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  오도송

 

 

 

 

 

참으로 노력하는 수행자에게

 

 

 

오! 무명의 원인과 함께

행(行) 등의 연기에 속하는 결과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관찰하여 모든 의심 사라졌네.

 

무상 고 무아의 본성을 명백하게 보았노라.

깨달음의 조건이 드러나자 모든 번뇌 사라지고

지혜의 밝은 빛 찬란하게 빛나네.

 

집(육체) 짓는 자가 누구인가를 찾아

수많은 생을 헤매며

거듭거듭 태어남은 고통이어라.

 

아! 드디어 찾았네.

집 짓는 자가 누구인가를

그는 바로 욕망 이어라.

집의 서까래(오온)는 무너지고

대들보(무명)는 갈라졌네.

 

이 마음은 지금 모든 환영에서 깨어나

대 열반에 이르렀고

욕망의 소멸 이루었네

 

 

 

 

 

 

 

 

 

칼릴지브란과 예언자에 대하여

 오쇼 라즈니쉬

 

 

 

 

 

칼릴 지브란...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황홀하고 기쁘다.

그에게 견줄  만한 다른 이름을 떠올린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단순히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가슴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과 맞닿아  있다.

칼릴 지브란, 그는 순수한 음악, 하나의 신비이다.

오직 시인만이 그를 이해한다. 그것도 어쩌다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대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세상이 여러 번 바뀌고,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칼릴 지브란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으로도 과연 그처럼 인간의 영혼 깊은 곳을 꿰뚫어볼 줄  알고, 또한 우리를 둘러싼 미지의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간직한 인물이 나타날지 나는 자신할 수 없다.

 

  칼릴 지브란, 그는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이다.

인간의 언어로 비록 한 조각이나마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인간의 언어와 의식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신비가, 시인, 창조적인 영혼들이 칼릴 지브란을 통하여

손을 맞잡고 노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도  그는 그것이 진리 전체가 아니라, 진리를 흘끗 들여다본 것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대여, 진리를 흘끗 들여다 보는 일이 바로 그대를 궁극의 진리, 절대 진리, 우주적인 진리로

인도하는 순례의 첫걸음이다.

 

역시 아름다운 사람인 클로드 브래그든(Claude Bragdon)은 칼릴 지브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의 힘은 어떤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에서 솟아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우주적이고 무한한 힘이 나올 리가 없다.

하지만 그  힘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한 웅장하고 찬란한 언어는 오로지 칼릴 지브란 자신의 것이다."

나는 브래그든의 이 말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한 송이  아름다운 꽃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별들이 찬란한 하늘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충분히  그것들을 감상할 수 있다. 나는 동의하는 것과 감상하는 것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둔다.

그리고 만일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깨인 사람이다. 만일 그 차이를 구분할 줄 모른다면,

그는 아직 원시적이고 미개 의식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브래그든이 한 말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한다.

동시에 나는 그가 한 말이 단지 추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그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는 말한다. "그의 힘은 어떤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에서 솟아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우주적이고 무한한 힘이 나올 리가  없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이론적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체험의 뿌리가 없다.

그는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칼릴 지브란을 통하여 흘러나온다는  것을 느끼지만, 확신할 수가 .

또한 확신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다. 자신이  체험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칼릴 지브란의 아름다운 언어에 무한한 감명을 받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한 편의 시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위대한 영적 생명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 그 자신은 그것을 맞보지 못했다.

그는  칼릴지브란을 사랑하지만, 칼릴 지브란으로 살지는 못한 것이다.

 

나에게는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에 대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그대에게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먼저, 그는 확실히 위대한 시인이다. 어쩌면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시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신비가가 아니다.  시인과 신비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쩌다가 시인은 문득 신비가의 자리에 있게 된다. 그 드문  순간에, 장미꽃이 그에게 쏟아져 내린다.

매우 드문 그 경우에, 시인은 거의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와 같은 깨달은  사람이 된다.

하지만 기억해 두라, 나는 '거의'라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드문 순간들이 왔다가 가버린다. 그는 그 드문 순간들의 주인일 수가 없다.

그  순간들은 산들바람과 향기처럼 왔다가, 그대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 가버린다.

시인의 천재성이란 바로 그러한 순간들을 언어로 포착하는 일이다.

그러한 순간들은 그대의 삶 속에도 역시 찾아온다. 그것들은 거저 나누어 주는 존재의 선물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대 내면에 진리 추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섬광이다. 

언젠가는 그러한 순간이 바로 그대의 삶 자체가, 그대의 피와 뼈와 골수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것으로 숨쉬게 될 것이며, 그대의 심장은 그것으로 고동칠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절대로  잃어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대 자신이 원한다고 해도.

시인은 몇 순간만 신비가이며, 신비가는 영원히 시인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의문을 낳는다.

아무도 그 의문을 풀지 못했다.

 

여기 한 가지 해답이 있다. 이  의문은 수없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시인은 섬광과도  같은 몇 순간만을 체험하는 데에도 그토록  많은 아름다움과 그토록 많은 시를  창조할 수 있다.

그의 손이 가 닿는 순간 단어들은 생명을 얻고 살아난다. 그런데 신비가들은 어째서 그러한 시들을 쓸 수가 없었는가?

그들은 하루 스물네 시간을 밤낮으로 그러한 창조적인 상태 속에서 지내지만, 그들의 언어에는 시인 같은 아름다움이 없다.심지어 고타마 붓다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도  칼릴  지브란이나  미하일  나이미(Mikhail  Naimy),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 같은 시인의 말에는 훨씬 못 미친다. 이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단지 몇 순간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것을  창조하는데,

자나깨나 우주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왜 그렇지 못한가?

왜 그들은 칼릴 지브란과 같은 시를 쓸 수 없었는가?

리고 아무도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만일 어떤 거지가 금광을 발견한다면, 그는 좋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왕이라면  그렇지 않다. 시인은 잠시만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잠시만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가는 잠깐만 우주의식과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주의식 자체가 되어 버렸다.

되돌아올 길이 없다. 

섬광과도 같은 몇 순간들은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들은 단지 이슬방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신비가는 바다가  되었다. 그래서 침묵이 곧  그의 노래이다.

모든 말이 무력해지며, 어떤 식으로든 그의 체험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바다는 너무나 넓으며, 그는 계속해서 그 바다와 하나다.

자연히 그는 자신이 그 바다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창조하기 위해서는, 창조하는 그대가 거기 있어야만 한다.

노래부르기 위해서는, 노래부르는 그대가 거기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신비가는 노래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의 시이다. 그대는 그것을 인쇄할  수도, 그것을 그릴 수도 없다. 

단지 그것을 마실 수 있을 뿐이다.

 

시인을 만나는 것과 신비가를 만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시인과의 만남부터 시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대가 만일 이슬방울조차 맛보지 못했다면, 바다는 아직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면 더 정확히 말해서, 그대가 아직 바다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대에게는 그 이슬방울만으로도 드넓은 바다처럼 느껴질 것이다.

내가 칼릴 지브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며,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시 자체이다. 나는 화가가 아니라, 그림 그 자체이다.

 

  여기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동양의 어떤 왕이 나라 안팎의 모든 화가들에게 실물과 똑같이 보이는 그림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다.

"만일 그대들이 문을 하나  그린다면, 단순한 그림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진짜 문인 줄 착각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그림을 나는 갖고 싶다.

그만큼 사실적이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그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왕국 전체를 원한다면 그것도 기꺼이 주겠다." 

수천 명의 화가들이 궁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열심히 그렸다... 

그러나 어떻게 실제와 똑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 화가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누구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까지 그려야 한다는 시간적인 제약도 없어야 한다.

또한 종이 위에  그 그림을 그리지도 않을 것이다.  궁전 안의 큰 벽에 그리겠다.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는 누구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 완성된 그림은 왕이 맨 먼저 보게 될 것이다.

조건이 받아들여졌다. 거의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이제 왕은 많이 늙었지만,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는가?

왕은 약속을 지켰다. 6년이 지난 뒤, 화가가 왕에게로 와서말했다.

"이제 들어와도 좋습니다."   화가가 왕을 방으로 데리고 갔다. 왕은 믿을 수가 없다.

정말로 사실과 똑같은 그림이  벽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림 속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있고,

나무들 사이로 좁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왕이 물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가?" 화가가 말했다. "당신이 직접 걸어가 보십시오..."

이 이야기를 믿든지 안 믿든지 -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 화가는 왕과 함께 그림 속의 길로 걸어들어갔으며, 영영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을 역사적은 실제 사실로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대는 핵심을  놓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진실된 이야기이다.

참된 화가는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아 없어지며, 참된 시인은 자신의 시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창조는 신비가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신비가는 자신이  창조한 것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그에게는 자신의 그림에 또는 자신의 시에 서명조차 할 시간이 없다.

시인은 그렇게 할 수가 있다. 잠시 창문이 열려 그 너머를 보고 난 뒤 다시 창문이 닫혀버리기 때문이다.

 

칼릴 지브란은 30권 가까이 되는  책들을 썼다.

이제부터 우리가  읽어나갈 이 <<예언자(The Prophet)>>는 그의 첫 번째 책이다.

그 나머지는 전부 휴지 조각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가 이 작품을 썼을 당시 그는 아주  젊은, 불과 스물한 살의 나이였다.

따라서 갈수록 더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만하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하려고  매우 열심히 노력했다.

평생 동안 그는  글을 썼지만, 그 어떤 작품도 <<예언자>>의  아름다움과 진리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어쩌면 창문이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우연한 기회에 신비가가된다. 은 단지 우연에 의한 것일뿐이다...

산들바람이  불어오지만, 그대가 불어오게 한 것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 이 <<예언자>>는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이 되었다.

- 더 나은  것을 쓰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바로  여기서 그는 실패한 것이다.

그에게 매우 간단한 진리 한 가지를 말해 줄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그대가 <<예언자>>를 썼을 때 그것은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절로'써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대는 그러한 작품을 쓰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지, 그대가  '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그  일이 일어나는 그릇이었을 뿐이다.

그대를 통해 흘러나온  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어린애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듯이... 어머니가 그 아이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단지 통로 역할만을  했을뿐이다.

<<예언자>>는 그대의 행위, 그대의  머리,  그대 자신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흘러나온 매우 드문 작품이다.

실제로 그대가 사라질 때만이, 그러한 일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그대가 내버려 둘 때만이,

그대가 도중에  가로막고 있지 않을  때만이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

긴장을 다 풀고 있기 때문에 그대가 방해자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은 그토록 귀하고 드문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그대는  칼릴 지브란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다. 그는 우주가 자신을 통해  흘러나오도록 내맡겼다.

그는 단순히 하나의 그릇, 통로였다. 피리 부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텅 빈 피리였다.

내 체험에 의하면, <<예언자>>와 같은 책은 그대가 말하는 소위  성스러운 책들보다훨씬 성스러운 책이다.

그리고 이러한 책은 순수한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종교를 탄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책은 그대에게 어떤 의식 절차도 주지 않는다. 어떤 계율도 교리도 주지 않는다.

단지 그들에게 일어났던 똑같은 체험을 그대에게도 순간이나마 맛보게 해줄 뿐이다.

그 체험 전부터는 말로 표현되지가 않는다.

그러나 약간은... 어쩌면 장미 전체는 아닐지라도 몇 개의 꽃잎만큼은 가능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장미가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다만 그대의 창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이따금 산들바람이 꽃잎들을 불어다  줄수 있다.

그대의 존재 속으로 부는 산들바람에 실려오는 그 꽃잎들은 실제로 미지의 세계로 의 초대이다.

신이 그대에게 긴 순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순례를 떠나지 않는 한  그대는 여전히 무의미한 삶 속에서 질질 끌려가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가슴 속에는 웃음이 없다.

 

  칼릴 지브란은 '알무스타파(almustafa)'라는  가상의 이름을 지어냄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을 피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의 시작이다. 알무스타파가 바로  그 예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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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A

(Infi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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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out Hori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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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체험(Unitive Experience)

 

 

일체지향적 상태의 통찰에 따르면, 우주는 분리된 개체를 지어내는 무한한 가능성과 똑같은 정도의 풍부하고

빈틈없는 기회를 경계를 소멸시키는 과정에도 제공함으로써, 근원으로의 회귀를 매개한다.

 

이런 통합 체험들 덕분에 개별 의식체들은 소외감을 극복하고 자신이 분리되었다는 착각에서 벗어난다.

지금까지 절대적 경계로 여겨졌던 것들을 초월하여 점진적 통합을 이뤄갈수록 개체는 점점 더 크게 확장된다.

그리고 그 끝에서는 모든 경계가 소멸되고 절대의식과의 재통합이 일어난다.

이처럼 무수한 차원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잇달아 일어나는 통합과정은 우주적 춤의 완전한 한 주기를 완성한다.

 

 

통합 체험은 자연 또는 인간의 창조물에서 극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가장빈번하게 일어난다.

별들로 가득한 하늘의 무한함, 거대한 산맥의 장엄함, 사막의 무시무시한 정적등이신비체험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랜드캐년, 거대 폭포, 유명한 석순동굴등 자연의 경이로움과 맞닥뜨린 사람들은 그 장엄함에 압도당하고

불가사의한 황홀경에 빠지곤 한다.

겉으로는 절대적 위력을 행사하면서 깊은 곳에서는 고결한 침묵을 지키는 바다도 절정 체험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천으로 꼽을 만하다.

아름다운 일몰, 마법같은 북극광, 개기일식 등을 바라보는 일도 깊은 통합체험을 일으킬 수 있다.

신비적 자각을 일깨우는 데 꼭 이렇게 큰 규모의 사건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제 거미집을 뱅뱅도는 거미 한 마리 또는 공중에서 날갯짓하는 채로 꽃의 꿀을 빨아먹는 벌새 한 마리처럼

사소한 광경들이 신비체험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최고의 에술품을 체험하는 일도같은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

창조적 작업에 깊히 몰두한 작업가, 공연중인 연주자, 그리고 객석의 청중은 때때로 자신의 경계를 잃고 말뜻 그대로

음악과 하나가 된다.

그들은 그저 음악을 듣는다기 보다는 실제로 음악이 된 듯한 느낌에 빠진다.

훌륭한 무용가들은 무대에서 더 이상 춤추는 사람과 춤이 구별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다.

역사상의 모든 문명에서 전해오는 위대한 조각과 그림과 온갖 미술품들도 예민한 사람들에게 비슷한 영향을 미친다.

  

 

 

 

 

 

 

 

 

 

 

 

 

 

가슴의 에너지장과 하나 되기

 

 

 

 

당신이 저 먼 곳의 별을 하나의 가슴으로 볼 때,

그것 또한 당신을 하나의 별이자 가슴으로 본다.

당신이 죽어가는 아이에게서 불멸하는 가슴을 볼 때,

그 아이 또한 당신의 영원한 가슴을 진심으로 축복해 준다.

당신이 건강한 세포를 하나의 가슴으로 볼 때,

그것 또한 당신을 자신의 확장으로 본다.

이러한 인식들은 진동하는 사랑의 현(string)이 되어 우주의식과 연결된다.

이러한 마음의 가닥들은 빛으로 공명하는 가슴의 에너지장과 우리를 하나로 엮는다.

이러한 에너지의 필라멘트들은 일체성의 깨달음이 된다.

가슴의 에너지장 속에서, 이처럼 장엄한 가슴의 씨줄과 날줄을 느끼고 그려보라.

그것을 통해 울려 퍼지는 영원함, 순수함, 생기, 사랑을 상상해보라.

이것이 바로 '근원'의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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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 보라.

모든 가슴은 당신의 존재를 알고 지켜보고 있다.

그 관심과 사랑을 빠짐없이 수용하고,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달하라.

주고, 받고, 또 주고, 또 받으라.

가슴의 빛이 가득 들어와 당신을 빛나고 또 빛나게 한다.

당신은 참된 자아를 기억해낸다.

그러한 파동은 흘러넘치고 또 쏟아져 나와 온 우주로 번져간다.

이제 더 큰 사랑이 당신에게로 온다.

주고, 받고, 또 주고, 또 받으라.

거대한 가슴은 파동을 통해 모든 가슴을 고동치게하고 일깨운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보살피는 영이 있다고.

 

- 감응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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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eaming Of Andromeda [Jean F. Cochois Remix]

 

 

 

 

 

 

 

빛몸 명상하기

 

 

당신은 에너지와 의식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존재이다.

당신은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고,

이 우주는 창조의 흐름과 완벽하게 손발을 맞춘다.

당신은 본질적으로 빛이다.

" 내안의 빛은 당신 안의 빛을 알고 사랑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영적에너지를 투명한 다이아몬드 빛으로 보게 되었다.

그것은 걸림이 없고, 한계가 없으며, 눈이 부시게 맑고 밝다.

 

 

 

 

 

 

 

 

다이아몬드 빛몸의 심상화

 

 

1. 생각을 멈추고, 몸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고, 지금 이 순간 속에 백 퍼센트 존재하라.

    고요함 속에서 마음을 열라.

    그리고 긍정적인 경험의 목록들을 떠올려보라.

 

2. 당신의 등 뒤에 다이아몬드 빛몸이 나타났다고 상상해보라.

    그것은 당신과 꼭 닮았지만, 순수하고 투명한 빛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흠이나 장애도 없다.

    당신의 다이아몬드 빛몸은 지혜, 사랑, 조화, 풍성한 앎을 발산하고 있다.

    그 빛몸이 다가와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3. 상상 속에서 그 빛몸의 높은 주파수를 느껴보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주파수에 동조되어보라.

    그때 당신의 빛몸은 당신의 몸속으로 걸어들어오고, 아무런 걸림도 없이 당신과 하나가 된다.

 

4. 당신의 빛몸은 당신의 육체와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빛몸의 모든 부위가 그에 상응하는 신체 부위로 찾아든다.

    빛의 심장은 육체의 심장과, 빛의 세포는 육체의 세포와, 빛의 뇌는 육체의 뇌와 하나가 된다.

    이 과정이 일어나는 동안, 당신의 몸의 각 부위들을 시간을 들여 흝어보라.

 

5. 당신 자신을 그 빛 몸에 내 맡기면서 이렇게 말하라.

    " 당신은 나의 뇌, 나의 심장, 나의 폐, 나의 손, 나의 목소리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아십니다.

      당신의 방식대로 하십시오.

      나는 당신이 나를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고, 가르쳐줄것을 믿습니다."

 

6.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당신의 빛몸에 내맡기고 그 안내를 따르는 동안, 빛몸은 당신을 탈바꿈시킬 만큼 강력해진다.

    당신은 이제 다이아몬드 빛몸 자체가 되었다.

    당신의 정체성이 바뀌었다.

    당신은 빛몸에게서 들려오는 그 안내의 목소리가 실은 자신의 목소리 였음을 깨닫는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이 실재인지를 안다."

 

7. 당신의 모든 세포는 물론이고 감정과 감각, 생각까지도 빛몸으로 가득 채우라.

    빛몸이 당신의 육체와 두뇌를 다스리고, 어둠을 밝히고, 분리된 틈새를 메우고, 모든 신체조직을 향상시키고,

    근심과 걱정을 지우고, 새로운 길을 열고, 높은 주파수에 맞춰 당신을 재조직하게 하라.

    침묵속에 머물라.

 

8. 이제 그 다이아몬드 빛몸의 진동을 소리굽쇠처럼 울려서, 그 빛과 근원의 파동이 온몸 곳곳으로 퍼지고

    당신의 피부를 넘어 주변의 공간까지 흘러가도록 하라.

    그것이 우주 속에서 원하는 만큼 확장되도록하라.

    확장된 당신의 다이아몬드 빛은 모든 곳에 편재하는 다이아몬드 빛과 만나고 합쳐진다.

    그 빛의 중심에서, 당신은 영원불멸하는 영혼의 소리와 근원 주파수를 듣고 느낄 수 있다.

 

 

 

 

 

 

 Farid Farjad - Gnossienne  No.1

 

 

 

 

진동속으로 빠져들기

 

2010.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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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상태는 가장 높은 상태이다.

가장 고요한 상태는 가장 빠른 상태이다.

가장 진실하고, 자애롭고, 상호연결된 감정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것이다.

사랑이란 그 무엇보다 창조적이고 활기찬 주파수이다.

진리란 당신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사랑이다.

조화란 모든 생명의 진동과 화합하고 어울리는 사랑의 공명이다.

 

당신의 마음이 진동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진동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고,

당신의 영혼이 고요함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절대적인 일체성과 사랑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주파수들의 향연을 즐기고, 고요히 음미하라.

주파수를 통해 창조하는 존재가 되고, 고요히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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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 Spheeris - Love & Understanding 

 

 

웃음

 

웃음은 뇌에서 발생하는 사고에 의해서 촉발된다.

좌뇌는 감각이 받아들이는 괴상하거나 역설적인 정보를 소화하지 못한다.

(좌뇌는 계산하고 추론적인 논리적 기능을 담당한다.) 허를 찔린 좌뇌는

즉시 고장 상태에 빠지며, 받아들인 이질적인 정보를 우뇌에 보낸다.

(우뇌는 직관적 예술적 사고를 담당한다).

이 정체불명의 소포를 받게 된 우뇌는 순간적인 전류를 보내러 좌뇌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한편, 그 사이에 자신은 이정보에 대해 개인적이고도

예술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평소에는 항상 깨어 있는 좌뇌의 순간적인 활동정지는 즉시 대뇌의 이완과

엔도르핀(이 호르몬은 사랑의 행위를 할때도 나온다)의 분비를 초래한다.

역설적인 정보가 좌뇌에게 거북하게 느껴질수록 우뇌는 더 강한 전류를

보내게 되고, 엔도르핀의 분비량은 더욱 많아진다.

 

동시에 이질적인 정보가 야기하는 긴장상태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 메카니즘으로서, 온몸이 몸의 긴장완화에 참여한다. 허파는 공기를

체외로 세차게 배출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운음의  <신체적>과정의 시작

이라 할 수 있다. 이어 광대뼈 근육 및 흉곽과 복부의 단속적인 움직임으로

몸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몸의 더 깊은 곳에서는 심장근육과 내장이

경련을 일으킴으로써 일종의 체내메세지를 발출하여 복부 전체의 긴장을

푼다. 이 이완이 심하면 때로는 괄약근까지 풀어지게 된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정신은 역설적 혹은 이질적인 성격의 뜻밖의 정보를

소화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의 활동을 정지시킨다. 즉, 고장상태로 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고는 가장 기묘한 쾌락의 원천이 된다. 더 많이

웃을수록 우리의 건강은 더 좋아진다.이 활동은 노화를 늦추고 스트레스를

감소시켜 준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6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 신"  6권에서 옮김 

 

 

 

 

인간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일부이며,시간과 공간의 한계속에 갇혀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생각과 감각이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 분리된 것이라고 느끼는데,

사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일으킨 일종의 착시 현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환상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감옥이며,

이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 욕망만을 추구하며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이 감옥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 공감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모든 생명체와 찬연한 자연 전체를 끌어안아야 한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신" - 제5권 서두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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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강가에서~

2009.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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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빠른 사람들은 사라진 솔로몬의 보물을 찾아 나섰다.

머리가 빠른 사람들은 잊혀진 솔로몬의 지헤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아무도, 어느 것도 찾지 못했다.

입이 빠른 사람들이 퍼트린 소문만 자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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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 강론

서양의 붓다


오쇼라즈니쉬 강의 / 손민규 옮김


Much learning does not teach understand.

You could not discover the limits of the soul even if you

traveled every road to do so such is the death of the meaning.


많은 학식도 이해를 가르쳐 주지는 못하네,

모든 길을 여행해 보아도

영혼의 한계를 발견할 수는 없으리니,

그 의미는 너무나 깊고 깊어라.

 

하나, 숨은 조화 - The hidden harmony


드러난 것보다 숨은 조화가 훨씬 낫다.


대립은 화합을 가져오고

불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생겨난다.


만물은 변화 속에서 안식을 발견 하나니

자신과 불화를 이루는 것이

어떻게 자신과 일치되는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수금(竪琴)과 활의 경우처럼

구부러진 등에도 조화는 있다.


활의 이름은 삶이지만

그 일은 죽음이다.


(사랑은 계속되는 허니문의 관계를 말한다. 허니문이 끝나고 모든 것이 안정되면 그것은 이미 죽은 사랑이다, 안정된 모든 것은 죽은 것이다. 삶은 안정이 없는 움직임을 통해 유지 된다. 안전한 것은 이미 무덤 속에 묻힌 것과 같다.)

 

둘, 잠들어 있는 사람들 - Fast asleep even while awake


인간은 잠들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동안에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귀머거리와 같다

아무리 그들이 듣는다 해도.

그들에게는 이런 말이 어울린다.

“그들은 어디에 있건 그 자리에 있지 못한다네.”


잠든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


깨어난 사람들은 공통된 하나의 세계관을 갖지만

잠자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적인 세계를 갖는다.


깨어있을 때에는 무엇을 보든 죽음이고,

잠자고 있을 때에는 무엇을 보든 꿈이다.


(사랑을 통해 비상할 때, 그 사랑은 아름답다. 반면, 사랑을 통해 추락할 때 그 사랑은 더럽고 추하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대는 이 사랑이 독약이라는 것을 곧 깨달을 것이다. 그 사랑은 구속이 된다. 그대는 사랑의 올가미에 걸렸다. 자유가 파괴되고 날개가 잘렸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 사랑에 빠짐으로써 그대는 소유물이 된다. 그대는 상대방을 소유하는 동시에 상대방이 그대를 소유하도록 허용한다. 그대는 물건이 된다. 그리고 상대방을 물건으로 전락시키려고 애쓴다.)


예수는 말한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장사 지내게 하라.”

시간이 세상이라면 영원은 신이다. 수평적 차원이 세상이고 수직적 차원이 신이다.

“신이여 당신 뜻대로 하소서”

시간 속에서 죽어라. 그러면 영원 속에서 부활한다.

마음의 세계에서 죽어라. 그러면 의식의 세계에서 살아난다.

생각의 차원에서 죽어라. 그러면 각성의 차원에서 태어난다.

 

셋, 지혜는 하나다 - Wisdom is one and unique


이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들,

중용을 지키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중용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덕이다.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행하며,

사물의 본질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데

지혜가 있나니.


로고스가 아니라 내말에 귀를 기울여

만물이 하나임을 시인하는 것이 지혜다.


지혜는 하나다.

만물을 조종하는 지성,

만물을 통하여 그 지성을 아는 것이 지혜다.


지혜는 유일무이하다.

이 지혜는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않는 동시에

또 그렇게 불리기를 바란다.

 

넷, 신은 낮인 동시에 밤이어라 - God is day and night


신은 낮인 동시에 밤이며,

겨울인 동시에 여름이다.

그는 전쟁인 동시에 평화이며,

풍족함인 동시에 결핍이다.


바닷물은 순수한 동시에 불결하다.

물고기에게는 마실 수 있으며 유익한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마실 수도 없고 치명적인 것이다.


낮과 밤의 본질은 하나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하나이며 똑같다.


잠자는 사람들도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에

동참하고 협조한다.


원안에서 시작과 끝은 하나다.


신은 인격체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의 문이 될 것이다. 특히 유태교인, 기독교인, 모하메드 교인들은 신을 인격체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이것이 문을 닫아 버린다. 신을 인격체로 보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다. 성경에서는 신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 인 것 같다. 인간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창조했다. 그런데 인간은 제각기 다르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은 에너지이다. 신은 절대적인 각성이다. 신은 지복이며 환희다. 정의 될 수도 없고 한계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원히 존재한다. 신은 전체를 의미한다.


선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도의 길로 들어가기 전에 강은 강이고, 산은 산이다. 도의 길로 들어서면 강은 강이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하면 다시 강은 강이고 산은 산이다”


인간이 곤경에 처한 것은 항상 선택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항상 균형을 잃고 있다. 모든 사회와 문명이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모든 것을 선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성 우월적인 사회, 전쟁 지향적인 사회를 만들었다. 여자는 완전히 무시당한다. 여자는 끼어들 여지조차 없다. 여자는 어둠, 평화, 침묵, 수동성, 자비다. 여자는 만족이지 욕망이 아니다. 반면 남자는 욕망이다. 남자는 흥분, 모험, 전쟁이다. 항상 어디론가 헤매고, 어딘가에 도달하 려 하고, 항상 무엇 인가 찾아다닌다. 남자는 방랑자이고 여자는 가정이다. 이 둘이 만날 때, 방랑자와 가정, 욕망과 만족, 능동성과 수동성이 만날 때 최고의 조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숨은 조화다.

 

 

다섯, 그 의미는 너무나 깊고 깊어라 - Such is the depth of its meaning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임의적인 추측을 만들지 말자.


많은 학식도 이해를 가르쳐 주지는 못하네.


금을 찾는 사람들은

깊이 땅을 파헤치지만

얻는 것은 거의 없으리라.


모든 길을 여행해 보아도

영혼의 한계를 발견할 수는 없으리니,

그 의미는 너무나 깊고 깊어라.


어떤 것에 전적인 관심을 쏟을 때, 그것이 진지함이다. 어떤 것을 수단으로 보고 관심을 기울일 때 그대는 교활하다. 그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대는 착취한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길을 이용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길이 곧 목적지다. 종교적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디에 있건 그곳이 목적지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이 사람이 목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의 삶 전체가 내게 집중되어 있다. 달리 갈 곳이 없다. 이 순간을 전체적으로 즐기고 누려야 한다.

이런 사람이 종교적인 사람이다. 그는 어디로 갈지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아침 산책을 즐길 뿐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직장에 출근할 때와 아침 산책을 나갈 때 같은 길을 걷는다고 하자. 길은 똑같다. 모든 것이 똑같다. 집도 똑같고 그대도 똑같다. 그대의 다리도 똑같다. 그러나 아침 산책을 나갈 때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종교적인 사람은 아침 산책을 하듯이 살아간다. 그리고 비종교적인 사람은 직장에 나가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는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세속적인 사람은 목적을 지향한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상관없다. 세속덕인 것이든 신이든 그는 목적을 지향한다.

반면, 비세속적인 사람은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산다.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집중된다. 이때 지금 이 순간은 무한(無限)이 된다. 아무리 많은 길을 걸어도 무한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남는다. 이것이 아름다움이다. 만일 도달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만일 그대 자신을 알 수 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때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 권태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권태는 결코 오지 않는다. 삶은 영원히 이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삶은 무한에서 다른 무한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마음만으로 듣지 말고 가슴 깊이 새겨라.

 

여섯, 여기에도 신은 있다 - Here, too, are the gods


몇 명의 방문객이 뜻하지 않게

헤라클레이토스를 찾아갔을 때

그는 불가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기에도 신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을 탐구했다.


시간은 장기를 두는 아이와 같으니,

왕권이 그의 것이니라.


광신은 신격화된 질병이다.



다시 아이가 될 수 있다면 그대는 모든 것을 이룬 것이다. 반면, 다시 아이가 될 수 없다면 그대는 모든 것을 놓친 것이다. 성자는 다시 태어난 어린아이다. 처음으로 태어난 아이는 진짜 아이가 아니다. 그는 어른으로 성장해야 한다. 두 번째 탄생이 진정한 탄생이다. 두 번째로 태어나는 사람은 스스로를 탄생시킨다. 이것이 변형이다. 그는 다시 아이가 되었다. 그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냥 살 뿐이다. 어떤 순간이 오건 그는 그 순간과 함께 움직인다. 그에게는 계획이 없다.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겉으로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진짜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신도 없고 악마도 없다. 아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성자는 “신은 여름이며 겨울이다. 신은 평화이며 전쟁이다. 신은 악마이며 선이다.”라고 말한다. 성자에게는 모든 도덕률이 사라진다. 모든 구별이 사라진다. 만물이 성스럽고 모든 장소가 신성하다.


명심하라. 어떤 목적을 추구하면 삶 전체를 잃을 것이다. 삶에는 아무 목적도 없다. 삶은 목적 없는 놀이다. 삶은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다. 그저 삶 자체를 즐길 뿐이다.

이것은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의 마음은 수학적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삶에는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다. 마음은 즉각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왜 사는가? 왜 자살하지 않는가?” 하고 반문한다. 보라 의미가 있으면 모든 것이 추해진다. 삶이 사업처럼 된다. 목적이 있으면 삶 전체가 시(詩)를 잃어버린다.

삶에 시가 존재하는 것은 이 삶에 아무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일곱, 지혜로운 영혼은... - A dry soul is wisest and best


취한 사람은 어린아이에게 끌려간다.

그는 어디에 가는지도 모르면서 비틀거리며 따라간다.

그의 영혼은 젖어 있으므로.


영혼은 축축해짐으로서 쾌락을 얻는다.


건조한 영혼이 가장 지혜로우며 최상의 것이다.


의식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생물학적 속임수나 자연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깨어있는 의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이때 그대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일어난다.

이때에는 사랑자체가 통합적인 힘이 된다.

사랑자체가 깨어있음이 된다.

관계 속에서 그대는 더욱 더 깨어있게 된다.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필 뿐, 타인을 이용하지 않는다. 나누어 주기만 할뿐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통해 그대 또한 자유로워진다.

두 사람은 궁극으로 가는 여행길에서 좋은 동반자가 된다.

그들은 서로를 돕는다.

이 길에는 함정이 많다.

길은 멀고 여행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고통과 번뇌, 행복, 침묵 등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질 동반자가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정신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사람,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을  기탄없이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 무슨 일이 닥쳐도 그대를 도와줄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선할 때나 악할 때나, 화를 낼 때나 행복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그대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변함없이 그대를 사랑해 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 이런 동반자를 갖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을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은 조건을 달지 않는다.

사랑은 무조건이다.

의식적인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 전혀 다른 현상이다.

의식적인 사랑은 아주 드물긴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상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대의 사랑은 마약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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