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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자에게는 규칙이 필요 없다.
깨어 있음이 그의 규칙이다.
그는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만, 규칙에 매이지 않는다.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魚處水生
여섯째날 아침 – 바닷새를 죽인 음악
주머니가 작으면 큰 물건을 담을 수 없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물을 길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옛날에 바닷새 한 마리가
노나라 수도의 교외에 날아온 적이 있었다.
왕은 그것이 상서로운 징조라 해서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라고 명령하고
바닷새에게 종묘의 술을 마시게 하는가 하면
음악가들을 불러 순임금 시절의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여러 맛있는 짐승 고기까지 대접했다.
그러나 이 소란스런 잔치에 놀라
불행한 바닷새는 슬픔 속에 죽고 말았다.
새는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
인간의 입장에 따라서?
또는 새의 입장에 따라서?
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를 틀고
들판과 물가를 자유롭게 날아야 하지 않을까?
강이나 호수 위를 떠다니면서
미꾸라지나 물고기를 잡아먹고
때로 다른 물새들과 줄지어 날다가
갈대 끝에 앉아 한가롭게 쉬어야 하지 않을까?
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거나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조차 싫어하는데
어찌 시끄러운 음악에 놀라지 않겠는가!
그들은 음악으로 바닷새를 죽인 것이다.
물은 물고기를 위한 것이고
공기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본래 성품이 각자 다르니 필요한 것도 다르다.
그러기에 옛 현자는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았다.
_ <바닷새와 인간의 음악>
<오쇼 강설>
고정된 인간의 본성이란 없다.
인간 개개인마다 그 본성이 다르다.
모든 개개인이 그 자신 하나의 우주다.
일반적인 규칙이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일단 규칙의 희생자가 되면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오로지 완전한 자유 속에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
이해가 유일한 규칙이 되게 하라.
진정한 이해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라.
규칙은 감옥이지만 이해는 무한한 하늘, 무한한 공간을 준다.
예수가 진리를 깨달았고 붓다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모두가 추종해야 할 하나의 규칙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고타마 붓다가 아니며,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열심히 예수를 추종할 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뿐 결코 그리스도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다.
예수는 누구도 추종하지 않았다.
규칙들은 그대에게 외부적인 깨끗함을 준다.
그러나 내면에서 그대는 여전히 바보다.
그리고 기억하라. 오직 바보들만이 규칙을 따른다.
현자는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규칙에 대해서는 잊는다.
현자는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규칙을 가진 자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삶은 매 순간 변화한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끝없이 변화한다.
삶은 그대를, 또는 그대의 규칙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매 순간이 새롭다.
깨달음을 향한 모든 노력은 그 붙들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것,
다시금 흐름을 되찾아 얼어붙지 않는 것이다.
얼음처럼 굳어지지 말라.
흐르는 물처럼 되라.
삶은 끊임없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으며 오직 진정한 이해만이 그것에 반응할 수 있음을 잊지 말라.
근원은 같고, 궁극적인 진리도 같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것의 표현이 다르다.
그리고 기억하라.
누구의 진리도 그대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대 자신이 그 비밀의 상자를 열어야만 한다.
자신의 능력을 알라.
이것이 첫 번째 핵심이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안다면 첫걸음은 이미 내디뎌진 것이며, 목적지가 멀지 않다.
첫걸음이 틀리면 평생을 걷고 또 걸어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삶은 계획될 수 없다.
그것은 계획 없이 밀어닥치는 여름철 홍수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계획이 없기 때문에 삶은 아름답다.
계획될 수 없다면 모든 것이 죽고 지겨워질 것이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곳에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자유가 사라진다.
삶은 시간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이해는 명상을 통해 얻어진다.
그것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시간은 외부의 현상, 표면의 현상이다.
수천 년을 살아도 인간은 여전히 어리석다.
실제로 그의 어리석음은 더욱 커질 뿐이다.
그대 안에 어리석음의 씨앗이 있다면 그것은 수천 년 동안 거대한 나무가 되어서
수많은 어리석은 자들이 그 나무 아래서 쉴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더욱 어리석어 지고, 지혜로운 자는 더욱 지혜로위진다.
지혜는 그것이 어떤 경험이든지 그대가 존재 전체로 깨어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깨어 있는 의식과 경험의 만남이 바로 지혜다.
수십억 인구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붓다가 된다면, 이 무슨 일인가?
왜 다른 모든 나무들은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
꽃을 피우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 나무는 웃을 수 없고, 노래 부를 수 없고, 춤출 수 없다.
나무의 에너지가 넘쳐날 때 꽃이 가능하다.
꽃은 하나의 선물, 하나의 나눔이다.
나무는 존재계 전체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필요한 것 이상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그것은 하나의 노래다.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깨어 있는 의식이 필요하다.
깨어 있는 의식이 결여된 사랑은 결국 감옥이 되고 만다.
깨어있는 의식을 동반한 사랑은 곧 자유다.
그 자유가 그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되게 할 것이다.
그 자유가 그대에게 날개를 줄 것이다.
남들과 함께 살 때 삶은 어떤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 규칙들은 종교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신적이지도 않다.
그것들은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다.
구도자는 규칙들이 단지 하나의 게임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그것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넘어서 간다.
초월한다. 그 자신은 그것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타인을 위해 규칙들을 따르지만 그렇다고 자동인형이 되진 않는다.
그의 의식은 늘 깨어있다.
깨어 있는 의식이 그의 목적이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그러기에 옛 현자는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았다.“
다섯째날 아침 - 거북이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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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추구하기 위해 이곳에 있다.
그대가 이곳에 존재하는 진정한 운명을 발견해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진정한 존재에 귀 기울이라.
楚有神龜(초유신구)
다섯째날 아침 – 거북이의 생
한번은 장자가 푸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초나라 사신 두 사람이 왕의 공식 문서를 받들고 찾아왔다.
“왕께서 당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든 채 여전히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초나라에 한 신령한 거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거북이는 죽은 지 3천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귀한 상자에 넣어
사원의 제단에 모시고 있다고 들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거북이는 죽어서 뼈만 남아 3천년 동안 향 연기를 맡으며
왕의 제사를 받기를 원하겠는가?“
두 사신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거북이로서는
살아서 진흙 바닥을 꼬리를 끌며 돌아다니는 편이 낫겠지요.“
장자가 말했다.
“어서 돌아가라.
나 또한 진흙 바닥을 기어다니고 싶으니!“
_ <장자와 거북이>
<오쇼 강설>
붓다는 결코 누구도 추종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의 방식대로 살았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제 그를 추종한다면 그대는 불행한 존재다.
누구도 추종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불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현재 불행할 만큼 불행하다.
타인에게 귀 기울이지 말라.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
비록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때로 일이 잘못된다 해도 걱정하지 말라.
처음엔 당연히 잘못될 것이다.
타인을 추종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 그대가 침묵할 때 타인의 목소리들이 멈춘다.
누구에게도 귀 기울이지 말라.
모두가 떠나고 그대만이 텅 빈 공간 속에 홀로 남는다.
그때 그대의 본성이 꽃 피어나기 시작한다.
씨앗의 껍질이 깨어지고, 싹이 나온다.
그대 내면의 목소리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때 그것을 따르라.
그것이 신에게로 가는 그대의 길이다.
헛된 투자를 포기하는 것,
타인을 포기하는 것,
그들의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는 것,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바로 구도의 길이다.
Gale Revilla - Ashes To Ashes, Dust To D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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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날 아침 – 원숭이 동산에서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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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지만 아무런 발자취도 남지 않는다.
누구도 그 길을 따를 수 없다.
그대 자신의 길을 가라.
인류 역사상 누구도 걸어본 적이 없는.
去樂辭顯(거락사현)
넷째날 아침 – 원숭이 동산에서의 일
오나라 왕이 강에 배를 띄우고 놀다가
강변의 원숭이 동산에 이르렀다.
원숭이들은 왕의 일행을 보자
모두 겁에 질려 나무 꼭대기로 도망쳤다.
그런데 한 마리 원숭이만은 완전히 무관심한 듯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나뭇가지 사이로 이동하며
자기의 재주를 왕에게 자랑했다.
왕이 활을 들어 그 원숭이를 향해 화살 하나를 쏘았다.
그러자 원숭이는 날아오는 화살을 능숙하게 손으로 잡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신하들에게
일제히 원숭이를 향해 활을 쏘라고 명령했다.
한순간에 원숭이는 온몸에 집중적으로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왕은 친구인 안불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금 일어난 일을 보았는가?
이 원숭이는 자기의 영리함을 자랑하고
자기의 재주를 너무 믿었다.
그는 아무도 자기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기억하라!
사람들과 상대할 때
자신을 돋보이지 말고 재능에 의존하지 말라!“
집에 돌아오자 안불의는 그 길로 한 현자의 제자가 되었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쾌락을 버렸으며,
어떤 것이든 자신의 뛰어남을 감추는 법을 배웠다.
머지않아 나라 안의 누구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모두가 그를 경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_ <원숭이 재주>
<오쇼 강설>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를 먹고 마시라.
나를 너희의 술과 빵이 되게 하라.
나로 하여금 너희의 핏속을 흐를 수 있게 나를 흡수하라.‘
진정한 스승은 눈을 준다.
이것이 길이니 이 길을 따르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대에게 빛을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이 빛을 들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이 빛이 그대의 길을 보여줄 것이다.‘
거짓된 스승은 언제나 그대에게 지도를 준다.
이것이 지도다. 길을 잃고 헤매지 말고 이 지도를 따르라......
거짓된 스승은 그대에게 빛을 주지 않는다.
그대가 빛을 갖고 있다면 지도는 필요 없다.
그대 자신의 길을 발견할 것이다.
존재계는 언제나 새로운 독특함 속에서 꽃피어난다.
누구나 특별하다.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증명하길 원한다면 그대는 인간이 아니라 한 마리의 원숭이가 될 것이다.
흉내 내는 것을 중단하라.
이것은 가장 위대한 역설 중 하나다. 그대는 독특하다.
하지만 동시에 존재계 전체와 하나가 된다. 이 역설은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직접 체험해야만 한다. 그대는 독특하다.
그러나 동시에 존재계 전체와 하나다.
여기 장미가 꽃 피어난다.
장미는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향기를 맡고 그 꽃을 감상할 사람들을 위해서 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꽃 피어날 뿐이다.
도의 사람은 그 스스로 꽃피어난다.
그는 장미와도 같다.
그는 하나의 용도가 아니다.
자신의 내면 존재를 자각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의 물건과도 같다.
도의 사람은 모든 특기를 떨쳐 버린다.
모든 학위를 불태우고, 모든 다리를 부순다.
그래서 그 자신 속에 머문다.
그는 하나의 꽃이 된다.
이 꽃은 목적 없이 피어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실현한 것이다.
그때 거기 충만감이 있다.
영적인 세계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과 같다.
새는 날아가지만 아무 발자취도 남지 않는다.
누구도 그 길을 따를 수 없다.
이 가르침에서 기쁨을 취하라.
행복을 취하라.
그럼 그것이 그대의 내면에서 하나의 빛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대에게 길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모방하지 말라. 믿음이든 불신이든 갖지 말라. 머리에 의존하지 말라.
한 마리 의 원숭이가 되지 말라.
인간이 되라.
Desert Rose - Sands Of Time (2001)
Perception of the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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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아침 - 도인이 된 싸움닭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서
죽지 않는 어떤 것을 발견한 사람이다.
내면 깊숙한 곳의 영원한 존재를 안 사람이다.
그때 그곳에 어떤 두려움도 없다.
望之木鷄
셋째날 아침 – 도인이 된 싸움닭
기성자는 왕을 위해 싸움닭을 훈련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닭 한 마리를 골라 훈련을 시켰다.
열흘이 지나자 왕은
닭이 싸움할 준비가 되었는가를 물었다.
조련사는 대답했다.
“아직 안 됐습니다.
아직 불같은 기운이 넘치고
어떤 닭과도 싸울 자세입니다.
공연히 뽐내기만 하고
자신의 기운을 너무 믿고 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다시 묻자, 조련사는 대답했다.
“아직 안 됐습니다.
아직도 다른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불끈 성을 냅니다.“
또다시 열흘이 지났으나 왕의 물음에 그는 여전히 대답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도 상대를 보기만 하면 노려보고
깃털을 곤두세웁니다.“
또 열흘이 지나 왕이 묻자, 기성자는 마침내 대답했다.
“이제 거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울어도 움직이는 빛이 안 보이고,
먼 곳에서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조각한 닭과도 같습니다.
이제 성숙한 싸움닭이 되었습니다.
어떤 닭도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며,
아마 바라보기만 해도 도망칠 것입니다.“
_<싸움닭>
<오쇼강의>
기도는 텅 빈 존재의 고요한 갈망이다.
기도의 끝은 침묵이다.
언어마저 사라진 고요한 기도,
사념은 그곳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에고는 녹아서 사라진다.
두려움 없는 사람,
이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서 죽지 않는 어떤 것을 발견한 사람이다.
내면의 존재, 불멸의 존재, 내면 깊숙한 곳의 영원한 존재를 안 사람이다.
그때 그곳에 어떤 두려움도 없다.
또한 그때 그곳에 어떤 용감함도 없다.
왜냐하면 용감함은 일종의 위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이 앞에서는 모든 언어가 무색해진다.
마음은 침묵하게 된다.
어떤 말을 해도 이치에 맞지 않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고, 생각이 없다.
그대는 그를 바라보고도 현명한 자라고도 부를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자신이 있을 때, 자신감은 잊혀진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말한다. 나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다고.
이 절대적인 신뢰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무엇을 위장하기 위한 것인가?
신뢰만으로는 부족한가?
그래서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한가?
에고 없이 싸우는 것,
이것이 궁극의 열쇠다.
만일 에고 없이 싸울 수 있다면 그대는 모든 것을 에고 없이 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사랑조차 에고 없이 할 수 있다.
이 싸움닭처럼 에고 없이 싸우는 것, 이제 그는 거의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이 ‘거의 준비가 되었다’라는 말을 기억하라.
그 다음 단계는 수행을 모두 버리는 일이다.
그리고 단지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대가 지켜볼 수 있다면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
어떤 행위도 필요 없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때 어떤 수행도 필요치 않다.
그때 그곳에는 순간에서 순간으로의 삶, 축제만이 있을 뿐이다.
순간에서 순간으로의 감사가 있다.
순간에서 순간으로의 기쁨과 환희가 있다.
With or without You
See the stone set in your eyes
See the thorn twist in your side
I wait for you
Sleight of hand and twist of fate
On a bed of nails she makes me wait
And I wait without you
With or without you
With or without you
Through the storm we reach the shore
You give it all but I want more
And I'm waiting for you
With or without you
With or without you
I can't live
With or without you
And you give yourself away
And you give yourself away
And you give
And you give
And you give yourself away
My hands are tied
My body bruised, she's got me with
Nothing to win and
Nothing left to lose
And you give yourself away
And you give yourself away
And you give
And you give
And you give yourself away
With or without you
With or without you
I can't live
With or withou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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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아침 – 그림자 도망치기
마음과 싸우지 말라.
다만 마음을 옆으로 내려놓으라.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다.
싸울 필요가 없다.
달아날 필요도 없다.
不休而死
둘째 날 아침 – 그림자 도망치기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싫어한 나머지
그것을 떨쳐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은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내디뎌 달리면 달릴수록
새로운 발자국 소리가 늘어만 가고
그의 그림자는 조금도 어려움 없이
그를 따라왔다.
그는 이 모든 재난이
아직 자신의 달리는 속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힘이 다해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단순히 그늘 속으로만 걸어 들어갔어도
그의 그림자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어도
그의 발자국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자와 발자국 소리>
Tunn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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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도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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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도를 말하다
오쇼
류시화 옮김
마음이 옳으면 모든 옳고 그름의 판단을 잊는다.
그때 그대는 자유인이다.
삶이 그 자체로 흘러가게 하라.
흐름에 존재를 맡긴 채 흘러가라.
그 흘러감 자체가 궁극의 깨달음이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다.
순수한 침묵이 내안에 있음을 안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나 평화로울 수 있다.
어떤 감정이 나를 방문하더라도
나는 곧 순수한 침묵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은 늘 내 안에 있다.
_ 류시화
亡是非
첫째 날 아침 – 신발이 발에 맞으면
목수로 유명한 공수는
아무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도구를 사용한 것보다 더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무에서 형태를 낳고
그의 마음은 자유로워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무심의 경지에 있었다.
무엇에도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마음은 더 없이 단순한 상태가 되어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았다.
신발이 발에 맞으면
발의 존재를 잊는다.
허리띠가 허리에 꼭 맞으면
허리의 존재를 잊는다.
마음이 옳으면
모든 옳고 그름의 판단을 잊는다.
무리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으며,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유혹 되지도 않는다.
그때 일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때 그대는 자유인이다.
쉬운 것이 옳은 것이다.
옳게 시작하라, 그러면 쉬어진다.
쉽게 나아가라, 그러면 그대는 옳다.
쉽게 나아가는 옳은 길은
그 옳은 길을 잊는 일이며
또 쉽게 나아간다는 것조차 잊는 일이다.
<오쇼강의>
의지를 통해 이룬 것은 무엇이든 늘 짐으로 남을 것이다.
늘 하나의 갈등, 내면의 긴장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엔가 이룬 그것들을 다시 잃고 만다.
오직 노력 없음을 통해 이룬 것만이 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짐이 아닌 것만이 영원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
오직 그것만이 영원히 그대와 함께 남아 있을 수 있다.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
이제 갓 태어난 어린아이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모르는, 어떤 구분도 없는...... .
일단 마음속에 구분이 일어나면,
일단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것을 분별하면,
이미 병든 것이다.
그때는 진리에서 한없이 멀어진다.
노력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노력은 공격적이고 폭력적이고 경쟁적이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에서는 노력을 통해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고타마 붓다는 6년 동안 고행을 했다.
끊임없이 명상하고 노력했다.
고행자가 되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었다.
붓다는 철저히 실패했다. 6년의 노력 후 그는 완전히 좌절했다.
그 완전한 절망 속에서 그는 모든 노력을 포기했다.
그는 진리의 세계에 속한 것들까지 모두 포기했다.
그리고 그날 밤,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편안한 잠을 잤다.
질적으로 다른 침묵이 그의 내면에 찾아 왔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 상태가 그날 밤 그에게 일어났다.
아무 꿈이 없었기 때문이다. 꿈은 욕망의 그림자다.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어디론가 나아갈 자도 그곳에 없었다.
그 자체가 깨달음 이었다.
인간에게 가능한 궁극적 현상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날 밤, 부처는 꽃피어났다.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욕망이 너무나 미래로 달려갔기 때문에
그는 ‘지금 여기’를 볼 수 없었다.
도의 사람은 ‘나’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물건임을 이해한다.
그래서 도의 사람은 그것을 버린다. 사실 그것을 버릴 필요가 없다.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는 순간 그것은 스스로 떨어져 나간다.
그곳에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의 마음은 자유롭고 무심의 경지에 있다.
건강한 것은 잊혀 진다.
그러나 병든 것은 늘 기억에 남아 있다.
그것은 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그래서 언제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완벽하게 건강한 자연인은 완벽하게 자신을 잊는다.
그는 흰 구름과 같다. 바람과 같다. 바위와 같다.
나무와 같고, 새와 같다.
그러나 인간과는 다르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처처럼 오직 병든 것만이 기억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은 ‘내적인 합일’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깊은 조화다.
그곳에 아무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곳에는 선택이 없다. 그것은 선택이 사라진 받아들임이다.
선택하지 말라. 그리고 이것이 기적이다.
쉬운 것이란 그런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듯이 존재하는 것.
자신이 그곳에 없는 듯 있는 것.
누구의 길도 가로막지 않는 것.
그대는 존재의 환희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자연스러움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그대는 자연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는 그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받아들임 자체가 된다.
그의 받아들임을 통해 그대는 삶의 받아들임을 배운다.
그리고 만일 그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자연스러움이 일어날 것이다.
일단 자연스러움이 일어나면
저 큰 바다가, 깨달음의 대양이 멀지 않다.
강물이 그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갈 것이다.
Saint Of Sin - Moments in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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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크샤(moksha), 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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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크샤(moksha), 해탈
<모크샤>란 <영혼의 해방>을 일컫는 말로서 “아트만이 윤회의 악순환에서 풀려난 상태”를 말한다. 이를 중국인들은 <해탈>(解脫)이라 번역했다.
유한한 행복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면 그때 우린 더 높은 행복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 불멸의 행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첫째로 나 자신의 본성인 아트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다음 그걸 바탕으로 이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본성인 아트만과 브라만이 하나임을 경험해야 한다.
모든 존재들은 본질적으로 순수하며 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래부터 해탈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만두까 우파니샤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브라만이며, 아트만은 곧 브라만이다.
만두까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神과 인간은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서 폐쇄적인 두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의 두 가지 표현 양식>인 것이다.
baba hanuman atr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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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라(samsara, 輪廻), 영혼의 방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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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라(samsara, 輪廻), 영혼의 방황
<삼사라>란 단어에는 <흐르다>, <떠돌다>, <바퀴가 구르듯 끝없이 <굴러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우리는 마야에 현혹되어 우리 스스로가 행했던 그 행위(karma, 業)의 결과에 따라 삶과 죽음 사이를 끝없이 떠돌고 있다.”는 뜻이다.
이 윤회의 과정에는 다음의 세 차원이 있다.
첫째, 신들(demigods)의 영역인 열락의 차원(天上界)
둘째, 고통과 열락이 반반 섞인 인간의 차원(人間界)
셋째, 고통이 많은 짐승의 차원(畜生界)
죽은 다음 우리의 육체는 불에 태워진다. 그러면 그 불기운을 타고 영혼은 달(月)에 이르게 된다. 달에 이른 영혼은 구름이 되어 비(雨)로 지상에 내려와 풀과 나무(곡식) 속으로 스며든다. 사람은 이 곡식으로 음식을 만드는데, 이 음식물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또 다른 인간의 육체 속으로 흡수된다. 이렇게 흡수된 음식물은 정액이 되어 여성의 자궁 속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자궁 속으로 들어간 정액은 자궁의 불기운(熱)을 통해서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삶과 죽음의 순환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간다.
<브리하드 아라냐까 우파니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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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maya), 창조의지와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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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maya), 창조의지와 물질
<마야>란 일종의 마술이란 뜻으로서 브라만의 창조의지(창조에너지)를 일컫는 말이며, 동시에 그 의지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현상계(물질)를 지칭하는 말이다.
마야의 두 가지 특성
첫째, 흔들림 현상(reflection) : 흔들리는 물에 사물이 비취면 그 비췬 사물은 무수히 분화(分化)된 것처럼 보인다. 마야의 이 흔들림 현상 때문에 유일자인 브라만이 수많은 개체(아트만)처럼 분화되어 보인다. 즉 유일자인 브라만과 수많은 개체(아트만)가 실지로 분화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절대적인 차원을 상대적인 이원(二元)의 차원으로 굴절시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잘못된 인식 때문에 삼사라(samsara, 生死輪廻), 영혼의 기나긴 방황이 시작된 것이다.
둘째, 베일 현상(veiling) : 커튼을 내리면 그 커튼에 가려 저쪽 사물이 희미하게 보인다. 마야의 이 베일 현상(은폐 현상) 때문에 브라만의 빛이 은폐되어 보인다. 이 베일 현상으로 하여 인과법칙, 공간과 시간, 그리고 형체와 명칭(존재)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 베일 현상은 우리의 올바른 식별력(識別力)을 흐리게 하고, 그로 하여 브라만을 감지하지 못하는 무지(無知)가 생겨난다.
이 무지를 avidya라 하는데, 이는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는 <영적인 어둠>(spiritual darkness, 無明)을 뜻하는 말이다.
마야의 세 가지 성질(3 gunas)
마야의 세력권 안에 있는 이 현상계의 모든 존재들(인간, 도 식물, 생물, 무생물 일체)은 이 세 가지 성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첫째, 라자스(rajas) : 창조열정(상승력, 動性, 붉은색)을 말한다. 이 우주가 창조되고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모두 이 라자스의 영향 때문이다.
둘째, 타마스(tamas) : 파괴 본능(하강력, 暗性, 검은색)을 말한다. 이 우주가 파괴되고 갖가지 재앙이 일어나며 생명이 죽는 것은 모두 이 타마스의 영향 때문이다.
셋째, 사트바(sattva) : 라쟈스와 타마스 사이에서 이 둘의 균형을 잡아 주는 힘(유지력, 平性, 흰색)을 말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저 별들이 제 궤도를 이탈하지 않으며 생명이 자라고 계절이 순환하는 것은 모두 이 사트바의 영향 때문이다.
마야의 가시화 두 가지 형태
첫째, 우주적인 환영체(宇宙幻影體, the cosmic illusion) : 유일자인 브라만은 마야의 이 우주적인 환영체를 통해 창조주, 유지자(이 세ㅔ상을 유지시키는 비슈누), 파괴자(악마)로 둔갑한다.
둘째, 개별적인 환영체(個別幻影體, the individual illusion) : 유일자인 브라만은 마야의 이 개별적인 환영체를 통해 아트만으로 산이나 나무, 돌, 동 식물, 인간의 육체 등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개체(Jiva)로 분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마야와 브라만(아트만)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면 마야는 브라만 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브라만의 창조 에너지(창조 의지)의 가시화이기 때문이다.
브라만의 고요(본질) 속에는 마야의 물결(창조의지)이 굽이치고 있으며, 또한 마야의 물결 속에는 브라만의 고요가 깃들어 있다.
이처럼 마야는 브라만을 제한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마야는 브라만의 불가사의한 힘(창조의지)이기도 하다. 브라만(니르구나 브라만)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이 마야와 연결 되면서 역동적인 창조주(사구나 브라만)가 된다. 만일 이 마야를 작동시키지 않으면 브라만은 그 호흡작용(창조, 유지, 파괴)을 할 수 없다. 왜냐면 불생불멸적인 브라만은 그가 창조한 이 현상계(물질)의 가변성을 통해 호흡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저 거미가 그의 몸에서 거미줄을 뽑아 낸 다음 그 줄을 타고 활동하는 것과 같다.
저 누에는 그가 뽑아 낸 명주실 속에 숨어 있듯, 그(브라만)는 그 자신이 만든 이 마야의 장막 속에 숨어 있나니, 우리로 하여금 그(브라만) 속에서 그와 하나가 되게 하라.
- 스베따스바따라 우파니샤드
shantala_-_shiva_invocation-atrium
아트만의 네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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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그는 결코 볼 수 없다.
왜냐면 그는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들을 수 없다.
왜냐면 그는 듣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왜냐면 그는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알 수 없다.
왜냐면 그는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 브리하드 아라냐까 우파니샤드
* Upa-ni-shad : 가까이(옆에, near) - 아래에(down) - 앉다(to sit)
"심오한 가르침을 전수받기 위해 제자가 스승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 발 <아래에> 겸허하게 <앉다>" 는 뜻
아트만(Atman, 我), 영혼의 불멸성
<아트만>(Atman)이란 말은 <호흡>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로서독일어의 아트멘(Atmen,호흡하다)과 그 어원이 같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가면서 이 말은 <자아>(自我,self), <영혼>(soul), 또는 <내면의식>(內面意識, inner consciousness), <자각력>(自覺力, awareness)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브라만은 대우주(macrocosm)요, 아트만은 소우주(microsm)다. 브라만이 전체인 <숲>이라면 아트만은 그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개체인 <나무> 한 그루 한그루에 해당한다.
아트만은 그 자각력(自覺力)의 강도에 따라 다음의 네 단계로 구분짓는다.
첫째, 잠깬 상태 : 감각의 세계로서 일상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객관적 사물들을 지각하는 차원이다.
둘째, 꿈꾸는 상태 : 이미지의 세계로서 잠깬 상태에서 사물들을 지각했던 그 기억들을 근거로 그 자신의 주관을 섞어 꿈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차원이다.
그곳((꿈의 세계)에는 마차도 없고 마차를 끌고갈 말도 없고 길도 없다. 그러나 그 자신이 마차를 만들고 길을 만든다. 그곳에는 환희도 기쁨도 쾌락도 없다. 그러나 그 자신이 환희와 기쁨과 쾌락을 만든다. 왜냐면, 그는 그 자신의 꿈의 대상물들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깊은 잠의 상태 : 무의식세계로서 자신의 본성과 하나가 되어 깊이 휴식하는 차원이다.
깊은 잠 속에서는 모든 것이 물처럼 투명해진다. 즉,<보는 자>와 <보여 지는 것>은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브라만(아트만)의 세계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성취요 축복이며, 이것이 바로 가장 높은 세계다. 이 축복의 극히 적은 일부분으로 모든 생명체들은 살아가고 있다.
넷째, 순수의식 상태 : 깊은 잠의 상태에서 우린 자신의 본성과 하나가 되어 깊은 휴식에 들어간다. 그러나 여기 자각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의 본성과 하나 되었다>는 이 본질감을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넷째 순수의식 상태에서는 자각력이 빛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나 자신의 본성과 하나 되었다>는 이 사실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순수의식 상태는 <아트만의 절정> 또는 <아트만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잠깬 상태와 꿈꾸는 상태는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차원이다. 그리고 깊은 잠의 상태는 본질에 대한 인식력이 결여된 무의식 차원이다. 그러나 이 세차원이 부서지게 되면 순수의식 상태가 드러난다.
앞의 세 가지 상태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면 우린 잘못된 인식 차원과 인식력이 결여된 차원에 갇혀 버리게 된다. 이 세 가지 상태는 원인과 결과가 지배하는 인과법칙(因果法則)의 차원이다. 그러나 이 인과법칙의 차원에서 벗어나 순수의식 차원을 깨닫게 되면 우린 본다. 언제 어디서나 근원자 브라만을 보게 된다.
여기 두 마리 새가 있다.
이 둘은 절친한 친구로서 언제나 같은 나무(생명의 나무)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둘 가운데 먼젓새(지바트마, 自我, 행위자)는 언제나 나무열매를 먹기에 정신이 없다. 그러나 뒤의 새(파라마트마, 超自我, 주시자)는 열매를 먹고 있는 먼젓새를 지극히 응시하고 있다. 같은 나무에 앉아서 <먼젓새>는 자신의 나약함을 슬퍼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불멸의 존재인 <뒤의 새>를 알아 볼 때 그는 그 순간 이 모든 생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문다까 우파니샤드
Jivatma는 어둠 속에서 고뇌하고 있으나 Paramatma는 빛 속에서 조용히 지바트마를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깨달은 이들은 이 둘을 빛과 그림자로 설명하고 있다.
까타 우파니샤드
I'll find my way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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