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진리는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다시 또다시 자기 자신의 발로 서야만 한다.
聖人之言
열째날 아침 – 수레를 만드는 사람
나라의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환공이
어느 날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침 수레를 만드는 목수인 윤편이라는 자가
뜰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윤편이 문득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일어나더니
환공에게 다가와 물었다.
“좀 여쭙겠습니다만, 왕께서 지금 읽고 계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들의 말씀이다.”
윤편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성인들은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자 윤편이 말했다.
“그렇다면 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화가 나서 말했다.
“수레를 만드는 목수인 주제에 무엇을 안다고 떠드는 것이냐?
네가 지금 한 말에 대해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지 못하면
목숨이 없어질 줄 알라.“
그 수레를 만드는 자가 말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 일에서 얻은 경험으로 미루어
말한 것일 뿐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렁해서 쉽게 빠져 버립니다.
또 덜 깎으면 조여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게 적절히 손을 놀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퀴가 꼭 맞아 제가 원하는 대로 일이 끝납니다.
그러나 그 기술은 손으로 익혀 마음으로 짐작할 뿐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요령을
심지어 제 자식 놈에게조차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으며
자식 놈 역시 저에게서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이 일흔이 넘어서도 제 손으로
수레바퀴를 깎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진정으로 깨친 사실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못한 채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께서 지금 읽으시는 그 글이
그들이 남기고 간 찌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ᄁᆞ?“
-<수레를 만드는 자의 지혜>
<오쇼 강설>
시간은 허상을 만드는 재주꾼이다.
붓다가 다시 세상에 오면 사람들은 그를 거부할 것이다.
예수가 오늘날에는 숭배받지만 살았을 적에는 십자가에 처형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살아 있으면 사람들은 그를 처형한다.
죽으면 비로소 숭배하기 시작한다.
그를 구세주라고 생각하든, 큰 깨달음에 이른 인물이라고 생각하든,
신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든 그것은 이제 그대의 자유다.
이제 그대는 마음대로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투영할 수 있다.
그가 살았을 때는 그것이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가능하다.
기억하라. 종교는 과학보다 예술에 가깝다.
그리고 예술보다 더욱 오묘한 것이 종교다.
예술은 객관성을 상징하지만, 종교는 주관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객관적인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성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붓다가 니르바나(열반)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외부세계의 것이 아니다.
예수가 하늘나라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객관적인 세계의 어느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객관세계를 상징한다.
반면에 종교는 주관세계를 상징한다.
그것으로부터 세상과 연결된 무엇도 발견할 수 없다.
그대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 의미, 그 중요성을 발견할 수 없다.
그때 ‘신’이라는 단어를 반복하겠지만 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예술 이상의 것, 기술 이상의 것이다.
한 사람의 붓다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나의 돌과 같다.
그는 망치와 끌로 그대에게서 비본질적인 부분들을 깎아나간다.
마침내 본질이 찬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 장엄함이 드러나고, 저쪽 세계가 이쪽 세계 속으로 꿰뚫고 들어온다.
그는 어떤 새로운 것을 이 세계 속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그대를 변화시키고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소유로부터 존재를 분리시켜야 한다.
소유로부터 소유자를 분리시켜야 한다.
육체로부터 영혼을, 주변으로부터 중심을.
그것은 하나의 기술이다.
어떤 화가도 그대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말할 수 없다.
그대는 스승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피카소를 바라보라.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한사람의 창조주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이 탄생하면 그 그림은 저쪽 세계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 아무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붓다가 말할 때, 그는 말하는 자가 아니다.
한 사람의 붓다가 걸어갈 때, 그는 걷는 자가 아니다.
한 사람의 붓다가 그대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그는 그 손이 아니다.
도가 그를 통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을 신이든, 그대가 원하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이제 그 손은 붓다의 손이 아니다. 그것은 도구에 불과하다.
신이 그를 통해 그대를 만지고 있으며, 붓다는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와 신 사이에 서 있지 않다.
인간에게서 신을 만드는 것,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술이다.
언제나 동물이고자 노력하는 인간으로부터 신을 창조해 내는 것,
그 사념을 떨쳐내고 그 에고를 버리게 해 궁극의 것이 내면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
그것은 실로 위대한 기술이다.
그것은 이슬방울 속에 바다를 실현하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차원 높은, 절대의 기술이다.
어떤 경전도 그것을 전할 수 없다.
오작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일 수만 있을 뿐이다.
그런 스승은 1천년에 한 번, 2천년에 한 번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나면 죽은 교파와 종파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숭배하기 시작한다.
뉴델리에 가면 어느 과자 가게의 간판에 이런 문장이 써 있다.
뉴델리에 가면 그 가게를 찾아보라. 그 문장은 이렇다.
‘정말 맛있는 과자! 수백 마리의 파리가 그것을 증명한다!’
인간의 마음은 오래된 것일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리는 술이 아니다. 새롭고 신선한 것일수록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살아있는 것이 더욱 심오하다.
죽은 것은 평면적이다.
그것들은 과거의 찌꺼기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축적된 과거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언제나 늙은 사람만을 죽게 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린아이로 대체시킨다.
이것은 신이 늙은 사람보다 어린아이를 더 믿는 다는 뜻이다.
늙은 사람이 이제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신은 새로운 것을 믿는데 인간은 낡은 것을 믿는다.
신은 그대의 자리에 한 아이를 탄생시킨다.
신은 많은 지식보다 순진무구함을 사랑하는 듯하다.
나이 먹고 빛바랜 나뭇잎보다 연약한 새순을 사랑하는 듯하다.
삶은 강물처럼 흐른다.
고여 있지 않으며, 똑같은 상황을 두 번 다시 연출하지 않는다.
늘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반복될 수 없다.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대가 새로운 것을 느끼지 못하고, 너무도 죽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어느 한 순간도 같지 않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새로운데, 오직 인간의 마음만이 고정되어 있다.
유일하게 낡은 것을 고집하는 것,
세상의 유일한 박물관,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화석을 수집하고 무덤에 집착한다.
도는 늘 다른 동굴에 몸을 숨기고서 말한다.
“나는 어제의 동굴에 숨지 않는다. 그 동굴은 이미 끝났다.
숭배자들은 그 동굴에 대고 절할 것이지만 나는 이미 그곳을 떠났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가?
옛 성인 장자가 남긴 찌꺼기를 읽고 있는가?
Lotus Bloom (feat. Sara Bloom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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