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상(像)을 찾는다.

처음에는 부모의 시선에서, 그 다음에는 친구들의 시선에서 우리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그러다가 우리는 자신의 참모습을 비춰 줄 하나뿐인 거울을 찾아 나선다.

다시 말하면, 사랑을 찾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알고 보면 <좋은 겨울>의 발견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자신의 만족스러운 상을 비춰 주는 거울을 찾아냈을 때 흔히 첫눈에 반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의 시선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평행한 두 거울이 서로에게 기분 좋은 마법의 시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거울 두 개를 마주보게 놓으면 거울 속에 거울이 비치면서 같은 이미지가 무수히

생겨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듯이 <좋은 거울>을 찾아내면 우리는 다수의 존재로

바뀌고 우리에게 무한한 지평이 열린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주 강하고 영원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두 거울은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움직이는 존재다.

두 연인은 자라고 성숙하고 진보한다.

그들은 처음에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동안 서로 나란한 길을 따라 나아간다 해도,

두 사람이 반드시 똑같은 속도로 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아가는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다.

 또한 두 사람이 상대의 시선에서 언제나 똑같은 자신의 상을 찾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면 결별이 찾아온다. 나를 비춰 주던 거울이 내 앞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건 사랑이야기의 종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을 잃는 것이기도 하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의 시선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제5권


“신 - 베르나르 베르베르”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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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TRA VISION


탄트라 秘典





마음을 변형시키고 초월시키는 112가지 수행법!


Osho Rajneesh 강의 l 이연화 옮김





5천 년 전 시바는 그의 연인 데비에게

112절로 이루어진 탄트라 방편들을 전수했다.

그것의 이름은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Vigyana Bhairava Tantra)이다.

여기서 비그야나는 의식을 말하고 바이라바는

초월을 의미하며 탄트라는 방편들을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전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의식 초월 방편’이 된다.


목마른 영혼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태어났는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라는 고민도 없이 무지와

무관심, 무감각에 빠져버린 메마른 의식과 안일한 삶의 태도에서

이젠 깨어나십시오.







탄트라의 세계


    탄트라는 지적인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산체험이다.

    그대가 수용적으로 되고, 준비되고,

    느낄 만큼 예민해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그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비가 묻는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토록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원소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우주의 중심에 앉은 자는 누구입니까?

  형상들로 충만하여 동시에 모든 형상들을 초월한 이 생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이름과 모양마저도 뛰어넘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 주소서!



호흡(呼吸), 우주에 이르는 다리


    진리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진리는 미래에 성취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그대가 바로 진리이다.



1

빛의 샘(光源), 그 황홀한 일별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 사이에서 찾을 수 있도다.

숨이 들어오고, 들어온 숨이 나가려고 하기직전,

바로 거기에 지복(至福)이 깃들어 있도다.


2

숨을 들이쉴 때 아래(下丹田)에서 위(百會)로 반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리고 내쉴 때 다시 위에서 아래로 반원을 그린다.

이 두개의 회전점을 통해서 불생불멸의 그 자리를 깨달을 지어다.


3

들이쉬고 내쉬는 그 찰나의 사이에 호흡은 에너지가 없으면서 또한

에너지로 가득 찬 그대의 중심에 닿는 도다.


4

숨을 완전히 내쉰 뒤 호흡이 멎었을 때,

또는 숨을 완전히 들이쉰 뒤 호흡이 멎었을 때,

호흡의 이 우주적인 멈춤 속에서 에고는 사라진다.



다섯 개의 신비


    도약하라!  비상하라!

    그대 자신을 변형시켜라.

    그대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초월시켜라.


5

미간(眉間)에 집중하고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精髓 : prana)로 가득 차게 하라.

그리고 정수리에서  빛이 쏟아지듯

호흡의 정수가 쏟아지고 있음을 느껴라.


6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도 들숨과 날숨사이에 항상 유념하라.

이 수련을 계속하면 머지않아 그대는 다시 태어나리라.


7

만져지지 않는 호흡의 정수는 미간에 있다가

그대가 잠드는 순간 가슴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꿈의 세계를 넘고 죽음의 세계까지 넘어간다.

 

8

지극한 경배와 헌신으로 호흡의 두 교차점에 집중하라.

그리고 ‘아는 자’를 알아라.


9

죽은 듯이 누워 있으라.

화가 날 때 그 분노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속눈섭 하나 움직이지 말고 응시하라.

빨고 싶으면 빨아라.

그러나 ‘빠는자’로 남지 말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그대의 마음을 쉬게 하는 방편들



이 방편들은 그대로 하여금 중심을 찾고

거기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10

사랑의 달콤한 애무를 받을 때 사랑 자체가 되면

어여쁜 공주는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간다.


11

개미가 기어가는 것을 느낄 때 감각의 문을 닫아라.

그때 그것이 일어나리라.


12

침대에 눕든지 자리에 앉든지 그대자신을

무중력 상태에 있게 하라. 그때 마음을 넘어선다.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Ⅰ


    이 방편들은 단전에 뿌리를 박기 위한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있다.

    이 방편들을 통해서 그대는 단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다.


13

무한한 허공 속에서 오색찬란한 공작의 꼬리 깃털이 그대의

오감(五感)이 되었다고 상상하라. 이제 그 아름다운 색채가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리고 한 점을 정하여 거기에서 만나게 하고

그 점을 집중하라. 그 점이 허공 속에 있든지 벽 위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다.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하라. 그때 또 다른

것을 향한 그대의 바람이 실재가 되어 나타나리라.


14

그대의 신경 전체에 온 주의를 집중시켜라. 연꽃 뿌리 속에 들어 있는

실처럼 섬세한 신경이 척추 속에 있다. 그대의 의식이 척추의 중심에

머무를 때 변형이 일어난다.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Ⅱ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15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을 손으로 막아라. 그러면 두 눈 사이의

공간에 모든 것이 담겨지리라.


16

축복받은 자여, 모든 감각이 가슴속으로 녹아들 때 연꽃의 중심에

이르게 되리라.


17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Ⅲ


    그대의 전 관심을 방편에다 쏟아라.

    결과는 잊어버려라.

    결과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방해가 된다.


18

어떤 대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라.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말라. 여기

그 대상의 중심 속에 축복이 있다.


19

손이나 발로 지탱하지 않고 엉덩이로만 앉아 있어 보라. 갑자기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20

흔들리는 수레 속에서 율동적으로 흔들려라. 수레가 멈추어도 그대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진동 속에 계속 머물게 하라.


21

감로수로 가득 찬 그대  육체의 한 부분을 침으로 천천히 찔러 보라.

그리고 찌르는 행위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갑자기 그대는 내면의

순수를 얻게 될 것이다.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Ⅳ


    금세기 가장 위대한 탄트라 행자인

    게오르그 구제프는

    인간의 유일한 죄는 동일시(同一視)이다

    라고 말했다.

    여기의 방편은 동일시에 대한 것이다.


22

과거의 일을 회상하라. 그때 그 상황과 그대의 모습에 집중하고 현재의

모습은 잊어버리면 거기에 초월이 일어나리라.


23

그대 앞에 한 물건이 있다. 그것의 충만한 실재를 느껴라.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다. 오직 그것만이 실재 한다고 느껴라. 그리고 나서 그

두 가지 느낌, 부재감과 실재감 둘 다 떠나라. 그리고 실현시켜라.


24

어떤 사람을 반대 하거나 찬성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기분을

 그에게 투사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중심에 머물게 하라.



정지(靜止)명상법


    “스톱!” 그 상태에서는 숨조차 쉬지 마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느낄 것이다.

    동시에 그대는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25

그대가 어떤 행위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바로 그 순간 정지하라!


26

어떤 욕망이 다가올 때 그 욕망을 주시하라.

그리고 갑자기 그 흐름을 멈추어라.


27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한없이 걸어라.

그러면 결국 쓰러질 것이다.

그 순간 그대는 체가 되리라.



  지성파와 감성파를 위한 각각의 방편


    그대는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마라.

    그때 그대는 건강하고 전체적인

    존재의 관점을 갖게 된다.


28


힘과 지식이 점점 그대에게서 빠져 나간다고 상상하라. 완전히 빠져

나가는 순간 거기에 초월이 일어난다.


29

헌신은 자유를 준다.



시각(視覺) 명상법 Ⅰ


    이 세상은 여기에 있다.

    니르바나 역시 여기에 있다.

    이 세상은 가까이 있다.

    마찬가지로 니르바나 역시 가까이 있다.


30

눈을 감아라. 그리고 감은 눈으로 그대 내부의 세밀한 부분들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리하면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알게 되리라.


31

하나의 그릇을 볼 때 그릇 전체를 보라.

그것의 표면이나 재질을 보지 말고 그릇 전체의 형태만을 보라.

머지않아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리라.


32

사람이나 사물을 처음 보는 것처럼 보라.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시각(視覺) 명상법 Ⅱ


    눈은 물질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비물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눈은 그대와 그대의 육체가 만나는 지점이다.

    육체 속에서 눈만큼 깊이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없다.


33

구름너머 푸른 하늘을 그저 바라보라.

거기에 평정이 있다.


34

궁극적인 신비의 가르침이 전달되는 동안

그대는 눈동자도 깜빡이지 말고 경청하라.

즉시 절대적인 자유를 얻게 되리라.


35

깊은 우물의 가장자리에서 그 깊음을 계속 응시하라.

거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다.


36

어떤 대상을 바라보라.

그리고 나서 천천히 그 대상으로부터 그대의 시력을 지워버려라.

그리고 그대의 사념 또한 지워 버려라. 그러면 ......



소리를 통해 가는 길 Ⅰ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이 쌓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 마음이란 것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 있다.

    그대가 자신을 깨닫는 것이 점점 불가능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37

데비여,

이 꿀로 가득 찬 각성의 초점 속에서 산스크리트 글자를 상상하라.

먼저 그 글자를 주시하라.

다음에 그 글자의 소리를 명상하라.

그 다음에는 더욱 미묘한 그 소리의 느낌을 명상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느낌마저 넘어가라.

그대는 자유롭게 될 것이다.


38

계속되는 폭포소리에 젖듯이 소리의 중심 속에서 흠뻑 젖어라.

그 다음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소리중의 소리를 들어보라.



소리를 통해 가는 길 Ⅱ


    어떤 글자의 소리를 상상하고 소리가 울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세밀하게 지켜보라.

    그때 각성이 일어난다.


39

옴(A-U-M)과 같은 하나의 소리를 영창하라.

그 소리가 소리의 충만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도 함께 들어가라.


40

어떤 글자의 소리를 상상하고

소리가 울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세밀하게 지켜보라.

그때 깨어 있으라.


41

악기의 현이 울리는 것을 듣는 동안

그것을 이루고 있는 중심 소리를 들어라.

그리하여 편재(偏在) !



소리를 통해 가는 길 Ⅲ


    탄트라는 이 세상을 그대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운명이 어떠한 것이라도

    그대는 받아들여야 한다. 이 방편들은

    그대가 이런 자세를 취할 때만 도움이 된다.


42

하나의 소리를 영창하고 그 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점점 작아져 가는 소리를 따라 그대의 느낌 역시

침묵의 조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43

입을 가볍게 열고 혀의 중심에 마음을 집중하라.

그리고 호흡이 들어올 때 침묵 속에서 ‘흐(HH)' 소리를 느껴라.


44

어떤 'A' 나 ‘M' 없이 그저 ’옴(AUM)'소리 위에 중심을 잡아라.



소리를 통해 가는 길 Ⅳ


    이름의 소리 속으로 들어가라.

    이 소리를 통해서 모든 소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45

호흡이 끝날 때 ‘아흐(AH)’로 끝나는 것을 고요히 영창하라.

그러면 저절로 ‘흐(HH)’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발성이다.


46

두 귀를 손가락으로 막고 항문을 수축시킴으로써 듣는 것을 멈춰라.

그러면 소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47

그대 이름의 소리 속으로 들어가라.

이 소리를 통해서 모든 소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탄트라적 성행위의 영적 의미


    “들어가라. 느낌의 중심 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라.”

    자, 그러면 어떻게 이 느낌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여기 그 방법이 있다.


48

성적인 결합이 시작될 때에 처음의 단계인

‘불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

이 불의 상태가 계속되도록 하고

마지막의 ‘타다가 꺼진 불’이 되는 것을 피하라.


49

그토록 깊은 이 포옹 속에서 그대의 감각은 나뭇잎처럼 떨린다.

이 떨림 속으로 들어가라.


50

실제적인 포옹 없이 단지 그 결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변형이 일어난다.


51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친구를 만났을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다.

이 기쁨 속으로 깊이 스며들어라.


52

먹거나 마실 때 음식의 맛 그 자체가 되라.

그리하여 그 맛으로 그대 자신을 가득 채워라.



환상에서 실재로


    꿈을 꿈이라고 의식할 때 그대의 존재는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53

오, 연꽃의 눈이여, 감촉의 달콤함이여,

노래하고 바라보며 맛볼 때마다 그대가 존재함을 자각하라.

그리고 언제나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라.


54

만족감이 발견되는 곳마다

그 어떤 행위 속에서든지 이것을 실현하라.


55

잠이 들려는 순간, 아직 잠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외부를 향한 주의력이 사라지는 순간,

바로 거기에서 존재가 드러난다.


56

환영이 그대를 현혹시키고

찬란한 색채들이 그대를 둘러쌀 때,

분별되는 것조차 분별할 수 없게 된다.



삶을 흐르는 물처럼 지켜보는 기법


    오, 사랑스런 그대여,

    쾌락에도 머물지 말고 고통에도 머물지 마라.

    오직 그 가운데 머물라.


57

거대한 욕망의 파도 속에서도,

그대여 흔들리지 마라.


58

이른바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요술경처럼 나타나며

갖가지 그림을 보여 준다.

즐거워하라, 그것을 그렇게 보라.


59

오, 사랑스런 그대여,

쾌락에도 머물지 말고 고통에도 머물지 마라.

    오직 그 가운데 머물라.


60

욕망들과 그 대상들은 다른 사람들 속에 존재하듯이

자신 속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것을 변형시켜라.



파도에서 바다까지


    “눈을 감아라!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이 질문을 던진 자가 누구인지 기억해보라.


61

파도는 바다와 함께 있고 불꽃은 불과 함께 있듯이

우리 역시 우주적 대양의 한 조각 파도다.


62

내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그대의 마음이 방황할 때마다,

바로 여기에 이것이다.


63

어떤 특별한 감각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날 때,

그 자각 속에 머물러라.






2004. 1



탄트라 비젼 1,2권(방편들 모음)


사실 이 모든 방편을 요약하면 한단어로 “沒入” 이다.

또한 굳이 사족을 붙이자면 나를 몸과 마음에서 분리시켜 同一視하지 않는 것이다.



기쁨샘(喜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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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그다지도 쉽게 삶에 지치는 것일까?

늘 행복과 기쁨에 겨워 살 수는 없는 걸까?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붓다는 “삶이란 오직 지금 이 순간, 즉 현재라는 찰나의 시간 속에만 존재한다” 고 가르쳤다.

또한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현재다. 당신이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당신이 이 순간을 놓친다면 결국 삶과의 약속을 어기는 셈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인의 마음은 쉽게 현재에 머물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이 늘 현재를 떠나

과거나 미래 어딘가를 방황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삶이 힘겨운 까닭은 이렇듯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4. 8. 26

힘 (틱낫한 지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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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제자가 존경하는 스승이자 달인에게 다가가서

외다리로 균형을 잡고 서는데 걸리는 짧은 시간안에

우주의 모든 비밀과 장엄한 신비를 푸는 답을 가르쳐 달라고 청한다.

그 비범한 달인은 이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정신적 거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열성적인 제자의 요청을 받고는 그 질문에 대해 아주 신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는 무한의 지혜로 눈빛을 빛내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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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이웃을 그대 자신처럼 사랑하라.

나머지는 모두 해설에 불과하다.

자, 어서 가서 배우라.

 

2008. 8. 13.

"내영혼의 빛"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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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본질

 

사랑은 물질을 창조하고 우주의 일체성과 조화로움을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낮은 차원의 세게에서 사랑은 매혹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일으키고 나무가 탈때 작열하는 불입니다.

그것은 연기를 일으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불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밝은 빛입니다.

온기와 생명력을 주는 태양입니다.

 

사랑은 생명 그자체이다.

 

 

"사랑의 마법사 다스칼로스"에서 옮김

 

 

 

아이들에 대하여

 

 


  그러자 아이를 품에 안은 한  여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아이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말했다.

너희의 아이는 너희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생명의 아들딸이니.

저들은 너희를 거쳐서 왔을 뿐 너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또 저들이 너희와 함께 있기는 하나 너희의 소유는 아니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사랑은 줄 수 있어도,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저들은 저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너희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줄려고 하지 말라. 저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다.

너희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너희가 아이들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너희같이 만들려 애쓰진 말라.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너희는 활이요, 그 활에서 너희의  아이들은 살아있는 화살처럼 날아간다.

그래서  활쏘는 이가 무한의 길에 놓인 과녁을 겨누고, 그 화살이 빠르고 멀리 나가도록 온 힘을 다하여 너희를 당겨 구부리는 것이다.

너희는 활쏘는 이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분은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듯이 또 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기에.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필적할 만한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

이 작품에는 일정한 내적인 흐름이 있다.

처음에 그는 사랑을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는 결혼으로, 결혼에서 아이들로
- 이것이 바로 삶의 강물이 흐르는 방식이다. 


  이 차이를 느낀 적이 있는가?

여자는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세속적이다. 여자는 땅에뿌리내리고 있다.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공허한 말장난이나 수수께끼가 아니다.

심지어  수세기 동안 여자들에게는 그러한 것을  질문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온통 쓰레기로 가득 차 있고, 공허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매순간 부딪쳐야만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칼릴 지브란은 추상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추상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삶의 진정한 문제들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겁쟁이들이지 철학자가 아니다. 그런데 이 겁쟁이들이 세계의 사상을 주름잡고 있으니...

이 질문들 모두가 여자에게서 나왔다. 거기 겁쟁이들도 있었다.

배운 사람들, 성직자들, 철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물었을 때, 알무스타파는 그들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자가 바보 천치라면 그 어리석은 질문에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너희의 아이는 너희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는 물건이 아니다. 그대는 아이를 소유할 수 없다.

"이 애는 '나의' 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생명은 결코 누구에게 소유 당할 수 없다.

생명을 그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는 있으나, 주먹을  쥐는 순간 생명은 빠져나간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아이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아이들을 파괴해 왔다.

아이를 소유할 수 있는가?  그대는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가?

생명은 어디까지나 풍요로운  존재의  선물이다. 그대가 그 생명이 탄생하는 도구로 선택된 것에 감사하라.

아이는 그대를 통하여 세상에  나왔지만,  그렇다고 그대에게 소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는 단지 통로였을 뿐이다. 만일  부모들이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세상은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아이들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산과 숲과 들판을 통하여 흐르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대를 통하여 세상에 나온 아이는 그대 이전에도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에 왔었다.

아이의  과거와 미래에는 영원히 놓여 있다. 아이는 여러 집, 여러 도시, 어려 낯선 장소에서 살았었다.

그 수백만의  통로들 중에서 그대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다.

겸허한 마음으로 아이를 존경하라.

지금까지 세상의  어떤 사회도 아이들을 존경하지 않았다.

나이 먹고, 늙고, 거의 죽은 사람들만을 존경해  왔다.
모두가 무덤에만 존경을 표시하지, 요람에는 존경을 보내지 않는다.

아이는 가장 순수한, 전혀 물들지 않은 생명이다.

알무스타파의 말이 옳다. '아이들은  너희를 거쳐서 왔을 뿐 너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태초로부터 나왔다.


  또 저들이 너희와 함께 있기는 하나 너희의 소유는 아니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사랑은 줄 수 있어도,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세상에선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다.

그대의 부모를   억하는가?

그들은 그대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었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사랑을 이용하여 그대에게 자신들의 종교, 자신들의 정치 이념, 자신들의 국적과 사상을  강요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인류가  왜 분열되었는가?

누가 죄인인가? 

왜 이토록 많은 국가가 생겨났는가?

왜 이토록 많은 종교가 난립하는가?


  인류는 하나다. 진리도 하나다. 하지만 사람들의 자신의 본래 얼굴을 찾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가면이 씌워지고, 사람들은 이 가면이 자신의 진짜 얼굴인 것으로  착각한 채 평생을 산다.

그대는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대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적이 없다.

그리스도, 고타마 붓다, 마하비라, 노자, 짜라투스타라, 이들 중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이 좋은지 선택할 기회도, 선택권도 그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대의 종교는 그대를 묶는 밧줄이다.

그대의 감옥이다.

그대의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사슬이다.

그것들은 육신이 아니라 그대의 영혼을 묶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을 팔아 버린 사람이다. 

모든 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이 이제는 노예제도가 없어졌다고 주장하지만, 그래도 그대는 노예이다.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그렇다.

노예제도는  형태를 달리했을 뿐이다. 더 위험해졌다.
그대가 나에게 수갑을 채운다 해도 내 정신은 자유롭다.

내  발에 사슬을 채워도 내 영혼은 자유롭다.

내 몸을 못쓰게 만들어도, 내 영혼은  자유롭다. 

하지만 힌두교와 불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로 그대의 마음을 물들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사슬로 그대의 정신을 묶는 것이다.

이것이 더 큰 죄다. 지금까지의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그 책임이 있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사랑은 줄 수 있어도,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저들은 저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저들의 생각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아직은 씨앗의 형태이다.

저들은 아직 가능성의 상태이다.

하지만 저들에게  자유와 사랑을 주면 저들의 생각은  구체화되고, 실체화된다.

그대 자신의 생각이 실체화되었을 때 그대의 존재는  너무나 큰 기쁨과 충족감 과 축복을 느낀다.

그대는 꿈속에서도 그러한 것을 체험할 수 없으며, 그것에 대한 어떤  관념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그대의 사고 능력을 초월해 있다. 그것은 그대의 가슴에서  자라고, 그대의 가슴에서 꽃피어나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좋은  의도 아래에서 모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

세상 어디를 가나 죽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영혼을 죽여 버렸다.
  저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다.

너희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는 과거에 속해 있고, 그대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니 그대의 죽은 경전들을 아이들에게 짐 지우지 말라.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의 경전을 가질 것이고, 저들 자신의 성자들을 가질 것이다.

저들 자신의 부처, 저들 자신의  그리스도를 가질 것이다.

왜 저들이 과거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가.

그들의 미래는 활짝 열려 있다.


  그대 만일 그대의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그대의 손길을 거두라.

저들이 강해지도록 사상을 주입시키지 말라.

그대의 사상은 저들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대의 사상 때문에  저들은 자신의 길을 잃을 것이다. 그대는 저들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을 지켜보고, 저들의 뚜렷한 통찰력을 보라.   나이를 먹을수록 그대의 눈에는 먼지가 낀다.

그리고 모두가 그대에게 충고를 한다. 충고란 세상에서 누구나 주면서 아무도 받지 않는 유일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대에게 의존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오염시킨다.

알무스타파가 옳다.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저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다.' 그대는 어제에  살고 저들은 내일에 산다.

그대가 줄 수 있는 한 많은 사랑을 주어라. 현재는 만남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이별의 장소이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이  현재에서 그대들은 헤어지기 시작한다.

나날이  그대와 그대의 아이들의 간격은 더욱더 커진다.


  그대 만일 과거로부터 자유롭다면, 그대는 더 높은  의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나  붓다보다 더 높은 의식을. 우리는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별들을 향해  높이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자명한 진리를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과거는 그대의 인생에 가장 큰 장벽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생각은 이미 시대에 뒤진 것이다.

아이들은 저들 자신의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나무들이 훨씬 잘 안다.

가을이면 낡은 이파리들은 떨어져 흙  속으로 사라져서는, 더 푸르고, 더  젊고, 더 싱싱한 새 이파리가 자라날 자리를 준다.

만일 낡은 이파리들이 계속  나무에 매달려 있기를 고집한다면, 새 이파리들이 자라날 공간이, 가능성이 없게 된다.


  너희가 아이들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너희같이 만들려 애쓰진  말라.
여기서 칼릴 지브란은 대단히 심오한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이를 그대의 복사본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아이를  죽이는 일이다.

아이들은 자기 본래의 얼굴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본래의 얼굴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본래의 얼굴에는 신성한 어떤 것이 있다.

본래의  얼굴은 위엄을 가지고 있다. 복사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너희는 활이요, 그 활에서 너희의 아이들은 살아있는 화살처럼 날아간다. 

어디를 행해 날아가는가? 미지의  알 수 없는 세계를 행해 날아간다.

저들을 방해하지 말라.  저들에게 힘을 주라. 저들에게 사랑을  주라.
그래서 저들이 가장 먼 별까지 닿을 수 있도록 하라.
  그래서 활쏘는 이가 무한의 길에  놓인 과녁을 겨누고, 그 화살이  빠르고 멀리 나가도록 온 힘을 다하여 너희를 당겨 구부리는 것이다.

존재계는 그대가 그대의 아이들 앞에서 활처럼 구부러지기를 바란다.

저들은 멀리 여행을 떠나야 하고, 그대는 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활쏘는 이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대의 아이가 그대로부터  떠나갈 때, 그대의 아이가 자신의 권리에 따라 한 개인으로  성장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기뻐하라.

그가 순종적인 바보가 되지 않았음을 감사히 여기라.

바보가 아니면 아무도  순종하지 않는다. 지성은 언제나 반역을 꾀한다.

그대가 낳은 아이가 반역의 정신을 가진 것을 기뻐하고, 축복해 주라. 이것이 그대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그것을 불안해한다. 너희는 활쏘는 이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분은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듯이  또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기에. 존재계는 그대들 둘 다 사랑한다.

그대들은 같은  존재계의 아이들이다. 단지 그대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화살들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저들을 축복하라. 알겠는가?

 

아이들에 대하여 -

오쇼 라즈니쉬가 강독한 칼릴지브란의 "예언자" 를

류시화 시인이 옮긴"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에서 발췌

2008. 5. 26 - 기쁨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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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수행의 원리와 실제




임 승 택*



目次

 

         1. 시작하는 말

        2. 위빠사나의 의의

        3. 위빠사나의 원리

        4. 위빠사나의 실제

        5. 마치는 말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1. 시작하는 말

  부처님께서 최초로 가르침을 펴신 후, 2500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그간 불교는 인도라는 지역을 벗어나 아시아 각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세계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종교적 가르침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불교만큼 고유의 독특한 색채를 흩트리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질적 문화를 탄력성 있게 수용‧발전해 온 종교는 찾기 힘들다.

  불교는 지상의 어느 곳에 전해 졌든 간에 그 지역의 시대적 상황과 문화를 배려한 바탕 위에서 가르침을 펼쳤다. 이러한 포교의 방식은 부처님 당시부터 상대방의 됨됨이에 따라 거기에 맞는 가르침을 펼쳤던 對機說法의 전통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인도 땅을 벗어난 불교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본래의 뜻을 저버리고 각기 다른 가르침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南方佛敎라든가 北方佛敎 따위의 독자적인 명칭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에게 알맞게 계승하려는 시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불교의 실천법은 오늘에 이르러 불교의 포용력만큼이나 다양해 졌다. 더불어 오늘의 세대는 이질적인 문화적 요인들이 동일한 생활 영역 안에 공존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때에 여러 유형의 종교적 실천법들은 나름의 이유와 사명을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소위 말하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觀, 觀法, vipassanā)’ 수행을 테마로 한다. 남방불교란 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을 중심으로 전해져 내려온 上座部(Theravāda) 불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위빠사나’란 ‘觀法’이라는 용어로써 우리에게 일찍부터 알려져 있던 수행법을 지칭한다. 이와 같은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는 북방대승불교의 수행전통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일견 이질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들과의 동질적인 면모를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小乘佛敎라고 하는 貶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방상좌부’는 세계의 종교사를 통틀어 2300년이라는 가장 오랜 전통을 고수해온 종파이다. 그리고 ‘위빠사나’는 부처님께서 직접 개발하시고 유포하신 四念處(cattāro satipaṭṭhānā) 수행법의 전형이다.1)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남방불교의 위빠사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거기에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들이 보다 더 생생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초기불교의 원형에 가까운 양식들이 유지‧보존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들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를 돌이켜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가늠하는데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위빠사나의 의의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에게 과연 어떠한 의의를 지니는가. 이 점에 대해 필자는 이 행법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의거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싶다. 四念處의 위빠사나는 부처님의 유훈으로 전승되어 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가르침으로, ‘自燈明法燈明 自歸依法歸依’ 즉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고 법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는 말씀이 있다. 佛子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구절인데, 바로 이것이 ‘사념처의 위빠사나’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지 않을 것이다. 관련 경전의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난아,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知)과 마음지킴(念)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느낌(受)에 대해...  마음(意)에 대해...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아난아, 이것을 일컬어, 비구가 자신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自燈明)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自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한 법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法燈明)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法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내가 [입멸한] 후에, 자신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또한 법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곧 나의 제자들 중에서 최고의 비구가 될 것이다.”2)


  인용문에 나타나는 내용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3개월 전에 행하신 법문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입멸하신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합니까’라고 아난이 질문을 하자, 이와 같이 답변하신 것이다. 바로 이 법문을 통해 ‘자등명 법등명’의 실제 내용이 사념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유훈으로 전승된 사념처의 수행은 모든 불제자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검증된 가르침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우리의 주변 일각에는 사념처의 위빠사나를 소승의 행법으로 폄하하는 경향들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마지막 유훈으로 남긴 가르침이 四念處觀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이를 소승의 관법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불교라는 종교 안에서 부처님을 능가하는 또 다른 권위를 내세울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법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사념처관의 의의를 설하는 대목이다. 이 행법이 과연 어떠한 의미와 의의를 지니는가에 대해 부처님께서 직접 밝히신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유일한 길(一乘道)이 있다. 이것은 중생을 정화하는 길이며, 슬픔과 근심을 초월하는 길이며,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는 길이며, 지혜를 증득하는 길이며, 열반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것은 곧 사념처(四念處)의 수행이다... ”3) 



3. 위빠사나의 원리


  1) 위빠사나의 원어적 의미

  ‘위빠사나(vipassanā)’라는 용어는 빨리(pāli)어로서 두 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여기에서 ‘위(vi)’라는 말은 ‘분리하다’ ‘쪼개다’ ‘관통하다’ 등을 의미하고, ‘빠싸나(passanā)’는 ‘관찰’ ‘식별’ ‘봄’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빠사나의 온전한 의미를 번역하자면 ‘꿰뚫어 봄(洞察)’이 적당할 것이다. 한역에서는 이를 ‘觀’ 혹은 ‘觀法’으로 번역하여 사용해 왔다.  

  ‘위빠사나’는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의 4가지를 테마로 하는데, 이를 곧 ‘四念處(cattāro satipaṭṭhānā)’ 혹은 ‘四念處觀(cattāro satipaṭṭhānā vipassanā)’이라 한다. 이러한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구체적인 수행의 과정에서 ‘아누빠싸나(隨觀, anupassanā)’라는 말로 대체된다. ‘아누빠싸나’란 어떠한 현상을 ‘지속적으로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몸에 대해 위빠사나를 행하는 것’을 일컬어 ‘까야누빠싸나(身隨觀, kāyanupassanā)’라 하고, ‘느낌에 대해 위빠사나를 행하는 것’을 ‘웨다나누빠싸나(受隨觀, vedananupassanā)’라 한다.

  이와 같이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 anupassanā)’을 이름하여 ‘사념처의 위빠사나’라고 부른다. 이들 4가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따라가며 보면서, 세간에 얽힌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머무는 것이 곧 위빠사나 수행의 요체이다. 관련 경구를 다시 한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知)과 마음지킴(念)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느낌(受)에 대해서는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마음(心)에 대해서는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4)


  인용된 경문은 사념처의 위빠사나에 관련하여 초기불교의 경전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정형구이다. 이 경문에는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 anupassin)’이라는 술어 이외에 ‘알아차림(知, sampajañña)’이라든가 ‘마음지킴(念, sati)’ 따위의 용어가 등장한다. 이들 역시 사념처의 위빠사나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다. 이들은 ‘따라가며 보는 것’에 수반되는 일종의 ‘마음작용(cetasika)’인데, 그와 같은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으로써 몸과 느낌 따위를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이다. 이들 용어는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 원리인 까닭에 별도의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2) 알아차림(知, sampajañña)

  ‘알아차림(知)’이란 편견이나 왜곡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如如, yathātaṁ)’를 분명하게 알아차린다는 의미이다. 즉 몸으로 일어나는 현상, 느낌으로 일어나는 현상 등을 그때그때 명확히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대상은 비단 위에서 언급한 4가지에 국한되지 않으며,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현상들이 포함된다. 경전에서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비구들이여, 비구의 알아차림(知)이란 무엇인가.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나 물러날 때 알아차림(知)으로 행한다. 볼 때나 관찰할 때 알아차림(知)으로 행한다. 구부리거나 펼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겉옷과 발우와 옷을 착용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먹거나 마시거나 먹고 난 이후에나 맛을 볼 때나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에도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이야기할 때에나 침묵할 때에도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곧 비구의 알아차림이다.”5)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싶을 때 자는, 그러저러한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낸다. 그리고 경험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매순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평범한 사실에 대해 순일하게 알아차릴 때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밥을 먹는 경우,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알아차리면서 먹는 시간은 실제적으로 극히 짧다. 밥을 먹는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습관적인 상념 속에서 보낸다. 그리하여 이러저러한 생각과 번뇌 속에서 밥을 먹는다. 일상 그대로를 여여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항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든다. 이것은 일정한 시간동안 지속적인 마음집중을 시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적인 알아차림의 상태를 유지하겠노라 작심하지만, 언제 그러했느냐 싶게 다른 생각에 팔려 있는 경우를 경험하곤 한다.

  따라서 명확한 ‘알아차림’으로 현재에 머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통해 의도하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 충일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습관적인 상념의 굴레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항상 깨어있는 마음상태로 사물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보자는 의미이다.    


  3) 마음지킴(念, sati)

  ‘마음지킴(念)’6)이란 그와 같이 과거와 미래를 정처 없이 넘나드는 마음을 현재의 상태로 되돌리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좌선을 처음 해보는 사람은 자신에게 그렇게도 많은 잡념이 일어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실토하곤 한다. 언제 잡념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고 한참 동안을 끄달려 다닌 후에야, 비로소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알아차림(知)’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러한 ‘알아차림(知)’에 의해 ‘마음을 되돌리는 것’을 ‘마음지킴(念)’이라 할 수 있다.7) 더불어 ‘되돌린 마음을 일정한 상태로 유지‧지속하는 것’을 ‘마음지킴(念)’이라 한다면, ‘그러한 상태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는 것’을 ‘알아차림(知)’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해서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은 위빠사나 수행을 이끌어 가는 한 쌍의 축으로 기능한다. 

  ‘마음지킴’은 ‘잊지 않음(不忘)’이라는 원어적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마음지킴’에 대해 경전에서는 ‘감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 빗대어 설명하곤 한다.8) 이러한 용례들은 마음을 ‘일정한 집중상태’로 유지시키는 기능을 지닌 ‘마음지킴’의 쓰임을 잘 나타낸다. 이 용어에 대해 필자는 선행연구물에서, ������빠띠삼비다막가������ 등의 경설에 나타나는 내용을 근거로,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거나(anupassī) 따라가는 것(anugacchanā)으로서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고, 나아가서는 부차적으로 감지되는(viditā) 여러 현상들을 통해 연기의 이법 등 진리에 대한 자각을 유도하는 것”9)으로 정의한 적이 있다.

  이러한 정의는 이 용어가 ‘사마타(止, samatha)’와 ‘위빠사나(觀, vipassanā)’ 양자 모두에 대해 깊은 연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사마타와 직결된 것이고, ‘연기의 이법 등 진리에 대한 자각’은 위빠사나와 통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지킴’이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양자 모두에 대해 통해 있는 포괄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10) 이러한 까닭에 ‘마음지킴’을 원리로 삼는 위빠사나 수행은 단지 협소한 의미의 ‘위빠사나(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얼마간 ‘사마타(止)’적인 내용 또한 포함한다. 다음의 경구는 이와 동일한 의미의 맥락으로 파악된다. 


“비구들이여, 마치 옷에 불이 붙어 있고 머리에 불이 붙어 있어, 옷과 머리(의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극단적인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과 물러남이 없는 마음지킴(念, sati)과 알아차림(知, sampajañña)을 행해야 한다. 바로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러한 선한 법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과 물러남이 없는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연후에, 그는 ‘안으로 마음의 가라앉음(內心寂止=사마타)’과 ‘탁월한 혜로써 보는 법(增上慧法觀=위빠사나)’을 얻게 된다.”11) 

  

  원리적 측면에서 볼 때,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동일한 비중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마음지킴’은 보다 더 광범위한 용례와 쓰임을 지닌다. 사념처의 원어인 ‘cattāro satipaṭṭhānā’를 그대로 직역하면 ‘4가지 마음지킴의 확립’이 된다. 더불어 팔정도의 ‘sammāsati(正念)’라든가, 호흡관법으로서의 ‘ānāpānasati(安般守意)’등에도 한결같이 이 용어가 등장한다. 이들 모두는 결국 ‘마음지킴’의 수행체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지킴’은 실제 수행에서 요구되는 하나의 기능임과 동시에, 수행법 자체를 대변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에 의해 ‘있는 그대로(yathātaṁ)’를 여실하게 보고 아는 것을 일컬어 ‘如實智見(yathābhūtañāṇadassana)’이라 이름한다. 이러한 ‘여실지견’이야말로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올바르게 보도록 하여, 일체의 현상에 대해 탐욕과 번뇌를 낼만한 무엇이 없음을 깨달아, 궁극적으로는 ‘열반(nibbāna)’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곧 위빠사나이다.


  4) 진리에 대한 지각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에 의해 위빠사나를 행해 나갈 때, 수행자는 비단 ‘몸’이나 ‘느낌’ 따위의 직접적인 관찰대상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여러 현상에 대해서도 훤하게 깨여있는 상태를 체험한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지혜(paññā)’의 개발을 본분으로 하는 위빠사나의 원리를 규명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감지된다(viditā honti)’고 하는 형식으로 설명한다. 관련 문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긴 들숨과 날숨의 힘에 의해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을 알아차릴 때,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느낌(受)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의 특성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想)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사유(尋)가 일어난다.....    ‘무명의 일어남(集)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조건(緣)에 의한 일어남(paccayasamudaya)의 의미로 느낌의 일어남이 감지된다(vidito hoti)....   ‘무명의 소멸로부터 느낌의 소멸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느낌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지각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사유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12)


  인용문은 일차적인 관찰대상으로서 ‘코끝’ 혹은 ‘면상’에 대해 ‘마음지킴을 확립하고난 후(satiṃ upaṭṭhapetvā)’에 진리가 체득되어지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13) 이 문구에서 핵심이 되는 용어는 ‘감지되는 것(vidita)’이다. 이 ‘감지되는 것’의 원어로 사용된 ‘vidita’는 동사원형 ‘√vid(보다, 알다, 경험하다)’에서 기원한 말로서, 과거수동분사‧복수‧주격의 문법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이 용어에 의해 수식을 받는 ‘느낌’‧‘지각’‧‘사유’ 따위는 수행자의 자발적 의지와 상관이 없이 저절로 드러나 포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조건(緣, paccaya)’에 의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감지된다’는 의미이다.

  ‘마음지킴(sati)’에 의한 위빠사나 수행이 단순하게 ‘평정상태(samatha)’만을 의도하는 것이라면, 일차적인 관찰대상 즉 ‘코끝’이라든가 ‘배의 움직임’ 따위에 대해 집중된 상태에만 논의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그와 같이 집중된 상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낌(受)’ 따위의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피동적으로 ‘감지된다(viditā honti)’는 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부각시키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인용문에 제시된 내용으로서, 느낌(受, vedanā)‧지각(想, saññā)‧사유(尋, vitakka) 등은 수행의 과정에서 포착되는 일체의 모든 것을 망라한다고 할 수 있다.14) 그런데 이들 부차적인 포착의 대상들은 ‘코끝’이라든가 ‘면상’ 혹은 ‘배의 움직임’이라고 하는 직접적인 마음지킴의 대상으로부터 의식이 분산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깊은 선정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들로서 다름 아닌 번뇌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일어남과 사라짐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고갈되어 없어질 때까지 과도적으로 존속하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인용문에 나타나듯이, 이들은 인위적인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기 위한 매개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無明의 일어남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일어남의 의미로 느낌의 일어남이 감지된다....   무명의 소멸로부터 느낌의 소멸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느낌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는 따위의 언급이 그것이다. 바로 이 내용은 직접적인 관찰대상 이외의 것에 대해서도 깨여있는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조건성(緣, paccaya)’에 대한 자각을 내용으로 하는 ‘지혜(paññā)’의 개발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이상에서 기술한 위빠사나의 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위빠사나’란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이라는 두 가지 요인을 통해 마음의 방황을 멈추고 현재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한다. 더불어 위빠사나는 그 과정에서 폭넓게 감지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을 매개로 진리에 대한 지각을 유도하는 행법이다. 이와 같이 ‘알아차림(知, sampajañña)’‧‘마음지킴(念, sati)’‧‘감지되는 것(viditā)’의 세 용어는 위빠사나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들이다.




4. 위빠사나의 실제


  1) 사념처(cattāro satipaṭṭhānā)의 세부내용

  사념처의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관찰대상으로서의 4가지란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이다. 그런데 이들은 수행의 과정에서 포착되는 모든 현상들을 총괄적으로 아우르는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이들 4가지 각각은 또 다른 세부항목들을 지닌다.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大念處經, Dīghā-nikāya, vol.2. pp.290-315)에 나타나는 이들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몸에 대한 마음지킴 ① 호흡의 출입에 대한 알아차림

          (身念處)       ② 몸의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

                         ③ 몸의 행동에 대한 알아차림

                         ④ 몸의 구성하는 32가지의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⑤ 몸의 4대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⑥ - ⑭ 몸의 부패과정을 9단계로 관찰


(2)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  ①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受念處)        ②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③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④ 속된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⑤ 속되지 않은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⑥ 속된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⑦ 속되지 않은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⑧ 속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⑨ 속되지 않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                               차림


 (3)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  ① - ② 탐욕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心念處)         ③ - ④ 분노가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⑤ - ⑥ 어리석음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⑦ - ⑧ 산란함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⑨ - ⑩ 넓은 마음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⑪ - ⑫ 우월한 마음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⑬ - ⑭ 고요한 마음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⑮ - ⑯ 해탈한 마음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4) 법에 대한 마음지킴   ① 다섯 장애(五蓋)에 대한 알아차림

         (法念處)          ② 다섯 집착된 온(五取蘊)에 대한 알아차림

                           ③ 여섯 터전(六入處)에 대한 알아차림

                           ④ 일곱 깨달음의 요소(七覺支)에 대한 알아차림

                           ⑤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 八正道)의 법에 대한

                              알아차림


  이상과 같은 사념처의 세부항목은 수행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을 4가지 유형으로 종합‧분류한 것이다. 현재 미얀마나 태국 등지에서 위빠사나를 지도하는 스승들은 바로 여기에 열거된 세부항목에 근거하여 고유의 家風으로 가르침을 펼친다.15) 

  예컨대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계통의 수행센터에서는 ‘몸에 대한 마음지킴’의 ②와 ③의 항목에 비중을 두는 수행법을 가르친다. 또한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을 독자적으로 계승한 쉐우민 사야도(Shwe Oo Min Sayadaw)의 경우에는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을 위주로 하는 위빠사나를 가르친다. 이들은 예비적인 선정을 익히지 않고서도 행할 수 있는 ‘순수 위빠사나(純觀, suddhavipassanā)’를 가르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16)

  한편 재가자로서 인도에서 널리 활약하고 있는 고앤까(S. N. Goenka)는 ‘몸에 대한 마음지킴’의 ①항목과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에 비중을 둔 위빠사나를 가르친다.17) 그 이외에 모곡 사야도(Mogok Sayadaw)는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과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을, 순룬 사야도(Sunlun Sayadaw)는 독특한 ‘정화 호흡법’과 함께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에 비중을 둔 위빠사나를 가르친다. 이들의 가르침 역시 일상적인 삶 속에서 포착 가능한 대상들을 위빠사나의 주제로 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러나 파웃 사야도(Paaut Sayadaw)와 같이 ‘사마타(止)’를 먼저 익히게 한 다음, 위빠사나로 전향시키는 경우도 있다.18) 그의 가르침에는 일정기간 ‘몸에 대한 마음지킴’의 ④항목에 속한 뼈‧골수‧콩팥 등에 대한 관찰법과 함께, ������위숫디막가(pp.123-126)������에 기술되어 있는 ‘까시나(kasiṇa) 명상법’이 포함된다고 한다. ‘까시나 명상법’이란 마음의 집중을 얻기 위한 ‘도구’로서 ‘까시나’를 이용한 선정수행을 가리키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집중력이 전제되어야 한다.19) 따라서 파웃 사야도의 가르침은 순수한 위빠사나라기 보다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혼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스승들은 제각기 다른 禪風을 전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위에서 열거한 사념처의 세부항목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또한 실제 수행에서 사념처의 4가지는 엄격히 분리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위빠사나의 힘이 증장되면 눈‧귀‧코‧혀‧몸‧마음의 감관에 와 닿는 모든 정신적‧육체적 현상들이 기민하게 포착된다. 이때가 되면 사념처의 4가지에 대한 구분은 큰 의미를 잃는다.

  즉 특정한 대상에 편중됨이 없이 일체의 현상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위빠사나를 행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는 “초보적 수행단계에서는 특정 대상을 중심으로 관찰을 해야 하지만, 수행이 진척되면 6근의 영역 전체로 관찰대상을 확대해야 한다”20)고 가르치며, 쉐우민 사야도(Shwe Oo Min Sayadaw) 또한 “처음 수행을 해 나갈 때는 ‘내(puggala)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수행을 오래 하다가 보면 법(dhamma)이 저절로 드러나 이끌어 준다”21)고 언급한다. 그러한 설명에 비추어 볼 때, 여기에서 소개한 각각의 선풍과 그것에 따른 수행법들은 결국 초보 수행자를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지속적인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으로 위빠사나를 진행해 나갈 때, 수행자는 ‘다섯 장애(五蓋)’를 극복하게 되고, ‘여섯 입처(六入處)’‧‘일곱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 八正道 포함)’를 깨닫게 된다. 사념처의 맨 마지막 항목으로 등장한 ‘법에 대한 마음지킴(法念處)’이 곧 그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열거했던 사념처의 세부항목 중에, 주된 관찰의 대상은 몸(身)‧느낌(受)‧마음(心)의 3가지이며, 마지막의 ‘법에 대한 마음지킴’은 수행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 위빠사나의 실천

  이상과 같이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이라는 2가지 원리를 통해, 사념처의 4가지에 대한 관찰로 이어지는 차제적인 순서를 거친다. 그런데 이들 과정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배양되는 ‘마음지킴의 힘’과 ‘알아차림의 힘’은 비단 일상적인 삶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니까야에는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경우(Dīghā-nikāya, vol.2. p.99등)가 여러 차례 등장하며,22) 심지어는 죽음에 임하는 순간이라든가, 죽고 난 이후에 다른 생을 선택할 때에도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으로써 행한다는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다. 관련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난아, 그와 같이 보살은 도솔천에서 몸이 죽고 난 후,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을 지니고서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갔다.....    아난아, 그와 같이 보살은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을 지니고서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태어났다...  아난아, 그와 같이 여래는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을 지니고서 목숨의 형성력(命行)을 포기한다... ”23)


  인용된 내용은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 원리인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이 과연 어떠한 범위에 이르기까지 기능하는가를 단편적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모든 수행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 대목은 夢中一如라든가 寤寐一如의 경지에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위빠사나 수행이 生死一如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인용구에 나타나는 내용은 부처님과 같이 고원한 경지에 계신 분이나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까닭에 실제 수행자에게 위빠사나 수행이 어떤 공덕을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달리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경구를 인용해 본다.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즐거운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면, 탐욕의 부림(使)을 받아, 거기에서 떠날 길을 보지 못한다.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 괴로운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면, 성냄의 부림을 받아, 거기에서 떠날 길을 보지 못한다....     만일 비구가 정진하여 바른 지혜가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느낌에 대해 지혜로써 알아차린다. 모든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게 되면, 현재의 법에서 온갖 번뇌가 아주 다하게 되나니, 지혜에 의존하여 목숨을 마치게 되고, 열반에 들어 중생의 목숨을 받지 않는다.”24)    


  인용된 경구는 ‘느낌(受, vedanā)’을 중심으로 사념처의 공덕을 이야기한 대목이다. 어떠한 느낌이 발생하면 그 느낌을 곧바로 알아차려, ‘탐욕(愛, taṅhā)’과 ‘집착(取, upādāna)’ 따위의 번뇌가 발생할 여지를 차단하여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그와 같이 행할 때 온갖 번뇌가 다한 열반의 공덕이 기대된다는 의미이다.

  이 경구와 관련하여 필자는, 모곡 사야도(Mogok Sayadaw)의 해설을 간략히 소개해 본다.25) 그분의 가르침에 따르면 12연기의 流轉 과정에서 ‘무명(avijjā)’에서부터 ‘느낌(vedanā)’까지의 지분은 전생의 업력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다. 즉 현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개개인에게 다가오는 조건들이다. 그러나 ‘느낌’ 이하의 지분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다.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위빠사나이다.

  위빠사나가 진전됨으로 인하여 수행자는 모든 느낌(受)들이 일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감각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체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해 ‘탐욕(愛)’과 ‘집착(取)’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이 원만해 졌을 때, 재생으로 통하는 업력이 힘을 잃게 되고, 마침내는 ‘무명(avijjā)’ 자체가 종식된 ‘지혜(vijjā)’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위에서 인용한 “모든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게 되면, 현재의 법에서 온갖 번뇌가 아주 다하게 되나니, 지혜에 의존하여 목숨을 마치게 되고, 열반에 들어 중생의 목숨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그와 같은 모곡 사야도의 해설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념처의 위빠사나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갖가지 느낌의 유혹에 노출된 채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삶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그러한 유혹을 인위적으로 멈추게 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매순간의 ‘느낌’들을 곧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인해 야기되는 탐욕과 애착에 끄달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단한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용구에 나타나듯이 ‘즐거운 느낌’을 하나의 ‘감각현상’으로 즉각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의 실제를 놓치게 된다. 그리하여 거기에 대해 ‘탐욕(愛, taṅhā)’을 일으키게 되고, ‘집착(取, upādāna)’에 빠지게 된다. 탐욕과 집착에 얽혀 새롭게 야기되는 ‘존재(有, bhava)’를 일으키고, ‘늙음과 죽음(老死, jarā-maraṇa)’의 굴레에 빠져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러하듯이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12연기의 교리적 해석과도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지평에서 현실적인 삶으로부터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담지해 낸다.   

  마지막으로 본 소절을 마치는 시점에서, 이러한 사념처의 위빠사나를 과연 얼마만큼 해야 하는가를 밝히는 법문을 소개한다. 수행에 필요한 기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제는 기간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됨됨이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으로라도 사념처의 공덕을 밝힐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무언가 절박함이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四念處)를 7년 동안 행한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 결과 중에 어느 한 가지가 기대된다. 즉 현재의 상태에서 아라한의 경지(阿羅漢果)를 얻든지, 남은 번뇌가 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음(不還果)을 얻게 된다. 7년이 아니라 6년, 5년, 4년, 3년, 2년, 1년이라도....  일년이 아니라 7개월이라도.... 7개월이 아니라 6개월, 5개월, 4개월, 3개월, 2개월, 1개월, 보름이라도.... 보름이 아니라 7일 동안이라도, 이 사념처를 열렬히 수행한다면 두 가지 결과 중 어느 한 가지가 기대된다. 즉 현재의 상태에서 아라한의 경지를 얻든지 남은 번뇌가 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음을 얻게 된다.... ”26) 



  5. 마치는 말

  이상과 같이 위빠사나의 원리와 실제에 대해 살펴 보았다. ‘위빠사나의 의의’에 관한 장에서 필자는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의거하고 있으며, 또한 부처님의 유훈으로 남겨진 실천법이라는 점을 규명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불제자들에게 검증된 행법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위빠사나의 원리’에 관한 장에서는 ‘위빠사나의 원어적 의미’와 함께, 이 행법의 구체적 실천 원리로서 ‘알아차림(知, sampajañña)’‧‘마음지킴(念, sati)’‧‘감지되는 것(viditā)’ 등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들 3가지 요인들은 사념처의 위빠사나 수행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들이며, 별도의 기능과 영역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sati’ 즉 ‘마음지킴’은 ‘주의집중’의 의미와 통해 있고, ‘sampajañña’는 말 그대로 ‘알아차림’의 뜻인 반면에, ‘viditā’는 ‘깨어있음의 상태’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들 3가지 기능은 실제의 위빠사나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행해지는 까닭에 분명하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각각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위빠사나 수행의 특성을 아는데 매우 중요하다.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은 일단 적극적인 의지를 지니고서 행해 나아가야 하는 성격을 지닌다. 반면에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의 ‘육체적‧정신적 현상(saṅkhārā)’은 저절로 드러나 포착되는 특성을 지닌다. 더불어 ‘마음지킴’은 마음의 방황과 혼란을 막는 것에 비중이 실린 개념이며, ‘알아차림’은 현재의 상태에 대한 즉각적인 앎을 그 기능으로 한다. 

  한편 ‘위빠사나의 실제’를 다룬 장에서는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大念處經)에 나타나는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소개하였고, 또한 이것을 현재 미얀마나 태국 등지에서 행해지고 있는 실제 위빠사나와 관련지워 설명하였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스승들은 바로 거기에 나타나는 내용에 근거하여 고유의 가풍으로 가르침을 펼친다. 

  남방불교의 禪師들에 의해 전수되는 위빠사나 행법은 구체적인 실천 방식에서 약간씩 다른 모습을 취한다. 그러나 Mahāsatipaṭṭhāna-

Suttanta에 나타나는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략 일치한다. 또한 실제 수행에서 사념처의 4가지는 엄격히 분리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위빠사나의 힘이 증장되면 모든 감각기관에 와 닿는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을 기민하게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개략적으로 소개한 각각의 선풍과 그것에 따른 수행법들은 결국 초보 수행자를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위빠사나의 실천’과 관련하여, 필자는 모곡 사야도의 해설을 통해 위빠사나 수행이 12연기의 교리체계와 맞물려 있음을 조명하였다. 위빠사나가 진전됨으로 인하여 수행자는 모든 ‘느낌(受)’들이 일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감각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체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해 ‘탐욕(愛)’과 ‘집착(取)’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위빠사나에 대한 이러한 해설은 갖가지 ‘느낌’의 유혹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느낌’ 자체를 인위적으로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의 실상을 곧바로 알아차림으로써, 그것에 의한 끄달림으로 인해 발생하는 ‘탐욕’과 ‘분노’를 미리 방지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숙달함으로써 끝없이 이어지는 ‘업의 순환(輪廻, saṁsāra)’을 약화‧단절시킬 수 있다. 바로 그것이 가능하도록 고안된 행법으로서, 사념처의 위빠사나가 갖는 의의를 정리할 수 있겠다.









참 고 문 헌


 <기초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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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ṁyuttanikāya(SN.), Ed. Feer, M.L. 5 vols., London: PTS, 1991, 1989, 1975, 1990 & 1976 respectively(reprints).

Saddhammapakāsinī(PsA.), Ed. Joshi, C.V. 3 vols., London: PTS, 1933, 1941, 1947 & 1979(reprints).

Visuddhimagga(Vism.), Ed. Rhys Davids, C.A.F. 2 vols., London: PTS, 1920, 1921  & 1975(reprints).

������雜阿含經������, 大正新修大藏經, 제1권.

������長阿含經������, 大正新修大藏經, 제1권.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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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On the Principle and Practice of Vipassanā



  In this paper I have examined the principle of Vipassanā and its practice. In the chapter with regards to the meaning of Vipassanā, I confirm that Cattāro Satipaṭṭhānā Vipassanā is originally based on Buddha's teaching and it is also the way of practice which Buddha left to his disciples as his last instruction. Thus, I emphasized that Cattāro Satipaṭṭhānā Vipassanā is the way of practice which can be verified by all Buddhists.

  In the chapter with regards to the principle of Vipassanā, I examined an original meaning of Vipassanā and its functional concepts like sampajañña, sati, viditā, etc. These three concepts are essential in practice of Vipassanā. Through the three concepts we are able to understand characteristics of Vipassanā more clearly.

  On the other hand, in the chapter with regard to practice of Vipassanā, I introduced briefly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 connecting its content with Vipassanā which was being practiced in Myanmar, Thailand, etc. The masters of Vipassanā in southern Buddhism teach their disciples in their own ways, which are based on this sutra.

  The teachings by the masters of southern Buddhism are a little different from each other. Yet, what is more important is that they are not beyond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 Moreover, even four forms of Satipaṭṭhānā cannot be said to be separated from each other. As the power of Vipassanā grows, one can be keenly aware of his physical and mental phenomena. So all practices with southern masters of Vipassanā introduced in this paper can be said to be expedients for beginners of Vipassan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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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cret - Summary


1. The Secret Revealed - 비밀이 공개되다


▣ 인생의 위대한 비밀은 바로 Law of Attraction(끌어당김의 법칙)이다.


▣ “끌어당김의 법칙”은 비슷한 것 끼리 서로에게 끌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한가지 생각을 할때 그 생각과 비슷한 다른 생각들을 끌어당기게 되는 것이다. 


▣ 생각은 자석과 같다. 자성이 있다. 또한 생각은 주파수가 있다. 당신이 생각을 할 때 그 생각은 우주로 보내어진다. 그리고 자석과 같이 비슷한 주파수 혹은 진동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을 끌어당기게 된다. 당신이 내보낸 모든 기운,진동,자기장은 곧 근원지인 당신에게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 당신은 방속국의 송신탑과 같은 역할을 한다. 만약에 당신의 인생에서 무엇이든지 바꾸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당신의 생각을 바꿈을 통해서 당신의 주파수를 바꾸어야 한다.


▣ 당신의 현재 생각이 당신의 미래 인생을 창조해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가장 많이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당신의 인생으로 나타날 것이다.


▣ 당신의 생각이 사물로 변하는 것이다.


 

2. The Secret Made Simple - 비밀을 간단하게 풀자면


▣ “끌어당김의 법칙”은 자연의 법칙이다. 그것은 만유인력의 법칙만큼이나 대상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모든 것에 공평하게 작용한다.


▣ 그 어떤 것도 당신의 지속적인 생각의 집중이 없이는 당신의 삶속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


▣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당신이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물어보라. 감정이라는 것은 아주 유용한 툴로서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 좋은 생각을 하면서 나쁜 감정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당신의 생각이 당신이 거하게 될 주파수를 결정하게 되고, 당신의 감정은 당신이 어떤 주파수위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당신이 기분이 나쁘다면 더 많은 나쁜 것들을 끌어당기는 주파수에 처하게 된 것이고, 당신이 기분이 좋다면, 당신은 강력하게 좋은 것들을 당신에게 끌어당기고 있는 셈이다.


▣ 즐거운 기억들, 자연,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 등은 당신의 감정을 순식간에 바꾸어줄 수 있고 당신의 주파수를 순간적으로 바꾸어준다.


▣ 사랑의 감정이 당신이 내뿜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주파수이다. 당신이 더 많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내뿜을 수록 당신은 더 많은 힘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3. How to Use the Secret - “비밀”을 사용하는 법


▣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나온 지니처럼 “끌어당김의 법칙”은 우리에게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


▣ “창조하는 작업“은 세가지 작업으로 나뉜다. 구하다, 믿는다, 받는다


▣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곧 우주에게 “구하는 것”이다.

▣ “믿는다”는 것은 곧 행동하고,말하고,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당신이 이미 그것을 얻었다는 듯이 말이다. 당신이 이미 그것을 얻었고 누리고 있다는 느낌의 주파수를 발산하고 있다면 끌어당김의 법칙이 사람들,사건들, 그리고 환경들을 움직여서 당신으로 하여금 그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 “받는다”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 이미 성취되었을때 느낄만한 감정을 이미 느낀다는 것이 포함된다.


▣ 당신이 몸무게를 뺄때, “체중감량”에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한다. 대신에 당신의 “완벽한 체중”에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당신의 “완벽한 체중”을 느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 우주가 당신의 바램을 현실화하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다. 1달러나 100만달러나 마찬가지다.


▣ 먼저 작은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주차장 자리를 찾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커피한잔 이라든지 하는것들을 끌어당겨보아라. 이런 것들을 끌어당기는 자신의 힘을 느끼기 시작하면 점점 더 큰 것들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당신의 하루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를 먼저 하루 전에 머리속으로 창조해보아라.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당신의 의도대로 인생을 창조해가게 될 것이다.

4. Powerful Processes - 강력한 프로세스들


▣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강력한 끌어당김의 힘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기대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기대하지 말아라.


▣ 감사한다는 것은 당신의 에너지를 전환시키고 원하는 것들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프로세스이다.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하라. 그러면 더 좋은 것들을 끌어당기게  된다.


▣ 당신이 원하는 것을 미리 감사하는 것은 우주에게 강력한 신호를 내보내는 것이다.


▣ 시각화는 당신의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시각화를 할 때 그것은 강력한 생각과 현재 그것을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생성하게 된다. 그러면 끌어당김의 법칙이 그 느낌에 상응하는 상황을 현실화 시키게 되는 것이다.



5. The Secret to Money - 돈에 관한 “비밀”


▣ 돈을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풍요에 초점을 맞추어라. 당신이 “돈의 부족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돈을 끌어당기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돈의 풍족함“혹은 ”풍요로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 당신이 원하는 돈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상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런 상상을 하게 될때 당신은 돈에  대해 더 좋은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많은 돈이 흘러들어오게 될 것이다.


▣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돈을 가장 빨리 끌어당기는 힘이다.


▣ 당신이 보는 것 마다 이렇게 말하라. “나도 저것을 살 수 있지. 나는 저것을 살 돈이 있다. 나는 풍족하다.” 이렇게 되뇌이면 돈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긍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 돈을 베풀어라. 그런 행위는 곧 “나는 풍족하다”라는 메세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주파수를 내뿜게 되고 그 주파수로 인해서 더 많은 돈이 당신에게로 끌어당겨지게 되는 것이다.


▣ 부를 생각하라. 풍요를 생각하라.



6. The Secret to Relationships - 인간관계에서의 “비밀” 


▣ 당신이 원하는 관계를 끌어당기고 싶을때, 당신의 주변환경, 당신의 말, 생각, 행동등이 당신의 바램과 모순되지 않도록 조절을 하라.

▣ 당신 스스로를 먼저 채워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 스스로에게 먼저 베풀라.


▣ 당신 스스로를 사랑과 존경심으로 대하라. 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을 사랑과 존경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사랑과 존경심을 먼저 보여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내 스스로에게 그것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 당신이 당신 스스로에 대해서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 그런 감정에 상응하는 환경들을 더욱더 끌어당기는 셈이 된다.


▣ 당신의 장점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당신의 더 많은 장점들과 사랑스러운 점들이 부각될 것이다.


▣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때 상대방의 장점에 주의를 집중하라. 그러면 더욱더 많은 장점들을 보게 될 것이다.



7. The Secret to Health - 건강에 대한 “비밀”


▣ Placebo(위약)은 끌어당김의 법칙을 보여주는 한가지 예가 될 수 있다. 약효가 없는 알약을 투여하면서 진짜 알약이라고 환자에게 주었을 때 환자가 믿는 바에 의해서 치료되어지는 것이다. 그 믿음이 치료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 우리의 건강상태가 어떠하든 완벽한 건강상태를 상상해야 한다.


▣ 웃음은 더 많은 기쁨을 가져오고 부정적인 감정을 정리하고 기적적인 치료로 이어진다.


▣ 질병이라는 것은 생각으로 인해서 생성되어진다. 또한 질병을 관찰함으로도 생기고, 그 질병에 대한 집중이 요인이 되기도 한다. 만약 몸이 약간 안 좋다면, 그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 그것을 더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것에 관심을 집중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질병에 대해서 얘기할때 그것을 듣고 있다면 당신은 그들의 질병을 더욱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대신 대화의 주제를 바꾸어서 좋은 것들에 대해서 얘기하라. 그리고 강력한 사고의 능력을 그들이 이미 건강해진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집중하라.


▣ 노화에 대한 믿음들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을 버리고 오직 건강과 영원한 젊음에 사고를 집중하라.


▣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질병 및 노화에 대한 메세지들을 듣지 말아라. 부정적인 메세지들은 유익하지 않다.


8. The Secret to the World - 세상에 대한 “비밀”


▣ 당신이 저항하는 것은 당신이 끌어당기는 것이다. 저항하면 할 수록 더 끌어당기게 된다. 왜냐하면 감정을 가지고 그것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새로운 주파수를 내뿜어야 한다.


▣ 세상의 부정적인 것에 집중함으로 인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것에 집중하면 할 수록 더욱더 그런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당신의 삶도 그것에 오염되게 된다.


▣ 세상의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대신에 당신의 생각과 에너지를 신뢰, 사랑, 풍요, 교육, 평화에 집중시켜라.


▣ 세상의 모든 풍요는 모든이에게 다 돌아가도 남을 만큼 풍족하다는 풍요의식을 가져라.


▣ 세상의 풍요는 무한하다.


▣ 세상의 모든 것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라. 그렇게 된다면 당신의 주파수를 늘 가장 높은 곳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9. The Secret to You - 당신에 대한 “비밀”


▣ 모든 것은 에너지이다. 당신은 에너지 자석이다.


▣ 당신은 영적인 존재이다. 당신은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모양을 바꿀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 존재의 핵심은 항상 있어왔고 그리고 항상 있을 것이다.


▣ 우주는 생각으로 형성된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 뿐만이 아니라 우주도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 무한한 아이디어의 저장고가 당신에게 열려있다. 모든 가능성과 발견들, 발명들이 Universal Mind(집합적인공통의 잠재의식)속에 담겨 있다. 그래서 인간들이 그것을 끄집어 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의식속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 우리는 모두다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다.


▣ 당신 과거의 어려움이라든지, 문화적 코드, 사회적 신념들을 떨쳐버리라. 당신만이 당신이 원하는 인생을 창조할 수 있다.


▣ 당신이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지름길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당신의 능력은 당신의 사고능력에 있다. 깨어있으라.



10. The Secret to Life - 인생에 대한 “비밀”


▣ 당신의 인생계획을 칠판에 비유한다면 그 칠판은 당신이 채워나가는 것이다.


▣ 당신이 해야 할 오직 중요한 한 가지는 지금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feel good now)


▣ 당신이 당신속에 내재해있는 능력을 깨달아갈 수록 더 많은 능력을 끌어당기게 될 것이다.


▣ 당신의 위대함을 포옹하는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 모든 창조의 영역에서 우리를 제한하는 믿음들을 떨쳐버리게 되면서 우리는 인류의 진정한 위대함을 경험해갈 것이다.


▣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하라. 당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가”를 물으라. 당신의 “기쁨”에 헌신할 때(commit to joy) 기쁨을 일으키는 일들이 당신에게 몰려올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기쁨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제 당신이 이 “비밀”을 알았으니, 당신이 이 지혜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당신에게 달려있다.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옳다. 모든 능력은 당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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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에 대한 금언



   다음에 열거된 말들은 스승들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다. 어떤 것들은 글로 써서 주셨고, 또 어떤 것들은 다른 방법으로 전해 주신 것들이다. 그것들은 일반 사람들이 접할 수 없는 고대 사본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각각의 금언은 나의 이성과 판단을 위해서 제시되었다. 그것들을 깊이 숙고해 본 결과 맞는다고 생각되었기에 나의 동료들을 위해서 출판하며 그들도 내 생각에 동감하리라 생각한다.

                                                           - W. Q. J. -



1) 카르마를 만들거나 그 결과를 느낄 존재가 없다면 카르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2) 카르마는 원인들 뒤에 따르는 결과들의 조정으로 그러한 과정을 겪는 존재는 조정 과정 동안에 기쁨이나 고통을 경험한다.


3) 카르마는 균형을 회복하려는 우주에 있는 한 치의 오차도 틀리지 않는 성향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작용한다.


4) 균형을 회복하려는 작용이 겉으로 보기에 멈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떤 다른 지역이나 장소에서 일어난 혼란을 조정하기에 필요한 과정으로 성인이나 완전한 투시가만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카르마의 작용이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지 멈추는 경우는 결코 없다.


5) 카르마는 모든 만물에 다 작용한다. 미세한 원자에서부터 브라흐마에 이르기까지 인간 신 엘리멘탈 등이 있는 삼계(三界)에서 진행됨으로 현현한 우주에서 그 어떤 곳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6) 카르마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우주에서 시간의 궁극적인 나눔이 무엇인지 아는 자(者)는 카르마를 알게 된다.


7) 카르마의 본질적인 성질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알 수도 없다.


8) 그러나 원인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계산해 보면 그 작용을 알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원인 다음에 일어나는게 아니라 원인 속에 그 결과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계산이 가능하다.

9) 지구의 카르마는 이전 현현기에 (혹은 지구가 나온 진화의 흐름) 있던 모든 단계에 있던 모든 존재들의 생각과 행위의 결합이다.1)


10) 그런 존재들 속에는 신성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악한 사람들 모두가 포함되기 때문에 지구의 지속 기간은 그 위에서 살고 있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더 크다.


11) 지구와 그 인종들의 카르마는 인간의 정신으로 헤아리기에는 너무나 먼 과거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 카르마의 시발점을 탐구하는 것은 아무 쓸모도 없으며 도움될게 하나도 없다.


12) 이미 일어난 카르마의 원인들은 그것이 다할 때까지 계속 영향을 끼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동료나 의식을 가진 다른 존재들을 돕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13) 그 결과들은 자신이나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에 의해서 완화될 수 있다. 그러면 그에 따른 결과들은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 연관된 모든 원인들의 상호작용과 그 조합이 된다.


14) 카르마는 작용하기 위한 적합한 도구가 없으면 세계나 인종 국가 혹은 인간들에게 작용할 수 없다.2)


15) 적합한 도구가 있을 때까지 그것과 관련된 카르마는 소진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16) 자신에게 제공된 도구 속에서 카르마를 경험하는 동안 아직 소진되지 않은 다른 카르마는 다른 방법이나 다른 존재들을 통해서 소진되지 않고 미래에 작용하기 위해 보존된다. 카르마의 작용이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 시간이 흘러도 카르마의 성질이 변하거나 그 힘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17) 카르마가 작용하기 위한 도구의 적합성은 어떤 생에서 자아가 사용하기 위해서 얻은 신체 정신 지성 그리고 심령적인 성질들과 카르마와의 정확한 연결 관계에 달려 있다. 


18) 어떤 생이든 자아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는 카르마가 그 도구를 통해서 자용하기에 적합하다.


19) 어떤 생 동안에 새로운 등급의 카르마가 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카르마가 작용하는 도구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 강렬한 생각과 맹세의 힘을 통해서

  ⓑ 오래된 카르마의 완전한 소진으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을 통해서


20) 신체와 정신과 혼은 나름 대로의 독립적인 활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 중에 어느 하나가 독립적으로 카르마의 원인들을 소진시킬 수도 있다. 다른 통로들을 통해서 작용하는 원인들보다 발생 시기가 더 오래되었거나 가까운 카르마의 원인들은 소진시킬 수도 있다.


21) 카르마는 자비로우며 정당하다. 자비와 정의는 하나라는 전체의 마주보고 있는 양극이다. 정의 없는 자비는 카르마의 작용에서 불가능하다. 소위 우리가 자비 혹은 정의라고 부르는 것은 결함이 있으며 잘못되거나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22) 카르마는 세 종류가 있다.

  ⓐ 적합한 도구를 통해서 현재 생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

  ⓑ 미래에 소진 되기 위해서 현재 만들어져 저장되고 있는 것.

  ⓒ 과거 생에서 물려 받았지만 자아가 사용하는 도구가 적합치 않아서 혹은  현재 작용하는 카르마의 힘 때문에 억제되어 아직 작용하지 않는 것.


23) 카르마가 작용하는 세 가지 활동 영역

  ⓐ 신체와 환경   ⓑ 정신과 지성   ⓒ심령과 아스트랄계


24) 작용이 미루어지고 있는 카르마와 현재 작용하는 카르마는 카르마가 작용하는 세 가지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혹은 동시에 작용할 수도 있으며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카르마가 동시에 작용할 수도 있다.


23) 어떤 종류의 신체로 태어나서 어떤 종류의 카르마의 결과를 얻는 것은 카르마적인 성향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26) 카르마적인 성향을 억제하거나 제거하거나 혹은 반작용을 주지 않을 때 그 성향은 자아의 환생이나 자아들의 가족에게 최소한 3번의 생 동안 영향을 줄 것이다.


27) 다른 원인들을 일으킴으로써 반작용을 주거나 그 성향을 억제하려는 혹은 결함을 제거하려는 자아의 노력은 카르마적인 성향의 영향력을 바꿀 것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데 Tm여진 노력의 강약에 따라서 그 영향력을 짧게 할 것이다.


28) 성인이나 진정한 투시가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카르마를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개개인은 자기 몫의 카르마를 받으며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틀릴 수도 있다. 가난하게 태어나거나 힘겨운 시험을 받는 것은 나쁜 카르마에 대한 벌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아의 단련을 위해서 시험들과 어려움들을 경험하는 가난한 환경 속으로 자아들은 지속적으로 환생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강해지며 용기와 동정심을 얻게 된다.


29) 인종 카르마는 배분의 법칙에 따라서 인종 속에 있는 개개인들에게 영향을 준다. 국가 카르마는 한층 집중되어진 채로 같은 법칙에 의해서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에 작용한다. 가족 카르마는 가족이 순결하고 뚜렷하게 유지된 국가에만 작용한다. 왜냐하면 칼리 유가 시기에 그렇듯이 가족의 혼합이 있는 국가에서의 가족 카르마는 일반적으로 국가로 배분되어진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시기에도 어떤 가족들은 오랜 기간 동안 잘 뭉쳐진 채로 있어서 그 구성원들은 가족 카르마의 영향을 느낀다. 여기서 “가족”이란 여러 작은 가족들을 포함한다.


30) 카르마는 멘탈계와 아스트랄계를 통한 연결로 자연의 재해들을 일으킨다. 재해의 원인은 내부의 불이나 공기의 혼란과 같이 즉각적인 물리적 원인으로 추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요는 인간의 생각이라는 역동적인 힘을 통해서 만들어진 혼란 때문에 발생된다.


31) 재해가 일어나는 지역과 카르마적인 연결 고리가 없는 자아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카르마의 작용 밖에 있게 된다.

  ⓐ 그들의 내적인 본성에 영향을 주는 반발 작용

  ⓑ 이 세계의 진보를 감시하고 있는 존재들에 의한 부름과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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