 말라. 그대 자신의 자각을 통해 결론이 내려질 때 그것은 곧 그대의 변형으로 이어진다. 그때 그대는 어떤 부자유함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억압이나 아쉬움도 없다. 그리고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어떤 것을 멈출 수 있다. 나는 멈추는 것을 인식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명심하라. 내가 말하는 것은 그대가 자각할 때 그대는 어떤 것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멈추기 위한 기술 따위는 찾지 말라. 멈추는 것은 깨어 있음의 결과일 뿐이다. 그대가 깨어 있다면 그대는 욕망의 흐름을 멈출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굳이 멈출 필요가 없다. 그대는 절대로 그럴 필요가 없다. 섹스가 거기에 있다. 만약 그대가 충분히 깨어 있다면 그대는 굳이 그것을 멈출 필요가 없다. 그때 섹스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만약 그대가 깨어 있으면서 그것을 멈추고자 결심한다면 그대의 체념 또한 아름답다.

 

그러므로 내 말의 요지를 이해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한다면 그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자각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추한 것이다.

그대는 시바보다도 더 깨어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무릎 위에 파르바티를 앉혀 놓고 있다. 그것이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 누가 과연 옳은가? 붓다가 옳은가? 아니면 시바가 옳은가? 문제는 우리가 모든 사람이 자신의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데 있다. 붓다와 시바는 모두 깨어 있는 사람이다. 그들의 선택은 모두 옳다. 단지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 틀릴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틀 속에 빠지지 말라. 그대의 의식이 각성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각성하기 전에 이것을 그만두고 저것을 멈추는 따위의 행동은 절대로 하지 말라. 결론짓지 말라. 아무도 모른다. 깨어 기다려라. 그대의 존재가 꽃필 때까지 말이다. 누가 존재의 꽃을 피우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다른 사람을 따를 필요가 없다. 따르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모든 모방 행위는 자살 행위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기다려라.

이 방편들은 그대를 깨어 있게만 할 뿐이다. 그대가 깨어 있으면 그대는 어떤 것을 멈출 수 있다.

 

 

지성파와 감성파를 위한 각각의 방편

 

그대는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마라.

그때 그대는 건강하고 전체적인

존재의 관점을 갖게 된다.

 

28

 

힘과 지식이 점점 그대에게서 빠져 나간다고 상상하라. 완전히 빠져

나가는 순간 거기에 초월이 일어난다.

 

29

헌신은 자유를 준다.

 

탄트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병적 현상이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혼란에 빠졌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의 마음 자체가 하나의 혼란이다.

그대의 마음이 긴장된 것이 아니다. 그대가 바로 긴장이다. 그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라. 만약 마음에 병이 들었다면 그 병은 고쳐질 수 있다. 하지만 마음 자체가 하나의 병이라면 마음은 고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마음을 초월하는 길밖에 없다.

 

만약 그대가 자신이 육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그대의 육체를 초월할 수 없다. 누가 초월하며 어디로 초월하겠는가?

육체뿐일 때는 육체를 넘어서 어디로도 갈 수 없다. 따라서 그대가 육체를 초월한다는 것은 이미 그대가 육체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뜻이다. 그 무엇이라고 할 때 그것은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차원이다.

마음에 대해서도 같은 이치이다. 그대가 마음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때는 마음을 초월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때 우리는 그저 마음의 병이나 고치려고 애쓸 뿐이다. 그것은 마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병을 다루는 차원이다. 병적인 상태를 고쳐서 정상적인 상태의 마음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정상적인 마음 자체가 바로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란 항상 긴장과 고뇌와 번민 속에 있기 마련인 것이다. 물론 잠깐 동안의 이완 상태를 경험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마음의 본성이란 긴장과 번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마음은 육체와 그대 내면에 있는 '비육체'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그것은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가장 신비한 다리인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서로 대조적인 것을 연결해 준다. 물질과 영혼을 말이다.

만약 그대가 이 역설을 이해할 수 있다면...... 한쪽 둑은 물질이고 다른 쪽 둑은 비물질인 것을 잇는 다리라는 것을, 한쪽 둑은 보이는 것이고 다른 쪽 둑은 보이지 않는 것임을, 한쪽 둑은 죽음이 있고 다른 쪽 둑은 죽음이 없는 것임을, 그대가 무슨 이름을 붙이든 이 두 개의 모순은 그대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거기에는 긴장이 가실 수가 없다.

마음은 항상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또한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움직이고 있다. 매순간 마음은 깊은 긴장 속에 빠져 있다. 도저히 연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을 서로 연결해 주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긴장이 있다. 그것은 또한 고뇌를 만든다.

나는 지금 그대의 은행 잔고에 대한 고뇌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좀더 근원적인 고뇌, 붓다의 고뇌를 말하는 것이다. 그 고뇌는 생활고로 그대의 마음이 눌려 있을 때에는 발견할 수 없는 고뇌이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그 고뇌를 인식한다면 그대는 종교적으로 될 것이다.

종교는 바로 이 근원적인 고뇌에 대한 것이다. 붓다도 고뇌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고뇌는 재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내의 미모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보이는 사물에 대해서는 어떤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일반적인 걱정거리란 없었다. 그는 왕자였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남편이었다. 그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시체를 메고 가는 광경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고뇌를 발견했다. 그 고뇌는 근원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 광경을 보고 마부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마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사람은 이제 죽은 것입니다."

붓다는 태어나서 그때 처음으로 죽음과 대면한 것이다. 그는 당장 이렇게 물었다.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나도 죽을 것인가?"

이 질문을 보라. 그대는 이렇게 물어본 적이 없다. 그대는 아마 누가 죽었으며, 죽을 나이가 되지 않았는데 왜 죽었는지를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문은 근원적인 고뇌와는 상관이 없다. 그대는 동정심을 느낄 수도 있다. 슬픔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곧 잊어버린다. 그러나 붓다는 모든 질문을 자신에게 돌렸다.

"나도 죽을 것인가?"

마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따라서 왕자님도 죽을 것입니다."

붓다는 말했다.

"마차를 돌려라.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이 삶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 마음은 고뇌로 가득 찼다. 이 고뇌가 풀리지 않는 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은 근원적인 고뇌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삶의 실정을 알게 된다면, 마음과 육체의 현재 상태를 깊이 인식하게 된다면 거기에 미묘한 고뇌가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그대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점점 강하게 울려나올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그 고뇌는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다. 마음은 이제 끝이 없는 심연을 느끼게 되었다. 육체는 죽게 되지만 그대는 죽지 않는 것임을, 그대에게 죽음을 모르는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연하게 깨달을 때까지 그 고뇌는 그칠 줄 모른다.

이것은 거대한 모순이다. 그대는 두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개의 배 위에 타고 있다. 그대는 깊은 갈등에 빠지게 된다. 그 갈등은 마음의 갈등이다. 그 마음은 두 개의 양쪽 극단, 즉 죽음과 불멸, 물질과 영혼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다리인 것이다.

 

둘째로, 마음은 하나의 과정이며 흐름이지 물체가 아니다.

마음은 형태를 갖고 있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마음(mind)'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마치 그대 속에 어떤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을 잡으려고 하면 그것은 텅 빈 허공일 뿐이다. 마음은 과정이며 흐름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차라리 '마음작용(minding)'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산스크리트어에는 그것의 정확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타(citta)'이다.

 

이 마음작용에 대해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명상이며 무심(無心) 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명상에 대해 묻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명상을 하려고 하면 갑자기 긴장이 됩니다. 그전에는 긴장되지 않았는데, 하루 종일 잘 지냈었는데 명상을 하려고 조용히 앉으면 갑자기 긴장됩니다. 그리고 잡념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평소에 안하던 온갖 생각들이 마구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명상이 잡념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오해이다. 잡념은 명상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항상 복잡하게 돌아가는 잡념 속에서 살아왔다. 단지 그대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대의 의식이 내면을 살피지 않고 항상 외부로만 향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그대가 홀로 고요하게 앉아 있어 보라. 그러면 그대는 끊임없이 자신의 본모습, 즉 존재의 심연을 애써 외면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 즉 마음작용은 바로 그런 노력의 과정이다. 그리고 거기에 거대한 양의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다. 그것은 마음이 생존하기 위한 갈등이며 에고의 투쟁이다. 에고란 바로 마음작용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무기이다. 가장 폭력적인 무기인 것이다.

진정한 명상은 무심한 상태가 되는 것이며 끝없는 자신의 심연을 대면하는 것이다. 거기에 아무 생각도 일어날 수 없다. 그 놀라운 상황 속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명상을 하면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다.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경악스런 사태 속에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어 마음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

 

셋째로, 그대는 태어날 때 마음 없이 태어난다. 사람은 단지 마음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만 갖고서 태어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사회 속에서 자라지 않으면 그는 단지 육체만 갖게 된다. 마음 없이 말이다. 그는 어떤 언어도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개념을 갖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는 한 마리의 짐승일 뿐이다. 오직 느낌만 있을 뿐이며 그 느낌마저 인식하지 못한다.

사회는 그대 마음작용의 능력을 훈련시킨다. 사회는 그대에게 마음을 준다. 동양은 마음이라는 방 내부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방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아 왔다. 유일한 관심은 그 방을 나가는 문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양은 그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빠져 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이것에만 관심이 있다. 나는 방 내부에 대한 설계도를 만들고 싶지 않다. 방 안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것이 없다. 나는 오직 마음이라는 방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 그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방 밖을 빠져 나가서 무한한 하늘 밑에 서게 될 때 방안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대는 마음의 변화를 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대는 마음을 초월해 버렸다. 그때 모든 것이 변한다.

동양은 마음을 초월할 줄도 알고 마음을 이용할 줄도 안다. 따라서 마음과 그대를 동일시하지 말라. 이것이 동양의 결론이다. 그리고 명상의 모든 방편이 문을 찾아서 마음의 방을 나가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28

힘과 지식이 점점 그대에게서 빠져 나간다고 상상하라.

완전히 빠져 나가는 순간 거기에 초월이 일어난다.

 

이 방편은 실제 행동 속에서 할 수도 있고 상상으로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우선 침대에 누워서 완전히 이완하라. 그리고 마치 그대의 육체가 죽어 가고 있다고 느껴라. 눈을 감아라. 곧 그대는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상상하라. 나는 죽어 가고 있다. 점점 죽어 가고 있다. 그 느낌이 생생하다면 그대의 몸은 점점 무거워져서 납덩어리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몸이 점점 죽어 가고 있다는 상상을 계속하라. 그러면 그대는 죽음이 일어나는 순간을 느끼게 된다. 그때 갑자기 육체를 잊어버리게 되고 초월이 일어난다.

육체가 죽어 가는 것을 느낄 때, 그때 초월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대의 육체를 보라. 지금 막 그대는 죽어 가고 있다. 그대의 몸은 시체가 되었다. 육체를 보라. 그대는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다. 바로 여기에 초월이 있다. 그대는 마음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죽은 시체는 마음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시체는 완전히 이완된다. 마음의 흐름이 완전히 멈추기 때문이다. 그대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육체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마음은 사라지고 없다.

기억하라. 마음은 삶을 위한 것이지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한 시간 뒤에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그대에게는 오직 한 시간만이 남아 있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 그대의 마음은 완전히 멈출 것이다. 생각이란 항상 과거나 미래로 움직여 갈 수 있을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대가 내일을 생각한다면 명상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때 그대는 걱정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내일을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걱정하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승에서의 삶 뿐만 아니라 저승에서의 삶까지도 계획하고 염려하는 것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천국도 없고 사후세계도 없으며 영혼도 없다. 그대의 죽음은 전체적이며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아무것도 되살아나는 것이 없다."

사람들은 붓다가 무신론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는 단지 그대로 하여금 내일을 염려하는 병을 고치려고 한 것이다. 그대를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다. 그때 명상은 저절로 일어난다.

 

'밖에 서 있는 것(standing out)'은 영어에서 절정(ectasy)의 본래 뜻이다.엑스터시(ectasy)는 바로 밖에 서 있다는 뜻이다. 그대는 무심의 상태 속에서 자신의 몸 밖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대를 몸 안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무심이 되는 순간 그대는 몸 안에 있다는 느낌 역시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초월이다. 그때 몸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마음 안으로도 들어가라. 한번 이것을 경험하고 나면 다시는 자신이 몸이나 마음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오직 그 길을 통해서만이 전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마음을 이용할 수 있다. 마음은 그대의 목적에 이용되는 하나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대는 마음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그대가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이것은 탄트라에서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대가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마음을 하나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건강하고 전체적인 존재의 관점을 갖게 된다.

 

29

헌신은 자유를 준다.

 

이 방편은 단 두 마디 말로 끝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간단하게, 또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어렵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헌신하라'는 한 마디 말로 끝내려 한다. 자유는 헌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헌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책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는 두 가지 유형의 방편이 있다.

첫째는 지적인 사람을 위한 방편이다. 그것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을 위한 방편이다.

둘째는 감정적인 사람을 위한 방편으로서 시적이며 가슴이 뜨거운 사람을 위한 방편이다.

 

마음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과학적인 마음과 시적인 마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서로 분리된 양극이다. 그것들은 결코 서로 만날 수 없다. 마치 철도의 평행선처럼 언제나 떨어져 있다.

때때로 한 사람이 시인이자 과학자인 경우가 있다. 매우 드물지만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분열이다. 그는 두 개의 인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시인일 때는 과학자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가 과학자일 때는 시인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린다.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개념과 논리가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시의 세계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더 이상 논리나 개념 따위가 없다. 오직 거기에는 감정과 리듬과 감동만이 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 이것은 마음의 두 가지 기본 유형이다. 그리고 이 장에서 말한 첫 번째 방편은 지적인 사람을 위한 방편이다. 두 번째 방편인 '헌신하라, 자유롭다'는 감정적인 사람을 위한 방편이다.

한편 그대는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를 알아야 한다. 물론 어떤 것이 더 높고 낮은 것은 없다. 지적인 유형이 더 고상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들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성질이다. 그대가 무슨 유형에 속하는지 그것만 알면 된다.

이 두 번째 방편은 감정적인 유형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왜인가? 헌신이란 무조건적이며 맹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헌신 속에서는 헌신의 대상이 그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 된다. 그것이 바로 신뢰인 것이다. 그러나 지적인 사람은 아무도 신뢰할 수 없다. 그는 오직 비판만 할 줄 안다. 믿지 못하고 의심만 할 줄 안다. 때때로 지적인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될 때가 있지만 그것은 결코 진실한 믿음이 아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의 믿음을 확인해 보고 싶어 한다. 그것은 절대로 진정한 신뢰가 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증거를 찾고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논리적 기반이라도 마련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요점을 놓치고 있다. 믿음이란 결코 어떤 논리적 근거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논리적 근거나 증거가 있다면 그때는 믿음이란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신비주의자이며 성자로 알려진 사람 중에 하나인 테르툴리안(Tertullian)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신을 믿는다. 왜냐하면 신은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옳다. 이것이 바로 감정적인 사람의 자세이다.

그는 말한다.

"신은 증명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는다."

그의 말은 역설적이다. 비논리적이다. 만약 그가 논리적으로 말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신의 존재가 증명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는다."

이렇게 말하면 지적인 사람들은 매우 좋아할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위험이 없다. 이미 증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적인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서는 아무런 지지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헌신에 대해서 잊어버려라. 먼저 사랑을 이해하라. 그러면 헌신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사랑에 빠진다. 그 말을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사랑에 떨어진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그대의 무엇이 떨어진다는 말인가? 그것은 그대의 머리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이 표현은 분명 지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리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적 능력을 잃는다는 뜻이다.

그대는 미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한번 물어보라. 왜 사랑에 빠지는지 말이다. 그들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논리적 이유도 타당하지 않다.

 

두 개의 마음이 용해되어 하나가 되기란 무척 어렵지만 사랑 속에서는 가능하다. 그때 두 개의 마음은 사라진다. 그리고 거기에 빈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에서 사랑이 꽃핀다.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 논리적 설명도 불가능하다.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증명하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행태 심리학자인 왓슨(Watson)과 스키너 (Skinner)는 사랑이란 단지 환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일종의 백일몽 같은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대가 만약 사랑에 빠졌다면 그것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이 틀렸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은 말한다. 사랑은 일종의 이상심리라고 말이다. 그대의 육체가 호르몬의 분비로 인한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그대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행복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왓슨조차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랑이 단지 화학적 변화로 인한 이상심리 작용이라고 말한 그가 자신도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왓슨 역시 행복을 느꼈다.

사랑은 증명될 수 없다. 그것은 내면의 문제이며 주관적인 것이다. 사랑 속에서는 그대보다 상대방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가 중심이 되고 그대는 주변이 된다. 논리는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작용한다. 마음 역시 언제나 자기중심적이다. ''라고 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늘어서 있다.

두 개의 마음이 용해되어 하나가 되기란 무척 어렵지만 사랑 속에서는 가능하다. 그때 두 개의 마음은 사라진다. 그리고 거기에 빈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에서 사랑이 꽃핀다.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 논리적 설명도 불가능하다.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증명하기 불가능하다.

 

논리나 이성이 극단적으로 흐르면 결국 나만이 존재하고 나머지 모든 것은 꿈이 된다. 이것이 이성과 논리가 작용하는 방식이다.

이와 정반대의 길이 있다. 그것은 가슴의 길이다. 가슴의 길에서는 나는 꿈이 되고 상대방이 실재가 된다. 그대가 이쪽 극단으로 흐르면 그것이 곧 헌신이다. 만약 그대의 사랑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그대는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직 상대방만이 남아 있다. 이것이 곧 헌신이다.

사랑은 헌신이 될 수 있다. 사랑은 헌신의 첫걸음이다. 오직 그때만이 헌신은 꽃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조차 너무 멀다. 오직 섹스만이 현실이다. 사랑은 두 개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하나는 섹스로 떨어질 수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헌신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사랑은 바로 그 가운데 있다. 그 밑에는 섹스의 심연이 있고 그 위에는 열린 하늘이 있다. 헌신의 무한한 하늘이 있다.

만약 그대의 사랑이 깊어진다면 상대방은 더욱더 중요해진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비로소 그때만이 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가능하다. 만약 그를 위해 죽을 수 없다면 그를 위해 살 수도 없다. 삶은 죽음을 통과한 이후에만 그 진정한 의미를 간직하게 된다. 사랑 속에서는 그대보다 상대방이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드문 일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대는 사라지고 만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대는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대가 그 경험을 통해서 헌신의 일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연인 사이에서 상대방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 사랑의 정점에서 그대는 사라지고 상대방은 신성이 된다. 그대가 이것을 사드하나(영적 수행)로 삼는다면, 내면의 탐구로 삼는다면, 사랑을 즐거움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변형시키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때 사랑은 헌신이 된다. 상대가 누구이든 그대가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있다면 그대는 변형될 것이다.

"헌신은 자유를 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 속에 자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대가 사랑 속에 있을 때, 오직 사랑 속에 있을 때만이 그대는 섬세한 자유를 갖게 된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외부적인 모습으로 보자면 마치 사랑에 빠진 그대는 노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 둘 다 서로의 노예가 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 속에서 자유의 일별을 보게 된다. 사랑은 자유인 것이다.

왜인가? 에고가 속박이기 때문이다.

다른 속박은 없다. 그대가 감옥에 수감되어 탈옥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의 연인이 감옥 속에 들어오면 그 순간 감옥은 사라지고 만다. 여전히 벽이 거기에 있지만 그것은 그대를 가둘 수 없다. 그대는 완전히 그 벽들을 잊어버린다. 그대는 상대방 속으로 녹아 들어가 하늘이 된다. 감옥은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완전히 자유롭다.

물론 그대가 자유를 느끼는 것은 새가 날아다니는 공간적 하늘이 아니라 의식의 하늘이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만이 그대는 그 하늘을 맛볼 수 있다. 그것은 그대 자신을 완전히 조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감정적인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이 방편이 유효하다.

 

그대가 사라지고 나면 그대의 연인은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어딘가에 존재하면 그때 사랑하는 사람은 존재할 땅이 없다.

 

(질문 )

 

"당신께서는 사랑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인 우리에게는 사랑이 집착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속시킵니다. 집착과 자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는 것은 거기에 더 이상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집착이 실체이고 사랑은 미명일 뿐이다. 그대가 사랑에 빠질 때마다 얼마 안 가서 그대는 자신이 불행에 떨어졌다고 느낀다. 도대체 그것은 무슨 원리 때문인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인간은 자유에 대해서는 미묘한 공포를 느낀다. 모든 사람이 노예가 되고 싶어 한다. 왜 그대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가? 그대는 고독을 두려워한다. 그대는 자신에 대해서 지겨워하고 있다. 그대가 고독할 때에는 아무것도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누군가에게 빠지고 일부러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대는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 없다. 그래서 그대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살려고 한다. 그것은 그대 뿐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홀로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두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사랑의 놀이를 벌이는 것이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그대는 집착을, 속박을 추구하고 있다. 그대는 곧 집착이 표면에 들어날 것이고 사랑의 연기는 막을 내린다. 사랑의 연기는 그 기능을 다했기 때문에, 그대는 소유하고 싶은 사람을 드디어 손에 넣었기 때문에 이제 계속 집착할 일만 생겼다. 더 이상 사랑을 가장할 필요가 없다. 그때 그대는 속박을 느낀다. 노예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자유를 위해 갈등한다.

 

사랑은 결코 집착이 될 수 없다. 사실은 집착이 필요한 것이고 사랑은 포장지 역할을 했을 뿐이다. 사랑은 미끼였을 뿐이다. 고기가 걸려들면 사랑은 역할을 다했다. 만약 진정한 사랑이 거기에 있었다면 그것은 결코 집착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직 나만을 사랑해 달라'라고 말하는 순간 그대는 소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소유하는 순간 그대는 그를 은밀하게 모욕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를 하나의 물건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사랑한다는 것, 자유롭고 싶은 것은 자신에 대해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났을 때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나누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때 비로소 그대는 자신의 사랑을, 자신의 행복을, 자신의 침묵을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대가 내면의 의식을, 그대의 중심을 깨달을 때만이 사랑은 집착이 되지 않는다. 그대가 내면의 중심을 모른다면 사랑은 집착이 될 것이다. 아니 아예 사랑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내면의 중심을 알게 될 때 사랑은 헌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먼저 그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지금 그대는 존재가 아니다. 어느 날 붓다가 마을을 지나가는데 한 젊은이가 와서 말했다.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까?

붓다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먼저 그대는 존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잊어버려라. 그대 자신이 있고 난 후에야 모든 것이 따라온다."

지금 당장에는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사랑은 집착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행위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그것은 모두 틀린 것이다. 먼저 존재하라. 그 다음에야 그대의 존재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그 전에는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집착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이르노니 만약 그대가 집착에 대항해서 싸운다면 그대는 완전히 한 바퀴를 잘못 도는 것이다.

깊은 숲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한 친구를 방문했다. 거기에는 다른 고행자들도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나무 밑의 움막에서 지내고 있는데 새로운 구도자가 왔다. 마침 그때 내 친구는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는 강가로 목욕을 하러 간 것이다. 그래서 그 나무 밑에서 새로 온 구도자가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가 강에서 돌아와 그 광경을 보더니 그 새로 온 구도자를

밀쳐 내 버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나의 나무 밑이다. 다른 곳을 찾아보라. 아무도 내 자리에 앉을 수 없다."

그 친구는 자신의 집과 가정을 떠났지만 이제 그 나무가 새로운 소유물이 된 것이다. 그대는 그의 나무 밑에서 명상할 수 없다. 그대는 어떠한 욕망을 쉽게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의 집착은 쉽게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생각에게 속고 있다. 그러므로 집착과 싸우지 말라. 왜 집착이 거기에 있는지 이해하라. 그러면 그 깊은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없기 때문에, 그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신 그 자리에 집착이 들어선 것이다.

그대 내면에는 진짜 그대가 자리 잡고 있지 않다. 그대 내면에는 순전히 가짜 그대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가짜 그대는 끊임없이 집착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가짜 그대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거짓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잊기 위해 그대의 시선을 다른 데로 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대 내면에 진짜 그대가 들어설 때, 모든 것은 달라진다. 그대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거지에서 황제로 변하는 것이다. 이제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진실로 자신의 존재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대는 사랑으로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 지복의 황홀감이 그대에게 차고 넘쳐서 그대의 사랑은 대지를 적시고 허공을 메우며 별들을 어루만질 것이다. 전우주가 그대의 사랑으로 목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다.

 

 

 

 

 

 

 

 

 

 

 

 

 

 

 

 

 

 

 

Cantara

Cantara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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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 Grahu

 

 

 

 

 

 

 

 

 

 

존재계에 맞서지 마라.

그 안에 참여하라.

그러면 어떤 하나됨( oneness )을 느낄 것이다.

 

이 하나됨을 여여(如如)라고 부를 수 있다.

또는 있음(isness), 이것(thisness)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 의미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다 좋다는 뜻이다.

그대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발견해야 한다.

오직 그런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그는 삶이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는 미쳐 자신이 깨닫지도 못했던 염원을

삶이 항상 충족시켜 주었음을 안다.

 

-  오    쇼  -

 

 

 

 

 

 

 

 

 

 

임제가 말했다.

 

홀로 비추는 둥근 달 아래 강산은 고요한데,

나홀로 크게 웃는 소리가 천지를 놀라게 하는구나.“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인간과 인간의 마음을 제외하고 자연을 관찰한다면

모든 것이 지복의 상태에 있다.

 

모든 것이 붓다이다.

 

오직 인간의 마음이문제를 일으킨다.

사념이 없다면 인간 또한

그 풍경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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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계를 자신의 의사대로 바꾸려는 것,

이것이 모든 불행의 근본이다.

그대는 존재계를 바꿀 수 없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p.s : 마음을 버리는 방법

수용적인 자세, 깨어 있는 의식, 주의깊게 듣는 태도, 언어가 아닌 것을 이해하는 것, 침묵에 잠기는 것

 

 

 

 

 

 

 

 

 

 

 

 

 

 

신비신학 - 디오니시우스를 말하다 

 

< 오    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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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 사람에게 알려진다.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해되는 것이다.

 

 

< 케노파니샤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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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의 노래 >

 

 

 

그대는 그것을 잡을 수도 없고

그것을 없앨 수도 없다.

그것을 얻을 수 없으면서 그것을 얻는 것이다.

그대가 침묵을 지킬 때 그것은 말하고

그대가 말을 할 때 그것은 침묵을 지킨다.

 

 

- 영가선사(66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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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 하나만을 알고 있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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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존재를 넘어선 삼위일체이시여,

신비스런 계시의 정상으로 우리를 인도하소서.

모든 생각과 빛을 넘어 승화시키소서.

신성한 진리의 단순하고 절대적인 불변의 신비가

은밀히 계시하는 침묵의 투명한 어두움 속에 숨어 있나이다.

이 어두움은 가장 깊히 모호하지만 또한 눈부시게 명료하며,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뛰어난 아름다움과 장엄함으로

우리의 보지 못하는 마음을 넘치게 채웁니다.

 

 

- 디오니시우스

 

 

 

 

The Hymn (Update Project Ambient M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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