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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도를 말하다
오쇼
류시화 옮김
마음이 옳으면 모든 옳고 그름의 판단을 잊는다.
그때 그대는 자유인이다.
삶이 그 자체로 흘러가게 하라.
흐름에 존재를 맡긴 채 흘러가라.
그 흘러감 자체가 궁극의 깨달음이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다.
순수한 침묵이 내안에 있음을 안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나 평화로울 수 있다.
어떤 감정이 나를 방문하더라도
나는 곧 순수한 침묵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은 늘 내 안에 있다.
_ 류시화
亡是非
첫째 날 아침 – 신발이 발에 맞으면
목수로 유명한 공수는
아무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도구를 사용한 것보다 더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무에서 형태를 낳고
그의 마음은 자유로워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무심의 경지에 있었다.
무엇에도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마음은 더 없이 단순한 상태가 되어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았다.
신발이 발에 맞으면
발의 존재를 잊는다.
허리띠가 허리에 꼭 맞으면
허리의 존재를 잊는다.
마음이 옳으면
모든 옳고 그름의 판단을 잊는다.
무리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으며,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유혹 되지도 않는다.
그때 일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때 그대는 자유인이다.
쉬운 것이 옳은 것이다.
옳게 시작하라, 그러면 쉬어진다.
쉽게 나아가라, 그러면 그대는 옳다.
쉽게 나아가는 옳은 길은
그 옳은 길을 잊는 일이며
또 쉽게 나아간다는 것조차 잊는 일이다.
<오쇼강의>
의지를 통해 이룬 것은 무엇이든 늘 짐으로 남을 것이다.
늘 하나의 갈등, 내면의 긴장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엔가 이룬 그것들을 다시 잃고 만다.
오직 노력 없음을 통해 이룬 것만이 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짐이 아닌 것만이 영원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
오직 그것만이 영원히 그대와 함께 남아 있을 수 있다.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
이제 갓 태어난 어린아이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모르는, 어떤 구분도 없는...... .
일단 마음속에 구분이 일어나면,
일단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것을 분별하면,
이미 병든 것이다.
그때는 진리에서 한없이 멀어진다.
노력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노력은 공격적이고 폭력적이고 경쟁적이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에서는 노력을 통해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고타마 붓다는 6년 동안 고행을 했다.
끊임없이 명상하고 노력했다.
고행자가 되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었다.
붓다는 철저히 실패했다. 6년의 노력 후 그는 완전히 좌절했다.
그 완전한 절망 속에서 그는 모든 노력을 포기했다.
그는 진리의 세계에 속한 것들까지 모두 포기했다.
그리고 그날 밤,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편안한 잠을 잤다.
질적으로 다른 침묵이 그의 내면에 찾아 왔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 상태가 그날 밤 그에게 일어났다.
아무 꿈이 없었기 때문이다. 꿈은 욕망의 그림자다.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어디론가 나아갈 자도 그곳에 없었다.
그 자체가 깨달음 이었다.
인간에게 가능한 궁극적 현상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날 밤, 부처는 꽃피어났다.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욕망이 너무나 미래로 달려갔기 때문에
그는 ‘지금 여기’를 볼 수 없었다.
도의 사람은 ‘나’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물건임을 이해한다.
그래서 도의 사람은 그것을 버린다. 사실 그것을 버릴 필요가 없다.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는 순간 그것은 스스로 떨어져 나간다.
그곳에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의 마음은 자유롭고 무심의 경지에 있다.
건강한 것은 잊혀 진다.
그러나 병든 것은 늘 기억에 남아 있다.
그것은 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그래서 언제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완벽하게 건강한 자연인은 완벽하게 자신을 잊는다.
그는 흰 구름과 같다. 바람과 같다. 바위와 같다.
나무와 같고, 새와 같다.
그러나 인간과는 다르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처처럼 오직 병든 것만이 기억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은 ‘내적인 합일’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깊은 조화다.
그곳에 아무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곳에는 선택이 없다. 그것은 선택이 사라진 받아들임이다.
선택하지 말라. 그리고 이것이 기적이다.
쉬운 것이란 그런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듯이 존재하는 것.
자신이 그곳에 없는 듯 있는 것.
누구의 길도 가로막지 않는 것.
그대는 존재의 환희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자연스러움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그대는 자연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는 그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받아들임 자체가 된다.
그의 받아들임을 통해 그대는 삶의 받아들임을 배운다.
그리고 만일 그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자연스러움이 일어날 것이다.
일단 자연스러움이 일어나면
저 큰 바다가, 깨달음의 대양이 멀지 않다.
강물이 그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갈 것이다.
Saint Of Sin - Moments in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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