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컬트 명상에 대한 서신들 ( Letters on Occult Meditation)

 

서언

 

다음의 편지들은 1919년에 받은 2개의 편지들을 제외하면, 모두 1920년 5월 16일부터 1920년 10월 20일 사이의 기간동안 수신되었다. 저자의 동의를 얻어, 그 편지들을 묶어 출판하게 되었다.

 

이 편지들은 받은 그대로의 완전한 내용으로 출판된 것이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일부 내용이나, 어떤 오컬트 학파와 관계된 내용들, 아직은 알려져서는 안될 예언적이거나 비의적인 특성을 가진 내용들은 일부 제외되었다.

 

이 편지들을 읽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위해 노력하기를 바란다.

 

진리는 많은 면을 가진 다이아몬드와 같다는 것과 그 서로 다른 측면들은 인류를 인도하는 존재들이 분명한 필요를 느끼게 될 때에 각각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읽을 것. 그동안 명상에 관한 많은 책들이 씌어져 왔다. 어떤 것들은 너무나 난해하고, 또 어떤 것들은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평범한 교육받은 사람을 만족시키기가 어려웠다. 이 편지들의 저자는 명상의 당면한 목적과 그 중간 단계들을 강조하며, 명상의 근본원리를 간결하면서도 과학적으로 드러내려는 노력을 해 왔음이 역력하다.

 

저자에 관하여 떠도는 소문이나 제기된 주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편지들 그 자체의 가치에 의거하여 그것들을 판단하라. 이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익명성을 유지하기로 선택했으며, 그 편지들의 수신자에게 그것들을 자신의 필명으로 출판하도록 요청했다. 그 편지들의 내용이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도울 것이며, 이미 몇몇 사람들에게 그러했듯이,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앨리스 A. 베일리, 뉴욕, 1922

 

 

첫번째 편지

하위 인격과 에고의 정렬 Alignment of the Ego with the Personality

 

 

역자주: 앨리스 베일리 문헌에서의 에고(Ego)는 영혼, 상위자아 혹은 내면의 자아의 다른 표현으로서 심리학 등에서 말하는 개인적 정체성, 자기 중심의식이 아니다. 이에 해당하는 앨리스 베일리의 용어는 인격(Personality)혹은 하위 자아 등이 있다. 에고는 윤회하는 자아로서, 매 화신마다 생겼다 없어지는 인격과는 다른 보다 본질적인 실체이다.

 

 

하위 인격과 에고의 정렬 Alignment of the Ego with the Personality

1920년 5월 16일, 일요일

 

어떤 특정 화신에서 에고(Ego), 혹은 상위자아(the Higher Self)의 진정한 사명(work)이 성취될 수 있으려면, 3개의 의식의 매체, 즉 육체, 감정체, 그리고 하위 마음체가 원인체의 영역 안에서 정렬되어야 하며, 의지를 가함으로써 그 안에서 안정화되어야 한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 즉 하위 마음의 진정한 대표자들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하위 3개의 몸들이 정렬되어 있는 자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멘탈체가 다른 두 개의 몸들을 정교하게 정렬시키고 있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럴 경우, 멘탈체는 어떤 장애나 방해도 없이 곧바로 물질 두뇌와 직접 연결되어 있게 된다.

 

그 정렬이 4중적인 것이 될 때, 그리고 위에 언급된 세 개의 몸들이 상위 자아의 몸, 즉 원인체 혹은 에고체(egoic body)와 정렬되고 그 영향권 안에서 고요히 유지될 때,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 - 감성적으로 그리고 지성적으로 인류를 지배했던 존재들 –의 사역이 가능해 진다. 그러한 때에 영감받은 작가들과 몽상가들은 그들의 영감과 꿈들을 받아 적을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럴 때에, 통합적이고 추상적인 사상가들은 자신의 개념들을 형상의 세계 속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막힘 없는 통로channel의 존재여부에 따라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연구해보라,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육체적 통합에 대해서도 연구하라; 육체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나서 여기에 감정적 안정을 더하고 나면, 당신의 두 개의 매체가 하나로 작용하고 있게 된다. 그 통합이 멘탈체에 까지 연장될 때, 3중의 하위 인간은 그의 절정에 오르게 되며, 형상의 세계 속에서 대부분의 것들을 경험한 상태가 된다.(reaching his apotheosis, and has rung most of the changes in the world of form.)

그 후, 상위 자아와의 완성된 통합이 이루어 지게 되는데, 그것은 물질 두뇌 의식으로 – 이런 표현이 적절하다면, 막힘 없는 깔때기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통하는 의사소통의 체널이 형성됨을 의미한다. 그 전까지 그것은 아주 드믄 경우에만 직접 연결되었었다. 고도로 통합된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네 개의 작은 두뇌 센터들이 높은 진동수로 작용하고 있다; 에고(Ego)가 하위 몸들과의 정렬의 완성에 근접해 가게 되면, 송과선과 뇌하수체가 점차 발달하기 시작한다. 또한, 그들이 상관관계를 가지며( 제 3 입문이 일어나기 전에 발생하는 일이다) 작용하고 있게 되면, 두뇌의 제 3의 센터 혹은 알타 메이저 센터(alta major center,역주: 척수가 위쪽으로 끝나는 지점, 척수와 뇌와의 연결부위 근처)가 이제까지의 부드러웠던 진동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제 4 입문을 받게 되면, 그 세 개의 센터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완성되게 되며, 하위 체들은 정화된 기하학적 형상으로 정렬된다. 그렇게 되면 완성된 5중의 초인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역주: 알타 메이져 센터 – 척주와 두개골이 만나는 부분, 즉 뒷머리의 가장 아래쪽에 자리하여 형성되며, 제자들에게 형성되는 다른 에테르 센터들이 상위 에테르 들로 만들어지는 반면, 이 센터는 제 4 에테르 즉 가장 낮은 등급의 에테르로 형성된다. From A Treatise on Cosmic Fire )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정렬은 아주 강한 영감의 순간들이나 인류애적 노력이 필요한 시기들에, 또는 고통의 순간들과 같은 때에 아주 드물게 발생하게 된다. 에고가 하위 자아 혹은 인격의 지속적인 신호를 받아들이기 전에, 다소 간의 의식의 분리(Abstraction)가 일어나야만 한다. 그 분리가 감정을 포함하고, 정신성에 기초하며, 물질 두뇌를 접촉할 때, 정렬이 일어난다. When that abstraction involves the emotions, is based in the mentality and contacts the physical brain, then alignment is commencing.

따라서, 명상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명상은 의식의 추출 혹은 분리(abstraction)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고 의식으로부터 감정과 이성을 추출하도록 일깨우려 하기 때문이다.

 

 

정렬과 진동 Alignment and Vibration

 

그것은 대체로 질료와 진동의 문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멘탈계의 추상적인 차원들은 세 개의 상위 차원들로 구성되며, 그 중 첫 번째가 제3 하부계(subplane)이다. 이전에 설명한 바 있듯이, 각각의 하부계는 차원의 주계층들(major planes)과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대가 그대의 몸들- 육체, 감정체, 그리고 멘탈체- 속으로 그 몸들이 속한 각각의 계의 제3 하부계의 질료를 구성해 넣는다면, 상위 자아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더욱 지속적으로, 정렬되어가는 하위인격을 통해 작용하기 시작하게 된다. 아마도, 우리는 이런 생각을 뒤집어서, 오직 제3하부계의 질료가 일정 비율 이상(그 비율은 입문(Initiation)의 비밀들 중 하나이다)을 그 각각의 매체들 속에 포함한 이후라야, 의식적인 전체로서의 하위 인격은 상위 자아를 인식하고 따르게 된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정도의 비율이 달성된 후, 물질계와 감정계에서 보다 상위 하부계의 두 가지 질료로 몸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구도자에게는 육체를 정화하고 훈련시키며, 감정체를 억제하기 위한 투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정화와 억제(subjugation)는 그 두 계에서 해야 할 일들을 묘사하는 키워드이다. 이 작업은 하위 마음의 사용을 동반하며, 그리하여 세 개의 하위 매체들은 정렬된다.

 

그렇게 되면, 추상적인 차원들의 진동들이 느껴지기 시작할 수 있다. 그대는 그것들이 상위 자아의 매체인 원인체를 통해서 온다는 것과, 일반적인 원인체는 멘탈계의 제3하부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충분히 인식되지 않고 있다.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진정한 추상적 사고는 오직 하위 인격이, 에고(Ego)의 진동에 대해 상호적인 진동에 의해서, 충분히 막힘없는 통로(channel)을 형성할 만큼 충분히 정렬되었을 때에야 가능해 진다. 그렇게 되면, 간헐적으로, 최초에는 드물지만 점점 빈도수가 증가하면서, 추상적인 관념들이 흘러 내려오기 시작할 것이고, 적절한 시간이 흐르면 영적 삼개조(the Spiritual Triad), 즉 진정한 삼중의 자아 그 자체로부터의 진정한 각성 혹은 직관의 섬광들이 있게 될 것이다.

 

 

에고의 화음 The Chord of the Ego

(음악용어들이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번역이 부실합니다. 보완해 주실 분이 계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상호적인 진동reciprocal vibration”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인격, 즉 하위 자아가 에고, 즉 상위 자아에게 순응함을 뜻하며, 인격의 광선이 에고의 광선에 의해 지배되고 그들의 색조가 결합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상위 자아의 주된 색상과 하위 자아의 부차적인 색조가 아름다움(beauty)이 성취되도록 혼합됨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불협화음과 불일치, 색상들 간의 충돌, 그리고 상위와 하위의 싸움이 있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고 나중에는 마스터의 도움으로, 색상과 음조의 조화가 만들어 지고, 마침내 그대는 질료의 기본적인 색조(음조)와 정렬된 하위 인격의 장삼음(the major third), 에고의 딸림 5도음(dominant fifth)을 얻고, 마침내는 모나드, 혹은 스피릿(Spirit)의 완전한 화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데프트의 직분에서 추구하는 것은 딸림음(dominant,음계의 제 5음)이며, 그 이전에 하위 인격의 완성된 3도음(perfected third ,혹은 완전 3도음)이 먼저 추구되어야 한다. 다양한 화신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이의 모든 음조를 연주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어떤 때에는 장조가 되며 어떤 때에는 단조가 되지만, 언제나 그것들은 더 유연해지고 더 큰 아름다움으로 향해 간다. 적절한 시점이 되면 각각의 음은 자신의 화음, 즉 스피릿의 화음에 조화된다. 각각의 화음은 한 악구(phrase)의 일부를 구성하며, 그 악구는 전체의 7분의 1인 한 악절의 완성에 기여한다. 그러면, 전체의 일곱 악절들은 이 태양계의 소나타를 완성하며, 그것은 대작곡가(Master-Musician)인 신, 혹은 로고스의 삼중적 걸작의 일부가 된다.

 

 

소우주적인 정렬과 대우주적 정렬 Microcosmic and Macrocosmic Alignment

1920년 6월 2일

 

오늘 아침, 나는 그대에게 상응의 법칙 하에서 정렬의 우주적인 적용의 예를 보여주며, 에고의 정렬에 대해서 다시 한번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기하학, 혹은 도형과 숫자들에 기초하고 있다.

 

하위 삼계 –물질계, 감정계, 그리고 멘탈계-에서 인간의 진화의 목표는 그의 삼중의 하위 인격을 에고의 몸(the body egoic)과 정렬시키는 것이며, 마침내 하나의 곧은 선이 성취되고 그 사람은 하나(the one)가 된다.

 

인격이 살아가는 매 번의 생은 마지막에, 정육면체의 선들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고, 그것들을 일종의 형상으로 드러냄으로써, 어떤 기하학적 도형으로 표현된다. 이전의 생애들의 형상들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외곽선과 조야한 설계를 가진다. 이번 세대의 평균적인 진보된 사람들에 의해 지어진 형상들은 명확하고 선명한 외곽선을 가진다. 하지만 그가 제자도의 길을 걷게 될 때, 그 목적은 이 모든 많은 선들을 하나의 선으로 합치는 데에 있으며, 이러한 완성은 점진적으로 성취된다.

 

마스터는 5중으로 발달하는 모든 선들을 처음에는 셋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하나로 합쳐놓은 존재이다. 6개의 점을 가진 별은 5개의 점을 가진 별이 되고, 육면체는 삼각형이 된다. 그리고 삼각형은 하나가 된다. 그 하나는 (더 큰 주기의 끝에) 현현의 원 안에 있는 하나의 점이 된다.

 

따라서 모든 헌신자들에게 근본 진리들의 삼위일체에 기반한 단순함을 가르치고 하나에 집중할 것을 고취시키려는 노력이 있게 된 것이다. 각각의 삶은 더 큰 안정성을 지향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 삼중의 인격이 원인체의 의식(causal consciousness)과 일치되어진 경우를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순간들이나, (최고의 영감의 순간들이나 비이기적인 행위를 위한 목적을 가지는 순간들에는) 상위와 하위가 곧은 직선을 형성한다. 보통은 감정체가 격렬한 감정이나 진동을 통해서, 혹은 끊임없는 동요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정렬에서 벗어난다. 감정체가 순간적으로 정렬된다 하더라도, 그 때는 멘탈체가 방해요소로 작용하며, 상위 차원에서 하위 차원으로, 그래서 물질 두뇌로의 흐름을 방해한다. 감정체가 고요해지고 멘탈체가 저항이 아니라 여과기로서 작용하도록 구성되기 위해서는 많은 생애의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이 어느 정도 성취되어 감정체가 안정되고 순수한 반영체가 되며, 멘탈체가 민감한 각인판이며 분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상위차원에서 주어진 진리의 이성적인 해설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 둘을 동시에 정렬시키는 일은 많은 생애의 많은 수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것이 이루어 졌을 때, 물질 두뇌의 통제와 그것의 최종적인 정렬이 남게 되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주어진 가르침의 직접적인 수용자이며 전달자로서 작용할 수 있고, 고차원의 의식을 정확히 반영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우주적 대응은 어디에 있는가? 이 태양계에 그에 대한 유추는 어디 있는가? 여기서 나는 한가지 암시를 주려 한다. 태양계적 진화의 과정에서 몇몇 행성들간의 그리고 태양과의 곧은 정렬에서 로고스적인 혹은 신성한 정렬이 이루어진다.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하지만 한가지 경고를 주려 한다. 정렬에 대한 추측을 물질적 행성들에 의거해서 하려 하지 말라. 진실은 거기에 있지 않다. 물질적 행성들 중 오직 세 개만이 (그리고 에테르 물질로 존재하는 세가지 행성들이) 로고스가 – 그 자신의 성취의 목표인-우주적 자아 의식을 성취했음을 의미하는 최종적인 정렬에 포함된다. 이 세 개의 행성들 중에 지구는 포함되지 않지만, 금성은 감정적 영구원자에 해당하는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

 

그 이상의 정렬 과정이 진행될 수 있다. 우리 전체의 태양계와 시리우스의 항성계와의 정렬에는 훨씬 요원한 목표가 잠재되어 있다. 그것은 훨씬 먼 미래의 일이지만 더 큰 주기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명상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MEDITATION


1920년 6월 3일 June 3, 1920

명상은 에고(Ego)와의 연결과 정렬을 일으킨다.

명상은 균형의 상태를 만들어 준다.

명상은 진동을 안정화시킨다.

극성(polarization)의 전이를 돕는다.


오늘 아침 나는 그대에게 명상이란 주제에 관해 좀더 많은 정보를 주려고 한다. 그것들은 어제 주어진 내용과 지난달 16일 주어진 내용들과 관계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명상은 정렬을 돕는 것이며, 그래서 상위 자아와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명상이라는 수행체계가 생겨난 것이다. 나는 충분한 해설을 위해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이 명상이란 주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명상의 중요성

명상법을 지정할 때에 고려해야할 점들

명상에서의 신성한 말씀의 사용

명상에서 피해야 할 위험들

명상에서의 형상의 사용

명상에서의 색과 소리의 사용

명상을 통해 마스터들에게 접근하기

미래의 명상 학교들

몸들Vehicles의 정화

비밀스런 봉사의 삶


오늘은 첫번째 요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 명상은 왜 중요한 것인가?


에고가 하위인격을 지배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학도가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명상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된다.


오늘날 인간은 많은 것을 추구하느라 바쁘고, 또한 주위환경의 압력으로 전적으로 하위 자아에 극성화되어 있으며, 그 극성화는 멘탈체나 감정체에 집중되어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극성화가 전적으로 육체적이거나 순전히 감정적인 것인 한, 명상을 할 필요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멘탈체가 활성화 된 때라 하더라도, 인간이 많은 변화와 다양한 삶들을 살아 보고, 많은 화신을 통해서 기쁨과 고통의 잔을 모두 맛보고 나서, 온전히 하위 자아 만을 위한 삶을 그 가장 깊은 곳까지 체험해 본 후 그것이 만족을 줄 수 없음을 알게 될 때까지는 어떤 (명상을 향한) 욕구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때가 되면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것들로 돌리기 시작하고, 미지의 것을 열망하기 시작하며, 자신의 내면에서 대립하는 양 극의 쌍을 깨닫고 느끼기 시작하며, 또한 이제까지는 꿈도 꾸지 못했던 가능성과 이상들을 자신의 의식 안에서 만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성공과, 인기와 다양한 재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것들을 써서 어떤 만족도 얻어내지 못하는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그 내면의 욕구는 계속 지속되다가 마침내 그에 따르는 고통이 너무나 심해져서, 내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와 누군가를 알아내고자 하는 욕망이 모든 장애들을 극복하게 된다. 그는 내면으로 향하기 시작하고, 그가 왔던 근원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그는 명상하고 사색하며 진동을 강화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명상의 열매들을 모으게 된다.


명상은 네 가지 작용을 한다


1. 명상은 인간이 에고와 연결되고 3개의 하위 체들을 정렬시킬 수 있게 한다.


2. 명상은 인간에게 전적으로 수용적이고 소극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적극적이지도 않은 균형점에 있는 균형잡힌 태도를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에고에게, 나중에는 마스터에게, 그 균형상태를 깨뜨리고 보다 더 높은 음조에 고요한 진동을 동조시킬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 의식을 보다 새롭고 더 높은 음율에 맞춰 진동하게 하고,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면) 삼중의 영(Spirit)의 영역으로 진동의 고점이 뛰어들게 할 수 있게 된다. 끊임없는 명상의 수행으로, 전체적인 균형점은 계속해서 높아져 가다가, 마침내 그 진동과 조정의 저점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감성적인 것과도 닿지 않고, 지성과도 접하지 않으며 (원인체 마저도 벗어나), 거기서 그 사람이 영적인 의식 안에 극성화되는 때가 온다.


이것은 제 4비전을 의미한다. 그 비전 이후로, 아데프트는 스스로 현현의 몸을 자유롭게 창조해 낼 수 있으며, 그에게는, 인과의 법칙 하에서 진화하며 하위 삼계에서 사용하기 위해 몸을 객체화시킬 만한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3. 명상은 감정계와 이지계(mental plane)의 하부계(subplane)들 상에서의 보다 낮은 진동들(역주: 제3하부계 밑의 하부계의 진동들)을 안정화시킨다. 명상은 하위3계들(역주: 멘탈계, 감정계, 그리고 물질계) 의 각각의 제3하부계의 진동에 하위자아를 조율시키는 작업을 시작하며, 마침내 각 계의 제3하부계가 지배될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은, 제2하부계가 동기화될 것이다.


인간은 그가 제3하부계에서 의식적으로 진동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이번 주기에서 인격적인 완성의 지점에 도달한다. 우리는 물질계, 감성계, 그리고 멘탈계에서의 제 4하부계를 (한번의 화신의 기간 안에 지배되고, 정렬되고, 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때) 구체적인 의미 그대로 그리고 낮은 견지에서 볼 때, 완성된 인격(Perfected Personality)의 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특별한 한 생은 인간이 그의 하위 자아의 가장 완전한 표현을 성취한 생일 것이다. - 육체적으로 완벽하고, 감성적으로 민감하며(vibrant), 지성적으로 장대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면 그에 이어서, 보다 높은 진동으로의 전이, 상위 자아의 음조로의 조율, 즉 하위 인격의 장삼도의 음을 에고의 딸림 5도음으로 맞추는 조율이 시작된다.


4. 명상은 하위인격의 항구원자(permanent atom)들 중의 하나로부터 영적 삼개조(spiritual Triad)에 있는, 그에 대응하는 원자로 극성의 중심을 옮기는 작업을 돕는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와 같이 명상과 명상을 현명하고 성실하며 진지하게 수행하는 일의 근원적인 본질은 쉽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위 본성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가 있은 후, 인간은 명상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도들은 최초에는 불규칙하며, 종종 상위 자아가 단지 인간을 사고하게 하고, 아주 가끔 간헐적으로 진지한 명상을 하게 만드는 데에만 여러 생이 지나가기도 한다. 내면으로 몰입하는 경우가 점점 더 자주 찾아오게 되다가, 마침내 그 인간 앞에는 신비가적 명상과 열망에 여러 생을 바치는 일이 일어나게 되며, 일반적으로 그 일에 온전히 한 생을 바치는 삶을 사는 것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그것은 감성적 열망의 최고점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멘탈체를 통한 법칙의 과학적 적용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법칙들은 진정한 오컬트 명상을 지배하는 것들이다.


마스터들 중의 한 분 아래에서 명확히 활동하고 있는 그대들 각자의 뒤에는, 두 번의 절정에 오른 삶이 놓여있다. 세속적인 최고조에 올랐던 삶과, 신비가적인 혹은 감성-직관적인 계열을 따르는 명상에 가장 깊이 몰두 했던 삶이 그것이다. 마스터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연결된 자들은 이런 명상적 삶을 중세 유럽의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보냈고, 마스터 M. 혹은 마스터 K.H.의 제자들은 인도, 티벳, 혹은 중국에서 보냈다.


이제는 그대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일련의 삶들이 다가오고 있다. 이전의 절정에 오른 삶들은 그것에 비하면 단지 밟고 올라갈 계단에 지나지 않았다. 구도의 길에 선 이들이 당면한 삶들에서는 법칙에 기반한 질서정연한 오컬트 명상이라는 도구를 통한 최종적인 성취가 있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아직 신비가적 방법을 통한 성취가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은 훗날 오컬트적인 혹은 이지적인(mental)방법의 기초가 될 것이다.




역주: 참고할 만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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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 목적은 무엇인가? (From Intellect to Intuition, pp. 83-87)


명상의 목적은 영혼과 만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영혼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전체적인 목적은 우리가 외적으로 자신을 표현함에 있어서 내적인 실체로서의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단지 하위 인격의 낮은 특성들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측면과 자신을 동일 시 할 수 있게 됩니다. 명상을 통해서, ... 영혼의 힘이 펼쳐지게 됩니다. ( 육체, 감정, 그리고 정신의 수준에서) 영혼이 자신을 표현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각각의 껍질 혹은 매개체는 각각 그 안에 내재된 어떤 잠재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들 모두의 근원인 영혼은 그 힘들을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정화된 형태로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의 힘들은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펼쳐집니다. 이런 과정은 의도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발달시켜서가 아니라 내적인 신이 그의 몸을 통제하고 지배하게 됨에 따라 그의 힘이 물질계에 드러나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며, 그때 영혼의 잠재력들은 익숙한 현실로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신비가들과 비전가들의 증언은 그 사실들을 증언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흥미를 끌며 우리를 격려하는 것입니다만 우리 스스로가 명확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이성적인 의식의 발달을 위한 이 과정은 반드시 스스로 적용하고 스스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은 종합적이고 상식적인 마음의 발달과 일상적인 삶, 감정, 그리고 생각의 세계와 관련해 그 마음의 사용을 지배하는 능력을 포함합니다. 또한 이 과정은 영혼과 물질두뇌 사이의 매개체로서 작용하는 마음의 역량과 원하는 대로 영혼의 세계로 마음을 향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합니다. 그 첫번 째는 일반적 교육을 통한 건전한 방법들을 통해 발달되고 길러질 수 있으며, 두 번째는 교육과정의 더 높은 형태인 명상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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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목소리(The Inner Voice)

1. 사람들은 죽음 후의 삶(the life hereafter)을 증언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사업과 쾌락과 흥분의 소란과 소용돌이들로 침묵 속에서 울리는 그 말들을 지워버렸다.
신비의 길(the occult path)을 성공적으로 밟아 나아갈 수 있는 온전한 비밀은 마음의 자세에 있다; 그 자세가 현실적인 유물론적인 것일 때, 물질 형상과 눈 앞의 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에 몰두해 있는 것일 때, 깊이 있는 비전적 진리를 깨닫는 데에 있어서의 발전이란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
(A Treatise on White Magic, 84)



2. 입문의 길(the Path of Initiation)은 보다 고차원적인 진동에 점점 더 민감해져 가면서 점진적인 의식의 확장을 겪어가는 길이다. 이 과정은 처음에는 내면의 목소리에 대한 감수성으로서 나타나며, 이 내면의 소리에 대한 감수성은 제자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능력들 중의 하나이다. 위대한 스승들(the Great ones)은 자신의 영혼에서 나오는 내면의 목소리를 곧바로 따를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을 찾고 있다.

 

내면의 목소리(2)

진정한 구도자라면, 그가 스스로 길을 찾기 까지는 그 무엇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아버지의 집(the house of the Father)에서 찾을 수 있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의 존재의 중심에 있는 그 욕구를 달래주지 못한다. 그는 그 모든 시시한 방법들을 다 시도해 보았지만 그 모두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많은 안내자들을 따라 보았지만 그들이 그저 “눈먼 자들을 이끄는 눈먼 지도자”일 뿐임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는 진정한 자기 자신일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는 스스로의 안내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홀로’ 발견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은 남아있지 않다. 모든 진정한 제자들의 운명이라 할 수 있는 고독 속에서, 그를 한 명의 마스터가 될 수 있도록 준비시켜줄 자신에 대한 앎(self-knowledge)과 외부에 의지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믿음(self-reliance)이 생겨난다. 이러한 고독은 그 어떤 차별적인[분리적인]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가는 길(the Way) 그 자체의 조건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구도자들은 이 차이점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기 바란다.

진정한 구도자는 세상의 혼란의 한 가운데에서도 똑바로 서서 분명하게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그런 드문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세상의 짙고 매캐한 안개 너머로 이 땅의 모든 사건들을 주재하는 그 평화의 중심을 바라볼 수 있도록 훈련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침묵의 목소리의 속삭임을 놓치지 않기에) 언제나 그 높은 진동에 동조되어 있어, 모든 사소한 유혹의 목소리들에는 닫혀져 있는, 그런 훈련된 민감한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점들이 또한 그에게 고독함을 가져오며, 앞서 있는 존재들을 만날 때 덜 진화된 영혼들이 느끼기 마련인 초연함을 만들어낸다.

제자들은 길(the Way)을 물어 찾으라는 말을 듣지만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데에서 역설적인 상황이 생겨난다. 그 길을 아는 자들은 아마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구도의 길은 마치 거미가 그의 존재의 중심으로부터 자신의 그물을 자아내듯이 구도자 자신이 만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어떤 시대에서건 “하느님의 분노의 포도즙 틀을 홀로 밟아온” 자,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홀로 자신의 카르마를 녹여버리고 구도의 길을 밟아갈 임무를 지성적으로 짊어진 자들 만이 그들의 영혼을 아데프트[마스터]로서 꽃피울 수 있었다.
[역주: 이사야서 63,2-3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 내면에서 오는 영혼의 충동들에 따르라.

인류의 스승들은 이제 싹트기 시작한 입문자들에게 분별심을 기르도록 지도하고 그들이 아래의 것들을 구별하는 힘든 일을 훈련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a) 본능과 직관
(b) 상위 마음과 하위 마음( Higher and lower mind)
(c) 욕망과 영적인 충동
(d) 이기적인 열망과 성스런 열의
(e) 달의 지배자들(lunar lords-역주: 하위 체들의 집합의식)에서 오는 강박감과 태양의 지배자(Solar Lord-역주:영혼)의 펼쳐짐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우리가 행해온 봉사와 배움과 일work에 대한 열망 조차도 어쩌면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유로워 지려는 욕망, 또는 일상의 단조로운 의무들에 대한 싫증에 기반한 것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쉽지도 비위에 맞는 일도 아니다. 영혼의 충동에 따르려는 자는 an accuracy of summation(?)을 길러야 하며, 오늘날 진실로 찾기 힘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품성을 길러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자아(Self)에게 진실해야만 한다” 그리고 홀로 있는 순간에도, 내밀한 명상의 순간에도, 단 하나의 잘못이라도 얼버무리거나 단 한 측면으로도 눈감고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말과 행동과 그 동기를 검증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오직 그렇게 해야만 그는 영적인 분별심을 기를 수 있고 모든 사물 속에서 진리를 인식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오직 그렇게 해야만 실재에 도달하고 진정한 자아를 알게 될 것이다.



- 세속적인 지식과 영민함에 지나치게 신경쓰는 일을 그만두라



만일 구도자가 홀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면, 만일 그가 모든 일들에 있어서 진실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만 한다면, 그는 마찬가지로 용기를 기를 필요가 있다. 그는 세상의 생각들과 그 생각들에서 나온 표현들에 대해 끊임없이 반대로 나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며, 그것도 매우 자주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는 세상이 매일 인용하고 동의하는 의견들과 상관없이 그가 옳다고 보고 옳다고 아는 것들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는 자신에게 의지하고, 영적인 교류와 깨달음의 순간에 스스로 도달한 결론들에 의지해야만 한다. 많은 구도자들이 여기에서 실패한다. 그들은 그들이 아는 최선의 것을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가 말하는 그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그들은 명상의 순간에 그들에게 권유된 어떤 일들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스승인 내면의 자아(the Self)가 말하라고 촉구하는 말들을 하지 못한다. 이 모든 이루지 못한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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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미혹도,그 어떤 환영도
황야를 지나고 우거진 숲을 지나서,
슬픔과 고뇌의 깊은 강을 건너,
희생의 계곡을 지나 장대한 전망의 산맥을 넘어
해방의 문 앞에 이르는
그 면도날 같은 길을 밟아가기로 결심한 사람은
그리 오래 잡아둘 수 없습니다.

그는 아마도 가끔은 어둠 속을 여행해 갈 것입니다.
(어둠의 환영은 너무나 사실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어쩌면 너무나 현란하고 혼란스러운 빛 속을 걷게 되어서
앞에 놓인 길을 거의 볼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길에서 용기를 잃고 흔들리게 될 지도 모르고,
봉사와 투쟁의 피로에 눌려 주저앉게 될 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잠시 길을 벗어나
야망과 이기심과 물질적 환희라는 곁길을 따라
방황해 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찰나처럼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지상에서도 또는 그 어디에서도
환영에서 눈뜬 인간의 진보를 막을 수 있는 것이란 없습니다.
그는 아스트럴 계의 미혹을 넘어 참된 실재를 일별하였으며,
비록 오직 한번일지라도, 그 자신의 영혼의 낭랑한 부름을 들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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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기원문 The Great Invocation


 


권능과 빛을 구하는 기도

 

대 기원문은 오랜 기원을 갖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우리 행성에서의 삶의 모든 측면들 속으로 변화와 재조정을 일으키도록 도움을 주고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닌 만트라적인 기도문입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기도문이며, 이 힘든 변화의 시기 동안 우리의 행성을 돕기 위하여, 모든 다양한 신념과 영적인 성향들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이 기원문의 아름다움과 힘은 그 단순성에 있으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몇 가지 핵심적인 진리 - 즉, 우리가 막연히 신이라 부르는 어떤 근본적인 지성(Intelligence)이 존재한다는 진리; 모든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들의 뒤에서, 우주를 추진시키고 있는 힘이 사랑이라는 진리; 위대한 존재들이 주기적으로 지구에 왔었으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사랑을 구현했었다는 진리; 사랑과 지성 이 모두는 신의 의지(the Will of God)라 하는 것의 결과라는 진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직 인류 그 자체를 통해서 만이 그 신성한 계획이 성취될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우리의 행성에 존재하는 거대한 고통과 괴로움에 직면하였을 때,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필요를 느끼면서도, 종종 어떤 진정으로 건설적인 방식으로 도움을 주려는 우리의 시도들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서의 고통의 경감과 보호를 위해 기도에 의지하곤 했습니다.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오늘날, 인류는 행성 전체와 인류의 이익을 위한 집단적인 기도와 기원의 힘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집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 기원문을 집중적이고 역동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도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강력한 영적인 에너지들을 접하고 퍼뜨릴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행성 지구의 변형과 향상에 공헌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기도문의 집단적인 사용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의식을 밝히고 끌어올리며, 즉 우리 세계의 대체로 물질적인 초점을 보다 진정으로 영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는 방향으로 기여하며, 우리 지구에서의 삶의 모든 측면으로 빛과 사랑과 권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대 기원문을 집중하여 사용하면 각자의 삶에 강력한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 각자의 마음가짐, 의향, 성격, 그리고 목표는 변화되고 영적으로 유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그가 가슴속에 생각하는 대로 그러하다."는 말은 자연의 근본적인 법칙입니다;  빛을 희구하고 깨달음을 기대하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돌리는 것은 결코 헛될 수 없으며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원문은 현재 70가지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기원문을 깊이 진심으로 매일 사용하는 일에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기원문을 사용하고 다른 이들도 사용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그 어떤 단체나 조직을 후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의 것입니다.

 

 

신의 마음 속 빛의 초점으로부터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빛이 흘러 들게 하소서

이 땅 위로 빛이 강림하게 하소서

 

신의 가슴 속 사랑의 초점으로부터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사랑이 흘러 들게 하소서

그리스도여, 이 땅으로 돌아오소서

 

신의 뜻을 알고 있는 그 중심으로부터

큰 목적이 모든 사람들의 작은 의지들을 인도하게 하소서

마스터들께서 알고 있고 섬기고 있는 그 목적이…

 

인류라는 중심으로부터

사랑과 빛의 계획이 성취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악이 거하는 곳을 봉인하게 하소서

 

빛과 사랑, 그리고 권능이 지상에서의 계획을 복원하게 하소서

 

 

 

많은 종교들이 세계의 스승(World Teacher) 또는 구세주를 믿고 있으며, 그를 그리스도, 미륵부처님, 이맘 마흐디, 보살, 또는 메시아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용어들은 몇몇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그리고 유태교 버전의 대 기원문에서 그리스도 대신 사용되고 있습니다.

 

 

 

 

THE GREAT INVOCATION

A PRAYER FOR POWER AND LIGHT

 

 

The Great Invocation is a prayer of ancient origin--it is a mantric formula of tremendous potency that is helping to bring about changes and readjustments within all aspects of our planetary life. It is a world prayer, used by people of all faiths and spiritual inclinations, to aid our planet during this difficult transition period.

 

On the surface, the beauty and strength of this Invocation lies in its simplicity, and in its expression of certain central truths that most people, innately and normally, accept -- the truth of the existence of a basic Intelligence to Whom we vaguely give the name of God; the truth that, behind all outer seeming, the motivating power of the universe is Love; the truth that great Individuals have cyclically come to Earth and embodied that love so that we could understand; the truth that both love and intelligence are effects of what is called the Will of God, and finally the self-evident truth that only through Humanity itself can the divine Plan work out.

 

 

It is natural, at times, to feel powerless when faced with the enormity of the pain and suffering upon our planet; we sense the need yet often feel our attempts to contribute in any truly constructive manner are futile. In the past, individuals generally turned to prayer for protection and for the alleviation of suffering in their personal lives. Today, as we enter into a new age, humanity is collectively demonstrating a deepened understanding of the power of group prayer and invocation for the benefit of humanity and the planet as a whole. The focused and dynamic use of the Great Invocation gives all people everywhere a potent means of contacting and distributing powerful spiritual energies, thereby contributing to the upliftment and transformation of planet Earth. Through its collective use we bring light and love and power to bear upon all aspects of our planetary life, irradiating and uplifting human consciousness -- contributing towards the transformation of the largely material focus of our world into one that is more truly spiritual.

 

 

 

The focused use of the Great Invocation causes powerful changes in one’s life -- one’s attitudes, intentions, character and goals will be changed and made spiritually useful. “As a man thinketh in his heart so is he” is a basic law in nature; the constant turning of the mind to the need for light and the prospect of illumination cannot and will not be ineffectual.

 

The Invocation is now translated into over 70 languages and is used by countless individuals. Will you join them in using it every day-with thought and dedication? By using the Invocation and encouraging others to use it, no particular group or organisation is sponsored. It belongs to all humanity.

 

From the point of Light within the Mind of God

Let light stream forth into the minds of men.

Let Light descend on Earth.

 

From the point of Love within the Heart of God

Let love stream forth into the hearts of men.

May Christ return to Earth.

 

From the centre where the Will of God is known

Let purpose guide the little wills of men -

The purpose which the Masters know and serve.

 

From the centre which we call the race of men

Let the Plan of Love and Light work out

And may it seal the door where evil dwells.

 

Let Light and Love and Power restore the Plan on Earth.

 

 

Many religions believe in a World Teacher or Saviour, knowing him under such names as the Christ, the Lord Maitreya, the Imam Mahdi, the Bodhisattva, and the Messiah, and these terms are used in some of the Christian, Hindu, Muslim, Buddhist and Jewish versions of the Great Invocation.

 

Men and women of goodwill throughout the world are using this Invocation in their own language. Will you join them in using the Invocation every day - with thought and dedication?

 

By using the Invocation and encouraging others to use it, no particular group or oganisation is sponsored. It belongs to all humanity.

함께하는 음악

gregorian - save a p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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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과 그 메카니즘
심리학의 문제

엘리스 배일리


루시스 출판사
113 유니버시티 플레이스 11 층, 뉴욕시, 뉴욕 주 10003
루시스 인쇄사
3화이트홀 커트 슈트 54 런던 사우스웨스트 1번가 2 EF

감사와 사랑으로 엘리스 E. 듀퐁 오티즈에게 바친다

서언
제1장 소개
제 2장 분비선(腺)과 인간 행동
제 3장 에텔체 또는 생기체의 이론
제 4장 혼의 본성과 그 위치
제 5장 혼, 에테르 그리고 에너지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
제 6장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
제 7장 결론
부록
참고도서
색인



“몸과 혼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 작용은 다른 인과 관계보다 신기한 점이 훨씬 더 많다.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자가 사실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루돌프 헤르만 롯체


“중심적인 자아의 소망에서 하강하는 의도meaning가 몸을 감싼다. 이것은 세포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여러 가지 의도로 구성된 성채가 된다. 그 기관들은 사실적인 것일뿐만 아니라, 모험적이고 심오한 상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가치와 미추, 우아함과 기교, 암시적인 철학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오만스럽고 수치스러운 태도, 예술에 대한 무한한 관심, 자유자재한 춤의 의미, 그 모두가 명료하게 된다. 자세, 몸짓, 그리고 무수한 색채와 강도에 따른 표현상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내면의 움직임이 거침 없이 즉시 나타난다. 시와 도덕, 종교와 논리가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처럼 성원들의 내면에 다시 자리를 잡고, 분열에 의해 파멸할 것이라고 위협받는 세계는 구체적인 통합을 회복한다.
                자아, 그 몸과 자유, WM. E. Hoching, p.97.



서언

동양의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사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대부분 이를 무분별하게 경외하거나 막무가내로 불신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런 상태는 유감스러운 것이다. 숭배자는 불신자만큼이나 위험하다.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우리들의 사고와 신기할 정도로 다른, 거대한 동양적 사고의 본체를 공평하게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본질적인 탐색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면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 무분별한 태도는 우리의 철학적 심리학적 서적들, 이 책과 또 다른 책에서 동양적 사고를 거의 완전히 생략해버리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비난한다. 동양은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자신들만의 고유어를 갖고 있다. 이를 잘 번역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동양의 저작이 혼란스러운 시적 표현이나 자아 신비화의 기이한 허튼소리로 채워져 있다고 보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배일리 여사는 비판적인 정신이 동양적 사고로 나가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 비판적인 정신이란 서양적 사고와 똑같이 동양적 사고도 지혜의 궁극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녀는 서구인들이 훨씬 더 경이적인 신비한 원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경외심을 일으키는 외양과 동작으로 다가와서, 조잡스러운 부정확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서구인들에게 그것은 불합리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요컨대 이렇게 말한다. “이 동양적 사고는 실존의 문제들을 깊이 연구하는 경우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이 서양의 사고보다 반드시 더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또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은 모두 자신의 사고를 특화시켜 왔다. 그러므로 둘 다 진지함과 독특한 통찰력의 미덕을 지닌다. 그렇지만, 특화는 궁극적 통합으로 이어질 때에만 가치를 갖는다. 동양과 서양이 각자의 삶의 가장 심오한 영역, 즉 그들의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사고의 영역에서 결합할 때가 성숙되지 않았는가?”

만약 다른 이유가 없다면, 이 책은 동양을 서양으로 그리고 서양을 동양으로 번역하는 것만이 아니라 두 가지 계열의 사고를 단일한 관점에서 조화롭게 결합시키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녀가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는지 아닌지는 독자들이 평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주목할만 하며, 두 가지 형태의 사고 모두에 보다 지성적인 접근을 할 때 결실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적인 분비선(腺)의 연구와 동양적인 “에너지 센터”의 연구 사이에서 저자가 행하는 독특한 비교야말로 이 책에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다. 서양 철학자 스피노자는 오래 전에 절대자의 삶 속에서 그리고 이른바 개체라는 절대자의 표현된 삶에서 몸과 마음이라고 부른 것의 엄격한 병행론(parallelism)을 지적했다. 만약 그런 병행이 존재한다면, 모든 외적 현현에 대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내적 힘이나 심령력의 발견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매우 일반적으로만 내적 힘과 외적 힘을 가정해 왔다. 이 책에서는 이른바 개성을 조정하는 분비선의 연구에 집중함으로써 보다 적절한 개체의 수련에 대해 풍부한 암시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연구의 진전 가능성을 열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관계를 제시할 것이다. 서양에서는 생리학적 행동과 관련해서 갑상선thyroids 또는 부신adrenals을 함께 말한다. 이처럼 생리학적 행동의 심령적 대응물이 있을까? 그것은 답하기 힘든 질문이고 이를 처음 접한 생리학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19세기 유물론의 어두운 상황으로부터 나온 완고한 독단론자가 아니라면, 뇌라는 생리학적 기관의 심령적 대응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갑상선, 부신, 그리고 나머지들의 심령적 대응물은 왜 아니겠는가?

만약 이러한 질문을 논리적 일관성을 위해 탐구한다면, 개체의 심령적 삶이 머리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매우 유약한 지성적 관점을 훨씬 넘어서 우리의 사고는 틀림없이 확장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저자가 도달한 잠정적인 결론을 정리하지는 않겠다. 특별한 결론들은 수정되거나 심지어 거부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생리학적 심리학적 연구로 이어지게 될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 놓았으며 결국 이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도전적일 뿐만 아니라 독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양인들에게는 충격을 줄 것이지만, 서양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지나치게 낯선 동양적 사고 과정에 대해 진정으로 감탄하는 마음과 이에 대한 경이감이 뒤섞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혼과 그 메카니즘: 1장 도입
제 1장 도입

이 책을 쓰게 된 데에는 세 가지 바램이 있었다. 첫째로는 유물론적 또는 현상계의 심리학과 내성적 또는 내면계의 심리학을 결합시키려는 바램이고, 둘째로는 과거의 과학적 심리학을 인류의 사고와 인류의 심리학이라는 더 넓은 영역에서 보기 때문에 물질주의적인 서양과 내성적인 동양을 조화시키려는 바램이고 마지막으로 이들이 대립하는 것이 한 가지 진리의 여러 국면들이며, 이들이 함께 하나의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싶은 바램이다.

이 바램들은 현재 세계적으로 심리학적 교육 수준에서 나오고 있다. 오늘날 지배적인 심리학의 형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철학의 저택들The Mansions of Philosophy”에서 윌 듀런트가 잘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사람을 연구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환경과 더불어 외부에서 시작하여, 적응 메카니즘으로 사람을 설명한다. 그것은 사상을 사물로, ‘마음’을 ‘물질’로 환원하고 스펜서의 변장한 유물론과 왓슨의 행동주의로 귀결한다... 또 다른 방식은 내면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환경을 연구하고 사용하고 정복하려는 필요, 충동 그리고 욕망 체계로 사람을 본다. 그것은 사물을 사상으로, 물질을 마음으로 환원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목적이 모든 형태를 결정한다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질료가 형태를 얻어 완성하는 현실)’와 더불어 시작하고 베르그송의 생기론Vitalism과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로 귀결한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 257


W. B. 필스베리는 이 이중적인 체계는 불필요하게 중복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행동주의적 이론을 취하면, 우리는 두 가지 심리학, 즉 내적 심리학과 외적 심리학을,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 고찰한 심리학과 내부로부터 고찰한 심리학을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기껏해야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필스베리, W. B. 박사, 철학사, p. 298.


이 중복된 상황을 인식하면서, 그리고 두 가지 노선의 해석이 불필요하다는 필스베리 박사에 동의하면서 나는 두 가지가 제 삼의 단일한 것으로 융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기계론적 학파의 정당성과 마찬가지로 내성주의적 학파의 입장도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가정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두 학파 모두 사실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각 학파는 진정으로 상대 학파를 보완해 준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그런다면 서양의 정확한 지식과 동양의 내성적인 지혜에 기초하는 제 삼의 합성 학파가 세워질 수도 있다.

이들 두 심리학파를 고려해 보면, 현대 심리학이 대부분 물질주의적이면서 매우 대중적인 학파라는 것이 분명하다. 유럽과 미국의 많고 다양한 학파에서 나온 심리학에 대한 최근의 책들을 연구하면, 대다수가 행동주의 학파의 기계론 철학을 승인 또는 거부하는 데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는 경우라면 또 다른 형태의 물질주의적 심리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볼프강 쾰러는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때는 어떤 태도를, 이후에는 또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 세속인의 믿음이다. 또한 대부분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한 가지를 하고 이어지는 다른 상황 아래에서는 분명히 다른 일을 하는 성향이 있는 이유를 그는 직접 알고 이해한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동적인 맥락, 즉 정신적인 삶을 구성하는 발전 과정에서 진실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 믿음에 반해서 그리고 그와 완전히 이질적으로 현재 매우 학식있는 심리학자의 관점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어떤 때는 이 일을 하지만 다른 때는 다른 것을 하는 성향이 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경우에는 어떤 신경 경로들이 활기를 띄는 것이고, 두 번째 경우에는 다른 경로들이 열리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투과성이 좋은 경로들을 지니고 있다!” 볼프강 쾰러, 게슈탈트 심리학, p. 349.


그러나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고, 윌 듀런트가 말했던 것처럼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욕망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이며, 조절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거기에는 신비주의와 형이상학이 뒤섞여 있으며, 정신분석, 행동주의, 성적인 신화와 사춘기 질병이 혼합되어 있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 376.

심리학은 신경이건 원자 또는 생기이건 에너지, 힘, 에테르 파동, 그리고 전류와 전하, 리비도라고 하는 심리학자들의 자유 부동력(freely floating force)이라는 단어들로 위엄을 갖춘 불가시적인 경계 지대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과학들은 규정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이와 같은 비인간의 거주처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인다. 장막이 들어 올려지면 인간의 꿈과 열망으로 이루어진 약속의 땅이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다. 불확실성과 기대감은 현대 과학의 확실성과 냉엄한 사실들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인류가 우주적인 무대에 드리워져 있는 커튼 앞에 서서 지성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다음 막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류가 오랜 과거를 지녀서 많은 경험을 얻고 지식을 축적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완전히 기대하지 않았던 계시와 발전에 참여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기에는 현재의 삶의 장치와 이해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동안 이 우주적인 무대에서, 그리고 다양한 노선들을 통한 진리에로의 접근 과정에서 사람들은 과학에 의해 알려진 사실들을 정비해 왔고, 향후 가능한 발전을 찾아내고 있으며, 옳은지 그른지 실험과 시험을 할만한 가정에 서서 많은 분야에서 활동을 진전시키고 있다. 인간 지식의 모든 분야의 학도들을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갖어야 하는지를 지적하면서 버트란트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정확히 반대가 되는, 발견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버트란트 러셀, 회의적인 에세이, p.157.

오늘날의 이러한 과학적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회의론적인 것과, 불가지론적인 것이겠지만 단호하고 공정하게 탐구하면서 의문을 갖지만, 가정된 사실들이 증거에 유효하다고 증명되는 때 기꺼이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 가짐으로, 편견없는 다수의 공식화된 진실에서만 하나의 진리가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소심한 소인배만이 신념이 없고atheistical, 독단적이고, 파괴적인 비판을 일삼으며, 빛이 되돌아 오고, 새날이 밝아올 때 꼼짝하지 않는다.

이 탐구, 물음, 과학적인 태도와 연구는 특별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식분야지만, 아직도 진정한 과학적 연구 분야로 들어 가고 있는 중인 가장 신생의 심리학에 적절하다. 더 많은 것이 알려질 때까지 의견을 보류하여 특별한 학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이 분야를 고찰할 때에만, 탐구자는 시야가 제한되어 고립된 관점으로만 보고 자신이 놓여 있는 광경을 보지 못해서 완전한 단위를 이루지 못한 단편들과 사소함만을 다루는 위험을 회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시기의 가장 바람직한 징후들 중 하나는 동양적 관점에 대한 이해와 이를 연구하려는 경향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동쪽과 서쪽은 대단히 다르고 진리에 이르는 접근법이 다르기 때문에 학도들은 최근에서야 비로소 그들의 기본적인 통일성의 가능성을 숙고하게 되었으며, 사람과 그 환경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삶의 동양적 해석과 서양적 해석의 융합으로부터 출현하게 될 것이다. 낡은 해석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고대의 진실이 수립될 것이다. 낡은 오해는 오류로 인식될 것이지만, 현실은 보다 분명한 빛과 아름다움을 발할 것이다. 서양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구조의 이해에 기초해서 이들이 지닌 것과는 다른 과학, 사상 그리고 추론이 결합되고, 구조를 움직이고 이끌어가는, 동양에서는 친숙한 에너지 또는 영혼의 이해에 기초하는 새로운 심리학이 나타날 것이다. 구조와 동력은 적대적이지 않고, 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다.

서양 심리학은 우선 구조에, 즉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우주,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한 사람의 객관적 반응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사람을 활동하는 육체로 다루고, 자연의 역학mechanics과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역학이며, 시험과 실험을 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룬다. 그것은 몸을 연구하여 감정과 정신력을 설명하고, 이른바 혼에 대해서도 몸으로 설명한다. eb런트는 이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은 말로 지적하고 있다. “자아 또는 혼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유전적인 성격과 획득된 유기체의 경험의 총합일뿐이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75.

이것은 다양한 유형과 기질을 메카니즘으로 설명한다. 루이스 버먼은 자신의 흥미있는 책에서 이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가장 값진 지식은 그가 내분비선으로 이루어진 생물이라는 것이다. 즉, 특이한 유기체로서 인간은 구성 부분들을 조절하는 많은 세포 공장의 산물, 부산물이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 공장의 부서들이 차의 부품들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 화학 공장들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몸을 구성하는 다른 세포들에 작용하는 특별한 물질들을 만들어서 이른바 생명이라는 무수한 과정들을 조절하고 결정한다. 생명, 몸 그리고 혼은 조용한 화학 공정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분비물의 활동에서 출현하는데, 이것은 주석염의 용액에서 시작되는 화학 반응에서 전류에 의해 주석 결정수가 나오는 것과 동일하다.

사람은 내분비선에 의해 조절된다. 5만년 동안 사람은 자신을 정의하고 알려는 노력을 해 온 뒤에 1920년대에 진입해서야, 위의 사실을 자신에 대한 진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심오한 결론이지만, 많은 사실에 의해 지지받는 분명한 결론일 뿐이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26.


서양 심리학은 물리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을 강조하며, 선택하는 분야가 과학적이다. 그것은 환상적인 신비가의 태만하고 몽상적인 추측을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사람과 그 행동 그리고 자질에 대한 진실을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사실들에서 몸을 분리시켜 버렸다. 이 지식은 더 섬세한 인종에게 작용할 수 있는 메카니즘을 만드는 데에 매우 가치있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보다 극단적인 학파들의 경우에 서양 심리학은 육체의 세포와 기관들의 작용에 감정, 사고 그리고 활동을 모두 연관시키기 때문에 매우 결정론적이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는 주로 유기체, 신경 장치, 그리고 내분비계에 의해 지배된다. 다음의 인용은 이러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행동주의자의 관점에서 본 심리학’에서 왓슨은 ‘감정은 전체적으로는 몸의 메카니즘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내장과 분비계의 큰 변화를 포함하는 유전 유형 반응pattern-reaction’(p.195)이라는 점과 ‘생각은 언어 메카니즘의 움직임’(페이지 316)이라는 점, 그리고 ‘고도로 통합된 육체적 활동일뿐’(p. 325)이라는 점을 가르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우리가 내재적인 육체 과정을 연구하는 경우에 생각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왓슨은 대뇌 피질의 해당 부위에서 일어나는 활동과 사고를 동일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 활동을 할 때 음성 도구, 횡경막, 손, 손가락, 눈의 움직임 등, 말하고, 쓰고, 동작하는 것과 명시적으로 묵시적으로 관련되는 모든 육체 과정과 동일시한 것이다.(p. 324). 머톤 프린스, 1925년의 심리학, p.208


“심리학은 세계와 그 속에 있는 사람을 함께 연구한다. 즉 그것은 경험을 신경계에 종속된 것으로 연구하지만, 반면에 물리학은 경험을 신경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연구한다. 심리학은 그러므로 일반 과학들과 함께 마음의 일반적인 특성들을 드러내는 학문 분야로서 분류되어야 한다. 이에 의하면 마음은 ‘신경계에 의존한다고 생각되는 인간 경험의 총합’으로 정의된다...심리학은 (인간)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보는 전체적인 환경을 연구하는 반면, 물리학은 (인간)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을 넘어 존재한다고 보이는 전체 환경을 연구한다. 월터 S. 헌터, 1925년의 심리학, p.95.


“세 번째로 기계론자들의 믿음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하는 두 가지 가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참이라고 해도 다른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이 두 가지 가정은 (1) 세계의 모든 과정들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 종류로만 이루어져 있고 (2) 이 모든 과정들은 자연을 무기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에 물리학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즉 기계적이거나 엄밀하게 결정되고 그래서 엄밀하게 예측가능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윌리엄 맥도걸, 1925년의 심리학, p.303.


루빈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개체의 육체적 모습, 심령적 성격, 또는 혼의 과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분비선의 내분비물의 성질과 총량에 의해 대개 증명된다.” 허먼 H 루빈 의학박사, 인간의 신비한 분비선들, p.54.


어떤 학파들은 의식 일반을 부정하는 데에까지 가서 이를 물질에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양적 연구자는 그들이 정확하게 보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리어리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의식이 신경을 특징짓는 것은 파동이 물질의 형태를 특징짓는 것과 같다.” 다니엘 H. 리어리 철학박사, 현대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 p.116.

그래서 의식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정의된다. “말, 그리고 동작 메카니즘과 밀접하게 관련되거나 이를 포함하는 육체 활동의 복합적인 통합과 연속, 그래서 자주 사회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왈터 S. 헌터, 1925년의 심리학, p.91.


왓슨은 독자들에게 “의식에 대한 언급들, 즉 감각, 지각, 주의, 의지, 심상과 같은 용어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이 용어들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연구를 수행할 때, 그리고 학도들에게 학문 체계로서 심리학을 소개할 때면 언제나 그러한 개념들이 없어도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왔다. 솔직이 그 의미를 모르며, 다른 누구도 일관되게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1925년의 심리학, p.201, 각주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심리학이 심령과 완전히 결별해서 ‘의식’이라는 단어를 대체물, 즉 ‘마음’과 ‘기억’과 함께 살아 있는 것과 함께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때 인간의 행동은 과학적인 기초 위에 세워질 것이고, 문학이나 철학 또는 종교적인 사색의 한 분야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은 개성, 즉 일정한 학식있는 행동을 보여 주는 ‘의식’에, ‘기억’은 개인의 가로무늬근 또는 민무늬근 조직의 일부에서 나오는 신호에 길을 내줄 것이다.” 조지 A. 도시, 우리는 왜 인간처럼 행동하는가, p. 333.

이렇게 완고한 서양 심리학의 물질주의적 경향은 심리학psychology이라는 말의 어원이 ‘논logos’과 심령psyche 또는 혼soul과 관련되어 있다 것을 기억할 때 더 놀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는 그러한 입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들은 내성주의자, 정신주의자mentalist라고 더 잘 알여져 있는 내성적인 심리학파이다. 이들은 의식의 사실성을 인정하고 의식적 실재를 추정한다. 리어리 박사는 이 부류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내성주의자들은 의식, 인식, 인식의 인식, 자아, ‘나(I)’의 심상, 그리고 경직된 훈련과 완고한 기법을 지닌 행동주의자가 경멸, 무시 그리고 부정하는 모든 종류의 개념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성주의자는 관심을 내면으로 돌린다. 자아 성찰로부터 자료들을 얻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을 묻는다. 이론적으로 행동주의자는 인간을 생명의 낮은 형태로 다루기 때문에 동물과 동일하게 다루며, 동물이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행동을 명백하고 객관적으로만 관찰한다. 이는 연구실에서 물체나 화합물의 반응을 관찰할 때 물리학자나 화학자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우기 주관적 학파는 초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경향이 있고, 행동주의 학파는 보다 경험적이고 실용적이다...

“정신주의자들은 심령적 행동이 물리적 행동의 반영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몸과 뇌 이상으로 다른 수준에는 다른 것이 있으며, 이는 원한다면, 마음, 영혼,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은 물질의 기능이 아니다. 다른 한편 유물론자들은 이와는 다르지만, 그와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즉 모든 것은 물리적이며, 생각, 느낌, 감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모든 행동은 모두 물리적, 물질적인 세포의 기능이며, 그러한 구조 없이는 활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행동이 무엇이건 그것은 작용한다. 한편으로 인간은 육체의 구조를 사용하는 정보력이나 영혼을 갖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불가결하게 복잡하기도 하고, 미묘하기도 하며, 고상하다고 할지라도 도덕이나 종교에 의해 작동할 수 있는 기능을 하는 유일한 구조를 기초로 갖고 있다.” 대니엘 B. 리어리 박사, 현대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 pp. 6-7.


내성주의자들과 물질주의자들은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으며, 이들 학파의 주장은 심리학이 분리되면서, 다양하고 많은 집단들에 의해 훨씬 더 약화되었다. 하바드 대학의 호킹 박사는 말한다.

“심리학은 정말 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동적 심리학, 목적 심리학, 형태 심리학 그리고 반응 심리학, 프로이드 심리학, 구조 심리학, 행동주의 심리학,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학파들이 있다. 그들은 자아를 다르게 묘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합은 특징적으로 심리학적 색조를 갖는다. 우리는 행동주의를 순수한 실례로 간주하는데, 그것이 이 성격 중에서 극단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Wm. E. 호킹, 자아 그 몸과 자유, pp.17,18.

프린스 박사는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구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세 가지 진영으로 나뉘어진다. 자아 심리학자들, 비자이 심리학자들 그리고 중도적 입장들. 첫 번째 집단은 모든 의식적 과정의 내용이 자아, 즉 자아, 자아의식의 인식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든 의식은 자아에 의해 어떤 것을 의식 또는 인식하는 것이다.

“비자아 심리학자들인 두 번째 집단은 성찰에 의해서는 어떤 자아나 자아 의식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와 ‘너’는 언어의 필요에 의해 요구되는 강제된 표현일뿐이다.” 머토 프린스, 1925년의 심리학, p. 223.


서양 심리학은 대체로 분명히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기계와 기계 장치의 시대에 번성하는 기계론이다.

서양 기계론적 심리학자의 입장은 그러므로 확고부동하게 완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알려진 진실에 기초해서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증명할 수 있고, 자신의 경우들을 인용할 수 있고, 그 자신이 인간 전체라고 주장하는 인간의 메카니즘에 대한 지식이 객관적이고 명백한 결과를 지닌 실험과 시험에 기초해 있다.

이 물질주의적 심리학에 반대해서 즉시 제기된 비판은 서양 심리학이 주로 비정상적이고 결함이 많고 병적인 케이스만을 배타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었다. 비범하고 천재적이고 이른바 매우 영적인 개인은 무시되고, 일반인에게 아름답고, 본질적이며, 진실한 많은 것이 설명에서 배제된다. 만약 심리분석가가 그리스도를 분석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여호와 콤플렉스”로 고생하고 있다고 도식화되고 분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했던 형태의 구조와 “그의 신경계를 특징짓는 의식”의 성격은 여러 시대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구조가 다시 재현될 수 있었는가? 비슷한 메카니즘을 재생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 심리학은 단지 발전의 초입에 머물러 있을뿐이고, 그래서 왈트 휘트먼은 더 큰 영역을 보고 있다.

“긍정적인 과학 만세! 정확한 증거 만세!”...

여러분이 보여 주는 사실은 이용할만 하지만, 내가 머물 곳은 아니지,
나는 그것으로 내가 거주하는 곳으로 들어갈 뿐이라네” 왈트 휘트먼, 풀잎들, p. 10.


서양에서 독립적으로 출현하긴 했지만 내성주�자들과 정신주의자들의 모호한 반영일뿐인 동양학파는 서양 학파들과 정반대이다. 동양의 심리학은 형태 뒤에 놓여 있는 것을 다룬다. 그것은 영적이고 초월적이다. 그것은 혼과 영혼을 가정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추론과 결론들이 이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형태와 구조를 완전히 인정하지만, 형태와 에너지를 이용하여 전진시키는 자를 강조한다. 그것은 생명과 에너지의 심리학이다.

태고의 시간으로부터 이것은 동양의 사고였으며, 인도의 유서깊은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몸 속에 들어 있는 지고의 영혼은 보는 자, 사고하는 자, 유지하는 자, 맛보는 자, 주님, 상위 자아라고 불리네.

“모든 감각 안의 힘에 의해 비추어지나 모든 감각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초월적이고, 모두를 지지하고, 여러 가지 힘들로 분리되지 않고 모든 힘을 즐기는 자일세.

“그것은 미묘함 때문에 모든 존재의 외부와 내면에 존재하며, 움직임 없이, 움직이고, 지각되지 않네, 그것은 떨어져 있지만 아주 가까이 있네. XIII: 22. 14, 15.

“이 일시적인 몸들은 몸의 영원하고,불멸하며, 무량한 주님에 속해 있도다. II: 17.

"사람들은 감각력들이 대상보다 더 높다고 말하고 감각력보다 감정이 더 높다고 하며, 감정보다 이해가 더 높다고 하지만, 이해보다 높은 것은 그라네. III: 42.”

이렇게 동양의 심리학은 원인, 창조자, 자아를 다룬다. 그리고 그 자아가 정신적, 감정적, 그리고 물리적 활동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작용하는 인간의 성스러운 자아(divine self: 신아)인지 더 작은 자아들이 모두 살아 움직이며 자아 존재를 지니는 거대한 자아(great Self)인지를 다룬다. 동양의 심리학은 그것의 위대한 논증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자아(the Self)를 알고 있고, 그 앎을 통해 주관적인 진아, 상위혼(Over Soul: 에머슨이 말한 만물을 생성시키는 영혼)과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배출해 왔다. 이 주장들은 그들의 방법을 연구하려는 자와 특별한 훈련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입증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력을 주는 진아, 즉 배후에 존재하고 초월해 있는 영혼 쪽에서 그들의 위치는 형태의 영역에 있는 서양 심리학자의 그것만큼 분명하다.

이 두 체계의 결점은 명백하고 각각의 경우에 개탄스러운 결과를 만든다. 서양은 메카니즘을 강조하고, 혼을 부정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지성적 힘을 부정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 때문에 사람의 코구멍 속으로 먼지가 들어갈 뿐 신의 영혼을 드리쉴 수는 없다. 동양은 물리적인 것을 인정하나 그것을 경멸하며, 그로 인해 동양의 비참한 물리적인 조건에 책임이 있게 된다. 이렇게 결함이 심하다면, 이 둘이 결합하면 힘이 나는 것은 진실이 아니겠는가?

자아(the Self)는 존재하고 (이것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한다) 의식적인 신성한 혼이 있다면, 그것이 물리계를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성스러운 결합을 인식할 수 없겠는가? 만약 그것이 지배적인 에너지로 모든 것을 현현시킨다면 (이것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결과들이 성취될 수 있는 정도로 현명하고 의미있게 그 에너지는 진아가 사용하는 구조에 적응될 수 없을까? 혼의 완벽한 표현이 메카니즘의 매질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형태에 대한 서양의 과학적인 지식과 혼의 본성에 대한 동양의 축적되고 상속된 지혜가 지성적으로 결합될 수는 없을까? 물질이 위로는 마음과 혼과 영혼에 이르고, 향상을 촉진시키는 영혼이 육체를 완벽하게 해서 그것을 증명하면 더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물질주의적 심리학과 내성적 심리학을 결합시키고, 서양과 동양을 조화시켜서 그 결합이 강력하고 진실되게 하려는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혼과 그 메카니즘: 2장 분비선과 인간 행동
2 장 분비선과 인간 행동


분비선에 대한 연구는 유년기에 머물러 있다. 이 주제에 대한 문헌들을 개괄적으로 살펴 보면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어떤 분비선의 분비물의 효과와 내밀한 본질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 많으며, 미스테리가 장막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정한 분비선에서 분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일반적인 논의에서도 갑상선과 갑상선 추출물의 조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대부분의 분비선의 분비물은 알려져 있지 않거나 일부만이 추출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학이나 강단의 심리학에 과학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지성적인 사람은 환자를 대상으로 하고 두툼한 사전으로 무장하여 분비선과 그 분비물, 그리고 그 효과 등을 주제로 연구하고, 유용한 자료를 부지런히 수집하고 그 분야를 조사한 뒤에는 이를 보고하는 것을 망설일 필요는 없다. 사실 그러한 연구가 중요한 탐구 분야에 대한 잘 된 요약을 제공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한 기술적인 문헌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감명과 아울러 특별히 과학적인 자료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참신한 정신이 모든 분야에 더 좋은 관점을 제시해 주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훈련받은 전문가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연구되고 보고된 바대로 심리학의 일반 주제에 대해 동양에서 지니고 있는 전래되는 믿음과 오래된 확신에서 표현되었다면, 특별히 그럴 것이다.

분비계를 연구할 때, 그것이 몸의 성장, 머리카락, 심장, 혈액, 그리고 생식기들과 맺는 관계와 같이 일반적인 생리학적 용어로 그 효과를 설명하려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지난 세기에 출판된 의학 서적에서도 수집될 수 있다. 오히려 내 의도는 선진적이고 현대적인 탐구자들,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이 분비선의 연구로부터 추리할 수 있고, 그것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하는 것, 그리고 신기한 내적인 분비물이 사람의 행동, 감정 그리고 정신성, 간단히 말해 사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비선을 연구할 때, 나는 이용할 수 있는 책들로부터 광범위하게 인용할 것이다. 이것은 권위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제시된 견해를 보다 참신하고 생생하게 반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고 문헌의 일부는 이 책의 끝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책들과 훈련된 연구자들은 일반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용어를 종종 사용한다. 예를 들면 갑상선의 분비는 “삼 요드 삼 수소 엑시진돌 프로피오닉 산! (triiodotrihydroexygindolepropionic acid)”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가능한한 나는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표현을 피할 것이다.

분비선을 살펴 보기 전에 “심리학”으로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 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적어도 서양에서는 이미 설명한 것처럼, 심리학이 심령 또는 혼의 논리(logos) 또는 법칙(law)이라는 본래적인 의미를 포기해버렸다. 리어리 박사가 제시한 최근의 정의는 이렇다.


“포괄적 의미로 행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 인간 행동의 과학이란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 즉 인간이 지니는 모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동은 전체적이고 통합된 개성의 행동을 뜻한다.

“심리학은 유기체를 전체로 다룬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물리적이고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즉 개성으로, 복합적인 외부 환경 속에서 다른 개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통합성과 적응성을 지닌 개인으로 다룬다.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행동은... 생리적 사실과 결과, 결국 생물학의 영역으로, 그리고 생화학, 일반 화학으로 귀결되고 필연적으로 운동하는 물질의 과학인 물리학으로 귀결하게 된다.” 대니얼 B. 리어리, 현대심리학, 정상과 이상, pp. 10, 14, 18.


그러므로 심리학은 인간을 환경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다루는 인간 행동의 과학이며, 사람과 그 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의 과학이다. 그것은 인간 행동의 과학이지만, 선악의 행위로 구성되는 윤리적 의미에서 그러하지는 않다. 그것은 인간 행동, 즉 개성의 과학이다. 그러나 이 행동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호킹은 이렇게 말한다. “자아는 참으로 행동의 체계이다. 그러나 지속적인 희망에서 나오는 목적 지향적 행동의 체계이다. 자아의 핵은 희망이다.” Wm. E, 호킹, 몸과 자유, p.46.


삶은 더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이 희망은 진정 지속적인 희망이지만,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호킹은 목적 지향적인 행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행동과 개성이라는 영역에는 세 가지 주요 요소들이 있다. 첫째로는 환경이 있다. 이것은 현재의 사실, 또는 사실들의 모음, 또는 드라마가 연기되는 단순한 수동적인 무대 이상이다. “문화적이든, 사회적이든, 물리적이든 그 모두가 다양한 사실로 나타나거나 기록되는 유기체는 아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적 장치, 특히 이제 우리가 더 자세하게 논의하게 될 반응 장치가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특정한 환경과 특정한 반응 장치, 일련의 행동을 제공하며 불가피하다고 주장되는 환경과 반응 장치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관계의 행위 또는 결과가 존재한다. 이 세 가지의 상호 작용에 의해 인간 행동이 일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히 두 번째 주 요소, 즉 반응 장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여기서 메카니즘의 특정한 측면들, 즉 신경계와 내분비선ductless glands은 다른 것들보다는 더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이 두 체계는 인간의 몸에서 밀접한 상호 관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인간이 환경, 외부 세계에 접촉하는 것은 신경계로, 인간 체구조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놀라운 부분이다. 이 계를 통해서 인간은 구체적인 것을 인식하게 되고 신경망과 척수와 뇌를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는 정보를 인식하게 된다. 여러 가지 메시지들은 수 백만 개의 신경 전달 통로를 따라 뇌의 중앙 발전소로 전달되어 신기한 방식으로 정보로 전환된다. 정보에 대한 역 반응이 일어나게 되고 인간은 전기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들어오고 나가는 신경 에너지의 나타남과 함께 내분비계(그리고 근육계)에서 이와 유사한 활동이 일어나며 활동의 연결이 긴밀해서 내분비선이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못하면, 전달되는 정보에 대한 적절한 반응과 한 형태의 에너지에서 다른 형태로의 에너지 변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체 반응 장치와 그 경우의 메카니즘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유기체는 수용체를 통해서 받아들이는 주변의 에너지를 근육과 분비선의 작용에 따라 송출되는 에너지로 전환하는 변형 장치이다. 이와 동시에 이 장치도 이 과정에 의해 변형되며, 자극, 즉 유기체가 완전히 작용하거나 행동할 때 이 두 가지의 자극과 에너지가 결합되어 출력 신호를 내부에서 일으킨다.” 대니엘 B. 리어리, 현대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 p. 33.


신경계와 근조직은 대개 물리적인 반응 장치, 또는 환경에 대한 물리적인 반응이 이루어지는 수단이라고 설명될 수도 있지만, 신경계와 내분비선을 지성적이고 감정적인 반응 장치, 실제적인 반응을 형성하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장치와 환경 사이에서 벌어지는 후자의 상호 작용은 행위와 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감정과 사고 활동은 내분비계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사람의 본성도 그런 식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리어리 박사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결국 현재의 이론이 보다 정확하고 더 근거가 확실한 지식으로 대체되면, 우리는 내분비선 안에서 또는 그와 관련되는 위치를 발견할 것이다.” 상동., p. 189.


루빈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상태와 되고자 한 상태는 정상적인 내분비선을 지니고 태어났는지 아닌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믿음에 우리는 급속히 접근하고 있다.” H. H. 루빈, 우리의 신기한 분비선들, p. 10.


그리고 리어리 박사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본능보다는 “수용체와 민무늬근와 내분비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대니엘 B. 리어리, 현대심리학: 정상과 이상. p.61.


콥 박사도 자신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체 구조를 결정하는 분비선의 작용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개체individual의 정신적 외관, 즉 ‘행동 복합behavior complexes’은 물질적인 행복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질적인 행복은 틀림없이 다양한 분비선의 분비에서 일어나는 활동과 상호작용에 따르는 것이다...

“비록 이 주제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다 해도 내분비선의 특별한 배치에 의해 몸에서 특정한 형태가 만들어지고 동일한 곳에서 그 결과를 마음이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I. G. 콥, 운명의 분비선, pp. 3,6.


최근 강의에서 J. S. 헉슬리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공을 이루는 데에 순수한 지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질은 주로 갑상선, 뇌하수체, 등등 다양한 내분비선들의 균형이다. 미래의 응용 심리학은 성격을 수정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상동., pp. 11, 12.


이 성격의 문제에 대해 호킹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갑상선이나 내장에 있는 분비선들, 또는 부신과 같은 내분비선들이 성질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 선들 중에서 어떤 것을 자극하거나 그 산물을 주입하거나 그와 함께 복용하면 한때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변화들이 일어날 것이다. 티록신을 조절함으로써 크레틴병(갑상선 호르몬의 결핍에 의한 것으로 소인증과 정신박약 증상을 보인다.: 역주)이 정상처럼 될 것이다. 복용을 멈추면 원래의 조건으로 되돌아 간다. 이 복용을 늘려도, 불행히 그 누구도 정상에서 천재로 향상되지는 못한다. 다만 또 다른 비정상 형태가 만들어질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화학적인 발견도 인간의 정상성을 증가시키는 밝은 희망들을 입증하지는 못하고 있다. 평범한 개인을 천재로 생각하게 하는 약들도 있지만, 복용 결과가 동일한 영향을 준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실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발견에 관해 미래 인류에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혼이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진짜 의미가 있고, ‘요오드 결핍은 현명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 것’이다.” W. E. 호킹, 몸과 자유, pp. 58.59.


그러므로 내분비선과 육체 구조뿐만 아니라 행동에도 미치는 효과를 고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면 분비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특별히 내분비선이라고 언급되는 것은 무엇인가? 콥 박사는 말한다.


분비선들은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배설계drainage system와 관련되는 분비선과 림프선과 육체 작용에 이용되는 산물을 분비하는 것과 관련되는 분비선이다. 림프선이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두 번째 집단은 서로 조율되어 작용하면서 몸의 과정을 조절하고 제어하는 유체들을 분비하는 것이 임무이고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 분비선들은 내용물을 분비하는 관을 갖는다. 두 번째는 관이 없고 그 분비가 혈액의 흐름으로 직접 흡수된다. 이들은 무관 분비선(ductless glands) 또는 ‘내분비 기관’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 산물을 내분비물이라고 부른다. ‘내분비학’이라는 용어는 내분비선의 연구와 관련된다.” W. E. 호킹, 자아, 몸 그리고 자유, pp. 58, 59.


루빈 박사는 말한다.

“내분비”라는 단어는 “분리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그리스어 “크리네인(krinein)"이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이 무관 분비선들 또는 분비 기관들은 ‘내분비선’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이들의 분비물은 직접 혈액으로 영양 림프의 흐름으로, 즉 몸으로 들어간다. 그 때문에 자아에게 필요한 물질을 분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비들은 심리학에서 알려진 몇 가지 경이적인 반응을 자극하는 ‘호르몬’ 또는 유기체의 화학 전달 물질이 포함된다. 사실 호르몬이 심리학에 대한 관계는 라듐이 화학에 대한 관계와 같다.” H. H. 루빈 의학박사, 신기한 분비선들, pp. 8, 9.


이 내분비계는 고도의 협동과 상호의존 속에서 작용하는 기능적인 단위를 형성한다. 버먼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기질은 완전히 협동적이다. 내분비의 분비선들이 이 협동을 지휘하는 자이다... 육체 배후에 그리고 마음 배후에는 이러한 지휘자들의 위원회가 있다” 루이스 버먼 의학 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p. 96, 97.

사실 모든 분비선들은 통일적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서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활동을 연계시키고 있으며 통일된 효과에 의해 사람은 현재 상태가 된다.

사실 그들은 인체의 메카니즘 속에서 다른 계와 분명히 구분되는 기능과 유기체들과 밀접히 연결되는 체계를 형성한다. 혈액계와 신경계는 고유한 활동을 하지만, 내분비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혈액은 신기하게도 다른 분비선들이 분비하는 특별한 호르몬을 전달하는 작용을 하며, 신경계는 내분비선의 정상 또는 비정상 기능을 일으키기 쉬운 심령적인 발전과 특별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보인다.

내분비계에 대한 이러한 논의로부터 우리는 자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럼 무관의 분비선이란 어떤 것들이 있을까?

특별히 중요한 7 개의 분비선들은 머리에서 시작해서 아래쪽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름                       위치                         분비물
1
송과선                    머리                         알려지지 않음
2
뇌하수체 전엽/후엽   머리                        알려지지 않음
3
갑상선                    목                            티록신
4
흉선                       흉곽 상부                  알려지지 않음
5
췌장                       태양총                      인슐린
6
부신 피질/수질        신장 뒤 부분               알려지지 않음/아드레날린
7
생식선                    하복부                       정소와 난소


이처럼 머리와 몸에는 중요한 분비선들의 망상조직이 분포하고 있다. 이것들은 생리학적으로 몸의 구조, 성장 그리고 화학적인 변화를 다스리고,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감정적 반응과 사고 과정을 담당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선행과 악행, 행동의 성질, 그리고 성격을 만드는 자일 것이다.

이제 위에서 언급한 일곱 가지 분비선을 고려하여, 우리는 정신적 심리적 효과에 제한하여 설명할 것이다.

1. 송과선-위치, 머리-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송과선은 고깔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가 완두콩 만하고 코뿌리 뒤에 위치한 뇌하수체 배후 상단에 있는 뇌 중앙의 작은 공간 안에 들어 있다. 송과선은 뇌의 제 삼 뇌실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눈의 망막 색소와 유사한 색소가 있고 이른바 “뇌사립brain sand particles”의 모음이 들어 있다. 틸니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송과체는 어떤 기능을 하는지 확인해 보려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생명에 불가결한 것인가 아니면 대사 활동의 특별한 단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아마 이 기관이 사람과 대부분의 포유류에서 어떤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 기능이 내분비물에 의해 특별히 결정될 수는 있지만, 생명에 불가결하지는 않는 것이 확실한 분비물일 것이다. 송과선 분비물의 정확한 영향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레더릭 틸니 의학박사, 송과선, pp. 573, 542.


이 분비선은 빛에 대한 민감성을 조절하고 성적 특징에 영향을 미치며, 뇌 성장과 관계 있으며, 이하에서 논의되는 역사적 경우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그 활동적인 기능은 사람을 지적인 면에서 조숙하게 만든다고 주장되어 왔다. 이 분비선은 또한 제 삼의 눈, 그리고 시클로프의 눈the eye of the Cyclops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사실 또는 추측을 넘어서 연구자들은 솔직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여러 가지 실험들도 정보를 별로 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아이들과 장애인들에게 송과선 추출물을 복용시키는 실험에서 실험자가 15 세 이상일 때에는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고, 다른 경우에는 상반되는 결과가 나와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몇 십년 전까지 송과선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버먼 박사는 통증과 두통에 만성적으로 시달리는 한 어린 아이가 독일로 보내졌던 경우에 주목했다. 그는 5살 정도의 나이에 매우 조숙해 있었고, 이미 사춘기에 이르러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이상할 정도로 명랑했으며,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인 주제를 논하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집단 의식적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에만 행복해 했다. 병원에 도착한 뒤로 그의 상태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한 달 이내에 죽었다. 부검에서 송과선 종양으로 나타났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89.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이 역사적인 사례는 동양 철학자들의 주장을 고려할 때, 특별한 관심을 갖게 한다.

대부분의 고대 철학자들은 저서에서 송과선이 혼의 자리라고 주장했으며, 데까르트는 “사람 안에서 혼과 몸은 단일한 점에서만, 즉 머리에 있는 송과선에서만 서로 접촉하고 있다”는 말을 빈번하게 했다.

송과선이 혼의 자리라는 고대의 믿음에서, 그리고 아동기의 특징적인 분비선이며 이후 위축되는 분명한 사실에서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있지는 않을까? 아이들은 신에 대한 믿음과 인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왕국이 너희 안에 있다”고 말했고, “너희가 어린 아이들처럼 되지 않고는 하늘의 왕국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워즈워드의 “아동기의 회상으로부터 불멸성을 암시하는 송시”도 주의를 환기시켜 준다.

“우리의 태어남은 꿈일 뿐이고 망각일 뿐이다.
혼은 우리와 함께 떠오르는 삶의 별,
다른 곳에 그 자리를 두고 있고
저 멀리서 왔네
완전한 망각 속에 있지도
벌거벗고 있지도 않지만,
영광의 구름을 걸어가고 있네
그곳은 우리의 고향인 신으로부터 우리가 오는 곳
하늘은 유년기에 우리 주변에 놓여 있다네!
교도소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하네
소년으로 커가면서,
하지만 그는 빛을 바라보고 그것이 흐르는 곳에서
즐거움 속에서 그것을 안다네.
낮에는 동쪽에서 멀리 떨어져 젊은이는
여행해야 하지만, 그는 자연의 성직자,
빛나는 모습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네
마침내 그는 죽음을 감지하고
일상의 빛으로 흐려진다네.”

동양의 철학은 송과선과 혼과의 이러한 관련성이 가능한 것이라고 확인한다.

2. 뇌하수체-위치 머리-전엽의 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후엽의 분비물 피투이트린pituitrin
지난 세기(19세기)의 80년대까지 수 세기 동안 뇌하수체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아서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외분비 기관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그것은 한곳에 위치한 두 가지 분비선이라 해도 옳을 것이다. 이것은 콩만한 크기로 코 뿌리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뇌의 기부에 놓여 있다.

이 분비선은 “자연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불려 왔고, “두개골 속의 두개골”처럼 빈 공간 속에 들어 있다. 대부분의 분비선이 그런 것처럼, 여러 가지 형태로 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또한 수면과 성 주기와 같은 주기적인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지속적인 노력, 즉 에너지 소비의 분비선이며 생명에 본질적이다. 뇌세포를 자극하며, “개성과 직접적이고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또한 뇌하수체가 불충분하게 발전하면 분명히 도덕적, 지성적인 열세, 그리고 자아 통제력의 부족이 나타나거나 적어도 이러한 현상을 동반하지만, 뇌하수체가 잘 발전되면, 정신적 활동과 인내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정적 정신적 성격과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뇌하수체는 진정 한 기관 안에 있는 두 가지 분비선이다. 뇌하수체 후엽의 분비물은 피투이트린이다.


“뇌하수체 후엽은 모성적-성적 본능과 그 승화, 사회적이고 창조적인 본능을 다스린다... 온화한 감정들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지성화된 자아 보호적인 감상주의와 반대로) 모든 기본적인 정서 때문에 다정다감, 동정 그리고 최면 암시에 잘 걸리는 성향이 이 기능들과 연결되어 있다.”

뇌하수체 전엽의 분비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뇌하수체 전엽은 지성의 분비선이라고 설명되어 왔다... 지성에 의해 마음의 능력을, 개념과 추상적 사고에 의해 환경을 통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178.


버먼 박사는 또한 “정신적 활동은 지성적으로는 뇌하수체 전엽의 기능 증가를, 감정적으로는 뇌하수체 후엽의 기능 증가를 동반한다.” 상동, p. 236.

이러한 연구로부터 모든 동물들이 공유하는 모성적인 본능, 동료들에 대한 사랑, 또는 신의 사랑 등 어떤 것을 의미하든 개성의 자질인 감정은 대개 지성화시키는 능력이기도 한 뇌하수체의 조건에 크게 의존한다고 생각된다.

다른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하면, 동양의 지혜를 배우는 학도는 이 모든 추측이 상대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한다.


3. 갑상선-위치, 목- 분비물, 티록신
갑상선에 대해서는 송과선 또는 뇌하수체보다 더 많이 밝혀져 있으며, 동양의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 분비선은 기관 위쪽에 있는 후두 근처의 목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매우 큰 분비선이다. 그것은 한때 성선(sex gland)이었으며, “제 삼의 난소”라고 불리기도 했고 언제나 난소낭(ovarian cases)과 관련되어 있다. 척추 하부에서 성기의 관들ducts과 연결되어 있지만, 진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관련성이 상실되고, 성기와 뇌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서 머리 쪽으로 점차 이동한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46.

또한 여러 가지 조직을 분화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며, 중독을 방지하고 독에 대한 저항력을 증가시키는 해독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갑상선은 에너지 대사의 조절 기관이다. 그것은 에너지 변형의 효과적인 윤활 장치라고 불려 왔고 몸 에너지의 거대한 촉매이다.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내분비계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생명에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정상 이하의 사람들, 장애인과 백치들을 다룬 실험을 통해서 연구자들은 버먼 박사의 말처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갑상선이 없다면 육체적인 능력과 기능의 전개도, 예상 연령에 보이는 사춘기의 징후와 그 이후의 성적인 경향을 보이는 종족의 생식과 아울러 복합적인 사고, 배움, 교육, 습관 형성, 상황에 대한 반응 에너지도 있을 수 없다.” 상동 p.55.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감각 정도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인 감수성과 지각의 정확도는 갑상선의 또 다른 기질이다. 이에 더하여 갑상선이 더 원기왕성하면 더 민감하다. 사물을 더 많이 느끼면 고통도 더 쉽게 느낀다. 왜냐하면 자극이 신경 장치를 자극하는 단계에 훨씬 더 빨리 도달하기 때문이다.” 상동 p. 180


뇌하수체와 같이 갑상선도 기억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 뇌하수체는 기억의 보존과 관계된다고 보이며... 갑상선 기억은 특히 지각과 교훈에 적용되며, 뇌하수체는 이해 (독서, 학습, 사고)와 개념에 적용된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182.


4. 흉선-위치, 상위 흉부-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흉선에 대해서는 실제로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매우 신비한 것 중 하나이다. 송과선과 같이 이것은 아동기의 분비선으로 간주되지만, 아직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

흉선은 흉부에 위치해 있으며, 심장의 상부를 덮고 있으며, 영양과 성장과 관련된다고 짐작된다. 아이들의 무책임한 성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성인기에 기능항진이 일어나면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인간이 되는 경우도 있다.

5. 췌장-위치, 태양총 부근-분비물, 인슐린
췌장과 관련된 정보는 대부분 심리학적이며, 그래서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복부에 있고 (본능적인 동물적 본성의 뇌인) 태양총에 가까이 있으며, “육체적 정신적 목적들을 위한 에너지의 작동”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소화 과정과 관련 있으며, 당 대사에 필요하다고 알려진 인슐린을 분비한다. 세포에 충분한 당이 공급되지 않으면 생존에 필수적인 근육 작용이나 신경 작용이 가능하지 않다.” 상동. p.93.


6. 부신-위치, 신장 뒤-부신 피질의 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부신 수질의 분비물 아드레날린.
부신의 분비선들은 각각 쌍을 이루고 있으며, 하복부에 위치해 있으며, 신장 뒤에 걸쳐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일반적인 성장과 뇌 세포의 성장에 관련되어 있다. 부신 피질의 분비물은 성숙을 이루는 내분비물들의 원천이다.

그러나 부신의 분비선들은 기본적으로 대항의 분비선들이다. 이들은 위험이나 분노를 나타낼 때 직접적이고 활동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그 분비물은 긴급한 때에 자극된다. 고통, 분노 그리고 두려움은 이 분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모든 증거는 수질이 두려움의 증상들을 만드는 물질을 분비시키고, 피질은 화의 반응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76.


또한 이렇다.

“용기는 두려움과 화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모두가 항상 논란 거리가 되고 있다. 용기는 일반적으로 두려움의 반대가 되는 감정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부신 수질의 억제를 의미하는 용기를 가져 올 것이다. 사실상 용기의 메카니즘은 더 복합적이다. 동물의 용기와 의도적인 용기는 구분되어야 한다. 동물의 용기는 글자 그대로 짐승의 용기이다. 언급되었듯이 엄청난 양의 부신 피질을 갖는 동물들은 들판과 숲의 왕들로 호전적이고, 공격적이며, 돌진한다. 그들의 감정은 일종의 피의 욕구를 지닌 것이며,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 황소에게 붉은 천을 흔드는 것처럼 움직이는 공격 대상은 부신 피질의 분비물의 흐름을 자극해서 말하자면 새로운 혈액 조건에 의해 화의 본능이 일어난 것이다. 의도적인 용기의 경우에는 본능 이상의 것이 있다. 결단의 행위, 의지의 표현이 있다. 부신 피질이 없다면 그러한 용기는 불가능하며, 용기에 대한 영예는 주로 뇌하수체 전엽에 돌려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그 분비물과 적절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부신 피질은 진정한 용기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용기 있는 행동들은 뇌하수체 전엽 형의 개인들에게서 대부분 발견되고 있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 p. 177.


7. 생식선- 위치, 하복부-분비, 정소와 난소의 분비물
생식선 또는 간질성 분비선interstitial glands은 외분비의 성선들이지만, 내분비물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많은 분비물은 생식을 위한 수단이다. 생식선이 개성에 미치는 영향을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다. 성적 충동과 그 육체적 정신적인 다양한 부수 효과는 잘 알려져 있고, 연구되어 있는데, 이는 주로 남용과 금지에 대한 것이며, 인류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육체적,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인간의 반응을 모두 성과 관련짓거나 성에만 관련지우는데 우리는 모든 극단적인 주장 배후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성이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동양적 지혜는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고, 에너지 센터들과 분비선들과의 관계를 살펴 볼 때 그에 대한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앞서 설명한 모든 것과 이 주제에 대한 많은 책들과 논문들 중에서 다음의 것이 아마 간단한 요약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제는 모두 실험 단계에 있고, 많은 실험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분비선과 그 기능의 유사성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대부분은 신체 대사와 성장에 연결되어야 하며, 그 모두가 성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그들은 개성의 형태와 기질을 결정한다.

과학이 실험적이기 때문에 사람은 정신분석이 이루어져야 이해될 것처럼 보인다. 감정과 정신적 개념이라는, 파악하기 힘들고, 감지할 수 없는 과정은 물질에 의해 설명된다. 분비선과 신경계, 그리고 접촉 장치와 반응 장치의 발전과 기능의 정도로 현재의 모든 상태가 귀착된다. 성자를 죄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죄인을 성자로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단지 특정한 내분비물의 증감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갖고 나오는 장치보다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그 메카니즘이야말로 사람의 총합이다. 그는 그것을 증진시킬 수 있거나 남용할 수 있지만, 그 장치가 결정 요소이다. 자유 의지는 종식되고 불멸성은 부정된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이 행복한 것처럼 행동하고 또한 다음 세대가 심령적으로 더 잘 태어날 수 있도록 더 좋은 몸을 형성하는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런 결론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모든 연구 대상의 메카니즘과 함께 완벽한 몸이 구성될 수 있고, 따라서 결국 완벽한 심령적 본성이 작용할 수 있는 도구들이 될 수 있는 법칙과 방법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최소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내분비선에 대한 이 모든 결론들이 사실상 올바른 것일까? 개략적으로 분류하고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개요에 공백을 채우는 것만이 남아 있는 것일까?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의문 속에 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우선 개인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개인에 있어서는 분비선과 분비 기능이 기본적인 원인일 것인가 아니면 효과 또는 도구적 성질만을 갖을 뿐인가? 사실 그 너머에 있는 더 큰 원인이 되는 것은 없는가? 모든 물리적이고 심령적 메카니즘을 통해 작용하는 어떤 혼이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지 않을까? 성 바오로가 사람은 자연적인 몸과 영적인 몸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자연의 영광이 하나이고 영의 영광이 다른 하나라고 암시했던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그리고 더 일반적인 두 번째 질문에서 단순한 메카니즘이 실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고 우리의 유일한 길잡이 별은 그 메카니즘을 완성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 “내일 죽으니까 먹고 마시도록 하자” 우리 내면에는 영혼, 혼, 등등으로 불리는 미세한 자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나 에머슨이 말하는 상위혼(Oversoul) 또는 어떤 다른 이름의 초월적인 전체의 일부를 형성하는 자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결코 그것과 하나되지(at-one: 속죄되지) 못하지만, 그 대신에 그 하나됨(at-one-ment: 속죄)에 대한 열망이 우리를 전진시키는 것인가? 썩지 않는 것이 썩는 것을 입는 것일까 또는 필멸은 불멸을 입지 못할까? 죽음은 극복되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동양의 지혜를 살펴 보기로 하자.

혼과 그 메카니즘: 3장 에텔체의 이론
제 3장 에텔체의 이론

동양의 심리학자들은 서양 심리학자들이 가정이라고 간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영적인 본성을 강조하여 물리적인 본성 자체는 영적인 활동의 결과라고 믿는다. 그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내적인 주관적 에너지가 외적으로 현현한 것일 뿐이라고 믿는다. 그는 우주적이고 인간적인 메카니즘 전체를 결과로 간주하며 과학은 그 결과만을 다루고 있다고 믿는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에너지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모든 형상에 스며들어 운동하게 하는 자로, 이른바 에테르와 유사한 어떤 실체를 통해 작용한다. 물질은 가장 거친 형태의 에너지 또는 영혼이며, 영혼은 가장 승화된 상태의 물질이다.

2. 모든 형상에는 이 에테르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형상은 에테르 형체 또는 에텔체를 갖고 있다.

3. 작은 원자가 음의 측면과 아울러 양의 원자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모든 에텔체에는 음의 물질 한가운데에 양의 에너지 센터들이 존재한다. 인간은 또한 음적인 육체에 대비되는 양적인 에텔체를 갖고 있다. 그것은 육체를 활동적으로 활성화시키고 존재 상태를 유지하도록 통일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4. 사람의 에텔체는 심령적 활동을 일으키면서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가 흐르는 7 가지 주요 에너지 핵들을 갖고 있다. 이 핵들은 뇌척추계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심령적 활동의 기초 또는 혼은 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지배적인 원리는 머리에 있으며, 이 센터로부터 모든 메카니즘이 지시를 받으며, 다른 6 가지 에너지 센터들은 이를 통해 에너지를 받게 된다.

5. 특정한 센터들만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는 상태에 있으며, 나머지는 정지되어 있는 상태이다. 완성된 사람 안에서는 모든 센터들이 완전히 작용하여 완벽한 심령적 전개와 완벽한 메카니즘을 만들어낸다.

영적 에너지에 대해 동양에서 강조하는 것과 구조 또는 메카니즘에 대해 서양에서 강조하는 것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상위 국면과 하위 국면에서 모두 사람의 심령적 본성을 완전히 설명한다.

동양적 생기론적 착상과 서양적 또는 기계론적 착상을 결합시키기 위해 그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면 에텔체의 존재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동양적 체계는 난해하고 복잡하며 요약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단한 소개가 이루어져야만 하고 그래서 다음의 개요를 제시한다. 그것은 불완전하지만, 그 분야의 지적인 개관이 된다면, 아무리 간단할지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개요를 제시할 때 우리는 “동양의 심리학자가 믿는다” 또는 “동양주의자가 말한다” 또는 유사한 표현을 계속 반복하는 대신에 긍정적인 진술을 할 것이다. 서양적인 사고에는 그것이 실험을 통해서 입증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반증된 것으로 기각되는 하나의 가설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소개와 함께 우리는 동양의 이론을 요약할 것이다.

모든 것의 원천인 보편적인 본체가 있지만, 매우 순화되어 있고, 미세해서 인간 지성이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다. 그것과 비교하면, 매우 미묘한 향기, 춤추는 태양빛의 발광, 진홍빛 일몰의 영광조차도 거칠고 현세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빛의 거미줄”이다.

물질성을 암시하는 “본체substance”라는 핵심어는 오류어misnomer이다. 그러나 이 단어를 라틴 어원으로 환원해 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즉 “sub”는 아래이고 “sto”는 서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체는 아래 쪽에 서 있는 것 또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sub-stans(본체)”라는 철자 또는 오철자가 보다 더 직설적이고 시사적이다.

이 보편적인 본체가 미세하고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에서 물질보다 훨씬 더 밀도가 높다. 만약 우리가 모든 사실과 가능성에 반하는 가설인 보편적인 본체 밖에서 동인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외적인 동인이 보편적인 본체를 압축시키거나 다른 식으로 외부에서 영향을 미친다면, 본체는 이미 알려진 물질보다 더 밀도가 높을 것이다.

생명, 중단 없는 생명은 본체에 내재하며 그의 영속적인 대응물이다. 생명과 본체는 동일한 하나이고,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하나이지만, 한 실재의 상이한 측면들이다. 생명은 양전기와 같고 본체는 음전기와 같다. 생명은 동적이고 본체는 정적이다. 생명은 활동성이나 영혼이고 본체는 형상 또는 물질이다. 생명은 낳아주신 아버지이고, 본체는 품어주신 어머니이다.

생명과 본체의 이러한 두 측면에 더하여, 세 번째 것도 있다. 생명은 이론적 또는 잠재적인 활동성이고 작업장을 필요로 한다. 본체는 이것을 제공하고 생명과 본체가 결합하면 활동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킨다.

그래서 단일한 실재, 즉 보편적인 본체가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공존하는 이원성, 즉 생명과 본체가 있으며, 그와 동시에 공존하는 삼개조, 즉 생명, 본체, 그리고 이른바 의식 또는 혼의 상호작용이 있다.

현현된 세계 전체는 에너지(그리고 공통 인자인 본체와 의식)로부터 나온다. 극히 작은 모래알로부터 별이 빛나는 하늘의 웅대한 회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프리카의 원시인으로부터 부처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모든 것은 에너지의 산물들이다. 물질은 가장 조밀하거나 가장 낮은 형태의 에너지이다. 영혼은 이와 같이 가장 높거나 가장 미세한 형태의 에너지이다. 그래서 물질은 하강하고 하락한 영혼이고 거꾸로 영혼은 상승하고 영광이 더해진 물질이다.

밀도를 취할 때 에너지는 7 가지 단계 또는 계들을 거쳐서 하강한다. 대개의 경우 그 중에서 세 가지를 구현하는데, 사람은 육체, 감정적 메카니즘 그리고 심체mind-body를 갖게 되어 결국 세 가지 국면에서 기능하게 되거나 세 가지 계에서, 즉 물리계, 감정계 그리고 멘탈(mental: 정신)계에서 깨어 있게 된다. 그는 네 번째 이상의 요소, 즉, 혼, 자아Self를 인식하게 되는 경계에 서게 되고 그 이후에는 그것의 실현을 위해 깨어 나게 될 것이다. 세 가지 상위 계들에 대해서는 이 기본적인 논의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7 가지 계들과 아울러 각 계에는 7 가지 하위계가 있다. 우리는 가장 낮은 물리계의 7 가지 하위 계만을 논할 것이다.

물리계의 세 가지 하위 계들은 모든 학도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고체, 액체 그리고 기체로 예를 들면, 얼음, 물 그리고 증기이다. 그에 더하여 네 가지 더 미세한 계들 또는 매우 다른 4 가지의 에테르가 있다. 이들 네 가지는 잘 알려진 세 가지 하위 계와 각각 공존하고 있으며, 거기로 침투한다.

사람의 육체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도 또한 에테르적 대응물, 즉 에텔체를 갖고 있다. 거친 육체가 음인 반면, 이것은 양이다. 에텔체는 응집 인자이며, 생명과 존재 안에서 육체를 유지한다.
사람이건 어떤 물건이건 에테르적 대응물은 보편적인 본체, 보편적인 생명, 그리고 보편적인 에너지의 성질을 띤다. 그것은 이 모든 것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족적이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보편적인 에너지의 저장소이며, 에테르적 대응물 속에서 살며 움직이고 존재한다. 에너지는 그래서 에테르적 대응물을 통해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의 경우도 참이다. 보편적인 에너지는 그의 에텔체를 통해 작용한다. 그리고 사람이 7 가지 계들에 존재하는 것처럼 에텔체에는 에너지와 7 가지 접촉하는 지점이 있지만, 세 가지 계들만이 활동적이고 네 가지는 휴면 상태인 것처럼 세 가지 에너지 센터들만이 완전히 발전되어 있고 네 가지는 아직 발전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룬다.

서양 과학과 동양 이론을 조화시킬 때, 이 둘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자연히 제기된다.

다름 아닌 아이작 뉴톤 경과 같은 과학자는 의심 없이 에테르라는 보편적인 매질을 받아들인다. 프린키피아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모든 탁한 체들 속에 가득 차 있고 숨어 있는 대단히 미세한 어떤 활기에 관련된 것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활기의 힘과 활동에 의해 체의 입자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견인하고 연속적이라면 뭉친다. 그리고 이웃하는 전기체들은 이웃하는 미립자들을 견인하는 것만큼 잘 반발하며 먼 거리 사이에서도 작용한다. 그리고 빛이 방출되고, 반사되고, 굴절되며 굴곡이 생기면서, 체들을 타격한다. 그러면 온통 동요가 일어나고 동물적 몸의 구성 부분들이 의지의 명령, 이 활기의 파동에 의해 외부적인 감각 기관으로부터 뇌에까지, 그리고 뇌로부터 근육으로 신경의 견고한 통로를 따라 상호 유도되면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들은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전기적이고 융통성있는 생기의 작용 법칙을 정확하게 결정하고 입증하는 데에 요구되는 충분한 실험을 우리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에드윈 어서 버트 박사, 현대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들, p. 275.


위의 인용으로부터 뉴톤은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형상을 밑받침하는 에텔체의 진상을 인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뉴톤이 현 세기 이전에 살았기 때문에 최근 판 브리태니카 백과사전(1926)으로 눈을 돌려 보자. 다음 설명은 “에테르”라는 제목 아래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공간이 단지 기하학적 추상물인지 또는 연구될 수 있는 명확한 물리적인 속성을 갖는 지는 이러저러한 형태로 논의되어 왔다. 물질에 의해 점유되는 부분과 마찬가지로 본체는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어떤 의심도 없다. 그러나 감지할 수 있는 물질이 부재한 공간에서 매개하는 부분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물리적인 속성도 갖고 있으며, 그에 대한 충분한 연구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셈이다.

“이 물리적인 속성들은 감각에 직접 미치지 않고, 그래서 좀 모호하다. 그러나 이것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현재 의문이 없다. 공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물리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공간이 기하학적 추상물 이상의 그 무엇이고 실제적인 현실처럼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거기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당하다. 이름이 중요하지는 않지만, 오래 전에 에테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은 아이작 뉴톤에 의해 채택되었고, 현재도 적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테르라는 용어는 모든 공간에 차 있고, 어디에서나 어떤 분열이나 공백이 없는 진정한 일체이고, 편재하는 물리적인 실재를 뜻하며, 물질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구성한다는 인식이 증가해 가는 추세이다. 물질 자체는 이로부터 변화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래서 에테르는 물질 조각과 조각들 사이에서 이른바 중력을 전달하기 위해 필수적이고 아무리 작고,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물질 조각들 사이에서 방사되는 파동을 전달하는 일반적인 목적을 위해서 훨씬 더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에테르의 속성은 물질로 표현될 수는 없다. 하지만 더 좋은 단서가 없기 때문에 비유를 통해 말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물질이라면,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물체처럼 이름이 붙여져야 하고, 탄성과 밀도로 표시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을 통해 실제로 표현되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높다고 보이는 것처럼 원자 물질이 에테르 속에 있는 어떤 구조라면 에테르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알려진 물질적 본체보다 훨씬 더 밀도가 높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물질은 본체를 이루는 매질 속에서 존속하고 있는 상대적으로 섬세한 구조이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제 13판: 에테르 항목


이 견해는 다른 과학자들이 부연하고 있다.

17 세기의 저작에서 버트 박사가 인용한 캠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 헨리 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가 철학자에게 영적인 본체가 자연에 존재하는지 묻는 것이 필요할까? 이 본체가 몸의 모든 기질, 또는 적어도 동작, 모습, 장기의 위치와 같이 몸의 대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한편...이 본체가 몸을 제거하고 중단시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움직임에 관련되는 것은 무엇이건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작은 부분을 결합시키고, 나누고, 흩어놓고, 묶고 형성시킬 수 있고, 형태에 질서를 부여하고 배치된 것을 회전시키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움직이고 그 회전 운동을 저지하고, 원리에 따라 빛, 색, 그리고 다른 감각 대상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추가할 수 있다... 영적인 본체는 마지막으로 끈도 없고, 갈고리도 없고, 영사기나 다른 도구도 없지만 다만 자신을 적응시켜, 물질을 결합시키고, 나누며, 추진시키며, 동시에 조절을 유지하는 신기한 응집력과 분산력을 갖는다. 그것이 자신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을 분쇄하여 그 자신을 다시 확장하는 것 같은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무어를 논하면서 버트 박사는 계속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무어는 인간 안에 영적인 본체가 있다는 결론으로부터 모든 자연 안에 이와 유사하고 더 거대한 영적인 본체가 있다는 가정으로 자신의 추론을 확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연의 사실들은 인간보다 더 간단한 기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에드윈 어서 버트, 현대물리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들, pp. 131-132.


또한 17 세기 저작에서도 로버트 보일은 동일한 가정을 제시하면서, 에테르의 두 가지 기능을 연속적인 충격에 의해 운동을 전파시키고 자아와 같은 신비한 현상을 발생시키는 매질이라고 생각했다. 보일은 이렇게 말한다.

“우주에 그러한 본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현상들을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몇 가지 실험에서 매우 미세하고, 확산되지 않는 에테르적 본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소에 대한 설명에 대해 여러 가지 정확한 답이 내려져 있다고 해도, 이에 대해 살펴 보지는 않겠다.” 상동, pp. 182, 183.


현대로 다시 돌아와, 윌리엄 버겟 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주는 동물과 식물의 전 영역을 차지하는 조직화된 활기의 세계, 즉 지성과 물질 세계 사이의 연결 고리인 물리적, 생기적, 그리고 지적인 현상의 집합으로 나타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가사의하지만, 물질의 분자 간 운동은 물리적인 것과는 다른, 매질의 성질에서 기원한다. 이것은 생명 없는 물질 운동을 통제하는 일반 법칙을 대체하고, 간섭할 수 없는 법칙에 기원하지 않는 운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동일한 원리에서 힘이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윌리엄 버렛 경, 보이지 않는 것의 입구에서, p. 274.


동양의 가르침은 생기체를 육체와 지성체 사이의 매개라고 간주한다. 그것은 태양계에서 인간의 마음과 우주심의 매개자로 작용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윌리엄 버렛이 말한 “물리적, 생기적 그리고 지성적”인 세 가지 항목을 언급하는 것은 흥미있다

올리버 롯지 경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소통에 대한 견해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순수과학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이 시대의 전선에 서 있다. 그는 말한다.

“원자를 결합시키는 에테르, 즉 몸의 특징적인 구성에 본질적인 결합 에테르는 어떠한가, 어떤 것이 물질 자체만큼 근본적인가?

“우리는 대개 몸의 에테르 측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 기관을 갖고 있지 못하며, 물질을 직접적으로 파악한다. 어린 시절에는 물질만을 파악한다고 해도, 성장하면서 에테르를 추리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파악하기도 한다. 우리는 특징적인 외형이나 어떤 외형적인 몸도 응집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즉 에테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테르는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비물질화된 부분, 즉 변형이 일어나는 부분이며, 잠재적인 에너지의 그릇, 물질 원자들이 들어 있는 본체이다. 물질로 구성되는 몸이 있을뿐만 아니라, 에테르로 구성되는 몸도 있다. 둘은 공존하고 있다.” 올리버 로저 경, 에테르와 현실, pp. 161.162.


그는 히버트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다시 동일한 주제를 거론하고 있으며, 매우 재미있고 시사적인 결론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고 있다.

“빛은 에테르가 미치는 영향의 일종이다. 빛이 에테르와 맺는 관계는 소리가 물질과 맺는 관계와 같다... 모든 시공의 법칙에 따르고, 주로 지상의 에너지 근원인 에너지 법칙에 완전히 지배되며, 물리적 힘이 현현되는 것을 모두 다스리고, 탄성과 견인 등 모든 물질의 속성의 근간을 이루면서 물리학의 계획표 안에 에테르는 적합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수정된 에테르의 전위들이 우주적 건설재라고 입증될 가능성이 있다... 무차별적인 에테르는 대단히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물질적인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그리고 온 공간을 채우는 일체이다. 이원성은 물리학의 도식인 물질과 에테르를 통해서 나타난다.

“모든 동역학 에너지는 원자든 육체적 형태든 이른바 물질에 속해 있다. 운동이나 이동은 그것의 특징이다. 모든 정적인 에너지는 에테르, 수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에테르에 속한다. 에너지는 항상 이쪽에서 저쪽으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즉 에테르에서 물질로 또는 그 역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모든 일이 일어난다.

“이제, 모든 감지할 수 있는 대상은 물질적인 대응물과 에테르적인 대응물을 모두 갖게 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전자만을 감각적으로 알고 있지만, 후자는 미루어 짐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 다른 측면을 파악하는 어려움, 간접적인 추론의 필요성은 우리에게 물질을 알려 주고 에테르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는 감각 기관의 본성에 본질적이고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만큼 생생하고 실제적이며 공존과 상호 작용은 본질적으로 결합하는 그들의 성질이다. 모든 곳에 그리고 언제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에테르 없는 지역은 없다 하더라도 많은 지역에는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가능성과 실재성은 모든 곳에 퍼져 있으며, 현세적인 경험 전체를 완전하게 구성한다.”

보충설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에테르는 사물의 물리적인 틀에 속하며, 그것이 심령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물질이 그런 것처럼 심령적 목적을 보조할 것이다. 테이트 교수와 밸포어 스튜어트 교수는 1875년 이전까지 공간의 에테르에 대한 심령적 의미를 추측했고, 보이지 않는 우주라는 책에서 비판된 종교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다루었다. 그리고 위대한 수리 물리학자 제임스 크러크 맥스웰은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의 제 9판 “에테르” 항 결론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초감각적이고 보편적인 연결 매질이 실제로 존재하며 확실한 기능을 갖고 있다는 신뢰를 표명하였다.” 올리버 롯지 경, 에테르, 물질 그리고 혼, 히버트 저널, 1919년 1월.


펜실배니어 대학의 내분비학 교수인 사져스 박사는 이 보편적인 매질에 대한 신뢰를 다음과 같은 말로 확언했다.

“에테르와 같은 본래의 지성적이고 협동적이며 창조적인 매질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분명해 보인다...

“과학자들이 해석하는 에테르는 모든 조건들을 만족시키고 만족시킬 수 있는, 과학적으로 알려진 유일한 매체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모든 물질에 스며들어 있으며, 파의 움직임에 의해 우주에 제한 없이 모든 공간에 퍼져 있다. 그것은 실제로 태양과 가장 멀리 떨어진 항성에서 오는 빛의 방사 에너지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선’파, 무선 전파, 베크렐 광선, 엑스 또는 뢴트겐선 등을 전달하는 매체이이다.

“에테르는 우주와 지상에서 창조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에테르는 협동과 지성으로 물질을 만드는 것처럼 우주의 에테르는 태양계를 만들고, 그것이 형성하는 모든 화학적 원소들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속성들을 제공한다...” E. de M 샤스 사져스. 의학박사, ScD. LLD, 과학에 의해 제시된 종교의 힘, pp. 152, 153.


옥스퍼드 대학의 조아드 박사는 물질을 활기있게 하는 이 생기력, 즉 ‘생명력’의 활동을 우리에게 그려 주며 생명과 형상 사이의 관계를 보여 준다. 그는 진정 에테르의 대응물과 그를 통해 작용하는, 동양적 에너지 이론에 근접해 있다.

“생명력. 우선 우주가 순전히 물질적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에너지나 목적이 없고 생명이 없는 혼돈, 죽음, 그리고 공허였다. 어떤 단계에서 이 무기적인 우주로, 그리고 어떤 설명되지 않는 근원으로부터 생명의 원리가 도입되었다. 나는 물질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생명을 통해 의도한다. 처음에는 맹목적이고 뒤뚱거리고 순전히 본능적인 충동이나 기분으로 더 높은  의식을 얻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스스로를 표현하려고 한다. 우리는 완전하고 보편적인 의식의 성취라고 할 수 있는, 생명력의 궁극 목적을 이해할 수 있고, 그 결과는 생명과 에너지가 온 우주에 스며듦게 함으로써 보장될 수 있고 이것은 ‘물질’ 세계로서 시작한 것이 ‘마음’이나 ‘영혼’의 세계로서 완성되게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에너지와 생명의 원리가 물질에 주입되고 스며들면서 물질 속에서 그리고 물질을 통해서 일한다. 우리는 그렇게 주입된 물질에 살아 있는 유기체의 이름을 부여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그 목적이 성취되면, 그것을 지원하기 위해 생명력이 창조한 도구 또는 무기의 빛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주 그 자체처럼 살아 있는 각각의 유기체는 전선이 전류를 담을 수 있는 것과 흡사하게 생명에 의해 활기를 받은 물질의 토대를 형성한다.

“생명력은 전능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정복하려는 물질에 의해 제한되고, 그 방법은 실험적이며, 그에 의해 창조된 유기체로 구성된 사람들 속에서 그것이 도달하는 진화 단계에 따라 변화한다. 다른 형태의 존재들은 다른 단계들에서 그 목적에 가장 잘 봉사한다.” C. E. M. 조아드 박사, 마음과 물질, pp. 178, 179.


철학적 주제에 대해서 가장 폭넓게 읽히고 인기있는 작가인 윌 듀런트는 이렇게 말한다.

“물질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것이 기본적이라는 생각을 점점 덜 하게 되고, 육신이 생명과 마음의 외부적 징표인 것처럼 단지 에너지가 외화된 것일뿐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된다... 형상과 힘을 주는 물질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자발성과 생명을 갖는 비물질적인 것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미세하고 숨겨져 있지만, 항상 드러나는 생명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의 궁극적 정수이다... 생명은 우선하며 내적이다. 물질은 논리상, 그리고 의미 상 시간적으로 그와 동시적이고, 공간적으로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본성 상 그것에 이차적이다. 물질은 생명의 형상이고 그의 가시적 성질이다...

“생명은 형상의 기능이 아니고, 형상이 생명의 산물이다. 물질의 무게와 굳기는 원자 내적 에너지의 결과이고 표현이며 몸 안의 모든 근육이나 세포는 주조된 욕망의 도구이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p. 66, 67, 80, 81.


이 책들과 과학자들은 에너지 또는 생명의 생기체의 매질인 에텔체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이 신비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의 모호한 꿈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서양 연구가들에 의해 자연의 사실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의 견해를 요약하면서 이들을 다음과 같이 공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인 몸 뒤에는 에테르 물질로 구성된 주관적인 형태가 있으며, 이는 에너지, 또는 프라나의 생명 원리의 행위자로 작용한다. 이 생명 원리는 혼의 에너지 측면이며, 에텔체를 통해 혼은 형상에 활기를 부여하고, 특이한 성격과 속성을 부여하고 욕망들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마음의 활동을 통해 그것을 지휘한다. 머리를 통해 혼은 몸을 의식적인 활동으로 동력화하고 심장을 통해 신체의 모든 부분들에 생명이 퍼지게 한다.

이 이론은 서양의 물활론과 밀접한 상관성을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현재로써는 활력론(animism: 정령론)이라는 용어로 충분하지만, 인간 의식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발전들 때문에 “물력론(dynamism)”이라는 용어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 완전히 의식적인 존재가 된 사람과 통합되어 작용하는 개성에게, 의식적인 목적과 지도하는 의지를 처음으로 증명하는 때가 되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 언급된 물리적, 감각적, 정신적인 인간 본성의 세 가지 상태들은 인류사에서 비로소 통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휘하는 자아는 조절할 수 있으며, 마음을 통해 생기체 또는 에텔체에 작용하고, 뇌에서 그 접촉점을 갖으면서 그 도구를 완전히 조절하여 표현하고 이어서 창조적인 활동을 지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키설링이 “심오한 존재”라고 부른 것이 출현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문제는 심오한 존재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우리가 인간의 능력과 대조되는 특성으로 그의 존재성을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생생한 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존재가 결정한다고 말하는 경우, 그 모든 언설들에 개별적인 생명이 침투해 있다는 것, 모든 개개의 표현은 개성을 발산한다는 것, 그리고 이 개성은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러한 통찰은 그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실제로 성취될 수 있다. 그것은 마음과 혼을 지닌 존재로써 인간이 그 안에서 자신의 의식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감각 연관으로 표현된다는 사실 덕택에 가능하다. 그는 자유롭게 자신이 즐겁게 여기는 곳은 어느 것이나 중시할 수 있다. 그래서 중시하는 ‘위치’에 따라서 심령적인 유기체는 그 센터를 실제로 변화시켜서 새로운 존재의 센터를 얻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센터가 존재 안에 놓이는지 표면에 놓이는지는 의식의 센터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론적인 연구가 보여 준다면, 필요한 변화 과정을 유도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그 존재를 향상시키는 데에 성공할 수 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성에만 지속적으로 강조를 두고 실제로 자신의 내적 존재와 일치할 것만을 지속적으로 요구받는다. 분명 이 과제는 어려운 것이다. 그 해법은 매우 느린 과정일뿐만 아니라 특별한 훈련 기법을 필요로 한다.” 허먼 키설링, 백작, 창조적인 이해, pp. 180, 181.


메카니즘, 생명과 목적, 의지의 종합으로써 인간이 혼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서양과 동양의 심리학자들이 연합해서 분비샘과 생기체, 그리고 에너지 센터들과의 관련성을 연구하고 이해한다면 크게 촉진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와 관련해서 호킹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

“건전한 정신 건강법의 도움으로 보다 나은 인류의 구체적인 미래를 바라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돌팔이 의사의 시대가 지나간 뒤에 그리고 어느 정도 그들의 도움으로 요가와 같은 수련의 영적인 의미가 서양 심리학의 건전한 요소들과 온전한 윤리 체계와 결합함으로써 자아 완성의 가능성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들 중 어떤 것도 다른 것이 없이는 가치가 많지 않을 것이다.” Wm. E. 호킹, 몸과 자유, p. 75.


에너지 센터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을 자세히 설명하기 전에 두 가지 점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는 혼의 본성에 대한 고찰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세기 동안 이루어진 혼 의식의 위치에 대한 증언을 고찰해 보는 것이다.

제 4장 혼의 본성과 그 위치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혼은 논의와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고 이를 정의해 보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이것은 여러 시대 동안 최고의 지적 관심 거리이자 모든 종교와 철학의 주요 주제였으며, 여전히 그러하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혼에 대한 수 천년의 증언이 실제로 어떤 기초를 갖고 있어야만 하고 자연히 하나의 사실일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히스테리나 노이로제와 병적인 환상과 경험에 기초한 추측을 배제하면 인류에 의해 부정되지 않고 확인을 보증하는, 건전하고 훌륭한 사상가,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들로부터 나온 증언과 추론 구조의 잔여물이 남는다.

리처드 뮐러 프라인펠스 박사는 “혼에 대한 인간의 신앙사를 쓰기 위해서는 인류사 전체를 쓰는 것과 같은 시간이 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리차드 프라인펠스 뮐러, 혼의 신비, p. 24.

이 문제는 아메스 교수가 잘 요약해 놓았다.

“한 쪽에는 자아 또는 혼이 생각과 함께 있고, 다른 쪽에서는 대상, 즉 사람들과 신의 세계가 있다. 수 세기 동안 현자들은 자아와 대상 사이의 틈을 넓히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머리 속에는 사상이, 외부에는 사물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함께 머리 속의 상상들이 외부에 있는 대상에 대해 참이라는 것을 보증할 수 있는 확실한 연결 통로는 전혀 없었다. 이 해협의 양측에 일군의 철학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자아 쪽에 서 있는 관념론자들은 자신들의 앎에서 분리했던 실재에 이르려고 자신들을 확장시켰지만 헛된 것이었다. 반대 쪽에서는 유물론자들이 자아를 무시하거나 그것이 환영 또는 물리적인 세계로부터 유출되는, 숨이나 안개 같은 수반현상이라고 간주했다. 이른바 이원론자들은 실재가 심령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각자 그 위치를 인정하여, 마음이 어떻게 그 자체로부터 기인하면서, 그렇게 다른 객체로 가는지, 또는 객체가 어떻게 그 자체일 수 있고 파악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에 적절히 답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스크라이브너, 아메스 시카고 대학 철학 교수, 종교, pp. 127-128.


혼에 대한 정의를 몇 가지 살펴 보고자 한다. 이들은 수많은 정의에서 취합한 것이다. 정의와 설명에서 매우 분명한 일치가 있다. 웹스터 사전에는 몹시 흥미로운 어구로, 매우 정확하게 동양 지혜의 관점에서 혼을 정의하고 있다.

“개별 생명, 특별히 심령적인 활동에서 나타나는 생명의 본질, 본체, 또는 동인으로 생각되는 실체. 개별적인 실존의 매체, 몸과 본성상 분리되어 있고, 실존상 분리될 수 있다.”

혼의 본성에 대해 다른 해석을 살펴 보면 세 가지 관점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웹스터 사전에 잘 요약되어 있다.

“첫째, 혼은 실체 또는 주체로 다루어지고 특히 사람의 의지적인 사고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몸을 통한 경험의 주체이다. 그것은 마음이 아니고, 사고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둘째, 혼은 마음 또는 의식적인 경험과 동일시된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 관념론자들의 일반적인 이해이다.

“셋째, 혼은 뇌의 작용 또는 기능들의 총합이다. 그래서 피에르 J. G. 카바니스(1757-1808)는 위가 음식을 소화하듯 뇌는 사고를 분비한다고 가르쳤다.”

웹스터는 현재 사고의 적용 경향을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페히너의 이해처럼 혼은 단일한 전체, 즉 단일한 몸의 과정 전체와 결합되는 영적인 과정으로 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관점 사이에 서 있다.” 웹스터 사전, 1923년 판

무엇보다도 불교도가 강조하는 “숭고한 중도”는 다음 세대를 위해 극단적인 입장에서 벗어나는 길을 취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혼이 신의 광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특이하고 유체같은 화합물을 통해 움직인다. 인도인들은 사람의 혼이 불변의 원리, 세계혼, 우주혼anima mundi, 우주 도처에 퍼져 있는 에테르Akasa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이 에테르는 단지 특별한 형태의 에너지를 지휘하는 자이고 본질적인 영혼과 감각적인 물질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매체로 작용할 뿐이다.

동양과 서양 철학을 연결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했던 피타고라스는 동일한 가르침을 주었다. 중국에서 노자는 영적인 혼은 반물질적인semi-material 생기있는 혼과 결합되며, 그러는 가운데 육체를 활기있게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정신적인 능력을 지닌) 혼은 몸과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로마인들은 혼이 영적인 혼, 지성적인 혼 또는 마음, 그리고 생기체로 구성되는 삼개조라고 간주했다. 테오프라스투스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열정의 참된 원리”로 간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스토아 학파는 프노이마(pneuma: 영, 정신)라는 생기의 원리 또는 생기의 발전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유포시켰다... 프노이마의 도입과 함께 인간 개성의 몸, 혼, 영이라는 3원론이 시작되었고, 이것은 신학자들의 사색 속에서 탁월하게 형성되었다. 혼 또는 심령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개념으로... 즉 한편으로는 생리학자들의 활력vital force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 또는 인간의 비물질적 혼으로 분화되었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권, pp. 53-54.


그렇게 스토아학파는 동양 철학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가르침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벌어진 틈에 다리를 놓았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혼의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혼이 세 부분을 지닌다고 믿었다. 하나는 신으로부터 오는 불멸 또는 합리적인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몸에 속하는 식욕과 감각의 자리인 필멸의 동물적 또는 감각적인 부분이다. 세 번째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으면서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의지 또는 영혼으로 이를 통해 이성은 욕망을 정복한다. 식물은 최하위 부분을 갖고 동물은 두 가지 하위 부분을 갖지만, 합리적인 부분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다.

이 이성적인 혼을 그는 본성상 감각에 의해 파악되지 않고 오직 지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비물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필멸의 몸과의 결합은 장구한  생애 동안에 나타나는 사건 중에서 사소한 것일 뿐이다... 플라톤은 그래서 혼과 몸을 기본적으로 구별했다.” 상동. p. 35.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을 생기vital 원리들의 합으로 간주했고 존재가 몸에 대한 것은 시각이 눈에 대한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혼은 육체 내에 있는 진정한 존재였으며, 플로티누스는 그에게 동의했다. 그는 혼을 물질보다 더 높은 존재에 속하는 육체의 살아 있는 지각력으로 간주했다. 터툴리안은 성 그레고리가 했던 것처럼 혼을 생기 원리와 합리 원리,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대부분의 동양 학파들은 혼을 자아, 즉 개체로 간주했고, 기독교 신비주의는 “내면의 그리스도”인 그의 부름과 그의 현존에 의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상태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잠재력이 각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성 바울의 가르침과 연결된다. 기독교와 동양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비교하면 자아, 혼, 그리스도라는 용어들이 동일한 존재나 의식 상태를 내포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하는 주관적인 실재를 가리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혼에 대해 그리스인의 사고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뒤에 영지주의와 마니교에 의해 윤색되었다. 그들은 혼은 빛으로 몸은 어둠으로 간주했다. 빛은 몸을 비춰서 결국 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4 세기의 성 그레고리는 성 바울이 했던 것처럼 몸, 혼, 영이라는 몸의 삼중성을 강조했다. 그는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사상가들의 관점을 자신의 가르침에서 요약하였다.

“혼은 부분을 갖지 않지만, 그레고리는 영적인 능력, 감각적인 능력, 그리고 이성적인 능력을 구분해서, 몸, 혼 그리고 영에 대응시켰다. 이성적인 본성은 몸의 모든 부분들에 동등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상위 본성은 하위 본성을 매체로 사용한다. 물질에는 생기력이 들어 있으며, 생기력에 감각력이 거주하며, 감각력에 이성력이 결합된다. 감각적인 혼은 그래서 매체이며, 육신보다는 순수하고 이성적 혼보다는 탁하다. 그래서 몸과 결합된 혼은 모든 활동의 진정한 원천이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권, p. 88.


5 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파들이 혼에 대해 사고를 전개했다. 스콜라학파, 아랍의 철학자들, 카발라 연구가들, 중세의 철학자들, 그리고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던 일군의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혼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논했지만, 많은 진보를 이루지는 못했다. 왜냐면 모두가 서서히 현대 과학의 출현, 현대 의학의 수립, 그리고 전기 시대의 출현을 향해 점차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자연의 형태 측면과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관심을 끌면서, 혼과 그 본성에 대한 사색이 신학자들에게 점차 이관되었다.

17 세기에 슈탈은 혼을 주제로 글을 썼고, 당시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가르침을 요약했다. 이것을 애니미즘 이론(Theory of Animism: 활력론: 혼이 생명에 원천이라는 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혼이 생명 원리이며, 모든 유기적 발전의 원인이 된다는 학설이다. 애니미즘이라고 하면 자연의 힘들을 인격화하고 숭배했던 진화가 덜된 종족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슈탈이 요약한 애니미즘은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존재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힘과 에너지, 원자에 대한 현대 과학자들의 가르침을 연구하면서 부정할 수 없는 에너지의 세계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 힘들에 의해 움직이는 우주에 살고 있다. 속도, 활동, 활기, 이동, 소리 전달, 전기 에너지, 그러한 많은 말들은 오늘날 표제어가 되어 있다. 우리는 힘에 대해 말하고 생각한다.

슈탈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가르침을 요약했다.

“몸은 혼을 위해 만들어졌지 혼이 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 산물이 아니다... 모든 생명 운동의 원천은 혼이다. 이것은 몸의 기관을 구성하고 있으며, 외적 영향에 대해서 잠시 그것을 유지한다...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질병이 아니라, 심각한 외상에 의해 작동할 수 없게 되거나 더 이상 그것을 작동시키지 않겠다고 선택했기 때문에, 혼이 몸의 기관을 떠나는 직접적인 행위 때문이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69.


버클리의 혼에 대한 정의는 재미있다. 왜냐면 그는 경험을 통해 그것을 간단하고 활동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혼을 두뇌 활동의 산물로써 간주하는 현대의 유물론적 심리학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생명 혼을 부차적으로 다루고 있다.

뮐러 프라엔펠스 박사는 말한다.

“... 우리는 몸을 원자적 메카니즘으로 간주해서는 안되고 광범위한 생명 에너지의 매체로 간주해야 한다. 그래서 ‘몸’이 단순한 물질임을 그치고 ‘활기찬’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또한 계속 말한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우리는 혼의 이해에 이를 가능성을 본다! 인류가 이 개념을 어떻게 형성하게 되었는가 기억해 보자. (의식 없이 ‘혼’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생명이라는 활동의 복잡한 지속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류는 혼이라는 개념을 창조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원시 문화들에서 ‘혼’은 결코 의식과 동일한 것이 아니고 이러한 동일시가 그 후에 철학적으로 은폐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사실상 원시인들이 ‘혼’이라고 이해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활기있는Animated’ 것과 ‘살아 있는alive’ 것은 개념상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마치 ‘활기없는inanimate’ 것과 ‘죽은dead’ 것이 동일한 것과 똑같다. 그리스어 프시케psyche는 결코 의식만을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생명’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와 같이 많은 경우에 독일어 레벤Leben과 젤레Seele도 영어의 ‘라이프life’와 ‘소울soul’이 서로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현대 철학의 주 경향들이 모두 하나가 된다. 후기 유물론자들도 혼은 본체가 아니지만, 심령적 과정이 본체 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것을 ‘움직임motion’과 동등하다고 간주했다. 다른 한편 양심주의자들conscientialists도 심령적 과정을 물리적 운동과 어느 정도 관련지워야 하는 ‘사건events'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이 두 관념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이른바 ‘혼’이라는 것은 확장된 ‘본체’나 생각하는 ‘본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체’가 아니라 매우 복잡한 사건들, 즉 여러 가지 결과들의 연속성으로, 한편으로는 몸의 구조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 학설은 우주를 본체와 의식으로 나누지 않고, 둘 사이에 한편에서는 물질적으로 나타나고, 또 한편으로는 의식이라는 가설의 연결 고리를 설정하는데, 이 점에서 유물론과도 다르고 관념론과도 다르다. 그것은 혼을 본체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의식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의식과 몸은 둘 다 우리에게 의식을 산출하고 또한 원물질에 형상을 부여하면서 이 둘을 모두 포괄하는 제 3의 사물의 결과일 뿐이다. 의식은 보다 심원한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유물론은 몸을 형성하고 그와 함께 혼을 형성하는 형태를 이루는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 보았다. 이 이론은 비록 이원론을 회피하는 것처럼 일방성을 회피함에도 불구하고, ‘일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이 남용되어 왔고,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관념론과 유물론은 둘 다 단원론으로 설명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론은 역학론이라고 불린다. 왜냐면 그것은 혼의 본성을 지도받는 힘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것을 활력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힘이 몸에 형상을 부여하고 의식을 야기시키고, 생명과 동일한 것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리차드 뮐러 프라엔펠스, 혼의 신비, pp. 40. 41. 42.


우리는 이 세 가지, 즉 영혼, 혼 그리고 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암시를 비경The Secret Doctrine에서 얻게 된다.

“우리는 삶을 이른바 물질 속에 나타나는 실존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또는 부정확하게 분리시키면, 사람 안의 영, 혼, 그리고 물질이라고 부른다. 물질은 실존계에 혼이 현현하기 위한 매체이고, 혼은 영의 현현을 위한 상위 계의 매체이고, 이 셋은 모든 것에 퍼져 있는 생명에 의해 종합되는 삼개조Trinity이다.” H. P. 블라바츠키, 비경, I권, pp. 79,80.


혼과 자아는 동양의 문헌에는 동의어로 나온다. 혼, 그 본성, 목적 그리고 실존 양식에 대한 주요 보고서로는 바가바드 기타가 있는데, 이는 동양의 모든 경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더이쎈은 아트마, 자아 또는 혼에 대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만약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 우주의 일반 원리로서 브라만을, 심령적 원리로서 아트만이라는 도식에 따른다면, 모든 우파니샤드 철학의 기본적인 사고는 간단한 등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브라만 = 아트만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 속에 물질화되어 나타나는 힘인 브라만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 유지, 보존,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로 회복시키며, 이 영원하고 무한한 성스러운 힘은 아트만과 동일하며 외적인 모든 것을 탈각한 이후 우리는 내면에서 진실하고 가장 본질적인 존재, 우리의 개적인 자아, 즉 혼을 발견하게 된다. 브라만과 아트만의 이 동일성, 즉 신과 혼의 동일성은 우파니샤드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기본이 되는 사고이다...

아트만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 단어는 바로 ‘자아’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입장이 가능한데, 아트만의 이해에 따라 (1) 물질적 자아, 몸 (2) 개체 혼, 즉 몸으로부터 자유롭고 앎의 주체로써 대상과 대립하고 구분되는 자 (3) 지고의 혼, 주객은 더 이상 서로 구분되지 않거나 인도의 이해에 따르면 대상 없는 앎의 주체이다.” 파울 듀센 의학박사, 인도의 종교와 철학, pp. 39. 94.


어느 동양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유기적 존재들은 자기 결정의 원리를 갖고 있는데, 그에게는 ‘혼’의 이름이 일반적으로 주어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혼’은 내면에 생명을 갖는 모든 존재에 속해 있으며, 서로 다른 혼들은 본상상 동일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면 혼의 생명을 모호하게 하고 방해하는 물리적인 조직 때문이다. 혼이 결합되는 몸의 본성에 의해 다양한 모호성의 정도가 나타난다.

감각 등의 파악과 더불어 각각의 부띠buddhi는 과거의 업보karma에 의해 결정되는 고립된 유기체이며, 그 자신과 특이하게 관련되는 무지(avidya: 무명)를 지닌다. 자아ego는 우리가 경험적 자아의 내면적 생명으로 알고 있는 것을 구성하는, 연속적인 의식 경험의 심리적 통일체이다.

경험적 자아는 자유로운 영혼과 메카니즘, 즉 뿌루샤와 쁘라끄리띠의 혼합이다... 모든 자아ego는 죽을 때 해체를 겪는 조잡한 육체 내에 감각을 포함한 심령적인 장치로 형성된 미세체subtle body를 지니고 있다.” S. 라다크리슈나, 인도 철학, II 권, pp. 279, 283, 284, 285.


어느 인도 경전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생명, 마음, 혼, 영혼이라는 네 가지 아트마가 있다. 혼, 마음, 생명 원리의 대우주적 현현력의 뿌리에 놓여 있는 궁국적인 힘은 영혼이다.’” 라마 쁘라샤드, 자연의 미세한 힘들, p. 121. (쁘라슈노빠니샤드에서 인용))


그러므로 모든 것은 생명력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물질은 영혼 또는 에너지가 가장 낮게 나타난 것이며 영혼은 물질이 가장 높게 표현된 것이라는 동양에서 공식화된 진리에 우리는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그래서 시공간 속에서 특이한 편애와 경향에 따라 종교인, 심리학자, 과학자, 그리고 철학자의 관심을 끄는, 현현한 생명 의식의 다양성이 나온다. 모두가 활기 있는 한 생명의 변화하는 국면을 연구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과 관련되는 차별화, 용어, 그리고 그 요약은 많은 혼란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통일된 실재를 부분으로 분리하는 데에 참여하고 있고, 그렇게 해서 균형 감각을 잃어버리고 일시적으로 분리시킨 특별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러나 전체는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고, 우리가 의식을 총괄하여 진정한 경험에 참여함에 따라 이 실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이 자라나게 된다.

이 경험에 대한 증언은 바로 시간의 밤으로부터 추적될 수 있다. 세계의 계획에 따른 진화적 발전 과정에서 인간 가족이 출현한 때로부터, 자연을 설명하기 위한 신 관념과 인간을 설명하기 위한 혼 관념은 진보적인 발전을 나란히 이루어 왔다. 혼을 다룬 저작은 그 과제의 중대성 때문에 발전이 지체된 상태로 남아 있다.

혼이 발견될 수 있는 위치와 사람의 형상 안에 들어 있는 위치에 대한 추측은 항상 많이 있었다. 그에 대해 제안된 몇 가지 이론들을 여기서 다뤄 보기로 한다.

플라톤은 생명의 원리가 뇌 속에 있으며, 뇌와 척수는 생명력의 조정자라고 주장했다.

스트라토는 뇌의 앞부분의 양미간에 그것이 위치해 있다고 보았다.

히포크라테스는 뇌 안에 의식 또는 혼이 있다고 했고,

헤로필루스는 calamus scriptorius를 혼의 주요 자리로 삼았다.

에라시스트라토스는 소뇌에 혼을 위치지웠으며,그것은 운동의 조절에 관여한다고 말했다.

현대 의술의 위대한 선구자 갈렌은 제 4 뇌실을 인간 혼의 고향이라고 주장했다.

(기원후 3세기의) 히폴리투스는 “송과선을 향해 나가는 영혼에 의해 뇌막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 근처에 영혼의 흐름을 받아 척추로 전달하는 소뇌의 입구가 위치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불가사의한 과정에 의해 이 소뇌는 송과선을 통하여 영적이고 생명을 부여하는 물질을 끌어들인다.”

성 어거스틴은 혼이 중간 뇌실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중세 사상의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아랍의 철학자들은 뇌실을 혼이나 의식적인 생명의 자리로 생각했다.

홀랜더 박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뇌의 위치에 대해 아랍인들이 취했던 강(腔) 또는 동공을 의미하는 특정 세포에 고대 철학자들이 그 기능을 위치지우려고 했던 이유는 기체 상태인 프노이마가 확장할 공간 상의 여유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4 가지 부위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이마 쪽을 향해 있다고 생각된 제1 또는 전방 뇌실은 일반적 의미의 동공이었다. 왜냐면 그로부터 5 가지 외부 감각의 신경들이 뻗어나가 있고, 이들 신경의 도움에 의해 그 속으로 모든 감각들이 결합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제 2 뇌실은 제 1 뇌실과 함께 작은 입구로 연결되어 있는데, 상상적 능력의 자리로써 고정되었다. 왜냐면 다섯 가지 외부 감각으로부터 인상들이 제 1 뇌실로부터 그곳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뇌를 통과하는 두 번째 단계를 이룬다. 제 3 뇌실은 이해의 자리였다. 그리고 제 4 뇌실은 기억에 할당되었다. 왜냐면 제 2 뇌실에서 흡수된 마음의 개념 작용이 집중과 집적을 위해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상 이른바 전실은 두 동공으로 구성된다. 좌측과 우측의 뇌실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제 3 뇌실과 연결된다. 고대에는 이 중실이 몬로의 소공이라고 불렸다. 제 4 뇌관과 세 번째 뇌관은 신호를 주고 받는다. 고대인들은 이 후실을 실비우스의 맥관이라고 불렀다.

측실들은 뇌량corpus callosum으로 지붕처럼 덮혀 있다. 제 3 뇌실은 시상optic thalamus으로 덮혀 있고 제 4 뇌실은 소뇌와 연수 사이에 위치한다... 만약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자극되면, 그 효과는 어쨌든 의식 내에서 결합되고, 이 사실에 대한 지식은 공동 감각중추sensorium commune 또는 공동 감각(common sense: 일반 상식)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감각 센터의 가설에 영감을 주었다. 이것은 혼의 자리로 간주되기도 했다. 뇌의 부분들은 중복되기 때문에 위치 선택이 매우 제한되며, 중심선에 있는 조직들만이 선택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에 의해 송과선이, 그리고 19세기에는 W. B. 카펜터에 의해 시상이, 그리고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연수pons cerebri가 선택된 것과 같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97.


로저 배이컨은 뇌의 센터를 혼이 발견될 수 있는 장소로 간주했다.

루도비코 비베스는 “혼을 의식적인 생명일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생명의 원리로 간주했다. 심장은 그 생명 활동 또는 생장 활동의 센터이고, 뇌는 지성적인 활동의 센터이다.” 상동. p. 119.

중세의 유명한 해부학자 문디누스는 “동물 영혼”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이 동물 영혼이 협소한 통로을 통해 제 3 뇌실로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뇌의 세포질들이 지성의 자리라고 가르쳤다.

뇌의 회질과 백질의 차이를 처음으로 구분했던 베살리우스는 5 개의 뇌실을 설명하여, “세 개의 혼들을 구분했으며,.. 기능이 특히 정신적이었던 동물 영혼의 합인 주요 혼을 뇌에 배당했다.” 버나드 홀랜더 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29.

세르베투스는 뇌의 제 3 뇌실과 제 4 뇌실을 연결하는 통로인 실비우스의 맥관에 혼을 위치지웠다.

De Rerum Natura에서 텔레시오는 “혼은 가장 미세한 형태의 물질, 매우 미묘한 본체로 신경계 내에 갇혀 있어서 우리의 감각에서 벗어나 있다고 가르쳤다. 그 자리는 주로 뇌이지만, 또한 척수, 신경, 동맥, 정맥, 그리고 체내 장기의 외피로 확장한다... 신경계는 혼-생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람의 혼은 동물의 혼과 그 정도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의 물질적 혼에서 벗어나 그 물질적 혼과 결합되는, 신에 의해 직접 각인된 신성한 비육체적 혼을 추정했다.” 상동, 132.


윌리스는 정신성, 활기, 기억 등 혼의 다양한 기능을 뇌의 다른 부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뵈쌍Vieussens은 centrum ovale에 혼을 두었다. 스웨덴보르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혼에 대한 육체 감각의 왕도는... corpora striata를 통한다... 의지의 결단도 모두 그 길을 하강할 것이다... 그것은 올림푸스의 머큐리이다. 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혼에 알려지고, 거기에는 혼이 몸으로 내린 명령도 담겨 있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86.

코르포라 스트리아타는 전두엽과 후두엽 바로 아래에 있는 한 쌍의 거대 뇌신경절이다.
홀리스는 “감각과 운동은 둘 다 뇌수질에서 동력을 받기 때문에 이것이 혼의 자리이다,”라고 결론을 맺었고

챨스 보넷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감각들은... 우리가 부여받은 것... 뇌 속 어딘가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으로 비밀스러운 교신을 한다. 교신들이 일어나는 부분은 혼의 자리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혼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 의해서이고 몸으로 다른 존재들에 작용한다. 이제 혼은 신경에 의해서만 작용한다.” 상동, p. 190.

반면 폰 좀머링은 혼의 자리를 대뇌의 유동체에 위치지웠다.

심리학자 W. B. 카펜터는 시상을 혼 생명의 자리로 간주했다.’ 이 다양한 저자들의 결론은 위에 인용된 홀랜더 박사의 저작에서 가져 온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물활론자이자 물리학자이고 골상학의 창시자 프랜시스 죠셉 겔의 시대로부터 혼의 위치는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조명을 받게 되었고, 성격, 윤리, 그리고 이른바 인성학(Ethology: 품성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뇌와 심적 기질들과의 관계가 연구 주제로 되었고, 오늘날은 분비선을 포함시켜서 이러한 관념을 연구 과제로 수행해 나가고 있다. 심리학의 현대적이고 유물론적 원리들은 일시에 낡은 생기론적, 물활론적, 그리고 신비적 관념을 대체해버렸다. 그렇지만, 유물론적 접근법은 대단히 큰 가치가 있다. 그것은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그것은 우선 균형을 유지시켰고, 지식 구조를 만들었으며, 자연적 사실에 기초했으며, 예언적 신비가의 오류와 결론, 그리고 종교 신학자들의 미신들을 상쇄시켰다. 둘째, 현대 심리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마음, 그리고 그 힘의 연구를 통해, 그리고 크리스챤 사이언스와 신사고와 같은 조직의 영향을 통해 이뤄진 결론에 의해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가교가 건설되었다. 이제 혼, 마음 그리고 뇌의 삼중성triplicity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이 납득되고 이해될 수 있다. 바람직스럽지 않은 모습들을 제거한 뒤에 (그리고 현재 몇 개가 있다) 서양 과학과 협력하여, 빛은 다시 동방에서 비칠 것이며 새로운 존재 상태로, 권능의 더 완전한 실현으로 인간 혼의 본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르도록 인류에게 길을 제시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브라우닝이 이 통합된 인간에 대해 이해한 것이 진실임을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세 혼이 한 혼을 구성하네, 첫째는 지혜,
한 혼이 신체 부위 각각으로 모두로 이뤄지니,
그 속에 들어서, 일하는, 행위자,
땅을 향유하다가, 그것이 끝나자 사람은
하락하네, 허나 충고 따라 위를 향해
안으로 자라고, 다시 안으로 자라나
다음 혼까지, 뇌 속에 자리하네
첫째를 이용하니 합하여 쓰는구나
느끼고, 사고하고, 의지하는, 지자(知者)
때맞춰 방향을 위로 돌리고
안으로 자라고, 다시 안으로 자라나
마지막 혼에 의해, 모두 첫째를 쓰는구나,
지원 받든 받지 않든 자존하고,
사람의 자아를 구성하는 존재자
전자(前者)에 의지하여 놀게 하고,
첫째가 끝내면 위로 향하여,
신은 유지하고 지지되니, 끝나는 것은 인간
영적 교통의 경외로운 순간 위를 향해,
어느 장소도 필요 없이, 그에게로 돌아가니.
행위자, 지자, 존재자, 세 혼들에 한 인간.”

로버트 브라우닝, 사막에서의 죽음. (로버트 브라우닝, 사막에서의 죽음.)

제 5장 혼, 에테르 그리고 에너지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

“그 미세함 때문에 모든 곳에 퍼져 있는 에테르는 접해 있지 않는 것처럼, 몸 전체에 위치한 혼도 접해 있지 않다.
하나의 태양이 이 모든 세상을 비추는 것처럼, 몸 안에 거주하는 그는 모든 장field을 비춘다.
지혜의 눈으로 장과 장을 보는 사람을 분간하는 자,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존재의 해방을 분간하는 자들은 지고의 존재에게 간다.” 바가바드 기타, XIII, pp. 32, 33, 34.


혼과 그 표현, 즉 물리계에서 에텔체 또는 생기체를 다루는 동양의 문헌은 이 책 뒤에 있는 불충분한 참고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광범위하다. 우파니샤드와 뿌라나스 도처에는 이 가르침을 다루는 수천의 문구들이 흩어져 있다. 가장 중요한 정보원들 중에서 두 가지를 든다면 그것은 쉬브-삼히따와 샤챠끄라 니루빠남이다.

존 우드로프 (아더 아발론) 경은 이 동양의 가르침과 혼의 발전 기법에 대한 지식을 서양에 전하려고 책을 통해 많은 일을 했다. 그는 그것을 하나씩 발표하는 형태로 대중이 가장 위험한 과학을 지나치게 빨리 이해하지 않도록 보호했다. 서양 의학과 과학에 기초하여 어떤 인도 철학자가 쓴 신비한 꾼달리니(배산트 G. 렐)라는 소책자도 진정 가치있는 것이다.

이 과학의 위험은 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어떤 기법을 앎으로써 사람이 생기체를 통해 작용하는 자신의 본성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의 의사들은 사람과 관련된 에너지 요소들을 점점 더 인식하고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들이 그런 것처럼 육체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지니는 전기적 성질은 필연적인 인식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서양 과학자들은 에테르와 그 운동을 인식한다. 동양의 스승들은 아까샤와 뿌라나에 대해 말한다. 양자는 모두 모든 형상에 스며 있는 활력있는 생명을 다루고 있고 그것은 에테르의 일관성, 감각성, 그리고 실존의 결과이다. 께노빠니샤드의 다음 구절은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 줄 것이다.


“위대한 힘은 비현현이요, 비형상이며, 빛을 주는 하나의 수여자, 그로부터 소리를 내는 에테르(아까샤)를 세상에 냈고, 그로부터 감지되는 에테르를 탄생시켰네.
감지되는 에테르로부터 빛나는 에테르, 이로부터 맛보는 에테르, 그로부터 냄새나는 에테르가 생겨났네. 이들은 다섯 에테르이고 오중(五重)으로 확장했네.
이들로부터 우주가 나왔다네. 이들에 의해 우주가 연속되네, 이들 안으로 그것은 사라지네. 이들 중에서 그것은 자신을 다시 나타낸다네.” 께노빠니샤드, “자연의 미세한 힘”에서 라마 쁘라샤드에 의해 인용


고대 인도 문헌들에 나오는 빛나는 에테르와 현대 과학자들의 광파 사이에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라마 쁘라사드는 자연의 미세한 힘이라는 매우 흥미있는 책에서 미세한 물질의 네 가지 상태를 이렇게 나열했다.

                1. 뿌라나 또는 생명 물질
                2. 심령 물질
                3. 정신 물질
                4. 영 물질

그리고 이 네 가지는 아까샤를 표현 매질로 사용하는 에너지의 성질들이다. 동양서를 연구하면 우리는 힘의 주관적 세계에 의해 존재하고, 활기를 얻는 물질 세계의 그림을 얻게 된다. 이는 에테르(아까샤)를 운동장으로 사용하면서 현상계에서 모든 형태, 성질 그리고 차별화를 일으킨다.

'뱀의 힘The Serpent Power'으로부터 뽑은 다음의 인용은 물질과 에테르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을 제시한다.


“최신의 과학적인 연구는 이 원래의 물질이 과학적인 ‘물질’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질량, 무게, 관성을 갖지 않는다. 물질은 현재의 가정에 따라, 감각에 의해 알려진 ‘물질’과는 매우 다른 것에 의해 탈물질화되었고, 제거되었다. 이 궁극적인 물질은 운동 상태에 있는 에테르라고 불린다. 현재의 과학적 가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과학적인 ‘물질’이라는 것은 없다. 만약 그렇게 보이는 것이 있다면, 환상Maya과 같은 샥띠Shakti의 움직임 때문이다. 우주가 만들어낸 궁극적이고 가장 단순한 물질적 요소는 ‘에테르’라는 어떤 본체의 움직임이고 이 속에 있는 것이다. 이 물질의 움직임들은 실재적 관점으로부터 ‘물질’이라는 개념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물질은 그래서 그 형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 궁극적인 원소는 일종의 최종 분석이며, 다양한 종류의 물질의 차이들은 궁극적인 입자의 다양한 운동과 그 연속적인 결합에 의존한다. 그러한 기초적인 통일성을 얻게 되면, 한 형태의 물질이 또 다른 형태로 이전할 수 있게 된다.” 아더 아바론(존 우드로프 경), 뱀의 힘, p. 89.


또 다른 책에서 아더 아발론은 말한다.

“첫째로, 모든 가능한 힘들이 추가되어도 ‘물질’은 빛의 현상과 같은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며, 따라서 ‘에테르’라는 물질이 존재한다는 하나의 과학적 믿음에 이르게 된다. 우주를 채우는 매질은 빛, 열, 전기, 그리고 아마도 천체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인력처럼 먼 거리에서의 운동의 방사를 파동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에테르는 ‘물질’ 이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다르며, 보통의 물리적 의미에서 감각 기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물질’과 비교해서 설명하려고 할 때, 어쩔 수 없는 지식의 불명확성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에테르의 실재를 가정하면, 그 속에 잠겨 있는 ‘물질’ 체들은 그 안에서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사실 인도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아까샤 따뜨바(Akasha Tattvas: 아까샤의 성질)의 파동의 특성은 다른 따뜨바와 그 파생물이 존재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순전히 ‘과학적인 서양의 이론들은 그 질료인 ‘물질’과 ‘에테르’로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해 왔다.” 존 우드로프, (아더 아발론) 샥띠와 샥따, p. 167.

“많은 사람들이 마야(환상)라는 관념을 비웃었고, 여전히 이를 비웃는 사람도 있다. 만약 물질이 충분히 확고하고, 영원하며, 실재하지 않는다면 어떨 것인가? 그러나 과학에 따르면 (물질적 존재로써) 우리는 무엇에 기초해 있는가? 그 답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 가변적인 형상으로 물질화되는 대단히 빈도가 낮은 무형상의 에너지라는 것이다... 나의 친구가 견고한 물질(빠르티바부따)의 ‘껍질’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 미세함이 발전할 때까지 점차 더 거칠어지는 과정이 계속된다.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이것은 충분히 감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고 어떤 방사하는 본체 속에서 우리의 눈 앞에서 분열한다.” 존 우드로프 경 (아더 아발론), 샥띠와 샥따, p. 170.


인도의 혼을 보여 주는 많은 내용을 서양에 전달한 비베카난다는 말한다.

“인도 철학자들에 따르면, 온 우주는 두 가지 물질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아까샤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는 편재하는 것이다. 형상을 갖고 있는 모든 것, 취합의 결과인 모든 것은 이 아까샤로부터 진화된다. 공기로 되는 것, 액체로 되는 것, 고체로 되는 것이 바로 아까샤이다. 태양, 지구, 달, 별, 혜성이 되는 것이 바로 아카샤이다. 몸, 동물의 몸, 행성, 우리가 보는 모든 것, 감각될 수 있는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까샤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파악될 수 없다. 그것은 미세하기 때문에 모든 일반적인 지각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거칠게 되어 형상을 지니게 될 때에만 목격될 수 있다. 창조가 시작되었을 때, 이 아까샤만 존재한다. 주기의 끝에 고체, 액체, 그리고 기체는 모두 다시 한번 아까샤로 녹아 들었으며, 다음 창조는 이와 같이 이 아까샤로부터 나온다.

어떤 힘에 의해 이 아까샤가 우주를 형성하는가? 뿌라나의 힘에 의해서이다. 아까샤가 우주의 무한히 편재한 물질인 것처럼 이 뿌라나는 무한히 편재하는 이 우주의 현현력이다. 한 주기의 처음에 그리고 마지막에 모든 것은 아까샤가 되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힘들은 용해되어 뿌라나로 다시 들어간다. 이 뿌라나로부터 다음 주기에 에너지라고 부르는 모든 것, 즉 힘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진화된다.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뿌라나이다. 중력으로, 즉 자기magnetism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뿌라나이다. 몸의 움직임으로, 신경 전류로, 사고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뿌라나이다. 상념으로부터 최하위 물리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뿌라나의 현현일뿐이다. 정신적인 것이건 물리적인 것이건 용해되어 그 원 상태로 되돌아 간 때 우주의 모든 힘의 총합은 뿌라나라 불린다...” 스와미 비베카난다, 라자 요가, pp. 29. 30.


현대적인 작가, 라마차라까는 말한다.

“여러 가지 이론들이 이름이 지닌 위대한 원리를 오해하지 않도록, 우리는 그 원리를 ‘뿌라나’라고 부를 것이다. 이 말은 ‘절대적인 에너지’를 뜻하는 산스크리트 단어이다. 많은 오컬트 권위자들에 따르면 힌두이즘의 ‘뿌라나’는 에너지 또는 힘의 보편적인 원리이고, 모든 에너지나 힘은 그 원리로부터 파생된 것이거나, 그것의 특별한 형태로 그 원리가 현현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아메바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식물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부터 동물의 최고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 형태에서 발견된다. ‘뿌라나’는 편재해 있다. 그것은 생명을 갖고 있는 모든 것 속에서 발견된다. 오컬트 철학은 생명이 모든 사물 속에, 즉 모든 원자 속에 있으며, 무생물의 경우에도 생명이 덜 현현한 것일 뿐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뿌라나’는 모든 것 속에,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혼 속에 있는 신의 일부이고, 그 주변에 물질과 에너지를 모이게 하는 에고와 이 ‘뿌라나’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뿌라나’는 그 물질적 현현 속에서 에고에 의해 사용되는 에너지의 한 형태일 뿐이다. 에고가 몸을 떠나면, 더 이상 통제를 받지 않는 ‘뿌라나’는 몸을 형성하는 개별적인 원자, 또는 원자 집단의 질서에만 반응하고, 몸이 원래의 원소들로 해체되고, 분해되면, 각 원자는 그와 함께 새로운 결합을 형성시킬 수 있는 충분한 ‘뿌라나’를 취한다. 사용되지 않은 ‘뿌라나’는 자기가 나왔던 거대한 우주적 저장고로 다시 되돌아 간다. 통제받는 에고와 함께, 응집이 생겨 원자들은 에고의 의지에 의해 결합된다.

“‘뿌라나’는 일반적인 원리를 지시하는 이름으로 그 원리는 중력, 전기, 행성의 회전, 그리고 생명의 형태 중 최고로부터 최저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서나, 모든 운동, 힘 또는 에너지의 본질을 이룬다. 그것은 모든 형태를 띠는 힘과 에너지의 혼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생명을 동반하는 운동 형태를 만든다.” 요기 라마차라까, 숨의 인도 요가학, pp. 16. 17.


이 뿌라나는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일반적인 생명 원리이고, 이른바 인체의 에너지나 생명은 어떤 특이한 인간 혼이 지녀온 보편적 원리가 분화된 것이다.

우주 내에 아까샤 (에테르)를 이용한 에너지들은 시대를 초월한 지혜에 따르면 세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뉜다.

1. 포하뜨, 이는 기독교인들이 영으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존재 의지이며, 신의 결정적인 생명 원리이다. 이 신은 우리가 모든 형상의 총합이고 모든 의식 상태의 총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신성한 목적이며,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2. 뿌라나, 이는 의식 원리의 활동, 즉 기독교의 혼과 유사하다. 이 뿌라나는 영혼이나 생명, 그리고 물질이나 본체의 결합 결과이고, 신성한 목적을 수행하는 결합, 활기 그리고 예민함을 산출해낸다.

3. 쿤달리니, 이는 인간 형태와 관련될 때, 물질 자체에 잠재하는 힘이다. 이것은 원자의 통합적 생명이다. 그 원자가 경험의 소주기에 참여하는 어떤 형태와도 분리되어 있다.

샥띠는 힘 또는 에너지이다. 아더 아발론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도대체 샥띠란 무엇이고, 사물 안에는 무의식의 원리가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샥띠는 ‘할 수 있다’ ‘힘을 갖는다’는 ‘샥’이라는 어원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어떤 활동에 적용될 수 있다. 탈 수 있는 힘은 불의 샥띠이다. 이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형태의 힘이 나오는 근원적인 샥띠(아드야 샥띠)로 환원될 수 있다.” 존 우드로프 경 (아더 아발론), 샥띠와 샥따, p. 207.


그러므로 이 세 형태의 에너지는 하나의 보편적인 생명의 국면들이다. 에테르를 매체 또는 활동장으로 이용하며 그로부터 모든 객관적인 형상들을 만들면서 태양계를 통해 스스로 표현된다. 그 과정은 인도 철학에 따르면 사람에게서 반복된다.

육체는 세 번째 형의 에너지의 구성 부분들 또는 원자들로 표현된 것이며, 그 원자 에너지의 총합을 꾼달리니라고 한다.

“말하자면 나머지 감각 모두가 저장된 센터가 물라다라 차끄라이고, 또아리를 튼 활동 에너지가 꾼달리니, 즉 ‘또아리 튼 것’이다.”

그것은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거대 우주적 힘(샥띠)의 개별 육체적 표현이다.” 배산트 G. 렐, 신비한 꾼달리니, p. 40.


육체 그 자체를 인간계의 몸 속에 있는 한 원자로 보면, 척추 기저 센터에 있다고 상정되는 꾼달리니 에너지는 본성 상 양의 원자핵일텐데, 이는 전자로 간주되는 다른 원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생기체, 또는 에텔체는 이른바 뿌라나라는 감각적인 활기를 부여하는 이원성인 생명 혼이 표현되는 매체이다. 이 이중적 에너지는 생기체에, 그에 따라 육체에도 두 가지 양의 센터를 갖고 있다. 하나는 감정과 감각이 집중된다고 주장되는 심장에, 다른 하나는 마음과 영적 의식이 표현되는 머리에 있다.

렐 박사는 “적절한 뿌라나는 후두와 심장 기저 사이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우빠니샤드의 사상가들은 머리보다 가슴(heart: 경우에 따라 심장이라고도 옮긴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거기에 생명의 숨이 거주한다. 다섯 개의 뿌라나와 아울러 눈, 귀, 말, 마음도 가슴에서 나온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므로 가슴은 의식적 생명의 중심이기도 하다. 잠잘 때 혼의 기관들은 가슴에 머물고, 또한 죽을 때 그들은 거기에 모인다. ‘가슴을 통해 우리는 형상을 인식한다,’ 가슴을 통해 우리는 믿음을 인정하고, 아이를 낳고, 진실을 알고, 말 또한 거기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가슴이 무엇에 기초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덧붙이면 화를 내며 대답을 거절한다. 그러나 기관들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은 가슴에 기초해 있고, 그것의 지지를 받는다. 가슴이 브라만이라는 실제적인 정의를 제외해도, 그곳은 혼의 경험적인 고향이고, 그래서 브라만의 고향이다. ‘여기 가슴 안에 한 동공이 있어, 그 속에 우주의 주님, 우주의 지배자, 우주의 장(長)인 그가 거주한다.’ 가슴은 흐리다얌hridayam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가슴 안에’ 사는 ‘자는 그’이기 때문이고 (hridi ayam, Chand. 8.3.3.) 한톨의 쌀이나 보리처럼 작다. 즉 가슴에서 창조된 것의 자아로써 뿌루샤(purusha: 보는 자)는 몸 가운데에서 1 인치 높이로 거주한다.” 폴 듀센 박사, 우빠니샤드의 철학, pp. 286, 287.


“이처럼 후기 우빠니샤드의 수많은 문구들은 ‘가슴의 동공에 들어 있는’ 브라만을 경배한다. 우주의 아트마와 내면의 아트만의 일치는 송가. 6.8-16의 따뜨 뜨밤 아시(tat tvam asi)로 표현되고, 또한 이의 모방일 가능성이 있는 브리흐Brih. 5.4의 ‘진리 안에서 이것은 그것이다’라는 뜻인 에따뜨 바이 따뜨(etad vai tad)로도 표현된다. 동일한 공식이 시구에 덧붙여진 산문 구절 속에 있는 까트 4. 3-6. 1에서 12 번 발견된다. 까트 5.14에 따르면 최고의 지복은 이 사고의 의식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서 까트. 4. 12-13만을 인용한다.

        1인치 높이로, 여기 몸 속에
        뿌루샤는 사는구나,
        과거와 미래의 주님
        그를 알고 있는 자는 더 이상 초조하지 않고,
        진리 속에서 이것은 그것이다.

        연기 없는 불꽃처럼, 1 인치 높이로
        뿌루샤는 크기 안에 있고,
        과거와 미래의 주님
        그것은 오늘의 그이고 또한 미래의 그라네,
        진리 속에 이것은 그것이네 폴 듀센 박사, 우빠니샤드의 철학, p. 170.


여기서 푸루샤가 연기 없는 불꽃에 비유되는 것처럼 S'vet. 6. 19에 나오는 이 문구의 모방 구에는 그것이 연료를 소모하는 불에 비유된다. 반면 S'vet5.9에서는 내면의 아트만과 우주의 아트만 사이의 대조가 극단적으로 이뤄진다.

        머리카락 끝을 백번 쪼개고
        그로부터 100분의 1을 취해서
        혼의 크기를 판정하는 것
        그것은 불멸로 간다.

아트만이 가슴에 있는 연기 없는 불꽃이라는 설명은 요기 우빠니샤드에서는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한 혀의 모습으로 발전되었는데, 이것은 마한. 11.6-12인 초기의 일이었을 것이다. 폴 듀센 박사, 우빠니샤드의 철학, p. 171.


문헌들은 자아인 아트만이 가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로부터 그것은 혈액을 통해 생명 원리로 표현되고 있다. 혼의 본성, 또는 이성적 마음과 자아 의식적 개인은 머리에서 표현되고 그 위치에서 신경계를 다스린다.

“최고 센터들은 대뇌피질에 위치하고, 여기에서 반응과 감각의 지식이 현현된다는 것이 이제 증명되었다. 이 센터들은 수용하고, 즉 지각하고 있고, 지시하고, 즉 감시하고 있고, 뇌의 양쪽 반구에 있는 기초 신경절basal ganglia이라는 두 가지 큰 융기부 안의 보조 센터들을 갖고 있다. 이들은 시상과 corpus striatum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 것은 주요 감각 센터에 보조적이며, 둘째 것은 대뇌피질에 있는 주요 운동 센터에 보조적이다. 일반적으로 보조 운동 센터들은 의지에 의해 어느 정도는 조절된다... 요기는 시상에 있는 부수적인 신경 센터들에 관심이 있다. 시상의 일반적인 기능은 몸의 모든 부위로부터 감각을 받아들여, 척추를 통해 중계하여 주요 센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뇌에 있는 최고 반사 센터이고 모든 느낌이 이곳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우다나뿌라나Udanaprana라고 불린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척수 안에서 마지막으로 코 뿌리 높이에 있는 벌브Bulb라는 척수 부분으로부터 중계된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다나뿌라나를 의식적으로 조절하여 들어가고 나가는 모든 감각을 요기는 제압하고, 조절하여야 한다.” 배산트 G. 렐, 신비한 쿤달리니, p. 70.


슈리니와사 이엔갈Srinivasa Iyengar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만들었는데, 조잡한 허무주의 학파를 제외하고는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1. 인간은 의식, 마음 그리고 몸의 복합체이다.
2. 아트마(자아)는 의식의 본성이며 변할 수 없다.
3. 마음은 비록 내부 기관이기는 하지만, 물질적이며 아트만과 다른 것이다.
4.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개성적이고,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5. 이 에너지는 뿌라나이며, 마음과 물질 사이의 매개자이다.

“인도 철학은 뿌라나를 우주의 기본적인 에너지이고 운동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뿌라나는 뿌루샤로부터 오거나, 그로부터 시작하는, 그리고 물질에 작용하는 힘으로 이해된다.(영혼의 국면-A.A.B.)”

“동물의 에너지는 그것이 근육을 떠나 외부 대상에 작용할 때까지 모두 신경 에너지이다. 이 신경 에너지가 뿌라나라고 불린다. 서양 과학은 백 년 동안 기계적인 운동 형태로 신경 에너지를 설명하여 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동양 철학은 그러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뿌라나로부터 기계적인 운동을 설명하거나, 의식에 수반되는 에너지로부터 기계적인 움직임을 끌어낸다.

뿌라나는 사이키콘Psychikon 심령, 즉 그리스 철학의 동물 영혼에 상응한다. 이것은 영혼과 물질 사이를 매개하고, 그들을 서로 관계맺게 하는 부류이다.” 슈리니와사 P. T. 이엔갈, 인도 철학의 개요, pp. 58.59.


아더 아발론은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혈액, 심장, 그리고 숨과 같은 육체의 다양한 부분을 ‘혼의 자리’ 또는 생명의 자리로 지정해 왔다. 바이딕Vaidik 체계는 가슴을 의식의 주요 센터로 위치지우고 있는데, 그의 견해는 ‘마음에 세기다(take it to heart)’와 ‘암기하다(learn by heart)라는 어구에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삐따의 5 가지 기능 중 하나이자, 가슴에 위치한 사다까는 율동감 있게 심장의 수축을 지속함으로써 인식 기능의 수행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인도 생리학자들이 인식의 자리로 심장을 거론했던 경향이 있었던 것은 심장의 구조를 보는 이런 견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딴뜨라에 따르면, 비록 심장도 뿌라나의 그 국면에서 지바뜨마, 또는 육화된 영혼의 자리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의식의 주요 센터들은 두뇌-척추의 차끄라들과 상부의 뇌(샤하스라라)에 존재한다.” 아더 아발론(존 우드로프 경),뱀의 힘, p. 3.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이 인간의 현상을 설명한다. 진화가 진행되면서, 물질적인 형태의 생명을 위해 양의 센터 또는 핵은 척추의 기저에 위치해 있고, 감각적이고 의식적인 인간 생명을 위한 양의 센터는 가슴 안에 있지만, 마음과 영적인 생명 원리에 대한 양의 센터는 머리에 있다는 것이 발견되고 입증될 수 있다.

인간 내부의 센터들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의 도식과 기법은 모두 증가하는 뿌라나 또는 생명 혼 에너지가 발휘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면 (육체의 자동 제어를 통해서) 영적 인간, 혼의 유산인 혼의 권능과 영적 성격을 입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방법과 수행의 목적은 혼과 의식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며, 두 가지 하위 에너지와 물질, 감각적 정신적 본성을 세 가지 에너지들 중에서 최고인, 영적인 생명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성취되면 영적인 생명 원리는 그 메카니즘을 최고 상태의 완전함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혼은 활기를 얻어 어떤 장애나 한계도 알지 못하게 된다. 물질은 하늘로 상승하게 되어,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하는) 물질의 에너지인 쿤달리니 불이 결국 척추의 기저에서 머리 위로 그 위치가 올라간다고 인도인들은 가르친다. 이것은 동정녀 성모가 하늘로 승천하여 자신을 아들인 그리스도, 즉 혼 옆에 자리하게 한다는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과 뇌 의식 속에 자리잡은,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모든 자연인의 에너지를 통제하는 혼 또는 자아에 의해 의식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가 또는 결합으로 신비적 경험일 뿐만 아니라, 생기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하나됨(at-one-ment: 속죄)이다. 이것은 완전한 인간, 즉 물리적, 감각적, 그리고 정신적, 그리고 보편적인 혼과의 의식적 결합이다. 렐 박사는 말한다.

“‘요가’라는 말은 결합 또는 융합한다는 ‘유가’라는 어원에서 파생된 것이다. 용접할 때 동일한 두 금속 조각이 열처리와 망치질에 의해 하나로 되듯이 인도 철학의 요가에서도 보편적 영혼 ‘빠라마뜨마’의 일부인 육화된 영혼 ‘지바뜨마’는 특정한 육체적 정신적 훈련에 의해 보편적인 영혼과 하나가 된다.

요가는 상위 파동에 반응하는 마음의 능력을 고양시켜 우주에서 우리 주변에서 진행되는 무한한 의식적 운동을 지각, 파악, 그리고 흡수하는 과학이다.” 배산트 G. 렐, 신비한 꾼달리니, pp. 13.14.


르네 궤농은 이 결합의 결과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다.

“우리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해방 또는 결합은 똑같은 것으로 ‘상위에서’ 모든 상태들을 포섭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한 실현(사다나sadhana)이고, 존재의 온전함이기 때문이다. 이들 상태가 실제로 현현되는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이상학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영원하고 변함 없는 가능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의 단순한 효과에 의해 여러 가지 상태의 주인인 요기는 활기를 주는 호흡(뿌라나) 없이 다른 상태에서 벗어나 오직 한 상태와 관계한다. 도구가 많이 있는 것처럼, 그는 등불 하나가 심지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수의 형상에 활기를 줄 수 있다.’ 아니루따는 이렇게 말한다. ‘요기는 우주의 원초적인 원리와 직접 연계되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차적으로) 공간 전체, 시간 전체, 그리고 사물 전체와 연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 현현과, 그리고 더 상세하게 말해 그 모든 변용된 인간 상태와 직접 연계되어 있다.

 

제 6장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들

동양의 가르침에 따르면 생기체 또는 에텔체는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으며, 생명 원리인 뿌라나의 지휘자 역할을 하고, 물질에 활기를 불어넣고, 형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는 전장에서 살펴 보았다. 또한 생기체는 혼이라는 자연의 지각 원리를 구체화하는 혼의 표현 매체이다.

혼의 주요 특성은 의식이다. 생명으로써 혼은 “가슴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성적인 영적 의식은 “양미간에 있는 옥좌에 앉아 있다.” 르네 궤농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러므로, 물리적 관점에서 생명 센터에 거주하는 것은 에테르이고, 심령적 관점에서 그것은 ‘살아 있는 혼’이다. 현재 우리는 개별적인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나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원리적이고 무조건화된 ‘자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정 ‘우주 영혼’ (아뜨마)이고, 실제로 브라마, ‘지고의 지배자’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이 센터를 브라마-뿌라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이렇듯 내면의 인간으로 간주되는 (이와 아울러 이것을 모든 존재 상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브라마는 뿌루샤라고 불리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개별성 안에 안식하거나 머무르기 때문이다... 적절하기도 하고 말 그대로 한 마을(뿌리-샤야)이라는 단어 속에서 뿌라pura가 마을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르네 궤농, 인간과 그 생성, pp. 44.45.


생명력은 육체와 접하는 일곱 센터를 갖고 있다.
이들 일곱 생명력 센터는 생명력을 전달하고 혼이 머무는 지점이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실존을 유지하고 그것에 활동을 일으킨다.

드리머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사람의 센터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의 우빠디upadhi의 핵 속에 각각 반영된다. 생명파라고도 불리는 신성 에너지에 의한 물질의 형성 작용을 연구해 보면, 물질이라는 객관성의 한계 속으로 자아를 투사하여 특정한 성질이 어떻게 물질로 나투어 이른바 따뜨바tattvas로 발전하는 지를 알게 될 것이다. 각각의 따뜨바는 혼을 불어넣은 생명에 대해 탄마뜨라, 또는 신성한 의식의 변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따뜨바에서 우리는 중심적 생명으로서 신 의식을 지니는 반면, 저항의 관념은 외벽을 형성한다.”

“자아는 현현력에 의해 각각의 계 속에서 자신의 대행자뿐만 아니라 우빠디들의 핵을 일시에 그리고 동시에 형성하는 인공적인 센터들을 발전시키면서 다양한 우빠디들에서 반영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해 왔다.” 드리머, 바가바드 기타 연구, pp. 37, 40, 107.


생명 센터의 인도식 이름은 “차크라”이다.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의 위치를 (인도식 이름과 함께) 머리에서부터 기저에 이르기까지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머리 센터                   -샤하스라라 챠끄라
2. 양미간 센터                -아즈나 챠끄라
3. 목 센터                      -비슈따 차끄라
4. 가슴 또는 심장 센터     - 아나하따 챠끄라
5. 태양총 센터                -마니뿌라 챠끄라
6. 천골 또는 성적 센터     -스와디스타나 챠끄라
7. 척추의 기저 센터         -물라다라 챠끄라

횡격막 위에 네 가지 센터들이 있고, 그 아래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독자는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들 에너지 센터 또는 챠끄라에 대한 글은 많이 쓰여졌고, 그보다 더 많은 내용이 이야기될 수 있지만, 개괄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생명 센터들은 몸의 모든 부분에 뿌라나 에너지를 전하고 세 부분의 신경계, 즉 뇌척추 신경, 교감 신경과 말초 신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에너지 센터들로부터 생기 에너지 또는 뿌라나 에너지는 미세한 지시선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 이 선들은 “나디nadis”라고 불리며, 신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동시에 동맥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들은 육체의 신경계에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과 그 생성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미세한 형태의 나디 또는 동맥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과 혈액 순환을 일으키는 육체의 동맥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오히려 생리학적으로 신경계의 가지에 상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표현상 이들은 빛나는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이 어딘가에서 발생해서 열과 빛으로 양극화되면, 미세한 상태는 두 가지의 보충적인 방식들, 즉 열의 성질에 해당하는 혈액에 의해, 그리고 빛의 성질에 해당하는 신경계에 의해 육체 상태와 연결된다. 그러나, 나디와 신경은 단순히 상응하기만 하고,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전자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과, 완전한 개별성 속에서 두 가지 다른 영역을 실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호흡이 생명 유지에 본질적이고 주요한 생명 활동에 진정으로 관련되기 때문에 나디와 호흡 작용 사이에 어떤 관계가 확인된다 해도, 그것들은 공기가 순환하는 통로의 일종이라는 설명을 결론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육체적 요소와 미세한 현현에 속하는 적절한 ‘생기 호흡’(뿌라나)을 혼동하게 만들 것이다.

나디의 총 수는 7만 2천개이지만, 다른 문헌에 따르면 7천 2백만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왜냐면 이 수들은 상징적인 것이지 숫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르네 궤농, 사람과 그 생성, pp. 136. 137.


인도 말 로뚜스(lotus: 연꽃)를 챠끄라나 에너지 센터에 관련해 사용하는 라마 쁘라사드는 이런 맥락에서 흥미있는 언급을 하고 있다.

“현대 해부학자들이 말하는 신경총은 이러한 센터들과 일치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으로부터 이 센터들이 혈관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신경과 혈관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양적인 뿌라나와 음적인 뿌라나의 매개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이다. 신경은 양적인 몸의 체계이고, 혈관은 음적인 몸의 체계이다. 신경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상응하는 혈관이 있다. 그들 양자는 모두 구분 없이 나디라고 불린다. 한 쌍은 심장의 연꽃에서 중심을 잡고 있고, 다른 쌍은 천 장의 꽃잎을 이루면서 머리에 중심을 잡고 있다. 혈관계는 신경계의 정확한 그림이고, 사실 그 그림자일 뿐이다. 가슴과 같이 머리에는 그 상위와 하위 부분, 즉 대뇌와 소뇌가 있고 또한 좌우 반구가 있다.” 라마 쁘라사드, 자연의 미세한 힘들, pp. 45-46.


에너지 센터들은 척추와 머리 안에 위치하고 있다. 아더 아발론은 말한다.

“차끄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양 해부학과 중추 신경계와 교감 신경계의 생리학을 설명해야 한다. 둘째, 딴뜨라의 신경계와 차끄라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면에서 가능하다면, 두 체계의 상호 작용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야 한다. 나머지 것은 일반적으로 탄트라 신비주의에 특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차끄라와 샤하스라라에 대한 딴뜨라 이론은 두개골 속에 들어 있는 뇌나 뇌수를 중추신경계와 척추(메루딴다) 내에 들어 있는 척수와 비교하는... 생리학적 측면에 관심을 두고 있다.

앞으로 다섯 센터들(차끄라)에 대해 설명하겠지만, 척추는 다섯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기저에서부터 차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네 개의 불완전한 척추뼈가 결합하여 미저골coccyx이라는 뼈를 이루고 있는 미저골 영역, 다섯 개의 척추뼈가 결합되어 천골이라는 하나의 뼈를 형성하는 천골 영역, 요추 영역 또는 다섯 개의 척추뼈로 이루어진 요부region of the loins, 12 개의 척추뼈로 이루어진 등dorsal 영역, 또는 등뼈 영역, 그리고 7 개의 척추뼈로 구성되는 경부, 또는 목의 영역. 순차적으로 제시된 것처럼, 척수는 각기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특징들을 보인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물라다라, 스와디스타나, 마니뿌라, 아나하따, 그리고 비슈따 센터, 또는 차끄라가 조절하는 영역에 상응한다. 이 지역들은 척추 기저, 천골 센터, 태양총 센터, 심장 센터, 목 센터이다,
중추계는 31 개의 척추 신경과 12 개의 두개골 신경을 통해 말초신경계와 연결되어 있고, 이 두 가지는 모두 구심성 신경과 원심성 신경 또는 감각 신경과 운동 신경으로 감각을 일으키거나 행동을 자극한다. 뇌신경 중에는 척추 구(연수)로부터 마지막 6 가지 신경이 올라오고 후각 신경과 시신경을 제외한 다른 6 가지 신경은 연수 바로 앞에 있는 뇌 부분들에서 올라온다. 참고로 요가와 딴뜨라 학파의 저자들은 신경에 대해 나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또한 의학 서적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쉬라스Shiras를 이용해서 동맥을 설명하지 않고, 이것이 뇌신경을 의미한다고 지적해 왔다. 그렇지만, 요가 나디들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신경이 아니라 생기력이 통과하는 더 미세한 지시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척추골 사이의 유공(작은 구멍)에서 빠져나온 척추 신경은 척추의 양쪽에 있는 교감 신경계의 신경절과 교신한다. 척추건spinal cord은 인체의 경우 제 1 경추의 상부 경계에서부터 확장되어 연수 속으로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제 4 뇌실로 들어가 두 번째 요추로 내려가는데, 거기서 그것은 필라멘트 말단filum terminale이라는 지점으로 점차 얇아진다.” 아더 아발론, 뱀의 힘, pp. 123-125.


앞의 인용은 탄트라 체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최고의 도덕적 자질을 지니고, 생활과 생각이 순수한 사람에게만 안전한, 인도의 에너지 조절 체계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동서양 모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딴뜨라 수행을 가르치는 이른바 비속화된 수행과 학파들은 지나치게 비난받아도 가혹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에너지 센터들은 우리가 방금 살펴 본 것처럼 척추와 머리 위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척추의 매질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서 상술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일곱 개의 센터 중에서 두 개는 머리 속에 있고 5 개는 척추 속에 있다. 머리 속에 있는 두 센터들은 정신력과 운동력에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다. 천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연꽃이라고 불리는 샤하스라라 센터(머리 센터)는 영적 에너지의 구현이며, 의지, 추상적 마음mind 또는 영적 마음, 그리고 직관이라고 설명된다. 아즈나 센터, 또는 미간 센터는 인간이라고 부르는 통합된 유기체, 즉 개성의 하위 마음과 심령적 본성과 관련된다.

척추 안의 다섯 센터들은 사람이 자신의 동물적 본능, 감정적 반응, 그리고 삶의 의도를 드러내는 유기체의 다양한 활동과 관련된다. 그들은 주로 두 가지 머리 센터로 들어가고 그로부터 나오는 에너지의 지휘를 받는다.
뱀의 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센터들은 의지적인 운동에 관계되는 근육 결합 조직들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과 아울러 척수 안에서 근접한 센터가 위치해 있는 유관 신경 분포, 배설 등의 기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대뇌 센터들은 의지, 느낌, 그리고 감정의 현현과 관계될 때에만 이 기능들을 조절한다고 지적되고 있다. 반면 부교감 신경계와 관련된 센터들은 지속적인 유기체의 실존에 본질적인 다양한 자극 조건과 일치하는 무의식적인 적응 메카니즘을 구성한다고 하며, 연수는 또한 상위 센터들과 말초 신경 사이의 통신 경로이자 신경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들을 조절하는 독립적인 센터이다. 머리에서 척추까지 내려오는 운동 자극을 전달하는 신경 섬유들이 척추구(연수)를 통과해 경로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교차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하는데, 이것은 묵따 뜨리베니의 설명을 보면 딴뜨라에서 언급되어 왔던 사실이다. 후자는 수많은 구심성 신경관과 원심성 신경관에 의해 소뇌와 대뇌의 신경절과 연결되어 있다. 소뇌 위에 대뇌가 있는데, 이는 대개 의식적인 의지와 관념 작용과 수의voluntary 운동이 일어나는 것과 관련되는 활동을 한다. 그러나 내관적인introspctive 심리학의 주관적 물질인 의식이라는 개념은 심리학적 작용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의식’이 하나의 유기적 포착conception이 아니고 의식이 내관적인 면을 나타내는 에너지의 생리학적 이해와 전혀 관련되지 않기 때문에 의식에는 어떤 기관도 없다. 내면의 의식은 아뜨마이다. 마음과 몸은 둘 다 의식의 불완전하거나 베일을 쓴(veiled: 가려진) 표현들로 몸의 경우 너무나 가려져 있어서 무의식의 모습을 갖고 있다. 살아 있는 뇌는 뿌라나에 의해 주입된 감지할 수 있는 거친 물질(마하부따)로 구성되어 있다. 그 물질은 마음(안따까라나)의 형상 속에서 의식이 표현하기에 적합한 매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집성(集成)되어 있다. 의식은 몸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단순히 몸의 작용도 아니다. 정신적 의식이 뇌의 장애에 영향을 받거나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은 그런 의식의 표현에 대해 후자의 필요성을 증명하고, 의식이 뇌 속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거나 그것이 같은 것의 속성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척추의 양쪽에는 교감 신경관 (이다와 핑갈라)라는 신경 섬유와 연결된 일련의 신경절이 있는데, 두개골의 기저로부터 미저골까지 쭉 확장되어 있다. 이것은 척수와 소통하고 있다. 비록 경부 영역에서 대부분 사라진다 해도, 대단히 규칙적으로 각 척추 신경에 상응하는 신경절의 각 마디가 흉관 영역과 요추 영역에 있다는 것과 신경 구조의 매우 큰 다발들은 심장, 위, 그리고 폐, 즉 각각 아나하타, 마니뿌라, 그리고 비슈따에 의해 조절되는 영역들, 즉 이하에서 설명되는 다섯 차끄라 중 위쪽의 세 차크라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양쪽의 교감신경의 연쇄로부터 신경 섬유들은 복부와 흉곽의 장기로 이어진다. 이로부터 또한 신경들이 방출되어 척추 신경으로 되돌아 가고, 다른 신경들은 몇몇 뇌신경들 속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사지, 몸통, 다른 부분들로 분산되어 척추 신경 또는 뇌신경으로 이어진다. 교감 신경들은 주로 다양한 조직의 소동맥의 근막과 내장의 근 조직을 조절하는 자극을 전달한다. 혈관의 색조가 연수에 있는 혈관 운동 센터의 활동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교감신경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교감 신경은 중추신경계로부터 확산되는 자극을 유도한다. 이들은 교감 신경 자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척추 신경의 앞쪽 뿌리에 의해 척추로부터 자극이 나와 짧은 가지들을 거쳐서 교감 신경의 연쇄로 들어간다. 교감신경계는 순환, 소화, 그리고 호흡을 조절하고 그에 영향을 미친다.

중추 신경계의 해부학적 배열은 매우 복잡하고 한편 섬유, 세포 그리고 원(原) 섬유의 엉킴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직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중추 신경계의 생리학을 설명할 때, 신경계의 한 부분과 또 다른 부분 사이에서 자극이 통과할 수 있는 경로를 추적하는 것과 해부학적 연관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갖고 그 부분들이 서로 그리고 몸의 나머지와 형성하는 생리학적 관련성을 추측하는 것 이외에는 현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특별한 메카니즘, 즉 감각, 분지, 또는 운동, 그리고 이른바 비뇨생식기 센터와 같은 그 센터들과 특별히 관련되는 중추신경계 내의 신경 센터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주어진 생리학적 행위는 척추의 특정 부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기에 차끄라라고 불리는 마야 샥띠(Maya Shakti)의 표현들과 같은 센터들의 미세한 국면이다. 이들은 차례로 물라다라, 스와디스타나, 마니뿌라, 아나하따, 그리고 비슈따 차끄라들과 궁극적으로 관련있는 생식, 배뇨, 소화, 심장 활동, 그리고 호흡의 거친 기관들과 간접적인 조절 기관들을 통해 관계되고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 관tracts이 배타적이지 않고, 다양한 지각, 의지, 그리고 관념화 과정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아더 아발론, 뱀의 힘, pp. 126-129.


이 센터들은 개인의 진화 상태에 따라 활동성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어떤 센터들이 “깨어 있고” 다른 사람은 똑같은 센터들이 상대적으로 잠자고 있을 수 있다. 어떤 유형은 태양총 센터가, 다른 유형은 심장이, 또한 다른 유형은 목이 활동적이거나 잠든 상태일 것이다. 머리 센터가 활동적인 경우는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미개한 사람들과 진화가 많이 되지 않은 경우에는 횡경막 아래의 세 가지 센터들, 즉 척추의 기저 센터, 천골 센터, 태양총 센터들이 살아 있고, 지배적이지만, 횡경막 위의 센터들은 “잠자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목 센터에서 느낌을 받지만, 머리와 가슴 센터들은 여전히 잠자고 있다. 진화가 많이 이루어진 사람들, 종족의 지도자, 직관적인 철학자와 과학자, 그리고 위대한 성자들은 머리와 가슴 센터가 파동, 즉 감정적 정신적 의식의 유형과 성질에 의해 머리와 가슴에서 중요한 느낌을 받고 있다.

사람의 발전에 따라서 이 에너지 센터들은 살아나고 현저하게 되고, 그 생생함에 따라 다양한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횡경막 아래의 센터들은 사람과 동물 양쪽에서 모두 발견되는 물질적 형태의 육체적 삶과 동물 혼적인 삶을 지배한다. 횡경막 위의 센터들은 지성적이고 영적인 삶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상태가 동물의 삶과는 달리 더 높은 진화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활동들을 하게 한다.

요약한 내용은 7 가지 에너지 센터 또는 차크라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이다.

서양의 분비선 이론과 동양의 일곱 가지 센터 이론을 비교하면, 우선 그 위치에서 현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들은 분비선이 위치하는 동일한 곳에서 발견되고, 에너지 센터들 각각은 상응하는 분비선에 대한 힘의 근원이고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확실한 사실이다) 다음의 비교표는 이 위치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센터들                        분비선

머리 센터                    송과선
양미간                        뇌하수체
목 센터                       갑상선
심장 센터                    흉선
태양총 센터                 췌장
천골 센터                    생식선
척추 기저 센터             부신

        

첫 번째 사실보다 훨씬 더 현저한 두 번째 것은 깨어 있는 에너지 센터들이 분비선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 작용은 이미 알려져 있고, 대부분의 분비물 또는 호르몬이 여기서 발견된다. 인류 중에서 선진적인 사람들의 잠자거나 깨어 있는 센터들은 그 기능이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분비선에 따르는데, 그 분비물은 대개 추출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뇌하수체나 흉선 둘 중 하나 안에 있는 송과선의 분비물은 부신 수질의 분비물과 같이 미확인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버먼 박사는 언급하고 있다. 이것들은 잠자거나 깨어있는 심장 센터, 목 센터, 머리 센터, 그리고 척추 기저 센터에도 해당한다.

이것은 흥미있는 일치일까? 또는 각각의 경우에 발견되지 않은 호르몬이 있는 분비선들이 일반인들의 경우 자고 있는, 아직 각성이 일어나지 않은 센터에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인가?

여러 가지 분비선은 이 센터들의 에너지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확인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의 경우 각성되서 작용하는 센터들이 분비선들과 연결되어, 그 특이한 분비와 이미 알고 있는 혈류와 관계된 작용이 격리된 반면, 아직 잠자며 개발되지 않은 센터들은 그 분비가 부분적으로만 알려졌거나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분비선들과 결합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쨌든 고려할 가치가 있다.

사람은 분비선이 만들어낸 것이며 인간은 특이한 분비계 자체라고 서양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정당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에너지 센터들에 대한 동양적 이론의 정당함에 있을 수도 있다. 분비선과 기능 항진super-activity 또는 기능 저하의 조건, 그리고 정오(正誤)의 기능은 이러한 센터들의 상태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이러한 분비선들은 훨씬 더 크고 더 복잡한 체계의 외부적 상징, 가시적인 것, 물질적 국면일 뿐이다. 그것들을 통해 작용하는 혼 생명의 성질, 그리고 모든 것을 조절하고 지배하는 혼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센터들의 상태는 그를 통해 진동하는 혼 에너지의 형태와 성질에 의존한다. 미개발된 사람의 경우에 그것은 활동하고 나타나는 생명 에너지, 뿌라나일뿐이다. 이것은 동물에게 생명을 주고 하위 센터들(척추 기저 센터와 천골 센터)에 활동성을 준다. 사람이 발전하면 의식, 즉 혼 국면이 점차 그 현존을 느끼게 만들고, 태양총 센터를 활동하게 만든다. 이 센터는 사람과 동물에서 하위의 심령 감각적 삶의 자리이고, 본능적인 뇌라고도 불린다. 바가반 다스는 이렇게 가르친다.

“산스끄리뜨 문헌에서 배꼽이 심장보다 유기체에 더 중심적이고,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다루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심장의 중요성은 아무리 지적해도 부족함이 없고, 그것은 진실이지만, 생리학적으로 ‘배꼽’은 진화의 초기 단계에 보다 더 중요한 기관이었으며, 현 단계에서도 욕망 작용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가슴보다도 더 적절하게 욕망과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바가반 다스, 성스러운 말씀의 과학, I권, p. 82, 각주


그는 다음 문단에서 베산트 여사도 인용하고 있다.

“‘배꼽’은 태양총을 나타내는데, 아마 교감 신경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경총일 것이다. 그것은 식도와 생식기와 함께 소화관을 조절하고, 간장, 비장, 위로 신경 가지가 이어진다. 그것은 또한 폐와 심장으로도 이어져 있다. 그것은 교감 신경계의 뇌로 간주될 수 있으며, 생각에 위험한 이완에 반응하며, 이에 대한 무분별한 집중은 불치의 신경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이 흥분하여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고, 감정적인 충격에 따르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바가반 다스, 성스러운 말씀의 과학, I 권. p. 83


오늘날 사람은 대부분 이 세 가지 센터들을 통해 작용한다. 몸의 에너지들은 생식선을 통해 성적 생활에 만족을 주고 이를 자극하는 작용을 하며, 전투의 분비선이자 투쟁의 분비선인 부신을 통해 싸우고 진화하려는 충동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태양총을 통해 마음의 본능적 삶을 다스린다. 그래서 개인이 발동되면 의식적 감각적 인간으로 된다. 진화가 진전되면, 자아 또는 혼이 사람 속에서, 그의 육체적 실존에서, 점점 더 활동적이고 지배적이 되고, 조금씩 조금씩 에테르 구조의 모든 부분들이 생기있게 깨어나게 된다. 점차 상위 센터들은 활동성이 증가하게 되며, 몸을 통해 쏟아지는 힘의 강조점이 횡경막 위의 센터들로 이동한다. 목 센터가 깨어나면 창조적인 작업의 기관으로 된다. 심장 센터는 활기있게 되고, 사람은 자신의 혼적 관계, 자기 집단의 책임과 생명 혼의 포괄성을 의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머리 센터들이 깨어나 또 다른 범위의 지각들이 그의 의식으로 들어온다. 그는 혼으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고, 개성으로서 통합되고, 그 뒤에도 영혼의 세계, 신적인 세계, 그리고 영혼들의 보이지 않는 세계, 그리고 혼 생활을 실재로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를 인식하게 된다.

인간 진화의 목적들 중에는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 들어 있다. 척추 기저 센터와 심장 센터는 완전히 기능하는 활동 상태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물질 그 자체에 내재하고 척추 기저 센터에 내장된 에너지와, 가슴에 자리잡은 혼의 에너지와 머리에 집중된 영혼의 에너지의 혼합을 통해 인간은 완성의 최고점에 이르게 된다. 에너지의 이러한 융합을 통해 그는 몸이 진정 혼을 위한 매체이고, 그 혼은 진정 의지의 표현이자 영혼의 목적이 되도록 신의 적극적 표현, 즉 영혼, 혼, 몸이 된다.

지상에 살았을 때 그리스도는 무엇이라 말씀했는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XIV: 9) 그는 또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할 것이고;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아버지에게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인 아버지를 드러내며 몸에 육화된 혼이었고, 몸의 메카니즘을 통해 혼의 권능을 증명하였는데, 이것은 센터들의 각성에 따르는 것이라고 인도인들은 주장한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아니마... 모든 몸에 스며들어 죽은 자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권능.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게 방으로 들어 올 수 있었고,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었다. (누가 24: 36, 마가 16: 14, 요한 20: 19, 요한 11.).

2. 마히마... 자신을 포함하거나 확대시키거나 또는 우주를 포괄하는 권능. (마테 12:25, 요한 2: 24, 요한 6:64.)

3. 라기마... 공중 부양을 하거나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자신을 빛으로 만드는 권능. 그리스도는 물 위를 걸었다. (마테 12: 25, 요한 2: 24, 요한 6: 64.)

4. 가리마... 자신을 무겁게 만드는 권능. 기독교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이 권능을 수행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5. 쁘랍띠... 사건들을 예언했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십자가 처형을 예언했다. 마테 26: 2, 누가 24: 7) 질병을 고치는 권능 (그리스도는 수 백명을 고쳤다, 마테 12: 15, 14: 15), 그리고 투시력과 투청력. (그리스도는 투시력, 요한 1: 48, 그리고 투청력, 요한 12: 29.)를 보였다.

6. 쁘라까메가... 몸을 보존하는 권능. 그리스도는 사후에 제자들 앞에 그들이 알고 있던 동일한 몸으로 분명히 다시 나타났다. (요한 20:20-27)

7. 비시뜨반... 자기 조절의 권능, 동물과 사람들을 조절하는 권능. 마귀 들린 사람들의 조절과 경사진 곳으로 달려 내려가 바다에 빠진 돼지들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마테 8, 마가 5, 마가 9)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증명했다.

8. 이샤뜨반... 일반 주권의 권능. 이것은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장되었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능들의 소유와 우리가 더 큰 것도 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예언 성취는 서양인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하는가? 라디오의 경우 음파가 방송되고 조절되고 증폭되지만, 무엇보다도 본래의 미세한 형태로 흘러들어 오는 음파를 수신기는 보강한다. 사람은 기계적인 보강 장치를 만들어 문제 없이 미묘한 음파를 수신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바로 투청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생각의 전달은 (대단히 회의적인 사람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종류의 방송과 다른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다른 “기적들”과 함께 물질 세계는 더 미세한 에너지와 힘에 의해 조절되고 더 미세한 장에서 적기에 작동하는 법을 배우면 간단히 물리적인 것과 물질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혼과 영혼의 발달을 통해, 모든 센터들의 깨어남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완성과 영광에 다가간다는 것이 인도의 오래 된 믿음이다.


제 7장 결론

이 책에서 우리는 심리학의 두 체계,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을 살펴 보았다. 이를 종합하면 우리는 사람이 살아 있는 영혼으로서 어떤 메카니즘을 통해 작용하고 있다는 완전한 그림을 얻을 것이다. 센터들이 위치한 에텔체는 미세하고 보이지 않으며, 오감의 범위를 벗어나 있고, 내분비선들과 신경계 안에서 밀도 있는 물리 영역, 즉 밀도 높은 물리적 현현의 나머지를 조절하고 있다.

혼은 항상 거대한 실재이며, 한 생명의 표현이며, 에텔체와 밀도 높은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 속에서 특화된 센터들을 진화시키고 밀도 높은 물리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에텔체에 영향을 미치고 그를 통해 작용하는 것은 바로 혼의 힘이다.

서양인에게 가장 강력한 호소력을 미치는 문제는 어떻게 수술 시에 보다 큰 효율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혼인 사람은 그의 도구의 조건에 의해 수술 효율이 제한된다. 만약 혼의 중심이 분비선, 신경계 그리고 에텔체를 조정할 수 없고 적절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면, 혼으로서 사람은 그것들을 고치거나 치유해야 한다. 인간의 분비선이 적절하게 작용하지 않아도 이를 연구, 개선 그리고 완성시키는 데에 별 진척이 없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 혼이기 때문이다.

의약의 사용을 통해 그리고 다른 수단에 의해 분비선과 신경 센터들에 직접 가하는 작용은 본질적으로 그 작동을 수정하는 것이고, 문제되는 특정인에 의해 원래 창조된 특정의 분비선과 신경 센터들의 최고 상태를 제한하는 것이다. 호흡, 만트라,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양적 수행에 의해 영향을 맏을 수 있는 에텔체 내의 센터들도 동일하며, 더더욱 진실이다. 그러한 수행들은 대단히 위험하고, 정신 이상에 이를 수도 있다. 결국 바라건데, 우리는 여러 가지 센터들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정보를 갖고 수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연구 결과로 세 가지 이론이 분명해졌는데, 사람을 생명, 자기 의식, 그리고 지성적 목적을 표현하는 유기체로 설명하는 삼중의 가설이 형성되게 되었다.

첫 번째는 분비선과 신경계에 사람은 영향을 받는다. 그의 기질, 자연적인 성질, 삶의 경험과 환경의 지성적인 처리는 그의 내분비계에 의해 결정된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강조한다.
두 번째는 에너지 센터들에 의해 사람은 영향을 받는다. 인간 내부의, 즉 에텔체의 특정한 에너지 초점의 정지 또는 활동은 그의 기질, 표현 방법, 몸의 형태와 수명을 결정한다. 물리계에서 그의 활동은 센터들을 통해 흐르는 에너지의 성질에 완전히 의존한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강조한다.

세 번째는 센터들과 아울러 분비선과 신경증은 혼이 발휘하는 조절 또는 조절 부족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우리가 물질적인 면을 모두 보이지 않고 증명될 수 없는 영역으로 내몰아갔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옳을까? 지나간 시대의 결론이 처음에는 모든 면에서 모호한 가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던가? 과거에 증명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 것이 현 시대에는 증명되었고 입증되지 않았는가? 현재 모호한 요소들을 보다 분명하게 지각하기 위해 직접 이용할 수 있는 많은 증거를 통해 적기에 충분한 방법을 채택하고 기술을 적용할 수는 없을까?

우리가 구조에 관한 사실들을 보았던 것처럼 서양은 진보하고 있다. 사람의 메카니즘은 내분비계와 신경계, 반응 장치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이 주제에 접근할 수 있고, 사람의 분비선을 다룸으로써 인체의 완성을 꾀하여 결국 사람을 혼이 충만한 빛으로 이끌 수 있을까? 또는 센터들은 혼에 대한 표현 매체이고, 신경계와 분비선들을 통해 몸의 구성과 조절을 맡고 있다는 동양적 주장을 받아들여, 승인하기 힘든 방법을 연구, 적용하여 센터들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순전히 물리적인 접근법도 아니고 미숙하게 센터들을 깨어나게 할 위험도 피할 수 있는 제 삼의 길은 있는가? 혼이 그 도구를 완전히 사용하여 센터들의 올바른 활동이 일어나는 데에 요구되는 혼과 몸 사이의 완벽한 상호작용을 이룰 수 있는 해법과 방법을 얻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사람은 하나의 혼이며, 따라서 표현 도구, 즉 삼중의 하위 본성인 심령적 정신적 상태의 총합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을 통하면 각각의 체계 중에서 가장 좋은 측면들을 전체 인류가 이용할 수 있도록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지식의 결합을 이뤄내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은 혼이고 몸을 갖고 있고, 하나의 에너지체를 통해 이 둘을 연결시키는 통일적인 매체가 있다는 작업 가설을 가정해 본다.

혼이 실존하고 기관에 활기를 준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려는 사람들은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열망과 감정, 그리고 물리적 수단을 사용해 왔던 신비가들이 있고, 보다 정신적으로 순수하게 영적인 지식에 이름기 위해 지성과 마음을 사용해 왔던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장구한 계열의 신을 아는 자들은 혼을 자아, 사랑하는 자, 하나, 또는 신, 또는 그리스도 등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存 있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들이 뭐라고 이름했는 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신비가는 단식과 과도한 수련을 통해 몸을 채찍질하고 학대했다. 그래서 그는 육적인 욕구를 줄였다. 여기에 사랑하는 자에 대한 강렬한 헌신과 일별에 대한 열망을 더했다. 격렬한 수행의 세월 끝에 찾았던 것을 발견하고 그 사랑하는 자와 통일되었다.

두 번째 집단은 이성을 사용했고, 마음 조절법mindcontrol을 수행하고, 엄격한 감정적 육체적 조절을 더했다. 집중적인 탐구를 통해서 그들도 실재를 발견했고 영원한 계획의 광범위한 의식으로 들어가 보편적인 혼과의 결합에 이르렀다.

두 집단은 모두 혼 경험의 진실을 증명하지만, 자신의 특별한 성향과 방법에 제한되었고, 그 증거는 일방적이었다. 하나는 너무 환상적이고, 신비적이며 감정적이다. 다른 것 또한 너무 학구적이고 지적이며 형구축적form-building이다. 이제, 인간 지식의 폭넓은 유포와 문헌, 대화와 왕래를 통해, 이들 간의 긴밀한 교제를 통해 최초로 융합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서양과 동양의 철학자들과 성자들의 결론으로부터 현 시대에 영적인 성취 방식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체계와 하나의 방법을 종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작 단계를 어떻게 밟는 것이 실용적인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a) 서양의 지식을 이용한 육체에 대한 분별력있는 대우, 특히 내분비계의 예방 의학과 일반 건강과 관련해서 그러하다.

(b) 현대 심리학과 붊별력있는 심리 분석의 기본적인 사실의 지적인 이해와 적용, 그래서 혼이 표현하는 정신적, 감정적 그리고 육체적 메카니즘의 지식을 얻는다.

(c) 육체는 욕망과 감정적 본성에 반응하고 그에 의해 조절되는 자동 기계이고, 그래서 (음식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신에 대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 의식의 감정적인 상태는 이성적인 마음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

(d) 이 모두로부터 마음의 법칙에 대한 연구가 성장해서 마음과 뇌 사이의 관계가 이해되고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가지 요점이 파악되어 사람의 개성에서 그 효과가 느껴지면 우리는 통합적이고 협동적인 유기체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구조는 혼이 지도할 준비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위의 단계들은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전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혼과 혼이 드러내는 세계의 완전히 지성적인 앎은 이 요약된 자질을 갖춘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신에 대한 직감, 진실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사, 그리고 신비한 광경과의 접촉은 가슴 센터가 깨어나 작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한 신의 연인들은 모든 시대에 존재한다. 그들은 느끼고, 직감하고, 사랑하며 찬미하지만, 혼, 마음 그리고 머리 사이의 연결은 부족하다. 이런 신비적 자질에 지성적인 것이 더해지면, 머리 센터는 깨어나고, 송과선은 더 이상 위축 상태에 있지 않고, 혼의 자리와 지휘하는 영적 의지의 자리로 알려지게 된다. 이 두 센터들이 모두 깨어나면 인류는 성화된 가슴과 두뇌를 갖고 일하는 영적인 개성들에 대한 큰 이해를 얻게 되고, 세계적 사상에 그들은 봉인을 남길 것이다. 지금까지는 신비가들의 방식이 다수를 위한 것이었고, 지성의 방식은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인류는 이제 그 전제를 다수의 신비한 경험에 두면서 감정과 찬미로부터 지식으로, 그리고 신의 사랑으로부터 신의 지식으로 전진할 수 있다.

이것은 동양의 지혜가 서양의 지식에 추가되고 혼의 과학의 기법이 서양의 지성적 유형에 부여되는 경우일 것이다. 이 기법을 상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8 단계로 나누어서 간단히 정리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타인과의 관계의 조절. 동양의 오계(五戒)에서 규정되어 있는 무해함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오계란 무해함, 모든 존재에 대한 진실, 절도 행위 금지, 음란 행위 금지, 탐욕의 금지. 엘리스 A. 베일리, 혼의 빛, p. 184.
이다.

2. 다섯 가지 규칙으로 요약되는 삶의 청정함: 내적 외적 정화, 만족, 열렬한 열망, 영적인 학습과 이슈와라(신성아)에 대한 헌신. 상동, p. 187.


3. 균형

4. 생명 에너지의 올바른 조절과 에텔체에 대한 혼의 직접적인 활동. 이 에너지 조절과 그로 인한 센터들과 육체의 조절은 청정함과 균형이 이루어진 뒤에만 가능하다. 그는 훈련을 통해 동물적 기질의 조절을 배우고 더 이상 노여움과 이기심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시점에 이를 때까지 에너지를 다스리는 법칙에 대한 앎이 허락되지 않든다.

5. 추상 작용. 자기 의식을 머리에 집중해서 거기서 혼으로 작용하거나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물로 나가 있는 의식을 회수해서 내면으로 돌리는 능력을 이르는 말이다.

6. 주의 또는 집중. 이것은 한 점을 향하는 살아 있는 마음으로, 감정 대신에 활동으로 방향을 돌리게 한다. 그래서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집중된 마음에 의해 조절된다.

7. 명상은 주의력이나 집중력이 확장된 것이며, 혼과 그 관심 사항에 마음을 집중하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유기체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게 만들어 “생각하는 대로, 존재한다.”는 명제의 진실을 실증한다.

8. 정관contemplation은 자기 왕국 속에서 형상들을 바라보는 혼의 행위이며, 본성 상 다섯 번째 또는 영적 왕국에서 발견되는 에너지들을 접한다. 이 행위 뒤에는 (조절된 마음에 의해서) 머리 속으로 혼의 지식과 에너지가 흘러 들어온다. 이러한 혼의 활동은 이른바 광명을 이뤄낸다. 그것은 전신을 에너지화시키고 적절한 리듬과 진보 속에서 에너지 센터들이 깨어나게 한다.

생기체와 에너지 센터들을 통해 작용하는 이 의식적으로 지휘된 영적인 에너지는 우리가 완벽한 건강과 혼의 표현을 위해 육체와 내분비계가 결국 완벽한 기관을 갖추어야 함을 제시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명확한 혼의 지식에 이를 수 있으며, 명백한 목적을 지니고 그 메카니즘을 사용할 수 있는 “더 심오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배운다.

위의 방법을 따름으로써 동서양의 위대한 신비가들, 성자들, 그리고 달인들Adepts의 삶을 연구하면 많은 환각과 정신병적 조건의 기미를 뺀 뒤에 현상적인 효과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것이다. 여러 가지 형태의 투시, 예지 그리고 텔레파시 의사소통, 투청력과 신비화된 특별한 능력을 우리는 종종 본다. 그러나 이 모든 힘들은 자신의 영적인 현현들과 하위의 현현들도 생기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A. E. 포웰은 이렇게 말한다.

“두 가지 종류, 즉 낮은 투시와 높은 투시가 있다. 낮은 것은 중앙 아프리카의 원시인들과 같이 미개발된 사람들에서 일어나기도 하는데, 특화된 기관을 통해 소통되는 정확하고 명확한 감각 지각보다는 에텔체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호하고 포괄적인 느낌의 일종이다. 그것은 실제로 인간의 조절 범위를 넘어선다. 신경계와 지나치게 밀접하게 관계맺고 있는 에텔 복체 중 하나에 대한 작용은 다른 하나에 신속하게 반응한다. 낮은 투시에서는 상응하는 신경의 교란이 교감 신경계 내에서 거의 대부분 일어난다.

보다 발전된 인종에서는 모호한 민감성은 정신 능력이 개발되면서 대개 사라진다. 그 이후 영적인 인간이 전개되기 시작하면 그는 다시 투시력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능력은 의지의 조절 아래에서 정밀하고 정확하며 감각 기관을 통해 수련된다. 신경 작용은 뇌척추계에서 거의 전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하위 형태의 심령력은 대부분 동물과 대단히 비지성적인 인간에게 자주 나타난다. 병적으로 흥분하고 통제되지 못한 심령력은 뇌 발달과 교감 신경계의 지배가 미약하고 에텔 물질의 지나친 비대화를 포함한 신경계에서 핵을 지닌 신경절 세포가 큰 핵을 지니고 있어서 조잡한 아스트랄 파동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A. E. 포웰, 에테르 복체, pp. 102. 103.


고양이와 개와 저급한 인간들은 정상적이고 보다 지적인 사람에게 나타날 수 없는 것을 빈번히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능력은 무의식적이고, 사람은 환각의 희생자가 된다. 이처럼 성자와 투시자도 보고 듣지만, 그들의 능력은 의지에 따라 이용되고, 완전히 조절된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모든 심령적 연구가들에게 열려져 있고, 생기체와 센터들의 전제를 받아들이면 실제적인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다.

다양한 센터들이 깨어나면 물리적인 것보다 더 미세한 물질의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을 혼의 과학을 가르치는 동양의 스승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이 관심을 갖는 것은 횡경막 위의 센터들이 대부분인데, 이는 자신의 동료들의 영적 지각, 정확한 이해 그리고 해석과 같은 능력을 수여하여 그리스도가 사람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와 행위하는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영감의 에너지, 즉 그 모든 것의 최상의 힘은 목 센터를 통한 창조적인 작업과 심장 센터를 통한 인도주의적 사업에 대해 영감을 준다.

이 부류에 의해 주장되는 두 번째 효과는 횡경막 아래의 힘을 위의 센터들로 옮기는 것이다. 진화와 명상의 효과에 의해 특정한 양식의 소화 기관과 생식계와 신경 메카니즘들이 작업을 진척시킬 수 있도록, 자동적으로 몸을 에너지화시키는 정상 기능을 수행하는 세 가지 하위 센터들(척추 기저, 천골 센터와 태양총)을 벗어나 세 가지 주요 차크라들(머리, 심장, 그리고 목)에 사람은 의식적으로 작용을 가할 수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대다수 사람이 “횡경막 아래”의 삶을 살고 생명력은 순전히 동물적이고 감각적인 삶에 집중되어 있으며, 성적인 생활과 감정적인 삶은 잠들어 있고, 천골과 태양총으로 그리고 거기를 통해 흐르는 모든 힘은 어떤 생리학적이고 하위 심령적 과정들을 자극한다. 그러나 사람이 진화하면서, 힘의 방향이 변한다. 우리는 그 힘이 이중적인, 즉 한편으로는 생명력이고 한편으로는 혼의 힘으로 하나는 혈액을 통해 표현되고 다른 하나는 신경계를 통해 표현된다는 것을 보았다. 생명력의 측면은 모든 몸의 기관과 구조를 생기있게 하고 능력을 부여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해 나가지만,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정적인 혼의 힘은 위로 향하기 시작한다. 척추 기저 센터의 생명력은 차례로 각 센터를 통과하여 각 지점에서 혼의 에너지를 모아 증가시키면서 척추 통로를 통해 머리로 전달된다.

이러한 의식 전달의 심리학적 효과는 흥미있다. 혼이 머리 안에서 (과학적인 동양의 서적들에 적혀 있는 것처럼) “옥좌에 앉아” 자기의 힘을 통해 척추 기저에 있는 힘을 끌어 올린다. 그러면 영적인 에너지와 물질 자체 내에 있는 힘이 혼의 인력 에너지를 통해 완전히 섞이게 된다. 이것은 쿤달리니 에너지가 오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혼의 지배적인 자기력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고 특정한 센터에 대한 명상이나 물질 에너지에 대한 의식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천골 센터의 혼 에너지는 최고의 창조 센터인 목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래서 집단을 위해 발전되는 창조 작업이 강조될 것이고, 이와 관련된 사람의 활동적인 성 생활을 강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양총 센터의 에너지는 이와 함께 심장으로 이동하여 전달되어야 하고, 의식은 더 이상 자기 중심적이지도 순전히 이기적이지도 않지만, 사람은 사람과 삶에 대한 태도에서 집단의식적이고 포용적이 된다. 그는 더 이상 적대적이고 배타적이지 않다. 그는 알고 이해한다. 그는 동정, 사랑 그리고 봉사한다. 센터와 센터 사이, 그리고 센터와 분비선 사이의 이러한 관계가 일단 파악되면 폭넓은 연구 분야가 존재하게 된다. 심령적인 효과와 아울러 생리학적인 효과는 자세한 연구를 보증할 것이다.

시대를 초월한 지혜에 대하여 공부하는 학도들이 또 다른 주장을 하는 것도 흥미있다. 사람이 목 센터가 작용하는 매우 높은 진화 상태에 이르면, 세계의 일에서 자기 위치를 갖기 시작한다. 그는 세계 활동 중의 어떤 분야에서 특정한 결과를 얻는다. 그의 개성은 체계화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고, 스스로 성숙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뇌하수체는 감정과 정신적 특성의 자리라고 말한다. 한 엽lobe에 추론적인 마음이 자리하는 한편, 다른 엽은 상상적인 감정적 능력과 시각화 능력을 담당하고 있다. 창조적인 능력을 지녀서 개발된 개성을 갖은 사람의 경우에는 뇌하수체의 두 가지 엽들은 그러한 요구를 감당할 수 있고, 혼이 움직이고 표현되는 물질적 국면의 상태, 메카니즘이 그것들로부터 유래할 수 있다. 이 분비선은 미간 센터와 관련된다. 이 센터는 혼의 에너지에 반응하는 머리 센터에 음성적이다. 개괄한 기법과 일치해서 혼이 통제력을 얻어, 머리 센터를 활성화하고 위축된 송과선을 어릴 때처럼 작용하는 상태로 바꾸면, 긍정적인 국면이 그 부분을 작동시키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센터와 그 대응 센터인 뇌하수체 사이에서, 그리고 긍정적인 센터와 그 대응 센터인 송과선 사이에서는 어떤 관계가 세워진다. 시간이 경과하면, 자기장이 세워지고, 혼과 몸이 만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관계하면 혼은 사람의 의식 속에서 탄생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신의 고향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이고, 진정한 인간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육체의 성 기관들과 그 생식 활동들은 외부적으로 구체화된 상징이다. 매우 광범위하게 만연되어 있는 성 주술의 남용은 혼과 몸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는 머리 속에 있는 두 가지 에너지 센터들 사이의 진정한 영적인 결합 또는 혼합에 왜곡을 낳는다. 진정한 과정은 머리 속에 집중된 인간 자신의 본성 안에서 진전되며, 그 관계는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신에 혼과 몸 사이에서 일어난다.

두 가지 머리 센터와 그에 상응하는 분비선들 사이의 이러한 관계에 대해 주장하는 또 다른 효과는 둘 사이의 상호작용은 빛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그들의 빛이 나타나게 하라”는 명령을 한 것을 포함해서 세계의 경전들에는 이와 관련된 확실한 증거가 많이 있다. 신비가들의 삶에서도 산적한 증거들이 있다. 이들은 저작에서 자신들이 목격해 왔던 빛을 저작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나는 일군의 학도들에게 자신들의 일의 결과로 어떤 흥미있는 현상을 알게 되었는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신경과민증 환자들과 몽상가적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보내지 않았지만, 비즈니스, 예술과 문학 분야에 종사하는 남녀에게 보내졌는데, 그들은 신뢰를 보내왔다. 75 퍼센트가 머리에서 빛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환각 상태였을까? 그들은 상상의 희생자들이었을까? 그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항상 보는 것일까?

여기에도 흥미있는 연구 분야가 있으며, 그 결과들은 지금 과학에 의해 인식되고 있는 것처럼 빛이 물질이며, 물질이 빛이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을 것이다. 만약 혼이 작용하고 있고, 사람이 그 혼과 의식적인 결합을 이뤘다면, 관련된 특별한 자극을 통해 신체의 가장 중요한 센테, 즉 머리 센터에서 육체와 관련된 주요 점에서 에텔체의 빛을 인식할 것이다. 바조니 교수는 말한다.

“우리는 지구 상에 있는 모든 형태의 물질이 92 개의 다른 종류의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모여서 분자를 이루고, 셀 수 없이 많은 것으로 결합되어 주변에서 보는 모든 체들을 형성하고, 그 물질들로 우리 몸들을 형성한다. 이제 이들 92 가지 종류의 원자 중에 어떤 하나가 과학자들이 잘 알고 있는 방식으로 자극되면, 빛, 일반적으로 색채를 지닌 빛을 방출하게 할 수 있는데, 이 빛의 본성은 92 가지 원자마다 각각 특이하고 특징적이다.” C. B. 바쪼니, 우주의 핵, p. 31.


에텔체의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우리의 문제에 어떤 빛을 던져 주는 것인가? 동서양의 고대 그림들에서 성자들과 신의 머리 주변에 있는 후광은 예술가들이 영적인 의미만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에서 깨달은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예술가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이것들은 연구되어 증명되거나 논박되어야만 한다.

혼의 제어 기법에 기초한 서양의 성취와 동양 철학에 의해 단일한 인간에 대한 설명을 찾는 두 가지 위대한 사상 학파들을 통일하는 가능성은 하나의 실험과 같다. 서양 학도가 전제로 간주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마음을 연다면, 이 책에서 제시한 논증들을 진실로 증명하거나 틀렸다고 거부하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매터링크는 다음과 같은 결과에 대해 허버트 스펜서를 인용한다.

“능력을 최대로 신장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무익한 상상이라고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헛되이 파악해 보려는 위대함을 다른 과정보다 완전히 깨달을 수 있다... 계속해서 알아내려고 하지만 앎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하면서 포기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통해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와 최고의 의무와 똑같다는 의식을 생생하게 유지할 수도 있다.” 모리스 매터링크, 빛을 넘어서, p. 95.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전망을 어느 정도 분명하게 하고, “확신을 깊게” 하면, 우리가 “살아 있고 움직이며 존재성을 갖추고 있는” 알 수 없는 본질적인 현실을 은폐하는 형태와 측면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인간 가족이든 혼의 왕국에서 시각화되고 접촉되는 형태이든, 그것이 현상 세계라는 것을 인정하면, 결국 점진적으로 (존재의 크기가 커지는) 형상들은 그 본질적인 삶에 대한 확장된 진실을 우리에게 드러내 줄 수 있다. 메카니즘이 개발되고 개선됨에 따라 우리의 신성의 개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에드워드 카펜터는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위대한 저작인 황금 가지에서 프레이저 박사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자연의 법칙들은 우리가 세계와 우주의 고상한 이름들로 위엄을 갖춰 놓은, 계속 변화하는 주마등과 같은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가정일 뿐이다. 과거의 분석에서 마법, 종교 그리고 과학은 오직 (생각의) 이론일 뿐이며, 과학이 그 선구자들을 밀어내면, 그 이후 몇 가지 더 완벽한 가정에 의해, 즉 현상을 보여 주는 스크린 위에 그림자가 나타나는, 아마 현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방법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나는 프레이저 박사가 ‘현상을 보는 방법’이 과학적인 방법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은 올바르다고 본다. 그러나 이 변화는 과학 자체의 성장에 의하거나 그 ‘전제들’의 확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슴의 성장과 확장에 의해, 그리고 그 심리학과 인식력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드워드 카펜터, 이교도와 기독교 교의; 그 기원과 의미, p. 278.


매터링크는 이것을 매우 간결하게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의 시야로부터 일광을 가리는 안개는 저지대에서만 퍼져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몸에서부터 나오는 개념들을 맑게 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존재의 협소한 한계들은 우리의 시야로부터 무한성을 가로막는다.’”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면) 초자연적인 것을 논박하고, 신비가와 투시가가 증언하는 주관적인 상태가 단지 자연 에너지와 힘을 증명하는 것일뿐이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실제적으로 암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최소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힘들을 수 세기 전에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현대 문명의 영광인 그러한 힘들을 현재 인정하고 사용할 수 없다. 이 혼의 힘들 중에서 하나가 자연적인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새로운 세계의 입구가 인류 앞에 열릴 것이다. 리어리 박사는 이것을 이렇게 평가한다.

“어떤 육체적인 구조의 활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개성의 기질, 특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미신이라고 간단히 결론지워버릴 수 있는 논점도 아니다. 그것은 널리 유포되어 있고, 감정으로 꽉 차 있고, 심리학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을 정도로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이거나 아니거나 그러한 특성이 있다면 다시 한번 언급할 가치가 있으며, 정의 또는 가정 상 구조에 기초해 있지 않고, 가장 사소하고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조금이라도 허용하면 과학의 전 분야에 불가피하게 그리고 완전히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정론이 진정한 결정론인 것은 반드시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니엘, H. 리어리 박사, 현대 심리학: 정상과 이상, pp. 191. 192.


우선 활력있는 혼과 관련된 동양 철학도의 주장이 증명되거나 논박될 수 있는 실험실이 있어야만 한다. 죽음의 현상은 혼의 철수라는 각도에서 연구될 수 있다. 물론 인체의 빛 방사는 관심을 끌어 왔다. 척추와 에너지 센터들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빠리 솔본느 대학의 바라둑 박사가 45 년 전에 몇 가지 흥미있는 작업을 했지만, 아직 새로운 연구 분야이다. 그의 책 L’Ame Vitale은 추측이긴 하지만, 암시적이고, 그의 주장은 증명될 필요가 있다.

생기체와 이것이 신경계와 분비선에 미치는 효과라는 주제 전체는 광범위한 연구 분야를 열어 놓는다. 인간의 에텔체와 신경 기관의 관계 뿐만 아니라 행성적 에텔체 또는 유기체로서 그 위치를 갖고 있는 에테르와의 관계는 아직 다루어지지 않은 분야이다.

둘째로 빈번히 증명되는 머리의 빛에 대한 사실과 본질에 대해서 증거를 모으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텔레파시의 본성에 대한 최근의 두드러진 실험들은 올바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텔레파시 기법은 아직 유치한 단계에 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의사소통 사이에 구분이 생기면 많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앞의 것은 정신적 텔레파시이지만, 혼과 혼, 그리고 혼과 뇌 사이에서 벌어지는 교신은 훨씬 더 드문 것이다. 이 후자의 형태는 영감이라고 불려 왔고, 세계의 경전들과 이른바 “영감을 받은” 저술들로 나타났으며, 위대한 발명가와 과학자들, 시인들과 예술가들의 정신적 과정들을 인도해 왔다.

텔레파시와 영감은 빛 그 자체나 라디오처럼 개별적인 인간 에텔체와 이것이 우주적 에텔체와 맺는 관계에 의존적이다. 그들은 영혼과 혼의 더 미세한 세계를 증언한다.
새로운 개혁이라는 책의 맺음말에서 푸핀은 이렇게 말한다.

“이 초물질적인 물질의 의미를 우리가 해독하려고 시도할 때 혼의 창조력은 유일한 안내자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혼을 다른 사람의 혼과 비교하고 하위의 동물의 혼과 비교하는 가장 믿을 만한 기준을 제공한다. 양적인 측정의 과학적인 방법들을 어느 정도 닮은 이러한 비교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계속되어 왔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연구 절차는 관찰, 실험 그리고 계산에 의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에 상응한다. 그것이 정밀성이 부족한 것은 주의깊은 비교 고찰에 의해 여러 세기 동안 정성적qualitative 측정을 하면서 생겨난 엄청난 시행착오들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혼이 동물 혼에 비해 훨씬 더 우월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이가 몸 구조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는 일반적인 판단에 이르게 된다. 또한 비교에 의해서 다른 모든 차별화된 요소들 위에 우뚝 솟은 한 가지 요소가 드러났다. 그것은 영적인 요소였다. 인간 혼의 창조력은 인간 의식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 세계이다.” 미카엘, 푸핀, 새로운 개혁, pp. 264, 265.


가능성이 있는 다른 연구 분야로는 인간의 오라aura에 대해 킬르너 박사가 작업을 진전시킨 것이 있다. 그는 이것을 인간의 분위기라는 책에서 구체화했다. 비범한 힘에 대해 많은 계열들의 연구를 독자들을 위해 잘 요약해 놓은 것으로는 피더랄 인디펜던트라는 호주의 정기간행물에 나오는 최신의 글이 있다. 이로부터 두 문단을 인용한다.

“아인슈타인의 최신 상대성 이론을 연구해 온 과학자가 최근에 그리스도가 물 위를 걸었던 사건을 새롭게 조명했다. 연구 결과로 H. H. 쉘던은 회의주의자들이 오랜 동안 조롱해 왔던 성경의 이야기가 과학적 법칙으로 설명 가능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기적은 회의주의적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상대성 역학의 법칙과 전기 법칙은 하나의 공식으로 환원될 수 있고, 전자기 힘이 중력에 영향을 미쳐, 이를 완전히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라고 셀던 교수는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최근 수학 이론에 따르면, 오직 하나의 본체가 있으며, 전기 및 중력 성분을 포함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법칙이 있고, 양자는 모두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이제 이러한 발견이 이루어진 결과로써 비행기를 엔진이나 물질적인 지지 없이 고도를 유지시키고 창에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공중에서 걸어나오는 일들이 쉽게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연구 분야라고 셀던 박사는 믿고 있다. ‘만약 이 이론이 전기와 중력이 사실상 같다는 것을 증거로 세운다면 우리는 실제로 중력 에너지로부터 우리 자신을 격리시킬 수 있다’고 그는 선언했다. 이러한 믿을 수 없어 보이는 가능성의 실제적인 증거로 쉘던 박사는 자기에 민감한 퍼멀로이(니켈과 철의 합금) 막대기가 자석 밑에 놓이면 어떻게 공중에 혼자 매달리게 되는지를 들었다.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이론적 조명으로 발이 물 표면에 닿자마자 밑으로 가라앉게 하는 중력 법칙에서 그리스도가 자유로웠던 것은 몸 속에 막대한 양의 전자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이것은 그의 개성과 생명력으로부터 솟아나는 어떤 에너지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모든 그림에는 머리 주변에 후광이 그려져 있다. 한때 이 후광은 그의 사도들이 과도하게 상상한 결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심령 현상을 연구한 많은 학도들과 함께 과학은 모든 인간에게 어떤 강력한 전기 기계에서 방출되는 발광과 흡사한 후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실제적인 실험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러한 주장은 과학이 영적인 일들과 물질적인 것을 구분짓는 경계선을 급속히 관통하고 있다는 진전된 증거이다. 일단 상위 법칙의 지식은 하위 법칙들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진정한 영적인 유산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종교가 과학적인 근거에 서게 될 그 날의 여명을 고대하고 있으며, 푸핀 박사가 덧붙여 말한 것처럼 여러 시대 동안 목격한 진실들이 증명되고 입증될 것이다.

“그렇다, 신의 영적인 현실들은 볼 수 없지만, 형성되어 있는 물리적인 사물들 속에서 드러나는 물리적 실재에 의해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게 된다. 사도의 말에 대한 이런 해석에 따르면 물리적인 현실과 영적인 현실은 서로를 보완한다. 그들은 동일한 현실의 두 가지 극단terminals으로, 한 극단은 인간의 혼 속에 거주하며 다른 것은 외적 세계의 사물 안에 있다. 과학과 종교가 왜 서로를 보충해야 하는지 기본적인 이유 한 가지가 여기에 있다. 그것들은 신성이 거주하는 세계로 인간 혼이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두 개의 기둥이다.” 미카엘 푸핀, 새로운 개혁, p. 272.


그때 새로운 능력, 새로운 이상, 신과 물질에 대한, 생명과 영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지닌 새로운 인종이 출현할 것이다. 그 인종을 통해 그리고 미래의 인류를 통해 메카니즘과 구조와 아울러 그 메카니즘을 사용하여 그 자신의 본성, 즉 사랑, 지혜 그리고 지성을 나타내는 혼, 즉 본체도 알게 될 것이다.

과학은 이 궁극적인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진화 과정의 경향은 형상과 생명 사이의 보다 완벽한 적응을 향해 가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 왔다. 모든 창조를 통해 모든 곳에서 한 가지 목적이 작용하고 있으며. 완벽을 향한 의지가 현현하고 있다. 그 목적과 의지는 사랑과 지혜에 의해 조절되고 그 두 가지 형태의 에너지, 즉 영혼의 목적과 혼의 견인력은 물질 측면의 완성에 지성적으로 적용되어 있다. 영혼, 혼 그리고 몸의 성스러운 삼개조(triplicity: 삼위일체)는 세계 속에서 풍부한 심상, 색채, 형태로 현현하고, 세계의 경전 속에서 인류를 위해 표현된 완성을 향해 모두 전진해 갈 것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브라우닝의 환상과 묘사는 우리의 연구 결과를 요약해 줄 것이고, 이 글을 끝맺는 데에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신은 새롭게 하시니
고대의 환희를. 그래서 모든 것 속에 살고,
생명의 순간적인 시작으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는 이 계획의 완성
존재의 그것, 그의 특성들은 여기로 그리고 저기로
가시적인 세계 도처에 흩어졌으나,
결합되기를 청하였네, 희미한 단편들이 원했으니
어떤 경이적인 전체 속에서 결합되기를
불완전한 성질이 창조를 모두 경과하여
하나의 피조물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이 모든 흩어진 광선들이 만나야 하는 어떤 점
사람의 능력 속에 수렴되는...
모든 종족이 똑같이 완성될 때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모두가 인류를 향해
그리고 그 목적을 만들어 저 멀리 두었네
그러나 완성된 인간 내면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신을 향한 성향. 예언은 말했으니
사람의 근접함을, 그래서 사람은 자아 속에서 일어나
8월의 대망, 상징, 유형들
희미한 광채 중에 계속 전진해 가는
저 영원한 원 속에서 생명은 추구하네.
사람들이 자기 본성의 경계를 통과하기 시작하여
확실히 바뀐 새로운 희망과 돌봄 발견하고
적절한 기쁨과 슬픔, 너무나 크게 자라네
옳고 그름의 편협한 신조, 사라지고
측량하기 힘든 선에 대한 갈증 앞에, 평화
그들 내면에서 점점 더 상승하네.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지구에 있구나,
평온히. 반쯤 이룬 피조물들의 라운드 가운데에” 로버트 브라우닝, 파라켈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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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근본 명제 (The Three Fundamental Propositions)

SD의 서문(Proem)에서

 

I. 모든 곳에 존재하고(Omnipresent), 영원하며(Eternal), 끝이없고(Boundless), 변하지 않는(Immutable) 원리(Principle).

이에 대해서는 어떤 억측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를 표현하거나 비유하려 하는 경우, 그 내용은 왜소해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 만두캬(Mandukya, 옴이라는 말을 다룬 우파니샤드<고대 인도의 힌두교 철학책>)의 말대로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개념을 일반 독자에게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모든 현현되고 조건 지어진 존재 이전에 하나의 절대 실재(one Absolute Reality)가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이 무한의 영원한 원인(the Infinite and Eternal Cause) --- 현 유럽의 철학에서 무의식(Unconscious) 및 알 수 없는(Unknowable)이라고 희미하게 정의된 --- 은 존재하는 모든 것 또는 존재할 모든 것의 뿌리없는 뿌리(the Rootless Root)이다.

그것은 물론 어떤 속성(attribute)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현현된 유한한 존재와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그것은 존재(Being)라기 보다는 있음 그 자체(Be-ness) --- 산스크리트 어로는 Sat --- 이며, 모든 생각과 억측을 초월한다.

이 있음 그 자체는 SD 안에서 두 가지 면에서 상징화하였다. 하나는 절대적인 추상공간(absolute Abstract Space)으로서, 순수한 주관성(subjectivity)을 나타내며, 어떤 인간의 개념도 그것을 빼놓을 수 없으며, 누구도 그것없이 생각할 수 없다. 또 하나는 절대적인 추상운동(absolute Abstract Motion)으로서 조건지어지지 않은 의식(Unconditioned Consciousness)을 나타낸다.

서양의 사상가들도, 변화 없이는 의식을 인지할 수 없고, 운동(motion)은 그 핵심적인 특징인 변화를 가장 잘 상징한다고 말해왔다. 유일실재(the one Reality)의 이 측면은 큰 숨결(Great Breath)이라는 용어로 상징되기도 한다. 이 상징은 너무도 생생하여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따라서 SD의 첫번째 근본 공리(Axiom)는 이 형이상학적인 하나의 절대 있음 그 자체(One Absolute Be-ness) --- 신학의 삼위일체처럼 유한한 지성으로 상징되는 --- 이다.

 

II. 끝이 없는 영역으로서의 우주 전체(the Universe in toto)의 영겁성(eternity);

현현하는 별(Manifesting Stars) 및 영원의 불꽃(Sparks of Eternity)이라고 불리는, 주기적으로 끊임없이 현현하고 사라지는 무수한 우주의 놀이터. 신지(神智)의 서(Book of Dzyan)에서 말하듯이, 순례자의 영겁은 자존(自存, Self-Existence)의 눈 깜빡임과 같다. 세상의 출현과 사라짐은 밀물과 썰물의 정기적인 교차와 같다.

SD의 이 두번째 표현은 물리학이 자연의 모든 영역에서 관찰하고 기록한, 주기성 법칙(law of periodicity)의 절대적인 보편성을 보여준다. 낮과 밤, 삶과 죽음, 잠과 깸과 같은 교차는 너무도 흔한 사실이고, 완전하게 보편적이며, 예외가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 절대적인 우주 법칙의 하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III. 모든 혼은 근본적으로 우주의 전체혼(the Universal Over-Soul)과 동일하다(Identity)는 원리.

우주의 전체혼은 미지의 뿌리(the Unknown Root)의 한 측면이다. 전 기간 동안 주기(Cyclic) 및 카르마(Karmic) 법칙에 따라서, 육화(Incarnation) 또는 필연(Necessity)의 주기를 통하여 개개의 혼 --- 전체혼의 한 불꽃 --- 이 의무적으로 걸어야 하는 순례. 다시 말하면, 우주의 제6원리(the Universal Sixth Principle) --- 또는 전체혼 --- 의 순수 본질에서 비롯된 불꽃이⒜ 만반타라(Manvantara, pralaya(휴식) 사이의 현현의 기간으로서 브라마의 하루 --- 4,320,000,000 태양년에 해당한다 --- 를 지칭한다.

Manvantara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①prakritika manvantara -- universal manvantara, ②saurya manvantara -- solar system manvantara, ③bhaumika manvantara -- earth manvantara, ④paurusha manvantara -- manvantara of man) 동안 현상계에 있는 모든 원소 형태를 두루 거치고,⒝ 처음에는 자연적 충동에 의해서 그리고 나중에는 스스로 유도하고 고안해 낸 노력에 의하되 카르마에 의해 균형을 잡으며 개체성(individuality, Higher or Divine Ego를 지칭함)을 획득함으로써, 모든 수준의 지성을 통하여 상승 --- 가장 낮은 것에서부터 가장 높은 마음(Manas)에 이르기까지, 광물과 식물에서부터 가장 신성한 대천사(Dhyani-Buddha)에 이르기까지 --- 하기 전에는, 순전히 영적인 부디(Buddhi, Divine Soul)가 독립적으로 의식적인 존재를 취할 수 없다.

긴 세월동안 재생과 윤회를 거쳐 개인적인 노력과 공덕으로 쌓은 자아(Ego,비전철학에서는 두가 지 Ego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개인적이고 죽는 personality이고, 다른 하나는 신적이고 불멸하는 Individuality이다)에 의한 특권이나 특별한 선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비전철학(秘傳哲學, Esoteric Philosophy)의 주축이 되는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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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소리

The Voice of the Silence

 서          론



   다음에 있는 내용들은 동양의 신비가들 수중에 있는 문헌들 중의 하나인

"금잠의 서(The Book of the Golden Precepts)"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들에

게 있어서 그것들을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며, 많은 신지학도들은 그 가르

침들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이 금잠들의 많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번역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인도에서는 심령 능력을 개발하는 방법이 구루(스승)에 따라 다르다는 것

은 잘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속해 있는 학파가 서로 다를 뿐만 아니

라, 그 스승들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것을 철저히 비밀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 너머에 있는 비

교학파(秘敎學派)에서는 구루가 제자들보다 조금 더 알고 있는 라마승의 경

우가 아니면, 그 방법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내가 여기에 번역한 내용은 "씨크릿 독트린"의 토대가 된 "지혜의 서"의

스탠져를 발췌한 원전과 맥이 같은 것이다. 나가르주나(Nagarjuna)의 전설에

따르면 "나가(Naga)"에 의해서 위대한 아라한(Arhat)에게 주었다는, 신비한

문헌인 "파라마르타(Paramartha)"와 같이, 이 "금잠의 서"는 원전이 같은 것

이다. 그러나 그 사상과 금언들은 숭고하고 독창적이지만 종종 산스크리트

문헌들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최고의 비교(秘敎) 문

헌인 "즈나네쉬바리"에서 크리슈나가 제자 아르쥬나에게, 완전하게 깨달은

요기(Yogi)의 상태를 휘황찬란한 색채로 묘사한다. 그 밖에도 우파니샤드에

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타마 붓다의 첫 제자들인

위대한 아라한들 대부분은 몽고계통의 사람들이 아닌, 특히 티벳으로 이주한

힌두인들과 아리안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아상가에 의해서 맡겨진

문헌들만 해도 상당히 많다.

   원래의 금언들은 얇고 길쭉한 사각형의 판에 새겨져 있다. 복사본들은 주

로 원판에 새겨져있다. 이 판들은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요가챠리아 학파) 본

당에 붙어있는 사원의 제단 위에 보존되어 있다. 다양한 표기 방식으로 쓰여

졌는데, 티벳어로 쓰여지기도 하였고, 대부분은 표의문자로 쓰여졌다. 성어

(聖語:Senzar)는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알파벳을 가지고 있었으며, 표음문

자보다는 표의문자의 성질을 띈 다양한 방식의 암호문자들로 쓰여졌다. 또

다른 방법은 숫자와 색채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각각의 숫자와 색채는 그것

에 해당하는 티벳 문자--30개의 단음자와 74개의 복음자로 구성--가 있어서

하나의 완전한 암호문자를 이룬다. 표의문자로 쓰여졌을 경우에는 본문을 읽

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 이런 경우 점성학에서 사용되는 상징과 부호들, 즉

12 궁도와 7원색(七原色)이 사용되며, 7원색은 각각 명암의 정도에 따라 밝

은 색, 원색, 어두운 색으로 나뉘어져, 말이나 문장을 쓰는데 사용되는 33자

를 나타낸다. 이 방법으로 12 궁도를 다섯 번 반복하고 오원소(五元素)와 7

원색을 첨가하면 60개의 성스러운 글자들과 12개의 부호들로 구성된 완전한

문자가 된다. 문헌의 첫머리에 놓여있는 부호가 읽는 방법을 결정하는 데,

각각의 단어가 단순히 산스크리트어 방식일 때는 인도식에 따라 읽으면 되

고, 혹은 중국식에 따라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쉬운 방법은 비전을

받은 신비가들이나 그들의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부호나 상징들 자체가 아라

비아 숫자들이나 그림처럼 독자가 어떤 특별한 언어나 혹은 그가 특히 선호

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읽는 방법이다. 중국어 표기 방법 중에 하나로

이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한자에 익숙한 사람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어있다. 예를 들면 중국 사람이 그 자신의 언어로 쉽게 읽듯이,

일본 사람도 자기 자신의 언어로 쉽게 읽을 수 있다.

   "금잠(金箴)의 서"--일부는 불교이전 시대의 것이고, 다름 부분은 그 이

후에 쓰여진 것으로--는 약 90여개의 소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 중

에 39개는 수년 전에 내가 완전히 터득했다. 나머지 부분들은 번역하기 위해

서 지난 20년간 수집해서 정리해 놓지 않은 엄청난 양의 자료들 사이에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기록들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

었다. 또한 감각의 대상에 너무 집착해 있으며,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되어버

린 오늘날, 올바른 정신으로 그런 고결한 윤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 세상에 그것들을 모두 번역해서 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자기지식의 탐구를 위해서 모든 시련을 인내할 마음이 없다면, 이러한 가르

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동양 문헌들 속에서, 특히 우파니샤드 속에서 그러한 윤리들이 주

를 이루고 있다. 크리슈나가 제자 아르쥬나에게 말하길, "삶에 대한 모든 욕

망을 없애라." 그런 욕망은 "죽지도 않으며, 죽임을 당하지도 않는 영원히 불

멸"인 대아(Self) 속에는 머무르지 않으며, 자아 구현의 매개체인 육체 속에

만 있다.(카토파니샤드) '수타 니파타'에서도, "감각을 죽여라."라고 가르친다.

"쾌락과 고통, 득과 실, 승리와 패배를 똑같이 보아라." 또한 "영원한 것 속

에서만 안식처를 구해라." 크리슈나가 여러 가지 형태로 되풀이해서 말하는

"분리감을 없애라." "산만한 감각들을 따르는 정신(manas)은 마치 바다 위에

서 바람이 부는 대로 표류하는 배처럼, 혼(Soul)--붓디(Buddhi)--을 무기력

하게 만든다."(바가바드기타, II, 67)

   그러므로 신지학회에 몇 안되는 진정한 신지학도들에게 가장 적합하리라

고 생각되며, 그들의 필요에 부응할 것으로 확신되는 논문들 중에서 선별하

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다. 고급자아(the Higher Self)인 크리슈나-크

리스토스(Krishna-Christos)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뿐이다.

   "현자는 살아있는 자를 위해서도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하지 않는다.

나도 그대들도, 사람들의 지배자들도 결코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후에

도 우리는 모두 영원히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바가바드기타, II, 11, 12)

   이 번역에서 원문의 특색인 시적인 아름다움과 이미지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이 노력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다.

                                                            1889

                                                            H. P. B.


 1. 침묵의 소리


1. 여기에 있는 이 가르침들은

저급의 "이디(iddhi)"의 위험을 모르는

제자들을 위한 것이도다.

2. "나다(nada)"의 소리,

 '소리없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자는

"다라나(Dharana)"의 본성을 터득해야 하느니라.

3. 지각의 대상들에 대해 무관심해진 자는

감각들의 '라자(Raja)',

즉 환영을 일깨우는 자이며

생각을 만들어 내는 자를 찾아야 하느니라.

4. 정신(Mind)은 실재를 말살하는 자(者)이도다.

5. 제자로 하여금 그 말살자를 말살하도록 하여라.

왜냐하면;

6. 그가 꿈속에서 보는 모든 형상이

깨어나면 비현실적으로 보이듯이,

그 자신의 형상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때;

7. 그가 수많은 소리를 듣는 것을 멈추었을 때,

그는 외면의 소리를 없애는 내면의 소리,

'절대 유일자'를 인식하게 될 것이니라.

8. 그때 비로소 그는 

허위의 세계인 '아사트(asat)'를 버리고,

진실의 세계인 '사트(sat)'로 들어서게 되느니라.

9. 혼의 눈이 열리기 전에

먼저 내면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육체의 눈은 모든 환영에 눈이 멀어야 하느니라.

10. 혼의 귀가 열리기 전에

맹호의 포효 소리도

속삭이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아야 하고,

노호하는 코끼리들의 울음소리도

개똥벌레의 청아한 날갯짓 소리처럼 들리지 않아야 하느니라.

11. 혼이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게 되기 전에,

마치 점토로 빚은 형상이 먼저 도공의 마음과 일체가 되듯이,

그의 혼은 '침묵의 소리를 내는 자'와 하나가 되어야 하느니.

12. 그때가 되서야 비로소

혼은 듣게 될 것이고 기억하게 될 것이로다.

13. 그러면 그때 내면의 귀에

'침묵의 소리'가 속삭이며 말할 것이도다.

14. 만약 그대의 혼이

그대의 삶의 햇빛을 듬뿍 받고 있는 동안에 미소짓는다면;

만약 그대의 혼이

육체와 물질이라는 껍질 속에서 노래를 부른다면;

만약 그대의 혼이

환영의 성(城) 속에서 울고 있다면;

만약 그대의 혼이

그대의 스승(Master)과 그대를 묶어주는

은줄을 끊으려고 애쓰고 있다면;

오, 제자여!

그러면 그대의 혼은

이 지상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15. 피어나고 있는 그대의 혼이

이 세상의 소란에 귀 기울일 때;

'거대한 환영'의 커다란 울음소리에 대답할 때;

고통의 뜨거운 눈물을 보고 놀랐을 때;

고뇌의 울음소리에 귀가 먹었을 때;

그대의 혼은 겁 많은 거북이처럼

'자기 자신'이라는 갑각(甲殼) 속으로 쑥 들어 가도다.

오, 제자여,

그대의 혼은

침묵하고 있는 '신(God)'이 머물기에는

무가치한 성소라는 것을 배워야 하느니라.

16. 그대의 거만한 힘이 점점 더 강해질 때,

그대의 혼은 안전한 피난처로부터 빠져 나와

그 혼을 보호하고 있는 성소로부터 떨어지게 되고,

은줄을 연장하며 앞으로 달려 가도다.

공간의 파장 위에 있는 그 형상을 보면서 속삭이길

"이것이 나로구나." 하도다.

오, 제자여,

그대의 혼이

망상의 거미줄 속에 잡혀 있다는 것을 나타내 도다.

17. 제자여, 이 세계는 '비애의 전당'으로,

"대이설"이라는 망상으로

그대의 대아(大我)를 유혹하는 함정들이

혹독한 시련의 길을 따라서 도사리고 있도다.

18. 오 무지한 제자여,

이 세계는 단지 여명에 이르는 음울한 입구로,

그 여명 너머에는 진정한 빛의 계곡이 있도다.

그 빛은 어떤 바람에도 꺼지지 않으며,

심지나 기름이 없이 타는 그런 빛이도다.

19. '대법(大法)'은 말하도다:

"모든 자아를 아는 자가 되기 위해서,

그대는 먼저 자신의 자아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하느니."

그 진아를 깨닫기 위해서

그대는 소아를 버리고 '무아(non-self)'가 되어야 하며,

존재를 버리고 '비존재(non-being)'가 되어야 하느니.

그러면 그때 그대는 비로소 '대붕(大鵬)'의 날개 사이에서 안식할 수 있도다.

아!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영원 동안 '옴(AUM)'인

그 대붕의 날개 사이에서의 안식은 너무나 달콤하도다.

20. 만약 그대가 알고 싶거든, 생명의 대붕에 올라탈지어다.

21. 만약 그대가 살고 싶거든, 그대의 삶을 포기해야 할지어다.

22. 오 지친 순례자여,

세 개의 전당은 그대를 고뇌의 종말로 이끄도다.

오, 마라(Mara)의 정복자여!

세 개의 전당은 세 가지 의식상태를 거쳐서

그대를 네 번째 상태로 이끌며,

그래서 영원한 안식의 세계인

일곱 가지 세계로 인도할 것이로다.

23. 그 세 개의 전당을 알고 싶거든

귀 기울여 듣고 명심해야 하느니라.

24. 첫 번째 전당의 이름은 무지, '아비디야(Avidya)'이도다.

25. 그 전당 속에서

그대는 빛을 보고, 살고 죽는도다.

26. 두 번째 전당의 이름은 '배움의 전당'이니라.

그 속에서 그대의 혼은

생명의 꽃들이 만발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로다.

그러나 그 꽃들 밑에는 뱀이 똬리를 틀고 있도다.

27. 세 번째 전당의 이름은 '지혜'로

그 방 너머에는 파괴할 수 없는 전능의 샘인

'아크샤라(Akshara)'의 끝없는 대해가 펼쳐져 있도다.

28. 그대가 첫 번째 전당을 안전하게 지나고 싶거든,

그대의 마음은 그곳에서 타오르는 욕정의 불길을

생명의 빛으로 혼동하지 않도록 해야하느니라.

29. 그대가 두 번째 전당을 안전하게 건너고 싶거든,

그곳에 피어있는 감각을 마비시키는

꽃의 향기를 들이마시기 위해서 멈춰 서서는 안되느니라.

그대가 '카르마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한다면,

그런 환영(幻影)의 세계에서 그대의 스승을 찾지 말아야 하느니라.

30. 지혜로운 자는 감각의 유원지에서 지체하지 않는 도다.

31. 현명한 자는 환영의 달콤한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도다.

32. 지혜의 전당에 그대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 줄 스승을 찾아라.

그 지혜의 전당 너머에서는 모든 환영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의 빛이 영원히 스러지지 않는 영광을 발하며 빛나도다.

33. 제자여, 창조되지 않은 그것이

지혜의 전당에 거주하고 있듯이,

그대 안에도 거주하고 있도다.

그대가 그것에 도달해 둘을 융합하고 싶거든,

그대가 입고 있는 환영의 어두운 옷을 벗어버려야 하느니라.

육체의 소리를 죽이고,

진리의 빛과 그대 사이에

감각의 이미지가 끼여들지 않도록 하면

그 둘은 하나로 합쳐지리라.

그리고 그대 자신의 '아즈나나'를 깨달아

배움의 전당으로부터 도망쳐라.

이 전당은 거짓된 아름다움 속에 있어서 위험하며,

그대의 수련을 위해 필요할 뿐이도다.

제자여, 눈부신 환영의 광채에 현혹되어

그대의 혼이 거기에 머물러서

허위의 빛에 갇히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느니라.

34. 이 허위 빛은

'마라'에 박혀있는 보석으로부터 빛나도다.

그것은 감각을 현혹시키며,

정신을 맹목으로 만들며,

주의하지 않는 자를 파멸에 이르게 하도다.

35. 등잔불의 눈부신 불꽃에 현혹되어 이끌린 나방은

끈적끈적한 기름에 빠져 사라지게 되도다.

환영이라는 악마와 싸워보지도 못한, 부주의한 혼은

마라의 노예로서 지상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도다.

36. 떠도는 혼들의 무리를 보아라.

인생이라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를 배회하다가,

지치고 날개가 부러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서 하나씩 둘씩 떨어지는 것을 보아라.

광풍에 휩쓸리고, 돌 바람에 쫓긴 채로,

그들은 회오리바람 속으로 떠내려 들어가서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가도다.

37. 지혜의 전당을 통해서 '지복의 계곡'에 도달하고 싶거든,

제자여! 

그대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떼어놓는 무서운 대이설로부터

그대의 감각의 문들을 굳게 닫아 버려라.

38. 마야의 바다에 섞여져 있는,

"천상에서 태어난" 자아가

"우주혼"으로부터 떨어지게 해서는 안되고,

불(火)의 힘이 가장 깊은 방인 마음의 방 속으로

그리고 세계의 어머니가 거처하는 곳으로

깊이 들어가도록 해야 하느니라.

39. 그 힘이 "유일(唯一) 혼"의 숨결인

만물을 채우고 있는 소리,

즉 그대의 "대아"의 목소리가 될 때.,

그때 마음으로부터

그 힘이 두 눈 사이인 미간(眉間),

즉 여섯 번째 영역으로 솟아오를 것이로다.

40. 그때가 되서야 비로소

그대는 파도 위로 부는 바람을 타는

"하늘을 걷는 자"가 될 수가 있으며,

그의 발은 물에 젖지 않는 도다.

41. 그대가 신비의 소리라는

사다리의 윗 계단에 발을 내려놓기 전에,

그대는 "내면의 신"의 소리를 일곱 가지로 들어야 하느니라.

42. 첫째 소리는

나이팅게일의 짝이 서로 헤어질 때 부르는

감미로운 소리와 같도다.

43. 두 번째 소리는

반짝이는 별들을 일깨우는

'디야니스'의 은빛 심벌즈 소리로 들리 도다.

44. 그 다음은

조개 속에 갇혀 있는

바다 요정의 슬픈 멜로디와 같도다.

45. 그리고 네 번째 소리는

'비나(Vina)'의 음률과 같도다.

46. 대나무 피리 소리와 같은 다섯 번째 소리가

그대의 귀속에서 울리 도다.

47. 그리고 그것은 우렁찬 트럼펫 소리처럼 변하도다.

48. 마지막 소리는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처럼 진동하여 퍼져나가 도다.

49. 이 일곱 번째 소리는

다른 모든 소리들을 삼켜버릴지니.

그 소리들은 사라져 버리고,

그리고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도다.

50. 그 여섯 가지 소리를 죽여서,

그것들을 대아(스승)의 발 밑에 놓았을 때,

그때 제자는 "유일자"와 하나가 되어,

그 유일자가 되고, 그리고 유일자 안에서 살게 되리라.

51. 그대가 그 길로 들어서기 전에

그대는 그대의 "아스트랄체"를 없애버려야 하고,

그대의 "멘탈체"를 깨끗이 해야하며,

그리고 그대의 마음을 정화해야 하느니.

52. 깨끗하며 투명한 영원한 생명의 순수한 물은

폭풍우의 진흙탕과 섞여질 수가 없도다.

53. 연꽃의 가슴속에 있는 아침 햇살 속에서 빛나는

천상의 이슬방울이 땅 위로 떨어졌을 때,

한 조각의 진흙이 되도다.

보아라! 

진주가 이제는 한낱 작은 진흙 조각이 되었도다.

54. 그대의 깨끗하지 않은 생각들이

그대를 압도해 버리기 전에,

그것들과 싸워라.

그것들이 그대를 이용하듯,

그대도 그것들을 이용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약 그대가 그 부정한 생각들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것들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그대를 압도해 버리고

그리고 그대를 죽일지니!

잘 명심할지어다. 제자여!

부정한 생각들의 그림자일지라도

가까이 못 오게 하여라.

왜냐하면 그것은 점점 더 크게 자라서 힘이 강해질 것이고,

그러면 그대가 시커멓고 더러운 괴물의 존재를 미처 깨닫기 전에,

이 암흑의 존재는 그대를 삼켜버릴 것이도다.

55. "신비한 힘"이

그대를 신으로 만들기 전에, 제자여!

그대는 먼저 그대의 의지대로

그대의 아스트랄체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얻어야만 하느니라.

56. 물질적인 자아와 영적인 대아는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도다.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하느니.

두 개의 자아를 수용할 수 있는 곳은 없도다.

57. 그대의 혼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개성의 싹을 잘라 없애야 하고,

감각의 벌레를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없애 버려야 하느니라.

58. 그대 자신이 길 자체가 되서야

그 길로 여행을 할 수 있도다.

59. 연꽃이 아침해를 마시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듯이,

그대의 혼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여라.

60. 고통받는 자가 흘리는 고통의 눈물을

그대가 닦아내기 전에,

강렬한 태양으로 하여금

고통의 눈물을 한 방울이라도 마르게 해서는 아니되도다.

61. 그 뜨거운 고통의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그대의 마음에 받아 거기에 그대로 있게 해야 하며,

그 눈물을 일으키게 한 고통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그 눈물을 결코 닦아내서는 아니되도다.

62. 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그대여!

이 눈물들이야말로

불멸의 자비의 들판을 기름지게 하는 시냇물이니라.

보가이 나무의 꽃보다 보기 힘들고 찾기 어려운,

한밤중에 피어나는 '붓다의 꽃'이 자라나는 곳은

바로 그러한 땅이도다.

그 꽃은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씨앗이도다.

그 꽃은 아라한을 고뇌와 욕망으로부터 단절시키고,

그를 존재의 들판을 통해서

침묵과 비존재의 세계에서만 알려진 평화와 지복으로 인도하리라.

63. 욕망을 없애라.

그리고 그것이 다시는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완전히 없애야 하도다.

64. 삶에 대한 애착을 없애라.

그러나 그대는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에서가 아니라,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

"탄하"를 없애도록 하여라.

65. 아무 것도 바라지 마라.

카르마에 대해서도,

대자연의 변치 않는 법칙들에 대해서도 고뇌하지 말지어다.

오직 사적이며 덧없고, 일시적이며 소멸해 갈 것들과 맞서 싸워라.

66. 자연을 돕고 자연과 함께 일해라.

그러면 자연은 그대를 그녀의 창조자들 중의 하나로 여기며

복종할 것이로다.

67. 그러면 자연은 그대 앞에

그녀의 비밀의 방들의 문을 활짝 열고,

그대 눈앞에

그녀의 순결하고 깨끗한 가슴속 깊이 숨겨져 있는

보물들을 드러내 보일 것이도다.

물질의 손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은 그녀는,

결코 눈을 감지 않으며

대자연의 모든 왕국에서

어떤 것도 가릴 수 없는 눈인

'대령(大靈)의 눈'에만 그녀의 보물들을 보여주리니.

68. 그런 다음 그녀(자연)는 그대에게

첫 번째 문, 두 번째 문, 세 번째 문 그리고 일곱 번째 문까지 이르는

방법과 길을 보여줄 것이도다.

그리고 그 목적지--

그 목적지 너머에는 혼의 눈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보여진 적이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영광이 대령의 태양 빛 속에 놓여 있도다.

69."도(道)"의 길로 들어서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도다.

그 길의 끝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다.

지원자가 오르는 사다리는

고통과 괴로움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일지니.

이 고뇌는 오직 미덕의 소리에 의해서만 잠잠해질 수 있도다.

그러나 제자여!

만일 그대가 아직도 버리지 않은 단 하나의 악이라도 있다면...

애석하도다! 

왜냐하면 그때 그 사다리는 무너져 그대를 내던져 버릴지니.

그 사다리는 그대의 죄악과 과오라는

깊은 수렁 속에 발을 내리고 있으며,

그대가 이 광활한 물질의 대심연을 건너가기 위해서

그대는 먼저 "단념(Renunciation)의 대해(大海)"에

그대의 발을 씻어야 하느니라.

아직도 더러움이 남아있는 발을

사다리의 가장 낮은 계단에 올려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느니라.

감히 진흙이 묻은 발로 사다리를 더럽히는 자에게는

재앙이 있으리니.

부정하고 끈적끈적한 진흙이 순식간에 말라서 굳어지면,

그대의 발은 그 자리에서 달라붙어,

교활한 새 사냥꾼의 덫에 잡혀있는 새처럼,

그대는 더 깊은 영적 진보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로다.

그대의 악들이 형체를 이루어 그대를 끌어내릴 것이도다.

그 죄들은 해가 진 후 울고 있는 재칼처럼,

죄악의 목청을 돋구리라.

그 생각들은 군대가 되어


그대를 그들의 노예로 사로잡으리라.

70. 제자여!

성스러운 여행의 첫 발을 내딛기 전에

그대의 욕망들을 없애고

그대의 죄악들을 무력하게 만들어라.

71. 그대가 사다리에 한발을 들어 올려놓기 전에

그대의 죄악들을 목졸라 영원히 잠재울지어다.

72. 그대의 생각들을 침묵시키고,

그대가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느끼고는 있는

그대의 "대아(스승)"에게 그대의 모든 관심을 고정시켜라.

73. 그대가 적에 대항해서 안전하길 원한다면,

그대의 모든 감각들을 하나의 감각으로 융합시켜야 하도다.

그대의 뇌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바로 그 감각에 의해서만

그대의 대아에 이르는 가파른 길이

희미한 그대의 혼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도다.

74. 제자여, 그대 앞에 있는 길은 멀고도 험하도다.

그대가 버리고 온 과거에 대한

단 하나의 생각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그대를 끌어당길 것이며,

그대는 처음부터 다시 올라가야만 할 것이도다.

75. 그대 속에 있는 지난 날의 경험들에 대한

모든 기억을 없앨지어다. 뒤를 돌아다보지 말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길을 잃을 것이도다.

76.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물리게 하면,

그 욕망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을 믿지 마라.

왜냐하면 이것은 마라의 가증스러운 현혹이기 때문이도다.

꽃의 심장을 먹고 자라는 벌레처럼

욕망은 악을 먹음으로써 점점 더 커지고 강해지도다.

77. 장미는 기생충이 그 심장을 다 먹어치우고

생명의 액을 다 빨아먹기 전에

어버이 줄기에서 태어난 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느니라.

78. 금단의 나무는

폭풍우에 의해 그 줄기가 시들기 전에

보석 같은 싹들을 피우도다.

79. 제자는 첫 번째 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리기 전에

그는 먼저 그가 잃어버린 순진한 어린아이 상태를

다시 되찾아야 하느니라.

80. "유일의 대아(ONE Master)"에서 발하는 빛,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한줄기의 대령의 황금빛은

시초부터 제자에게 눈부신 광선을 퍼부었도다.

그 빛줄기는 두텁고 어두운 물질의 구름을 뚫고

가느다랗게 내려 오도다.

81. 깊고 빽빽한 정글의 숲을 뚫고  대지를 비추는 햇살처럼,

이 빛줄기는 이곳 저곳에서 물질계를 비추도다.

그러나 제자여,

그대의 육체를 꼼짝 못하게 하고,

머리는 침착하게,

혼은 눈부신 다이아몬드처럼 강하고 순수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첫 번째 단계에서 아무리 열의를 다하더라도

그 광채는 그 방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고,

그 햇살은 마음을 따뜻하게 하지 못할 것이며,

'지고한 경지의 신비스러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될 것이도다.

82. 그대가 듣지 못한다면, 그대는 볼 수도 없으리라.


83. 그대가 보지 못한다면,

그대는 들을 수도 없으리라.

듣고 보는 것, 이것이 제 2단계이니라.

84. 제자가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과 코를 막은 채로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때,

네 가지 감각이 합쳐져

내면의 감각인 다섯 번째 감각으로 바뀌었을 때,

그 때 비로소 그대는 네 번째 단계로 접어든 것이니라.

85. 오 잡념을 살육한 자여,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이런 모든 감각들이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다시 한번 죽여야 하느니라.

86. 외면의 모든 사물과 보이는 것들로부터

그대의 정신을 거두어 들일지어다.

내면의 이미지들이

그대의 "혼의 빛"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도록,

그 내면의 이미지들을 거두어 들여라.

87. 그대는 이제 여섯 번째 단계인

'다라나'에 들어섰도다.

88. 오 행복한 자여!

그대가 이제 일곱 번째 단계로 들어섰을 때,

그대는 더 이상 "성(聖) 삼각형"을

지각하지 않을 것이로다.

왜냐하면 그대 자신이 그 성삼각형이 되었기 때문이로다.

그대 자신과 그대의 정신은 동일한 선상에 있는 쌍둥이처럼 되었고,

그대의 목표인 별은 머리 위에서 불 타도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영광과 지복 속에 있는 삼각형은

이제 마야의 세계에서 그 이름을 잊어버렸도다.

그들은 하나의 별이 되었으며,

불타오르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는 불이 되었으며,

영원한 불줄기의 '우파디(Upadhi)'인 그 불이 되었도다.

89. 성공을 거둔 요가 수행자여!

이것이 바로 "사마디"의 올바른 전조인

"디야나"라는 것이도다.

90. 이제 '그대 자아'는

시초의 한줄기 빛으로 뻗어 나온

'그 대아(THAT SELF)' 속으로 융합되어,

'그대 자신'은 '대아 자신'이 되었으며,

그 대아 속으로 사라졌도다.

91. 제자여!

그대의 개체성은 어디 있는가?

그대 자신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불 속으로 사라진 불꽃,

대양 속으로 사라진 한 방울의 물,

'언제나 존재해 온 광선'이 '일체'이며 영원한 광채가 되었도다.

92. 제자여!

그대는 행위자이며 바라보는 자이고,

빛을 발하는 자이며 빛을 발하는 작용이고,

소리 속에 있는 빛이고,

빛 속에 있는 소리이니라.

93. 축복 받은 자여!

그대는 다섯 가지 장애물을 잘 알고 있도다.

그대는 그것들을 정복한 자이며,

네 가지 진리의 전달자인 여섯 번째 주(主)이니라.

그 진리들을 비추는 빛은

그대 자신에게서 발산되나니,

제자였던 그대는 이제 스승이 되었도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진리는 이것이다:

94. 그대는 모든 고통의 지식을 지나 왔도다.

--- 이것이 첫 번째 진리이니라.

95. 그대는 유혹의 무리들 앞에서 마라들의 왕을 정복했도다.

--- 이것이 두 번째 진리이다.

96. 그대는 세 번째 문에서 죄를 파괴해서

세 번째 진리를 터득하지 않았는가?

97. 지혜로 이끄는 길에 들어서지 않았는가?

--- 이것이 네 번째 진리이다.

98. 자 이제 모든 지식의 완성인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안식해라.

왜냐하면 그대는 완벽한 통찰의 경지인

'사마디를 완성한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도다.

99. 보라! 그대는 빛이 되었도다.

그대는 소리가 되었도다.

그대는 그대의 스승이자 그대의 신이도다.

그대는 그대가 찾는 대상인 그대 자신이도다.

결코 변하지 않고 악이 범하지도 못하며,

일곱 가지 소리가 하나로 합쳐진,

영원토록 울려 퍼지는, 끊어지지 않는 소리인

"침묵의 소리"이도다.

100. 옴 타트 사트(Om Tat Sat).

 2. 두 갈래 길


101. 오! 자비의 스승이여!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가리켜 줄지어다.

승인 받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달콤한 대법(大法)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기 위하여

무지와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도다.

지원자가 말하길:

102. 자비의 스승인 그대여!

"마음의 가르침"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렵니까?

그대의 종을 해탈의 길로 이끌어 주시지 않으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시도다:

103. 길은 둘이요;

위대한 대 완성은 세 가지이며,

몸을 지식의 나무로 바꾸게 하는 미덕은 여섯 가지가 있도다.

104. 누가 그 길에 다가설 것인가?

105. 누가 그 길에 먼저 들어설 것인가?

106. 하나이면서 두갈래 길의 가르침,

"비밀의 마음"을 드러내는 진리를 누가 먼저 들을 것인가?

지혜를 가르치는 대법은

배움을 거부할 때,

고뇌의 이야기를 보여 주도다.

107. 아 가련하도다!

모든 인간은 '알라야'를 지니고 있어서,

그 위대한 혼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알라야를 지니고 있어도,

그것이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구나!

108. 보아라!

잔잔한 물결 위에 반사된 달처럼,

알라야는 작은 것들과, 큰 것들,

그리고 아주 미세한 원자들 속에서도 반사되지만,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르지 못하는 구나!

아 슬프도다!

비존재에 대한 지식,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

값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진리를 배우는 은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선물을 누리는구나!

제자는 이렇게 묻는다.!

109. 오, 스승이시여!

지혜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10. 오, 현명한 이여!

완성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11. 도의 길들을 찾아라.

그러나 제자여, 그대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대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느니라.

그대가 첫발을 내딛기 전에,

그대는 먼저 허위와 진실,

덧없는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는 것을 배워야 하느니라.

무엇보다도 머리로 터득한 지혜와 혼의 지혜,

즉 눈의 교리와 마음의 교리를 구별하는 것을 배워라.

112. 무지는 꽉 막혀있는, 공기가 없는 통과 같은 것이리니!

혼은 그 무지의 통 안에 갇혀있는 새와 같도다.

새는 지저귀지도 못하고, 깃털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도다.

혼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가수처럼,

무력하게 앉아 있으며, 끝내 지쳐서 죽어 가느니라.

113. 그러나 그렇게 무지할지라도,

길을 밝혀주고 안내할 혼의 지혜가 없는,

머리로 터득한 지식보다는 더 낫느니라.

114. 지혜의 씨앗은

공기가 없는 공간 속에서는 싹이 나와 성장할 수 없도다.

삶의 경험에서 수확을 얻기 위해서,

마음은 폭넓은 깊이가 있어야 하며,

금강혼으로 이끌 수 있는 지점들이 필요하도다.

마야의 영역에서 그런 지점들을 구하지 말지어다.

환영을 넘어서 높이 솟아올라,

망상이라는 허위의 암시를 믿지 말고,

영원히 변치 않는 사트(Sat)를 찾아라.

115. 마음은 거울과 같도다.

비추는 동안에는 망상의 먼지를 끌어 모으도다.

환영의 먼지를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혼의 지혜라는 온화한 미풍이 필요하도다.

오! 초심자여,

그대의 정신과 혼을 융합시켜도록 하여야 하느니라.

116. 무지를 털어 내고, 환영을 버려라.

이 세상의 속임수들로부터 그대의 얼굴을 돌려라.

그대의 감각들을 믿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허위이기 때문이도다.

그러나 감각의 성소인 그대의 육체 안에서        

초월적인 '영원한 인간'을 찾아라.

그를 발견했을 때, 내면을 보아라.

그대는 붓다이도다.

117. 오, 헌신자여!

칭찬을 피하라.

칭찬은 자기망상으로 이끄나니.

그대의 육체는 자아가 아니니라..

그대의 진아는 육체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며,

칭찬이나 비난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도다.

118. 오, 제자여!

자기 만족은 거만한 바보가 올라간 높은 탑과 같도다.

그는 자만으로 가득 찬 고독 속에 앉아서,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를 인식하지 못하도다.

119. 현명한 자는 허위의 배움을 거부하도다.

허위의 배움은 선법(善法)에 의해 바람 속에 흩어지도다.

선한 법륜(法輪)은 교만한 자들, 겸손한 자들 모두에게 똑같이 도나니..

눈의 교리는 대중을 위한 것이고,

마음의 교리는 선택된 자들을 위한 것이도다.

눈의 교리를 아는 자는 자만 속에서 말하느니.

"보아라, 나는 알고 있도다. "

마음의 교리를 아는 자는 겸손하고 조용하게 말하느니

"나는 이와 같이 들었도다."

120. 오, 제자여!

'거대한 채(Sifter)'는 '마음의 교리'를 지칭하는 이름이도다..

121. 선한 법륜은 쉴 사이 없이 빠르게 도는 도다.

밤낮으로 무가치한 껍질을 황금의 낟알로부터 날려버리고,

소맥 가루로부터 찌꺼기를 날려버리도다.

카르마의 손이 법륜을 안내하고,

그 회전은 카르마의 마음의 고동을 나타내도다.

122. 진정한 지식은 밀가루이고,

허위의 지식은 껍질이나니.

그대가 지혜의 빵을 먹고 싶으면,

'아무리타(Amrita)'의 깨끗한 물로 반죽하지 않으면 안되느니라.

그러나 그대가 껍질을 가지고 마야의 이슬로 반죽한다면,

그대는 죽음의 검은 비둘기들,

탄생 노쇠 비애의 새들을 위한 먹이만 만들 수 있도다.

123. 그대가 아라한 같이 되기 위해서

만물을 사랑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들었다면,

그들에게 말하라. "거짓이라고."

124. 그대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그대의 어머니를 혐오하고,

그대의 자식을 경시해야 하며,

그대의 아버지를 부인하고,

그를 '집주인'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들었다면;

그리고 인간이나 동물에 대한 모든 연민을 포기해야 한다고 들었다면,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의 혀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125. 이와 같이 브라만의 고행자들은 가르치도다.

126. 만약 그대의 죄는 행위에서 생겨나고

지복(至福)은 절대적 무행위에서 비롯된다고 배웠다면,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말하라.

죄나 과오를 단절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를 멈추고

정신을 해방시키는 것은

'윤회하는 자아'를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느니.

"마음의 교리"는 이렇게 가르치도다.

127. '눈'의 다르마는

외적이고 비존재하는 것들의 구현이로다.

128. '마음'의 다르마는

'보디(Bodhi)', 영원불멸의 신지( 智)의 구현이로다.

129. 기름과 심지가 깨끗할 때 등불은 밝게 타느니.

그것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청소도구가 필요하도다.

불꽃은 청소하는 과정을 느끼지 못하도다.

'나무 가지들은 바람에 흔들리지만,

본체가 되는 줄기는 흔들리지 않는 도다.'

130 행위나 무행위를 그대 속에서 찾을 수 있도다.

그대의 몸은 동요하지만,

그대의 정신은 고요하고,

그대의 혼은 산 속의 호수처럼 투명하도다.

131. 오, 제자여!

그대는 '시간의 주기'의 얽매인 수행자가 되길 원하는가?

132. 사람들과 떨어진 채

교만에 가득 찬 채 고독하게

어두운 숲 속에 앉아 있기만 하면

궁극의 자유라는 목표에 다다를 것이라고 믿지 마라.

나무 뿌리나 풀뿌리를 먹고

히말라야의 눈으로 갈증을 없앤다면,

궁극의 자유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지 마라.

133. 뼈를 부수고 살과 근육을 잘라내는 것이

그대와 "침묵의 자아'를 합일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오! 그림자의 희생자여!

그대가 육체의 죄를 정복하면,

그대의 의무가 자연스럽게 그리고 인위적으로

완수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지어다.

134. 지복를 얻은 자들은

그와 같이 하는 것을 경멸하도다.

대법의 사자, 자비의 주(主)가

인간의 비애의 참된 원인을 인식한 후에

고요한 산 속에서의 달콤하고 이기적인 안식을 즉시 버렸도다.

그는 은둔자에서 인류의 스승이 되었도다.

'줄라이'가 열반에 들어간 후에

그는 산과 들과 도시에서 설법을 펼쳤으며,

데바들과 인류 그리고 신들에게 설법을 펼쳤도다.

135. 친절한 행위의 씨앗을 뿌려라.

그러면 그대는 풍요로운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로다.

자비의 행위 속에서의 무행위는

무서운 죄를 행하는 것이라고 성인은 말씀하시도다.

136. 그대는 무서운 죄의 행위를 억제할 것인가?

그러면 그대의 혼은 자유를 얻게 될 지리니.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각에 도달해야 하느니.

 그리고 자각은 사랑스러운 행위의 자식이로다.

137.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성공을 추구할 수 없듯이,

수행자여! 

인내심을 가져라.

그대 혼의 시야를 별에 고정시켜라.

그 별의 광선이 바로 그대이니라.

빛나는 그 별은 언제나 존재해오고 있는,

빛 없는 심연 속에서, 미지의 가없는 들판에서 빛나는 별이도다.

138. 영원히 참고 견디는 자처럼 인내하라.

그대의 그림자들은 살고 사라지도다.

그러나 그대 속에 있는 '그것'은 영원히 살 것이며,

그것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식 그 자체이며,

덧없는 생명이 아니도다.

그것은 영겁에서부터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인간'으로

결코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을 것이도다.

139. 제자여!

만약 그대가 달콤한 평화와 안식을 얻고자 한다면,

미래를 수확하는 들판에 좋은 씨앗을 뿌려라.

탄생의 비애를 받아들여라.

140.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빛을 주기 위해

그대는 그늘로 들어서라.

고뇌와 비애로 바짝 마른땅을 기름지게 하는 눈물은

인과응보의 꽃이 되어 열매를 맺으리라.

검은 연기가 솟아나는 인생의 용광로에서

날개 달린 불꽃이 일어나며,

높이 솟아오르는 정화된 그 불꽃은 카르마의 눈을 넘어서,

도의 삼체(三體)라는 영광스러운 직물을 짜도다.

141. 영광스러운 삼체(三體)는

니르마나카야, 

삼보가카야, 

다르마나카야로 

장엄한 체이도다.

142. '샹나(shagna) 옷'을 얻으면, 영원의 빛을 얻을 수 있도다.

'샹나 옷'만이 개성을 말살하는 열반을 줄 수 있으며,

윤회를 멈추게 하도다.

오, 제자여!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비를 죽이는 도다.

'다르마나카야'의 영광을 입은 완전한 붓다는

더 이상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없도다.

아! 수많은 소아들은 대아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느니라.

인류는 '단위(Units)'들의 복지를 위해 희생되어져야 하느니라.

143. 오, 초심자여,

이 길은 현교의 길로

이기적인 지복에 이르는 길이도다.

자비의 부처들, 비밀교리(秘密敎理)의 보살들은 이 길을 피하도다!

144. 인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사는 것이 제 1보이니라.

영광스러운 여섯 미덕을 실천하는 것이 제 2보이니라.

145. 니르마나카야의 겸손한 옷을 입게 되면

대아의 영원한 지복을 포기하고,

인류의 구원을 돕는 것이니라.

열반의 지복에 이르러서 그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지고의 마지막 단계로,

자아를 버리는 도의 길에서 최고의 단계이도다.

146. 오, 제자여!

이것이 비교(秘敎)의 길이니라.

완성을 이룬 부처들이 선택한 길로,

나약한 소아들을 위해 대아를 희생한 비밀의 길이도다.

147. 그러나 만약 그대에게 '마음의 교리'가 너무 높다면,

만약 그대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주기를 꺼린다면,

그러면 나약한 마음의 소유자여!

경계하라! 

그대는 '눈의 교리'에 만족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희망을 가져라!

"오늘" 비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면,

"내일"은 그 길에 들어설 수 있으리.

그 어떤 노력도, 심지어 아무리 작은 사소한 노력도

올바르건 그릇되건

원인의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을 배워라.

심지어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도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라.

'과거 생에 내뱉은 격한 말 한마디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에게 다시 되돌아오는 도다.'

고추가 장미꽃을 피울 수 없으며,

또한 달콤한 쟈스민의 은빛별이 가시나 엉겅퀴로 변하지 않을 것이니라.

148. 그대는 "내일"을 위한 기회를 바로 "오늘" 만들 수 있도다.

"대 여행"에서 매 시간 뿌린 원인들은

결과라는 결실을 맺게 되도다.

왜냐하면 엄격한 정의가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도다.

그 정의는 하나의 오차 없이 행위의 거대한 파도로

유한한 존재들에게 전생의 모든 생각과 행적의 카르마적 결과인

행, 불행을 몰고 오는 도다.

149. 오, 인내심 많은 자여!

그대 자신을 위해 되도록 많은 공적을 쌓을 지어다.

기운을 내라. 그리고 운명에 만족할지어다.

그것이 그대의 카르마이며

그대가 수많은 탄생의 주기 동안 쌓은 카르마이니라.

그것이 바로 전생의 행위에 얽매인 채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웃고 울고

고통과 슬픔 속에서 그대와 같이 태어난

사람들의 운명이도다.

150. "오늘" 그들을 위해 행하라.

그러면 "내일" 그들이 그대를 위해 행할 것이니라.

151. 최후의 자유라는 달콤한 열매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자아를 버림으로써 생겨나는 싹이니라.

152. 마라에 대한 두려움으로 돕기를 주저하는 자는

자아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멸할 운명일지리니.

자신의 지친 발을 흐르는 시냇물에 담그고

피로를 풀려고 하지만 물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감히 시냇물에 발을 담그지 못하는 순례자는

뜨거운 열기의 고통을 피할 수 없느니라.

이기적인 두려움 때문에 행하지 못하는 것은

나쁜 열매밖에 열리지 않을 지리니.

153. 이기적인 헌신자는 헛된 삶을 사는 것이니라.

자신의 삶의 의무를 마치지 못하는 자는

헛된 삶을 사는 것이니라.

154. 생명의 수레바퀴을 따르라.

민족과 친척, 친구와 적에 대한 의무의 수레바퀴을 따르라.

그리고 고통에 대해서처럼 쾌락에 대해서도

그대의 마음의 빗장을 걸어 매어라.

카르마의 응보를 소진하고,

미래 생을 위해 시디스(Siddhis)를 얻어야 하느니라.

155. 그대가 태양이 될 수 없거든,

겸손한 행성이 되거라.

그대가 만년설의 순수한 산 위에서

한낮의 태양처럼 타오를 수 없거든,

오, 초심자여!

보다 겸손하고, 소박한 길을 택할 지어다.

156. 어둠 속에서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길을 밝혀 주는 저녁별처럼,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희미하게 나마 "길"을 가리켜 주어라.

157. 진홍색 베일 속에 있는 "미그마"를 보아라.

미그마의 눈이 잠들어 뒤척이는 지구를 획 어루만지도다.

수행자들의 머리위로

보호하는 사랑의 손길을 뻗친 "라그파"의 불같은 듯한 오라(aura)를 보아라.

이 둘은 "니마"의 종들로,

"니마"가 자리를 비운 밤하늘을 묵묵히 지키고 있도다.

그러나 영겁의 과거에는 이들 역시 눈부신 태양들이었으며,

"미래"에 언젠가 또 다시 두 태양이 될 것이로다.

바로 이것이 대 자연 속에 있는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른 흥망성쇠이니라.

158. 오, 제자여! 그들처럼 되어라.

고뇌하는 순례자에게 빛과 안식을 주어라.

그리고 아직 그대보다 적게 알고 있는 자를 찾아라.

슬픈 고독 속에서 스승도 없이 그리고 희망과 위안도 없이,

그림자를 먹여 살리는 빵과 지혜의 빵에 굶주리고

앉아 있는 자를 찾아라.

그리고 그로 하여금 "대법"을 듣게 해줄지어다.

159. 오, 비전의 후보자여!

자만과 자애에서 헌신에 노예가 된 자,

삶에 집착하지만 인내심과 순종을 대법 앞에 바친 자는

부처의 발 밑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 꽃처럼

현생에서 "스로타파티"가 된다고 말해 줄지어다.

완전한 "시디스"는 아주 멀리 흐릿하게 보이지만,

일단 첫발을 내딛어 비전의 시냇물의 흐름에 들어서면,

그는 산 독수리 같은 시야와 겁 많은 암사슴의 청력을

얻을 수 있게 되리라.

160. 열망자여!

전생에서 그의 지식이었던 바로 그 지식을

참된 헌신으로 되돌려 받으리라고 말해주어라.

신의 시력과 청력은 단 한번의 짧은 생에서는 얻어질 수 없느니.

161. 큰 지혜에 이르고자 하거든 겸손해야 하느니라.

162. 그대가 그 지혜를 얻었을 때는

더욱더 겸손해야 하느니라.

163. 모든 시냇물과 강물을 받아들이는

대양 같은 존재가 될지어다.

대양의 장엄한 평온은 흔들림이 없으며,

대양은 그것들을 느끼지 않는도다.

164. 그대의 신성으로 저급 자아를 통제할지어다.

165. '영원'으로 신성을 지배하여라.

166. 욕망을 없앤 자는 참으로 위대하도다.

167. 내면의 신성한 자아가

욕망의 바로 그 지식을 없애 버린 자는 더욱더 위대하도다.

168. 그대의 저급 자아가 고급 자아를 더럽히지 않도록 경계하라.

169. 궁극의 자유에 이르는 길은 "그대 자신"속에 있느리라.

170. 그 길은 그대의 하위 자아 밖에서 시작되고 밖에서 끝나는 도다.

171. 모든 강의 어머니는

사람들에 의해 칭송받지 못하며

교만한 티르티카들의 눈에는 초라해 보이나니.

불멸의 감로로 가득 차 있는 인간이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텅비어 있도다.

성스러운 강들의 발상지는 신성한 땅이리니.

지혜를 지니고 있는 자는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느니라.

172. 무한한 통찰력을 갖고 있는 아라한과 성자들은

우둠바라 나무의 꽃이 피는 것만큼이나 귀하도다.

죄 많은 자의 발길이 닿지 않은,

눈 덮힌 고봉(高峰)의 얼어붙은 땅에서

맑은 이슬을 먹고 피어나며

아홉 줄기와 일곱 줄기로 뻗어나는

성스러운 식물과 함께

아라한은 한밤중에 태어나도다.

173. 오, 제자여!

혼이 처음으로 궁극의 자유를 갈구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생에서

그 누구도 아라한이 되지 않는 도다.

그러나 열성에 넘쳐 있는 자여!

불멸의 고급자아와 저급자아 사이의 격렬한 싸움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전사는

비록 한 명의 신병일지라도

전쟁터로 가는 '도의 길'에 오를 수 있는 권리를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니라.

174. 왜냐하면 그는 승리하거나 패배할 것이다.

175. 그러나 만일 그가 정복하면 열반이 그의 것이리니.

그가 저 끝없는 고통과 고뇌의 원인인 속세의 번뇌를 벗어 던지면

사람들은 그 속에 있는 위대하고 성스러운 붓다를 칭송할 것이니라.

176. 그리고 만일 그가 쓰러진다면,

그는 결코 헛되이 쓰러진 것이 아니니라.

그가 마지막 싸움터에서 죽인 적들은

다음 생에 또다시 적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로다.

177. 그러나 그대가 열반에 이르고자 하거나

아니면 '영예로운 보상'을 물리치고 싶거든,

불굴의 용기를 가진 자여!

행(行)과 무행(無行)의 열매가

그대의 동기가 되지 않도록 할지어다.

178. 오, 앞으로 다가올 수십 겁의 긴 세월 내내  

고뇌를 자원한 자여!

"비교(秘敎)의 삶"이라는 고통을 짊어지기 위해

자유를 포기한 여래(如來)는

"세 번이나 위대한 자"라고 불려질 것이니라.

179. 제자여!

길은 하나이지만,

그 끝에서는 두 갈래이니라.

그 단계는 네 개의 문과 일곱 개의 문으로 나누어져 있느니라.

하나는 즉각적으로 지복에 이르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지복을 늦추는 길이도다.

두 길 모두 보상이니라.

선택은 그대의 자유이도다.

180. 하나가 둘로 되느니.

현교(現敎)의 길과 비교(秘敎)의 길이 그것이로다.

현교의 길은 궁극적인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며,

비교의 길은 자기 희생으로 나가는 길이니라.

181. "영원한 것"을 위해 무상한 것을 희생할 때,

그 보상은 그대의 것이리니.

물방울은 자신이 생겨난 곳으로 되돌아가도다.

현교의 길은 변화 없는 변화, 영예로운 절대의 경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지복인

열반에 이르는 도다.

182. 이렇게 첫 번째 길은 자유에 도달하느니라.

183. 그러나 두 번째 길은

포기의 길로, '고뇌의 길'이라고 불려지도다.

184. 비밀의 길은 아라한을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정신적 고뇌로 이끄나니.

"살아있는 죽은 자"들에 대한 고뇌이며

성자들도 감히 어쩔 수 없는

카르마의 비애에 잠겨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무력한 동정이니라.

185. 왜냐 하면 '법'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도다 :

"모든 원인들을 피하도록 가르쳐라.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드는 결과의 파문이

제 갈 길을 가도록 그대는 맡겨두어야 하느니라."

186. 현교의 길은

그대가 목적지에 도달하자마자,

그대로 하여금 여래(如來)의 길을 포기하도록 이끌며,

이 세계와 인간들을 영원히 망각하게 만드는

다르마카야의 영광스러운 상태로

들어가게 할 것이니라.

187. 비교의 길도

셀 수 없이 많은 수십 겁이 끝날 무렵에,

그대를 파라니르바나의 지복 속으로 이끌지니.

열반을 얻었다가 망상에 현혹된 이 세계의 인간들에 대한

무한한 동정과 자비심에서 그 열반을 포기하였도다.

188. 그러나 "후자가 가장 위대한 것이다."라고 했느니라.

지고한 완성의 스승, '삼약삼부다'는

절대 순수의 경지, 열반의 문턱에서 멈추어 서서

세계의 구제를 위해 그의 대아(大我)를 포기했느니라.

189. 이제 그대는

두 갈래 길에 대한 지식을 얻었느니라.

오, 열의가 가득한 자여!

그대가 일곱 개의 문을 지나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그대는 선택을 하게 되리라.

그대의 정신은 이제 맑도다.

그대는 모든 것을 터득했기 때문에

더 이상 망상에 빠져 혼돈하지 않는 도다.

비밀의 베일을 벗은 진리가

그대의 얼굴을 준엄하게 응시하면서

이렇게 말하도다 :

190. "대아를 위한 안식과 자유의 열매는 감미롭도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걸리는 쓰디쓴 의무의 과실은

그보다 훨씬 더 감미롭도다.

고통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그 의무이니라."

191. "프라티에카 붓다"가 되는 자는,

오직 자신의 대아에게만 순종하도다.

싸움에서 승리하여 영예로운 보상을 손에 들고 있는 보살은

성스러운 자비에서 말하도다!

192.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위대한 보상을 포기하노라."

그는 이렇게 더 위대한 희생을 성취하도다.

193. "세상의 구원자"가 바로 그이니라.

194. 보아라!

즉각적인 지복의 목표와 길고 긴 고뇌의 길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도다.

고뇌의 길을 열망하는 자여!

그대는 앞으로 다가올 수십 겁 내내,

어느 길이든 선택할 수 있도다.

195. 옴 바즈라파니 훔(Om Vajrapani Hum)


3. 일곱 개의 문


196. 스승이시여,

이제 선택을 했나이다.

큰 지혜를 갈망하나이다.

당신은 비밀의 길 앞에 놓인 베일을 걷어

"대승"을 가르쳐 주셨나이다.

여기 당신의 종이 다시 당신의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었나이다.

197. 제자여!

이제 그대는

홀로 여행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느니라.

스승은 길을 가리켜 줄 수 있을 뿐,

'길'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하나의 길이지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은

순례자들마다 다르기 마련이니라.

198. 불굴의 의지를 지닌 제자여!

어떤 길을 선택하겠는가?

사중(四重)의 디야나, "눈의 교리"의 '삼탄(Samtan)'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지혜의 일곱 번째 단계인

프라즈나(Prajna)와 보디(Bodhi)로 이끄는 여섯 가지 파라미타인

고귀한 미덕의 문을 거쳐가는 실같은 길을 택할 것인가?

199. 네 단계 디야나의 험준한 길은

언덕 위로 굽어져 있느니라.

그 높은 정상에 오르는 자는

세 번이나 위대한 자이도다.

200. 파라미타의 정상은

그보다 훨씬 더 가파른 길로

올라가야 하느니.

그대는

일곱 개의 관문을 싸워서 통과해야 하느니라.

그 일곱 개의 지주는

욕정이 화신한 잔인하고 교활한 힘들이

점거하고 있느니라.

201. 제자여,

용기를 내라.

황금률을 명심할 지어다.

일단 그대가 스로타파티,

즉 '시냇물에 들어간 자'의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일단 그대가 현생이나 미래생에서

해탈의 시냇물 바닥에 발을 밟기만 하면,

오! 불굴의 의지를 지닌 자여!

이제 그대 앞에는

일곱 번의 환생만이 남아 있을 뿐이도다.

202. 신 같은 지혜를 갈구하는 자여!

보아라.

그대 눈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203. 어둠의 장막이 물질의 심연을 덮고 있나이다.

그 장막 속에서 제가 몸부림치고 있나이다.

밑을 내려다보니 어둠은 점점 더 깊어지고,

손을 흔들자 장막이 흩어지고,

몸뚱아리를 길게 뻗은 뱀처럼

그림자가 움직이나이다.

그것은 점점 더 커지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나이다.

204. 그것은 그대의 죄라는 어둠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로

도(道)의 길 밖으로 벗어나 있는,

그대 자신의 그림자이니라.

205. 오! 스승이여!

"길"이 보이나이다.

그 길의 기슭은 구렁 속에 잠겨있고,

그 정상은 영광스러운 니르바나 빛 속으로 사라지나이다.

이제 지혜에 이르는 험난한 가시밭 길 위에 있는,

갈수록 좁아지는 문들이 보이나이다.

206. 잘 보았구나, 제자여!

그 문들은 열망자를 바다 너머 피안으로 이끄는 문들이니라.

문마다 그 문을 열 수 있는 황금 열쇠가 있느니라.

그리고 그 열쇠들은 이러하니라:

207. 제 1열쇠는 다나(Dana)로,

자비와 불멸의 사랑의 열쇠이니라.

208. 제 2열쇠는 쉴라(Shila)로,

원인과 결과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열쇠로

더 이상의 카르마 작용을 막아주는

언행(言行)의 조화의 열쇠이니라.

209. 제 3열쇠는 크샨티(Kshanti)로,

어떤 것에도 동요되지 않는 온화한 인내심이니라.

210. 제 4열쇠는 비라가(Viraga)로,

고통과 쾌락을 초월하고 환상을 극복하며,

오직 진리만 지각하는 것이니라.

211. 제 5열쇠는 비리야(Viriya)로,

세속적인 거짓의 수렁에서 벗어나

지고의 진리에 이르는 길을 싸워 헤쳐 나가는

불요불굴의 에너지이니라.

212. 제 6열쇠는 디야나(Dhyana)로,

일단 황금의 문을 열기만 하면,

나르졸(Narjol : 성자, 초인)을

영원한 사트(Sat)의 영역과

끝없는 명상으로 이끄도다.

213. 제 7열쇠는 프라즈나(Prajna)로,

인간을 디야니스의 아들인 보살로 만들고,

신으로 만드는 열쇠이니라.

214. 이것들이 문들을 여는 황금 열쇠들이니라.

215. 오! 그대 자신의 자유를 짜는 자여!

그대가 마지막 문에 도달하기에 앞서,

길고 지루한 길을 따라 있는 완성의 파라미타를

통달해야 하느니라.

216. 오! 제자여!

그대가 그대의 스승을 직접 대면할 수 있기 전에,

그대의 스승을 빛과 빛으로 대면할 수 있기 전에,

그대는 무엇을 들었는가?

217. 그대가 맨 앞에 있는 제 1의 문에 도달하기에 앞서,

그대는 먼저 정신에서 육체를 떼어놓아야 하고,

그림자를 흩뜨려 없앨 줄 알아야 하며,

영원 속에서 사는 것을 터득해야 하느니라.

그러기 위해서

그대는 모든 것 안에서 숨쉬고 살아야 하느니라.

그대가 지각하는 모든 것들이 그대 속에서 숨쉬듯이;

그대는 그대 자신이 만물 속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만물이 대아(Self)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느껴야 하느니라.

218. 그대는 그대의 정신을 감각들의 놀이터로 삼지 않도록 할지어다.

219. 그대의 존재를 절대 존재로부터 분리시키지 말지어다.

대양(大洋)을 한 방울의 물 속으로 융합시키고,

한 방울의 물을 대양 속으로 융합시킬지어다.

220. 그러므로

그대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로다.

모든 사람들에 대해 사랑을 품어라.

마치 그들이 한 스승의 제자들처럼,

한 어머니의 자식들처럼,

221. 스승들은 많지만, 스승의 혼(MASTER-SOUL)은 하나이다.

"알라야", 즉 우주혼이도다.

그 스승의 광선이 그대 속에서 살고 있듯이

그 스승 속에서 살아라.

사람들 모두가 '알라야'속에서 살고 있듯이,

그대는 그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느니라.

222. 그대가 도(道)의 길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그대가 첫 번째 문을 건너지나가기 전에,

그대는 먼저 둘을 하나로 융합시키고

개성아를 초월적 자아를 위해 희생시켜서,

둘 사이에 있는 '길'인 '안타카라나'를

소멸시켜야 하느니라.

223. 엄격한 지고의 법인 '다르마'의 물음에 답할 준비를 해야 하느니라.

그대가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대에게 물을 것이로다!

224. '숭고한 희망을 품은 자여!

그대는 모든 규칙에 순종했는가?'

225. '그대는 그대의 마음과 정신을

모든 인류의 거대한 마음과 정신에 맞추었는가?

모든 자연계의 음향이

성스러운 강의 우렁찬 소리에 반향되어 나오듯이,

"시냇물에 들어간 자"의 마음과 정신은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의 한숨과 생각에 반향되어야 하느니라.

226. 제자들은 혼의 소리를 내는 비나의 현에 비유될 수 있고,

인류는 음향판에, 그리고

그것을 켜는 손은

'대세계 혼'의 조화로운 숨결에 비유될 수 있도다.

스승이 건드렸을 때

다른 현들과 어우러져 조화로운 화음을 못내는 현은

끊어지게 되고 그래서 버리게 되듯이,

전체 제자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도다.

대령(大靈)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느니.

그렇지 않으면 끊어져 나가게 되느니.

227. 자신의 혼을 죽인 자들인 '그림자의 형제들'인

무서운 둑파가 그러했느니라.

228. 오! 빛의 후보자여!

그대의 존재를 인류의 커다란 고통에 맞추었는가?

229. 그대는 조화시켰는가?

그러하다면 그대는 들어설 수 있느니라.

그러나 그대가 쓸쓸한 비애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먼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들을 알아야 하느니라.

230. 자비와 사랑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도의 길로 들어가는 문인

다나(Dana)의 문 앞에서는 안전하리라.

231. 보아라! 행복한 순례자여!

그대를 마주하고 있는 문은 높고 드넓어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듯 보이 도다.

그 문을 지나가는 길은 곧고 평탄한 초원이로다.

그 곳은 어둡고 깊은 숲 속에 있는 양지바른 빈터와 같고,

지상에 투영된 아미타바 낙원과 같도다.

희망의 나이팅게일과 눈부신 깃털을 가진 새들이

푸른 나무 가지에 앉아서

두려움을 모르는 순례자들의 성공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도다.

그 새들은 대지식의 일곱 단계의 원천이며

신성 지혜의 다섯 겹의 근원인

보살의 다섯 가지 미덕을 노래하고 있도다.

232. 앞으로 나아갈지어다!

그대는 열쇠를 가졌으니 안전하도다.

233. 두 번째 문까지의 길도

초록색으로 덮혀 있도다.

그러나 그 길은 험하고 위로 굽어진 길이도다.

그 길은 바위투성이의 정상까지 그러하다.

거칠고 돌 투성이인 정상에 잿빛 안개가 걸려 있도다.

그리고 그 너머는 모든 것이 어둡도다.

앞으로 계속 나아감에 따라

순례자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희망의 노래는

점점 더 작게 들리도다.

이제 의심의 오싹함이 그를 뒤덮고,

그의 발걸음은 점점 더 흐트러져 가도다.

234. 오! 후보자여! 이것을 경계하라.

그대 혼의 달빛과 아주 멀리 어렴풋하게 보이는

그대의 숭고한 목적지 사이에서

한 밤중에 소리 없이 날아다니는 박쥐의 시커먼 날개처럼

퍼져나가는 두려움을 경계하라.

235. 오, 제자여!

두려움은 의지를 죽이고,

모든 행위를 정지시키느니.

만약 쉴라(Shila)의 미덕을 갖추지 못한 채 여행을 하면,

돌로 덮혀 있는 도(道)의 길에서

카르마의 자갈들이 순례자의 발에 상처를 입히리라.

236. 후보자여!

발을 조심스럽게 내디딜지어다.

크샨티(Kshanti)의 본질 속에 그대의 혼을 목욕시켜라.

이제 그대는 인내의 문인 크샨티의 문에 다가가노라.

237. 그대의 눈을 감지 말고,

도르제(Dorje)에서 그대의 눈을 뜨지 마라.

마라의 화살들은

비라가(Viraga)에 이르지 못한 자를 향해 쏘느니라.

238.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경계하라.

두려움의 숨결아래서 크샨티의 열쇠는 녹슬게 되나니.

녹슨 열쇠로는 문을 열지 못하느니라.

239. 그대가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대 발은 점점 더 많은 함정들을 만나게 되리라.

......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용기의 빛,

바로 그 하나의 불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밝혀 주리라.

용기를 내면 낼수록 더욱 더 많은 빛을 얻게 될 것이리라.

두려워하면 할수록 그 빛은 점점 더 희미해지리라.

그 빛만이 그대를 안내할 수 잇느니라.

저 높은 산봉우리에서 비추는 석양의 햇빛이 사라지면,

캄캄한 어두운 밤이 오듯이,

마음의 빛도 마찬가지이니라.

마음의 빛이 사라지면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어둡고 위협적인 그림자가 길에 떨어져,

공포로 그대의 발을 꼼짝 못하게 하리라.

240. 제자여!

그 치명적인 그림자를 조심할지어다.

모든 이기적인 생각이 저급 혼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한

대령(Spirit)으로부터 나오는 눈부신 빛도

저급 혼의 어두움을 쫓아 버릴 수 없느니라.

순례자는 이렇게 말하도다!

'이제 나는 이 덧없는 육체를 버렸도다.'

원인을 없애 버렸도다.

그림자들은 결과로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도다.

고급자아와 저급자아 사이의     

최후의 대전쟁이 시작되었도다.

보라! 그 전쟁터는 지금 대 전쟁에 휩싸여 있지만,

더 이상 그러하지 않으리라.

241. 일단 그대가 크샨티의 문을 지나면,

세 번째 단계를 밟은 것이니라.

그대의 육체는 그대의 노예가 되었도다.

'내면의 인간'을 함정에 떨어지도록 유혹하는 문인

네 번째 문에 대비하라.

242. 그대가 그 네 번째 문에 다가가기 전에,

그 문의 빗장을 벗기기 위해 손을 들어올리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대 자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적 변화들을 통제하고

혼의 눈부신 성소 속으로 몰래 기어드는

미묘하고 교활한 생각과 느낌의 군대를

괴멸시켜야 하느니라.

243. 그것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의 창조물들,

즉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으며

인류 주위에 꾀어드는 그대 사고의 산물들이며

인간의 자손이자 세속적 성과의 상속자들을

무력하게 만들어야 하느니라.

그대는 충만해 보이는 텅 빔을,

텅 비어 보이는 충만함을

깨우쳐야 하느니라.

오! 두려움 없는 열망자여!

그대 마음의 샘 속을 깊이 들여다보고 대답할 지어다.

외면의 그림자를 인식하는 자인

그대는 대아(大我)의 힘을 아는가?

244. 만약 그대가 알지 못한다면,

그대는 길을 잃었느니라.

245. 왜냐하면 네 번째 길에 오르면,

아무리 미약한 열정이나 욕망의 미풍이라도

순결한 혼의 벽에 비춘 빛을 흩뜨리기 때문이니라.

마야의 환상적인 선물에 대한

아무리 작은 아쉬움이나 미련일지라도,

번개 빛 같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생각일지라도,

대령과 그대 자아 사이에 놓여있는 길이며

아함카라를 거칠게 흔들어 일깨우는

느낌의 고속도로인 안타스카라나를 통해서

그대가 이미 얻었던 세 개의 상을 잃게 만들 것이니라.

246. 영원한 것은 변화를 모른다는 것을 알지어다.

247. "여덟 가지 쓰라린 불행을 영원히 버릴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지혜에 이르지 못함은 물론이요,

자유에도 이르지 못하리니."

"앞서간 분들의 발자국을 따라간 자",

깨달음의 완성을 이룬 '타타가타'인

위대한 스승께서 말씀하셨도다.

248. 비라가의 미덕은 엄격하고 정확하도다.

그대가 이 길을 극복하려거든,

이전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진 이지(理智)가

행동을 멈추도록 해서는 안된다.

249. 그대 자신을 순수한 알라야로 충만시키고,

대자연의 "혼의 사고"와 일체가 되어야 하느니라.

그것과 일체가 되었을 때,

그대는 정복할 수 없는 존재가 되리라.

그것과 분리되었을 때,

그대는 세계의 모든 환상의 근원인

"삼브리티"의 놀이터가 되리라.

250. 알라야의 순수하고 밝은 정수를 제외하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본질은 유한하도다.

인간은 알라야의 수정같은 광선이도다;

표면은 낮은 차원의 육체의 형상이지만,

내면은 때묻지 않은 한줄기 빛,

바로 그 빛줄기야말로 그대의 삶의 길잡이요,

그대의 진아(眞我)이고, 관찰자이며 침묵의 사색가로,

저급아의 희생자이니라.

그대 혼은 상처를 입을 수 없으며,

오직 그대의 잘못된 육체를 통해서만 고통을 받느니.

혼과 육체를 통제하고 잘 다스리면,

"균형의 문(Gate of Balance)"으로 건너갈 때

그대는 안전하리라.

251. "피안으로 가는" 용기있는 순례자여!

용기를 낼 지어다.

마라 무리들의 속삭임에 귀기울이지 말지어다.

끝없는 공간 속에 있는 사악하고 질투심이 많은 라마인(Lhamayin),

유혹의 무리들을 쫓아버릴 지어다.

252. 굳건히 버틸지어다.

그대는 이제 비애의 문,

수만 개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중간의 문에 다가서고 있도다.

253. 오, 완성을 갈구하는 자여!

그대가 이 입구를 넘으려거든,

그대 자신의 생각들을 완전히 다스려야 하느니라.

254. 불멸의 진리를 추구하는 자여!

그대가 목적지에 도달하려거든,

그대 혼을 완전히 다스려야 하느니라!

255. 그대 혼의 시선은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운 '빛'

하나의 절대순수의 빛에 집중시켜라,

그리고 그대의 황금의 열쇠를 사용하라.

256. 지루하고 힘들 일을 다했도다.

그대의 노고는 거의 끝났도다.

그대를 집어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을 거의 지났도다.

257. 그대는 이제 인간의 정욕의 문을 에워싸고 있는

언덕을 넘어섰도다.

그대는 이제 마라와 그 흉폭한 무리들을 정복하였도다.

258. 그대는 그대 마음으로부터 더러움을 제거했으며,

불순한 욕망으로 그대 마음이 피를 흘리게 해왔도다.

오! 영예로운 전사여!

그대의 과업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도다.

'성스러운 섬'안에 방벽을 높이 쌓을지어다.

위업을 달성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자만과 만족으로부터

그대의 마음을 지키는 댐을 높이 쌓을지어다.

259. 자만심은 일을 망치리라.

심지어 승리를 쟁취하였다 하더라도

거대한 마야의 대양으로부터 해변으로 밀려와 부딪히는

사납게 휘몰아치는 파도가

순례자와 '성'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방벽을 든든히 쌓을 지어다.

260. 그대의 '성(城)'은 사슴이고,

그대의 생각들은 생명의 시냇물로 가고 있는 사슴을

끈질기게 쫓아가는 사냥개들이다.

'순수한 지혜의 길'이라 불리는 '디야나 마르가',

즉 쉼터의 계곡에 도달하기 전에

짖어대는 사냥개들에게 붙잡히는 사슴들은 참으로 애석하도다!

261. 오, 행과 불행의 정복자여!

그대가 '디야나 마르가'에 안착하여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부르기 전에

그대의 혼은 무르익은 망고 열매 같이 되어야 하느니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선

황금빛 수액처럼 부드럽고 달콤해야 하며,

그대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선

그 과일의 씨처럼 단단해야 하느니라.

262. 자아를 유혹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대의 혼을 강건하게 할지어다.

그리하여 '금강혼'이라는 이름을 얻을 지어다.

263. 박동하는 심장 속 깊이 파묻혀 있는 금강석이

지상의 빛을 반영할 수 없듯이,

그대의 정신과 혼도 마찬가지이도다.

디야나 마르가에 푹 빠져버린 정신과 혼은

마야의 영역에 속하는 그 어떤 것도 반사하지 않는 도다.

264. 그대가 그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대가 도의 길에서 정복해야만 하는 문들이 활짝 열려서

그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이로다.

그리고 아무리 막강한 대자연의 힘일지라도

그대가 가는 길을 막지 못하게 되도다.

그대는 일곱 겹의 도의 길에 주인이 될 것이로다.

오!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지원한 자여!

그러나 그때가 되기 전에는...

265. 그때가 되기 전까지,

아직도 훨씬 더 힘든 과업 하나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나니,

그대는 '모든 생각(ALL-THOUGHT)'을 느껴야 하되,

그 모든 생각들을 그대의 혼으로부터 추방시켜야 하느니라.

266. 아무리 강한 바람일지라도

그대 내면에서 단 하나의 세속적 생각이 떠다닐 수 없도록

정신을 고정시켜야 한다.

이렇게 정화되고 나면

그 성소는 모든 행위나 소리 그리고 세속의 빛이 없는

텅 빈곳이 되어야 하느니.

마치 서리맞은 나비가 문간에 떨어져 죽어있듯이,

그대의 모든 세속적 생각들도 성전 앞에 떨어져 죽어야 하느니.

267. 성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도다;

"황금 불꽃이 빛을 잃지 않고 계속 타오르기 위해서는,

등을 모든 바람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잘 보관해 두어야 하느니라."

바람에 노출된 등불은 깜빡거릴 것이니.

흔들리는 불꽃은 혼이 거주하는 순백의 성소에

현혹적이고 어두우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림자를 드리우리니..

268. 오, 진리를 추구하는 그대여!

그러면 그대의 정신과 혼은

정글 속에서 날뛰는 미친 코끼리처럼 되리라.

숲 속의 나무들을 살아있는 적들로 착각하고

햇빛이 비추는 바위벽 위에서 춤추는

그림자들을 죽이려고 날뛰다가 이내 죽어 가는 도다.


269. 대아(大我)의 보호아래 있어서

그대 혼이 신지(神智)의 땅에서 발판을 잃지 않도록

경계할 지어다.

대아를 망각하여

그대 혼이 동요하는 정신을 다스리지 못해서

정복하면 당연히 얻게 될 보상을 잃지 않도록

경계할 지어다.

271. 변화를 경계할지어다!

변화는 그대의 대적이니라.

변화는 그대와 끝까지 싸울 것이고,

그대가 걷는 도의 길에서 그대를

끈적끈적한 의심의 늪 속 깊이 내던지리라.

272. 미리 준비하고 경계할지어다.

오, 불굴의 전사여!

그대가 도전해서 실패했다 할지라도,

용기를 잃지 마라.

게속 도전해서 싸우고 또 싸우고

또 싸울지어다.

273.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는

큰 상처에서 소중한 생명의 피가 쏟아져 나와도

자신이 쓰러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적을 공격하고,

자신의 요새로부터 쫓아내서 결국에는 절멸시키도다.

그러니 행동하라.

패배로 고통받는 자들이여!

전사같이 행동하라!

그대의 혼의 요새로부터 그대의 모든 적들,

야망, 분노, 혐오, 심지어 욕망의 그림자까지

쫓아버릴지어다.

심지어 그대가 패배했을 지라도.

274. 인류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그대,

명심할지어다.

모든 실패는 성공이며,

모든 신실한 시도는 때가 되면 그 보상을 받는 다는 것을...

제자의 혼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싹이 나서 자라나는 신성한 씨앗은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그 줄기가 점점 더 강해지고,

갈대처럼 구부러지지만 부러지지 않으며,

결코 사라지지 아니 하도다.

그러나 때가 되었을 때,

그것은 꽃을 피우리라.

275. 그대가 준비하고 왔다면,

두려워하지 마라.

276. 이제부터 일곱 개 문중에 다섯 번째 문인 비리야 문까지

그대의 길은 안전하도다.

이제 그대는 여섯 번째 문인 '보디(Bodhi)'문,

즉, 디야나의 안식처로 이끄는 길에 들어섰도다.

277. 디야나 문은 마치 설화 석고 단지처럼 순백색이며 투명하도다.

바로 그 속에 아트만으로부터 방사되는 프라즈나의 불꽃

즉 황금불꽃이 계속 타고 있다.

278. 바로 그 단지가 그대다.

279. 그대는 감각의 대상들로부터 벗어나,

'시각의 길'과 '청각의 길'을 여행해서

지혜의 빛 속에 서 있도다.

이제 그대는 티티크샤 상태에 도달했도다.

280. 오, 성자여! 그대는 안전하도다.

281. 모든 죄악의 정복자여!

알지어다.

'소와니'가 일곱 번째 길을 통과하면,

자연 전체가 즐거운 경외심으로 전율하고 머리를 숙인다는 것을...

은빛별은 밤에 피어나는 꽃들에게,

실개천은 자갈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리라.

검은 대양의 파도들은 파도에 휩싸인 바위들에게 소리치리다.

향기를 실은 미풍은 계곡에게 알리고,

위풍당당한 소나무는

신비스러운 속삭임으로 말하리라;

"영겁의 주(主)가 소생하였도다."

282. 이제 그대는

서쪽을 향해 서 있는 순백의 기둥같도다.

떠오르는 영원한 생각의 태양이 그 기둥 위에

가장 찬란한 첫 번째 빛줄기를 비추도다.

그 정신은 평온하고 끝없는 대양처럼

무한한 공간 속에 퍼져가도다.

그는 생과 사를 손안에 쥐고 있도다.

283. 그러하도다. 그는 강대하도다.

그의 내면에 살아있는 힘

바로 자기 자신인 그 힘이 자유를 얻었도다.

그 살아있는 힘은 환영의 거처를

신들보다 위대한 브라흐마와 인드라보다 높이 들어올리는 도다.

이제 그는 자신의 위대한 보상을 받게 되리라.

284. 거대한 망상의 정복자!

망상을 정복해서 자력으로 얻은 행복과 영광을

자기 자신의 안락과 지복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까?

285. 아니도다.

대자연의 감추어진 지식의 후보자여!

성스러운 타타가타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그런 재능과 권능들은 자아를 위한 것이 아니도다.

286. 그대는 수메루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을 막을 것인가?

그대는 그대 자신을 위해서 그 시냇물의 흐름을 바꿀 것인가?

아니면,

주기의 정점에서 원천으로 되돌려 보낼 것인가?

287. 만약 그대가 힘겹게 얻은 지식의 시냇물,

천상에서 태어난 지혜의 시냇물이

달콤하게 계속 흐르게 하고 싶거든,

그 시냇물이 고여있는 연못이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되느니라.

288. 알지어다.

그대가 "무한의 공간",

아미타바의 협력자가 되길 원한다면,

두 분의 보살처럼

삼계 전체에 그대가 얻어낸 빛을 비추어야 하느니.

289. 알지어다.

그대가 얻어낸 초인적 지식과 신성한 지혜의 시냇물을

알라야의 통로인 그대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시냇가로 쏟아 부어야 하느니.

290. 오, 비밀의 길을 걷는 성자여!

알지어다.

그 순수하고 신선한 시냇물은

인류의 눈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비애의 바다인

대양의 쓰라린 파도를

달콤하게 만드는 데 쓰여져야 하느니.

291.그대가

지고의 하늘에서 반짝이는 항성(恒星)처럼 된다면,

그 눈부신 천체는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위하여

심연의 공간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비추어야 하느니라.

만물에게 빛을 주고,

그 어떤 것들에서도 빛을 받지 말지어다.

292. 일단 그대가

깊은 계곡에 있는 순수한 눈처럼 된다면,

만지는 손길에는 차갑고 무감각하지만

그 가슴속 깊이 잠자고 있는 씨앗에게는

따뜻하고 보호하는 눈 같은 존재가 된다면,

그 눈은 바로

살을 에는 듯한 서리와 북풍을 받아내는 눈이 되어야 하며,

굶주린 사람들을 먹일 약속된 수확을 품고 있는 대지를

잔인하고 쓰라린 삭풍의 이빨로부터

보호하는 그런 눈이 되어야 하느니라.

293. 미래 영겁의 세월 내내

그대는 이렇게 살도록 스스로 운명을 지웠도다.

인류는 그것을 알지도 못하며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도다.

"수호의 장벽"을 이루는 무수히 많은 다른 돌들과 함께

하나의 돌로 박혀있는 것,

그대가 일곱 번째 문을 통과하면

바로 그것이 그대의 미래이도다.

수많은 자비의 스승들의 손에 의해 세워지고

그들의 고통과 피로 다져진 보호 장벽은

더욱더 깊고 훨씬 큰 불행과 비애로부터

인류를 보호하는 도다.

29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며,

지혜의 말에 귀기울이지도 않을 것이도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도다.

295. 열의 있고 진실한 혼인 그대!

그대는 그것을 들었고, 이제 모두 알고 있도다...

그리고 그대는 선택을 해야만 하느니라.

그러니 다시 한번 귀기울일 지어다.

296. 오, 스로타파티여!

소완의 길에서 그대는 안전하도다.

아니다.

그 길에서는

어둠만이 지친 순례자를 만나게 되고,

손은 가시에 찢겨져 피가 흐르고,

발은 날카로운 돌부리에 찢어지고,

마라는 가장 강한 무기를 휘두르는 도다.

그러나 바로 그 너머에는

고귀한 보상이 놓여 있도다.

297. 침착하고 흔들림이 없는 순례자는

니르바나에 이르는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도다.

그의 발에서 더 많은 피가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이 더욱더 순결해 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도다.

일곱 번의 짧고 덧없는 생 후에는

니르바나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도다.

298. 바로 그것이 디야나의 길이고

요기의 안식처이며

스로타파티들이 갈망하는

축복된 목적지이니라.

299. 아라한의 길을 지나

그 길을 얻어낸 자에게는

아직 그렇지 못하니라.

300. 거기서 "클레샤"는 영원히 없어지고,

탄하의 뿌리가 완전히 뽑혀지도다.

그러나 제자여!

기다릴 지어다. 마지막 한마디 말만...

그대는 신성한 자비를 파괴할 수 있는가?

자비는 어떤 속성이 아니니라.

그것은 대법 중의 대법이니라.

영원한 조화, 알라야의 대아(大我),

끝없는 우주 본질,

영원한 정의의 빛,

일체 만물의 본래의 적합성, 그리고

영원한 사랑의 대법

이것이 바로 자비이니라.

301. 그대가 그것과 하나가 되면 될수록,

그대의 존재는 그것 속에 녹아 들어가고,

그대의 혼이 실재하는 그것과 하나가 될수록

그대는 '절대적 자비'가 되리라.

302. 바로 그것이 "아리야(Arya)의 길",

완전한 봇다의 길이니라.

303. 그러나

그대로 하여금 말하도록 만드는

성전(聖典)의 두루마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304. "옴! 모든 아라한들이

열반의 길의 감미로운 결실을 얻는 것이 아님을 알겠도다."

305. "옴! 모든 부처들이

열반의 다르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았도다."

306. "그렇도다.

아리야의 길에 들어선 그대는

더 이상 스로타파티가 아니라,

그대는 보살이니라.

그대는 시냇물을 건넜도다.

그대가 다르마카야의 권리를 얻었도다.

그러나 삼보가카야가 더 위대하고,

자비의 부처인 니르마나카야가 훨씬 더 위대하도다.

307. 오, 보살이여!

이제 머리를 숙이고 잘 들을지어다.

자비가 말하도다!

"모든 생물들이 고통받고 있을진대 지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 자신만 구원을 받고 온 세상이 울부짖는 것을 들을 것인가?"

308. 그대는 지금 그 말을 분명히 들었도다.

309. 그대는 일곱 번째 단계를 성취해서,

최후의 지식의 문을 지나가면,

비애와 결합하게 되리니.

만약 그대가 타타가타가 되려거든,

전임자들의 발자국을 따르고,

끝없는 끝이 올 때까지

이타적인 상태로 계속 지내야 하느니라.

310. 그대는 깨달았도다.

그대의 길을 선택할지어다.

311. 보아라.

동쪽 하늘에 넘쳐 흐르는 아름다운 빛을.

하늘과 땅이 하나같이 칭찬하도다.

활활 타오르는 불과 흐르는 물,

감미로운 향을 내는 땅과 힘차게 부는 바람인

네 가지 현현된 힘들로부터

사랑의 노래가 퍼져 나오는 도다. 

312. 들어라!

승리자가 헤엄치는

황금빛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소용돌이로부터

대자연의 소리 없는 소리가 수천 가지 소리로

이렇게 칭찬하도다;

313. 오, 미얄바의 중생들이여,

그대들에게 기쁨이도다!

314. 피안(彼岸)으로부터 순레자가 돌아왔도다.

315. 새로운 아라한이 탄생하였도다.

316. 모든 만물에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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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 대한 간략한 가이드



명상을 위한 마음가짐



명상은 청정한 생활과 선한 심성이라는 기반이 없이 입문하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하고 무익한 것입니다. 잡초로 가득한 정원에 비료를 주면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나 약하고 작은 꽃들을 밀어내 버리듯이, 그러한 명상은 그들의 삶의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만을 자극하는 에너지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수단이 될 뿐입니다.

개인적인 성장이나 영적인 힘들을 추구하는 욕망과 같은 옳지 못한 동기가 있다면, 명상은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명상은 이러한 조건하에서는 오직 미망의 골짜기에서 어두운 그림자만을 강화시킬 것이며, 이기적 욕망의 계곡에 숨어있는 자만심이라는 뱀만을 온전히 길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봉사하려는 욕망이 결여되어 있을 때, 명상은 위험한 것입니다. 봉사라는 말은 공동체의 선(행복)을 위하여 영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봉사하려는) 충동이 없더라도, 에너지는 여러체들(육체,아스트럴체,멘탈체, 등등)에 쏟아져 들어오겠지만, - 쓸모가 없고 출구를 찾지 못할 것이기에 - 에너지 센터(차크라)들을 과도히 자극하고, 초심자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히게 될 조건들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소화와 배출은 육체적 삶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 삶의 법칙이기도 하며, 이러한 단순한 법칙이 무시되었을 때, 육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결과들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



명상에 대한 간략한 가이드
(An Introductory Guide to Meditation )

차례

A. Introductory Remarks 서론

B. Some Pertinent Questions 명상에 관한 몇 가지 질문

C. The Mechanics of the Meditation Process 명상의 원리

D. Some Preliminary Suggestions 몇 가지 기본적인 제안

E. The Practice of Meditation 명상의 실행

F. Meditation Technique 명상의 기법

G. The Raja Yoga Method of Meditation 라자 요가 명상의 기법

H. The Need for Care in Meditation 명상에 있어서의 주의점



A. 서론
(The following contains extracts adapted from Alice A. Bailey's books From Intellect to Intuition and The Light of the Soul.)

(다음의 글들은 앨리스 A. 베일리의 책들 중 “지성에서 직관으로”와 “영혼의 빛”에서 발췌한 내용을 담고 있다.”)

The present widespread interest in the subject of Meditation is an evidence of a world need which requires clear understanding. Where we find a popular trend in any direction, which is one-pointed and steady, it may be safe to assume that out of it will emerge that which the human race needs in its onward march.

명상이란 주제에 대한 오늘날의 광범위한 관심은 명확한 이해를 요하는 세계적인
[명상의] 필요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어떤 방향으로든 초점이 명확하고 꾸준한 대중적인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인류가 그 계속되는 진보에 있어서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이 그로부터 나타날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That meditation is regarded by those who define it loosely as a "mode of prayer" is, unfortunately, true. But it can be demonstrated that in the right understanding of the meditation process and in its right adaptation to the need of our modern civilisation will be found the solution of the present educational impasse and the method whereby the fact of the soul may be ascertained – that living something which we call the "Soul" for lack of a better term.
불행하게도, 명상은 그것을 적당히 정의하는 사람들에게 “기도의 일종”이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명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우리 현대 문명의 요구에 명상을 올바르게 적용한다면, 오늘날의 교육의 난국에 대한 해결책과 영혼-우리가 더 나은 용어가 없어 “영혼”이라 부르는 그 살아있는 어떤 것-의 존재를 확증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Down the ages there has been a steady progression of the evolving human consciousness, and a steady growth of awareness of nature, of the world in which we live, and an increasing grasp of the Whole, until now the entire world is knit together through the radio, the telephone and television. Humanity is omnipresent, and the mind is the main factor in the bringing about of this apparent miracle.

오랜 세월동안 진화하는 인간의 의식은 꾸준한 진보를 이룩해 왔고, 자연에 대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인식은 꾸준히 성장해 왔으며, “전체the Whole”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계속 늘어왔습니다. 마침내 오늘날 전세계는 라디오와 전화, 그리고 텔레비전으로 하나로 엮여졌습니다. 인류는 모든 곳에 편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명백한 기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마음[정신]은 그 주된 요인이었습니다.

"We have arrived at an understanding of the laws which govern the natural world, and some of those which govern the psychical. The laws of the spiritual realm, so-called, remain to be scientifically discovered and utilized. A few have known these laws and spoken to humanity about them.... Among these few who stand out as the eminent Knowers, are the Buddha, the Christ, Plato, Aristotle, Pythagoras, Meister Eckhart, Jacob Boehme, Spinoza – the list is long.
“우리는 자연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정신을 지배하는 법칙들 중의 일부에도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위 영적인 영역의 법칙들은 여전히 과학이 발견하고 활용해야 할 영역에 남겨져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법칙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인류에게 전달해 왔습니다…. 탁월한 선각자인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붓다와 그리스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야곱 뵈메, 스피노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열거하자면 매우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We are now beginning to ask the pertinent question: Is it not possible that many thousands now are at the point where they can co-ordinate the brain, the mind and the soul, and so pass through the portal of mental awareness into the realm of light, of intuitive perception, and the world of causes? The Knowers say that we can, and they tell us of the way."
“우리는 이제 그에 관한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두뇌와 마음과 영혼을 통합하고, 그리하여 빛과 직관적 인식의 영역, 그리고 원인[본질]의 세계로 들어가는 정신적 인식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지점에 서게 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가? 선각자들은 우리가 그럴 수 있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그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From Intellect to Intuition, pp. 180-81)
(지성에서 직관으로,pp.180-81)

B. Some Pertinent Questions
B. 명상에 관한 몇 가지 질문들

What are the objectives of meditation?
명상의 목적은 무엇인가?

The purpose of meditation is soul contact and, ultimately, union with the soul; its whole object is to enable one to become in outer manifestation what one is in inner reality. Through the practice of meditation one is enabled to identify with the soul aspect and not simply the lower characteristics of the personality.
명상의 목적은 영혼과 만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영혼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전체적인 목적은 우리가 외적인 표현에 있어서 내적인 실체로서의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Through meditation,...the powers of the soul are unfolded. Each sheath or vehicle through which the soul expresses itself (on physical, emotional and mental levels) carries latent within itself certain inherent potencies, but the soul, which is the source of them all, has them in their purest and most sublimated form....
명상을 통해서,…. 영혼의 힘이 펼쳐지게 됩니다. ( 육체, 감정, 그리고 정신의 수준에서) 영혼이 자신을 표현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각각의 껍질 혹은 매개체는 각각 그 안에 내재된 어떤 잠재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들 모두의 근원인 영혼은 그 힘들을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정화된 형태로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The soul powers unfold normally and naturally. This they do, not because they are desired and consciously developed, but because as the inner God assumes control and dominates His bodies, His powers become apparent upon the physical plane and soul potentialities will then demonstrate forth as known realities....
영혼의 힘들은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펼쳐집니다. 이런 과정은 의도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발달시켜서가 아니라 내적인 신이 그의 몸을 통제하고 지배하게 됨에 따라 그의 힘이 물질계에 드러나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며, 그때 영혼의 잠재력들은 명백한 사실로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The testimony of the mystics and initiates of all the ages can be brought in corroboration of them. The fact that others have achieved may encourage and interest us but it does no more unless we ourselves take some definite action; for this process for the unfolding of the reasoning consciousness must be self- applied and self-initiated.
This involves the development of the mind as a synthesised, or common sense, and governs its use in relation to the world of the earthly life, of the emotions and of thought. It involves also its orientation at will to the world of the soul, and its capacity to act as an intermediary between the soul and the physical brain.
모든 시대의 신비가들과 비전가들의 증언은 그 사실들을 증언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흥미를 끌며 우리를 격려하는 것입니다만 우리 스스로가 명확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이성적인 의식의 발달을 위한 이 과정은 반드시 스스로 적용하고 스스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은 종합적이고 상식적인 마음의 발달과 일상적인 삶, 감정, 그리고 생각의 세계와 관련해 그 사용을 지배하는 능력을 포함합니다. 또한 이 과정은 영혼과 물질두뇌 사이의 매개체로서 작용하는 마음의 역량과 원하는 대로 영혼의 세계로 마음을 향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합니다.

The first relation is developed and fostered through sound methods of exoteric education and of training; the second is made possible through meditation, a higher form of the educational process.
그 첫번째는 일반적 교육을 통한 건전한 방법들을 통해 발달되고 길러질 수 있으며, 두 번째는 교육과정의 더 높은 형태인 명상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From Intellect to Intuition, pp. 83-87)


Q: 명상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명상의 기법을 통해 도움을 얻고 그것을 마스터 할 수 있는가?

A:처음에는, 명상을 하고자 하는 충동 그 자체가 바로 앎의 길(the Path of Knowledge)로 이끄는 영혼의 부름이라고 할 수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 누구도 어떤 자질이 모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크고 , 더 현명하며, 더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기만 한다면 지금 즉시
집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양의 지식과 정신적 힘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것들을
아직 한번도 무의식의 영역으로부터 끌어내어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초심자에게 나타나는 명상의 효과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을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명상 훈련에 있어서의 첫번째 단계, 즉 집중의 결과는 종종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찾게" 됩니다. 그들은 이전에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던
감춰져 있던 가능성들과 지혜(Understanding)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자각을
발전시켜 갑니다. 그것이 비록 현상계에 관한 것이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기적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갑자기 [그들에게]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들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며, 아는 자와 앎의 도구 사이의 분별은 점점 분명한 것이 되어갑니다.

동시에, 어떤 상실감이 느껴지게 됩니다. 신비주의적인 기도와 명상이 그들에게
주었던 이전의 축복과 평화가 있는 꿈결같은 상태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임시적으로 그들은 종종 큰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일종의 권태감, 결핍감, 그리고
공허감등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관심의 초점이 감각적인 것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 지라도-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써 알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인지되지 않고 있으며, 또한 감각 기관(the feeling apparatus) 역시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친숙한 인상들을
더 이상 의식에 전달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 기간은
과도기 이며, 새로운 세계가 구도자에게 그 인상을 남기기 시작할 때까지 참아내야 합니다. 이는 왜 인내와 끈기가 명상 과정의 초기 단계에서 특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지에 대한 한가지 이유입니다.

명상의 초기 효과들 중의 하나는 일반적으로 집에서건 회사에서건, 또는 그 밖의 어떤 삶의 현장에서건 일상 생활에서 더 효율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용무에
정신적으로 몰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일종의 집중 훈련이며 주목할 만한 결과를
가져옵니다.우리가 궁극적 각성을 얻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집중하고 명상하는
연습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고 우리의 삶을 매우 풍요롭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유용함과 능력은 엄청나게 향상되고 우리의 영향력은
크게 확장됩니다.

완전히 감정적이지 않고, 상당한 교육을 받았으며, 꾸준하게 노력해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분한 용기를 가지고 명상을 탐구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각성으로 향한 길의 첫 걸음을 떼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재조정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가장 어려운 단계들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첫 걸음은 어렵기
마련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십시오. 왜냐하면 오랜 세월의 습관과 리듬을 상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이러한 과정이 시작되고 숙달된다면, 작업은 더
쉬워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제 정리를 해보자면,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째: 우리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영혼은 마음을 훈련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인식될 수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입니다.

둘 째: 이 가정에 근거해서, 우리는 우리의 하급 본질의 세 측면을 통합하고,
마음과 감정과 육체를 통합하여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전체로 만드는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집중하기를 훈련함으로써 이루어 집니다.

세 째: 집중이 서서히 (지속적인 집중 활동인)명상으로 변해감에 따라 영혼의
의지가 마음에 전달되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영혼, 마음,
그리고 두뇌는 긴밀한 관계를 이루어가게 됩니다. 우선 마음이 두뇌와 감정을
조절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영혼이 마음을 조절하게 됩니다. 첫번째 단계는
집중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며, 두 번째는 명상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을 통해서, 관심 있는 탐구자는 명상이 정말 해 볼만한 일이라는 것과 그 것을 이루기 위한 첫번째 자질은 끈기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건 자신의 사고를 조직화하고, 둘째로 매일 정기적으로, 가능하다면 어떤 정해진 시간에 하는 집중 수련은 하나에 몰입된 태도를 만들어 주며, 이 두 가지가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Ibid., pp. 199-206)

...It should be remembered, at the outset, that the very urge
itself to meditate can be taken as indicating the call of the soul to the Path
of Knowledge. No one should be deterred because of a seeming lack of the needed
qualifications. Most of us are bigger and wiser, and better equipped than we
realise. We can all begin to concentrate at once if we so choose.
We possess a great deal of knowledge, mental power, and
capacities, which have never been drawn forth from the realm of the subconscious
into objective usefulness; anyone who has watched the effect of Meditation upon
the beginner will substantiate this statement....

The results of the first step in the Meditation discipline,
i.e., of Concentration, are often amazing. People "find" themselves; they
discover hidden capacities and an understanding never used before; they develop
an awareness, even of the phenomenal world, which is, to them, miraculous; they
suddenly register the fact of the mind, and that they can use it, and the
distinction between the knower and the instrument of knowledge becomes steadily
and revealingly apparent.

At the same time there is also registered a sense of loss. The
old dreamy states of bliss and peace, with which the mystic prayer and
meditation had dowered them, disappear; and, temporarily, they experience a
sense of aridity, of lack and of an emptiness which is frequently most
distressing. This is due to the fact that the focus of attention is away from
the things of the senses, no matter how beautiful.

The things that the mind knows and can record are not yet
registered, nor is the feeling apparatus making its familiar impacts upon the
consciousness. It is a period of transition, and must be supported until such
time as the new world begins to make its impress upon the aspirant. This is one
reason why persistence and perseverance must play their part, particularly in
the early stages of the meditation process.

One of the first effects of the meditation work is usually an
increased efficiency in the daily life, whether lived in the home, the office,
or in any field of human endeavour. Mental application to the business of living
is in itself a concentration exercise and brings notable results. Whether we
achieve final illumination or not through the practice of concentration and
meditation, we will nevertheless have gained much, and greatly enriched our
life; our usefulness and power will be enormously increased and our sphere of
influence widened.


...Anyone who is not purely emotional, who has a fair
education, and who is willing to work with perseverance, can approach the study
of meditation with good courage. one can begin to organize one's life so that
the first steps can be taken on the path towards illumination, and this
organization is one of the most difficult of steps. It is well to remember that
all initial steps are hard, for the habits and rhythms of many years have to be
offset. But once these have been taken and mastered, the work becomes easier.

To sum up, therefore,...the answer to our question is as
follows:

First: We accept the hypothesis that there is a soul, and that
that soul can be cognised by the person who can train and control the mind.

Second: Upon the basis of this hypothesis, we begin to
co-ordinate the three aspects of the lower nature, and to unify mind, emotion
and physical body into an organised and comprehended Whole. This we do through
the practice of concentration.

Third: As concentration merges into meditation (which is the
act of prolonged concentration) the imposition of the will of the soul, upon the
mind, begins to be felt. Little by little the soul, the mind and the brain are
swept into a close rapport. First, the mind controls the brain and the emotional
nature. Then the soul controls the mind. The first is brought about through
concentration. The second through meditation.

Out of this sequence of activities, the interested
investigator will awaken to the realization that there is a real work to be done
and that the primary qualification needed is perseverance....The organization of
the thought life at all times everywhere, and, secondly, the practice of
concentration, regularly, every day, at some set time, if possible, make for the
one-pointed attitude, and these two together spell success.

(Ibid., pp. 199-206)


Q: 영혼을 일깨우기 위해 홀로 은둔하는 것이 필요한가?

A: 우리들의 대부분은 완전한 평화와 고요함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세계에서의 [명상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의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오래된 진리의 새로운 측면을 찾아내는 일에 우리의 특권이 있음을 아는 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서구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보다 젊은 인종에 속합니다. 오래, 아주 오래 전 동양에서는 소수의 대담한 개척자들이 은둔하는 삶을 추구하여, 우리를 위해 그 가능성들을 확인하였으며, 우리를 위해 그 법칙들을 보호하였습니다. 마침내 한 두 명의 사람이 아니라 대중들이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그러한 시대에 까지, 그들은 그 기법들을 우리를 위해 안전하게 보존해 왔습니다.
그 시대가 이제 도래하였습니다. 현대적 삶의 스트레스 속에서도 남녀 누구나 어디에 있든지 우리들 내부에서 평화의 중심을 찾을 수 있으며, 그들이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고, 같은 지식을 얻으며 인류의 위대한 선인들이 증언해온 같은 빛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고요하고 명확한 집중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은둔의 장소는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삶[생명력]과 만나는 고요한 장소는 머리 속에 있는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 스스로를 충분히 한 점에 집중하도록 훈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그들의 내면에 있는 중심점으로 그들의 생각을 끌어들일 수 있으며, 머리 속에 있는 이 중심에서 하나됨이라는 위대한 작업이 계속되어 질 수 있습니다.
Ibid., pp. 208-10)
진정한 집중은 [무언가에] 몰입하고, 사고에 의해 조절되는 삶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며, 구도자에게 있어 첫 걸음은 그들 매일의 삶을 질서있게 하고 그들의 행위를 바르게 하며, 삶의 태도에 있어 초점을 갖고 한 점에 몰입하도록 하는 노력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필요한 노력을 할 만큼 충분히 관심을 갖고 끈기 있게 그것을 수행해 나아갈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부차적인 행위들을 그만두고, 우리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바르게 재조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근기와 우리의 열망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러므로 하나에 몰입된 사람에게 삶의 의무들을 게을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고 일과 직업에 대한 의무는 더욱 완벽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것입니다.

Ibid., pp. 207

Is it necessary to withdraw into the solitudes to evoke the soul?

Most of us live in the midst of conditions in which complete peace and quiet are utterly impossible; and the solution in today's world lies in a right understanding of our problem and of the privilege which is ours in demonstrating a newer aspect of an old truth.

We belong, in the West, to a younger race. In the old, old East, the few adventurous pioneers sought seclusion and ascertained for us the opportunities, and safeguarded for us the rules. They held in safety for us the technique until such time as the masses of people were ready for a move forward in their numbers, and not in their ones and twos.

That time has now come. In the stress...of modern living...men and women everywhere can and do find the centre of peace within themselves, and they can and do enter into that state of silent positive concentration which enables them to reach the same goal, and attain the same knowledge, and enter into the same Light to which the great Individuals of the race have borne witness.

The secluded point to which one withdraws, is found to lie within oneself; the silent place in which the life of the soul is contacted is that point within the head where soul and body meet....Those who can train themselves to be sufficiently one-pointed can withdraw their thoughts at any time and in any place to a centre within themselves, and in this centre within the head the great work of at-one-ment is carried forward.

True concentration grows out of a concentrated, thought-governed life, and the first step for aspirants is to begin to organise their daily life, regulate their activities, and become focused and one-pointed in their manner of living. This is possible to all who care enough to make the needed effort and who can carry it forward with perseverance....

When we can organise and re-arrange our lives, leaving out the non-essential activities, we prove our mettle and the strength of our desire. ...Therefore, no neglect of duty is possible to the one-pointed person. Duties to family and friends and to one's business or profession will be more perfectly and efficiently performed....


C. 명상의 원리
여기에 계략적으로 설명된 이론의 근거가 되는 가정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영혼이 작용하는 에너지의 중심점은 상부두뇌입니다. 명상을 하는 동안, 그 명상이 효과적인 것이라면, 영혼으로부터 에너지가 두뇌로 쏟아져 들어와 신경계에 명확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지만, 만일 마음이 통제되지 못하고 (순수한 신비가—역주:pure mystic:전적으로 헌신하는 감정쪽에 기울어 있는 신비가--의 경우에서처럼) 감정적인 본질이 지배하는 경우 그 효과는 존재의 감정적 상태인 감각 기관(the feeling apparatus)에서 우선적으로 느껴집니다. 마음(the mind)이 지배적인 요소일 때는 상부 두뇌에 있는 사고 기관이 조화로운 진동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명상하는 사람은 명확하게, 종합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역량을 얻게 됩니다.

둘째 : 보다 진보된 사람의 경우에, 뇌하수체 부근에서 [정신의] 저급 기능들의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 기능들은 통합되고 정렬되며, 일부 명망있는 학파의 심리학자들과 내분비계 학자들이 말하듯 여기에서 감정과 (인종적 습관과 유전된 본능으로부터 자라나며, 창조적인, 혹은 수준 높은 마음의 작용이 필요하지 않은) 마음의 보다 구체적인 측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셋째: 육체적, 감정적, 그리고 정신적인 상태들의 총합인 인격(the personality)이 높은 수준에 있을 때, 뇌하수체는 보다 효율적으로 작용하게 되며, 그 부근에 있는 에너지의 중심점의 진동은 매우 강력하게 됩니다. 한 가지 주지할 사실은, 이 이론에 의하면, 인격이 낮은 수준에 있을 때, [환경에 대한] 그 반응이 주로 본능적이고, 마음이 실질적으로 거의 작용하지 않을 때에는 그 에너지의 중심점은 태양신경총의 근처에 위치하게 되며, 그 사람은 본성에 있어 보다 동물적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송과선 부근에 있는 중심점, 그리고 상부 두뇌는 머리에 주의 깊게 의식을 집중하는 것을 매움으로써 작용하게 됩니다…… 감각의 다양한 통로는 조용한 상태에 들게 됩니다. 본질적인 인간(the real man)의 의식은 더 이상 감각의 다섯 통로를 따라 외부로 요동치지 않습니다. 다섯 감각들은 여섯번째 감각인 마음에 의해 지배되고 구도자의 모든 의식과 인지 능력은 머리에서 통합되며, 안으로 그리고 위로 향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심령적 본질(the psychic nature)이 정복되며, 멘탈계는 그의 활동무대가 됩니다. 이러한 물러남 또는 추출과정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됩니다.

1. 육체적 의식, 혹은 청각, 촉각, 시각, 미각, 그리고 후각의 물러남. 이러한 지각의 방법들은 임시적으로 휴면상태가 되고, 지각은 순전히 정신적인 것이 되며, 두뇌의식만이 물질계에서 활동하는 전부가 됩니다.

2. 의식이 송과선 부근으로 물러나, 깨달음의 초점이 이마의 중심부와 송과선의 중간 사이에 집중화됨.

다섯째: 이러한 과정이 끝나면, 구도자는 머리에 집중하는 능력을 얻어가게 되며, 이러한 추출 과정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섯 감각들은 여섯번째 감각인 마음에 의해 착실히 통합되어 갑니다. 마음은 여기서 통합을 주관하는 요소가 됩니다. 영혼이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삼중의 인격(the three-fold personality)은 영혼과의 직접적인 통신을 할 수 있게 되고,….. 곧 명상하는 사람은 육체의 한계를 의식하지 않게 되며, 마음을 통해 영혼의 뜻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두뇌의식은 비록 임시적이긴 하지만 현상계에 대한 반응을 완전히 제지당한 채로 긍정적인 기다림의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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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부터는 다음번에....

C. The Mechanics of the Meditation Process

The hypothesis upon which the theories here outlined are based might be expressed in the following propositions:

One: The centre of energy through which the soul works is the upper brain. During meditation, if effective, energy from the soul pours into the brain, and has a definite effect upon the nervous system. If, however, the mind is not controlled and the emotional nature dominates (as in the case of the pure mystic) the effect makes itself felt primarily in the feeling apparatus, the emotional states of being.
When the mind is the dominant factor, then the thought apparatus, in the higher brain, is swung into an organised activity. The one who meditates acquires a new capacity to think clearly, synthetically and potently....

Two: In the region of the pituitary body, we have the seat of the lower faculties, when co-ordinated in the higher type of human being. Here they are co-ordinated and synthesised, and as we have been told by certain reputable schools of psychologists and endocrinologists here are to be found the emotions and the more concrete aspects of the mind (growing out of racial habits and inherited instincts, and, hence, calling for no exercise of the creative or higher mind)....

Three: When the personality the sum-total of physical, emotional and mental states is of a high order, then the pituitary body functions with increased efficiency, and the vibration of the centre of energy in its neighbourhood becomes very powerful. It should be noted that according to this theory, when the personality is of a low order, when the reactions are mainly instinctual and the mind is practically non- functioning, then the centre of energy is in the neighbourhood of the solar plexus, and the man is more animal in nature.

Four: The centre in the region of the pineal gland, and the higher brain, are brought into activity through learning to focus the attentive consciousness in the head....
The various avenues of sense perception are brought into a quiescent condition. The consciousness of the real man no longer surges outwards along its five avenues of contact. The five senses are dominated by the sixth sense, the mind, and all the consciousness and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aspirant is synthesised in the head, and turns inward and upward. The psychic nature is thereby subjugated and the mental plane becomes the field of man's activity. This withdrawal or abstracting process proceeds in stages:

1. The withdrawal of the physical consciousness, or perception through hearing, touch, sight, taste and smell. These modes of perception become temporarily dormant, and the perception becomes simply mental and the brain consciousness is all that is active on the physical plane.

2. The withdrawal of the consciousness into the region of the pineal gland, so that the point of realisation is centralised in the region between the middle of the forehead and the pineal gland.

Five: When this has been done, and the aspirant is acquiring the ability so to focus in the head, the result of this process of abstraction is as follows:
The five senses are being steadily synthesised by the sixth sense, the mind. This is the co-ordinating factor. Later it is realised that the soul has an analogous function. The three-fold personality is thus brought into a direct line of communication with the soul, and...in time the one who meditates becomes unconscious of the limitations of the body nature, and the brain can be directly impressed by the soul, via the mind. The brain consciousness is held in a positive waiting condition with all its reactions to the phenomenal world utterly, though temporarily, inhibited.


여섯째: 높은 수준의 지성적인 사람(personality)은, 뇌하수체 영역에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송과선 영역의 상부 센터와 일치하여 조화롭게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집중과정에 의해 수용적인 상태가 되어 기다리고 있는 현재인격(personality)과 영혼의 적극적인 측면 사이에 어떤 자기장이 형성되게 됩니다. 그러면, 빛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그는 깨달음을 얻게 되며, 그의 머리에서는 후광이 드리워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절제된 생활과 두뇌에 의식을 집중함에 의한 결과입니다. 이는 또한 일상의 삶에 집중하려는 노력, 그리고 또한 명확한 집중 수련을 통해 일어난 결과 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 뒤이어 명상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며, 그 후에는- 그 훨씬 후에는- 구도자는 관조할 수 있는 힘이 생겨가고 있음을 알아채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명상의 원리에 대한 간략한 요약이며, 따라서 간결하고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은 [스스로] 명상 작업에 지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까지는 실험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명확히 하고 그것을 임시로 받아들였다면, 이제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또는 우리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될 때까지는 그 일을 계속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가정이란 것은 비록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기에 적절한 시간 안에 사실임이 증명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필요한 만큼의 끈기가 부족하거나 이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려 이 분야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연구를 계속해 나가며, 그 고대의 기법들과 공식들이 스스로를 증명해 보일 수 있도록 시간을 투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번째 자격요건[끈기]에 부응하며, 보다 집중된 마음 자세를 삶에 부여하기 위하여, 그리고 매일의 명상과 집중을 수련하기 위하여 노력해 나아갑니다. …, 우리가 초심자이거나, 흐트러진 마음을 가지고, 유동적이고 변덕스러우며, 불안정하다면, 우리는 집중하는 수련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숙련된 지성인이라면, 또는 일상 업무 속의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관심 있게 집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저 우리의 마음을 새로운 인식의 영역으로 돌리기만 하면 되며, 바로 명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관심 있는 사업가에게 명상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From Intellect to Intuition, pp. 211-16)

D. 약간의 기본적인 제안

명상을 위한 시간 내기

우선 이 특별한 작업을 위해 매일 약간의 시간을 따로 마련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15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진실하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인식하도록 합시다. “나는 시간이 없어요”라는 변명은 전혀 당치 않은 것이며, 단지 관심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하루를 구성하고 있는 일천 사백 하고도 사십 분이나 되는 시간 중 단 15분을 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이 특별히 관심을 갖고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닐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명상을 위해서 이른 아침에 시간을 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매일의 갖가지 일들과 삶의 일상적인 주고 받음에 빠져들고 나면, 마음은 격렬한 진동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침에 첫번째 일로 명상을 수행한다면, 그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침엔 주변이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마음은 더 빠르게 의식의 고양된 상태에 동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영적인 일들과 영혼의 일들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 날을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습관이 된다면, 곧 우리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변화하고 있음과 영혼이 생각하는 것들을 우리도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명상을 위한 장소를 찾기

다음으로, 우리는 정말 조용하고 방해 받지 않는 장소를 찾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 말은 소음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조용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갖가지 소리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타인이 접근해 오거나 불러내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상을 하려는 구도자들은 종종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부딪히는 반대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많은 말을 하곤 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우리의 15분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누구도 상관할 바 없는 일이며, 그것에 대해 가족들에게 말을 하거나, 그들에게 우리가 명상을 하려 하니 조용히 해야 한다고 명령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일 가족들 때문에 아침 명상을 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루 중에 약간의 시간을 내도록 합시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어려움이 있더라도 해결책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며, 그 해결책은 그 어떤 의무나 책임도 소홀히 하지 않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최후의 수단으로서, 매일 아침 15분씩 더 일찍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From Intellect to Intuition, pp. 216-18)





Sixth: The high grade intellectual personality, with its focus of attention in the region of the pituitary body, begins to vibrate in unison with the higher centre in the region of the pineal gland. Then a magnetic field is set up between the positive soul aspect and the waiting personality which is rendered receptive by the process of focused attention. Then the light, we are told, breaks forth, and we have the illumined human being, and the appearance of the phenomenal light in the head.

All this is the result of a disciplined life, and the focusing of the consciousness in the head. This is, in its turn, brought about through the attempt to be concentrated in the daily life, and also through definite concentration exercises. These are followed by the effort to meditate, and later–much later–the power to contemplate makes itself felt.
This is a brief summation of the mechanics of the process, and is necessarily terse and incomplete. The ideas have to be accepted tentatively, however, before there can be an intelligent approach to the meditation work....

Having formulated our hypothesis and accepted it temporarily we proceed with the work, until it proves false, or until our attention is no longer engaged. An hypothesis is not necessarily false because it fails to prove itself in the time we deem proper. People frequently give up their pursuit in this field of knowledge because they lack the needed perseverance, or their interest becomes engaged elsewhere.

However, we are determined to go forward with our investigation and give the ancient techniques and formulas time to prove themselves. We proceed, therefore, to comply with the first requirements and endeavour to bring to bear upon life a more concentrated attitude of mind, and to practice daily meditation and concentration.
If we are beginners, or are possessed of an unorganised mind, fluidic, versatile and unstable, we start in to practice concentration. If we are trained intellectuals, or have the focused attentiveness that business training confers, we need only to reorient the mind to a new field of awareness and begin truly to meditate. It is easy to teach meditation to the interested business executive.

D. Some Preliminary Suggestions

Finding Time

It is advisable to set apart a certain time each day for this particular work. At the beginning fifteen minutes is ample time. Let us be truthful with ourselves, and recognise things for what they are. The plea, "I have no time," is an utterly futile one, and indicates simply lack of interest. May it not be truly said, if anyone claims not to be able to find fifteen minutes out of the one thousand four hundred and forty minutes which constitute a day, that they are not particularly interested?

First of all, we shall endeavour to find time early in the morning for our meditation work. The reason for this is, that after we have participated in the happenings of the day and in the general give and take of life, the mind is in a state of violent vibration; this is not the case if the meditation is performed first thing in the morning. Then it is relatively quiet, and the mind can be more rapidly attuned to the higher states of consciousness.
Again, if we start the day with the focusing of our attention on spiritual things and on the affairs of the soul, we shall live the day in a different manner. If this becomes a habit, we shall soon find our reactions to the affairs of life changing and that we are beginning to think the thoughts that the soul thinks. It then becomes the process of the working of a law, for "as a man thinks so is he".

Finding a Place for Meditation

Next, we shall endeavour to find a place that is really quiet and free from intrusion. This does not mean quiet in the sense of freedom from noise, for the world is full of sounds; but free from personal approach and the calls of other people.
Aspirants to meditation sometimes talk much about the opposition they meet from their family and friends. In the majority of cases it is their own fault. People talk too much. It is nobody's business what we do with fifteen minutes of our time every morning, and there is no need to talk about it to our households, or to enjoin upon them that they must be quiet because we want to meditate.
If it is impossible to get a moment for morning meditation because of family commitments, let us find some time for it later on in the day. There is always a way to be found out of a difficulty, if we want a thing badly enough and a way that involves no omission of duty or of obligation. As a last resort, it is always possible to rise fifteen minutes earlier every morning.


E.명상의 실천

자세
시간과 장소를 찾았다면, 우리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명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몇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앉아야 하는가? 결가부좌(요기들이 취하는 다리를 꼬고 앉는 자세)가 최선인가, 아니면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혹은 앉거나 서야 하는가? [자신에게] 가장 쉽고 가장 일상적인 자세가 언제나 최선입니다.

결가부좌는 동양에서 많이 취해져 왔고 현재도 그러하며, 많은 책들이 그 주제에 대해 말해왔습니다. 그 중 어떤 자세들은 신경체(the nervous body) 및 힌두인들이 나디(the nadis)라고 부르며, 서구에서는 신경계의 배후에 놓여 있다고 알고 있는, 미세 신경의 내부 구조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자세들의 문제점은 그 자세들이 다소 바람직하지 못한 두 가지 경향을 조장하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세들을 취하는 사람은 곧잘 목적에 집중하지 않고 [형식적] 과정에 몰두하기 쉽습니다; 또한 그는 종종, 우리가 일반 대중이 하지 않는, 그래서 우리를 깨달음을 얻게될 사람(potential knower)으로서 구분지어줄 어떤 것을 하려고 시도할 때에 생기는 우월감이라는 매혹적인 상태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명상의 외형적 측면에 몰두하게 됩니다; 우리는 진아( the Self)가 아니라 자아가 아닌 것(the Not-self)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쉽게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자세를 선택하기로 합시다. 아마도 서구인을 위한 좌법은 바로 이런 것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척추를 곧게 하여 바르게 앉아야 한다는 것이며, 몸의 어떤 곳에도 긴장이 없도록 (구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완된 상태로 앉아야 하며, 목 뒤쪽의 긴장을 풀 수 있도록 턱을 약간 떨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상은 내적인 작업입니다. 따라서 몸을 이완하고 바른 자세를 취하며, 그리고 나서는 몸을 잊을 수 있을 때에만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습니다.

호흡

육체를 편안히 하고 이완시킨후 육체적 의식에서 물러났다면, 이제는 우리의 호흡을 살피고 그것이 조용하고 평탄하며 규칙적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올바른 명상과 육체의 정화를 위해 이미 수년간 노력해온 사람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호흡수련에 대해 주의 사항 한가지를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동양의 고대의 가르침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합일에 이르는 방법”들 중 처음 세가지가 어느 정도 삶에서 구현되었을 때, 그리고 나서 적절한 지도를 받을 때에만 호흡을 다스리는 수련이 허용되었습니다.
호흡수련은 영적인 발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령적 능력의 계발과 많은 관련이 있으며, 그런 수련함으로써 많은 위험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고대에는 스승이 이러한 형태의 가르침에 적합한 사람을 뽑는 일은 흔한일이 아니었고, 거기에는 영혼과의 접촉을 어느 정도 이루기 위한 수련이 더해졌습니다. 따라서 영혼은 그 수련의 목표와 세상을 위한 봉사를 더 심화시키기 위해 호흡을 통해 발생된 에너지들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호흡이 고요하고 규칙적인가 하는 것만을 살필 것이며, 다음엔 우리의 생각을 육체로부터 완전히 철수시키고 집중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E. The Practice of Meditation

Posture

Having found the time and the place, we shall sit down in a comfortable chair and begin to meditate. The question then arises: How shall we sit? Is the cross-legged attitude the best, or shall we kneel, or sit, or stand? The easiest and most normal position is the best always.


The cross-legged attitude has been, and still is, much used in the Orient, and many books have been written on the subject. Some of the postures have relation to the nervous body and that inner structure of fine nerves, called by the Hindus, the nadis, which underlie the nervous system as recognised in the West.


The trouble with such postures is that they can lead to two rather undesirable reactions; they lead a person to concentrate the mind upon the mechanics of the process and not upon the goal; and, secondly, they frequently lead to a delightful sense of superiority, that has its basis in our attempt to do something that the majority is not doing, and which sets us apart as potential knowers. We become engrossed with the form side of meditation; we are occupied with the Not-self instead of with the Self.

So let us choose that posture that enables us, the most easily, to forget that we have a physical body. This is probably for the Westerner the sitting attitude; the main requirements are that we should sit erect, with the spine in a straight line; that we should sit relaxed (without slumping) so that there is no tenseness anywhere in the body, and that we should drop the chin somewhat, so as to release any tension in the back of the neck. Meditation is an interior act, and can only be performed successfully when the body is relaxed, rightly poised and then forgotten.


Breathing

Having attained to physical comfort, relaxation, and having withdrawn ourselves from the body consciousness, we next note our breathing and ascertain whether it is quiet, even and rhythmic.

A note of warning should be sounded here as to the practice of breathing exercises, except by those who have first given years to right meditation and to purification of the body nature. In the ancient teachings of the East, the control of the breath was only permitted after the first three "means to union", as they are called, had been somewhat wrought out in the life, and then only under proper instruction.

The practice of breathing exercises has nothing whatever to do with spiritual development. It has much to do with psychical development, and its practice leads to much difficulty and danger. It is only here and there that, in the ancient days, the teachers picked a person for this form of tuition, and it was added to a training which had produced a certain measure of soul contact, so that the soul could guide the energies evoked by the breath for the furtherance of its objectives and for world service.

Therefore, we will do no more than see that our breathing is quiet and regular, and will then withdraw our thoughts from the body altogether and begin the work of concentration.


명상수련에 대한 조언


하이어라키의 드러남The Externalization of the Hierarchy, 17~20

서론, 변화의 시기 - II. 비전학교와 수련체계 중에서


모든 비전 학교들에서는 반드시 그리고 당연히 명상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말한다면 명상이란 머리의 [에너지]센터를 일깨우고, 그것을 다스리며, 사용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영혼과 인성(the personality)은 조화를 이루고 통합되며, 하나됨이 이루어집니다.그리고 구도자에게는 엄청난 양의 영적인 에너지의 유입이 있게 되어, 그의 존재 전체에 기운을 북돋아 활발히 움직이게 만들며, 그에게 잠재된 선을 그리고 또한 악을 표면으로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여기에는 많은 위험이 놓여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학파들에서는 순수성과 진실함의 필요성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 순수함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강조해 왔지만,모든 광신주의와 편협함을 피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가 주어지지 않아왔습니다. 이들 두가지 품성은 잘못된 식사방법 같은 것들보다 훨씬 더 학도들을 방해하는 것들이며, 다른 어떤 요소들 보다도 분리의 불꽃을 크게 타오르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명상은 언제나 그리고 매일 매일 하나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삶은필연적으로 두뇌세포에 과도한 긴장을 주게 되는데, 이는 활동하고 있지 않은 세포들을 활동하게 하고 두뇌의식을 영혼의 빛에 깨어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연한 명상의 과정은, 수년간의 기간에 걸쳐서 진행되고 명상적인 삶과 하나에 집중된 봉사로 보완된다면, 전체적인 [몸과 영혼의]체계를 성공적으로 일깨울 것이고, 하위 인간[역주:personality]을 영적인 인간[역주:soul]의 영향력과 통제하에 놓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에텔체에 있는 힘의 센터들을 일깨우고 척추뼈의 아래쪽 끝에서 잠자고 있는 신비한 에너지의 흐름을 자극하여 활동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경험자의] 지도를 받으며, 적절한 주의와 보호를 받으며 진행되어진다면, 그리고 그 과정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진행된다면 거기에는 위험의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학도가 준비되지 않고, 그의 여러 체들이 잘 조화되고 충분히 발달되기전에 그러한 조율과 일깨움을 강제하거나 이러 저러한 수련들에 의해서 일으킨다면, 그 때 그 구도자는 재앙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호흡 수련이나 프라나야마 수련은 반드시 전문가의 지도하에서, 그리고 수년 간의 영적인 실천과 헌신, 그리고 봉사의 삶을 보낸 후가 아니라면 절대로 채택해서는 안됩니다; 에너지체(force body,역주:에텔체)의 센터들[차크라]의 힘을 깨우려는 목적으로 그 센터들에 집중하는 것은 결단코 피해야만 할 일입니다;그러한 행위는 과도한 자극을 일으켜, 학도 스스로는 닫기 힘든 아스트럴 계로의 문을 열게될 것입니다. 내가 모든 오컬트 학파들에 있는 학도들에게 진정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변화의 시대를 위한 요가는 하나에 집중된 의도를 지니고, 방향성 있는 목적을 가지며, 신의 현존을 끊임 없이 실천하는, 그리고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 착실히 체계적으로 진행하는 규칙적이고 정연한 명상을 추구하는 바로 그런 요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집착없이 초연하게 이루어지고 사랑이 담긴 봉사하는 삶과 병행된다면, 센터들의 각성과 잠들어있는 쿤달리니의 불꽃을 불러 일으키는 과정은 안전하게 그리고 온전한 정신하에서 진행
될 것이며, 몸의 전체적인 체계는 "생생함aliveness"이라는 필수적인 단계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에 몇시간에 걸치는 격렬하고 집중적인 명상 과정들을 따르거나, 특정한 센터를 각성시키는 것, 뱀의 불꽃[쿤달리니에너지]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몸에 잠재된 불의 에너지를 불러 일으키는 등의 목적을 가진 행위들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아무리 강하게 경고한다고 해도 그것은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삶이 주는 일상적인 압박감이 너무나 크고 보통의 구도자들은 너무나 민감하고 섬세한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나친 명상이나, 광적인 식이요법, 몇시간씩 잠을 줄이는 것 또는 심령적인 경험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강조는 정신적 균형을 깨뜨리고 종종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큰 해를 끼치게 됩니다.

오컬트 학파들에 속한 학도들이여, 꾸준하고 조용한 그리고 감정적이지 않은 일에 매진하도록 합시다. 몇시간에 걸친 긴 연구와 명상은 자제해야 합니다. 그대들의 몸은 아직 그에 따르는 긴장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자신들을 해칠 뿐입니다. 일상의 의무와 봉사가 부여하는 압박 속에서도 자신이 본질적으로 누구인지 그리고 그대들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잊지 않으며, 평범하고 바쁜 삶을 이끌어 갑시다. 그리고 매일 아침 정기적으로 명상을 하도록 합시다. 처음에는 15분으로 시작하고 절대 40분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봉사하는 삶 속에서 자신을 잊고, 개인적인 심령 능력의 발달에 관심을 쏟지 않도록 합시다. 적절한 수준의 학습과 연구로 마음을 단련하고 지성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그래야 그대들의 마음은 그대들의 감정과 균형을 이루고, 그대들의 각성이 커지고 의식이 확장함에 따라 마주치게될 것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학도들은 자신이 걷는 길(the Path)에 대해 또는 마스터에 대해 헌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대한 존재들은 자신들의 개인성에 대해 헌신하는 사람 보다는 지성적인 협력자와 일꾼들을 찾고 있으며, 자기 자신의 영혼의 빛을 받으며 홀로 걷고 있는 학도들을 헌신적인 열광자보다 더 믿음직한 도구로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빛은 진지한 구도자에게 모든 단체들의 근본에 깔려있는 동일성을 밝혀줄 것이며, 너무나 많은 일들을 오염시키고 방해하고 있는 편협함이라는 독소를 그가 떨궈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 빛은 그로 하여금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갓 입문한 초심자들의 특징인 편협함과 광신주의, 그리고 분리의식을 너그럽게 보아 넘기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를 도와서, 결국에는 그들 역시 보다 진실하게 보고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빛은 봉사의 진정한 비의적 가치를 인식하게 하고 그 무엇보다도 모든 신의 아들들의 두드러지는 특징인 무해함(harmlessness)이라는 품성을 실천하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하지 않으며, 오해를 낳거나 편견을 품게 만들 수 있는 생각을 품지않으며, 또한 그의 형제들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힐 행동을 하지 않는 무해함, 이것이야말로 비전 학도로 하여금 험난한 성장의 길을 안전하게 밟을 수 있게 하는 주된 미덕이라 할 것입이다. 삶의 중심이 동료들에 대한 봉사에 놓이게 될 때, 생명 에너지의 흐름이 세상을 향해 밖으로 흐를 때, 거기에는 위험의 요소가 없으며 구도자는 안전하게 명상하고 원을 세우고 일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그의 동기는 순수합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성을 흩어버리고 관심의 초점을 자신에게서 공동체로 옮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영혼의 생명력은 그를 통해 쏟아 부어질 수 있고, 모든 존재들에 대한 사랑으로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전체 속의 한 부분으로서 인식하게 되고, 그 전체의 생명력은 그를 통해 의식적으로 흐를 수 있게 되며, 모든 현현된 생명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하나됨과 형제애를 깨달을 수 있도록 그를 이끌어 주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구조 등.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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