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념의 힘과 효력


사념의 힘


신지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신지학을 단순한 사변적 철학체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신지학은 전혀 사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신지학은 절대적인 사실을 관찰하고 자연의 현상 및 그 힘에 의해 행해지는 실험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신지학을 학습하게 됨으로써 인생의 실제적인 규범을 얻게 된다. 그것은 삶의 모든 순간마다 신지(神知)가 학도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지학이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신지학도는 세계 속의 세세한 부분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세계 전체를 알게 되며, 또한 진화법칙을 이해함으로 인해 삶을 현명하게 살게 되고, 한계가 있는 육체적 감각의 범위 내에 있는 극미한 부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반적인 본성에 관해서는 다른 저서에서 기술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그의 세계에 있어 가장 뚜렷한 특성의 하나인 보다 섬세한 물질(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성한다)의 인간의 사고와 감정에 대한 급속한 반응에 주의를 집중해 보자.

  

이 주제에 관해서 학습한 적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사고와 감정의 힘이 절대적인 실재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러한 힘이 보다 섬세한 물질에 영향을 주는 것은 증기나 전기의 힘이 물리적 물질에 영향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량의 증기와 전기의 힘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확실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상위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적인 효과를 생겨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질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무한한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힘을 상당량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은 물질적 부나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상위 여러 계의 부는 이러한 힘을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으며, 또한 누구든지 이룰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힘은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지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를 탐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확실히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모든 것을 의식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그러한 힘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무지로 인해 힘을 잘못 사용하고 있으며 선보다는 악을 행하는 쪽이다. 힘을 지닌다는 것은 책임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장 필요한 것은 알지 못하는 동안에 악을 행하지 않고 그처럼 위대한 힘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이 주제에 관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사념의 특성


그러면 사념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작용하는가? 신지학에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인간은 우리의 태양계에 상호심투해 있는 각각의 세계에 대응하는 다양한 매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욕망, 정열, 감정의 매체를 아스트럴체라고 부르며, 생각을 표현하는 매체는 멘탈체라고 부른다. 멘탈체는 아스트럴체보다 좀더 섬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보다 높은 매체이다.


투시가의 눈으로 보면 맨 처음으로 보이는 것이 이 상념의 매체인 멘탈체이다. 그것은 멘탈체 안에 있는 물질의 진동에 의해 나타난다.


이 진동으로 인해 여러 효과가 생겨나는데 그와 같은 모든 것은 이 물질계에서 일어나는 과학적인 효과와 상당히 닮았다.


첫째, 멘탈체 자체에서 생기는 영향이다. 이것은 습관을 만들어내는 성질임을 알 수 있다. 멘탈체에는 서로 종류가 다른 물질이 많이 있고, 그러한 것들은 각각 고유의 진동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개개의 물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진동에 대해서는 쉽게 반응하기 때문에, 강력한 사념이나 감정에 의해 바깥쪽이 비워지면, 가능한 빨리 자신의 고유한 진동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사념이 충분히 강하다면 멘탈체의 모든 물질을 잠시동안 자신과 같은 진동을 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다음 번부터는 반복이 좀 쉽게 이루어진다. 그와 같이 해서 습관이 되어 멘탈체에 형성되면 사람들은 특정한 사념을 반복하게 된다.


둘째, 밀도에 따라 멘탈체의 위와 아래에 있는 인간의 다른 매체에 미치는 영향이다. 물질계에서는 어느 한 종류의 물질을 뒤흔들어 섞으면 그것은 쉽게 다른 종의 물질로 전해진다.


가령, 지진이 일어나면 바다에 커다란 파도의 물결을 일으키며, 또 폭풍에 의한 공기의 흐름은 그 아래 있는 대양에 파도를 일으켜, 얼마 후 커다란 파도의 물결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아스트럴체의 동요(바꾸어 말하면 우리들이 보통 감정이라 부르고 있는 것)는 멘탈체에 진동을 주어 그 감정에 대응하는 사념을 일으킨다.

역으로 멘탈체의 움직임 중 아스트럴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스트럴체에 영향을 미친다. 즉, 이것은 어떠한 종류의 사념이 쉽게 감정을 자극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멘탈체의 진동이 그것보다 농밀한 아스트럴체의 물질로 전해져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다 더 섬세한 원인체의 물질에도 필연적으로 전해져 간다.


이와 같이, 사람의 습관적인 사념은 그 자신의 에고의 특질을 만들어 간다.

지금까지 사념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같은 사념은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사념은 감정에 작용할 뿐 아니라 사념을 품는 사람에게 영속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자신의 바깥에 주는 영향을 생각해보자. 마치 대기가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사념은 우리들 모두를 둘러싸고 있는 멘탈 물질의 바다에 영향을 준다.


셋째로 모든 사념은 방사성의 파동을 발생시키고 있다. 그 파동은 처음 생겨난 사념의 성질에 따라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다. 이 진동은 멘탈계에 머무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의 위와 아래의 계(界)에도 영향을 미친다.


만약 사념이 순수하게 지적이고 비개인적인 경우에(가령, 어느 철학체계에 대하여 생각한다거나, 혹은 대수나 기하학의 문제를 풀려고 할 때) 발생하는 파동은 멘탈 물질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만약 영적인 성질의 것이라면, 즉 그의 사고(思考)에 사랑이나 영적 열망, 혹은 깊은 헌신의 감정이 섞여 있다면, 그 파동은 상위의 멘탈계 영역까지 올라가서 직관적으로 장엄함과 영광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의 파동은 대단히 강력한 것이 된다.


이에 반해, 만약 사념이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의 일이나 개인적인 욕망에 치우쳐진 것이라면, 그의 진동은 아래로 내려와서 그의 힘의 대부분을 아스트럴계에서 소모해 버린다.

이러한 파동은 모두 광(光)이나 음(音)의 파동이 이 물질계에 작용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각각 대응하는 수준에서 작용한다.


파동은 모든 방향으로 확산되지만, 그의 힘은 처음 발생했던 거리로부터 멀어져감에 따라 감쇠해간다. 그러나 파동은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멘탈 물질의 바다에 작용할 뿐 아니라, 그의 바다 안에 움직이고 있는 다른 멘탈체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실험으로, 피아노의 음이나 바이올린의 현에서 울리는 음이 똑같은 피치로 조정되어 있는 같은 종의 악기에서 그에 대응하는 음을 생겨나게 하는 실험이 있다.

하나의 악기에서 발생한 진동이 공중에서 전해져 다른 악기에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멘탈체에서 만들어진 사념의 진동은 주위의 멘탈 물질에 의해 전달되어 다른 멘탈체에서 재생된다.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사념은 전염되기가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에서 이것에 관하여 고찰해 볼 것이다.


넷째로 모든 사념은 진동뿐만 아니라 형태(像)도 만든다. 그 상은 확실하고 독립되어 있는 물질로서 여기에는 힘과 생명력이 부여된다.


대부분의 경우 일시적으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작용하지만, 그것은 진동과 똑같이 멘탈계에만 머물기도 하고 아스트럴계의 수준까지 내려와 감정의 세계에 주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사념상의 연구는 매우 흥미 있는 것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해설과 채색도는 「사념형태(Thought forms)」(리드비터, 베산트 공저)를 참조하라.


지금 당장에는 그러한 것들을 나타내는 것보다는 사념의 영향이라든가, 또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사념의 작용에 대해 주목해 보자.


사념파의 작용


그러면 사념의 힘이 나타나는 두 가지 현상에 대해 고찰해 보자. 진동은 사념의 특성에 따라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힘은 주로 멘탈 물질의 네 개의 단계 중에서 하나로 향하게 된다. 네 개의 단계란, 멘탈계의 아래쪽을 이루는 네 개의 층을 말한다.


보통 사람의 사념은 대략 그 자신이나 그의 욕망, 감정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최하위 단계의 멘탈 물질만이 진동한다. 실제 대다수의 모든 사람이 아직 멘탈체가 완전히 발달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멘탈체의 상태는 아스트럴 매체의 상태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통의 교양을 지닌 사람이면 아스트럴체는 육체와 똑같이 충분히 발달해 있고, 그것을 완전히 의식의 매체로서 사용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아직 아스트럴체를 육체와 같이 사용하는 습관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 힘에 자신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아스트럴체의 힘은 모두 그대로 있다. 단지, 문제는 사용하는데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사람이 아스트럴계에서의 행동을 인식한다면, 잠자고 있을 때나 혹은 죽은 후이거나 그는 충분히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갈 수 있다.


하지만 천상의 세계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나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그것은 멘탈체가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인류가 놓여있는 진화과정이 바로 멘탈체의 발달이다.

멘탈체는 비의(秘儀)를 얻어낸 대동포단에 속하는 스승들의 지도아래 특별한 훈련을 받은 자만이 매체로 사용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 그저 부분적으로만 발달해 있으며, 결코 의식을 독립된 매체로 사용할 수는 없다.


거의 대다수 사람들의 멘탈체의 상위 부분은 멘탈체의 하위 부분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조차 아직까지는 휴지상태에 있다. 이것은 멘탈계의 대기 전체에서 가장 아래의 층에 속하는 진동이 파장을 내고 있어도 높은 층에서는 비교적 활동이 적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사실은 훗날 사념의 힘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실제적인 가능성을 고찰할 때 필요하기 때문에 확실히 마음에 새겨두어야 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사념의 파장이 뚫고 나가는 거리와도 중요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사념의 파장이 관통하는 거리 그리고 다른 멘탈체에 영향을 주는 강도와 지속력은 처음 일어났을 때의 사념의 강도와 명확성에 달려있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의 소리의 파장을 공중에 방사시켜 그것이 여러 방향으로 퍼져서 청취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의 소리가 닿는 거리는 발음의 강도와 명확성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강력한 사념은 약하거나 불확실한 사념보다는 훨씬 먼 곳까지 도달한다. 하지만 강도보다는 명확성이 보다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사업이나 오락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의 귀에 대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는 것처럼, 아무리 강력한 사념파일지라도 이미 다른 생각에 몰두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든 주의력을 필요로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명확하고 강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방사된 사념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들은 늘 그런 영향력의 범위 안에 있게 된다.


이런 파동은 매우 뚜렷한 순응성을 갖고 작용한다. 모든 점에서 곧바로 반응을 하는 멘탈체를 찾아내었을 때는 똑같은 파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도 대체로 원래의 파동과 비슷한 정도의 영향을 줄 수가 있다.


가령, 어떤 카톨릭 교도가 성모 마리아 상 앞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하자. 그의 강한 기도의 파동이 파도를 일으켜서 여러 방향으로 펼쳐지게 된다. 만약 그 파동이 다른 카톨릭 교도의 멘탈체나 아스트럴체에 닿으면 기도하고 있는 사람의 원래 파동과 똑같은 사념과 감정이 불러 일으켜질 것이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 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개신교도나 다른 종파의 신도에 파장이 닿으면 역시 기도를 하고 싶은 기분은 생겨나겠지만, 그의 감정은 자신의 종파에 익숙한 방향을 취해 그리스도에게로 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파동이 회교도에게 닿으면 알라에게 향하는 기도의 기분을 일으킬 것이고, 힌두교도의 경우에는 크리슈나에게로 향하며, 조로아스터교도의 경우는 아후라마즈다에게로 향할 것이다.


그 파동은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기도의 기분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심지어 기도의 기분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는 유물주의자의 멘탈체에 닿았을 경우에도 역시 고상한 효과를 일으킨다. 그 사람은 전혀 익숙하지 않은 진동을 바로 만들어 낼 수는 없겠지만, 그 파동이 지닌 경향은 그의 멘탈체의 상위부분을 진동시켜 어떤 행동을 부추기게 할 것이다. 공감하는 정도로는 효과가 계속 유지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악의나 불순한 사념의 작용도 같은 법칙에 따른다. 미움이나 시기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그것과 닮은 격정을 일으키도록 파동을 방사한다.


그러한 파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미운 감정의 대상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따라서 감정의 대상을 미워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파동의 방사로 인해 전혀 다른 사람에게 같은 종류의 악감정을 일으킨다.


사념형태의 작용


사념형태의 작용은 파동의 작용보다는 한정되어 있지만 훨씬 정확하다. 사념형태는 파동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실제에 있어 사념형태는 같은 형태의 파동에너지와 조화되는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작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념 형태의 힘과 가능성에 관해 분류해 본다면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확고하게 다른 사람에게로 향해져 있는 사념을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이나 감사의(때로는 부러움이나 질투) 사념을 내보내는 것처럼, 이런 사념은 다른 어떠한 사념과도 똑같이 방사하는 파동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의 영향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같은 파동을 재생산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나 사념에 의해 만들어낸 사념 형태는 확실한 의도로 치우쳐 있다. 그것은 사념자의 멘탈체와 아스트럴체에서 떨어지자마자 사념이 향하게 되어 있는 상대방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서 그 사람에게 밀착한다.


이것을 충전된 라전병에 비유하는 것도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니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멘탈계와 아스트럴계의 물질은 병으로 상징되고, 거기에 들어간 사념의 파동에너지는 충전되어 있는 전기에 해당된다.


만약 사념이 어떤 사람에게 향해있을 때 그가 사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이거나 혹은 그의 마음 속에 접근한 사념과 조화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활발한 진동이 발생하면 사념은 바로 그 사람 위에서 방전한다.

당연히 그 결과로서, 이전에 이러한 파동을 가진 것이 없었다면 그 사념에 닮은 파동을 일으킬 것이고, 이미 같은 사념이 거기에 있었다면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그 때 그 사람의 마음에 진동이 전달될 수 없을 정도로 무엇인가 다른 일에 몰두해 있다면, 사념 형태는 그의 둘레에 떠있으면서 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게 될 것이다.

둘째, 사념이 다른 사람에게 향하지 않고 주로 사념을 품고 있는 사람 자신에 관련된 것이라면(실제 대부분의 사람의 사고는 그러한 것이지만) 파동은 늘 모든 방향으로 확산한다.


그러나 사념 형태만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의 둘레에 떠 있으면서 언제든지 그 사람에게 반응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의 마음이 다른 생각에 완전히 빠져 있는 한, 떠 있는 상은 그저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가 일련의 사고를 다 끝마치면 다시 말해 그의 마음이 잠시 쉬게 되면, 그의 사념 형태는 반응하는 기회를 찾아내어 바로 같은 사념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즉, 그의 마음에 이전에 몰두한 적이 있는 일의 사념을 반복하게 해준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와 같은 사념 형태의 외피에 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때로 자신에게 압력이 덮치는 것 같은 느낌을 갖지만 그것은 둘레에 어느 일정한 사념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악한 사념이 떠오르는 경우 악마에 의해 유혹 당하고 있다고 믿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유혹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셋째, 사념자의 둘레에 떠 있지도 않으면서 특별히 누군가에게 향해 있는 것도 아닌 한 무리의 사념이 있다. 이 경우에 만들어지는 사념 형태는 사념자의 둘레에도 머물지 않고 특별히 다른 사람을 향해 끌려가지도 않으면서 그저 특별한 용도나 목적 없이 그것이 만들어진 곳에 떠돌고 있다.


사람은 각각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사념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한 것들은 그로부터 떨어져서 어느 정해진 대상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 형태, 그의 둘레에 모여서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형태, 그가 지나는 길을 따라서 일종의 선을 그어서 그의 발자취를 표시하는 형태가 있다.

대기 전체는 세 번째 형태의 어렴풋하고 애매한 사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걸어 나갈수록 이러한 팽배한 양의 사념 안에서 혹은 사념에 닿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마음이 다른 생각에 의해 확실하게 점유되어 있지 않다면, 이러한 다른 사람의 사념들은 멍하게 있는 사람의 마음속을 뚫고 지나간다. 그러한 것의 대부분은 특별히 마음을 끌지는 못한다.

그러나 때로는 주의를 끄는 사념이 들어오면 마음은 그것에 끌려 잠시동안 즐거워 한 후에 그것이 들어왔을 때보다는 좀 강화된 상태로 방출한다.


물론, 이처럼 여러 가지 발생의 기원이 다른 상념끼리 섞여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일관된 것이 없다. 당연히 이러한 것의 어느 하나에서 사고를 시작해서 일련의 관념의 연상이 시작되기도 하고 그 자신에서부터 사고를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훌쩍 생각이 들어와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왜 생겨난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동안 어떻게 해서 이러한 특정한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일까?������라고 자문한다면, 그리고 그때까지 자신의 사고의 줄거리를  돌이켜본다면, 그는 그사이에 수많은 쓸모 없는 무용의 사념이 마음속을 지나간 것을 알고는 대단히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것의 4분의 1은 자신의 사념이 아니며, 그저 지나가면서 취한 사념의 결합에 불과하다. 대체로 그러한 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며, 일반적인 경향으로 보면 선이라기보다는 나쁜 편으로 기울어져 있다.


사념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이제 사념의 작용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실제 문제에서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좋을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이런 지식을 통해 어떻게 우리들 스스로 진화해가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사념의 작용을 과학적으로 고찰해보면 우리들이 진화에 관하여 보통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모든 사념과 감정은 하나의 성향을 강하게 하기도 하고 약하게 하기도하여 영속적인 효과를 생기게 한다. 더욱이 모든 사념파와 사념 형태는 그 사념이 향하는 상대에게 필연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임으로 마음에 품은 사념과 감정은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통 사람은 감정을 점검해보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느끼면 그는 자신의 감정에 몸을 맡기고 그것을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념의 힘이 작용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사람은 그와 같은 감정의 발산을 하나 하나 세심히 짚어보고 그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기 이전에 자신의 진화에 해로운가 해롭지 않은가를 검토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에게 이익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감정은 나오는 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조절해야 한다. 현재 우리들이 도달해 있는 진화 단계는 멘탈체의 발달에 있으므로 이 문제를 보다 신중히 취급해 자신의 진화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음이 가는 대로 두는 대신에 마음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라는 것을 이해해서 마음을 조정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음을 불안정한 상태로 두어서는 안 된다. 멍하고 흐린 상태에서는 어떤 사념 형태일지라도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와트박사가 이전에 말했듯이, 악마는 한가한 사람을 찾아내어 악을 행하게 한다. 이 말은 위의 내용에 적용시켰을 경우 확실한 진실이다. 왜냐하면 멍한 상태의 마음은 좋은 인상보다는 나쁜 인상을 훨씬 쉽게 취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통제를 얻어내는 첫 걸음은 늘 마음에 유익한 생각을 지니도록 하는 일이다. 마음의 움직임의 배후에 확실하고 바람직하며 쓸모 있는 일련의 사념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해야 할 명백한 의무가 없을 때 언제든지 되돌아 올 수 있는 사념을 간직해 두는 것이다.


마음을 훈련하는 또 하나의 필요한 점은 해야 할 일을 철저히 해낸다는 신념을 마음에 새겨두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집중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완전히 하나의 일에 잠깐동안이라도 고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알 수 있다.


마음은 이것저것 헤매고 다니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다시 말해, 각기 다른 여러 생각들이 한꺼번에 섞여 들어온다. 하나의 주제를 단 5분 동안만이라도 마음에 고정시키려고 하면, 마음은 여러 차례 옆길로 빠져나가 몇 번이고 다시 그 주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집중 그것자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행히 그것을 해볼 기회가 자주 주어진다. 결국은 집중할 수 있게 된다면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그것에 주의를 집중하고 될 수 있는 한 높은 성취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편지를 쓰고 있다면, 세세한 사항에 대한 부주의로 편지의 목적이 흐려지지 않도록 매우 정확히 써야 한다. 책을 읽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소설이라 해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집어내어 거기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어야 한다.


무엇을 배우는데 있어 마음에 대한 확실한 훈련을 하지 않고는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겠다는 노력은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왜냐하면, 힘이 불어나는 것은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기만 한다면 마음은 늘 약한 상태로 남게 된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점은 자신의 에너지를 절약하는 요령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제각기 일정량의 에너지밖에 지니지 못하므로 그것을 얼마나 유효하게 잘 사용하는가는 자신의 책임이다.


보통 사람은 그의 힘을 가장 쓸모 없는 곳에 낭비해 버린다. 그러나 오컬티즘의 학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통 사람은 단지 불안정한 진동의 중심에 불과하다. 그들은 언제나 고뇌와 걱정을 가지고 있거나 매우 소심해 있으며 혹은 무엇인가 얻어내려고 애태우고 있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 그들은 늘 불필요하게 흥분해 있으며, 그것도 거의가 쓸모 없는 일에 대한 것들이다.


자신은 전혀 의식해 본적이 없겠지만 그들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는 늘 주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이러한 진동과 동요를 불행하게도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욕망이나 감정에 의해 불필요하게 흥분해 버린다. 감이 빠르고 쉽게 느낌을 받는 사람이 도시에 살거나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이 막대한 활력을 낭비해 버리는 또 하나의 원인은 불필요한 논쟁에 의해서다. 어떠한 의견이든, 설령 그것이 종교나 정치에 관한 것이든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의견을 제압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믿음을 갖고 살건 그것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며, 자기가 이 세상을 단 하나의 사상과 습관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진리는 여러 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 사람 혹은 하나의 신조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전체가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사고하는데 있어 의견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자신의 의견과 대립하는 견해를 가진 사람 또한 그러한 신조를 따르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람들이 논쟁을 일삼고 있는 대부분의 주제는 그토록 골치를 썩여가며 토론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가장 확고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일수록 아는 것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오컬티즘의 학도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물어오면 대단히 즐겁게 답을 해주지만 무익한 말싸움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않는다.

  

힘을 낭비하게 되는 또 하나의 원인은 마음의 걱정이다. 많은 사람은 늘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칠지 모르는 재난에 대해서 걱정한다. 즉 죽음이나 사후의 일에 대한 두려움 혹은 경제적인 파멸이나 사회적 지위의 실추 등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민한다.


막대한 양의 힘이 이와 같은 무익하고 불쾌한 면에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절대적인 정의로운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지고의 길로 올라가는 것이야말로 신의 의지이고 그와 같은 진보의 길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을 모두 버리게 될 것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자신에게 닥친 모든 것들은 진화를 돕기 위해 있는 것이며, 자신의 진화를 늦추게 하는 유일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임을 이해해야 한다.

자신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고민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며 가장 가깝게 있는 의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해 나가는 것이 자신에게 선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마음의 걱정이 남을 돕거나 심지어 최소한의 역할조차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많은 재난과 힘을 낭비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악의가 섞인 감정으로 힘을 낭비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말이나 마음에 걸리는 어떤 것으로 인해 화를 내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거짓이나 불쾌한 말을 했다 해도 십중팔구 그의 말 뒤에는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설령 그의 말에 악의가 있다고 해도 감정을 자극하도록 그대로 둔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다.


일부러 끄집어내어 오래도록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상처받거나 스스로의 감정에 의해 자극 받지 않는 한 불쾌한 말만으로 상처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말을 조용히 넘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다른 사람이 말한 것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면, 자신의 멘탈체의 동요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을 뿐,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없다.


다른 이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히려 행동하지도 않았으며 할 수도 없다. 만약 학도가 불쾌하게 되거나 마음이 상했거나 그에 의해 큰 고통을 겪게 된다면, 그 책임은 스스로가 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의 말로 인해 자신의 멘탈체나 아스트럴체에 동요가 온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자신의 매체를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아직까지는 이러한 모든 것을 혼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면서 다른 이들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평판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길을 걷고 자신의 일에 충실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사념의 영향


마음과 감정을 통제하여 쓸데없는데 힘을 쓰지 않는 것은 자신의 진화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만이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가령, 어떤 이가 화를 내게 되면 그것은 당연히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또 화를 내게 되면 그러한 충동에 저항하는 일이 더욱 힘들고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둘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그로부터 발산되는 진동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만약 그가 성난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들도 역시 그런 노력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는다 해도 이러한 자신의 행위는 그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그가 노(怒)한 감정의 파동을 내보내는 것을 그대로 두게 되면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마음, 즉 그들의 아스트럴체에 똑같은 진동을 일으킨다.


  


만약 그들에게 아직 그러한 파동이 없었다면 끌어 일으킬 것이고 이미 존재해 있었다면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동료의 자기개발을 더 어렵게 만들 뿐 아니라 무거운 짐을 그들의 어깨에 얹어주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만약 그가 노한 파동을 통제해 억제한다면, 그는 평온하고 부드러운 영향을 방출할 것이고, 그것은 똑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 모두에게 틀림없는 도움을 주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념은 필연적으로 주위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사념이 불순하거나 사악한 것이었을 때의 책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때의 우리는 주위사람들에게 도덕적 부패를 사방으로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 구석에는 악의 씨앗이 있다. 그러나 그 씨앗은 바깥에서 어떠한 힘이 가해져 활동하게 하지 않는다면 꽃이 피어 열매를 맺지 않는다.


  


만약 우리들이 불순하고 사악한 사념에 빠져 만들어 내는 힘의 파동은 그 씨앗을 발화시켜 길러주는 원인이 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그의 혼의 진화는 정체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주어진 충격은 뒤에 사악한 사념이나 말이나 행위로 꽃 피어 더 멀리 퍼져 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해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불순하거나 사악한 사념이라도 그 책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다.


  


다행히도 이러한 현상은 사악한 사념과 똑같이 훌륭한 사념에도 모두 해당된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랑과 온정과 평화의 사념을 끊임없이 방사함으로서 태양과 같은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참으로 눈부신 힘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이와 같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늘 신중해야 한다.


  


생각을 할 때는 가령, 어떤 사람의 일에 대해 생각할 경우 그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 힘이 작용해 차츰 그 이미지와 일치되도록 그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사념을 친구들의 장점에 맞추어 고정해야 한다. 그것은 그의 어떠한 자질을 생각하든 간에 그의 파동을 강하게 하여 그러한 자질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하나의 실례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남에 대한 험담이나 추문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도 없이 행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무서운 악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만큼은 비난을 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 중에 버릇없이 행동한 사람이 있을 때, 사람들은 절대로 그의 장점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사념을 그의 단점에 고정시켜 버리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단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의까지도 거기에 끌어넣는다. 이와 같은 경우, 그들은 그의 그러한 진동을 강화시켜서 결과적으로 그의 나쁜 재질을 키우게 되고 만다.


  


역으로, 이 악덕이 그들 자신의 터무니없는 사상 안에서만 있는 것이고 욕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대부분이 이것이 실상이다), 그들은 이 단점을 자신의 힘이 미치는 영역까지 그 사람의 내부에 만들어 내게 된다.


만약 이 희생자 안에 악덕의 씨가 숨어 있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불미스러운 노력은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확실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우리들은 마음속에서 그들의 높은 이상을 두고, 그들이 얼마 후 거기에 이르도록 강하게 원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의 성격에 어떤 결점이나 악덕이 있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절대 그러한 것에 마음을 두어 그것을 강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는 그들의 높은 이상에 대하여 강력한 사념을 만들어 그 파동을 우리들의 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보내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경우가 있다.


  


������정말이지 이러이러한 부인은 성격이 급하기 짝이 없어. 잘 알고 있지? 그녀는 어제도 이러이러했어. 들어서 알겠지만 그녀는 언제나 너무 심해������


  


이런 것이 또 한 사람에 의하여 그녀의 가장 친한 30-40명의 친구들에게 반복된다. 몇 시간만에 몇 백명의 사람들 모두가 성급하기 짝이 없는 것에 대하여 집중적인 사념파를 이 불행한 희생자에게 쏟아 붓게 된다.


  


그녀는 얼마 후 기대한 대로 그들이 비웃는 꼴로 되고 만다. 그로 인해 또 하나의 성급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보게 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못된다.


  


이러한 경우, 도움이 되어주길 원하는 사람이면, 화를 내며 남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각별히 주의해서 피해야 하며, 자신의 모든 힘을 모아서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그 부인이 지금보다 침착하고 평정한 상태에서 행동하면 좋겠어. 자신이 조절하려고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우리들은 그녀가 자신의 성스러운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강하고 조용히 그리고 부드러운 영향력을 가능한 되풀이해서 내보내자.������


  


처음에는 노한 사념이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평안한 사념이다. 어느 것이나 똑같이 그의 목표를 찾아내 사념으로 향해진 당사자의 멘탈체와 아스트럴체 안에서 그것이 증식해 가는 것을 돕게 된다.


  


친구들의 일에 대해 모든 방법으로 될 수 있는 한 애정을 쏟아 생각하자. 그들의 장점을 생각하고 주의를 그러한 것들에 집중하는 것으로서 친구들을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자.


  


우리들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결점을 비난할 때 보여주는 것과 같은 정도의 열의를 가지고, 우리들의 비판을 그들의 진수에 이르게 하는 적절한 것들로 해야 할 것이다.


사념에 의한 자기 개발














사람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생각이나 격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 몇 번이나 노력했지만 언제나 실패했지. 그래서 그러한 노력은 아예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되었어.������


  


이러한 생각은 아주 비과학적인 것이다. 만약 나쁜 재질이나 습관이 우리 안에 일정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전의 여러 생애에서 그런 힘이 누적되도록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힘을 쉽게 억제할 수 있었던 시기에 저항하지 않고 그것이 그대로 불어나게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통제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일정한 한가지 방향으로만 사고하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사고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누적해 두었던 에너지의 양은 어차피 유한하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들이 몇 번의 생애에서 그 에너지를 비축했다 하더라도 그것에 써야 할 시간은 역시 유한한 것이며, 그 결과도 당연히 유한한 것이다.


  


만약 지금 우리들이 과거의 잘못을 알아내어 그 습관을 통제하여 충동을 중화시켜 보겠다고 노력한다면, 그 습관의 뿌리에 작용했던 똑같은 힘을 역방향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많은 시간 동안 계속된 습관을 완전히 중화할만한 충분한 힘이 금방 나오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노력은 그 누적한 힘을 감소시킬 것이다.


  


우리들은 영원히 살아가는 혼으로서 무한히 힘이 나오도록 할 수가 있다. 우리들은 끌어낼 수가 있는 무한한 힘을 저장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인내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결국에는 틀림없이 성공한다. 어느 정도의 실패를 여러 번 반복했다 하더라도, 그 때마다 누적된 힘은 다소라도 감소할 것이며, 결국 그것은 우리보다는 먼저 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끝내 성공하는 것은 단지 기술상의 문제일 뿐이다.


  


당신은 기차의 차장이 정지한 큰 화차나 객차를 착실히 밀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바라는 곳에 운반해 갔을 때, 그는 어떻게 해서 그것을 정지시키는가?


  


아무리 전력을 다 쏟아 넣는다 해도 한번에 세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는 객차 앞에서 나가는 힘을 되밀어가며 서서히 후퇴하면서 힘을 넣어 되돌린다.


  


그러나 객차의 진행에 대항하고 있는 힘은 결코 멈추지 않으면서 차츰 그 객차의 힘을(이것은 습관이 만들어진 뿌리의 힘에 해당한다) 약화시켜 끝내는 그것을 정지시키고 만다. 이전의 카르마를 제압하는 것의 좋은 실례가 아니겠는가!


사념에 의한 원조


이러한 사념의 흐름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 슬퍼하거나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볼 때 언제든지 도움의 손길을 뻗칠 수가 있다.


  


이 물질계에서는 종종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그의 육체의 뇌는 편견이나 종교적 고집에서 우리들이 권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는 육체보다는 훨씬 감수성이 뛰어나기에 도움이 되는 사념이나 사랑의 파동과 감정에 의해 그것에 가깝게 접근할 수가 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은 섬세한 물질에 있어서나 농밀한 물질에 있어서나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므로 우리들이 내보내는 에너지는 틀림없이 그 목표에 이르고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을 위로하고 도와주기 위해 내보내는 사념 형태나 사념이 그 사람에게 도착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형태(想)나 이데아가 도착했을 때, 그것이 그의 마음에 확실히 나타나느냐 아니냐는 우선 그 사념의 명확성에 달려있고, 다음은 그때의 정신상태에 달려있다.


  


그가 자신의 시련이나 고통에 완전히 마음을 뺏기고 있어 우리들의 사념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우리의 사념 형태는 단지 그 주변에서 머물며 기회를 엿보다 그의 주의가 소홀한 틈이 생기거나 그가 지쳐버려 자신의 사고의 흐름을 중지했을 때 가차없이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자비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 물질계에서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현실적인 원조를 해주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멘탈계나 아스트럴계에서는 사랑의 사념을 착실하게 집중하면 반드시 도움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인 구제라고 말하는 형상은 사념이라고 하는 것이 심지어 이 물질계에 있어서도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아스트럴 물질이나 멘탈 물질에는 아주 쉽게 작용하기 때문에, 단지 실행해 보기만 하면, 그것이 실제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와 같은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나 버스나 기차를 탔을 때, 의기 소침해 있거나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가 그를 분발시켜 도와주기 위한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슬픔이나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태양은 여전히 세상을 비추고 있으며, 이승에서는 아직도 감사해야 할 많은 것과 선과 미가 풍부히 있다는 의미의 강한 감정을 보내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때에 따라서는 이런 실험의 결과를 바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즉, 우리들이 보낸 사념의 효과를 얻어 그가 벗어난 모습을 실제로 목격하는 때가 있다.


  


늘 그와 같은 현실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만약 우리들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똑같은 결과가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확신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학습이 미숙한 사람은 그가 사념을 보낸 사람에게 진정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믿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주 많은 경험을 해 이와 같은 행위를 실제로 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언젠가는 성공한 증거가 모여서 그 때는 의심을 하는 일이 없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각자는 이와 같이 해서,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살아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간에) 모두를 도와주는 일을 생활의 일부로 해야 한다. 육체를 가졌든 안 가졌든 멘탈체나 아스트럴체에 향해지는 힘의 작용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이런 착실하고 규칙적인 실행은 커다란 선이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그것에 의해 자신의 능력을 발달시켜 진보를 더욱 확실히 해나감과 동시에 이것에 의해 세상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출판된 정신요법에 관한 어떤 책에는 노력과 협동심에 대해서 신지학도가 매일 매일 기울여야 하는 태도를 예리하게 기술한 문장이 있었다.


  


������빵을 반죽할 때 거기에 사랑을 집어넣어라. 당신이 어떤 물건을 포장할 때, 그것이 슬픔에 찬 여인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힘과 용기를 함께 넣어서 포장해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나이에게 지불하는 돈에도 신뢰와 솔직함을 보태어 건네 주라.������


  


독특한 표현이지만 훌륭한 사고가 담겨있다. 매 순간이 우리에게는 기회이고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는 신지학적인 사고를 그대로 표현했다.


  


이리하여 선한 법칙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학도는 그의 둘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나누어주며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않는 것에 상관없이 어디서든지 겸손하게 선을 행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념을 통해서 모든 사람은 도움의 사념을 내보낼 수가 있고 또한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사념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남을 배려하고 남을 도와주고자 하는 사념을 내보낼 수 있으며 이러한 사념은 우주의 법칙이 존속하는 한 반드시 그 목적을 완수한다.


  


물론 항상 그 결과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치는 평화와 사랑의 거리에 뿌린 작은 종자에서 어떤 열매가 열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