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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자에게는 규칙이 필요 없다.
깨어 있음이 그의 규칙이다.
그는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만, 규칙에 매이지 않는다.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魚處水生
여섯째날 아침 – 바닷새를 죽인 음악
주머니가 작으면 큰 물건을 담을 수 없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물을 길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옛날에 바닷새 한 마리가
노나라 수도의 교외에 날아온 적이 있었다.
왕은 그것이 상서로운 징조라 해서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라고 명령하고
바닷새에게 종묘의 술을 마시게 하는가 하면
음악가들을 불러 순임금 시절의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여러 맛있는 짐승 고기까지 대접했다.
그러나 이 소란스런 잔치에 놀라
불행한 바닷새는 슬픔 속에 죽고 말았다.
새는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
인간의 입장에 따라서?
또는 새의 입장에 따라서?
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를 틀고
들판과 물가를 자유롭게 날아야 하지 않을까?
강이나 호수 위를 떠다니면서
미꾸라지나 물고기를 잡아먹고
때로 다른 물새들과 줄지어 날다가
갈대 끝에 앉아 한가롭게 쉬어야 하지 않을까?
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거나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조차 싫어하는데
어찌 시끄러운 음악에 놀라지 않겠는가!
그들은 음악으로 바닷새를 죽인 것이다.
물은 물고기를 위한 것이고
공기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본래 성품이 각자 다르니 필요한 것도 다르다.
그러기에 옛 현자는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았다.
_ <바닷새와 인간의 음악>
<오쇼 강설>
고정된 인간의 본성이란 없다.
인간 개개인마다 그 본성이 다르다.
모든 개개인이 그 자신 하나의 우주다.
일반적인 규칙이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일단 규칙의 희생자가 되면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오로지 완전한 자유 속에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
이해가 유일한 규칙이 되게 하라.
진정한 이해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라.
규칙은 감옥이지만 이해는 무한한 하늘, 무한한 공간을 준다.
예수가 진리를 깨달았고 붓다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모두가 추종해야 할 하나의 규칙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고타마 붓다가 아니며,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열심히 예수를 추종할 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뿐 결코 그리스도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다.
예수는 누구도 추종하지 않았다.
규칙들은 그대에게 외부적인 깨끗함을 준다.
그러나 내면에서 그대는 여전히 바보다.
그리고 기억하라. 오직 바보들만이 규칙을 따른다.
현자는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규칙에 대해서는 잊는다.
현자는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규칙을 가진 자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삶은 매 순간 변화한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끝없이 변화한다.
삶은 그대를, 또는 그대의 규칙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매 순간이 새롭다.
깨달음을 향한 모든 노력은 그 붙들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것,
다시금 흐름을 되찾아 얼어붙지 않는 것이다.
얼음처럼 굳어지지 말라.
흐르는 물처럼 되라.
삶은 끊임없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으며 오직 진정한 이해만이 그것에 반응할 수 있음을 잊지 말라.
근원은 같고, 궁극적인 진리도 같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것의 표현이 다르다.
그리고 기억하라.
누구의 진리도 그대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대 자신이 그 비밀의 상자를 열어야만 한다.
자신의 능력을 알라.
이것이 첫 번째 핵심이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안다면 첫걸음은 이미 내디뎌진 것이며, 목적지가 멀지 않다.
첫걸음이 틀리면 평생을 걷고 또 걸어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삶은 계획될 수 없다.
그것은 계획 없이 밀어닥치는 여름철 홍수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계획이 없기 때문에 삶은 아름답다.
계획될 수 없다면 모든 것이 죽고 지겨워질 것이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곳에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자유가 사라진다.
삶은 시간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이해는 명상을 통해 얻어진다.
그것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시간은 외부의 현상, 표면의 현상이다.
수천 년을 살아도 인간은 여전히 어리석다.
실제로 그의 어리석음은 더욱 커질 뿐이다.
그대 안에 어리석음의 씨앗이 있다면 그것은 수천 년 동안 거대한 나무가 되어서
수많은 어리석은 자들이 그 나무 아래서 쉴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더욱 어리석어 지고, 지혜로운 자는 더욱 지혜로위진다.
지혜는 그것이 어떤 경험이든지 그대가 존재 전체로 깨어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깨어 있는 의식과 경험의 만남이 바로 지혜다.
수십억 인구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붓다가 된다면, 이 무슨 일인가?
왜 다른 모든 나무들은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
꽃을 피우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 나무는 웃을 수 없고, 노래 부를 수 없고, 춤출 수 없다.
나무의 에너지가 넘쳐날 때 꽃이 가능하다.
꽃은 하나의 선물, 하나의 나눔이다.
나무는 존재계 전체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필요한 것 이상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그것은 하나의 노래다.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깨어 있는 의식이 필요하다.
깨어 있는 의식이 결여된 사랑은 결국 감옥이 되고 만다.
깨어있는 의식을 동반한 사랑은 곧 자유다.
그 자유가 그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되게 할 것이다.
그 자유가 그대에게 날개를 줄 것이다.
남들과 함께 살 때 삶은 어떤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 규칙들은 종교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신적이지도 않다.
그것들은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다.
구도자는 규칙들이 단지 하나의 게임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그것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넘어서 간다.
초월한다. 그 자신은 그것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타인을 위해 규칙들을 따르지만 그렇다고 자동인형이 되진 않는다.
그의 의식은 늘 깨어있다.
깨어 있는 의식이 그의 목적이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그러기에 옛 현자는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