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릴지브란과 예언자에 대하여

 오쇼 라즈니쉬

 

 

 

 

 

칼릴 지브란...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황홀하고 기쁘다.

그에게 견줄  만한 다른 이름을 떠올린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단순히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가슴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과 맞닿아  있다.

칼릴 지브란, 그는 순수한 음악, 하나의 신비이다.

오직 시인만이 그를 이해한다. 그것도 어쩌다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대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세상이 여러 번 바뀌고,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칼릴 지브란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으로도 과연 그처럼 인간의 영혼 깊은 곳을 꿰뚫어볼 줄  알고, 또한 우리를 둘러싼 미지의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간직한 인물이 나타날지 나는 자신할 수 없다.

 

  칼릴 지브란, 그는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이다.

인간의 언어로 비록 한 조각이나마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인간의 언어와 의식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신비가, 시인, 창조적인 영혼들이 칼릴 지브란을 통하여

손을 맞잡고 노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도  그는 그것이 진리 전체가 아니라, 진리를 흘끗 들여다본 것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대여, 진리를 흘끗 들여다 보는 일이 바로 그대를 궁극의 진리, 절대 진리, 우주적인 진리로

인도하는 순례의 첫걸음이다.

 

역시 아름다운 사람인 클로드 브래그든(Claude Bragdon)은 칼릴 지브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의 힘은 어떤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에서 솟아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우주적이고 무한한 힘이 나올 리가 없다.

하지만 그  힘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한 웅장하고 찬란한 언어는 오로지 칼릴 지브란 자신의 것이다."

나는 브래그든의 이 말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한 송이  아름다운 꽃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별들이 찬란한 하늘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충분히  그것들을 감상할 수 있다. 나는 동의하는 것과 감상하는 것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둔다.

그리고 만일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깨인 사람이다. 만일 그 차이를 구분할 줄 모른다면,

그는 아직 원시적이고 미개 의식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브래그든이 한 말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한다.

동시에 나는 그가 한 말이 단지 추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그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는 말한다. "그의 힘은 어떤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에서 솟아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우주적이고 무한한 힘이 나올 리가  없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이론적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체험의 뿌리가 없다.

그는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칼릴 지브란을 통하여 흘러나온다는  것을 느끼지만, 확신할 수가 .

또한 확신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다. 자신이  체험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칼릴 지브란의 아름다운 언어에 무한한 감명을 받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한 편의 시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 그 자신은 그것을 맞보지 못했다.

그는  칼릴지브란을 사랑하지만, 칼릴 지브란으로 살지는 못한 것이다.

 

나에게는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에 대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그대에게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먼저, 그는 확실히 위대한 시인이다. 어쩌면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시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신비가가 아니다.  시인과 신비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쩌다가 시인은 문득 신비가의 자리에 있게 된다. 그 드문  순간에, 장미꽃이 그에게 쏟아져 내린다.

매우 드문 그 경우에, 시인은 거의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와 같은 깨달은  사람이 된다.

하지만 기억해 두라, 나는 '거의'라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드문 순간들이 왔다가 가버린다. 그는 그 드문 순간들의 주인일 수가 없다.

그  순간들은 산들바람과 향기처럼 왔다가, 그대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 가버린다.

시인의 천재성이란 바로 그러한 순간들을 언어로 포착하는 일이다.

그러한 순간들은 그대의 삶 속에도 역시 찾아온다. 그것들은 거저 나누어 주는 존재의 선물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대 내면에 진리 추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섬광이다. 

언젠가는 그러한 순간이 바로 그대의 삶 자체가, 그대의 피와 뼈와 골수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것으로 숨쉬게 될 것이며, 그대의 심장은 그것으로 고동칠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절대로  잃어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대 자신이 원한다고 해도.

시인은 몇 순간만 신비가이며, 신비가는 영원히 시인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의문을 낳는다.

아무도 그 의문을 풀지 못했다.

 

여기 한 가지 해답이 있다. 이  의문은 수없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시인은 섬광과도  같은 몇 순간만을 체험하는 데에도 그토록  많은 아름다움과 그토록 많은 시를  창조할 수 있다.

그의 손이 가 닿는 순간 단어들은 생명을 얻고 살아난다. 그런데 신비가들은 어째서 그러한 시들을 쓸 수가 없었는가?

그들은 하루 스물네 시간을 밤낮으로 그러한 창조적인 상태 속에서 지내지만, 그들의 언어에는 시인 같은 아름다움이 없다.심지어 고타마 붓다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도  칼릴  지브란이나  미하일  나이미(Mikhail  Naimy),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 같은 시인의 말에는 훨씬 못 미친다. 이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단지 몇 순간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것을  창조하는데,

자나깨나 우주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왜 그렇지 못한가?

왜 그들은 칼릴 지브란과 같은 시를 쓸 수 없었는가?

리고 아무도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만일 어떤 거지가 금광을 발견한다면, 그는 좋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왕이라면  그렇지 않다. 시인은 잠시만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잠시만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가는 잠깐만 우주의식과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주의식 자체가 되어 버렸다.

되돌아올 길이 없다. 

섬광과도 같은 몇 순간들은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들은 단지 이슬방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신비가는 바다가  되었다. 그래서 침묵이 곧  그의 노래이다.

모든 말이 무력해지며, 어떤 식으로든 그의 체험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바다는 너무나 넓으며, 그는 계속해서 그 바다와 하나다.

자연히 그는 자신이 그 바다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창조하기 위해서는, 창조하는 그대가 거기 있어야만 한다.

노래부르기 위해서는, 노래부르는 그대가 거기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신비가는 노래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의 시이다. 그대는 그것을 인쇄할  수도, 그것을 그릴 수도 없다. 

단지 그것을 마실 수 있을 뿐이다.

 

시인을 만나는 것과 신비가를 만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시인과의 만남부터 시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대가 만일 이슬방울조차 맛보지 못했다면, 바다는 아직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면 더 정확히 말해서, 그대가 아직 바다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대에게는 그 이슬방울만으로도 드넓은 바다처럼 느껴질 것이다.

내가 칼릴 지브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며,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시 자체이다. 나는 화가가 아니라, 그림 그 자체이다.

 

  여기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동양의 어떤 왕이 나라 안팎의 모든 화가들에게 실물과 똑같이 보이는 그림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다.

"만일 그대들이 문을 하나  그린다면, 단순한 그림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진짜 문인 줄 착각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그림을 나는 갖고 싶다.

그만큼 사실적이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그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왕국 전체를 원한다면 그것도 기꺼이 주겠다." 

수천 명의 화가들이 궁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열심히 그렸다... 

그러나 어떻게 실제와 똑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 화가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누구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까지 그려야 한다는 시간적인 제약도 없어야 한다.

또한 종이 위에  그 그림을 그리지도 않을 것이다.  궁전 안의 큰 벽에 그리겠다.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는 누구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 완성된 그림은 왕이 맨 먼저 보게 될 것이다.

조건이 받아들여졌다. 거의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이제 왕은 많이 늙었지만,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는가?

왕은 약속을 지켰다. 6년이 지난 뒤, 화가가 왕에게로 와서말했다.

"이제 들어와도 좋습니다."   화가가 왕을 방으로 데리고 갔다. 왕은 믿을 수가 없다.

정말로 사실과 똑같은 그림이  벽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림 속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있고,

나무들 사이로 좁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왕이 물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가?" 화가가 말했다. "당신이 직접 걸어가 보십시오..."

이 이야기를 믿든지 안 믿든지 -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 화가는 왕과 함께 그림 속의 길로 걸어들어갔으며, 영영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을 역사적은 실제 사실로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대는 핵심을  놓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진실된 이야기이다.

참된 화가는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아 없어지며, 참된 시인은 자신의 시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창조는 신비가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신비가는 자신이  창조한 것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그에게는 자신의 그림에 또는 자신의 시에 서명조차 할 시간이 없다.

시인은 그렇게 할 수가 있다. 잠시 창문이 열려 그 너머를 보고 난 뒤 다시 창문이 닫혀버리기 때문이다.

 

칼릴 지브란은 30권 가까이 되는  책들을 썼다.

이제부터 우리가  읽어나갈 이 <<예언자(The Prophet)>>는 그의 첫 번째 책이다.

그 나머지는 전부 휴지 조각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가 이 작품을 썼을 당시 그는 아주  젊은, 불과 스물한 살의 나이였다.

따라서 갈수록 더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만하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하려고  매우 열심히 노력했다.

평생 동안 그는  글을 썼지만, 그 어떤 작품도 <<예언자>>의  아름다움과 진리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어쩌면 창문이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우연한 기회에 신비가가된다. 은 단지 우연에 의한 것일뿐이다...

산들바람이  불어오지만, 그대가 불어오게 한 것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 이 <<예언자>>는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이 되었다.

- 더 나은  것을 쓰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바로  여기서 그는 실패한 것이다.

그에게 매우 간단한 진리 한 가지를 말해 줄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그대가 <<예언자>>를 썼을 때 그것은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절로'써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대는 그러한 작품을 쓰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지, 그대가  '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그  일이 일어나는 그릇이었을 뿐이다.

그대를 통해 흘러나온  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어린애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듯이... 어머니가 그 아이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단지 통로 역할만을  했을뿐이다.

<<예언자>>는 그대의 행위, 그대의  머리,  그대 자신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흘러나온 매우 드문 작품이다.

실제로 그대가 사라질 때만이, 그러한 일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그대가 내버려 둘 때만이,

그대가 도중에  가로막고 있지 않을  때만이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

긴장을 다 풀고 있기 때문에 그대가 방해자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은 그토록 귀하고 드문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그대는  칼릴 지브란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다. 그는 우주가 자신을 통해  흘러나오도록 내맡겼다.

그는 단순히 하나의 그릇, 통로였다. 피리 부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텅 빈 피리였다.

내 체험에 의하면, <<예언자>>와 같은 책은 그대가 말하는 소위  성스러운 책들보다훨씬 성스러운 책이다.

그리고 이러한 책은 순수한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종교를 탄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책은 그대에게 어떤 의식 절차도 주지 않는다. 어떤 계율도 교리도 주지 않는다.

단지 그들에게 일어났던 똑같은 체험을 그대에게도 순간이나마 맛보게 해줄 뿐이다.

그 체험 전부터는 말로 표현되지가 않는다.

그러나 약간은... 어쩌면 장미 전체는 아닐지라도 몇 개의 꽃잎만큼은 가능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장미가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다만 그대의 창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이따금 산들바람이 꽃잎들을 불어다  줄수 있다.

그대의 존재 속으로 부는 산들바람에 실려오는 그 꽃잎들은 실제로 미지의 세계로 의 초대이다.

신이 그대에게 긴 순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순례를 떠나지 않는 한  그대는 여전히 무의미한 삶 속에서 질질 끌려가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가슴 속에는 웃음이 없다.

 

  칼릴 지브란은 '알무스타파(almustafa)'라는  가상의 이름을 지어냄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을 피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의 시작이다. 알무스타파가 바로  그 예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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