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의미에서의 직관이란 무엇인가?

직관은 자타불이라는 보편적 일체성에 대한 깨달음을 가져오며, 그로부터 진정한 자비가 가능해 진다.


직관의 정의 (Glamor - A World Problem - Certain Preliminary Clarifications에서)


직관이란 사람들을 향해 솟아 나오는 (감성적) 사랑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에 대한 단순한 이해가 아니다. 직관이라 불리는 많은 것들은 단지 유사점들을 알아채고 명료한 분석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오랜 세월을 세상에서 살아왔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온 지성적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다른 사람들의 기질이나 문제점들을 간파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능력을 직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직관은 고차원적인 것이든 저차원적인 것이든 심령능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환영을 보고 침묵의 소리를 듣고, 어떤 가르침에 기쁘게 반응하는 것들로 직관이 작용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직관은 단지 상징을 보는 것만은 아니다. 상징을 보는 능력은 모든 에텔체들이 그 근간을 두고 있는 원형(pattern-forms)들을 생산해 내는 활동을 하는, 우주심(Universal Mind)의 어떤 층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며, 특별한 종류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직관은 영혼의 특권인 통합적인 이해(synthetic understanding)이며, 그것은 오직 영혼이 그 자신의 차원에서 두 방향으로 접근해 갈 때에만 가능해 진다
: 위로는 모나드를 향해서, 그리고 아래로는 통합되어 있고, 아마도(비록 잠깐이라 하더라도) 조화롭게 영혼과 하나됨의 상태에 있는 하위 인격을 향해서. 그것은 제 3비전에서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되는 고도로 내적인 통합의 첫 번째 징표이다.

직관은 보편성의 원리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이며, 그것이 작용하면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 분리감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된다. 그 절정의 지점에서 그것은, 감상이라던가 애정적 반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모든 존재들과의 동일시가 그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그 보편적 사랑(Universal Love)으로서 알려 진다. 그렇게 되었을 때, 진정한 자비를 알게 된다; 또한 그 때에는 그 어떤 비판적 인식이나 생각도 불가능해 진다. 오직 그 때에 만이, 모든 형상들 속에 신성한 씨앗이 잠재되어 있음이 보이게 된다.


직관은 빛, 그 자체이며, 그것이 작용하게 되면, 세상은 빛으로서 보이고 모든 형상들이 가진 빛의 몸들이 점점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와 함께 모든 형상들의 내면에 있는 빛의 중심(영혼)과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며, 따라서, 만물과의 근본적인 관계가 정립되고, 그 어떤 우월감이나 분리감도 뒷 배경으로 물러나 버리게 된다.


따라서 직관은 그것의 등장과 함께 다음의 세가지 품성을 가져온다.

1. 빛의 계시(Illumination) 빛의 계시이란 말은 머리 속의 빛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현상적인 것이며, 진정으로 직관적인 많은 사람들은 그런 빛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내가 언급하고 있는 빛은 구도의 길(the Way)을 비추는 빛이다. 그것은 지성의 빛으로서, 실재로는 마음을 밝히고, 빛 속에 고요히 멈추어 있는 그 정신적 도구(mental apparatus즉, mind) 안에 자신을 반영하는 그런 빛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상의 빛으로서 영원하게 존재하는 실체이지만, 오직 개인의 내면의 빛이 그렇게 인식되었을 때에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온 시대의 빛(Light of the Ages)으로서, 그 날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더욱 더 밝게 빛나는 빛이다. 그러므로, 직관은 각자의 내면에서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각자의 경험 속에서 하나의 사실로서 자신과 우주심과의 완전한 동일성을 인식하고, 각자가 거대한 세계 생명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고, 또한 각자가 영원하고 영속적인 존재 속에 참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2. 이해(Understanding) . 이 말은 모든 형상들의 총체의 밑에 선다 stands under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물러나는 능력, 혹은 형상적 삶과의 오랜 동일시로부터 철수할 수 있는 역량을 포함한다. 문제는 비의적 의미에서 물러나는 것이며, 그러면서 동시에 분리감과 고립감 그리고 우월감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이해를 가진다는 것은 모든 존재들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하위 인격에는 초연함을 유지하는 더 향상된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초연함은 자신의 안위- 육체적인, 정신적인 혹은 영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정적인-에 대한 이기적인 염려 속에서 사랑에 대한 무능력에 기초한 것이기 쉽다. 이해는 통합된 인격으로서 삶과 만나며, 거기에 더해서 전체적 목적들과 계획들에 영혼으로서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성자아와 영혼의 통합과, 폭넓은 경험, 그리고 내면에 거주하는 그리스도 원리의 신속한 활동을 의미한다. 직관적 이해는 언제나 자동적인 것이다. 이해에 추론이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직관의 활동이 아니다.

3. 사랑(Love).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애정어린 감상이 아니며, 사랑하는 기질을 가진다는 것과도 다르다. 이런 두 가지 측면은 부수적인 것이며, 결과적인 것이다. 직관이 발달되면, 애정과 사랑을 표출하는 정신은 필연적으로 그 순수한 형태로서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이런 결과들을 낳는 것은 훨씬 깊고 포괄적인 그 무엇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요구(필요)와 삶에 대한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이해이며, 이것은 신성한 신의 아들이 가진 고귀한 특권이다. 그것은 벽을 쌓아 올리며, 비판하고 분리를 낳는 모든 것들을 거부한다. 그것은 어떤 요구를 이해할 때라도, 아무런 구별도 두지 않으며, 또한 영혼으로서 사랑하는 자의 내면에 사랑의 대상과의 즉각적인 동일시를 낳는다.


이러한 세가지 단어가 직관의 세가지 특성들 혹은 측면들을 요약하는 것이며, 보편성(universality), 혹은 보편적 일체감(the sense of universal oneness)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구도자들이 얻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직관이 현존할 때, 그 극적인 나, 즉 언제나 모든 사건들과 모든 현상들, 모든 집단적 작업을 중심으로서의 자기자신과 연관시키는 능력의 즉각적인 해체가 일어나게 된다.


나는 이 이상으로 직관이란 주제에 대해 더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너무나 광대한 문제이며, 너무나 난해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직관의 세가지 측면들을 그대에게 제시하고 나서, 그대의 삶에 사랑과 빛과 이해로서 결실을 맺게 할 그런 수련과 수행에 자신을 던져 매진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론이 파악되고, 올바른 삶의 재조정이 이루어지며, 필요한 작업들이 완수되었을 때, 지금까지 잠재되어 왔던 송과선 주변의 두뇌세포들은 깨어나고 진동하면서, 그 하위자아는 자기적 영향력을 방사하게 된다. 몸 안의 모든 세포들의 핵은 빛의 초점들이며, 직관의 빛이 감지되면 그 세포의 빛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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