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상징을 초월하는 마하무드라의 노래
탄트라,
더없는
깨달음
말로써 공(空)을 설명하지만
공은 결코 그런 식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은 빛처럼 찬란하다.”고 말하지만
의식은 모든 언어와 상징을 초월한다.
본질적으로 의식은 공(空)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다.
The ultimate experience
하나, 최후의 경험
마하무드라는 모든 언어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참으로 진지하고 진실한 그대를 위하여
이것을 말할 수밖에 없도다.
공(空)은 의지처를 필요로 하지 않나니
마하무드라는 무(無)에 의지한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유동적이고 자연스런 상태를 지켜라.
그러면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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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무드라(mahamudra)는 최후의 경험이다.
마하무드라는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는 완벽한 오르가슴이다.
존재의 근원으로 녹아드는 것이다.
도덕에는 선과 악이 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상태에는 지혜로운 것과 어리석은 것이 있다.
자연적인 사람은 선한 것이 아니라 지혜롭다.
자연적이지 못한 사람은 악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다.
자연에는 선과 악이 없다.
다만 지혜로운 것과 어리석은 것이 있을 뿐이다.
죄도 없고 덕도 없다.
지혜와 무지가 있을 뿐이다.
이 무지를 죄로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라.
무지가 유일한 죄다.
어떻게 하면 무지를 지혜로 변형시킬 수 있을까?
유동적이고 자연적일 때 변형이 일어난다.
진리의 아름다움, 진실의 아름다움을 잊지 말라.
더 진실해져라. 그러면 꽃이 되어 활짝 피어날 것이다.
더 진실해지면 많은 것들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사회는 거짓과 위선에 많은 투자를 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대는 위선적인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방에서 위선과 마찰을 빚을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혼자가 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해탈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해탈은 자랑할 것이 못된다.
해탈은 그대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내면을 텅 비워라.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워라.
이것을 그대 삶에서 제일가는 원칙으로 삼아라.
The root problem of all problems
둘, 모든 문제의 근본은 마음이다.
하늘을 응시하면서 무(無)를 보아라.
주의 깊게 마음을 관찰하라.
그러면 온갖 차별이 무너지고
깨달음에 도달하리라.
하늘을 떠도는 구름은
뿌리도 없고 집도 없다.
마음속을 떠도는 차별심도 이와 같으니,
본래의 의식을 보면 모든 차별이 무너지리라.
허공에 온갖 형상과 색깔이 나타나지만
허공은 검은 색이나 흰색으로 물들지 않는다.
본래의 의식으로부터 만물이 출현하지만
이 의식은 선악에 물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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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실체가 없다.
오직 사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사념은 본성과 하나가 아니다.
사념은 오고 가지만 당신은 그 자리에 남는다.
그대는 하늘과 같다.
하늘은 그냥 그렇게 존재할 뿐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모든 ‘됨(becoming)’은 공간 속에 나타나는 형상과 이름,
색깔과의 동일시에 불과하다.
당신은 이미 ‘존재(being)’다.
아무 것도 될 필요가 없다.
붓다는 무엇을 얻었는가?
아무 것도 얻지 않았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얻었다.
그것을 기억해 냈다.
The nature of darkness and of light
셋, 빛과 어둠
장구한 세월을 이어온 어둠도
불타는 태양을 가리지는 못하리라.
억겁의 윤회도 의식의 찬란한 빛을
가리지는 못하리라.
말로써 공(空)을 설명하지만
공은 결코 그런 식으로 표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은 빛처럼 찬란하다” 고 말하지만
의식은 모든 언어와 상상을 초월한다.
본질적으로 의식은 공(空)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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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빛의 부재(不在)에 지나지 않는다.
빛은 오고 가지만 어둠은 항상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어둠은 ‘부재’로써 지속 된다.
어둠은 어떤 실체도 없이 그 자리에 머문다.
미움은 실존하지 않는다.
미움은 사랑의 부재 상태일 뿐이다.
분노는 실존하지 않는다.
분노는 자비의 부재 상태다.
무지는 실재하지 않는다.
무지는 깨달음의 부재 상태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빛이 되고,
자신을 망각한 사람은 어둠이 된다.
당연히 이 어둠을 틈타 온갖 도둑과 강도가 공격한다.
온갖 재앙이 일어난다.
그대는 하나가 아니다.
내면의 불꽃이 계속 깜박거리고 있다.
강한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흔들거리고 있다.
행동은 문제가 아니다.
존재가 문제다.
내면의 존재와 빛을 깨달으면,
그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 빛은 항상 거기에 있다.
그 빛은 그대의 존재 자체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공(空)은 공이다.
그러나 그 안에 전체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보면 공은 공이 아니다.
공은 가장 완벽하고 충만한 현상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계 전체가 그대 안에 들어온다.
물방울 하나가 사라져 바다가 된다.
주시자에 관심을 기울여라.
경험이 아니라 주시자에 초점을 맞추어라.
아무리 아름다운 경험일지라도 그 모두가 꿈과 같은 것이다.
모든 경험을 넘어서야 한다.
경험도 없고,
대상도 없고,
빛도 없고,
피어나는 꽃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임제가 바위 옆에 있는 나무 밑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깨달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임제가 말했다.
“나는 이곳에 홀로 앉아 있다. 나는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본다. 가끔씩 손님이 찾아오는 것도 본다. 나는 여기에 홀로 앉아서 그냥 지켜본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며,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스스로 죽는 사람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는 영원 자체가 될 것이다.”
Be like a hollow bamboo
넷, 텅 빈 대나무가 되어라
몸으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어라.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지켜라.
마음을 비우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라.
텅 빈 대나무가 된 것처럼
몸을 편하게 하고 휴식하라.
마하무드라는 집착 없는 마음과 같다.
이렇게 수행하면 조만간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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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Relaxation)
휴식은 이 순간만으로 충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슬이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에 잔디밭을 걸어 보라.
전체적으로 느껴보라.
잔디의 촉감, 차가운 이슬방울, 신선한 아침 바람, 떠오르는 태양, 이 모든 것을 느껴보라.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가?
무엇이 더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는가?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 밤의 침묵을 느껴 보라.
눈을 감고 그대 자신을 느껴 보아라.
무엇이 더 필요한가?
충분하고도 남는다.
내면에서 깊은 감사함이 솟아난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이다.
휴식은 이 순간만으로 충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 순간만으로도 그대가 바라는 것 이상이다.
이때 에너지가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다.
에너지가 평화로운 연못이 된다.
이 에너지의 연못 안에서 그대는 용해되어 사라진다.
그것이 휴식이다.
휴식은 전체의 차원에 속한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들판에 핀 저 백합꽃을 보아라. 그들은 애써 일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솔로몬의 영광도 저 백합꽃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들은 솔로몬보다 더 아름다운 향기를 뽐내고 있다. 보아라, 저 백합꽃에 대해 명상하라. -마태복음 6장 28~29절
기도
‘지금 여기’ 만으로도 충분하다.
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노래한다.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있다.
이것을 즐겨라!
그대는 살아서 숨쉬고 있으며 의식을 갖고 있다.
이것을 찬미하라!
이때 돌연 휴식이 찾아온다.
긴장과 번뇌가 사라진다.
번뇌를 일으키던 에너지가 감사함으로 바뀐다.
그대의 가슴 전체가 감사함으로 고동친다.
이것이 기도다.
깊은 감사함으로 고동치는 것,
이것이 기도다.
누군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에게 물었다.
“천국에서 천사들은 무엇을 합니까?”
에크하르트가 대답했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천국은 찬미하고 즐기는 곳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찬미 할 뿐이다. 그곳의 영광과 장엄함, 그곳의 시(詩)와 번성함을 그들은 찬미한다.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찬미한다.”
강가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듯이 수동적이 되어라.
이 수동성이 자동으로 마음을 비워 줄 것이다.
의식이 고요한 호수가 된다.
투명한 거울이 된다.
- 이 명상을 해보라.
입을 굳게 다물고 앉아라.
혀를 입천장에 대라.
사념에 동요되지 말고 수동적으로 마음을 주시하라.
아무것도 기다리지 말고 그저 지켜보라.
그리고 자신을 텅 빈 대나무로 느껴라.
이때 갑자기 무한한 에너지가 그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대는 미지의 새로운 어떤 것, 신성한 것으로 가득 찬다.
빈 대나무가 피리가 되고, 신이 피리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되면 그대 안으로 신이 들어오는데 아무 장애물도 없다.
이것은 가장 아름다운 명상법 중에 하나다.
텅 빈 대나무가 되어라.
이 밖에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그대는 지금 그대로 완벽하다.
욕망을 갖는 한 그대는 놓친다.
욕망이 가라앉게 하라.
무욕(無慾)의 고요한 호수가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뜻밖에도 ‘그것’이 여기에 있다.
무엇을 수행하란 말인가?
더 릴렉스 하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
더욱 수동적이고 텅 빈 존재가 되어라.
아무런 욕망과 기대도 없이 초연한 주시자가 되어라.
삶을 찬미하라.
그러면 어느 순간에 무르익는 계절이 오고,
그대는 붓다가 되어 활짝 피어난다.
The innate truth
다섯, 본연의 진리
만트라의 암송과 바라밀다의 실천,
경전의 교훈, 계율의 엄수,
학파와 성전(聖典)의 가르침으로는
본연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욕망으로 가득 차서 목적을 추구하는 마음은
빛을 가릴 뿐이다.
탄트라의 수행자가 분별심을 일으킨다면
삼마야(samaya)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다.
모든 행위를 멈추고, 욕망을 포기하라.
바다에서 파도가 일듯이,
상념이 일어났다 스러지도록 놔두어라.
무주(無住)와 무분별(無分別)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자가
탄트라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다.
욕망을 버리고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경전의 진실된 의미를 안다.
* 삼매三昧(Samadhi)는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망념妄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삼매야三昧耶(Samaya)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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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에 앉아 지켜보라.
파도가 일어났다가 가라앉는다.
밀물이 있는가 하면 썰물이 있다.
바다의 분위기가 수시로 바뀐다.
가만히 앉아 지켜보라.
마음도 이와 같다.
사념의 파도가 일어났다가 스러진다.
때로는 조류가 밀려와 큰 혼란이 일어나고,
때로는 썰물이 되어서 다소 고요해 지는 것을 느낀다.
의식 전체가 바다와 같다.
사념을 받아들여라.
밀물이 오는 것도 좋고, 썰물이 오는 것도 좋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거대한 파도가 일어난다.
엄청난 에너지가 솟구친다.
그것을 주시하라.
그 다음에 파도가 가라앉고 모든 것이 잠잠해진다.
아름다운 보름달이 고요한 바다에 비친다.
사념의 파도가 밀려와 산산이 부서져도
그대는 고요하고 평정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그저 지켜보는 자가 되어라.
이것은 더 풍성한 침묵이다.
바다는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그대와 떨어져 존재한다.
일정한 거리가 있다.
이 거리가 진짜 명상이다.
이것이 진짜 침묵이다.
그대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는다.
그대의 순수함은 절대적으로 온전하다.
무분별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사람,
아무 차별도 하지 않는 사람이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무주(無住)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자...
진리는 모든 경전을 초월한다.
모든 경전이 진리를 암시한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손가락은 수없이 많지만 달은 하나다.
일단 진리를 알면 그대는 모든 것을 안 것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바다는 어디에서 맛을 보건 짠맛이다.”
진리의 맛은 한결같다.
The great teaching
여섯, 위대한 가르침
마하무드라 안에서는 모든 죄가 불타 없어진다.
마하무드라를 통해 인간은 세상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된다.
이것이 가장 빛나는 진리의 횃불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어리석나니,
그들은 불행과 슬픔에 빠져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리라.
해탈을 구하는 자는 스승(guru)를 믿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이 스승을 받아들일 때
해탈은 지척에 있다.
아,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모든 것이 슬픔의 씨앗이로다.
작은 가르침은 행위로 인도하나니
그대는 오직 큰 가르침을 따라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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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에 맞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대는 전체의 일부다.
이것은 파도가 바다와 싸우고,
나뭇잎이 나무와 싸우는 것과 같다.
이것은 그대의 손이 그대의 몸통과 싸우는 꼴이다.
그대는 도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탄트라는 자연적인 길이다.
초연함과 자연스러움이 목적이다.
흐름에 맞서 싸울 필요가 없다.
강과 더불어 흘러가라.
강은 바다로 흘러간다.
강의 흐름에 복종하라.
이 ‘복종’이 탄트라의 핵심 단어이다.
탄트라는 사랑의 길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복종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첫 번째로 이해해야 한다.
탄트라는 투쟁의 길이 아니라 초연하고 자연스러운 길이다.
장자는 “쉬운 길이 옳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의 일부다.
우리는 하나의 전체다.
한 사람이 정상에 도달한 큰 파도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주변의 작은 파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그는 바다 전체, 그리고 주변의 모든 파도와 하나다.
어떻게 파도 하나가 깨달을 수 있는가?
탄트라를 이해할 수 있다면 시시한 가르침에 신경 쓰지 말라.
거대한 배가 있는데 왜 작은 돛배에 연연하는가?
모하메드교 신비주의자인 주나이드((Junnaid)가 신에게 물었다.
“제 이웃에 사는 사람 하나는 너무 악해서 마을 전체에 큰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와서 ‘신에게 기도해서 이 자를 제거해 달라고 부탁하시오’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나이드는 기도 중에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그를 받아들였는데 네가 누구라고 그를 거부하는 게냐?”
주나이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시는 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신이 그를 탄생시켰으며, 여전히 그가 살아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살아 있는데 그치지 않고 원기 왕성하게 활동하도록 신이 돕고 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이기에...?”
마하무드라는 무엇인가?
마하무드라는 전체와 분리 되지 않는 존재의 상태다.
전체와 함께 나누는 궁극적인 오르가슴의 상태가 마하무드라로 불린다.
거대한 오르가슴이란 뜻이다.
성적인 오르가슴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오르가슴은 자신의 신체가 더 이상 물질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다. 육체가 전기처럼 진동한다. 아주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진동이 올라오기 때문에 그대는 이것이 물질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는다. 이것은 전기적인 현상이 된다. 오르가슴 안에서 그대는 육체의 가장 깊은 층에 도달한다. 그곳에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에너지의 파동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춤추는 에너지, 진동하는 에너지가 된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이 진동의 순간, 에너지로 충만한 이 순간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 육체라는 경계선이 사라질 때, 육체가 수증기처럼 증발하고 에너지만 남았을 때, 아주 미묘한 리듬만 남았을 때,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깊은 사랑을 통해서만 이런 느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랑은 죽음과 같다.
두 연인이 하나의 리듬 안에서 진동하기 시작할 때, 그들의 심장 박동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서 조화를 이룰 때, 이때 오르가슴이 일어난다. 그들은 하나의 멜로디, 하나의 하모니가 되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음악이다. 이에 비하면 다른 음악은 빛을 잃는다.
두 사람이 하나로 진동하는 것, 이것이 오르가슴이다. 그리고 존재계 전체와의 사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마하무드라다. 이것이 가장 큰 오르가슴이다.
에너지가 우주와 더불어 진동하고 있을 뿐이다.
그 사이에는 아무도 없다.
에고가 완벽하게 사라진다.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가 있고 그대가 있다.
파도가 바다와 함께 넘실대고 있다.
이것이 마하무드라의 경지다.
이것이 궁극적인 오르가즘이며,
가장 지복에 찬 의식의 경지다.
이제 그대는 우주 전체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왜 그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가?
그들은 삶이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을 불신 때문에 놓치고 있다.
그들은 어리석다.
믿지 않는 한 마하무드라는 불가능하다.
그대가 복종한다면 삶은 가장 큰 축복이며 은총이다.
그대가 최고의 선물을 놓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배우기를 원한다면 신뢰를 배워라.
신뢰를 통해 그대는 전체가 그대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
왜 스승을 믿어야 하는가?
스승은 창문이다.
그를 통해 지나가야 한다.
그를 통해 약간의 맛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대 또한 자신의 창문을 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말에 불과하다.
스승은 전체적인 지복이 인격화 된 현상이다.
그의 내면에 지복이 물결치고 있다.
그를 믿으면 이 물결이 그대에게 전해진다.
스승은 그저 하나의 현존이다.
그를 통해 그대는 처음으로 신을 일별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대 스스로 나아갈 수 있다.
‘구루(guru)'라는 단어는 비구름처럼 무거워진 사람을 말한다.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목마른 사람에게 비를 쏟아 부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향기를 머금고 피어 있는 꽃이다.
그대에게 코가 있다면 이 향기가 그대를 뚫고 들어갈 것이다.
구루라는 단어는 미지의 에너지로 무거워진 사람,
만삭이 된 산모처럼 신을 잉태하고 무거워진 사람을 뜻한다.
그대가 받을 준비만 하면 그는 언제라도 그대의 품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탄트라는 큰 가르침이다.
큰 가르침은 그대의 존재와 관계가 있다.
그대의 존재, 그대의 중심, 오직 이것이 중요하다.
큰 가르침에 의하면 그대는 이미 붓다다.
이것을 자각하라.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지 말라.
강물에 자신을 맡겨라.
강과 하나가 되어라.
강은 이미 바다로 가고 있다.
이것이 큰 가르침이다.
The passless path
일곱, 길 없는 길
이원성을 초월하는 것이 왕다운 견해로다.
산란함을 정복하는 것이 왕의 수행이로다.
수행 없는 길이 모든 붓다의 길이로다.
이 길을 걷는 자가 깨달음에 이르리라.
이 세상은 무상하다.
환영이고 꿈이어서 실체가 없도다.
세상을 등지고 혈족(血族)을 버려라.
욕망과 증오의 사슬의 끊고
산에 들어가 명상하라.
아무 노력 없이
자연스러운 상태에 한가로이 머물 수 있다면
곧 마하무드라의 경지에 오르리라.
무득(無得)의 경지를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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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진화한다.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에서 완전으로 진화한다.
더 큰 완전함으로 진화한다.
아무 미래도 없는 완전함은 죽은 것이다.
불완전 가운데 성장하라.
이것이 삶이다.
완전해 지려고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성장을 멈출 것이다.
이때 그대는 딱딱하게 굳은 돌부처가 될 것이다.
오직 죽은 사람들만이 위험에서 벗어난다.
사람들이 시체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세상은 무상하다.
꿈과 이 세상은 아무 차이도 없다.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그대는 자기만의 꿈속에 갇혀 있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사람들의 숫자만큼 많은 세상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아간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은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에너지의 파장일 뿐이다.
교차하는 파장이 물질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스크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교차하는 빛이 있을 뿐이다.
이 빛들이 환영을 만들어 낸다.
이 세상은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영화와 같다.
모두가 전기적인 현상일 뿐이다.
오직 그대만이 실재한다.
주시자만이 실재이고,
나머지는 모두 꿈이며 환영이다.
깨달음이란 이 모든 꿈을 초월했음을 뜻한다.
보여지는 대상이 없다. 오직 보는 자만 남는다.
이때 그대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대는 실체를 얻었다.
“혈족을 버려라.”
그의 말은 내면의 속박 관계를 버리라는 뜻이다.
‘내 것’ ‘네 것’ 이라는 관념을 버려라.
틸로빠의 말은 마음속의 꿈과 인연,
내적인 환영의 세계를 버리라는 뜻이다.
자신의 마음을 버리면 돌연 그대는 산속에 있게 된다.
시장 안에 있을 때에도 시장이 사라진다.
집에 앉아 있을 때에도 집이 사라진다.
돌연 그대는 산 속에 있게 된다.
문득 그대는 홀로 존재한다.
그대 외에 아무도 없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내적인 현상이다.
그대는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 실체가 있다.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대 존재의 봉우리와 계곡,
존재의 높이와 깊이를 보게 될 것이다.
틸로빠의 말은 이런 뜻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대가 처한 상황 속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에서 자신을 발견하든 그곳에 있어라.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유지하라.
그러면 곧 존재계와 하나가 되는 절정의 오르가슴에 도달할 것이다.
느긋하고 자연스러워라.
때가 오기를 기다려라.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되면 그 일은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왜 서두르는가?
서두르면 끊임없이 기대하게 될 것이고,
초조함과 긴장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득(無得)의 경지를 얻으리라.
준비가 되면......
Cut the root
여덟, 나무의 뿌리를 잘라라.
나무의 뿌리를 자르면 잎이 마르듯이
마음의 뿌리를 자르면 세상이 무너지리라.
등불이 억겁의 어둠을 한 순간에 몰아내듯이
마음의 빛은 섬광처럼 무지의 베일을 태워 없애리라.
마음에 집착하는 자는
마음을 넘어선 진리를 보지 못하리라.
수행에 매달리는 자는
수행을 초월해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한다.
마음과 수행, 이 둘을 초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마음의 뿌리를 깨끗하게 자르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모든 차별에서 벗어나 편한 상태에 머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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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속박을 낳고 무선택은 자유를 준다.
일시적인 것이 비진리이고, 영원한 것이 진리다.
삶과 존재계는 영원하지만 마음은 일시적인 것이다.
탄트라는 말한다.
이 마음의 메카니즘(mechanism)을 이해하고 뿌리를 잘라라.
선택하지 말라.
선택하면 동일시된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대는 특정한 방식으로 그것과 하나가 된다.
어떤 것과 동일시될 때 그대는 영혼을 잃는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 영혼을 상실한다는 의미다.
그대는 수많은 사물과 동일시된다.
그대는 사물이 된다.
선택이 동일시를 초래하고,
이 동일시는 그대를 최면과 같은 잠에 빠지게 한다.
동일시(identification)가 뿌리다.
탄트라는 인격을 개선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인격의 개선은 가지치기를 해서 나무를 다듬는 것과 같다.
인격은 외형(外形)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외형이 바뀌어도 그대는 똑같다.
탄트라는 더 깊이 들어간다.
“뿌리를 잘라라.”
마음의 뿌리, 마음과의 동일시가 끊어지면 삼사라(samsara)가 무너진다.
각성의 바람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집 전체가 무너진다.
돌연 그대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된다.
어둠은 하나의 부재 상태에 불과하다.
다만 빛이 부재했을 뿐이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한순간에 모든 무지가 불타 없어진다.
이것이 돈오(頓悟)다.
마음을 넘어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대다.
마음을 초월해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을 초월한 곳에 의식이 있다.
마음을 초월한 곳에 무엇이 있는가?
사치다난다(satchitananda), 진리, 의식, 지복이 있다.
그대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진리는 그대와 함께 있었다.
왜냐하면 그대가 바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
진리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명상은 주시다.
명상한다는 것은 주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명상은 이해이며 각성이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보면 마음의 뿌리가 잘려질 것이다.
이 응시가 날카로운 칼이 된다.
여유롭고 자연스러워라.
자신의 내면을 꾸밈없이 응시하라.
이것이 마지막 말이다.
Beyond and beyond
아홉, 저 넘어 피안의 세계
주지도 받지도 말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키라.
마하무드라는 모든 수용과 거절을 넘어선다.
아라야(alaya)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그것을 방해하거나 더럽힐 수 없다.
태어나지 않은 차원에 머물러라.
그러면 모든 현상이
드하르마타(dharmata) 안으로 용해 될 것이다.
모든 자의지(自意志) 와 긍지가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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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그대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나는 그대를 통해 나 자신을 알고,
그대는 나를 통해 그대 자신을 안다.
그런데 둘 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이것은 이상한 게임이다.
틸로빠는 주고받음에 연연하지 말라고 말한다.
자연스럽게 줄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이때에는 마음속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나는 무엇인가 주었다.”는 생각이 쌓이지 않는다.
이것이 주는 것(giving)과 나누어 가지는 것(sharing)의 차이점이다.
우리는 공생적(共生的)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의 일부다.
의식의 바다는 거대하다.
아무도 외딴 섬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만나 하나로 합쳐진다.
경계선이 없다.
모든 경계선이 허상이다.
틸로빠는 이것을 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대는 허공을 자를 수 없다.
그대 내면의 존재는 허공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
그것은 무아(無我)다.
실체가 없다.
분명히 존재하긴 하지만 물질이 아니다.
그것을 자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없어도 세상은 계속 돌아간다.
왜 그대 자신을 여유롭게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지 못하는가?
왜 전체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가?
강아지가 제 꼬리를 물려고 하는 것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겨울 아침을 즐기지 못하고 쓸데없이 자기 꼬리를 잡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여유롭고 자연스러워라.
어느 누가 제 꼬리를 잡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행동에 빠지지 말라.
영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은 가장 어리석은 행동 중의 하나다.
흰 구름처럼 흘러갈 뿐이다.
구름은 목적지가 없다.
그저 움직임 자체를 즐긴다.
흘러가는 것 자체가 아름답다.
드하르마타(dharmata)는 만물이 고유의 원소(元素)적인 성질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대가 내면의 거처에 머물면 만물이 고유의 자연적인 원소로 돌아가 용해될 것이다.
그대가 이 질서를 교란하는 주범이다.
내면의 거처에 머물러라.
아라야(alaya)안에 , 내면의 하늘, 그 절대적인 순수성 안에 머물러라.
이 하늘에는 구름이 오고가도 아무 흔적이 남지 않는다.
모든 원소가 자신의 안식처로 돌아간다.
배고픔이 스스로 자신을 만족시켜 포만감이 된다면
그대가 어떻게 나를 내세울 수 있겠는가?
삶이 자신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성취하고 죽음에 도달하여 휴식에 든다면
어떻게 그대가 ‘나’를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라고 말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자연스러운 사람은 내면에 앉아서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한다.
그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오직 이때 마하무드라가 일어난다고 틸로빠는 말한다.
존재계와 하나가 되는 마지막 오르가슴이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존재계와 떨어져 있지 않다.
그대 내면의 하늘과 외부의 하늘이 하나가 된다.
오직 하나의 하늘이 있을 뿐이다.
The supreme understanding
열, 더없는 깨달음
최고의 이해는 이것과 저것을 모두 초월한다.
최고의 행동에는 애착 없는 위대한 창조성이 깃들어 있다.
최고의 완성은 아무 희망 없이
내재성을 깨닫는 것이다.
첫 단계에서 구도자는 마음이
폭포수처럼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리라.
중간 단계에서 마음은 갠지스 강물처럼
유연하고 고요하게 흐른다.
마지막 단계에서 마음은 거대한 바다가 된다.
이 바다에서 아들의 빛과 어머니의 빛이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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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말라.
그대 자신으로 남아라.
다른 사람들을 지나쳐 가라.
무관심 하라.
모든 사람 각자 다른 길을 가리키며 그대를 충동질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그대 내면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다.
유연성이 젊음이고 경직성은 늙음이다.
유연할수록 젊은 것이며, 경직될수록 늙은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완전히 경직된 상태다.
삶은 절대적인 여유로움, 절대적인 유연성이다.
탄트라의 성자는 순간마다 즉흥적으로 감응한다.
그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자신도 모른다.
이것은 아름다운 현상이다.
틸로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에게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부분적이지만 깨달음은 전체적이다.
전체를 보면 모든 구분이 사라진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전체를 볼 때 모든 차별이 사라진다.
모든 경계선이 무너진다.
지구 전체가 하나가 된다.
깨달음보다 높은 것은 없다.
이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른 것들과 연결된다.
경계선이 사라지고 만물이 하나로 용해된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무한한 바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있을 뿐이다.
붓다는 내면에 고요하게 앉아있다.
모든 것이 내면에 응집되어 있으며,
무한한 에너지가 사방으로 흘러넘친다.
순간마다 창조가 이루어진다.
우주적인 창조가 일어난다.
틸로빠는 왜 ‘희망’이라는 말을 쓰는 것일까?
희망과 더불어 미래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희망과 더불어 욕망이 들어오고,
더 많이 원하는 탐욕이 생기고 불만이 생긴다.
그리고 당연히 절망이 뒤따른다.
'희망 없음(no hope)' 이것은 기대에 찬 상태도 아니고 절망한 상태도 아니다.
절망과 기대는 둘 다 희망에서 나온다.
틸로빠는 사물의 여여(如如, suchness)함을 본다.
그에게는 선택이 없다.
그는 아침과 저녁을 동시에 본다.
그는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본다.
그는 탄생과 죽음을 한꺼번에 본다.
그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희망 없이 산다.
이것은 참으로 경이적인 차원이다.
틸로빠가 말하는 것은 언어를 넘어선다.
축복은 희망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축복은 그저 흘러넘치는 에너지다.
그대가 꽃피기 시작한다.
존재의 여여함을 깨달았을 때 개화(開花)가 일어난다.
아무 이유도 없는 피어남과 축복이 계속된다.
그저 여여함 안에서 휴식한다.
성취해야할 모든 것은 내면에 있다.
이것이 ‘내재성’이라는 말의 의미다.
그대는 완벽한 존재로 태어났다.
이것이 예수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말한 뜻이다.
한 방울의 물을 이해한다면 바다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한 방울의 물은 바다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우주 전체의 축소판이다.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이것을 깨달으면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그대는 웃기 시작한다.
그대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찾는 자 자신이 찾는 물건이었다.
여행자 자신이 목적지였다.
이것이 최고의 성취다.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 아무 희망 없이 자신의 완전무결함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경지다.
첫 단계에서 구도자는 마음이
폭포수처럼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리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면 사토리(satori)가 일어날 것이다.
깨달음의 첫 번째 일별(一瞥)이 찾아 올 것이다.
지금 그대의 마음은 꽁꽁 얼어붙은 빙하(氷河)와 같다.
그러나 여유롭고 자연스런 상태에 머문다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다면 이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태양이 내리쪼이기 시작한다.
지금 여기에 존재할 때 막대한 에너지가 비축된다.
그리고 이 에너지가 마음을 녹이기 시작한다.
이 첫 번째 단계를 통과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사회가 그대에게 주입한 모든 것이 무너진다.
지금까지 그대가 배워 온 모든 것이 무너진다.
지금까지 그대를 지탱하고 체계를 유지해온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대의 습관, 그대의 가치관, 그대의 길 전부가 사라진다.
정체성(identity)이 증발되고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녹아내리면서 자기 정체성이 상실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에게 일어난 일이다. 첫 번째 사토리 순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아는 것이라곤,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이 단계를 통과하면, 첫 번째 사토리를 잘 통과하고 중간 단계에 이르면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
이 질서는 내면에서 온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질서, 새로운 질서가 솟아난다.
자연스러운 계율이 찾아온다.
그대만의 계율이 솟아난다.
중간 단계에서 마음은 갠지스 강물처럼
유연하고 고요하게 흐른다.
곤두박질치며 포효하던 폭포가 사라졌다.
광란의 상태가 가라앉았다.
이것이 두 번째 사토리다.
그는 갠지스 강처럼 된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흐르는 소리조차 없는 강물이 된다.
그대의 걸음걸이가 우아해 진다.
그대의 존재로부터 전혀 새로운 매력이 발산된다.
우아하고 고상한 매력이 배어 나온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다.
이것이 불상(佛像)에 표현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표현 될 수 없다.
광기가 저절로 가라앉는다.
사회가 강요한 기존의 질서는 완전히 사라진다.
예전의 지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경전을 통해 알았던 모든 지식이 사라진다.
이제 그대만의 지혜가 솟아오른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사자처럼 포효한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물은 큰 소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평원에 이르면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
지형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흘러간다.
아주 평온하다.
이 내적인 완성에 도달하라.
모든 희망을 버리고 내면의 근원으로 들어가라.
어떤 목적지도 갖지 말라.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저 즐겨라. 매순간을 즐겨라.
두 번째 상태는 절대적인 침묵과 정적, 고요함, 평정이다.
집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함이며 휴식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마음은 거대한 바다가 된다.
이 바다에서 아들의 빛과 어머니의 빛이 하나가 된다.
고요하게 흐르던 강물이 바다에 도달한다.
바다와 하나가 된다.
끝없이 펼쳐진 대해, 무한한 대양이 된다.
경계선이 사라진다.
이제 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체적인 단위가 사라졌다.
이제 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래 근원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원(圓)이 완성된다.
그대는 집으로 돌아왔다. 본래의 근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제 그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이 가장 역설적인 상태이다.
언어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직접 맛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것이 틸로빠가 ‘마하무드라’로 부르는 것이다.
거대한 오르가슴, 궁극적인 법열, 최고의 오르가슴이다.
여행이 막을 내렸다.
여행이 끝났을 뿐만 아니라 여행자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길이 끝났을 뿐만 아니라 목적지 또한 사라졌다.
존재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있음(is-ness)'만이 남았다.
육체가 사라졌다.
육체는 존재했었다(existed).
존재했던 마음, 존재했던 길이 사라졌다.
목적지가 사라졌다.
존재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순수한 '있음(is)'마나 남았다.
텅 빈 거울, 텅 빈 하늘, 텅 빈 실존(being)만 남았다.
이 상태를 틸로빠는 ‘마하무드라’라고 부른다.
이것이 최고이며 마지막 경지다.
이 보다 더한 경지는 없다.
이 경지는 '초월성(beyondness)'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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