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 즈 · 니 · 쉬 · 강 · 설 · 의 · 완 · 결 · 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는 神들의 광기
제1권 사자가된 낙타의 반역
제2권 어린아이가 된 사자의 반역
제3권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의 자유
오쇼 라즈니쉬 지음 · 손민규 옮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천체여! 만일 그대가 그대의 빛을 받아 줄 대상을 갖지 못했다면 그대의 행복은 과연 무었이 되겠는가?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태양이 떠오름으로 새들은 행복하다. 태양이 떠오름으로 꽃들은 행복하다.지구 전체가 깨어 일어나 행복에 넘치고 에너지로 가득 찬다.태양이 떠오름과 함께 새날이 밝아 온다는 희망으로 넘친다.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노래할 때, 태양 또한 틀림없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새와 꽃들이 없고 아무도 기다려 주는 이가 없다면 태양은 슬픔에 잠길 것이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사라진다면 태양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떠오르겠는가? 뱀과 독수리 짜라투스트라는 뱀과 독수리를 데리고 다니곤 했다.동양에서 뱀은 지혜를 상징한다. 가장 위대한 지혜는 뱀이 허물을 벗듯이, 뒤 돌아 보거나 집착함이 없이 과거로부터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항상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움직인다. 지혜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삶에 대한 경험이다. 지혜는 과거 기억의 잔재를 긁어모으지 않는다. 지혜는 항상 신선하고 새롭고 현존하는 것을 반사하는 투명한 거울과 같다. 독수리는 자유, 용기의 상징이다.독수리는 두려움 없이 태양을 가로질러 끝없는 하늘 저 멀리 날아간다.지혜와 자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지식은 지혜와 정반대로 대립되는 것이다. 지혜는 본질적으로 순진무구함이다.지식은 에고이지만 지혜는 그 에고의 사라짐이다. 지식은 그대를 온갖 정보로 가득 차게 하지만 지혜는 그대를 완전히 텅 비게 한다. 그 비어있음(Emptiness)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충만함이다.지혜가 자유를 가져다준다. 다른 자유는 없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자유는 허위에 불과하다. 유일하게 진정한 자유는 영혼의 자유이다. 인간은 거의 무감각해졌다. 인간은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일수록 더 무감각하다. 인간이 이해하는 언어는 단지 돈과 권력, 명성의 언어일 뿐이다. 인간은 사랑과 기쁨, 춤의 언어를 잊어버렸다. 홀로 되었을 때, 짜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면서 신이 죽었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 진리와 종교성,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말을 이해해야 한다. 신은 단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말이란 있을 수 없다. 신이라는 관념은 교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신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 허황된 관념은 오랜 세월 동안 세뇌작용을 통해 인간에게 강요되어 왔다. 신은 공포와 탐욕, 삶에 대한 절망감에서 비롯된 발명품일 뿐이다. 신은 삶의 예술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창작품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춤추는 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삶은 주의깊음(alertness)과 지성, 인내와 관용을 필요로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삶과 삶이 주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는 삶을 열렬하게 긍정하는 유일한 신비주의자이다. 삶에는 아무 것도 포기할 것이 없다. 삶은 존재계의 선물이다. 삶을 즐기는 법을 배우라. 삶의 과즙을 맛보라. 나무와 별, 그들과 함께 춤추라. 질투 없이 사랑하고, 경쟁심 없이 살라. 모든 사람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어떠한 신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때 저 세상의 낙원이란 개념은 쓸모 없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대의 삶이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며, 나무가 춤추고 기쁨의 빛을 비추는 아름다운 정원처럼 되기를 바란다. 짜라투스트라는 절대적으로 삶에 찬성한다. 이것이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이다. 독약과 같은 사람들, 파괴적인 사람들은 수많은 추종자를 갖는다. 그리고 삶과 사랑의 메세지가 전부인 이 독특한 신비주의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종교가 되었다. 삶 이외의 다른 신은 없으며 사랑 이외의 다른 기도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친다. 인간이란 초극(超克) 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초극하기 위해 무엇을 해왔는가?"이제 까지 모든 만물은 자기 이상의 무엇을 창조해 왔다. 그러나 위대한 만조(滿潮)가 썰물이 되는 것을 바라며, 또한 인간을 초극하는 것보다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가?원숭이는 인간에 대해 무엇인가? 웃음거리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비통한 치욕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초인에 대해 웃음거리이거나 비통한 치욕이다. 그대들은 벌레로터 인간에의 길을 걸어왔으나, 그대들 안에는 아직도 많은 것이 벌레 그대로이다. 먼 옜날에 그대들은 원숭이였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인간은 어떤 원숭이 보다 더한 원숭이다. 그대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자도 식물과 유령사이의 잡종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내가 그대들에게 유령 혹은 식물이 되라고 할 것인가?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고 있다!초인이란 대지(大地)의 뜻이다.그대들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초인은 대지의 뜻이 될거라고......형제여! 그대들에게 부디 원하노니, 언제까지나 대지의 뜻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초지상적인 희망에 관에 말하는 자들을 부디 믿지 말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독을 가져오는 자들이다.전에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 최대의 모독이었으나, 신은 죽었고 더블어 이 모독자들 또한 죽었다. 이제는 대지에 대한 모독이, 또한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의 내장(內臟)을 대지의 뜻보다 훨씬 존중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모독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설령 다윈의 이론이 생물학 적으로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심리학적으로는 그의 이론을 거부할 수 없다. 그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원숭이가 남아있다. 그대의 행동은 아직도 인간이하이다. 그대가 갖고 있는 인간성은 피부 깊숙이 스며든 것이 아니라 단지 살갗을 스친 정도일 뿐이다. 그대는 자신 안에서 고릴라가 뛰쳐나오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사소한 모욕만으로도 누구인가를 죽이거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대는 동물들이 갖고 있는 온갖 폭력성과 충동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 누구든지 대지에 반대하는 자는 그대에게 반대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대지의 아들과 딸이기 때문이다. 나무와 새에게 그러하듯이 이 대지는 그대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이 대지 위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이 그대의 가족이다.이 세상 전체를 거대한 가족, 사랑의 바다로 만드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종교이다. 그 외에, 종교라고 말하여지는 모든 것은 위선에 불과하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본문)
그대들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크나큰 경멸의 시간이다.그대들의 행복, 그리고 이성과 선행도 한결같이 구역질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또한 그대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이다.'나의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그것은 빈곤과 더러움, 그리고 비겁한 안일이다. 그러나 나의 행복 자체를 정당화해야 할 것이다!'나는 위대한 경멸자를 사랑한다. 그들은 동시에 위대한 숭배자이며 피안을 향한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오쇼 강설)
그대의 무지에 대한 경멸, 그대의 증오와 질투에 대한 경멸, 그대 안의 동물적인 본능과 세속적인 삶에 대한 경멸.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대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체험은 '그대 자신'에 대한 경멸인 것이다. 그대의 행복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모든 사람은 자신을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는 이성이 결여된 수많은 미신으로 물들어 있다. 그대는 신을 믿는가?이성적인 인간은 신을 믿을 수 없다. 그대가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천국과 지옥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도 자신을 매우 합리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그대의 이성은 맹목적인 신념과 증명되지 않은 가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이성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것은 경멸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대의 선행이란 무엇인가?실제로 그대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그대는 사랑과 기쁨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대에겐 넘치는 축복이 없다. 그러니 그대가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게임이다. 먼저 그들을 거지로 만들라. 그런 연후에 적선을 하고 그대는 선한 사람이 된다? 그대가 가진 것은 돈뿐이며 그 돈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착취한 것이다.그대의 선행은 무엇인가?그대는 자신의 선행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위선이지 미덕이 아니다. 짜라투스트라는 강렬한 어조로 말한다. 저 너머의 세계, 의식의 에베레스트를 동경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으로 불려질 가치도 없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본문
짜라투스트라는 이 같은 말을 마치고 다시 군중을 응시하며 침묵 속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말했다.'그들은 저기에 서 있다. 그들은 비웃고 있다. 그들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이들의 귀에 어울리는 입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목동이 없는 가축의 떼이다. 누구나 같은 것을 바라며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간다.'옛날에는 세계의 모든 인간이 미치광이였다' - 그들 중에 가장 영리한 자가 이렇게 말하고 눈짖을 한다.사람들은 영리하며 과거에 일어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은 끝이 없다. 사람들은 아직도 서로 싸우지만 곧 화해한다. - 그렇지 않으면 소화 불량에 걸리기 때문이다.사람들은 밤과 낮에 약간의 즐거움을 가지긴 하지만 건강을 소중하게 여긴다.'우리는 행복을 발견해 냈다.' -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박거린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쇼 해설
짜라투스트라의 이 말들은 항상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왔다. 수많은 군중들을 상대로 말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뜻밖이고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은 귀를 갖고 있었지만 귀 기울이지(listening) 않는다. 기껏해야 그들은 들을(hearing) 뿐이다. 그들은 귀를 갖고 있으므로 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더 요구된다. 귀와 더블어 고요하고 수용적인 마음, 간섭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다.그때, 듣는 것은 귀 기울임이 될 것이다. 귀 기울임은 그대가 그것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올 때 그대는 그 바람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가? 내적인 경험에 관해서도 똑같은 사실이 적용된다. 단지 고요한 마음으로 귀 기울인다면 무엇이 진리인지 즉각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마음과 무관하다. 이러한 인식은 그대 존재의 중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침묵과 순간 속에 존재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마음이 아니라 가슴을 통한 앎,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앎이다. 이것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짜라투스트라의 말이 곧 나의 말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는 그 말들이 25세기 전의 인물에 의해 말해 졌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교육의 혜택을 받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불행하다. 우리는 온갖 기계와 장난감으로 가득 찬 세상 안에서도 불행하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와 우리 존재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가 밖에서 찾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 존재의 내면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밖에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며 낙타가 사자가 될 것인지, 그리고 마침내 어떻게 사자가 어린아이가 될 것인지........ 존경심과 경애심을 품고 있는 강인한 정신에는 여러가지 무거운 것이 존재한다. 강인한 정신은 무거운 것, 가장 무거운 것을 열망한다.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 강인한 정신은 이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많은 짐을 짊어지기를 원한다.이처럼 강인한 정신은 온갖 무거운 것을 스스로 짊어진다.그리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서둘러 사막으로 달려간다.그러나 가장 황량한 사막에 이르러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곳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정신은 자유를 획득하여 자신의 사막에서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왜 정신 속에는 사자가 필요한가? 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공손하게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 사자라 해도 그런 능역은 없다. 사자의 능력은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자유를 만들어 내는 것 뿐이다.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에 대해서조차도 신성한 '노(No)'를 말하는 것, 나의 형제들이여, 그것을 위해서는 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나에게 말해 다오. - 사자도 해내지 못한 것을 어린아이가 해낼 수 있을지를, 왜 약탈자인 사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지를...... 어린아이는 순진 무구하다. 어린아이는 하나의 망각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어린아이는 하나의 유희이며 스스로 움직이는 수레바퀴이다. 어린아이는 첫번째 운동이며 신성한 긍정이다.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요구된다. 이제 정신은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것이며, 세계로부터 분리된 정신은 이제 자신만의 세계를 쟁취한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는 의식의 진보 과정을 세 개의 상징으로 구분한다.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가 그것이다. 낙타는 짐을 나르는 짐승이다. 낙타는 기꺼이 노예처럼 일하며 결코 반역하지 않는다.그는 'No'라고 말할 줄 모른다. 그는 신봉자이고 추종자이며 충실한 노에이다. 낙타는 인간 의식의 가장 낮은 단계이다. 사자는 혁명가이다. 혁명의 시작은 '노'라고 말하는 데서부터 발한다.낙타의 의식 속에는 "그대는 이것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자기를 이끌어 주는 누군가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그에게는 종교와 사제와 신성한 경전들이 필요하다. 그는 용기와 영혼이 없으며 자유에 대한 열망도 없다. 그는 다만 복종할 뿐이다. 사자는 자유를 열망하며 모든 구속을 파괴하고자 한다. 그는 자기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는 다만 "나는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자조차도 인간 성장의 최고점은 아니다. 최고점은 사자가 변형을 통하여 어린아이가 될 때 가능하다.어린아이는 순진 무구하다. 그것은 순수한 신뢰이다. 그것은 존재와 삶, 그리고 삶이 포함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신성하게 'Yes'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순수함과 진실함, 수용성, 그리고 존재에 대한 개방성의 정점이다. 이 상징들은 매우 아름답다.
즐거움과 정열에 대하여
감각이 느끼고 정신이 인식하는 것, 그것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감각과 정신은 스스로 모든 것의 목적이라고 그대를 설득하려 든다. 감각과 정신은 그토록 오만하다.감각과 정신은 도구와 장난감이다. 그 배후에는 여전히 '자기(self)'가 있다.'자기'는 감각의 눈으로 찾으며 정신의 귀로 듣는다.'자기'는 항상 귀를 기울이고 추구한다.'자기'는 비교하고 극복하고 점령하고 파괴한다.'자기'는 지배한다. 그리고 에고의 지배자이다.나의 형제여,그대의 사상과 감정의 배후에는 하나의 강력한 통치자, 하나의 알 수 없는 현자가 서 있으니, 그는 '자기'라 불리운다. 그는 그대의 육체 안에 산다.누가 안단 말인가?
(오쇼 강설)
주시하라.그러면 그대의 감각이 확실한 것이 아님을 발견할 것이다. 감각의 주장은 공허한 것이다. 그대는 말해진 적도 없는 소리를 들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본다. 육체는 항상 있는 그대로 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대 안에 단 두 가지의 실체만을 인정한다.육체와 존재가 그것이다. 그대의 존재에 도달하고 싶다면 육체와 더블어 시작하라. 육체는 그대 존재의 외적인 측면이다. 그리고 존재는 육체의 내적인 측면이다. 자기(self)는 그대의 진정한 주인이다.만일 그대의 자기가 감각과 마음을 도구로 이용한다면 그것은 완벽하게 옳다.그러나 인간에게는 일이 거꾸로 되었다. 우리는 주인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으며, 하인이 주인인 체한다. 마음과 감각은 하나의 도구로써는 훌륭하다. 주인이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주인인 체한다. 하지만 마음은 단지 하나의 하인일 뿐이다. 존재는 완전히 잊혀졌다. 그것이 인류의 비극이다. 그대의 자기, 즉 존재는 육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똑같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마음은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은 그대에게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그대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사랑 속에는 어떤 광기가 존재한다.그러나 그 광기 속에는 어떤 질서가 존재한다. 삶을 사랑하는 나의 눈에 나비와 비누 거품이 보이며 인간들 가운데 그와 같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이 가볍고 어리석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작은 영혼들이 파닥거리며 나는 것을 보는 것이 , 짜라투스트라로 하여금 눈물짓게 하고 노래하게 한다.
(오쇼 강설)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사랑에는 목적이나 의미가 없다. 사랑은 커다란 기쁨과 희열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의 의미는 아니다. 사랑은 목적을 가지는 비즈니스가 아니다. 광기란 무엇인가?그대가 왜 사랑하는지 증명할 수 없을 때 , 그것은 광기이다. 그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없다. 사랑은 자신 속에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그 공간은 진주처럼 빛나는 이슬방울이 매달린 장미꽃과 같다. 이른 아침 산들바람과 태양아래에서 춤추는 장미와 같다. 사랑은 그대 삶의 춤이다.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은 광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에게는 사랑만이 유일하게 정상적인 것이다.그대는 사람들을 관찰해 본적이 있는가?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것을 알릴 필요조차 없다. 그의 눈을 보면 새로운 깊이가 느껴지고 그의 얼굴에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떠오른다. 그의 걸음걸이에서 춤과 같은 미묘함을 볼 수 있다. 그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의 존재에 봄이 찾아와 영혼 속에 있던 꽃이 횔짝 피어 났다. 행복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삶의 흐름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긴 사람이다. 그는 작은 무지개를 만들면서 햇빛 속에 빛나는 비누 거품조차 사랑한다. 비누 거품과 나비, 바람속에서 춤추는 장미 . . . 그렇게 심각함이 없이 가벼운 것, 그대가 어리석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작은 영혼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춤을 보면서 짜라투스트라는 눈물 짖고 노래 부른다. 그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다.이 변화하는 삶이 짜라투스트라에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노래 부르게 한다.
우정에 대하여
타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폭로한다.친구에 대한 우리의 염원은 우리 자신을 폭로한다.
(오쇼강해) 친구에 대한 욕구가 있는 한 그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다.오로지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친구가 될 수 있다.그러나 그것은 그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의 우정은 배고픔과 갈증이 아니라 흘러 넘치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사랑을 나누어 주기 원한다. 친밀함 (friendliness)은 관계 이상의 것이다. 모든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구속한다. 관계는 그대를 노예로 만들고 다른 사람을 노예화 시킨다.친밀함은 어떤 조건이나 기대, 보답, 심지어는 감사함까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나누어 주는 기쁨일 뿐이다. 친밀함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다면 그대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그대는 속임수를 쓸 수 있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공허함을 채워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공허함을 채워 줄 수는 없다.그대는 자신의 공허함과 직접 마주쳐야 한다.그대는 그 공허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위안이 아니다.그대는 혁명을 필요로 한다.그대 존재의 변형을 필요로 한다.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사랑과 우정, 믿음등 모든 관계는 그대 자신이 공허하고 가치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폭로할 뿐이다. 그대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누가 그대를 사랑하겠는가? 그대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다면 누가 그대를 믿겠는가?
이웃간의 사랑에 대하여
나는 그대에게 이웃이 아니라 벗을 가르친다.그 벗으로 하여금 대지의 축제가 되고 초인에 대한 예측이 되게 하라.나는 그대에게 벗과, 그의 넘쳐흐르는 가슴을 가르친다.나는 그대에게 완성된 세계를 품고 있는 벗을, 선의 그릇을, 항상 베풀기 위하여 완성된 세계를 갖고 있는 창조하는 벗을 가르친다.그대는 벗의 안에 깃든 그대의 원칙으로써 초인을 사랑해야 한다.
(오쇼 강설) 이웃은 우연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친구는 그대 스스로 발견하고 선택한 존재이다. 우정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를 친구로 '선택' 한다.우정이 하나의 축제가 될 정도로 친구를 사랑하라.이 세상은 이웃이 아니라 친구를 필요로 한다. 사랑하지만 간섭하지 않는 친구, 사랑하지만 조건을 내세우지 않는 친구, 사랑하지만 그대를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내버려두는 친구, 세상에는 그런 친구가 필요하다.사랑과 우정으로 가득찬 세상,그런 세상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그 보다 낮은 목표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단 하나의 유일한 종교, 즉 사랑을 알았다면 세상은 파라다이스가 되었을 것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자의 길에 대하여
나의 형제여, 그대는 따로 떨어져 홀로 있기를 원하는가?잠시 멈추어 내말을 들어라."추구하는 자는 쉽사리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 따로 떨어져 홀로 있는 것은 죄악이다." - 군중은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말하는가? 내가 듣기 원하는 것은 그대의 지배적인 사상이지, 그대가 멍에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자라투스트라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대의 눈은 분명히 나에게 알려야 한다.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나의 형제여, 나의 눈물과 더블어 홀로 있으라.자신을 초월하여 창조하기를 원하는 사람,그리하여 소멸해 가는 사람,나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느니......
(오쇼 강설)
군중은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스타일을 원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군중은 그대가 군중의 일부이기를 원한다.예수라는 젊은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무엇이 그의 죄였는가?그의 죄는 홀로 자신의 길을 갔다는 것이다.그는 자신의 개체성을 확립했고 군중을 추종하지 않았다.그는 자신만의 발자국을 만들었다.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기를 원한다.그래야만 자신의 열등감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홀로 우뚝 선다.그는 자기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다.그는 위험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대의 내면이 공허하며 군중 속에서 그대 자신을 잊으려고 애쓴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군중은 창조자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창조하는 사람은 사회적인 도덕규범이나 표준적인 가치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그는 교회에 갈 의무도 없고 경전을 읽을 의무도 없다. 그는 자신만의 종교를 발견한다.창조성이 곧 그의 종교이다.군중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그를 설득하려 든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유인이기를 포기해야 한다.그렇다면 그대는 무엇인가?그대는 영혼이 없는가?그대는 의식을 갖지 못했는가?그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꼭 다른 사람이 와서 그대에게 빛을 주어야만 하는가?어떤 사람이 빛을 가져온다면, 그는 다시 빛을 거두어갈수도 있다.그 빛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자신을 초월하여 창조한다는 말은 그대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 그럴 때에만 그대 안에 이미 현존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창조할 수 있다. 그대의 거짓된 인격이 모두 사라질 때 그대의 진정한 개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창조는 그대 자신으로 가는 길인 동시에 초인으로 가는 길이다.자신의 내면에서 초인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헛된 삶을 사는 것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내게 말해 다오, 황금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황금은 흔치 않고 무용하며 반짝반짝 빛나면서 그 광채가 부드럽기 때문이다.황금은 항상 자신을 선사한다. 황금은 오직 최고의 덕을 나타내는 하나의 비유로서만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된다. 선사하는 자의 눈빛은 황금처럼 빛난다.
(오쇼 강설)
그는 황금에 대해 말함으로써 아름다움과 선함, 그리고 사랑이라는 최고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사랑은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사랑을 수단으로 만드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사랑이 아름다움과 기쁨, 향기를 간직하기 위해선 무용한 채 남아 있어야 한다. 사랑이 어떤 곳에 도달하기 위한 사다리가 되는 순간, 사랑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에는 목적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은 목적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전락한다.무엇이든지 유용한 것은 수단이라는 낮은 차원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목적은 항상 무용한 것이다. 짜라투스트라에 있어서 , 무용성이라는 말은 비난의 말이 아니다. 장미꽃의 유용성이 무엇인가?하늘의 구름이 현란한 색채로 물들고 지평선이 한편의 시처럼 될 때, 그토록 아름다운 석양의 유용성은 무엇인가?유사 이래로 예술가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예술은 예술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자신의 덕을 다른 사람에게 선사하는 사람들, 내면의 풍요로움을 전해 주는 사람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갖는 사람들의 눈은 황금처럼 빛난다.그들은 비교할 수 없는 광채를 가진다.
선과 악의 모든 이름은 비유이다. 비유는 말하지 않으며 다만 암시할 뿐이다. 비유에서 지식을 구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정신적인 가치에 관한 모든 언어는 다만 힌트일 뿐이다.마치 그것이 실체인 양 말에 얽매이지 말라. 말은 힌트이다.그것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일본에는 불상이 없는 절이 있다.그 절에는 불상 대신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다.왜냐하면 붓다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손가락을 숭배하지 말라.손가락에 대해서는 잊어라.경전과 스승, 종교에 대해서는 잊어라.다만 그들이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해 힘쓰라. 손가락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죽인다.모하메드교인은 기독교인을 죽이고, 기독교인은 힌두교인들을 죽인다.힌두교인은 모하메드교인을 죽인다.아무도 손가락을 위해 싸운다는 사실을 모른다.그러나 달은 하나이다.손가락이 가리키는 각도는 다를 수 있다.왜냐하면 달을 가리키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시대, 다른 시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어찌 크리슈나, 예수, 붓다, 짜라투스트라가 똑같은 방식으로 달을 가리킬 수 있겠는가? 경전과 말, 조각상이 지시하는 바에서 지식을 구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탐구는 내면을 향해야 한다.신의 왕국은 그대 내면에 있다.그대가 내면을 향하지 않는 한,그대가 눈을 감고 마음을 릴렉스(relax) 시키지 않는 한,그대의 마음과 가슴, 육체가 깊은 조화를 이루지 않는 한,그대는 내면에 울려 퍼지는 침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 자신의 목소리이다.그대 자신의 진리만이 그대를 해방시킨다.다른 사람의 진리는 항상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그대들의 가슴이 강물처럼 드넓게 가득히 물결쳐 그 강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축복이 되고 위험이 될 때, 그때야말로 그대들의 덕이 비롯되는 때인 것이다. 전통과 관습, 군중에 맞서서,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용기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짜라투스트라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그를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가슴이 사랑의 강물로 흘러 넘치는 사람의 현존 자체가 그대에게 위험을 안겨준다. 그의 사랑은 그대를 익사시킬 수 있다. 그의 사랑은 그대의 에고를 파괴할 수 있다. 유사 이래로 인류에게 커다란 축복을 안겨준 사람들은 인류를 저주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되어 왔다. 오로지 지성과 용기를 겸비한 극소수의 사람들,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모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들의 축복을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위험성만을 알았다. 이 사람들은 사회 전체에 혼란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와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는 혼란은 별이 탄생할 때의 혼란이다. 그 혼란을 통해 인간은 진화의 최고점에 도달한다. 낡은 것이 파괴되고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그런 혼란은 마땅히 환영받아야 하는 혼란이다.
그대들이 비난과 칭찬을 초월하고 , 그대들의 의지가 사랑하는 자의 의지로서 만물에 명령하려 할 때, 그때야말로 그대들의 덕이 비롯되는 때이다.그대들이 단 하나의 의지를 의욕하는 자가 되고, 모든 욕구를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본질이며 필연이라고 부를 때, 그때야말로 그대들의 덕이 비롯되는 때이다. 진실로 그것은 새로운 선이며 악이다 !진실로 저 심연의 새로운 일렁임이며 새로운 샘물의 목소리이다 ! 이 새로운 덕은 힘이며 지배적인 사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하나의 미묘한 영혼이다. 그것은 황금의 태양이다. 그리고 그 둘레를 인식의 뱀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짜라투스트라의 중심 주제이다. 사랑은 곧 그의 신이다. 사랑은 모든 덕의 출발이며 기원이다.어둠과 무지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은 새로운 도덕성이며 새로운 선(善)이다.사랑은 새로운 신이다. 진실로 저 심연의 새로운 일렁임이며 새로운 샘물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황금의 태양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2)
나의 형재들이여, 그대들의 덕의 힘으로 대지에 충실하라!그대들의 사랑과 지식이 대지의 뜻에 봉사하도록 하라!이렇게 나는 그대들에게 간절히 바란다. 정신 또한 덕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백 번을 실험했으며 백 번을 길을 잃고 헤매었다. 그렇다. 인간은 하나의 실험이었다. 아, 많은 무지와 오류가 우리에게서 육체가 되었다. 수천 년 간의 이성뿐만 아니라, 수천 년 간의 광기도 우리에게서 돌연히 튀어나온다. 상속자가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오쇼 강설)
인간은 실험적인 존재이다.인간은 깨어있는 의식의 경지와, 삶의 심오한 근원에 도달하기 위한 실험적인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은 완성품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개는 개로 태어나 개로 죽는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붓다로 죽을 수 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다른 동물은 진화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진화할 수 있다. 일단 그대가 실험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 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대는 진보해야 한다. 그대의 진보에는 한계가 없다. 진정한 진화는 내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그대의 여행은 내면을 향한다. 그렇게 해서 실험적인 존재로써의 그대는 결국 경험적인 존재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성직자가 아니다. 그는 영혼의 과학자이다.그의 종교는 숭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그의 종교는 더 높은 차원으로의 변형으로 이루어 진다.그에게 있어 종교의 상징은 불이다. 불은 항상 위를 향해 타오른다.그러나 짜라투스트라의 추종자들은 다른 종교와 똑같은 오류를 저질렀다. 그들은 의식의 더 높은 차원을 향해 스스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보다는 불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숭배는 교활한 장치이다. 사람들은 뭔가를 숭배하고, 숭배가 곧 종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숭배는 종교가 아니다.사람들은 길을 잃었고 , 짜라투스트라의 사원은 여전히 상징에 매달린다. 그대 안의 모든 쓰레기를 불사르고 순수한 황금 만을 남기는 불꽃,스스로 그런 불꽃이 되고자 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대지는 그대를 통해 자신의 의미를 추구한다. 그대는 대지의 가장 진화된 부분에 속한다. 그대의 육체는 대지에 속한다. 그대는 대지의 가장 만개한 꽃이며 위대한 변형이다.사랑으로 대지의 뜻을 받들라.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대지와, 대지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잠재성을 흔들어 일깨우라. 그것만으로도 신과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게 될 수 있다. 인간은 그 자신만으로도 충족될 수 있다. 인간은 하나의 실험이었다.인간은 하나의 '되어감(a becoming)이다.실험이 실패한 이유는 아무도 우리를 대지의 실험으로써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모든 종교는 대지를 포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출발점부터 잘못된 길을 간다. 그들 또한 대지의 아들이며 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지에 대한 포기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삶의 의식을 부여한 것은 바로 대지였다. 수천 년 동안 잘못되어 온것이 유산으로써 우리에게 물려졌다. 과거의 전통과 종교에서 잘못된 것을 가려내고, 다른 실험들이 어디에서 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매우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그대는 맹목적으로 과거의 행로를 따라가서는 안된다. 불필요하고 비 본질적인 모든 것을 불태우고 극소량의 본질만 남기는 불꽃이 되어야 한다. 그 극소량의 본질로부터 그대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3)
그대들은 나를 존경한다. 그러나 언젠가 그대들의 존경이 무너진다면 어찌 될까?무너지는 우상에 맞아 죽지 않도록 조심하라.그대들은 짜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는가?그러나 짜라투스트라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그대들은 나의 신봉자이다. 그러나 신봉자에게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조차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나를 발견할 것이다.나는 지금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나를 떠나 그대들 자신을 찾으라. 그대들이 나를 모두 부인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와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은 신봉자(believers)를 원하지 않는다.세상은 신봉자로 가득 찼다. 짜라투스트라가 원하는 사람은 완전히 변화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믿음(belief)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옳다."나를 믿지 말라. 나를 이해하라!그리고 그 이해를 통해 그대 안에 혁명이 일어나도록 하라."단지 믿기만 하는 것은 너무 싸구려이다. 그것은 사기극이다.그러나 세상 전체가 그런 기만 속에 살아간다. 짜라투스트라를 만남으로 해서 그대가 그대 자신을 탐구하기 시작한다면 그와의 만남은 커다란 의미를 가질 것이다.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와의 만남은 아무 의미도 없다.
지복(至福)의 섬에 대하여
유일한 것, 완전한 것, 충족된 것, 불멸하는 것, 이런 것에 대한 모든 가르침을 나는 악이며 염세적이라고 부른다.최상의 비유는 시간과 생성에 대해 말해야 한다.그 비유는 모든 무상함을 대변하며 찬미하는 것이어야 한다.나의 의지는 항상, 나를 해방시키고 기쁨을 가져다 주는 자로서 나에게 온다.
(오쇼 강설)
그대의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 될 것이다.그때, 그대는 날이 갈수록 더러워지는 고여 있는 물이 아니다. 그대는 변화하여 흐르는 강이다.그대의 삶은 매 순간 새로워지고 새로운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선사한다. 찬양되어야 할 것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변화이다.불변하는 것은 죽어 있다.그러나 살아 있는 것은 항상 움직인다.그것은 항상 변화하고 생성한다.짜라투스트라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생성'을 가르친다. 그는 영원불변 대신해 변화를 가르친다. 의지(Willing)는 그대를 해방시킨다.왜냐하면 의지는 그대를 창조자로 만들기 때문이다.의지는 그대를 신으로 만든다.의지는 그대를 초인으로 변형시킨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동정하는 자에 대하여
일찍이 악마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신에게도 그의 지옥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동정을 경계하라. 동정으로부터 무거운 구름이 인간에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진실로 나는 뇌우(雷雨)의 전조(前兆)를 잘 알고 있다.그러나 이 말 또한 명심하라!모든 사랑은 동정을 넘어서 있다.위대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까지도 창조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에 바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바치는 나의 이웃에게도" -- 이것이 창조자의 말이다.그러나 모든 창조하는 자들은 냉혹하다.
(오쇼 강설)
그대는 지성과 명상, 사랑을 통해 계속적으로 그대 자신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그대의 연인을 변화시켜야 한다.그대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매순간 새로워져야 한다. 그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차원, 새로운 길을 발견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한다. 그대는 똑같은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 동정은 사랑보다 훨씬 낮은 차원이다.사랑은 창조적인 경험이다.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를 창조한다.그 끊임없는 창조 안에서 그들은 항상 새롭고 신선하다. 짜라투스트라는 창조성의로써의 사랑을 말한다. 그의 말은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사랑은 고정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사랑은 창조적인 소용돌이이며 하나의 춤이다.춤이 더욱더 깊어질수록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춤만이 남는다.그대는 삶을 아름다운 춤으로 만들 수 있다.그대는 삶을 사랑의 창조적인 행위로 채울 수 있다.짜라투스트라는 사랑을 최상의 가치로 가르친다.그에게 있어 사랑은 신이다.그에 관한 한, 사랑은 종교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성직자에 대하여
어느 날 짜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신호를 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여기 성직자들이 있다. 그들이 나의 적이기는 하지만, 조용히 칼을 잠재운 채로 그들을 지나쳐 가라!그들은 질이 좋지 않은 적이다. 그들의 겸손보다 더 복수심에 찬 것은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손대는 자는 쉽게 더럽혀진다.그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자가 그들에게 멍에를 씌운 것이다.그릇된 가치와 잘못된 경전의 멍에를! 아, 누군가가 그들을 그들의 구세주로부터 구원해 준다면!아, 저 성직자들이 세운 오두막집을 보라!그들은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동굴을 교회라고 부른다!아, 이 왜곡된 빛, 이 곰팡내 나는 공기여! 여기서는 영혼이 자신의 정점까지 날아오를 수 없다!오히려 그들의 신앙은 이렇게 명령한다. '무릎을 꿇고 계단을 기어오르라. 너희 죄인들이여!'누가 그런 동굴과 속죄의 계단을 만들었던가? 그것은 자신을 숨기고 싶어하고 밝은 하늘 아래에서 부끄러워했던 자들이 아니었던가?허물어진 지붕 사이로 다시 맑은 하늘이 새어 들어와 무너진 벽 위의 풀들과 붉은 양귀비꽃을 내려다볼 때 -- 그때에 비로소 나는 이 신의 처소를 향해마음을 돌리리라.그들은 자기들에게 반대되는 것, 자기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신이라고 불렀다. 진실로 그들의 숭배 속에는 영웅적인 성질이 많았다.그리하여 그들은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말고는, 그들의 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나로 하여금 그들의 구세주를 믿게 하려면 그들은 좀더 훌륭한 노래를 불러야 하리라. 나에게 그의 제자들이 좀더 많이 구원받은 것처럼 보여야 하리라!나는 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싶다. 아름다움만이 속죄를 설교하기 때문이다.그들 구세주의 영혼은 헛점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 구멍들을 자신들의 망상으로 채우고 그 구멍 마개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그들은 열심히 고함을 지르며 그들의 가축 떼를 외나무다리 위로 몰아친다.마치 미래로 통하는 다리가 그 하나 뿐인 양 !그러나 진실로 이 목자들 또한 여전히 양떼에 속해 있는 것이다!그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 위에 피의 문자를 새겼다. 그리고 그들의 어리석음은 진리가 피에 의해 증면 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그러나 피는 진리의 증인ㅇ로서는 가장 나쁜 증인이다. 피는 가장 순수한 가르침에도 독을 섞어서 망상과 증오로 바꾸어 놓는다.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이 자유로 가는 길을 찾으려 한다면, 구세주보다도 훨씬 위대한 사람들에 의해 구제되어야 한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쇼 강설)
종교를 대표하는 성직자들, 그들은 종교의 친구가 아니다. 그들은 종교의 가장 큰 적이다. 왜냐하면 종교에는 중개인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대와 존재계 사이에는 직적적인 관계가 있을 뿐이다.존재계는 단 한 가지 언어만 아는데, 그것은 바로 침묵의 언어이다.그대를 위해 삶과 존재계의 의미를 해석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모든 사람은 자기 스스로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존재계는 아름다운 음악과 넘치는 기쁨,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축복의 노래가 있다.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존재계의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침묵하는 것 뿐이다. 종교적인 인간은 순수한 엑스터시(ecstasy) 속에 산다.그의 가슴은 노래로 가득하다.그는 언제라도 춤출 준비가 되어 있다.그러나 성직자들은 진리를 탐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진리가 이미 발견되었으므로 그저 신앙을 갖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진리는 다만 명상적인 각성(awareness)과 그대 내면의 침묵을 필요로 한다.유일한 사원은 바로 그대의 내면이다. 그 외의 다른 사원은 모두 가짜이다. 깊은 조화 속에 하나가 되지 않는 한, 그대는 이 우주의 음악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음악은 세상이 잘못된 곳이 아니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것이어야 한다.삶은 하늘 밖의 하늘, 정상 위의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진보해야 한다. 신은 자신의 창조물인 아담과 이브가 현명해지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은 계속 그를 숭배한다.그리고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성직자들을 따라간다.짜라투스트라는 바로 이런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전적인 자유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 전부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의 구세주가 될 것이다.그대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구세주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낡은 목록판과 새로운 목록판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정지해 있다." -- 이것이 바로 겨울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불모의 시간을 위한 좋은 구실이며, 겨울 잠을 자는 자들과 난롯가에 웅크리고 있는 자들을 위한 커다란 위안이다."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정지해 있다" -- 그러나 얼음을 녹이는 바람은 그 반대를 설교한다!오, 나의 형제들이여, 지금 모든 것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누가 아직 선과 악에 매달릴 수 있겠는가?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는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고타마 붓다와 동시대인이다. 이 세 명의 위대한 스승은 삶에 대해 기본적으로 하나의 접근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삶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았다."삶은 유전한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그들은 만물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인간 심리에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 한다. 왜냐하면 변화가 무엇을 초래할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그대는 미리 그것과 마주칠 준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발적이고 즉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이것이 문제이다. 즉흥성(spontaneousness)은 깊이 있는 의식과 주의 깊음(aalertness)을 요구한다. 짜라투스트라와 고타마 붓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왜 이같은 사실을 계속 강조하는가? 그것은 이 사실이 우리의 도덕과 종교, 인간관계, 그리고 삶에 대한 접근방식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치를 위해 살아라.삶과 더블어 흘르라.이 지구는 정치가나 종교지도자, 교회와 전통의 소유물이 아니다.이 지구는 삶을 사랑하고, 삶을 노래하는 사람들, 삶을 축복하고 춤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삶을 하나의 축제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 -- 삶은 그런 사람들의 것이다. 삶을 남김 없이 전체적으로 사는 것, 이것이 곧 신성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낡은 목록판과 새로운 목록판에 대하여
오,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가도록 방향을 가리키고, 그대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임명한다.그대들은 미래를 낳는 자, 미래를 경작하는 자, 미래의 씨를 키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진실로 소상인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귀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값이 붙어 있는 것 중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앞으로 그대들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영광으로 여기지 말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대들의 명예로 삼으라! 그대들은 자식들의 땅을 사랑해야 한다.이 땅이 그대들의 새로운 귀족이 되게 하라.아득히 깊은 바다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그대들의 땅이 되게 하라! 나는 그대들에게 그것을 찾고 또 찾으라고 항해할 것을 명한다!그대들은 그대들이 아버지의 자식임을 그대들의 자식에게 보상해야 한다.그래서 지나간 모든 것을 구제해야 한다! 나는 이 새로운 목록판을 그대들의 머리 위에 걸어 놓는다!
(오쇼 강설)
과거로부터 해방 되는 것, 그것은 곧 정신적인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마치 지구상에 새로 태어난 것처럼 그대는 아무 과거도 갖지 않는다. 그대는 오늘 아침 봉오리를 연 장미꽃처럼 신선하다.연꽃에 매달린 이슬방울처럼, 아침의 산들바람처럼 그대는 신선하고 새롭다.과거에서 해방되라.과거는 그대의 영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과거가 마음 속에 남겨 놓은 먼지를 깨끗이 청소했을 때, 그대의 의식은 투명한 거울이 된다. 그 거울은 너무나 투명해서 미래의 모든 것 -- 새로운 귀족과 새로운 가치, 초인을 비추어 볼 수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며 수치이다.'창조 되었다' 는 것은 꼭두각시 이외에 다른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그때에, 그대는 고유의 영혼을 갖지 못한다.반면에, 신성은 그대가 창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신성은 그대를 모두를 초인과 창조자로 만들 것이다.신성은 그대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다. 순진무구함과 침묵, 평화와 진리 그리고 그대 내면의 존재와 빛에 대한 경험, 그대의 영원성에 대한 경험이 신성을 이루는 요소이다.신성은 미래의 종교가 될 것이다.신은 숭배의 대상이지만, 신성은 숭배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신성을 창조함에 의해 그대는 의식의 최고점에 도달한다.그대는 가장 아름다운 공간과 엑스터시에 도달한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딘가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대의 기계적인 습성, 로보트 같은 행동, 그리고 그대 자신을 초월하기 위해 용기를 내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 최고의 완성인 초인은 오지 않으리라. 우리는 동물들과 산, 나무, 강과 의사를 소통하기 위하여 노력한 적이 없다. 확실히 그들의 언어는 우리와 다르다.침묵 속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무, 동물들 그리고 새들과의 조화를 경험한다.인간은 탐험을 계속해야 한다. 탐험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우리는 사소한 일에 정신을 쏟고 있다. 우리는 삶의 실체와 소중한 가치에 관심이 없다. . . . . .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SATSANG 사트상 : 사트상은 진리에 도달한 자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뭔가 꼭 말을 해야 될 필요도 없으며, 반드시 질문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그저 진리에 이른 자와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경험이다. 그의 진동이 전해오고, 그의 기쁨이 전염된다. 그의 침묵이 그대 안으로 스며든다. 그의 가슴이 돌연 그대의 가슴과 어울려 춤추기 시작한다.
웃음과 춤에 대하여
도대체 사랑하지 않으면 곧바로 저주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내게 고약한 취미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 완고한 자는 그렇게 했다. 그는 천민 출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에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으리라. 위대한 사랑은 사랑을 바라지 않는다. -- 위대한 사랑은 보다 큰 것을 바라는 것이다.
(오쇼 강설)
위대한 사랑은 사랑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사랑은 이미 위대하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랑은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곧 명상이나 기도가 될 것이다.홀로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흘러 넘칠 수 있는 것은 명상 안에서만 가능하다. 명상에는 엄청난 사랑과 자유가 동시에 존재한다.
아,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진실성'을 믿게 하려면 먼저 그대들이 숭배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수어 버려야만 하리라.진실한 자 -- 신도 없는 사막에 가서 자신의 숭배하고자 하는 가슴을 부숴 버린 자를 나는 그렇게 부른다.그러나 잘 먹어 살찐 유명한 철학자들은 도시에 산다. -- 그 짐수레를 끄는 가축들은 !그들은 언제나 당나귀가 되어 민중의 짐수레를 끌고 있는 것이다 !
(오쇼 강설)
철학은 진리를 발견하는 길이 아니다. 철학을 통해서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다. 철학은 다만 공허한 언어의 체계를 구축할 뿐이다. 철학은 사람들의 머리를 비대하게 만들 뿐, 삶에 어떤 혁명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과거에 신은 만물의 창조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런 관념은 인간을 하나의 사물로 전락시킨다.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이 없을 때뿐이다. 인간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되어 간다. 창조는 진화가 없음을 의미한다. 창조된 모든 것은 그 지점에서 완전히 정지한다. 진화는 우주가 원래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인간의 의식은 진화를 통해 생성된 것이다. 그리고 진화 안에서는 신이 있을 자리가 없다. 짜라투스트라는 부패하고 낡은 것을 철저하게 청소하고자 한다. 그는 그대의 눈이 멀리 떨어진 별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한다. 그 별은 그대의 미래이다.그대는 그 별이 될 수 있고,또 그 별이 되어야 한다.왜냐하면 별이 되지 않는 한, 그대의 삶은 춤과 노래, 축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변자가 아니다.그들에겐 정신을 차리도록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 사람이 필요하다.그대가 숭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의 의식보다 높은 것은 없다.오로지 인간의 의식만이 자신을 초월하여 나아갈 수 있다.그대가 떠받들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의 유명한 철학자들을 '민중의 수레를 끄는 당나귀들' 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대가 존경받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사람들의 선입견에 어긋나는 말을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의 품위를 갖춘 사람은 존경을 바라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의 품위와 존엄성을 갖는다. 그는 자신을 존경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초극(自己超克)에 대하여
(오쇼 강설)
삶은 끊임없는 초극의 과정이다.초극이 없다면 , 사물은 그 자신을 초월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정체된 채로 남을 것이다. 짜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종교는 '진화' 이다. 찰스다윈보다 2천 년이나 앞서서 짜라투스트라는 진화론의 모든 기초를 다져 놓았다.삶은 계속해서 그 자신을 초극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초극을 멈추는 순간, 삶은 사라진다. 완전히 정지할 때, 세상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삶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재의 세계에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로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변하지 않는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과 악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극해야 한다.그리고 선악의 창조자가 되려는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 가치들을 부수어야만 한다.이렇게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적인 선이다.우리의 진리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파괴하라.지어야 할 집이 너무 많다. "창조의 길 위에서 그대는 또한 파괴해야 하리라."더 높은 가치를 원한다면 낡은 집은 부숴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창조자는 거의 언제나 파괴자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학자에 대하여
(오쇼 강설)
지식의 포기는 내면의 청소를 의미한다.명상은 빌려 온 지식을 포기하고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다.그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그대의 무지는 순진무구함이 된다.지혜로운 자들이 "나는 모른다."고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짜라투스트라에 의하면, 최고의 의식 상태는 어린아이와 같다. 붓다와 예수는 진리를 알았을지도 모른다. 크리슈나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앎이 그대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대는 그대 스스로 탐구하고 추구해야 한다. 그대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 구도자가 되어야 한다.그대는 지도에도 없는 인적미답의 길을 가야한다. 무지가 환히 빛을 발하게 될 때, 하나의 원이 완성된다.무지가 각성과 만나는 순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폭발이 일어난다. ego로서의 그대가 사라지고, 그대는 순수한 존재, 아무것도 주장할 필요가 없는 순수한 '있음(isness)'이 된다.바로 그런 순간에,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고 말했다. 똑같은 상황에서 보디달마는 이렇게 선언했다."나의 '나'는 단지 언어적인 편의일 뿐이다. 내 안에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실체는 없다. 나는 다만 언어적인 편의상 '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 말이 없다면 그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는 사라지고 순수한 하늘, 순수한 '있음(isness)' 만이 존재한다.지식의 구름이 끼지 않은 청정무구함만이 존재한다."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볼 때, 그대는 생각하는가?대부분의 경우에 그대는 낡은 습관으로 인해 생각을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마음속으로 "아, 얼마나 아름다운 석양인가!"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의 말은 장애물이 될 뿐이다. 그것은 석양과 하나가 되는 방법이 아니다. 생각이 멈춰야 한다. 그때 그대는 석양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거의 석양의 일부가 되어 그곳에 있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그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알게 될 것이다. "석양은 아름답다." 고 되풀이한다고 해서 석양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말들은 빌려 온 것이다. 그대는 그 말들을 들어 왔을 것이고, 자신의 미적 감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말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딴 곳을 헤매고 있다. 아름다움에 의해 그대의 마음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대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훌륭한 춤이 그대에게 명상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그대는 춤을 감상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구제에 대하여
그리하여 나의 눈은 현재로부터 과거로 달아나 보지만 여전히 같은 것을 뱔견하게 된다.인간의 조각난 단편과 사지(四肢)와 무서운 우연을 -- 그러나 인간은 하나도 없다.지상의 현재와 과거 -- 아! 나의 벗들이여 -- 그것이 나의 가장 견디기 힘든 짐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반드시 도래할 것'을 보는 견자(見者)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했으리라.
(오쇼강설)
군중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 자신의 본성에 따라 두려움 없이 사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다. 본성을 제외한 다른 안내자는 없다. 다른 안내자는 그대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뿐이다.삶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삶은 아름다운 노래와 꽃으로 가득 차 있다. 삶은 그대를 그대 자신으로 성장하도록 절대적인 자유를 준다. 견자(見者), 의욕하는자, 한 사람의 창조자, 미래 그 자체. 그리고 미래로 가는 다리, -- 그러나 아아, 그러면서도 그 다리위에 불구자 같은 -- 이 모든 것이 짜라투스트라인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내가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밤이 아무리 길더라도 언젠가 새벽은 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인류에게 닥친 이 밤이 영원히 계속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나는 미래를 본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거의 현재와 같다. 나는 새벽이 멀지 않았음을 안다. 나는 그 새벽을 앞당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나는 지금의 인류와 앞으로 도래할 초인 사이의 다리이다. 그러나 또한 나는 불구자이기도 하다. 나는 초인이 될 수 없으며, 다만 다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인류는 나를 통과하여 새로운 시대, 더 아름답고 축복받은 존재계로 들어가리라."
구제에 대하여 2
'형벌'이란 복수가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복수는 제 스스로 거짓말을 함으로써 선한 양심을 가장하는 것이다. 마침내 의지가 자기 스스로를 구제하여 의욕이 무의욕(無意慾)으로 되지 않는 한 --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이 광기의 어처구니없는 노래를 알고 있다! 내가 그대들에게 "의지는 창조하는 자이다."라고 가르쳤을 때,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노래로부터 그대들을 데리고 떠났던 것이다.의지는 과연 스스로 구제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었는가?의지는 복수의 정신을 잊였는가?
(오쇼 강설)
삶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월한다.의지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이 적용될 수 있다.의지 또한 그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자만이 아이가 될 수 있다.왜냐하면 이 교활한 세상에서 순진무구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 사자의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기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신뢰감을 간직한다는 것은 겁쟁이에게는 불가능하다.아이는 순진 무구함과 신뢰에 가득 차 있다.만일 그대가 순진 무구하고 신뢰에 가득 차 있다면 그대를 속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신뢰는 그대 주변에 어떤 에너지를 창조한다. 신뢰감 자체가 보호막을 형성한다. 순진무구함은 사람들이 그대를 속이지 못하게끔 막아주는 방패가 된다. 의지의 마지막 기능은 그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볼 때, 짜라투스트라는 고타마 붓다에게 동의한다.물론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고타마 붓다는 그 상태를 '무욕(無慾 desirelessness)' 이라 부르고, 짜라투스트라는 '무의지(無意志 will - lessness)' 라고 부른다그때 그대는 집에 도착한 것이다.욕망도 의지도 없다.그대 자신의 잠재성을 완전히 실현했다.그대의 존재는 활짝 꽃피었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상은 어둠 속을 더듬는 것과 같다.그러나 '봄(seeing)' 은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보는 것이다. 존재계에는 언어적인 주장을 초월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경험을 넘어선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부 세계만을 본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 그들 고유의 주체성(subjectivity)을 보는 것이 가능함을 알지 못한다.절대적인 침묵 안에서 마음이 계속적인 재잘걸임을 멈출 때 , 돌연 그대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공간이 그대의 내면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을 깨닫게 되고 삶 전체가 달라진다.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종교, 이념, 신학, 철학 등 모든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다. 이제 그는 자신의 눈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는 구세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구원받았다.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그러나 '보는 자' 는 모든 것을 안 다음, 다시 그것들을 버렸다. 그것들은 모두 쓰레기이기 때문이다.'보는 자' 와 어린아이는 매우 가까이 있다.지성적인 예리함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대가 순진무구한 가슴 갖느냐 하는 것이다.
처세에 대하여
무서운 것은 정상이 아니라 낭떠러지이다!시선은 아래쪽을 향하고 손은 위쪽을 붙잡으려는 낭떠러지, 거기서 가슴은 이중적인 의지로 인해 현기증을 일으킨다.아,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내 가슴의 이중적인 의지도 잘 알고 있을 테지?그리고 나의 손이 확고한 것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인간들 사이에서 마치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장님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속이는 자들이 나를 경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것,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처세술이다.
(오쇼 강설)
인간은 심연 위에 가로놓인 밧줄과 같다.인간은 한편으론 동물의 세계에 묶여 있고 다른 한편으론 인간 자체를 초월하기를 염원한다.인간은 하나의 다리이다.인간은 지나가야 하는 사다리와 같다.정상이 있다면 심연이 있는 법이다. 정상을 향해 움직일 때, 그대는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정상은 문제가 아니다.정상은 오르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다. 문제는 바로 입을 벌리고 있는 낭떠러지이다. 단 한 순간만 방심해도 그대는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진보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분열되어 있다. 그의 생물학적이고 생리적인 측면은 중력처럼그를 아래로 끌어내린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더 높은 곳, 태양이 빛나는 정상에 오르기를 염원한다.삶은 정상을 향한 도전과, 심연을 겁내지 않는 대범한 영혼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도 항상 주의와 경계를 늦추지 말라! 단 한발자국도 잘못 디뎌서는 안 된다.그대가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은 낡은 것이 죽을 때에 한해서이다. 위험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누가 아는가?낡은 것이 죽고 난 다음에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자신의 삶에 변형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그들이 나를 속이도록 내버려 두는 것, 이것이 나의 처세술이다. 그런 태도는 나를 끊임없는 걱정과 경계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그것은 나를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허용한다. 나는 그들이 나를 속일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나는 그들이 나를 속이도록 내버려 둔다. 편안히 쉬기 위해서 !"
처세에 대하여 2
자부심을 가진 자보다 허영에 찬 자를 더욱 신중히 대하라는 것,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처세술이다.상처받은 허영심은 모든 비극의 어머니가 아닌가? 그러나 자부심이 상처를 받으면 자부심보다 더 나은 무엇이 자라나는 것이다.나는 허영심을 가진 자들이 모두 훌륭한 배우임을 발견했다. 그들은 연기에 능숙하며, 사람들이 즐겁게 보아 주기를 바란다. 그들의 모든 정신은 이런 욕망에 쏠려 있다.
(오쇼 강설)
진짜 문제는 허영에 가득 찬 사람이다. 그는 빈껍데기뿐이면서도 자신이 겸손하고 소박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애쓴다. 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영원히 똑같은 상태로 남을 것이다.아마 겸손을 내세움으로서 그들은 자신의 비겁함과 비창조성을 감추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는 상처를 받을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자존심을 회복하려 할 것이고, 자신의 기개를 증명하려 들 것이다. "
신비주의자의 경험은 절대적인 고독과 침묵 속에서 얻어진다. 그 침묵을 언어의 세계로 끌어내려면, 그 음악을 세속적인 언어로 표현하려면, 대단한 기술이 요구 된다. 거기에서부터 신비주의자의 실패는 시작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신비주의자의 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사상을 듣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신비주의자의 침묵과 의식이 자신의 가슴에 도달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의 말을 멋대로 해석하고 완전히 왜곡시킨다. 이런 실패의 순간에 신비주의자가 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고독, 내면의 중심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과학자들은 매우 충격적인 현상을 발견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은 문이라기보다는 검열관(檢閱官)처럼 작용한다. 감각의 검열 작용에 의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은 자그만치 98퍼센트에 이른다! 우리는 단지 2퍼센트만을 인식하는 것이다. 나머지 98퍼센트는 감각에 의해 차단된다. 우리가 알아듣는 것도 2퍼센트에 불과하다. 98퍼센트는 마음에 의해 차단된다. 오락은 그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더 의식적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그대를 더 무의식적으로 만든다.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점점 더 많은 오락을 만들어 왔다. 인간은 더 무의식적으로 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의식적으로 되는 것은 변화의 과정을 겪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요한 시간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여, 너의 과일은 무르익었으나 너는 그 과일에 어울릴 만큼 무르익지 못했구나!그러므로 너는 다시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너는 아직 더 무르익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벗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내가 왜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모든 것을 다 들은 셈이다.그리고 그대들은 내게서, 누가 가장 침묵하는 자이며 그렇게 되기를 열망하는 자인지 들었다.
(오쇼 강설)
이 독백은 매우 멋진 수단이다. 만일 부인이 그대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면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말라. 큰소리로 말하지 말고 속삭이듯이 그녀의 귀에 가까이 대고 말하라. 그러면 그대의 말을 들을 것이다. 이제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고독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대들에게 비유를 말해야겠다. 이제 나는 더 심오한 방식, 인간의 가슴에 도달할 수 있는 더 효과적인 방식을 발견하기 위해 침묵에 잠길 것이다. 내가 나의 앎을 나누어 줄 수 없다면 그 앎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면 나의 체험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붓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그대가 내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하다. 그대가 이해한 바는 내가 말한 의미와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그 의미는 그대가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람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힘들다. 오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짜라투스트라가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어둠 속에서 끌고 나올 수 있는 새로운 그물,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언어를 찾고자 한다. 둘째로, 짜라투스트라는 그들이 자신을 실망 시키고 기대를 저버렸음을 제자들 스스로 알기를 원한다. 나의 벗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내가 왜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모든 것을 다 들은 셈이다.그러나 이 말을 하고 났을 때, 극심한 고통이 그를 엄습했고 벗들과의 작별이 임박해지자 그는 소리내어 울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그날 밤 벗들을 남겨 두고 그는 홀로 떠났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방랑자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는 자신과 이야기 한다.나는 방랑자이며 산을 오르는 자이다. 나는 평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한곳에 앉아 있질 못하는 것 같다.
(오쇼 강설)
모든 인간은 별에 도달하기를 원한다.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순례 여행은 목적이 문제가 아니다.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 자체가 축복인 것이다. 여행의 목적은 방랑의 길을 떠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 즉시 그는 새로운 여행을 준비할 것이기 때문이다.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목적지는 그대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인간의 정신은 염원 이상의 것이 아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열망 ,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바다를 탐험하고, 아무도 오른 적이 없는 산을 오르고 싶은 열망, 그리고 미지의 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염원, 이것이 인간의 정신이다. "나는 방랑자이며 산을 오르는 자이다." 라고 말할 때,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정신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방랑자에 대하여 2
내게 재난이란게 닥칠 수 있었던 시기는 지나갔다.
(오쇼 강설)
재난을 초월한다는 것은 그대가 존재계와 깊은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거기에 실패나 절망은 가능하지 않다. 그대의 침묵과 진실함(serenity)은 방해받지 않는다. 고타마 붓다는 이런 경험을 '여여(如如 suchness)' 라고 이름 붙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그는 "그것은 그렇게 일어날 것이었다"고 말했다.고타마 붓다에게는 존재하는 것 자체 이외에 다른 욕망은 없다.그는 원래 '타타타(tathata)'라는 아름다운 말을 썻다. 제자들이 죽었을 때도 그는 "애석할게 없다. 그의 때가 온 것이다." 하고 말했다.붓다는 "타타타(tathata) 사물의 본성은 여여하다."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타타가타(tathagat 如來), 즉 여여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얻었다. 전체적인 수용성과 더블어 재난이 사라지고 삶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 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삶에는 절망이나 재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정확히 놓여 있다. 그대는 너무나 평온하다. 이 평온과 고요함 속에서만 그대는 그대 자신을 알게 된다. * 요약자 주(註) : 타타가타 (산스크리트어 tatha-agata)는 어원적으로 '그렇게 여기에 오신 분' 이다.
방랑자에 대하여 3
만일 모든 발판이 사라질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의 머리를 밟고도 올라갈 줄 알아야 한다. 그대가 달리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는가?
(오쇼 강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뒤에 남겨두고, 그대 자신을 앞질러 나가야 한다.그대의 꿈과 생각, 상상, 편견, 철학 등 그대의 퍼스낼러티를 형성하는 모든 것을 뒤에 남겨두고 나아가야 한다.그대는 하나의 화살과 같다.그리고 그대에게 맡춰야할 표적은 없다. 그대는 전속력으로 날아가지만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이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방랑자에 대하여 4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을 무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자신의 눈에 너무 열중하는 자라면 어떻게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있겠는가?그렇다! 나 자신과 나의 별까지도 내려다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의 정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최후의 정상으로 내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이 서 있는 곳 중에서 심연이 아닌 곳이 어디 있으랴!본다는 것 자체가 심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쇼 강설)
그대에게 위안을 주는 모든 것은 가짜이다. 삶은 매 순간 마다 그대는 심연 위에 서 있다. 그렇지 않은가? 바로 다음 순간에 그대에게 죽음이 닥칠 수도 있다. 그리고 죽음은 가장 깊은 심연(abyss)이다. 구도자의 투명한 눈을 갖게 될수록 그대는 자신의 주변에서 더 많은 심연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봄(seeing)은 심연을 보는 것이다. 그대 존재의 정상을 보고자 한다면 그대는 또한 심연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대가 아무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면, 아무 곳에도 도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탐험 자체가 즐거움이며, 외부와 내면에서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 기쁨이요 축복이라면 -- 그때에 정상과 심연은 차이가 없을 것이다. 정상과 심연은 하나가 된다.
탄생은 그대에게 생명을 준다.이제 그 생명 에너지를 의식의 각성에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그대에게 달려 있다.각성된 의식은 정확히 꽃과 같다.그대 내면의 꽃을 피우지 못하는 한, 그대는 결코 삶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씨앗은 그저 씨앗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씨앗은 수천 송이의 꽃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 되었다. 씨앗은 파괴되어야 한다.씨앗은 그 안에 숨어 있는 꽃이 실제로 피어날 수 있도록 대지 속에 사라져야 한다.
해뜨기 전에
신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가리워져 있다. 그처럼 그대도 그대의 별을 숨기고 있다. 그대는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대는 그대의 지혜를 나에게 말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벗이었다.우리는 서로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침묵하고, 서로에게 미소로써 우리의 앎을 보인다.
(오쇼 강설)
하늘은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이 벙어리이고 무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앎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침묵이 유일한 언어이다. 신비주의자는 그것을 안다. 하늘의 침묵은 곧 자신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그대는 아름다운 꽃과 석양, 별이 빛나는 밤, 그 아름다운 침묵 속에서 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나 사원에서는 신을 볼 수 없다. 성직자들은 인류를 속이기 위해 거짓 신을 창조했다. 교회와 사원은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와 같다. 그곳에서는 매우 쉽고 싸게 신(神)을 구입할 수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벗이었다.' 매우 아름다운 말이다. '아는 자'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그대는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순수한 즐거움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그것이 순수한 삶이다.목적의식은 삶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 대가나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순수한 즐거움으로 행동한다면, 그의 모든 행동은 그 자체가 보상이 될 것이다. 오직 그런 사람만이 삶의 깊이와 높은 경지를 안다.매 순간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며 보상이다. 매 순간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매 순간 그대는 삶의 화환을 엮어간다.그 삶은 어떤 목적이나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그 삶 자체가 의미이며 즐거움이다.그대의 행동 자체가 보상이며 벌인 것이다.
해뜨기 전에 2
세계는 깊다. -- 낮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다. 낮 앞에서 모든 게 다 말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낮이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헤어지자 ! 오, 내 머리 위의 하늘, 수줍음에 불타오르는 하늘이여 ! 오, 해뜨기 전의 나의 행복이여 ! 낮이 오고 있다. 그러니 이제 우리 헤어지자!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는 매우 심오한 신비를 말한다.세상에는 깊은 어둠 속에서만 알려지는 것들이 있다. 삶은 하나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삶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누리며 살아야 할 신비이다.밤이 오면 모든 것이 신비로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낮이 오면 꽃잎에서 증발되는 이슬방울과 더블어 신비는 사라진다.인간을 초월하는 것은 곧 인간의 마음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짜라투스트라는 '인간과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내게 있어서, 명상은 존재계의 신비로 가는 길이다. 모든 의심과 회의를 벗어 던져라.어두운 미지의 세계,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라.가슴 전체의 '예스'와 신성한 '아멘'을 갖고서 그 안에 들어가라.그것이 그대 자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삶과 존재계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그것이다 !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작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나는 이런 민중들 사이를 걸어가며 많은 말들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주울 줄도 간직할 줄도 모른다.
(오쇼 강설)
사람들은 자신의 선입견에 들어맞는 말만을 듣는다. 그때 그는 자신이 항상 옳았음을 증명하며 흐뭇해 한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면 그는 완전히 귀를 닫아 버린다. 그는 진리가 자신의 존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가 자신의 안락한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류에 관해 가장 불행한 사실 중의 하나는, 인류가 사술과 미신, 율법 그리고 노예화에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과 감수성(sensitivity), 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다.종교는 경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성직자들의 수중에 있는 것도 아니다. 종교는 교회와 사원에 있지 않다. 종교는 그대의 지성, 그대의 의식이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그대 스스로의 사원이 되지 않는다면, 하늘처럼 광활하고 순수하게 되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종교적인 경험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작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2
오, 축복받은 번개의 시간이여 ! 정오가 되기 전의 비밀이여 !어느 날엔가 나는 그들을 달리는 불로, 불꽃의 혀를 가진 선구자로 만들리라.어느 날엔가 그들은 불꽃의 혀로써 예고하리라."위대한 정오가 오고 있다.. 그때가 가까왔다 !" 라고.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는 자기 자신에 지치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위대한 정오'를 선언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위대한 정오. 이것은 사랑과 개체성(individuality), 자유의 가장 큰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위대한 정오라고 부른다.위대한 정오, 그것은 인류가 가진 의식의 최고점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배교자에 대하여
나와 똑같은 종류의 사람은 역시 나와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그의 첫번째 동료는 시체와 어릿광대이리라.
(오쇼 강설)
의식의 최고점에 달할 때, 고타마 붓다, 마하비라, 짜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분리된 세사람이 아니다. 세 개의 침묵, 세 개의 엑스터시는 분리될 수 없다. 세 개의 제로(zero)는 아무리 더해도 하나의 제로이다.축복의 최고 경지에서 그대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러나 고립되어 있지 않다. 그대는 혼자이다. 왜냐하면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의 오르가즘(orgasm), 하나의 바다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수많은 강물이 하나의 바다에서 합쳐지듯이 말이다. 그들은 바다만큼 자유롭게 된다.최고의 정상에서 그대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러나 그 홀로있음(aloneness)은 같이 있음(togetherness)이다. 그것은 엄청난 합일(merger)이다. 여러 사람들을 살펴보라. 그러면 그들의 말투와 몸가짐, 태도에서 그들의 의식이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의식은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날 때, 그대의 행동과 몸가짐도 변화를 일으킨다.
배교자에 대하여 2
"신들은 있지만, 그러나 하나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신앙이 아니겠는가?"귀 있는 자는 들어라.
(오쇼 강설)
모든 존재계는 신성하다. 신성(godliness)은 모든 곳에 있다. 그러나 인격체로서의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그대는 신성과 더블어 춤추고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신성을 숭배할 수는 없다.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는 있다.그대는 전체적으로 춤출 수 있다. 그 춤 속에서는 춤추는 자가 사라지고 춤만이 남는다. 그것이 종교성(religiousness)이며 감사함(gratefulness)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귀향(歸鄕)에 대하여
오, 고독이여!그대 나의 고향인 고독이여!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거친 타향에서 거칠게 살아와,눈물 없이는 그대에게 돌아갈 수 없을 정도이구나!
(오쇼 강설)
엄마의 자궁 안에 있을 때와 똑같이 평화와 침묵, 정적의 세계에 도달한 사람. 즉 모든 존재계가 자궁이 되고 엄마가 되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그 경험이 마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임을 발견한다.그는 더 많은 자유와 아름다움, 강열한 엑스터시(ecstasy)가 있는 더 큰집에 도달한 것이다. 예전의 집은 진짜 집에 비하면 멀리서 들려 오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진짜 집은 그대의 고독(solitude)과 홀로 있음(aloneness), 그리고 그대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그대의 집은 그대 안에 있다. 바깥 세계에서의 방황을 멈출 때, 먼 곳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대 존재의 근원에서 릴렉스(relax)할 때 -- 그럴 때에만 그 집은 발견될 수 있다. 고독(solitude)은 외로움(loneliness)이 아니다. 외로움은 휴식이 아니라 불안이다. 집이 될 수 있는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홀로 있음이다. 고독은 명상과 침묵의 꽃망울이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고독은 그대 내적인 잠재성의 개화(開花)이다.
귀향(歸鄕)에 대하여 2
우리는 서로에게 묻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활짝 열린 문을 당당하게 지나다닌다.여기서는 모든 존재가 말이 되기를 원하며, 모든 생성이 내게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한다.
(오쇼 강설)
릴랙스(relax)할 때, 존재계 전체가 전혀 새로운 질(quality)을 갖게 된다. 고독과 홀로 있음은 모든 존재를 그대와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하늘 전체가 그대의 것이 되고, 나무가 곧 그대가 된다. 산이 그대 안에 있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자기만의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우주의 심장이 뛰는 소리이다. 이제 그대는 집에 돌아 왔다. 이것은 '귀향(homecoming)' 이라 불려질 수 있다. "눈을 감고 내면을 들여다보라."그대가 찾고 있는 자는 바로 그대이다. 찾는 자가 찾아지는 자이다. 관찰자와 관찰되는 자는 똑같다. 그대는 하나가 된다. 이 하나됨은 인간의 의식이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황홀경(ecstasy)이다.이것이 가장 높은 경지이며, 가장 깊은 심오함이다. 이것이 종교의 전부이다. 그대는 어느 곳으로도 갈 필요가 없다.깊은 침묵과 정적 속에 잠기기만 하면 그 뿐이다. 그러면 그대는 수천 마일을 헤매어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그대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그대는 온갖 유혹에 끌려 이러저러한 것을 쫒아 달리기 시작한다. 서서히 본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다. 그대 안의 어딘가에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앎이 없다면 그것을 찾겠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을 맛보았고, 그대의 깊은 의식 속에는 여전히 그 맛이 남아 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방황과 탐험에 지쳤을 때, 이제 그대는 쉴 곳을 찾아 앉을 것이다. 그 휴식 속에, 삶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그대는 지금까지 내내 찾아 헤매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귀향에 대하여 3
나 자신과 나의 부유함을 숨기는 것 - 그것을 나는 저 아래에서 배웠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아직도 가난하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행복한 콧구멍으로 나는 다시금 산의 자유를 호흡한다! 마침내 나의 코는 모든 인간이라는 생물의 악취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을 사랑한다. 인간은 초인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앗은 초인이 성장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을 미워한다. 씨앗은 하나의 감옥이 되었다. 적당한 토양을 찾았을 때, 씨앗은 즉시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씨앗은 너무 자신을 방어한다. 그때 씨앗은 감옥이 된다. 씨앗은 적당한 토양을 회피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씨앗은 씨앗으로써의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자신이 지닌 잠재성을 완전히 잊게 된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짜라투스트라가 인류에게 크게 공헌한 점은, 전혀 새롭고 개안된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대는 간혹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짜라투스트라는 위대한 통찰력을 지닌다. 그는 선입견에 따라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본다. 그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지닌 고유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는 매우 객관적이고 실재적이다. 그는 어떠한 관념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으며, 특정한 철학이나 종교를 설립하려 하지 않는다. 투명하고 명확한 시각은 그대에게 진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는 그대 앞에 다이아몬드를 던져 놓는다. 그러나 그대는 장님 같은 태도를 취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선입견이 방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대는 눈을 꼭 감고 있을 수 있다. 그대에겐 멀리서 반짝이는 별에 도달하고 싶은 열망이 없다. 그대는 초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없다. 편안한 거짖 속에 빠져 있는 그대를 편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를 기분좋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파괴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악이다. 그것은 그대의 성장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초인이 나타나 부패하고 냄새나는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순진 무구하고 새로운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부패한 상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주 만성이 되어 버렸다.
세가지 악(惡)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 그것은 시들어 버린 자에게만은 달콤한 독약, 그러나 사자의 의지를 가진 자에겐 훌륭한 강심제이며 경건하게 보관된 포도주 중의 포도주.감각적 쾌락, 그것은 보다 높은 행복과 최고의 희망에 대한 커다란 상징적 행복. --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보다도 더 이방인이 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얼마나 낯선 존재인가를 누가 속속들이 이해하였겠는가?
(오쇼 강설)
그대 자신에게 비인간적인 기준을 강요하지 말라.비인간적인 기준에 단련된 사람일수록, 당연히 그는 위선자가 된다. 그러나 군중은 그를 성자로 떠받들고 존경할 것이다. 왜냐하면 군중은 그처럼 할 수 없기 때문이다.대부분의 경우에 그는 이중적인 인격을 갖는다. 하나의 얼굴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의 얼굴은 사생활 속에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다. 그리고 표면에서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모든 가치를 행하는 척한다. 감각적인 쾌락을 포기한다면, 그대는 더욱더 무감각(insensitive)하게 될 것이다. 감각적 쾌락은 그대의 감각(sense)을 생동감 있게 지켜준다. 그대의 감수성을 최고 상태로 유지 시키는 것은 감각적 쾌락이다. 그러므로 감각적 쾌락을 포기하는 것은 곧 감수성(sensitivity)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대에게 감수성이 없다면, 그대는 음악의 즐거움, 그림과 조각, 시의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 그것들은 위대한 천재들에 의해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다. 시체와 살아 있는 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살아있는 사람은 민감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예민하게 작용한다. 그는 음악의 미묘한 선율을 들을 수 있고, 예술 작품의 심오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시에 담겨진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아무 조건 없이 감각적 쾌락을 허용할 때에만 가능하다. 군중은 양떼와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특정한 삶의 스타일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 삶의 스타일은 그들에겐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강한 사람들에게는 감옥이며 죽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짜라투스트라는 감각적 쾌락을 신성하게 여긴다.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면 할수록 그대는 허약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힘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존재계와 단절될 것이다. 그대는 감각을 통해 존재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감각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그대는 이미 무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감각적 쾌락 안에서 그대가 파괴된다면, 그것은 그대가 더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포기해야 할 것은 감감적 쾌락이 아니라, 바로 그대의 허약함이다. 감각적 쾌락은 더 큰 행복이 가능하다는 암시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대가 삶의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감각적 쾌락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대는 더 큰 행복을 맛볼 수 있다.감각적 쾌락은 영적인 축복으로 가는 징검다리와 같다. 그런데 그대는 징검다리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 그때, 그대는 더 높은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사다리를 없애 버렸으니 말이다. 사다리는 포시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기어 올라가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이 초월과 포기의 차이점을 명시하라 !가능한 한 다양하고 강렬하게 감각적 쾌락을 즐기라. 그것들을 완전히 소진(消盡)시키라. 그러면 돌연 그대는 깨닫게 될 것이다."감각적 쾌락의 세계는 끝났다. 이제 나는 이 세계를 초월해야 한다." 그때 그대는 감각적 쾌락에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감각적 쾌락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놓인 다리이다.남성과 여성이 서로 이방인 이라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간격이 크면 클수록 매력은 더 강해진다. 그들이 서로 다를수록 그들은 서로에게 더 끌린다. 그들이 서로에게 낯선 존재일수록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탐구는 더 깊어진다.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하나의 여행이다. 그것은 탐험과 같다. 그것은 정반대의 극단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또한 삶의 변증법적인 면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것은 큰 공부이다. 그 공부가 없이는 더 높은 의식과 행복, 더 높은 영성(spirituality)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깊은 감각적 경험을 한 사람만이 남성과 여성의 엄청난 차이점과 독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때엔 남성과 여성 사이에 평등이야 불평등이냐 하는 문제는 없다. 남성과 여성은 다만 서로 독특한 존재일 뿐이다.
세가지 악에 대하여2
지배욕, 그것은 가장 냉혹한 가슴을 가진 자에 대한 불타는 천벌, 가장 잔인한 그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잔인한 고문, 산채로 불 태우는 어둠의 불꽃.지배욕, 그것의 시선 앞에서 인간은 기어 다니고, 허리를 굽히고, 노역하고, 뱀과 돼지보다도 더 천하게 된다. -- 마침내 인간으로부터 커다란 경멸의 외침이 터져 나올 때 까지.지배욕, 그러나 높은 것이 힘을 갈망하여 밑으로 내려올 때, 누가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르겠는가! 진실로, 그런 갈망과 하강에는 병적인 것이나 탐욕은 없다 !
(오쇼 강설)
지배욕(Lust for power)은 노예제도를 만들고, 온갖 방법으로 인류를 파괴해 왔다. 그것은 파괴적이고 추악한 욕망이다.그러나 창조적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창조적인 의지를 그는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라고 부른다. 권력에의 의지는 지배욕과 전혀 다른 현상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그대 자신이 더 강하고 통합적(intergrated)이며, 더 사자에 가깝고 개체성을 지닌 개인이 되어감을 의미한다."나도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나도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권력에의 의지는 자기 자신이 되려는 의지이다. 그것은 영원 불멸성을 획득하려는 의지이다.힘에 대한 욕구는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권력에의 의지이며,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지배욕이다. 모든 것에는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법이다.
세가지 악에 대하여3
이기심(selfishness), 고귀한 육체가 속해 있는 굳센 영혼으로부터, 그리고 아름답고 승리감에 넘치며 싱싱한 육체의 둘레에서 모든 사물은 거울이 되는 것이다. 자기 향락은 자신으로부터 모든 비겁한 것을 추방한다. - '나쁜 것, 그것은 곧 비겁하다는 것이다!'그러나 이제 그들 모두에게 낮이, 변화가, 심판의 칼이, 위대한 정오가 오고 있다. 그때 많은 것이 밝혀지리라!그리고 에고(ego)를 건전하고 신성하다 말하고, 이기심을 영광되다고 말하는 자는, 진실로 예언자인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선언한다. - "보라, 그가 오고 있다. 그가 가까이 왔다. 위대한 정오가 ! "
(오쇼 강설)
짜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유일하게 악한 것은 비겁함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선한 것은 용기이다. 모든 덕은 용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모든 죄악은 비겁함에서 비롯된다.짜라투스트라는 이기심은 다만 사물의 본성이라 말한다. 그러나 비겁한 겁쟁이들은 미덕을 쌓기 위하여 비이기심을 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인류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을 '위대한 정오' 라고 부른다. 그때가 되면 이기심이 건전한 것으로 될 것이다.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것이 우리의 종교, 우리의 지고한 정신적 가치로 선언될 것이다. 자연 그 자체가 우리의 종교이다. 그 밖의 다른 종교는 필요없다."보라, 그가 오고 있다. 그가 가까이 왔다. 위대한 정오가!"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