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강해 요약

 

 

 

 

 

 

금강경의 성립시기 : AD 150~200, 기독교의 신약성경이 쓰여 지기 시작한 대략 1세기경임

 

금강경의 범본제명은 “Vajraccedika-prajnaparamita-sultra"이다.

Vajra(바즈라)는 금강에 해당하는 말로 원래의 의미는 벼락(thunderbolt)이다

ccedika(쩨디까)는 자른다는 의미

prajna(쁘라기냐)는 지혜의의미로 반야(般若)는 음역임.

금강경의 범본제명을 해석하면 벼락처럼 단번에 자르는 지혜의 완성의 경전이 된다.

 

<소승 과 대승>

부파불교시대의 사부대중

출가이중 : 비구, 비구니재가이중 : 우바새, 우바이 

 bodisattva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산자 , 깨달음을 바라는 모든 자 

보살이 곧 부처 자신의 원래 모습이다.

보살에는 승속의 이원적 구분이 없다

소승이 자기 일신만의 구원을 추구하는데 반하여 대승은 일체중생과 더블어 구원 받기를 원하는 자,

소승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자기 혼자만 타는 일인용 보트를 타고 저어가는데,

대승은 많은 사람과 피안으로 같이 가기 위해서 큰 수레, 큰 배가 필요한 자, 그 자가 곧 대승이다 !

성불이야 말로 보살행의 전제며, 보살행이야말로 성불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1의 회향은 무상정등각을 얻는 것이요,

2의 회향은 그 얻은 무상정등각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전위시키는 것이다 

 

보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체의 차별주의를 거부하는 1ekayana인 것이다.

우월의식 특권의식의 거부가 곧 대승 운동이요, 이 대승정신이 바로 보살정신이요,이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사상인 것이다.

  이 반야사상의 최초의 명료한 규정이 바로 금강경인 것이다.

소승과 대승의 구분근거는 금강지혜의 실천 유무에 있다

 

금강의 지혜 즉 반야란 무엇인가?

제법무아 내가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내가 있지 아니하다고 하는 아상의 부정,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부정에 곧 보살의 원초적이고 진실한 의미가 있다. 금강경은 오로지 대승의 출발이다.대승됨의 최초의 기준이요, 최후의 기준이다.

 

우리가 개법장진언'옴 아라남 아라다'를 외우는 까닭은

내 속의 참된''를 찾아 마음의 문을 열겠다는 맹세입니다.

마음의 문을 잘 열 수 있게 해달라는 기원입니다.- 혜국큰스님-

    

 

1분 법회의 말미암음

 

여시아문. 일시, 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여시아문의 아는 아난존자의 기술임 (부처님과 장로 수부띠 사이의 대화를 목격)

아난 : 아난다로서 귀가 밝아 잘 듣고 또 기억력이 탁월한 것으로 유명해 多聞第一로 꼽히었고 , 佛典第一結集(544 BC?), 결집은 더불어 같이 노래를 부른다는 뜻이다.

 

사위국 : 코살라왕국

역사적 붓다가 소속 되있던 샤카 종족의 카필라바쯔는 작은 종족단위의 종족집단정치체제였고 코살라 왕국에 속해 있다.

 

사위성 : 슈라바스띠(Sravasti) 북 코살라 왕국의 수도의 당현장의 음역으로 서라벌 신라 서울등도 부처님이 주로 설법하신 나라의 수도 슈라바스띠에서 온 것이다.

 

코살라 왕국의 군주는 파사익왕이었다. 싯달타와 생년월일이 같다하고 싯달타가 성불한 해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파사익 왕에게는 제뜨리라는 왕자가 있었는데 전쟁에서 이긴 사람의 뜻이다.

속어적 표현에서는 Jeta(제따)가 된다. 스타워즈의 제다이라는 전사들도 파사익왕의 태자인 제다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슈라바스띠에는 須達(Sudatta) 라는 거부가 살고 있었는데 給孤獨長者라는 존경스러움을 표현하는 별명으로 불리워졌다.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이 원하는 그 아름다운 땅을 인류사상 최초의 가람을 지을 곳으로 지목해 놓고 그 땅 임자를 알아보았더니 제따태자의 소유지임을 알게 되었다.

祈樹의 원어는 Tetavana 인데 이는 제따의 음역이고 수는 바나 즉 숲의 의역이다. 음역과 의역의 합성어로서 祈樹제따태자의 숲이란 뜻이다. 수달은 이 기수를 매입하기 위하여 제따 태자를 찾아갔다.

 

태자제따와 장자수달은 진지하게 상의하여 그 땅은 수달이 奉施하고, 그 땅의 나무들은 제따태자가 봉시하고 精舍를 건립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이로써 인류사상 최초의 불교 가람이라 할 수 있는 祈樹給孤獨園이 탄생된 것이며 거기에 건립된 사찰이름까지 합쳐 祈園精舍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위대한 설법의 대부분이 바로 이 기원정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기원정사의 유적은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커닝햄경의 의하여 발굴 되었는데, 규모 남북 350m, 동서 240m , 위치는 사위성 성밖 서남쪽 1Km 떨어진 숲에 한가롭게 자리잡고 있었고 바로 여기에서 금강경의 대설법이 이루어진 역사적 정황을 리얼하게 그려볼 수 있다.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여는 ....과에 해당하는 전치사이고 구가 본동사로 더블어 계시었다는 뜻이다. 대는 아주 훌륭한 인격을 갖춘의 뜻이고 중은 들에 해당하는 복수격이다.

       

着衣持鉢 : 비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31

 

乞食 : 무소유의 정신, 모든 교만한 마음을 버리기 위한 것.

부처님께서 걸식을 하신 가장 큰 이유는 후세의 비구스님들이 재산이나 보화를 쌓아 놓지 못하게 하려하심이었다.

 

次第乞已 : 많이 빈다 해도 일곱집을 넘지않는 것이며, 일곱집을 넘으면 다시 다른집을 가지 않는 것이다. 현재 미안마 행하여지는 습속을 보면 반드시 맨발로 나가며 비가 와도 우산을 쓸 수 없으며 걸식할 때에는 일체 상대방을 쳐다보아서는 안된다.

 

洗足已 : 세례의 전형적 행위

 

* 상산수훈(마테복음 중)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에서 마음이 가난한자 란 결국 무아의 상태에 도달한자를 의미. “내세울 나 가 없다는 뜻

 

 

2분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

 

起請 : 자리에서 일어나 청한다

 

長老 : 덕행이 높고 나이가 많은 출가 수행자를 통칭하여 이르는 말.

 

수보리 : 기원정사 준공을 기념하여 부처가 설법을 했는데 그 때 그 설법을 듣고 감동받아 출가하였다고 한다. 급고독장자의 동생인 스마나의 아들. 無諍第一, 供養第一, 色像第一, 解空第一 등으로 불린다.

 

: 벗긴다는 뜻의 본동사

판단우견 : 존경하는 스승에게 내 몸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자기를 낮춤으로서 상대방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다. 겸손 비움의 표시

 

希有世尊 : 참으로 드물게 있는 세상의 존귀하신 분이시여

 

如來 : 산스크리트 원어 그와 같은(tatha) 경지 (gata)에 간 사람

 

: 잘 이라는 뜻의 부사

 

護念 : 최상의 은혜 잘 보호하고 잘 생각해 주신다는 뜻. protect

付囑 : 잘 부탁한다는 뜻이다. 격려한다. encourage

 

도올 설 : “우리는 지혜없이 자비를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아뇩다라는 “anuttara”의 음역인데 보다 높은 것이 없다는 뜻이고 삼먁은 “samyak”의 음역인데 완벽하다는 의미, 삼보리는 “sambodhi” 인데 , 正覺의 뜻이다. 더 이상 없는 완벽한 깨달음 즉, 無上正等覺을 말한다. 그럼 무상정등각은 무엇인가? 諸法無我이다. 여기에서 법은 모든 존재를 말한다.

 

불타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금강경에서 깨달아야할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阿耨多羅三藐三菩提 , 無上正等覺이다

無上正等覺은 무엇인가 ?

그것은 바로 諸法無我이다.

 

여기서 말하는 (atman)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가 아니다.

여기서 아라는 것은 실체(substance)를 말하는 것이다.

실체란 무엇인가?

현상의 배후에 현상의 존속을 가능케하는 자기동일체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물체의 구성요소를 불교에서는 色受想行識五蘊이라 부르고 그 조합을 假合이라고 부른다. 즉 존재가 아닌 오온의 가합인 것이다.

붓다의 무상정등각의 최후의 깨달음은 바로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제법은 무아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 없는 중생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구원이란 근원적으로 그 뭇 중생들에게 존재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도 구원한 바가 없다. 아니 구원 받아야할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降伏其心 :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로 되어 있다.

 

: 중국고어에서 매우 친근감을 나타내는 이다

 

: 로 읽고 자세히, 명료하게 의 뜻

 

: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하는 것. 능동     : 수동의 의미, 들리다.

 

唯然 : “라는 대답에 연이라는 음사를 붙인 것이다.

 

 

3분 대승의 바른 종지

(보살의 마음가짐의 내용을 설함)

 

正宗 : 바르고 으뜸됨 이다 종을 마루라 한다. 일본사람들은 정종을 마사무네라고 하는데 바르고 의뜸가는 최고의 술이라는 뜻이다.

 

금강경은 바로 이 삼분에서 정점을 형성한다. 금강경의 모든 것이 여기서 쏟아져 나온다. 사실 제 3분 이후의 문장은 제 3분의 내용을 펼친 것이다.

 

衆生 : 중생이란 “sattva"의 번역인데 보살의 살에 해당하는 말이다. 좁은 의미에서 중생은 인간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윤회의 범위를 생각할 때 정확하게 살아있는 모든 것이다. 우리말의 짐승이 중생에서이다.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이 중생 즉 사뜨바9종류로 분류하여 말한다.

 

첫째 : 태어나는 방식(mode of conception)에서

1) 난생 : 알에서 태어난 것,

2) 태생 : 자궁에서 태어난 것,

3) 습생 : 물에서 태어난 물고기 모기등 곤충류,

4) 化生 : 화생은 아무근거 없이 갑자기 태어난 것으로 도깨비나 신 그리고 지옥의 존재 같은 것이 다 화생이다.

 

둘째 : 형태의 유무에 관한 분류

1) 유색은 형태를 가진 모든 생물

2) 무색은 형태가 없는 신들

 

셋째 : 지각의 유무로 분류 되는 것

1) 유상은 오관의 지각을 가진 존재

2) 무상은 물리적 오관을 갖지 않는 천상의 존재들

3) 비유상비무상은 지각을 가졌다고도 안가졌다고도 할 수 없는 至高들이다.

 

滅度 : 멸은 불을 끈다는 의미요 도는 건네다의 의미,즉 제도한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고해의 강물을 건넌다, 즉 구원한다는 뜻이다. 불이란 무엇인가 ? 그 것은 욕망, 갈애의 불이요, 곧 연기의 불이요, 곧 윤회의 불이다.

불을 끈 상태를 열반 “nirvana"(의 음역)이라 한다. 곧 불이 꺼진 상태

 

이 꺼진 상태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1)유여열반 : 열반에 들기는 했는데 윤회를 계속하게 만드는 오온의 집적이 남아있다는 뜻으로 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장작의 불이 꺼지긴 했는데 숯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2)무여열반: 완전히 숯도 남지 않고 재조차 남지 않고 완전히 연소되어 꺼지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죽음이다.

 

 

4분 아름다운 행동은 집착이 없다

 

妙行 : 아름다운 행동이라 번역했지만 , 실재로 행은 여기서 보시를 가리킨다. 묘는 지혜의 인식을 거친 후에 획득되는 상식의 세계를 의미한다.

 

4분의 주제는 보시바라밀이다. 아와 타가 존재하는 보시가 아니라, 아와 타가 근원적으로 해소되는 보시인 것이다.

 

於法 : 법은 소승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存在이다. 존재의 실체성에 집착하는 그러한 인식구조에서 내가 남에게 베푼다는 행위는 불필요한 의 증대만 가져올 뿐이다.

 

보시는 “dana"의 번역인데 준다는 뜻이다. 보시는 크게 三施로 나뉜다.

첫째 財施인데 이는 衣食과 같은 불자를 주는 것이다.

둘째 法施인데 이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셋째 無畏施인데 두려움을 제거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보시의 가장 본질적 여건은 내가 보시를 행한다고 하는 나의 의 해소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3~4)

 

부주어상의 상은 표시를 의미한다. , 티를 내지 않는다.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뜻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몸을 내 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노자 제 7)

 

四維 : 사유라는 것은 동서남북의 사이에 끼어드는 방위를 말함. 상하를 포함하면 십방이 되는 것이다. 이를 시방으로 발음

 

: 오직으로 번역

 

기독교에서는 아가페적 사랑을 말한다.

이 아가페적 사랑은 이 부주상보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이 사라져야 한다.

나의 아가페적 사랑은 가 사라져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5분 진리대로 참 모습을 보라.

 

如理 : 리는 眞如의 세계며 그것은 生滅의 세계가 아닌 生滅을 일으키고 있는 그 자체의 세계다. 우리의 언어는 生滅의 세계에 한정된 것이며 眞如의 세계에서는 언어가 격절된다. 은 바로 언어와 관련되는 것이다

實見 : 실견에서 실은 부사적 용법으로 여실히의 뜻이다. 언어가 격절된 그 자리에서 그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三身設 (trayahkayah) : 우리가 붓다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

1) 法身 : “眞理의 신체를 의미하며 영원불변의 진리의 當體를 가리킨다.

2) 應身 : 온갖 중생들의 구제를 위하여, 세간의 사람들의 부름에 響應하여 나타나는 신체라는 의미

3) 報身 : 인간이 부처가 되기 위한 으로서 行業을 쌓아 그 行業로서 완전한 功德을 구비한 佛身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인간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色身 : 역사적 실존인물을 가리키는 것, 역사적 붓다나 예수는 모두 색신의 이름이다. 삼신사상에서 응신이니 화신이니 하는 것은 모두 색신을 가리킨다.

둘째, 法身 : 진리의 구현체로서의 존재성을 가리키는 것, 정신적 원리로서의 붓다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는 모두 법신을 가리킨다.

 

身相으로 如來를 보지 말라는 뜻은 붓다를 색신으로 보지 말고 진리의 구현체인 법신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부처님상이라 부르는 것으로 三十二相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부처님 혹은 전륜성왕의 몸에 구족된 삼십이종의 미묘한 특징을 가리킨다.

 

虛妄 : 허망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과 관련된 말이다. 존재 그 자체의 허망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 수단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이다.

 

 

6분 바른 믿음은 드물다

 

後五百歲 : 三時란 불타의 멸후의 시대를 正法 像法 末法三期로 나누는 시대구분으로

정법은 부처님 돌아가신 후 500년간으로 불타의 가르침이 잘 실현된 시기로서 (가르침) (수행) (깨달음) 三者가 잘 구비된 시기다.

상법은 제2500년간으로 교와 행만이 있고 증이 없는 시기다.

말법은 그 후의 500년으로서 교만 있고 행 증이 다 결여된 시기로 滅法의 시기다.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는 표현은 이미 오랜 윤회의 시간 속에서 훌륭한 행동 과 덕성과 지혜로 선업을 쌓아온 그런 보살들을 형용하는 말이다.

 

乃至 : 내지는 .....하는데 이르다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설법 그 자체가 종교가 아니요, 그 설법 조차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7분 얻을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

 

實在에 대한 언어적 규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實在無常하여 찰나찰나 변해가고 있는데 그것을 규정하는 언어는 그것과 무관하게 대상세계를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로 구성한 세계는 無常의 세계가 아니라 의 세계다. 의 세계는 妄想인 것이다.

 

無爲法 : 무위라 함은 인간의 언어가 단절되는 眞如의 세계다. 그것은 현상으로서 나타나 있는 存在가 아니라 存在의 근원으로서 무 규정적인 것이다,

 

有差別 : 범인들과 구분되어지는 위대함이 있다.

 

 

8분 법에 의해 다시 태어나라

 

無爲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현실적 도덕적 행위는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행하는 자세가 보살승에 올라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須彌世界 : 수미산이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그것을 동심원으로 일곱 개의 산맥이 있고 그리고 외연에는 철위산이 둘러쳐 있다. 이 구산의 사이사이에 八海가 있고 있고 그 바깥쪽 바다에는 四大州가 떠 있다. 요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수미세계이고 위로는 色界初禪天으로부터 아래로는 大地下風輪에 까지 이르고 있다.

 

이 수미세계가 1,000 개 모은 것이 小天世界이고, 이 소천세계를 또 1,000개 모은 것이 중천세계, 中天世界를 또 1,000 개 모은 세계가 大天세계이다. 즉 대천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수미세계의 1,000 3승으로 10억개의 수미세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교화의 범위이다.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 여기서 깨달음이다.불법은 곧 깨달음의 법이다.

이 최후의 충격적 일언은 깨달음그 자체의 부정인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다 !

 

 

9분 어느 한 상도 상이 아니어라

 

須陀洹 : 수다원은 인간세의 미혹함을 끊고 성자의 영원한 평안함의 흐름()에 방금 들어간 () 의 의미다.

 

斯陀含 : 원어를 직역하면 한번 오는 자즉 두 번 다시 생사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벗어난다는 뜻이다. 한번만 더 윤회의 굴레로 들어갈 뿐, 더 이상의 윤회는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사람은 人間世天上을 한번 더 왔다 갔다 (一往來) 한다는 것이다.

 

阿那含 : 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 사람은 色界에서는 이미 각자의 위치에 간 사람으로 不來로 의역된 것이다.

 

阿羅漢 : 소승불교에서 인간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더 이상 배움이 필요 없기 때문에 無學位라 한다. 아라한은 涅槃에 들었기 때문에 미망의 세계 즉 ( 欲界, 色界, 無色界)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므로 不生” “殺賊이라고 부른다.

 

수행의 모든 단계에서 생겨나는 자의식을 모두 깨쳐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10분 깨끗한 땅을 장엄케 하라

 

淨土 : 정토란 이름이 분명으로 나오고 있는데 佛土와 동일한 뜻으로 淸淨國土라는 말을 두 글자로 압축시킨 것이다. 부처님의 나라 즉 깨달은 자들의 나라며 淨福의 영원한 이상향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인 穢土(더러운 땅, 예토)와 상대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불교사상사에서 이 정토는 來世淨土(앞으로 갈 정토), 淨佛國土(지금 이룩하는 정토), 常寂광토(이미 있는 정토) 三種類大別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토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완벽하게 동일한 개념이다.

 

淨佛國土(지금 이룩하는 정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淨土化를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天國의 현실적 실천이다. 정불국토의 정은 佛國土를 깨끗이 한다고 하는 우리 삶의 현실적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진행형이다.

 

燃燈佛 : "Dipankara Tathagata"의 의역이다. 이 부처님은 過去世로서 授記(vyakarana)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수기는 예언을 의미하는데 과거세에 있어서 과거불이 수행자에게 미래의 세에 있어서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고 하는 보증을 확약하는 예언을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 연등불은 타오르는 등불과도 같은 부처님으로서 석존이전의 과거세에 존재했던 二十四佛 중의 한사람 이었다.

 

연등불의 이야기는 불교설화문학에 속한다.

석가모니는 전생에 있어서 수메다”(Sumedha)라는 고행자였다. 이 고행자는 당대의 부처님이었던 연등불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연등불이 지나갈 도로가 수선하는 바람에 아주 질펀하게 더러운 물이 고여 있었다. 그래서 수메다는 그곳에 몸을 뉘어 연등부처님이 몸을 밟고 지나가시도록했다. 그리고 일곱자루의 연꽃을 헌화하였다. 그때 연등부처님은 를 내리시는() 것이다 : 그대는 후에 샤캬족의 성자(샤캬무니 = 석가모니)가 되리라.”

 

莊嚴 : 장엄이라는 한문의 동사적 형태는 “...의 건립을 성취한다.” “...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완성한다.”는 의미임.

 

是名莊嚴 : 은 명사가 아니라 이름한다”(to name)는 동사이다. 는 지시대명사로서 앞의 문장 전체를 받는다.

 

莊嚴佛土者卽非莊嚴, 是名莊嚴. :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은 즉 장엄하게 내가 불토를 만들고 있다고 하는 我相이 없을 때 비로소 이것을 장엄하게 한다 라고 표현해 줄 수 있다.

 

라오쯔는 말한다 :

 

길을 길이라 이름하면

그것은 항상 그러한 길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須彌山王 : 중국불교문헌에서는 모든 사물에 자를 붙여 그것을 생명체로서 존중해주는 의미의 접미사로 쓰고 있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산이다, 세계의 제일 아래에는 風輪이 있고, 그 위에 水輪이 있고, 그 위에 金輪(地輪)이 있고(鐵圍山으로 동그랗게 둘러쳐져 있다)., 그 위에 九山八海, 四大州가 있고 그 정 가운데 16萬由旬의 높이로 솟아있는 것이 수미산이다. 그 정상에는 帝釋天의 거소가 있는데 그것이 곧 三十三天忉利天(Trayastrimsa)이다.

鐵圍山 : 수미산을 둘러싼 구산팔해(九山八海)의 아홉 산 가운데 하나. 지변산(地邊山)을 둘러싸고 있으며, 구산 가운데 맨 바깥쪽에 있는 쇠로 된 산이다. 높이와 넓이가 각각 312유순(由旬)이라고 한다.

 

由旬 : 예전에, 인도에서 거리를 재던 단위.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서, 80리인 대유순, 60리인 중유순, 40리인 소유순의 세 가지가 있다.

 

 

11분 함이 없음의 복이여 위대하여라!

 

인도인들의 과장법의 표현과 진실한 내용이 잘 포함되어 있다.

 

 

12분 존중해야 할 바른 가르침

 

塔廟 : 원어는 "짜이띠야 부후따"(caitya-bhuta)는 불교이전부터 묘소의 의미였는데 불교에서는 부처님과 불제자의 유골을 헌납한 곳을 스뚜빠”(stupa, )라 했다.

 

天人阿修羅 : 중생이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하여 생사를 반복하는 여섯 개의 세계인 六道(六趣)중에서 地獄, 餓鬼, 畜生三惡道를 빼고 난 三善導를 가리킨다.

 

阿修羅 : “asura"의 음사이며 혈기가 왕성하고 전투를 좋아하는 귀신의 일종이다.

이 인도의 아수라는 이란 신화에서는 아후라(ahura)로 나타나며, 이 아후라는 데바(devas)와 함께 善神들이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인드라신등의 대두와 더불어 아수라는 데바의 적으로 간주 되었고, 항상 신들에게 싸움을 거는 악마 귀신 등으로 추방되었다. 이란에서는 재미있게 거꾸로 발전되어 데바가 악신으로 격하되어 데몬”(demons) 즉 악마가 되어버리고 아후라는 최고의 신(the supreme God)으로 격상되었다.

 

成就 : 성취는 몸에 구비되어 있다, 달성한다, 완성한다, 충분히 이루다의 뜻임.

 

 

13분 법에 따라 받아 지녀라

 

반야의 사상은 근원적으로 언어의 세계를 부정한다.

 

 

14분 상을 떠나 영원으로

 

實相 ; 眞如와 같이 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을 의미한다.

 

忍辱 : 인욕(ksanti)이란, 대승보살의 수행덕목인 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나에게 주어지는 비난 중상 모략 굴욕등을 참아내어 분노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인욕의 본질은 참는 대상이 없어지고 참는 주체가 사라지는 경지 즉 내가 참고 있다라고 하는 의식마저 해소되어 버리는 경지가 곧 인욕바라밀이다.

 

 

15분 경을 외우는 공덕

 

 

受持讀誦 : 문명사적으로 볼 때는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을 비교할 때, 상대적인 평가이겠지만, 인도는 음악전통이 강하고, 중국은 회화전통이 강하다. 이 금강경을 통하여 계속 나오고 있는 授持라는 말은 받아 지닌다고 그냥 풀었지만 그것은 “dharayati"에 해당하는 말로써, 실제적 의미는 귀로 듣고 기억한다는 뜻이다. ”memorization" 이다. 다시 말해서 가르침을 내 마음속으로 받아들여 간직한다는 것이다.

 

無量百千萬億劫 : 원어는 “bahuni kalpa-koti-nyuta-satasahasrani" . "kalpa"의 음역이며 무한히 긴 시간을 뜻한다. koti十萬, 으로 번역된다. nyuta , 那由他로 번역된다. sata이며 sahasra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백의 천의 십만의 조의 수많은 인데 이것은 인간의 상상을 절하는 무한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 산스크리트 'kalpa'의 음역인 겁파(劫波)의 약칭으로, 장시(長時대시(大時)라 의역된다. 본래 인도에서는 범천(梵天)의 하루, 곧 인간계의 43,200만 년을 1겁이라 한다.

 

不可思議 : 이해가 되기 어려운” “신비로운의 의미로 인간의 언어 개념이 격절되는 세계에 대한 형용이다. “acintya"에 해당하는 불교전문용어임. 인간의 언어가 단절된 無我功德

 

荷擔 : 하담은 걸머멘다는 의미인데 해당되는 원문은 “samamsena bodhim dharayisyanti"로서 자기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我見 : 我相我見으로 바뀌었는데 내가 실체로서 있다고 하는 견해의 뜻.

아견에 집착하게 되면 이 경을 들어 자기 것으로 하지도 못하고 남을 위하여 해설할 수도 없다는 것은 만고의 명언이다.

 

當知此處則爲是塔 : 바로 진리의 말씀이 있는 바로 그곳이 탑이요 십자가요, 모든 사람과 신과 천사가 그 주위를 경배하고 아름다운 꽃의 향기로서 聖化하리라!

 

供養 : 공양이란 말은 “puja"의 역어인데 그 원의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대접한다는 뜻

 

 

16분 더러운 업을 항상 깨끗이

 

阿僧祈 : 아승기는 “asamkhya"(아삼캬)의 음역이며, 그 뜻은 셀 수 없음의 의미다. 1059승 혹은 56승으로 알려져 있다.

 

那由他 : 나유타는 1,000억에 해당하는 매우 큰 수량 단위

 

當知是經義不可思議, 果報亦不可思議.

모든 신비주의는 (God)이라는 언어를 넘어서 神聖(Godhead) 그 자체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나 개인의 영혼과 신과의 合一을 추구한다. 그러나 구극에 있어서는 이러한 신과의 합일조차도 거부되는 단절이 드러난다. 신과 나라는 모든 실체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지혜의 신비는 주관과 객관, 주부와 술부의 대립이 해소되는 자리에 서있다. 어떠한 언어도 그 자리에 진입할 수 없다.

 

狐疑 : 의는 의심이 깊어 결심이 서지 않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우가 초봄에 언 강물을 건너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모습에서 그 뜻이 유래되었다.

 

 

17분 지혜의 궁극은 나가 없음

 

석가모니(Sukya-muni)라 할 때 석가는 싣달타가 속한 종족의 이름이다. 모니는 영감을 얻은자” “예언자” “고행자” “성자의 뜻이다.

 

깨달음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내가 참된 기독교인이요 네가 사탄이라는 생각도 없다. 사탄도 껴안으면 곧 천사요, 천사도 껴안으면 곧 사탄이라! 진실한 如如와 허망한 迷惑이라는 생각, 그것이 없는 자리가 곧 여래의 무상정등각이다. 悟迷不二!

일체의 존재()는 곧 깨달음의 존재다. 일체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覺者, 붓다인 것이다. 풀 한포기에서 성자의 모습을 보라! 꽃 한송이에서 예수의 모습을 보라!

 

通達無我法者 : 산스크리트 원문은 “niratmano dharma"이다. 불교의 종지는 無我, 대승의 종착은 無我, 보살의 종국은 無我.

 

 

18 분 모든 것을 한몸으로 보아라

 

우리가 본다고 하는 전체적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라는 총체적 과정인 것이다.

 

천안은 Heavenly eye 즉 신의 눈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혜안은 지혜의 눈이다. 법안은 현상계의 형체를 넘어서 다르마() 그 자체를 직시하는 눈일 것이요 불안은 모든 존재의 구분이 사라진 如如의 눈일 것이다.

 

佛世界 : 불세계는 불안으로 보는 세계일 것이다.

 

若干種 ; 온갖 종류의라고 번역

 

如來說諸心 : 여기서 말하는 심이란 원어는 “citta dhara"인데 이것은 실로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을 뜻한다. 과거의 경험에 기초한 의식 및 무의식이 현재 미래로 흘러가면서 우리의 의식작용이나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는 의미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20분 색을 떠나시오, 상을 떠나시오

 

色身 : 색신의 산스크리트 원문은(rupa-kaya)이다. 루빠는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할 때 의 바로 그 색이다. 구체적인 형체를 가진 것을 뜻한다. 즉 공간을 점유하는 것.

 

具足 : 구족한다는 것은 단정한 모습을 구비하고 있다. 비구 비구니들이 입단과정에서 거치는 완전한 계율을 具足戒라고 하는데 이것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온전한 계율이라는 뜻이다.

 

뭇상은 32상을 류의 색신을 형용한 말이다.

 

 

21분 설하는 자도 없고 설 되어지는 자도 없다

 

A가 곧 B라는 것은 A라는 주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길이라 하는 것은 나의 無化 無我를 의미하는 것이다.

 

慧命須菩堤 : 혜명이라 한 것은 산스크리트어 “ayusmat"인데, 이것은 長老에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누구든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이와같이 생각했다고 말하지 말라. 만약 어떤 이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면 그는 곧 나 예수를 비방하는 자라. 나는 길이 아니요, 진리가 아니요,생명이 아니라.그러므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말하지 않았다.자신이 곧 길 진리 생명이었다. 이제는 예수는 사라지고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곧 금강경이 설하는 "무아" 인 것이다.이것이 곧 요한복음의 로고스 사상인 것이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 저는 진리의 영이라.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 하심이요,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22분 얻을 법이 없어라

 

 

23분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시오

 

 

24분 복덕과 지혜는 비교될 수 없다

 

 

25분 교화는 교화하는 바가 없다

 

汝等勿爲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 이것은 나의 실존적 독백인 것이다.

여등물위여래작시념, 아당도중생. , 아상의 단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책임일 뿐인 것이다.

 

범부라는 표현은 어리석은 일반인들의 뜻인데 원문은 “bala-prthag-janab”이다 직역하면 하나 하나씩 따로 따로 태어난 자이것이 복수형이 되면 愚者” “群衆의 뜻이 된다.

 

 

26분 법신은 모습이 없다

 

如是如是. 以三十二相觀如來 : 여기 수보리의 대답이 우리의 상식적 기대를 벗어나 있다. 이것이 方便설법인 것이다. 수보리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같이 듯는 뭇 중생들을 위하여 자신을 낮춘 것이다.

 

轉輪聖王 : 전륜성왕이란 “cakravarti-raja” 인데 바퀴를 돌리는 왕이란 뜻이다. 여기서 바퀴라는 것은 인도 고대의 성왕이 가지고 있었던 무기를 상징화하는 것으로, 적진에 자유자재로 굴러다니면서 적을 분쇄하는 무기인 것이다. 흔히 불교에서 법륜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을 이렇게 우리의 무명을 쳐부수는 바퀴로 상징한데서 생겨난 말인 것이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어느 성당에 마리아가 피흘린다고 쫓아가고, 어느 절간에 부처님상이 땀흘린다고 달려가는 추태를 생각할 때, 이 금강경의 지혜는 그 얼마나 많은 인류사의 종교미신을 단절 시킬 수 있는 신령스러운 말씀으로 가득 차있는가?

 

 

27분 끊음도 없고 멸함도 없나니

 

본 절의 뜻은 온전한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무상정등각을 얻은 것은 아니다라는 그 부정을 또 다시 부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온전한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무상정등각을 얻은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은 이미 고도의 自覺이다. 그러나 그 고도의 자각 “...이 아니다라는 자각 자체가 해소 되어야만 비로소 무상정등각이 드러나는 것이다.

百尺竿頭 須進一步!

 

나의 마음을 斷滅한다고 했을 때, 단멸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마음은 단멸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 의식이 더욱 깊어지고 강렬해지게 마련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인간존재의 가장 심연의 파라독스다.

 

 

 

28 받을 생각도 말고 탐하지도 말라

 

得成於忍 : 득성어인은 인을 얻어 이룬다는 뜻이다.

 

菩薩所作福德, 不應貪着. 是故說不受福德 : "功成而佛居"의 위대한 표현일 것이다.

 

 

29분 위엄있는 그 모습 고요하기도 하다

 

여래자,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 우리의 인생이여!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아름다운 삶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어찌 창조와 종말을 운운하랴!

 

 

30분 모이나 흩어지나 한 모습

 

이란 매크로(거시)의 세계다. 란 마이크로(미시)의 세계이다. 우리가 보통 인식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합의 세계이다. 거시적인 세계는 항상 마야 즉 의 가능성으로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사물을 미시적으로 분석하기를 좋아한다.

인식론적 반성이 없이는 마이크로의 세계를 논구할 수가 없다.

 

기독교는 종교적 진리에 관한한, 인식론을 거부한다. 예수가 죽었다 살아났다.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기독교가 인식론을 거부하기 때문에 인식론이 기독교 서구라파 문명 전통에서는 과학이나 철학의 분야로 독립되었다.

 

불교에서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심오성인 동시에 그 한계인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인식론이 종교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이 발달되었고, 불교 전통에서는 그것이 合一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의 발전이 저해된 그러한 아이러니를 인류 역사는 露呈시킨 것이다.

 

미진중은 단순히 미진의 복수형으로 보야야한다.

 

若世界實有者相, 則是一合 :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큰 전체상일 것이오이다.

붓다는 우리가 합의 문제로 사유를 틀면, 곧 세계 그 자체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속에 티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티끌의 의 궁극은 세계 그 자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cosmos)이다.

 

一合相者, 則是不可說.(일합상자, 즉시불가설.) :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 그것이 곧 우주요 인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지어다.

 

 

31분 앎을 갖지 말지어다

 

 

32분 색신은 모습이 없어라

 

應化非眞 : 응화비진은 응신과 화신을 가리킨다. 이 모두 색신의 異名이다.

 

演說 : “연하여 설한다는 뜻으로 이란 물이 흐르는 대로 그 물가를 따라서 자세히의 뜻이 있다.

 

노자의 말에 이런 말이 있다.

 

慹大象! 天下往.

모습없는 큰 모습을 잡아라!

천하가 스스로 간다.

 

진언이란 나의 육신의 발성기관의 진동이 아닌 우주의 소리요 신의 소리인 것이다.

 

나모 : 존엄하신 지혜의 완성의 여신(Bhagavate Prajnaparamitaye) 에게 경배(귀의)하는 인사의 말이다. “지혜의 완성이 여성명사화 되어 신격화 되고 있다.

 

스바하 : 기독교의 아멘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행복이 깃들기를” “축복이 있기를의미. 인도에 가면 사람들이 성스러운 곳에 향을 뿌리면서 스바하를 외친다.

 

: 은 우주의 소리로 “AUM"을 표기한 것이다. A는 소리의 시작, U는 지속이며, M은 끝이다. 이는 우주의 탄생과 지속과 소멸을 다 함축하는 진언인 것이다.

 

금강경은 논리의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찬가요, 해탈의 노래다. 그 노래가 이 진언 속에 다 함축되어 있다. 진언을 말할 때는 반드시 리드믹한 노래로 불러야 한다. 장음과 단음, 억양의 고하의 묘합을 살려!

 

나모바가바떼 쁘라갸 빠라미따예

옴 이리띠 이실리 슈로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이것으로 나의 강해가 끝난다.

 

    

 

우리말

금강반야바라밀경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강해

 

    

    

1분 법회의 말미암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기수급 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계시었다.

 

이 때에, 세존께서는 밥 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빌으셨다.

 

그 성 안에서 차례로 빌으심을 마치시고,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시어, 밥 자심을 마치시었다.

 

옷과 바리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심을 마치시고 자리를 펴서 앉으시거늘.

 

 

2분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

 

이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웃 옷을 한편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들어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손을 모아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희유하신 세존이시어 ! 여래께서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하여 주십니다.

 

세존 !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 “ 좋다! 좋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 바대로, 여래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해준다. 너 이제 자세히 들어라 !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고자 원하오니이다.”

 

 

3분 대승의 바른 종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뭇 보살 마하살들이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어다 :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 모태에서 태어난 것, 물에서 태어난 것,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 지각이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이것들을 내가 다 남김없는 온전한 열반으로 들게하여 멸도하리라.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 없는 중생을 내 멸도 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어째서 그러한가 ? 수보리야 !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4분 아름다운 행동은 집착이 없다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 보살은 법에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고,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는 것이다. 수보리야 !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 한다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리라.

 

수보리야 ! 네 뜻은 어떠하뇨? 동쪽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

 

수보리야 ! 남 서 북 방과 사유 상하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

 

수보리야 !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 보살은 오직 가르친 바 대로 머물지니라.“

 

 

5분 진리대로 참 모습을 보라

 

수보리야 ! 네 뜻에 어떠하뇨?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이르신 몸의 형상이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6분 바른 믿음은 드물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 “세존이시여 ! 퍽으나 많은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그런 말 하지마라, 여래가 멸한 뒤 후오백세에도 계율을 지키며 복을 닦는 사람이 있어, 이 글귀에 잘 믿는 마음을 낼 것이며, 이를 진실한 것으로 삼으리라.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한 부처, 두 부처, 서너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자리에 온갖 선근을 심었음으로, 이 글귀를 듣는 즉시 오직 일념으로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라는 것을.

 

수보리야 !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뭇 중생들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수밖에 없으리라.

 

어째서 그러한가? 이 뭇 중생들은, 다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을 것이며, 법의 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법의 상이 없다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무릇 중생들이 만약 그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달라붙게 되는 것이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 만약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법 아님도 취하지 말 것이다.

 

이러한 뜻의 까닭으로, 여래는 항상 말하였다 :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

 

 

7분 얻을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

 

수보리야 ! 내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과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인가? 여래가 설한 바의 법이 과연 있는 것인가 ?”

 

수보리가 사뢰었다 :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할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실 만한 정해진 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며,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오니이까? 일체의 성현들은 모두 함이 없는 법으로 이루어져 범인들과 차별이 있기 때문이오이다.“

 

 

8분 법에 의해 다시 태어나라

 

수보리야! 내 뜻에 어떠하뇨? 만약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많다 하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복덕은 곧 복덕의 본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오이다. 그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오이다.”

 

만약 또한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곧 이 경중에서 사구게라도 하나 타인을 위하여 설파하는데 이른다면, 이 사람의 복이 칠보공덕의 복을 뛰어 넘으리라.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일체의 모든 부처님,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

 

 

9분 어느 한 상도 상이 아니어라.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까? 수다원을 이름하여 들어간 자라 하지만, 그는 들어감이 없습니다. 그는 형체에도, 소리에도, 내음새에도, 맛에도, 만져지는 것에도, 마음의 대상에도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에 수다원이라 이름 할 수 있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까? 사다함을 이름하여 한번 왔다 갔다 할 자라 하지만, 그는 실재로 왔다 갔다 함이 없기 때문에 바로 사다함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까? 아나함을 이름하여 이제 다시 아니올 자라 하지만, 그는 실재로 온다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아나함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까? 실제로 아라한이라 이름할 수 있는 법이 도무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삼매의 사람 중에서 가장 으뜸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니,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 라는 이 같은 생각을 짓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라는 생각을 했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야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기는 자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실제로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곧 수보리야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10분 깨끗한 땅을 장엄케 하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옛날에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있지 아니하냐?”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법에 얻은 바가 실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말이 되느냐? 아니 되느냐?”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어! 어째서이오니까?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하는 것은 장엄하게 함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장엄하다 이름하는 것이오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뭇 보살과 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그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또한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 그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다. 반드시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수보리야! 비유컨대, 그 몸이 수미산처럼 큰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몸이 크다 할 것이냐? 크지 않다 할 것이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큽니다. 세존이시어!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부처님께서 그 몸은 몸이 아니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비로소 큰 몸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11분 함이 없음의 복이여 위대하여라!

 

수보리야!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갠지스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갠지스 강들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 하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참으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모든 갠지스 강만이라도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거늘 , 하물며 그 모래 수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 지금 너에게 진실한 말로 이르노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여기 있어, 칠보로서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를 채워 보시 한다고 한다면,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등을 받아 지니게 되어, 그것을 딴사람에게 잘 설명해 준다면, 이 복덕은 앞서 칠보의 복덕보다 더 크리라.”

 

 

12분 존중해야 할 바른 가르침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어디서나 이경을 설하되, 사구게 하나라도 설하는데 이른다면, 마땅히 알라, 바로 그곳이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모두 기꺼이 공양하는 부처님의 탑묘와도 같은 곳이 되리라는 것을, 하물며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 전체를 수지하고 독송함에 있어서랴!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은 최상이며 제일인 희유의 법을 성취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부처님과 그의 존경스러운 제자들이 계신 곳이 된다는 것을.“

 

 

13분 법에 따라 받아 지녀라

 

이 때에,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마땅히 무어라 이름하오며, 우리들은 어떻게 이 경을 받들어 지녀야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이 경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라. 이 이름으로써 그대는 이를 마땅히 받들어 지닐지라.”

 

그 까닭이 무었이뇨?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내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설한 법이 과연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티끌이 많다 하겠느뇨?”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티끌을 여래는 설하기를, 티끌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비로소 티끌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여래는 이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고 설파한다. 그래서 비로소 세계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뇨?”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나이다. 어째서 그러하오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삼십이상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이다.”

 

수보리야! 만약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갠지스강의 모래수와 같은 많은 목숨을 다 바쳐 보시를 했다하더라도, 또한 다시 여기 한사람이 있어 이 경 중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지녀 딴 사람에게 설하였다 한다면 이 사람의 복이 더 많으리라.“

 

 

14분 상을 떠나 영원으로

 

이 때에,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 의취를 깊게 깨달아 눈물흘려 흐느끼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정말 드문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깊고 깊은 경전을 설하신다는 것은! 저는 예로부터 얻은 바의 혜안으로도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여기 다시 한사람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그 믿는 마음이 깨끗하면 곧 참된 모습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야 말로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임을 알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참된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곧 어떤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참된 모습이라 이름할 수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깨닫고 이를 받아지니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없지만, 만약 먼 훗날 후 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어 깨달아 이를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하겠나이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이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오니이까?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따라서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난 자를 곧 이름하여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그렇다! 그렇다!

 

만약 또 한사람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놀라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이야 말로 심히 희유의 사람이라는 것을.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여래는 설하였다, 제일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니라고. 그래서 비로소 제일바라밀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은 여래가 설하기를,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그것은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버힘을 당한 것과도 같다. 나는 그때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다. 어째서인가? 그 옛날에 마디마디 잘림을 당했던 그 때에, 내가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나는 분명코 분노와 미움을 냈으리라.

 

수보리야! 나는 또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던 것을 또렷이 기억하노니, 그때의 세상에서도 나는 아상도 없었고, 인상도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할 지어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 지어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그 마음을 낼 지어다.

 

만약 그 마음이 머무는 바가 있다면, 그 머뭄이 머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항상 보살이라면 그 마음이 색에 머뭄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케하기 위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하느니라.

 

여래는 설하였다. 일체의 뭇 상들이 곧 상이 아니라고. 여래는 또 설하였다. 일체의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고.

 

수보리야! 여래는 참말을 하는 자며, 살아 있는 말을 하는 자며, 있는 그대로 말하는 자며, 허황된 말을 하지 않는 자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다. 수보리야! 여래가 깨달은 바의 법, 그 법은 실하지도 허하지도 아니하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캄캄한 어둠속에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눈이 또렷하고 찬란한 햇빛이 온갖 형체를 비추고 있는 것과도 같다.

 

수보리야! 앞으로 오는 세상에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열심히 읽고 외우면, 여래는 깨달은 자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나니, 이 모든 이들이 헤아릴 수 없고, 가 없는 공덕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15분 경을 외우는 공덕

 

수보리야! 여기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아침나절에 갠지스강의 모래수 만큼의 몸을 바쳐 보시하고 ,또 점심나절에 갠지스강의 모래수만큼의 몸을 바쳐 보시하고 , 다시 또 저녁때 갠지스강의 모래수만큼의 몸을 바쳐 보시한다 하자! 그리고 또 이와 같이 매일 매일 백천만억겁의 시간동안을 몸 바쳐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우러나와 거슬리지 않는다면, 바로 이 사람의 복이 저 사람의 복을 이기리니. 하물며 이 경을 베껴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남에게 해설해주는 사람에 있어서랴!

 

수보리야! 요약하여 말하건데, 이 경은 가히 생각할 수도 없고 가히 헤아릴 수도 없는 공덕을 지니고 있으니, 여래는 이를 큰 수레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설하고, 가장 좋은 수레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설하느니라.

 

여기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나니,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잴 수 없고 가없는 불가사의 공덕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은 사람들은 여래가 깨달은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스스로 깨닫게 되리라.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작은 법에 만족하는 자들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게 되므로, 이 경을 들어 자기 것으로 하지도 못하고, 읽고 외워 남을 위하여 해설하지도 못하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어느 곳에든지 이 경이 있게 되면 바로 그곳이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기꺼이 공양하는 곳이라. 마땅히 알지라! 이 곳이 곧 탑이라는 것을! 모두가 기꺼이 공양하는 마음으로 절을 드리고 주위를 돌면서 온갖 꽃의 향기로서 그곳에 흩으리라.”

 

 

16분 더러운 업을 항상 깨끗이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울 때에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경시당하고 핍박을 받는 다면 이는 전생에 지은, 지옥에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이 사람을 경시하고 핍박하기 때문에 곧 전생의 죄업이 소멸할 것이요, 그래서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내 돌이켜 생각해 보니, 과거의 헤아릴 수도 없는 아승기의 겁의 기나긴 시간 동안에, 연등부처님을 뵈옵기 전에도 이미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많은 부처님을 뵈올 수 있었고, 또 이분들을 공양하고 섬김에 조금도 헛된 세월이 없었어라.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어,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잘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공덕을 쌓는다면, 그 공덕은 내가 과거세에서 그 많은 부처님을 공양했던 그런 공덕이 그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뿐아니라, 천만억분의 일내지 어떠한 숫자의 비유로도 그에 미치지 못하리라.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법이 쇠퇴한 먼 훗날에도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외울지니, 그 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공덕을 내가 만약 자세히 다 말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마음이 미쳐 흐트러지거나, 반신반의하여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라! 이 경의 뜻은 불가사의하며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 하다는 것을!”

 

 

17분 지혜의 궁극은 나가 없음

 

이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어떻게 마땅히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선남자 선여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자는 반드시 이와 같은 마음을 낼 지어다: ‘나는 일체의 중생을 멸도한다 하였으나 일체중생을 다 멸도하고 보니 실로 멸도를 한 중생이 아무도 없었다라고.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었이뇨?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다고 하는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느냐? 있지 아니하였느냐?”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따로 있지 아니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도무지 있지 아니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있다고 한다면,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훌륭한 부처가 되리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진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훌륭한 부처가 되리라고 이런 귀한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먂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야! 실로 깨달은 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그러한 법이 있지 아니한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깨달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바로 그 속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나니, 그러므로 여래는 설하기를, 일체의 법이 모두 부처님 법일 뿐이라 한 것이다.

 

 

수보이야! 내가 말한 바 일체의 법이라 하는 것도 곧 일체의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장대한 것과도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그 장대한 몸이 장대한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장대한 몸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보살 또한 이와 같다. 보살이 만약 나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을 멸도하리라하고 이와 같은 말을 지었다하면 그를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으리라. 어째서 그런한가? 수보리야! 진실로 이름하여 보살이라 할 수 있는 법이 있지 아니하기 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말하느니라, 일체의 법이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라고.”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는 반드시 불토를 장엄케 하리라고 이런 말을 짓는다면, 그를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불토를 장엄케 한다고 말한 것은 즉 장엄케 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장엄케 한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면, 여래는 비로소 그를 참으로 보살이라 이름할 수 있다 설하느니라.”

 

 

18 분 모든 것을 한몸으로 보아라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육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천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혜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법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불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저 갠지스강에 있는 저 모래를 부처가 말한 적이 있느냐?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를 말하신 적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하나의 갠지스강에 있는 모든 모래, 그 만큼의 갠지스 강이 있고, 이 갠지스강들에 가득찬 모래수만큼의 부처세계가 있다면, 이는 많다고 하겠느냐? 많지 않다고 하겠느냐?” “너무도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 많은 부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설한 갖가지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로소 마음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19분 모든 법계를 다 교화하시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차는 칠보로서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이연으로 얻은 복이 많다 하겠느냐? 많지 않다 하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은 복은 정말 많습니다.”

 

수보리야! 복덕이라고 하는 실제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여래는 결코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설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복덕이 없는 까닭에 여래는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설한 것이다.”

 

 

20분 색을 떠나시오, 상을 떠나시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부처가 색신을 구족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색신을 구족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아니됩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색신을 구족했다 하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셨기 때문이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색신을 구족했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뭇 상을 구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뭇 상을 구족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아니됩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뭇 상이 구족 되었다 하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셨기 때문이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뭇 상이 구족되었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이다.”

 

 

21분 설하는 자도 없고 설 되어지는 자도 없다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할 법을 가지고 있노라, 이 같은 생각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이 같은 생각을 지어서는 아니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자라. 내가 설한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 수보리야! 법을 설한 다해도, 설할 법이 아무것도 없나니, 그래서 비로소 법을 설한다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에, 혜명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퍽으나 많은 중생들이 미래의 세상에서 이 법이 설하여지는 것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그들을 중생이라고 해서도 아니 되고 중생이 아니라 해서도 아니 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하는 것은 곧 중생이 중생이 아님을 여래가 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중생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22분 얻을 법이 없어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심은 곧 얻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오니이까?”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에, 조그만큼의 법이라도 얻은 바가 있지 아니함에 이르렀음으로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23분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시오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있지 아니하니, 그래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 것이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는 것으로써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라 하는 것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하였으니 이를 이름하여 선한 법이라 한 것이다.”

 

 

24분 복덕과 지혜는 비교될 수 없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들만큼 쌓인 칠보더미를 가져다가 보시를 한다 해도, 또 어떤 이가 있어 반야바라밀경 내지 그 사구게 하나를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타인에게 설한다면, 앞의 칠보복덕은 이에 백분에 일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백천만억분의 일 내지 어떠한 숫자의 비유로도 이에 미치지 못하리라.”

 

 

25분 교화는 교화하는 바가 없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너희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이 같은 생각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이 같은 생각을 지어서는 아니 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실로 여래가 제도가 중생이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여래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지고 있음이라.

 

수보리야! 여래가 내가 있다고 한 것은 곧 내가 있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내가 있다고 한 것에만 집착한다. 수보리야! 그러나 여래는 말한다, 범부라는 것도 범부가 아니라고.“

 

 

26분 법신은 모습이 없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뇨?”

 

수보리가 사뢰어 말하였다: “그러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만약 네 말대로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해야 될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제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깨달아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알겠나이다.”

 

이 때에, 세존께서는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시었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나를 보지 못하리라.”

 

 

27분 끊음도 없고 멸함도 없나니

 

수보리야! 네가 만약 여래가 상을 구족한 까닭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라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수보리야 간곡히 부탁하노니, 이와 같은 생각을 짓지말라, 여래가 상을 구족한 까닭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라고.

 

수보리야! 너는 혹시 이와 같이 생각할 할지도 모르겠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자는 모든 법을 단멸해 버린 상을 설한다고.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을 짓지 말라. 어째서 그러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는 자는 법에 있어 단멸한다고 하는 상을 설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28 받을 생각도 말고 탐하지도 말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의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서 보시한다고 하자, 또 어떤 사람이 있어 일체의 법이 아가 없음을 알고, 인을 얻어 이루면, 이 보살의 공덕이 앞의 보살이 얻은 바의 공덕을 뛰어 넘으리라.

 

수보리야! 뭇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나이까?” “수보리야! 보살은 자기가 지은 복덕에 탐하여 집착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한 까닭으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9분 위엄있는 그 모습 고요하기도 하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를 일컬어, 오는듯 가는듯, 앉는듯 눕는듯 하다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래서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30분 모이나 흩어지나 한 모습

 

수보리야! 만약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힘껏 부셔 티끌로 만든다면, 네 뜻에 어떠하뇨, 그 티끌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이오니까? 만약 그 티끌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티끌들이라 설하디 아니하셨을 것이오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오니이까? 부처님께서 설하신 티끌들이란 티끌들이 아니기 때문이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티끌들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이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오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이름하오이다. 어째서이오니까?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큰 전체상일 것이오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의 큰 전체상은 큰 전체상이 아니오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큰 전체상이라 이름하오이다.“

 

수보리야! 하나의 큰 전체상이라 하는 것은 곧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범용한 사람들이 그것에 탐착할 뿐이다.”

 

 

31분 앎을 갖지 말지어다

 

수보리야! 누가 부처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설했다고 말했다면,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이 사람이 내가 설한 바의 뜻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느냐?”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나이다. 어째서 그러하오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곧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이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사람은 일체의 법에서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깨달을 지니, 마음에 법의 상을 짓지 말라. 수보리야! 말한 바의 법의 상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는 곧 말하였다. 법의 상이 아니라고. 그래서 우리는 법의 상이라 이름하는 것 뿐이니라.”

 

 

32분 색신은 모습이 없어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수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져다가 보시를 한다 해도,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보살의 마음을 발하고, 이 경 내지 사구게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워,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한다면, 이 복이 저 칠보의 복을 뛰어 넘으리라.

 

그리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한단 말인가? 상을 취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 움직이지 말라.

 

어째서 그러한가?

모든 지은법이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네.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아라.

그대들이여

이 같이 볼지니.”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심을 마치시었다. 장로 수보리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비구와 비구니와 우바색과 우바이, 그리고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믿고 받아들이고, 받들어 행하더라.

 

 

진언

 

나모바가바떼 쁘라갸 빠라미따예

옴 이리띠 이실리 슈로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금강반야바라밀경

金剛般若波羅密經

 

 

요진천축삼장구마라집역

姚秦天竺三藏鳩摩羅什譯

무술세고려국대장도감봉자조조

戊戌歲高麗國大藏都監奉刺彫造

한역 :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강해

 

 

法會因由分 第一

1분 법회의 말미암음

 

여시아문. 일시, 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계시었다.

 

이시, 세존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걸식

爾時, 世尊食時, 著衣持鉢 入舍衛大城乞食

이 때에, 세존께서는 밥 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빌으셨다.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사흘.

於其城中, 次第乞已, 環至本處, 飯食訖.

그 성 안에서 차례로 빌으심을 마치시고,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시어, 밥 자심을 마치시었다.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옷과 바리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심을 마치시고, 자리를 펴서 앉으시거늘.

 

 

善現起請分 第二

2분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

 

시 장로수보리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 이백불언:

時 長老須菩堤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著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이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웃 옷을 한편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들어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손을 모아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희유세존! 여래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희유하신 세존이시어! 여래께서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하여 주십니다.

 

세존! 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세존 !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

 

불언: “선재! 선재! 수보리! 여여소설, 여래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佛言: “善哉! 善哉! 須菩堤! 如汝所說,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여금제청! 당위여설, 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여시주

汝今諦聽! 當爲如說,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여시항복기심.“

如是降伏其心.“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 “ 좋다! 좋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 바대로, 여래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해준다. 너 이제 자세히 들어라 !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유연세존! 원요욕문.”

唯然世尊! 願樂欲聞.”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고자 원하오니이다.”

 

대승정종분 제삼

大乘正宗分 第三

3분 대승의 바른 종지

 

불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佛告須菩堤: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뭇 보살 마하살들이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 지어다 :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약태생, 약습생약화생, 약유색약무색, 약유상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若胎生, 若濕生若化生, 若有色若無色, 若有想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아개영입, 무여열반, 이멸도지.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度之.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 모태에서 태어난 것, 물에서 태어난 것,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 지각이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이것들을 내가 다 남김 없는 온전한 열반으로 들게 하여 멸도하리라.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 득멸도자.“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 없는 중생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何以故? 須菩堤!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어째서 그러한가 ? 수보리야 !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묘행무주분 제사

妙行無住分 第四

4분 아름다운 행동은 집착이 없다

 

부차수보리! 보살어법응무소주, 행어보시.

復次須菩堤! 菩薩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 보살은 법에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응여시보시, 부주어상.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堤! 菩薩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고,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는 것이다. 수보리야 !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하이고? 약보살부주상보시, 기복덕불가사량.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 한다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리라.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堤! 於意云何? 東方虛空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야 ! 네 뜻은 어떠하뇨? 동쪽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

 

수보리! 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堤!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야 ! 남 서 북 방과 사유 상 하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

 

수보리! 보살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불가사량.

須菩堤! 菩薩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不可思量.

수보리야 !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 보살단응여소교주

須菩堤! 菩薩但應如所敎住

수보리야 ! 보살은 오직 가르친 바대로 머물지니라.“

 

 

여리실견분 제오

如理實見分 第五

5분 진리대로 참 모습을 보라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견여래부?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身相見如來不?

수보리야 ! 네 뜻에 어떠하뇨?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불야, 세존! 불가이신상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이르신 몸의 형상이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고수보리: “범소유상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佛告須菩堤: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정신희유분 제육

正信希有分 第六

6분 바른 믿음은 드물다

 

수보리백불언: “세존! 파유중생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부?”

須菩堤白佛言: “世尊! 頗有衆生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 “세존이시여 ! 퍽으나 많은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불고수보리: “막작시설! 여래멸후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장구능생신심,

佛告須菩堤: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能生信心,

이차위실

以此爲實.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그런 말 하지마라, 여래가 멸한 뒤 후오백세에도 계율을 지키며 복을 닦는 사람이 있어, 이 글귀에 잘 믿는 마음을 낼 것이며, 이를 진실한 것으로 삼으리라.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이종선근, 이어무량천만불소종제선근,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種諸善根,

문시장구내지일념생정신자.

聞是章句乃至一念生淨信者.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한 부처, 두 부처, 서너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자리에 온갖 선근을 심었음으로, 이 글귀를 듣는 즉시 오직 일념으로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라는 것을.

 

수보리! 여래실지실견, 시제중생득여시무량복덕.

須菩堤!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야 !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뭇 중생들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수밖에

없으리라.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무법상역무비법상.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亦無非法相.

어째서 그러한가? 이 뭇 중생들은, 다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을 것이며, 법의 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법의 상이 없다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중생수자,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著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著我人衆生壽

.

.

어째서 그러한가? 이 무릇 중생들이 만약 그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달라붙게 되는 것이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시고불응취법, 불응취비법.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어째서 그러한가 ? 만약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법 아님도 취하지 말 것이다.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以是義故, 如來常設,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러한 뜻의 까닭으로, 여래는 항상 말하였다 :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

 

 

무득무설분 제칠

無得無說分 第七

7분 얻을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유소설법야.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수보리야 ! 내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과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인가? 여래가 설한 바의 법이 과연 있는 것인가 ?”

 

수보리언: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무유정법여래

須菩堤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

가설.

可說.

수보리가 사뢰었다 : “제가 부처님 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할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실 만한 정해진 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불가설, 비법비비법.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不可說, 非法非非法.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며,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그 까닭은 무엇이오니이까? 일체의 성현들은 모두 함이 없는 법으로 이루어져 범인들과 차별이 있기 때문이오이다.“

 

의법출생분 제팔

依法出生分 第八

8분 법에 의해 다시 태어나라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소득복덕영위다부?”

須菩堤!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寧爲多不?”

수보리야! 내 뜻에 어떠하뇨? 만약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많다 하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겠느냐?”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즉비복덕성. 시고여래설복덕다.”

須菩堤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복덕은 곧 복덕의 본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오이다. 그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오이다.”

 

약부유인, 어차경중, 수지내지사구게등위타인설, 기복승피.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爲他人說, 其福勝彼.

만약 또한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곧 이 경중에서 사구게라도 하나 타인을 위하여 설파하는데 이른다면, 이 사람의 복이 칠보공덕의 복을 뛰어 넘으리라.

 

하이고? 수보리! 일체제불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출.

何以故? 須菩堤! 一切諸佛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皆從此經出.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일체의 모든 부처님,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須菩堤!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

 

일상무상분 제구

一相無相分 第九

9분 어느 한 상도 상이 아니어라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須菩堤! 於意云何? 須陀洹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수다원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시명수다원

是名須陀洹

수보리가 사뢰었다 :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까? 수다원을 이름하여 들어간 자라 하지만, 그는 들어감이 없습니다. 그는 형체에도, 소리에도, 내음새에도, 맛에도, 만져지는 것에도, 마음의 대상에도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에 수다원이라 이름 할 수 있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사다함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

須菩堤! 於意云何? 斯陀含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사다함명일왕래.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수보리가 사뢰었다 :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까? 사다함을 이름하여 한번 왔다 갔다 할 자라 하지만, 그는 실재로 왔다 갔다 함이 없기 때문에 바로 사다함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부?”

須菩堤! 於意云何? 阿那含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명위불래, 이실무불래, 시고명아나함.”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名阿那含.”

수보리가 사뢰었다 :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까? 아나함을 이름하여 이제 다시 아니올 자라 하지만, 그는 실재로 온다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아나함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아라한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부?”

須菩堤! 於意云何? 阿羅漢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실무유법명아라한, 세존! 약아라한작시념,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作是念

아득아라한도, 즉위착아인중생수자.

我得阿羅漢道, 卽爲著我人衆生壽者.

수보리가 사뢰었다 :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까? 실제로 아라한이라 이름할 수 있는 법이 도무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존! 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 최위제일, 시제일이욕아라한. 아부작시념,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我不作是念

아시이욕아라한.

我是離欲阿羅漢.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삼매의 사람 중에서 가장 으뜸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니,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 라는 이 같은 생각을 짓지 않습니다.

 

세존! 아약작시념아득아라한도, 세존즉불설수보리시요아란나행자.

世尊! 我若作是念我得阿羅漢道, 世尊則不說須菩堤是樂阿蘭那行者.

이수보리실무소행, 이명수보리시요아란나행.“

以須菩堤實無所行, 而名須菩堤是樂阿蘭那行.“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라는 생각을 했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야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기는 자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실제로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곧 수보리야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장엄정토분 제십

莊嚴淨土分 第十

10분 깨끗한 땅을 장엄케 하라

 

불고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득부?

佛告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昔在燃燈佛所, 於法有所得不?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옛날에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있지 아니하야?”

 

불야. 세존! 여래재연등불소, 어법실무소득.”

不也. 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實無所得.”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법에 얻은 바가 실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장엄불토부?”

須菩堤! 於意云何? 菩薩莊嚴佛土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말이 되느냐? 아니 되느냐?”

 

불야. 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즉비장엄, 시명장엄.”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卽非莊嚴, 是名莊嚴.”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어! 어째서이오니까?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하는 것은 장엄하게 함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장엄하다 이름하는 것이오이다.”

 

시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

是故須菩堤! 諸菩薩摩訶薩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

생심. 응무소주이생기심.

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

그러므로, 수보리야! 뭇 보살과 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그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또한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 그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다. 반드시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수보리! 비여유인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부?“

須菩堤! 譬如有人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수보리야! 비유컨대, 그 몸이 수미산처럼 큰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몸이 크다 할 것이냐? 크지 않다 할 것이냐?“

 

수보리언: “심대. 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須菩堤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큽니다. 세존이시어!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부처님께서 그 몸은 몸이 아니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비로소 큰 몸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무위복승분 제십일

無爲福勝分 第十一

11분 함이 없음의 복이여 위대하여라!

 

수보리! 여항하중소유사수, 여시사등항하! 어의운하! 시제항하사영위다부?”

須菩堤!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寧爲多不?”

수보리야!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갠지스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갠지스 강들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 하지 않겠느냐?”

 

수보리언: “심다. 세존! 단제항하상다무수, 하황기사?”

須菩堤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尙多無數, 何況其沙?”

수보리가 사뢰었다: “참으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모든 갠지스 강만이라도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거늘 , 하물며 그 모래 수이겠습니까?

 

수보리! 아금실언고여, 약유선남자선여인, 이칠보만이소항하사수,

須菩堤!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

삼천대천세계, 이용보시, 득복다부!“

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多不!“

수보리야! 내 지금 너에게 진실한 말로 이르노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여기 있어, 칠보로서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를 채워 보시 한다고 한다면,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수보리언: “심다. 세존!”

須菩堤言: “甚多. 世尊!”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어차경중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이차복덕,

佛告須菩堤: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而此福德,

승전복덕.“

勝前福德.“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등을 받아 지니게 되어, 그것을 딴사람에게 잘 설명해 준다면, 이 복덕은 앞서 칠보의 복덕보다 더 크리라.”

 

 

존중정교분 제십이

尊重正敎分 第十二

12분 존중해야 할 바른 가르침

 

부차수보리 수설시경내지사구게등, 당지차처, 일체세간천인아수라,

復次須菩堤 隨說是經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

개응공양여불탑묘, 하황유인진능수지독송.

皆應供養如佛塔廟, 何況有人盡能受持讀誦.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어디서나 이 경을 설하되, 사구게 하나라도 설하는데 이른다면, 마땅히 알라, 바로 그곳이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모두 기꺼이 공양하는 부처님의 탑묘와도 같은 곳이 되리라는 것을, 하물며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 전체를 수지하고 독송함에 있어서랴!

 

수보리! 당지시인, 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 약시경전소재지처, 즉위유불약존중제자.“

須菩堤!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所在之處, 則爲有佛若尊重弟子.“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은 최상이며 제일인 희유의 법을 성취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부처님과 그의 존경스러운 제자들이 계신 곳이 된다는 것을.“

 

 

여법수지분 제십삼

如法受持分 第十三

13분 법에 따라 받아 지녀라

 

이시, 수보리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운하봉지?”

爾時, 須菩堤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이 때에,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마땅히 무어라 이름하오며, 우리들은 어떻게 이 경을 받들어 지녀야 하오리까

 

불고수보리: “시경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佛告須菩堤: “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이 경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라. 이 이름으로써 그대는 이를 마땅히 받들어 지닐지라.”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수보리! 어의운하?

所以者何? 須菩堤!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須菩堤! 於意云何?

여래유소설법부?“

如來有所說法不?“

그 까닭이 무었이뇨?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내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설한 법이 과연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백불언: “세존! 여래무소설.”

須菩堤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 시위다부?”

須菩堤!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 是爲多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티끌이 많다 하겠느뇨?”

 

수보리언: “심다. 세존!

須菩堤言: “甚多. 世尊!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제미진여래설비미진, 시명미진. 여래설세계비세계, 시명세계.”

須菩堤! 諸微塵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非世界, 是名世界.”

수보리야! 이 모든 티끌을 여래는 설하기를, 티끌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비로소 티끌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여래는 이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고 설파한다. 그래서 비로소 세계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견여래부?”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뇨?”

 

불야. 세존! 불가이삼십이상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설삼십이상즉시비상,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卽是非相,

시명삼십이상.“

是名三十二相.“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나이다. 어째서 그러하오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삼십이상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이다.”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이, 항하사등신명보시, 약부유인어차경중내지수지

須菩堤! 若有善男子善女人以, 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於此經中乃至受持

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심다.”

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수보리야! 만약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갠지스강의 모래수와 같은 많은 목숨을 다 바쳐 보시를 했다하더라도, 또한 다시 여기 한사람이 있어 이 경 중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지녀 딴 사람에게 설하였다 한다면 이 사람의 복이 더 많으리라.“

 

 

이상적멸분 제십사

離相寂滅分 第十四

14분 상을 떠나 영원으로

 

이시, 수보리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이백불언: “희유세존! 불설여시심심경전.

爾時, 須菩堤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아종석래소득혜안, 미증득문여시지경.

我從昔來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이 때에,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 의취를 깊게 깨달아 눈물흘려 흐느끼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정말 드문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깊고 깊은 경전을 설하신다는 것은! 저는 예로부터 얻은 바의 혜안으로도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존! 약부유인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당지시인성취제일희유공덕.

世尊! 若復有人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成就第一希有功德.

세존이시여! 만약 여기 다시 한사람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그 믿는 마음이 깨끗하면 곧 참된 모습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야 말로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임을 알겠나이다.

세존! 시실상자즉시비상, 시고여래설명실상.

世尊! 是實相者卽是非相, 是故如來說名實相.

세존이시여! 이 참된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곧 어떤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참된 모습이라 이름할 수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존!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약당래세후오백세. 기유중생득문시경,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得聞是經,

신해수지, 시인즉위제일희유.

信解受持, 是人卽爲第一希有.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깨닫고 이를 받아지니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없지만, 만약 먼 훗날 후 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어 깨달아 이를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하겠나이다.

 

하이고? 차인무아상무인상무중생상무수자상. 소이자하? 아상즉시비상, 인상중생상

何以故? 此人無我相無人相無衆生相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卽是非相, 人相衆生相

수자상. 하이고?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壽者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則名諸佛.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이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오니이까?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따라서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난 자를 곧 이름하여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불고수보리: “여시여시.”

佛告須菩堤: “如是如是.”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그렇다! 그렇다!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불포불외, 당지시인심위희유.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甚爲希有.

만약 또 한사람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놀라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이야 말로 심히 희유의 사람이라는 것을.

 

하이고? 수보리! 여래설제일바라밀, 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

何以故? 須菩堤! 如來說第一波羅蜜, 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여래는 설하였다, 제일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니라고. 그래서 비로소 제일바라밀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 인욕바라밀, 여래설비인욕바라밀.

須菩堤!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은 여래가 설하기를,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할절신체. 아어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何以故? 須菩堤! 如我昔爲歌利王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수자상.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嗔恨.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그것은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버힘을 당한 것과도 같다. 나는 그때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다. 어째서인가? 그 옛날에 마디 마디 잘림을 당했던 그 때에, 내가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나는 분명코 분노와 미움을 냈으리라.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작인욕선인, 어이소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

須菩堤! 又念過去於五百世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

.

.

수보리야! 나는 또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던 것을 또렷이 기억하노니, 그때의 세상에서도 나는 아상도 없었고, 인상도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시고수보리! 보살응리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

是故須菩堤! 菩薩應離一切相,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

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할 지어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 지어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그 마음을 낼 지어다.

 

약심유주, 즉위비주. 시고불설보살심불응주색보시. 수보리! 보살위이익일체중생.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佛說菩薩心不應住色布施. 須菩堤! 菩薩爲利益一切衆生.

응여시보시.

應如是布施.

만약 그 마음이 머무는 바가 있다면, 그 머뭄이 머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항상 보살이라면 그 마음이 색에 머뭄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케하기 위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하느니라.

 

여래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여래는 설하였다. 일체의 뭇 상들이 곧 상이 아니라고. 여래는 또 설하였다. 일체의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고.

 

수보리! 여래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須菩堤! 如來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무실무허.

須菩堤! 如來所得法, 此法無實無虛 .

수보리야! 여래는 참말을 하는 자며, 살아 있는 말을 하는 자며, 있는 그대로 말하는 자며, 허황된 말을 하지 않는 자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다. 수보리야! 여래가 깨달은 바의 법, 그 법은 실하지도 허하지도 아니하니라.

 

수보리! 약보살심주어법이행보시, 여인입암즉무소견. 약보살심부주법이행보시,

須菩堤! 若菩薩心住於法而行布施, 如人入闇則無所見. 若菩薩心不住法而行布施

여인유목일광명조견종종색.

如人有目日光明照見種種色.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캄캄한 어둠속에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눈이 또렷하고 찬란한 햇빛이 온갖 형체를 비추고 있는 것과도 같다.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선여인, 능어차경수지독송, 즉위여래이불지혜실지시인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受持讀誦, 則爲如來以佛智慧悉知是人

실견시인 개득성취 무량무변공덕.”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수보리야! 앞으로 오는 세상에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열심히 읽고 외우면, 여래는 깨달은 자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나니, 이 모든 이들이 헤아릴 수 없고, 가 없는 공덕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지경공덕분 제십오

持經功德分 第十五

15분 경을 외우는 공덕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 초일분이항하사등신보시, 중일분부이항하사등신보시,

須菩堤! 若有善男子善女人, 初日分以恒河沙等身布施, 中日分復以恒河沙等身布施,

후일분역이항하사등신보시, 여시무량백천만억겁이신보시, 약부유인문차경전신심불

後日分亦以恒河沙等身布施, 如是無量百千萬億劫以身布施, 若復有人聞此經典信心不

, 기복승피. 하황서사수지독송위인해설!

, 其福勝彼. 何況書寫受持讀誦爲人解說!

수보리야! 여기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아침나절에 갠지스강의 모래수 만큼의 몸을 바쳐 보시하고 ,또 점심나절에 갠지스강의 모래수 만큼의 몸을 바쳐 보시하고 ,다시 또 저녁때 갠지스강의 모래수 만큼의 몸을 바쳐 보시한다 하자! 그리고 또 이와 같이 매일 매일 백천만억겁의 시간동안을 몸바쳐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우러나와 거슬리지 않는다면, 바로 이 사람의 복이 저 사람의 복을 이기리니. 하물며 이 경을 베껴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남에게 해설해주는 사람에 있어서랴!

 

수보리! 이요언지, 시경유불가사의불가칭량무변공덕, 여래위발대승자설, 위발최상승

須菩堤! 以要言之, 是經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 如來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

자설.

者說.

수보리야! 요약하여 말하건데, 이 경은 가히 생각할 수도 없고 가히 헤아릴 수도 없는 공덕을 지니고 있으니, 여래는 이를 큰 수레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설하고, 가장 좋은 수레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설하느니라.

 

약유인능수지독송, 광위인설, 여래실지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불가량불가칭무유변

若有人能受持讀誦, 廣爲人說, 如來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

불가사의공덕. 여시인등, 즉위하담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不可思議功德. 如是人等, 則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

여기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나니,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잴 수 없고 가없는 불가사의 공덕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은 사람들은 여래가 깨달은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스스로 깨닫게 되리라.

 

하이고? 수보리! 약요소법자, 착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즉어차경불능청수독송위인

何以故? 須菩堤! 若樂小法者,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則於此經不能聽受讀誦爲人

해설.

解說.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작은 법에 만족하는 자들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게 되므로, 이 경을 들어 자기 것으로 하지도 못하고, 읽고 외워 남을 위하여 해설하지도 못하게 되느니라.

 

수보리! 재재처처약유차경, 일체세간천인아수라소응공양. 당지차처즉위시탑, 개응공

須菩堤! 在在處處若有此經, 一切世間天人阿修羅所應供養. 當知此處則爲是塔, 皆應恭

경작례위요이제화향이산기처.”

敬作禮圍遶以諸華香而散其處.”

수보리야! 어느 곳에든지 이 경이 있게 되면 바로 그곳이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기꺼이 공양하는 곳이라. 마땅히 알지라! 이 곳이 곧 탑이라는 것을! 모두가 기꺼이 공양하는 마음으로 절을 드리고 주위를 돌면서 온갖 꽃의 향기로서 그곳에 흩으리라.”

 

 

능정업장분 제십육

能淨業障分 第十六

16분 더러운 업을 항상 깨끗이

 

부차수보리! 선남자선여인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시인선세죄업응타악도. 이금세

復次須菩堤! 善男子善女人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先世罪業應墮惡道. 以今世

인경천고, 선세죄업즉위소멸,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先世罪業, 應墮惡道以今世人,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울 때에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경시당하고 핍박을 받는 다면 이는 전생에 지은, 지옥에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이 사람을 경시하고 핍박하기 때문에 곧 전생의 죄업이 소멸할 것이요, 그래서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수보리! 아념과거무량아승기겁, 어연등불전, 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 실개공양

須菩堤! 我念過去無量阿僧祈劫, 於燃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 悉皆供養

승사 무공과자.

承事 無空過者.

수보리야! 내 돌이켜 생각해 보니, 과거의 헤아릴 수도 없는 아승기의 겁의 기나긴 시간 동안에, 연등부처님을 뵈옵기 전에도 이미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많은 부처님을 뵈올 수 있었고, 또 이분들을 공양하고 섬김에 조금도 헛된 세월이 없었어라.

 

약부유인, 어후말세, 능수지독송차경소득공덕, 어아소공양제불공덕, 백분불급일,천만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所得功德, 於我所供養諸佛功德, 百分不及一,千萬

억분내지산수비유소불능급.

億分乃至算數譬喩所不能及.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어,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잘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공덕을 쌓는다면, 그 공덕은 내가 과거세에서 그 많은 부처님을 공양했던 그런 공덕이 그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뿐아니라, 천만억분의 일내지 어떠한 숫자의 비유로도 그에 미치지 못하리라.

 

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어후말세, 유수지독송차경, 소득공덕, 아약구설자, 혹유인

須菩堤! 若善男子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或有人

, 심즉광란 호의불신. 수보리! 당지시경의불가사의, 과보역불가사의.”

, 心則狂亂 狐疑不信. 須菩堤! 當知是經義不可思議, 果報亦不可思議.”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법이 쇠퇴한 먼훗날에도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외울지니, 그 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공덕을 내가 만약 자세히 다 말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마음이 미쳐 흐트러지거나, 반신반의하여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라! 이 경의 뜻은 불가사의하며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 하다는 것을!”

 

구경무아분 제십칠

究竟無我分 第十七

17분 지혜의 궁극은 나가 없음

 

이시, 수보리백불언: 세존! “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운하응주?

爾時, 須菩堤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 云何應住?

하항복기심?”

何降伏其心?”

이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어떻게 마땅히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불고수보리: “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당생여시심, 아응멸도일체

佛告須菩堤: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

중생,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실멸도자.

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實滅度者.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선남자 선여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자는 반드시 이와 같은 마음을 낼 지어다: ‘나는 일체의 중생을 멸도한다 하였으나 일체중생을 다 멸도하고 보니 실로 멸도를 한 중생이 아무도 없었다라고.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소이자하? 수보리! 실무

何以故? 須菩堤!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

유법,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었이뇨?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다고 하는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어연등불소, 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부? “불야, 세존!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於燃燈佛所, 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不? “不也, 世尊!

여아해불소설의, 불어연등불소, 무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燃燈佛所,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느냐? 있지 아니하였느냐?”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따로 있지 아니하옵니다.”

 

불언: “여시여시. 수보리! 실무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도무지 있지 아니한 것이다.

 

수보리! 약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연등불즉불여아수기, 여어내세당득작

須菩堤! 若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者, 燃燈佛則不與我受記, 汝於來世當得作

, 호석가모니. 이실무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시고연등불여아수기작시언,

,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是故燃燈佛與我受記作是言,

여어내세당득작불, 호석가모니.

汝於來世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수보리야! 만약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있다고 한다면,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훌륭한 부처가 되리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진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훌륭한 부처가 되리라고 이런 귀한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하이고? 여래자, 즉제법여의.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약유인언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실무유법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若有人言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須菩堤! 實無有法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먂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야! 실로 깨달은 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그러한 법이 있지 아니한 것이다.

 

수보리! 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어시중무실무허. 시고여래설,일체법개시불법.

須菩提!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於是中無實無虛. 是故如來說,一切法皆是佛法.

수보리야! 여래가 깨달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바로 그 속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나니, 그러므로 여래는 설하기를, 일체의 법이 모두 부처님 법일 뿐이라 한 것이다.

 

수보리! 소언일체법자, 즉비일체법, 시고명일체법.”

須菩堤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名一切法.”

수보이야! 내가 말한 바 일체의 법이라 하는 것도 곧 일체의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 비여인신장대.” 수보리언: “세존! 여래설인신장대, 즉위비대신. 시명대신.”

須菩堤! 譬如人身長大.” 須菩堤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수보리야!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장대한 것과도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그 장대한 몸이 장대한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장대한 몸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 보살역여시. 약작시언, “아당멸도무량중생, 즉불명보살. 하이고? 수보리!

須菩堤! 菩薩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則不名菩薩. 何以故? 須菩堤 !

실무유법 명위보살.

實無有法 名爲菩薩.

수보리야! 보살 또한 이와 같다. 보살이 만약 나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을 멸도하리라하고 이와 같은 말을 지었다하면 그를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으리라. 어째서 그런한가? 수보리야! 진실로 이름하여 보살이라 할 수 있는 법이 있지 아니하기 문이다.

 

시고불설일체법, 무아, 무인, 무중생, 무수자.”

是故佛說一切法, 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그러므로 부처는 말하느니라, 일체의 법이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라고.”

 

수보리! 약보살작시언,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 하이고? 여래설장엄불토자, 즉비

須菩堤! 若菩薩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

장엄, 시명장엄.

莊嚴, 是名莊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는 반드시 불토를 장엄케 하리라고 이런 말을 짓는다면, 그를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불토를 장엄케 한다고 말한 것은 즉 장엄케 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장엄케 한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 약보살통달무아법자, 여래설명진시보살.”

須菩堤! 若菩薩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면, 여래는 비로소 그를 참으로 보살이라 이름할 수 있다 설하느니라.”

 

 

일체동관분 제십팔

一體同觀分 第十八

18 분 모든 것을 한몸으로 보아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육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육안.”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육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천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천안.”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천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혜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혜안.”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혜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법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法眼.”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법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불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여시. 세존! 여래설시사.”

須菩堤!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저 갠지스강에 있는 저 모래를 부처가 말한 적이 있느냐?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를 말하신 적이 있사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

須菩堤!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

여시영위다부?” “심다. 세존!”

如是寧爲多不?” “甚多. 世尊!”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하나의 갠지스강에 있는 모든 모래, 그 만큼의 갠지스 강이 있고, 이 갠지스강들에 가득찬 모래수 만큼의 부처세계가 있다면, 이는 많다고 하겠느냐? 많지 않다고 하겠느냐?” “너무도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불고수보리: “이소국토중소유중생약간종심, 여래실지. 하이고? 여래설제심, 개위비

佛告須菩堤: “爾所國土中所有衆生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

, 시명위심.

, 是名爲心.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 많은 부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설한 갖가지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로소 마음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所以者何? 須菩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법계통화분 제십구

法界通化分 第十九

19분 모든 법계를 다 교화하시오

 

수보리! 어의운하? 약유인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이시인연득복다부?”

須菩堤! 於意云何? 若有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以是因緣得福多不?”

여시. 세존! 차인이시인연득복심다.”

如是. 世尊 !此人以是因緣得福甚多.”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차는 칠보로서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이연으로 얻은 복이 많다 하겠느냐? 많지 않다 하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은 복은 정말 많습니다.”

 

수보리! 약복덕유실, 여래불설득복덕다. 이복덕무고, 여래설득복덕다.”

須菩堤! 若福德有實, 如來不說得福德多. 以福德無故, 如來說得福德多.”

수보리야! 복덕이라고 하는 실제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여래는 결코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설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복덕이 없는 까닭에 여래는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설한 것이다.”

 

 

이색이상분 제이십

離色離相分 第二十

20분 색을 떠나시오, 상을 떠나시오

 

수보리! 어의운하? 불가이구족색신견부?” “불야. 세존! 여래불응이구족색신견.

須菩堤! 於意云何? 佛可以具足色身見不?” “不也. 世尊! 如來不應以具足色身見.

하이고? 여래설구족색신, 즉비구족색신, 시명구족색신.”

何以故? 如來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부처가 색신을 구족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색신을 구족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아니됩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색신을 구족했다 하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셨기 때문이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색신을 구족했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가이구족제상견부?” “불야. 세존! 여래불응이구족제상견.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可以具足諸相見不?” “不也. 世尊! 如來不應以具足諸相見.

하이고? 여래설제상구족, 즉비구족. 시명제상구족

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뭇 상을 구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뭇 상을 구족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아니됩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뭇 상이 구족 되었다 하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셨기 때문이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뭇 상이 구족되었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이다.”

 

 

비설소설분 제이십일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21분 설하는 자도 없고 설 되어지는 자도 없다

 

수보리! 여물위여래작시념, 아당유소설법. 막작시념. 하이고? 약인언여래유소설법,

須菩堤!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言如來有所說法.

즉위방불. 불능해아소설고. 수보리! 설법자, 무법가설. 시명설법.”

則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堤!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할 법을 가지고 있노라, 이 같은 생각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이 같은 생각을 지어서는 아니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자라. 내가 설한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 수보리야! 법을 설한 다해도, 설할 법이 아무것도 없나니, 그래서 비로소 법을 설한다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시, 혜명수보리백불언: “세존! 파유중생어미래세, 문설시법, 생신심부?” “불언:

爾時, 慧命須菩堤白佛言: “世尊! 頗有衆生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佛言:

보리! 피비중생, 비불중생. 하이고? 수보리! 중생중생자, 여래설비중생. 시명중생.”

菩堤! 彼非衆生, 非不衆生. 何以故? 須菩堤!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이 때에, 혜명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퍽으나 많은 중생들이 미래의 세상에서 이 법이 설하여지는 것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그들을 중생이라고 해서도 아니되고 중생이 아니라 해서도 아니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하는 것은 곧 중생이 중생이 아님을 여래가 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중생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무법가득분 제이십이

無法可得分 第二十二

22분 얻을 법이 없어라

 

수보리백불언: 세존!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위무소득야?”

須菩堤白佛言: 世尊!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爲無所得耶?”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심은 곧 얻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오니이까?”

여시여시. 수보리! 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무유소법가득, 시명아뇩다라삼먁

如是如是. 須菩堤! 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堤, 乃至無有少法可得, 是名阿耨多羅三藐

삼보리.”

三菩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에, 조그만큼의 법이라도 얻은 바가 있지 아니함에 이르렀음으로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심행선분 제이십삼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23분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시오

 

부차수보리! “시법평등무유고하,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復次須菩堤! “是法平等無有高下,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堤.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있지 아니하니, 그래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 것이다.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則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는 것으로써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수보리! 소언선법자, 여래설즉비선법, 시명선법.”

須菩堤!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라 하는 것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하였으니 이를 이름하여 선한 법이라 한 것이다.”

복지무비분 제이십사

福智無比分 第二十四

24분 복덕과 지혜는 비교될 수 없다

 

수보리! 약삼천대천세계중소유제수미산왕, 여시등칠보취, 유인지용보시. 약인이차

須菩堤! 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持用布施. 若人以此

반야바라밀경내지사구게등, 수지독송위타인설, 어전복덕백분불급일, 백천만억분내지

般若波羅蜜經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爲他人說, 於前福德百分不及一, 百千萬億分乃至

산수비유소불능급.”

算數譬喩所不能及.”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들만큼 쌓인 칠보더미를 가져다가 보시를 한다 해도, 또 어떤 이가 있어 반야바라밀경 내지 그 사구게 하나를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타인에게 설한다면, 앞의 칠보복덕은 이에 백분에 일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백천만억분의 일 내지 어떠한 숫자의 비유로도 이에 미치지 못하리라.”

 

 

화무소화분 제이십오

化無所化分 第二十五

25분 교화는 교화하는 바가 없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등물위여래작시념, 아당도중생. 수보리! 막작시념. 하이고?

須菩堤! 於意云何? 汝等勿爲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須菩堤! 莫作是念. 何以故?

실무유중생여래도자. 약유중생여래도자, 여래즉유아인중생수자.”

實無有衆生如來度者. 若有衆生如來度者. 如來則有我人衆生壽者.”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너희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이같은 생각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이 같은 생각을 지어서는 아니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실로 여래가 제도가 중생이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여래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지고 있음이라.

 

수보리! 여래설유아자즉비유아. 이범부지인, 이위유아. 수보리! 범부자여래설즉비범

須菩堤! 如來說有我者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須菩堤! 凡夫者如來說卽非凡

.”

.”

수보리야! 여래가 내가 있다고 한 것은 곧 내가 있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내가 있다고 한 것에만 집착한다. 수보리야! 그러나 여래는 말한다, 범부라는 것도 범부가 아니라고.“

 

 

법신비상분 제이십육

法身非相分 第二十六

26분 법신은 모습이 없다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관여래부?”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觀如來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뇨?”

 

수보리언: “여시여시. 이삼십이상관여래.”

須菩堤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觀如來.”

수보리가 사뢰어 말하였다: “그러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습니다.”

불언수보리: “약이삼십이상관여래자, 전륜성왕즉시여래.”

佛言須菩堤: “若以三十二相觀如來者, 轉輪聖王則是如來.”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만약 네 말대로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해야 될 것이다.”

 

수보리백불언: “세존! 여아해불소설의, 불응이삼십이상관여래.”

須菩堤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觀如來.”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제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깨달아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아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알겠나이다.”

 

이시, 세존이설게언:

爾時, 世尊而說偈言: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이 때에, 세존께서는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시었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나를 보지 못하리라.”

 

 

무단무멸분 제이십칠

無斷無滅分 第二十七

27분 끊음도 없고 멸함도 없나니

 

수보리! 여약작시념, 여래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막작시념,

須菩堤!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須菩堤! 莫作是念 ,

여래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수보리야! 네가 만약 여래가 상을 구족한 까닭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라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수보리야 간곡히 부탁하노니, 이와 같은 생각을 짓지말라, 여래가 상을 구족한 까닭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라고.

 

수보리! 여약작시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설제법단멸상,막작시념. 하이고?발아

須菩堤! 汝若作是念,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者, 說諸法斷滅相,莫作是念. 何以故?發阿

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어법불설단멸상.

耨多羅三藐三菩堤心者, 於法不說斷滅相.

수보리야! 너는 혹시 이와 같이 생각할 할지도 모르겠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자는 모든 법을 단멸해 버린 상을 설한다고.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을 짓지말라. 어째서 그러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는 자는 법에 있어 단멸한다고 하는 상을 설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불수불탐분 제이십팔

不受不貪分 第二十八

28 받을 생각도 말고 탐하지도 말라

 

수보리! 약보살이만항하사등세계칠보보시. 약부유인지일체법무아, 득성어인, 차보

須菩堤! 若菩薩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布施. 若復有人知一切法無我, 得成於忍, 此菩

, 승전보살소득공덕.

, 勝前菩薩所得功德.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의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서 보시한다고 하자, 또 어떤 사람이 있어 일체의 법이 아가 없음을 알고, 인을 얻어 이루면, 이 보살의 공덕이 앞의 보살이 얻은 바의 공덕을 뛰어 넘으리라.

 

하이고? 수보리! 이제보살불수복덕고.” 수보리백불언: “세존! 운하보살불수복덕?”

何以故? 須菩堤! 以諸菩薩不受福德故.” 須菩堤白佛言: “世尊 !云何菩薩不受福德?”

수보리! 보살소작복덕, 불응탐착. 시고설불수복덕.”

須菩堤! 菩薩所作福德, 不應貪著. 是故說不受福德.”

수보리야! 뭇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나이까?” “수보리야! 보살은 자기가 지은 복덕에 탐하여 집착해서는 아니된다. 그러한 까닭으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위의적정분 제이십구

威儀寂靜分 第二十九

29분 위엄있는 그 모습 고요하기도 하다

 

수보리! 약유인언여래약래약거, 약좌약와, 시인불해아소설의.

須菩堤! 若有人言如來若來若去, 若坐若臥, 是人不解我所說義.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를 일컬어, 오는듯 가는듯, 앉는듯 눕는듯 하다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이고? 여래자,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래서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일합이상분 제삼십

一合離相分 第三十

30분 모이나 흩어지나 한 모습

 

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이삼천대천세계쇄위미진, 어의운하? 시미진중,영위다부?”

須菩堤! 若善男子善女人, 以三千大千世界碎爲微塵, 於意云何? 是微塵衆,寧爲多不?”

수보리야! 만약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힘껏 부셔 티끌로 만든다면, 네 뜻에 어떠하뇨, 그 티끌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약시미진중실유자, 불즉불설시미진중. 소이자하?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若是微塵衆實有者, 佛則不說是微塵衆. 所以者何?

불설미진중, 즉비미진중. 시명미진중.”

佛說微塵衆, 卽非微塵衆, 是名微塵衆.”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이오니까? 만약 그 티끌들이 실재로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티끌들이라 설하디 아니하셨을 것이오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오니이까? 부처님께서 설하신 티끌들이란 티끌들이 아니기 때문이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티끌들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이다.

 

세존! 여래소설삼천대천세계, 즉비세계, 시명세계. 하이고? 약세계실유자, 즉시일합

世尊!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何以故? 若世界實有者, 則是一合

. 여래설일합상, 즉비일합상. 시명일합상.”

. 如來說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오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이름하오이다. 어째서이오니까?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큰 전체상일 것이오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의 큰 전체상은 큰 전체상이 아니오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큰 전체상이라 이름하오이다.“

 

수보리! 일합상자, 즉시불가설. 단범부지인탐착기사.”

須菩堤! 一合相者, 則是不可說. 但凡夫之人貪著其事.”

수보리야! 하나의 큰 전체상이라 하는 것은 곧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범용한 사람들이 그것에 탐착할 뿐이다.”

 

 

지견불생분 제삼십일

知見不生分 第三十一

31분 앎을 갖지 말지어다

 

수보리! 약인언불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수보리! 어의운하? 시인해아소설

須菩堤! 若人言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堤! 於意云何? 是人解我所說

의부?”

義不?”

수보리야! 누가 부처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설했다고 말했다면,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이 사람이 내가 설한 바의 뜻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느냐?”

 

세존! 시인불해여래소설의. 하이고? 세존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世尊! 是人不解如來所說義. 何以故? 世尊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비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시명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나이다. 어째서 그러하오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곧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이다.”

 

수보리!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어일체법, 응여시지, 여시견, 여시신해,

須菩堤!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불생법상. 수보리! 소언법상자, 여래설즉비법상. 시명법상.”

不生法相. 須菩堤!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사람은 일체의 법에서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깨달을 지니, 마음에 법의 상을 짓지 말라. 수보리야! 말한 바의 법의 상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는 곧 말하였다. 법의 상이 아니라고. 그래서 우리는 법의 상이라 이름하는 것 뿐이니라.”

 

 

응화비진분 제삼십이

應化非眞分 第三十二

32분 색신은 모습이 없어라

 

수보리! 약유인이만무량아승기세계칠보지용보시. 약유선남자선여인, 발보살심자,

須菩堤! 若有人以滿無量阿僧祈世界七寶持用布施. 若有善男子善女人, 發菩薩心者,

지어차경내지사구게등 수지독송위인연설, 기복승피.

持於此經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爲人演說, 其福勝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수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져다가 보시를 한다 해도,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보살의 마음을 발하고, 이 경 내지 사구게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워,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한다면, 이 복이 저 칠보의 복을 뛰어 넘으리라.

 

운하위인연설? 불취어상, 여여부동.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그리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한단 말인가? 상을 취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 움직이지 말라.

 

하이고?

何以故?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어째서 그러한가?

모든 지은법이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네.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아라.

그대들이여

이 같이 볼지니.”

 

불설시경이. 장로수보리급제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일체세간천인아수라, 문불소

佛說是經已. 長老須菩堤及諸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尼, 一切世間天人阿修羅, 聞佛所

, 개대환희, 신수봉행금강반야바라밀경.

, 皆大歡喜, 信受奉行金剛般若波羅蜜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심을 마치시었다. 장로 수보리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비구와 비구니와 우바색과 우바이, 그리고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믿고 받아들이고, 받들어 행하더라.

 

眞言

 

나모바가바떼 쁘라갸 빠라미따예

옴 이리띠 이실리 슈로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반야심경

[ 般若心經 ]

 

    

 

 

산스크리트 본 번역 (서종순  외대교수)

 

 

저 멀리 건너가는 지혜의 핵심 경전

 

옴 ! 존경스럽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예배드립니다.

심오한 지혜의 완성을 실천하시는 성스러운 관자재 보살께서는

다섯 무더기들의 스스로 그러한 모습이 공함을 확실하게 낱낱이 관찰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보신다.

 

사리불아 ! 이 세상에서 물질적 현상은 공한 것이고,

공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물질적 현상이 될 수 있다.

공한 것이라해서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 현상이라 해서 공한 것을 떠나 있지 않다.

물질적 현상은 모두 그 스스로의 모습이 공한 것이며,

또 그 스스로의 모습이 공한 것은 무엇이든 물질적 현상을 갖는다.

감수작용과 표상작용과 의지작용과 식별작용이 바로 이와같이 모두 공한 것이다.

 

사리불이여 ! 이 세상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공한 모습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렵혀지지도 않고 더럽혀질 수 없지도 않으며,

늘어날 수도 없으며 줄어들 수도 없다.

그러므로 사리불아 ! 공함에는 물질적 현상도 없고

감수작용도 없고, 표상작용도 없고, 의지작용도 없고, 식별작용도 없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생각도 없다.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만져지는 대상도 없고, 개념도 없다.

눈이 영역부터 의식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없는 것이다.

깨달음도 없으니 무명도 없고, 깨달음이 없어질 일도 없으니 무명이 없어질 일도 없다.

그러니 늙을 일도 없고 죽을 일도 없고 늙음과 죽음이 없어질 일도 없다.

고통의 현실도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고,고통의 소멸도 없고, 고통을 소멸하는 방법도 없다

도무지 안다고 하는 것도 없으며 깨닫는 다고 하는 것도 없으며 깨닫지 못한다고 하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 깨닫지 못한다고 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모든 구도자들은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며 마음의 장애가 없이 편안히 생활한다.

마음의 장애가 없이 편안히 생활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고

뒤집어지는 마음의 상태를 멀리 떠나 영원한 평안함에 들어간다.

과거 현재 미래에 머물고 계신 모든 각자들은 모두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

더없이 온전한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한다.

지혜의 완성의 위대한 주문,

위대한 깨달음의 주문,

더 높은 깨달음의 주문,

더 높은 것이 없는 주문,

비교할 바가 없는 주문은,

우리의 모든 고통을 평정하며,

거짓이 없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라는 것을.

그 주문은 지혜의 완성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여 진다.

 

건너간 분이시여! 건너간 분이시여! 저 멀리 건너간 분이시여!

저멀리 완전히 건너간 분이시여! 깨달음이여 ! 만세 !

이처럼, 지혜의 완성의 핵심이 끝난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와하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 스바하 !

 

 

 

 

 

 (한 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2007.6.10, 도서출판 들녘)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지고 또 가장 많이 유통되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정확한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으로서 보통 반야심경이라 줄여서 부르고 있다.

반야심경은 불과 260자밖에 되지 않는 짧은 경문이지만,

·소승 경전의 내용을 간결하고도 풍부하게 응축하고 있어서,

예불이나 각종 의식에는 물론 식사 때에도 지송하고 있을 뿐 아니라

초종파적으로 공통으로 독송하는 경전이다.

불교에 입문하지 않더라도 불교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전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기에 앞서 외워두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만큼

불교 입문서로서의 대표성도 가지고 있다.

반야심경은 많은 번역본이 존재하는데,

그 가운데에서 일반적으로 독송되는 것은 당의 현장이 번역한 것이다.

구법의 동반자, 반야심경당나라 현장법사는 629년 오랫동안 꿈꾸었던 천축국을 향해 구법의 길에 올랐다.

익주 공혜사에 이르렀을 때, 한 병든 노스님을 만났는데,

그는 험난한 천축길에 만나게 될 갖은 시련을 알려주면서

"삼세제불의 심요(心要) 법문이 여기 있으니

이것을 늘 기억하여 외면 온갖 악귀를 물리치고 안전히 다녀올 수 있으리라" 했다.

그 노스님이 가르쳐준 것은 범어로 된 반야심경이었다.

천축을 가는 길은 황량하고 험난해서 나는 새나 짐승도 없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곳이 며칠씩 계속되기도 했다.

자기 그림자를 벗삼아 고난의 길을 가는 현장에겐 끊임없이

무서움과 괴로움, 편안함을 유혹하는 악귀들이 덮쳐오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도 무수히 많았다.

그때마다 현장은 이 반야심경을 지심으로 독송했는데,

그때마다 악귀들은 물러나고 길이 저절로 열리면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장은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천축 마가다국 나란타사에 도착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거기에서 자신에게 반야심경을 가르쳐준 병든 노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현장을 본 그 노스님은 흔연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이곳에 무사히 도착한 것은 삼세제불의 심요법문을 수지 독송한 덕이니라.

내가 바로 관음보살이다."그러고는 표연히 떠올라 하늘 높이 사라져버렸다.

그 뒤 현장법사는 귀국하자마자 관음보살이 친히 교수한 반야심경을 번역하여 유포했는데,

수지하여 지심으로 독송하는 이마다 반야심경의 영험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위대한 지혜를 완성하는 경경의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하''크다'를 뜻하는 말이고, '반야''지혜'를 뜻하며,

'바라밀다''완성', ''은 심장 또는 정수를 뜻하는 말이므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뜻으로 풀어보면 '위대한 지혜의 완성과 그 정수를 담은 경'이 된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은 대명도경(大明度經)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은 지혜인 '반야', '()'는 피안에 도달한다, 완성한다는 뜻으로 '바라밀다'를 의역한 것이다.

반야심경의 범어 원본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다른 경전들처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되는 서분(序分)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歡喜奉行)"로 끝나는 유통분(流通分)이 있는 광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 앞뒤가 없이 다만 정종분(正宗分)만 있는 약본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약본으로서,

부처님이 관자재보살을 예로 들어 사리불에게 반야사상을 설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광본에 따르면 부처님은 왕사성 영취산에서 삼매에 들고,

그 삼매 속에 관자재보살이 옛날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때 사리불이 부처님의 힘을 빌어 관자재보살에게 보살이 행할 바를 묻고,

이에 대해 관자재보살이 약본의 내용을 그대로 설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부처님의 삼매 속에서 관자재보살이 설법을 행하는 형식인 것이다.

반야심경은 흔히 인도의 우수한 학승들이 반야계 경전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의 84천 법문을 260자 안에 요약한, 전무후무한 경전이라고 일컫는다.

그만큼 군더더기 하나 없이 불교사상의 정수를 오롯이 담아내었다는 말인데,

음미할수록 한자한자가 놀라운 짜임새로 구성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공사상의 핵심을 정교하게 변증하는 앞단계가 있고 이어서 바라밀의 경지를 웅장한 톤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그 결론으로 진언의 내용이 풍부한 울림으로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풀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

-당 삼장법사 현장봉소역(唐 三藏法師 玄奘奉詔譯)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 一切苦厄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 전도몽상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帝揭帝 波羅揭帝 波羅僧揭帝 菩提娑婆訶

 

 

 

우리를 제도하기 위해 스스로 구도자의 지위로 내려서서 보살이타행을 하는

관자재보살에게 전지전능한 반야 지혜를 성취하는 진리의 요체가 있으니,

그것은 모든 생명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오온(五蘊) : 물질(), 감각(), 지각(), 의지와 행함(), 인식작용())가 뚜렷하게 실재하는 듯 생각되지만

 본성을 근원적으로 살펴볼 때 그 실체가 아예 없음을 밝은 빛 아래서 명백히 보듯 깨닫는 것이니라.

사리풋타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현상들은 영원불변한 게 없다.

시간의 흐름과 장소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유전할 뿐이니

일정한 실체가 없는 비어 있는 것이니라().

삼라만상은 물질적인 현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이처럼 실체가 없이 비어 있고() 그렇다고 텅 비어 있음()이 물질적인 현상()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곧 있고 없음이 다름이 아니다.

있음은 없음 그 자체요,

없음은 동시에 있음이로다.

감각(), 지각(), 의지(), 지식()도 마찬가지여서 있는 것인 양 보이지만 실상은 텅빈 것이요,

텅빔 속에서 있는 것으로 끊임없이 나타날 뿐이니라.

 

사리풋타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처럼 끊임없이 유전하는 것일 뿐 끝내 실체가 없는 것이니,

생겨나거나() 없어지거나() 할 게 없다.

더럽거나() 깨끗할 것()도 없고 늘거나() () 일도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실체가 없음을 명백히 깨달은 이 자리()에서 보면,

확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물질적 요소()나 정신적 요소(受想行識)

감각기관((), (), (), (), 신체(), 의식())이나 감각(색채(), 소리(), 냄새(), (), 촉감(), 인식())의 대상도 사실은 없는 것이다.

 

눈으로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눈의 영역(眼界)부터

 귀의 영역(耳界), 코의 영역(鼻界), 혀의 영역(舌界), 몸의 영역(身界), 의식의 영역(意識界)에 이르기까지

다 실체가 없는 것이니, 따라서 확실한 듯 느껴지는 이 ''라는 관념도 기실은 없는 것이로다.

 

그러기에 벗어나야 할 어떤 번뇌(無明)도 본래부터 없는 것이니,

그 번뇌를 벗어나고 말 것도 없느니라. 늙음()이나 죽음() 또한 본디 없는 것이니,

그것들을 여의하고 말 것도 없도다.

 

모든 것은 다 괴로움이라는 진리()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이 번뇌라는 진리()도 없으며,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에 이른다는 진리()도 없고,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진리()도 없으니,

지혜()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그 지혜로 생겨나는 얻음() 또한 없느니라.얻을 것()이 없으므로,

진리를 깨닫고자 만행을 닦는 구도자(菩提薩埵)들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무엇을 꺼리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물질이 있느니 오온이 있느니 괴로움이 있느니 하는 중생들의 뒤집힌 생각을 멀리 여의니

영원히 평안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열반을 얻게 되느니라.

 

무한한 과거에 계셨던 모든 부처나 무한한 공간에 계신 현재의 모든 부처나 무한한 미래에 계실 모든 부처들도

다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기 때문에 위없이 높고 바르고 두루한 전지전능의 큰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내용으로 충만한 최상의 주문이요,

무지함과 몽매함을 밝혀주는 광명의 주문이며, 더 이상을 생각할 수 없는 최고의 주문이며,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본연의 진리로다.

 

반야바라밀다의 이 같은 위대함을 비밀한 뜻으로 표현하는 진언(眞言)이 있으니

 

그 진언은 다음과 같다.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우리말 반야심경

 

 

한역 반야심경은 전통적인 불교의식이 배어 있어서 고졸한 맛 그대로 여전히 독송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대중들이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우리말로 풀이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한문의 뜻을 새기며 이해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말로 읽어 직접 뜻이 와닿을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에서였다.

여기서는 여러 우리말본 가운데 청담스님이 번역한 우리말 반야심경을 택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스님만의 독특한 새김이 있어서 여러모로 참고해 볼 만하리라 본다.

 

 

 

큰 지혜로 참 '마음'에 돌아서는 말씀-청담 번역

 

 

관자재보살이 지혜로 도를 닦아 '참마음 자리'를 깨닫고 보니,

물질, 느낌, 따짐, 저지름, 버릇 등의 다섯 가지 '마음'의 고난에서 벗어났느니라.

 

사리불이여, 물질이 허공과 다르지 않고 허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므로

물질이 바로 허공이며 허공이 바로 물질이니라.

이와 같이 중생들의 느낌과 따짐과 저지름과 버릇들이 바로 부처님의 밝은 지혜이며

부처님의 광명지혜가 바로 중생들의 나쁜 생각이니라.

 

사리불이여, 이 모든 것들이 없어진 '참마음 자리'는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 , , , , 생각도 없으며 또한 형상, 소리, 냄새, , 이치도 없으며,

쳐다보는 일도 들어보는 일도 맡아보는 일도 맛보는 일도 대어보는 일도 생각해보는 일도 없으며,

허망한 육신을 '(自我)'라고 하는 그릇된 생각(無明)도 없고,

 ''라는 그릇된 생각이 없어졌다는 생각마저 없으므로

''를 위한 움직임()도 없으며 생멸도 없어지고

주관과 객관의 대립도, 감각, 욕심, 가짐, (), 출생, 사망 등 열두 가지 인연법칙이 모두 없으며,

늙고 죽는 것도 없고 늙고 죽음 다 없어진 것도 없으며

그 괴로움의 원인과 그 괴로움을 벗어난 것과 그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까지도 없으므로

지혜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느니라.

 

'마음'은 본래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보살'이 반야바라밀이 되어 아무 데도 걸린 데가 없으므로

겁나는 일이 없으며 꿈같이 허망한 생각이 없어서 최후의 열반에 이르게 되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도 이 '마음 자리'를 깨달아

가장 높고 바르고 밝은 지혜로써 생사를 초월했고 자유자재한 경지를 성취했느니라.

그러므로 생각의 주체인 이 마음도 아닌 '마음'이 가장 신비하고 가장 밝고 가장 높은 주문이며,

절대 아닌 절대로서 이 마음은 모든 것과는 다르면서

또한 만물과 둘이 아닌 주문이므로 능히 모든 고난을 물리칠 수 있고 진실하며 허망됨이 없느니라.

 

 이에 마음을 깨닫는 주문을 말하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Vas - Sunyata

 

 

 

 

 

 

 

 

 

 

싯달타의 깨달음 - 도올강의

 

색(色) : 물질적 존재의 총칭

공(空) : 비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인식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말한다.

            즉, 공은 비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관계양상이다.

 

 

 

신은 세계 내적 존재이다.

신은 무한한 주체적 지향의 실현을 위한 끊임없는 활동속에 있다.

신은 영원히 달성중에 있는 현실태 일 뿐,

결코 달성된 현실태 일 수 없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한다면,

이 세계 또한 신을 창조한다.

 

 

 

 

 

연기 :  보리수 아래에서 싯달타가 증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각)의 내용

 

십이연기 十二緣起; 무명(無明) ·() ·() ·명색(名色) ·육처(六處) ·() ·() ·() ·() ·() ·() ·노사(老死)

 

싯달타는 인간의 고뇌상황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의 해결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윤회상황 그 자체의 분석에만 몰두했다.

그것이 연기다.

 

 

 

 

 

 

 

 

 

 

 

연기를 보는 자는 곧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자는 곧 연기를 보는 것이다.

법을 보는 자는 곧  나 부처를 본다.

 

무명 곧 무지 (Ignorance)가 인간 고뇌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싯달타는 기나긴 사색 끝에 도달하였다.

 

모든 법은 항구적이고 독립적인 자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諸法無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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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tara

Cantara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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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 Grahu

 

 

 

 

 

 

 

 

 

 

존재계에 맞서지 마라.

그 안에 참여하라.

그러면 어떤 하나됨( oneness )을 느낄 것이다.

 

이 하나됨을 여여(如如)라고 부를 수 있다.

또는 있음(isness), 이것(thisness)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 의미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다 좋다는 뜻이다.

그대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발견해야 한다.

오직 그런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그는 삶이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는 미쳐 자신이 깨닫지도 못했던 염원을

삶이 항상 충족시켜 주었음을 안다.

 

-  오    쇼  -

 

 

 

 

 

 

 

 

 

 

임제가 말했다.

 

홀로 비추는 둥근 달 아래 강산은 고요한데,

나홀로 크게 웃는 소리가 천지를 놀라게 하는구나.“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인간과 인간의 마음을 제외하고 자연을 관찰한다면

모든 것이 지복의 상태에 있다.

 

모든 것이 붓다이다.

 

오직 인간의 마음이문제를 일으킨다.

사념이 없다면 인간 또한

그 풍경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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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계를 자신의 의사대로 바꾸려는 것,

이것이 모든 불행의 근본이다.

그대는 존재계를 바꿀 수 없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p.s : 마음을 버리는 방법

수용적인 자세, 깨어 있는 의식, 주의깊게 듣는 태도, 언어가 아닌 것을 이해하는 것, 침묵에 잠기는 것

 

 

 

 

 

 

 

 

 

 

 

 

 

 

신비신학 - 디오니시우스를 말하다 

 

< 오    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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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 사람에게 알려진다.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해되는 것이다.

 

 

< 케노파니샤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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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의 노래 >

 

 

 

그대는 그것을 잡을 수도 없고

그것을 없앨 수도 없다.

그것을 얻을 수 없으면서 그것을 얻는 것이다.

그대가 침묵을 지킬 때 그것은 말하고

그대가 말을 할 때 그것은 침묵을 지킨다.

 

 

- 영가선사(66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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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 하나만을 알고 있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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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존재를 넘어선 삼위일체이시여,

신비스런 계시의 정상으로 우리를 인도하소서.

모든 생각과 빛을 넘어 승화시키소서.

신성한 진리의 단순하고 절대적인 불변의 신비가

은밀히 계시하는 침묵의 투명한 어두움 속에 숨어 있나이다.

이 어두움은 가장 깊히 모호하지만 또한 눈부시게 명료하며,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뛰어난 아름다움과 장엄함으로

우리의 보지 못하는 마음을 넘치게 채웁니다.

 

 

- 디오니시우스

 

 

 

 

The Hymn (Update Project Ambient Mix)

 

 

마음의 기적


저자 - 디팩 초프라


1. 관찰자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재라고 받아들이는 세계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물건은 크고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단단하며 어떤 것은 부드럽다. 그러나 이 중의 어떤 성질도 우리 자신의 인식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예컨대 접는 의자와 같은 어떤 물체를 가정해 보자. 우리에게는 그 의자는 그리 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미에게는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단단해 보이지만, 중성미자(neutrino)는 그 속을 거침없이 지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아원자(亞原子) 입자에게는 의자의 원자들이 서로 수 마일씩이나 떨어져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가만히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당신이 외계의 어느 지점에서 그것을 본다면 의자는 지구상의 모든 것들과 함께 돌면서 시속 수천 마일의 속도로 우리의 눈앞을 지나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인식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우리가 의자에 대해서 묘사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성질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가 있다. 예컨대 의자가 붉은색이라면 초록색 안경을 쓰고 봄으로써 검은색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만일 의자의 무게가 2.5킬로그램이라면 그것을 달 위에 가져가 1킬로그램도 채 안 나가게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밀도가 큰 행성의 중력장 속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수십만 킬로그램의 무게로 만들 수도 있다.


물질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속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저 밖에’ 어떤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다. 우주란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의 반영일 뿐이다. 인간의 신경계는 우주 속에 진동하고 있는 총 에너지의 10억 분의 1도 안되는 지극히 미소한 부분만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박쥐나 뱀과 같은 다른 동물들의 신경계는 우리의 세계와 공존하고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반영한다. 박쥐는 초음파의 세계를 감지하며, 뱀은 적외선의 세계를 감지한다. 두 세계 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진정으로 ‘저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다만 인식자인 우리가 해석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정형화되지 않은 원시 데이터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사용하여, 물리학자들의 말하는 ‘지극히 불명확하고 멀건 양자의 수프’를 굳혀서 3차원의 고형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영국의 뛰어난 신경학자인 존 에클스(John Eccles) 경은 다음과 같이 놀랍지만 반박할 수 없는 단언으로써 감각이라는 환상을 통찰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자연의 우주에는 어떤 색깔도,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색깔이나 소리와 비슷한 것, 즉 직물, 문양, 아름다움, 향기 등등의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현실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어떤 객관적 사실도 본질적으로는 무효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혼란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속에는 ‘단지 당신의 인식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당신의 우주 - 당신의 몸을 포함한 -를 당신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믿기지 않는 해탈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몸속에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미국과 영국에서는 65세에 맞게 되는 정년퇴직이 제멋대로 한 사람을 사회에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65세가 되기 전날까지만 해도 한 직장인은 노동과 가치로써 사회에 기여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는 사회의 피부양자가 된다. 의학적으로 이러한 인식적 전이의 결과는 비참하다. 퇴직이후 몇 년 동안에 심장마비와 암의 발병률이 치솟고, 퇴직하기 전에 건강했던 사람들이 조기에 죽음을 맞는다. 소위 ‘조기 은퇴성 사망’이라는 이 증후군은 자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인식에 기인한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인식일 뿐이지만 그것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는 질병을 일으키고 사망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비교한 바에 의하면, 노년층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지극히 원기왕성하다. 그들은 미국의 노인네들로서는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굽히기, 들기, 오르기 등을 거뜬히 해낸다.


인간의 표피세포와 같은 오래된 세포를 고배율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그 광경은 마치 전쟁터처럼 황폐화되어 있다. 섬유질이 이러 저리 얽혀 있고 지방질 노폐물과 처리되지 않은 순환노폐물이 보기 흉한 덩어리로 엉켜 있다. 리포푸신(lipofusin)이라 불리는 암황색 색소가 세포내부의 10 내지 30퍼센트까지 축적되어 더럽혀져 있다.


이 황폐한 광경은 아세포 기능의 이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물질적인 렌즈가 아니라 정신적인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 오래된 세포들이 마치 그 사람의 경험이 기록된 지도와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준 일들과 함께 우리를 괴롭힌 일들이 거기에 각인되어 있다. 의식 층에서는 오랜 전에 잊혀진 일들이 마치 감춰진 컴퓨터 마이크로 칩처럼 여전히 외부로 신호를 보내어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긴장하게 하며 지치고 근심스럽고 후회스럽고 의심스럽고 실망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반응들은 심신의 경계막을 넘나들면서 우리의 일부가 된다. 오래된 세포 속의 독성 노폐물 덩어리들이 누구에게나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전적인 차이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 70세에 이를 즈음이 되면 당신의 세포는 독특한 형태를 띠게 될 텐데, 그 형태는 당신이 자신의 신체조직과 내장기관에 대사 작용으로 변화시키고 처리시킨 독특한 경험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혼돈스럽고 거칠게 진동하는 ‘양자의 수프’를 다루어서 의미 있고 질서 있는 현실의 단편들도 만들 수 있게 되면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오직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을 때에만 존재한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 의식의 거의 대부분이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몸을 만들어 내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소위 자율신경계는 당신의 의식을 빠져나간 기능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멍한 상태로 길을 걸어가더라도 뇌 속의 자율신경 중추는 여전히 위험한 순간을 살펴서 긴장반응을 발동시킬 태세를 갖추고 외부세계에 대처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수많은 일이 행해지고 있다. 숨쉬고, 소화시키고, 새로운 세포를 키우고, 손상된 오래된 세포를 고치며, 독성을 순화시키고, 호르몬의 균형을 유지하며, 지방을 혈당으로 바꿈으로써 저장된 에너지를 변환시키고, 눈동자의 조리개를 조절하고, 혈압을 높이고 낮추며,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걷는 동안에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근육으로 혈액을 보내 주고, 주변의 소리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등의 일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율적인 과정이 노화현상에 아주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이러한 기능들을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져 가는 것이다. 한평생 무의식적인 생활을 이어가면 수많은 노후작용이 일어나고, 한평생 의식적으로 활동하면 노화를 예방할 수 있다. 신체의 기능을 자동운전 상태로 내버려두는 대신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 그 자체가 당신이 어떻게 나이를 먹느냐에 변수가 될 것이다. 심장박동과 호흡으로부터 소화와 호르몬 조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른바 자율기능들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가 있다.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과 명상의 시대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여러 가지 일 중에서도, 예컨대 심신건강 연구실에서는 심장질환자가 의지로서 혈압을 내리거나, 위궤양 환자가 위산의 분비를 줄이는 훈련을 받고 있다. 이러한 능력을 노화현상에 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구태의연한 인식을 새롭게 바꾸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기법은 얼마든지 있다.

 

2. 우리의 신체는 에너지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의 패턴을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의 몸은 분자와 원자로 쪼개어지는 고형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은 모든 원자의 99.9999퍼센트가 텅 빈 공간이며, 실제로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덩어리인 아원자 입자가 이 공간 속을 빛의 속도로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 진동은 무작위적이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한 덩어리의 진동은 수소 원자의 정보를 지니고, 또 다른 덩어리의 진동은 산소 원자의 정보를 지닌다. 사실 모든 원소들이 하나의 고유한 정보이다.


정보는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우주와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추상적인 것이다. 인체의 물리적 구조를 궁극적인 근원으로 추적해 가면 분자가 원자로, 원자가 아원자 입자로, 아원자 입자는 텅 빈 공허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유령 같은 에너지로 꽁무니를 감추어 버려서 마침내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게 된다. 신비스럽게도 이 공허에는 어떤 정보가 표현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 소리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양자의 장은 표현되지 않은 형태로 온 우주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 십 억의 은하계가 이 문장 끝의 마침표보다 수백만 배나 작은 공간 속에 압축되어 있었던 대폭발(Big Bang)의 순간 이래로 늘 그래 왔었다. 그러나 무한히 작은 그 점 이전에도 우주의 구조는 나타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을 포함한 우주의 근본 질료는 비질료(non-stuff)이다. 그러나 그것은 범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비질료이다. 모든 원자 내부의 공허는 보이지 않는 지능으로 맥동하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이 지능이 본래 DNA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각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DNA가 정보화된 자신의 지능을 쌍둥이 격인 RNA에 전해 주고, RNA는 나아가서 세포 속으로 들어가 수천 개의 효소들에게 그 지능의 조각들을 전달해 주고, 그러면 효소는 그 특정한 지능의 조각을 단백질을 만드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생명이 전개된다. 이러한 과정의 모든 순간에 에너지와 정보가 교환되어야 하며, 이것이 없이는 생명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이 생겨나지 않는다.


인체는 주로 글루코스나 혈당의 형태로 세포에 전달되는 당분을 연소함으로써 에너지를 뽑아낸다. 글루코스의 화학구조는 우리가 먹는 설탕인 자당(sucrose)과 매우 가깝다. 하지만 설탕을 태운다고 해서 복잡하고도 정교한 구조를 가진 살아있는 세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꺼먼 숯 덩어리와 물과 이산화탄소의 흔적만이 남을 뿐이다.


물질대사는 단순한 연소과정 이상의 어떤 것이다. 각설탕 속에 비활성 상태로 들어 있는 당분이 그 에너지로써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인체 세포가 그것에 새로운 정보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당분은 그 에너지를 예컨대 신장, 심장, 혹은 뇌의 세포에 줄 수 있다. 이 세포들은 모두가 자신만의 독특한 형태의 지능을 지니고 있다. 심장세포의 율동적인 수축운동은 뇌세포의 전기적 방전작용이나 신장세포의 나트륨 교환 작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지능의 풍부성과 다채로움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온 신체가 공유하고 있는 단일한 지능이 있다. 이 지능의 흐름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며, 사망의 순간에 이 흐름이 끊기면 우리의 DNA 속에 저장된 그 모든 지식도 쓸모없게 된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이 흐름은 다양한 방법으로 손상된다. 면역계통과 신경계통, 내분비계통의 특유한 지능이 모두 쇠퇴하기 시작한다. 생리학자들은 이 세 가지 계통이 인체의 가장 중요한 제어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면역세포와 내분비선은 뉴런과 마찬가지로 뇌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용체(receptor)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확장된 뇌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노화란 단순히 우리의 잿빛 물질덩어리 속에 한정된 하나의 질병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면역계통이나 내분비계통의 지능이 상실되면 온몸의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말기 단계까지 진행되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날 때까지도 그 손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감은 노화를 일으키는 수 십 억의 양자의 교환 작용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깊이 침투해 들어가지 못한다. 그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른 동시에 너무나 느리다. 각각의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데에는 10,000분의 1초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너무 빠르다는 것이며,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 누적된 효과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너무 느리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들에는 한 개의 원자보다 수백만 배 작은 규모의 정보와 에너지가 개입된다.


인체가 단순한 물질이라면 노화에 의한 쇠약을 불가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엔트로피(entropy), 즉 질서 있는 체계로부터 점점 무질서하게 되어 가는 경향성의 희생물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폐차장에서 녹슬어 가는 고물차와 같은 것이다. 엔트로피는 잘 돌아가던 기계를 찌그러진 고물로 망가뜨려 놓는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반대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녹슨 고철 무더기가 저절로 재조립되어 새 차로 만들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능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세월의 약탈에 영향 받지 않는 것이다. 현대과학은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을 지금 막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신체의 젊음을 유지해 온 스승들의 영적인 전통 속에 이미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인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그보다 좀 희귀하긴 하지만 서양의 기독교권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본질이 지능의 한 흐름임을 깨달은 현자들을 배출해 왔다. 이 흐름을 유지하고 해가 갈수록 풍부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계의 심층적 차원에서 엔트로피를 극복해 냈다. 인도에서는 이 지능의 흐름을 프라나(흔히 ‘생명력(氣)’이로 번역된다)라고 한다. 이것은 의지로써 증가시키거나 이곳저곳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육신을 젊고 순조롭게 유지하도록 조종할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프라나를 접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다. 요기(yogi)는 다름아닌 의식의 집중을 이용하여 프라나를 움직인다. 심층적 차원에서 프라나와 의지의 집중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의식이며 의식이 곧 생명이다.

 


3. 몸과 마음은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이다.


지능은 그것을 가리고 있는 물질이라는 가면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다. 그 자신을 사념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분자로써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두려움과 같은 기본적인 감정은 하나의 추상적인 느낌으로 묘사될 수도 있고, 혹은 눈에 보이는 아드레날린 호르몬의 분자로 묘사될 수도 있다. 느낌이 없이는 호르몬도 없으며, 호르몬이 없이는 느낌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신호가 없으면 통증도 없고, 통증의 수용체에 꼭 들어맞아서 통증의 신호를 차단시키는 엔도르핀(endorpin)이 없으면 통증으로부터 해방될 수도 없다. 심신상관 의학(Mindbody medicine)이라고 불리는 혁명은 이 단순한 발견 위에 근거한 것이다. 생각이 가는 곳에 화학물질이 동반된다. 이러한 통찰이, 예컨대 남편을 최근에 사별한 여성들에게 유방암이 일어나는 확률이 왜 두 배나 더 높은지, 또 오랫동안 우울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병을 얻는 확률이 왜 네 배나 더 높은지 등을 이해하는 데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정신적인 압박상태가 질병을 일으키는 생체화학물질로 변환된 것이다.


나의 임상 경험에서도, 쥐어짜는 듯이 숨 막히는 통증을 유발하는 심장계통의 대표적인 질환인 협심증 환자가 두 사람 있었는데, 한 사람은 통증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전혀 느끼지도 않고 달리기와 수영, 심지어는 등산까지 즐기는데 비하여 다른 사람은 팔걸이의자에서 일어나려고만 해도 거의 까무러칠 정도의 통증에 시달리는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두 사람의 신체적인 차이를 조사해 볼 것이지만, 그것은 발견할 수도 있고 전혀 발견 못할 수도 있다. 심장병 전문의들은 세 개의 관상동맥 중에서 최소한 하나가 50퍼센트 이상 막혔을 때 협심증의 통증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혈관이 막히는 것은 대부분이 죽은 세포, 응고된 혈액, 지방질이 낀 혈소판 등이 혈관내벽에 끼어서 이루어진 동맥경화의 형태이다. 그러나 50퍼센트라는 수치는 단지 어림짐작일 뿐이다. 어떤 협심증 환자들은 오직 관상동맥의 한 군데에만 혈행을 방해하는 작은 병변(病變)을 가지고도 통증으로 장애인이 되는 반면, 다른 환자들은 관상동맥을 85퍼센트까지 말고 있는 덩어리들을 여러 군데에 지니고도 마라톤 코스를 뛴다고 알려져 있다. (덧붙일 것은, 협심증은 반드시 어떤 물질이 낄 경우에만 발병되는 것은 아니다. 관상동맥에는 근육세포층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 경련을 일으켜서 혈관이 닫혀 있을 때에도 박동하여 통증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데 따라 반응이 매우 다르다.)


심신상관 의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나의 두 환자는 통증에 대한 각자의 서로 다른 해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환자들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신만의 특유한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통증(혹은 기타의 증상)은 심신체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과거의 모든 영향들과 상호 작용한 다음에야 의식 속으로 떠오른다. 모든 사람이, 아니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일에 항상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없다. 통증의 신호는 다양한 용도로 변환될 수 있는 원시 데이터일 뿐이다. 장거리 달리기 같이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 경기는 선수로 하여금 고통을 성취의 신호(‘고통 없이는 성취도 없다’라는 속담을 보라)로 해석하게끔 만들지만, 똑같은 고통이 다른 상황에서 주어지면 전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육상 선수들은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코치를 존경하지만, 신병훈련소에서 그와 같은 훈련을 받으면 교관을 증오한다.


의학은 이제 막 심신의 상관관계를 치료에 이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통증 치료가 그 좋은 보기이다. 플라시보(placebo), 즉 가짜 약을 투여하면 30퍼센트의 환자는 정말 진통제를 투여한 것과 같은 진통효과를 경험한다. 그러나 심신의 상관효과는 이보다 훨씬 더 전일적(全一的)이다. 똑같은 가짜 약으로써 진통을 겪게도 하고, 위궤양 환자의 과다한 위산분비를 멈추게도 하며, 혈압을 낮추기도 하고, 항암제 역할도 한다. (설탕으로 만든 약을 환자에게 주면서 강력한 항암제라고 믿게 하여 머리가 빠지고 구토증이 나는 등 화학요법이 일으키는 모든 부작용이 나타나게 할 수도 있으며, 생리식염수 주사로 말기의 악성 종양을 실제로 완화시킨 예도 있다.)


약효가 없는 동일한 약물로써 이처럼 전혀 다른 반응을 이끌어 낼 수가 있으므로, 마음에 적당한 암시만 주면 인체는 ‘그 어떠한’ 생화학 반응이든지 만들어 낼 능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가짜 약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플라시보 효과를 나타내는 힘은 다름 아닌 암시의 힘이다. 이 암시가 인체가 자신을 치유하려는 의지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 약으로 환자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고, 바로 그 ‘치유의 의지’로 접근하는 것이 어떨까? 만약 우리가 늙지 않으려면 의지를 효과적으로 발동시킬 수만 있다면 인체는 그것을 자동으로 실행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매우 흥미로운 증거를 가지고 있다. 노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병중의 하나는 파킨슨병이라는 신경장애로서, 근육운동을 조절할 수 없어서 걷기와 같은 신체동작이 극도로 느려지다가 결국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이 경직되게 만드는 병이다. 파킨슨병은 도파민(dopamin)이라는 뇌의 매우 중요한 화학물질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고갈되는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어떤 종류의 약물에 의해 도파민을 생산하는 뇌세포가 파괴되어서 일어나는 파킨슨병 증상도 있다. 이 두 번째 형태의 증상의 심화되어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어떤 환자를 가정해보자. 그는 안간힘으로 겨우 한두 걸음을 옮기고는 다시 동상처럼 뻣뻣이 얼어붙는다.


그러나 바닥에다 금을 그어 놓고 “이 금을 밟아 보세요.”하고 말하면 그 사람은 마치 기적과도 같이 그 금위에 설 수가 있다. 도파민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기능이며, 저장된 것은 완전히 소모되었다는 사실(거의 뇌가 다리의 근육에게 한 걸음 더 움직이도록 신호를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는 것처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걸음을 걷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뇌가 깨어난 것이다. 그 사람은 몇 초만 지나면 다시 얼어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그에게 마음속으로 금을 긋고 그것을 밟아 보라고 하면 그의 뇌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부연하자면, 노인들의 쇠약이나 활동력 감퇴는 대부분의 경우 단지 휴지상태일 뿐이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활동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의지만 재확인시켜 주면, 많은 노인들이 운동능력과 체력과 민첩성과 정신반응을 극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


의지는 의식집중의 적극적인 동업자이다. 의지는 우리가 자동적인 과정을 의식적인 과정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이다. 거의 대부분의 환자가 간단한 심신상관관계 훈련을 이용해서 빠른 맥박과 천식성 기침, 뭔지 모를 불안감을 몇 번 만에 좀더 정상적인 반응으로 바꾸어 놓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적절한 기법을 이용하여 다시 통제권 안으로 가져올 수가 있다. 이것이 노화에 대해 시사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예컨대 ‘나는 정력과 활동력을 나날이 증진시키고 싶다’는 식의 의지를 사고과정에 주입함으로써, 활동에 표현되는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는 대뇌중추에 통제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활동력이 감퇴하는 것은 대부분이 그렇게 감퇴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대’한 결과이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패배적인 의지를 강한 신념의 형태로 심어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심신의 상관관계가 이러한 의지를 자동으로 실행하게 된다.


과거에 우리가 지녔던 의지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구시대의 프로그램을 만든다. 사실은, 의지의 힘은 언제든지 다시 각성시킬 수가 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의식적으로 마음을 프로그래밍 함으로써, 나이가 들기 전에 일찌감치 그와 같은 손실을 방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인체의 생화학 작용은 의식의 산물이다.


낡은 패러다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대한 한계 중의 하나는, 인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 사람의 의식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질병의 치료는 그 사람의 신념, 추측, 기대,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또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인체를 마음이 없는 기계로 보는 입장이 아직도 서양의학의 주류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와는 반대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암이나 심장질환으로 사망하는 비율은 아무래도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진 사람들이 더 높고, 목적의식이 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더 낮다.


최근 몇 해 동안 이루어진 의학연구 결과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의 하나는 스탠퍼드 대학의 정신의학자인 데이비드 스피겔(David Spiegel)이 행한 실험이다. 그는 환자의 마음상태가 암의 극복과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많은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신념과 태도에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이 이로운 점보다는 해로운 점이 더 많으리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암을 일으킨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식의 생각은 죄의식과 자기비판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피겔은 유방암이 상당히 진전된 86명의 여성(그들의 병은 관행요법으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들을 대상으로, 그들 중의 반수에게 매주 자기최면 법 강의와 결합된 정신요법을 행했다. 어느 모로 보나 이것은 최소한의 개입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 그것도 여러 명의 환자가 함께 하는 요법으로써 죽음이 불가피하게 된 말기 증상의 병과 어떻게 싸울 수가 있었겠는가? 결과는 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험 대상자들을 10년 동안 추적해 본 스피겔은 요법을 받은 그룹이 요법을 받지 않은 그룹보다 평균 두 배나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최근까지 단지 세 명만이 살아 있었는데, 그들 모두 요법을 받은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 연구결과는 연구자가 그 효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라서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한테서도 이와 비슷한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예일 대학의 젠센(M. R. Jensen)이 보고한 1987년의 신중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감정을 억누르고 절망감에 빠지고 분노나 두려움, 기타 부정적인 감정을 발산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여성들에게는 유방암이 빠르게 퍼져 나간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류머티스 관절염이나 천식, 난치성 통증, 그리고 기타의 장애 증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발견이 보고 되었다.


낡은 패러다임에 빠져 있는 의사들은 이러한 연구결과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통찰력이 번득이는 저서 <의학과 의미(Medicine and Meaning)>에서 래리 도시(Larry Dossey)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의학 회보나 의과대학 강단에서 끊임없이 설교되고 있는 지배적 교훈은 ‘전래의 병리학’만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며, 느낌, 감정, 태도 등은 한갓 들러리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감정이란 외딴 정신의 공간 속을 스치듯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의식의 표현이며 생명의 근본적인 질료라는 사실이다. 모든 종교 전통 속에서 생명의 숨결은 곧 영혼이다. 영혼을 고양시킨다거나 저하시킨다는 것은 인체가 반드시 반영해야 할 근본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의식은 노화현상에 매우 큰 차이를 가져온다. 고등한 생명 형태를 지닌 모든 종이 노화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인식을 다시 노화 자체로 재 번역한다. 늙어가는 것에 절망을 느끼기 때문에 한층 더 발리 늙어가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을 아량으로 받아들이면 육체적? 정신적인 많은 불행을 막아낼 수 있다.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늙는다.’는 속담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생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계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정보의 자극이다. 우리가 나무, 별, 산, 바다라고 부르는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도 자연계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한 가지 중요한 면에서 이와는 다르다. 자연계는 자신의 생각의 형태가 일단 정해지면 거기에 고정되어 버린다. 행성이나 나무와 같은 사물은 생겨나고 발달하고 쇠퇴하고 분해되는 자동적 단계의 성장 사이클을 따른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의 주기 속에 갇히지 않는다. 인식능력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응에 참여한다. 우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을 때 문제가 일어난다. 마이클 탤보트(Michael Talbot)는 자신의 저서 <홀로그램 우주(The Holographic Universe)>라는 책에서 이것을 희랍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 왕에 빗대어 재치 있게 이야기한다. 자기가 손을 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해 버리므로, 마이더스 왕은 사물의 실질적인 재질을 알 수가 없다. 물도, 밀알도, 살도, 깃털도, 모두가 그가 손을 대는 순간 단단한 금속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은 양자의 장을 일상의 물질적 현실로 바꾸어 버리므로 우리는 양자적 현실 그 자체의 재질을 알 수가 없다. 오감을 통해서도 알 수 없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 또한 양자의 장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생각은 공허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떤 시공간적(時空間的) 사건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육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특정한 시공간적 사건이다. 우리는 순전히 추상적인 잠재력을 고형의 물체로 바꾸어 놓은 마이더스의 손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육체의 물질성만을 경함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의식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육체를 바꾸어 놓는 자신의 행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5. 인식이란 학습된 현상이다.


만일 모든 인간이 어떤 경험에 대해서 똑같은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면, 의식의 힘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분명히 일어날 리가 없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똑같은 인식을 공유하는 일은 없다. 당신 애인의 얼굴이 나의 가장 미운 적일 수도 있고,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나에게는 구역질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각 개인의 반응들은 반드시 학습된 것이다. 여기서 개인의 차이가 비롯된다. 학습 행위는 마음을 매우 활발히 사용하는 것으로, 신체에 매우 활발한 변화를 일으킨다. 사랑, 증오, 기쁨, 혐오 등의 인식은 신체에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방향의 자극을 준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몸은 우리가 태어난 이래로 배운 모든 해석방식의 육체적 산물인 것이다.


장기이식 수술을 받은 일부 환자들은 신장이나 간, 심장 등을 기증 받은 후에 괴이한 경험을 했다는 보고를 해 온다. 장기를 기증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은 기증자의 기억 속에 끌려들어 가기 시작한다. 사람의 체내에 다른 사람의 신체 조직이 이식되면 그 사람의 대인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번은 심장이식 수술을 한 어떤 여성이 잠을 자다 깨어났는데, 갑자기 맥주와 통닭을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전에는 그런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미라는 젊은 남자가 나타나는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하고부터 그녀는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죽은 심장 기증자의 신상을 조사해 보았다. 그녀가 그의 가족을 만나본 결과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티미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맥주를 매우 즐겼으며 맥도널드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초자연적인 설명을 찾기보다 우리의 신체는 경험이 육체적 표현으로 변형된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우리가 ‘육화’시키는 어떤 것이므로 우리 몸의 세포 속에는 우리의 기억이 주입되어 있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세포를 받는다는 것은 동시에 그 사람의 기억도 받는 것이 된다.

 

당신의 몸 세포는 끊임없이 경험을 처리하고 그것을 당신의 개인적 관점에 의거하여 대사 작용으로 변환시킨다. 당신은 단순히 원시 데이터를 눈과 귀를 통해 통과시키고 거기에 판단의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그것을 내화하면서 실제로 자신이 그 해석 자체로 ‘변하는’ 것이다. 일자리를 잃어서 실의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몸 구석구석으로 그 슬픔을 투사한다. 즉, 대뇌에서 나오는 신경전달물질이 고갈되고 호르몬의 양이 떨어지며, 수면 주기가 혼란해지고, 피부세포의 표피층에 있는 뉴로펩티드 수용체가 교란되고, 혈액 속의 혈소판이 끈적끈적해져서 덩어리가 되기가 더 쉬워지며, 눈물조차 기뻐할 때의 눈물과는 다른 화학성분을 보이는 것이다.


그 사람이 새로운 직장을 얻게 되면 이 모든 생화학적 양상이 극적으로 바뀌며, 만일 그 직장이 매우 만족스럽다면 그의 몸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수용체, 그리고 DNA 자체에 이르기까지 다른 모든 필수 생화학물질들은 갑작스럽게 상황이 호전되었음을 반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DNA를 유전정보가 저장된 잠겨진 창고로 생각하지만, 작용상 쌍둥이인 RNA는 매일 매일의 상황에 반응하고 있다. 의과대학생들은 시험기간이 되면 암에 대항하는 면역반응에 필수적인 화학물질인 인터루킨(interlukin) 2의 수치가 줄어드는 현상을 보인다. 인터루킨2의 생산은 전령 RNA(messenger RNA)에 의해 제어되는데, 이것은 시험결과에 대한 학생들의 걱정이 유전자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점은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상태의 신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는 것을 역설해 주고 있다. 의과대학생들의 시험에 대한 걱정은 실업자의 걱정처럼 언젠가는 지나간다. 그러나 노화현상만은 날마다 대면해야만 한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 향후 40, 50년, 혹은 60년 동안에 일어날 일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신경학적으로 말하자면, 뇌의 신호는 한갓 물결치는 에너지의 결합이다. 당신이 혼수상태에 있다면 이 신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이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그 신호는 무한히 창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극 중에서 ‘우리는 꿈과 똑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고 말하는 프로스페로의 대사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인체란 대뇌신호가 3차원적으로 투사되어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상태로 변형된 것, 즉 현실화된 꿈과도 같다.


노화란 일련의 오도된 변형, 즉 균형 잡히고 안정적인 자기쇄신의 과정이 옆길로 샌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 육체상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먼저 우리의 의식 - 우리 마음속의 의식이든 세포 속의 의식이든 상관없다 - 이 옆길로 샌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어떻게 이처럼 옆길로 새게 되었는지를 깨달음으로써 체내의 생화학기능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의식을 벗어나면 생화학 작용은 없다. 우리 몸 안의 모든 세포들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신은 무차별로 냉혹하게 몸을 허물어뜨리는 세월의 제물이라고 생각하던 환상은 깨끗이 떨어져 나간다.



6. 지능의 자극이 신체를 시시각각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낸다.


몸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은 변화하는 생명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서 필요하다. 예컨대 어린아이의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는 친숙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다. 그리하여 세상에 대해서 좀더 많은 것을 배우기까지는 그의 몸은 능숙하고 조절되지 못한 행동을 보인다. 3개월 된 아이는 그림 속의 계단과 실제의 계단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 아이의 대뇌는 어떤 것이 눈의 착각인지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6개월이 되면 아이의 현실이 변화된다. 그 정도 된 아이들은 눈의 착각을 알아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이용해서 그들의 몸은 3차원 공간을 좀더 잘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거울이 벽 속의 구멍처럼 보이지 않으며, 진짜 계단은 올라가기 위한 것이지만 그림 속의 계단은 그렇지 않으며, 둥근 것과 판판한 것은 다르다는 등.) 이러한 인식의 변천은 단지 정식적인 것만이 아니다. 눈과 손을 사용하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 성공적으로 사용되며, 형상을 인식하고 운동기관을 조절하는 뇌의 다양한 중추의 육체적인 수준에도 변화가 온다.


새로운 인식이 계속 뇌로 들어오는 한 우리의 몸은 새로운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젊음의 비결은 없다. 여든 살 먹은 나의 환자 한 분이 간명하게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성장하기 때문에 늙지 않는다. 성장하기를 멈추면 늙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이런 것들이 몸과 마음을 성장시키며 이 일이 계속 일어나는 한 시시각각 새로워지려고 하는 본연의 경향이 외부로 표현된다.


양자의 세계에서,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노화는 그렇지 않다. 우리 육신의 시간적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청년 같은 50대가 지니고 있는 분자와 할아버지 같은 50대의 체내 분자는 나이가 같다. 어느 쪽이나 몸의 나이를 말하자면 50억 살(온갖 종류의 원자의 나이)이라고도 할 수 있고, 한 살(인체 조직 속의 원자가 교환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혹은 3초(세포가 음식과 공기와 물을 처리하는 효소를 교체하는 데 걸리는 시간)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우리를 소용돌이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정보의 나이 만큼밖에 나이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점은 매우 운 좋은 일이다. 우리는 양자장에 담겨 있는 정보의 내용을 통제할 수 있다. 각 세포를 이루고 있는 음식과 물과 공기 속의 원자에 담겨 있는 정보는 일정량의 고정된 것이지만 그 정보를 변형시킬 수 있는 힘은 자유의지로 조절할 수 있다. 한 가지, 이 세계에서 당신이 자유롭고 확실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세계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다. 예를 들자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어린아이들이 성장을 멈춘 의학적 사례가 놀랄 정도로 많이 있다. ‘사회심리적 소인증(小人症)’이라고 불리는 이 증후군은 심하게 학대받은 아이들 가운데서 발생하는데, 그들은 사랑의 결핍을 성장호르몬의 결핍으로 바꿔 놓는다. 이 증상은 성장호르몬은 모든 아이들의 DNA 속에 새겨진 기정(旣定) 시간표에 따라 분비되는 것이라는 가설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런 경우에 해석의 힘은 신체 정보의 장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유전자에 새겨진 내용을 무효화시킨다.


해석은 자신과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난다. 당신은 이것을 마음속의 대화로 경험한다. 생각, 판단, 그리고 느낌이 끊임없이 마음속을 소용돌이친다. “난 이것이 좋아. 저것은 싫어. 이것은 겁나지만 저것은 잘 모르겠어.” 등등. 마음속의 대화는 제멋대로 일어나는 정신적 잡음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지닌 가정과 신념에 의해서 의식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당신이 현실에 대해 세워 놓은 어떤 가정이 진실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신념의 핵심이 형성된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견지하고 있는 한, 당신의 신념은 신체 정보의 장을 특정한 변수의 범위 안에 가둬 놓는다. 즉, 당신은 어떤 것을 자신이 기대하는 수준에 맞는가 안 맞는가에 따라서 좋은 것으로, 혹은 싫은 것으로, 괴로운 것으로, 혹은 즐거운 것으로 인식한다.


어떤 사람이 인식을 변화시키면 그의 현실에도 또한 변화가 일어난다. 사회심리적 소인증을 앓는 아이들의 경우, 성장호르몬을 투여하는 것보다 사랑이 있는 환경 속에 살게 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나타낸다. (자신은 부모가 원치 않으며 가치 없는 존재라는 신념이 너무 강하면 성장호르몬을 투여해도 몸이 자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양부모를 만나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라고 믿는 이들의 근본 신념이 바뀌며 그들은 자연의 성장호르몬을 마치 둑이 터지듯이 분비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정상적인 키와 몸무게와 발육상태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들이 자신을 달리 보게 됨으로써 생리적 차원에서 그들의 개별적 현실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노화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은 늙게 되어 있다는 뿌리 깊은 신념이 어떻게 노화 그 자체로 변형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강력한 일화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신념이 늙어가는 자화상을 만들고, 그것들이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 마음속으로 바랐던 것이 실제 결과로 나타나는 것 - 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이 떠받치고 있는 신념을 뒤엎어야만 한다. 당신의 몸이 시간과 함께 쇠퇴해 간다는 신념 대신에 당신의 몸은 시시각각 새로워진다는 신념을 키워 가라. 당신의 몸이 마음 없는 기계라는 신념 대신에, 당신의 몸은 생명의 심원한 지능으로 차 있으며 그 지능의 유일한 목적은 당신을 북돋우는 것뿐이라는 믿음을 키우라. 이 새로운 신념들은 그저 지니기에 기분 좋은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 삶의 희열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7. 분리된 개체처럼 보이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가 우주를 지배하는 지능의 패턴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와 주위의 환경은 하나이다.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몸이 어느 지점에서 끝나 있다고 인식한다. 우리의 몸은 방의 벽이나 집 밖의 나무와는 텅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그러나 양자의 관점에서 보면 ‘고형 물질’과 ‘빈 공간’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1입방 센티미터마다 양자 공간은 거의 무한대의 에너지로 채워져 있다. 또한 아무리 미세한 진동이라도 그것은 전체 은하계 속을 진동하고 있는 광대한 장의 일부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환경은 곧 우리 몸의 연장이다. 호흡을 할 때마다 우리는 중국에 사는 누군가가 어제 내쉰 수억 개의 공기 원자를 들이마신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산소와 물과 햇빛은 우리 체내에 있는 것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원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사물과 합일되어 있는 상태를 체험할 수 있다. 보통의 깨어 있는 의식 상태에서는 당신은 장미를 만져 보고 딱딱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인 당신의 손가락이 또 다른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인 장미를 만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손가락과 그것이 만지는 대상은 둘 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무한한 장의 한갓 미세한 끄트머리일 뿐이다. 이러한 진리가 고대 인도의 성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이렇게 외치게 하였다.


소우주가 그러한 것처럼 대우주 또한 그러하도다.

원자가 그러한 것처럼 우주 또한 그러하도다.

인간의 몸이 그러한 것처럼 우주의 몸 또한 그러하도다.

인간의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우주의 마음 또한 그러하도다.


이것은 한낱 신비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분리의 상태에서 의식을 해방시켜 만물과의 일체성(unity)을 확인한 이들의 실제적인 체험이다. 일체성 속에서는 ‘외부에’ 있는 의식, 사람들, 사물들, 그리고 사건들은 모두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사실, 우리는 이 영향력들의 중심에 있는, 관계들의 거울일 뿐이다. 유명한 자연주의자인 존 뮤어(John Muir)는 “무엇인가를 따로 집어내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우주 속의 모든 것들과 얽혀 있음을 발견한다.”고 외쳤다. 이것은 결코 희귀한 경험이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물들의 주춧돌이다.


일체성의 경험을 할 수 있는가는 노화와 관련해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와 우리의 연장된 몸 사이에 조화로운 상호작용이 있으면 우리는 기쁘고 건강하고 젊은 느낌을 느끼기 때문이다. “공포는 분리에서 나온다”고 인도의 성현들은 말한다. 이 말 속에서 그들은 우리가 왜 노화하는가를 깊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봄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외부의’ 사물들 사이에 혼돈과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 최종 상태의 분리인 죽음은 공포스러운 미지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생명의 일부인 변화의 가능성 그 자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낸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상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일어나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폭력을 수반한다. 다른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이 우리와는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게 만들고자 한다. 조화 속에는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성 속에 있는 사람은 지배가 불가능한 것을 지배하려고 무모하게 애쓰는 대신 받아들이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내면과 그의 연장된 몸속에는 평화와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현인 크리슈나 무르티(Jidu Krishnamurti)는 경이롭게 각성된 의식과 지혜와 줄어들 줄 모르는 활력으로 90여 성상을 살았다. 나는 그가 여든 다섯의 나이로 강단을 향해 계단을 뛰어 올라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를 여러 해 동안 알고 지낸 한 여인이 하는 말에 나는 매우 감명 받았다. “나는 그에 대해서 이 한 가지만을 알았습니다. 그에게는 폭력성이 전혀 없습니다.”


양자적 우주관은 그 방정식과 가정에 관한 한 영적인 관점이 아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발견에 대해 신비로운 경외감으로 일치되어 있었다. 닐스 보어는 물질의 파동적인 속성을 우주심에 비교했다. 그리고 어빈 슈뢰딩거는 우주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마음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생을 마쳤다. (이것은 중력과 다른 모든 힘들이 신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라고 했던 뉴턴의 말을 재확인시킨다.) 진리인 것은, 인간 자신의 영혼을 탐사하는 것이 언제나 인간을 더 큰 의미의 영혼의 가장자리로 데려다 놓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러한 만남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한때 마음과 몸과 영혼을 갈라놓았던 경계를 실제로 넘나들 수 있게 해준다.


분리로부터 일체로, 분쟁으로부터 평화로의 변화가 모든 영적 전통의 목표이다.


“우리는 똑같은 객관적 세계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이 대답했다. “그렇다. 그러나 그대는 세계 속에 있는 자신을 보고 나는 내 속에 있는 세계를 본다. 이 하찮은 인식의 전환이 속박과 해방의 그 모든 차이를 만든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을 분리되고 외떨어진 존재로 봄으로써 만들어낸 무질서 속에 구속되어 있다. 그 완벽한 예가 감정이 격하고 욕구불만적인 행동은 보이며 끊임없이 마감시한에 쫓기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A형의 성격(Type A Personality) - 성급하고 경쟁심이 많으며 항상 긴장하고 있는 인간의 행동유형. 미국의 심장의학자 메이어 프리드먼(Meyer Friedman)과 로이 로젠먼(Roy H. Rosenman)이 만든 말이다. - 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어떤 종류의 포용성이나 흐름 속에도 자신을 풀어놓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의 상처를 분노로 키워 간다. 이같이 억눌린 혼란은 적개심과 성급함, 타인에 대한 책망, 까닭 없는 공포로 주변 환경에 투사된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남을 지배하려고 하며 사소한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과민하게 반응하여 자신과 남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가한다. 특히 사업계에서 A형의 사람은 끊임없이 혼돈을 일으키는 와중에서 자신은 성공적으로 경쟁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실제에 있어서는 일의 성과는 매우 낮으며 욕구불만이 쌓여 감에 따라 자신의 연장된 몸으로부터 들어오는 피드백은 육체적 몸 속에 더 많은 폐허상태를 만들어 낸다. 혈압과 콜레스테롤치가 상승하고 심장은 불필요한 스트레스성 발작을 잘 일으켜 치명적인 심장마비나 뇌졸중의 위험이 심각하게 높아진다.


A형의 성격은 자신의 연장된 몸과 조화롭게 교류하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해로움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환경 속에서 인식하는 스트레스는 모든 사람들을 덮쳐 오는 대부분의 노화현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우리를 노화하게 만드는 것은 스트레스라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인식하는 것이다. ‘저 밖에’ 있는 세계를 위협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스트레스 반응이 가져오는 손상에서 해방되어 환경과 공존할 수 있다. 여러 모로 보아, 늙지 않는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세계가 바로 당신 자신임을 확인시켜 주는 지식을 더욱 풍부하게 가지는 것이다.

 


8.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만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실재는 영원하다. 이른바 시간이라는 것은 사실은 계량화된 영원이다.


우리의 몸과 온 물질세계가 끊임없는 변화의 전개이기는 하나, 그것은 과정이라기보다는 실재이다. 우주는 생겨났으며 진화하고 있다. 우주가 생겨남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대폭발의 순간 이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논리적인 마음으로는 ‘시간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또는 ‘공간보다 큰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떠올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아인슈타인조차도 양자이론을 처음 구상하던 젊은 시절에는 뉴턴의 사상에 빠져 우주가 변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낡은 관념을 고수하여, 시간과 공간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한 상수라고 생각했다.


이 정상(定常)상태(steady-state)의 실재관은 우리의 오감이 아직도 우리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이 빨라지거나 늦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공간이 확장되거나 수축되는 것을 감지할 수가 없으나, 이 또한 리드미컬한 우주의 일부분이다. 더 나아가,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던 무차원의 영역을 상상한다는 것은 인식의 급격한 전이를 요구한다. 우주는 모종의 영원한 근원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인식의 전이를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의 몸이 변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흐름, 혹은 연속(순차적 연쇄)이 있어야 한다. 이 연속 속에는 전과 후가 있다. 이번의 호흡 전에는 먼젓번의 호흡이 있었고 이번의 심장박동 후에는 다음번의 심장박동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시간과 도구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의 평생 동안의 심장박동에 대한 심전도(心電圖)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출력된 그것을 손에 듦으로써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자리에 담긴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아래로 훑어볼 수도 있고 위로 거슬러 훑어볼 수도 있다. 마지막의 박동과 맨 처음의 박동이 나란히 오도록 접어 볼 수도 있다.


자연계 속의 가장 기본적인 시공간적 사건들에 관해서 양자물리학이 밝혀 놓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식의 조작이다. 이 사건들이 에너지 상태를 교환할 때 두 개의 입자는 쉽게 시간을 거슬러갈 수도 있고 앞질러갈 수도 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 미래의 에너지 사건에 의해 변경될 수도 있다. 화살처럼 돌이킬 수 없이 앞으로만 날아가는 시간의 개념은 양자 공간의 복잡한 기하학 속에서 영원히 깨져 버렸다. 양자공간 속에서는 다차원의 줄과 고리가 시간을 모든 방향으로 끌고 다니며, 심지어는 그것을 정지시키기도 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절대는 무시간성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온 우주가 그보다 큰 실재에서 터져 나오는 일개사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날과 달과 시, 분, 초라고 인식하는 그것은 더 큰 실재에서 떼어 낸 조각들이다. 무시간성을 마음 내키는 대로 떼어 내는 것은 인식자인 우리에게 달린 일이다. 우리의 인식이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을 만들어 낸다. 끊임없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귀한 생필품으로서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시간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개인적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하루를 늘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는가? 당신은 빠르고 불규칙적인 심장박동과 소화 리듬의 교란, 불면증, 고혈압으로 신체상에 나타나는 숨 막히고 공포스러운 ‘시간병’ 증세에 시달리는가? 이러한 개인 간의 차이는 우리가 변화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변화의 인식은 시간의 경험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과거나 미래에 의식을 두고 있으면, 우리는 시간의 장 속에서 노화를 만들어 내는 셈이다. 나이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젊어 보이는 한 인도의 스승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 속에서 일생을 보낸다. 그러나 나의 삶은 현재 속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다.” 인생이 현재 속에 집중되어 있으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과거나 미래가 그 위에 침범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 과거나 미래는 어디 있는가? 아무 데도 없다. 오직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는 정신적인 투사(投射)이다. 당신이 이 투사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면, 과거를 건져 내려고도, 미래를 어떻게 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전혀 새로운 체험의 공간이 열린다. 그것은 늙지 않는 몸과 시간을 초월한 마음의 체험이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현실과 일체가 될 수 있는 능력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시간이 불가피하게 가져오는 노쇠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당신은 간단한 심신 훈련으로써 시간을 초월한 상태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다. 하루 중에서 압박감 없이 이완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정하라. 편안한 의자에 앉아 시계를 풀어라. 시계를 들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가까운 장소에 시계를 놓아두라. 이제 눈을 감고 호흡을 의식하라. 의식으로 하여금 들고 나는 숨의 흐름을 편안히 따르도록 놓아두라. 호흡의 흐름과 함께 온몸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고 상상하라. 1, 2분 후에는 따뜻하고 이완되는 느낌이 근육 전체에 퍼지는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내면적으로 안정되고 고요해지면 천천히 눈을 살짝 떠서 시계의 초침을 엿보라. 초침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이 얼마나 이완되느냐에 따라 초침은 다른 행태를 보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초침이 완전히 멎어 있을 것이고 이런 효과는 1초 내지 3초까지 지속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초침이 0.5초 정도 머뭇거리다가 정상적인 째깍거림으로 건너뛸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초침이 움직이기는 하지만 평상시보다 느려져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실험은 직접 해 보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단 시계가 멈추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면 시간이 인식의 산물임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은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시간뿐이다.


당신은 자신의 의지대로 의식을 시간을 초월한 영역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명상은 이러한 경험을 익히기 위한 고전적인 기법이다. 명상중에는 활동하는 마음이 그 근원으로 철수된다. 이 변화하는 우주가 변화를 초월한 근원을 가져야만 하듯이, 쉬지 않고 활동하는 당신의 마음 또한 생각과 느낌과 감정과 욕망과 기억을 넘어선 의식 상태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심오한 개인적 체험이다. 시간이 없는, 혹은 초월적인 의식의 경지에서 당신은 충만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변화와 상실과 쇠퇴 대신 안정감과 충만감이 있다. 당신은 무한(無限)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경험이 현실이 되면 변화와 결부된 공포는 사라지고 시, 분, 초와 날과 달로 쪼개어진 영원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매순간의 완전성이 본질적인 것이 된다.


이제 명상은 서양 문화의 주류 속으로 진입했다. 연구자들은 침묵과 충만과 영원이라는 주관적 경험을 측정해 내기 위해 과학적 기법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명상자의 생리기능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발휘되는 상태로 전이하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다. 수많은 개인적 연구결과에 의하면, 호흡이 길어지고 산소 소비량이 줄어들며 대사율이 떨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노화와 관계되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스트레스 - 노화현상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 와 관련된 호르몬의 불균형이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노화와 연관되는 다양한 생리상태의 변화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노화과정을 늦추거나 심지어는 역전시키기까지 한다. 초월명상(TM, Transcendental Meditation) - 인도의 스승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가 미국에 전파한, 만트라를 통해 의식을 일종의 초월상태로 이끄는 명상기법 - 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연구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오랫동안 명상을 한 사람은 생리적인 연령이 실제 나이보다 5년 내지 12년 정도 젊은 것이 확인되었다.


20년이 넘도록 계속된 이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노화의 생리적 과정 그 자체를 조작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의식을 통해서만도 바라는 결과가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명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틀 그 자체를 바꾸어 놓는 것이다. 양자 차원에서는, 시간이 그다지 큰 지배력을 지니지 못하는 현실 속으로 마음을 옮겨다 놓는 것만으로도 심장박동이나 호르몬치와 같은 시공간 속의 물리적 사건에 영향을 준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시간이 다양한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의식은 그 모든 차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9. 우리는 모든 변화를 초월한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이 현실을 경험하면 변화는 우리의 지배 아래에 들어온다.


지금 당신이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생리학은 시간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의식에 종속된 것이라는 사실은 당신이 전혀 다른 형태의 기능 - 불사의 생리학 - 을 보유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곧 불변성의 경험을 의미할 것이다. 불변성은 변화의 결과로서는 생길 수가 없다. 그것은 시간에 속박된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초월한 의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러한 전환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 예컨대 당신이 극도로 시간에 쫓기면서 일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 압박감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 언제나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압박감을 창조성과 에너지의 원천으로 이용하여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 떠밀려서 적극적인 동기를 상실하고 중압감을 느껴 스트레스를 보상할 만한 만족을 얻어내지 못한다.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시간의 압박에 휘말리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그로부터 스트레스와 구속감을 느끼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자신을 덮쳐 온다. 그는 내부의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그의 몸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몸 세포는 끊임없이, 온갖 미묘한 방법으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자신을 맞추어 나간다. 생리학자라면, 우리가 수백만의 얽히고 설킨 심신상관적 사건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의 연쇄 속에 끌려 다닌다고 혹은 갇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시간에 얽매인 과정들을 재정돈할 수 있는 어떤 상태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다. 간단한 비유가 이 점을 밝혀 줄 수 있다. 당신의 신체를 뇌와 모든 세포 사이를 왕복하는 신호들의 출력물로 생각하라. 보내지는 신호의 종류를 정하는 신경계는 신체의 소프트웨어 역할을 한다. 온갖 종류의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과 기타 전령 분자(messenger molecule)들을 이 소프트웨어가 처리하는 입력물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눈에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프로그래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어디엔가 있는 것일 틀림없다. 심신상관 체계 속에서는 매초마다 수천 개의 결정이 내려지고 생명의 요구에 부응하게 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택이 내려진다.


만일 내가 인도에서 길을 걷다가 코브라를 보고 겁에 질려서 뒤로 물러섰다면, 이 사건을 제어하는 눈에 보이는 장치는 내가 보인 근육의 반응일 것이다. 그것은 나의 신경계가 보낸 화학적 신호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빨라진 심장박동수와 가빠진 호흡은 뇌하수체에서 보내진 특별한 화학물질(부신피질 자극 호르몬)에 반응하여 부신피질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촉발시킨 것이다. 나의 겁에 질린 반응과 관련된 분자 차원의 작용을 생화학자가 낱낱이 추적할 수 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반응하기로 결정을 내린 눈에 보이지 않는 결정자를 발견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짧은 순간적 반응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도 없이 몸이 혼자 놀라 물러서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땅꾼이라면 흥미롭다는 듯 허리를 구부릴 것이고 힌두교 신자라면 시바 신의 형상을 발견하고 경외감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사실은 ‘그 어떤’ 가능한 반응 - 공포, 흥분, 신경질적 반응, 마비, 무감각, 호기심, 기쁨 등등 - 도 다 일어날 수가 있다. 보이지 않는 프로그래머는 눈에 보이는 신체기관을 프로그램할(어떤 유형의 행동을 하라고 지시할) 수 있는 무한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내가 뱀과 마주치는 순간, 나의 모든 기초 생리기능들 - 호흡, 소화, 대사, 배설, 인식, 사고작용 - 은 코브라가 나에게 지고 있는 ‘의미’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올더스 힉슬리(Aldous Huxley)의 다음 말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경험이란 당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다.”


당신은 이 의미란 것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빠르고 손쉬운 대답은 대뇌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체 기관은 다른 모든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순간마다 뇌 속의 수 십 억의 원자들은 철새처럼 들락거린다. 대뇌는 일평생 단 한번도 동일한 패턴을 보이는 법이 없는 전기파로 회오리친다. 뇌의 기본적인 화학작용은 점심식사에 색다른 음식이 들어왔거나 갑작스럽게 기분이 흔들리면 변이될 수 있다. 그러나 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변화라는 큰 바다 속에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 나의 기억은, 그 기억 위에 서서 말없이 나의 삶을 지켜보며 나의 경험을 참고하여 언제든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즐기는 프로그래머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프로그래머는 단지 선택하는 의식일 뿐이다. 그것은 변화에 압도되지 않고 다만 음미한다. 그러므로 시간에 얽매이는, 일상적 인과의 세계에서 생기는 한계에 제약받지 않는다.


뱀을 무서워하는 ‘나’는 과거 언젠가 그 두려움을 학습했다. 나의 모든 반응은 시간에 얽매인 자아와 그것이 지닌 성향의 요체이다. 1,000분의 1초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프로그램 되어 있던 공포가 일련의 신체적 신호의 연쇄를 일으켜서 그와 같은 반응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의식을 가지고 말없이 지켜보는 결정자(decision maker)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미묘한 경로로,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이 우리가 갓난아이 적 이래로, 설사 변한 것이 있다고 해도 크게 변한 것이 없음을 다들 느끼고 있다. 아침에 깨어나면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어 온 온갖 규정들이 자동적으로 자리를 잡기 전의 순수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행복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으며, 잘난 체하지도 않고 겸손해 하지도 않으며,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다.


아침에 깨어날 때 이 ‘나’는 경험이라는 갑옷을 재빨리 걸쳐 입는다. 수초 내로 나는 자신을 상기한다. 예컨대 나는 마흔여섯 살의 의사이며 아내가 있고 두 자녀가 있고 보스턴 근교에 집이 있고 병원까지는 10분 거리에 있다는 등으로, 이러한 자아의 정체성은 변화의 결과이다. 변화를 초월한 ‘나’는 어디서나 일깨워질 수 있다. 할머니의 요리냄새를 맡고 있는 인도 델리 시의 다섯 살배기 아이, 플로리다에서 야자수 나뭇잎을 흔드는 사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든 살 노인네 등으로.


고대 인도의 성현들이 간단히 ‘진아(眞我)’라고 부른 이 변함없는 ‘나’는 경험에 있어서 나의 진정한 기준점이 되어 준다. 다른 모든 기준점은 변화와 쇠퇴와 상실을 피할 수 없다. 다른 모든 ‘나’의 느낌은 상대적 세계가 부과하는 모든 시간에 얽매인 조건, 예컨대 고통 아니면 기쁨, 빈곤 아니면 부요, 행복 아니면 슬픔, 젊음 아니면 늙음과 동일화되어 있다. 일체의식 속에서는 이 세계는 영혼(Spirit) - 곧 의식 - 의 흐름으로 설명된다. 우리의 지상의 목적은 영혼으로서의 진아와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 정도에 따라서 늙지 않는 몸과 시간을 초월한 마음의 경험이 실현될 것이다.

 

10. 우리는 노화와 질병과 사망의 제물이 아니다. 이들은 풍경의 일부일 뿐 어떤 형태의 변화에도 물들지 않는 지켜보는 자는 아니다.


근원적으로 생명은 창조이다. 당신이 자신의 내면의 지능과 접하게 되면 당신은 생명의 창조적인 핵심에 이른 것이다. 낡은 패러다임에서는 생명의 지배력이 DNA에 주어져 있었다. DNA는 극도로 복잡한 구조의 분자로서, 유전학자들에게조차 그 비밀은 1퍼센트도 밝혀져 있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생명의 지배력이 의식에 속해 있다. 앞에서 열거된 모든 예들 - 성장호르몬의 분비를 차단할 수 있는 아이, 초조감을 느낄 때 인터루킨 생산에 변동이 오는 의대생들, 의지로써 심장박동수를 조절할 수 있는 요기들 - 은 대부분의 기초 신체기능들이 우리의 정신상태에 반응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의 몸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수십억 가지의 변화는 단지 스쳐 지나가는 생명의 광경일 뿐이다. 이 막 뒤에는 지켜보는 자가 있다. 그는 곧 흐르는 의식의 근원이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의식과 함께 시작되고 끝난다. 내가 스스로 정하는 모든 목표와 기대치는 의식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고대의 성현들이 진아라고 한 그것은 현대 심리학 용어로 의식의 연속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일체의식이라고 알려진 의식상태는 의식이 완전한 상태이다. 즉, 가면과 환상과 벌어진 틈바구니와 파편이 없는 자신의 연속체 전체를 간파하는 상태이다.


우리는 의식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하므로 모두가 이런 저런 종류의 틈바구니 속으로 떨어진다. 많은 물질적 존재의 영역들이 우리의 지배를 벗어나 질병과 노화와 사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의식이 파편화되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1970년대 초반에 메닝거 병원에서 행한 유명한 일련의 실험에서 인도의 저명한 영성가인 스와미 라마는 의지로써 자신의 심장박동수를 70회에서 정상치를 크게 상회하는 300회까지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시범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심장박동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리드미컬하게 혈액을 펌프질하지 못하고 일종의 경련상태에 이르렀다. 보통사람이라면 심장의 경련은 심장마비와 기타 심각한, 때로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다. 이런 사고는 해마다 수천 명의 건강한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러나 스와미 라마는 이러한 심장이상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일은 의식의 직접적인 명령하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장박동수가 정상이다가 갑작스러운 이상으로 불과 수분 만에 죽는 사람들(모든 종류의 부정맥, 심장 세동(細動), 심빈박(心頻搏)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이 실제로는 의식의 손상을 겪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우리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비추어 이러한 손상의 원인을 심장근육의 탓으로 돌린다. 즉, 규칙적인 심장박동을 주관하는 전기화학 신호가 교란되었다는 것이다. 심장을 구성하고 있는 수십 억 개의 세포들이 전체의 유연하고 통일된 운동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제각각으로 혼란스럽게 수축하여 심장을 마치 꿈틀대는 뱀이 든 주머니 모양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모든 심장전문의들이 두려워하는 이 끔찍스러운 광경은 2차적인 현상일 뿐이다. 심장세포 가운데서의 의식 손상이 1차적인 원인이다. 이 의식의 손상은 국부적인 손상이 아니라 전반적인 손상이다. 환자 자신이 자신의 모든 몸 세포를 다스리고 제어하는 지능의 심층차원과의 통신로를 잃어버린 것이다. 실상, 모든 세포는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다양한 층의 패턴으로 조직된 지능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스와미 라마와 같은 도인은 우리의 의식이 그처럼 조각조각 파편화되고 축소되어야 할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되면 그는 자신이 이 지능의 흐름의 근원이며 경로이며 목표임을 깨달을 것이다. 세계의 종교 전통이 영(Spirit)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전체(wholeness), 즉 의식의 모든 조각난 파편들을 굽어보고 있는 의식의 연속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질병과 노화와 사망의 제물이 되었다. 의식을 잃는 것은 지능을 잃는 것이고 지능을 잃는 것은 지능의 최종산물인 인체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교훈은 이것이다. 즉, 몸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먼저 의식을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매우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당신의 자아관(自我觀)의 결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해전에서 독일 군인들은 가끔씩 전함이 침몰되어 구명보트에서 며칠, 혹은 일주일씩 구조를 기다려야만 했다. 여기서 어김없이 맨 먼저 죽는 것은 젊은 군인들이었다. 전에도 침몰 당했다가 살아난 적이 있는 베테랑 선원들은 위험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젊은 선원들은 자신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어갔던 것임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이 현상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사례에서 단서를 잡아, 동물실험 연구자들은 실험용 생쥐들을 물탱크 속에 빠뜨리는 등의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빨리 노화시키거나 병들게 하여 죽도록 만들 수 있었다. 한번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는 동물들은 그것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이고는 금방 포기하여 죽어 버린다. 물탱크에 단계적으로 익숙해진 동물들은 그것을 견뎌 내어, 세포가 스트레스에 의해 파괴되는 증세를 보이지 않고 오랫동안 헤엄을 치면서 버틴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노화는 대부분 절망 때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운 상상이 노인들의 높은 발병률과 노인성 치매와 합세하여, 냉혹하며 자기충족적인 기대를 가져다  주었다. 노년은 몸과 마음이 점점 더 허약해지는, 피할 수 없는 쇠약과 상실의 시기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전체는 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깨어나고 있다. 60, 70대의 노인들이 40, 50대의 원기 왕성한 건강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정 - 인간은 늙어‘야만’ 한다는 것 - 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늙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가 낡은 패러다임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서, 의식의 전환이 새로운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낡은 우주관 속에 하나의 사실로서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주관이란 우주의 무한한 에너지를 어떤 논리적인 틀 속에 정돈하는 하나의 방식론일 뿐이다. 노화는 모든 것이 변해 가고 사라지고 죽는 자연계의 틀 속에서는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지능의 끝없는 흐름이 온통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 속에서는 그 합리성을 상실해 버린다. 어느 쪽의 관점을 받아들일 것인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당신은 장미꽃이 피었다가 시드는 것으로 보기로 할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을 끝없는 생명의 물결로 보기로 할 수도 있다. 다음해에는 그 장미의 씨앗에서 싹터 나온 새 장미를 보게 될 것이므로.


물질은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유폐된 순간이다. 우리 자신과 우주를 유물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우주의 유폐된 측면이 과도한 중요성을 지니게 만든다. 이 책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나는 여러분들의 우주관이 바뀔 때 존재란 것이 얼마나 유연하고 힘들지 않는 것일 수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몸은 고형적인 물리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흡사 강과도 같다. 헤르만 헤세가 영적인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에서 아름답게 묘사해 놓았던 그 신성한 강 말이다. 이 책 속에는 깨달음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 싯다르타가 마침내 자신의 평화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여러 해를 방랑하던 끝에 그는 넓은 니란자 강가에서 발을 멈추는데 그때 내면의 소리가 이렇게 들려온다. ‘이 강을 사랑하라. 그 곁에 머물러 그로부터 배움을 얻으라.’ 나에게는 이 속삭임이 생명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는 나의 몸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강과도 같이, 나의 몸은 순간의 바뀜과 함께 변화하며, 만일 내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 어떤 공백도, 새삼스러운 고통을 일으킬 과거의 어떤 아픈 기억도, 두려움을 가져올 미래의 상처에 대한 예상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를 떠받쳐 주는 생명의 강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너무나 겸손하여 우리의 인식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몸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면, 힘 있는 어떤 지능이 그 속에 우리와 함께 깃들여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학문적인 지능이 아니라 하나의 세포 속에 짜여 들어 있는 수백만 년의 지혜에 버금가는 그런 것이다. 학문적인 지식은 그처럼 웅대하지는 못하다. 싯다르타는 그 강에 귀를 기울이고 배우기를 원했다. 이 점이 지극히 중요하다. 당신이 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려면 몸의 흐름과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낡은 관점이 간과해 왔던 지식에 대해서 기꺼이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헤세는 이렇게 글을 이었다. “그에게는, 이 강과 그 비밀을 이해하는 자는 누구나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많은 비밀들을, 아니 모든 비밀을 이해하게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당신에게 일어난 것은 모두 당신의 몸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가능성 또한 그 속에 있다는 것이다. 노화는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대부분 당신의 몸이 배워 온 것이다. 신체는 프로그래머인 당신이 입력시킨 것을 수행하도록 배워 왔다. 이 프로그램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당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신념과 가정에 지배받는 무의식적인 것이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물질세계를 가져다 준 사념체계를 모두 허물어뜨리는 일이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체적 자아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친숙한 경험 속에 가장 개인적인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에 대해서 편안해지면, 질서가 엔트로피와의 싸움에서 자꾸만 밀릴 때 모든 것 위에 덮쳐오는 공포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믿도록 배워 온 세계는 그런(질서가 엔트로피 앞에서 밀리는) 세계이다. 그러나 또 다른 방식이 있고 다른 세계가 있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강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행자인 바수데바에게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네도 강의 비밀을 깨달았는가?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야.”



바수데바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퍼졌다. “그렇다네, 싯다르타. 자네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강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지. 그 근원에도, 하류에도, 폭포에도, 나루터에도, 흐르는 줄기에도, 바다에도. 그리고 강에게는 과거의 그림자도, 미래의 그림자도 없이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것 말일세.”


“바로 그거야.”하고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았고 그것 또한 하나의 강이었네. 어린 싯다르타와 젊은 싯다르타, 그리고 늙은 싯다르타는 실재가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에 의해 분리된 것일 뿐이었지.”


그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으나 바수데바는 그저 환한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수세기에 걸쳐 물질주의가 조장해 온 망상은 우리가 강을 정복하여 그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로부터 얻는 유일한 것은 죽음일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의 삶이 더욱 더 큰 경험의 장으로 확장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 속에 집약되는 에너지, 정보, 그리고 지능에는 한계가 없다. 이러한 무한의 창조성은 그 육적인 형태로서 당신의 세포 속에 육화되어 있다. 또한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서, 말해지지 않았으나 가능한 모든 의미, 가능한 모든 진리, 가능한 모든 창조로 충만해 있는 공(空), 즉 마음의 침묵 속에 표현되어 있다. 모든 원자의 핵심 속에 존재하는 공은 우주의 자궁이다. 두 개의 뉴런이 상호 작용할 때 명멸하는 사념 사이에 새로운 세계 탄생의 기회가 존재한다. 이 책은 시간의 호흡이 시들지 않고 오직 새로워질 뿐인 바로 그 침묵의 탐사에 관한 것이다. 아무도 늙지 않는 땅을 찾으라. 그곳은 다름 아닌 당신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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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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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의 빛에 대한 체험

 

 

 

 

그대여, 이 순간에 모든 것은 구름 없는 텅 빈 하늘과 같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티 없이 맑은 그대의 마음은

중심도 둘레도 없는 허공과 같다.

이 순간 그대는 그대 자신의 참나를 알라.

그리고 그 빛 속에 머물러 있으라.

 

 

 

그대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의식을 집중하라.

 

허공처럼 많은 생명 가진 모든 것들에게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리라.

현상계에서 모든 상대성이 사라진

그 절대의 세계로부터 큰 기회를 잡으리라.

존재의 근원과 하나가 되어

어떤 모습으로든지 모든 생명가진 존재들에게

이익이 되고 무한한 허공처럼 다함없는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을 위해 나는 일하리라.

 

지금 순수한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빛을 체험하고

그 상태에 오래도록 머무리라.

 

현재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이다.

그것은 본래 텅 빈 것이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붓다임을 깨달으라.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본래 텅 비어 있고 아무런 모습도 갖지 않은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이 곧 그대의 마음이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고 더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세계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그 하나됨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빛

아미타바(아미타불)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나며,

저 큰 빛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이것을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다.

본래 텅 빈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붓다임을 깨닫고,

그것이 곧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임을 알 때

그대는 붓다의 마음상태에 머물게 되리라.

 

그대의 순수의식이 투명한 빛을 깨닫고

존재의 근원과 영원히 하나가되어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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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마음의 다르마카야( 法身)를

그대는 보게 되리라.

 

그것을 보면 그대는

모든 것을 보게 되리라.

 

끝없는 통찰력과

생과 사의 윤회와

대자유의 경지를.

 

 

 

티벳의 성자 밀라레빠, <제췬 카붐> 제 12장

라마 카지 다와삼둡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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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과거의 무의식과 어둠(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

 깨달음과 자유의 상태로

인도되는 것이며,

주어진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하고 승리하는 것이다.

 

 

깨달음 : 마음의 텅 빈 충만이 곧 불성임을 알고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생각임을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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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이다.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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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각들을 창조해내는 근원에는

참된 의식이 있다.

 

텅 빔은  모든 생각과 모든 설명을 초월한 경지이다.

 

하지만 그것은 낱낱의 사물들로 모습을 나타낼 만큼

 생명력으로 충만한 것이며,

그 텅 빈 충만이

인간의 영혼 속에는 깃들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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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자신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빛 아미타바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나며,

저 큰 빛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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