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강해 요약
금강경의 성립시기 : AD 150~200, 기독교의 신약성경이 쓰여 지기 시작한 대략 1세기경임
금강경의 범본제명은 “Vajraccedika-prajnaparamita-sultra"이다.
Vajra(바즈라)는 금강에 해당하는 말로 원래의 의미는 벼락(thunderbolt)이다
ccedika(쩨디까)는 자른다는 의미
prajna(쁘라기냐)는 지혜의의미로 반야(般若)는 음역임.
금강경의 범본제명을 해석하면 “벼락처럼 단번에 자르는 지혜의 완성의 경전”이 된다.
<소승 과 대승>
부파불교시대의 사부대중
출가이중 : 비구, 비구니재가이중 : 우바새, 우바이
bodisattva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산자 , 깨달음을 바라는 모든 자
보살이 곧 부처 자신의 원래 모습이다.
보살에는 승속의 이원적 구분이 없다.
소승이 자기 일신만의 구원을 추구하는데 반하여 대승은 일체중생과 더블어 구원 받기를 원하는 자,
즉 소승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자기 혼자만 타는 일인용 보트를 타고 저어가는데,
대승은 많은 사람과 피안으로 같이 가기 위해서 큰 수레, 큰 배가 필요한 자, 그 자가 곧 대승이다 !
성불이야 말로 보살행의 전제며, 보살행이야말로 성불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제1의 회향은 무상정등각을 얻는 것이요,
제2의 회향은 그 얻은 무상정등각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전위시키는 것이다.
보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체의 차별주의를 거부하는 1승 ekayana인 것이다.
우월의식 특권의식의 거부가 곧 대승 운동이요, 이 대승정신이 바로 보살정신이요,이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사상인 것이다.
이 반야사상의 최초의 명료한 규정이 바로 금강경인 것이다.
소승과 대승의 구분근거는 금강지혜의 실천 유무에 있다.
금강의 지혜 즉 반야란 무엇인가?
제법무아 내가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내가 있지 아니하다고 하는 아상의 부정,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부정에 곧 보살의 원초적이고 진실한 의미가 있다. 금강경은 오로지 대승의 출발이다.대승됨의 최초의 기준이요, 최후의 기준이다.
우리가 개법장진언'옴 아라남 아라다'를 외우는 까닭은
내 속의 참된'나'를 찾아 마음의 문을 열겠다는 맹세입니다.
마음의 문을 잘 열 수 있게 해달라는 기원입니다.- 혜국큰스님-
제1분 법회의 말미암음
여시아문. 일시, 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여시아문의 아는 아난존자의 기술임 (부처님과 장로 수부띠 사이의 대화를 목격)
아난 : 아난다로서 귀가 밝아 잘 듣고 또 기억력이 탁월한 것으로 유명해 多聞第一로 꼽히었고 , 佛典第一結集때 (544 BC?), 결집은 “더불어 같이 노래를 부른다”는 뜻이다.
사위국 : 코살라왕국
역사적 붓다가 소속 되있던 샤카 종족의 카필라바쯔는 작은 종족단위의 종족집단정치체제였고 코살라 왕국에 속해 있다.
사위성 : 슈라바스띠(Sravasti) 북 코살라 왕국의 수도의 당현장의 음역으로 서라벌 신라 서울등도 부처님이 주로 설법하신 나라의 수도 슈라바스띠에서 온 것이다.
코살라 왕국의 군주는 파사익왕이었다. 싯달타와 생년월일이 같다하고 싯달타가 성불한 해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파사익 왕에게는 제뜨리라는 왕자가 있었는데 “전쟁에서 이긴 사람”의 뜻이다.
속어적 표현에서는 Jeta(제따)가 된다. 스타워즈의 제다이라는 전사들도 파사익왕의 태자인 제다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슈라바스띠에는 須達(Sudatta) 라는 거부가 살고 있었는데 “給孤獨의 長者”라는 존경스러움을 표현하는 별명으로 불리워졌다.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이 원하는 그 아름다운 땅을 인류사상 최초의 가람을 지을 곳으로 지목해 놓고 그 땅 임자를 알아보았더니 제따태자의 소유지임을 알게 되었다.
祈樹의 원어는 Tetavana 인데 이는 제따의 음역이고 수는 바나 즉 숲의 의역이다. 음역과 의역의 합성어로서 祈樹는 “제따태자의 숲”이란 뜻이다. 수달은 이 기수를 매입하기 위하여 제따 태자를 찾아갔다.
태자제따와 장자수달은 진지하게 상의하여 그 땅은 수달이 奉施하고, 그 땅의 나무들은 제따태자가 봉시하고 精舍를 건립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이로써 인류사상 최초의 불교 가람이라 할 수 있는 “祈樹給孤獨園”이 탄생된 것이며 거기에 건립된 사찰이름까지 합쳐 祈園精舍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위대한 설법의 대부분이 바로 이 기원정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기원정사의 유적은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커닝햄경의 의하여 발굴 되었는데, 규모 남북 350m, 동서 240m , 위치는 사위성 성밖 서남쪽 1Km 떨어진 숲에 한가롭게 자리잡고 있었고 바로 여기에서 금강경의 대설법이 이루어진 역사적 정황을 리얼하게 그려볼 수 있다.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여는 ....과에 해당하는 전치사이고 구가 본동사로 더블어 계시었다는 뜻이다. 대는 아주 훌륭한 인격을 갖춘의 뜻이고 중은 들에 해당하는 복수격이다.
着衣持鉢 : 비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3衣1鉢
乞食 : 무소유의 정신, 모든 교만한 마음을 버리기 위한 것.
부처님께서 걸식을 하신 가장 큰 이유는 후세의 비구스님들이 재산이나 보화를 쌓아 놓지 못하게 하려하심이었다.
次第乞已 : 많이 빈다 해도 일곱집을 넘지않는 것이며, 일곱집을 넘으면 다시 다른집을 가지 않는 것이다. 현재 미안마 행하여지는 습속을 보면 반드시 맨발로 나가며 비가 와도 우산을 쓸 수 없으며 걸식할 때에는 일체 상대방을 쳐다보아서는 안된다.
洗足已 : 세례의 전형적 행위
* 상산수훈(마테복음 중)에서 “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에서 마음이 가난한자 란 결국 무아의 상태에 도달한자를 의미. “내세울 나 ”가 없다는 뜻
제 2분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
起請 : 자리에서 일어나 청한다
長老 : 덕행이 높고 나이가 많은 출가 수행자를 통칭하여 이르는 말.
수보리 : 기원정사 준공을 기념하여 부처가 설법을 했는데 그 때 그 설법을 듣고 감동받아 출가하였다고 한다. 급고독장자의 동생인 스마나의 아들. 無諍第一, 供養第一, 色像第一, 解空第一 등으로 불린다.
袒 : 벗긴다는 뜻의 본동사
판단우견 : 존경하는 스승에게 내 몸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자기를 낮춤으로서 상대방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다. 겸손 비움의 표시
希有世尊 : 참으로 드물게 있는 세상의 존귀하신 분이시여
如來 : 산스크리트 원어 “그와 같은(tatha) 경지 (gata)에 간 사람”
善 : 잘 이라는 뜻의 부사
護念 : 최상의 은혜 잘 보호하고 잘 생각해 주신다는 뜻. protect
付囑 : 잘 부탁한다는 뜻이다. 격려한다. encourage
도올 설 : “우리는 지혜없이 자비를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아뇩다라는 “anuttara”의 음역인데 “보다 높은 것이 없다”는 뜻이고 삼먁은 “samyak”의 음역인데 “완벽하다” 는 의미, 삼보리는 “sambodhi” 인데 “각, 正覺”의 뜻이다. 더 이상 없는 완벽한 깨달음 즉, 無上正等覺을 말한다. 그럼 무상정등각은 무엇인가? 諸法無我이다. 여기에서 법은 모든 존재를 말한다.
불타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금강경에서 깨달아야할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즉, 無上正等覺이다
無上正等覺은 무엇인가 ?
그것은 바로 諸法無我이다.
여기서 말하는 我(atman)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나”가 아니다.
여기서 아라는 것은 실체(substance)를 말하는 것이다.
실체란 무엇인가?
현상의 배후에 현상의 존속을 가능케하는 자기동일체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물체의 구성요소를 불교에서는 色受想行識의 五蘊이라 부르고 그 조합을 假合이라고 부른다. 즉 존재가 아닌 오온의 가합인 것이다.
붓다의 무상정등각의 최후의 깨달음은 바로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제법은 무아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 없는 중생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구원이란 근원적으로 그 뭇 중생들에게 존재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도 구원한 바가 없다. 아니 구원 받아야할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降伏其心 :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로 되어 있다.
汝 : 중국고어에서 매우 친근감을 나타내는 “너”이다
諦 : 체로 읽고 자세히, 명료하게 의 뜻
聽 :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하는 것. 능동 聞 : 수동의 의미, 들리다.
唯然 : “예” 라는 대답에 연이라는 음사를 붙인 것이다.
제 3분 대승의 바른 종지
(보살의 마음가짐의 내용을 설함)
正宗 : 바르고 으뜸됨 이다 종을 마루라 한다. 일본사람들은 정종을 마사무네라고 하는데 바르고 의뜸가는 최고의 술이라는 뜻이다.
금강경은 바로 이 삼분에서 정점을 형성한다. 금강경의 모든 것이 여기서 쏟아져 나온다. 사실 제 3분 이후의 문장은 제 3분의 내용을 펼친 것이다.
衆生 : 중생이란 “sattva"의 번역인데 보살의 살에 해당하는 말이다. 좁은 의미에서 중생은 인간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윤회의 범위를 생각할 때 정확하게 살아있는 모든 것이다. 우리말의 짐승이 중생에서이다.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이 중생 즉 “사뜨바”를 9종류로 분류하여 말한다.
첫째 : 태어나는 방식(mode of conception)에서
1) 난생 : 알에서 태어난 것,
2) 태생 : 자궁에서 태어난 것,
3) 습생 : 물에서 태어난 물고기 모기등 곤충류,
4) 化生 : 화생은 아무근거 없이 갑자기 태어난 것으로 도깨비나 신 그리고 지옥의 존재 같은 것이 다 화생이다.
둘째 : 형태의 유무에 관한 분류
1) 유색은 형태를 가진 모든 생물
2) 무색은 형태가 없는 신들
셋째 : 지각의 유무로 분류 되는 것
1) 유상은 오관의 지각을 가진 존재
2) 무상은 물리적 오관을 갖지 않는 천상의 존재들
3) 비유상비무상은 지각을 가졌다고도 안가졌다고도 할 수 없는 至高의 神들이다.
滅度 : 멸은 불을 끈다는 의미요 도는 건네다의 의미,즉 제도한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고해의 강물을 건넌다, 즉 구원한다는 뜻이다. 불이란 무엇인가 ? 그 것은 욕망, 갈애의 불이요, 곧 연기의 불이요, 곧 윤회의 불이다.
불을 끈 상태를 열반 “nirvana"(의 음역)이라 한다. 곧 불이 ”꺼진 상태“
이 꺼진 상태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1)유여열반 : 열반에 들기는 했는데 윤회를 계속하게 만드는 오온의 집적이 남아있다는 뜻으로 “몸”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장작의 불이 꺼지긴 했는데 숯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2)무여열반: 완전히 숯도 남지 않고 재조차 남지 않고 완전히 연소되어 꺼지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죽음”이다.
제 4분 아름다운 행동은 집착이 없다
妙行 : 아름다운 행동이라 번역했지만 , 실재로 행은 여기서 보시를 가리킨다. 묘는 지혜의 인식을 거친 후에 획득되는 상식의 세계를 의미한다.
제 4분의 주제는 보시바라밀이다. 아와 타가 존재하는 보시가 아니라, 아와 타가 근원적으로 해소되는 보시인 것이다.
於法 : 법은 소승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存在이다. 존재의 실체성에 집착하는 그러한 인식구조에서 내가 남에게 베푼다는 행위는 불필요한 業의 증대만 가져올 뿐이다.
보시는 “dana"의 번역인데 ”준다“는 뜻이다. 보시는 크게 三施로 나뉜다.
첫째 財施인데 이는 衣食과 같은 불자를 주는 것이다.
둘째 法施인데 이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셋째 無畏施인데 두려움을 제거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보시의 가장 본질적 여건은 내가 보시를 행한다고 하는 나의 相의 해소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3~4)
부주어상의 상은 표시를 의미한다. 즉, 티를 내지 않는다.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뜻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몸을 내 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노자 제 7장)
四維 : 사유라는 것은 동서남북의 사이에 끼어드는 방위를 말함. 상하를 포함하면 십방이 되는 것이다. 이를 시방으로 발음
但 : 오직으로 번역
기독교에서는 아가페적 사랑을 말한다.
이 아가페적 사랑은 이 부주상보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이 사라져야 한다.
나의 아가페적 사랑은 “나”가 사라져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제 5분 진리대로 참 모습을 보라.
如理 : 리는 眞如의 세계며 그것은 生滅의 세계가 아닌 生滅을 일으키고 있는 그 자체의 세계다. 우리의 언어는 生滅의 세계에 한정된 것이며 眞如의 세계에서는 언어가 격절된다. 相은 바로 언어와 관련되는 것이다
實見 : 실견에서 실은 부사적 용법으로 “여실히”의 뜻이다. 언어가 격절된 그 자리에서 그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三身設 (trayahkayah) : 우리가 붓다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
1) 法身 : “眞理의 신체”를 의미하며 영원불변의 진리의 當體를 가리킨다.
2) 應身 : 온갖 중생들의 구제를 위하여, 세간의 사람들의 부름에 響應하여 나타나는 신체라는 의미
3) 報身 : 인간이 부처가 되기 위한 因으로서 行業을 쌓아 그 行業의 報로서 완전한 功德을 구비한 佛身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인간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色身 : 역사적 실존인물을 가리키는 것, 역사적 붓다나 예수는 모두 색신의 이름이다. 삼신사상에서 응신이니 화신이니 하는 것은 모두 색신을 가리킨다.
둘째, 法身 : 진리의 구현체로서의 존재성을 가리키는 것, 정신적 원리로서의 붓다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는 모두 법신을 가리킨다.
“身相으로 如來를 보지 말라”는 뜻은 붓다를 색신으로 보지 말고 진리의 구현체인 법신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부처님상이라 부르는 것으로 三十二相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부처님 혹은 전륜성왕의 몸에 구족된 삼십이종의 미묘한 특징을 가리킨다.
虛妄 : 허망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과 관련된 말이다. 존재 그 자체의 허망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 수단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이다.
제 6분 바른 믿음은 드물다
後五百歲 : 三時란 불타의 멸후의 시대를 正法 像法 末法의 三期로 나누는 시대구분으로
정법은 부처님 돌아가신 후 500년간으로 불타의 가르침이 잘 실현된 시기로서 敎(가르침) 行(수행) 證(깨달음) 三者가 잘 구비된 시기다.
상법은 제2의 500년간으로 교와 행만이 있고 증이 없는 시기다.
말법은 그 후의 500년으로서 교만 있고 행 증이 다 결여된 시기로 滅法의 시기다.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는 표현은 이미 오랜 윤회의 시간 속에서 훌륭한 행동 과 덕성과 지혜로 선업을 쌓아온 그런 보살들을 형용하는 말이다.
乃至 : 내지는 “곧.....하는데 이르다” 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설법 그 자체가 종교가 아니요, 그 설법 조차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제 7분 얻을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
實在에 대한 언어적 규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實在는 無常하여 찰나찰나 변해가고 있는데 그것을 규정하는 언어는 그것과 무관하게 대상세계를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로 구성한 세계는 無常의 세계가 아니라 常의 세계다. 常의 세계는 妄想인 것이다.
無爲法 : 무위라 함은 인간의 언어가 단절되는 眞如의 세계다. 그것은 현상으로서 나타나 있는 存在가 아니라 存在의 근원으로서 무 규정적인 것이다,
有差別 : 범인들과 구분되어지는 위대함이 있다.
제 8분 법에 의해 다시 태어나라
無爲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현실적 도덕적 행위는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행하는 자세가 보살승에 올라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須彌世界 : 수미산이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그것을 동심원으로 일곱 개의 산맥이 있고 그리고 외연에는 철위산이 둘러쳐 있다. 이 구산의 사이사이에 八海가 있고 있고 그 바깥쪽 바다에는 四大州가 떠 있다. 요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수미세계이고 위로는 色界의 初禪天으로부터 아래로는 大地下의 風輪에 까지 이르고 있다.
이 수미세계가 1,000 개 모은 것이 小天世界이고, 이 소천세계를 또 1,000개 모은 것이 중천세계, 中天世界를 또 1,000 개 모은 세계가 大天세계이다. 즉 대천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수미세계의 1,000 의 3승으로 10억개의 수미세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교화의 범위이다.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 여기서 佛은 ‘깨달음’이다.불법은 곧 깨달음의 법이다.
이 최후의 충격적 일언은 “깨달음” 그 자체의 부정인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다 !
제 9분 어느 한 상도 상이 아니어라
須陀洹 : 수다원은 “인간세의 미혹함을 끊고 성자의 영원한 평안함의 흐름(流)에 방금 들어간 (入) 자”의 의미다.
斯陀含 : 원어를 직역하면 “한번 오는 자” 즉 두 번 다시 생사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벗어난다는 뜻이다. 한번만 더 윤회의 굴레로 들어갈 뿐, 더 이상의 윤회는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사람은 人間世와 天上을 한번 더 왔다 갔다 (一往來) 한다는 것이다.
阿那含 : “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 라는 의미이다. 이 사람은 色界에서는 이미 각자의 위치에 간 사람으로 不來로 의역된 것이다.
阿羅漢 : 소승불교에서 인간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더 이상 배움이 필요 없기 때문에 “無學位”라 한다. 아라한은 涅槃에 들었기 때문에 미망의 세계 즉 ( 欲界, 色界, 無色界)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므로 “不生” “殺賊”이라고 부른다.
수행의 모든 단계에서 생겨나는 자의식을 모두 깨쳐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제10분 깨끗한 땅을 장엄케 하라
淨土 : 정토란 이름이 분명으로 나오고 있는데 佛土와 동일한 뜻으로 淸淨國土라는 말을 두 글자로 압축시킨 것이다. 부처님의 나라 즉 깨달은 자들의 나라며 淨福의 영원한 이상향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인 穢土(더러운 땅, 예토)와 상대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불교사상사에서 이 정토는 來世淨土(앞으로 갈 정토), 淨佛國土(지금 이룩하는 정토), 常寂광토(이미 있는 정토) 의 三種類로 大別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토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완벽하게 동일한 개념이다.
淨佛國土(지금 이룩하는 정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淨土化를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天國의 현실적 실천이다. 정불국토의 정은 佛國土를 깨끗이 한다고 하는 우리 삶의 현실적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진행형이다.
燃燈佛 : "Dipankara Tathagata"의 의역이다. 이 부처님은 過去世의 佛로서 授記(vyakarana)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수기는 예언을 의미하는데 과거세에 있어서 과거불이 수행자에게 미래의 세에 있어서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고 하는 보증을 확약하는 예언을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 연등불은 타오르는 등불과도 같은 부처님으로서 석존이전의 과거세에 존재했던 二十四佛 중의 한사람 이었다.
연등불의 이야기는 불교설화문학에 속한다.
석가모니는 전생에 있어서 “수메다”(Sumedha)라는 고행자였다. 이 고행자는 당대의 부처님이었던 연등불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연등불이 지나갈 도로가 수선하는 바람에 아주 질펀하게 더러운 물이 고여 있었다. 그래서 수메다는 그곳에 몸을 뉘어 연등부처님이 몸을 밟고 지나가시도록했다. 그리고 일곱자루의 연꽃을 헌화하였다. 그때 연등부처님은 記를 내리시는(授) 것이다 : “그대는 후에 샤캬족의 성자(샤캬무니 = 석가모니)가 되리라.”
莊嚴 : 장엄이라는 한문의 동사적 형태는 “...의 건립을 성취한다.” “...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완성한다.”는 의미임.
是名莊嚴 : 名은 명사가 아니라 “이름한다”(to name)는 동사이다. 是는 지시대명사로서 앞의 문장 전체를 받는다.
莊嚴佛土者卽非莊嚴, 是名莊嚴. :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은 즉 장엄하게 내가 불토를 만들고 있다고 하는 我相이 없을 때 비로소 이것을 장엄하게 한다 라고 표현해 줄 수 있다.
라오쯔는 말한다 :
길을 길이라 이름하면
그것은 항상 그러한 길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須彌山王 : 중국불교문헌에서는 모든 사물에 王자를 붙여 그것을 생명체로서 존중해주는 의미의 접미사로 쓰고 있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산이다, 세계의 제일 아래에는 風輪이 있고, 그 위에 水輪이 있고, 그 위에 金輪(地輪)이 있고(鐵圍山으로 동그랗게 둘러쳐져 있다)., 그 위에 九山八海, 四大州가 있고 그 정 가운데 16萬由旬의 높이로 솟아있는 것이 수미산이다. 그 정상에는 帝釋天의 거소가 있는데 그것이 곧 三十三天인 忉利天(Trayastrimsa)이다.
鐵圍山 : 수미산을 둘러싼 구산팔해(九山八海)의 아홉 산 가운데 하나. 지변산(地邊山)을 둘러싸고 있으며, 구산 가운데 맨 바깥쪽에 있는 쇠로 된 산이다. 높이와 넓이가 각각 312유순(由旬)이라고 한다.
由旬 : 예전에, 인도에서 거리를 재던 단위.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서, 80리인 대유순, 60리인 중유순, 40리인 소유순의 세 가지가 있다.
제11분 함이 없음의 복이여 위대하여라!
인도인들의 과장법의 표현과 진실한 내용이 잘 포함되어 있다.
제12분 존중해야 할 바른 가르침
塔廟 : 원어는 "짜이띠야 부후따"(caitya-bhuta)는 불교이전부터 묘소의 의미였는데 불교에서는 부처님과 불제자의 유골을 헌납한 곳을 “스뚜빠”(stupa, 塔)라 했다.
天人阿修羅 : 중생이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하여 생사를 반복하는 여섯 개의 세계인 六道(六趣)중에서 “地獄, 餓鬼, 畜生”의 三惡道를 빼고 난 三善導를 가리킨다.
阿修羅 : “asura"의 음사이며 혈기가 왕성하고 전투를 좋아하는 귀신의 일종이다.
이 인도의 아수라는 이란 신화에서는 아후라(ahura)로 나타나며, 이 아후라는 데바(devas)와 함께 善神들이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인드라신등의 대두와 더불어 아수라는 데바의 적으로 간주 되었고, 항상 신들에게 싸움을 거는 악마 귀신 등으로 추방되었다. 이란에서는 재미있게 거꾸로 발전되어 데바가 악신으로 격하되어 “데몬”(demons) 즉 악마가 되어버리고 아후라는 최고의 신(the supreme God)으로 격상되었다.
成就 : 성취는 몸에 구비되어 있다, 달성한다, 완성한다, 충분히 이루다의 뜻임.
제 13분 법에 따라 받아 지녀라
반야의 사상은 근원적으로 언어의 세계를 부정한다.
제 14분 상을 떠나 영원으로
實相 ; 眞如와 같이 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을 의미한다.
忍辱 : 인욕(ksanti)이란, 대승보살의 수행덕목인 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나에게 주어지는 비난 중상 모략 굴욕등을 참아내어 분노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인욕의 본질은 참는 대상이 없어지고 참는 주체가 사라지는 경지 즉 내가 참고 있다라고 하는 의식마저 해소되어 버리는 경지가 곧 인욕바라밀이다.
제 15분 경을 외우는 공덕
受持讀誦 : 문명사적으로 볼 때는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을 비교할 때, 상대적인 평가이겠지만, 인도는 음악전통이 강하고, 중국은 회화전통이 강하다. 이 금강경을 통하여 계속 나오고 있는 “授持”라는 말은 “받아 지닌다”고 그냥 풀었지만 그것은 “dharayati"에 해당하는 말로써, 실제적 의미는 귀로 듣고 기억한다는 뜻이다. 즉 ”memorization" 이다. 다시 말해서 가르침을 내 마음속으로 받아들여 간직한다는 것이다.
無量百千萬億劫 : 원어는 “bahuni kalpa-koti-nyuta-satasahasrani" 다. "kalpa"는 ”劫“의 음역이며 ”무한히 긴 시간“을 뜻한다. koti는 十萬, 億으로 번역된다. nyuta 는 兆, 那由他로 번역된다. sata는 百이며 sahasra는 千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백의 천의 십만의 조의 수많은 劫인데 이것은 인간의 상상을 절하는 무한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劫 : 산스크리트 'kalpa'의 음역인 겁파(劫波)의 약칭으로, 장시(長時)·대시(大時)라 의역된다. 본래 인도에서는 범천(梵天)의 하루, 곧 인간계의 4억 3,200만 년을 1겁이라 한다.
不可思議 : “이해가 되기 어려운” “신비로운”의 의미로 인간의 언어 개념이 격절되는 세계에 대한 형용이다. “acintya"에 해당하는 불교전문용어임. 인간의 언어가 단절된 無我의 功德
荷擔 : 하담은 “걸머멘다”는 의미인데 해당되는 원문은 “samamsena bodhim dharayisyanti"로서 자기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我見 : 我相이 我見으로 바뀌었는데 “내가 실체로서 있다고 하는 견해”의 뜻.
아견에 집착하게 되면 이 경을 들어 자기 것으로 하지도 못하고 남을 위하여 해설할 수도 없다는 것은 만고의 명언이다.
當知此處則爲是塔 : 바로 진리의 말씀이 있는 바로 그곳이 탑이요 십자가요, 모든 사람과 신과 천사가 그 주위를 경배하고 아름다운 꽃의 향기로서 聖化하리라!
供養 : 공양이란 말은 “puja"의 역어인데 그 원의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대접한다“는 뜻
제 16분 더러운 업을 항상 깨끗이
阿僧祈 : 아승기는 “asamkhya"(아삼캬)의 음역이며, 그 뜻은 ”셀 수 없음“의 의미다. 10의 59승 혹은 56승으로 알려져 있다.
那由他 : 나유타는 1,000억에 해당하는 매우 큰 수량 단위
當知是經義不可思議, 果報亦不可思議.
모든 신비주의는 神(God)이라는 언어를 넘어서 神聖(Godhead) 그 자체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나 개인의 영혼과 신과의 合一을 추구한다. 그러나 구극에 있어서는 이러한 신과의 합일조차도 거부되는 단절이 드러난다. 신과 나라는 모든 실체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지혜의 신비는 주관과 객관, 주부와 술부의 대립이 해소되는 자리에 서있다. 어떠한 언어도 그 자리에 진입할 수 없다.
狐疑 : 호의는 의심이 깊어 결심이 서지 않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우가 초봄에 언 강물을 건너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모습에서 그 뜻이 유래되었다.
제 17분 지혜의 궁극은 나가 없음
석가모니(Sukya-muni)라 할 때 석가는 싣달타가 속한 종족의 이름이다. 모니는 “영감을 얻은자” “예언자” “고행자” “성자”의 뜻이다.
깨달음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내가 참된 기독교인이요 네가 사탄이라는 생각도 없다. 사탄도 껴안으면 곧 천사요, 천사도 껴안으면 곧 사탄이라! 진실한 如如와 허망한 迷惑이라는 생각, 그것이 없는 자리가 곧 여래의 무상정등각이다. 悟迷不二!
일체의 존재(法는)는 곧 깨달음의 존재다. 일체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覺者요, 붓다인 것이다. 풀 한포기에서 성자의 모습을 보라! 꽃 한송이에서 예수의 모습을 보라!
通達無我法者 : 산스크리트 원문은 “niratmano dharma"이다. 불교의 종지는 無我요, 대승의 종착은 無我요, 보살의 종국은 無我다.
제18 분 모든 것을 한몸으로 보아라
우리가 본다고 하는 전체적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라는 총체적 과정인 것이다.
천안은 Heavenly eye 즉 신의 눈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ㅎ
혜안은 지혜의 눈이다. 법안은 현상계의 형체를 넘어서 다르마(法) 그 자체를 직시하는 눈일 것이요 불안은 모든 존재의 구분이 사라진 如如의 눈일 것이다.
佛世界 : 불세계는 불안으로 보는 세계일 것이다.
若干種 ; “온갖 종류의“ 라고 번역
如來說諸心 : 여기서 말하는 心 심이란 원어는 “citta dhara"인데 이것은 실로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을 뜻한다. 과거의 경험에 기초한 의식 및 무의식이 현재 미래로 흘러가면서 우리의 의식작용이나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는 의미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제 20분 색을 떠나시오, 상을 떠나시오
色身 : 색신의 산스크리트 원문은(rupa-kaya)이다. 루빠는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할 때 의 바로 그 색이다. 구체적인 형체를 가진 것을 뜻한다. 즉 공간을 점유하는 것.
具足 : 구족한다는 것은 단정한 모습을 구비하고 있다. 비구 비구니들이 입단과정에서 거치는 완전한 계율을 具足戒라고 하는데 이것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온전한 계율이라는 뜻이다.
뭇상은 32상을 류의 색신을 형용한 말이다.
제 21분 설하는 자도 없고 설 되어지는 자도 없다
A가 곧 B라는 것은 A라는 주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길이라 하는 것은 나의 無化 즉 無我를 의미하는 것이다.
慧命須菩堤 : 혜명이라 한 것은 산스크리트어 “ayusmat"인데, 이것은 長老에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누구든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이와같이 생각했다고 말하지 말라. 만약 어떤 이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면 그는 곧 나 예수를 비방하는 자라. 나는 길이 아니요, 진리가 아니요,생명이 아니라.그러므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말하지 않았다.자신이 곧 길 진리 생명이었다. 이제는 예수는 사라지고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곧 금강경이 설하는 "무아" 인 것이다.이것이 곧 요한복음의 로고스 사상인 것이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 저는 진리의 영이라.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 하심이요,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제 22분 얻을 법이 없어라
제 23분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시오
제 24분 복덕과 지혜는 비교될 수 없다
제25분 교화는 교화하는 바가 없다
汝等勿爲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 이것은 나의 실존적 독백인 것이다.
여등물위여래작시념, 아당도중생. 즉, 아상의 단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책임일 뿐인 것이다.
범부라는 표현은 “어리석은 일반인들”의 뜻인데 원문은 “bala-prthag-janab”이다 직역하면 “하나 하나씩 따로 따로 태어난 자” 이것이 복수형이 되면 “愚者” “群衆”의 뜻이 된다.
제 26분 법신은 모습이 없다
如是如是. 以三十二相觀如來 : 여기 수보리의 대답이 우리의 상식적 기대를 벗어나 있다. 이것이 方便설법인 것이다. 수보리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같이 듯는 뭇 중생들을 위하여 자신을 낮춘 것이다.
轉輪聖王 : 전륜성왕이란 “cakravarti-raja” 인데 “바퀴를 돌리는 왕”이란 뜻이다. 여기서 바퀴라는 것은 인도 고대의 성왕이 가지고 있었던 무기를 상징화하는 것으로, 적진에 자유자재로 굴러다니면서 적을 분쇄하는 무기인 것이다. 흔히 불교에서 법륜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을 이렇게 우리의 무명을 쳐부수는 바퀴로 상징한데서 생겨난 말인 것이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어느 성당에 마리아가 피흘린다고 쫓아가고, 어느 절간에 부처님상이 땀흘린다고 달려가는 추태를 생각할 때, 이 금강경의 지혜는 그 얼마나 많은 인류사의 종교미신을 단절 시킬 수 있는 신령스러운 말씀으로 가득 차있는가?
제 27분 끊음도 없고 멸함도 없나니
본 절의 뜻은 “온전한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무상정등각을 얻은 것은 아니다”라는 그 부정을 또 다시 부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온전한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무상정등각을 얻은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은 이미 고도의 自覺이다. 그러나 그 고도의 자각 “...이 아니다”라는 자각 자체가 해소 되어야만 비로소 무상정등각이 드러나는 것이다.
百尺竿頭 須進一步!
나의 마음을 斷滅한다고 했을 때, 단멸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마음은 단멸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 의식이 더욱 깊어지고 강렬해지게 마련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인간존재의 가장 심연의 파라독스다.
제 28 받을 생각도 말고 탐하지도 말라
得成於忍 : 득성어인은 “인을 얻어 이룬다”는 뜻이다.
菩薩所作福德, 不應貪着. 是故說不受福德 : "功成而佛居"의 위대한 표현일 것이다.
제 29분 위엄있는 그 모습 고요하기도 하다
여래자,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 우리의 인생이여!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아름다운 삶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어찌 창조와 종말을 운운하랴!
제 30분 모이나 흩어지나 한 모습
合이란 매크로(거시)의 세계다. 離란 마이크로(미시)의 세계이다. 우리가 보통 인식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합의 세계이다. 거시적인 세계는 항상 마야 즉 幻의 가능성으로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사물을 미시적으로 분석하기를 좋아한다.
인식론적 반성이 없이는 마이크로의 세계를 논구할 수가 없다.
기독교는 종교적 진리에 관한한, 인식론을 거부한다. 예수가 죽었다 살아났다.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기독교가 인식론을 거부하기 때문에 인식론이 기독교 서구라파 문명 전통에서는 과학이나 철학의 분야로 독립되었다.
불교에서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심오성인 동시에 그 한계인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인식론이 종교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이 발달되었고, 불교 전통에서는 그것이 合一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의 발전이 저해된 그러한 아이러니를 인류 역사는 露呈시킨 것이다.
미진중은 단순히 미진의 복수형으로 보야야한다.
若世界實有者相, 則是一合 :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큰 전체상일 것이오이다.
붓다는 우리가 합의 문제로 사유를 틀면, 곧 세계 그 자체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속에 티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티끌의 合의 궁극은 세계 그 자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cosmos)이다.
一合相者, 則是不可說.(일합상자, 즉시불가설.) :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 그것이 곧 우주요 인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지어다.
제 31분 앎을 갖지 말지어다
제 32분 색신은 모습이 없어라
應化非眞 : 응화비진은 응신과 화신을 가리킨다. 이 모두 색신의 異名이다.
演說 : “연하여 설한다”는 뜻으로 演이란 “물이 흐르는 대로 그 물가를 따라서 자세히”의 뜻이 있다.
노자의 말에 이런 말이 있다.
慹大象! 天下往.
모습없는 큰 모습을 잡아라!
천하가 스스로 간다.
진언이란 나의 육신의 발성기관의 진동이 아닌 우주의 소리요 신의 소리인 것이다.
나모 : 존엄하신 지혜의 완성의 여신(Bhagavate Prajnaparamitaye) 에게 경배(귀의)하는 인사의 말이다. “지혜의 완성”이 여성명사화 되어 신격화 되고 있다.
스바하 : 기독교의 아멘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행복이 깃들기를” “축복이 있기를” 의미. 인도에 가면 사람들이 성스러운 곳에 향을 뿌리면서 “스바하”를 외친다.
옴 : 옴은 우주의 소리로 “AUM"을 표기한 것이다. A는 소리의 시작, U는 지속이며, M은 끝이다. 이는 우주의 탄생과 지속과 소멸을 다 함축하는 진언인 것이다.
금강경은 논리의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찬가요, 해탈의 노래다. 그 노래가 이 진언 속에 다 함축되어 있다. 진언을 말할 때는 반드시 리드믹한 노래로 불러야 한다. 장음과 단음, 억양의 고하의 묘합을 살려!
나모바가바떼 쁘라갸 빠라미따예
옴 이리띠 이실리 슈로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이것으로 나의 강해가 끝난다.
'하나됨 - 지금여기 > Buddh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범본 금강경 한글 옮김 - 각묵스님 (0) | 2014.09.25 |
---|---|
金剛經 四句偈 (0) | 2014.09.16 |
아름다운 우리말 금강경을 독송합시다.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0) | 2014.09.12 |
금강반야바라밀경 - 도올 김용옥 강해 (0) | 2014.09.05 |
반야심경 - (0) | 2014.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