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아름다움의 노래

 

나는 시인들의 상상력이며

예술가들의 안내자

또한 음악을 창조하는 사람의 스승.

 

나는 어린아이의 눈동자 속에 깃들인

자비로운 어머니의 눈짓.

그 눈짓으로 그녀는 신을 찬미한다.

 

나는 운명과도 같다.

오늘 내가 이룩한 것들을

내일이면 파괴시켜 버린다.

나는 신이다.

나는 생명과 죽음을 창조한다.

나는 바이올렛꽃의 한숨보다 가볍고

폭풍보다 강건하다.

나는 진실이며,

오 인간이여, 하나의 참된 진실인 것이다.

 

- 칼릴 지브란

 

 

 

 

 

 

 

 

 

 

 

 

 

 

 

 

 

 

 

 

 

 

 

 

 

 

 

 

 

 

 

 

 

 

 

 

 

 

 

 

 

 

 

 

 

 

 

 

 

 

 

 

 

 

 

 

 

 

 

 

 

 

 

Cynthia Jordan-Autumn Equinox

 

 

 

.

.

.

.

.

 

 

 

그대 안의 본성에 충실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안의 본성에 충실하도록 도우라.

이것이 종교적인 인간이고 진정한 구도자의 의미다.

 

獨行

 

아홉째날 아침 장자, 도를 말하다

 

마음에는 행복과 불행에 영향받지 않는

부동의 탑이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도에 의해

그 탑은 보호받는다.

자연의 도는 인위적이지 않고 의식함이 없는 것이어서,

꾸미고 계산하고 의도적일 때는

이미 자연의 도가 아니다.

 

스스로를 의식해 자기를 드러내고자 할 때

그 행위는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며

자기 본래의 것을 잃는다.

자기를 의식적으로 드러냄은 모두 거짓된 것이다.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면

바깥 세상의 일들이 마음을 어지럽혀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때 더 이상 자연의 도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다.

자연을 도를 잃으면

행동 하나하나가 재난을 부른다.

 

남의 눈에 띄는 밝은 곳에서 행하면

사람들이 벌을 내릴 것이며,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행하면

귀신이 벌할 것이다.

 

저마다 자연의 도를 이해하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그런 이는 사람에 대해서나 귀신에 대해서나

늘 평화로울 것이며,

마음의 탐에 초연히 홀로 머물며

늘 옳게, 그러나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할 것이다.

 

<마음의 탑>

 

 

 

 

<오쇼 강설>

 

지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기 전에 인간은 자연스럽게 에덴동산에서 살았다. 그 에덴 동산은 먼 옛날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곳이다.

나무들은 그대로 에덴 동산에서 살고 있다.

동물들도 여전히 에덴 동산에 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여전히 그 속에서 운행하고 있다.

지금 이곳이 에덴 동산이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그곳을 벗어나 살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법 없이도 존재한다.

자연은 그 자체의 고유한 법칙을 갖고 있으며 그 법칙은 인간에 의해 통과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동의절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법칙들이 이미 그곳에 있으며, 삶은 그 법칙들을 따른다.

그대가 간섭하지 않으면 그대는 금방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자연을 가로 막지 말고 허용하라.

그것과 함께 흘러가라.

그것을 신뢰하라.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나왔으며, 그것이 그대의 어머니, 그대의 근원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대는 그 품 안으로 돌아갈 것이다.

 

삶의 길에서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때 지적인 이해를 통해선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

그대 안의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인간,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자 원한다면 그 길밖에 없다.

명상이 그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사념이 끊어진 그 자리로 들어가라.

처음엔 힘든 노력이 될 테지만 점차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그 일이 일어날 것이다. 관념이 사라지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갈수록 더 많은 자유와 환희를 느낄 것이다.

 

의도적인 것, 인위적으로 만든 의지, 꾸밈과 계산을 버려라.

본성을 신뢰하고, 어린아이처럼 되라

본성이 그대를 안내한다.

졸리지 않는다면 잠잘 필요가 없다. 잠을 자야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의도함이 없이 움직이라.

그러면 그대는 근원에 이를 것이다.

이 근원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부동의 탑이고, 도이다.

 

자연스러운 것이 옳은 것이다.

쉬운 것이 옳은 것이다.

그대 자신이 되는 것, 그대는 오직 그것 밖에 될 수 없다.

다른 모든 것은 인위적인 것일 뿐이다.

 

 

 

 

 

 

 

 

 

 

 

.

.

.

.

 

 

 

 

 

 

 

 

 

 

 

 

 

 

빛나는 우담발화(燁燁優鉢)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시들다니(朝華夕蔫)

 

금시조 날아와(翩翩金翅)

잠깐 앉았다 데려가 버렸네(載止載騫)

 

슬프다

아름답고 깨끗한 이여(哀玆都潔)

보낼 글 있지만 전할 길 없네(有書無傳)

 

그대와 더불어 함께(與爾偕征)

구학의 빗장 열고 싶었네(手啓玄鍵)

 

조용한 밤 낚시 거두니(靜夜收釣)

밝은 달빛만 배에 가득하도다(明月滿船)

 

그대 떠난 뒤(殘春緘口)

산림이 참 쓸쓸해졌구나(山林寂然)

 

 

 

 

 

 

 

 

 

 

 

 

 

 

 

 

 

 

 

 

 

 

 

 

 

 

 

 

 

 

 

 

 

 

 

 

 

 

 

 

 

 

 

 

 

 

 

 

 

 

 

 

 

 

 

 

 

 

 

 

 

 

 

 

 

 

 

 

 

 

 

 

 

 

 

 

 

 

 

 

 

 

 

 

 

 

 

 

 

 

 

 

 

 

 

 

 

 

 

 

 

 

 

 

 

 

 

 

 

 

 

 

 

 

 

 

 

 

 

 

 

 

 

 

 

 

 

 

 


































































 

 











































 

 

신심명

03.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

간택(揀擇)함이 없는 마음이나 증애(憎愛)함이 없는 마음바탕에

털끝만큼이라도 가리고 택하는 차별심이나 미워하고 좋아하는 차별심이 남아 있으면

이 차별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택하고 버리는 마음이나,

미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은 모두 자기 욕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며,

욕심은 구하는 마음이 심해지면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만스러운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구하는 것이 있으면 반대로 구하지 않는 것도 있게 되니

자연히 좋고 나쁜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구하던 것이 구해지면, 더 좋은 것을 구하려 하게 되고,

또 점점 더 좋은 것을 구하려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니 언젠가는 불만이 생기게 된다.

또 이렇게 구하고 모아서 쌓아놓은 자기 것을 잃게 되었을 때도

역시 불만스럽게 되고, 그 불만이 커지면 원한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원한(怨恨)은 복수(復讐)로 이어질 수 있으니,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악순환의 발단은

간택하는 분별심과 증애(憎愛)의 분별심에서 일어나는 법이니

오직 간택(揀擇)하는 마음을 싫어하면 지도(至道)에 무난히 이를 수 있고,

증애(憎愛) 하는 마음이 없으면 지도하는 길이 통연(洞然)하고 명백(明白)해진다고 한 것이다.

 

간택하는 마음과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간택하는 마음이나 증애하는 마음은

이기심(利己心)의 근본인 오온심(五蘊心)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오온심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물질,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인데,

물질은 몸이고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은 통틀어서 마음이라고 하는데

우리들의 감각작용은 몸을 통해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 말이나 행동,

즉 간택 및 증애하는 느낌, 생각, 언행의 근본이 되는데 식()에서 일어난다.

 

이 의식은 전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나 금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 지배하는 나의 생각이다.

미워하거나 좋아하거나, 택하거나 버리는 생각의 요인은

나의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그렇게 판단되고 행하는 것이지

그 사물이나 사람 자체에 미운 털이 박혀있어서 미운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미운 털이 박혀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그 물건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 된다.

절에 오면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중에는 자기 비위에 맞는 사람도 있지만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 자체가 좋아서 내 비위에 맞고,

그 사람 자체의 성격이 나빠서 내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자신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자신의 오온심에서 비롯된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온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자기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만 있으면

그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나에게 접근해 온다 하더라도

그를 간택하거나 증애하는 마음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형형색색의 사람과 물건이 서로 어우러질 때

()함이나 성장함이 일어나는 법이고 창조가 가능해 질 수 있지만,

서로 대립하거나 배척할 때는 서로 쇠퇴해지고 멸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고 남을 상대하지 않으면 연기하는 대열에서 소외되고

자기 성격의 개선(改善)이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더욱 외골수로 빠지게 된다.

 

이것도 역시 자기가 간택하고 증애하는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

남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씀한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기도 하겠지만 많은 경우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고(思考)의 허물에 의해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씀은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관점(觀點)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간택하는 마음을 싫어하고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오온심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을 소멸하기 위해 참회하고, 복을 짓고, 도를 닦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참회는 복()을 짓는 뿌리이고,

복을 짓는 행위는 수행을 위한 뿌리이다.

즉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복 짓는 일부터 해야 하고,

복 짓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거나 해()가 되는 일을 한

성품, , 행동 등에 대한 참회가 있어야 한다.

참회를 통해서 복() 짓는 일에 역행하였던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음으로서 복 짓는 일에 가속이 붙게 된다.

 

복을 짓고 수행하는 일에 근본이 되는 것이 내 마음을 믿는 신심(信心)이다.

인과응보를 믿고 제행이 무상함을 믿으며,

제법이 무아하다는 가르침을 내려주신 불법승 삼보를 믿는 마음이다.

 

복 짓는 마음이란 나를 위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다.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으면 그 과보로 금생에 복된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건강 복, 부모 복, 형제 복, 친구 복, 스승 복, 관록 복, 명예 복, 재복, 사업 복, 부인 복, 남편 복, 자식 복,

불교를 만나는 복, 노래를 잘 부르는 복, 그림을 잘 그리는 복, 총명한 복 등등 수 없이 많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복을 짓는 업이 되기도 하고,

무기(無記)이기도 하고, 또 악업을 짓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어느 쪽으로 복 짓는 일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금생이나 내생에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항상 남과 잘 사귀고 남에게 필요한 일, 좋은 일을 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좋은 연을 많이 짓다보면

선한 도반을 많이 만나고 훌륭한 스승이나 선배 또는 귀인을 만나 하는 일마다

잘 풀려가 더욱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다.

 

남이 하는 언행이 나의 비위를 상하게 했을 때,

저 사람의 언행이 기분 나쁘다고 생각되는

즉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저 사람이 저런 언행을 하지 않았을까? 고 생각하는 마음이

간택(揀擇)이 없고 증애(憎愛)가 없는 마음이다.

 

상대방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화가 났을 때,

자기가 낸 화를 정당화하려 하거나 변명하려하는 것은

간택심과 증애심을 오히려 깊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화가 난 것을 인지하는 즉시

마음 속 깊이 참회하고 복 짓는 일을 찾아 하면

화도 다스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택심과 증애심도 점차 해소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복을 잘 지어 부처님 법에 수순할 수 있을 때

()과 혜()를 함께 닦아 탐욕심을 비워

선정(禪定)을 이루고 무명을 밝히는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Fountain of Secret

'하나됨 - 지금여기 >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인의 사랑 - 다섯째 회상 / Nicholas Gunn - Not Afraid  (0) 2023.02.01
판도라  (0) 2022.03.18
Soul Photo  (0) 2018.12.08
크리슈나의 가르침   (0) 2018.11.02
미르다드의 書  (0) 2017.01.17

 

 

 

.

.

.

.

 

 

 

 

 

 

 

목장

나는 샘을 치우려 가렵니다.
그냥 물위의 나뭇잎이나 건져내면 되겠지요.
(물이 맑아지는 모습을 지켜볼른지는 모르지만 )
오래 걸리지 않을테니,
함께 갈까요.

ㅡ 로버트 프로스트
 

 

 

 

 

 

 

 

 

 

 

.

.

.

.

.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은 영원할 수 없다.

원인이 사라지면 그것도 사라진다.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 그것만이 영원할 수 있다.

그것을 찾으라.

 

秋水時至

 

여덟째날 아침 강의 신과 바다의 신

 

가을 홍수가 밀어닥쳤다.

수천갈래의 노도와 같은 물길이 황하로 밀려들었다.

강둑까지 물이 불고 강폭이 넓어져서

이쪽에서 바라보면 저쪽 강둑에 서 있는 것이

소인지 말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황하의 신은 무척 자랑스러워하며

세상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기 손안에 들어온 것이라 여겼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물결을 따라 흘러내려가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파도가 동쪽 수평선까지

무한히 이어진 것을 보고 놀라서 그만 말을 잊었다.

 

그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는

바다의 신을 향해 한탄했다.

속담에 겨우 백 개의 도리를 듣고는

천하에 자기만한 자가 없는 줄 안다는 말이 있는데

역시 그 말이 맞도다.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이다.

이제야 넓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구나.“

 

바다의 신이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여름 한철에만 사는 벌레에게 얼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철학을 논하는 자에게 삶의 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강의 신과 바다의 신>

 

 

<오쇼 강설>

 

삶은 하나의 초대이다.

그대는 손님이 되어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삶은 그대를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삶과 싸우지 말라.

삶을 해결하려고 고뇌하지 말라.

삶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삶은 하나의 신비다.

신비란 그대가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

그대가 그 속으로 사라져야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 자신이 신비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사랑이 녹아서 미움이 되고, 미움이 녹아서 사랑이 된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삶이 죽음 속으로 녹아들고, 죽음이 다시 삶 속으로 녹아든다.

이렇듯 존재계는 모순이지만 대립되는 두 세계 사이에는 깊은 조화가 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로 보인다.

마음은 논리적이지만 삶은 모순적이다.

그래서 그 둘은 결코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논리 속에서만 분명하게 선이 그어지고 규정지을 수 있을 뿐이다.

삶이란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삶은 모순 속에서 진행된다.

 

과학에는 머리가 필요하고, 예술에는 가슴이 필요하다.

그러니 삶에는 존재 전체가 필요하다.

머리만 활동하면 메마른 이론만 늘어날 뿐이다.

가슴만 활동하면 꿈과 허구만 늘어날 뿐이다.

존재 전체, 그것이 필요하다.

존재 전체로 움직일 때 그대는 우주와 만날 수 있다.

 

늙어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와 함께 살라.

그는 도의 사람이다.

행복한 젊은이는 많다.

그러나 그것은 문재가 아니다.

그러나 늙어서도 여전히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겨울이 오고 가을의 홍수가 물러갔으나 그가 여전히 행복하다면

그는 도를 깨친 사람이다.

영원한 삶의 근본을 깨우친 사람이다.

 

어느 날인가 그대는 바다에 이를 것이다.

바다란 무엇인가?

죽음이 곧 바다이다. 죽음은 무한히 넓은 바다와도 같다.

삶은 그 근원이 있지만 죽음은 근원도 없다.

삶은 강둑이 있어서 때로는 물이 불어나 거대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물이 메말라 강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은 강둑조차도 없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바다인 것이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야만 하듯이

인간 의식의 강물도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러야 한다.

 

현재가 좋은 시절이라고 믿는 노인은 드물다.

그들은 언제나 황금빛 옛시절 속에서 산다.

그때는 이러저러하게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상황이나 정치적 상황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때는 젊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좋았다.

가을 홍수로 강물이 불어났던 것이다.

이제 그대의 강은 바닥이 드러났지만 다른 강이 홍수를 맞이한 것일 뿐이다.

 

마음은 과거에 살든지 현재에 살든지 아니면 미래에 산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 인간의 관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시간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따라서 관념을 버리면 영원을 얻는다.

그것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그 세 가지 관념을 초월했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가 사라진다.

그때 그대는 행복 속에서 슬픔을 느끼고, 슬픔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때 그대는 젊음 속에서 늙음을 느끼고, 늙음 속에서 젊음을 느낀다.

그때 그대는 죽음 앞에서 어린아이이고,

탄생 앞에서 한사람의 노인이다.

 

도의 사람들은 말한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노자는 한 마디로 말했다.

진리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 표현된 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문제는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사용하는 언어에 있다.

그대가 사용하는 우물의 언어 그것이 문제이다.

 

도의 사람의 머리 속에는 사념이 없다는 것을 그대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대의 머리 속에는 단 한순간도 사념이 멈춘 적이 없다.

그대의 머리 속은 군중과도 같다.

그러니 아무 사념 없이 무심의 상태에 앉아 있는 도의 사람을 이해하겠는가?

 

 

 

For A Dancer - Katey Sagal

 

Keep a fire burning in your eye

Pay attention to the open sky

You never know what will be coming down

I don't remember losing track of you

You were always dancing in and out of view

I must've always thought you'd be around

Always keeping things real by playing the clown

Now you're nowhere to be found

I don't know what happens when people die

Can't seem to grasp it as hard as I try

It's like a song playing right in my ear

That I can't sing

I can't help listening

I can't help feeling stupid standing 'round

Crying as they ease you down

Cause I know that you'd rather we were dancing

Dancing our sorrow away

(Right on dancing)

No matter what fate chooses to play

(There's nothing you can do about it anyway)

Just do the steps that you've been shown

By everyone you've ever known

Until the dance becomes your very own

No matter how close to yours another's steps have grown

In the end there is one dance you'll do alone

Keep a fire for the human race

And let your prayers go drifting into space

You never know will be coming down

Perhaps a better world is drawing near

And just as easily, it could all disappear

Along with whatever meaning you might have found

Don't let the uncertainty turn you around

(The world keeps turning around and around)

Go on and make a joyful sound

Into a dancer you have grown

From a seed somebody else has thrown

Go on ahead and throw some seeds of your own

And somewhere between the time you arrive and the time you go

May lie a reason you were alive but you'll never know

 

 

 

..

.

.

.

.

 

 

신은 그대가 그에게로 간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대에게로 온다.

그대가 춤추면서 신에게로 다가가면 신도 춤추면서 그대에게로 다가올 것이다.

 

人相造道

 

일곱째날 아침 물고기와 도

 

 

물고기는 물에서 나고

사람은 도에서 난다.

물에서 난 물고기는

연못의 깊은 그늘로 찾아 들어가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채워진다.

 

도에서 난 사람은

행위 없음의 깊은 그늘로 침잠해

다툼과 근심을 잊는다면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고

그 삶은 평화롭다.

 

<물고기와 도>

 

 

<오쇼 강설>

 

욕망은 삶 그 자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의해 그림이 그려진다.

욕망은 마음의 그림일 뿐, 진정한 필요가 아니다.

욕망은 멀리 있는 지평선과 같은 것이다.

대지가 하늘과 만나는 지점이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가고 또 걸어가도 그 거리는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남아 있을 것이다.

땅과 하늘은 결코 맞닿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힌두교에선 그것을 마야라고 부른다. 환영인 것이다.

 

필요는 아름다운 것이고, 욕망은 추한 것이다.

필요는 신체적인 것이고 욕망은 심리적인 것이다.

그대의 목적지는 그대 내면에 있다.

그대가 가야 할 다른 어느 곳에 있지 않다.

그러나 욕망은 그대를 먼 나라, 먼 시간대, 공간 속 먼 지점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더 많은 욕망을 가질수록 그대는 더 급하게 달려간다.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존재 방식이다.

다른 존재 방식이 있을 수 없다.

들판의 백합처럼 피어나라.

나뭇가지의 새들처럼 노래하라.

야생동물처럼 야생적이 되라.

 

삶은 탄생과 죽음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삶은 피어남과 시듦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삶은 일출과 일몰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삶은 그 두 언덕 사이에서 움직인다.

그것들은 두 개의 강둑과 같은 것이며, 그 강둑 사이로 삶의 강물이 흐른다.

삶이 그대를 보살펴 줄 것이다.

삶을 받아들이고, 물처럼 흘러가라.

그리고 그대의 에고와 그대 자신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구도의 길이다.

 

그대가 신이다.

축소판인지 몰라도 그대는 곧 신이다.

깨어있음 외에는 어떤 수련도 필요하지 않다.

가까이 있는, 바로 곁에 있는 그것을 자각하는 것,

이미 그대의 피부에 닿고 있는 그것을 자각하는 일,

그대의 심장에서 맥박치고 있는 그것을 자각하는 일,

그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그것을 자각하는 일,

바로 곁에 가까이 있는 그것을 자각하는 일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미래 속에 존재한다면 그대는 그만큼 멀어진 것이다.

그때 그대는 멀리 여행을 떠난 것이며, 신은 이곳에 존재한다.

그대는 이미 신을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행위의 세계에서 명상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한 장의 낙엽처럼 약간의 떨림, 산들바람에 흔들림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대지에 안착할 때까지 더 깊이 떨어져 내릴 것이다.

그대는 뿌리에 닿는다.

모든 것이 가라앉는다.

그때 거기 더 이상 근심도, 사념도, 세상도, 그대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것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인 것이다.

 

신은 하나의 반응이다.

신은 그대 존재의 메아리다.

그대가 산에 올라가 무언가를 소리치면 산은 그것에 메아리로 화답할 것이다.

생명계 전체가 그대 안에서 메아리 치고 있다.

그대가 하는 무엇이든 그대에게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카르마의 법칙이다.

신은 그대가 신에게로 다가가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대에게로 온다.

그대가 신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을 통해 신이 그대를 바라본다.

 

 

Nicholas Gunn feat. Diana Miro - hold me tight

 

lyrics

 

This place

Our life

It feels

So right

And I wonder why

Is it in the way you love and hold me tight

And hold me tight

And hold me tight

This place

Our time

I feel

You’re mine

This place

Our time

I feel

You’re mine

And hold me tight

And hold me tight

And I wonder why

Is it in the way you love and hold me tight

And there is more to life

In this place that shelters us on cold dark nights

 

 

.

.

.

.

.

 

 

깨어 있는 자에게는 규칙이 필요 없다.

깨어 있음이 그의 규칙이다.

그는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만, 규칙에 매이지 않는다.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魚處水生

 

여섯째날 아침 바닷새를 죽인 음악

 

 

 

주머니가 작으면 큰 물건을 담을 수 없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물을 길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옛날에 바닷새 한 마리가

노나라 수도의 교외에 날아온 적이 있었다.

 

왕은 그것이 상서로운 징조라 해서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라고 명령하고

바닷새에게 종묘의 술을 마시게 하는가 하면

음악가들을 불러 순임금 시절의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여러 맛있는 짐승 고기까지 대접했다.

그러나 이 소란스런 잔치에 놀라

불행한 바닷새는 슬픔 속에 죽고 말았다.

 

새는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

인간의 입장에 따라서?

또는 새의 입장에 따라서?

 

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를 틀고

들판과 물가를 자유롭게 날아야 하지 않을까?

강이나 호수 위를 떠다니면서

미꾸라지나 물고기를 잡아먹고

때로 다른 물새들과 줄지어 날다가

갈대 끝에 앉아 한가롭게 쉬어야 하지 않을까?

 

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거나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조차 싫어하는데

어찌 시끄러운 음악에 놀라지 않겠는가!

그들은 음악으로 바닷새를 죽인 것이다.

 

물은 물고기를 위한 것이고

공기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본래 성품이 각자 다르니 필요한 것도 다르다.

 

그러기에 옛 현자는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았다.

 

_ <바닷새와 인간의 음악>

 

 

<오쇼 강설>

 

고정된 인간의 본성이란 없다.

인간 개개인마다 그 본성이 다르다.

모든 개개인이 그 자신 하나의 우주다.

일반적인 규칙이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일단 규칙의 희생자가 되면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오로지 완전한 자유 속에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

이해가 유일한 규칙이 되게 하라.

진정한 이해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라.

규칙은 감옥이지만 이해는 무한한 하늘, 무한한 공간을 준다.

 

예수가 진리를 깨달았고 붓다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모두가 추종해야 할 하나의 규칙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고타마 붓다가 아니며,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열심히 예수를 추종할 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뿐 결코 그리스도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다.

예수는 누구도 추종하지 않았다.

 

규칙들은 그대에게 외부적인 깨끗함을 준다.

그러나 내면에서 그대는 여전히 바보다.

그리고 기억하라. 오직 바보들만이 규칙을 따른다.

현자는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규칙에 대해서는 잊는다.

현자는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규칙을 가진 자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삶은 매 순간 변화한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끝없이 변화한다.

삶은 그대를, 또는 그대의 규칙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매 순간이 새롭다.

 

깨달음을 향한 모든 노력은 그 붙들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것,

다시금 흐름을 되찾아 얼어붙지 않는 것이다.

얼음처럼 굳어지지 말라.

흐르는 물처럼 되라.

삶은 끊임없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으며 오직 진정한 이해만이 그것에 반응할 수 있음을 잊지 말라.

 

근원은 같고, 궁극적인 진리도 같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것의 표현이 다르다.

그리고 기억하라.

누구의 진리도 그대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대 자신이 그 비밀의 상자를 열어야만 한다.

 

자신의 능력을 알라.

이것이 첫 번째 핵심이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안다면 첫걸음은 이미 내디뎌진 것이며, 목적지가 멀지 않다.

첫걸음이 틀리면 평생을 걷고 또 걸어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삶은 계획될 수 없다.

그것은 계획 없이 밀어닥치는 여름철 홍수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계획이 없기 때문에 삶은 아름답다.

계획될 수 없다면 모든 것이 죽고 지겨워질 것이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곳에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자유가 사라진다.

 

삶은 시간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이해는 명상을 통해 얻어진다.

그것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시간은 외부의 현상, 표면의 현상이다.

수천 년을 살아도 인간은 여전히 어리석다.

실제로 그의 어리석음은 더욱 커질 뿐이다.

그대 안에 어리석음의 씨앗이 있다면 그것은 수천 년 동안 거대한 나무가 되어서

수많은 어리석은 자들이 그 나무 아래서 쉴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더욱 어리석어 지고, 지혜로운 자는 더욱 지혜로위진다.

지혜는 그것이 어떤 경험이든지 그대가 존재 전체로 깨어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깨어 있는 의식과 경험의 만남이 바로 지혜다.

 

수십억 인구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붓다가 된다면, 이 무슨 일인가?

왜 다른 모든 나무들은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

꽃을 피우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 나무는 웃을 수 없고, 노래 부를 수 없고, 춤출 수 없다.

나무의 에너지가 넘쳐날 때 꽃이 가능하다.

꽃은 하나의 선물, 하나의 나눔이다.

나무는 존재계 전체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필요한 것 이상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그것은 하나의 노래다.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깨어 있는 의식이 필요하다.

깨어 있는 의식이 결여된 사랑은 결국 감옥이 되고 만다.

깨어있는 의식을 동반한 사랑은 곧 자유다.

그 자유가 그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되게 할 것이다.

그 자유가 그대에게 날개를 줄 것이다.

 

남들과 함께 살 때 삶은 어떤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 규칙들은 종교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신적이지도 않다.

그것들은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다.

구도자는 규칙들이 단지 하나의 게임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그것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넘어서 간다.

초월한다. 그 자신은 그것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타인을 위해 규칙들을 따르지만 그렇다고 자동인형이 되진 않는다.

그의 의식은 늘 깨어있다.

깨어 있는 의식이 그의 목적이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그러기에 옛 현자는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았다.“

 

 

Freedom.“

.

.

.

.

.

 

 

 

 

 

루바이야트

 

11

씨뿌린 풀밭을 따라간다면

거긴 사막과 경작지의 갈림길,

노예와 술탄의 구별이 없는 곳,

보좌 위의 마아무드 고이 잠든 곳

 

12

시집 한 권, 빵 한 덩이, 포도주 한 병,

나무 그늘 아래서 벗 삼으리

그대 또한 내 곁에서 노래를 하니

오, 황야도 천국이나 다름없어라

 

*마아무드 : 인도를 정복했던 페르시아의 통치자,

                   처음으로 자신을 술탄이라 불렀음.

 

_ 오마르 카이얌 Omar Khayyam

 

 

 

 

 

 

 

 

 

 

 

 

 

 

 

 

 

 

 

 

 

 

 

 

 

 

 

 

 

 

 

 

 

 

 

 

 

 

 

 

 

 

 

 

 

 

 

 

 

 

 

 

 

 

 

 

 

 

 

 

 

 

 

 

 

 

 

 

 

 

 

 

 

 

 

 

 

 

 

 

 

 

 

 

 

 

 

 

 

 

Sitting On The Moon

 

 

 

.

.

.

.

.

 

 

그대는 추구하기 위해 이곳에 있다.

그대가 이곳에 존재하는 진정한 운명을 발견해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진정한 존재에 귀 기울이라.

 

楚有神龜(초유신구)

 

다섯째날 아침 거북이의 생

 

 

 

한번은 장자가 푸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초나라 사신 두 사람이 왕의 공식 문서를 받들고 찾아왔다.

왕께서 당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든 채 여전히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초나라에 한 신령한 거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거북이는 죽은 지 3천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귀한 상자에 넣어

사원의 제단에 모시고 있다고 들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거북이는 죽어서 뼈만 남아 3천년 동안 향 연기를 맡으며

왕의 제사를 받기를 원하겠는가?“

 

두 사신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거북이로서는

살아서 진흙 바닥을 꼬리를 끌며 돌아다니는 편이 낫겠지요.“

 

장자가 말했다.

어서 돌아가라.

나 또한 진흙 바닥을 기어다니고 싶으니!“

 

_ <장자와 거북이>

 

 

<오쇼 강설>

 

붓다는 결코 누구도 추종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의 방식대로 살았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제 그를 추종한다면 그대는 불행한 존재다.

누구도 추종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불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현재 불행할 만큼 불행하다.

 

타인에게 귀 기울이지 말라.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

비록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때로 일이 잘못된다 해도 걱정하지 말라.

처음엔 당연히 잘못될 것이다.

타인을 추종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 그대가 침묵할 때 타인의 목소리들이 멈춘다.

누구에게도 귀 기울이지 말라.

모두가 떠나고 그대만이 텅 빈 공간 속에 홀로 남는다.

그때 그대의 본성이 꽃 피어나기 시작한다.

씨앗의 껍질이 깨어지고, 싹이 나온다.

그대 내면의 목소리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때 그것을 따르라.

그것이 신에게로 가는 그대의 길이다.

 

헛된 투자를 포기하는 것,

타인을 포기하는 것,

그들의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는 것,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바로 구도의 길이다.

 

 

 

Gale Revilla - Ashes To Ashes, Dust To Dust

 

 

 

+ Recent posts