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수행의 원리와 실제




임 승 택*



目次

 

         1. 시작하는 말

        2. 위빠사나의 의의

        3. 위빠사나의 원리

        4. 위빠사나의 실제

        5. 마치는 말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1. 시작하는 말

  부처님께서 최초로 가르침을 펴신 후, 2500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그간 불교는 인도라는 지역을 벗어나 아시아 각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세계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종교적 가르침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불교만큼 고유의 독특한 색채를 흩트리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질적 문화를 탄력성 있게 수용‧발전해 온 종교는 찾기 힘들다.

  불교는 지상의 어느 곳에 전해 졌든 간에 그 지역의 시대적 상황과 문화를 배려한 바탕 위에서 가르침을 펼쳤다. 이러한 포교의 방식은 부처님 당시부터 상대방의 됨됨이에 따라 거기에 맞는 가르침을 펼쳤던 對機說法의 전통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인도 땅을 벗어난 불교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본래의 뜻을 저버리고 각기 다른 가르침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南方佛敎라든가 北方佛敎 따위의 독자적인 명칭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에게 알맞게 계승하려는 시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불교의 실천법은 오늘에 이르러 불교의 포용력만큼이나 다양해 졌다. 더불어 오늘의 세대는 이질적인 문화적 요인들이 동일한 생활 영역 안에 공존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때에 여러 유형의 종교적 실천법들은 나름의 이유와 사명을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소위 말하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觀, 觀法, vipassanā)’ 수행을 테마로 한다. 남방불교란 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을 중심으로 전해져 내려온 上座部(Theravāda) 불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위빠사나’란 ‘觀法’이라는 용어로써 우리에게 일찍부터 알려져 있던 수행법을 지칭한다. 이와 같은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는 북방대승불교의 수행전통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일견 이질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들과의 동질적인 면모를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小乘佛敎라고 하는 貶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방상좌부’는 세계의 종교사를 통틀어 2300년이라는 가장 오랜 전통을 고수해온 종파이다. 그리고 ‘위빠사나’는 부처님께서 직접 개발하시고 유포하신 四念處(cattāro satipaṭṭhānā) 수행법의 전형이다.1)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남방불교의 위빠사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거기에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들이 보다 더 생생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초기불교의 원형에 가까운 양식들이 유지‧보존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들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를 돌이켜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가늠하는데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위빠사나의 의의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에게 과연 어떠한 의의를 지니는가. 이 점에 대해 필자는 이 행법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의거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싶다. 四念處의 위빠사나는 부처님의 유훈으로 전승되어 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가르침으로, ‘自燈明法燈明 自歸依法歸依’ 즉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고 법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는 말씀이 있다. 佛子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구절인데, 바로 이것이 ‘사념처의 위빠사나’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지 않을 것이다. 관련 경전의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난아,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知)과 마음지킴(念)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느낌(受)에 대해...  마음(意)에 대해...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아난아, 이것을 일컬어, 비구가 자신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自燈明)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自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한 법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法燈明)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法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내가 [입멸한] 후에, 자신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또한 법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곧 나의 제자들 중에서 최고의 비구가 될 것이다.”2)


  인용문에 나타나는 내용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3개월 전에 행하신 법문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입멸하신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합니까’라고 아난이 질문을 하자, 이와 같이 답변하신 것이다. 바로 이 법문을 통해 ‘자등명 법등명’의 실제 내용이 사념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유훈으로 전승된 사념처의 수행은 모든 불제자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검증된 가르침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우리의 주변 일각에는 사념처의 위빠사나를 소승의 행법으로 폄하하는 경향들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마지막 유훈으로 남긴 가르침이 四念處觀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이를 소승의 관법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불교라는 종교 안에서 부처님을 능가하는 또 다른 권위를 내세울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법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사념처관의 의의를 설하는 대목이다. 이 행법이 과연 어떠한 의미와 의의를 지니는가에 대해 부처님께서 직접 밝히신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유일한 길(一乘道)이 있다. 이것은 중생을 정화하는 길이며, 슬픔과 근심을 초월하는 길이며,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는 길이며, 지혜를 증득하는 길이며, 열반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것은 곧 사념처(四念處)의 수행이다... ”3) 



3. 위빠사나의 원리


  1) 위빠사나의 원어적 의미

  ‘위빠사나(vipassanā)’라는 용어는 빨리(pāli)어로서 두 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여기에서 ‘위(vi)’라는 말은 ‘분리하다’ ‘쪼개다’ ‘관통하다’ 등을 의미하고, ‘빠싸나(passanā)’는 ‘관찰’ ‘식별’ ‘봄’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빠사나의 온전한 의미를 번역하자면 ‘꿰뚫어 봄(洞察)’이 적당할 것이다. 한역에서는 이를 ‘觀’ 혹은 ‘觀法’으로 번역하여 사용해 왔다.  

  ‘위빠사나’는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의 4가지를 테마로 하는데, 이를 곧 ‘四念處(cattāro satipaṭṭhānā)’ 혹은 ‘四念處觀(cattāro satipaṭṭhānā vipassanā)’이라 한다. 이러한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구체적인 수행의 과정에서 ‘아누빠싸나(隨觀, anupassanā)’라는 말로 대체된다. ‘아누빠싸나’란 어떠한 현상을 ‘지속적으로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몸에 대해 위빠사나를 행하는 것’을 일컬어 ‘까야누빠싸나(身隨觀, kāyanupassanā)’라 하고, ‘느낌에 대해 위빠사나를 행하는 것’을 ‘웨다나누빠싸나(受隨觀, vedananupassanā)’라 한다.

  이와 같이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 anupassanā)’을 이름하여 ‘사념처의 위빠사나’라고 부른다. 이들 4가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따라가며 보면서, 세간에 얽힌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머무는 것이 곧 위빠사나 수행의 요체이다. 관련 경구를 다시 한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知)과 마음지킴(念)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느낌(受)에 대해서는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마음(心)에 대해서는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4)


  인용된 경문은 사념처의 위빠사나에 관련하여 초기불교의 경전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정형구이다. 이 경문에는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 anupassin)’이라는 술어 이외에 ‘알아차림(知, sampajañña)’이라든가 ‘마음지킴(念, sati)’ 따위의 용어가 등장한다. 이들 역시 사념처의 위빠사나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다. 이들은 ‘따라가며 보는 것’에 수반되는 일종의 ‘마음작용(cetasika)’인데, 그와 같은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으로써 몸과 느낌 따위를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이다. 이들 용어는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 원리인 까닭에 별도의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2) 알아차림(知, sampajañña)

  ‘알아차림(知)’이란 편견이나 왜곡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如如, yathātaṁ)’를 분명하게 알아차린다는 의미이다. 즉 몸으로 일어나는 현상, 느낌으로 일어나는 현상 등을 그때그때 명확히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대상은 비단 위에서 언급한 4가지에 국한되지 않으며,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현상들이 포함된다. 경전에서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비구들이여, 비구의 알아차림(知)이란 무엇인가.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나 물러날 때 알아차림(知)으로 행한다. 볼 때나 관찰할 때 알아차림(知)으로 행한다. 구부리거나 펼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겉옷과 발우와 옷을 착용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먹거나 마시거나 먹고 난 이후에나 맛을 볼 때나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에도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이야기할 때에나 침묵할 때에도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곧 비구의 알아차림이다.”5)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싶을 때 자는, 그러저러한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낸다. 그리고 경험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매순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평범한 사실에 대해 순일하게 알아차릴 때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밥을 먹는 경우,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알아차리면서 먹는 시간은 실제적으로 극히 짧다. 밥을 먹는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습관적인 상념 속에서 보낸다. 그리하여 이러저러한 생각과 번뇌 속에서 밥을 먹는다. 일상 그대로를 여여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항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든다. 이것은 일정한 시간동안 지속적인 마음집중을 시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적인 알아차림의 상태를 유지하겠노라 작심하지만, 언제 그러했느냐 싶게 다른 생각에 팔려 있는 경우를 경험하곤 한다.

  따라서 명확한 ‘알아차림’으로 현재에 머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통해 의도하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 충일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습관적인 상념의 굴레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항상 깨어있는 마음상태로 사물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보자는 의미이다.    


  3) 마음지킴(念, sati)

  ‘마음지킴(念)’6)이란 그와 같이 과거와 미래를 정처 없이 넘나드는 마음을 현재의 상태로 되돌리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좌선을 처음 해보는 사람은 자신에게 그렇게도 많은 잡념이 일어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실토하곤 한다. 언제 잡념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고 한참 동안을 끄달려 다닌 후에야, 비로소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알아차림(知)’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러한 ‘알아차림(知)’에 의해 ‘마음을 되돌리는 것’을 ‘마음지킴(念)’이라 할 수 있다.7) 더불어 ‘되돌린 마음을 일정한 상태로 유지‧지속하는 것’을 ‘마음지킴(念)’이라 한다면, ‘그러한 상태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는 것’을 ‘알아차림(知)’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해서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은 위빠사나 수행을 이끌어 가는 한 쌍의 축으로 기능한다. 

  ‘마음지킴’은 ‘잊지 않음(不忘)’이라는 원어적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마음지킴’에 대해 경전에서는 ‘감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 빗대어 설명하곤 한다.8) 이러한 용례들은 마음을 ‘일정한 집중상태’로 유지시키는 기능을 지닌 ‘마음지킴’의 쓰임을 잘 나타낸다. 이 용어에 대해 필자는 선행연구물에서, ������빠띠삼비다막가������ 등의 경설에 나타나는 내용을 근거로,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거나(anupassī) 따라가는 것(anugacchanā)으로서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고, 나아가서는 부차적으로 감지되는(viditā) 여러 현상들을 통해 연기의 이법 등 진리에 대한 자각을 유도하는 것”9)으로 정의한 적이 있다.

  이러한 정의는 이 용어가 ‘사마타(止, samatha)’와 ‘위빠사나(觀, vipassanā)’ 양자 모두에 대해 깊은 연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사마타와 직결된 것이고, ‘연기의 이법 등 진리에 대한 자각’은 위빠사나와 통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지킴’이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양자 모두에 대해 통해 있는 포괄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10) 이러한 까닭에 ‘마음지킴’을 원리로 삼는 위빠사나 수행은 단지 협소한 의미의 ‘위빠사나(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얼마간 ‘사마타(止)’적인 내용 또한 포함한다. 다음의 경구는 이와 동일한 의미의 맥락으로 파악된다. 


“비구들이여, 마치 옷에 불이 붙어 있고 머리에 불이 붙어 있어, 옷과 머리(의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극단적인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과 물러남이 없는 마음지킴(念, sati)과 알아차림(知, sampajañña)을 행해야 한다. 바로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러한 선한 법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과 물러남이 없는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연후에, 그는 ‘안으로 마음의 가라앉음(內心寂止=사마타)’과 ‘탁월한 혜로써 보는 법(增上慧法觀=위빠사나)’을 얻게 된다.”11) 

  

  원리적 측면에서 볼 때,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동일한 비중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마음지킴’은 보다 더 광범위한 용례와 쓰임을 지닌다. 사념처의 원어인 ‘cattāro satipaṭṭhānā’를 그대로 직역하면 ‘4가지 마음지킴의 확립’이 된다. 더불어 팔정도의 ‘sammāsati(正念)’라든가, 호흡관법으로서의 ‘ānāpānasati(安般守意)’등에도 한결같이 이 용어가 등장한다. 이들 모두는 결국 ‘마음지킴’의 수행체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지킴’은 실제 수행에서 요구되는 하나의 기능임과 동시에, 수행법 자체를 대변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에 의해 ‘있는 그대로(yathātaṁ)’를 여실하게 보고 아는 것을 일컬어 ‘如實智見(yathābhūtañāṇadassana)’이라 이름한다. 이러한 ‘여실지견’이야말로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올바르게 보도록 하여, 일체의 현상에 대해 탐욕과 번뇌를 낼만한 무엇이 없음을 깨달아, 궁극적으로는 ‘열반(nibbāna)’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곧 위빠사나이다.


  4) 진리에 대한 지각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에 의해 위빠사나를 행해 나갈 때, 수행자는 비단 ‘몸’이나 ‘느낌’ 따위의 직접적인 관찰대상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여러 현상에 대해서도 훤하게 깨여있는 상태를 체험한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지혜(paññā)’의 개발을 본분으로 하는 위빠사나의 원리를 규명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감지된다(viditā honti)’고 하는 형식으로 설명한다. 관련 문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긴 들숨과 날숨의 힘에 의해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을 알아차릴 때,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느낌(受)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의 특성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想)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사유(尋)가 일어난다.....    ‘무명의 일어남(集)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조건(緣)에 의한 일어남(paccayasamudaya)의 의미로 느낌의 일어남이 감지된다(vidito hoti)....   ‘무명의 소멸로부터 느낌의 소멸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느낌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지각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사유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12)


  인용문은 일차적인 관찰대상으로서 ‘코끝’ 혹은 ‘면상’에 대해 ‘마음지킴을 확립하고난 후(satiṃ upaṭṭhapetvā)’에 진리가 체득되어지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13) 이 문구에서 핵심이 되는 용어는 ‘감지되는 것(vidita)’이다. 이 ‘감지되는 것’의 원어로 사용된 ‘vidita’는 동사원형 ‘√vid(보다, 알다, 경험하다)’에서 기원한 말로서, 과거수동분사‧복수‧주격의 문법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이 용어에 의해 수식을 받는 ‘느낌’‧‘지각’‧‘사유’ 따위는 수행자의 자발적 의지와 상관이 없이 저절로 드러나 포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조건(緣, paccaya)’에 의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감지된다’는 의미이다.

  ‘마음지킴(sati)’에 의한 위빠사나 수행이 단순하게 ‘평정상태(samatha)’만을 의도하는 것이라면, 일차적인 관찰대상 즉 ‘코끝’이라든가 ‘배의 움직임’ 따위에 대해 집중된 상태에만 논의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그와 같이 집중된 상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낌(受)’ 따위의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피동적으로 ‘감지된다(viditā honti)’는 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부각시키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인용문에 제시된 내용으로서, 느낌(受, vedanā)‧지각(想, saññā)‧사유(尋, vitakka) 등은 수행의 과정에서 포착되는 일체의 모든 것을 망라한다고 할 수 있다.14) 그런데 이들 부차적인 포착의 대상들은 ‘코끝’이라든가 ‘면상’ 혹은 ‘배의 움직임’이라고 하는 직접적인 마음지킴의 대상으로부터 의식이 분산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깊은 선정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들로서 다름 아닌 번뇌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일어남과 사라짐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고갈되어 없어질 때까지 과도적으로 존속하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인용문에 나타나듯이, 이들은 인위적인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기 위한 매개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無明의 일어남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일어남의 의미로 느낌의 일어남이 감지된다....   무명의 소멸로부터 느낌의 소멸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느낌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는 따위의 언급이 그것이다. 바로 이 내용은 직접적인 관찰대상 이외의 것에 대해서도 깨여있는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조건성(緣, paccaya)’에 대한 자각을 내용으로 하는 ‘지혜(paññā)’의 개발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이상에서 기술한 위빠사나의 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위빠사나’란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이라는 두 가지 요인을 통해 마음의 방황을 멈추고 현재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한다. 더불어 위빠사나는 그 과정에서 폭넓게 감지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을 매개로 진리에 대한 지각을 유도하는 행법이다. 이와 같이 ‘알아차림(知, sampajañña)’‧‘마음지킴(念, sati)’‧‘감지되는 것(viditā)’의 세 용어는 위빠사나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들이다.




4. 위빠사나의 실제


  1) 사념처(cattāro satipaṭṭhānā)의 세부내용

  사념처의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관찰대상으로서의 4가지란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이다. 그런데 이들은 수행의 과정에서 포착되는 모든 현상들을 총괄적으로 아우르는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이들 4가지 각각은 또 다른 세부항목들을 지닌다.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大念處經, Dīghā-nikāya, vol.2. pp.290-315)에 나타나는 이들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몸에 대한 마음지킴 ① 호흡의 출입에 대한 알아차림

          (身念處)       ② 몸의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

                         ③ 몸의 행동에 대한 알아차림

                         ④ 몸의 구성하는 32가지의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⑤ 몸의 4대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⑥ - ⑭ 몸의 부패과정을 9단계로 관찰


(2)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  ①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受念處)        ②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③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④ 속된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⑤ 속되지 않은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⑥ 속된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⑦ 속되지 않은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⑧ 속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⑨ 속되지 않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                               차림


 (3)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  ① - ② 탐욕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心念處)         ③ - ④ 분노가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⑤ - ⑥ 어리석음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⑦ - ⑧ 산란함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⑨ - ⑩ 넓은 마음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⑪ - ⑫ 우월한 마음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⑬ - ⑭ 고요한 마음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⑮ - ⑯ 해탈한 마음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4) 법에 대한 마음지킴   ① 다섯 장애(五蓋)에 대한 알아차림

         (法念處)          ② 다섯 집착된 온(五取蘊)에 대한 알아차림

                           ③ 여섯 터전(六入處)에 대한 알아차림

                           ④ 일곱 깨달음의 요소(七覺支)에 대한 알아차림

                           ⑤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 八正道)의 법에 대한

                              알아차림


  이상과 같은 사념처의 세부항목은 수행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을 4가지 유형으로 종합‧분류한 것이다. 현재 미얀마나 태국 등지에서 위빠사나를 지도하는 스승들은 바로 여기에 열거된 세부항목에 근거하여 고유의 家風으로 가르침을 펼친다.15) 

  예컨대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계통의 수행센터에서는 ‘몸에 대한 마음지킴’의 ②와 ③의 항목에 비중을 두는 수행법을 가르친다. 또한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을 독자적으로 계승한 쉐우민 사야도(Shwe Oo Min Sayadaw)의 경우에는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을 위주로 하는 위빠사나를 가르친다. 이들은 예비적인 선정을 익히지 않고서도 행할 수 있는 ‘순수 위빠사나(純觀, suddhavipassanā)’를 가르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16)

  한편 재가자로서 인도에서 널리 활약하고 있는 고앤까(S. N. Goenka)는 ‘몸에 대한 마음지킴’의 ①항목과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에 비중을 둔 위빠사나를 가르친다.17) 그 이외에 모곡 사야도(Mogok Sayadaw)는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과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을, 순룬 사야도(Sunlun Sayadaw)는 독특한 ‘정화 호흡법’과 함께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에 비중을 둔 위빠사나를 가르친다. 이들의 가르침 역시 일상적인 삶 속에서 포착 가능한 대상들을 위빠사나의 주제로 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러나 파웃 사야도(Paaut Sayadaw)와 같이 ‘사마타(止)’를 먼저 익히게 한 다음, 위빠사나로 전향시키는 경우도 있다.18) 그의 가르침에는 일정기간 ‘몸에 대한 마음지킴’의 ④항목에 속한 뼈‧골수‧콩팥 등에 대한 관찰법과 함께, ������위숫디막가(pp.123-126)������에 기술되어 있는 ‘까시나(kasiṇa) 명상법’이 포함된다고 한다. ‘까시나 명상법’이란 마음의 집중을 얻기 위한 ‘도구’로서 ‘까시나’를 이용한 선정수행을 가리키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집중력이 전제되어야 한다.19) 따라서 파웃 사야도의 가르침은 순수한 위빠사나라기 보다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혼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스승들은 제각기 다른 禪風을 전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위에서 열거한 사념처의 세부항목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또한 실제 수행에서 사념처의 4가지는 엄격히 분리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위빠사나의 힘이 증장되면 눈‧귀‧코‧혀‧몸‧마음의 감관에 와 닿는 모든 정신적‧육체적 현상들이 기민하게 포착된다. 이때가 되면 사념처의 4가지에 대한 구분은 큰 의미를 잃는다.

  즉 특정한 대상에 편중됨이 없이 일체의 현상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위빠사나를 행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는 “초보적 수행단계에서는 특정 대상을 중심으로 관찰을 해야 하지만, 수행이 진척되면 6근의 영역 전체로 관찰대상을 확대해야 한다”20)고 가르치며, 쉐우민 사야도(Shwe Oo Min Sayadaw) 또한 “처음 수행을 해 나갈 때는 ‘내(puggala)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수행을 오래 하다가 보면 법(dhamma)이 저절로 드러나 이끌어 준다”21)고 언급한다. 그러한 설명에 비추어 볼 때, 여기에서 소개한 각각의 선풍과 그것에 따른 수행법들은 결국 초보 수행자를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지속적인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으로 위빠사나를 진행해 나갈 때, 수행자는 ‘다섯 장애(五蓋)’를 극복하게 되고, ‘여섯 입처(六入處)’‧‘일곱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 八正道 포함)’를 깨닫게 된다. 사념처의 맨 마지막 항목으로 등장한 ‘법에 대한 마음지킴(法念處)’이 곧 그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열거했던 사념처의 세부항목 중에, 주된 관찰의 대상은 몸(身)‧느낌(受)‧마음(心)의 3가지이며, 마지막의 ‘법에 대한 마음지킴’은 수행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 위빠사나의 실천

  이상과 같이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이라는 2가지 원리를 통해, 사념처의 4가지에 대한 관찰로 이어지는 차제적인 순서를 거친다. 그런데 이들 과정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배양되는 ‘마음지킴의 힘’과 ‘알아차림의 힘’은 비단 일상적인 삶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니까야에는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경우(Dīghā-nikāya, vol.2. p.99등)가 여러 차례 등장하며,22) 심지어는 죽음에 임하는 순간이라든가, 죽고 난 이후에 다른 생을 선택할 때에도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으로써 행한다는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다. 관련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난아, 그와 같이 보살은 도솔천에서 몸이 죽고 난 후,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을 지니고서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갔다.....    아난아, 그와 같이 보살은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을 지니고서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태어났다...  아난아, 그와 같이 여래는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을 지니고서 목숨의 형성력(命行)을 포기한다... ”23)


  인용된 내용은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 원리인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이 과연 어떠한 범위에 이르기까지 기능하는가를 단편적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모든 수행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 대목은 夢中一如라든가 寤寐一如의 경지에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위빠사나 수행이 生死一如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인용구에 나타나는 내용은 부처님과 같이 고원한 경지에 계신 분이나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까닭에 실제 수행자에게 위빠사나 수행이 어떤 공덕을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달리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경구를 인용해 본다.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즐거운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면, 탐욕의 부림(使)을 받아, 거기에서 떠날 길을 보지 못한다.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 괴로운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면, 성냄의 부림을 받아, 거기에서 떠날 길을 보지 못한다....     만일 비구가 정진하여 바른 지혜가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느낌에 대해 지혜로써 알아차린다. 모든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게 되면, 현재의 법에서 온갖 번뇌가 아주 다하게 되나니, 지혜에 의존하여 목숨을 마치게 되고, 열반에 들어 중생의 목숨을 받지 않는다.”24)    


  인용된 경구는 ‘느낌(受, vedanā)’을 중심으로 사념처의 공덕을 이야기한 대목이다. 어떠한 느낌이 발생하면 그 느낌을 곧바로 알아차려, ‘탐욕(愛, taṅhā)’과 ‘집착(取, upādāna)’ 따위의 번뇌가 발생할 여지를 차단하여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그와 같이 행할 때 온갖 번뇌가 다한 열반의 공덕이 기대된다는 의미이다.

  이 경구와 관련하여 필자는, 모곡 사야도(Mogok Sayadaw)의 해설을 간략히 소개해 본다.25) 그분의 가르침에 따르면 12연기의 流轉 과정에서 ‘무명(avijjā)’에서부터 ‘느낌(vedanā)’까지의 지분은 전생의 업력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다. 즉 현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개개인에게 다가오는 조건들이다. 그러나 ‘느낌’ 이하의 지분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다.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위빠사나이다.

  위빠사나가 진전됨으로 인하여 수행자는 모든 느낌(受)들이 일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감각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체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해 ‘탐욕(愛)’과 ‘집착(取)’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이 원만해 졌을 때, 재생으로 통하는 업력이 힘을 잃게 되고, 마침내는 ‘무명(avijjā)’ 자체가 종식된 ‘지혜(vijjā)’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위에서 인용한 “모든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게 되면, 현재의 법에서 온갖 번뇌가 아주 다하게 되나니, 지혜에 의존하여 목숨을 마치게 되고, 열반에 들어 중생의 목숨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그와 같은 모곡 사야도의 해설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념처의 위빠사나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갖가지 느낌의 유혹에 노출된 채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삶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그러한 유혹을 인위적으로 멈추게 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매순간의 ‘느낌’들을 곧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인해 야기되는 탐욕과 애착에 끄달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단한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용구에 나타나듯이 ‘즐거운 느낌’을 하나의 ‘감각현상’으로 즉각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의 실제를 놓치게 된다. 그리하여 거기에 대해 ‘탐욕(愛, taṅhā)’을 일으키게 되고, ‘집착(取, upādāna)’에 빠지게 된다. 탐욕과 집착에 얽혀 새롭게 야기되는 ‘존재(有, bhava)’를 일으키고, ‘늙음과 죽음(老死, jarā-maraṇa)’의 굴레에 빠져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러하듯이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12연기의 교리적 해석과도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지평에서 현실적인 삶으로부터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담지해 낸다.   

  마지막으로 본 소절을 마치는 시점에서, 이러한 사념처의 위빠사나를 과연 얼마만큼 해야 하는가를 밝히는 법문을 소개한다. 수행에 필요한 기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제는 기간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됨됨이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으로라도 사념처의 공덕을 밝힐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무언가 절박함이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四念處)를 7년 동안 행한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 결과 중에 어느 한 가지가 기대된다. 즉 현재의 상태에서 아라한의 경지(阿羅漢果)를 얻든지, 남은 번뇌가 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음(不還果)을 얻게 된다. 7년이 아니라 6년, 5년, 4년, 3년, 2년, 1년이라도....  일년이 아니라 7개월이라도.... 7개월이 아니라 6개월, 5개월, 4개월, 3개월, 2개월, 1개월, 보름이라도.... 보름이 아니라 7일 동안이라도, 이 사념처를 열렬히 수행한다면 두 가지 결과 중 어느 한 가지가 기대된다. 즉 현재의 상태에서 아라한의 경지를 얻든지 남은 번뇌가 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음을 얻게 된다.... ”26) 



  5. 마치는 말

  이상과 같이 위빠사나의 원리와 실제에 대해 살펴 보았다. ‘위빠사나의 의의’에 관한 장에서 필자는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의거하고 있으며, 또한 부처님의 유훈으로 남겨진 실천법이라는 점을 규명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불제자들에게 검증된 행법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위빠사나의 원리’에 관한 장에서는 ‘위빠사나의 원어적 의미’와 함께, 이 행법의 구체적 실천 원리로서 ‘알아차림(知, sampajañña)’‧‘마음지킴(念, sati)’‧‘감지되는 것(viditā)’ 등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들 3가지 요인들은 사념처의 위빠사나 수행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들이며, 별도의 기능과 영역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sati’ 즉 ‘마음지킴’은 ‘주의집중’의 의미와 통해 있고, ‘sampajañña’는 말 그대로 ‘알아차림’의 뜻인 반면에, ‘viditā’는 ‘깨어있음의 상태’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들 3가지 기능은 실제의 위빠사나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행해지는 까닭에 분명하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각각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위빠사나 수행의 특성을 아는데 매우 중요하다.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은 일단 적극적인 의지를 지니고서 행해 나아가야 하는 성격을 지닌다. 반면에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의 ‘육체적‧정신적 현상(saṅkhārā)’은 저절로 드러나 포착되는 특성을 지닌다. 더불어 ‘마음지킴’은 마음의 방황과 혼란을 막는 것에 비중이 실린 개념이며, ‘알아차림’은 현재의 상태에 대한 즉각적인 앎을 그 기능으로 한다. 

  한편 ‘위빠사나의 실제’를 다룬 장에서는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大念處經)에 나타나는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소개하였고, 또한 이것을 현재 미얀마나 태국 등지에서 행해지고 있는 실제 위빠사나와 관련지워 설명하였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스승들은 바로 거기에 나타나는 내용에 근거하여 고유의 가풍으로 가르침을 펼친다. 

  남방불교의 禪師들에 의해 전수되는 위빠사나 행법은 구체적인 실천 방식에서 약간씩 다른 모습을 취한다. 그러나 Mahāsatipaṭṭhāna-

Suttanta에 나타나는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략 일치한다. 또한 실제 수행에서 사념처의 4가지는 엄격히 분리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위빠사나의 힘이 증장되면 모든 감각기관에 와 닿는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을 기민하게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개략적으로 소개한 각각의 선풍과 그것에 따른 수행법들은 결국 초보 수행자를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위빠사나의 실천’과 관련하여, 필자는 모곡 사야도의 해설을 통해 위빠사나 수행이 12연기의 교리체계와 맞물려 있음을 조명하였다. 위빠사나가 진전됨으로 인하여 수행자는 모든 ‘느낌(受)’들이 일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감각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체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해 ‘탐욕(愛)’과 ‘집착(取)’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위빠사나에 대한 이러한 해설은 갖가지 ‘느낌’의 유혹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느낌’ 자체를 인위적으로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의 실상을 곧바로 알아차림으로써, 그것에 의한 끄달림으로 인해 발생하는 ‘탐욕’과 ‘분노’를 미리 방지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숙달함으로써 끝없이 이어지는 ‘업의 순환(輪廻, saṁsāra)’을 약화‧단절시킬 수 있다. 바로 그것이 가능하도록 고안된 행법으로서, 사념처의 위빠사나가 갖는 의의를 정리할 수 있겠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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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On the Principle and Practice of Vipassanā



  In this paper I have examined the principle of Vipassanā and its practice. In the chapter with regards to the meaning of Vipassanā, I confirm that Cattāro Satipaṭṭhānā Vipassanā is originally based on Buddha's teaching and it is also the way of practice which Buddha left to his disciples as his last instruction. Thus, I emphasized that Cattāro Satipaṭṭhānā Vipassanā is the way of practice which can be verified by all Buddhists.

  In the chapter with regards to the principle of Vipassanā, I examined an original meaning of Vipassanā and its functional concepts like sampajañña, sati, viditā, etc. These three concepts are essential in practice of Vipassanā. Through the three concepts we are able to understand characteristics of Vipassanā more clearly.

  On the other hand, in the chapter with regard to practice of Vipassanā, I introduced briefly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 connecting its content with Vipassanā which was being practiced in Myanmar, Thailand, etc. The masters of Vipassanā in southern Buddhism teach their disciples in their own ways, which are based on this sutra.

  The teachings by the masters of southern Buddhism are a little different from each other. Yet, what is more important is that they are not beyond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 Moreover, even four forms of Satipaṭṭhānā cannot be said to be separated from each other. As the power of Vipassanā grows, one can be keenly aware of his physical and mental phenomena. So all practices with southern masters of Vipassanā introduced in this paper can be said to be expedients for beginners of Vipassan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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