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 강론
서양의 붓다
오쇼라즈니쉬 강의 / 손민규 옮김
Much learning does not teach understand.
You could not discover the limits of the soul even if you
traveled every road to do so such is the death of the meaning.
많은 학식도 이해를 가르쳐 주지는 못하네,
모든 길을 여행해 보아도
영혼의 한계를 발견할 수는 없으리니,
그 의미는 너무나 깊고 깊어라.
하나, 숨은 조화 - The hidden harmony
드러난 것보다 숨은 조화가 훨씬 낫다.
대립은 화합을 가져오고
불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생겨난다.
만물은 변화 속에서 안식을 발견 하나니
자신과 불화를 이루는 것이
어떻게 자신과 일치되는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수금(竪琴)과 활의 경우처럼
구부러진 등에도 조화는 있다.
활의 이름은 삶이지만
그 일은 죽음이다.
(사랑은 계속되는 허니문의 관계를 말한다. 허니문이 끝나고 모든 것이 안정되면 그것은 이미 죽은 사랑이다, 안정된 모든 것은 죽은 것이다. 삶은 안정이 없는 움직임을 통해 유지 된다. 안전한 것은 이미 무덤 속에 묻힌 것과 같다.)
둘, 잠들어 있는 사람들 - Fast asleep even while awake
인간은 잠들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동안에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귀머거리와 같다
아무리 그들이 듣는다 해도.
그들에게는 이런 말이 어울린다.
“그들은 어디에 있건 그 자리에 있지 못한다네.”
잠든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
깨어난 사람들은 공통된 하나의 세계관을 갖지만
잠자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적인 세계를 갖는다.
깨어있을 때에는 무엇을 보든 죽음이고,
잠자고 있을 때에는 무엇을 보든 꿈이다.
(사랑을 통해 비상할 때, 그 사랑은 아름답다. 반면, 사랑을 통해 추락할 때 그 사랑은 더럽고 추하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대는 이 사랑이 독약이라는 것을 곧 깨달을 것이다. 그 사랑은 구속이 된다. 그대는 사랑의 올가미에 걸렸다. 자유가 파괴되고 날개가 잘렸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 사랑에 빠짐으로써 그대는 소유물이 된다. 그대는 상대방을 소유하는 동시에 상대방이 그대를 소유하도록 허용한다. 그대는 물건이 된다. 그리고 상대방을 물건으로 전락시키려고 애쓴다.)
예수는 말한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장사 지내게 하라.”
시간이 세상이라면 영원은 신이다. 수평적 차원이 세상이고 수직적 차원이 신이다.
“신이여 당신 뜻대로 하소서”
시간 속에서 죽어라. 그러면 영원 속에서 부활한다.
마음의 세계에서 죽어라. 그러면 의식의 세계에서 살아난다.
생각의 차원에서 죽어라. 그러면 각성의 차원에서 태어난다.
셋, 지혜는 하나다 - Wisdom is one and unique
이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들,
중용을 지키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중용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덕이다.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행하며,
사물의 본질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데
지혜가 있나니.
로고스가 아니라 내말에 귀를 기울여
만물이 하나임을 시인하는 것이 지혜다.
지혜는 하나다.
만물을 조종하는 지성,
만물을 통하여 그 지성을 아는 것이 지혜다.
지혜는 유일무이하다.
이 지혜는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않는 동시에
또 그렇게 불리기를 바란다.
넷, 신은 낮인 동시에 밤이어라 - God is day and night
신은 낮인 동시에 밤이며,
겨울인 동시에 여름이다.
그는 전쟁인 동시에 평화이며,
풍족함인 동시에 결핍이다.
바닷물은 순수한 동시에 불결하다.
물고기에게는 마실 수 있으며 유익한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마실 수도 없고 치명적인 것이다.
낮과 밤의 본질은 하나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하나이며 똑같다.
잠자는 사람들도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에
동참하고 협조한다.
원안에서 시작과 끝은 하나다.
신은 인격체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의 문이 될 것이다. 특히 유태교인, 기독교인, 모하메드 교인들은 신을 인격체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이것이 문을 닫아 버린다. 신을 인격체로 보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다. 성경에서는 신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 인 것 같다. 인간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창조했다. 그런데 인간은 제각기 다르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은 에너지이다. 신은 절대적인 각성이다. 신은 지복이며 환희다. 정의 될 수도 없고 한계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원히 존재한다. 신은 전체를 의미한다.
선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도의 길로 들어가기 전에 강은 강이고, 산은 산이다. 도의 길로 들어서면 강은 강이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하면 다시 강은 강이고 산은 산이다”
인간이 곤경에 처한 것은 항상 선택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항상 균형을 잃고 있다. 모든 사회와 문명이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모든 것을 선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성 우월적인 사회, 전쟁 지향적인 사회를 만들었다. 여자는 완전히 무시당한다. 여자는 끼어들 여지조차 없다. 여자는 어둠, 평화, 침묵, 수동성, 자비다. 여자는 만족이지 욕망이 아니다. 반면 남자는 욕망이다. 남자는 흥분, 모험, 전쟁이다. 항상 어디론가 헤매고, 어딘가에 도달하 려 하고, 항상 무엇 인가 찾아다닌다. 남자는 방랑자이고 여자는 가정이다. 이 둘이 만날 때, 방랑자와 가정, 욕망과 만족, 능동성과 수동성이 만날 때 최고의 조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숨은 조화다.
다섯, 그 의미는 너무나 깊고 깊어라 - Such is the depth of its meaning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임의적인 추측을 만들지 말자.
많은 학식도 이해를 가르쳐 주지는 못하네.
금을 찾는 사람들은
깊이 땅을 파헤치지만
얻는 것은 거의 없으리라.
모든 길을 여행해 보아도
영혼의 한계를 발견할 수는 없으리니,
그 의미는 너무나 깊고 깊어라.
어떤 것에 전적인 관심을 쏟을 때, 그것이 진지함이다. 어떤 것을 수단으로 보고 관심을 기울일 때 그대는 교활하다. 그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대는 착취한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길을 이용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길이 곧 목적지다. 종교적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디에 있건 그곳이 목적지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이 사람이 목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의 삶 전체가 내게 집중되어 있다. 달리 갈 곳이 없다. 이 순간을 전체적으로 즐기고 누려야 한다.
이런 사람이 종교적인 사람이다. 그는 어디로 갈지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아침 산책을 즐길 뿐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직장에 출근할 때와 아침 산책을 나갈 때 같은 길을 걷는다고 하자. 길은 똑같다. 모든 것이 똑같다. 집도 똑같고 그대도 똑같다. 그대의 다리도 똑같다. 그러나 아침 산책을 나갈 때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종교적인 사람은 아침 산책을 하듯이 살아간다. 그리고 비종교적인 사람은 직장에 나가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는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세속적인 사람은 목적을 지향한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상관없다. 세속덕인 것이든 신이든 그는 목적을 지향한다.
반면, 비세속적인 사람은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산다.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집중된다. 이때 지금 이 순간은 무한(無限)이 된다. 아무리 많은 길을 걸어도 무한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남는다. 이것이 아름다움이다. 만일 도달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만일 그대 자신을 알 수 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때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 권태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권태는 결코 오지 않는다. 삶은 영원히 이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삶은 무한에서 다른 무한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마음만으로 듣지 말고 가슴 깊이 새겨라.
여섯, 여기에도 신은 있다 - Here, too, are the gods
몇 명의 방문객이 뜻하지 않게
헤라클레이토스를 찾아갔을 때
그는 불가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기에도 신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을 탐구했다.
시간은 장기를 두는 아이와 같으니,
왕권이 그의 것이니라.
광신은 신격화된 질병이다.
다시 아이가 될 수 있다면 그대는 모든 것을 이룬 것이다. 반면, 다시 아이가 될 수 없다면 그대는 모든 것을 놓친 것이다. 성자는 다시 태어난 어린아이다. 처음으로 태어난 아이는 진짜 아이가 아니다. 그는 어른으로 성장해야 한다. 두 번째 탄생이 진정한 탄생이다. 두 번째로 태어나는 사람은 스스로를 탄생시킨다. 이것이 변형이다. 그는 다시 아이가 되었다. 그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냥 살 뿐이다. 어떤 순간이 오건 그는 그 순간과 함께 움직인다. 그에게는 계획이 없다.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겉으로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진짜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신도 없고 악마도 없다. 아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성자는 “신은 여름이며 겨울이다. 신은 평화이며 전쟁이다. 신은 악마이며 선이다.”라고 말한다. 성자에게는 모든 도덕률이 사라진다. 모든 구별이 사라진다. 만물이 성스럽고 모든 장소가 신성하다.
명심하라. 어떤 목적을 추구하면 삶 전체를 잃을 것이다. 삶에는 아무 목적도 없다. 삶은 목적 없는 놀이다. 삶은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다. 그저 삶 자체를 즐길 뿐이다.
이것은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의 마음은 수학적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삶에는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다. 마음은 즉각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왜 사는가? 왜 자살하지 않는가?” 하고 반문한다. 보라 의미가 있으면 모든 것이 추해진다. 삶이 사업처럼 된다. 목적이 있으면 삶 전체가 시(詩)를 잃어버린다.
삶에 시가 존재하는 것은 이 삶에 아무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일곱, 지혜로운 영혼은... - A dry soul is wisest and best
취한 사람은 어린아이에게 끌려간다.
그는 어디에 가는지도 모르면서 비틀거리며 따라간다.
그의 영혼은 젖어 있으므로.
영혼은 축축해짐으로서 쾌락을 얻는다.
건조한 영혼이 가장 지혜로우며 최상의 것이다.
의식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생물학적 속임수나 자연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깨어있는 의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이때 그대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일어난다.
이때에는 사랑자체가 통합적인 힘이 된다.
사랑자체가 깨어있음이 된다.
관계 속에서 그대는 더욱 더 깨어있게 된다.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필 뿐, 타인을 이용하지 않는다. 나누어 주기만 할뿐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통해 그대 또한 자유로워진다.
두 사람은 궁극으로 가는 여행길에서 좋은 동반자가 된다.
그들은 서로를 돕는다.
이 길에는 함정이 많다.
길은 멀고 여행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고통과 번뇌, 행복, 침묵 등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질 동반자가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정신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사람,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을 기탄없이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 무슨 일이 닥쳐도 그대를 도와줄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선할 때나 악할 때나, 화를 낼 때나 행복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그대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변함없이 그대를 사랑해 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 이런 동반자를 갖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을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은 조건을 달지 않는다.
사랑은 무조건이다.
의식적인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 전혀 다른 현상이다.
의식적인 사랑은 아주 드물긴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상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대의 사랑은 마약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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